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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67] 연변대학 명교수 학술의 전략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9월18일 10시31분    조회: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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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67](정판룡편2)

구술자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박사생 도사, 정판룡의 제자, 작가.

두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판룡선생은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대학으로 만든 주인공의 한 분이고 학술적인 전략가라는 점입니다. 연변대학 정원에 정판룡문학비가 있지요. 그 정면에 선생의 한마디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그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모스크바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북경에 오게 됩니다. 이젠 어떻게 살 것인가, 북경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연길에 돌아가야 하는가? 아마도 고민이 많았겠죠.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초,연길에 살구꽃, 배꽃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려 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렬차에 앉았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저희 제자들이 보건대 연변대학에 대한 사랑과 민족사회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묻어나는 글귀라고 생각해서 이를 비문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정판룡문학비.

일단 북경에 오니까 먼저 온 친구들, 그 중에는 박사학위를 못 받고 돌아온 친구들도 더러 있었죠. 하지만 그들은 북경 사회과학원이나 북경대학과 같은 좋은 연구소와 대학에 배치를 받았어요. 정판룡 같은 훌륭한 인재를 북경에 남겨야 되겠다. 그래서 친구들이 일자리를 주선했습니다. 그때 한걸음 먼저 전중문선생이 북경 사회과학원에 배치를 받았어요. 그래서 상급하고 론의해가지고 정판룡선생을 북경 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에 배치하고저 이미 내정을 했어요.

그 무렵, 정판룡이 북경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달복달한 분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림민호 부교장입니다. 림민호 부교장은 연변대학 인사처 부처장으로 일하는 현룡순선생에게 지시를 했어요. “빨리 북경의 국가교육부에 편지를 드려서 정판룡을 돌아오게 하라, 정판룡은 우리 연변대학에서 급히 수요하는 인재이다.”라고 한 거지요.

정판룡선생이 돌아올 무렵이였던 60년대초 연변대학 정문.

현룡순선생은 중앙교육부에 련달아 3통의 편지를 드렸습니다. 그때 정판룡선생은 어떻게 생각했을가요? “나를 그처럼 아끼고 키워준 림민호 부교장이 나를 부른다. 그리고 연변대학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은 대학이다. 나는 북경에서 편히 살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연변에 가서 보람있게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래서 정판룡선생은 일단 모스크바에 남아있는 안해 왕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연변이 나를 수요하기 때문에 나는 연변에 가야 하겠다. 량해를 해달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단 짐을 찾아가지고 연변대학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정판룡선생은 연변대학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는데 다음과 같은 몇가지 중요한 일을 했다고 봅니다.

첫째,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대학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때 연변대학의 상황은 아주 궁색하고 초라했습니다. 그럴 듯한 교실 하나, 연구실 하나 없는 상황이고 더더구나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교과서가 없이 공부를 한 거예요. 일부 교과서는 구쏘련에서 로어로 된 교과서를 가져다가 대충 번역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과서를 가져다 썼어요. 우리가 자체로 편집한 교과서는 거의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교과서가 있어야 되겠다, 교과서를 만들자면 좋은 교수들을 영입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지요. 

선생은 연변에 돌아오자마자 조문학부 당총지 서기 겸 부학부장 사업을 맡아했습니다. 연변대학 재학생들 가운데서 총명하고 성실하고 재간이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하고, 또 연변대학 밖에서 인재들을 널리 물색하고 영입해서 탄탄한 교수진을 만들었어요. 선생께서 물색하고 영입한 교수들을 보면 참 재미가 있어요. 키가 크든지 작든지, 잘 생겼든지 못 생겼든지 오직 학술이라는 18반 무예에서 한두가지만 잘 다루면 교원으로 발탁했습니다. 강의를 잘하고,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고, 성품이 좋으면 교수로 영입한 것입니다.

 

정판룡교수가 집필한 외국문학강좌 교재.

리해산, 김영덕, 김병수, 허룡구 등 교수님들에게는 좀 실례가 되는 이야기지만 이들 모두 키가 1메터 60쎈티메터 정도 밖에 안되지요. 그렇지만 한학을 정통하고 강의를 잘하고 글재주가 좋은 거예요. 리해산 교수는 《수호전》,《삼국연의》,《홍루몽》을 번역한 유명한 번역가입니다. 허룡구 교수는 시도 잘쓰고 강의도 잘하고… 이런 작은 거인들을 교수로 영입해 가지고 교과서를 편찬한 거지요. 자, 나는 세계문학사 교수니까 먼저 세계문학사 교과서를 쓴다. 그래서 림휘, 허호일, 서일권 교수와 손잡고 《세계문학간사》라는 교과서를 1980년대 초반에 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학과,다른 강좌의 선생님들을 동원한 거예요. 김영덕, 김병수, 허룡구 이런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여서 《중국문학사》를 썼고 임범송, 현룡순, 김해룡 선생님이 《문학개론》을 썼습니다. 또 박상봉, 최상철, 전국권, 김만석 이런 선생님들이 동원되여 《습작학개론》을 집필하여 출판하였지요. 그외에도 많은 교과서들을 편찬해 냄으로써 최초로 연변대학에 교과서가 없던 국면을 타개한 거지요.

저도 1978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수업시간에 필기하고 나면 팔목이 다 부러질 지경이였어요. 그런 국면을 적어도 저의 아래, 아래 반부터는 개선하고 교과서가 있는 대학공부를 하게 되였지요.

1979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수업장면.

그리고 대학은 어떤 학위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연변대학은 정판룡선생이 계셨기 때문에 조선언어문학 석사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1986년도에 중국 국내 대학에서 제일 처음으로 조선언어문학 박사점을 설치하게 되였어요. 이 또한 령의 돌파입니다. 북경과 상해에 있는 정판룡 교수의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함께 공부한 바 있는데 이들 모두가 중요한 학술기관의 리더들입니다. 북경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의 전중문, 북경외국어대학의 왕부상, 상해외국어대학의 호맹화 교수가 그렇습니다. 물론 친구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북경대학 계선림 교수의 인정과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계선림 교수는 살아있는 공자로 대접을 받는 저명한 교수입니다. 정판룡선생은 귀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는다고 이런 거물급 학자들을 파고 드는 거예요. 계선림선생을 찾아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대요.

연변대학에 온 계선림(오른쪽 첫번째)교수를 모시고.

“선생님,지금 우리 나라에서 영문학과, 프랑스학과, 일본어학과를 만들고 있는데 모두 외국에서 원어민교수를 영입해 들이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자금을 얼마나 많이 씁니까? 우리 연변대학은 그런 돈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연변대학 조선족교원들은 한국어 또는 조선어를 다 잘합니다. 그러니까 조선-한국언어문학학과를 경영할 경우, 우리 대학 교수들은 외국에서 영입한 원어민교수들과 똑같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정판룡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계선림선생께서는 연변대학을 긍정하셨습니다.

“당신들 연변대학은 조선언어문학 관련 인재를 키울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소.”

이 어른의 말씀이 천근, 만근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우리 연변대학은 1986년에 복단대학,길림대학,북경대학,중앙민족대학과 같은 유수의 대학을 물리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조선언어문학 박사점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정판룡선생의 가장 특출한 기여라 하겠지요.

이렇게 교과서를 준비하고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요람를 만들었습니다. 하기에 저는 정판룡선생은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대학으로 만든 중요한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1998년 연변대학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연설하는 정판룡 교수.

 

정판룡교수와 그의 박사생 제자들.

그럼 두번째로 왜 정판룡이냐? 학술연구에서 솔선수범하면서 많은 업적을 일구어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학술전략가다운 안목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연변대학의 조선--한국학연구를 이끌어나갔다는 거지요. 선생은 1960년 연변대학에 돌아오자마자 청년학자들을 이끌고 북경사범대학 교수들과 손잡고 《동방문학사》라는 대형교과서를 편찬하고저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나라에서 나온 이른바 《세계문학사》는 유럽중심의 문학사예요. 거대하고 유구한 동방문학을 거의 다루지 않은 반쪽짜리 세계문학사입니다. 이 유럽중심의 문학사서술을 타파하고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문학사를 편찬하자고 결심하였습니다. 마침내 시골대학인 연변대학 정판룡교수가 아이디어를 내고 전국 여러 대학에 공동으로 《외국문학사》를 펴내자고 제안합니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통에 난산이 됩니다. 그렇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이를 다시 재개합니다. 중국경내 22개 대학의 교수들, 말하자면 세계문학, 동방문학 관련 교수들과 손잡고 정판룡선생이 조직자가 돼가지고, 또 그 자신이 인도문학에 대해 쓰고 허호일이 유럽문학, 림휘가 쏘련문학, 서일권이 조선문학에 대해 쓰게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멋지게 출판한 거지요.

4권으로 된 《외국문학사》인데 중국에서 편찬한 최초로 되는, 동서방을 아우르는 대형문학사로 되는 겁니다. 이 책이 출판되자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정판룡선생도 중국학계의 거목으로 인정이 됩니다. 특히 연변대학의 위상을 굉장히 높여주었지요. 이제는 뭐 북경대학, 복단대학 교수들이라고 해도 세계문학 분야에서는 감히 연변대학을 넘보지 못하게 된 겁니다. 말하자면 선견지명을 가지고 뛰여난 아이디어를 내서 솔선수범으로 좋은 책을 냈다 이겁니다. 그외에 또 개인저술로 《고리끼전》, 여러 동료들과 손을 잡고《제2차세계대전후의 세계문학》을 속속 펴냅니다.

정판룡선생이 동료들과 손잡고 펴낸 《제2차세계대전후의 세계문학》.

선생은 학술만 하고 대학교육에 관련된 저술활동만 한게 아닙니다. 평민백성들과 청소년 독자층이 다 읽을 수 있고 우리 의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저술활동도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은 1980년대 초반 스웨리예 스톡홀름대학에 갔더랬지요. 그 기회에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고 《외국견문》이라는 책자를 냈어요. 지금 읽어보아도 굉장히 사료가 풍부하고 재미가 있어요. 여러 나라의 발전상을 우리한테 아주 구체적이고 생동한 자료를 가지고 보여준 거지요.

정판룡선생의 자서전《고향떠나 50년》.

그리고 자서전 《고향떠나 50년》을 《장백산》잡지에 련재하였고 후에 한국 전라남도 《금호문화》에 련재하였습니다. 이 책은 민족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고 한국 웅진출판사에서 《내가 살아온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였는데 한국에서 벌써 절판이 되였습니다. 자기의 가족사, 자기의 성장사를 주축으로 조선족력사와 문화를 폭넓게,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지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 책을 두고 “중국을 알 수 있는 안내서”라고 평가하고 있고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찾고 있습니다.

선생은 만년에 《작가일화》, 《나와 나의 안해》와 같은 책들을 쓰셨는데 일반 독자들이 아주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훌륭한 교양서로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자기 전공분야의 학문에만 집념한 게 아니라, 우리 민중들의 의식을 제고하고 우리 사회를 좀 열리게 하는데 선생의 저서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정판룡선생이 집필한 부분적 저서들.

세번째는 중국에서 조선--한국학연구령역를 개척한 분이라는 거지요. 선생은 1987년에 5년간 맡았던 연변대학 부교장 자리를 내놓습니다.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거지요. 연변대학은 시골에 있다, 연변대학이 산해관을 넘어서 중국주류사회에 진출하고 자기의 립지를 탄탄히 굳히자면 자기 특색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 연변대학의 특성과 우세는 조선-한국학이다. 그래서 1989년도 한중수교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연변대학에 조선-한국학연구쎈터를 출범시킨 거지요. 그리고 같은 해에 연변대학에서 조선-한국학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의 학자와 한국의 학자들이 연변에서 모이게 됩니다. 이게 해방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선생은 학술연구를 통해서, 연변이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를 통해서 조선반도의 남과 북의 학자들, 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민족의 학자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을 통해서, 반도의 통일을 앞당기려고 했던 선각자였습니다. 참으로 연변대학이야말로 반도통일의 교두보로 된 셈이지요.

 

연변대학제2차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제4차한국전통문화국제학술회의.

뿐만 아니라 선생은 국내외 자금을 적극 유치해 발해사연구총서를 내는 데도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또한 연변대학 사회과학학부를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방법을 대주었습니다. 그리고 정판룡선생은 조선-한국연구쎈터에서는 일류의 학회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조선어로만 내서는 안된다, 반드시 한어로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경에 가서 중국사회과학원의 동의를 얻고 사회과학원출판사를 통해 《조선-한국학총서》를 한어로 냈습니다. 이것 역시 령의 돌파입니다. 연변대학에서 북경의 사회과학원출판사를 통해 《조선-한국학총서》를 당당하게 낸 겁니다. 뿐만 아니라 《간명한국백과전서》를 한어로 펴냈습니다. 이건 《간명미국백과전서》와 《간명일본백과전서》에 이어 세번째로 중국 최고의 출판사를 통해 《간명한국백과전서》를 출판한 것입니다. 이 자금 전부를 정판룡선생께서 유치한 것입니다.

《간명한국백과전서》출간식.

상술한 3가지로 놓고 볼 때 정판룡선생은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대학으로 만든 공로자의 한분이고 학술연구의 전략가라고 말하게 됩니다. 정판룡선생이 없었더라면 우리 연변대학은 특색 있는 연구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발전된 모습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판룡선생은 참으로 연변대학, 또는 중국조선족문화발전에 탁월한 기여를 한 지식인이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안상근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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