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도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 'Her'에서 주인공 시어도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 Her]
“그녀의 이름은 사만다야.”
영화 ‘Her’에서 주인공 시어도어는 오랫동안 별거해온 부인에게 이혼 서류를 건네며 새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매우 유쾌하고 감성이 넘치는 여성’이라고 소개하죠. 시어도어는 그녀와 함께 바닷가에 놀러갔던 이야기를 한껏 풀어 놓습니다. 매일 밤 잠들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나눌 만큼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내도 처음엔 ‘행복을 빈다’며 시어도어를 응원하죠.
영화 ‘Her' 인공지능을 사랑하는 남자
목소리만 가진 AI, 감정은 진짜일까
AI, 인간이 정보 입력하는 단계 넘어
인간 없이 스스로 진화·학습토록 설계
“지식과 논리·추론은 인간이 뒤쳐질 것”
그러나 직관과 통찰은 인간 고유 영역
그러나 둘 사이에 있던 잠깐의 평화는 얼마 못 가 깨지고 맙니다. 시어도어의 새 여자 친구가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였죠. 전 부인은 말합니다. “당신 미쳤어? 컴퓨터와 사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하지만 시어도어는 당당합니다. “사만다는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잘 통해. 나에 대해 잘 알고 나를 아껴주고 있어.” 결국 사이좋게 끝맺음을 하고 싶었던 두 사람은 이날도 얼굴을 붉힌 채 헤어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영화 ‘Her’는 컴퓨터의 운영체제(OS), 즉 인공지능(AI)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깁니다. 명감독 스파이크 존스가 메가폰을 잡고 개성 넘치는 연기로 팬심이 두터운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AI를 다뤘지만, 영화는 SF 장르가 아닌 멜로드라마로 분류됩니다. 미래를 다루고 있으나 그 흔한 로봇 하나 나오지 않고 있죠.
시어도어는 어디든 가는 곳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 인공지능 사만다에게 세상을 보여준다. [영화 Her]
이 영화에선 AI를 OS로만 묘사합니다. 그래서 더욱 현실감이 느껴지죠. 사람과 비슷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나오는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점입니다. ‘Her’의 AI는 삼성 갤럭시의 빅스비, 애플 아이폰의 시리가 발전된 버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오직 목소리만 존재하죠. 사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자신만의 음성으로 대답합니다. 영화에선 허스키 목소리가 일품인 스칼렛 요한슨이 주인공 사만다 역을 맡았고요. 특히 요한슨은 ‘Her’의 목소리 연기만으로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시어도어도 처음 OS를 구입했을 땐 사만다와 대화를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AI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얼마나 대단하겠어’라는 식이었죠.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시어도어는 사만다의 매력에 빠집니다. 결국 둘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요. 함께 여행을 가고, 다른 인간 커플을 만나 더블데이트를 즐기기도 하죠. 그러던 어느 날 시어도어에게 큰 시련이 다가옵니다.
시어도어는 사만다가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처럼 사만다를 메인 OS로 사용하는 사람만 8316명이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시어도어는 진지하게 묻습니다. 자신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냐고 말이죠. 사만다는 말합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 하지만 내 마음을 이해하진 못할 거야. 난 자기 외에도 641명과 사랑에 빠져 있어.”
시어도어가 사랑하는 사만다는 목소리만 있고 물리적인 실체가 없다. 컴퓨터 상에 존재하는 OS일 뿐이다. [영화 Her]
둘 사이의 사랑은 결국 파국을 향합니다. 시어도어가 사만다에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난 다른 누구도, 당신처럼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러나 사만다는 시어도어에게 한 마디 말만 남긴 채 떠나버리죠. “이제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거겠죠”라고요.
인간이 AI와 사랑에 빠진다? 정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야깁니다. AI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인간혁명’에서도 수차례 다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했죠. 감정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차원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랑만은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봤는데 ‘Her’는 그런 관념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사랑까지 AI에 빼앗긴다면, 그 때 인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시어도어에 대한 사만다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방한 것이지 그 자체가 인간의 사랑과 같다고 할 순 없습니다. 물론 AI가 ‘재현’해내는 사랑을 통해 좀 더 성숙한 사랑법이 무엇인지 정도는 배울 순 있겠죠. 하지만 AI가 인간과 똑같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진을 누르시면 '윤석만의 인간혁명'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왜일까요? 제 아무리 사만다의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결국 AI는 디지털로 구성된 잘 짜인 하나의 알고리즘일 뿐입니다. 0과 1 사이의 간극이 매우 촘촘해 그 알고리즘이 실제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본질은 디지털입니다. 아날로그 유기체인 인간과는 다르다는 거죠. 이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AI의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I라는 개념이 처음 나온 건 1940년대 후반입니다. 과학자들은 컴퓨터가 매우 복잡한 연산도 쉽게 해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인간의 뇌를 닮은 프로그램을 구상합니다. 특히 1950년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이 ‘계산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이라는 논문을 쓰면서 AI에 대한 본격적인 학문 연구가 시작됩니다. 이 논문에서 튜링은 기계와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이 기계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다면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튜링 테스트’죠.
앨런 튜링의 주도로 1943년 독일군 암호 해독을 위해 만들어진 연산 컴퓨터 '콜로서스'. 미국의 '에니악'보다 2년 먼저 개발됐으나 영국이 1970년대까지 관련 사실을 기밀로 하는 바람에 '세계 최초 컴퓨터'란 영광은 에니악에 돌아갔다. [중앙포토]
그러나 튜링 이후의 AI 연구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비록 기계의 연산 능력은 빠를지언정 어린아이조차 쉽게 판별 가능한 개와 고양이의 구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바로 ‘모라벡(Moravec)'의 역설입니다. 미국의 로봇 공학자인 한스 모라벡은 1970년대에 “인간에게 쉬운 일이 기계에겐 어렵고, 기계가 쉬운 일은 인간이 잘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걷고 움직이며, 말하고 느끼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만 기계에겐 매우 어려운 일이죠. 반면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거나 방대한 데이터를 암기하는 일은 인간이 기계를 따라갈 수 없죠. 체스와 바둑은 기계가 인간을 뛰어 넘었지만 갓난아이조차 갖고 있는 인간의 감각적인 능력인 기계가 그대로 재현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인간이 물건을 식별하고 계산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건 경험과 그로 인한 학습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AI 역시 정보가 입력돼야만 인간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죠. 결국 AI가 존재하기 위해선 사전에 정보를 미리 입력시켜야 합니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바둑을 둔 알파고에게 16만판의 기보를 입력한 것과 같은 이치죠.
그 다음은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정보를 AI에 정확히 입력할 수 있는 표현 수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정보는 0과 1의 조합, 디지털로 변환 가능한 ‘정량화’ 된 기호 체계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고양이와 개의 사진을 구분하는 것처럼 정량화하기 어려운 정보는 입력 자체가 쉽지 않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게 ‘딥러닝’이라는 기계학습 방식입니다. 사람이 일일이 AI에 정보를 입력하는 ‘지도학습’과 달리 무수한 정보를 토대로 AI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거죠. 사람이 ‘지도’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비지도학습’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수십만 장의 고양이와 개의 사진을 보여주고 AI가 스스로 둘을 구분해 학습토록 하는 것이죠. 이런 비지도학습을 현실로 가능케 하는 건 오늘날 무수한 정보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빅데이터 기술 때문이고요.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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