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산맥―김학철옹
김호웅
20세기를 마무리하고 21세기를 시작하는 2001년, 우리 민족문화의 두 거목 김학철과 정판룡은 20여일을 사이 두고 차례로 쓰러졌다. 이로써 우리 문화의 한 시대가 문을 닫았다. 이 글에서는 우리 민족문화의 두 거목중의 하나인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1916년 11월 4일, 김학철은 조선의 항구도시 원산에서 태여났다. 그의 집은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집안이 아니라 누룩을 빚어서 살아가는 집안》*이였다. 일곱살에 부친을 여윈 김학철은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겨내고 1930년 3월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35년 3월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김학철이 반일사상에 눈뜨기 시작한것은 보성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나는 서울 보성고 재학중에 리상화의 시에 접하게 된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부르짖음에 열광한 나머지 나는 그 빼앗긴 땅에서 살아야 하는게 새삼스레 절통했다. 그런데다가 또 입센의 “민중의 적”에서 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것은 혼자 따로 사는 사람”이라고 갈파하는것은 보고는 그만 환심장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김학철은 1932년 3월, 17세의 나이로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포부를 품고 륙로로 중국의 상해에 와서 김원봉(金元鳳)이 지도하는 반일 테러조직― 민족혁명당에 입당한다. 김학철은 상해의 황가화원(黃家花園)에서 두달 동안 훈련을 받은후 프랑스조계지(租界地)에 숨어살면서 민족혁명당의 기관지《앞
*강만길: 《민족혁명당의 태항산항일투쟁》, ( 《사회와 사상》 1989.2,p.98.)
길》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돈있는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테러활동에 참가한다. 1937년, 김학철은 민족혁명당의 지령에 의해 남경에 있는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 교장에 장개석)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하게 된다. 김학철은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는데 여기서 그는 맑스주의사상과 접하게 되며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1938년 8월 중앙륙군군관학교의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마친 김학철은 그해 10월 무한에 가서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 대장에 김원봉)에 참가한다. 김학철은 조선의용군에서 분대장의 직무를 맡았고 1940년 8월 29일 호철명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그 이듬해 5월 태항산에 들어간다. 그는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 직무를 맡고 일하면서 단막극《서광》(1938), 《승리》(1939),《등대》(1941) 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했고 또 작곡가 류신과 합작하여《조선의용군 추도가》(1941), 《고향길》(1941) 등 노래를 창작하기도 한다.
1941년 11월 10일 새벽, 태항산 지구의 호가장에서 홍사상(洪思翔) 휘하 일본군과의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김학철의 운명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그는 왼쪽다리에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된것이다. 김학철은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 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 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결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된다. 그 당시에는 이른바 조선인도 《일본국민》으로 취급하였으므로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였다. 말하자면 그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하였던것이다. 김학철은 나가사끼형무소에서 원폭(原爆) 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한 까닭에 1945년 2월 총상을 입은 왼쪽다리가 날로 썩어 부득불 절단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니 되였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김학철은 10월 6일 석방되여 10년만에 서울에 돌아온다.
서울에 돌아온 김학철은 1946년 10월까지 약 1년간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위원으로 일하면서 총을 붓으로 바꾸어 쥐고 《주간건설》, 《문학》, 《신문학》 등 잡지에 주로 조선의용군 전사들과 그들의 투쟁생활을 다룬 단편소설《담배국》(1946.7), 《이렇게 싸웠다》(1945.10), 《지네》(1945.12), 《남강도일》(1946.1), 《균렬》(1946.4), 《상흔》(1946.5), 《달걀》(1946.6), 《밤에 잡은 포로》(1946.6), 《야맹증》(1947) 등을 발표했고 그외 《문화정책과 중국공산당》, 《민족문화의 계급성》등 문학평론도 발표했다.
당시 미군정하에서 좌익운동이 탄압을 받게 되자 김학철은 북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우리 정보원이 입수한 블랙리스트에 제 이름이 있었던것》이다.*1946년 12월말 김학철은 조직에서 파견한 간호사와 누이동생의 부축을 받아 마포에서 배를 타고 옹진반도를 거쳐 해주에 들렸다가 구사일생으로 평양에 들어간다. 옹진반도에서 해병대에 붙잡혔지만《무한에서 두부장수하던
*김학철: 《나의 길》 ( 《동아일보》 1990.12.23)
사람인데 폭격에 한 다리가 없어졌다》**고 얼려넘기고 무사히 몸을 뺀것이다. 그때의 간호사가 바로 김학철의 부인 김혜원이다.
평양에 온 김학철은 《로동신문》의 기자로 일하다가 외금강휴양소 소장을 지내기도 하고 《민족군대》주필을 지내기도 하면서 단편소설《정치범 99》,《선거만세》,《적구》,《똘똘이》,《콤뮨의 아들》,《범람》등을 《로동신문》,《조선문학》,《화살》등 여러 신문, 잡지들에 발표하며 또 저명한 작곡가 정률성과 합작하여 대형교성곡 《동해어부》(1948), 《유격대전가》(1948)를 창작하고 로씨야 작가 고골리의《검찰관》을 조선문으로 번역해내기도 한다.
평양에서 김학철은 김사량(金史良, 1914∼1050.9)과 친교를 맺었고 이태준(李泰俊, 1904.1∼?)과도 자주 만났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평양을 떠나 북경으로 자리를 옮겨가는데 그 자신의 말을 빈다면 평양을 떠난데는 《장편소설 하나 넉넉히 엮을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한다. 사실 김학철은 한때《민족군대》주필로 발탁되기도 하였으나 이른바 연안파(延安派)인 까닭에 한직(閑職)으로 밀려났고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피신한것이다.
중국에 들어온 김학철은 북경에 가서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丁玲, 1907-1986)이 소장으로 있은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내게 된다. 이 시기 김학철은 단편소설《엄혹한 나날에》,《전우》,《고향》,《솔바람》,《군공메달》등을 《인민문학》,《광명일보》,《소설》,《중국청년보》와 같은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고 중편소설《범람》, 단편소설집《군공메달》(?文)을 펴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자 그해 12월 김학철은 연길시로 이주한다. 북경을 떠나 연변에 와서 자리잡은데도《역시 아직은 밝히기 어려운 사정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내막은 알길 없다. 김학철은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주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나 반년후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된다. 1953년 9월 단편소설집 《새집드는 날》을 출판하고 1954년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1,2,3부)를 발표하며 1956년 민족출판사에서 소설집 《고민》을 펴내고 1957년에는 중편소설 《번영》을 펴낸다. 이밖에도 1950년대초부터 로신의 소설《축복》, 《풍파》, 《아Q정전》, 정령의 장편소설《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와 주립파의 장편소설《산촌의 변혁》 등을 번역, 출판한다.
1957년부터 김학철은 무려 24년간이나 지속된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그의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와 단편소설 《괴상한 휴가》(1955)가 반당반사회주의 독초로 지목되여 비판을 받은 결과 《반동분자》*로 획분되여 창작권리를 빼앗기게 된것이다. 김학철은 공직과 로임을 박탈당하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생활보조비 50원을 타 쓰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몇년후 김학철은 연변작가협회 도서실에서 자료원으로 지내게 되였으나 여전히 《반동분자》로 몰려 괄시와 수모를 받았다. 공직도 없고 로임도 없고 글도 발표할 자격이 없는 밑바닥인생으로 굴러떨어진것이다. 하지만 김학철은 1964년
*강만길: 《민족혁명당의 태항산항일투쟁》(사회와사상,1989.2.p.104)
**동상서,p118
부터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비밀리에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
완성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의 가택
수색에 의해 장편소설《20세기 신화》의 원고가 발견이 되여 김학철은 기소, 강금되는 신세가 된다. 1975년 5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원에서는 김학철에게 10년 유기징역 판결을 언도한다.
1977년 12월, 김학철은 만기석방되나 그후 3년간은 계속 반혁명전과자 로 사회의 백안시를 당한다. 《그런데 62세에 만기출옥을 하고도 다시 3년동안을 반혁명전과자라는 극히 고귀한 신분으로 안해가 공장에 다니며 벌어다주는것을 얻어먹고 사는 신세가 될줄이야.》** 김학철은 분연히 일어나 최고인민법원에 상소한다. 결과 1980년 12월에야 무죄판결을 받는다.《20세기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리유로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것이다.
65세에 정치적생명과 작가적생명을 다시 찾은 김학철은 라스트 헤비― 말 그대로 최후의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1981년부터 지금까지 단편소설 20여편, 항일회상기《항전별곡》(1983), 《김학철단편소설집》(1985), 장편소설 《격정시대》(상, 하, 1986), 《김학철작품집》(1987), 산문집 《무명소졸》(1989), 산문집《누구와 더불어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1994), 《최후의 분대장》(1995), 산문집 《나의 길》(1996),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2001)을 펴냈다. 요즘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여러 권으로 된 《김학철문집》을 계속 출판하고있다.
김학철은 1983년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고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했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중국공산당 당적(黨籍)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을 받게 되였다. 1987년에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되였고 1994년에는 한국 KBS해외동포상을, 2001년에는 《장백산작가상》을 수상했다.
1989년 하반년에 43년만에 서울을 방문한 김학철은 한국언론에《외발의인(?人)》의 선풍을 일으켰으며 신문, 잡지, 방송 및 강연 등 형식으로 많은 담화와 글을 발표하였다. 귀국하는 걸음에《청구문화사》의 초청으로 일본의 동경에 들렸을 때,《나의 한쪽다리는 이제 일본의 흙으로 되었을 걸》하고 우스개를 피울 때 그 사무치는 감개와 흥분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수 있었으랴! 참으로 김학철처럼 기구한 일생을 살아온 작가는 드물것이다. 아무튼 영웅과 역적으로 점철된 그의 기구한 한평생과 그가 맛본 일구난언(一口?言)의 쓰라린 체험은 그의 문학의 강바닥을 이루었고 그의 문학을 체험의 문학
*그 당시만 하더라도 김학철은 조선공민이였기에 《우파분자》라 하지 않고 《반동분자》로 모호하게 칭하고 《우파분자》로 취급했다.
**김학철: 《나의 길》 (동아일보, 1990.1.17)
으로 규정한것이다.
아래에 김학철의 문학세계를 ① 1945∼1950년의 문학 ② 1950∼1956년의 문학 ③ 1957∼1978년의 문학 ④1981∼2001년의 문학 등 5개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다리를 총에 맞아 붙들려간 동무는 일본 어떤 형무소로 끌려갔다고 할뿐 그 생사와 진위를 알수 없었던바, 이번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척각의 작가(隻脚作家) 김학철군이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이는 김사량의 유명한 종군수기《노마만리》속에 나오는 한단락이다. 만약 이를 실종된 김학철, 조국의 품에 다시 안긴 김학철에 관한 첫 기록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또 귀중한 사진 한장이 있다. 1989년말, 43년만에 고국을 방문한 김학철이《문학사상》지에 공개한것이다. 일본감옥에서 풀려 나온 김학철을 환영하기 위한 모임에 참석했던《프로문인》들이 명동부근의 어느 다방앞에서 찍은것이다. 지하연, 박노갑, 안희남, 김남천의 얼굴이 보이는데 리태준, 리원조 등의 얼굴은 안타깝게도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그 한복판에 자랑찬 미소를 함뿍 머금고 버젓이 앉은 김학철, 채 자라지 않은 머리모양으로 보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람임을 알수 있지만 온몸에 환희와 긍지, 자신감과 용기가 넘치고있다. 우리는 그 얼굴을 통해 슬픔에 잠긴 누이동생에게《사람의 정의(定?)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짝쯤 없어도 문제없다》하고 답장을 준 그 당시 작가의 호기롭고 자신만만한 외침을 듣는듯싶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경모와 환대의 꽃보라속에서, 해방된 조국에 영웅으로 귀환한 김학철은 자기의 전투적인 경력, 체험을 갖고 문단에 나타난것이다.
김학철은 감옥에서 미리 작품을 써두었던것처럼 한꺼번에 8편의 단편소설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이렇게 싸웠다》(1945)로부터《야맹증》(1947)까지는 근근히 1년반 남짓한 시일이고 사실《야맹증》을 제외하고는 모두 1946년 6월까지의 8개월 사이에 발표된것들이라는 점과, 또《신문학》창간호(1946)의 뒤표지에 벌써 서울타임즈와 출판국의 광고가 실렸는데 한창 인쇄중에 있는 김학철의 단편집《조선의용군》에는 《균렬》,《담배국》,《남강도일》,《지네》,《씨》,《평원유격대》,《어간유정》,《상흔》등 8편이 수록되였다고 보도한 점, 이 두가지 사실로부터 추정할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김학철의 초기소설에서 보게 되는것은 가혹한 전투장면이나 선이 굵고 기복(起伏)이 험한 비극적사
*김사량: 《노마만리》 (《김사량선집》 조선 국립출판사, 1955년, p.141.)
건보다도 조선의용군생활의 에피소드와 락천성, 즉 성스러운 전쟁의 비장함
보다도 생활미가 넘치는 일화 및 사랑스러운 의용군전사들의 성격미인것이다. 례컨대 처음으로 활자화된 그의 처녀작《지네》는 많은 혈전을 겪고 많은 공을 세운 의용군전사가 지네만 보면 무서워 쪽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있다면, 단편 《담배국》은 어리석고 우둔하지만 령혼이 맑은 의용군전사 문정삼의 성격을 창조하고있는데 이 소설은 김학철의 작가적력량과 스찔을 약속해준 초기의 걸작이라 하겠다.
《전쟁할 때》라는 별명을 가진 문정삼이는 조선의용군 제×지대에서 소문난 느리배기이며 또 게으름뱅이였다. 그는 1일 16시간 수면제(睡眠制)의 제창자였다. 그는 워낙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미였는데 혹간 입을 열 때도 그 속도는 흡사 태엽이 거의 다 풀린 축음기와도 같았다. 지대에서 치중을 책임진 문정삼은 가끔 실수를 하여 대원들의 웃음거리로 되거나 미움을 받는다. 한번은 밤중에 남새인줄 알고 뽑아와서 국을 끓였는데 알고 보니 담배잎이였다. 하여 문정삼은 치중대에서 취사반으로 쫓겨났다가 다시 련락병으로 옮겨앉는다. 그런데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는 문정삼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온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적의 치중대를 수류탄으로 급습할수 있는 기회가 온것이다. 전리품은 담배, 술, 통조림 등을 가득 실은 4두마차였다. 행방불명이 됐던 문정삼이 본대에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이 나는데 결말은 온통 웃음으로 넘친다.
해방직후의 문단은 조선의용군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하여 한쪽 다리를 잃고 일본에서 돌아온 가장 기대되는 작가― 김학철에게서 피로 얼룩진 력사적인 사건, 투사형의 인물, 비장한 결말을 기대했을수 있었겠으나 작가는 도리여 일상적인 에피소드, 어리석으면서도 순진한 허물투성이의 인물들을 거느리고 문단에 등단한것이다. 이미 언급한바 있지만 김학철은 서울에 귀환하자마자 미리 써두었던것처럼 한꺼번에 8편의 소설을 펼쳐 보인다. 말하자면 김학철의 의용군생활체험은 기성문단의 그 어떤 간섭과 조정도, 또 작가가 받아들인 그 어떤 정치미학적인 리념의 려과, 조절도 없이 그대로 분출된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 생활적이고 유모아적인 에피소드에 의한 성격의 창조라는 김학철문학의 특성이 싹트게 된것이다.
(3)
평양, 특히 북경, 연길에서의 50년대 초엽의 생활은 김학철의 문학에 어떠한 색채를 부여하고있는가? 작가는 자기들의 피와 목숨으로 바꾼 신생(新生)의 사회주의국가의 탄생을 목청껏 노래하고있으며 사회주의국가의 정치적리념과 당면의 방침, 시책의 문학적형상화를 작가의 사명으로 간주하고있다. 이 시기 그의 작가적정열은 주로 항일투쟁 및 조선전쟁의 형상화와 사회주의제도하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이바지되고있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와 단편소설《군공메달》,《송도》를 들수 있고 후자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단편소설《새집드는 날》,《뿌리박은 터》를 들수 있을것이다.
《군공메달》은 조선전쟁때의 어느 한차례 전투에서 서로 협력하여 적의 땅크를 까부신 중국인민지원군 전사 호문평과 조선인민군 전사 양운봉이 서로 군공메달 ―공로를 양보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국제주의정신을 노래한 작품이라면《송도》는 중조 두 민족의 단결을 노래한 작품이다. 각기 부대를 거느리고 남으로 진격하던 조선인민군 련대장 보경과 중국인민지원군 련대장 서생평은 송도라는 곳에 이른다. 송도는 보경이 나서 자란 고향으로 채마농사를 짓던 화교의 외아들 생평과 함께 봄이면 송화 털고 가을이면 송이버섯 따던 정든 땅이다. 둘은 그곳에 있는 소나무의 거북이 잔등같은 껍질을 깎아내고 거기다 《조중(朝中)》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결의형제를 맺었다. 바로 그 뜻깊은 로송나무를 찾아간 보경은 자기보다 한발 먼저 와서 송진에 뒤덮인 나무줄기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문질러보고 하는 생평을 발견한다. 물론 둘은 서로 얼싸안고 상봉의 기쁨에 잠긴다. 《사상가란 혁명가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두 나라 백성을 반목시킬 목적에서 조중 두 나라 인민의 가슴속에 각각 묻어둔 증오의 씨는 싹을 트지 못하고 말았다. 도리여 그것을 밑거름으로 하고 단결의 싹이 트고 련합의 아지가 뻗었다.》 ―단편《송도》에 나오는 작가의 지문인데 정치설교의 냄새가 너무 짙은, 따분한 구절이다. 이 소설의 사건은 성격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성격들간의 갈등과 충돌의 결과로 벌어지는것이 아니라 그 어떤 선행한 정치적리념을 해석, 설명하기 위한 도식으로 되고있다. 김학철은 저도 모르게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수사자와 같은 사나이로부터 소심한 정치교원으로 변신하고있으며 그의 문학의 배포유한 유모아와 펄떡이는 생명체로서의 성격들은 속 얕은 흥분, 따분한 설교와 호소, 그 어떤 기존 리념에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변하고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새 생활의 찬가에 초점을 맞춘것, 평범한 인간들의 정신미를 발굴》한 소설로 평가되고있는《새집드는 날》, 《뿌리박은 터》등에서도 드러나고있다.
단편 《새집드는 날》은 해방후 나라의 덕택으로 셈평이 좋아진 젊은 세대의 농민 동준이가 외양간을 살림집에 붙여지은 재래의 농가집 구조와는 달리 위생을 보장하기 위하여 외양간을 살림집밖에 따로 내다 지었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이른바 해방을 받은 농민들의 날따라 꽃피는 생활을 반영하려고 하였다면 단편《뿌리박은 터》는 서한체 형식으로 고향땅에 뿌리박은《나》의 고난에 찬 력사, 오늘의 행복, 래일에 찾아올 더 큰 행복을 찬미하고있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은 포화의 시련을 겪은 전사이며 고향의 미래에 대한 황홀한 꿈을 안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인간인것만은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서는 구체적인 개성은 찾기 어렵고 단지 발가벗고 드러난 사상만을 볼수 있을뿐이다. 이는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잘 모르기는 하겠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란 각자가 다 자기의 뿌리박은 터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 터의 무한한 번영을 위하여 노력, 분투하면 자연히 이루어지는게 아닐는지.》
보다싶이 이 시기 김학철의 소설들은 생활미가 적고 그 주인공들은 그 어떤 사상의 메가폰으로 등장하고있다. 50년대초기 김학철문학의 이러한 변형, 좌절의 원인은 그가 자기의 강점― 풍부한 생활체험을 버리고 급급히 새로운 제재령역에 들어섰다는 점과 그리고 해방된 흥분과 희열, 신형의 제도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찬미에 휩싸인 나머지 자기의 특유한 작가적성격과 기질을 망각하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김학철은 로신의 말마따나《남보다 자신을 더 예리하게 해부》하는 작가였다. 그는 점차 자기의 작품을 반성하기 시작하며 자기가 걸어온 창작의 길에 회의(?疑)를 품게 된다. 이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거론, 절찬되고 있는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가 근년에 한국에서 재판(再版)되자 김학철 자신이 놀라움과 유감을 표시하면서 재판할 가치가 없는 작품이라고 스스로 혹평한 사실을 미루어서도 알수 있지만 벌써 1955년에 발표한 문제작《괴상한 휴가》에서 그러한 회희와 반성을 하고있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설가 차순기는 이 시기 김학철의 작가적 갈등과 고민을 반영한 자화상적인 형상이라고 하겠다.
차순기는 자기 작품이 성공하여 찬양이 자자할 때도 도취되지 않으며 여지없이 비난을 받을 때에도 고민이나 우울따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작품의 진가가 밝혀져 사회의 절찬을 받을 때에도 《내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작품이 두들겨 맞을 때가 도리여 내게는 즐거운 휴가로 된단 말입니다.》하고 말한다. 비난과 찬양이 엇갈리는 속에서 실망도 흥분도 하지 않고 자기 작품의 진실과 허위를 랭정하게 가늠하고 참된 작가의 길을 찾고있는 차순기의 형상이야말로 이 시기 심각한 고민과 탐구를 하고있는 김학철 자신의 모습이 아닐수 없다. 아무튼 1950년대 전반기의 문학에 대한 참회와 반성은 한평생 작가를 괴롭히고있으니 1981년에 발표된 단편《고뇌의 표준》에 나오는 주인공, 한 건축가의 참회 역시 작가 자신의 뼈저린 체험을 예술적으로 탈바꿈한것이라고 하겠다.
50년대 중반을 계기로 김학철은 심각한 작가적 고민과 반성을 거쳐 점차 새로운 눈으로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게 된다. 그는 단편 《맞지 않은 기쁨》, 《새암》, 《괴상한 휴가》등 소설에서 사회의 부정행위나 변태적심리, 그리고 빈번한 정치적풍파로 말미암은 인간심리의 기형화를 고발, 풍자하고있으며 그 어떤 고립과 비난속에서도 진리와 원칙을 고수하는 참된 인간의 정신적미를 발굴하고있다. 이러한 김학철의 작가적성장과정은 그의 첫 단편소설집의 제목은《새집드는 날》(1953)이고 두번째 단편소설집의 제목은《고민》이라는 사실로부터도 알수 있지만 단편《고민》의 주인공 ―《나》의 형상창조에서 보다 명료하게 볼수 있다.
초급중학교를 졸업하고 전기로동자가 된 《나》는 몇해 지나 6급 기능공으로 되여 기공검사원의 직무를 맡는다. 헌데 휴즈를 넣고 송전시키고 합격증을 떼여주기는 좋으나《고침일》로 판정을 내려 이미 가설해 놓은 전선을 다시 뜯어고치게 하기란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하기에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은 미움의 살을 맞기가 일수요, 남모르는 고충을 겪기 마련이다. 특히 현창수라는 조장(??)은 틈만 있으면《나》에게 조소와 비방의 화살을 쏜다. 지어 자기 맘속에 있는 처녀 양정숙을 사랑하지 않는가 해서《나》를 질투까지 한다. 그러다가《나》는 끝내 현창수의 속임수에 넘어가 합격되지 않은 공사에 《합격증》을 떼주게 된다. 하여《나》는 커다란 심리적타격을 받게된다. 《합격증을 내준 뒤에 발생한 사고니까 두말없이 그 책임은 검사원이 짊어져야 했습니다, 나는 억울하고 분해서 속으로 울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형별은 역시 고립이라는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한 동아리가 돼가지고 계획적으로 먹이는 골탕을 무슨수로 안먹는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인공《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경각성을 높여 면밀하게 검사하며 부정부패와 투쟁한다. 이처럼 소설은 《나》와 현창수와의 갈등을 통하여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책임감을 안고 자기 맡은바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해나가는 새시대 로동자의 형상을 생동하게 부각하였다. 주인공《나》의 성격적특질은 인간적인 성실성과 정의감 및 사회를 위한 헌신성인데 이는 작가의 정신구조와 일맥상통하고있으며 또 그러한 미학적리상을 그후의 작품들에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있다.
작가의 고민과 반성, 새롭게 눈뜬 사회비판정신, 사회정치풍조에 영합할 줄 모르는 작가의 성실성은 문제작《괴상한 휴가》를 내놓게 하였고 그 소설과 장편《해란강아 말하라》로 말미암아 반우파투쟁의 선풍에 휘말려 들어가 창작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비밀리에 창작을 계속하였으니 1961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장편소설《20세기 신화》는 그에게 24년이라는 기나긴 수난기를 가져다주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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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과 문화전제주의가 세상을 좌지우지할 때 정직한 작가들은 설사 작품의 발표권리를 잃었다 하더라도 가슴속에 활화산을 품고 침묵으로 저항하기도 하고 비밀리에 글쓰기를 계속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를 두고 복단대학교의 진사화(?思和)는 그것을 《잠재적인 습작(?在?作)》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잠재적인 글쓰기 현상은 그 어떤 시대에나 다 있을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모든것이 결핍하고 단일했던 50∼70년대의 당대문학사에서 그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제를 량적으로만 가늠하지 않을 경우 잠재적인 글쓰기는 문학사의 절반 강산(半?江山)을 차지한다. 잠재적인 글쓰기가 있었기에 당대문학사는 비로소 풍요로움과 완벽성을 기할수 있게 되였다. 문학이 외부세계의 압력을 받을 때 문학은 그 내부의 분렬과 대립을 통하여 불사조와 같은 예술생명력을 살려내며 지성인의 정신적욕구를 분출한다.》*
윤동주, 심련수(1918∼1945), 김학철의 경우와 같이 잠재적인 글쓰기는 조선족문학사에서도 볼수 있다, 특히 김학철의 장편《20세기 신화》는 거의 공백기나 다름없었던 1960―1970년대 조선족문학의 《잠재적인 습작》으로,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된다.
《20세기의 신화》는 김학철이 1957년 중국을 휩쓴 《반우파투쟁》의 와중에서 발표의 자유를 잃고 전업작가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후, 대약진운동을 통해 드러난 우상숭배와 인민생활의 정치, 경제적 위기로 요약되는 사회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집필한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전편 《강제수용소》와 후편 《수용소 이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편은 임일평이라는 작가의 시점으로 로 락인 찍힌 사람들이 강제로동수용소에서 얼마나 무서운 고생을 겪고있는가를 고발하고있다. 여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리유로 우파로 지목되여 수용소에 들어온 작가, 음악가, 정치가, 교원, 로동자 등이 살인적인 환경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사회의 전횡에 맞서 어떻게 승리해나가는가를 보여주고있다. 그리고 후편은 수용소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온 그들의 눈에 비친 1960년대 초반, 중반, 즉 인민공사운동과 대약진운동, 그리고 중국과 쏘련 분쟁의 소용돌이가 치던 시기의 흔들리는 중국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최근 한국의 평론가 김명인은 《20세기의 신화》의 미학적가치를 좀 다른 측면에서 평가해 주목된다. 김명인의 글을 보자.
《전편 “강제수용소”의 경우 수용소의 참상을 리얼하게 드러낸것을 넘어, 그 참경속에서도 결코 희망과 낙관을 잃지 않는 인간들의 위대함을 절실한 필치로 그려내고있다. 또한 비장과 해학, 풍자의 절묘한 균형으로 읽는 이들을 비극적 감상주의나 패배주의, 근거없는 주관적낙관주의와 기계적력사관으로 이끌지 않으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미학적승리를 거두고있다.
사실상 김학철의 분신이라고 할수 있는 조선의용군 출신 수용자 심조광의 아들의 일화, 즉 학교에서 소풍을 간 아이들이 “인민의 적”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놀이에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씌어진 쪽지를 찾아내고는 그 자리에 엎어져 끝없이 울었다는 일화* 같은것은 이른바 반우파투쟁의 광기가 어떻게 인민의 령혼을 파괴하였는가를 비극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그 비극적정서속에 몰입하지 않고 수용소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극(笑?)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듯이 여기저기서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이를 때론 해학으로 때론 풍자로 조형하여 비참이 사랑으로, 그것이 다시 그 비참을 만든것들에 대한 정당하고도 웅숭깊은 거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끔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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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思和:《我們的抽?一 當代文學史的》(《中國大學學術講演錄》,廣西師范大學出版社,2001年, p.99~100.)
자유의 몸이 된것은 1980년 12월, 김학철의 나이 65세 되던 때였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촉박하였다. 그는 출입문에《면회를 사절함》이라는 패쪽을 걸고 마치 수술실에 들어선 의사마냥 밤낮없이 창작에 달라 붙었으니 그후 20년간 장편《격정시대》를 비롯해 전기문학, 중단편소설, 수필, 잡문 등을 근 2백여편 내놓았다. 24년간의 박해와 억압속에서 축적된 작가의 회로애락과 작가정신이 화산처럼 폭발한것이다. 이 시기 김학철의 작가적정열은 주로 제반 사회현실문제의 탐구와 력사에 의해 외면당해 온 조선의용군의 투쟁생활을 예술적으로 복원(復元)하는 예술창조과정에 쏟아지고있다. 사회현실문제의 탐구에 못을 박은 작품들은 다시 찾은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해학적인 필치로 흥미진진하게 엮고있고 강권과 폭정에 맞서 자기의 참된 삶을 고수하는 인간들의 고매한 넋을 찬미하고있으며 봉건적인 애정 륜리 도덕, 문벌관념, 사회의 부정부패 및 정치적동란의 사회력사적원인 등을 신랄하게 고발, 비판하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속에 관통된것은 작가의 유모아적인 사고방식과 필치이다. 말하자면 상술한 작품의 바다우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작가의 찬란한 웃음이 넘실거리고있으니 그의 초기창작에서 움트고 약속된 작가의 유모아적인 스찔은 1950년대 초엽의 곡절과 변형, 1950년대 중반의 반성과 자각, 1960년대 중반의 《잠재적 습작》, 그리고 그 이후의 오랜 《침묵》을 거쳐 보다 높은 차원에서 꽃핀것이다.
24년만에 다시 붓을 잡은 작가는 일기(一?)에 《쌍둥이 자매》(1982), 《네번째 총각》(1982), 《신랑감》(1982) 등 3편의 애정소설을 펼쳐보인다. 10년간의 무서운 옥고를 치른 죄수작가가 청춘남녀들의 아기자기한 련애와 사랑을 다룬다는것도 상상밖이요, 일흔고개를 바라보는 로인이 청춘남녀들의 속삭임을 소설화한다는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애정소설은 구시월 연변의 사과배처럼 달콤하며 그 장면마다에서는 백두산폭포와 같이 경쾌한 웃음이 쏟아지고있으니 그것은 즐거운 청춘남녀들의 희열을 빌어서 다시금 작가적 청춘을 되찾으려는 작가의 열망, 또는 《두번째 해방》을 받은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한것인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김학철은 따분한 정치설교로 단순화되였던 문단에, 정치적암투로 긴장되였던 사회에 장쾌한 웃음의 폭풍을 몰고 왔으며 또 그것으로써 자신의 좌절과 고통을 초극하였던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성격창조는 소설의 첫째가는 과제이다. 이 시기 그의 소설에는 김지연, 네번째 총각, 지차손, 지비운, 양대붕, 현덕순 등 사랑스러운 인간형들이 등장하고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성은 이러저러한 흠집을 갖고있으나 마음바탕은 솔직하고 성실하며 의롭다는 점이다. 김학철은 성실성을 인간의 최대의 미덕으로 인정하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 주인공들의 성격, 기질은 초기작품의 희극적주인공 문정삼과 혈맥을 잇고있으며 50년대 주인공― 전기시공검사원《나》의 형상을 거쳐 새롭게 부활된것이라고 하겠다. 그중 작가의 눈물겨운 옥중체험에 기초하여 창조한 죄수의사 현덕순의 형상은
*김명인: 《어느 혁명적 낙관주의자의 초상》 (《창작과 비평》 2002년 봄호,p.245.)
작가의 미학적리상을 구현한 작가정신의 화신이라고 할수 있다.
내과의사 현덕순은 동료 너덧이 모인 술좌석에서 취중진정발(醉中眞談發)로 류소기가 쓴《공산당원의 수양을 론함》은 잘못이 없잖은가 하고 한마디 한것이 어느 고자쟁이의 밀고로 반혁명현행범이 되여 징역 10년 판결을 받고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다. 죄수의사의 책임을 맡은 현덕순은 조춘생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무덤에 묻힌 이웃집 처녀를 사간한 죄로 역시 10년형을 받고 들어온 조춘생은 기실은 정신병환자였다. 혼자 제멋에 겨워 노래하고 춤추며 땅바닥에 떨어진 부나비를 땅콩 주어먹듯 하는 조춘생은 매일《상식에 벗어난 우습강스러운 짓으로 부단히 사람들을 웃기였다.》 하여 조춘생은 감옥안에 없지 못할 명물로 웃음가마니로 되였다. 하지만 현덕순만은 정신병환자에게 징역을 살게 하는것은 국가의 수치이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일신의 안위를 고려하여 모르는체 하는것은 범죄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여 현덕순은 행정의사를 찾아가 조춘생을 진단해 보자고 주장하지만 공연히 핀잔만 듣고 만다. 그후에도 감옥의 중대장과 지도원을 찾아가서 정신병자환를 복역시키는것은 사회주의의 인도주의에 대한 배리라고 하면서 조춘생을 석방시키자고 주장하지만 지도원은 《주제넘은 수작! 그래 이렇게 반혁명독기를 뿜을 작정인가?…》하고 위협한다. 마침내 현덕순이 제 입으로 벌어서 정좌를 하고 반성하게 되자 평소에 앙심을 품었던 죄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조춘생까지 와서《여보 의사, 당신두 도적질을 하우? 손버릇이 사납군 그래》하고 헤식게 웃는다. 《4인무리》가 거꾸러짐에 따라 석방된 현덕순은 다시 조춘생의 행방을 물어가지고 정신병원까지 과자를 사들고 찾아간다. 조춘생은 게걸스레 과자를 먹으면서《여보 의사, 다음번에 올 때두 또 좀 훔쳐다 주우》하고 씨벌인다.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자기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걱정을 하며 말 그대로 《제 입으로 벌어서》욕을 먹는 현덕순은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의 천성은 그릇된 행위를 보고는 참지 못하며 자기 일신(一身)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고 진리를 견지한다. 실로 흑백이 전도된 지옥같은 감옥안에서 성실과 진실의 초불을 지켜 홀로 마음을 썩이는 현덕순,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현덕순의 넋이야말로 고상한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덕순의 형상을 통하여《우파모자》를 쓰고 18층 지옥에 떨어져서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면서 참된 인간의 길을 지켜온 김학철의 모습을 볼수 있다. 김학철은 바로 현덕순과 같은 정직하고 대바른 인간들이야말로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민족의 동량이요, 시대의 선구자라고 확신한것이다.
해학과 풍자는 모두 웃음을 동반한다. 하지만 해학속에는 그 대상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깃들어있다면 풍자속에는 그 대상에 대한 저주가 깃들어있는것이다. 김학철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적인 흠집, 모순되는 행위, 아이러니와 역설적인 구조를 통해 해학적인 웃음을 유발하고있다면 그의 만년의 작품들은 대상의 부동한 성격에 따라 해학과 풍자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있다. 바꾸어 말하면 신랄한 풍자에 의한 그의 사회비판정신은 한결 원숙해지고있다. 례컨대 단편《네번째 총각》에서는 부모의 권세와 이름을 빌어 행세하는 고급간부 자제들의 비렬한 령혼과 위선적인 본질을 가차없이 조롱, 풍자하고있다. 그리고 단편《인간세상》(1981)에서는 20년전《반우파투쟁》때 발표한《사람잡이 글》까지 성적으로 내놓고 부교수로 승진하는 곽봉원의 비루한 령혼을 타매하고있으며 중편실화소설《밀고제도》에서는 작가의 직접적인 옥중체험에 근거하여 조석으로 덮쳐드는 정치운동으로 하여 기형화된 사회인간들의 령혼을 보여주면서 간계와 모략, 날조와 밀고, 상호간의 불신과 암투로 뒤범벅이 된 동란년대의 사회정치구조을 신랄하게 고발, 풍자하고있다. 작품에서는《돌배골 감옥의 상층구조가 철근콩크리트 기둥으로 받쳐져있는게 아니라 수천수만 기수부지의 밀고장을 가려서 만든 기둥우에 덩그러니 올라앉아 있는것 같다》고 풍자하고있는데 실로 돌배골 감옥이야말로 인간적인 사랑과 신뢰를 상실하고 아귀다툼을 했던 그 당시 중국사회의 축도(??)라고 하겠다.
김학철은 한국 리화여자대학교에서 한 문학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감옥에 있을 때 죄수복은 여죄수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만들어져 온 죄수복의 주머니를 뒤져보면 별의별 쪽지들이 다 나왔어요. 열렬한 련애편지부터 “아들아 잘 있느냐”식의 장난기 어린것까지 정말 다양했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에게 웃음이 정말 중요하다는것은 깨달았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웃음을 만들어내고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작품을 쓸 때도 언제나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24년간에 달하는 비인간적인 대우, 특히 몸서리치는 10년간의 옥살이를 통하여 자기의 기구한 운명과 무서운 실존을 초극하는 방식은 웃음이라는것을 깨달았고 또 웃음을 무기로 허황한 인간세상에서 살며 싸우는 방식을 배운것이다. 아무튼 유모아는 총명과 지혜의 상징으로서 바다와 같은 흉금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수 있다. 벨린스끼의 말을 빈다면 유모아는 오직 심오하고 발달된 정신을 가진 인간이나 민족만이 구사할수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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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로서의 김학철의 초기경력과 《8·15》이전까지의 그의 사상의식발전은 그가 해방공간에 펼쳐보인《지네》,《담배국》, 《어간유정》등 단편소설들을 통하여 단편적으로 볼수 있고 1980년대에 발표한 전기문학《항전별곡》, 단편소설《두름길》,《원쑤와 벗》을 통해서도 엿볼수 있다. 하지만 장편소설《격정시대》(1986)는 그의 청소년시절의 경력과 그의 사상의식 발전과정을 예술적으로 재현한 작품으로서 그 주인공 서선장의 형상에는 작가의 자서전적요소가 다분히 깃들어있으며 그 《정신발전의 부동한 단계》가 반영되여 있다.
《격정시대》를 펼치면 1928년 초봄의 어느날 원산앞 바다가에 그림을 그리러 나온 보통학교 4학년학생 서선장과 만나게 된다. 고양이수염을 깍기도 하고 벌집을 쑤시기도 하는《무사분주하고 장난기 심한》선장, 그러나 총명이 뛰어나 작문만은 잘 짓는다. 그 당시 날로 혹심해지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그에 대한 조선인민들의 반일운동의 물결은 나어린 선장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에 눈뜨게 한다.
선장이 서울에 사는 변호사의 부인― 숙자아주머니네집에 양아들로 들어가서 공부하게 된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였다. 선장은 서울에서 친일파인 강교장을 밀어내는 반일학생운동에 참가하며 또 광주의 학생운동소식에 흥분하기도 한다. 특히 원산의 부두로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했을 때 일본선원들까지 배고동을 울려 성원하던 일에서와 체포령이 내린 유명한 독립운동가 리재유를 자기의 저택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된 일본인교수 스기우라의 사건에서 선장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이 더욱 로골화됨과 더불어 간도의 《만보산사건》, 《9·18》사변이 일어나며 마을의 애국청년 김영하 등이 체포, 투옥된다. 괴로움에 부대끼던 선장이는 중국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서 조선젊은이들이 공부하고있다는 소식이며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조선의 젊은이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가와대장을 포함한 일본군장령 10여명을 살상했다는 소식에 접한다. 피끓는 선장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오른다. 《남들은 다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해? 수치스러운 일이다. 도저히 량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폭탄도, 권총도 다 손에 넣을수 없으니까… 중국으로 건너가자, 림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로 찾아가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가자!》이처럼 소설은 선장이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된 과정을 실감있게 보여주면서 작품의 배경을 30년대 중엽의 상해로 옮기고있다.
상해에 이른 선장은 리춘근, 김혜숙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소개로 남경에 본부를 두고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상해지하조직에 들어가 테러활동에 종사한다. 그는 처음으로 시가(市價) 1천만원어치의 헤로인이 밀수입되는것을 눈감아주고 뢰물을 받아서 벼락부자가 된 상해 해관의 조선인관리 신영호를 혼내주는《사로니까 행동》에 참가한다. 그는 당황해하고 빈구석이 많았으나 용감하고 지혜로운 조직성원들과 사귀는가운데 어느덧《표범의 넋을 가진 사슴》으로, 용감한 테러분자로 자라난다. 또 조직안에서 중국공산당의 지하당원 성재수를 만나고 그의 영향밑에서《변증법적유물론》, 《유물사관》 등 혁명서적과 《국가와 혁명》, 《프랑스 내전》 등 맑스주의서적을 탐독함으로써 점차 맑스주의에 눈뜬다. 말하자면 개인테러는 극소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용감한 애국자들만이 해낼수 있는 신성한 사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단순한 민족주의자 선장은 점차 민중을 발동하는것을 주요한 투쟁수단으로 삼는 공산당을 우러러보게 된다.
남경의 중국륙군군관학교에서의 생활은 선장의 성격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는 여기서 김두붕, 한빈 등 이름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며 진일보 맑스주의서적을 탐독하게 된다. 1936년 학교를 졸업한 선장은 국민당군대 소위로 임명되여 《8·13》상해보위전에도 참가하지만 국민당의 무저항정책과 염통 곪기는줄은 모르고 그 식이 장식으로 벼슬 오를 궁리, 천량 모을 궁리만을 하는 국민당군대의 썩은 늪같이 침체된 생활에 혐오를 느낀다.
무한의 함락전야, 중국공산당과 주은래동지의 창의밑에 1938년 10월 10일, 국민당정부의 비준을 맞고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관할구역에서 정식으로 성립을 선포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관할구역에서 활동하게 되였는데 맨 먼저 동방의 마드리드로 불리우고있는 무한을 보위하는 전투에 뛰여든다. 선장은 전우들과 함께 항전표어를 쓰기도 하고 극을 공연하기도 한다. 이러한 항일투쟁의 물결속에서 선장은 마침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런데 선장은 일본어에 능숙한 까닭에 국민당군대 군단사령부의 통역― 수양아들 노릇을 하게 된다. 국민당의 소극항전, 적극반공의 정책과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선장의 가슴에 분노의 씨앗을 묻어준다. 그는 목숨을 걸고 정의의 전쟁에 뛰여들어서까지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신세가 한스러웠다. 이는 또한 국민당관할구역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공통한 심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무렵 조선의용대 대원들속에서는 해방구로 넘어가야 한다, 팔로군과 합류하는게 유일한 출로이다라는 사상조류가 대두한다. 이런 정세하에서 팔로군총부는 조선의용대를 락양을 거쳐 황하를 넘어 태항산혁명근거지에 들어오도록 배치한것이다.
《격정시대》는 1941년 12월의 태항산전투까지 기록하고있으며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주인공 서선장― 김학철이 조선의용군에 있어서의 체험의 끝이 태항산 전투, 즉 1941년말의 호가장전투까지였기때문이다.
《격정시대》를 두고 김학철 자신은 모종 원인으로 조성된 력사의 공백을 메울수 있는 문헌적가치를 가지고있다고 자신한바 있고 김윤식은 조선의용군에 관한 제반 연구기록들과 대조하면서 조선의용군의 《초창기 모습을 생생이 증언한것이 김학철 기록의 최대강점이다》라고 하면서 특히 《조선의용군의 일단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리유로 중국공산당의 집결지 태항산까지 넘어가게 되였는가를 증언하는 기록은 김학철의것이 유일한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유일하다함이란 체험적이라는 뜻이다》 라고 평가한바 있다.*
《격정시대》의 예술성에 관해서 김명인은 이 작품의 열린 서사형식은 혁명적락관주의의 주조(主潮)를 아주 잘 뒤받침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앞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김학철의 소설들은 다성적이고 개방적인 서사구조를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 그것은 우리 전통의 민담과 같은 서사구조에 가깝다. 작자는 마치 옛날의 이야기군처럼 자신의 삶속에서 보고 듣고 직접 겪은 수많은 이야기거리들을 한보따리 싸안고서 큰 줄거리가 흘러가는 중간중간에 틈나는대로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 이야기거리, 즉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또 발전하면서 소설 전체를 넉
*김윤식: 《항일빨지산문학의 기원- 김학철론》 (《실천문학》 1988년 겨울호, p.412.)
**김명인: 《어느 혁명적 난관주의자의 초상》 (《창작과 비평》 2002년 봄호, p.249.)
넉하게 열어놓는데 기여한다. 또 이러한 이야기에 걸맞는 해학과 골계의 민중적정서가 이 소설의 도처에서 지천으로 배어나오고있으며, 그 정서를 가능하게 하는 민
족적풍속과 생활에 관한 묘사가 전편을 관류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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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은 1985년 잡문《한담설화》8의 발표를 계기로 본격적인 산문창작에 들어서고있는데 지금까지 수백편의 산문작품을 내놓고있다.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촉박함과 변화무쌍한 현실은 작가로 하여금 소설보다 쾌속반응을 보일수 있는 산문작품의 창작에 전념하게 한듯싶고 그의 파란만장의 인생과 풍부한 생활체험은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해주고있는듯싶다.
김학철은 《불같이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은 눈귀가 찢어지게 미워하지도 못합니다》리고 말한바 있다. 그는 극한적인 상황속에서도 정의적인 위업의 불패성을 믿고 끗끗하게 살아왔다. 그는 정직한 인간에게는 불같은 사랑을 안겨주었고 비리와 부정, 권세와 폭압에는 추호의 굴종과 아첨도 없이 서리발치는 증오와 저주을 퍼부었다. 김학철은 체면치레나 세속적인것을 싫어했다. 그는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격이 서있고 가장 평민적이면서도 높은 인간적향기를 풍기는 그러한 인격자였다. 아마도 수필《불합격 남편》은 그 인격미의 일면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인것 같다. 김학철은 가끔 친구들의 부인들로부터 《불합격 남편》이라는 말을 듣는다. 《불합격 남편》이라고 롱질하는데는 그가 정치풍파에 부대껴온 까닭에, 한쪽 다리를 잃은 까닭에 부인에게 무척 고생을 시켰다는 리유도 있겠지만 평소에 안해를 너무 무뚝뚝하게 대한다는 리유도 있었다. 이에 김학철은 여러 가지 사랑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나는 사내대장부라는게 녀자들앞에서 체통값을 못하고 너절하게 노는 것을 아주 경멸한다. 그러기에 불합격 남편소리를 들을지언정 시시껄렁한 짓은 아니한다. 진정한 남성미란 수사자와 같은 기백 또는 위엄과 갈라놓을수없다.》
지금도 연길시 시민들은《10년 동란》의 마당에서 무지막지한 반란파들과 맞서서 송엽장을 내던지고 앉아버티던 김학철의 쇠쪽같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사회의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한 그의 저주의 감정과 비판정신은 정의의 위업에 대한 헌신성과 정비례되는것이니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량면처럼 김학철의 인격을 구축하고있다. 그는《부작용》,《간판왕》,《이름 가지기》와 같은 잡문에서 인습적이고 메마른 삶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해학적여유가 있는 윤택한 삶을 호소하고있다. 《인민극장, 인민공원, 인민병원, 인민방송국, 인민출판사, 인민비누… 맨 인민투성이다. 인민이 붙잖으면 인민적이 못되는가? 꼭 붙여야만 인민적이 되는가?》 천편일률적이고 타성이 짙은 사유방식에 대한 혐오이며 부정이다. 작가는 길가의 수수한 간판에도 기계적이고 극좌적인 사유방식을 발견하고 꼬집는가 하면 또《쪼로로기》와 같은 잡문에서는 도시의 포장도로건설에서의 무계획성과 그 페단을 들고나온다. 그 무계획성― 고루한 소생산자적건설의식으로 말미암아 자금, 인력의 랑비는 물론이요, 행인들에게 주는 불편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잡문은 그러한 무계획성을 수술에 무책임한 의사로 말미암아 자꾸만 배를 가르고 재수술을 받아야 했던 한 흑인병사가 참다못해 아예 배가죽에 쪼로로기를 달아달라고 애걸했다는 이야기에 비유하고있는데 전편에 걸쳐 해학과 유모아가 흘러넘치고있다. 그리고 《한담설화》, 《천양지차》, 《청첩공포증》, 《인육병풍》, 《날조의 자유》와 같은 잡문에서는 봉건적인 문벌관념, 특권계층들의 부정부패와 소인배들의 날조와 무함(?陷)을 여지없이 고발, 비판하고있다.
《그 나무에 그 열매》요, 《글은 바로 그 인간》이다. 우리는 김학철의 잡문들을 통하여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는 고상한 인물, 영웅적인물들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인류사회의 진보를 저해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신랄하게 비웃고 매섭게 채찍질하는것을 그 사명으로 알고》있는 김학철의 작가적 신념과 인격을 보게 된다.
김학철의 정치, 미학적 관점들은 《동남북풍》, 《문학도끼리》, 《작가수업》,《아름다운 우리 말》, 《형상성과 유모아》, 《한 녀류작가》등 잡문, 수필들에서 집중적으로 볼수 있다.
김학철은 경건한 맑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를 자기의 유일한 창작방법으로 내세우고있다. 김학철은 사회주의제도의 건립을 위하여 자기의 한평생을 바쳤고 또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부정은 자기 평생에 대한 부정과 환멸로 직결되는만큼 숙명적으로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제도를 옹호하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자기의 피로써 바꿔온 사회에서 극심한 상처를 입었고 또 사회의 비정과 비리를 《눈이 찢어지게》 미워하고 비판하면서도 공산주의는 인류의 최고 리상이라고 굳게 확신하고있으며 맑스주의를 장악한 사람만이 사회현상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판단, 가장 심오한 분석을 할수 있다고 단언하고있다.
김학철의 문학수업에 있어서의 정신적기둥은 중국쪽으로는 로신이고 조선쪽으로는 홍명희이다. 상해시절부터 로신을 숭배했고 로신의 많은 작품을 번역한 김학철은 로신에게서 심오한 철리, 분명한 애증의 감정, 날카로운 기지와 풍자수법을 배우고있다. 또한 책상머리에 사전류(?典?)의 책들과 함께 늘 《림꺽정》을 놓고있는 김학철은 홍명희로부터 우리 언어의 풍부함과 아름다움을 배우고있으며 소설적인 기량을 배우고있다. 하기에 김학철은 《조선작가들중에서 예술기량과 문장수단이 가장 뛰여난분이라면 홍명희선생을 나는 첫손가락에 꼽고싶다》, 《림꺽정》에는 남북조선 어느 사전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멋진 어휘들이 거의 무진장으로 들어있어서 우리 말의 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이다》라고 거듭 절찬을 보내고있다.
김학철은 소설의 중심은 인물이며 형상성과 유모아는 소설의 생명이라고 보고있다. 그는《작가수업》이라는 수필에서《장비는 장비고 조조는 조조다. 의관을 바꿔서 장비를 정승의 자리에 올려앉혀보라. 웃음거리밖에 더 될게 있는가. 조조를 장비의 자리로 옮겨놓아도 역시 마찬가지다. 매개 사람이 다 자기의 개성, 특질, 특징을 갖고있다. 개념적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인형, 악인형, 당일군형, 선진분자형… 이런 판에 박은 “형”으로 산 인물을 대체한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간부과, 인사과의 앙케트이다. 작가협회계통이 아니라 조직부, 인사국 계통이다》라고 하면서《인물이 없는 사건은 유령의 잠꼬대》라고 하였다. 또한 김학철은 《나는 따분한 설교는 딱 질색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파금의 소설은 격정으로 차있으나 우스개의 부족이 옥의 티이고 똘스또이의《전쟁과 평화》는 세계명작이지만 공제회(共??)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목은 참기 어려우며 빅또르 유고의《레 미제라블》 역시 명작이지만 빠리의 하수도를 지루하게 묘사한 대목은 참기 어렵다고 하면서 고골리의《따라스 불리바》, 숄로호브의《고요한 돈》에서의 적절한 숨돌리기수법을 찬양하고있다. 따라서 김학철은 소설은 약이 아닌만큼 억지로 먹일수는 없다고 하면서《웃음속에 철리가 담긴 소설은 읽지 말라 해도 읽는다》고 하였다.
김학철은 또 《아름다운 우리 말》― 조선어의 형상성과 표현력을 확신하면서 작가의 언어수양을 강조하고있다. 그는 우리 말에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말들이《강변의 조약돌과 같이 많고 하늘의 별과 같이 많다》고 하면서《문학의 기본적인 바탕은 언어이므로 이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이에 대한 수양을 쌓는것을 게을리한다면 그것은 베실로 수를 놓겠다는것과 마찬가지일것이다》라고 비유하고있다. 우리 민족에 고유한 속담 하나하나에서 팔진미(八珍味)의 하나인 웅장(熊掌)과 같은 맛을 느끼기도 하고 길가에 나붙은 간판 하나, 아낙네들이 주고받는 말 한마디도 무심히 보고 듣지 않는 김학철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말씨에 꽤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는 수필《아름다운 우리 말》에서《이미 써놓은 아름다운 말을 애써 깎거나 고쳐서 밉게 만들》고있는 일부 편집자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고있다. 그리고 한때 편집자들이 자기가 쓴 글은 한글자라도 제 마음대로 고치는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만약 고칠 경우에는 어김없이 전화로 문의(??)를 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연변문단에서 김학철의 에피소드로 전해지고있다. 아무튼 자기 모국어에 대한 사랑, 언어구사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탐구로 하여 그의 작품을 읽으면 마치《곰의 발바닥― 웅장》처럼 그 뒤맛이 그윽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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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필자는 김학철의 작품에 반영된 그의 경력과 체험, 그의 창작의 길, 그의 정치 미학적 관점을 통하여 김학철과 그의 문학의 총체상을 그려보려고 하였다.
김학철의 일생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거의 다 밤소나기 퍼붓는 령마루에서 래일 솟을 태양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파란만장의 눈물겨운 일생이며 극한적인 상황속에서도 정의적인 위업의 불패성을 믿고 설음과 고통, 험악한 인간의 운명을 이겨낸 일생이며 참된 인간들의 회로애락을 문학세계에 옮겨놓은 일생이였다.
작품의 무게는 언제나 그것을 쓴 사람이 겪는 고통의 심도와 정비례하는 법이다. 정직하고 솔직한 성격, 심각한 반성정신, 시류(?流)에 편승하지 않는 그의 독자적이고 끈질긴 탐구정신, 그 어떤 권세와 폭정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의 비리와 부정을 타매해온 그의 예리한 비판정신, 풍부한 자기체험에 기초한 그의 문학의 높은 진실성과 개방되고 철리적이고 유모아적인 그의 사고방식 등은 김학철이란 작가의 인생과 그의 문학의 본질을 구성하고있다. 하기에 김학철은 일제시대에서도, 미군정의 치하에서도, 그리고 《평양시절》과 중국의 졸속(拙速) 사회주의시대에도 늘 밑창 모를 괴한(怪?)으로 인정되였던것이다. 하지만 참된 삶의 가치관에 바탕을 둔 김학철의 정신과 그의 문학은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흐름에 있어서의 하나의 빛나는 리정표로 되며 우리 문학에 솟아오른 하나의 거대한 산맥으로 된다.
2002년 6월 15일
김호웅: 평론가, 문학박사,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부장, 교수.
참고문헌:
김호웅: 《조선의용군항일투쟁의 예술적기념비》(《아리랑), 1989년 제36기)
김호웅: 《김학철론》(《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년 6월) 김호웅:《중국조선족작가―김학철》(일본 와세다대학사회과학연구소 편:《사회과학연토) 제107기, 1991년.)
김호웅: 《 김학철》(한국 《창조문학) 1992년 봄호, 통권 제6호)
김호웅: 《중국 조선족문단의 괴한― 김학철옹》(《장백산)1993.4)
김호웅: 《우리민족의 영웅, 우리문학의 산맥― 김학철옹》(《천지) 1997.2)
김호웅: 《우리문단의 어른― 김학철선생》(《장백산) 1997.4)
김호웅: 《불굴의 투혼― 김학철옹》(《장백산) 1998.1)
김호웅: 《저명한 작가 김학철》(한문판 《천지) 2001.2)
김호웅: 《중국 조선족문단의 괴한― 외발의인 김학철》(한국 《동방문학) 2001. 2)
2002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