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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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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도편전람) 호가장전투 및 김학철항전기념전 댓글:  조회:122  추천:0  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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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영원한 김학철 (조룡남) 댓글:  조회:946  추천:0  2016-04-22
영원한 김학철   조룡남         당신을 보냅니다. ㅡ선생님의 골회함을 두만강에 띄우며     두만강에 와서, 눈물 젖은 두만강에 와서 당신을 보냅니다 당신의 유언대로 저문 강에 조용히 노을이 지는데 가족과 그 열두사람이 이렇게 조촐하게 당신을 보냅니다.   당신을 보냅니다 원산 앞바다로 당신을 보냅니다. 살아서는 돌아가지 않겠다던 그 고향입니다 한다리 끊어 바친 그 고국입니다 그래서 죽어 혼이 되여 돌아갑니다 외다리귀신으로 뚝뚝 뛰여 돌아갑니다   당신을 보냅니다 투사의 모습으로 당신을 보냅니다 의용군군칙대로 머리도 깎았습니다 색바랜 중산장이지만 목단추까지 정히 채웠습니다 당신이 지으신 그 추도가의 연주속에서 다 못가고 쓰러진 최후의 분대장을 보냅니다   당신을 보냅니다 고향이, 고국이 몰라볼가봐 우편박스 골회함에는 주소도 똑바로 써서 붙였고 홍성걸이란 본명도 밝혀 적었습니다 편안히, 편안히 가시옵소서!   당신을 보냅니다 격정시대를 지나, 긴긴 땅굴을 넘어 한 많은 두만강 천리 물길 ㅡ 출렁이는 물결에 띄워서 보냅니다 열두 사람 눈물에 실어서 보냅니다 떳떳이, 떳떳이 가시옵소서!   2001. 9. 27 두만강가                                                     김학철?나의 종교 ㅡ선생님의 유채를 화장하며     현대종교란 신에로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신에로의 접근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온갖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자신을 찾고 자기완성의 경지에 이르려는 노력의 표현이라 하겠다. 바로 여기에 신격과 인격의 통일이 있다.            ㅡ 저자   내가 손을 잡아본 모든 사람가운데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였던 그이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삶으로 가장 신에 가까워 나의 경건한 신앙이고 종교였던 그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당신의 외다리 래력처럼 떳떳한 최후의 분대장 ㅡ   가장 인간다운 사람만이 가장 투사다운 사람만이 가장 신에 가까운 사람이란 진리를 깨우친   김학철 ㅡ 나의 현대종교!   2001. 9. 27 경도릉원 빈소         선생님의 지팽이 ?선생님 두고 가신 지팽이를 만지며     우리 시대의 가장 오만한 하나의 머리를 떠받쳤던 지팽이   우리 겨레의 가장 꿋꿋한 하나의 배짱을 떠받쳤던 지팽이   그래서 불구의 외다리 김학철도 불멸의 삼족새(三足?)로 만들었던 지팽이   선생님은 지팽이를 두고 가셨다 2백만이 짚고 자신만만 걸어가라고   하늘이 무너져도 기둥 삼고 대소하며 우뚝 일어서라고   2001. 9. 27 선생님 저택           조룡남: 시인,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편집.  
155    김학철 령전에 (최룡관) 댓글:  조회:643  추천:0  2016-04-22
김학철 령전에        최룡관           급자기   하늘에서    급    자    기 나의 혜성 떨 어 지 다 아 조용히 조 용 히           원점에 오현히   산 그이는 산이였다 사 시절 푸른 정기를 뿜어내는 산이였다 검 은 구름은 산을 덮고 번개로 정수리를 치고 우박은 허리를 갈 기고 소나기는 정갱이에서 울부짖었 다 소나기가 지나가자 맑은 하늘아래 산의 웅좌는 생채기 한오리도없이 드틴 자리도 없이 원점에 올방자를 틀고 온건히 오연히 앉아있었다!   산 그이는 산이였다 지 각이 파도쳐도 닻 을 내린 배처럼 영원히 침몰될수 없는 그런 산 세월 의 한자리를 증언해 우뚝 엎딘 그 런 산이였다 산은 갔다 하루아침에 터 자리엔 애기잔디밭 눈시린 이슬의 꿈터 파 아란 아침공기가 안개처럼 부서진다 부서지며 쨍ㅡ 소리나는 씨앗을 마음밭에 한알씩 떨구어준다             한알 풀꽃 밥이라도   외 다리 외길로 금빛자국 찍으며 채찍소리에 피가 울 때 가지 않고 스스로 가다   락엽처럼 한점 미련도 없이 털부숭이(맑스)네 저택으로   대돌밑에 구수히 썩어 한 알 풀꽃밥이라도 되고지고                                            2001년 9월       최룡관: 시인, 연변일보 기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154    돌의 생명 (리성비) 댓글:  조회:508  추천:0  2016-04-22
돌의 생명 -김학철선생 타계 한돐에 즈음하여   리성비       캄캄한 하늘아래 모난 돌로 태여나 수없는 비정의 정을 맞으며 온몸으로 울음 운 돌   돌은 어느 날 붉은 울음 크게 울며 금이 갔다.   금빛해살 비추는 돌의 속살 금이 간 그사이에 어느 고운 산새 한마리 아름다운 노래소리와 함께 떨어뜨린 솔씨 하나 파아랗게 눈을 뜨다   몸에 금이 간 모난 돌멩이의 멍든 숨결   이제 한그루 소나무가 해마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푸른 생명체의 설레임으로 멍든 돌의 울음 대신 울어주리라     리성비: 연변문련 《예술세계》지 편집, 연변작가협회 시분과위원회 주임.    
153    김학철선생님께 드리는 시 (리상각) 댓글:  조회:548  추천:0  2016-04-22
김학철선생님께 드리는 시   리상각        새세기 벽두에 우리앞에는 85세 고령의 투사가 서있다 가렬처절한 항전의 나날 다리 하나를 잃은 용사 그 남은 하나의 무쇠다리로 우리의 하늘을 떠이고 섰다   파란만장한 한생의 반은 자유를 빼앗긴 철창살이 몸서리치는 그 철창속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사람 해빛없는 긴 땅굴속에서도 신념의 홰불을 높이 든 사람 그이는 20세기 전기적인물이다   멸적의 총창을 들었던 손에 비수같은 필을 바꾸어 들고 《20세기 신화》를 파헤친 거작은 암흑을 불사르는 번개다 《최후의 분대장》, 《격정시대》 전투적일생을 다룬 장편은 우리 시대의 대서사시   불의와 부패를 통격하는 잡문들은 구절구절이 불을 뿜는다 정의와 진리를 지켜 싸워온 그이, 겨레문학의 선두주자! 백발의 투사는 오늘도 이름 그대로 달아오른 쇠덩이다   자신이 쌓아올린 문학의 탑처럼 하늘을 거연히 떠인 김학철-문단의 거장 쇠소리나는 쟁쟁한 이름이여 당신에게 길이 영광이 있으라       리상각 시인인《연변문학》전임주필
152    령혼의 별들로 (강효삼) 댓글:  조회:516  추천:0  2016-04-22
령혼의 별들로 김학철정판룡두거인의 타계를추모하여 강효삼         누구든꼭한번씩은가야할길이지만어쩐지너무 이르게만 생각키는구려인생의막바지령마루에오른선배님들이지만가시는것이서럽소 장알박힌농부의 손에서평생떠나지않던연장처럼당신들손때묻은붓을머리맡에놓아두고놓영원으로눈을감아야할 때무슨생각들을하셨습니까 나같은문인이야길가에난작은풀잎같은 존재이지만당신들은껑충치솟아오른 문단의산맥들산 인생이철들어서부터榕구중고초가슴으로맛보며한분은투사로한분은학자로그토록진리 위해그처럼래일 위해로심초 사겨레위해하얀백지우에령혼의피를 쏟았지요 당신들이제 약속이나 한듯앞서거니뒤서거니떠나고보니아?가뜩이나참사람이 모자란우리문단의한귀퉁이가헐렁비는듯싶구려 피빛으로타던저녁노을이 서둘러사라진저산너머 고요히흐르는세월의강물우에떠가는흰옷의그림자의 -아니요臼새별이어둠속에더강렬한빛을내듯어둠과비리를질타해목청높던당신들 령혼은이제저 하늘-두별로 빛나 오래또 오래 빛날것이요항상진실을감추지않는당신들또랑또랑한음성퓌별을볼적마다일깨우며타이를것이요?세상이험악해질수록더더욱겨레답게사람답게들살아들-가라고-     강효삼 시인인연변작가협회리사′흑룡강성상지문화잠주임
151    풍악송 - 외다리로서다-김학철선생님께드림 (한국) 황송문 댓글:  조회:562  추천:0  2016-04-22
풍악송 - 외다리로서다-김학철선생님께드림 황송문        불의에항거하는눈초리는서리발보다도차겁고겨레살리려는애국심은용광로보다도뜨겁다 일제의잔혹한감옥안에서도감외다리로꿋꿋이 섰던모습은 백두산취송보다도푸르고의총비문보다도비장했다 오오오그 지조와그기개죽음의문턱을넘나들면서 모진풍상을견디여오셨네 진시황의위무로도굽힐수없고양귀비의영달로도달랠수없는얼어붙은빙벽과 타오르는불길시들줄모르는불사조였네 그얼음과그불길난류와한류는생명을이끄나니님의불타는혼릿어이아니 꽃피랴?오오오바위를뚫어푸른빛을내는솔뿌리보다도질긴외다리로서서 하늘을이고 사는푸른정신우에푸노을도양귀비꿏잎을흩뿌려J거룩한분노의피빛으로날리네 황송문 한국시인시소설가 선문대학교.인문대학교수淪
150    원로작가 김학철선생과 《20세기의 신화》(정판룡) 댓글:  조회:665  추천:0  2016-04-22
원로작가 김학철선생과 《20세기의 신화》   정판룡   (1)   1997년 이른 봄인것 같다. 나는 무슨 일로 한국에 나갔다가 서울 종로서점에서 생각밖에 갓 출판된 김학철선생의 《20세기의 신화》를 발견했다. 출판사와 출판기일을 보니 출판은 서울에 있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하고 출판시간은 1996년 12월로 되여있었다. 김학철선생이 《20세기의 신화》로 하여 수많은 옥고와 고생을 하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책은 처음으로 보는것이니 두말없이 한책 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3월 11일에 종로서점에서 샀다는것을 기록해두었다. 곧 읽어보려고 했지만 서울에서는 시간이 없었고 집에 돌아온 뒤에는 내가 곧 병원에 들어가 수술을 하는 바람에 미처 읽을 사이가 없었다. 요지음 시간이 생겨 이 소설을 한번 자세히 읽었는데 내용인즉 전날 연길에 있던 임일평이라는 젊은이가 1957년 반우파투쟁때 우파분자로 되여 처음에는 기관에서 비판투쟁을 받다가 후에는 공산주의농장이라는 강제로동수용소에 가서 로동개조를 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모자를 벗은 우파분자(摘帽右派)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것을 주로 쓰고있었다. 1957년에 전개된 반우파투쟁과 민족정풍은 주로 문예계를 중심한 인테리와 대학이나 당정기관에서 전개하여 이런저런 《분자》로 애매하게 붙잡혀나온 사람은 대부분이 임일평처럼 옳은 말, 속에 있는 말을 감히 한두마디 한 사회의 중견인물들이였다. 이런 사람들을 우에서는 50년말부터 공산주의농장이라는 강제로동수용소에다 모아놓고 로동개조를 시킨것 같다. 그러다가 60년대 중엽에 중앙에서 새로운 정책이 내려오면서 일부 《분자》들의 정치모자를 벗겨주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모자를 벗은 분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주고 신임하지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 임일평이도 《모자를 벗은 분자》가 된 뒤에도 원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신문사 접수실에서 접수원 일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부터 중국에는 《3년자연재해》라고 하여 종래로 보지 못한 전국성적인 대기근이 일어났다. 확실한 통계가 나오지 않아 기근의 엄중정도를 알수 없으나 우리 대학에서도 한때는 가둑나무잎, 콩대, 강낭대를 삶아 대식품을 만들었으며 푸대죽만 한두해 먹었으니 소위 《분자》들이 강제로동을 하는 강제수용소가 그 난통에 어떠했으리라는것은 가히 짐작할수 있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의 전국성적인 대기근은 《3년자연재해》로 인해 일어났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것이 이미 밝혀졌다. 1957년부터 시작된 과격한 정치운동과 대약진, 인민공사화 등 좌적인 운동은 공산풍, 평균풍 등을 초래하게 한것이다. 거기다가 1960년부터 공개화된 중쏘분기는 날이 갈수록 첨예해져 마지막에는 우쑤리강의 진보도(珍?島)에서 무장충돌까지 발생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어제날의 형제국가는 우리의 적으로 되였으며 나처럼 국가의 파견을 받고 쏘련류학을 한 사람들까지 의심을 받게 되였다. 《20세기의 신화》에는 이런 내용들도 적지 않게 취급되고있다. 나는 바로 60년도 5월에 류학갔다 돌아왔다. 이때 학교에 돌아왔으니 이 시기가 아주 인상적이다. 돌아와보니 나의 스승 김창걸선생님은 58년에 내부민족주의분자 모자를 쓰고 임일평처럼 학부의 자료실에서 접수원노릇을 하고있었으며 나의 동창친구들도 여럿 우파분자, 민족주의분자로 되여 학교에서 로동개조를 하고있었다. 로시인 리욱선생은 57년도 대명대방(大鳴大放)때 북경에 연수 가고 학교에 없었기에 면했다고 하며 또 학교에는 《학생우파》라고 하여 학생속에서 잡혀나온 《우파분자》들도 여럿 있었다. 글을 가르칠만한 교원들이 모두 적으로 되여 잡혀가고 없으니 학교는 폭풍이 지난 들판처럼 쓸쓸하고 처량했다. 1960년 가을부터는 전국성적인 대기근이 오면서 우리는 살기가 더 힘들었다. 김학철선생의 《20세기의 신화》에 묘사된 먹기를 위한 각종 사건들이 대학에서도 자주 일어났다. 1961년부터는 전국성적인 대기근을 대처하기 위한 각종 조치들이 우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일부 우파분자, 민족주의분자, 우경분자들에게 씌운 모자를 벗겨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모자를 벗은 우파분자, 민족주의분자라는 꼬리표를 그냥 달고 다니는것이였다. 로작가이신 김창걸선생은 운동때 민족주의분자로 확정은 되였는데 부교수이기에 성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하여 내부민족주의분자로 되고있었는데 비준이 없는 분자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모자를 벗은 민족주의분자의 꼬리표를 달고 그냥 자료실의 접수원으로 계셨다.  이처럼 《20세기의 신화》는 나로 보면 근 6년간 쏘련에 류학갔다가 돌아와 문화대혁명의 대동란이 일어날 때까지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때였기에 퍽 인상적이며 실감적이다. 우리 조선족문학으로 볼 때 토지개혁, 해방전쟁, 항미원조, 그리고 50년대의 호조합작, 인민공사시기를 반영한 작품들은 많고도 많다. 그러나 《20세기의 신화》처럼 50년대중엽으로부터 무고하게 이런저런 《분자》의 정치모자를 쓰고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며 생활을 해야만 했던 우리 사회의 일부 우수한 인테리들의 생활과 《3년자연재해》로 하여 생겼다는 전국성적인 대기근을 폭넓게 반영한 작품은 없다. 형제민족의 문학에는 《강제로동수용소》거나 60년대의 대기근을 반영하는 작품들 (이를테면 왕몽의 소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김학철선생이 쓴 이 작품이 처음인것이다.   (2)   《20세기의 신화》는 전, 후편 도합 1350매의 규모이니 김학철선생의 장편가운데서는 중간에나 속할것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년만 인 1965년 3월에 탈고 했다고 하니 1964년 년초에 쓰기 시작한것 같다. 당시 김학철선생은 몇해 강제로동수용소에서 로동개조를 했지만 잠시 모자를 벗은 분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창작의 권리는 여전히 없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이때 《가중되는 정치적압박과 극단적인 궁핍》은 그로 하여금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는것이다. 격분된 심정으로 자기가 직접 체험하고 보고 느낀것을 무슨 형식으로나마 쓸 생각을 한것이다. 격분된 심정으로 쓰게 되니 자연 개인숭배에 대한 말을 많이 하게 되고 그분에 대한 불경의 내용이 소설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때는 또 바로 문화혁명이 일어날 때라 그 누가 그이에 대한 불경의 말 한마디만 해도 현행반혁명이 되던 때이니 김학철선생이 조용히 집에서 쓴 이 소설이 무사할수 없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얼마 안되여 반란파들은 발표도 되지 않은 소설원고를 몰수해갔으며 예심으로만 7년 4개월, 정식공판으로 판결받은 감옥생활이 10년, 도합 17년 4개월의 령어생활을 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김학철선생님의 말씀대로 이것도 력사적기록을 돌파했다. 나는 한동안 세계문학을 전공했으며 세계문학사도 여러 책 쓴 사람이기에 동서고금 문학사에서 소설로 하여 큰 고생을 한 사람을 더러 알고는 있으나 김학철선생처럼 근근히 초고를 써놓은 미발표원고로 하여 근 20년 옥고를 치른 사람은 없는것 같다. 1977년 12월 만기출옥을 한 뒤에도 김학철선생은 옹근 3년을 완전실업자 대렬에 끼여 살다가 1980년에 최고법원에다 직소를 해서야 아직 발표되지 않은 미발표소설이라는데서 일이 락착이 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거리 《20세기의 신화》는 무죄판결이 공포된 뒤에도 7년이나 갇혀있다가 1987년 8월에야 비로소 임자에게 돌려졌다. 나는 《20세기의 신화》가 한국에서 출판되리라는것을 전혀 모르고 서울에 갔다가 우연히 그 책을 한권을 샀으며 김학철선생은 한국에서 출판되였다는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우연히 북경에서 김학철선생과 만나니 또 무슨 봉변을 받을려는지도 모르겠다는 근심을 했다. 그뒤 어떤 봉변이 또 그에게 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김학철선생의 속이 편안할수 없다. 그의 이런 정서는 그뒤 그가 발표한 많은 수필, 산문들에서 엿볼수 있다.   (3)   김학철선생은 1916년 출생이니 금년 만으로 85세가 된다. 지금 중국에는 파금(巴金)같은 로작가가 아직 생전이고 파금이나 빙심(氷心), 조우(曹遇)같은 백세로인이 한둘이 아닌것을 보면 이전에 비해 작가의 수명도 많이 길어진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일반정황을 보면 수명은 길어도 창작수명은 길지 않다는것이다. 파금같은분은 건국초기부터 글은 별로 쓴것같지 않으며 빙심도 나이가 얼마간 들면서는 별로 쓰지 않았다. 우리 중국조선족 문단을 보아도 대부분의 작가, 시인들은 나이가 60~70이 되면 점차 적게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것이 상례로 되고있다. 장편소설 《부활》을 늙어서 완성하여 세상에 소문을 낸 로씨야의 대문호 똘쓰또이도 나이 80이 된 뒤에는 가정내부의 소소한 쟁론으로 출가하였다가 외지에서 사망하는 일이 생긴것을 보면 우리의 김학철선생처럼 85세의 고령이면서도 계속 쓰는 로인은 적어도 이 중국에는 더 있는것 같지 않다. 김학철선생은 몇해째 《장백산》 잡지에다 《초대석》이라는 란을 설치하여 매기 3~4편의 수필, 산문을 발표하고있으며 그외에도 이따금 이곳저곳에 발표한것을 합하면 한해에 근 20편의 글들을 발표하고있는 셈이다. 김학철선생은 1980년 12월에 《무죄를 선고한다》고 담당판사가 대중앞에서 랑독했으니 1956년부터 1980년까지 장장 24년을 창작권리를 박탈당했으며 환갑해가 퍽 지난 64세 때 다시 창작권리를 회복했으니 부득불 늙어서야 글을 쓰게 되였다. 남들은 집에서 편안히 할아버지노릇을 할  때 김학철선생은 그때에야 잃었던 시간을 찾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강철같은 그의 의지는 김학철선생으로 하여금 오늘까지 건강한 몸으로 글을 계속 쓰게 하는것 같다. 감학철선생은 어떻게 하든 잃었던 24년의 시간을 보충하고야 말겠다고 하셨다. 《이 점에서만은 하나님이 공정한것 같애. 잃은 시간을 보충하라고 나에게 시간을 주는것 같애.》 김학철선생이 몇해전에 골암(骨癌)에 걸리셨다는 말을 듣고 지금 정황은 어떤가고 물어보았더니 《몸에 난 암종만 열 개나 된다고 하는데 나는 치료도 하지 않고 거기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아.》 기실 김학철선생님은 신체가 극히 불편한 몸이면서도 아침마다 그 높은 계단을 따라 내려와서는 부르하통강가에 나가 우리 젊은 사람 이상으로 운동을 하신다. 지난번 북경에서 《장백산작가상》 시상식이 있을 때 김학철선생은 원래 참가하려고 계획했는데 집에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부상을 입어 가시지 못했다. 김학철선생은 작가이고 투사이며 투사이며 작가이사다. 그는 일제시기에 반일투사 윤봉길의 애국행위에 감동되여 20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상해로 건너갔으며 중국륙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30년대말에는 조선의용대에 입대한 반일투사일뿐만 아니라 광복후에도 정치, 사회 부조리와 감히 맞서 싸운것으로 하여 근 20년 령어생활을 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24년이나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했었다. 그의 이런 투사정신을 떠나 그의 문학을 리해할수 없다. 그리고 김학철선생에게 있어 문학은 시종 그의 투쟁무기로 되여있었다. 김학철선생께서 건강장수하시고 더 많은 좋은 작품을 써주시기 바란다.                                                    2001년 8월         정판룡: 평론가, 연변대학 전임 부총장, 교수.
149    우리 문학의 산맥―김학철옹 (김호웅) 댓글:  조회:669  추천:0  2016-04-22
우리 문학의 산맥―김학철옹   김호웅          20세기를 마무리하고 21세기를 시작하는 2001년, 우리 민족문화의 두 거목 김학철과 정판룡은 20여일을 사이 두고 차례로 쓰러졌다. 이로써 우리 문화의 한 시대가 문을 닫았다. 이 글에서는 우리 민족문화의 두 거목중의 하나인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1916년 11월 4일, 김학철은 조선의 항구도시 원산에서 태여났다. 그의 집은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집안이 아니라 누룩을 빚어서 살아가는 집안》*이였다. 일곱살에 부친을 여윈 김학철은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겨내고 1930년 3월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35년 3월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김학철이 반일사상에 눈뜨기 시작한것은 보성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나는 서울 보성고 재학중에 리상화의 시에 접하게 된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부르짖음에 열광한 나머지 나는 그 빼앗긴 땅에서 살아야 하는게 새삼스레 절통했다. 그런데다가 또 입센의 “민중의 적”에서 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것은 혼자 따로 사는 사람”이라고 갈파하는것은 보고는 그만 환심장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김학철은 1932년 3월, 17세의 나이로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포부를 품고 륙로로 중국의 상해에 와서 김원봉(金元鳳)이 지도하는 반일 테러조직― 민족혁명당에 입당한다. 김학철은 상해의 황가화원(黃家花園)에서 두달 동안 훈련을 받은후 프랑스조계지(租界地)에 숨어살면서 민족혁명당의 기관지《앞   *강만길: 《민족혁명당의 태항산항일투쟁》, ( 《사회와 사상》 1989.2,p.98.) 길》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돈있는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테러활동에 참가한다. 1937년, 김학철은 민족혁명당의 지령에 의해 남경에 있는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 교장에 장개석)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하게 된다. 김학철은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는데 여기서 그는 맑스주의사상과 접하게 되며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1938년 8월 중앙륙군군관학교의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마친 김학철은 그해 10월 무한에 가서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 대장에 김원봉)에 참가한다. 김학철은 조선의용군에서 분대장의 직무를 맡았고 1940년 8월 29일 호철명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그 이듬해 5월 태항산에 들어간다. 그는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 직무를 맡고 일하면서 단막극《서광》(1938), 《승리》(1939),《등대》(1941) 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했고 또 작곡가 류신과 합작하여《조선의용군 추도가》(1941), 《고향길》(1941) 등 노래를 창작하기도 한다.    1941년 11월 10일 새벽, 태항산 지구의 호가장에서 홍사상(洪思翔) 휘하 일본군과의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김학철의 운명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그는 왼쪽다리에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된것이다. 김학철은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 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 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결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된다. 그 당시에는 이른바 조선인도 《일본국민》으로 취급하였으므로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였다. 말하자면 그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하였던것이다. 김학철은 나가사끼형무소에서 원폭(原爆) 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한 까닭에 1945년 2월 총상을 입은 왼쪽다리가 날로 썩어 부득불 절단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니 되였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김학철은 10월 6일 석방되여 10년만에 서울에 돌아온다.    서울에 돌아온 김학철은 1946년 10월까지 약 1년간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위원으로 일하면서 총을 붓으로 바꾸어 쥐고 《주간건설》, 《문학》, 《신문학》 등 잡지에 주로 조선의용군 전사들과 그들의 투쟁생활을 다룬 단편소설《담배국》(1946.7), 《이렇게 싸웠다》(1945.10), 《지네》(1945.12), 《남강도일》(1946.1), 《균렬》(1946.4), 《상흔》(1946.5), 《달걀》(1946.6), 《밤에 잡은 포로》(1946.6), 《야맹증》(1947) 등을 발표했고 그외 《문화정책과 중국공산당》, 《민족문화의 계급성》등 문학평론도 발표했다. 당시 미군정하에서 좌익운동이 탄압을 받게 되자 김학철은 북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우리 정보원이 입수한 블랙리스트에 제 이름이 있었던것》이다.*1946년 12월말 김학철은 조직에서 파견한 간호사와 누이동생의 부축을 받아 마포에서 배를 타고 옹진반도를 거쳐 해주에 들렸다가 구사일생으로 평양에 들어간다. 옹진반도에서 해병대에 붙잡혔지만《무한에서 두부장수하던   *김학철: 《나의 길》 ( 《동아일보》 1990.12.23)  사람인데 폭격에 한 다리가 없어졌다》**고 얼려넘기고 무사히 몸을 뺀것이다. 그때의 간호사가 바로 김학철의 부인 김혜원이다.    평양에 온 김학철은 《로동신문》의 기자로 일하다가 외금강휴양소 소장을 지내기도 하고 《민족군대》주필을 지내기도 하면서 단편소설《정치범 99》,《선거만세》,《적구》,《똘똘이》,《콤뮨의 아들》,《범람》등을 《로동신문》,《조선문학》,《화살》등 여러 신문, 잡지들에 발표하며 또 저명한 작곡가 정률성과 합작하여 대형교성곡 《동해어부》(1948), 《유격대전가》(1948)를 창작하고 로씨야 작가 고골리의《검찰관》을 조선문으로 번역해내기도 한다.    평양에서 김학철은 김사량(金史良, 1914∼1050.9)과 친교를 맺었고 이태준(李泰俊, 1904.1∼?)과도 자주 만났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평양을 떠나 북경으로 자리를 옮겨가는데 그 자신의 말을 빈다면 평양을 떠난데는 《장편소설 하나 넉넉히 엮을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한다. 사실 김학철은 한때《민족군대》주필로 발탁되기도 하였으나 이른바 연안파(延安派)인 까닭에 한직(閑職)으로 밀려났고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피신한것이다.    중국에 들어온 김학철은 북경에 가서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丁玲, 1907-1986)이 소장으로 있은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내게 된다. 이 시기 김학철은 단편소설《엄혹한 나날에》,《전우》,《고향》,《솔바람》,《군공메달》등을 《인민문학》,《광명일보》,《소설》,《중국청년보》와 같은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고 중편소설《범람》, 단편소설집《군공메달》(?文)을 펴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자 그해 12월 김학철은 연길시로 이주한다. 북경을 떠나 연변에 와서 자리잡은데도《역시 아직은 밝히기 어려운 사정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내막은 알길 없다. 김학철은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주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나 반년후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된다. 1953년 9월 단편소설집 《새집드는 날》을 출판하고 1954년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1,2,3부)를 발표하며 1956년 민족출판사에서 소설집 《고민》을 펴내고 1957년에는 중편소설 《번영》을 펴낸다. 이밖에도 1950년대초부터 로신의 소설《축복》, 《풍파》, 《아Q정전》, 정령의 장편소설《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와 주립파의 장편소설《산촌의 변혁》 등을 번역, 출판한다. 1957년부터 김학철은 무려 24년간이나 지속된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그의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와 단편소설 《괴상한 휴가》(1955)가 반당반사회주의 독초로 지목되여 비판을 받은 결과 《반동분자》*로 획분되여 창작권리를 빼앗기게 된것이다. 김학철은 공직과 로임을 박탈당하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생활보조비 50원을 타 쓰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몇년후 김학철은 연변작가협회 도서실에서 자료원으로 지내게 되였으나 여전히 《반동분자》로 몰려 괄시와 수모를 받았다. 공직도 없고 로임도 없고 글도 발표할 자격이 없는 밑바닥인생으로 굴러떨어진것이다. 하지만 김학철은 1964년   *강만길: 《민족혁명당의 태항산항일투쟁》(사회와사상,1989.2.p.104) **동상서,p118   부터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비밀리에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 완성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의 가택 수색에 의해 장편소설《20세기 신화》의 원고가 발견이 되여 김학철은 기소, 강금되는 신세가 된다. 1975년 5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원에서는 김학철에게 10년 유기징역 판결을 언도한다.     1977년 12월, 김학철은 만기석방되나 그후 3년간은 계속 반혁명전과자 로 사회의 백안시를 당한다. 《그런데 62세에 만기출옥을 하고도 다시 3년동안을 반혁명전과자라는 극히 고귀한 신분으로 안해가 공장에 다니며 벌어다주는것을 얻어먹고 사는 신세가 될줄이야.》** 김학철은 분연히 일어나 최고인민법원에 상소한다. 결과 1980년 12월에야 무죄판결을 받는다.《20세기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리유로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것이다.    65세에 정치적생명과 작가적생명을 다시 찾은 김학철은 라스트 헤비― 말 그대로 최후의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1981년부터 지금까지 단편소설 20여편, 항일회상기《항전별곡》(1983), 《김학철단편소설집》(1985), 장편소설 《격정시대》(상, 하, 1986), 《김학철작품집》(1987), 산문집 《무명소졸》(1989), 산문집《누구와 더불어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1994), 《최후의 분대장》(1995), 산문집 《나의 길》(1996),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2001)을 펴냈다. 요즘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여러 권으로 된 《김학철문집》을 계속 출판하고있다.     김학철은 1983년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고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했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중국공산당 당적(黨籍)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을 받게 되였다. 1987년에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되였고 1994년에는 한국 KBS해외동포상을, 2001년에는 《장백산작가상》을 수상했다. 1989년 하반년에 43년만에 서울을 방문한 김학철은 한국언론에《외발의인(?人)》의 선풍을 일으켰으며 신문, 잡지, 방송 및 강연 등 형식으로 많은 담화와 글을 발표하였다. 귀국하는 걸음에《청구문화사》의 초청으로 일본의 동경에 들렸을 때,《나의 한쪽다리는 이제 일본의 흙으로 되었을 걸》하고 우스개를 피울 때 그 사무치는 감개와 흥분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수 있었으랴! 참으로 김학철처럼 기구한 일생을 살아온 작가는 드물것이다. 아무튼 영웅과 역적으로 점철된 그의 기구한 한평생과 그가 맛본 일구난언(一口?言)의 쓰라린 체험은 그의 문학의 강바닥을 이루었고 그의 문학을 체험의 문학   *그 당시만 하더라도 김학철은 조선공민이였기에 《우파분자》라 하지 않고 《반동분자》로 모호하게 칭하고 《우파분자》로 취급했다. **김학철: 《나의 길》 (동아일보, 1990.1.17)   으로 규정한것이다.   아래에 김학철의 문학세계를 ① 1945∼1950년의 문학 ② 1950∼1956년의 문학 ③ 1957∼1978년의 문학 ④1981∼2001년의 문학 등 5개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다리를 총에 맞아 붙들려간 동무는 일본 어떤 형무소로 끌려갔다고 할뿐 그 생사와 진위를 알수 없었던바, 이번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척각의 작가(隻脚作家) 김학철군이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이는 김사량의 유명한 종군수기《노마만리》속에 나오는 한단락이다. 만약 이를 실종된 김학철, 조국의 품에 다시 안긴 김학철에 관한 첫 기록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또 귀중한 사진 한장이 있다. 1989년말, 43년만에 고국을 방문한 김학철이《문학사상》지에 공개한것이다. 일본감옥에서 풀려 나온 김학철을 환영하기 위한 모임에 참석했던《프로문인》들이 명동부근의 어느 다방앞에서 찍은것이다. 지하연, 박노갑, 안희남, 김남천의 얼굴이 보이는데 리태준, 리원조 등의 얼굴은 안타깝게도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그 한복판에 자랑찬 미소를 함뿍 머금고 버젓이 앉은 김학철, 채 자라지 않은 머리모양으로 보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람임을 알수 있지만 온몸에 환희와 긍지, 자신감과 용기가 넘치고있다. 우리는 그 얼굴을 통해 슬픔에 잠긴 누이동생에게《사람의 정의(定?)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짝쯤 없어도 문제없다》하고 답장을 준 그 당시 작가의 호기롭고 자신만만한 외침을 듣는듯싶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경모와 환대의 꽃보라속에서, 해방된 조국에 영웅으로 귀환한 김학철은 자기의 전투적인 경력, 체험을 갖고 문단에 나타난것이다. 김학철은 감옥에서 미리 작품을 써두었던것처럼 한꺼번에 8편의 단편소설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이렇게 싸웠다》(1945)로부터《야맹증》(1947)까지는 근근히 1년반 남짓한 시일이고 사실《야맹증》을 제외하고는 모두 1946년 6월까지의 8개월 사이에 발표된것들이라는 점과, 또《신문학》창간호(1946)의 뒤표지에 벌써 서울타임즈와 출판국의 광고가 실렸는데 한창 인쇄중에 있는 김학철의 단편집《조선의용군》에는 《균렬》,《담배국》,《남강도일》,《지네》,《씨》,《평원유격대》,《어간유정》,《상흔》등 8편이 수록되였다고 보도한 점, 이 두가지 사실로부터 추정할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김학철의 초기소설에서 보게 되는것은 가혹한 전투장면이나 선이 굵고 기복(起伏)이 험한 비극적사   *김사량: 《노마만리》 (《김사량선집》 조선 국립출판사, 1955년, p.141.) 건보다도 조선의용군생활의 에피소드와 락천성, 즉 성스러운 전쟁의 비장함 보다도 생활미가 넘치는 일화 및 사랑스러운 의용군전사들의 성격미인것이다. 례컨대 처음으로 활자화된 그의 처녀작《지네》는 많은 혈전을 겪고 많은 공을 세운 의용군전사가 지네만 보면 무서워 쪽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있다면, 단편 《담배국》은 어리석고 우둔하지만 령혼이 맑은 의용군전사 문정삼의 성격을 창조하고있는데 이 소설은 김학철의 작가적력량과 스찔을 약속해준 초기의 걸작이라 하겠다.    《전쟁할 때》라는 별명을 가진 문정삼이는 조선의용군 제×지대에서 소문난 느리배기이며 또 게으름뱅이였다. 그는 1일 16시간 수면제(睡眠制)의 제창자였다. 그는 워낙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미였는데 혹간 입을 열 때도 그 속도는 흡사 태엽이 거의 다 풀린 축음기와도 같았다. 지대에서 치중을 책임진 문정삼은 가끔 실수를 하여 대원들의 웃음거리로 되거나 미움을 받는다. 한번은 밤중에 남새인줄 알고 뽑아와서 국을 끓였는데 알고 보니 담배잎이였다. 하여 문정삼은 치중대에서 취사반으로 쫓겨났다가 다시 련락병으로 옮겨앉는다. 그런데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는 문정삼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온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적의 치중대를 수류탄으로 급습할수 있는 기회가 온것이다. 전리품은 담배, 술, 통조림 등을 가득 실은 4두마차였다. 행방불명이 됐던 문정삼이 본대에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이 나는데 결말은 온통 웃음으로 넘친다.    해방직후의 문단은 조선의용군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하여 한쪽 다리를 잃고 일본에서 돌아온 가장 기대되는 작가― 김학철에게서 피로 얼룩진 력사적인 사건, 투사형의 인물, 비장한 결말을 기대했을수 있었겠으나 작가는 도리여 일상적인 에피소드, 어리석으면서도 순진한 허물투성이의 인물들을 거느리고 문단에 등단한것이다. 이미 언급한바 있지만 김학철은 서울에 귀환하자마자 미리 써두었던것처럼 한꺼번에 8편의 소설을 펼쳐 보인다. 말하자면 김학철의 의용군생활체험은 기성문단의 그 어떤 간섭과 조정도, 또 작가가 받아들인 그 어떤 정치미학적인 리념의 려과, 조절도 없이 그대로 분출된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 생활적이고 유모아적인 에피소드에 의한 성격의 창조라는 김학철문학의 특성이 싹트게 된것이다.                                  (3)      평양, 특히 북경, 연길에서의 50년대 초엽의 생활은 김학철의 문학에 어떠한 색채를 부여하고있는가? 작가는 자기들의 피와 목숨으로 바꾼 신생(新生)의 사회주의국가의 탄생을 목청껏 노래하고있으며 사회주의국가의 정치적리념과 당면의 방침, 시책의 문학적형상화를 작가의 사명으로 간주하고있다. 이 시기 그의 작가적정열은 주로 항일투쟁 및 조선전쟁의 형상화와 사회주의제도하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이바지되고있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와 단편소설《군공메달》,《송도》를 들수 있고 후자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단편소설《새집드는 날》,《뿌리박은 터》를 들수 있을것이다.    《군공메달》은 조선전쟁때의 어느 한차례 전투에서 서로 협력하여 적의 땅크를 까부신 중국인민지원군 전사 호문평과 조선인민군 전사 양운봉이 서로 군공메달 ―공로를 양보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국제주의정신을 노래한 작품이라면《송도》는 중조 두 민족의 단결을 노래한 작품이다. 각기 부대를 거느리고 남으로 진격하던 조선인민군 련대장 보경과 중국인민지원군 련대장 서생평은 송도라는 곳에 이른다. 송도는 보경이 나서 자란 고향으로 채마농사를 짓던 화교의 외아들 생평과 함께 봄이면 송화 털고 가을이면 송이버섯 따던 정든 땅이다. 둘은 그곳에 있는 소나무의 거북이 잔등같은 껍질을 깎아내고 거기다 《조중(朝中)》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결의형제를 맺었다. 바로 그 뜻깊은 로송나무를 찾아간 보경은 자기보다 한발 먼저 와서 송진에 뒤덮인 나무줄기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문질러보고 하는 생평을 발견한다. 물론 둘은 서로 얼싸안고 상봉의 기쁨에 잠긴다. 《사상가란 혁명가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두 나라 백성을 반목시킬 목적에서 조중 두 나라 인민의 가슴속에 각각 묻어둔 증오의 씨는 싹을 트지 못하고 말았다. 도리여 그것을 밑거름으로 하고 단결의 싹이 트고 련합의 아지가 뻗었다.》 ―단편《송도》에 나오는 작가의 지문인데 정치설교의 냄새가 너무 짙은, 따분한 구절이다. 이 소설의 사건은 성격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성격들간의 갈등과 충돌의 결과로 벌어지는것이 아니라 그 어떤 선행한 정치적리념을 해석, 설명하기 위한 도식으로 되고있다. 김학철은 저도 모르게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수사자와 같은 사나이로부터 소심한 정치교원으로 변신하고있으며 그의 문학의 배포유한 유모아와 펄떡이는 생명체로서의 성격들은 속 얕은 흥분, 따분한 설교와 호소, 그 어떤 기존 리념에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변하고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새 생활의 찬가에 초점을 맞춘것, 평범한 인간들의 정신미를 발굴》한 소설로 평가되고있는《새집드는 날》, 《뿌리박은 터》등에서도 드러나고있다.    단편 《새집드는 날》은 해방후 나라의 덕택으로 셈평이 좋아진 젊은 세대의 농민 동준이가 외양간을 살림집에 붙여지은 재래의 농가집 구조와는 달리 위생을 보장하기 위하여 외양간을 살림집밖에 따로 내다 지었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이른바 해방을 받은 농민들의 날따라 꽃피는 생활을 반영하려고 하였다면 단편《뿌리박은 터》는 서한체 형식으로 고향땅에 뿌리박은《나》의 고난에 찬 력사, 오늘의 행복, 래일에 찾아올 더 큰 행복을 찬미하고있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은 포화의 시련을 겪은 전사이며 고향의 미래에 대한 황홀한 꿈을 안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인간인것만은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서는 구체적인 개성은 찾기 어렵고 단지 발가벗고 드러난 사상만을 볼수 있을뿐이다. 이는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잘 모르기는 하겠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란 각자가 다 자기의 뿌리박은 터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 터의 무한한 번영을 위하여 노력, 분투하면 자연히 이루어지는게 아닐는지.》    보다싶이 이 시기 김학철의 소설들은 생활미가 적고 그 주인공들은 그 어떤 사상의 메가폰으로 등장하고있다. 50년대초기 김학철문학의 이러한 변형, 좌절의 원인은 그가 자기의 강점― 풍부한 생활체험을 버리고 급급히 새로운 제재령역에 들어섰다는 점과 그리고 해방된 흥분과 희열, 신형의 제도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찬미에 휩싸인 나머지 자기의 특유한 작가적성격과 기질을 망각하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김학철은 로신의 말마따나《남보다 자신을 더 예리하게 해부》하는 작가였다. 그는 점차 자기의 작품을 반성하기 시작하며 자기가 걸어온 창작의 길에 회의(?疑)를 품게 된다. 이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거론, 절찬되고 있는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가 근년에 한국에서 재판(再版)되자 김학철 자신이 놀라움과 유감을 표시하면서 재판할 가치가 없는 작품이라고 스스로 혹평한 사실을 미루어서도 알수 있지만 벌써 1955년에 발표한 문제작《괴상한 휴가》에서 그러한 회희와 반성을 하고있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설가 차순기는 이 시기 김학철의 작가적 갈등과 고민을 반영한 자화상적인 형상이라고 하겠다.    차순기는 자기 작품이 성공하여 찬양이 자자할 때도 도취되지 않으며 여지없이 비난을 받을 때에도 고민이나 우울따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작품의 진가가 밝혀져 사회의 절찬을 받을 때에도 《내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작품이 두들겨 맞을 때가 도리여 내게는 즐거운 휴가로 된단 말입니다.》하고 말한다. 비난과 찬양이 엇갈리는 속에서 실망도 흥분도 하지 않고 자기 작품의 진실과 허위를 랭정하게 가늠하고 참된 작가의 길을 찾고있는 차순기의 형상이야말로 이 시기 심각한 고민과 탐구를 하고있는 김학철 자신의 모습이 아닐수 없다. 아무튼 1950년대 전반기의 문학에 대한 참회와 반성은 한평생 작가를 괴롭히고있으니 1981년에 발표된 단편《고뇌의 표준》에 나오는 주인공, 한 건축가의 참회 역시 작가 자신의 뼈저린 체험을 예술적으로 탈바꿈한것이라고 하겠다.    50년대 중반을 계기로 김학철은 심각한 작가적 고민과 반성을 거쳐 점차 새로운 눈으로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게 된다. 그는 단편 《맞지 않은 기쁨》, 《새암》, 《괴상한 휴가》등 소설에서 사회의 부정행위나 변태적심리, 그리고 빈번한 정치적풍파로 말미암은 인간심리의 기형화를 고발, 풍자하고있으며 그 어떤 고립과 비난속에서도 진리와 원칙을 고수하는 참된 인간의 정신적미를 발굴하고있다. 이러한 김학철의 작가적성장과정은 그의 첫 단편소설집의 제목은《새집드는 날》(1953)이고 두번째 단편소설집의 제목은《고민》이라는 사실로부터도 알수 있지만 단편《고민》의 주인공 ―《나》의 형상창조에서 보다 명료하게 볼수 있다.    초급중학교를 졸업하고 전기로동자가 된 《나》는 몇해 지나 6급 기능공으로 되여 기공검사원의 직무를 맡는다. 헌데 휴즈를 넣고 송전시키고 합격증을 떼여주기는 좋으나《고침일》로 판정을 내려 이미 가설해 놓은 전선을 다시 뜯어고치게 하기란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하기에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은 미움의 살을 맞기가 일수요, 남모르는 고충을 겪기 마련이다. 특히 현창수라는 조장(??)은 틈만 있으면《나》에게 조소와 비방의 화살을 쏜다. 지어 자기 맘속에 있는 처녀 양정숙을 사랑하지 않는가 해서《나》를 질투까지 한다. 그러다가《나》는 끝내 현창수의 속임수에 넘어가 합격되지 않은 공사에 《합격증》을 떼주게 된다. 하여《나》는 커다란 심리적타격을 받게된다. 《합격증을 내준 뒤에 발생한 사고니까 두말없이 그 책임은 검사원이 짊어져야 했습니다, 나는 억울하고 분해서 속으로 울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형별은 역시 고립이라는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한 동아리가 돼가지고 계획적으로 먹이는 골탕을 무슨수로 안먹는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인공《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경각성을 높여 면밀하게 검사하며 부정부패와 투쟁한다. 이처럼 소설은 《나》와 현창수와의 갈등을 통하여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책임감을 안고 자기 맡은바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해나가는 새시대 로동자의 형상을 생동하게 부각하였다. 주인공《나》의 성격적특질은 인간적인 성실성과 정의감 및 사회를 위한 헌신성인데 이는 작가의 정신구조와 일맥상통하고있으며 또 그러한 미학적리상을 그후의 작품들에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있다.    작가의 고민과 반성, 새롭게 눈뜬 사회비판정신, 사회정치풍조에 영합할 줄 모르는 작가의 성실성은 문제작《괴상한 휴가》를 내놓게 하였고 그 소설과 장편《해란강아 말하라》로 말미암아 반우파투쟁의 선풍에 휘말려 들어가 창작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비밀리에 창작을 계속하였으니 1961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장편소설《20세기 신화》는 그에게 24년이라는 기나긴 수난기를 가져다주기까지 한다.                                  (4)      정치권력과 문화전제주의가 세상을 좌지우지할 때 정직한 작가들은 설사 작품의 발표권리를 잃었다 하더라도 가슴속에 활화산을 품고 침묵으로 저항하기도 하고 비밀리에 글쓰기를 계속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를 두고 복단대학교의 진사화(?思和)는 그것을 《잠재적인 습작(?在?作)》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잠재적인 글쓰기 현상은 그 어떤 시대에나 다 있을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모든것이 결핍하고 단일했던 50∼70년대의 당대문학사에서 그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제를 량적으로만 가늠하지 않을 경우 잠재적인 글쓰기는 문학사의 절반 강산(半?江山)을 차지한다. 잠재적인 글쓰기가 있었기에 당대문학사는 비로소 풍요로움과 완벽성을 기할수 있게 되였다. 문학이 외부세계의 압력을 받을 때 문학은 그 내부의 분렬과 대립을 통하여 불사조와 같은 예술생명력을 살려내며 지성인의 정신적욕구를 분출한다.》*    윤동주, 심련수(1918∼1945), 김학철의 경우와 같이 잠재적인 글쓰기는 조선족문학사에서도 볼수 있다, 특히 김학철의 장편《20세기 신화》는 거의 공백기나 다름없었던 1960―1970년대 조선족문학의 《잠재적인 습작》으로,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된다. 《20세기의 신화》는 김학철이 1957년 중국을 휩쓴 《반우파투쟁》의 와중에서 발표의 자유를 잃고 전업작가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후, 대약진운동을 통해 드러난 우상숭배와 인민생활의 정치, 경제적 위기로 요약되는 사회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집필한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전편 《강제수용소》와 후편 《수용소 이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편은 임일평이라는 작가의 시점으로 로 락인 찍힌 사람들이 강제로동수용소에서 얼마나 무서운 고생을 겪고있는가를 고발하고있다. 여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리유로 우파로 지목되여 수용소에 들어온 작가, 음악가, 정치가, 교원, 로동자 등이 살인적인 환경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사회의 전횡에 맞서 어떻게 승리해나가는가를 보여주고있다. 그리고 후편은 수용소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온 그들의 눈에 비친 1960년대 초반, 중반, 즉 인민공사운동과 대약진운동, 그리고 중국과 쏘련 분쟁의 소용돌이가 치던 시기의 흔들리는 중국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최근 한국의 평론가 김명인은 《20세기의 신화》의 미학적가치를 좀 다른 측면에서 평가해 주목된다. 김명인의 글을 보자.    《전편 “강제수용소”의 경우 수용소의 참상을 리얼하게 드러낸것을 넘어, 그 참경속에서도 결코 희망과 낙관을 잃지 않는 인간들의 위대함을 절실한 필치로 그려내고있다. 또한 비장과 해학, 풍자의 절묘한 균형으로 읽는 이들을 비극적 감상주의나 패배주의, 근거없는 주관적낙관주의와 기계적력사관으로 이끌지 않으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미학적승리를 거두고있다.    사실상 김학철의 분신이라고 할수 있는 조선의용군 출신 수용자 심조광의 아들의 일화, 즉 학교에서 소풍을 간 아이들이 “인민의 적”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놀이에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씌어진 쪽지를 찾아내고는 그 자리에 엎어져 끝없이 울었다는 일화* 같은것은 이른바 반우파투쟁의 광기가 어떻게 인민의 령혼을 파괴하였는가를 비극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그 비극적정서속에 몰입하지 않고 수용소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극(笑?)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듯이 여기저기서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이를 때론 해학으로 때론 풍자로 조형하여 비참이 사랑으로, 그것이 다시 그 비참을 만든것들에 대한 정당하고도 웅숭깊은 거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끔 하고있다.》*                       (5)   *陳思和:《我們的抽?一 當代文學史的》(《中國大學學術講演錄》,廣西師范大學出版社,2001年, p.99~100.)     자유의 몸이 된것은 1980년 12월, 김학철의 나이 65세 되던 때였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촉박하였다. 그는 출입문에《면회를 사절함》이라는 패쪽을 걸고 마치 수술실에 들어선 의사마냥 밤낮없이 창작에 달라 붙었으니 그후 20년간 장편《격정시대》를 비롯해 전기문학, 중단편소설, 수필, 잡문 등을 근 2백여편 내놓았다. 24년간의 박해와 억압속에서 축적된 작가의 회로애락과 작가정신이 화산처럼 폭발한것이다. 이 시기 김학철의 작가적정열은 주로 제반 사회현실문제의 탐구와 력사에 의해 외면당해 온 조선의용군의 투쟁생활을 예술적으로 복원(復元)하는 예술창조과정에 쏟아지고있다. 사회현실문제의 탐구에 못을 박은 작품들은 다시 찾은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해학적인 필치로 흥미진진하게 엮고있고 강권과 폭정에 맞서 자기의 참된 삶을 고수하는 인간들의 고매한 넋을 찬미하고있으며 봉건적인 애정 륜리 도덕, 문벌관념, 사회의 부정부패 및 정치적동란의 사회력사적원인 등을 신랄하게 고발, 비판하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속에 관통된것은 작가의 유모아적인 사고방식과 필치이다. 말하자면 상술한 작품의 바다우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작가의 찬란한 웃음이 넘실거리고있으니 그의 초기창작에서 움트고 약속된 작가의 유모아적인 스찔은 1950년대 초엽의 곡절과 변형, 1950년대 중반의 반성과 자각, 1960년대 중반의 《잠재적 습작》, 그리고 그 이후의 오랜 《침묵》을 거쳐 보다 높은 차원에서 꽃핀것이다.    24년만에 다시 붓을 잡은 작가는 일기(一?)에 《쌍둥이 자매》(1982), 《네번째 총각》(1982), 《신랑감》(1982) 등 3편의 애정소설을 펼쳐보인다. 10년간의 무서운 옥고를 치른 죄수작가가 청춘남녀들의 아기자기한 련애와 사랑을 다룬다는것도 상상밖이요, 일흔고개를 바라보는 로인이 청춘남녀들의 속삭임을 소설화한다는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애정소설은 구시월 연변의 사과배처럼 달콤하며 그 장면마다에서는 백두산폭포와 같이 경쾌한 웃음이 쏟아지고있으니 그것은 즐거운 청춘남녀들의 희열을 빌어서 다시금 작가적 청춘을 되찾으려는 작가의 열망, 또는 《두번째 해방》을 받은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한것인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김학철은 따분한 정치설교로 단순화되였던 문단에, 정치적암투로 긴장되였던 사회에 장쾌한 웃음의 폭풍을 몰고 왔으며 또 그것으로써 자신의 좌절과 고통을 초극하였던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성격창조는 소설의 첫째가는 과제이다. 이 시기 그의 소설에는 김지연, 네번째 총각, 지차손, 지비운, 양대붕, 현덕순 등 사랑스러운 인간형들이 등장하고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성은 이러저러한 흠집을 갖고있으나 마음바탕은 솔직하고 성실하며 의롭다는 점이다. 김학철은 성실성을 인간의 최대의 미덕으로 인정하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 주인공들의 성격, 기질은 초기작품의 희극적주인공 문정삼과 혈맥을 잇고있으며 50년대 주인공― 전기시공검사원《나》의 형상을 거쳐 새롭게 부활된것이라고 하겠다. 그중 작가의 눈물겨운 옥중체험에 기초하여 창조한 죄수의사 현덕순의 형상은   *김명인: 《어느 혁명적 낙관주의자의 초상》 (《창작과 비평》 2002년 봄호,p.245.)   작가의 미학적리상을 구현한 작가정신의 화신이라고 할수 있다. 내과의사 현덕순은 동료 너덧이 모인 술좌석에서 취중진정발(醉中眞談發)로 류소기가 쓴《공산당원의 수양을 론함》은 잘못이 없잖은가 하고 한마디 한것이 어느 고자쟁이의 밀고로 반혁명현행범이 되여 징역 10년 판결을 받고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다. 죄수의사의 책임을 맡은 현덕순은 조춘생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무덤에 묻힌 이웃집 처녀를 사간한 죄로 역시 10년형을 받고 들어온 조춘생은 기실은 정신병환자였다. 혼자 제멋에 겨워 노래하고 춤추며 땅바닥에 떨어진 부나비를 땅콩 주어먹듯 하는 조춘생은 매일《상식에 벗어난 우습강스러운 짓으로 부단히 사람들을 웃기였다.》 하여 조춘생은 감옥안에 없지 못할 명물로 웃음가마니로 되였다. 하지만 현덕순만은 정신병환자에게 징역을 살게 하는것은 국가의 수치이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일신의 안위를 고려하여 모르는체 하는것은 범죄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여 현덕순은 행정의사를 찾아가 조춘생을 진단해 보자고 주장하지만 공연히 핀잔만 듣고 만다. 그후에도 감옥의 중대장과 지도원을 찾아가서 정신병자환를 복역시키는것은 사회주의의 인도주의에 대한 배리라고 하면서 조춘생을 석방시키자고 주장하지만 지도원은 《주제넘은 수작! 그래 이렇게 반혁명독기를 뿜을 작정인가?…》하고 위협한다. 마침내 현덕순이 제 입으로 벌어서 정좌를 하고 반성하게 되자 평소에 앙심을 품었던 죄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조춘생까지 와서《여보 의사, 당신두 도적질을 하우? 손버릇이 사납군 그래》하고 헤식게 웃는다. 《4인무리》가 거꾸러짐에 따라 석방된 현덕순은 다시 조춘생의 행방을 물어가지고 정신병원까지 과자를 사들고 찾아간다. 조춘생은 게걸스레 과자를 먹으면서《여보 의사, 다음번에 올 때두 또 좀 훔쳐다 주우》하고 씨벌인다.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자기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걱정을 하며 말 그대로 《제 입으로 벌어서》욕을 먹는 현덕순은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의 천성은 그릇된 행위를 보고는 참지 못하며 자기 일신(一身)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고 진리를 견지한다. 실로 흑백이 전도된 지옥같은 감옥안에서 성실과 진실의 초불을 지켜 홀로 마음을 썩이는 현덕순,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현덕순의 넋이야말로 고상한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덕순의 형상을 통하여《우파모자》를 쓰고 18층 지옥에 떨어져서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면서 참된 인간의 길을 지켜온 김학철의 모습을 볼수 있다. 김학철은 바로 현덕순과 같은 정직하고 대바른 인간들이야말로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민족의 동량이요, 시대의 선구자라고 확신한것이다.     해학과 풍자는 모두 웃음을 동반한다. 하지만 해학속에는 그 대상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깃들어있다면 풍자속에는 그 대상에 대한 저주가 깃들어있는것이다. 김학철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적인 흠집, 모순되는 행위, 아이러니와 역설적인 구조를 통해 해학적인 웃음을 유발하고있다면 그의 만년의 작품들은 대상의 부동한 성격에 따라 해학과 풍자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있다. 바꾸어 말하면 신랄한 풍자에 의한 그의 사회비판정신은 한결 원숙해지고있다. 례컨대 단편《네번째 총각》에서는 부모의 권세와 이름을 빌어 행세하는 고급간부 자제들의 비렬한 령혼과 위선적인 본질을 가차없이 조롱, 풍자하고있다. 그리고 단편《인간세상》(1981)에서는 20년전《반우파투쟁》때 발표한《사람잡이 글》까지 성적으로 내놓고 부교수로 승진하는 곽봉원의 비루한 령혼을 타매하고있으며 중편실화소설《밀고제도》에서는 작가의 직접적인 옥중체험에 근거하여 조석으로 덮쳐드는 정치운동으로 하여 기형화된 사회인간들의 령혼을 보여주면서 간계와 모략, 날조와 밀고, 상호간의 불신과 암투로 뒤범벅이 된 동란년대의 사회정치구조을 신랄하게 고발, 풍자하고있다. 작품에서는《돌배골 감옥의 상층구조가 철근콩크리트 기둥으로 받쳐져있는게 아니라 수천수만 기수부지의 밀고장을 가려서 만든 기둥우에 덩그러니 올라앉아 있는것 같다》고 풍자하고있는데 실로 돌배골 감옥이야말로 인간적인 사랑과 신뢰를 상실하고 아귀다툼을 했던 그 당시 중국사회의 축도(??)라고 하겠다.    김학철은 한국 리화여자대학교에서 한 문학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감옥에 있을 때 죄수복은 여죄수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만들어져 온 죄수복의 주머니를 뒤져보면 별의별 쪽지들이 다 나왔어요. 열렬한 련애편지부터 “아들아 잘 있느냐”식의 장난기 어린것까지 정말 다양했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에게 웃음이 정말 중요하다는것은 깨달았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웃음을 만들어내고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작품을 쓸 때도 언제나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24년간에 달하는 비인간적인 대우, 특히 몸서리치는 10년간의 옥살이를 통하여 자기의 기구한 운명과 무서운 실존을 초극하는 방식은 웃음이라는것을 깨달았고 또 웃음을 무기로 허황한 인간세상에서 살며 싸우는 방식을 배운것이다. 아무튼 유모아는 총명과 지혜의 상징으로서 바다와 같은 흉금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수 있다. 벨린스끼의 말을 빈다면 유모아는 오직 심오하고 발달된 정신을 가진 인간이나 민족만이 구사할수 있는것이다.                                   (6)        항일투사로서의 김학철의 초기경력과 《8·15》이전까지의 그의 사상의식발전은 그가 해방공간에 펼쳐보인《지네》,《담배국》, 《어간유정》등 단편소설들을 통하여 단편적으로 볼수 있고 1980년대에 발표한 전기문학《항전별곡》, 단편소설《두름길》,《원쑤와 벗》을 통해서도 엿볼수 있다. 하지만 장편소설《격정시대》(1986)는 그의 청소년시절의 경력과 그의 사상의식 발전과정을 예술적으로 재현한 작품으로서 그 주인공 서선장의 형상에는 작가의 자서전적요소가 다분히 깃들어있으며 그 《정신발전의 부동한 단계》가 반영되여 있다.   《격정시대》를 펼치면 1928년 초봄의 어느날 원산앞 바다가에 그림을 그리러 나온 보통학교 4학년학생 서선장과 만나게 된다. 고양이수염을 깍기도 하고 벌집을 쑤시기도 하는《무사분주하고 장난기 심한》선장, 그러나 총명이 뛰어나 작문만은 잘 짓는다. 그 당시 날로 혹심해지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그에 대한 조선인민들의 반일운동의 물결은 나어린 선장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에 눈뜨게 한다.    선장이 서울에 사는 변호사의 부인― 숙자아주머니네집에 양아들로 들어가서 공부하게 된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였다. 선장은 서울에서 친일파인 강교장을 밀어내는 반일학생운동에 참가하며 또 광주의 학생운동소식에 흥분하기도 한다. 특히 원산의 부두로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했을 때 일본선원들까지 배고동을 울려 성원하던 일에서와 체포령이 내린 유명한 독립운동가 리재유를 자기의 저택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된 일본인교수 스기우라의 사건에서 선장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이 더욱 로골화됨과 더불어 간도의 《만보산사건》, 《9·18》사변이 일어나며 마을의 애국청년 김영하 등이 체포, 투옥된다. 괴로움에 부대끼던 선장이는 중국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서 조선젊은이들이 공부하고있다는 소식이며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조선의 젊은이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가와대장을 포함한 일본군장령 10여명을 살상했다는 소식에 접한다. 피끓는 선장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오른다. 《남들은 다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해? 수치스러운 일이다. 도저히 량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폭탄도, 권총도 다 손에 넣을수 없으니까… 중국으로 건너가자, 림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로 찾아가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가자!》이처럼 소설은 선장이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된 과정을 실감있게 보여주면서 작품의 배경을 30년대 중엽의 상해로 옮기고있다.    상해에 이른 선장은 리춘근, 김혜숙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소개로 남경에 본부를 두고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상해지하조직에 들어가 테러활동에 종사한다. 그는 처음으로 시가(市價) 1천만원어치의 헤로인이 밀수입되는것을 눈감아주고 뢰물을 받아서 벼락부자가 된 상해 해관의 조선인관리 신영호를 혼내주는《사로니까 행동》에 참가한다. 그는 당황해하고 빈구석이 많았으나 용감하고 지혜로운 조직성원들과 사귀는가운데 어느덧《표범의 넋을 가진 사슴》으로, 용감한 테러분자로 자라난다. 또 조직안에서 중국공산당의 지하당원 성재수를 만나고 그의 영향밑에서《변증법적유물론》, 《유물사관》 등 혁명서적과 《국가와 혁명》, 《프랑스 내전》 등 맑스주의서적을 탐독함으로써 점차 맑스주의에 눈뜬다. 말하자면 개인테러는 극소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용감한 애국자들만이 해낼수 있는 신성한 사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단순한 민족주의자 선장은 점차 민중을 발동하는것을 주요한 투쟁수단으로 삼는 공산당을 우러러보게 된다.    남경의 중국륙군군관학교에서의 생활은 선장의 성격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는 여기서 김두붕, 한빈 등 이름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며 진일보 맑스주의서적을 탐독하게 된다. 1936년 학교를 졸업한 선장은 국민당군대 소위로 임명되여 《8·13》상해보위전에도 참가하지만 국민당의 무저항정책과 염통 곪기는줄은 모르고 그 식이 장식으로 벼슬 오를 궁리, 천량 모을 궁리만을 하는 국민당군대의 썩은 늪같이 침체된 생활에 혐오를 느낀다.    무한의 함락전야, 중국공산당과 주은래동지의 창의밑에 1938년 10월 10일, 국민당정부의 비준을 맞고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관할구역에서 정식으로 성립을 선포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관할구역에서 활동하게 되였는데 맨 먼저 동방의 마드리드로 불리우고있는 무한을 보위하는 전투에 뛰여든다. 선장은 전우들과 함께 항전표어를 쓰기도 하고 극을 공연하기도 한다. 이러한 항일투쟁의 물결속에서 선장은 마침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런데 선장은 일본어에 능숙한 까닭에 국민당군대 군단사령부의 통역― 수양아들 노릇을 하게 된다. 국민당의 소극항전, 적극반공의 정책과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선장의 가슴에 분노의 씨앗을 묻어준다. 그는 목숨을 걸고 정의의 전쟁에 뛰여들어서까지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신세가 한스러웠다. 이는 또한 국민당관할구역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공통한 심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무렵 조선의용대 대원들속에서는 해방구로 넘어가야 한다, 팔로군과 합류하는게 유일한 출로이다라는 사상조류가 대두한다. 이런 정세하에서 팔로군총부는 조선의용대를 락양을 거쳐 황하를 넘어 태항산혁명근거지에 들어오도록 배치한것이다.    《격정시대》는 1941년 12월의 태항산전투까지 기록하고있으며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주인공 서선장― 김학철이 조선의용군에 있어서의 체험의 끝이 태항산 전투, 즉 1941년말의 호가장전투까지였기때문이다. 《격정시대》를 두고 김학철 자신은 모종 원인으로 조성된 력사의 공백을 메울수 있는 문헌적가치를 가지고있다고 자신한바 있고 김윤식은 조선의용군에 관한 제반 연구기록들과 대조하면서 조선의용군의 《초창기 모습을 생생이 증언한것이 김학철 기록의 최대강점이다》라고 하면서 특히 《조선의용군의 일단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리유로 중국공산당의 집결지 태항산까지 넘어가게 되였는가를 증언하는 기록은 김학철의것이 유일한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유일하다함이란 체험적이라는 뜻이다》 라고 평가한바 있다.* 《격정시대》의 예술성에 관해서 김명인은 이 작품의 열린 서사형식은 혁명적락관주의의 주조(主潮)를 아주 잘 뒤받침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앞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김학철의 소설들은 다성적이고 개방적인 서사구조를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 그것은 우리 전통의 민담과 같은 서사구조에 가깝다. 작자는 마치 옛날의 이야기군처럼 자신의 삶속에서 보고 듣고 직접 겪은 수많은 이야기거리들을 한보따리 싸안고서 큰 줄거리가 흘러가는 중간중간에 틈나는대로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 이야기거리, 즉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또 발전하면서 소설 전체를 넉   *김윤식: 《항일빨지산문학의 기원- 김학철론》 (《실천문학》 1988년 겨울호, p.412.) **김명인: 《어느 혁명적 난관주의자의 초상》 (《창작과 비평》 2002년 봄호, p.249.)   넉하게 열어놓는데 기여한다. 또 이러한 이야기에 걸맞는 해학과 골계의 민중적정서가 이 소설의 도처에서 지천으로 배어나오고있으며, 그 정서를 가능하게 하는 민 족적풍속과 생활에 관한 묘사가 전편을 관류하고있다.》*                       (7)      김학철은 1985년 잡문《한담설화》8의 발표를 계기로 본격적인 산문창작에 들어서고있는데 지금까지 수백편의 산문작품을 내놓고있다.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촉박함과 변화무쌍한 현실은 작가로 하여금 소설보다 쾌속반응을 보일수 있는 산문작품의 창작에 전념하게 한듯싶고 그의 파란만장의 인생과 풍부한 생활체험은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해주고있는듯싶다.    김학철은 《불같이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은 눈귀가 찢어지게 미워하지도 못합니다》리고 말한바 있다. 그는 극한적인 상황속에서도 정의적인 위업의 불패성을 믿고 끗끗하게 살아왔다. 그는 정직한 인간에게는 불같은 사랑을 안겨주었고 비리와 부정, 권세와 폭압에는 추호의 굴종과 아첨도 없이 서리발치는 증오와 저주을 퍼부었다. 김학철은 체면치레나 세속적인것을 싫어했다. 그는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격이 서있고 가장 평민적이면서도 높은 인간적향기를 풍기는 그러한 인격자였다. 아마도 수필《불합격 남편》은 그 인격미의 일면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인것 같다. 김학철은 가끔 친구들의 부인들로부터 《불합격 남편》이라는 말을 듣는다. 《불합격 남편》이라고 롱질하는데는 그가 정치풍파에 부대껴온 까닭에, 한쪽 다리를 잃은 까닭에 부인에게 무척 고생을 시켰다는 리유도 있겠지만 평소에 안해를 너무 무뚝뚝하게 대한다는 리유도 있었다. 이에 김학철은 여러 가지 사랑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나는 사내대장부라는게 녀자들앞에서 체통값을 못하고 너절하게 노는 것을 아주 경멸한다. 그러기에 불합격 남편소리를 들을지언정 시시껄렁한 짓은 아니한다. 진정한 남성미란 수사자와 같은 기백 또는 위엄과 갈라놓을수없다.》    지금도 연길시 시민들은《10년 동란》의 마당에서 무지막지한 반란파들과 맞서서 송엽장을 내던지고 앉아버티던 김학철의 쇠쪽같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사회의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한 그의 저주의 감정과 비판정신은 정의의 위업에 대한 헌신성과 정비례되는것이니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량면처럼 김학철의 인격을 구축하고있다. 그는《부작용》,《간판왕》,《이름 가지기》와 같은 잡문에서 인습적이고 메마른 삶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해학적여유가 있는 윤택한 삶을 호소하고있다. 《인민극장, 인민공원, 인민병원, 인민방송국, 인민출판사, 인민비누… 맨 인민투성이다. 인민이 붙잖으면 인민적이 못되는가? 꼭 붙여야만 인민적이 되는가?》 천편일률적이고 타성이 짙은 사유방식에 대한 혐오이며 부정이다. 작가는 길가의 수수한 간판에도 기계적이고 극좌적인 사유방식을 발견하고 꼬집는가 하면 또《쪼로로기》와 같은 잡문에서는 도시의 포장도로건설에서의 무계획성과 그 페단을 들고나온다. 그 무계획성― 고루한 소생산자적건설의식으로 말미암아 자금, 인력의 랑비는 물론이요, 행인들에게  주는 불편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잡문은 그러한 무계획성을 수술에 무책임한 의사로 말미암아 자꾸만 배를 가르고 재수술을 받아야 했던 한 흑인병사가 참다못해 아예 배가죽에 쪼로로기를 달아달라고 애걸했다는 이야기에 비유하고있는데 전편에 걸쳐 해학과 유모아가 흘러넘치고있다. 그리고 《한담설화》, 《천양지차》, 《청첩공포증》, 《인육병풍》, 《날조의 자유》와 같은 잡문에서는 봉건적인 문벌관념, 특권계층들의 부정부패와 소인배들의 날조와 무함(?陷)을 여지없이 고발, 비판하고있다.    《그 나무에 그 열매》요, 《글은 바로 그 인간》이다. 우리는 김학철의 잡문들을 통하여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는 고상한 인물, 영웅적인물들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인류사회의 진보를 저해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신랄하게 비웃고 매섭게 채찍질하는것을 그 사명으로 알고》있는 김학철의 작가적 신념과 인격을 보게 된다.    김학철의 정치, 미학적 관점들은 《동남북풍》, 《문학도끼리》, 《작가수업》,《아름다운 우리 말》, 《형상성과 유모아》, 《한 녀류작가》등 잡문, 수필들에서 집중적으로 볼수 있다. 김학철은 경건한 맑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를 자기의 유일한 창작방법으로 내세우고있다. 김학철은 사회주의제도의 건립을 위하여 자기의 한평생을 바쳤고 또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부정은 자기 평생에 대한 부정과 환멸로 직결되는만큼 숙명적으로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제도를 옹호하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자기의 피로써 바꿔온 사회에서 극심한 상처를 입었고 또 사회의 비정과 비리를 《눈이 찢어지게》 미워하고 비판하면서도 공산주의는 인류의 최고 리상이라고 굳게 확신하고있으며 맑스주의를 장악한 사람만이 사회현상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판단, 가장 심오한 분석을 할수 있다고 단언하고있다.     김학철의 문학수업에 있어서의 정신적기둥은 중국쪽으로는 로신이고 조선쪽으로는 홍명희이다. 상해시절부터 로신을 숭배했고 로신의 많은 작품을 번역한 김학철은 로신에게서 심오한 철리, 분명한 애증의 감정, 날카로운 기지와 풍자수법을 배우고있다. 또한 책상머리에 사전류(?典?)의 책들과 함께 늘 《림꺽정》을 놓고있는 김학철은 홍명희로부터 우리 언어의 풍부함과 아름다움을 배우고있으며 소설적인 기량을 배우고있다. 하기에 김학철은 《조선작가들중에서 예술기량과 문장수단이 가장 뛰여난분이라면 홍명희선생을 나는 첫손가락에 꼽고싶다》, 《림꺽정》에는 남북조선 어느 사전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멋진 어휘들이 거의 무진장으로 들어있어서 우리 말의 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이다》라고 거듭 절찬을 보내고있다.     김학철은 소설의 중심은 인물이며 형상성과 유모아는 소설의 생명이라고 보고있다. 그는《작가수업》이라는 수필에서《장비는 장비고 조조는 조조다. 의관을 바꿔서 장비를 정승의 자리에 올려앉혀보라. 웃음거리밖에 더 될게 있는가. 조조를 장비의 자리로 옮겨놓아도 역시 마찬가지다. 매개 사람이 다 자기의 개성, 특질, 특징을 갖고있다. 개념적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인형, 악인형, 당일군형, 선진분자형… 이런 판에 박은 “형”으로 산 인물을 대체한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간부과, 인사과의 앙케트이다. 작가협회계통이 아니라 조직부, 인사국 계통이다》라고 하면서《인물이 없는 사건은 유령의 잠꼬대》라고 하였다. 또한 김학철은 《나는 따분한 설교는 딱 질색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파금의 소설은 격정으로 차있으나 우스개의 부족이 옥의 티이고 똘스또이의《전쟁과 평화》는 세계명작이지만 공제회(共??)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목은 참기 어려우며 빅또르 유고의《레 미제라블》 역시 명작이지만 빠리의 하수도를 지루하게 묘사한 대목은 참기 어렵다고 하면서 고골리의《따라스 불리바》, 숄로호브의《고요한 돈》에서의 적절한 숨돌리기수법을 찬양하고있다. 따라서 김학철은 소설은 약이 아닌만큼 억지로 먹일수는 없다고 하면서《웃음속에 철리가 담긴 소설은 읽지 말라 해도 읽는다》고 하였다.    김학철은 또 《아름다운 우리 말》― 조선어의 형상성과 표현력을 확신하면서 작가의 언어수양을 강조하고있다. 그는 우리 말에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말들이《강변의 조약돌과 같이 많고 하늘의 별과 같이 많다》고 하면서《문학의 기본적인 바탕은 언어이므로 이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이에 대한 수양을 쌓는것을 게을리한다면 그것은 베실로 수를 놓겠다는것과 마찬가지일것이다》라고 비유하고있다. 우리 민족에 고유한 속담 하나하나에서 팔진미(八珍味)의 하나인 웅장(熊掌)과 같은 맛을 느끼기도 하고 길가에 나붙은 간판 하나, 아낙네들이 주고받는 말 한마디도 무심히 보고 듣지 않는 김학철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말씨에 꽤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는 수필《아름다운 우리 말》에서《이미 써놓은 아름다운 말을 애써 깎거나 고쳐서 밉게 만들》고있는 일부 편집자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고있다. 그리고 한때 편집자들이 자기가 쓴 글은 한글자라도 제 마음대로 고치는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만약 고칠 경우에는 어김없이 전화로 문의(??)를 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연변문단에서 김학철의 에피소드로 전해지고있다. 아무튼 자기 모국어에 대한 사랑, 언어구사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탐구로 하여 그의 작품을 읽으면 마치《곰의 발바닥― 웅장》처럼 그 뒤맛이 그윽한것이다.                                (8)      이상과 같이 필자는 김학철의 작품에 반영된 그의 경력과 체험, 그의 창작의 길, 그의 정치 미학적 관점을 통하여 김학철과 그의 문학의 총체상을 그려보려고 하였다.    김학철의 일생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거의 다 밤소나기 퍼붓는 령마루에서 래일 솟을 태양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파란만장의 눈물겨운 일생이며 극한적인 상황속에서도 정의적인 위업의 불패성을 믿고 설음과 고통, 험악한 인간의 운명을 이겨낸 일생이며 참된 인간들의 회로애락을 문학세계에 옮겨놓은 일생이였다.    작품의 무게는 언제나 그것을 쓴 사람이 겪는 고통의 심도와 정비례하는 법이다. 정직하고 솔직한 성격, 심각한 반성정신, 시류(?流)에 편승하지 않는 그의 독자적이고 끈질긴 탐구정신, 그 어떤 권세와 폭정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의 비리와 부정을 타매해온 그의 예리한 비판정신, 풍부한 자기체험에 기초한 그의 문학의 높은 진실성과 개방되고 철리적이고 유모아적인 그의 사고방식 등은 김학철이란 작가의 인생과 그의 문학의 본질을 구성하고있다. 하기에 김학철은 일제시대에서도, 미군정의 치하에서도, 그리고 《평양시절》과 중국의 졸속(拙速) 사회주의시대에도 늘 밑창 모를 괴한(怪?)으로 인정되였던것이다. 하지만 참된 삶의 가치관에 바탕을 둔 김학철의 정신과 그의 문학은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흐름에 있어서의 하나의 빛나는 리정표로 되며 우리 문학에 솟아오른 하나의 거대한 산맥으로 된다.   2002년 6월 15일   김호웅: 평론가, 문학박사,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부장, 교수.                           참고문헌: 김호웅: 《조선의용군항일투쟁의 예술적기념비》(《아리랑), 1989년 제36기) 김호웅: 《김학철론》(《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년 6월)  김호웅:《중국조선족작가―김학철》(일본 와세다대학사회과학연구소 편:《사회과학연토) 제107기, 1991년.)  김호웅: 《 김학철》(한국 《창조문학) 1992년 봄호, 통권 제6호)  김호웅: 《중국 조선족문단의 괴한― 김학철옹》(《장백산)1993.4)  김호웅: 《우리민족의 영웅, 우리문학의 산맥― 김학철옹》(《천지) 1997.2)     김호웅: 《우리문단의 어른― 김학철선생》(《장백산) 1997.4)  김호웅: 《불굴의 투혼― 김학철옹》(《장백산) 1998.1)  김호웅: 《저명한 작가 김학철》(한문판 《천지) 2001.2)  김호웅: 《중국 조선족문단의 괴한― 외발의인 김학철》(한국 《동방문학) 2001. 2)                                     2002년 6월 15일    
148    김학철산문의 유모아적풍격 (장정일) 댓글:  조회:706  추천:0  2016-04-22
  김학철산문의 유모아적풍격   장정일        머리말             사람에게 있어 심태만큼 중요한것도 없다. 사람은 이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산다. 사람은 보통 무사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모순이 없을리 없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사람은 고달프고 외곡된 생활뒤에는 항상 분홍빛 래일이 반겨주리라고 기대하기가 일쑤이다. 아리랑고개가 없기를 바라고있더라도 하나쯤만 있기를 바라는것이다. 모순이 끊일새 없는 현실은 그러나 번마다 이런 선량한 념원이 비현실적인 환상임을 증언해 주군 한다.     김학철의 자세는 남다르다. 김학철은 이런 허황한 환상과는 인연이 없이 아리랑고개뒤에는 또 하나의 아리랑고개, 아니 무수한 아리랑고개가 기다리고있기에 태만, 즉 는 금물이라는 자세이다. 그는 시종 정신적인 태만자와 노예로 되기를 거부하며 생활에 대한 과 을 잃지 않는, 과 의 삶을 산 소설가, 산문가이다. 중국 조선민족문인들중 김학철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가는 없다. 그만큼 그는 독특한 삶과 문필로 저만큼 앞서나가면서 우리의 정신문화생활에 지울수 없는 파문을 남기였다. 역수행주, 불진즉퇴(逆水行舟, 不進則退;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는 멈춰서면 밀려내려간다)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그는 치렬하고 정열적인 작품활동으로 한생을 불태웠다.     미소를 머금고 용기있게 세상을 관조한 김학철은 생활의 비극과 부조리를 명쾌한 유모아로 초극시킨 산문가이며 비극을 희극으로, 희극을 비극으로 바라본 혜안의 작가였다. 김학철이 자주 화제로 떠오르는건 우연이 아니다. 그와 그의 문학에 관한 무성한 화제자체는 그가 영향력이 있는 작가다운 작가라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깨여있는 존엄의 목소리, 어딘가 남다른 탐구의 발걸음소리, 현실을 앓는 정신적고뇌의 진실한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린색하지 않다. 사회는 아리랑고개와는 무관한, 도수가 모자라는 슴슴한 화제나 공연한 몸짓, 시류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가볍게 변하며 어딘가에 천착을 못하는 무색무취의 작품이나 인물에 부질없는 애정을 쏟아붓지를 않는다.     김학철과 그의 소설문학, 산문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되고있다. 그는 랭철한 눈으로 끊임없이 신화의 세계를 진실의 세계로 환원하였다. 역경에 몸을 사리지 않고 생활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부대끼는 동안 그는 나름대로의 사상과 지조, 그리고 예술적인 사유방식과 령감을 획득하였다. 그의 소설문학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이 글에서는 삶과 작품이 많이 닮았고, 강함과 부드러움, 증오와 사랑, 비판과 반성이 씨줄과 날줄로 교차된 김학철의 치렬한 산문정신을 유모아적인 풍격이라는 측면을 주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삶과 문학의 일체화             김학철의 산문작품(산문, 수필, 칼럼, 잡문으로 요약됨)을 분석하기에 앞서 그의 남다른 생애를 개략적이나마 돌아보는것은 매우 필요한것이다. 그의 소설도 크게 례외는 아니지만 그의 허다한 산문작품의 경우 회상록같은 자전적성분이 다분하다. 그는 현재의 시점을 통해서 자주 자신의 과거를 불러온다. 만년의 그의 산문은 그 자신의 인생사광맥이 채굴되여 원숙기의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측면이 뚜렷하다. 타방으로 그의 리성적사고나 예술적스찔 또한 그의 성장과정과 그의 해당시기 주변환경이나 인물들과 긴밀한 관련을 가진다.     조선 원산의 한 누룩업자의 가정에서 태여난 김학철은 서울 보성고등학교(고중)재학시 항일구국의 격정을 안고 중국 상해로 건너오면서 파란만장한 인생려정이 시작된다. 그는 식민지시대의 청년시절부터 력사의 중압을 한몸에 안고서 지성적인 열혈사나이의 반항적인 삶의 스타트를 뗀다.     청년 김학철의 삶의 동기가 문학과 긴밀히 잇닿아있었다는 사실은 예시해주는바가 크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라는 산문에서 김학철은 서울 보성고 재학중에 라는 리상화의 시를 접하며 나라 잃은 절통감을 느끼였으며 입센의 에 나오는 이라는 말에 열광하기도 했다고 쓰고있다. 상해로 건너와서는 또 뻬데피의 시 에 매료된다.(민족출판사 간, 제2-3페지) 라는 글에서는 또 자신이 30년대에 서울집을 뛰쳐나와 독립운동의 대렬에 뛰여든것은 졸라의 글 에도 힘입은바가 크다고 고백한다.(창작과 비평사 간, 제184페지) 이 모든것은 30년대의 시대적상황과 함께 문학의 순수와 격정이 그를 항일구국의 성전에 나서게 한 기폭제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초기 반일테러활동을 거쳐 군관학교에서의 학습, 졸업뒤 무한과 태항산 등 광활한 지역에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투신하면서부터 그는 맑스주의의 철학적안목의 수립과 더불어 국제적인 반파쑈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받는다. 생사결투라는 극한상황에서만큼 인간의 사상, 정감의 참모습이 잘 보일 때는 없다. 엄혹한 시련의 시기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숙성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전투에서 부상당해 일본감옥에서 한쪽다리를 잃지만 여기서 그는 오히려 당당히 직립을 하여 이 세상을 조감할수 있는 정신적인 협장, 그 어떤 중압이나 쓰라림도 슬기롭게 풀어나갈수 있는 유모아적인 식견과 기질을 구축한다. () 누이동생에게 다리절단수술소식을 알리는 김학철의 이 유모아적인 편지는 의미심장한것이다. 파란많은 이 세상에서 사람은 이런 정신적인 을 짚고서 대지에 서야 사람은 비로소 허리가 곧은 삶이 가능하다는 사리를 간과하여서는 아니될것이다. 이때로부터 삶과 문학을 일체화한 김학철의 본격적인 문학생애가 시작된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심각한 인생경력이 있다. 중국의 반우파투쟁에서 에 이르는 암울한 시기에 김학철은 인생의 황금시절 장장 20여년을 무권리와 감옥살이신세로 보낸 기막힌 사연이 그것이다. 복권해서 붓을 다시 들었을 때는 이미 환갑을 넘긴 65세. 모든것을 잃은것 같지만 세상일은 새옹지마라고 큰 무대, 작은 골목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학철의 정신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세상을 보는 안목은 더 승화된다.      (앙드레 모루아 , 문학과 지성사 간, 제83페지)고 폴 발레리는 말했다. 세상을 포기하는 사람이 그러하다면 세상에서 포기된 사람도 사정은 마찬가지일것이다. 도회소식은 시골에 가 들어라는 속담도 있다싶이 김학철은 소외된 삶, 령어의 환경을 거치면서 오히려 이 세상을 리해하는 보다 독립된 정신과 예리한 눈, 그리고 인생의 굴곡과 리해득실을  넘어서는 열린 마음과 유모아적인 시각의 여유를 갖게 된다. 하찮은 리해득실과 허영따위 곁가지들을 잘라버리고 생활의 큰줄기만을 응시하면서 그는 변덕많은 인생, 심지어 흔히 망각의 구석인 감옥풍경까지도 문학의 광재로 포옹하였다. 따뜻한 온실이 아니라 쓰디쓴 인생의 련옥을 지나온 적기적인 투혼이 유모아예술의 꽃을 피워냈으니 그것이 바로 김학철 만년의 산문력작들이다.                               주제와 유모아적풍격             김학철의 산문은 사회비평, 문명비평, 현실투시, 자기비판을 망라하여 다루고있는 주제가 다양하다. 력사의 소용돌이속에서 그는 시종 민족공동체의 운명과 그의 질적향상을 위해 사고와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가 바로 그의 좌우명이며 ()가 바로 그의 삶의 진실한 모습이요, 심경의 진솔한 고백이다.     그의 허다한 산문들은 풍격상 엄격한 리성과 론리를 해학적인 유모아로 풀어나간다는 특점을 갖고있다. 유모아적인 작가가 유모아적인 작품을 낳는다. 김학철은 로신의 , 즉 (, , 연변인민출판사 간, 제316-318페지)를 가장 흠모하는 작가이다. 만년에 소설에서 산문으로 넘어간 모습도 김학철은 로신을 닮았다. 세상의 풍상고초속에서 그는 무너지거나 주저앉기는 고사하고 지칠줄 모르는 유모아의 슬기, 그 오연하고 찬연한 노을로 황혼기를 장식하였다.     유모아는 프리이틀리가 말하다싶이 (프리이틀리 , 중문판 제404페지) 울프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그녀의 견해에 의하면 (울프 , 동상서 제406페지) 김학철산문의 유모아적인 특점에 관한 론의는 물론 이런 정의와 내포를 념두에 두고있으며 동시에 대체로 풍자와 해학, 위트와 기지 등 비교적 넓은 의미에서 그 특점이 조명되여야 할것이다.     개인우상화배격, 획일주의와 절대주의의 거부를 망라한 사회비평의 주제에서 흘러나오는 해학적인 유모아는 김학철의 산문이 력사의 중압과 현실과제를 슬기롭게 소화하며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그의 산문(잡문)의 골자를 이루는 이런 폭넓고 용기있는 사유는 그의 작품이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 사회적인 보편성에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소농경제의 인장(印章)이 박힌 락후된 경제의 토대우에서는 개인우상화나 획일주의적인 사유의 유령이 배회하게 마련이였다. 그 유령때문에 력사는 침통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 청산은 한세대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 유령의 잔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것이다. 김학철의 허다한 산문은 개인우상화의 여파로 남아있는 이런 획일주의, 일치주의의 유령을 가차없이 단죄하고있다. 그의 비판적인 유모아는 생활의 구석구석의 정신적병페를 끄집어내여 수술대에 올리면서 잠든 령혼을 깨워주고 라태탓에 느슨해진 정신의 태엽을 조여주느라 고심한다.     만장일치로 가결이 됐다는, 우리가 흔히 무심하게 들어온 화제가 김학철의 산문 에서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여러가지 만장일치와 만난다. 로마제국 인민회의의 만장일치, 슬금슬금 눈치를 보아가며 마지못해 손을 드는 만장일치, 군관학교 식사시의 일사분란한 기립, 착석의 만장일치, 태평양전쟁시기 일본군국주의의 의 만장일치를 여유있게 떠올리며 작가는 말한다 -         김학철은 참을수 없던 답답한 시절, 그리고 현실의 정신적병리현상을 도처에서 끄집어내 우스꽝스레 전시를 시키는 풍부한 상상력과 기술이 있다. 독자들은 그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무심하던 사유에 발랄한 생기가 부여되게 된다. 유능한 정신과의사같은 그의 예리한 진단앞에서는 이제 아무리 성대한 대회의 만장일치라도 감동을 자아내지를 못한다. 감동은 오히려 몇몇이나마 반대표, 기권표를 던진자의 출현이라는 소식에 기울어지게 된다. 주견을 세울줄을 모르는 가련한 령혼의 먼지낀 정원에 청신한 바람을 주입하듯 김학철은 현실과 사람들 마음속의 치명적인 흠집을 리해하며 보다 높고 넓은 견지에서 간결하면서도 설득력이 있게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새 생활의 바람직한 방향을 토론한다. 허지만 만장일치병은 만만치 않은 병이라는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사람들은 번마다 자기의 병에 수긍을 하고 량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병치료를 루루이 받기는 하면서도 일단 일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또다시 일치병 재발증상을 보이기가 일쑤이다. 독자들은 일치병이 완고한 질환임을 확인하게 된다.     잡문 은 미세한 사물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사회의 비개성적이고 비능률적인 답답한 세태를 풍자한 경우다. 에서 간판은 상호나 단위이름을 알리는 구실을 넘어 일종 제도적병페와 사상적경직성을 나타내는 생동한 전시물의 역할도 수행하고있다. 계획경제하에서 간판은 종적인 소속관계에 주안점을 두다보니 간판글자가 많아질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어느 성, 어느 시, 어느 국, 어느 회사의 어느 상점이라는것을 빠짐없이 렬거하는식이 그것이다. 허지만 시장경제하에서 간판은 횡적인 교류관계에 주안점을 두게 되므로 교류의 능률과 효률을 위해서 간판이란 알아보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간편할수록 좋은것이다. 우리 주변의 흔해빠진 긴 간판에 나라이름, 대륙이름, 심지어 지구, 태양계, 은하계를 덧붙여서 을 터보자는 작가의 역사유의 유모아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운운에 와서는 그 웃음이 눈물로 변하는 비애를 경험하지 않을수 없다.     문학에서 보편성을 띤 개별성은 생명력을 가진다. 이 발표된지는 오라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상은 아직도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간판들을 내걸고 무사태평으로 그날그날을 근심없이 살아가는 팔자좋은 주인들의 행렬은 아직도 길다. 간판글자수가 너무 길다는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확신이 결여하고 삼검불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아직도 일부 지도자들 회의발언고의 식의 장편대론은 내용이 빈약하다. 그 빈약한 내용을 경청하는이들이  단위나 회사에 돌아가면 또 그 빈약한 을 중복하기가 일쑤이다. 우리의 효률이 선진국을 따라잡자면 모름지기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사업의 의의와 능률제고의 원칙에 충직한 간부들이 부쩍 더 많아져야 할것이다. 허구한 날 승진이나 리속챙기기에 골몰하지 않고 소용있는 일을 하나라도 더 찾아하는 간부들이 빨리 더 많아져야 할것이다. 경쟁시대에 장문의 간판의 페해를 모르는것은 비극이다. 그런 비극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것은 희극이다. 약간 바꿔 말해서 경쟁시대에 효률이 뭔지를 모르는것은 희극이다. 그 희극이 사실은 비극이라는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것은 비극이다. 이것이 긴 간판현상에 내재한 일종 보편성이다. 우리의 제도와 마음속에 존재하는 이런 무수한 식의 천편일률과 비효률적인 형식주의를 제거하는 과정이 바로 희비극을 정리하며 현대화와 사회진보를 이룩하는 과정인것이다.      김학철은 사람들 머리속의 진부한 사상과 관습의 비효률성과 후진성을 정신병리학의 수술대에 올리는 한편 사소한 사물에 내재한 희극성과 비극성을 내적론리의 끈으로 한데 묶어내면서 신비한 사색의 쪽문을 열기도 한다. 은 김학철자신이 원하는 옷의 단순성과 운명적으로 차례진 옷의 복잡성이 어우러진 생동한 인생변주곡이다. 옷의 디자인을 톱고 색상을 따지는 현대생활이건만 언제보아도 김학철의 옷은 단벌 남색중산복이였다. 남이 가 그의 소박한 의상관의 전부이다. 그런 그가 풀어헤치는 옷관련 인생경력담은 이채롭다. 소학교 입학때는 한복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 3,4학년부터는 교복, 중학교때에는 특대호 나팔바지, 상해시절은 표표한 청년신사양복, 상해를 떠난 뒤로는 해마다 삼백예순날 군복, 거기에 일본감옥의 적갈색죄수복, 중국감옥의 큼직한 자 찍힌 죄수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뒤로 변함없이 쭉 입은 중산복이다. 고풍스런 시절의 고답적인 뉘앙스, 환상이 부푸는 시절의 랑만, 신사시절의 득의와 순수, 군복시절의 절제, 죄수복에 얽힌 인격수호의 절규, 중산복 간편함의 여유로움이 주마등처럼 현란하게 변주된다. 작가는 자의로 또는 타의로 입어본 옷의 묵은 력사를 들추면서 인간을 말하고 사회를 말하고 인생철학을 말한다. 잘못 입혀진 죄수복에서 해학을 읽어내고 물이 난 중산복을 고집하며 세상을 읽어본다. 그 달관의 초월적자세에서는 독립된 인격과 가치관의 매력이 빛을 발하고있다. 이런 매력으로 말미암아 독자는 한결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지고 든든해진다. 그것은 흔연히 절망의 심연에 떨어졌다가도 대망의 탄탄대로에로 오연히 솟아날수 있는 정신적에너지이다. 유모아적인 달관의 필치는 사소한 옷견지, 심지어 험상궂고 볼품없는 사물도 쓸모있는 로 활용을 하여 산 예술작품으로 변형되게 하는 힘을 갖고있다.           김학철의 산문에는 사회비판, 문화피평을 주제로 한 증오와 고발비판의 유모아외에 개성존중, 인도주의와 인간성 찬미, 그리고 인생의 재미 등을 주제로 한 사랑과 온정의 다정다감한 유모아도 넘쳐난다.             고뇌와 투혼의 인생에도 인륜지락은 찾아오는가. 고진감래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글이면서도 처연한 느낌을 지워버릴수 없게 하는 글이 김학철의 산문 이다. 너무나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온 작가이기에 그의 만년의 손자손녀 사랑은 회심의 미소와 함께 처연한 느낌이 들게 하는것이다.                    절름바리 할아버지와 한쪽다리를 들고 뽀뽀라?  유치원짜리손녀의 요 유모아적인 깜찍한 동작장면은 즐거움일까? 슬픔일까? 랑만일까? 아쉬움일까? 단순한 한 대목이지만 이 대목을 읽는 우리는 달고 쓰겁고 쯥쯜한 력사의 조수가 집채같은 거대한 해일로 밀려오는 착잡한 기분이 들게 된다.     괴테는 말했다. , (요한 페테르 에케르만 , 중문판 제6, 제10페지) 김학철 손녀의 가 바로 특수한 사물,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파악이고 묘사이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장면이 작가의 펜끝에 의해 일종 보편성으로 응축된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에서도 김학철은 외국호텔특실에 초대되였다가 메뉴를 볼줄 모르고 최신식변기를 쓸줄 몰라 쩔쩔 매던 해프닝을 짐짓 다루면서 세계의 다양성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사소한 쇄말사에 유모아적인 생기를 불어넣어 모종 보편성으로 승화시키는 능란한 재치에서 우리는 흉금이 넓은 초탈한 현인의 지혜를 감지할수 있어 마음이 흐뭇해진다.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는 실사구시한 정치가 주덕해, 친일경력이 있는 의 작사작곡자 윤극영의 목숨을 구해준 문정일, 리념은 다르지만 막역지우인 일본감옥친구 송지영, 어려서 만났을 때 이였던 군가의 작곡가 정률성, 반우파투쟁때 몇마디 비판발언을 했던게 내려가지 않아 수십년후에 양해를 구하는 우직하고 고정한 김창걸 등 친구와 벗들과 선배를 다룬 김학철의 많은 량의 산문들은 감동적인 우정과 인정의 주제를 다루고있다. 간혹 우수가 비껴있기도 하지만 이런 산문들은 대부분 인간미가 넘치는 우정의 시편과도 같은 작품들이다. 과장도 축소도 없이 사소한 모퉁이를 건드리면서 령혼이 숨쉬는 산 인물을 그려내는 그의 펜은 끓어넘치는 인간애와 동지애로 뜨겁다. 불의에는 예리한 메스, 의로운이에게는 감동의 샘터로 되는것이 바로 그의 다용도의 펜이다. 작가가 자신의 소년시절 을 다룬 글들은 더구나 흥미진진하다. 그 대상은 혹은 동네처녀, 혹은 친척, 혹은 선배로 다르지만 녀성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하는 소년시절의 장난끼, 모호한 련정, 경모의 정, 청년시절의 흠모의 정 등 에피소드들이 스케치식으로 전개된 의 그 우습꽝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묘사는 작가의 깊은 인간애와 생동하는 감성의 일단을 보여주는것이다.     이렇듯 깊고 순진무구한 인간사랑, 생활사랑의 정감을 지닌 사람과 매서운 항일전장의 투사, 우상숭배의 반대자는 일견 수화상극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것이 바로 내적으로 통일된 인간의 량면이다. 작가 김학철은 그토록 사랑하였기에 그토록 증오하였다. 그토록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증오하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그토록 증오하는것은 또한 그토록 사랑하기 위해서인것이다. 작가로서의 김학철이 사랑하고 증오하는 방식이 바로 유모아적인 방식이다. 그것은 삶의 중압과 부조리와 쓰라림을 지혜로 초극하는 방식이며 그의 삶과 문학을 일체화하며 세상을 포옹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기반성, 자기비판은 세계에 마음의 창문을 연 유모아적인 현자의 생존방식이다. 좁은 울타리를 치고 사는 페쇄적인 인간, 속이 막힌 사람, 언제나 시비를 객관에 밀기만 하는 사람. 하찮은 물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 남의 아픔을 몰라주는 가슴이 차가운 사람은 자기반성을 할줄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기반성을 포기함으로써 자기갱신의 기회도 포기된다. 자기갱신이 없는 사람은 자라지 못하는 사람일수밖에 없다.     현자나 강자는 다르다. 세계로 열린 눈금이 있기에 자기주소를 파악할줄을 알며 쉼없는 인생의 도약을 위해 자기해부, 자기반성 또는 자기비판을 통해 향상의 길을 터가는 여유와 지혜를 안다. 현자에게 있어 자기비판, 자기해부는 아픔이면서도 즐거움이다. 메스는 차갑고 향상은 즐겁다. 현자치고 자기비판을 두려워하는자는 없다. 약자치고 자기비판을 선용하는자는 없다. 현자일지라도 자기비판을 거부하면 우둔한자로 전락하고 약자라도 자신을 반성하면 강자로 거듭난다.     자기반성과 자기개신(改新)의 변증법의 핵은 아마도 실사구시일것이다. 세상에 흔한 성과과장증이나 전과부풀리기 등에 실사구시의 신랄한 메스를 들이대면서 김학철은 자기자신에게도 그 메스를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산문 에서 평양시절 상급문건에 따라 부르기금지에 관한 사설을 썼다가 정률성의 항의를 받던 일을 반성한다. 그는 산문 에서 발행부수가 10만을 돌파했던 중편 과 단편집 이 정령, 풍설봉 두분의 덕택으로 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된 사정을 밝히면서 후에 다시 생각을 해보니 그 작품들은 였다고 혹독한 자평을 한다. 산문 에서 고 자성을 한다. 출간에 즈음하여 쓴 이 산문에서 그는 며 몸둘바를 몰라한다. 그는 이어 장편 를 다시 읽어보니 이라고 말하고 이라고 땅이 꺼지게 등반의 어려움과 자신의 아쉬움을 호소한다. 이밖에 정치리론상의 미숙했던 점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자기비판을 서슴치 않고있다. 반서을 통해 그는 이렇게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기도 한다.     김학철의 자기 반성과 비판에서 류의할 점을 살펴보면 첫째, 이는 옹색한 사리사욕을 떠나서 열려있는 시각으로 행한 반성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이는 하찮은 자아도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전진의 방향을 찾고 에너지를 비축하여 재도약을 기하는 현명한 처사라는 점이다. 셋째, 자기비판을 한다고 해서 모든 성과가 일조에 무너지는것이 아니다. 결론은 력사가 내리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비판이 필요한것은 사람은 자기를 알고 자기의 현주소를 파악하며 장점을 발휘하고 단점을 미봉하면서 바람직한 진로를 모색해야 하기때문이다. 김학철의 반성주제의 산문에도 역시 자강의 웃음과 회오의 눈물이 섞여있는것이다. 반성을 모르고 자기기만과 자기위안만 일삼는것은 슬픈 일이다. 반성을 통해 자기부정에서 자기긍정에 이르는것은 바람직한 삶이다.               기법의 특점             생동한 형상성, 기지있는 유모아, 자연스런 구어체의 기술법은 김학철의 산문에서 쉽게 감지되는 기법상의 특점이 아닌가 한다. 특히 그의 산문창작의 효시라고 할수 있는 산문  는 그 제목자체가 시사해주는바가 있다. 그의 산문 전체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의 허다한 산문이 한담설화의 양상으로 전개되는것은 사실이다. 달밝은 밤 마을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한담을 하고 설화를 이야기하듯 하는 이 구어체의 한담설화식기법은 김학철의 문체 고유의 특점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얼음장같은 비판도, 다정다감한 회상도, 생동하는 인물묘사도 많은 고사, 일화, 일사, 자료가 동원되는 그의 한담설화식기법에 의해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게 전개된다. 그것은 정인군자가 올방자를 틀고앉아 정색을 하고 딱딱한 설교를 하는식의 지엄한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에 나오는 호한들처럼 염천에 나무그늘에 앉아 앞가슴을 헤치고 부채질을 하면서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친구와 마음을 주고받는 독자친화적이고 인간적인 부드러운 기법이다.     이런 부드러운 기법은 그러나 회상, 련상, 비약, 역설, 능청, 야유 등 작가의 예술적사유와 사상정감의 기복에 따라 날카로운 메스를 낳기도 하고 웅혼한 리성의 목소리를 울리게도 하고 눅진한 인간애의 난류가 흐르게도 한다. 이런 기법이 국계를 넘나들며 엮어진 그의 전기적인 일생의 그 무진한 광맥을 광채로운 산문예술로 변형시키기에 안성맞춤이였음은 물론이다.     타방으로 이런 한담설화식의 기법은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중복되면 단순화의 한계에 부딪칠 념려도 없지 않다. 문학이나 예술이나 발전해야 하고 변화가 필요하고 모종 의외성(意外性), 즉 파격이 이루어져야 생명력이 있다. 한담설화식은 장점이면서도 너무 중복되면 한계를 초래할수도 있다. 산문은 언제나 작가의 개성이 나타나는 반면에 신변잡기나 사상의 과다로출 또는 지식라렬, 론리위주의 건조한 경향에 기울어질 위험도 아울러 갖고있다. 따라서 작가는 기법을 예술적으로 확대하기에 노력함으로써 작가의 정신적에너지를 보다 다양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방출할 자유와 여유를 확보해야 하는것이다. 김학철의 산문이 다 한담설화식인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무튼 그 한담설화식필치는 장점이자 한계인 일면도 없지 않아보인다. 그리고 일부 비예술적인 직설의 로출도 그의 일부 산문의 예술성을 저하시킨 원인이 아닌가싶기도 하다. 문학이 함축성의 예술이라 할 때 독자들이 보다 활성화한 예술사고와 보다 다양한 형식을 통해 보다 섬세하고 암묵적인 정신의 교류를 기대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것은 정당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맺는 말             지적인 풍토, 리성적사유의 풍토가 척박한 우리의 상황에서, 력사적으로 형성된 획일주의적인 사유의 관습이 아직도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김학철산문의 출현은 필연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것은 격동의 동북아대지를 전전하면서 력사의 무게를 지니게 된 세련된 령혼의   귀중한 창조물이다. 로신의 굳센 정신과 의 활달한 문체를 닮은 그의 유모아적인 산문은 그의 높은 사상예술성과 더불어 독립적인 진정한 작가정신을 정립하고 지식인으로서의 현실직시의 사명감과 용기를 키우며 우리 고유의 산문 전통과 풍격을 확립함에 있어 개척적인 의미를 가진다.     정신의 를 거부하며 고뇌의 한생을 산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이미 타계하였지만 고뇌는 남아있다. 그 고뇌의 바통은 현대화, 세계화라는 변혁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그 바통엔 협장을 짚은 한 용기있고 식견이 있는 작가의 웃음과 눈물의 온기가 남아있다. 아리랑고개가 있는한 그 바통은 릴레이로 이어져야 할것이다.     삶을 고뇌하고 시대를 고민하고 인간을 탐구한 김학철의 산문은 직립한 인간의 용기있는 사상과 향기있는 예술혼의 씨앗을 묻었다. 그 씨앗이 자라는 대지는 척박하지 않고 적막하지 않다. 키돋움하는 오곡백과, 무연한 초지와 무성한 수림, 그리고 푸른 하늘의 이랑진 구름이 함께 할것이다.                                                                                          2002년 7월                                            
147    김학철선생의 인격적매력 (김동훈) 댓글:  조회:1052  추천:0  2016-04-22
김학철선생의 인격적매력                ― 그의 서거 일주기를 기념하여   김동훈           김학철선생이 눈을 감으신지 벌써 일주기가 가까와온다. 《최후의 분대장》의 타계와 더불어 이제 고전적의미에서의 혁명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그 시대를 가장 사내답게 살아간 척각의 로인,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고 만장파란을 헤쳐가며 그 시대가 준 과제를 가장 훌륭히 리행했던 한 진정한 투사의 사상과 비판리성, 철의 투지와 절개, 그리고 선의 위력과 악의 패배를 신념화했던 그 락천성과 독특한 유모아는 밤하늘의 별처럼 다음 시대를 만들어갈 젊은 주인공들의 삶의 앞길을 비쳐주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학철선생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세기적위인이며 거인이였다. 우상화된 전설속의 가상적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몸가까이에서 항상 삶의 체취를 감지할수 있었던 그런 근엄하고도 친절하신 범부아닌 범부였다.     내가 김학철선생을 처음 알게 된것은 20년전에 《건국후 조선족소설문학의 번영발전》이란 중편론문을 쓸 때였다. 김학철선생의 소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하는것이 우선 문제로 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이미 공개된 《조선족문학개관》에서 김학철선생의 작품은 작가의 신분이 《조선교민》(그후 1985년 중국공민으로 개적―필자 주)이라는 리유에서 외면당하였던것이다. 그러나 나는 론문 집필과정에서 김학철선생의 소설창작을 빼놓고 5,60년대의 조선족소설문학을 운운한다는것은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닐수 없음을 느꼈기때문이였다. 하여 당시 문학예술사업을 주관하고계시던 주위선전부 장일민부부장을 찾아가 김학철선생의 작품들을 조선족소설론에서 반드시 중점적으로 취급해야 할 리유를 말씀드렸더니 사려가 깊고 명석하신 장일민동지께서는 당석에서 나의 견해에 전적인 지지를 표시했다. 어설프게 씌여진 나의 졸고가 《중국조선족 문학예술개관》(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 30주년 기념론문집)에 발표된후 그것이 인연이 되여 김학철선생께서는 뒤늦게 연변문학평론계에 진출한 이 미숙한 후배를 알게 되였고, 또 자기의 작품집이 새로 출간될 때마다 《김동훈선생께》라는 이름을 박아서 꼭꼭 한책씩 보내주시였다. 그후 나는 《귀신협회》(내가 주석직을 맡고있는 연변민간문예가협회를 모두들 악의없이 이렇게들 불렀다.)의 번다한 사무와 대학교에서의 학술연구에 집념하다보니 한동안 현장평론에서 거의 손을 떼다싶이 하였고 비평계와의 련계도 뜸해졌다. 그러나 김학철선생은 종전과 다름없이 나를 사랑해주었고 급한 사연이 있어 혹시 찾아가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진지하게 지난날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1996년 12월 초순 어느날, 김학철선생을 찾아간 나는 그의 서재에서 《20세기의 신화》가 이제 곧 한국에서 출판될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언급하실 때 선생은 저으기 흥분하고계셨다. 그의 생전에 마감으로 찾아뵈온것은 지난해 5월 23일, 마침 밀양문화원의 초청으로 선생이 한국행을 준비하던 사흘전이였다. 그날은 한국고전문학의 석학이신 소재영교수와의 특별기약에 의해 담화가 이루어진것이다. 건강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으나 기분이 매우 좋으시여 장장 두시간이나 줄기차게 지난날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였다. 우선 서울 고학시절부터 시작하여 유도복을 넣은 트렁크 하나 들고 《왕정복고》를 위해 상해로 망명갔던 이야기, 항일구국의 진리를 찾아 팔로군을 찾아간 이야기, 태항산의 어느 한 전투에서 적군에 끌려온 학도병의 시체를 들추다 잡낭에 들어있는 수진본 《발가락이 닮았다》를 보고 그 너절한 작자에게 침을 뱉고싶었다던 이야기, 포로가 되여 나가사끼형무소에 끌려가 자기의 절단된 다리가 백골이 되여 나딩구는것을 보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석방후 서울에서의 문필활동, 평양에서 김사량, 리태준과 나누었던 친절한 교분…등에 이르기까지 한 청년이 동아세아대륙을 무대로 간난의 전장을 종횡편력한 궤적을 흥미진진하게 엮어나갔다. 그런데 10년동안 갇혀있던 추리구감옥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으셨다. 다소 억제하는 기분이였다. 처음 찾아온 이방 손님에게 그 지리한 사회주의의 감옥생활을 더 상기시키고싶지 않은 모양이였다. 작별을 고할 때 척각의 로인께서는 목발에 의지하여 우리와 함께 즐겁게 기념사진을 찍고 또 나의 명함장도 4장(몸에 소지한것이 모두 4장뿐이였다)을 다 두고가라시며 이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좀 당황했다. 선생을 위해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데 도리여 선생께서 이 불민한 후배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까지 해주시겠다니? 그러나 나는 더 심각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후날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서글픔과 막연한 예감에서 비롯된것이리라고 생각하면서 소재영교수와 함께 조용히 그의 서재를 물러나왔다. 듣자니 그후 며칠이 지나 김학철선생은 한국 밀양에 가셨다가 건강이 악화되여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고 석달만에 중국으로 이송되였다고 했다. 돌아오신후 선생께서 《일체 면회를 사절》하고 절식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조와 불안속에서 나날을 보내던중, 9월 13일 그의 아들 김해양씨를 통해 창비사에서 새로 출간한 그의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을 증송받았다. 책 내표지에 씌여진 선생의 친필서명을 통해 선생의 체취를 느낄수 있어 참으로 고마왔다. 답례 겸 문안으로 댁에 여러번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일반 전화련계가 단절된 때였다.     9월 25일 오전 11시에 선생댁에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선생이 병이 위독하여 새벽에 연변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나는 불안한 예감으로 안절부절하다가 오후 4시 30분에 연변병원 로간부병동을 직접 찾아갔더니 아아―선생께서는 방금 50분전에 심장의 박동을 멈추시였다고 한다. 김학천주석을 비롯한 작가협회 임직원 몇분이 선생의 유체를 새하얀 천으로 싸서 침대에 눕혀놓고 후사를 상론하는중이였다. 예기치 않았던 나의 갑작스런 도래에 작가협회임직원들이 일제히 놀라는 표정이였다. 선생께서 자기의 사망을 《비밀에 부쳐달라, 절대 밖에 소문을 내지 말라》,《부고를 내지 않는다, 추도식을 하지 않는다, 일체 부조금을 받지 않는다》는 유언이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가 하고 당황해하는것이였다. 내가 《스스로 불안한 예감이 들어 찾아온것이니 모두 다른 걱정을랑 말라》고 안심을 시키고 있는데 뒤따라 류연산씨가 병동에 들어섰다. 선생의 부인과 아들 김해양씨가 흰천으로 싼 얼굴부위를 풀어놓고 나와 류연산씨에게 선생의 최후의 용안을 첨앙하도록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말쑥하게 닦은 얼굴, 말짱히 밀어버린 머리, 오뚝 솟은 코마루, 꼭 다문 입술, 퇴색한 남빛 중산복… 선생의 모든 차림새가 항일의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던 《최후의 분대장》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는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옆사람과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자진 절식을 단행해오다가 이틀전에 관장을 해서 뒤까지 깨끗하게 씻어내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던것이다. 참으로 모질고 독하신분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깨끗하게 살고 깨끗하게 돌아가시였다. 인생의 부귀영화, 권세리욕에는 티끌만치의 미련도 없이 오로지 진리 하나만을 믿고 살아오다가 이제 량수청풍으로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예까지 생각하니 온가슴에 슬픔의 파도가 출렁거렸다.     《살아서 고생만 하다가…대약진 땐 〈반동작가〉라는 모자를 쓰고 도서관의 잡일을 하면서 쌀이 없어 점심을 그냥 굶고 다녔지요. 그 어려운 때 문화처 박찬구서기가 매일 벤또를 두개씩 싸가지고 와서 남몰래 저분을 대접했었다우. 조금이라도 자식에게 밥을 더 멕이겠다고 저분은 얼마나 배고픈 고생을 많이 했던지…으흐흑!》 옆에 앉아계시던 선생의 부인께서 갑자기 흐느끼며 하시는 이 말씀에 나도 그동안 참고있던 울음이 보물 터지듯 왈칵 쏟아져내렸다.     얼마후 령구차가 와서 선생의 유체를 모시고 경도릉원을 향했다. 허술한 령구차는 언덕길에서 줄창 덜컹거렸다. 오래 쓴 낡은 차였다. 덜컹거리는 차바퀴소리를 들으며 나는 더욱 서글퍼졌다. 장장 한세기를 세 나라를 넘나들며 고학, 망명, 류혈투쟁, 투옥, 불구, 석방, 필화, 재투옥의 다난한 리력으로 점철된 그 길고도 넓은 시공간을 독특한 물리적, 인간적체험으로 살아온 거인이, 명문상으로 연변에서 유일하게 《로홍군간부》의 고급대우를 받는다는 이 최후의 항일투사가 이렇게 허술한 령구차에 실려 단지 안해와 아들과 후배동료 몇사람의 인도를 받으며 영영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길을 가시는것이다. 위인의 유체를 모셔가는 행차가 너무 간소하고 초라한게 아니냐? 아니,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오히려 보통사람과 같이 청빈하게 살다가 청빈한 몸으로 조용히 천국에 가심이 선생의 진정한 바람일수도 있다. 다행히 그날밤의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추석전야의 둥근달이 선생의 청아한 모습으로 변하여 천공에 높이 걸려있었다.     이상 선생과 나의 만남은 반디불같은 인생의 한 순간에 불과하였고 선생에 대한 나의 인상 역시 극히 편린적인것들이였다. 그런데도 나를 포함한 수많은 문인, 선생의 표현을 빌면 《이제는 적어도 한개 군단》이 넘을 지성인들의 마음이 선생에게 확 쏠리는것이다. 그의 말, 그의 글, 그의 사상은 거대한 자석처럼 우리 민족의 선배와 후배 모두를 흡인하고있다. 하다면 이 척각의 로인이 투사, 거목, 위인으로, 민족의 정신적기둥으로 추앙되는 리유, 그 인간적매력은 어디에 있는것일가?     김학철선생의 삶의 행로를 살펴나가는 동안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것은 그가 지닌 비판리성과 불의에 대한 도전정신, 진리에 대한 집요한 추구였다.     선생은 아들 김해양씨에게 남긴 마지막 유서에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고 절절히 호소했다. 이것은 그의 삶의 신조이고 철칙이며 그의 인생을 지배해온 좌우명이였다. 그가 걸어온 행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더듬어보자.     비운의 소년시대 김학철에게 주어진 첫번째의 시대적과제는 어찌하면 망국노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조선백성이 편안히 살수 있게 할수 있을가 하는것이였다. 시대적책임감을 지닌 소년 김학철은 리상화의 시를 보고 한때 《지금은 남의 땅》이 된 빼앗긴 나라를 붓으로 되찾자고 생각했고 좀더 커서는 《빼앗긴 땅을 붓으로 찾지 못하면 총으로 찾자!》(《나의 길)제3페지)고 결심했다. 약관을 바라보던 시절에는 윤봉길, 서원준, 안몽룡 등의 반일테로사건으로 가슴이 들떠있었다. 《태극기 휘날리는 상해림시정부》가 그의 《마음의 메카》로 되였고 황포군관학교가 오매불망하는 《예루살렘》으로 되여버렸던것이다.(《최후의 분대장) 제92페지)《인간도처유청산》이란 시구를 념불처럼 외우며 스스로 담력을 버텨주고 유도복을 버젓이 챙긴 뒤에 례사롭게 《휘파람을 불며》 가출을 결행할 때 그는 이미 자신을 오직 진리 하나만을 위해서 사는 직업혁명가로 상상하였다. 그러나 정작 상해에 도착하고보니 바라고 온 림시정부는 이미 풍비박산이 나고 실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는 다시 반일테로의 전통을 이은 조선민족혁명당에 편입되였으나 그때까지 그는 《왕정복고》를 애국의 진리라고 생각했다. 얼마후 뻬테피의 시를 접하면서 자신이 홀어머니도 돌보지 않고 외국에 망명해 총을 들고 싸우는것은 《왕정복고》를 위해서가 아니라 목숨보다 더 중한 《자유》를 위한것임을 깨달았다. 반일테로의 한계를 느낀 청년 김학철은 바야흐로 블랑키주의에서 탈피하고있었다. 그가 중앙륙군군관학교(교장 장개석)를 졸업하고 장총을 멘 조선독립군이 된것도 대중적인 무장투쟁에 대한 새로운 의욕에서 발기된것이다. 조선의용군에 편입된 나날에 그는 《삼민주의》에는 전혀 흥취가 없었고 오히려 맑스주의리론학습에 각별히 열중했다. 일본 맑스주의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이야기》가 그에게 처음으로 계급의식을 심어주었다.(《최후의 분대장) 제138페지) 항일전쟁의 와중에 그는 비분의 눈물을 뿌리며 맑스의 《프랑스내전》을 읽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고서는 《국가》에 대한 묵은 관념이 와르르 무너지며 앞이 탁 트이는것같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최후의 분대장) 제213페지) 그로부터 그는 맑스주의를 유일한 진리로 믿어왔고 맑스주의를 지침으로 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조선의용군부대가 태항산에 들어가 팔로군부대에 합류한후 상급의 지시에 의해 지은 《추도가》에서 김학철선생은 《진리의 그늘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불멸의 영령》이란 명랑한 시구로써 오직 《진리》를 위하는것만이 항일투사들의 생명으로 약속한 공동한 뜻임을 선언하였다. 후꾸오까형무소에 압송된 그는 혈농이 흘러내리는 썩어가는 다리로 하여 시시각각으로 겪게 되는 모진 고통을 참아가며 끝끝내 민족의 지조를 지켰고 《일제필패》의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선생의 문학선택 또한 투사의 본능적행위였다. 형무소에서 다리를 절단하고 석방된 선생은 《혁명군인으로서의 출로가 아주 막혀버린 고비에서 문학의 길로 전환할 결심을 내린》것이다.(《나의 길) 제5페지) 다재다능하신 선생께서는 해방된 서울공간에서 짧디짧은 1년동안에 《담배국》, 《균렬》 등 10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고 조직의 결정에 의해 월북한후 평양에서 3년, 북경에서 2년, 남과 북, 동과 서으로 전전하는 동안에도 조선문, 한문으로 《군공메달》,《범람》등 여러권의 소설집들을 펴냈다.     1952년 가을 연길에 와 정착한 김학철선생은 4년동안 전직작가의 신분으로 맹활약하면서 소설집 《새집드는 날》,《뿌리박은 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등 다수 발표. 상기 작품들은 거개가 조직의 요구에 응하여 새로운 제도를 찬미하고 선행리념을 설교한것들이였다. 당내부와 사회의 부정기풍에 대한 작가의 회의와 반성은 《괴상한 휴가》로부터 시작된다. 《반우파투쟁》의 명목하에 진행된 지식인에 대한 숙청과 《대약진》,《인민공사》의 광적인 과열상태로 인한 아사자 속출의 비극은 그로 하여금 《초극좌적》소아유치병에 반기를 들고 개인숭배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하였다. 맑스주의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립각하여 그는 《20세기의 신화》라는 반《공명》의 정치비탄소설을 비밀리에 창작하기에 이른것이다. 《철조망으로 둘리지 않은 강제로동수용소에 또 봄이 왔다》로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 작자는 최대의 용기로써 5,60년대의 좌경로선과 좌경로선에서 파생된 제 시책에 대해 비판리성의 홰불을 추켜들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일년전에 탈고한 이 작품에서 선생은 이미 대동란의 징조를 내다보았으며 《100만대 1의 절대적인 렬세에 처하여가지고도 감히 자기의 옮음을 주장할수 있는》 무비의 용기로써 《홀로서기》를 완성하고 드디여 자기의 풍격을 되찾았다. 최삼룡씨의 말을 빈다면 이 작품은 《김학철의 전부의 생명과 정신 실존, 신념과 예지, 독립인격과 비판리성의 결정으로 세상에 창출된것》(최삼룡:《한 지성인의 책임감과 용기))이며 한 맑스주의자의 비통한 울부짖음이였다. 선생의 정치비판소설은 같은 시기 중국문단의 기타 작가들의 비밀창작에 비하여 10여년이나 앞섰다. 한족작가의 경우 비교적 유명한 비밀창작품으로는 필여협의 소설 《9급파도》, 풍자개의 산문 《연연당 속필》, 우한의 시 《반쪽나무》, 목단의 극시 《신의 변형》등이 있다.(진사화:《중국당대문학사 교정》제9장 제1,2,3절) 상기 한족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70년대 전반기에 씌여진것으로서 비밀리에 창작되여 지하에서 류행되다가 《4인무리》가 타도된후에 공개발표되였으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리성과 시대적통찰력 또한 김학철선생에 비해 뒤떨어지고있는것이 사실이다. 정치공명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이 거의다 허위적인것이고 매마르고 공식화된 공통적인 상징성을 띠고있는데 반해 선생의 《20세기의 신화》는 현대지성인으로서의 투철한 사회비판의식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드높은 옹호정신을 정면에 내세운 이 시기 중국문학의 본연적의의에서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다. 김학철선생이 세인의 이목을 끄는 가장 큰 매력이 곧 《100만대 1의 렬세》에서도 홀로 버티고서서 현대미신에 용감히 도전할수 있는 그 초인간적인 비판리성에 있는것이다.     김학철선생의 고도의 비판리성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간적 성실성과 정직성에서 출발한다.     성실과 정직은 도덕적력량의 핵심이며 아름다운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다. 김학철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량심의 순결을 지키는 정직하고 성실한분이다. 현대사의 무수한 파란을 거쳐 그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뭇사람의 존경의 눈길이 한몸에 쏠리는 변화된 현실앞에서도 그는 언제나 겸손하고 솔직했으며 자신의 과거를 절대 금관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자신을 언제나 《별의별 곡선항행》(《성장과정))을 다해온 하나의 범부로 해석한다. 그는 여러편의 자서전식수필에서 자기의 일생을 숱한 꼬부랑길을 걸어온 갈지(之)자의 행로로 총화하였다. 이를테면 소년시절에 일본군용기 《애국호》가 만주 《비적》을 소탕하는 사진을 보고 멋도 모르고 환성을 올렸던 일, 의렬단에 처음 참가해서 영친왕의 《왕정복고》를 꿈꾸었던 일, 나까사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쓰딸린을 《구세주》로 믿었던 일들을 가식없이 실토하였으며 50년대초기의 《새집드는 날》,《뿌리박은 터》등 자기의 소설작품들을 김호웅선생의 말을 빌어 《소심한 정치교원의 설교를 일삼았던 시기의 대표작》으로 폄하하기도 했다.(《성장과정)) 지어는 자기의 생명으로 바꾸어온 《20세기의 신화》에 대해서도 《소설인지 르뽀인지 아니면 숫제 자료집인지…》《예술성 또는 문학작품적가치가 수준미달》이라고 혹평한다.(《우스광스러운 나팔수))     선생의 성실성은 실사구시사상의 행동실천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한다. 50년대 말―60년대초 그 유명짜하던 《대약진》시기에 《눈속에 묻힌 락엽을 파내다가 대용식료품을 만들》면서도 《지금 우리 나라의 형세는 아주 좋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잠꼬대를 그는 귀쌈으로 깨우쳐주고싶었으며 실사구시적으로 《대약진》,《인민공사》의 오유를 대담히 폭로지적한 팽덕회동지의 맑스주의작풍을 내심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하기에 1975년 5월 연길시 문화궁전에서 열린 자신을 공판하는 대회석상에서 마지막으로 웨칠 구호를 《맑스만세! 엥겔스만세! 레닌만세! 팽덕회만세!》 네 마디로 결정했던것이다.(《제2차 공판》) 정직성과 성실성은 그의 작품에서 진실성의 추구로 표현된다. 그는 세상에 《백전백승의 장군》,《완전무결한 우점투성이의 위인》은 있을수 없다고 인정한다.     《완전무결한 우점투성이의 위인은 사람들의 존경은 받아도 사랑은 받지 못하는 법이다. 공자의 경우가 바로 그 좋은 례이다. 공자는 존경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우렁이속 같은 세상))     이와 같은 신조에 의해 선생은 공자와 같은 성인보다는 장비와 같은 괴짜를 쓰기 좋아한다. 《담배국》의 주인공 문정삼의 경우만 보아도 항일의용군 투사가 《소문난 느리배기》이며 한달에 꼭꼭 한번밖에 세수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이며 총쏠 때 한쪽눈은 감고 묘준할줄을 모르는 결함투성이 인간으로 묘사되고있다. 그러나 일대결심을 내린 주인공이 련락병으로서의 《눈부신 설치의 대활약》을 펼친데 대해서 소설은 더큰 보상을 안겨주였다. 소설의 결말은 《조 졸려서…죽겠습니다.》라는 매우 평범한 말로 끝난다. 전쟁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수마(睡魔)를 이겨내는 장사는 없다》는 가장 간단한 진실을 알려주었을뿐이다. 그는 문학작품에서 표현수단으로서 과장은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력사사실을 외곡하는 허풍을 떠는 글을 질색한다. 《독립운동사의 과대망상증》이란 수필에서 그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한개 려단을 사살했다고 기록한 1998년 10월 23일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고 《경악한 나머지 숨이 콱 막혀버렸다》고 썼다. 《20세기의 전설》이란 수필에서 그는 1907년 리준렬사가 헤그에서 자신의 배를 갈라 선혈이 림리한 창자를 회의석에 뿌렸다는 전설의 내막도 기실은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보지도 못한채 너무 격분한 나머지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작스레 세상을 뜬것이였으며 민족시인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단기수로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였다는 이른바 《독살설》은 근거가 박약한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심장이 없는 세계의 그 어떤 신도 믿지 않았고 과장으로 포장된 그 어떤 전설도 믿지 않았다. 그가 믿은것은 오직 진실과 진리였다. 그는 진실에 기초하여 자기의 사고와 지식을 부단히 확장하고 오차를 시정해나가면서 일보일보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인생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단지 성실성과 정직성만 가지고서는 선생과 같은 비판리성을 누구나다 견지할수 있는것이 아니였다. 김학철선생에게는 보통 인간들보다 몇배 더 강한 의지력과 그것을 버텨나가는 락관주의정신과 유모아적 삶의 철학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학철》로 개명한것도 철같은 의지를 키우겠다는 일종의 맹세같은 것으로 리해할수 있다. 그는 만년에 명문상으로 《로홍군간부》라는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지만 기실 특수한 향수를 누려본적은 없었다. 그가 매일아침 조깅과 맨손체조로 건강관리에 리용해온 하남다리 강둑에마저 《몰상식한 층층대를 만들어》 신체단련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연길시 강둑 층층대 풍경》) 그러나 그는 최하층인간들의 고달픈 생활에 습관이 되여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감옥에서 4년, 사회주의의 감옥(철조망을 두른것과 둘리지 않은것을 합쳐)에서 24년 수감되여있는 동안 그는 최저한도의 생존욕구, 최저한도의 인격존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최악의 조건에서 진리에 대한 추구를 견지하였으며 초인간적인 투지로써 자기의 머리우에 쏟아지는 모든 괄세와 모독과 좌절과 고통을 이겨냈다. 나가사끼형무소에서는 놈들의 총에 맞아 부상당한,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아 3년 2개월동안이나 무서운 육체적고통을 치렀고 《반우파투쟁》이후에는 《반동작가》의 감투를 쓰고 길가에서 아이들의 돌총을 맞아야 했으며 60년대의 필화로 추리구감옥에 구금된 10년동안은 하루 9량의 강낭떡과 멀건 남새국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이와의 전쟁》,《두명의 김학철》등 수필에서 선생은 추리구감옥에서 지내온 그 지긋지긋한 나날들, 《이투성이 속옷》과 《범》자가 무자비하게 마구 찍혀있는 죄수복에 얽힌 비참한 사연들을 숨김없이 폭로했다. 그는 자신이 신앙해온 사회주의가 그에게 상상할수 없는 거대한 실망감을 안겨주었어도 끝까지 렬악한 환경과 비참한 운명에 도전하면서 가슴속에 리성의 등불을 지펴가며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믿었으며 맑스가 구상한 인간다운 진정한 사회주의가 꼭 승리하리라 믿어왔다.     《〈반우파투쟁〉은 99프로가 잘못된 운동이다.―옳지 뭐, 〈대약진〉은 극좌로선의 산물이다. 100프로가 잘못된 망태기판이다.―이것두 옳지 뭐. 그런데 나더러 반혁명이라구! 헤헤, 두구 보자, 누가 옳은가? 사필귀정이랬으니까… 꾹 참구 어디 좀 기다려보자.》(《밀고제도))     이는 선생이 10년도형에 언도받고 추리구감옥으로 끌려가서 한 말이다. 《감옥문을 나서기만 하면 불과 며칠 안되여 그 지긋지긋한 옥고를 씻은듯 부신듯 다 잊어버리고 멀끔한 얼굴로 ―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듯이 ― 새판으로 일을 시작하는것》(《건망증》)이 광란의 시대를 살아간 《락천적건망증환자》로서의 그의 생존철학이였다.     《력사는 언제나 해결할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하는 법이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은 결국에 가서 모든 난문제들을 깡그리 해결하고야 말것입니다.》     이는 김학철선생이 1990년 10월 1일 한국 문학평론가 김명인선생에게 쓴 편지에서 하신 말씀이다. 말 그대로 철저한 변증유물론자만이 소유할수 있는 대범한 락관주의정신인것이다.     그의 강철의 의지력을 버텨준 기괴한 마술사는 그의 독특한 유모아와 웃음이다. 볼테르는 웃음을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다. 아무튼 웃음은 김학철선생을 《감옥에서도, 전쟁마당에서도 지어는 사형장에서도》 언제나 꿋꿋한게 살아나가게 한 투쟁무기, 예술수단이며 그의 독특한 생존지혜였다. 기나긴 정치박해가 끝나는 마당에서도 만세를 부를대신 《나는 일찌기 북간도 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24년이 걸려서야 빠져나올수 있는 땅굴이》. 이것은 승리자의 웃음이며 선생만이 생각해낼수 있는 독특한 유모아였다. 출옥후에 탈고한 장편소설 《격정시대》,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수필집 《우렁이속같은 세상》은 선생의 유모아의 극치를 이루었으며 그의 일관된 비판리성과 융합되여 신랄한 풍자적효과를 나타내였다. 그는 조선의용대에 모인 애국자들의 집단적락관주의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하면 〈비장함〉과 〈처절함〉에다 련결시키는 경향들이 있는데 이것은 일면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부각한 결과가 아닌가싶다. 우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지 혈육과 친지들은 고국에 남겨두고 단신 외국으로 뛰쳐나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5년씩 10년씩 또는 15년, 20년씩 풍찬로숙의 간고한 생활을 하고있는데 일년 열두달 삼백 예순날을 밤낮없이 우국지심에 잠겨만 있다면 사람이 과연 어떻게 견뎌낼것인가, 지레 말라죽어버리지. 그러므로 장난기와 롱담은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경우에도 장난기는 우리를 떠나지 않았고 또 아무리 위급한 고비판에도 재치있는 롱담은 역시 오갔다.》(《최후의 분대장) 제201페지)     선생의 락관성은 혁명의 성공에 대한 확신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 하나의 사고방식으로서 사상과 생활이 통일된 인간최고수준의 정신적태도라고 할수 있다.     김학철선생의 인격적매력에서 또하나 돌출한것은 참된 인간성 즉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최대의 옹호정신이다.     《20세기의 신화》와 《최후의 분대장》에서 김학철선생은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시기의 《공산당원의 탈을 쓴 불한당》과 인정없이 《사람잡이 운동》에 앞장선 극좌분자들을 《프로레타리아 용사》라고 지칭하고 그들에게 비판의 예봉을 돌렸다. 그와 반대로 살벌한 정치운동의 와중에도 《반동작가》의 감투를 쓴 그를 동정해주고 궁지에 몰린 그에게 남몰래 점심밥을 챙겨준 인간다운 인간, 진정한 공산당원간부 박찬구같은분을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다. 박찬구동지는 당시 주위선전부의 중층령도간부로서 자기의 당적을 내걸고 로항일투사를 보호했으며 선생의 부인에게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수 있는 일자리를 주선하여 기아선에서 버둥거리는 선생의 일가에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하여 김학철선생은 유명을 달리하는 생사의 갈림길에 남긴 마지막 유서에서 박찬구동지와 같은 진정한 공산당원간부, 인간의 존엄을 지킬줄 아는 진정한 《인간다운 인간》을 모든 사람이 따라배워야 한다고 쓰시였다. 현재 리직휴양중에 있는 박찬구동지는 오랜 당령을 가진 기층당의 지도일군으로서 주위선전부, 군중예술관, 문학예술연구소, 영화발행공사 등 여러 기관을 전전하면서 과장, 처장, 관장, 소장, 당서기 등 지도적위치에서 항상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고 참된 사랑으로 동지들을 널리 포섭하였으며 권세, 리욕과는 늘 담을 쌓고 지금까지 줄곧 청빈하게 살아왔다. 김학철선생이 그를 현대지성인이 따라배울 참된 《인간다운 인간》의 본보기로 내세운것도 결코 우연한 의기투합이 아니였던것으로 생각된다.     김학철선생의 인간적매력을 개방성과 세계성이란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볼수도 있다.     그의 삶의 행로와 행동령역이 협애한 민족주의의 울타리를 넘어 해방전에는 제국주의와 싸웠고 해방후에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진정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웠다. 그는 《민족의 질을 돋워올리는것》을 자신의 문학적사명으로 자각하고있었으나 조선족이란 이 울타리에 얽매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서 살았고 중국에서 살았고 일본에서도 살았으나 자신을 어느 한 개인의 의지에 끼워맞추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다가올 새로운 인간의 세계로 향하고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늘 미래의 세계인이였다.     마감으로 문학평론가 김명인선생의 말을 빌어 이 글을 맺기로 하자.     《세계의 변방, 연변의 한 루옥에서 살다 간 낡은 중산복의 로인 ― 우리중 누가 그보다 더 세계적이라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가.》                                               2002년 7월 2일       김동훈: 평론가,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연구소 소장, 교수
146    김학철의 문학사상과 그 작품의 력사문헌적의미 (전국권) 댓글:  조회:950  추천:0  2016-04-22
김학철의 문학사상과 그 작품의 력사문헌적의미   전국권        1. 머리말   필자는 작가 김학철선생님을 중국조선족의 시혼이라 부른다. 그것은 그가 조선족의 고결한 문학정신을 대변하고있기때문이다. 그는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문학가이며 불사조의 투사 독보(獨步)의 사상가이다. 항일전쟁이래 수십년 그는 개성적인 이미지로 채색된 수많은 문학작품으로 여러 세대의 독자들을 고무, 격려한 원로작가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조선족독자들은 거의 모두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그 거대한 사상예술적매력으로 하여 작가를 애대하여왔었다. 그 불굴의 작가정신과 작품의 강렬한 감화력으로 하여 어떤 평가들은 작가를 중국조선족작가들의 《정신기둥》이라고도 칭송한다. 그는 인격과 문품(文品)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문단의 독보(獨步)로 되고있다. 작가는 그 경력, 인간과 인격, 정신과 작품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문학사에 찬란한 한페지를 남겼다. 그는 진실로 문학가, 사상가, 투사이기에 손색이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론문에서 작가 김학철의 문학사상과 작품의 력사문헌적의미를 밝히고저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1980-2001년의 문학창작에 대한 소묘를 해야 한다.   2. 1950년-2001년의 문학창작   6.25전쟁이 폭발된후 김학철선생은 북경에 와서 정령이 소장으로 있은 중앙문학강습소에서 2년간(1950. 10-1952. 12) 연구원으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엄혹한 나날에》, 《전우》, 《고향》, 《솔바람》과 《군공메달》 등 단편소설을 《인민일보》, 《광명일보》, 《소설》, 《중국청년》 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의 중편소설 《범람》과 단편소설집 《군공메달》은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이런 창작성과로 하여 중국문단의 저명한 조선족작가로 되였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후 조선족문학발전을 위하여 이바지할 념원을 갖고 그는 연변에 왔다. 이떄로부터 1956년까지 짧디짧은 4년간에 그는 단편소설집 《새집드는 날》,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2,3권)를 발표하고 로신의 단펴소설 《아Q정전》, 정령의 장편소설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 주립파의 장편소설 《산촌의 변혁》과 《산촌의 변혁》(속집) 등을 번역 출판함으로써 다산작가이며 번역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줬다. 1 1957년부터 1980년까지 장장 24년이란 긴긴 세월 그는 있지도 않는 《반동분자》, 《반혁명》의 죄명을 쓰고 온갖 비인간적인 정치박해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결한 정조를 보유하고 다재다난한 운명과 싸우면서 부득불 한동안 붓을  놓을수밖에 없었다. 일반 정치문제가 해결된후 그는 다시 기지개를 펴고 손에 붓을 잡고 1981년부터 20년 동안에 전기문학 《항전별곡》(1983), 장편소설 《격정시대》 (1986.3상,하) 중편소설 《밀고제도》, 《짓밟힌 정조》 등 허다한 단편소설과 산문, 수필, 잡문들을 발표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그는 1946년부터 2001년까지  단편소설 50여편, 장편소설 3부, 전기문학 2부, 중편소설 4부, 산문집 《무명소졸》(1989, 서울), 《나의 길》(1996, 북경), 《우렁이속 같은 세상》(2001,서울) 등을 비롯한 수백편 작품을 발표하였다. 항일전쟁을 겪은 전기적인 경력은 작가로 하여금 풍부한 창작소재와 튼튼한 생활바탕을 갖도록 하였다. 혁명투쟁에 종사한 력사사실과 문학창작에 정진한 문필생애는 그를 영광스러운 항일투사로, 창작실력을 가진 혁혁한 작가로 만들어 국내외독자들의 존경을 받도록 하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문학을 사랑하면서 수많은 문학서적을 탐독하였다. 이러한 문학바탕이 있었기에 그는 그 어려운 항일전쟁의 나날에도 시간만 있으면 업여문학창작을 부지런히 하였다. 풍부한 경력, 문학서적의 다독, 부지런한 창작실천은 그로 하여금 다산작가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나타내게 만들었다. 그러면 도대체 그는 어떻게 작가로 된것이던가?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에서 작가는 말한다. 《이는 내가 다리 하나를 잃는것과 밀접히 련관됩니다.》, 《…당시 나는 다시 군인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알고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헛되게 세월을 보낼수 없다 생각하고 문학창작을 혁명사업으로 하고 실제적인 일을 하려고 작심했다…》2 이것이 바로 그가 문학창작을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한 동기인것이다.  그는 혁명투사의 정치과업을 작가로서의 문학수단으로써 완수하려고 작심한것이다. 즉 투쟁마당에서의 그 신념, 그 정열, 그 의지로 문학창작에 혼신을 바쳐온것이다.   3 김학철의 문학사상 점경   작가 김학철의 1950-2001년의 문학창작에 대한 소묘를 마친후 그의 문학사상과 작품의 력사문헌적의미를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개 측면에서 고찰하고저 한다.   (1) 작가의 력사사명 의식.   1952년 김학철선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그해 9월 3일에 정식 성립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11월에 자치주당위 제1서기 주덕해동지의 소개로 북경에서 연길에 왔다. 그는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주비위원회의 주임을 담당하였다. 반년후 그는 이 직무를 사퇴하고 전직작가로 되여 문학창작에 전념하였다. 이때로부터 1957년 그는 단편소설집 《새집드는 날》(1953.9, 연길), 《뿌리박은 터》(1953.10, 연길), 《고민》(1956.북경), 중편소설 《번영》(1957.5, 연길)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954.4.8 연길, 1988. 서울)를 출판하였다.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새사회와 새인물, 새로운 사상을 구가한것이였다. 1953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새집드는 날》과 《뿌리박은 터》를 음미해보자. 단편소설 《새집드는 날》의 경개는 이러하다. 과반 생애를 넘기도록 집이 없는 동준(東俊)이는 해방후 끝내 자기 새집을 마련하게 되였다. 새집에 드는 날  동준이와 아버지는 외양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새삶을 누리게 된 조선족농민의 희열과 새로운 문화적인 추구를 엿볼수 있는것이다. 단편소설 《뿌리박은 터》는 서한체형식으로 고향에 뿌리박은 《나》의 고난에 찬 지난날 인생에 대한 회고와 해방후 행복한 생활에 대한 긍지감 그리고 보다 아름다운 미래의 생활에 대한 동경심을 보여줬다. 주인공 《나》는 전쟁의 세례를 겪은 전사인데 그는 해방후 건설열조에 대한 격정, 그것을 위해 이바지할 신념으로 가득차있다. 그는 격동되여 이렇게 말한다. 《해방후의 특히는 이 근년의 년년풍작으로 하여 우리의 살림은 놀랄만큼 늘어났소. 그러니 자연 손님대접도 후해질밖에. 속담에도 쌀독에서 인심난다고 하지 않았소. 앞으로는 물론 점점 더 좋아질것이요…》 이 작품은 1953년에 쓴것이다. 지금 읽으면 어쩐지 렴가적인 랑만주의감을 주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작가 김학철선생의 문학창작사상을 연구하기에 20세기 50년대초 그의 작품의 문학가치에 대해 한두마디로 경박한 판단을 내리면 안될것이다. 작가의 창작은 현실사회의 영향을 떠날수 없는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 두편의 단편소설은 동일한 시기 조선족소설창작수준과 대비해 우수작에 속한다 말할수 있다. 말하자면 그 시기 다른 조선족소설가들의 단편소설들은 이 작가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것이였다. 그러기때문에 이런 단편소설은 그 당시의 성공작이라 해도 조금도 과분하지 않은것이다. ‘ 단편소설 《군공메달》과 《고민》 등 작품은 김학철선생의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와 중편소설 《번영》은 모두 50년대의 작품들로서 그 정치적색채가 농후하다. 그 작품들의 내용으로 보면 50년대 초기로부터 중기의 농촌합작화과정에서 나타난 선진인물들로서 시대적색채가 강렬하다. 김학철선생은 혁명투사로서 중국농촌의 합작화열조속에 몸을 잠그고있는 그로서는 자연히 붓을 들고 문학이란 이 수단으로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작가는 당을 따라 혁명하려는 결심을 문학창작실천에 옮긴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이 시기 작품은 결코 간단하게 정치구호를 웨친것은 아니였다. 작가는 인물형상의 생동성과 슈제트의 곡절성, 짙은 생활정취 등으로 작가적 소질과 재능을 충분히 보여준것이다. 김학철선생의 소설의 문학색채는 그의 문학사상과 밀접히 련관되여있는것이였다. 작가는 《작가의 사명》이란 글에서 말한다. 《문학창작이란 감정이 끓어번져서 붓을 들어 그 감정을 쏟아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뎌배길수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진행되는것이다. 인민이 헐벗고 굶주리는것을 보면 피눈물 뿌리고 인민이 행복하게 잘사는것을 보면 기뻐 날뛰는것이 우리 작가들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작가들은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는 고상한 인물, 영웅적인물들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그리고 인류사회의 진보를 저애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신랄하게 비웃고 매섭게 채찍질하는것을 그 사명으로 알고있다. 이 숭고한 사명감에 고무되여 인간정신의 기사로서의 직책을 다하려고 애쓰고있다. 작가수업이란 곧 인간수업이다. 인민의 근본리익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는 고상한 품성-인민성-의 확립은 창작입문의 ABC이다.》3 이것이 바로 력사유물사관에 기초한 작가의 사회사명의식의 구체적인 반영일것이다. 작가는 이런 직책을 리행하려는 자각된 의식을 갖추고 그것을 창작에서 실천하고있는것이다. 이것은 시장경제시대에 살고있는 우리 작가로서는 각별히 중요한것이다. 오늘 일부 작가들은 시체의 유혹에 끌려 배금주의자, 배물교의 노예로 타락하고있는데 김학철선생의 고결한 품성은 우리들의 귀감으로 될것이다.   (2) 작품의 비판리성정신과 풍자성, 해학.   이 세상 온갖 풍상고초를 겪은 김학철선생은 인생에 대한 깊은 체험을 갖고있다. 그로 해 작가의 작품은 예리한 비판리성정신을 보유하고있으며 심오한 풍자성과 해학성을 띠고있어 가독성을 다분히 가진다. 1957년 반우파투쟁으로부터 1978년 당 제11기 3차전원회의의 결속까지 장기간 판을 친 《좌》적로선으로 하여 우리 나라 지식인들은 심한 피해를 입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는 이미 먼 력사로 되여버렸다. 하지만 그런 악렬한 사회상황하에서 작가는 막대한 정치압력을 받으면서 시달릴대로 시달렸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작가는 당의 장기간의 교양에 의한 리성정신과 의지, 당의 사업에 대한 신념, 비정의에 대한 비판정신은 그더러 모든 시련을 겪어내게 했으며 그 어떤 불행과 좌절도 위업에 대한 의지를 꺾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시련속에서 그의 사물에 대한 관찰력은 더욱 령민해졌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문학의 사회력사사명에 대해 심각하게 리해하고있었다. 그는 작가는 애증이 분명하게 열정적으로 인류사회의 진보를 위해 공헌을 한 고상한 인물과 영웅인물을 구가하고 인류사회의 진보를 저애하는 좀벌레들을 무정하게 편달, 풍자해야 함을 똑똑하게 알고있었다. 필자의 소견에는 김학철선생의 작품에서 찬가를 부른 일부 작품보다는 예리한 비판리성의 불꿏 번뜩이는 작품이 그 사회문학적 가치가 더 있는듯도 싶다. 그가 20세기 50년대초,중반에 쓴 사회생활의 암흑면을 관조한 작품, 이를테면 《새암》(1955), 《괴상한 휴가》(1955), 《맞지 않는 기쁨》(1953) 《호박물주리》(1955) 등 단편소설들이 유난히 돋보인다. 이런 류형의 작품에서 작가는 예리한 메스로 사람들 사상의식속에 잔존하는 진부하고 소극적이고 변태적인것, 기형적인 사회의식과 심리상태를 해부해보였다. 소설 《괴상한 휴가》는 진지하게 음미해볼만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보는 주인공과는 다른데 로동자도 농민도 아닌 지식인이다. 각별히 의미심장한것은 이 지식인은 작가이다. 주인공 차순기는 자기 쓴 작품이 호평을 받을 떄는 묵묵부답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젓다가도 작품이 비난받을 떄는 도리여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것이다. 자기작품이 후에 끝내 성공작으로 평가되였을 떄 주인공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내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가 없다.》, 《작품이 두들겨 맞을 떄가 도리여 내게는 즐거운 휴식으로 된단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주인공 차순기의 형상을 통해 당시 시대의 조류를 얼마간이라도 알수 있을것이고 작가 김학철선생의 기개를 엿볼수 있을것이다. 당년 정치풍파를 겪은 일부 지식인들은 왕왕 동요하면서 그 성격의 연약성과 인격의 비굴성을 폭로시켰다. 작가는 이런 인간들의 작태를 편달할 떄 조소와 해학속에 비판리성정신을 깃들였기에 작품을 읽으면 각별히 친화감을 느끼게 된다. 당시 작가는 항일전쟁의 불(火)의 세례를 겪은 로전사로서 지식인의 량심에서 출발하여 문단과 사회생활에서 그 어떤 괴상한 현상을 보아냈던것이다. 일부 작가들은 창작할 때 정상적인 생활론리와 체험을 위반하고 사회에 류행되는 정치개념이나 설교에 굴종하여 써낸 작품으로 하여 작가자신과 독자사이에 심리간격을 만들게 된것이다. 한마디로 김학철선생은 문학이 독자대중을 리탈한 이 페단을 간파한것이다. 이 단편소설의 주인공이며 작가인 차순기의 괴상한 휴가는 사회의 부조리에서 온것이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문학형식으로 당시 정치기후로 인하여 조성된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을 비판한것이다. 실은 김학철선생이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1월까지 서울에서 쓴 단편소설 《담배국》 등에서 이미 그의 예리한 비판리성정신과 해학적성격의 문풍을 보여주었던것이다. 《담배국》은 그가 친히 참가했던 항일전쟁에서 발생한 실사실을 소재로 하여 쓴 소설이였다. 소설의 주인공 문정상(文正相)은 기괴한 성미를 가졌다. 소설이 시작되자 작가는 《전쟁할 때》란 별호를 가진 문정상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게으름뱅이, 늦장부리기로 소개하는데 그는 하루에 16시간을 잠잘 것을 제창하는것이다. 뒤이여 작가는 문정상이 어떻게 기괴한 별호를 가지게 되였는가 하는 경위를 쓴것이다. 문정상에겐 또 《담배국》이란 별호가 있다. 그 별호의 유래는 정말 흥미롭다. 이 사람은 게으르고 늦장부리기에 후근부대에서 임무를 집행할 떄 큰일을 망쳐서 취사반에 배치된다. 취사반에서 그가 집행해야 할 임무는 야채를 뜯어다가 국을 끓이는 일이였다. 그는 마대를 가지고 야외에 나갔는데 본래는 사방을 뒤지며 좋은 나물을 뜯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연 품이 들고 시간이 걸려야 한다. 게으름뱅이인 그는 새파랗게 자란 담배잎을 야채로 알고 그것을 한마대 뜯어다가 가마에 넣고 끓여 국을 만들어 전우들에게 마시게 했다. 이로해 문정상은 또 한번 비평을 받았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취사반에서 떨어져나와 련락원을 맡았다. 하루사이에 겨우 2시간 근무하고 또 강위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행군할 때마다 대오에서 떨어졌다. 어느 한번 그는 마을의 절간에서 하루밤을 지나게 되였늗데 아주 우연하게 적 3명을 때려엎고 리야까 하나에 말 두필, 식품 12상자를 로획하여 공을 세우고 상장을 수여받았다. 작가는 이 단편소설에서 문정상의 전사로서의 직책의식의 결여에 대해서는 선의적인 비평을 하면서 해학적인 수법으로 실직에서부터 립공하는 과정을 이야기했는데 보는바와 같이 작품의 가독성이 강한것이다. 작가는 《동서남북풍》, 《서울나들이》 등 일련의 잡문과 수필에서 사회상의 불량한 현상과 부정풍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의 비판은 광범한 인민대중의 정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있는것이다.   (3) 사실주의 창작정신의 고양   작가는 60여년의 창작생애에서 줄곧 사실주의창작방식을 보유하면서 작품을 통하여 사실주의문학정신을 고양하고있다. 물론 그로 말하면 이 방면에서 변화, 발전과정이 있었던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문학창작의 변화의 궤적을 보면 사상모순과 충돌, 곤혹과 자각이 동반하는 굴절적인 로정을 밟았던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성호는 론문 《투사와 작가》에서 김학철선생의 문학의 사실주의정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많은 작가들의 경우에는 작품창작에서의 독특한 개성은 그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싹을 보여주는것이다. 김학철의 경우에도 그의 문학적독특성은 그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싹텄다고 할수 있다. 사실에 기초한 세부의 진실한 묘사와 투사다운 락천성을 나타내는 훌륭한 인물형상창조 및 일정한 극적효과를 나타내는 슈제트구성 등의 결합으로 개성적인 특성을 지닌 김학철의 소설창작방법은 그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사실주의창작방법속에 용해되면서 그의 창작의 전반 과정에 일관성을 보여주는것이다.》4 또 김학철선생이 사실주의창작수법을 견지하여 독자들이 작가의 작품의 진일보 성숙에 박수를 보내는데 대해 김성호는 말한다. 80년대에 창작된 김학철의 소설은 50년대의 소설들에 비해 직접적인 정치적설교같은 색채가 퍽 옅어졌기에 상대적으로 인간학적인 맛이 더 난다고 할수있다. 5 작가가 80년대에 창작한 소설들은 내용으로 보면 주로 ①반우파투쟁시기의 력사사실에 대한 관조를 통해 《좌》적경향에 대한 비판. ②《문화대혁명》기간 감옥에서의 체험을 통해 사회의 불량한 현상에 대한 비판. ③남녀간의 애정이야기를 통해 인간성의 부활을 고양하고 있는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혁명투사의 고귀한 문학창작정신을 발양하여 그 작품에서 사실주의정신에 립각한 강렬한 비판성은 광범한 독자들로 하여금 이 시기 그의 문학청작특색을 깨치게 하였다. 80년대이후 그의 작품은 력사사건과 현실생활속의 사실을 쓸 때 사실주의수법을 충분히 리용하여 사물의 면모 그대로의 진실한 묘사에 주목을 돌리였다. 이와 동시에 로혁명투사의 안목으로 사회생활속의 여러가지 현상을 부감하면서 부정, 비리, 불의의 현상에 대한 예리하고도 적절한 비판을 들이대고있다. 그러기에 독자들은 거기서 강렬한 사상예술적진동을 느끼는것이다.   (4) 인물의 복잡한 성격론리에 대한 리해와 긍(5)  정.   김학철선생은 작품속의 인물형상을 창조할 때 인물의 복합성격에 대해 심오하게 리해하고있다. 그러기에 그는 인물형상의 단일화를 배격하면서 인물의 생동한 본래 모습을 그려보이는데 필묵을 짙게 쓰고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바 있다. 《인간세상의 모든 사건은 사람에 의하여 빚어진다. 즉 인물에 의하여 빚어진다. 인물이 없는 사건이란 유령의 잠꼬대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글자부터 사람, 즉 인물을 써야 한다…자기의 이야기를 꾸미기 위하여
145    김학철에 대한 기성연구검토와 몇가지 생각 (최삼룡) 댓글:  조회:599  추천:0  2016-04-22
김학철에 대한 기성연구검토와 몇가지 생각   최삼룡      위대한 작가 김학철에 대한 연구는 바야흐로 중국조선족 문학예술과 문화의 창조에서 한낱 중대한 과제로 떠오르고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의 일시적인 충동으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에 대한 중국조선족의 충체적인 인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문화현상이라 하겠다.  본 론고는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에 대한 기성연구를 검토하고 미래를 전망하는가운데서의 필자의 몇가지 생각들을 정리함으로써 앞으로의 김학철연구에 하나의 참조계를 제공하려는 뜻에서 씌여진것이다.    1 김학철에 대한 기성연구 검토   김학철은 1945년 11월부터 2001년 9월까지 56년간 수많은 소설, 잡문, 수필, 회상기 등 문학작품을 창출했는바 김학철에 대한 평론이나 연구도 이 56년간 간단없이 진행되여왔다. 이제 나는 네단계로 나누어 김학철에 대한 평론과 연구의 기성성과를 검토해보려 한다.   제1단계; 서울시기 (1945년 11월-1946년 11월)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종소리와 함께 나가사끼감옥에서 풀려나온 김학철은 그 해 11월에 서울에 돌아와 《사람의 정의(定義)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하나쯤 없어도 문제없다.》 (1)고 선언하고 작가가 될 결의를 다지고 소설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에 서울에서 발간되는 《건설》 (주필 조벽암)에 단편소설 《지네》를 발표하여서부터 1년 동안에 진보적인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창간호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하였다. 독립군 출신이며 열렬한 공산당의 활동가였던 김학철의 단편소설은 즉시에 좌익작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바 1946년 봄 리태준 등의 주선으로 문학가동맹에서는 환영회를 베풀었고 1946년 4월 20일 《신문학》편집부에서는 8.15이후의 창작에 대하여 좌담하면서 김학철의 《균열렬》에 대한 한마당의 의론도 전개하였다.(2) 이 좌담회에는 송영(1902-1978),김남천(1911-1953), 리원조, 윤세중, 채만식(1902-1950) 그리고 편집부를 대표하여 박영준(1911-1976), 리흡 등 7명이 참가했는데 거개가 후에 월북한 좌익작가들이였다.(3) 우선 이 좌담회에서 김학철의 《균렬》이 거론된 그 사실부터가 평가 고저는 차치물론하고 상당한 의의가 있다. 즉 김학철의 초기작품이 문단의 좌익작가들의 각광을 받았다는것을 의미하며 바로 김학철의 처녀작들이 문학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된다. 다음, 김학철의 《균렬》에 대한 차이가 크다는것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채만식은 이 작품을 놓고 《순수문학이니 통속소설이니 하는 일인(日人)의 작품과 꼭같은 감을 줍니다》, 《인간성을 떠난 인간을 그린것처럼 느껴집니다.》고 말하는가 하면 김남천은 작품보다 작가를 돌출히 내세우면서 《의용군의 한사람으로 일본과 싸우다 다리 하나까지 잃고 돌아온 작가를 생각한다면 보는 면이 넓어질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리원조는 김남천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보고 평해야 한다》면서 먼저번 문학가동맹소설좌담회에서 리태준씨가 이 작품을 르뽀트타쥬라고 했고 김남천은 너무 작위적이라고 했다고 하면서 두분의 말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 작품의 중심이 처음과 마지막에 있는것이 아니라 가운데 있다고 봅니다. 즉 사광과 학천 두 분대장이 싸우는 장면이 이 작품의 생명이라고 봅니다. 물론 작품의 동기는 이란 녀자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장면은 문장도 서툴지만 의 소행을 규명시키지 않았는데 리태준씨로 하여금 르뽀트타쥬란 말을 하게 한것입니다. 김남천씨가 작위적이라고 한것은 그 반대로 마지막 장면을 말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어데까지나 이 작품의 중간에 중점을 두고 또 그 장면을 좋게 봅니다.》라고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고있다. 그 다음으로 《균렬》은 상당히 재미있게 독자들의 흥취를 자아내게 씌여졌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것은 주로 리원조씨의 토론에서 보이느데 그는 《소설이란 언제 끝나는지 모르고 읽을수 있도록 써야 합니다. 읽다가 싫증이 나서 맨 마지막 장면을 들춰보고 읽게 하는 소설은 좋은 소설이 아닙니다. 나는 이 작품을 언제 끝났는지 모르고 읽었습니다.》라고 말하고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토론은 비록 심도있는 잘 준비된 연구회라고는 할수 없지만 김학철의 초기 문학창작 아니 어쩌면 김학철의 전반 문학에 제기되는 문제를 건드리고있는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인상을 안겨준다.   《전번 간담회때 이 소설책이 있은 뒤 작가가 문학하는 리유를 일장연설했으나 그때 나는 그를 작가라기보다 의용군의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보니 작가는 확실히 작가로서 력량을 가지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목가적인 맛은 있기는 합니다.》   이것은 역시 리원조의 말인데 이 한마디 말을 통해 리원조씨는 투사와 작가라는 이 이중사회각색을 띤 김학철의 인간과 문학을 잘 파악하고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항일투사이면서 또 소설창작에 몰두하는 젊은이라는 것은 당시 서울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과도 구별되는 점이며 또 평양, 북경, 연길의 많은 일반적인 작가와도 구별되는 점이다. 서울시기의 10편의 소설에 대하여 후인들은 이야기차원에 머물렀다든지 많은 미숙성을 보인다든지 등등 의론할수 있고 또 그 의론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김학철 자신도 《정치적인 선전물》이라는 평가를 받아들이였지만 아무튼 이 작품들은 《조선의용군 동료들의 민족해방운동중에서 겪은 애환을 뛰여난 필치로 소설화하였다.》 (4)는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것이다. ‘   제2단계; 반우파운동시기( 1957년 하반년 - 1958년말)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좌익에 대한 탄압을 회피하여 서울을 떠난 김학철은 평양에서도 글을 썼고 후에는 북경에 와서도 글을 썼지만 평단에서 김학철의 문학작품에 대한 운운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반우파운동중 정확히 시간을 재단한다면 1957년 하반년부터 1958년말까지 김학철의 문학작품은 갑자기 평론의 각광을 받게 되였다. 김학철은 1952년 주덕해의 요청으로 북경 문학예술연구소를 떠나 연길에 와서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주임으로 되였다가 반년뒤 사직하고 연변작가협회의 전업작가로 되였다. 이때로부터 반우파운동이 시작될 떄까지 약 5년간 김학철은 3부작장편 《해란강아, 말하라》, 중편 《번영》, 《소나기》(미발표), 단편 《맞지 않는 기쁨》, 《승리의 기록》, 《뿌리박은 터》. 《새집드는 날》, 《고민》, 《구두의 력사》, 《괴상한 휴가》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들과 북경시기에 발표한 《군공메달》 등이 모조리 반당반사회주의 독소로 몰리여 비판대에 올라 프로레타리아용사들의 집중포격을 당하였다. 1957년 5월호에 《아리랑》잡지에 발표된 《몇가지 오유적론점에 대하여》로부터 1958년 12월호의 《반동작가 김학철의 자화상》까지 그리고 《연변일보》 1957년 9월 29일 《선명한 반동립장의 실증》으로부터 1958년 1월 16일 《독초를 매여버리고 향기로운 꽃을 만발시키자》에 수록된 10편의 문장까지 김학철이를 비판한 문장 길고 짧은것을 다 합하면 무려 40여편이 되고 거기에 동원된 작자는 무려 100명이 거의 된다. 거기에는 대학교 교원으로부터 (그때는 교수라는 말을 쓰지 않았음)기자, 편집, 기관간부, 로동자, 농민, 대학생, 중학생 등 사회의 여러 행업,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다 있다. 세월이 반세기가 흘러간 오늘 이 비판문장을 읽어보노라면 우선 눈에 뜨이는것이 김학철선생에게 씌여진 규정어 다시 말하면 김학철의 반동성을 규명하고 인격을 모욕하는 여러가지 규정어들과 비유구들이다. 그것들중 대표적인것만 헤아린다면 《꼬리없는 개》, 《당신들의 개성(犬性)》, 《문예계의 오물》, 《한쪽 다리 부러진 엉큼한 사자》, 《독초가 가득한 소설》 《손에 다섯자루의 칼을 든 씩씩한 협객》, 《미친개 혼을 탄 한패거리 악한》, 《김학철이를 우두머리로 한 패류》, 《이름난 괴작을 쓴자》, 《우파작가》, 《김동구의 철학교수이자 상전》, 《반동작가》, 《반인민적인 비수의 묶음》, 《독기 서린 상판》, 《연변문예계 반동집단의 괴수》, 《반동작가》등등 등등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김학철이는 당시 조선국민이고 당관계도 중국에 가져오지 못한 외국인이기에 상급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우파는 우파되 우파라는 모자는 씌우지 못하고 반당반사회주의 반동작가라고 결정지었다는것이다. 아무튼 김학철이를 때리는 푸르레타리아용사들의 글을 읽어보면 당시 그들이 어떻게 정치투쟁의 수요에 따라 당시 류행되던 정치리론과 문학리론을 동원하여 작가들을 포괄하는 지식분자들을 마구 때려부시고 그들의 작품과 언론에 마구 죄를 들씌웠는가를 보아낼수 있으며 좌적인 정치로선과 외곡된 맑스레닌주의가 어떻게 문학예술을 기로에로 몰아넣었는가를 보아낼수 있으며 사회를 인도주의가 없는 살기찬 세상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아낼수 있다. 김학철이를 비판하는 이런 글들은 반면교재로 되여 우리가 문학예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어떤것은 제창하고 어떤것은 지양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주고있다. 이 시기의 김학철에 대한 평론글은 또 작자들의 본의 아니게 김학철이가 구경 어떤 사람인가를 , 김학철의 문학이 어떤 문학인가를 증명하는 사실적론거를 제공해주고있다. 당시 푸로레타리아용사들에 의하여 독초로 얻어맞은 작품들이 구경 어떤 작품들인가는 오늘까지 많은 평론가들과 학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해명되였으므로 여기서는 더 론술하지 않고 당시 얻어맞은 김학철의 주요한 언론을 여기서 독자들에게 보여드리기로 한다.   △ 문제는 진실을 쓰는데 있습니다. 우리 작가들은 고집이 없단말이요. 용감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왜요. 고집은 있어야 합니다. 고집이 없어서 공식화를 범한 뼈저린 경험도 있지 않습니까. ㅡ ≪아리랑≫ 1958년 3월호에서   △ 나의 작품 ≪괴상한 휴가≫를 교조주의자가 보면 나쁘다고 할것이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별의별것이 다 있다. 이것은 객관존재다. ㅡ 《연변일보》 1957년 6월 9일   △지금 중국이나 조선이나 할것없이 문학창작상 모두 개념화 공식화에 딱 막혔다. 누가 먼저 이 방선을 돌파하면 그는 위대한 인물이다. ㅡ 《아리랑》 1957년 11월호   △ 작가는 반드시 고집이 있어야 한다! 과거 라꼬시를 숭배하던 작가들은 라꼬시가 떨어지니 역시 볼모양없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가령 우리의 간판이 넘어지는 날이면 어쩔셈이냐! ㅡ 동상   △ 작가는 주견이 있어야 한다. 제일 공정한 심판관은 시간이다. ㅡ 동상   △젠장, 덮어놓고 《동무》, 《동무》는 뭐야! (책상을 치면서) 나는 선생, 씨, 군, 양 하고 부를 것을 주장한다! 이걸 회복해야 해! ㅡ《아리랑》 1958년 2월호   △ 쏘련의 예술은 모두 우상적이고 사회주의생활을 모두 신으로 만들었다. ㅡ동상   △ 백화만발인데 내놓고서 독자들의 평을 들어야지. 내놓기전에 자꾸 앞을 막아놓고 떠들 필요가 있는가? ㅡ《연변일보》 1958년 1월 16일   △어쩐지 늘 부정면이 더 잘 씌여지고 부정인물을 그리기가 쉽거든. 이상하단 말이야. ㅡ 동상   △ 진실을 쓰라 사랑할줄 알고 미워할줄 알라. ㅡ 동상   △ 《해란강아 말하라》가 왜 일부 독자들의 혹평을 받았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답; 그건 말이유. 그건 곧 해명될 때가 있을겁니다. 오래지 않습니다. 곧 밝혀집니다…조선사람이라는것이 누가 한사람이 뾰족하게 되려고 하면 깎아내리우려고 애를 쓰지요. 곧 우리 연변문예계에 이와 같은 구루빠가 있단 말입니다. 내가 작품을 좀 쓴다고 하니 그러는거지요. ㅡ 동상   △ 요새 《괴상한 휴가》에 대한 평론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말; 한개 작품의 가치라는것은 발표되여 군중의 여론이 없는 작품은 죽은 작품이지요. 생각해보시오. 지금 연변에 무슨 평론가라고 할만한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평론한다느게 와-하 하는 식으로 주대없이 떠드는거지요. ㅡ 동상   △ 1945년 일본감옥에서 나온 다음 남조선에서 쓴 시;   나는 나의 청춘과 한다리를 베여 바치고 그리고 알았다. 승리란 참혹의 상징이란것을 ㅡ 동상   이상 비판대상 혹은 과녁으로 된 언론의 그 진실여부는 반세기가 거의 되는 지금에 와서도  판단하기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튼 이 언론이 그의 수많은 작품과 더불어 김학철이를 중국의 55만 2천 8백 77명의 우파분자(5)의 하나로 만들게 하였다는것은  틀림없으며 설사 이 모든것이 비판자들에 의하여 조작된것이 아니 였다 해도 나는 이 언론들에서 그 어떤 반동성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그 예리성, 선봉성, 목적성에 감탄하게 되며 또 후세사람들이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로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김학철에 대한 평론과 연구를 고찰하면서 꼭 말해야 할것은 당시 그렇게 험한 문학환경속에서도 김학철의 문학에 대하여 제대로 평한 글이 다소 나왔다는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당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였고 김학철이 《연변의 주양》이라고 칭하였던 소설가 김순기씨의 두편의 글이다. 일찍 김학철의 《해란강아 말하라》가 금방 출판된 1954년에 그는 《연번문예》(3월호)에다 월메라는 필명으로 다음과 같이 평한바 있다.   작자는 9.18전후의 연번농촌의 모습을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하였다. 작자는 항일의 여러가지 구전문학적 민간이야기들을 재능있게 구사하였고 그의 규모에 격이 맞는 힘찬 흐름으로 사건을 전개시켰으며 특히 작품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계급적우애 합작 단결과 소박한 애정의 서정적정경, 아름다운 리상, 우람찬 투쟁과 잔인무도하고 교활한 원쑤들의 반동성과의 갈등을 흥미있게 묘사하였다… 작자는 그가 몸소 겪은 항일의 풍부한 체험으로 연변에 있어서의 인민항일의 위대한 모습을 힘있는 필치와 예술적형상으로써 개괄하여 우리의 앞에 재생시킬것을 확신한다…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는 우리 인민들을 자호와 승리에로 이끄는 사상력량을 가지고있을것이다.   김순기의 이 문장은 김학철의 《해란강아 말하라》의 사상성과 예술성에 대하여 제대로 파악하고있는바 역시 우파분자였던 김순기는 문학적인 혜안과 리론적인 담략의 소유자였음을 증명해주고있다. 김순기는 또 반우파운동의 불길이 바야흐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1957년 6월 《아리랑》잡지에 《차순기와 나와의 관계》라는 글을 발표하여 김학철의 문학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솔직히 표백하였다. 당시 《평문》 혹은 《잡문》으로 불리웠던 이 글에서 김순기는 먼저 김학철의 《괴상한 휴가》의 차순기는 어던 의미에서는 자기를 닮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것을 론술하고 다음으로 소설 《괴상한 휴가》의 《나》는 김학철이를 닮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또 김학철이와 다른 점도 있다고 론술한 다음 김학철의 단막극 《서리》의 발표과정에서 겪었던 자기의 정신체험을 서술하면서 《나의 무지는 한심한것이며 일가쟁명의 습기는 심한것이였다》고 또 《도리가 설명되지 않은 조폭한 비평과 교조주의적으로 기계적으로 작가와 작품을 비평하는 비속 사회학적비평태도》에 대하여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또 이런 《비평은 때로 문단에서 대두하였고 극단적 형이상적 리론비평의 영향으로 하여 많은 독자들이 독립사고를 잃게 되고 모종의 혼란상태에 빠지게 하는 현상은 때때로 곳에 따라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문학의 번영에는 좋은 환경이 필요된다》고 강조하였다. 아래에서 김순기는 《괴상한 휴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론하고있다.   김학철동무는 《괴상한 휴가》에서 사회현상중에 존재하는 중대한 부정상적현상의 하나를 비평하였다고 생각하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주는바가 크리라고 생각한다… 《차순기》는 자기의 일정한 근거와 주장과 주견을 가지고있으며 갈대처럼 이러저리 뒤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나간다. 이것은 참 좋은 방면이다. 그러므로 독립사고가 없고 자기의 작품을 진정으로 리해하는 사람이 없고 오직 평론가들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자기의 독자들을 그는 나무리고있다. 승리하여 교오하지 않고 실패하여 비관하지 않고 해방된 독립사고와 독창정신 이 점으로 하여 차순기의 성격은 긍정을 받아야 한다… 작품이 독자들에게 무엇을 설명하며 무슨 공명을 주는 가를 생각하지 않고 작품의 각들을 기계적으로 뜯어보며 기계적으로 정치에 맞추는것은 교조주의적이고 비속 사회학적이라고 본다. ‘ 김순기의 이 글과 더불어 《오늘의 독초가 백년후에 가서는 꽃이 될수도 있고 오늘의 꽃이 백년후에 가서는 독초가 될수 있다》 (6) 는 김순기의 어록을 음미해보면 참으로 반세기가 거의 지나간 오늘의 문학도들도 얻는바가 적지 않을것이다.   제3단계; 새 력사시기(1982-2001년 9월) 주지하다싶이 1957년부터 1981년까지 24년이란 긴긴 시간 김학철은 《반동작가》라는 모자를 쓰고 온갖 정치박해를 받았으며 인간적인 괄세를 받았다. 그러다가 1980년 겨울 무죄판결을 선고받은 다음부터 다시 붓을 들고 창작에 정진하여 《격정시대》 등 수많은 소설과 《나의 길》, 《최후의 분대장》 등 수많은 잡문, 수필, 회상기, 자서전 등 산문을 창작하였다. 따라서 1982년부터 서서히 김학철의 문학에 대한 평론과 연구가 시작되였다. 평단에서 김학철의 문학에 대하여 다시 운운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족문학예술개관》(내부발행)에서부터였다. 이 책에 수록된 《번영발전하는 소설문학》(김동훈)에서 김학철의 《해란강아 말하라》를 놓고 다음과 같이 론술하였다.   《해란강아 말하라》는 중대한 력사적주제를 폭넓게 반영한 장편소설이다… 건국후 우리의 조선족문단에 처음으로 씌여진 항일제재를 장편소설이다…. 제재의 확대, 주제의 심화, 인물형상의 개성화 등 면에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놓았다. 그후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출판되고 많은 잡문이 발표되면서 김학철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여는 중국조선족의 첫 문학사  《중국조선족문학사》 (7)저술에서는 《김학철》 장(章)을 따로 설치하고 또 《격정시대》 절(節)을 따로 설치하고 김학철의 문학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론술하였다. 그리고 1990년에는 연변문학예술연구소 편찬 《김학철론》(8)이 출판되였으며 1996년 11월 20일에는 《김학철선생문학창작50주년 기념모임》이 열리였고 이밖에도 많은 신문, 잡지들에서 김학철 연구론문들이 발표되였다. 80년대 중기로부터 김학철의 작품들이 한국에서 출판되면서부터 아울러 한국에서 김학철연구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근 20년래 김학철연구에서 한번 읽어볼만한 평문이나 론문은 《김학철론》에 수록된 조성일의 《김학철의 삶과 문학》, 최삼룡의 《김학철의 인격과 풍격》, 김성호의 《투사와 작가》, 리광일의 《김학철단편소설에서의 문학적추구》, 김호웅의 《조선의용군 항일투쟁의 예술적기념비》, 장정일의 《-숭고한 인생의 뽀에마》, 신경림(한국)의 《민중생활사의 복원과 혁명적락관주의의 뿌리》 그리고 《조선족문학연구》(9)에 수록된 김호웅의 《김학철론》, 《50주년기념모임》에서 발표된 최삼룡의 《김학철의 정신발전궤적이 주는 계시》, 현동언의 《김학철소설창작에 표현된 인문정신》, 금성의 《굽이굽이 열두고개》 등 론문을 헤아릴수있을것이다. 이와 같은 평문 혹은 론문들은 비단 좌적인 로선과 방침이 지배하고 진실이 외곡되고 인도주의가 소실되던 시기에 김학철에게 들씌워졌던 모든 부당한 평가를 깨끗이 청소해버렸을뿐만아니라 김학철의 문학을 사적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사상예술적특색을 규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제4단계; 서거후(2001년 9월-) 2001년 9월 김학철선생의 서거는 김학철연구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켰으며 많은 기념문장과 더불어 일부 주목할만한 연구론문도 창출되였다. 많은 신문과 잡지들에서 발표한 수십편의 글들은 이제 김학철의 인간과 문학에 대한 심층연구에  도움되는 많은 재료를 제공해주게 되였다.   2 몇가지 생각   많은 평론가들과 작가들의 노력으로 김학철연구는 눈에 뜨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위대한 작가 김학철의 산봉우리를 이룬 문학에 비하면 우리의 연구는 아직 《정말 부끄럽다》는 한마디말로 개괄할수밖에 없을 정도로 약하며 수준이 낮다는것이 이 글을 쓰는 필자의 제일 큰 생각이다. 김학철의 인간과 문학에 대한 연구에는 아직 공백점이 너무 많으며 그의 문학의 원본에 대한 정리와 출판에서 할 일들이 너무 많으며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 그리고 정신실존을 둘러싼 많은 류언비어들이 해소되지 못하고있으며 그의 문학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리해의 차이도 너무 크다. 이런 상황은 급속히 극복되여야 한다는것은 결코 필자 혼자의 생각이 아니고 김학철의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의 생각일것이다. 나는 김학철의 인간과 문학을 보다 정확하게 전면적으로 리해하기 위하여 김학철의 모든 작품(미발표작까지)을 출판하고 그의 정신실존을 보여줄수 있는 모든 서신, 일기, 강의기록, 당안자료를 수집, 정리, 출판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사실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저작권을 가지고 출판된 문자마저도 김학철의 정신실존을 외곡한것이 많은데 그것이 그대로 세상에 류전되는 상황이다. 김학철선생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바 있다.   …한데 어이없게도 그 《반당반사회주의의 독초》라고 두둘겨맞은 나의 작품들은 다 당선전부의 검열과 삭제개작들을 거쳐서 발표를 한것들이였다. 그 한 례를 든다면- 《칠순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손자를 앞세우고 공원을 찾는 모습은 보기에도 흐뭇하다.》 나의 소설의 이 구절을 읽어본 선전부장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안좋아요. 칠순이 넘었다고 놀러다니기나 하면 어떡해요. 일은 안하고.》 《칠순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날마다 논밭에 나가 일을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흐뭇하다. 이렇게 고쳐야 해요.》 나의 그 《반당,반사회주의독초》들은 다 이런식으로 봉명(奉命) 개작을 해가지고 발표를 한 것들이였다.(10)   이것은 비록 작은 례에 불과하지만 김학철의 정신실존이 외곡된 생동한 실례로 되며 오로지 김학철의 전부의 문학과 모든 문자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과 세부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기초해야만 김학철연구의 과학성을 담보할수 있다는 도리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나는 오직 심층연구가 있어야만 김학철의 인간과 문학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가능하며 또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토론만이 심층연구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김학철의 문학은 그 처녀작이 창출된 초기부터 쟁론을 일으켰다. 작가들속에서도 쟁론이 있고 평론계와 학계에도 쟁론이 있을뿐만아니라 많은 독자들속에서도 쟁론이 있고 서사형식으로 쟁론할뿐만아니라 구두형식으로도 쟁론하며 국내에서 쟁론이 있을뿐만아니라 국외에서도 쟁론이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은 극히 정상적이고 또 적극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진정으로 백가쟁명과 자유로운 토론에 기초한 심층연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 있다고 본다. 례를 들면 김학철의 인생에서 투사와 작가의 이중배역의 갈등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김학철의 인격에는 어떤 결함이 있는가? 김학철의 세계관에서 민족주의, 무정부주의와 맑스주의의 관계는 어떠한가? 김학철의 문학에서 사실주의와 랑만주의 그리고 현대주의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등등.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김학철의 문학유산을 우리 전체 민족공동체와 그  성원들의 정신식량으로 전화시키는데 해명해야 할 문제들이며 또 이런 문제의 해명은 오로지 심층연구에 기초해야만 가능한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비교문학내지 비교문화의 시각에서 김학철의 인간과 문학을 연구하면 많은 소득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서울시기 김학철과 기타 좌익작가, 평양시기 김학철과 기타 공화국작가, 북경시기 김학철과 기타 전쟁문학창작에 종사한 작가, 연길시기 김학철과 프로레타리아용사들과의 비교연구는 우리가 보다 정확히 김학철의 문학을 리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특히 나는 김학철의 《20세기 신화》같은 문제작은 구쏘련의 반체제문학과도 비교연구할수 있고 그의 수많은 잡문은 중국의 곽말약, 모순, 파금 등 대가들의 작품과 비교연구를 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상으로 나는 김학철연구의 기성성과에 대하여 검토하면서 아울러 나의 몇가지 생각을 적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김학철의 인간과 문학에 대한 연구는 이제 금방 시작되였다는것을 강조하고 김학철에 대한 심층연구는 중국조선족의 문학예술과 문화 창조에 보람있는 작업임을 확신한다는것을 강조하며서 펜을 놓는바이다.                                          2002년 6월 20일     최삼룡: 평론가,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소장, 교수   주해 1, 김학철 ≪나의 처녀작≫(≪김학철작품집)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6월 제1판) 289페지 2, ≪신문학≫, 1946년 6월호 3, 이 합평회에 참가한 사람들중 김남천, 리원조, 윤세중, 송영은 김학철처럼 월북하였고 채만식은 1950년에 서거하고 박영준은 계속 남아 많은 소설을 창작하였다. 리흡의 인적사항은 알수 없다. 4, ≪ 기획출판≫ (≪거름)≫, 1986년 11월 10일) 5,≪아리랑≫, 1957년 12월호 6, ≪文革前十年史≫ (肖冬?著 ?旗出版社 1999년 9월 제1판) 239페지. 7, 권철, 조성일, 주필, 권철, 조성일, 최삼룡, 김동훈 저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7월 제1판) 제3편 제3장과 제6장 제4절 참조. 8,연번문학예술연구소 편 ≪김학철론≫(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0년 12월 출판.) 9, 권철, 임범송 주필 ≪조선족문학연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년 6월 출판) 10, 김학철 ≪최후의 분대장≫(한국, 문학과 지성사 1995년 9월 제1판) 358페지.
144    어느 혁명적락관주의자의 초상 (한국) 김명인 댓글:  조회:574  추천:0  2016-04-22
어느 혁명적락관주의자의 초상 -김학철론   김명인        1. 한 시대가 문을 닫는다   2001년 9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연변병원에서 향년 86세의 한 로인이 눈을 감았다. 그가 지니고 떠난 이름은 김학철(金學鐵). 하지만 그가 1916년 식민지 조선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룡동리(현재의 원산시 용동)에서 태여나 지녔던 이름은 홍성걸이였다. 1916년에서 2001년까지, 원산에서 연변까지, 그리고 홍성걸에서 김학철까지, 한 사람이 태여나 죽을 때까지 전유했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름이라 부르는 존재의 기표가 차지하고있는 이 좁은듯 넓은 영역에는 참으로 많은것들이 들어있다. 김학철. 1916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장남으로 출생. 서울 보성중학 재학중 1935년 상해로 건너감. 민족혁명당의 테러활동에 참여. 1937년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전 황포군관학교) 입교. 1938년 민족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에 참여. 1941년 태항산팔로군 근거지에 합류. 이 무렵 중국공산당에 입당. 그 해 12월 호가장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다리에 총상 입고 일본군에 피체. 나가사끼형무소에서 4년간 복역. 부상 악화로 한쪽 다리 절단수술. 해방직후 서울에서 10편의 단편소설 발표. 1946년 월북하여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인민군)신문 주필 등 력임. 1950년 중국행. 북경 중앙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1952년 연길에 정착, 전업작가로 활동.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등 창작. 1957년 과정에서 탄압받음. 1967년 미발표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 필화사건으로 이후 10년간 복역. 1985년 이래 장편 《격정시대》 등 여러권의 소설과 수필, 자서전 등을 연변과 남한에서 간행.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력임. 1994년 KBC 제정 해외동포 특별상 수상. 2001년 사망. 1 이것이 그의 생애의 리력이다. 그 리력이 차지하고있는 시간과 공간, 력사와 지지(地誌)는 길고도 넓다. 그안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3국의 근대의 시간들이 대부분 녹아들어있다.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침략, 한국의 민족해방투쟁과 내전과 분단, 중국의 항일전쟁과 혁명의 성공과 오류 등이 그의  리력속에서 구체적 육체성을 지니고 살아있다. 또한 그안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여러 공간들이 역시 구체적 물질성을 지니고 그 역사시간을 가로지르고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이 생애의 주인공의 삶과 의식속에서 모순적으로 통일되여있다는 사실이다. 한 인간(김학철)속에 동아시아(공간)의 근대(시간)가 통일되여있는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이제 종언을 고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죽음과 함께 독특한 시공간적. 물리적 체험으로 충만한 이 모순적통일도 이제 시효를 잃었다고 할수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동아시아 지형과 그가 생을 마감한 시점의 동아시아 지형은 이미 현격히 달라져있다. 더 이상 그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격변과 류동은 없을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당시에는 얼마든지 있었던 김학철 같은 삶의 모델들, 즉 《동아시아 일체형》의 모델은 이제 다시 등장할수 없을것이다. 또한 그의 죽음과 함께 고전적의미의 혁명의 시대 역시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고 할수 있다. 민중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자기에게 들씌워진 운명과 싸워 이길수 있었던 시대, 격렬한 류동과 변전의 시대, 그 시대를 혁명의 시대라 불러도 좋을것이다. 이제 다시 그런 시대는 오지 않는다. 한 소년이 어느날 유도복을 넣은 트렁크 하나를 들고 서울을 떠나서 의주를 지나고 만주를 거쳐 상해로 가는 시대, 한 쳥년이 대륙을 무대로 간난의 전장을 종횡편력하고 제국주의 일본의 감옥과 사회주의 중국의 감옥에서 도합 14년 동안 갇혀있게 되는 시대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안정과 성숙인지 정체와 부페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시대는 더 이상 파란만장의 시대는 아니다. 김학철의 시대는 끝났다.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이 종결선언속에는 끝내 총을 들 기회를 갖지 못한 세대가 총을 든 세대에게 느끼는 어떤 종류의 선망이 뒤집힌채로 들어있음을 부정할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 가득한 랑만적 노스탤지어(nostalgia)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것이다. 지금 내가 례를 갖추어 장송하고있는것은 한 시대의 성격이고 그 시대를 바로 그 시대답게 살아간, 당대의 구현체로서의 한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대가 넘겨준 과제와, 그 시대가 그 과제를 리행하기 위해 축적했던 방법과 양식까지도 함께 땅에 묻고싶지는 않다. 김학철이 살았던 시기도 지금도 근대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김학철이 총을 들고 맞서 싸웠던 대상도 근대라는 이름의 리바이어선(Leviathan)이고, 지금 우리가 총없이 맞서 있는 대상도 여전히 그것이다. 단지 력사적국면이 변화되고 생활세계가 달라졌을뿐이다. 최원식(崔元植)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기본적으로 근대 전기에 속해있었고, 우리는 근대 후기에 속해있다는 차이뿐일것이다. 2 김학철은 생전에 연변에서 5권의 소설집과 두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전집에 해당하는 네권의 《김학철문집》을 간행했고, 남한에서 한권의 소설집, 세편의 장편소설, 한권의 자서전, 두권의 산문집을 간행했다. 3 해방직후 서울에서 약간의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1952년에서 1957년까지 5년동안,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떠날때까지의 약 15년 등 20년정도밖에 안되는 기간에 쓴것으로는 적은 량이 아니다. 《김학철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이 글은 그의 전체 저작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작가론에는 크게 못 미친다. 이 글은 단지 그가 각각 1954년, 1965년, 그리고 1986년에 집필하거나 발표했던 《해란강아 말하라》 《20세기의 신화》 《격정시대》 등 세편의 장편소설만을 대상으로 하고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을 참고로 해서 《혁명전사》이자 작가인 김학철의 삶과 문학에 대해,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준것들에 대해 산만한 생각을 늘여놓는것을 넘지 못한다.   2. 《해란강아 말하라》-김학철을 가둔 김학철 소설   김학철은 1952년 북경의 중앙문학연구소 연구원직을 사임하고 연변에 정착하여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주임으로 일하다가 반년만에 사표를 내고 《전업작가》의 길로 나섰다. 4 그가 전업작가의 신분으로 쓴 첫 장편소설이 이 《해란강아 말하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식민지시대 이래의 우리 장편소설의 전통에 잘 어울리는 규범적작품이지만, 김학철의 작품세계에서는 좀 외떨어진 작품이라고 할수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기본적으로 실기(實記)의 세계이다. 단편소설들중 일부가 간혹 허구적으로 제작된 경우가 있지만,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이 미학적가공을 최대한 절제하고 자기 경험의 일부를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재현도 어떤 의도적인 플롯의 장치에 의지하지 않는 무정형인것이 바로 김학철의 득의의 서사법이다. 《20세기의 신화》와 《격정시대》는 그 대표적인 경우로서 대부분이 작가의 경험속에 들어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이 실제의 진행과정을 따라 방사형으로 쉬임없이 퍼져나가고 작가는 그것들을 가급적 통제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그리고 그사이에 끝없이 작은 에피소드들이 끼여들어 하나의 다선적인 서사의 큰다발로 묶이는것이다. 그것은 해방직후 나가사끼감옥에서 갓 출소하여 서울에 와서 발표한 《균렬》《담배국》 등의 단편에서부터 일찌감치 나타나는 김학철 서사의 기본문법이다. 하지만 《해란강아 말하라》는 이와는 달리 정형적인 짜임에 의존하고있는 작품이다. 1920년대말에서 30년대초반 무렵 해란강변의 유수툰 마을, 조선인 이주자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고있는데 지주-자작농-소작농-농업로동자 또는 머슴-룸펜 프롤레타리아 등의 전형적인 반(半)봉건적 계급구성이 존재하고있다. 물론 처음에 소작농들은 지주의 권력에 눌려 병작반수, 즉 5할이라는 고률의 현물소작료를 납입하면서도 소작권을 박탈당할가 무서워 지주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중국공산당과 련계된 농민협회조직이 점차 힘을 얻어가면서 소작농들은 소작쟁의를 벌여 삼칠제를 관철시키게 되고,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지주계급은 일변 지주동맹을 결성하고 일변 호시탐탐 만주침략의 구실을 찾고있던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내통하여 무장자위대를 결성한다. 그 과정에서 빈곤한 소작농들은 점차 계급적. 민족적으로 각성해가고, 자작농은 분해되여 소작농편에 합류하거나 지주측에 가담하거나 하게 된다. 이렇게 계급투쟁이 점차 진전되고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이 강화되면서, 투쟁은 전형적인 반제반봉건 무장투쟁으로 발전되여간다. 이 과정에서 가난하고 즉자적이던 농민들은 계급적으로 각성한 항일무장투쟁세력이 되며, 중국공산당과 련대하여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해나감으로써 그 력사적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연변조선족의 고난의 형성사를 이루게 된다. 5 이 작품은 대체로 무리없이 하나의 서사적완결성을 지닌채 연변조선족의 반제반봉건투쟁의 전통을 형상화하고있다.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형상도 각각의 계급적전형성을 비교적 선명하게 구현하고있다. 말 그대로 교과서적이고 규범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여기엔 결정적인 결락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개성이다. 이 작품은 어딘가 김학철의것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구석이 많다. 마치 이야기군이 사랑방에 앉아서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가듯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무수한 에피소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동안 어느새 기본 줄기가 잡혀나가는 김학철소설 특유의 개방형 서사구조는 찾아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상당히 엄격하게 통제된 서사구조를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이러한 정형화된 서사구조가 전형적인 사회주의리얼리즘적서사의 특징이라고 할 때 김학철의 소설은 확실히 사회주의리얼리즘 소설과는 다른 계렬에 놓여있다. 이렇게 된데에는 두가지의 리유가 있을것이다. 이 서사구조속에 김학철자신의 경험이 투시될 여지가 없었던것이 그 하나고, 이 작품이 김학철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거의 집단창작에 가깝다는것이 또 하나다. 6 두가지는 모두 김학철 특유의 서사적운신폭을 좁히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있다.   3. 《20세기의 신화》-비극과 해학, 정치와 미학의 통일   《20세기의 신화》는 김학철이 1957년 중국을 휩쓴 《반우파투쟁》의 와중에 발표의 자유를 잃고 전업작가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난후, 1965년에 탈고한 이 소설은 원고상태로 당국에 압수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반혁명분자로 락인찍혀 10년동나 령어의 몸이 되였다. 소설은 전편 《강제로동수용소》와 후편 《수용소 이후》로 나누어져있는데 전편은 임일평이라는 작가의 시점으로 반우파투쟁 과정에서 우파분자로 락인찍힌 사람들이 수용된 간제로동수용소의 참경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되여있다. 여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리유로 우파로 지목되여 수용소에 들어온 작가, 음악가, 혁명가, 교사, 로동자, 등이 살인적인 환경속에서도 인간적존엄을 지키려는 의지가, 수용소를 지배하는 감시와 전횡에 맞서 어떻게 승리해가는가가 잘 드러나있다. 그리고 후편은 수용소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온 이들의 눈에 비친 1960년대 초, 중반무렵, 즉 인민공사운동과 대약진운동, 그리고 중, 쏘분쟁의 소용돌이가 휘감아돌던 시기의 동요하는 중국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이 소설은 이 글에서 다루고있는 김학철의 세 장편소설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소설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전편 《강제로동수용소》의 경우 수용소의 참상을 리얼하게 드러낸것을 넘어, 그 참경속에서도 결코 희망과 락관을 잃지 않는 인간들의 위대함을 절실한 필치로 그려내고있다. 또한 비장과 해학, 풍자의 절묘한 균형으로 읽는이들을 비극적감상주의나 패배주의, 근거없는 주관적락관주의와 기계적력사관으로 이끌지 않으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미학적승리를 거두고있다. 사실상 김학철의 분신이라고 할수 있는 조선의용군출신 수용자 심조광의 아들의 일화, 즉 학교에서 소풍을 간 아이들이 《인민의 적》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놀이에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씌여진 쪽지를 찾아내고는 그 자리에 엎어져 끝없이 울었다는 일화 7 같은것은 이른바 반우파투쟁의 광기가 어떻게 인민의 영혼을 파괴했는가를 비극적으로 웅변하고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그 비극적정서속에 몰입하지 않고 수용소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극(笑?)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듯이 여기저기서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이를 때론 해학으로 때론 풍자로 조형하여 비참이 사랑으로 그것이 다시 그 비참을 만든것들에 대한 정당하고도 웅숭깊은 거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끔 하고있다. 이같은 미학적성취는 이 작품에 나타난, 이견과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은 작가의 정치적립장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하고있다. 사실 《전환시대의 론리》와 《우상과 리성》 그리고 《8억인과의 대화》 등 리영희의 3부작을 통해서, 또 《중국의 붉은 별》이나 《번신(飜身)》등을 통해서 193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중국혁명과정에 대한 우호적 립장을 가지게 된 우리 나라의 《진보적지식인》들의 경우 50년대말에서 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에 중국에서 있었던 이른바 《위대한 실험》의 나날들을 이처럼 격렬하게 부정하고 비판하는 김학철의 태도앞에서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김학철은 원칙적인 사회주의자의 립장에서, 그 사회 내부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어느 편이 옳은가를 판정하는 것은 이글의 범위를 넘는 일이지만 8 이 소설은 여기저기 산재한 작가의 메가폰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형상과 미학적직조에 의해 이러한 비판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고있음은 틀림없다. 어쩌면 이 작가에겐 원칙을 지키는것이 우선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온갖 현실에 대한 고려는 나중이기때문에 이러한 격렬한 비판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타계하기 2주전 9.11뉴욕테러에 접하고 《탈레반파 빈 라덴은 철저한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거나 9 하는것 등이 그렇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사회주의적도덕성에의 복무를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고 살아온 불퇴전의 원칙주의자임을 상기한다면, 그의 이런한 돌출적발언들은 사실은 돌출적인것이 아니라 일관된 신념의 소산에 다름아님을 알수 있을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너무나 많은 비원칙적인것들에 둘러싸여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비원칙적으로 살고있기때문에 그의 올곧은 발언이 돌출적으로 들리는것일는지도 모른다.   4. 《격정시대》-열린 서사구조에 담긴 혁명적락관주의   《격정시대》는 김학철의 자전적성장소설이라고 할수 있다. 이 소설이 연변에서 처음 출간된것은 1986년으로 그의 년치가 벌써 칠십을 넘긴 때였다. 62세가 되던 해인 1977년에 10년의 징역형을 살고 나온 그가 10년의 시간동안 자신의 젊은날들을, 자기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의 경험과 기억들을 가다듬어 3천매가 넘는 큰 화폭에 담아낸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1916년 식민지의 항구도시 원산에서 태여나 보통학교시적 원산총파업을 겪고 서울에 류학온후 광주학생사건, 윤봉길거사 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민족의식에 눈떠가던 한 소년이 본격적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의혈단을 거쳐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고, 다시 독립혁명당 소속의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 태항산근거지에서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혁명전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낸 이 소설은, 우선 성장소설의 전통이 일천한 우리 소설사에서 두드러진 성과로 평가되여야 할것이다. 성장소살이 한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성장하면서 자기 삶의 객관적조건들에 부딪히고 그것을 극복해가면서 하나의 보편적력사주체로서는 과정을 그리는것이라면, 이 소설은 바로 이런 정의에 부합하는, 그리고 안정된 부르죠아 사회로의 편입과정을 그리는 서구형 성장소설과 구별되는 제3세계형성장소설의 보기드문 한 모델이 된다고 할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넘치는 락관주의로도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객관적으로 절박하기 짝이 없는 위기의 순간에도 이 소설속의 수많은 《혁병투사》들은 락관적태도를 버리지 않으며 우스개와 객담을 늘 총보다 더 요긴하게 지니고 산다. 주저와 동요, 실패와 좌절, 패배의식에 익숙한 한번도 남쪽의 정서뿐만아니라, 승리적관점, 주체적관점의 견지라는 강박으로 질식하기 십상인 한번도 북쪽의 정서로도 이러한 도저한 락관주의는 경이로운것이 아닐수 없다. 작가는 이 작품의 이러한 락관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우리 조선의용대(나중에는 의용군)는 혁명락낙관주의로 충만된 애국자들의 집단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우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고있다. 이런 긍지심때문이였을것이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하면 곧 《비장함》과 《처절함》에다 련결시키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면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부각한 결과가 아닌가싶다. 우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지 혈육과 친지들을 다 고국에 남겨두고 단신 외국으로 뛰쳐나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5년씩 10년씩 또는 15년, 20년씩 풍찬로숙의 간고한 생활을 하고있는데 일년 열두달 삼백예순날을 밤낮없이 우국지심에 잠겨만 있다면 사람이 과연 어떻게 견뎌낼것인가, 지레 말라죽어버리지. 그러므로 장난기와 농담은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경우에도 장난기는 우리는 떠나지 않았고 또 아무리 위급한 고비판에도 재치있는 롱담은 역시 오갔다.(《최후의 분대장)201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혁명적락관주의란 혁명의 성공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락관적사고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상과 생활이 통일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정신적태도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격정시대》의 인물들을 관류하는, 또는 그 인물들의 언행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가 김학철이 지니고있는 락관적 또는 락천적분위기는 정치사상적신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어떤것이 아니라, 대단히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의 어떤것에 가깝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늘 함께 하는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그리하여 모르는 사이에 삶과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놓여난 달관에 가까운 경지라고 하는것이 더 정확할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좁은 의미의 《혁병적락관주의》를 넘어선것이며, 의도보다 과정이 더 살아나는, 생동하는 과정속에서 의도의 정당성이 저절로 설득되는 한걸음 더 나아간 경지로 보인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락천적달관은, 력사적정당성을 지니지 못함으로 해서 그러한 락천적달관을 가지려야 가질수 없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도덕적우위를 확보한다. 이 점은 앞서 살펴본 《20세기의 신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당한 고난을 겪는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펼쳐보이는 락관적달관과 거기서 발생하는 해학은 숨막힐듯한 통제와 억압의 기제에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는 균렬을 일으키고 그것의 절대성을 해체하여 상대화하고 희화화한다. 이러한 미학적힘은 중국현대사의 한 시기를 지배한 우상을 근처에서부터 파괴하는 정치적힘으로 천화하는것이다. 한편 《격정시대》의 열린 서사형식은 이러한 락관주의적주조를 아주 잘 뒤받침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학철의 소설들은 다성적이고 개방적인 서사구조를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 그것은 우리 전통의 민담과 같은 서사구조에 가깝다. 작자는 마치 옛날의 이야기군처럼 자신의 삶속에서 보고 듣고 직접 겪은 수많은 이야기거리들을 한보따리 싸안고서 큰줄거리가 흘러가는 중간중간에 틈나는대로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 이갸기거리, 즉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또 발전하면서 소설 전체를 넉넉하게 열어놓는데에 기여한다. 또 이러한 이야기에 겉맞는 해학과 골계의 민중적정서가 이 소설의 도처에서 지천으로 배여나오고있으며, 그 정서를 가능하게 하는 민중적풍속과 생활에 관한 묘사가 전편을 관류하고있다. 10 흔히 근대소설의 특징으로 드는 《문제적 개인이 훼손된 방식으로 훼손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거나 《비극적아이러니》등는 기본적으로 닫힌 서사구조를 전제한것들로서, 이 소설의 개방적서사구조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이 소설이 지닌 락관과 해학이라는 미학적특질들은 비극적아이러니를 기본으로 하는 근대소설의 일반적 특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것들이다. 그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 무명의 락천가 투사들의 투쟁과 일상이 근대적일상성의 바깥에서 근대를 넘어서는 지점에 위치하기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는 사회주의리얼리즘소설의 작위적규률로부터도 자유롭다. 김학철소설의 이러한 락관과 해학으로 가득한 열린 서사구조는 그 낙관과 해학이 인간의 미래에 대한 더욱 구원(久遠)한 신념에서 온다는 점에서, 또 그렇기때문에 그 미래의 인간을 성마르게 구속하는 어떤 닫힌 서사도 거부한다는 점에서 낡은 과거의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이런 락관주의야말로 말의 옳바른 의미에서 진정한 《혁명적락관주의》에 값하는것이 아닌가.   5. 누가 더 세계인인가   김학철이 쓴 세편의 장편소설을 지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앞에서 그의 생에에 동아시아의 근대가 모순적으로 통일되여있다고 한바 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여났지만 중국 대륙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다. 지금 우리는 이런 리력을 가지려야 가질수 없다. 혹 일본과 중국, 심지어는 북한까지 다니면서 장사군이 될수는 있을것이다. 어쩌면 그런 삶에도 동아시아의 근대가 통일되여있다고 할수는 있을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김학철의 생애는 동아시아의 근대를 한몸에 통일하면서 동시에 그 극복을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는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싸웠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한 사회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기다렸다.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김학철의 삶의 행로를 살펴나가는 동안 가장 인상적인것은 그가 지닌 개방성과 세계성이였다. 그의 행로와 행동령역이 기본적으로 국제주의 혹은 제3세계 인민의 년대라는 원칙아래서 협애한 민족주의의 울타리를 일찍이 넘어섰다. 민족해방투쟁의 주체로서 그는 《조선사람》이였지만, 민족해방투쟁을 포함하고 그것을 뛰여넘는 사회주의적인간해방의 길에서는 그는 철저히 《세계인》이였다. 그는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몸바쳤지만 조국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서 살았지만 중국에 자신을 끼워맞추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다가올 새로운 인간의 세계를 향하고있었기때문에, 이 협애한 일국주의적국경선과 민족적편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회화적락관의 힘으로 이를 넘어설수 있었던것이다. 그는 늘 미래의 세계인이였다. 11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있는, 그리고 내면화하고있는 세계성이라는것이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인 비주체적 소외의 결과라면, 그의 세계성은 높은 리념적주체성에 기초한 의지적 선택의 결과였다고 할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것이 자본주의적세계화와 그에 대한 일국주의적저항을 벗어나 진정한 세계성의 맥락에서 근대극복의 전망을 획득하는것이라면, 김학철이 이미 체현한바의 이러한 세계성은 과거의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앞날의것으로 다가서고있다. 세계의 변방, 연변의 한 루옥에서 살다 간 낡은 중산복의 로인-우리중 누가 그보다 더 세계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가.   글을 마치고   김학철선생이 마치 두다리가 성한 젊은 청년이기라도 한것처럼 아직 강건하고 민활(敏活)한 젊은 로인이였던 1990년 여름무렵 나는 선생을 처음 만났다. 나는 그 해 봄에 나온 나의 첫 평론집을 선생께 드렸다. 선생은 얼마후 연변에 돌아가서 내게 편지 한장을 보내셨다.   김명인선생 우리가 서울 시내를 달리며 차속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가 진리를 탐구하는 길에서 부닥친, 행동하는 길에서 부닥친 난점들에 관한것이였습니다. 력사는 언제나 해결할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하는 법이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은 결국에 가서 모든 난문제들을 깡그리 다 해결하고야 말것입니다. 선생의 글들은(일어로 된것까지) 다 읽었습니다. 글이 로성한데 비해 작가가 너무 좀 젊은것같은 느낌인데 당자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재용(김희민) 내외분께 다정한 안부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김학철 90. 10. 1.   나는 벌써 날긋해지기 시작하는 누런 미농지로 된 선생의 편지를 앞에 두고 지금 내앞에 닥쳐있는 난점들에 대하여 생각하고있다. 그중에서 도대체 어떤것들이 해결할수있는 단계에 와있는것인지, 혹시 선생은 이미 넘어선 문제들을 나는 아직도 못넘어서고 있는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그것들을 문제라고나 생각하고 있는지…   머리 숙여 선생의 명복을 빈다.   주해 1. 이 간략한 년보는 김학철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문학과 지성사 1995)과 한홍구 외편 《항전별곡》(거름 1986), 그리고 연변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문예지 《장백산》2001년 11-12월호의 《김학철선생추모특집》을 참조하여 작성되였다. 2. 최원식 《80년대 문학운동의 비판적점검》, 《민족문학사연구》제8호(1995년 하반기) 64면, 여기서 최원식은 해방 이전을 근대전기, 해방 이후를 근대후기로 나누고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김학철은 근대 전,후기를 공히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의 생애의 성격은 근대 전기에 주조된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3. 현재 확인된 그의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변: 소설집 《군공메달》(1951) 《뿌리박은 터》(1953) 《새집드는 날》(1953) 《고민》(1956) 《김학철단편소설집》(1985),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954) 《격정시대》(1986), 저작집 《김학철문집》 전4권(1998~1999) 서울: 소설집 《무명소졸》(풀빛 1989),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풀빛 1988) 《격정시대》(풀빛 1988) 《20세기의 신화》(창작과 비평사 1996),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문학과지성사 1995), 산문집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실천문학사 1990) 《우렁이속 같은 세상》(창작과 비평사 2001). 4.《최후의 분대장》 351면. 여기서 《전업작가》란 글만을 써서 생활을 하는 작가라는 뜻에서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전업작가와 같으나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글을 팔아서 생활을 하는 반면 사회주의사회인 중국에서는 원고료뿐만아니라 국가공무원으로서의 봉급을 받아 생계를 보장받는다는 점이 다른다. 김학철은 이 제도를 무위도식하는 건달패를 육성하는 제도라고 비판하고있다. 5. 이 소설의 이런 서사골격은 1927년 중국공산당 만주성 임시위원회, 1929년 동만구위원회가 성립되고, 이어 1930년 《전만농민투쟁강령》이 만들어지면서 동만구 일대에 《붉은 5월투쟁》이 벌어져 일제와 악질지주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등 강력한 반제반봉건투쟁이 전개되던 일련의 실제 력사의 과정과 대부분 일치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 집필소조 《중국의 우리 민족》(한울 1988) 65~66면 참조. 6. 작가의 머리말은 《해란강아 말하라》 이 소설은 나 한사람의 창작이 아닙니다.》로 시작되여서 《해란강아 말하라》 이 소설은 그러기에 나 한사람의 창작이 아닙니다》로 끝난다. 이것이 단순한 겸사가 아님은 머리말에 많은 조력자들의 이름이 렬거된데서도 알수 있다. 이 소설은 조직의 결정으로 여러 사람들의 조력을 받아 만들어진 김학철 대표집필의 집단창작품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목록에 올리는것을 그다지 마뜩찮아했다. 김학철이 연변에 정착한것은 1952년, 이미 그전에 연변조선족의 해방투쟁사는 종결되였고 그는 조선의용군출신이라는 또다른 개인사를 지닌채 그 력사의 끄트머리에 접합되였던것이다. 이런 점이 이 《해란강아 말하라》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지 못하게끔 한, 그리고 이 작품이 작가의 애착을 얻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7.《20세기의 신화》136~37면. 8. 최근에 이르러 반우파투쟁을 위기에 직면한 공산당의 리성적비판에 대한 봉쇄책략으로, 대약진운동을 합리성을 무시한 무모한 실험으로 단정하는 견해가 제출되고있는것은 이 문제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오꾸무라 사또시, 박선영 역 《새롭게 쓴 중국현대사》(소나무 2001)참조. 9. 김해양 《미지막 스무 하루의 낮과 밤》(장 백산 2001년 11~12월호 9면. 10.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이 소설의 이러한 특징은 홍명희(洪命憙)의 《림꺽정》이 지닌 어떤 면과 대단히 근접해있는것으로 보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민중문학과도 밀접하게 잇닿아있다고 생각한다. 11. 그가 《김학철》이라는 가명을 쓴것은 중국에서 항일활동시의 필요에 의한것이였다. 그런데 그 필요성이 사라진후에도 《홍성걸》이라는 본면을 되찾아 사용하지 않고 아들의 이름까지 《김해양》으로 지은것 역시 그가 협애한 민족적집착에서 자유로운 인간이였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례가 될것이다.    《창작과 비평》 2002년 봄호 게재       김명인: 한국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143    김학철소설에서의 력사성과 문학성 (한국) 임규찬 댓글:  조회:533  추천:0  2016-04-22
김학철소설에서의 력사성과 문학성 -《격정시대》를 중심으로   임규찬       1   저에게 주어진 주제가 《연변문학》에 관한것이지만, 주제 자체가 방대할뿐만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고려해서도 적절하지 않아 하나의 대표성으로서 우리가 잘 아는 김학철의 문학세계에 초점을 맞출가 한다. 사실 그동안 남북분단으로 인해 남한에서의 연변문학은 북한문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강요된 공백상태에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적정체성 탓에 오히려 친북적령역으로 간주해왔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연변문학에 눈길을 돌리게 되였는데 이는 참 알다시피 남한 변혁운동의 발흥과 깊은 관련을 맺고있다. 오히려 80년대 후반에 보여줬던 연변문학에 대한 관심이 최근 들어서 시들어지고있다는 점도 그것을 반영해주고있는 한 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는 속에서도 김학철만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국내에 소개되고 또 세인의 관심을 끌어왔다. 중국에서는 오히려 출판조차 되지 않은 장편 《20세기의 신화》가 출간되고, 《최후의 분대장》, 《우렁이속 같은 세상》 등도 속속 신작으로 출간되였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는 김학철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저자 자신도 그렇게 말했거니와 필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격정시대》를 중심으로 김학철의 문학세계를 간략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   사실 90년대 들어 국내 소설계에서는 넓게 보면 전기소설류가 가장 성과있는 령역으로 다가오고있는것 같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가》 등과, 신경숙의 《외딴 방》, 그리고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이 그 대표적 례이다. 그중에서도 김학철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을 보면서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가》가 문득 떠올랐다. 《자전소설》이라고 명명된 이 작품은 사실 70년대 말에 출간된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과 내용면에서 긴밀히 대응하고있다. 마치 《최후의 분대장》과 《격정시대》가 긴밀히 대응하고있듯이 말이다. 발표자는 이 점을 중시하여 《박완서와 6.25 체험?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한편 쓴적이 있는데 그떄 자전소설에 비추어 《목마른 계절》의 사실적측면과 미학적측면을 주목한바 있다. 그래서인지 김학철에게서도 비슷한 충동을 느끼게 되였다. 그리고 저자 자신도 《격정시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격정시대》-나의 이번 장편소설-는 소설인지 전기문학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이다. 력사적사실에 충실하느라고 창작의 붓-허구의 붓-을 마음대로 놀릴수 없어서-실골목에서 창을 쓰는것 같아서-이러 부딪고 저리 부딪고 하는 통에 숱한 구속을 받았다. 지뢰원을 골라다니며 나가듯이 조심도 많이 하고 또 《공연히 시작했나보다.》 후회도 여러번 하였다.(《격정시대)의 창작과정)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고민가운데도 《력사적사실에 충실하자》는 립장을 취했다고 술회한바 있다. 사실 김학철의 소설은 장단편 구별없이 거의 전부가 항일전쟁시기의 조선의용군의 형상 창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항일무장투쟁 전사들의 삶과 투쟁을 형상화하는것으로 일관했다. 실제로 국내에 김학철의 소설이 큰 반향을 일으킨것은 우리 남한에 아직껏 무장독립투쟁을 그린 소설다운 소설이 없었다는 점이였다. 이러한 일관성때문에 오히려 그의 문학적세계에 대한 진단은 진작부터 어느 정도 합의된 상황이라 할수 있다. 우선 앞서 이야기한대로 항일무장투쟁을 거의 유일하게 직접 체험한 작가라는 점, 철저한 력사적의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항일투사들의 형상을 생동감있게 그려낸 점, 그리고 속담, 에피소드, 회화적인 묘사 등 능수능란한 언어적기교를 활용한 유머와 풍자적수법과, 대화를 통해 인물의 개성을 살려내는 수완 등으로 대표되는 미학적특질, 그리고 그 모든것을 총괄하는 미적, 사상적범주로 내세울수 있는 락관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평가를 눈여겨 보면 좀더 진지하게 론의되여야 할 사항이 있는듯하다. 물론 외관상 쉽게 드러나는 성격은 그의 작가적성향까지 감안하면 누구나 쉽게 동의할만한 특징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력사적사실과 의식적계몽성을 워낙 강조한 탓에 알게 모르게 문학적의미망들이 소홀히 취급된 감이 없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력사에 짓눌렸다고 볼수 있지만, 그런가운데도 엿보이는 문학적특색, 즉 력사를 능히 감당해나가는 위대한 문학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통합하여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런 견지에서라도 《격정시대》가 가장 적절한 대상이 될것이다.   (1) 《격정시대》의 미학적변형 《격정시대》는 작가 자신의 말대로 자전적성장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자의 분신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서선장의 인물형상을 주목하지 않을수 없다. 작가는 《서선장의 소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라든가 모두 저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중국에 들어와서부터의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쓴것입니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에 따르면 문학적변형은 중국에 건너간 이후인듯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중국에서의 경우는 체험의 공유성에 기반한 사실의 집적에 해당되는것이기에 작가 체험의 변형 혹은 가공의 성격은 크게 문제될것이 없다. 관건은 유소년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선 선장을 통해 보여주는 각종 사건과 행위는 《최후의 분대장》을 보더라도 김학철의 유소년기의 삶 그대로이다. 그런데 미학적변형은 전형적환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선 선장의 집안환경부터 달라졌다. 김학철은 누룩제조업자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7살부터 편모 슬하에서, 꽤 부유한것으로 보여지는 외가집에 의탁하여 살았다. 또 외가집이 서울로 이사한 덕에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그런데 《격정시대》에는 배사람인 아버지를 둔 전형적인 어촌의 빈한한 어민의 집안으로 제시되였다. 또한 서울 류학도 먼 친척 이모(남편이 변호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빈부의 문제를 전형적으로 표출할수 있는 환경으로 보이지 않게 변형시킨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배태된 계급 및 민족의식이 이후 차차 맑스주의를 받아들이며 무장투쟁에 뛰여드는 하나의 전형적성격을 창출할수 있는 기반이 된것이다. 오히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인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양씨동이란 가공의 인물이다. 대개의 등장인물은 실존인물에 기반해 있음을 《최후의 분대장》을 통해 쉽게 확인할수 있으나, 양씨동만은 례외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선이 굵고 남자다운 외모적 성격적 특질을 가진 청년으로 형상화된다. 제나름의 주대가 있는 남자로 로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또한 일본인의 첩이자 식모인 손쌍년과 과감하게 애정행각도 벌이는 등 여러 모로 주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씨동의 인물류형은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형인데, 례를 들자면 리기영의 《서화》속에 나오는 《돌쇠》가 이와 비슷한 형상이랄수 있다. 실제로 《격정시대》의 가장 탁월한 인물형상을 들라 하면 씨동인데. 그 역시 전반부에서 빛을 발한다. 사실 전반부에서 어린 선장을 통해 한 사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기는 힘들다. 이를 뒤받침하고있는 인물들이 몇 있는데, 그가운데에서 씨동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서 씨동은 전반부와 같은 중심성을 갖지 못하고 많은 혁명투사의 한 례로 평균화되여 나타나고 만다. 결국 《격정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알게모르게 괴리되여있다는데 있다. 문학과 력사라는 차원으로 단순화시켜 보면 전반부에는 문학성, 후반부에는 력사성이 주도적인 서사적원리로 작동하고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오히려 전반부와 같은 문학적변형을 후반부에서도 과감히 시도했으면 어떠했을가 하는 마음이였다. 작품 후기에서 작가는 《운명의 신은 나로 하여금 호가장전투를 마지막으로 싸우는 태항산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연 한다는 종지에 따라 도 중도에서 끝 아닌 끝을 맺게 된것이다》라는 진술은 이런 문제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것이다.   (2) 민족적민중미학의 소중한 자산 김학철이 사실 력사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중국땅에서 일본에 혼신으로 맞섰으면서도 아무도 알아주는이 없이 잊혀져가고있는 조선의용군의 력사를 글로 남기고싶었던때문이였다. 그러나 최근에 남한을 오고가면서 단순한 력사의 복원을 넘어서서 분단이 야기한 남북한의 력사 외곡에 대한 저항 또한 있음을 환기하지 않을수 없다. 길게 이야기할것도 없이 남북한 모두가 김학철의 말(《독립운동사의 과대망상증))대로 《과대망상증》을 앓고있다는것이다.오히려 김학철이 문학을 통해 분단질곡의 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는 전기문학이나 회상기 또는 무슨 전기 같은것을 통하여 흔히 위인, 걸사들에 접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보아 주인공들이 너무 동떨어지고 너무 완전무결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체면없이 아주 신격화해버린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말이다.(중략) 그러므로 《격정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우점도 있고 결점도 있는 보통사람들이다. 전쟁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겨서 신바람나게 추격을 하는가 하면 져서 오금아 날 살려라 도망질을 치기도 한다. 적군을 다 총알받이가 되려고 이 세상에 태여난것 같은 허수아비로 만들지도 않았거니와 아군을 다 《전설적영웅》으로 다듬어 세우지도 않았다. 20세기의 《홍길동》을 만들지 않았단말이다.(《격정시대)의 창작과정)   한마디로 영웅적관점이 아닌 민중적관점이랄수 있는 생생한 현장을 김학철의 작품에서 우리는 목도할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의용군의 집단을 하나의 특수한 영웅적세계로 우상화하지 않고, 그 자체가 일반 사회와 동일한 민중적생활현장으로 만들어놓았다는데 있다. 그의 특장으로 이야기하는 대화 등에서 나타나는 속담 활용이나 에피소드의 극적 재미, 유머, 풍자적수법 역시 생동하는 민중의 산 입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김명인(《어느 혁명적락관주의자의 초상))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다성적이고 개방적인 서사구조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열린 서사형식과도 함께 맞물리는 문제이다. 그런데 홍명희의 《림꺽정》으로 대표되는 소설적계보가 민족 내부축적의 서사구조로서 오랜 력사성을 가지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망각상태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싶다. 그리고 이러한 각도에서 김학철의 소설세계를 홍명희의 《림꺽정》과 비교해보는 일이나 기타 전통적서사구조와 관련하여 그 성과와 한계마저도 깊이 연구해보는 일이야말로 김학철문학연구의 진정한 본령이 아닐가 생각한다.   3   《우렁이속 같은 세상》을 새삼 지금 보니 마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듯 다른 누구 혹은 세상보다도 그 자신에 가장 혹독한 자기 평가와 반성을 하고있음을 보게 된다. 특정한 시절을 두고 스스로 《한심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어용나팔수》였다로 하는가 하면, 《격정시대》를 두고도 《소설인지 르뽀인지 아니면 숫제 자료집인지……도무지 분간을 할수 없는것이다.》라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탄식처럼 읊조렸던 《내가 끝내 정복을 못하고 만 정상》이란 말은 웬지 목울대를 쳤다. 그리고 그것을 참되게 계승하는 일이야말로 후대인의 몫이 아닐가 생각했다. 그의 죽음을 다시 한번 추모하여 스스로 평생의 모토로 삼았다는 구절을 함께 떠올리는것으로 본 발표를 마칠가 한다.   편안히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임규찬: 한국 작가   
142    넉넉하고 포근한 글들 (한국) 신경림 댓글:  조회:678  추천:0  2016-04-22
넉넉하고 포근한 글들   신경림        지난해 《격정시대》의 서평을 창비에 쓰고난 얼마뒤에 지우 신현태군이 연변에 갔다가 김학철선생을 만나고 왔다. 그는 김학철선생이 70고령에 다리 하나가 없는 불편한 몸으로 지금도 촌분을 아껴 창작에 몰두하고있더라고 전했는데, 그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삶과 사람은 나를 크게 감동시켰고, 그것이 막 《격정시대》를 읽고난 뒤였기때문에 더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김학철선생의 소설도 여러권 가지고 와서 내게 주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열심한 독자가 되였다. 그 무렵 나는 몇몇 너무 매끄럽고 너무 날렵한 국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몸에 꼭 끼는 옷을 입고 있는것 같아 답답해있는터였다. 그런터에 김학철선생의 소설을 읽으니 풍성하고 넉넉한 옷으로 갈아입는것같아 여간 편한것이 아니였다. 김학철선생의 소설은 먼저 읽는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소설을 이야기하는 어떤 짧은 글에서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것이 생각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한테 누구나 그 영화 재미있더냐고 묻지 교욱적이더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재미때문에 읽지 교육적이라서 읽지는 않는다. 소설은 먼저 독자에게 재미를 줘야 한다. 아무리 교육적이라도 안 읽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 아닌가.》 얼마나 듣기에 편한 소린가. 또 사실 그의 소설은 재미있고 편하다. 그는 소설을 가지고 독자에게 무엇을 억지로 주려 하지 않는다. 재미있게 얘기를 들려주고 그러는 가운데 독자가 취할것이 있으면 취하게 하는것이 그의 뜻인것 같다. 다 아다시피 그는 일제시대 중국에서 조선의용군에 들어가 항일무장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다리 하나를 잘린 사람이다. 해방후에도 삶이 평탄치가 않아 문화혁명기간 10년동안에는 시민과 작가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신체적 자유를 잃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글이고 사람이고 가파르고 각박해지게 마련이다. 세월을 가장 앞장서서 가장 아프게 당하고보면 앙칼진 마음이 있게 되는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김학철선생의 소설들은 영 딴판이다. 그냥 넉넉하고 부드럽고, 읽으면 절로 웃음이 나오니 웬일인지 모르겠다. 소설의 소재들은 거의가 피나는 항일투쟁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믿는 그의 마음가짐에서 오는것인지도 모른다. 이 믿음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그가 자기 소설속에 나오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얼마나 믿고 사랑하는가를 알수 있다. 이 믿음과 사랑이야기야말로 그의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리라. 사람을 믿고 사랑하니까 사람이 만드는 력사에 대해서도 락관하게 되는게 당연하리라. 사람이 삶의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에 의해서 사람이 거꾸로 규제받는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사람을 규제하는 조건이란 사람의 힘으로 얼마든지 극복될수 있는것이라는 생각도 문득 하게 된다. 그러나 김학철선생의 소설의 재미의 더 큰 샘은 아무래도 그 익살에 있지 않나 여겨진다. 해방직후의 그의 소설을 가리켜 당시의 한 평론가는 건강한 명랑소설이라고 말한것이 생각나지만, 그의 소설에는 아무리 비참한 소재인 경우에도 어느 한구석에는 웃음이 도사리고있다. 흔히 익살은 사람의 약점에 대한 예리한 통찰에서 나오는것으로 알려져있다. 말하자면 그것에 의한 삶의 재구성이 희극일터인데, 김학철선생의 경우는 그와 거꾸로라는 느낌을 준다. 즉 그의 익살은 사람의 약점을 꿰뚫어보는데서 나오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장점을 잘 알아보고 살리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것이다. 익살은 더러는 쓰리고 아픈것도 있는 법인데 그에게는 그런 익살은 없다. 이것이 더욱 그의 소설이 편하게 읽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김학철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나라(남한)에는 아직껏 무장독립투쟁을 그린 소설다운 소설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였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점된것이 통감통치시대를 합쳐 거의 50년, 그동안 단 한순간도 항일무장투쟁이 그친 날이 없었는데도, 이 중요하고도 엄청난 소재를 다룬 소설다운 소설이 없었다는것은 우리 나라 문학이 할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50년동안 우리의 정신을 지탱해온것이 무엇인데, 그것을 형상화하는 일에 그토록 게으른채 어찌 제대로 우리 문학을 해왔다고 감히 장담할수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정통이란 문제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데서 이런 일이 생기는것은 아닐가. 김학철선생의 무장독립투쟁을 내용으로 한 소설은 이런 점에 있어서도 우리 문학에 아주 소중하고 값진것일뿐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있는 혹은 지배계층에 의해서 일부러 지워진 력사를 서술해서 채워주고있다는 점에서 여간만 중요한것이 아니다. 사실 이 소설속에 나오는 투쟁의 이야기는 왜곡된 또는 한 부분이 삭제된 독립운동사만 읽어온 우리에게는 너무 생소한것들이다. 우리 력사가 얼마나 잘못 알려져있는가를 다시금 깨달으면서 김학철선생의 소설의 또 하나의 몫을 알게도 된다. 김학철선생이 서울에 오신지 두어달이 되였다고 들었지만 아직 나는 뵙지를 못하다가 며칠전 조정래의 《태백산맥》출판기념회자리에서 먼발치로 뵈였는데, 축사를 하는 그의 모습과 목소리가 너무 젊고 당당한데 저으기 놀랐다. 그는 문학은 사람이 고루 편하게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생각이라고 피력하면서, 한국에는 잘사는 사람의 노리개가 되려는 문학이 적지 않은데 놀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편 서울에 와보고 잘사는데 기뻤지만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한데 놀랐으며 변혁이 불가피함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이 변혁은 누가 주어서 얻어지는 것이아니라 싸움으로 뺴앗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가장 힘이 들어있어 보였다. 그날 나는 김학철선생을 뵐 생각이였으나 축사가 끝나자 그는 이내 자리를 빠져나갔기때문에 그날도 뵙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그 까닭 때문에, 그를 만나지 못한게 더 적격자라 하여 내가 이  발문의 필자로 선택되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그의 첫인상은 소설가라기보다 역시 한 전사라는 느낌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온갖 삶의 지혜를 다 갖춘 늙은 전사라는, 그의 소설의 편함, 넉넉함은 어쩌면 여기서 오는것은 아닐가. 듣건대 그는 아직도 스스로 인민의용군의 전사로 자처한다고 한다. 인민의용군의 전사로 다하지 못한 일을 글을 써서 한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고, 당시의 인민의용군의 모습을 글로 써서 알릴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 어느쪽이라도 인민의용군으로 일관하려는 그의 삶의 자세를 읽기에는 어렵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그 무엇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드물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이고 독자에게 읽혀 마땅하리라.   신경림 한국시인
141    전형화의 낯선 인간들 (한국) 오양호 댓글:  조회:1108  추천:0  2016-04-22
전형화의 낯선 인간들 -《김학철작품집》의 인간상 고찰   오양호     1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이 서울에 왔다. 해방전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유격대에서 일군과 싸우다 한쪽 다리를 잃어 쌍지팡이를 한채 조국의 수도 서울을 찾아온것이다. 필자가 지난 10월 12일 제5회 대륙연구강좌 《나의 인생, 나의 조국》을 듣기 위해 남대문뒤 대한상공회의소 현관을 들어서서 긴 회장을 올라오다 저만치 옆문으로 들어서는 쌍지팡이의 백발 성성한 로인을 발견했다. 김학철옹이 이 강좌를 하기 위해 나타난것이다. 마침 기다리고있던 한 신문사의 녀기자가 쫓아가 그와 이야기를 시작했고, 또 대륙연구소의 직원이 그를 안내하는 바람에 필자는 뒤를 쭐래쭐래 따라가다가 말았다. 인사라도 하고싶었는데 틈을 얻지 못했기때문이다. 필자가 김학철의 《격정시대》를 읽은 것은 88년 8월이였다. 그때 이 소설을 읽고 썼던 서평에서   《격정시대》는 한국 현대소설문학의 흐름을 다른 시각에서 조용히 반성케 한다. 그뿐아니라 이 소설은 그간 우리가 소설속에서 잃어버렸던 서민형 영웅소설의 초인의 탄생을 다시 깨닫게 해주고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한국 현대소설사가 안이한 자료만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격동의 시대를 포괄적으로 설명할수 없었던 난감한 문제를 아주 근본적으로 보완하는 구실도 해주고있다. 이런 점은 가히 80년대 소설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역할이라 할만하다.(출판저널 ? 통권 제25호)   조국이 광복을 되찾은지 반세기가 지나가는 이 시간이 되면서 광복을 위해 싸웠던 거의 모든 렬사들은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김학철 - 《격정시대》의 주인공 서선장이 작가자신이 틀림없는, 일본놈을 까부수는 것이 조국독립을 앞당기는것이라고 믿고 15세의 나이로 단신 상해림시정부를 찾아간 - 을 가지고있다. 더욱이 일본과의 항전에서 분대장으로 전투의 제일선 현장을 휘젓고 다녔던 생생한 항일전사의 현역을 소설가로 가지고있는것이다. 또 하나 다행한 일은 고희도 넘은 작가가 건강하며 지금도 창작에 무비의 정열을 몰붓고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로익장인 이 항일민족주의자가 불원간 《격정시대》보다 더 큰 대작을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력사발전의 론리에서 새 시야가 정리되면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새로운 력사소설이 기대될수 있다는 말이다. 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은 한국인의 피와 땀과 뼈가 묻힌 땅이다. 지금 그곳에는 200만여명의 우리 민족이 살고있다. 김학철의 모든 소설들은 이곳, 중국 동북3성을 중심무대로 하고있다. 지금 한국에서 간행된 연변 문학작품에서 글의 표제로 쓰이거나 빈번히 눈에 뜨이는 어휘들을 한번 보자. 해란강, 천지, 장백산, 두만강, 송화강, 목단강, 도라지, 진달래, 나리꽃, 민들레, 들국화, 금잔디, 아리랑, 봄바람, 변강산천, 고향, 산촌, 어머니, 꽃수레, 꽃노을, 풍운기, 개척자, 고난의 년대, 격정시대, 몽당치마 … 이런 단어들은 우리 민족의 마음을 지배하고있는 원형심상들이다. 해란강은 애국가만큼이나 무게있는 조두남 곡의《선구자》로 우리에게 각인되여있고, 《천지》는 바로 민족의 터밭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신령스런 존재이다. 장백산, 두만강, 송화강, 목단강은 민족의 한 맺힌 이민사, 투쟁사 그리고 끈질긴 독립군의 생리와 그 보호자의 이미지로 련결되고, 송화강은 벌써 1920년대 파인에 의해 우국렬사의 한을 달래주는 객관적상관물이였다. 《돌아다 보며는 고국이 천리런가 /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 온 길이 천리나 / 갈 길은 만리다 // 산을 버렸지 정이야 버렸나 /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배야 가자 / 몸은 흘러도 / 넋이야 가겠지 // 여기는 송화강, 강물이 운다야 /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 강물도 울더냐 / 장부도 따라 운다,》 그래서 지금은 해란강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인다. 그것은 그 강이 민족해방투재의 성역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생생히 남아있기때문이다. 론리가 감상적사설로 된듯하다. 그러나 이 사설은 김학철소설과는 무관한 연변문학에 접근하는 필자의 몇가지 시각중의 하나일뿐이다. 《김학철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당대적삶의 생태와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는 그것대로 더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여기서는 다만 인간상을 중심으로 그의 단편에 나타나는 의미를 고찰하겠다.   2   김학철의 소설에는 우리들에게 낯이 선 인물들이 많다. 《짓밟힌 정조》의 문대성이는 결점하나 없는 청년이고, 《문학도》의 백운산은 도인 같은 문인이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처럼 아파하는 리상주의자가 있는가하면, 사람의 직업은 경제적문제와 무관하고 오직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기여도 또는 의의에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역설하는 인물도 있다. 뿐만아니라, 작품집을 펼치면 갈등이나 고민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수 없는 인물들이 여기 저기서 튀여나온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주 생동감 넘치는 낯선 사람들, 또는 개성에 찬 인물들이 우리의 소설적흥미를 돋군다. 이런 점은 김학철의 단편들을 읽었을 때 당장 잡히는 대체적인 인상이다.   3 사회주의 론리와 인간의 론리   《죄수의사》의 주인공 현덕순은 술자리에서 취중진정발로 《하지만 그가 쓴 《공산당원의 수양》은 잘못이 없잖은가》한것이 무시무시한 어른들의 귀에 들어가 10년형을 선고받고, 로약대의 죄수의사가 된 사람이다. 로약대란 로쇠자, 병약자, 불구자들을 따로 모은 중대이고, 죄수의사는 죄수중대에 배치된 복역중의 의사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현덕순은 자기가 맡은 로약대의 죄수중 조춘생때문에 고민을 한다. 자신이 보기엔 이 인물은 분명히 정신병자인데 당국은 이런 정신병자를 성한 사람과 같이 복역시키고있는것이다. 정신병자는 먼저 정신과 치료를 받는것이 순서이고, 원칙이다. 그렇다면 이런 처사는 마땅히 시정되여야 하지 않겠느냐는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임 의사를 찾아가 정신병자를 어떻게 감옥에 가두느냐고 비판조의 말을 한다. 그때 전임 의사는 《우리는 죄수요 죄수! 알았소?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대상이란 말이요. 괜히 말 한마디 뻥끗 잘못했다간 가형(加刑)이 가려(可慮)요. 가형이 가려야! 하물며 당신은 반혁명인데… 》라며 주의를 준다. 그러나 현덕순은 다시 위생소로 행정의사를 찾아가 조춘생을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하지만 국가간부인 행정의사는 《인민앞에 지은 죄를 철저히 한번 위우쳐보두룩》이란 엄한 훈계를 한후 그를 곧 일반죄수로 밀어내버린다. 현덕순이 조춘생이를 돌보는 일은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는 괴물 조춘생에게 먹을것을 사가지고 병원으로 면회를 다니기 시작한다. 항상 배가 고픈 조춘생은 전등불에 날아온 부나비가 땅바닥에 떨어져있는것도 《뽕나무밭에서 오디를 주워먹듯 허겁스레》주워먹는것을 알고있기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비인간적인 사회주의의 현실이 상당한 깊이로 다뤄진다. 이를테면 바로 이 10년 장기수로 복역중인 조춘생의 문제와 같은것, 두냥짜리 강낭떡 하나로 끼니를 떼워야하는 죄수들의 실상, 그리고 국가정책에 조금이라도 비판을 가하면 엄벌을 피할수 없다는 가혹성들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이런 점은 작품의 결말에서 리상적인 인물의 등장으로 모두 부정되고만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현덕순이 그런 역할을 한다. 현덕순은 자신의 개인문제로 갈등을 보인 일은 없다. 그는 오직 남의 문제, 괴물 조춘생의 문제로만 고민을 한다. 가족의 이야기도 비치지 않았고, 의당 있을법한 죄수생활의 고통, 같은 죄수사이의 갈등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취급된 일도 없다. 이런 점은 《문학도》의 등장인물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문학도》의 두 주인공 홍성걸과 윤창한은 문학을 함께 지망하는 친구사이이다. 그러나 윤찬한이는 친우 홍성걸과 함께 하던 청결차 뒤거두매질을 집어치우고 큰 개인상에게 고용되여 머나먼 광주로 돈을 벌러 떠나버린다. 홍성걸이 혼자 대가 백운산을 찾아다니며 문학수업을 하여 작가로 커갈 즈음 윤창한은 장가도 들어 홍성걸이 부러워하게 만든다. 뿐만아니라 그는 신사복도 쪽 뽑아입구, 《비행기를 잡숫구》 궐연갑까지 챙겨 홍성걸앞에 나타나 《앉았있는 영웅보다 떠다니는 거지가 낫다고》고 큰소리친다. 홍성걸의 마음이 상당히 움직인다. 자본주의화해가는 대륙의 일면을 깨닫게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것을 안 스승 백운산은 다음과 같은 말로 홍성걸을 개도시킨다.   우리 문학도들은 단순하게 경제적효률만을 추구할수는 없지요. 우리의 목적은 인민대중에게 정신적재부를 공급하는데 있으니까 배를 곯으면서두 창작에 몰두한 위대한 작가들의 선례를 우리는 허다하게 알구 있거든요. 이런 작가뿐만아니지요. 맑스의 례를 들어두 그렇게…  맑스는 원래 철학박사였으니까 당시 그 사회에서 상류계에 속했지요. 하지만 맑스는 그 부유한 생활을 버리고 전당포 단골손님노릇하는 빈궁한 생활을 택했단 말이요.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러게 우리 문학도들은 자기의 사업과 생활의 문제가 상충할 때는 서슴없이 전자를 택하고 후자를 버려야 한단 말이요, 요만한 각오두 없이 문학도의 대렬에 끼이겠다는건 앉은뱅이가 등산대에 참가하겠다는거나 마찬가지의 웃음거리지요.   이 소리를 듣고 홍성걸이는 열리지 않아 애를 먹이던 창문이 덜컥 열린것과 같은 령감으로 작품을 쓰는 일에 정진하겠다고 다짐한다. 다시 그가 속한 계급성, 시대성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윤창한에게서 기대되던 생동감있는 인간상은 더 발전하지 못하고 여기서 소리없이 사라진다. 《짓밟힌 정조》의 문대성의 경우는 리상적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있는 인물이다. 그는 과묵하고, 믿음직스러우며, 남을 용서할줄 아는 락관적남자이다. 이 남자는 같은 동료교사 조봉숙을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조봉숙이 륜간을 당한 일이 있다는것까지 알면서도 마침대 그녀에게 구혼을 한다. 문대성의 도량이 큰 남성상은 조봉숙의 약혼자였던 인식이의 리기적이며 의협심없는 행동과 대조되여있다. 그러니까 문대성은 인식이 내버린 녀자를 거둬가는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라, 그는 조봉숙이와의 인간적애정에 의해 모든것을 용서하고, 새출발할줄 아는 양생보식 인물, 인민을 교양하는 모범적지식인이라는 론리로 인간상이 마무리되있는것이다.   4 항일민족주의자들의 전형   《태항산록》, 《이런 녀자가 있었다》, 《전란속의 녀인들》, 《원수와 벗》 등의 단편은 모두 민족해방투쟁 때의 일화를 소재로 한 기록문학적성격을 띤 작품들이다. 《태항산록》의 윤지평, 마춘식, 양대봉은 석고산 일대에서 맹활약을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원들이다. 그들은 한단성안에서 조선청년 셋을 쟁취한데 기운을 얻어 이번에는 무안에 둥지를 틀고있는 일본 헌병분견소를 요절낼 계획을 세워 한놈을 사살하고 한놈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한단성안에 아지트를 건립해놓고 삐라공작을 하던 송은산은 일본헌병대에 발견되여 쫓기다 자살한다. 한편 형대성안에 아지트 - 아사히이발소를 차려두고 일본사람 형제로 가장했던 조선의용군 공작원 둘이 적들에게 생포된다. 윤지평 지대장은 이 두 사람이 석가장으로 이송되는 날 호송렬차를 세우고 귀신같이 구출해낸다. 여기 등장하는 윤지평, 마춘식, 양대봉, 송은산은 조국해방을 위해 전신을 민족의 제단에 바칠 각오가 된 열혈전사들이다. 송은산은 자신의 신분이 탄로되려는 순간 《번개같이 권총을 빼여 옷자락에 손을 대는 놈의 배때기를 한방 갈기고 삼간뛰기로》 도망을 친다. 그러나 진로가 막히자 지붕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다시 적들에게 포위되자 자기의 운이 다한것을 꺠닫고 《에라 이럴바엔 혁명전사다운 최후를 마치자》고 결심한후 삐라묶음을 풀어 자기를 쳐다보고있는 길바닥의 사람들에게 분분이 뿌리고 피줄이 펄덕펄덕 뛰는 그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갖다대고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강원도 메나리》를 잘부르던 이 혁명적랑만주의자는 어떤 처녀에 대한 미련을 안은 채 로총각으로 일생을 마친것이다. 양대봉은 10년만에 누나를 만나는 순간 일본헌병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박복한 사람이다. 윤지평, 이 의용군지대장은 유채기름과 돼지기름을 렬차선로에 칠해 달리는 기관차를 제자리걸음시키고 대원들을 끌고 호송차에 달려들어 호통을 치며 우군을 구출해내는 전설적인 독립군으로 전형화되여있다. 《이런 녀자가 있었다》의 아끼꼬(류명자)는 자기의 약혼자가 무슨 독서회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됐다가 모진 악형을 당하구 반주검이 돼서 나온후 곧 죽어버리자 조선의용군에 참가할것을 결심하고 사촌 오빠까지 대동하고 다시 나타난다. 이 소설의 결말은 류명자가 조선의용군의 한 별동대원인 리지강과 주운룡에게 하던 속이 뻔히 내다 보이는 거짓말로 끝나고있다. 그러나 류명자의 종남매와 다른 세명의 열혈청년은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항일의 본산 태항산으로 엄연히 돌아온다. 이것은 《전란속의 녀인들》처럼 정신대로 끌려감으로써 본의 아니게 조국을 배반해야 했던 녀인들과는 다른 차원에 선 녀성들의 모습이다. 물론 류명자의 힘겨운 이국에서의 삶과 리지강, 주운룡의 파란만장한 독립군의 생리를 이 소설이 담아내기에는 단편소설로서의 형식이 맞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젊은 나이로 죽어야 했던 등장인물들의 일생에 실리는 좌절과 그를 지켜보는 다른 인물들의 분노로 하여 우리에게 있어서의 광복이 기실 얼마나 큰 무게로 일상사를 지배해왔는가를 이 소설은 보편적원리로 기술해내고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류명자의 선명한 성격에서 보편적 사회적 의의를 가진 일반성 즉, 그녀의 정신승리법이 집중화된 개성을 볼수있는것이다.   5 열리는 대륙과 장사군의 륜리   단편 《열병》은 드디여 중국에까지 밀어닥친 자본주의바람을 문제삼고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황준복이는 가짜 두강주를 한달도 채 안걸리는 기간에 팔아 2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번다. 이에 재미를 붙인 그가 또 불합격품을 주어모아 조립한 가짜 시계인 상해시계 100개를 반값에 넘겨받아 지방으로 팔러 나간다. 그러나 시계를 팔아 돈을 벌어 집에 돌아왔을 떈 그의 외동아들이 가짜약을 진짜약으로 알고 사먹고 죽은후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황준복에 대립되는 인물은 사촌형 황준덕이다. 황준덕은 세무국 부국장으로 사총동생 준복이의 술장사를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라고 못하게 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돈을 빌러 왔을 때 거절했던것이다. 그러나 준복은 그런 형을 두고 《같잖게 훈계나 하구! 돈을 내놓기 아까우니까……. 체, 누가 그 속을 모를줄 알구! 그깟년의 세무국 부국장쯤…… 하나두 부럽잖다야!》라며 오금에서 비파소리가 나게 나가 근방 사오십리 안팎을 쏘다닌다. 그는 형이 자네가 판 술이 가짜니까 도로 걷어들이라고 하자 《지금 그런 일쯤은 례상사예요》라며 《내가 도맡아 판것도 아닌데… 다른 놈이 한것까지 암담할건 무어 있어. 체!》라며 변화되여가는 세상형편을 모르는 형을 비꼰다. 결말이 비극적반전으로 되여서 이 인물의 이런 실용주의가 기댈 론리가 약해 보인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황준복은 김학철작품집에 수록된 어떤 작품에서도 발견할수 없는 개혁의 바람이 이는 중국내부의 엄연한 변화를 전형화한 인물이란 점에서, 또 보다 더 본질적인 인간의 생리에 주제가 가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가는 작품이다. 그리고 황준복이 그를 둘러싼 환경에서 벗겨져 나온 인민성이 상실된 인간이라면 형 황준덕은 인민을 단합하고 인민을 교양하며 인민을 자각케하는 거룩한 인간상이란 면에서 그 특성이 감지된다. 《우정》의 황길성이란 인물은 이 작품집에서 류사한 례를 거의 찾아볼수 없는 리얼리티를 지닌 인간상이다. 맑스주의문학리론에서 말하는 소위 전형화가 지나쳐 개성이 죽지도 않았고 개성이 지나쳐 별종이 되지도 않았다.   다른 9편 이외의 수필 및 잡문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가 있으면 론의키로 하고 이글에서는 생략한다.   오양호 한국 문학평론가. 인천대 교수
140    [장편] 격정시대 31 댓글:  조회:1187  추천:0  2016-04-21
장편소설   격정시대   김학철   31   밤새도록 달린 렬차가 평양을 지나고 또 안주를 지나서 청천강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날이 활짝 밝았었다. 정주역에서 승객들이 분주히 오르고 내리고 하는데 그 불량스러운 눈만 보아도 어떤 족속들인지 대번에 짐작이 가는 사복형사 서넛이 차에 올랐다. 선장이는 몰랐지만 국경을 넘을 렬차는 정해놓고 정주―선천 사이에서 사복형사들의 기찰을 받게 되여있었다. 정주―선천 사이에서 끝이 나지 않으면 신의주까지도 따라갔었다. 일성기적과 동시에 렬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형사들도 곧 차칸차칸을 살모사 같은 노랗게 기름진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그 살모사의 눈초리가 몸을 스칠 때는 마치 무슨 벌레라도 기여다니는것처럼 사람들은 공연히 등줄기가 스멀스멀해나는것이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선장이가 걸릴가! 교복과 교모―옷차림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워서였을것이다. “어딜 가지?” 선장이의 앉았는 좌석옆에까지 오자 발을 멈추며 곧 형사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봉천 갑니다.” “어디 차표 좀 볼가.” 선장이가 차표를 꺼내주니 형사는 한번 보고 곧 돌려준 뒤 “소지품은?” 하고 물었다. 선장이가 머리우의 선반을 가리키며 “저 트렁크 하나뿐입니다.” 하고 공손히 대답하니 형사는 건방지게 “내려서 들구… 나를 따라와.” 하고 명령조로 말하여 선장이는 지은 죄도 없이 공연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때 다른 형사 하나가 가까이 오면서 그자를 보고 “무언가?” 하고 물으니 그자는 저희들의 곁말로 무어라고 두어마디 웅얼거린 뒤 곧 다시 “빨리 해.” 하고 선장이를 재촉하였다. 그동안에 선장이는 트렁크를 내려 들고 맞은편 좌석에 앉았는 상인풍의 세비로 입은 중년남자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외딴 칸으로 데리고 가더니 선장이 하나를 일본형사 둘이서 검문을 하는데 꼴이 무슨 먹을알이 있을줄로 아는 모양이였다. “집이 어디야?” “서울입니다.” “서울 어디?” “견지동.” “집에선 무얼 하지?” “아버지가… 변호삽니다.” “변호사?” 하고 뇌며 두놈이 서로 얼굴을 한번 마주보고나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재학생이 공부는 안하구 갑자기 외국려행은 무어야?” 선장이 입에서 언젠가 얻어들어두었던 말이 제물로 튀여나왔다. “상해 동아동문서원으루 보결시험을 치러 가는 길입니다.” 상해 동아동문서원은 일본제국주의가 중국대륙을 침략하는데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 학교였다. “상해를 간다면서 차표는 왜 봉천까지만 끊었지?” “가는 길에 봉천 외삼촌한테 좀 들렸다 가려구 그럽니다.” “외삼촌이 봉천 어디 살기에.” “서탑입니다.” 이것도 무심히 얻어들어두었던 말이다. 봉천의 서탑은 조선거류민들이 모여사는 구역이란 말을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들은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머리속에서 잠을 자다가 긴장한통에 제물로 튀여나온것이다. “서탑에서 무얼 하지?” “무역상입니다.” 변호사의 아들이요, 무역상의 생질이요, 동아동문서원의 지망자요… 형사들의 의심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풀렸지 더하지는 않게 되였다. “트렁크를 열어봐.” 시키는대로 선장이가 쇠를 벗기고 뚜껑을 열어잦히니 그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유도복―허연 누비옷―이 불쑥 드러났다. 그 바람에 형사들은 부지중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외국려행을 가는데 가방속에다 유도복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놈은 처음 보았던것이다. “유도부원이야?” 형사 한 녀석이 웃음기 띤 얼굴로 물어서 선장이가 “녜 그렇습니다.” 대답하니 그자가 다시 “검도두 하나?” 하고 물어서 선장이는 “검도는 안합니다. 학교에 검도부가 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형사가 트렁크속을 뒤적뒤적해보았으나 색다른것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까 “몸에 지닌건?” 하고 바로 몸뒤짐을 시작하였다. 200원에서 부리가 헐린 현금과 손목시계와 만년필… 그리고 손수건과 손톱깎개와 영어단어장… 책을 잡힐 소지품은 하나도 없었다. 권총, 폭탄, 비밀문서, 암호장 따위는 그림자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기대가 어그러져 맥살이 난 두 녀석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그중의 한 녀석이 선장이를 보고 가장 선심이라도 쓰듯이 “됐어, 이젠 고만 돌아가.” 말한 뒤 권연 한가치를 꺼내 물고 호주머니속의 성냥을 더듬었다. 선장이가 트렁크를 챙겨들고 제자리로 돌아오니 맞은편 좌석에 앉았는 세비로 입은 남자가 반색을 하였다. “무사해서 다행이요. 난 조만히 근심했소.” “고맙습니다.” “만주는 초행이요?” “녜.” “국경지대라서 이 근방은 언제나 이렇게 까다롭지요.” 정주역에서 올랐던 형사들이 선천역에서 모두 하차하는데 큼직한 려행가방을 든 30세 안짝의 얼굴이 창백한 청년 하나를 련행하여서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의아스런 눈으로 내다보았다. 세비로 입은 사람이 부지런히 차창을 들어열고 역매도시락 둘을 사더니 하나를 선장이에게 건네며 “자 우리 아침이나 먹읍시다.” 하고 말하여 선장이는 할수없이 한번 사양하고 그대로 받았다. 갈창지같이 얇은 박판으로 짠 도시락 둘을 포개서 한벌인데 그 하나에는 깨를 뿌린 백반이 그리고 또 하나에는 일본식반찬이 들었었다. 차물은 철도마크를 돋을새김한 토기주전자에 담아 주전자채로 파는데 값은 7전이였다. 렬차가 압록강철교를 건늘 때   남아립지출향관(男儿立志出乡关)… 인간도처유청산(人间到处有青山)…   이런 글귀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라 선장이의 마음은 갑자기 무거워지고 또 긴장해졌다. 안동역에 렬차가 미끄러져들어가는데 보니 홈에 걸린 전기시계의 바늘들이 모두 뒤로 한시간씩 뒤걸음질을 쳤었다. 세비로 입은 사람이 선장이를 보고 “자 인제 국경을 넘었으니 우리두 이 나라 시간에다 시계를 맞춰야지.” 하고 웃어서 선장이도 손목시계의 수자들이 조선서처럼 1에서 12까지만이 아니고 가외로 13에서 24까지가 더 있어서 수자가 갑절이나 되는것이였다. 선장이는 속으로 (세상은 넓구나… 내가 이거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하고 탄식을 하였다. 그러자 지나간 일 한가지가 피뜩 머리속에 떠올라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전에 원산 선장이네 동네에 술을 몹시 좋아하는 늙은이 하나가 있어서 늘 동네의 웃음거리로 되였었다. 한번은 이 늙은이가 이웃 잔치집에 가 술을 억병을 마시고나서 가장 점잖게 주인을 보고 묻기를 “이젠 열세시쯤 됐겠지?” 하고 물어서 또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었다. 그 늙은이는 원래 시계를 볼줄 모르는 늙은이였다. 그때 선장이가 그 늙은이의 별명을 “열세시”라고 지어놓아서 “열세시”는 마침내 그 늙은이의 대명사로 되여버렸다. 그래서 후에 그가 졸사하였을 때도 동네사람들은 “아니 열세시가 간밤에 풍으루 죽었다며?” 이렇게 말들 하였었다. 이 세상에 열세시―스물네시라는게 있다는것을 알게 된 이 마당에 선장이는 모르는 주제에 아는 사람의 흉을 본것 같아 이미 세상뜬 “열세시”에 대하여 미안한 생각도 들고 또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세관의 검사가 시작되였다. 중국인관리라는것을 선장이는 이날 생후 처음 보았다. 까다롭게 굴지 않고 트렁크뚜껑에다 분필로 체크를 해주고 바쁜 걸음으로 다음 좌석으로 가는 그 동작이 민첩한 세관 관리에게 선장이는 호감을 가졌다. 세비로 입은 사람이 선장이―학생복차림의 혈혈한 려행자―에게 흥미를 가지고 또 호감을 느끼는듯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내처 이모저모로 살펴보더니 한낮이 기운 뒤에 식당차로 안 가겠느냐고 선장이의 팔죽지를 잡아끌었다. 선장이가 따라일어나니 그 사람은 옆좌석에 앉은 중년남자에게 선반우의 행구들을 좀 보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한낮이 기운 뒤라 식당차칸은 파장머리처럼 한산하여 공석이 대부분이였다. 앞을 서서 들어가던 세비로 입은 사람이 하얀 세탁보를 편 식탁들이 두줄로 늘어선 차칸을 한번 바라보고 “가물에 콩나듯했구먼, 손님들이.” 우스개말 한마디를 하고 곧 구석진 자리 하나를 골라 앉으며 선장이더러도 어서 앞에 와 앉으라고 손짓하였다. “우리 무얼 할가?” “글쎄요, 아무거나 하시지요.” “양식… 정식이 어떨가?” “좋겠습지요.” 10여개가 한벌로 된 크고작은 포크와 나이프와 스푼들이 아래가 트인 입 구자형으로 앞에 늘어놓일 때 선장이는 불현듯 숙자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언젠가 진고개 양식점에 가 이렇게 단둘이 마주앉아 양식을 먹은 일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때 선장이가 숱한 포크와 나이프와 스푼이 제앞에 가로세로 늘어놓이는것을 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래지며 “아이 이 숱한걸 다 무엇에 쓰나요?” 하고 숙자아주머니를 쳐다보니 숙자아주머니는 “그저 나 하는대루만 해.” 하고 웃었었다. 까다로운 양식 먹는 법을 그때 그렇게 배워두었던 까닭에 이날 선장이는 촌스럽게 당황하지 않아도 되였다. 식사를 하면서 세비로 입은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봉천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소?” “없습니다.” “그럼?…” “상해로 가는 길입니다.” “오 상해… 먼데루 가는구먼… 그래 상해엔… 누가 있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두 없어? 그럼?…” 선장이는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정직하고 선량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는것을 직감하였다. 티없이 맑은 넋은 왕왕 다이얄이 맞는 사람의 넋을 엑스광선처럼 꿰뚫어보는 법이였다. 그래서 바른대로 말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거짓말을 하기가 죄스러워서였다. 사위를 본능적으로 한번 둘러본 뒤 나직한 목소리로 “실은 림시정부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하고 속삭이듯 말하니 그 사람은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혹은 제 귀를 의심하는지 덩달아 음성을 낮추면서 “어디를 찾아가?” 하고 재쳐 물었다. 선장이의 “상해… 림시정부.” 하는 분명한 대답이 그 귀에는 우뢰같이 울리는지 그 사람은 새삼스레 전후좌우를 한번 둘러보고나서 선장이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살펴보는것이였다. 한참만에 겨우 붙었던 입이 떨어져가지고 “거기… 누가 있소?” 하고 무서운 일 물어보듯하는데 선장이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까 아침에… 형사들에겐 무어라구 말했소?” “형사들한테는 동아동문서원으루 보결시험을 치러 간다구 했습니다.” 보이가 비프스테이크를 들고 와서 다 먹은 수프그릇을 바꿔가는통에 이야기는 잠시 동이 끊겼다. “고향이 어디요?” “원산입니다.” “량친이 다 기시우?” “녜.” “아들을 서울까지 올려보내 공부를 시킬제는… 살림이 포실한가보구먼.” 선장이의 교복과 교모를 알아본것이다. “웬걸요. 아버지가 배를 타시는걸요.” “배를 타다니?” “배군이란 말이예요, 고기잡이 하는. 살림이 통 마련이 없는걸요.” “그렇다면 학비를 어떻게 대실가?” “서울 아저씨댁에서 뒤를 대주신답니다.” “음 그래… 외삼촌인가?” “외삼촌은!” 하고 선장이는 고개를 외치고 “외칠촌아주머니의 남편… 자식이 없에요.” 하고 말하였다. “그 아저씨는 무얼 하시는데?” “변호사예요. 서울서는 뜨르르하답니다.” 세비로 입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튼 오늘밤은 봉천서 묵을테지?” 하고 물어서 선장이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럼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묵도록 하오.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나중에 들읍시다.” 식사가 끝났을 때 선장이는 그 친절한 사람의 성명이 안몽룡이라는것과 개업의라는것과 그리고 처자가 있다는것까지 다 알았다. 선장이는 생소한 이역에서 이런 귀인을 만나게 된것을 못내 다행히 여겼다. 규모가 서울역보다 더 굉장하고 사람들이 더 벅적벅적하는 봉천역에서 차를 내려 밖으로 나오자 안의사는 곧 인력거 두채를 불렀다. 인력거군에게 “시타.” 하고 중국말로 행선지를 고하는것을 듣고 선장이는 중국말은 모르지만 가는 곳이 서탑임을 대강 짐작했다. 그리고 (형사놈들에게 외삼촌이 서탑에서 무역상을 한다고 거짓말한것이 비슷이 들어맞잖나.) 생각하고 속으로 웃었다. 선장이가 사람이 끄는 수레―인력거를 생후 처음 타보는지라 마음이 대단히 송구하였다. 등받이에 번듯이 나가누워 가는것은 끄는 사람을 더욱 모멸하는것 같아 웃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가는중에 인력거군이 홀지에 발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질렀다. 선장이가 말은 못 알아들어도 눈치로 그 뜻을 짐작하고 얼른 등받이에 등을 기대니 인력거군은 만족하여 앞선 인력거를 따라잡으려고 다시 부지런히 닫기 시작하였다. 안의사가 돌아다보고 웃고 또 길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고 웃는통에 선장이는 열적어 얼굴을 붉혔다. 탄 사람이 등받이에 기대야 채가 거뜬히 들려 끌기가 헐하고 그렇지 않으면 채가 지지눌리워 도리여 끌기가 힘든것이 인력거의 원리인것을 햇내기 선장이가 몰랐던것이다. 이윽고 두채의 인력거가 “인천의원”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자그마한 병원앞에 멎어섰다. 안의사는 인천사람이였다. 안의사의 젊은 안해가 돌쟁이아들을 안고 나와 맞고 또 근시안경을 쓴 약제사―안의사의 처남이 나와 친절하게 선장이의 트렁크까지 달래서 들고 들어갔다. 선장이는 따뜻한 가족적인 대접을 받으며 안의사내외와 안의사 처남 남매가 다 교양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밤에 환자 없는 진찰실에서 안의사와 선장이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그래 림시정부를 찾아가선 어떻걸 작정이요?” “나두 윤봉길이 걸은 길을 걸을랍니다.” 안의사가 아름이 차서 한참 입을 다물고있다가 “뜻은 장하지만…” 하고 말하는 중간에 선장이가 “남아이십미평국(男儿二十未平国), 후세수칭대장부(后世谁称大丈夫)가 아닙니까. 온몸에 피가 끓어 도저히… 안일하게 공부를 하구있을수가 없단 말입니다.” 하고 결심의 빛을 얼굴에 나타내니 안의사는 나이 자기보다 여라문살이나 아래인 선장이를 공경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우리 같은 사람은 이렇게 처자에게 얽매여 그날그날을 보내는데…” 하고 길이 탄식을 하는것이였다. 뻐꾸기시계가 아홉번을 운 뒤에 안의사의 처남이 들어와 진찰용침대에다 선장이의 자리를 펴주어서 선장이는 외국에서의 첫날밤을 진찰실에서 지내게 되였다. 자기전에 카르테선반이 놓인 책상에서 편지 세통을 썼다. 정실이에게 쓰는 편지에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문안을 한외에 쌍년이와 매부 한정희에게 자기의 행위를 배은망덕으로 생각지 말아달라고 량해를 빌고 또 아저씨와 어멈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썼다. 그리고 한선희에게는 김영하선생이 하루속히 출옥하기를 기원한다고 썼다. 이튿날 선장이가 관내로 떠나는데 안의사 처남 남매는 정거장까지 배웅을 나와 선장이가 로자가 넉넉하다고 밀막는데도 억지로 천진까지 가는 차료를 사주었다. 이때는 이미 만주국이라는게 생겨난 까닭에 철도도 관할이 달라져서 렬차는 봉천―북평 사이만을 운행하였다. 그러므로 상해를 가자면 천진에서 일단 하차하여 다시 차표를 사가지고 중국기차 즉 중화민국에서 관할하는 기차를 타야 하였다. 역구내에 들어오는 기관차들이 례배당에서처럼 뎅그렁뎅그렁 종을 울리는것이 선장이 눈에는 매우 신기해보였다. 안의사가 눈치를 알고 웃으며 “저건 양떼들이 철길에 들어서는걸 몰아내기 위한거요, 중국은 맨 평원지대니까.” 하고 설명을 해주어서 딴은 그렇겠다고 선장이는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엄청난 중국대륙이라는 생소한 개념이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반도에서 자라난 선장이의 머리속에 차차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하루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고 선장이는 안의사 처남 남매에게 애틋한 석별의 정을 느끼며 남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아보니 전후좌우가 다 복색이 다르고 또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들이였다. 선장이는 고독감에 싸여서 차창밖을 회전하는 낯선 전야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황막에서 소생을 한듯한 초여름의 풍경이였다. 몇시간후에 저녁때 산해관에서 운수불길하게 선장이는 또 걸렸다. 편복을 한 얼굴이 좁다랗고 몸이 호리호리한 서른나문살 가량의 남자가 선장이를 숱한 려객들틈에서 돌피뽑듯 쪽 뽑아내여 역에 주재하는 일본헌병에게 넘긴것이다. 색다른 학생복차림이 쉽게 눈에 뜨이는 모양이였다. 정주에서는 검문을 받아도 차칸에서 받은 까닭에 려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끌려내려갔다. 저 하나만 떨궈놓고 아무 일도 없은듯이 기적을 울리며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는 선장이의 마음은 허전하고 또 복잡하였다. 역구내에 있는 일본헌병분견소의 썰렁한 걸상에 혼자 앉아 한 반시간 좋이 기다려서야 헌병 하나가 들어오는데 나이는 젊고 얼굴은 곱살하였다. 이미 땅거미가 기여드는 때라 들어오는 길로 전등부터 켜놓고 선장이를 한번 보더니 “너야?” 묻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 “이리 와 앉아.” 하고 자신이 앉은 책상앞에 놓인 걸상을 가리켰다. 정주에서 형사들이 하던것과 대동소이한 신문이 되풀이되고 또 몸수색, 짐수색이 되풀이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캐냄직한 꼬투리는 쥐뿔도 없었다. 우연히 트렁크속에 넣어가지고 온 유도복이 생각지 않은 보람을 나타내였다. 일본인들은 유도복에 대하여―저의 나라 고유의것이라고 해서 그런지―일종의 친근감을 느끼는 모양이였다. 그것은 현저히 완충작용을 하였다. 헌병이 유도복을 보자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수색을 건성으로 하는것이 환히 알렸다. 젊은 헌병은 헛물을 켠것이 싱겁던지 권연갑을 꺼내여 “너 담배 피우니?” 묻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선장이에게 권연 한가치를 뽑아주었다. 선장이가 받지 않고 고개를 외치니 “얌전하구나.” 비웃듯이 말하고 그 권연을 도로 갖다가 제 입에 물고는 성냥을 찾는것이였다. 그리고 담배연기를 내뿜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루쯤 늦어두 뭐 랑패될건 없을테니 래일 낮차루 떠나지… 이왕 내린김에 산해관구경을 한번 하는것두 해롭진 않을걸.” 위로조로 말하고 다시 “내 너 잘데를 지시해주라구 하마.” 말하고 곧 사람을 불렀다. 아까 그 얼굴이 좁고 몸이 호리호리한 헌병보조원이 들어와 허리를 굽실하니 헌병은 손을 한번 내젓고 “려관에 데려다주도록.” 간단히 한마디 분부를 하였다. 그리고 저도 인젠 일이 다 끝났다는듯이 곧 걸상에서 일어났다. 인력거 두채를 불러다 갈라타고 어두운 밤거리를 려관으로 향하는데 헌병보조원이 그제야 비로소 모국어―조선말로 선장에게 사과체것을 하였다. “이보 학생, 어찌 알지 마오. 낸들 이런짓을 하구싶어 하오? 직업이 그러니 할수없이 하는거지. 나두 집에 학생또래의 동생이 있소.” 특무놈의 입에서 이런 회심의 목소리가 흘러나올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던터라 정직하고 순진한 선장이는 크게 감동이 되여 마음속으로 그자의 지은 죄를 선선히 다 용서를 해주었다. 헌병보조원이 소개를 한것은 한 조선거류민이 경영하는 려관명색으로서 중국식구들―“캉”을 놓고 한방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자고 머물게 되여있는 봉노방이였다. 밤중부터 복통이 나기 시작하여 선장이는 배를 그러안고 쩔쩔매는데 배창자가 뒤틀려서 금세 끊어질것처럼 아팠다. 아침도 먹는 시늉만 하고 물러앉아 식혜 먹는 고양이상을 하고있으려니까 나이 30 안팎의 얼굴이 두리넙적한 손님 하나가 앞에 와 물었다. “학생 왜 그러우?” “배가 자꾸 아파서요.” “몹시 아프우?” “녜.” “언제부터 그렇소?” “지난 밤중부터요.” “물을 갈아먹어 그런가.” 선장이가 잠자코 있으니까 그 사람은 “그럼 이걸 좀 해보시지.” 하고 주먹쥔 손의 엄지가락과 새끼가락을 뿔처럼 뻗쳐들고 엄지가락을 제 입에 갖다대보였다. 선장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배를 부둥킨채 어리둥절해 쳐다보니까 그 사람은 “아주 햇내기로구먼… 약담배두 몰라? 만병통치약.” 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선장이가 큰일나는줄 알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니 방안에서 보고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다. 복통이 좀 너누룩해지기를 기다려서 선장이가 정거장으로 나오는데 그 약담배를 피워보라고 권하던 사람도 들가방 하나를 들고 따라나섰다. 볼일이 있어 진황도란데를 간다는것이였다. 홈에서 엊저녁의 그 헌병이 선장이를 보더니 제법 상냥하게 알은체를 하였다. “이제 가나?” 국경을 넘어선 까닭인지 렬차가 산해관역을 떠나자 곧 검표가 시작되였다. 선장이는 태평으로 차표를 내보이는데 한손에 펀치를 든 일본인차장이 차표를 받아서 한번 번드쳐보고는 곧 “차를 잘못 탔습니다. 당신의 승차권은 중국철도의 승차권입니다. 이 렬차는 남만철도소속입니다. 그러니 다음역에서 일단 하차했다가 저녁차를 타도록 하십시오.” 하고 차표를 그냥 돌려주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았던 동생―약담배를 권하던 얼굴이 두리넙적한 사람―이 들었다보았다하고 “잘됐소, 나하구 같이 내립시다. 다음 정거장이 바루 진황도요. 처음 와보지?” 하고 싱글벙글하였다. 역에서 내리는 길로 곧 인력거를 불러타고 한 10분 달리니 벌써 그 사람이 단골로 다닌다는 려관에 와닿았다. 규모가 상당히 큰 려관인데 방들은 모두 비둘기장같이 간살이 작았다. 역시 조선거류민이 경영을 한다는것이였다. 같이 온 사람은 볼일 보러 나가고 선장이는 밤에 못 잔 벌충을 하려고 혼자 드러누워 잠을 자는데 문이 바스스 열리더니 무색옷을 매무시 곱게 입은 젊은 녀자 하나가 소리없이 들어와 선장이의 자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선장이가 눈을 한번 떠보고 속으로 적잖이 놀라며 곧 벽쪽으로 돌아누우니 그 녀자는 한동안 서있다가 킥 웃고 살그머니 도로 나가버렸다. 선장이는 (이거 내가 여우한테 홀린거나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어서 슬그머니 무섬증이 났다. 보리저녁때 동행이 돌아와서 이른 저녁상이 겸상으로 나오는데 전이 없는 큰상을 맞들고 들어오는 두 젊은 녀자가운데의 하나를 선장이가 대번에 알아보았다. 낮에 누워잘 때 들어왔던 녀자였다. 두 녀자가 나가지 않고 그대로 상머리에 붙어앉아 시중을 드는데 선장이의 동행과 무랍없이 갖은 잡소리를 다하며 시시덕거렸다. 남자측의 만수받이하는품도 더할나위없이 능란하여 마치 물을 만난 고기와도 같이 자유롭고 또 자재로왔다. 선장이는 웃을수도 없고 안 웃을수도 없고… 열적고 쑥스럽고 어색하고 게면쩍어 몸가짐이 몹시 어줍었다. 상을 물릴 때 낮에 들어왔던 쌍년이또래의 얼굴이 동글납작한 녀자가 선장이를 보고 “왜 저 학생은 새색시처럼 말 한마디가 없으셔?… 오늘밤 묵어서 래일 떠나셔두 되지요?” 하고 상글상글 웃었다. 선장이가 대번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이니까 옆에 앉은 동행이 얼른 가로채여가지고 “옳지, 네가 맘이 있어서 그러나보다만 썩 틀렸다. 이 총각은 소문난 도덕군자야, 네따위는 백이 와두 소용이 없어… 일찌감치 맘놓구 쳐다보지두 말아라.” 하고 익살을 부렸다. 나중에 선장이가 조용히 이제 그 녀자들은 다 무엇하는 녀자들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무언 무어야, 다 갈보들이지. 이 집이 려관 겸 갈보집이야. 이제 그런것들이 우글우글해. 이 방이 다 그런데 쓰는 방이야.” 하고 례사롭게 대답해주어서 선장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선장이가 진황도에 모두 10시간을 머물렀다. 그러나 인생의 학문을 배우기는 10년어치를 배웠다.  
139    [장편] 격정시대 30 댓글:  조회:513  추천:1  2016-04-21
장편소설   격정시대   김학철   30   정실이가 첫아들의 첫돌이 지난 뒤에 친정나들이를 왔다. 친정이라야 한동네 엎어지면 코닿을데지만 일단 대가집에 맏며느리로 들어가고보니 그렇게 쉽사리 달아오고 달아가고 하기는 어려웠었다. 그래서 이번 나들이도 차일피일하면서 두어달 좋이 별러가지고 온것이였다. 친정어머니가 외손자를 업고 동네집에 자랑 겸 구경을 시키러 나가는 길에 쌍년이에게 딸이 왔다고 기별해주었다. 쌍년이는 들었다보았다하고 행주치마를 벗어 빨래줄에 훌뿌려 걸고 하던 빨래는 팽개쳐두고 부리나케 쫓아왔다. 방안에 들어서는 첫밗에 “이 애, 한진사댁 작은아씨 한번 뵙기가 헐하잖구나.” 하고 놀림조로 인사를 하니 정실이도 “누가 아니라니. 조롱에 갇힌 새지 뭐냐. 깃두 맘대루 칠수가 없다니까.” 하고 실없는 말로 맞인사를 하였다. “네 아들 이제 내 막 안아보구 오는 길이다. 에미는 저렇게 대살진데 아이는 그렇게 토실토실하니 웬 일이야, 부자집 장손이라구 인삼록용을 장복시키잖니?” “미친 소리 작작 하구 어서 앉기나 해라.” 쌍년이가 자리에 앉으며 비로소 “너의 아버진 어디 가셨니?” 하고 물어서 정실이는 “날을 어찌나 잘 받았던지… 아버진 벌써 첫새벽에 바다에 나가셨단다.” 하고 웃었다. “상관있니, 며칠 묵다 가려무나.” “안되여, 저녁전엔 돌아가야 해.” “또 당일치기야? 시에미가 그렇게 까다롭냐?” “아니, 시어머닌 하나두 안 까다롭다. 내가 가봐야 할 일이 있어 그러는게지.” 쌍년이가 갑자기 누가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음성을 낮추어서 “그 댁 살림이 기울어진다는 소문이 떠도는데… 그게 진적한 소문이냐?” 하고 물으니 정실이는 미간을 약간 찌프리고 한참만에 “그런 소문이 날만한 일이 있어.” 하고 고개를 까댁였다. 그 걱정어린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쌍년이가 다시 “애기아버지가 큰살림을 잘 거느리지 못해 그런게 아니냐?” 하고 물으니 정실이는 “그래여, 다루는 솜씨가 서툴러… 어디 해봤어야지… 죽어나는건 최서사야.” 하고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저걸 어쩌니.” “당자가 도시 그런 일에다는 맘을 쓰구싶어하지 않는게 더 큰일이야. 자세한건 나 잘 모르지만 아무튼 살림이 줄어두 가량없이 준것만은 사실이야.” 쌍년이가 언짢은 이야기를 더하지 않으려고 말머리를 돌렸다. “선희는 어떻게 됐니?” “아가씬 지난달에 졸업하구…” “벌써 졸업이야?” “그럼 3년인데.” “세월이 류수 같다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구나. 더 말할것 있니… 네 아들이 벌써 돌이 지났는데.” “아가씬 졸업하자 이내 리화녀학교 음악선생으루 남아있게 됐대여. 리화전문하구 리화녀교는 한통속이라나.” “그럼 이젠 시집을 가야잖겠니 로처년데… 스물몇이야?” “나하구 자치동갑이지 뭐. 그러잖아두 김영하선생이 래년에 출옥하면… 례식을 올리게 될게야.” “얼마라구? 2년?” “2년. 아직두 1년 반이 더 남았어.” “왜들 모두 이런다니?” “모르니? 다 왜놈들때문이지!” “한진사댁 아가씨두 팔자는 누구만큼이나 험하구나.” “누가 아니래여.” “그래 너의 시어머니랑 너의 남편이랑은 그렇게 하라구 내버려두니?” “내버려두잖으면 어떻거니? 당자가 죽어두 다른데는 시집을 안 간다는데야. 그러구 주요하게는 오빠가 량해를 하니까. 김영하선생을 아주 좋게 여기거던… 참다운 애국자라구.” 이때 선장이 어머니가 외손자를 업고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방에 앉았는 딸을 보고 웃으면서 “이 애 에미야, 어서 나와 이 녀석 좀 받아라. 외할미 잔등에다 오줌 쌌다, 고현놈, 아이 차거워!” 하고 소리쳐서 정실이는 “저런 녀석 좀 보아.” 하고 아들을 받으러 달려나왔다. 쌍년이가 방안에 앉은채 밖을 내다보며 “아주머닌 그래두 복이 있으시우, 등에다 오줌받을 손자가 다 있으니.” 하고 웃어서 두 모녀도 다같이 웃었다. “그 오줌싸개 이리 다우, 한번 좀 더 안아보자.” 쌍년이가 웃으며 두팔을 벌려 앞으로 내밀었다. 이날 4월 29일 천장절은 일본천황 히로히또의 탄신이므로 공휴일이였다. 선장이가 소풍을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숙자아주머니가 뒤따라들어와서 “너 이따 저녁때 나하구 선희한테 한번 좀 가보자, 효자동에다 하숙을 정했단다. 년전에 우리 한번 들려보잖았니… 그 전도부인네 집.” 하고 의논조로 말하여 선장이는 선뜻 “아무려나 좋도록 하시지요.” 하고 같이 갈 의향을 말하였다. “느 누이의 시누이 아니냐, 남이 아니거든.” “그러게 가겠다잖습니까.” 숙자아주머니가 또 무슨 말을 하려다말고 새삼스레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얘 좀 보아, 너 어느새 키가 그렇게 컸니?” 하고 곧 선장이를 그러당겨 가슴에 붙이면서 “어디 키 좀 대보자.” 하고 꼿꼿이 서서 이마를 선장이턱에 갖다대였다. 마침 어멈이 빨아 손질한 유도복을 안고 들어오다가 이것을 보고 웃으며 “아유, 아씨 키가 도련님 턱에두 겨우 마치시네요!” 하고 호들갑스레 말하였다. 숙자아주머니는 이마를 선장이 턱에 댄채 오른손의 손바닥을 엎어가지고 제 정수리에 얹으면서 “정말이야?” 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정말 아니구요. 아씨가 지셨에요, 비교두 안되는걸요.” 어멈의 말을 듣고 숙자아주머니는 비로소 뒤로 물러서서 선장이의 얼굴을 가늠해보며 “너 신속에다 거름을 담아가지구 다니잖냐?” 하고 새삼스레 웃었다. 웃다가 선장이 교복깃에 달린 “4”자금장이 단지가 이제 한달밖에 안되였는데 벌써 광택이 가시고 재빛으로 변한것을 보고 괴이히 여기며 “아니 네 금장이 왜 벌써 그 모양이냐?” 하고 물었다. 선장이가 “갓 들어온 1학년생이나 반짝반짝한걸 달구 다니지… 상급생이 유치하게 누가 그런걸 달구 다녀요.” 하고 웃으니 숙자아주머니는 “주제넘은 녀석들.” 하고 거짓으로 눈을 흘겼다. “아씨 모르세요? 벌써 2학년 때부터 새 금장을 달 때는… 꼭 초불에다 그을려가지구 다신걸요.” 하는 어멈의 말을 듣고 숙자아주머니는 “그러냐?” 하고 선장이와 어멈을 번갈아보다가 선장이의 뺨을 찰싹 때리며 “낡은게 그렇게 좋거든… 광화문통 고물상에나 가 살아라.” 하고 웃었다. 이때 광화문통에는 고물상이 즐비하였었다. 썩후에 선장이가 숙자아주머니와 함께 효자동으로 한선희를 보러 왔다. 이때는 이미 안국동종점에서 총독부앞까지 전차선로 동종점까지 갈수가 있었다. 훈훈한 봄바람이 귀밑을 가볍게 간질러서 공연히 가슴이 부풀고 마음이 들뜨는 밤이였다. 선희는 두 사람의 래방을 못내 반기였다. “이거 내가 사돈님을 먼저 가뵈야 하는건데.” “별소릴 다하네.” 정실이가 한진사 식구가 되는 바람에 이들도 따라서 먼발치사돈이 되였었다. 선장이가 보자기에 싸들고 온 슈크림상자를 잠자코 앞에 밀어내놓으니 선희는 “아니 이건 또 웬걸 이렇게.” 하고 받아서 곧 보자기를 끄르고 또 뚜껑을 열어보더니 “이런 례절이 왜 있어요?” 하고 나무라듯 말하며 숙자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선장이는 한선희가 녀선생이 된 뒤에는 처음 보는데 그 원래의 아름다움에 일종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장중한 빛이 어린것을 이내 보아내였다. 선희가 주인집에 좀 보이고 온다고 말하고 슈크림상자를 들고 안방으로 올라갔다. 한 절반 억지로 덜어놓고 다시 뜰아래방으로 내려올 때 주인마누라 전도부인과 그 딸도 따라내려와 숙자아주머니와 선장이한테 인사하고 올라갔다. 주객 세 사람이 솔밭같이 앉아 슈크림을 먹으며 한동안 웃고 지껄였다. “글쎄 생전 남을 선생이라구 부를줄이나 알던 사람이 갑자기 남에게서 선생님소리를 들으니까 무에 꼭 잘못된것만 같은게 얼떨떨하지 뭐예요.” 하고 선희가 깔깔 웃어서 숙자아주머니와 선장이도 유쾌하게 따라웃었다. “그래두 선생님으루 보이기에 그렇게 부르겠지.” “말씀 마세요. 상급반에는 나하구 나이 엇비슷한 학생두 여럿인걸요.” “그렇게 큰것들이 있어?” 하고 숙자아주머니가 놀라는것을 선장이가 옆에서 “우리 학급의 오월봉이는 1학년 때 벌써 아들이 둘이나 있었는걸요.” 하고 발을 다니 선희와 숙자아주머니는 허리가 끊어지게들 웃었다. 이때 안방에서 라지오의 다이얄을 맞추는 소리가 삑삑 나더니 곧 아나운서의 “JOAK… 여기는 도꾜방송국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희가 “주인아저씨가 저녁마다 JOAK의 8시 뉴스를 듣는 습관이 있어요.” 하고 주를 다니 숙자아주머니는 “좀 좋아, 술이나 먹구 노름이나 노는데 비하면.” 하고 뒤받았다. 시보에 이어 뉴스가 시작되였다. 처음에는 이야기에 정신들이 팔려 어디 개가 짖느냐 하고 귀밖으로 흘려듣다가 문득 조선인이 어찌고저찌고 폭탄사건이 어찌고저찌고 하는 소리가 귀결에 피뜩 들려 숙자아주머니가 “아니 가만… 저거 뭐라나?” 하고 손을 내젓고 귀를 기울이는 바람에 선희와 선장이도 따라서 지껄이던것을 그치고 귀들을 기울였다. 세 사람의 눈이 차차로 동그래졌다.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이와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것이다. 전파를 타고 날아온 뉴스가 자못 엄청났기때문이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이란데서 조선인 윤 무어라 하는 사람이 폭탄을 던져 경축회장 주석대에 앉았던 일본군장령 여럿을 살상하였는데 그중에는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가와대장도 들어있다는것이였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니?” “인호오끼찌라니까… 아마 윤―봉―길이겠지요.” “나이 몇살이라구?” “스물다섯살이라잖아요.” “아직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구나.” “쉬, 가만 좀…” 선장이가 손을 내젓고 귀를 도사렸다. 한참만에 선희가 “저런!” 하고 낮게 소리치니 방송을 똑똑히 듣지 못한 숙자아주머니는 “왜?” 하고 선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10여명… 사상자가 여럿이라나봐요.” 선장이가 그 말에 “시라가와대장은 즉사했구… 노무라해군사령관은 눈깔 하나가 빠졌구… 시게미쯔공사는 다리 한짝이 달아났구…” 하고 발을 달고 “잘한다, 잘해!” 하고 무릎을 탁 쳤다. “언제라나, 사건이 발생한건?…” “오늘오전이라나봐요.” 숙자아주머니와 선희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 선장이는 저도 모르게 혼자서 팔을 뽐내였다. “쟤 좀 봐, 금세 쌈이라두 하러 나갈것 같네.” “피가 끓어 참을수 없는 모양이지요. 왜 안 그러겠어요, 우리두 다 속이 후련한데.” 숙자아주머니와 선희가 서로 지껄이는 소리를 선장이는 들을 귀가 없었다. 정신이 모두 바다건너 상해의 홍구공원이란데에 날아가있었기때문이다. 선장이는 받은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이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오래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의사가 할빈역두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쏴눕힌것은 아무리 장쾌하다더라도 필경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여나기전의 옛이야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오늘낮의 일이다. 자신이 동양악기점앞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의 아름다운 선률에 귀를 기울이고있었을, 바로 그무렵에 발생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애국용사―조선의 얼―의 나이도 씨동이또래밖에 더 안되였었다. 너무나 몸가까운, 너무나 생생한 사실이였다. (그에 대면 나는 하잘것없는 반병신이로구나!) 하는 자비심과 (그는 지금쯤 적에게 모진 악형을 당하고있을텐데… 나는 여기 이렇게 편안히 누워있어?) 하는 자책감에 등골에 땀이 다 내돋았다. 안절부절을 못하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앉으며 곧 껐던 불을 다시 켰다. 부지런히 책상서랍을 뒤져 언젠가 잡지에서 스크래프해두었던 황포군관학교 조선학생들의 사진을 꺼내들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였다. (얼마나 씩씩한 모습들인가!) (얼마나 장한 조선의 아들들인가!) (씨동이는 어디를 갔을가!) (김봉구는 어떻게 됐을가!) 상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갈매기떼가 되여 선장이의 머리우를 넘놀고 날아옜다. 눈뜨고 꿈꾸듯이 얼마를 그렇게 앉았다가 다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는 김영하선생이 잡혀가기 며칠전에 들려주던 말이 생각났다. “상해 프랑스조계에는 우리 나라 림시정부가 있단다. 그 청사에는 당당히 태극기까지 띄웠단다.” 그러자 선장이의 감은 눈앞에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 펄럭이는 기발은 흡사 선장이를 오라고 손길을 치는것 같았다. 선장이의 넋은 그 부름을 따라 머나먼 바다건너로 훨훨 날아갔다. 상해로 날아갔다. 황포군관학교로 날아갔다. 씨동이가 가있을것만 같은 그 어느 미지의 세계로 날아갔다. 가면 김봉구를 꼭 만나게 될것만 같은 그 어느 생소한 세계로 날아갔다. 이럴 때 김영하선생이 있었으면 오죽 좋았으랴. 이 넓은 서울장안에 같이 일을 의논할 사람 하나가 없다니! 선장이의 가슴은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남들이 다 목숨을 걸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하고있어? 수치스러운 일이다. 도저히 량심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폭탄두 권총두 다 손에 넣을수가 없으니… 중국으루 건너가자. 림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루 가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가자!) 선장이가 마침내 마음을 질정하였다. 그러자 감은 눈앞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고 또 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잇달아 쌍년이의 얼굴, 어멈의 얼굴, 숙자아주머니의 얼굴, 한선희의 얼굴, 김영하선생의 얼굴 그리고 매부 한정희의 얼굴… 숱한 얼굴들이 서로 겹치며 떠올랐다. 선장이는 눈 딱 감고 끈덕진 미련을 뿌리쳤다. 원산도 서울도 다 떼팽개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피뜩 (내가 정신이 나가잖았나? 로자두 마련하잖구 어디를 간다구 우둘렁거려?) 이런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돈!” 신음소리 같은 소리가 입에서 새여나왔다. 선장이는 막 건느려던 외나무다리가 눈앞에서 끊어지는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제길할.” 아침에 일어나는 길로 선장이는 지도를 펼쳐놓고 상해로 갈 로선까지 다 선정해놓았으나 로자가 없으면 그것도 다 실현이 불가능한 공중루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날 선장이가 하교를 하는 길에 어떻게 하면 돈을 구할수가 있을가 골똘히 생각하며 걷는중에 어디서 누군가가 “서방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의례 저하고는 상관이 없는 어떤 사람을 누가 부르겠거니만 여기고 그냥 걷는데 난데없이 여위고 새까만 까마귀발 같은 손 하나가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놀라서 발을 멈추며 눈을 들어보니 머리가 쑥바구니 같은 열두어살 먹어보이는 거지아이다. “서방님 적선합쇼. 한푼만 줍쇼.” 선장이가 갑자기 서방님으로 승격을 하는 바람에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여 동전 한잎을 꺼내주며 “인석아, 멀쩡한 총각더러 서방님이 무어냐!” 하고 웃으며 타박하니 거지아이는 얼른 말씨를 고치여 “고맙습니다. 도련님, 재수가 불일듯합쇼.” 하고 허리를 굽실하였다. (고 자식 고거 참. 남은 돈을 구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다는데… 한푼 보태주진 못하구 되려 뜯어가?) 선장이가 쓴웃음을 웃었다. 연갑수법률사무소앞까지 왔을 때 “이제 돌아와?”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 서있는것은 검소한 옷차림을 한 한선희다. “웬 일이요?” “너 보러 왔다.” “그럼 어서 들어갑시다.” “아니, 들어갈게 아니라 내게루 좀 가자.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럼 내 얼른 이 책가방 좀 들여다두구 나오리다.” 1분후에 한선희와 선장이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차정류소를 향하여 걷고있었다. 몇해전에 둘이 함께 서울을 올라올 때는 선장이 키가 선희의 어깨와 가지런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뒤쪽으로 선장이가 도리여 선희를 내려다보게 되였다. 키가 엄부렁 큰 선장이와 애돼보이는 선희가 같이 가는것을 보고 련애를 하는걸로 지레짐작을 한 싱검쟁이들이 눈짓코짓해가며 획획 휘파람을 불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의 낡은 관념에 푹 젖어버린 고리삭은 인간들 눈에는 젊은 남녀가 백주에 공공연히 한데 붙어다니는것은 상풍패속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던것이다. 그 우습강스러운 꼴들을 보자 선희는 지꿎은 웃음을 웃으며 “어서 나한테 더 바싹 달라붙어라.” 하고 짐짓 선장이의 팔죽지를 잡아당기는것이였다. 그건 낡아빠진 도학선생들에 대한 시위이고 도전이고 또 멸시였다. “오빠가 이번에 전장을 꽤 많이 처분을 한 모양이다. 대대루 물려내려온거지만 살림형세가 자꾸 기울어지니 어떻거니. 그래서 무슨 변고가 있기전에 미리미리 손을 써서 네게다두 학비를 좀 보태줄 생각이 났나보다. 이게 그 200원이다. 네거하구 내거하구 한몫 부쳐왔더라. 어제 받았다. 그리구 현금을 집에 두거나 몸에 지니는건 좋지 않으니까 이따 돌아가는 길에 우편국에 갖다 아주 저금을 하도록 해라, 아무때구 찾아 쓸수가 있으니까.” 방안에 들어와 앉자 이렇게 말하며 선희는 곧 가방속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여 선장이앞에 밀어놓는것이였다. 선장이는 꿈이 아닌가싶었다. 세상에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또 어디 있으며 이런 안성맞춤이 또 어디 있으랴. 이야말로 가물에 단비였다. (내가 아마 운수가 대통하는가보구나.) 선장이가 겉으로는 아닌보살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쾌재를 불렀다. 대문밖까지 바래면서 선희가 “자주 놀러 와.” 하고 다정하게 인사할 때 선장이는 얼없이 “아 틈만 있으면 아무때구 오리다.”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이것이 생리별이 될지도 모를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아수하기 그지없었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선희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사날후에 선장이가 학교 유도부에서 합숙훈련을 한다고 핑게대고 드러내놓고 트렁크에 옷가지들을 챙겨넣는데 속내 모르는 어멈은 열심히 거들어주며 “도련님이 우승을 하시면 아씨가 자전거를 사주신대요.” 하고 제 일 같이 좋아하였다. 물계 모르는 어멈은 흰 띠짜리 선장이가 귀신 찜쪄먹을 색띠짜리들을 어렵지 않게 누르고 우승을 하는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선량한 어멈! 불쌍한 어멈! 사랑스러운 어멈!) 선장이는 어멈 모르게 떠나갈것을 생각하니 그 락심천만한 얼굴을 눈앞에 보는것 같아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아픈것이 마치는것을 느꼈다. 저녁상에 마주앉아 수저를 들었을 때 선장이가 문득 “아저씨는 개성을 가셨다구요?” 하고 물으니 숙자아주머니는 심상하게 “응 래일저녁때나 오실게다.” 하고 대답하였다. “작년에 수학려행을 갔을 때 정몽주가 철퇴를 맞았다는 선죽교 돌다리에다 물을 부어보았더니 아닌게아니라 불그스레해집디다. 거기 사람들 말이 충신의 피라나요.” “충신의 피라서 아마 보통피와는 다른게지.” “아주머니두! 참 아무리 충신의 피래두 돌에 묻은게 500년 동안을 어떻게 남아있어요? 노박이루 비에 씻기면서! 다 관광객을 끌기 위한 수단이지. 그렇지만 충신을 두구두구 기린다는건 좋은 일이겠지요.” “듣구보니 네 말두 근리는 하다마는.” “인간이 한세상 났다가 나라일에 목숨을 바친다면 한세상 났던 보람이 있잖습니까. 리순신장군처럼, 안중근처럼 그리구 요전날 그 윤봉길처럼.” “얘가 미쳤나, 갑자기 목숨을 바치느니… 보람이 있느니없느니… 어서 밥이나 먹어라. 헌소리 작작 하구!” 선장이가 아무렇게나 제게서 가까운 묵나물에다 저갈을 대니 숙자아주머니는 “이게 맛있다 이걸 먹어라.” 하고 닭알부침 담긴 접시를 앞에다 옮겨놓아주었다. 선장이는 맛도 모르는 밥을 머리를 수굿하고 그저 본능적으로 먹었다. (이게 숙자아주머니와의 “최후의 만찬”이로구나.)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유감스럽기도 하고 얼얼하기도 하고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숙자아주머니. 애국애족이라는 관념을 통히 모르고 사는 숙자아주머니.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숙자아주머니. 본능적으로 나를 아끼는 숙자아주머니. 내 이 돌연적인 행동을 배은망덕으로밖에 더 어찌 해석하랴. 불쌍한 숙자아주머니. 연갑수의 희생양. 가엾은 숙자아주머니…) 머리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밥을 다 먹고나서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니 6시가 조금 지났었다. 4학년에 올라왔다고 숙자아주머니가 진고개에 데리고 가 사준 “세이꼬” 17석이였다. 행색이 총총한 선장이가 합숙으로 간다고 트렁크를 들고 나설 때 마음의 어지러움을 가리려고 현관문밖에까지 따라나와 바래는 숙자아주머니와 어멈을 돌아보고 “나 없다구 울지들이나 마세요.” 하고 웃음의 소리를 던지니 숙자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념려 말아, 너 없는 동안은 내처 웃구만 살테다.” 하고 대꾸하였다. 그리고 어멈은 “도련님이나 가서 울지 마세요 괜히.” 말하고 입을 막고 웃었다. 선장이가 밤 10시 40분차로 서울역을 떠났다, 북으로.  
138    [장편] 격정시대 29 댓글:  조회:673  추천:0  2016-04-19
장편소설   격정시대   김학철   29   1931년 여름 3천리산하의 방방곡곡에 일진광풍이 휘몰아쳤으니 이는 곧 세상에서 일컫는 만보산사건의 멀기 즉 여파이다. 중국 길림성 만보산에서 관개수로때문에 조선이민과 중국농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는 보도기사가 련일 각 신문들에 게재되자 맹목적인 동포애에 피가 끓어올라 머리가 뜨거워진 백의동포들이 애매한 청인 즉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하기 시작한것이다. 일제의 식민지폭압통치에 대한 쌓이고쌓인 민족적불만이 배출구를 찾지 못해 애를 쓰다가 만만한 구멍 하나를 발견하자 일시에 그리로 내뿜긴것이다. 저속한 말로 하면 시어미 역정에 개옆구리를 찬것이다. 어디서는 남새농사하는 청인을 몇이 달려들어 톱으로 켜죽였다느니 또 어디서는 있는 돈을 다 드릴테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것을 자귀로 찍어죽였다느니… 별의별 몸서리 치는 류언비어가 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이렇듯 민심이 흉흉한중에 빈지를 굳게 들인 화교들의 상점에다 조선사람들이 돌을 던지는것을 순찰중의 경찰이 보고도 제지하지 않는것을 목격하고 선장이의 머리속은 복잡해졌다. 영업허가를 내가지고 큰 거리에서 상행위를 하는 상가의 빈지짝에다 숱한 사람이 모여들어 돌멩이질하는것을 강건너 불구경하듯하는 경찰을 언제 어디서 보았던가! 일요일 오후의 일이다. 선장이가 안국동네거리에 있는 유서깊은 서점 겸 문방구점 이문단에 가 새로 나온 일본잡지를 립독하였다. 이때의 서점들에서는 잡지를 사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그냥 읽는것을 허용하였으므로 언제나 잡지매대 주위에는 립독 즉 “서서 읽기”하는 사람들이 웅게중게 둘러섰었다. 그 대부분이 학생들인데 모두 읽는데만 골똘하여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대개는 눈 한번 거들떠보지 않았었다. 지식욕은 왕성하나 서적을 구독할 자력이 따르지 못하는 학생들임을 잘 아는 까닭에 서점측에서도 일반고객과 층하를 두지는 아니하였다. 선장이가 두어시간 착실히 서서 읽기를 하고 이문당을 나서는데 관훈동으로 통하는 길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는것이 눈에 띄였다. 보통 안국동네거리라고 부르지만 기실은 길이 일곱가닥―일곱거리인데 그중의 하나인 이 관훈동거리는 고서점들이 모여있는 거리로 이름이 났었다. 구경속 좋은 선장이가 무슨 일이 또 났다 하고 부지런히 쫓아가본즉 화교가 경영하는 료리점―중화원앞에 사람이 백차일 치듯하였었다. 그리고 그 비슥맞은편에 있는 고서점―지신서점안에는 패검을 한 순사 둘이 덤덤히 밖을 내다보고있었다. 선장이는 불현듯 어느해 년분인가 원산청년회관을 적색로조에서 들이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주재소 순사들은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어느 바람이 부느냐는듯이 구경을 하였었다. 선장이는 타고난 정의감으로 언제나 약자를 동정하고 강자를 미워하였다. 그러기에 종업원이 모두 합해 칠팔명밖에 안되는 외국사람의 료리집을 숱한 사람이 에워싸고 란장판을 치는것을 보았을 때 선장이의 동정은 서슴없이 동포애를 초월하여 빈지 들이고 문 닫아걸고 롱성하는 약자―중화원 청인들에게 기울어졌다. 에워싼 사람들중의 몇몇이 상투가 국수버섯 솟듯하여 빈지짝에다 돌을 던지고 또 몽둥이질을 하여 한창 기세를 올릴 때였다. 굳게 닫았던 출입문을 불시에 열어젖뜨리며 대여섯명의 롱성군이 사나운 기세로 쏟아져나오는데 그 손에는 모두 부집게, 밀대, 도끼자루 따위 연장들이 들렸었다. 이때까지 상대방을 얕잡아보고 우쭐렁대던 사람들이 일시에 와 물러나며 길을 터놓으니 필사적각오라도 한듯싶은 중국사람들은 연장을 휘두르며 무인지경을 가듯하였다. 그렇게 좌충우돌 한바퀴 시위를 한 뒤에 그들은 곧 다시 걷히여 들어갔다. 그 앞장을 서서 부집게를 휘두르는 젊은 사람은 선장이가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 사람은 언젠가 구스노끼만년필점앞에서 그림 그리는 거지아이에게 10전짜리 백통전을 던져주던, 나무값을 깎던 청인이였다. 그 름름하고 씩씩한 자태를 선장이는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동정은 더욱더 걷잡을수없이 그들에게로 기울어졌다. 출기불의의 반격을 당하고 잠시나마 넋을 먹었던 사람들이 다시 정신들을 수습하며 곧 별반거조를 내려고 서두를즈음에 웬 사람 하나가 “여러분 잠간만!” 하고 앞을 가로막아나섰다. 선장이가 보니 뜻밖에도 김영하선생이였다. 놀람과 긴장으로 하여 선장이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저리 비켜!” “냉큼 물러서지 못해?” “저거 어디서 나온 목두기야?” “그 자식부터 한대 안겨라!” “임마, 창아리가 터지구싶어 몸살이 나느냐?” “저놈이 되놈편을 들잖나.” “하늘이 높은지 땅이 낮은지 아직 모르는군.” “여러분, 잠간만 내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김영하선생이 두팔을 벌려서 가라앉히는 형용을 하였다. “네깟놈의 말 들으려구 우리가 여기 모여선줄 아느냐?” “시러베아들놈!” “이 중국집 사람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웃음 띤 얼굴로 모여선 사람들을 둘러보는 김영하선생의 유화하고 침착한 태도가 떠돌던 살기를 우습게 사그라뜨렸다. “이건 종로에서 뺨 맞구 한강 가서 눈 흘기는 격이 아닙니까?…” “할 말이 있거든 그냥 해라, 까다로운 곁말을 쓰지 말구.” “우리 백의민족은 종래루 죄 없는 외국사람을 멸시하거나 욕보이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고상한 품성을 지닌 자존심 있는 민족입니다. 숱한 사람이 달려들어 몇명 안되는 사람을 매질한다는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외국사람을. 자존심 있는 민족은 그런짓을 안하는 법입니다.” “그놈들이 무슨 외국사람이냐? 쟝꼬로지!” “여보 당신 그놈들의 뢰물을 먹잖았소?” “중뿔나게 나서서 괜히… 같잖은게!” “당신 활동사진 변사가 아니요?” “만보산에서 우리 동포들이 되놈들에게 얻어맞은걸 당신 아오 모르오?” “거 싱거운 자식이 어디서 하나 튀여나와가지구 싹 식혀버리잖나.” “여보 당신 갈길이나 어서 가우, 오지랖 넓게 나서서 참견질 말구.” “가자, 가자.” “우리두 가자, 순사놈들 저기서 재미스레 구경하고있는 꼬락서니 보기 싫다.” 이러는 동안에 사람들의 보복의욕이 현저히 묽어지고 또 시들부들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볼일들이 생각이 나 서로 지껄이며 흩어져가기 시작하였다. 필경은 오합지중이였다. 선장이가 흩어지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왔다. “선생님!” “오 너두 왔었니? 가자.” 김영하선생이 선장이를 끌고 하숙으로 돌아와 작은 방의 미닫이와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리고 미선 한자루를 선장이를 주고 또 한자루는 자신이 부치며 개탄을 하였다. “다들 왜놈 좋은 일 하느라구 저리잖니. 방휼지쟁일나 말… 너두 알지? 조개하고 도요새가 싸우면… 리를 보는건 어부밖에 없단 말이야. 이건 다 왜놈들이 조선사람하구 중국사람을 쌈 붙여놓구… 어부지리를 보자는 흉계야. 경찰이 보구두 못 본체하는것만 봐두 알 일이지. 뒤구멍으룬 붙는 불에 키질을 하면서두 겉으룬 아닌보살하는데 다들 속는단 말이야. 참 어리석지!” “그럼 만보산에서 쌈이 났다는것두 거짓말입니까?” “쌈이야 좀 났겠지. 그렇지만 그걸 이 지경 침소봉대루 떠벌여놓은건 왜놈들이야.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쑤는 왜놈들이지 중국백성이 아니야. 속지 말아야 해.” 선장이는 제가 이렇게 두뇌가 명석한 인물―김영하선생의 제자라는것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이튿날오후 선장이가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고있는데 숙자아주머니가 와서 “아저씨가 부르신다.” 하고 말하여 선장이는 손에 들었던 책을 얼른 내려놓고 부지런히 일어나 사무실로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오 너 이 서류 가회동에 좀 갖다 전하구 오너라. 한상룡 한사장댁 알지?” “녜.” 한상룡은 동양생명보험회사의 사장으로서 경제계의 거물이였다. “볼품있게 이 서류가방채 들구 가거라. 그러구 가서는 두손으로 공손히 꺼내 바쳐야 해. 말썽 많던 민사소송에서 승소를 했다는거니까 아마 좋아하실게다. 내 이제 막 정비서한테 전화를 걸어놨다.” 선장이는 언제나 심부름을 다닐 때 거머번드르한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면 급이 껑충 뛰여오른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선우군의 자전거를 타구 가거라.” 연변호사가 등뒤에 대고 이르는 말을 선장이는 여공불급하게 “녜.” 대답하고 곧 현관에 나와 슬리퍼를 벗어놓고 구두를 갈아신는데 “모자, 모자!” 하고 숙자아주머니가 흰 줄 두줄이 둘린 교모를 들고 쫓아나왔다. 그리고 선장이 머리에 턱 씌워주면서 “점잖은 댁엘 간다는 녀석이 맨머리바람으루 갈테냐? 덤비기는!” 하고 웃었다. 이때는 아직 자전거에다 자물쇠 잠그는 법을 모르는 시절이다. 그래서 선장이는 곧 서류가방을 다들 하는 법식대로 차체가름대에 벌려서 걸고 쇠를 채운 다음 가볍게 몸을 날려 안장에 올라탔다. 자전거는 설렁탕배달들이 흔히 타고 다니는 일본제 “톱이바퀴M26”―짐받이가 없는것이였다. 한상룡의 저택은 가회동 중턱에 있다. 길거리에서 대여섯간 들어가 어마한 솟을대문이 솟았는데 승용차가 드나드느라고 문턱이고 문지방이고 다 없애치운 까닭에 콩크리트포장을 한 민틋한 길이 정원수를 심은 마당안으로 거침없이 뻗어들어갔었다. 선장이가 자전거를 대문간에 세우고 서류가방을 떼여내리는데 더운 때라 문이 활짝 열려있는 행랑방에서 행랑아범이 돌쟁이 딸아이를 안고 마주 나왔다. “사장님 계시우?” “녜 계시지요. 오후엔 출입을 안하셨으니까.” “연변호사댁에서 서류를 갖구 왔는데요.” “녜 그럼 잠간 좀 기다리시우, 내 들어가 연통하리다.” 행랑아범이 품에 안았던 애기를 땅바닥에 내려놓는것을 선장이가 얼른 앞으로 나서서 받아안았다. 어린아이는 낯을 가리지 않는지 아무 소리 없이 안겨서 선장이의 얼굴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루더듬었다. 손은 끈적끈적하였다. 빗기지 않은 머리는 헝클어졌고 씻기지 않은 얼굴에는 흘린 코가 말라붙었는데 몸에서는 퀴퀴한 지린내 같은것이 풍기였다. 그리고 몸에 걸친것은 넝마요 삼년 묵은 때가 다닥다닥한 조꼬만 발은 까마귀발이였다. 선장이가 열려있는 문으로 되박만한 답답한 방안을 들여다보니 세 벽에 다 피자국이 고기비늘처럼 촘촘히 들어찼었다. 그것이 모두 빈대를 눌러죽인 자국임을 깨닫자 선장이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품에 안은 아이를 다시 살펴보니 그 팔이고 다리고 등이고 가슴이고… 살가죽이 성한데라고는 없었다. (요 어린것이 저런 끔찍한 빈대굴속에서 살다니!) 생각하니 선장이는 측은한 마음을 금할바 없었다. 연통하러 들어갔던 행랑사람이 도로 나왔다. “들어오라시우.” 선장이가 어린아이를 도로 넘겨주고 제몸을 한번 굽어본 뒤 정갈하게 비질을 한 사랑마당으로 걸어들어갔다. 정원수와 화단과 괴석과 양어지가 자그마한 별천지를 이루었는데 사랑채의 유리문들이 으리으리하여 선장이는 발걸음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서울 연갑수의 법률사무소는 원산 선장이네 집에 대면 대궐이였다. 그러나 가회동 한상룡의 저택은 견지동 법률사무소에 대면 또 대궐이였다. 인간세상 높낮이가 이같이 현수하였다. 제도에 맞는 양복을 입은 표표한 젊은 비서가 마루끝에 나서서 선장이를 기다리고있었다. 선장이는 올라가지 않고 그냥 마루끝에 걸터앉으며 곧 서류가방을 열고 서류를 꺼내 두손으로 공손히 비서에게 바쳤다. 비서가 서류를 받아들고 방안에 들어가 주인하고 의논하는 동안 선장이는 차고앞에 세워놓은 승용차를 살펴보았다. 연회색의 크라이슬러인데 손질이 빈틈없이 잘되여 차 전체가 거울같이 반들반들하였다. 같은 한집이건만 행랑방은 천당속의 지옥같이 대조적이라고 선장이는 생각하였다. 방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주인인듯싶은 나이 지긋한 남자의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따라웃는 비서의 낮은 웃음소리도 들렸다. 한동안이 지나서 비서가 다시 마루로 나오더니 웃는 얼굴로 “수고했네.” 하고 50전짜리 봉황 새긴 깔쭈기 한잎을 선장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돌아가거든 연변호사께 사장님께서 매우 만족해하신다구 말씀하게. 그리구 쉬 한번 찾으시겠단다구.” 하고 말을 일렀다. “녜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걸어왔나?” “아니 자전거를… 저 대문간에 세워놨습니다.” “오 그럼 잘 가게.” “녜 안녕히 계십시오.” 선장이가 재벌인사하고 한손에 서류가방 들고 또 한손에 깔쭈기 들고 대문께로 나오는데 아까 그 행랑사람은 그저 거기서 어정거리고있었다. 선장이가 보니 그 품에 안긴 돌쟁이의 손에는 고대 잡아준듯싶은 짱아―잠자리 한마리가 쥐여져 파드닥거리고있었다. “벌써 돌아가시우?” “녜.” 대답하고 선장이는 바로 그 안긴 아이에게 다가가 잠자리 쥐지 않은 조꼬맣고 어지러운 손에다 고대 상급으로 받은 깔쭈기를 쥐워주었다. “아니 이게 웬 일이시우?” 행랑사람이 놀라 눈이 둥그래지는것을 선장이는 “빈대가 그렇게 많아서 애기가 어떻게 살지요. 우선 빈대부터 잡아없앨 도리를 생각해보시우.” 말하고 곧 한손에 서류가방을 든채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민틋한 콩크리트포장도로를 길거리를 향하여 내리달았다. 자전거를 탄김에 드라이브를 한바퀴 해볼 생각으로 재동어귀에서 오른쪽으로 꺾이지 않고 왼쪽으로 꺾이여 동구안대권 즉 창덕궁을 향하고 치달았다. 창덕궁앞에서 다시 남쪽으로 꺾이여 넓은 길을 거침새없이 꼿꼿이 단성사―유명한 영화관―앞까지 와가지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꺾이여 직선으로 종로네거리까지 왔다. 거기서 또 천천히 북쪽으로 꺾이여 비로소 견지동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집에를 와보니 활짝 열린 현관문앞에 자전거가 서너대 가로세로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현관에는 손에 수첩을 든 사람과 어깨에 카메라를 걸멘 사람이 네댓 몰켜서서 복도끝에 나선 선우군을 쳐다보며 무슨 질문들을 하고있는 모양이였다. 선장이는 (이거 선우군이 오늘 희떱게 무슨 기자회견을 하시잖나?) 의혹하고 또 신기로와하며 한옆에 자전거를 갖다세워놓고 먼발치에서 엿들었다. “그래 그자들이 모두 몇이나 되던가요?” “세놈입니다. 세놈.” “단 세놈이요?” “녜.” “손에다 무슨 흉기들을 들었던가요?” “아니, 흉기는 든게 없습디다.” “그럼 다 도수… 맨손이더란 말이지요?” “오 참 그중의 한놈이 호주머니에서 접칼을 꺼내들구 보란듯이 접었다 폈다 합디다.” “그게 주모자… 우두머리던가요?” “아니, 우두머린 아닌갑디다. 우두머린… 앞장을 선 놈이 우두머린것 같습니다.” “그럼 맨주먹으루 위협을 하더란 말인가요?” “공갈을 했다지요?” “공갈을 어떻게 합디까?” 기자들이 중구난방으로 질문공세를 들이대는 바람에 선우군은 일일이 응수하기가 어려워 땀을 빼는 모양이였다. “‘이놈아, 기집애는 여기 놔두구 어서 너만 꺼져라! 모가지를 돌려앉히기전에 냉큼 내려가지 못해?’ 하구 눈방울을 굴립디다.” “다른 놈들은 가만히 보구만 있던가요?” “그놈들두 옆에서 거들었겠지요?” “그 접칼을 접었다 폈다 하던 놈은 어떻겁디까?” 선우군이 처음에는 게면쩍어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나중에는 난당한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조금도 늦추지 않고 질문을 연방 들이대였다. “약한 녀자를 거기다 떨궈놓구 당신 혼자 내려오면 그 녀자가 욕을 보리란것쯤은 짐작을 했을테지요?” “그 세놈에게 륜간을 당했으니 이제 그 녀자는 진정을 아주 망쳤다구 생각하지 않으시우?” “사랑하는 녀자를 떼놓구 혼자 내려올 때 맘이 어떻습디까?” “왜 나이트십(기사정신)을 발휘해 그자들하구 격투를 좀 벌이지 못했습니까?” “1대3이 너무 버거워 감을 못했습니까?” “제발 이젠 고만들 좀 물러가주십시오. 난 신열이 나 더 서있을수가 없습니다.” 하고 비명을 올리며 선우군이 두손을 앞으로 내들고 흔드는데도 직업의식에 사로잡혀 홍제원 인절미가 돼버린, 차지고 끈덕진 기자들은 사정없이 계속 물고늘어졌다. “지금두 그 색시하구 결혼을 할 의향이 있습니까?” “끝까지 책임을 질 생각이 있으시오?” “어떤 방법으루 그 아가씨를 위로할 생각입니까?” “그녀가 이번 일을 당하기전까지는 분명히 숫처녀였습니까?” “그런 증거를 혹시 가지구계시우?” “그전에 당신하구 육체관계를 맺은적은 없었던가요?” “자 이쪽을 보십시오, 사진을 좀 찍겠습니다.” “그 망나니들이 이제 감옥을 가게 될건 틀림이 없는데… 감상이 어떻습니까?” “이 법률사무소엔 앞으루두 계속 나와 일을 보실겁니까?” “연변호사는 왜 보이지 않습니까? 어디를 갔습니까?” “연변호사가 이 일을 압니까 모릅니까?” 이튿날 선장이가 신문에 실린 기사를 읽어본즉 선우군은 안날 낮에 혼사말이 있는 녀자하고 둘이서 삼청동산속 즉 북악산밑에를 놀러 갔다가 뒤를 밟아온 깡패에게 협박을 당하였었다. 선우군은 하는수없이 녀자를 빼앗기고 저 혼자 내려오는 즉시 파출소에 신고를 하였었다. 그러나 경찰이 급히 손을 써서 깡패 세놈을 모짝 잡았을 때는 이미 그 녀자는 륜간을 당한 뒤였었다. 연변호사는 뜻밖에 관후하였다. 그는 추문을 퍼뜨린 장본인―선우군―을 떨어내쫓지 않고 그대로 두어두었다. 그리고 안해가 남우세스럽다고 내보내자고 잔소리를 하면 “젊은 사람이 그런 실수 한번쯤 하는건 병가지상사야. 너무 야박스레 굴것 없어.” 하고 더 말 못하게 말문을 막아버리군 하였다. 숙자아주머니가 남편 안 듣는데서 “초록은 동색이로군!” 하고 입을 비쭉하는것을 보고 선장이는 혼자 속으로 웃을 밖에 없었다. 선우군은 한 두어달 동안은 코가 쉰댓자나 빠져서 풀기없이 죽어지내더니 몇달 지난 뒤에는 또다시 살아나서 검은구름에 백로 지나가기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느날 선장이가 싱글거리며 지꿎이 “그 색시를 어떻걸 작정이요, 데리구 살 작정이요?” 하고 물어보았더니 선우군은 “정신빠진 놈, 공중변소가 돼버린 기집을 어느 쓸개빠진 녀석이 데리구 살아!” 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선장이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치가 그 길에 들어서는 청출어람으로… 저의 스승을 릉가하지 않겠는지 모르겠다.)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여름한철 그 매미날개같이 시원한 차림차림으로 덥고 목마른 행인들을 끌어들이던 빙수점들이 거의다 차림새를 바꾸어 “긴쯔바(왜떡)”가게로 변하는 계절이 되였다. 빙수라는것은 얼음을 눈처럼 갈아서 유리보시기에 담고 과즙, 설탕, 련유 따위를 치고 또 건포도를 얹어서 먹는 청량음료의 일종이다. 아이스크림이 보급되기전에는 성하였으나 후에는 차차차차 아이스크림에 밀리여 마침내 그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추석이 가까운 때라 선장이가 동정심 많은 어멈에게 넌지시 말하여 소고기장졸임 한단지를 뒤로 빼내가지고 김영하선생을 갖다드리려고 관훈동 하숙집을 찾아왔다. 바야흐로 둥글기 시작한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였다. 방안에서 말소리가 도란도란 나기에 무심중 지대돌을 살펴본즉 눈에 익은 김영하선생의 화단앞에 까만 녀자구두 한컬레가 놓였는데 이 역시 눈에 익었다. 틀림없이 한선희의 구두였다. 달빛속에서 선장이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두 남녀 사이에서 완충기노릇을 하던 선장이가 이젠 그 사명을 다한것이다. 선장이가 보자기에 싸들고 온 알단지를 보자기채 소리 안 나게 마루에 내려놓고 색시걸음을 걸어서 물러나왔다. 주제넘게도 선장이는 한시름이 덜린것 같았다. 어깨가 거뜬해지며 금세 날것만 같았다. 그러나 선장이가 어찌 알았으랴, 복잡한 인간세상에서 정직한 사람들의 행복은 대단원이란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것을. 9월 18일 밤에 일본군대가 남만철도를 폭파한 중국군대를 응징하기 위하여 봉천의 북대영을 공격, 점령하였다는 보도기사가 각 신문의 제1면을 메운것은 그 다음다음날인 9월 20일의 일이였다. 그 영향을 받아 학교에서는 각기 다른 의미에서 학생들이 모두 들썩들썩하였다. “잘한다! 공부구 나발이구 다 걷어치우구 전쟁판에나 나가자!” 하고 신바람이 나 어깨를 으쓱으쓱하는건 공부에 취미를 못 붙이는 락제후보생들이고 “일본군대가 세긴 세구나, 남의 나라 병영을 식은 떡 떼먹듯하는걸 보니.” 하고 감탄하고 또 자랑스레 여기는건 정치하고는 담을 쌓은 혼돈씨들이고 “그놈들은 무슨 할 지랄이 없어 그 먼데까지 가 란장판을 벌이누?” 하고 못마땅하게 여겨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건 다 끌끌한축들이고 그리고 “잠자는 놈을 들이덮쳐 이긴게 그리 장하냐? 이 멍추야!” 하고 눈을 희번득이며 종주먹을 들이대는건 일본놈들을 불공대천의 원쑤로 치부한 조선의 얼들이였다. 그러나 선장이는 벌어진 사태를 분석할 능력이 없는 까닭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하였다. 다른 아이가 와 옆구리를 직신거리며 “왜 넌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이냐?” 하고 조롱을 해도 그저 웃기만 하고 대꾸를 아니하였다. 김영하선생에게 물어보고나서 입을 열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을 했기때문이다… 아니나다르랴, 김영하선생은 분격한 어조로 “이건 침략전쟁이다. 우리 나라를 다 먹어삼키구두 부족해 또 중국까지 먹어보려는 수작이다. 무어나 그놈들이 옳다는건 다 그른걸루 알구 또 그놈들이 그르다는건 다 옳은걸루 알면 틀림이 없다. 우리는 이런 전쟁을 견결히 반대해야 한다.” 하고 여지없이 타박을 하는것이였다. 한 열흘 지나서 날마다 한장씩 뜯는 일력의 “9월 작음”이 “10월 큼”으로 바뀐 날 오후의 일이다. 창경원 전차종점까지 둘이 함께 걸어나오다가 곽복덕이가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 큰형이 룡산철도공장엘 다니는데…” “느 큰형이 어디 있니?” “우리 큰외사촌 말이야.” “오 난 또…” “그 형님의 말이 상당수의 철도종업원들이 이번 전쟁을 반대한다더라.” “그건 어째서?” “모르지. 아무튼 그래서 만주루 들어가는 군용렬차들에다 인위적으루 고장을 내놓는다더라. 기술있는 사람들이 감쪽같이 하는 일이니까 군부에서두 웬 영문을 모른다지 뭐냐. 그런데 놀라운건 일본사람들두 일부분 우리 사람하구 한통속이 돼가지구 그런 활동을 하구있다는거야.” 곽복덕이의 옮기는 말을 듣고 선장이는 으슴푸레하나마 일종의 심상찮은 무슨 계선을 눈앞에 보는것 같았다. 조선사람하고 일본사람을 갈라놓은 절대적인 계선이외의 그 무슨 계선을. 선장이가 우연히 얻어들은 새 소식을 얼른 갖다 전하고 또 그 해명을 들어볼 생각이 긴하여 저녁전에 퇴근시간 맞춰 관훈동에를 달아왔더니 김영하선생의 방에 전에없이 덧문이 꼭 닫혀있었다. 괴이히 여기고 마당에 서서 무춤무춤하는데 안방에서 주인집마누라가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며 “김선생 찾아온 학생 아니라구.” 혼자말을 지껄이고 부지런히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선장이가 안방앞으로 다가섰다. 왼쪽 눈밑에 녹두알만한 까만 점이 있는 주인마누라가 호들갑스레 “학생 아직 모르는구먼. 김선생 경찰에 잡혀갔다오.” 하는 바람에 선장이는 놀라서 “녜?” 하고 마루끝에 나선 주인마누라를 뻔히 쳐다볼뿐 뒤말을 잇지 못하였다. “오늘새벽 불시에 사복형사 셋이 들이닥쳤지 뭐요. 아직 일어나지들두 않았는데 누가 와 대문을 두드리더라우. 아범이 일어나 가 문을 열어주었더니 글쎄 다짜고짜루 ‘김영하 어느 방이야?’ 묻구는 신발들을 신은채 김선생 방으루 뛰여들더라는구려. 방안을 샅샅이 들뒤져 무슨 책이며 편지며 하는따위를 한보따리 압수한 뒤에 아직 세수두 못한 김선생을 끌어내 앞세우더라우. 그리구 가면서 ‘저 방엔 아무두 드나들지 못하게 해!’ 하구 개 벼룩 씹는 시늉을 하더라지 뭐요.” “대체 무슨 일루 잡혀갔답니까?” “아까 낮에 우리 령감이 세면도구랑 내복가지랑 드리러 종로경찰서엘 갔다왔는데… 난 잘 몰라두 아마 무슨 독서회사건이라나봅디다.” “독서회사건.” 입속으로 뇌고 선장이는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넋없이 대청기둥에 걸린 주련판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청휴창태평가(时清休唱太平歌) (때가 워낙 맑으면 태평가도 부르지 않는다)   무슨 잠꼬대인지 알수 없는 글귀였다. 선장이는 대들보가 휘인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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