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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후 5시 30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자신이 경험하거나 들은 성희롱·성추행을 공개하는 용도의 ‘미투(Me too) 게시판’이 생겼다. 서지현(45)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법무부 간부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직장인들도 피해 경험을 공유해보자는 취지였다.
하루 만에 이 게시판이 ‘난리’가 났다. ‘우리 회장님의 강제추행’같은 구체적인 사례도 나왔다. 블라인드에 따르면 2일 오후 6시까지 하루만에 714개의 고발 게시물, 방문자 12만7022명, 54만2213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2분마다 하나 꼴로 관련 게시물이 올라오는 셈이다.
◇"안아달라는 회장님" "청양고추 건배사 사장님" 2분 마다 하나 꼴로 고발
게시판에는 입사 면접 때 겪었던 성희롱, 회식자리에서의 일화, 대기업 회장님의 불미스러운 행동까지 올라와 있다.
유명 중견기업 면접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한 여성 직장인은 “면접관으로부터 ‘회장님은 ‘노는 여자’ ‘야한 여자’ 좋아하니까 2차 면접에서는 복장이 지금처럼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싸 보이게 입지는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썼다.
건설업계에 재직했던 또 다른 이용자도 “노래방에서 (현장)소장이 허리에 손을 얹길래 자리를 피했더니, 다음날 팀장이 불러 ‘사회생활 어떻게 할 거냐’면서 혼을 냈다”며 “이 회사는 여직원들이 있는데도 도우미(여성)를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털어놨다.
공기업 계약직으로 일했던 한 이용자는 “유부남 과장님이 사적으로 연락하고 사귀자고 들이댔다”며 “회식만 하면 손과 허벅지를 쓰다듬었는데 이를 아무도 심각하게 보지 않아 혼자서만 끙끙 앓았다”고 말했다.
다른 직장인들은 “나도 남초(男超) 직장에 다녔는데 저런 일이 많았다” “고생했다” “다들 비슷한 일을 겪는 것 같다”는 댓글을 달면서 공감했다. 700여개의 게시글에서 언급 빈도가 높은 낱말을 추렸더니 트라우마, 미투, 아저씨, 갑자기, 성희롱, 엉덩이, 기억 등으로 나타났다. (남자, 여자, 회사 같은 일반적인 용어 제외)
블라인드에 가입하려면 회사 이메일 계정을 통해 재직 사실에 대한 인증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재직 회사’를 속이고 게시글을 남길 수는 없다. 다만 개인의 익명성은 보장되는 형태다. 작성자가 원할 경우 회사명을 숨기거나 드러낼 수가 있는데, 일부 대기업 직원들은 ‘미투 게시판’에 사명(社名)을 내걸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금호 아시아나 내부 블라인드에서는 박삼구 회장의 행동을 문제 삼은 글이 100여건 이상 올라왔다. 이 회사의 한 직원은 “매달 한 번씩 박삼구 회장님이 본사에 올라오면 강제로 선발된 여직원이 팔짱을 끼고 아부해야 한다”며 “그 가운데 데면데면한 여직원이 있어 회장님이 ‘너는 나 안 안아주냐’며 강제추행했다”고 썼다.
현대차 그룹 내부 블라인드에도 “계열사 사장이 회식 자리에서 다들 (청양고추에) 장을 찍어주시고, 제가 ‘고추’라고 하면 ‘원샷’을 외치면서 먹어달라고 했다. 19금(19일 금요일)엔 2차 가야지’라고도 말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한국전력공사 직원은 “신입 때 회식 중에 부장님께 ‘고기 좋아하느냐’고 여쭤봤는데 손을 잡으면서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직도 그 얼굴이 생각나서 소름끼친다”고 했고, SK플래닛 남직원도 “친한 상사가 뒤로 안으며 가슴을 만졌고, 점심시간에 엎드려 있으니 어깨마사지를 해준다며 또 슬금슬금 (손을 얹었다)”고 블라인드 내부 게시판에 적었다.
거론된 대기업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청양고추 건배사’로 지목된 현대차그룹 계열사 측은 “회사가 어려운 상황이니까 매운 청양고추를 먹으면서 의지를 다지자는 의미에서 준비한 것이었고 문제가 된 건배사는 없었다”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 관계자도 “‘안아 달라’는 말은 사실무근으로, 익명을 가장해서 잘못 전해진 것”이라면서 “회장님이 직원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새벽에 격려방문하는 것으로 승무원들도 강제로 선발된 것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미투’, 한국서는 ’위드유’ ‘미 퍼스트’로 진화
미투 운동은 지난해 미국에서 촉발된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이다.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사건이 터지자, 여배우를 비롯한 여성 영화관계자들이 “나도 당했다”는 의미로 ‘#Me too’라는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한 것이 계기다.
한국의 경우는 서 검사의 고백으로 미투 운동이 정치권, 대학가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일 “나도 13년 전 검사장 출신의 로펌 대표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며 "저에게 굉장히 상처가 됐던 말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 의원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가해자는) 취업을 하려고 했던 로펌의 대표였는데 그 이후에도 그분은 계속 전화를 해왔다”며 "제가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도 계속 전화를 해와서 참으로 놀랐다. 숨어도 부족한 사람들이 자신감을 갖고 계속 피해자인 저에게 전화를 해대는 등 2차적, 3차적 위협을 해오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효경 경기도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도 “나처럼 세고 무늬만 여자인 사람도 거의 다반사로 성희롱을 당한다”며 “6년 전 상임위 연찬회에서 회식 후 의원들과 노래방에 갔는데 한 동료 의원이 춤추며 내 앞에 오더니 바지를 확 벗었다”고 폭로했다.
그밖의 ‘미투운동’ 동참자들은 익명이 보장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있다. 어릴적 당한 성추행을 고백하는 사람도 많다.
지난달 30일 한 여성은 인스타그램에 “중학생 때 집에 가는 길에 마주친 아저씨가 갑자기 스타킹을 벗어달라고 했다”며 “친구들도 다 성추행을 한 번씩은 당해서 내가 당한 게 새 발의 피일 정도”라고 썼다.
서울대 내부 커뮤니티에서도 “초등학교 다닐 때 교장실에 불러서 무릎에 앉히고 여기저기 만져 댔다”며 “어려서 뭐가 잘못됐는 지 모르고 무서워서 당시에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은 ‘당신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위드 유(#With you)’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했다. ‘미투’운동을 벌이는 당신의 편에 서서 성범죄에 맞서겠다는 응원이다.
응원 해시태그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양상이다. 성범죄 피해를 당하고도 오히려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등장한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범죄 목격자가 먼저 막아야 한다는 취지의 ‘#미퍼스트(Me First)’ 도 있다.
대학생 정세은(24)씨는 “피해자들은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힘든데 주변의 도움이 거의 없는 것 같다”며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할까 봐 혼자서 짐을 안고 가는 경우가 많으니, 인식이라도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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