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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름떡
2014년11월12일 04시37분    조회:2560    추천:2    작성자: 리태근
시름떡


리태근
 
 
   나한테는 나그네답지 않게 떡시장을 쇼핑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저녁에 퇴근할 때면 누가 부르기라도 하는듯 꼭꼭 떡시장을 둘러보고도 모자라서 이른새벽 아침시장을 또다시 돌면서 꿈에도 잊지 못하던 새하얀 시루떡을 찾고 또 찾는다. 많은 떡 중에서도 유별나게 시루떡을 좋아하는 굳어진 습관은 장장 반세기를 전해오는 어머님의 손길이 이어지기때문이다.
 
어머님은 평생 남다른 몇가지 솜씨를 갖고있었는데 된장, 고추장을 잘 담그고 김치도 맛있게 담그지만 그보다도 시루떡을 특별히 잘 만들어서 동네에서 “떡방아집”으로 불리웠다.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먹던 “대식품” 세월에도 어머님은 떡쌀만은 꼭 감추어 두었다가 설날이나 아버지 생일날이 돌아오면 시루떡을 만들어 내놓군 하였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은 설날이 돌아오면 눈치를 흘끔흘끔 보다가도 슬그머니 우리 집으로 찾아와 무작정 떡을 내놓으라고 못살게 굴군했다.
 
어머님의 떡쌀은 온전한 입쌀이라고는 한알도 없는 싸래기였다. 초겨울 탈곡이 끝나기 바쁘게 칼바람 몰아치는 탈곡장에 헌 로동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벼쭉정이가 매달린 색낡은 채갑수건을 쓰고 나앉아서 온종일 북데기를 들추고 또 들춘다. 헌솜신은 깁다못해 더덕바위였는데 사람발인지 곰발인지 분간할수 없다. 구멍난 신바닥에는 옥수수잎을 두겹, 세겹이나 깔았건만 소똥으로 매질해 놓은 떵떵 얼어든 탈곡장은 어머님을 산송장으로 만들었다. 손때묻어 반들반들해진 키는 탈곡기 날에 맞아 떨어진 눈먼 벼씨알보다 모래알이 더 많았다. 삶아놓은 언감자알처럼 갈라터진 손끝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눈앞이 캄캄할때까지 탈곡장을 누비며 싸래기를 찾아 헤매던 어머님을 방불히 보는것 같다.
 
어머님은 그렇게 좋아하던 시루떡도 일생에 몇번 해먹어보지 못했다. 아니 쌀이 금싸래기같은 세월을 만나서 맘껏 장끼를 부릴수도 없었지만 형님에게 마지막으로 시루떡을 해먹인후부터 어쩐지 “시루떡사랑”이 식어서 다시는 즐거운 마음으로 떡을 만드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아직 세상이 뭔지 알지도 못하던 어느해 겨울의 이른 아침이였다. 누런 마분지를 바른 맨봉당에서 아버지 헌솜옷을 덮고 자던 나는 매캐한 연기냄새를 맡고 깨여났다. 온밤 어른들이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잠을 설친 나는 잠꼬대를 하면서 투정을 부리자 작은 형님이 네가 좋아하는 시루떡을 했다고 귀띔해서 벌떡 일어났다. 눈도 채 뜨지 않고 시루떡을 입에 넣고 냄냄거리며 맛있게 먹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님은 긴 한숨을 쉬면서 뜨끈뜨끈한 시루떡을 배보자기에 꽁꽁 싸는것이였다. 오늘도 형님들이 갈부업하러 가는게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게걸스레 시루떡만 축내는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게 무겁지 않은가?
 
나무하러 가거나 갈부업가는 날이면 형님들은 웃고 떠들며 강판에 넘어지던 이야기며 갈밭에서 찬 줴기밥을 녹여먹던 일들을 어머님앞에 자랑하며 웃고 떠들겠는데 이건 아니다. 며칠전부터 잘 보이지 않는 바느질로 한뜸한뜸 누벼만든 새하얀 버선과 뉘집 처녀가 떠주었는지 새하얀 목달개며 그리고 옛날 일본놈들이 쓰던 “하꾸물병”까지 정성들여 닦아서 내놓는 어머님은 웬일인지 자꾸만 눈굽을 찍는것이였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 찬바람 안고 동구밖 봉밀하강가로 따라나섰던 어머니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며 오열하는것이였다. 어머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오늘 형님이 군대를 간다는것을 알았다. 그것도 살아올지말지 누구도 알수 없는 항미원조 전쟁터를 간다는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아직 세상을 알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루떡만 축냈다.
 
어머님은 마지막으로 온기가 그대로 슴배여있는 시루떡보자기를 그대로 형님의 허리에 달아주며 배고플때 잊지 말고 먹으라고 그리고 꼭 승리하고 돌아와서 시루떡을 먹어야 한다고 열당부 하셨다… 이렇게 시루떡을 허리에 차고 푸름푸름 밝아오는 앞남산 고개길로 눈물뿌리며 떠나신 형님은 반세기가 넘도록 다시는 어머님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시루떡도 끝내 못먹고 전장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시고 늘 두손을 마주잡고 하늘 향해 뭐라고 하느님께 날마다 기도하셨다. 그리고 큰 형님의 생일날이면 잊지 않고 떡쌀을 꿔서라도 시루떡을 해서 빈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이런 날이면 온집 식구들은 누구나 시루떡을 먹지 않아서 나는 두고두고 얼궈가며 혼자 먹었다. 그래서 나는 시루떡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는지도 모른다.
 
그후 둘째형님이 큰 형님을 찾으러 간다고 또다시 조선으로 갈 때도 어머님은 똑같이 시루떡을 만들어서 허리에 달아 보내셨다. 그리고 내가 대학교를 갈때도 어머님은 시루떡을 큰 함지가 떡 벌어지게 해서 온 동네를 불렀으며 내가 방학이 되여 동창생들을 한구들 미여지게 달고 왔을때도 시루떡을 기껏 만들어서 동창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한평생 시루떡을 인심후하게 만들면서도 한번도 시루떡을 시름놓고 맛있게 드시는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형님을 군대에 보낸후부터는 어쩐지 시루떡과 인연을 억지로 끊기 시작하였다. 어쩌다 시루떡을 만들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떡을 부스레기조차 남기지 않고 온동네 아낙네들에게 나눠주고 혹시 뉘집에서 시루떡을 만들어내오면 선자리에서 나에게 맛을 보이고는 그대로 아래웃집에 내보내는것이 어머님답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렇게 좋아하던 시루떡을 왜 갑자기 못난 언감자떡처럼 “박대”하고 외면했는지? 돌아오지 못할 하늘길을 떠나면서도 끝내 한이 맺힌 사연을 알려주지 않아서 오늘까지 수수께끼로 남았다.
 
   시루떡만 보면 그리운 아들이 생각나서 떡이 목이메서 자시지 못했을가? 아니면 먹기도 좋고 끈끼도 만점인 시루떡이 부실부실 부서지는게 싫어서 외면했을가? 시루떡을 먹고간 두 아들이 이날 이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어머님의 눈을 헐게 만들어서 시루떡을 억지로 외면했을가? 이렇게 한평생 정성을 다하여 만들던 시루떡은 끝내 어머님의 가슴속에 행복한 웃음이 담긴 시루떡이 아니라 고달픈 한이 맺힌 “시름떡”으로 남았던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내 가슴에 새하얗게 살아있는 어머님의“시름떡”을 먹으려고 오늘도  떡시장을 찾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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