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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조남기 장군의 민족간부 로정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6월28일 00시00분    조회: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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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2013년 4월 아주 따듯했던 어느 날 오후 길림신문사가 기획한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취재를 위해 북경 조남기 장군의 저택으로 찾아갔었다. 다 알다 싶이 조남기장군에 대한 소개는 이미 많이 나와있는 편이였으므로 내 나름으로 어떻게 하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족사회에 귀감이 되고 사료가치가 있는 내용을 담을가 고민을 했다.

나를 접대할 당시 조남기 장군은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을 때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전에 보낸 취재 내용과 관련해 준비해보았다고 하면서 종이에 적은 필기를 손에 들었다. 86세의 고령에 건강이 딸리는 상황에서 그는 나의 질문을 둘러싸고 하나부터 여섯까지 조목별로 나눠서 아주 상세히 준비했다. 그리고 또 신변의 사업일군을 시켜 내게 필요하다고 여긴 자료들을 돌아갈 때 갖고 가도록 서류봉투에 담아 미리 준비를 해놓았었다.

여태껏 취재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빈틈없이 참답게 취재를 대한 사람은 처음이다. 그후 나는 위인은 이래서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번 가졌다. 5년이 지났지만 나는 조남기 장군이 넘겨준 그 자료가 담긴 서류봉투를 그대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오늘 이 글을 통해 중국조선족력사에 큰 한획을 남긴 고 조남기 장군을 회억하고저 한다.

○ 학습

조남기 장군이 쓴 항미원조전쟁 회억록 

사람들은 백년에 한번씩 영웅인물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 군사과학원 원장, 전국정협 부주석으로 지내며 당대 중국의 당, 정, 군 거물들과 국사를 론하면서 어깨를 같이 한 조남기, 그는 백년 조선족사회가 낳은 위인이자 최고위급 지도자이다.

1946년, 군정대학에 들어갈 당시 문화수준이 제일 낮았던 19세의 열혈청년 조남기, 어떻게 국가의 최고위급 민족간부까지 됐을가? 항미원조전쟁 32년 후 홍학지 장군은 왜서 다시 조남기를 찾았을가? 조남기와 길림성 벼농사,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될 번한 조남기의 아들... 2013년 4월 길림신문사가 기획한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을 위해 북경 조남기장군의 저택으로 찾아갔을 당시 그는 필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2013년 4월 봄날이 무르녹는 어느 날 오후 수도 북경, 사업일군의 안내를 받으며 조남기 전임 전국정협 부주석의 저택에 들어섰다. 신변의 사업일군이 “수장동지께서는 요즘 편도선이 좋지 않아서 말씀하기 힘들어합니다. 취재시간을 30분으로 하면 좋을듯합니다.”라고 귀띔했다. 널직하고 조용한 응접실에서 기다리는데 잠시 후 조남기 부주석이 출입문 쪽에 나타났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나에 대한 소개는 전기를 비롯해 이미 적잖게 나와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합격된 민족간부가 될 것인지에 대해 물었는데 그럼 오늘은 이전 책자에 소개되여있지 않는 내용으로 말해볼가 합니다. 내가 당의 민족간부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데는 주요하게 6개 방면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남기는 이렇게 말머리를 떼며 아득한 67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갔다. 사업일군과 30분 동안만 취재하기로 약속한 시간은 저도 모르게 한시간도 퍽 넘게 흘렀다.

“제가 한낱 평범한 백성으로부터 소위 간부의 길을 걷게 된 가장 첫번째 핵심적 요소는 학습입니다. 그렇지요, 바로 학습이지요.”

1946년 7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연길에서 한족대대, 조선족대대와 부녀대대 3개 대대로 재편성해 학습하게 됐다. 400여명의 조선족대원들은 당연히 조선족대대에 편입됐다.

“이 무렵 중앙에서는 전 중국을 해방하자는 호소를 내렸습니다. 전 중국을 해방하는 투쟁에서 조선족들이 한족말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되겠는가? 저는 이렇게 아주 간단한 생각을 하고 한족대대에 가서 학습하겠다고 견결히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400여명 조선족중에서 유일하게 한족대대에 가서 학습하겠다고 요구하고 나선 거지요. 아주 간단한 결정 같았지만 저의 전반 정치생애에서 지극히 중요한 작용을 한 거지요. 조선족대대에 들어간 이들 중에서 후에 제일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은 이전에 연변주 주장을 지낸 조룡호동지 밖에 없습니다.”

군정대학의 400여명 조선족학원중에서 조남기의 문화수준은 소학교 정도 밖에 안돼 제일 낮았다. 한어문장을 알아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어말을 번질 줄도 몰랐다.

조남기는 한족대대에 들어가 이를 악물고 학습했다. 그는 자기에게 그 어떤 일이 있든 지간에 하루에 꼭꼭 10개 글자를 익히고 열마디 말을 장악하는 임무를 내렸다. 종이도 무척 귀할 때라 밖에서 나무가지로 땅바닥에 글씨를 련습했다. 반년 후 조남기의 한어수준은 그야말로 놀라운 진보를 가져왔다. 그 덕분에 그는 학교에서 성당위 민중운동공작대원을 선발할 때 1,000여명의 학원 가운에서 5명중의 일원으로 뽑히게 되였다. 이렇게 조남기는 정치생애의 첫 발자욱을 내디뎠다.

“1947년 7월, 20살 때 나는 연변지위 기관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습니다. 이 때 나는 또 남다른 실천을 했습니다. 역시 나의 평생에 영향을 준 한차례 아주 보귀한 학습이였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당시 조남기는 간사, 비서로 있으면서 지위서기 공원동지를 따라 기층으로 많이 다녔다. 하지만 령도의 발언고를 쓰는 임무는 없었고 지위서기 본인이 직접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나름대로 의식적으로 령도의 발언고를 작성했다. 자신의 생각과 령도의 생각이 어느 정도 수준의 차이가 나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차이가 십만팔천리나 났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견지해서 계속 썼지요. 얼마동안 지나니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알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엔 지위서기의 연설내용과 제가 준비한 글의 관점이 아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 방법은 조남기의 문제파악, 령도적 사고력과 판단력을 단련하는 데 아주 큰 작용을 놀았다. 그 후 무릇 어느 부서에서 지도자로 있든 간에 조남기의 연설고는 거의 전부 그가 직접 작성하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다. 조남기의 발언은 길지 않고 중점을 쏙쏙 짚어가면서 알기 쉽게 말하는 것이 가장 특점이다.

“항미원조전쟁에서 팽덕회 총사령의 신변에 있으면서 비록 짧은 8개월 동안이였지만 그의 모략과 지혜를 따라배우는 좋은 학습기회가 되였습니다.” 조남기는 지원군사령부 작전처에서 참모로 있으면서 팽덕회 총사령원의 신변에서 사업, 이 기간에 23세의 조남기는 큰일을 해내려면 반드시 여러가지 모순 가운데서 주요무순을 꽉 틀어쥐고 놓지 말아야 한다는 도리를 깊이 깨달았다.

○ 실사구시

 
2010년 여름 길림신문사의 부탁을 흔쾌히 접수한 조남기 장군은 북경에서 제사를 써가지고 장춘으로 오셨다.

“간부라면 실사구시를 주장해야 합니다. 거짓과 가짜를 부리면 녹아나는 건 백성들 뿐이지요.” 1964년 조남기는 사회주의공작조를 거느리고 중국과 조선, 로씨야와 바로 린접한 훈춘 경신으로 내려갔다. 때는 바로 전국적으로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네가지가 똑똑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정치, 경제, 조직, 사상)’을 벌일 때였다. 조남기는 경신에서 한달 동안 조사를 하는 가운데서 중앙의 지시와 당지 실정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한달 후 ‘네가지가 똑똑하지 못한 문제’를 전부 해결했는데 조절한 간부가 5%도 되지 않았으며 그것도 나이가 많거나 건강이 안 좋은 사람들로서 투쟁대상은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저는 ‘4청운동’을 이렇게 끝마치고 조사를 통해 경신진 백성들에게는 먹는 문제가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경신진은 지세가 낮고 늪이 많아 여름에 비가 오면 벼가 물에 다 잠겨 죽어버려 농민들은 벼농사를 하지 못하고 돌피를 심어 식량을 겨우 해결했다. 경신진 백성들이 째지게 가난한 데 비해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조선에서는 벼농사를 지어 이밥을 먹었다.

조남기는 ‘4청운동’대신 농업수리건설을 틀어쥐기로 했다. 그는 농민들을 조직해 수거를 파고 물길을 뺐다. 우에서 내려온 검사조가 중앙에서 지시한 ‘운동’ 진척에 대해 질문하자 조남기는 반날은 ‘운동’하고 반날은 생산을 조직한다고 대답했다. “실은 ‘운동’은 반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이밥을 먹게 하기 위해 수리건설에만 정력을 몰두했지요. 그 당시 정치환경으로 말하면 로선착오를 범하는 일이였지요.”

오늘날, 훈춘시 경신진은 어미지향으로 변신했다. 조남기는 50년 전에 발생한 일을 엊그저께 일처럼 회억하면서 “생산이 발전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은 바로 백성들입니다. 모든 일은 실제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라고 실사구시를 재삼 강조했다.

“‘문화대혁명’에서도 저는 실사구시를 견지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일체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쳤는데 어디에 그렇게 많은 나쁜 간부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문화대혁명’ 초기에 연변은 나의 주장 대로 그래도 안정된 편이였습니다. 후에 특수한 배경을 갖고 있는 모원신이 연변에 나타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지요. 알다 싶이 저도 맞서싸웠지만 비판의 대상이 돼 연변에서 쫓겨났구요.”

조남기는 이렇게 말하며 “그러나 력사는 실사구시를 견지한 제가 정확했음을 증명해줬습니다. ‘문화대혁명’에서 연변을 떠날 때는 반란파들에게 쫓겨 떠났지만 후에 연변의 백성들은 저를 잊지 않고 다시 불러줬지요.” 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혁신

연변자치조례 및 림업관리 조례와 관련한 조남기의 발언고

“령도간부라면 반드시 개척과 혁신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조선전쟁에서의 20대 초반의 조남기의 표현은 뛰여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남기가 평생을 두고 자호감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1951년 여름, 홍학지 부사령원은 지원군총부에 있는 조남기를 지명해 후근부로 오도록 하고 전선을 위한 전반 물자운수 임무를 책임지게 하였다. 급별은 높지 않았지만 사명이 굉장히 중요해 우리 군의 승패와 직접 이어지는 과업이였다. “탄약과 무기, 먹고 입는 것이 보장돼야 전사들이 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근데 이전에 차도 제대로 타보지 못한, 전혀 이 방면의 경험이 없는 저 보고 차량운수를 책임지라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못한다고 주저했지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우리 군의 전략적 후근 운수 보장에 대한 체계가 아직 서지 않았고 다 저와 비슷한 처지라 결국에는 한다고 나섰지요.”

어떤 부대에서는 전사들의 하루 식량 표준이 1.5근이였는데 3냥도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었다. 7월 찌는듯한 무더위 여름인 데도 물자가 보장 안돼 겨울옷을 입고 싸웠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정경들이였다. 전선운수문제는 당중앙과 전선 총사령부의 골치거리로 나섰다.

“저는 내가 만약 지원군 후근 총사령이라면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 것인가 라는 각도에서 심입되는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일련의 개혁방안을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홍학지 부사령원은 저의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후에 세상에 알려진 것이 조선전쟁에서의 ‘강철운수선’입니다.”

조남기가 내놓은 일련의 개혁방안으로 지원군 후근보장은 처음에 30% 밖에 되지 못했지만 3개월도 안돼 60%로 올라갔고 8달 뒤에는 100%로 보장할 수 있게 돼 중국인민지원군이 승리를 쟁취하는 데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지원군 물자운수에서 과시한 저의 능력은 후근보장을 책임진 홍학지 부사령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조선전쟁에서 깊은 우정을 쌓았지요.”

홍학지 장군은 가렬처절한 조선전쟁터에서 조남기의 남달리 뛰여난 재능에 속으로 감복하였다. 그래서 74세가 되던 해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 자리를 떠날 림박에 홍학지는 후임자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머리 속에 조남기가 떠올랐다. “그렇지, 바로 이 사람이야!” 32년 후 홍학지 장군은 또다시 조남기를 신변으로 불렀다. 1985년 3월 조남기는 길림성군구 정치위원, 길림성당위 서기에서 북경으로 상경해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부장으로 파격 임명, 그리고 2년 뒤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총후근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해방군 총후근부장까지 오게 된 것은 항미원조전쟁에서 과시한 그의 출중한 능력과 절대 갈라놓을 수 없다.

 백성

“당의 간부는 언제 어디서나 백성을 마음속에 생각해야 합니다. ‘전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하자’는 말 대로 어떻게 하면 인민들이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간부가 돼야 합니다.”

1962년 초봄, 조남기는 장백산 제1촌으로 불리는 안도현 이도백하 남도촌으로 내려갔다. 이 촌은 무상기가 100일 밖에 안돼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째지게 가난한 마을이였다. 민병사업을 조사하러 내려갔지만 가난한 농민들을 그저 보고 돌아올 수 없었다. 조남기는 남도촌에서 작물농사 같은 것은 곤난하지만 산이 많고 소먹이로 싱싱한 풀자원이 매우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이 촌의 책임자를 동원해 소양식을 발전시키기로 했다. 집체화의 길을 대대적으로 나가던 그 시기 조남기는 외려 ‘호도거리’ 방식을 실시했다. 집체의 소를 각 농호별로 나눠주고 일이 없을 때 수소를 가진 농민들은 산에 가 장작나무를 해다가 시내에 가 팔아 수입을 올리도록 하고 암소를 가진 농민들은 송아지를 낳으면 개인소유로 하도록 했다. 몇년 후 남도촌의 소는 호당 3마리로 늘어났으며 걸칠게 없이 가난하던 농민들의 살림은 린근에서 잘사는 동네로 소문났다.

“백성들은 이밥을 먹고 잘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일개 백성으로 무슨 수가 있어 정책을 제정하고 개변하겠습니가? 바로 간부들이 나서서 해야 할 책임이지요.” 조남기는 간부는 말로가 아니라 진심을 담아 백성을 생각하는 간부가 돼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1983년부터 1985년 3월 길림성을 떠날 때 까지 조남기가 길림성 농업을 주관하는 당위서기로 있은 기간 길림성의 농업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길림성은 농업대성인 데도 불구하고 시내 백성들은 한달에 입쌀 3근 밖에 차례지지 못했습니다. 같은 동북에 위치한 흑룡강성과 료녕성은 우리보다 상황이 퍼그나 나았지요. 백성들의 쌀주머니를 담당한 제가 더구나 벼농사를 잘한다고 알려진 조선족으로서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누가 해결하겠어요.”

당시 길림성의 벼재배면적은 350만무로, 이 수준을 유지하면 된다고 할 때였다. 그러나 조남기는 몇달 동안의 조사를 거쳐 대담히 새로운 구상을 제출, 전 성의 벼재배면적을 기존의 350만무에서 10년 동안의 노력을 들여 700만무로 늘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길림성에서 세운 이 목표는 예정 대로 1990년대 중반에 실현됐습니다. 길림성에서 재배한 입쌀은 길림성 인민들이 먹고도 남아돌아 타성으로까지 진출하게 됐지요. 지금 길림성 입쌀은 전국에서도 알아봐주는 량질미로 소문놓고 있지 않습니까.”

1983년 길림성 량식생산량은 그 전해의 200억근이라는 력사상 가장 좋은 해에서 일약 295억근에 달해 48%나 증산했다. 농민들의 일인당 평균수입도 42%나 올라갔다. 1984년 길림성의 량식생산량은 계속하여 승승장구, 300억근을 초과한 324억근에 달해 길림성에서 세웠던 2000년에 가서 300억근에 도달시킨다는 목표를 16년 앞당겨 실현해 길림성 농업생산 력사에 신화를 창조했다.

 일

1967년 연변군분구 정위로 있을 때 심양군구와 당중앙에 보낸 전보문

간부는 군중을 이끌고 앞장서 일을 하라고 선출한 간부지 새빨간 거짓말만 뻔질나게 하면서 개인리익을 먼저 놓고 사리사욕을 챙기라고 선출한 간부가 아니다. “당과 국가와 인민을 위해 일하는 간부가 돼야 합니다.” 조남기는 자신의 성장과 관련해 다섯번째 문제로 넘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1967년 조남기가 연변군분구 정위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 해 1월 조남기는 연길, 훈춘 등 현, 시의 농촌에 내려가 새해 농사차비 정황을 알아봤다. ‘문화대혁명’ 초기라 촌에서부터 현에 이르기까지 파벌을 무어가지고 살기등등해 정치혁명을 한답시고 간부란 간부는 거의다 투쟁 맞고 농업생산준비는 관여하는 사람이 없이 아예 뒤전이였다.

그 전해의 저온랭해로 농민들의 식량은 물론 종자마저 제대로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였으며 농기구, 비료, 농약 등 생산물자와 생산자금도 모두 비상에 걸렸다. “일년지계는 봄에 있다고 농업생산은 공업품 생산과 달리 시기를 놓치면 그 해 전부 농사가 절단나게 되지요. 그럼 백성들은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두 손을 팔짱 끼고 모르는 것처럼 먼산만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조남기는 당시 이 시급한 상황을 연변군분구의 명의로 심양군구와 중앙에 전보문을 보냈다. 당시 ‘문화대혁명’ 불길이 바야흐로 전 중국에 활활 타오르는 시절에 그는 전보문 세번째 내용에 이렇게 썼다. “농촌의 ‘문화대혁’은 농한기를 리용하고 정면교육을 할 것을 특별히 건의한다. 농촌에서 반대파조직을 조직하지 않으며 시내의 반대파조직이 농촌에 내려와 위세하고 파벌을 무어 싸우는 것도 제지할 것을 특별히 건의한다. 농촌에서 ‘생산유일론’ 비판을 전개하지 않음으로써 생산에 영향주지 않도록 할 것을 특별히 건의한다.”

이 전보문은 심양군구를 통해 정확하게 주은래 총리께로 전해졌으며 그 해 전국의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지도성 문건이 출범하는 데 관건작용을 놀았다. “만약 그 때 ‘4인무리’한테 이 전보가 넘어갔더라면 저의 일생은 아마 다시 써야 했을 겁니다.” ‘문화대혁명’ 비상시기에 일개 지방 군구의 간부가 누가 감히 나서서 이런 보고를 당중앙에 보낼 엄두나 냈겠는가!

“‘문화대혁’에서 얻어맞고 장춘발전설비공장에 개조하러 내려가서도 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1970년초, 조남기는 개조대상으로 몰려 이 공장에 공인계급의 재교육을 받으러 갔다. 당시 이 공장은 심양군구의 령도를 받고 있었으며 발전설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했는데 합격률이 동북3성 동업종 가운데서 꼴찌였다. 조남기는 발전설비 부품 생산에 대한 구체적인 전문지식은 없었으나 왜서 불합격품이 많이 나오는지에 대해 여러모로 조사했다. 그리고 문제를 찾아냈다.

조남기는 공장에서 그가 발견한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결과 3개월 후에는 동북3성에서 꼴찌로부터 일약 제품합격률이 제일 높은 공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길림일보》에서는 당시 이 일을 1면에 대서특필해서 보도했지요.” 조남기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 43년 동안 보관하고 있던 1970년 5월 14일 《길림일보 》 복사본을 펼쳐 나에게 보였다.

 변함없는 인민공복의 본색

관직이 피라미트처럼 높은 데로 올라갈수록 개인의 리익을 위한 기회가 그만큼 더 많아지고 사심을 챙기기도 쉽다. 조남기는 깨끗한 정치를 위하여 아들이 길림성 성장조리, 나아가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희생시켰다. 부모의 마음은 다 마찬가지다. 본의 아니게 아들의 관운을 반대하고 나선 조남기 장군, 마음속 깊은 한곳에는 어쩔 수 없는 서글픔과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을 것이다.

“저에게는 자녀가 1남 3녀 있습니다. 막내딸이 전국정협에서 그저 일반 순시원으로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며느리는 7년 동안이나 집에 있다가 결국엔 자기절로 장사를 시작했지요. 만약 자녀들에게 간부로 출세하는 길을 선택하게 했더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기회가 훨씬 더 많고 또 쉬웠겠지요.”

조남기의 큰아들은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하에 아주 우수하게 성장했다. 조직부문에서는 국가대외무역부에서 부서 책임자로 근무하던 그의 발전가능성을 보아내고 지도간부로 일층 양성하려고 산동성 연태시에 부시장으로 파견했다. 부시장으로 있는 기간 조남기의 아들은 분담한 업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어느 하루, 당시 중앙 조직부 부장으로 있던 증경홍동지가 저의 집으로 방문 왔었지요. 아들의 일로 저의 의견을 청취하려고 말입니다.”

증경홍이 조남기에게 이렇게 회보했다. “수장동지의 아들에 관해 조직부문 동무들이 고찰한 결과 산동성에서 아주 훌륭하게 맡은 바 과업을 완수하고 있다고 보고를 들었습니다. 중앙 조직부에서는 이런 타산이 있습니다. 즉 일보로 아들이 산동성 연태시의 파견임무가 끝나면 길림성에 파견해 성장조리를 맡게 할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로 파견할 계획입니다. 연변에는 아드님과 같은 우수한 조선족간부가 수요됩니다.”

그러나 결국에 조남기는 아들이 길림성과 연변에 가는 것을 반대하고 말았다. “길림성과 연변인민들에게 저에 대한 깨끗한 추억을 그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나날들을 보냈었지요.” 조선족이 낳은 최고위급 간부 조남기는 이렇게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조남기 장군이 당조직에 보낸 한통의 편지

 
조남기장군이 총후근부를 떠나면서 당조직에 보낸 서한과 그가 사용했던 필

우리는 아래 조남기가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를 떠날 때 당지부에 바친 한통의 서면보고를 읽노라면 그가 어떤 품격의 소유자인지를 잘 알고도 남음이 있다.

“당지부앞: 중앙군위의 결정에 의해 저는 이제 곧 총후근부를 떠나 군사과학원으로 가게 됩니다. 아래 당조직에 두가지 일을 회보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회보할 것은 제가 총후근부에서 사업한 지난 몇년 동안 어떤 단위에서는 량식, 육류와 가금알, 과일 등 물품을 보내왔습니다. 이런 일과 관련해 저의 태도는 줄곧 명확했는바 그들의 관심에 감사를 표시한 동시에 완곡하게 사절했습니다. 무릇 제가 집에 있을 때 가져온 것은 보낼 수 있으면 견결히 되돌려보냈고 그럴 사정이 안되면 값을 매겨서 돈을 부쳐보냈습니다...그럼에도 부쳐보낸 어떤 돈은 주인을 찾지 못해 되돌아왔습니다. 저는 비서를 시켜 일일이 등록하게 했는데 지금까지 보관한 현금이 1,543원, 량표 1,088근, 그리고 사진기 1대입니다. 지금 이 돈과 물건을 전부 조직에 바치오니 현금은 특수당비로 당지부에 바칠 것을 건의하며 기타 물품은 당지부에서 처리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회보할 것은 제가 총후근부에서 사업할 때 군과 외부의 신문 간행물에 저의 일부 연설내용이 실렸었습니다. 그 원고료로 저에게 900여원이 차례졌습니다. 이 연설내용에는 비록 저의 심혈이 일부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필경은 사업의 수요였으며 동시에 동지들과 함께 연구하고 토론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고료는 제가 가져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지금 이 원고료도 함께 당조직에 바치오니 동지들이 토론해서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이상의 사실은 제가 렴결자률하는 면에서 아직도 거리가 있으며 솔선수범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 저는 서신으로 당조직에 자신의 부족점에 대해 검토하는 바입니다...

전시복무계획국당지부 당원 조남기 1992년 12월 20일”

한 사람이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는 여러가지 객관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요소가 따라간다. 천시, 지리, 인화가 따라야 한다. 망망한 력사의 대해에서 조남기는 온갖 시련과 풍파를 지혜롭게 이겨내면서 시종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을 갈고 닦았다. 그렇게 그는 200만 중국조선족의 최고위급 간부라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됐다. 조남기는 그야말로 중화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의 가장 자랑스런 아들이자 당과 혁명사업에 충직한 가장 우수한 민족간부임에 손색이 없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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