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펼치면 문득 다음과 같은 의혹이 들기 마련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여성 차별을 다루다니 너무 진부한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바로 그것.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남성의 입장에서도 공감 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직장 내 성차별과 남녀 임금격차, 유리천장,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은밀한 인식의 차별 등….
하지만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한국의 여성들도 더 이상 분개할 필요가 없다. 남성들은 점점 퇴화하는 반면 여성들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성(性)의 권력 교체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설명에 앞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사례 중 하나가 ‘남성 감기(man-flu)’라는 신종 용어다. 이 말은 비슷한 정도의 감기 증상을 가지고도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질병을 앓는 듯 반응할 때를 비꼬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얼핏 생각하기엔 남성들의 엄살이 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성염색체로 인한 면역 시스템의 차이 때문이다.
인간은 성별과 관계없이 상동염색체 22쌍과 성염색체 한 쌍, 즉 46개의 염색체를 지닌다. 그런데 성염색체의 경우 여성은 X염색체 2개, 남성은 X염색체 1개와 Y염색체 1개다. 따라서 X염색체는 여성을 상징하며, Y염색체는 남성을 상징한다.
여성이 감기에 강한 것은 바로 X염색체 덕분이다. X염색체는 Y염색체보다 면역력과 관련한 유전자를 더 많이 지니므로 면역 시스템을 더욱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은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해도 효율적인 면역 시스템에 의해 감기 등의 질병에 덜 걸리게 된다.
Y염색체는 X염색체보다 유전자 수도 훨씬 적다. X염색체는 1098개인 반면 Y염색체는 78개뿐. 그 많은 유전자로 X염색체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우리 삶을 조절하지만, Y염색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성별을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점점 위축되어 Y염색체가 마침내는 사라질 것이라는 ‘Y염색체 종말론’까지 등장했다. 최초의 Y염색체가 탄생한 것은 2억~3억 년 전 포유류의 공통 조상에서다. 하지만 그 후 Y염색체는 수백 개의 유전자를 잃으며 점차 쇠퇴해 이제는 유전물질이 염색체의 끝부분에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쇠퇴하는 Y염색체
호주의 제니퍼 그레이브스 박사 등은 Y염색체가 쇠퇴하는 속도를 계산한 결과 앞으로 1000만 년 후에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논문을 2002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사실 Y염색체가 지닌 생식기능 유전자는 ‘SRY’와 ‘EIF2s3y’ 2개뿐이다. 즉, 이 2개의 유전자를 다른 염색체에 옮기면 Y염색체가 없어도 번식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지난해 미국 하와이주립대 연구진은 이 같은 과정을 통해 Y염색체가 없는 수컷 쥐가 낳은 새끼들이 3세대에 걸쳐 정상적으로 번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미 Y염색체를 상실한 동물도 있다. 두더지, 들쥐, 고슴도치 등 일부 설치류가 바로 그것인데, 이 동물들은 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다른 염색체에 있다.
그러나 Y염색체에 남아 있는 나머지 부분이 굉장히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는 상반된 연구도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보유하는 Y염색체는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인 붉은털원숭이의 Y염색체보다 유전자 하나가 부족할 뿐이다. 즉, 2500만 년이라는 기간 동안 하나밖에 변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남성의 Y염색체는 건재할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다.
반면 진화적으로 약 8000만 년의 격차가 있는 인간과 마우스를 분석한 결과, X염색체의 유전자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남성을 상징하는 Y염색체는 유전자가 쇠퇴했지만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데 비해, 여성을 상징하는 X염색체는 안정된 가운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가 요즘의 뒤바뀐 남성과 여성의 위상 및 역할을 콕 집어 표현하는 것 같아 놀랍기만 하다.
남성 종말론이 힘을 얻는 또 다른 이유는 현대사회가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조용히 공부하고 감정적으로 섬세하며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므로 예전처럼 힘을 필요로 하는 직업은 점차 쇠퇴하고 있다. 따라서 유전학 및 문화 측면에서 여성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또한 남자의 뇌는 한 번에 한 가지의 일을 집중하는 데 더 적합하다. 그에 비해 여자의 뇌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멀티태스킹에 더 적합하도록 설계돼 있다. 모든 분야가 융합으로 서로 얽혀 나아가는 현대사회의 발전상을 고려하면 뇌의 구조 역시 여자가 훨씬 유리한 셈이다.
거세지는 여풍(女風) 속에서 남자가 가야 할 길은?
미국의 칼럼니스트 해나 로진은 《남자의 종말》이란 저서에서 “4만 년간 세상을 지배한 남자를 40년 전부터 여자가 밀어내고 있다”며 이제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성을 앞서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선진국의 경우 교육 및 일자리 등에서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고 있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남자 및 여자 아이들의 교육발달 단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읽기와 쓰기에서는 여자아이들이 크게 앞서고 남자아이들이 약간 앞선 과목은 수학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연구가 행해진 64개국 모두에서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을 앞섰으며, 발달 간격은 1년까지 차이가 났다.
1985년 46%에 불과했던 미국 대학교의 여학생 비율은 2015년 56%로 역전됐으며, 2025년에는 58%까지 증가할 예정이다. 또한 미국 가정의 절반 이상이 여성 가장에 의존하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전업주부로 가사를 돌보는 남편이 지난 15년간 3배로 늘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래 남성들이 독차지했던 직업인 교직 및 공무원의 경우 이제 여성들이 더 많이 진출하고 있다. 지난여름 최종 발표가 난 국가직 9급 공무원 공채 합격자의 58.8%가 여성이었으며, 지난해 공립 초·중등학교 임용시험 합격자도 여성 비율이 무려 64.6%에 달했다.
이처럼 뛰어난 여성들이 앞으로 일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면 남성의 일자리가 없어져 남자들은 더 힘들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걱정은 사실 기우에 불과하다.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질수록 경제가 성장하고 나라 전체에 활력이 넘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32개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약 20년간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고 남녀 간 임금격차가 작을수록 출산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OECD는 2012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남성 수준으로 올라갈 경우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p가량 상승할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82년생 김지영》에서 그려진 모습들이 정말 고리타분한 옛날 옛적 이야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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