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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68] 왕유와의 로맨스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9월29일 09시59분    조회: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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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창건 70돐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68](정판룡편3)

구술자 김호웅: 연변대학교수, 박사생 도사,정판룡의 제자, 작가.

오늘은 외람되지만 정판룡교수와 왕유녀사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요.

다 아시다싶이 정판룡선생은 조선족이고 왕유녀사는 남방의 한족입니다. 두 분은 모스크바에서 만나 결혼을 했고 아주 재미있게, 보람있는 일들을 많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정판룡선생은 이미 20년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왕유녀사는 지금도 정판룡선생의 서재를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만년에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행복했던 정판룡 왕유교수

제가 우리 조선족력사를 좀 공부해 보니까 조선족의 걸출한 인물들 가운데 한족과 결혼해서 산 사람들이 꽤 많아요. 류자명, 조선족의 유명한 항일투사가 아닙니까? 해방후에는 호남농학원 농학교수로 우리 나라의 농업발전을 위해 많은 연구성과를 낸 분입니다. 역시 한족녀성과 결혼해 살았습니다. 작곡가 정률성, 영화황제 김염 역시 한족녀성과 살았지요. 그 외에도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가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중국의 해방을 위해서 훌륭한 업적을 쌓음과 동시에 한족부인의 극진한 사랑과 숭배를 받았어요. 정판룡선생도 바로 그런 분들 중의 한분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조선민족의 교육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함과 아울러 한족배우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서로 사랑하고 믿으면서 많은 일들을 했다, 이겁니다.

저는 정판룡선생의 문하에서 석사, 박사공부를 했고 선생을 20년 가까이 모신 바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에 대해서만은 그래도 좀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산했어요. 선생의 중요한 저서를 보지 못한 게 있었거든요. 선생께서 세상을 뜨기 전에 “내 안해 왕유에 대한 전기를 쓰고 싶다”고 했고 이를 써가지고 《연변녀성》에 련재를 했습니다. 후에 책으로 나왔는데 제가 미처 다른 일이 있어가지고 이 책을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왕유녀사께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와서 70년 세월》이라는 자서전을 쓰셨는데 이 책도 통독하지 못했어요. 이번 기회에 이 두 책을 다 읽었어요. 그래서 두 분의 사랑에 대해 더 큰 감동을 먹게 된 거지요.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선생께서는 21살 약관의 나이에 연변대학 교원이 되였어요. 또 이때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는 모스크바 류학을 했고 남들이 다 손을 들었는데 끝내 부박사학위를 받은 거예요. 지금도 모스크바대학은 세계10대 대학의 반렬에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이렇게 훌륭한 대학을 나왔으니 그를 따르는 녀성들이 많았지요. 정판룡선생은 《나와 나의 안해》라는 책에서 이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50년대 쏘련류학시절의 정판룡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배극선생이라는 어른이 계셨지요. 아마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선전부장일 겁니다. 그분의 부인이 연변대학 일어계의 황구헌교수입니다. 이 두분이 연변대학에 남은 젊은 교원들이 많은데 다 미혼이라 좋은 처녀들을 소개해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북경민족문공단에서 연변에 와서 몇차례 공연을 하게 되였어요. 그 중에 조선족처녀들이 많았지요. 그래서 배극선생네 내외는 자택에다가 연회를 차린 거예요. 문공단의 녀성배우들을 모셔오고 동시에 연변대학의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정판룡선생 또래들을 대여섯명 청한 겁니다. 서로 식사를 하면서 눈을 맞춰라, 마음에 들면 서로 련애를 하라, 이거지요. 그런데 《공작새무용》을 추는 처녀가 아주 잘 생기고 똑똑했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정판룡선생이 잠간 만나서 사귀였어요. 그런데 이건 아니다. 이 녀자는 북경에 돌아가야 하고 나는 여기서 교편을 잡아야 한다. 그러니 저 녀자가 아니다, 하고 끊은 거예요. 선생은 항상 이렇게 말했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의 감정만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반드시 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쏘련에 갔는데 거기서 두 처녀가 접근하는 거에요. 하나는 따마라라는 선반공인데 정판룡을 슬그머니 따르는 거에요. 이 녀자를 겨우 따돌리니까 이번에는 스펠라라는 크루지야의 가수가 따르는 겁니다. 어느 날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면서 청을 들어요. “다음 주 제가 공연을 하는데 공연을 와서 보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박수를 좀 쳐줄수 있겠죠?” 그래서 그녀의 공연장에 가서 박수도 쳐주고 잠간 사귀였어요. 그런데 너무 활달해요. 역시 이 녀자는 아니구나 해서 좋게 갈라졌다고 해요.

1956년 모스크바류학시절의 왕유

그러다가 만난 게 누군가 하면 왕유라는 녀자지요. 왕유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북경외국어학원에서 로어를 공부할 때 사실 한 캠퍼스에서 1년간 생활했어요. 정판룡은 22반, 왕유는 18반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서로 얼굴도 몰랐대요. 그런데 1957년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익히게 된 거지요. 1957년, 유명한 모스크바청년축전이 펼쳐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호요방선생께서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오셨는데 통역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모스크바에 류학하고 있던 중국류학생들이 자진해서 통역을 맡은 거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왕유를 만났어요. 두분이 사귀게 되는데 가만히 눈치를 보니까 왕유를 따르는 다른 중국류학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먼 빛으로 아쉽게 생각하고 가만히 보았는데 후에 왕유와 그 남자가 갈라졌어요. 그리고 조금 지나서 모스크바공청단에서 중국류학생들을 초청해가지고 볼가강유람을 하였어요. 그런데 구쏘련에서 넉넉하게 일정을 잡아주었어요. 한달동안 볼가강 상류까지 답사를 한다는 거예요. 그때 비로서 왕유를 다시 만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해봤는데 그때 호씨라고 한 친구가 있었지요. 정판룡보다는 네댓살 더 많고 이미 결혼한 친구인데 함께 공부를 했어요.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중국류학생 학생회 회장 호맹화씨입니다. 후에는 상해외국어대학 교장이 된 분이지요. 이분이 정판룡과 왕유 두 청춘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걸 보고 슬그머니 다리를 놓은 거예요. 왕유에게 가서는 “저 친구는 조선족이지만 굉장히 출중한 사람이다. 성품도 아주 좋다.” 했고 또 정판룡에게 와서는 “왕유는 레닌사범대학에서 공부하는 무석 출신의 아가씨인데 굉장히 총명하고 똑똑하다.”고 했지요.

1994년 상해외국어학원 교장 호맹화(가운데)와 함께

그래서 둘이 좀 깊이 사귀게 됐는데 애초에 왕유선생은 정판룡선생이 너무 투박하고 촌스럽게 생겨서 싫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러 자리를 피하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점점 정판룡선생에게 끌리게 되더라고 합니다. 아무튼 둘은 호맹화씨의 주선으로 본격적인 련애를 하게 되였어요. 둘은 모스크바의 여러 곳에서 만났는데 주로 레닌사범대학에서 만날 때가 많았습니다. 모스크바에 레닌산이라고 있는데 그 산 앞에 레닌사범대학이 있고 뒤에 모스크바대학이 있지요. 왕유는 레닌사범대학에서, 정판룡선생은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했지요.

한번은 정판룡선생이 우리 대학에 놀러 오라고 왕유를 청했어요. 지난 번에 볼가강에서 찍은 사진들이 있지 않은가? 그걸 아무래도 현상해야 되겠는데 휴식일을 타가지고 모스크바대학에 와서 현상하자, 하고 청했지요. 왕유는 아주 단순한 녀자라 좋다고 했어요.

1957년 여름방학에 볼가강유람을 하면서 남긴 사진. 앞줄 오른쪽 첫사람이 왕유 , 뒤줄 왼쪽 첫사람이 정판룡

“위대한 단순성”, 이게 왕유의 특징이지요. 그래서 왕유가 온 거예요. 정판룡은 자기 침실에서 모포로 창문을 가리고 왕유와 함께 현상을 했어요. 사진을 물에서 건져내서 잘 됐느니, 못 됐느니 하다나니까 얼굴과 얼굴이 서로 가깝게 됐다는 그 말씀이에요. 정판룡은 《나와 나의 안해》에서는 우리 둘이 저도 모르게 키스를 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첫 프로포즈에 성공을 했는데 정판룡선생은 그 장면을 진하게 묘사하지 않아요. 나도 40년이 지났지만 왕유와 첫키스를 하던 장면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일단 거기서 련애를 하고 성공을 해가지고 결혼까지 하는 거예요. 모스크바대학에 있는 숙사에 자그마한 회의실이 있었대요. 거기다가 례식장을 차리고 결혼식을 했고 왕유와 정판룡의 친구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지요. 그리고 정판룡은 1960년 먼저 학위를 받고 돌아오게 되고 왕유는 한 반년 더 남아있게 되였어요. 정판룡선생이 일단 북경에 와가지고 어떻게 할것인가 궁리하다가 나중에 연변에 돌아가기로 결단을 한 겁니다. 그렇다면 왕유의 동의를 얻어야 되겠다, 그래서 왕유한테 편지를 썼대요.

50년대 정판룡 왕유 부부

“나는 아무래도 림민호교장이 기다리고 우리 동포들이 기다리는 연변에 가야 되겠소. 내 할 일은 연변에 있소. 그러니까 우리 둘이 설사 갈라진다 해도 앞으로 어떤 기회가 있어가지고 어느 한곳에 자리를 잡을수 있을 것이요. ”그랬더니 왕유가 이렇게 회답을 해더래요. “뭐,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저두 연변에 갈 수 있어요. 연변에 가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요? 조선족들이 모여 산다고요? 동북의 조선족과 남방의 한족이라는 건 북방사람과 남방사람, 그만한 차이밖에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얼마든지 연변에 가서 살수 있어요. 황차 연변에도 많은 한족들이 살고 있지 않아요?” 그 편지를 읽고 정판룡선생은 너무 고맙더래요. 그래서 정판룡선생은 일단 먼저 연변에 돌아오게 되였습니다.

후에 왕유선생이 연변에 옵니다. 기차 타고 연길에 오니 아스팔트가 없고 온통 흙길이라고 합니다. 마차 한대를 세내 가지고 역전에 가서 짐을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1959년 모스크바에서 정판룡과 왕유

정판룡선생은 일찍부터 왕유녀사한테 굉장히 감사함을 느끼고 나는 왕유를 위해서 세가지 일을 해주겠다,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왕유가 자기 동창생들보다 먼저 정교수가 되게 하는 것이였어요. 왕유녀사는 중경에 있는 남개중학을 나왔어요. 항일전쟁시기에 중경에다가 남개중학 분교를 차린 거예요. 그런데 이게 교육수준이 굉장히 높고 훌륭한 명문중학교래요. 왕유는 이 학교를 나온 거예요. 그런데 이 중학교 졸업생들 대부분이 북경대, 청화대 교수로 된 거예요. 남개중학교 동창생들 가운데서 왕유가 제일 먼저 정교수가 되게 하겠다고 했는데 정판룡선생은 이를 실천한 거예요. 왕유는 동창들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정교수가 됐어요.

1992년 3월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두번째로는 남개중학 동창생들 가운데서 왕유가 국제경험이 제일 많은 교수로 되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선생은 평생에 40개 나라를 돌아 다녔어요. 그런데 거의 20개 이상의 나라들은 거의 다 왕유녀사와 함께 간 거예요. 스톡홀름에도 같이 갔댔고 미국에도 같이 갔고 구쏘련을 다시 탐방할 때도 같이 갔습니다. 그래서 사실 남개중학의 동창들은 왕유만큼 국제 경험과 시야를 가진 동창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왕유교수는 이게 큰 자랑거리지요.

1998년 성도에서 있은 동창모임때 마중나온 남개중학 동창생들과 함께 있는 왕유교수(앞줄 오른쪽)

세번째로 왕유를 위해서 전기를 쓰겠다는 거예요. 중국에 유명한 왕소군이라는 녀인이 있지요. 한나라 때의 미녀인데 흉노가 이 녀자가 너무 고와서 데려다가 흉노두목의 부인으로 삼은 거예요. 거기서 많은 자식들을 키우면서 시집살이를 잘했다는 그런 유명한 녀자이지요. 왕유는 성씨도 왕씨이고 하니 “연변의 왕소군”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다고 봅니다. 왕유녀사를 로씨야 12월당인의 안해들 같은 분으로 보고 싶어요. 1825년 무렵에 일부 귀족청년들이 일어나 짜리황제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모의는 실패했고 12월당인 대부분이 잡혀서 씨비리아로 추방을 당했어요. 이 사건은 30년 후에야 풀렸는데 많은 12월당인들의 안해들이 남편이 류배생활을 하고있는 씨비리아에 찾아가서 동고동락을 했지요. 나는 이런 의미에서 로어를 전공한 왕유녀사는 “조선족의 12월당인”의 안해라고 봅니다. 이렇게 비유하는 게 오히려 그럴듯 하지 않습니까?

정판룡 왕유교수의 단란한 가족

왕유녀사는 로어를 전공했지만 후에 로씨야와의 관계가 틀어지자 영어를 전공했어요. 사실 연변대학에 로어와 영어를 뿌리박게 한 중요한 공로자이지요. 그런데 너무 사업열정이 높다보니까 일만 하고 잘 잡숫지 못해서 크게 앓았어요. 또 년년생으로 홍이라는 딸과 진이라는 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다가 신장을 떼여버리지 않으면 안 되였습니다. 자식들을 키우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였어요. 그래서 딸은 무석에 있는 외할머니집에 보내서 외할머니가 키우게 하였어요. 정판룡선생은 왕유를 데려다가 너무 고생을 시켰다, 이 단순한 녀자가 연변에 와서 정말 수고했다, 조선족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했다, 내 전기를 한편 쓰겠다고 하신 거지요. 그런데 다른 일에 밀려서 암진단을 받은 후에야 이 책을 집필하게 되였어요.

정판룡교수가 안해인 왕유를 위해 쓴 책 《나와 나의 안해》

《연변녀성》에 20번, 거의 2년간 련재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통증이 심하고 힘들어서 더는 쓸 수 없게 되였어요. 그래서 마지막 6편은 왕유선생이 이어서 썼습니다. 민족출판사를 통해서 《나와 나의 안해》라는 책자를 냈는데 한 10여만자밖에 안되는 책이지만 두 민족이 이룬 다문화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 좋은 책이라고 봅니다.

1997년 KBS해외동포상을 동부인해서 수상하는 정판룡, 왕유교수

1998년 11월 결혼 39돐 기념일을 맞으며

정판룡선생은 세상을 뜨면서 제자인 김병민의 손을 잡고 (김병민, 김관웅, 리암 선생이 정판룡선생의 1기 박사생들임) “병민이, 나는 가는데 왕유를 여기다 두고 가는 게 시름이 놓이지 않네.” 하고 얘기하더래요.

저는 이 두 분이 나눈 진지한 사랑, 민족과 언어를 넘어서는 지극한 사랑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특별히 정판룡선생과 왕유녀사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해 드리는 겁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안상근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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