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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43] 정치감각을 키우던 나날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3월21일 16시22분    조회: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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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3](채영춘편-8)

1973년 한해동안의 차출근무를 거쳐 눈도장이 찍힌 후 (채영춘은) 1976년도 5월에 정식으로 연변인민교육출판사로 전근하였어요. 기층 공청단 단위 서기로부터 출판문화인으로 탈바꿈 한거죠.

1976년 연변인민교육출판사시절 북경출장길에서.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시간은 저에게 잊지 못할 나날들이였어요. 동북 3성 소설산문창작회의를 비롯한 문학모임에도 자주 참가하면서 미술과 문학을 골고루 섭렵할 수 있는 전기가 열린거였죠.

일단은 먼저 미술편집실에서 편집, 편집실 주임으로 2년 쯤 있으면서 200여폭의 도서장정디자인과 500여폭의 도서삽화, 두책의 어린이화책들을 창작출판했었는데 많은 작품이 동북3성 우수상을 수여받았구요. 그 사이 미술창작에서 전성기를 맞아 창작한 유화작품 〈강자>,〈현위서기>,〈불가사의한 년대> 등 여러 폭이 자치주 미술전시회 2, 3등상을 수상했지요.

1982년에 창작한 유화 〈불가사이한 년대〉옆에서 포즈를 취한 채영춘.

그후 지방문예편집실에 1년 남짓이 있으면서 문화혁명후 첫 장편소설〈청산의 매> 편집팀에 들어가 활약하기도 하였고 아동문예 편집부에서 소설편집을 맡아 하는 동안〈눈사람의 이야기> 등 여러 책의 한문소설을 번역출판하기도 했지요.

1978년 처음으로 《연변문예> 10기, 11기에 련달아 산문 두편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데뷔하는 격이 되였죠. 그해에 원고료가 회복되여 생각밖으로 제가 두편의 작품원고료 50원을 받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1978년 9월동북3성 과외 소설 산문창작회의에 참가한 채영춘(앞줄왼쪽 세번째).

어느날 주당위 선전부 간부처에 있는 친구가 저의 집에 찾아와 출판사 지도부에서 저를 출판사 후비간부로 선정하고 연변대학 간부반(중문학부)에 추천했으니 잘 준비하라고 격려해주는 것이였어요. 그때 지원순이라는 분이 연변인민출판사 사장이였는데 너무 고맙더라구요. 그후 입학시험도 보고 얼마후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였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몰라요. 출판사의 배려로 로임을 받으면서 일터를 탈리하여 2년 반을 공부하였지요. 대학전과였는데 유감없이 배웠어요. 졸업할 때는 3호학생으로 학교문을 나오게 되였구요.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몇달 출근하다가 인차 주당위의 소환을 받게 됩니다. 주당위 판공실 종합처에 전근하였지요. 주당위의 모든 중량급 문건들이 여기서 작성되여 나오는거얘요. 자치주 최고의 싱크탱크인 셈이죠. 저도 모르게 정치감각을 키우는 첫 관문에 들어서게 된거얘요.

제 주변에는 수준급 문장가들이 참 많았어요. 곽준봉, 김영림 같은 이들은 저에게 스승같은 존재였어요. 그들이 잘 이끌어주어 인차 종합처 부처장으로 승진했어요. 그때 《연변속보》(延边快报)라는 주와 현급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부정보간행물 같은 것을 종합처에서 꾸렸는데 제가 그중 주요 맴버로 있었지요. 그것이 후날 《연변정보(延边信息)》의 전신이 된거죠. 후에 정보처가 따로 나오고 김영림이 길림일보 연변기자소 소장으로 발탁되여가면서 제가 처장을 맡고 본격적으로 일을 벌려나갔지요.

1987년 중앙판공청 동북정보련락 네트워크 일원으로 중남해를 방문(앞줄 오른쪽 첫사람).

매단계 주당위의 중점사업을 파악한후 선제계획을 짜고 편집대강을 만들어가면서 각급 지도자들이 주목하는 열점화제에 과녁을 맞추어가며 매일매일 알찬 내용을 담기에 애썼지요. 창의력을 발휘하여 비정기 <내부참고지(内参)>와 <사진정보지(图片信息)>도 간행하였는데 우리 주는 물론 길림성에서도 좋은 평판을 받았지요.

출판사에서 쌓은 밑천을 제대로 활용한거지요. 각 지구 당위마다 다 이런 기구가 있었는데 우리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성에 가서도 사업경험을 내놓고 하면서 중앙판공청에도 이름이 오르게 되였죠. 그래서 연변 주당위 정보처는 중앙판공청의 정보련락기지의 하나로 되면서 중앙판공청과 열선 련계를 가지게 되였지요.

리덕수 서기께서는 성에 회의 가면 왕충우 성장이 자주 《연변정보》에 게재된 정보를 인용하면서 《연변정보》를 잘 꾸린다고 칭찬하더라며 많이 고무해주었지요. 그 당시 저의 정보처는 판공실내에서도 실력이 막강했죠. 여기서 배출된 일군들이 후에 성급 지도자, 주급지도자, 당정부문 주요책임자로 발탁되여 간 것만 봐도 알수 있지요.

1986년 전 주 당정정보사업회의에서 리덕수 서기께 사업회보를 하고 있는 채영춘(오른쪽).

주 당위 판공실에서 근무하던 나날들을 돌이켜보면 정말 이 기간에 후날 문화계통의 지도자로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정치감각을 키웠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1990년, 7년간 몸담고 일했던 주당위 판공실을 떠나 《지부생활》잡지 총편집으로 임명받아 가게 되였어요. 잡지사에 와서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당잡지의 통속화였어요. 잡지언어가 너무 경색되고 코너들이 너무 엄숙하여 독자와의 거리감이 생겨 흡인력이 떨어져 있었어요. 당잡지이지만 활발하고 편안하게 독자들에게 다가 갈 수 있는 코너, 형식들을 많이 취해야 하겠다고 생각되여 선차적으로 코너조절과 형식의 다양화, 내용의 활성화에 모를 박았지요.

1991년, 연안에서 섬북농민과 함께.

자기 눈으로 목격한 주변 공산당원들의 미덕을 수기형식으로 쓴〈내 가 본 공산당원> 코너, 기층 당지도간부와 당원의 감동적인 사연을 실화문학형식으로 다룬 〈충복의 노래> 코너를 개척하고 현상응모까지 벌리여 잡지와 독자의 관계를 좁혀갔어요. 그 밖에 부정적인 사회문제를 해학적으로 다룬〈콩트(미형소설) > 코너, 부패사건을 투시 조명한〈경종>코너도 만들고 생활잡지의 형식을 도입하여 잡지 중간에 전렬로 〈이모저모>, 〈요지경> 같은 여러가지 잡지화에 걸맞는 동태와 당건설에서 재미나는 일화들을 다양하게 실었지요. 잡지가 활성화되여 간다는 독자들의 좋은 반영이 따라 오더라구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14명에 달하는 편집이 있는 잡지사가 잡지 하나만 꾸려 간다는 것이 정말 성차지 않았어요. 일단은 제가 출판사에 있던 밑천을 살려 출판사와 련락하여 《오늘의 연변》이라는 소책자 총서를 기획하였지요. 케이스가 있고 포케트용 64절지로 된 소책자인데 연변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관광 등 열개 분야로 분류하여 시리즈화한 관광용 책자를 만들었지죠. 잡지사는 이 같은 출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가 시사정책 해독에서 우리 잡지가 기존판면 기획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였죠. 그런데 누군가 전임에서 《반월담》잡지를 조선말로 하려고 시도를 했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듣게 되였지요. (그렇지, 여기에 뭔가 해법이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반월담》 잡지를 가져다가 첫 페지부터 마지막 페지까지 자세히 훑어보았지요.

《반월담》잡지는 당시 중국 국내에서는 발행량이 전국 최고부수를 기록할 때였지요. 난해하고 엄숙하고 경직된 시사문제를 깔끔하게 해독해 짧은 편폭으로 실었는데 기층에서 대환영을 받는 잡지였어요. 그해에 《반월담》잡지가 창간된지 10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기층에서 인기가 폭발이였죠.

그들이 내건 슬로건도 아주 기막힌 것이였지요. ‘신주의 어디에나 인가 있고 인가 있는 곳엔 반월담이 함께 동행하노라’

1991년 신화사 《반월담》잡지 민범로 주필을 만난 채영춘(오른쪽).

(야- 이것이구나!) 페지를 번지며 보니 군중들이 환영할 수 밖에 없는 잡지였지요. 번역잡지를 꾸려보자고 마음 먹게 됐어요. 중요한 건 《반월담》잡지사의 뜻을 알아보는 것이였지요. 그래서 먼저 두분을 보내 탐문조사를 해 보니 대찬성이지 뭐예요. 지도부의 반복적인 토의를 거쳐 주당위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허가를 얻은 뒤 여러가지 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나서 몇몇 실무자를 데리고 북경으로 상경했지요. 

신화사에 가서 《반월담》잡지 민범로 총편집을 만났지요. 부총편집 엽좌표, 발행부 주임, 미술편집실 주임 등 몇몇 관계자들이 배동해 나왔더라구요. 그 자리에서 제가 먼저 연변 나아가서 중국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동북 3성이 조선반도와 잇닿아 있는 지정학적 특점을 상세히 렬거하고나서 연변에 조선말로 된 《반월담》같은 권위성 시사간행물이 꼭 있어야 하는 리유를 조목별로 설명하였죠. 그 다음 연변 당정 지도자들이 상당히 지지한다고, 그리고 우리 편집대오가 강건하다는 등 우리 우세에 대해 많이 말했지요.

민총편은 열심히 듣고 나서 당장에서 찬성하는 립장을 밝히더라구요. 여기까지는 좋았죠. 그런데 관건은 출간자금건이였어요. 그쪽에서는 《반월담》조선문판 창간식 때 1차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고 저희들은 장기적인 지원를 바랐지요. 팽팽한 줄당기기를 하였어요. 민범로 총편집은 장기적인 지원은 전례가 없었다고 하면서 《반월담》잡지사 선에서 답복 줄 일이 아니라면서 의견을 좁히지 못하였죠. 첫번째 회동은 각자의 립장만 확인하고 무산되였어요.

그로부터 얼마후 《반월담》잡지사에서 저를 다시 호출하였지요. 결국 신화사의 동의를 얻어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통보해 주더라구요. 얼마나 기쁘던지. 그날이 1990년 12월 20일이였죠. 그날 신화사청사에서 연변 《지부생활》잡지사와 신화사 《반월담》잡지사 사이 합의문이 채택되고 저와 민범로 총편집이 각자 잡지사를 대표하여 싸인하였죠.

1991년 6월 《반월담》(조선문)잡지 창간의식의 한장면.

북경에서 돌아온 후 온 잡지사가 동원되여 《반월담》조선문잡지 창간 준비로 분주하게 보냈죠. 그로부터 반년 후인 1991년도 6월 24일, 《반월담》잡지사 지도자들과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정 지도자들, 각 부문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반월담》(조선문)잡지 창간의식을 성대하게 치렀지요.

《반월담》조선문잡지는 1991년에 창간되여 1994년 12월까지 도합 84호를 발행하고 아쉽게도 정간되였어요. 가난한 자치주 살림이지만 좀 더 부추켰더라면 신화사의 후원도 있고 하여 얼마든지 건실하게 자랄 수 있었겠는데 하는 유감이 남았지요.

1990년 4월에 《지부생활》잡지사로 와서 1992년 8월에 연변TV방송국으로 전근해가기까지 2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였지만 《반월담》조선문잡지 창업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그 동안 황창주, 한정남을 비롯한 지도부 성원과 편집실 주임들이 많이 지지해주어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한 것 같았어요.

비록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정에 의해 《반월담》조선문잡지가 4년 만에 정간되였지만 동구라파 사태, 구쏘련 해체, 국내 새로운 정세를 배경으로 출범한 그 시대의 산물로서 광범한 조선족독자들에게 시사정책 해독의 멋진 강사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언젠가는 우리 후배들에 의해 복간되는 그 날이 꼭 오리라 확신하는거죠.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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