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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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 댓글:  조회:4638  추천:0  2015-02-17
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   가. 선비의 유래 선비는 곧 ‘사(士)’이다. 조선시대 사회계층을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농공상이며 여기서 사가 곧 선비를 뜻한다. 사의 계층은 사대부와 구분된다. 사람들은 흔히 사와 사대부를 구분 못하고 혼용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사는 공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고 대부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공부하여 권력을 갖게 되면 곧 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사(士)는 어떻게 생겨나고 대부(大夫)는 또 어떻게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대략 4천 년 전 은나라 때 문자가 생겨났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귀신을 섬기고 길흉화복을 점치고 점의 결과를 거부기 껍데기에 새겨놓는데서 상형문자가 탄생되었고 그것을 역사에서는 갑골문이라 부른다. 문자를 만들고 새기고 하였으니 공부한 사람이 있긴 하였으나 극히 드물었을 것이고 전반 사회가 귀신을 섬기는 기풍에 의해 삶을 영위하는 풍토에서 문화를 중시했을 리가 만무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공부한 사람이 사회 하나의 계층을 이룰 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시기 사(士)가 어떻게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다. 중국에서 사(士)가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주나라시기였다. 은나라 때는 청동기를 제작할 만큼 수공업이 굉장히 발달하였고 따라서 상업도 굉장히 발달하였다. 그런데서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며 장사업을 상업(商業), 장사치를 상인(商人)이라 부르는 관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은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주왕(紂王)이 타락하고 정사를 바로 돌보지 않아 힘을 잃은 틈을 타 주의 민족이 궐기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3천 년 전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정복하고 중원에 주나라를 세웠다. 중국역사학자들은 은(殷)에 대한 주(周)의 승리는 곧바로 농경문화가 경상(經商)문화에 대한 승리이고 문화의 숭배가 귀신숭배에 대한 승리였다고 평가한다. 주무왕은 은을 정복하여 얻은 땅을 친척과 전쟁에 기여한 장군들에게 나눠주어 경영하게 되었는데 땅을 분봉 받은 자를 제후라 부르고 제후가 또 자신의 토지를 친척들에게 분봉하였는데 이들을 대부라고 한다. 즉 주나라 왕은 자신의 통치범위를 천하라 여기고 자신을 하늘에서 내린 아들이란 뜻으로 천자를 자칭하고 나섰다. 제후가 분봉 받은 토지의 영역을 국이라 하는데 제후는 국왕에 해당된다. 제후는 왕이고 국과 가의 구체적인 경영은 대부가 맡아 한다. 대부 밑에 사가 있는데 사는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한다. 사가 공부하여 수양을 쌓는 것이 수신(修身)이고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하는 것을 제가(齊家)라 한다. 사는 또 춘추시대까지 전쟁이 일어나면 일선에 나가 싸워야 한다. 전사(戰士), 병사(兵士)란 말이 이렇게 생겨났다. 당시 백성은 싸울 자격이 없었고 싸움의 주체는 사의 계층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은 상대를 멸망시키고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패권을 이루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전국시대에 전쟁이 더는 패권의 목적이 아니라 겸병, 즉 상대를 먹어치우는 싸움이기에 백성들도 전쟁에서 싸우는 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주나라는 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농후하여 공부하는 자가 많아 졌고 이들이 사회 하나의 계층으로 등장하였으며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이들은 혼란스런 천하를 구제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자, 공자, 묵자, 맹자, 장자, 한비자 등등의 유명 인물들이 눈부시게 역사무대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제후와 대부는 자신들의 영지가 있었으나 사는 영지가 없이 마치 중국현대사에서 집단화 농업체제에서 가가호호 자류지(自流地)를 조금씩 남겨 채소나 심어먹을 수 있을 만큼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는 그 조그마한 땅을 믿고 생계가 어려워 대부나 제후한테 붙어먹고 살지 않으면 연명이 어려웠다. 쉽게 말하자면 사는 털과 같은 존재로서 가죽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춘추전국시대 각 학파 배운 사의 집단이 이 나라 저 나라 천하를 주유하면서 감투를 얻기 위해 몸부림친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공자라는 것을 세인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자를 비롯한 사의 집단이 단순히 감투에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학문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건립하고 대대손손 이어 내려가 영광을 빛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 선비가 진나라 천하통일에 기여 중국왕조역사는 하나라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라 시기 제후의 수는 1만이었고 은나라에 이르러 절반 이상으로 줄어 3천이었고 주나라 초기엔 8백의 제후가 있었다. 춘추시기에 서로 패권을 다퉈 제후의 수가 줄어들더니 전국시대 말기엔 7웅이 남았고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왜 역사가 흐를수록 제후의 수가 줄었고 이윽고 하나의 국가만 남았을까? 인류역사는 혈연으로 이뤄진 씨족공동체→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부족→부족연맹→부족국가→부족국가연맹→방국→제국으로 흐르는 패턴이었다. 중국역사의 경우 하나라 시기는 부족연맹, 은나라 시기는 부족국가, 주나라 시기는 서주 때 부족국가연맹, 동주에 이르러 방국형태에서 최후 제국으로 과도되었다. 이 공식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체에서 매우 분산된 분권사회로 이행되었고 그 분권이 점차 하나의 권력으로 집중되는 중앙집권제 제국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분권은 봉건을 의미하는데, 봉건이란 ‘봉토건국(땅을 나눠주는 것이 봉토이고 그 땅과 그 땅에서 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제후를 세우는 것이 건국임)’이며 주나라 왕은 천자로서 천하의 주인이지만 제후국의 치국에 관여하지 않아 허수아비 같은 존재이다. 각 제후국에 왕이 따로 있고 세금징수, 군대양성, 인사권까지 모두 행사하는 권력과 권리를 갖는다. 제국이란 권력집중과 관원대리제도를 실행하는 중앙통일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국역사는 분권사회로부터 어떻게 통일집권(統一集權)사회인 제국으로 이행되었을까? 전국시기인 기원전 4세기까지 진나라는 7국 중 별로 볼꼴이 없는 촌놈의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도 낙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도 없어 그저 그런 후진국이었다. 그러던 데로부터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 진나라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종국적으로 천하통일을 이루어냈다. 진이 천하통일 할 수 있었던 내막에는 진영정 썩 전에 상앙이란 선비가 이미 국력을 부강 시키고 군사를 가강하여 토대를 잘 닦아놓은 덕분이었다. 진효공 때 성은 공손이고 이름이 앙(鞅)이란 선비가 위나라에서 왔다. 그래서 처음엔 그를 ‘위앙(衛鞅)’라 불렀는데 효공이 그에게 상(商) 지역에 봉하여 그때부터 상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앙은 법가계열의 인물이다. 당시 법가는 이른바 진보파로서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초, 위, 한, 제 등 나라들에선 획기적인 개혁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앙은 후진적인 진나라를 선택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로 맘먹었다. 상앙의 변법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제반 분야의 개혁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개혁의 핵심내용으로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한다. 먼저 귀족 영주의 지위와 특권을 몰수하여 일반 백성가운데 지주나 부자 정도로 강등시킨다. 군공이 있는 종실의 경우라도 후(後)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후는 조세만 징수할 뿐 백성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기존의 영주에 부속된 신민은 재편하여 지방관이 관리토록 한다. 둘째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한다. 모든 관원은 국군이 임명하는데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하고 더 이상 작위가 세습되지 않도록 한다. 능력과 재능이 있는 자는 진나라 사람인지 여부를 떠나 정책을 결정하는 영도자가 될 수 있다. 당시 관직은 대부와 사 출신들이 맡았으며 대대로 세습되어 가는 귀족들이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리세습제를 타파하고 임명제를 실행한 것은 큰 혁명이었다. 셋째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 전국에 31개 현을 설치하고 현령과 현승(縣丞:부현장)이 다스리도록 한다. 이후 새롭게 얻은 땅에도 군현을 설치하고 더 이상의 봉국은 개설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정전제’를 폐지하였다. ‘정전제’는 일정한 토지를 아홉 등분한 것인데 분할된 농지가 우물 정(井)자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농가 8호가 각기 한 곳씩 맡아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한다. 하지만 농부들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농토는 열심히 경작하지만 공전을 가꾸는 데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다. 또 정전제는 가로 세로 길이 너무 많아 개간농토를 점하고 있는 면적이 많아 생산이 비효율적이다. 정전제를 폐지한 이후에는 새로 생긴 땅을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끔 허락하고 관은 세금을 징수하면 그만이기에 관과 개인 모두 좋아하는 개혁이었으며 생산량이 현저히 제고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전공에 따라 상벌제도를 실시하여 귀족계층도 전공이 없으면 기존의 권력을 내놓아야 했다. 전투에 나서는 모든 장군과 병사들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죽기 내기로 싸우니 전투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에 의해 임금의 권력이 확대되고 군사력이 가강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장하여 부국강병을 이뤄 천하통일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서서히 제국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진영정에 이르러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앙이란 한 선비가 변법을 통해 진나라를 부국강병 시켜 천하통일을 이뤄내는데 토대가 되었고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제국의 출현에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다. 진시황은 법가에 의해 성공하고 법가 때문에 망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된 것은 법가의 덕분이었다. 이미 상앙과 같은 법가 선비가 있어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도 있거니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인재를 긁어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법가계열의 인재를 모시기 위해 아무리 큰 대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재모시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비자를 데려오기 위해 한나라와 전쟁도 불사하고 한을 정복하고 나서 한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한비자는 대표적인 법가인물이며 제왕통치술을 집필한 인물이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을 많이 섭취하였고 또 한비자와 동문이었던 역시 법가계열의 인재인 이사(李斯)도 신변에 두었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 출신이었다. 말단관리직이 성차지 않아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구학(求學)의 길에 나섰고 순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가장 앞날이 창창한 진나라에 갔다. 그는 객경(客卿) 출신이라 본토 배기 관료들과 마찰이 심해 아슬아슬하게 쫓겨날 위기에도 처했으나 기민한 술수로 남아 진시황의 통일대업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통일 후에는 진시황에게 분서갱유를 권장하여 황제의 권력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이사는 또 진시황이 천하통일 집권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화폐를 개혁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심지어 거동륜(車同輪)에까지 신경을 써 모든 분야에서 통일된 하나의 기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인 진나라가 강대하고 천년만년 이어갈 것처럼 보였으나 이사와 같은 법가의 강력한 밀어붙이기 조치에 의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모순이 격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분서갱유를 통해 지식인 선비들을 부들부들 뜰게 만들고 강력한 법제도는 백성들을 숨을 못 쉬게 만들어 도처에서 곪고 있었다. 그리고 법가 문화는 너무 삭막하여 인간사회 정을 메마르게 하여 사람 살기 굉장히 피곤한 사회를 조성하였다.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쩍하면 죽임을 당하는 사회, 게다가 연좌죄를 실시하여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시름 놓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각박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전반 사회에서 모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이상하리만치 폭정이 삭막하여 재빨리 망하는 길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역사에서는 진승, 오광 농민봉기에 의해 진나라가 망했다고 서술한다. 허나 필자는 그 강대했던 첫 제국인 진나라가 15년이란 극히 단명한 수명을 맞게 된 것은 농민봉기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법가문화가 유가와 도가를 비롯한 기타 문화에 대한 패배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물론 진승, 오광 농민봉기가 이미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 도화선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라. 한무제 덕분에 유생들이 2천년 동안 천하를 지배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이었던 진나라는 비록 15년이란 단명으로 끝났으나 그 후 모든 왕조들이 진제국의 정치제도를 2천년 동안이나 지속하여 실행하여 왔다. 진제국의 정치제도는 군현제와 관원임명제 실시를 통해 지방 귀족들이 관리하던 토지와 백성을 모두 황제의 소유로 귀속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와의 초`한전에서 승리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자 어떤 정치제도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제국이 재빨리 망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일부 신하들은 진제국이 빨리 망한 것은 잘못된 정치제도 때문이라면서 아예 군현제를 포기하고 본래 주나라 후기 방국제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일부 신하들은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인지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군현제가 선진적인 정치제도이므로 이를 도입해야함이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유방은 두 부류의 주장을 절충하여 장안과 그 주변 즉 경기지역은 군현제를 실시하고 지방은 방국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일국양제(一國兩制)’이다. 이렇게 정치제도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무슨 이념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또 풀어야 하고 통치이념과 사상을 수립해야했다. 진제국처럼 법가의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또 급속히 망할 것 같아 아예 포기해버렸다. 진제국 시기 백성들이 지친데다 후기 농민봉기와 또 초`한전을 겪고 나서 더구나 백성들이 지쳐 있기 때문에 충분히 맘 놓고 편하게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자는데 입을 모았다. 그렇게 하려면 도가의 ‘청정무위’ 이념을 도입해야 했다. 이렇게 되어 한나라 초기 제국통치이념으로서 도가가 선발되었다. 백성을 닦달하지 않고 들볶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해져 문제와 경제 때 성세를 이루어 그 후 세대들이 본받을 만한 ‘문경지치’를 남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제국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이 없어 흉노를 비롯한 주변 오랑캐들이 집적거리고 제국 내에서도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무제 때 오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군사재정의 뒷돈을 조사해보니 염전(鹽田)과 제철(製鐵)이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무제가 염전과 제철의 사유권을 몰수하고 국가소유로 귀속시켜 그때부터 중국역사에 국영기업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무제는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흉노를 제압함으로써 내유외란(內揉外亂)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풀어야 할 과제로서 남은 것은 한나라 초기엔 도가의 이념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았으나 이젠 강력한 제국의 통치이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하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수립하기로 맘먹었다. 바로 이때 유생그룹의 대표이사 격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 동중서가 나타나 한무제와 흥정을 붙였다. 결과 한무제는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삼을 것을 동의하였다. 이렇게 동중서는 황제와의 흥정에서 얻을 것을 모두 얻어 승자가 되었고 그 후 2천 년 동안 유생들이 천하의 권력중심에 자리하게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마. 유교가 2천년 제국역사의 통치이념으로 선택된 이유? 중국문화는 선진(先秦)시대에 이미 기본 틀을 다 갖췄고 이미 완성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앞선 사례이다. 선진시대 각 학파의 이념을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도가는 ‘청정무위’를 주장하는데 전후(戰後) 백성을 숨 돌리게 만드는 데는 일정한 효력이 있으나 통치이념으로 지속하여 써 먹기는 너무 물렁해 보인다. 법가는 진나라가 도입하여 천하통일에 성공하였으나 지나치게 형벌을 중시하여 사회를 너무 삭막하게 만들고 민심이 지나치게 각박해져 왕조가 단명을 맞을 위험이 굉장히 크다. 묵가의 ‘겸애’사상은 좋은 것이나 전반 사유재산이 등장한 이후 인간사회는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이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삼기엔 부적격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힘을 강력하게 만드는 통치이념은 유가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가는 사회 각 영역에서 모두 질서를 추구한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군군신신(君君臣臣),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부부자자(父父子子), 연령에 따라 아래 위가 있어야 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 또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처강(夫爲妻綱)은 국가적으로 집안에서 모두 강력한 질서가 서기를 바라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 각 영역에서의 질서는 결국 따지고 보면 황제가 최고의 존재로 군림하는 것을 각인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유가는 또 예와 효를 매우 중시하는데 이는 농경문화에서 경험을 우선으로 받드는 풍토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것을 무기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유가는 또한 도덕과 윤리라는 무기로서 인간사회를 속박하고 질서를 지키고 공공의식을 키우며 인간의 됨됨이를 만들어간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함으로서 제국은 돈과 힘을 들이지 않고도 관료집단을 바르게 서게 할 수 있고 백성들도 따라서 사회 룰에 따르도록 만들 수 있어 수지가 가장 맡는 장시임에 틀림없다. 유가는 종법사상으로 국가와 집안의 질서를 유지케 하였던 것이다. 황족의 직계는 대종이고 기타 가족은 소종이다. 가문에서는 맏아들이 대종이고 차남부터 전부 소종이다. 대종과 소종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대종이 가산을 이어받고 제사를 주관한다. 제국시대엔 제사가 매우 중요한 행사이므로 제사를 통해 대종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상기 여러 가지 유가의 이념과 사상은 제국의 힘을 키우고 유지하고 백성들을 전부 황제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데 가장 좋은 무기였다. 그래서 한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 후에도 여전히 통치무기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 과거급제제도가 유생들이 천하를 장악하게 만들었다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먼저 귀족세습제를 폐지하고 관료임명제를 실시하였고 이를 통해 군현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진시황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중국은 간부임명제를 실시하고 있다. 제국시대 관장(官場)은 관(官), 요(僚), 이(吏) 등 세 가지로 나눴다. 관은 정무관이라면 요는 관의 보좌관이며 이는 사무관(서기관)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관료와 관리라는 말은 있어도 요리(僚吏)라는 말은 없다. 보좌역할 하는 사람과 단순히 서기 일만 하는 사람만으로는 관장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관을 중심으로 요와 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제국시대 관원을 도대체 어떻게 임명하였을까? 황제가 그 수많은 관원의 내막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일면식 없는 자들을 어떻게 알고 관원으로 등용하고 임명하였는가 말이다. 한나라 시기엔 찰거제를 실시하였다. 찰거를 향거리선(鄕擧理選)이라고도 하였다. ‘효(孝)’와 ‘렴(廉)’의 유교적 덕목에 기초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대신이나 지방 장관의 추천을 받아 선발하는 제도이다. 선발 과정에서 향리(鄕里)에서의 평판과 세론(世論), 곧 향론(鄕論)이 중시되었기에 향거리선(鄕擧理選)이라고 한다. 대신(大臣)이나 열후(列侯), 주(州) 자사 등이 추천하는 ‘수재(秀才)’와 군(郡)·국(國)의 장관이 추천하는 ‘효렴(孝廉)’ 등으로 나뉘는데, 효렴 출신자의 비중이 높았다. ‘수재(秀才)’는 후한에서는 ‘무재(茂才)’라고 불렀다. 향거리선은 한(漢)이 향촌 공동체의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위진남북조시기엔 천거제(薦擧制)로서 찰거제를 대체하였다. 천거제는 찰거제 때와 같이 관원으로 등용되는 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비슷하였다. 천거제는 매개 주군 관원들이 몇 품 이상의 관원을 몇 명씩 추천하는 할당제를 실시하였다. 추천된 관원이 부정을 저지르면 추천한 관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 뒷문거래를 막기 위함이었으나 연대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죄를 덮는 사례가 많아 역시 부정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찰거제이든 천거제이든 이상적인 인물 적합한 자격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는데 폐단이 많았다. 그래서 수나라 때 생겨난 것이 과거급제제도이다. 과거급제제도는 말 그대로 공부한 자가 시험을 통해 합격되어 관원으로 등용되는 제도이다. 문제는 시험과목을 무엇을 기준으로 하며 무슨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가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도 포함되어야 하고 법가의 사상도 있어야 하고 더 멀리 주역도 끼워야 하며 역법지식에도 밝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사상이다. 유가사상은 사서오경을 위주로 한다. 그러니까 과거시험의 주요 내용 7할 정도가 유교경전이 차지하고 나머지 모두 합쳐 3할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소매가 길면 춤추기 좋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당연히 유생들이 과거시험 참여도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 혹시 도가나 법가에 심취한 선비라 할지라도 출세하려면 반드시 유가에 기울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급제제도를 통해 유생들이 대거 관장에 진출하게 되었고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역사는 조정에서 유생출신 관원보다 황제의 신변에서 맴도는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례로 당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을 때 환관인 고대력사(高大力士)가 황제를 대신해 윤허하고 재가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명나라 시기엔 10만에 달하는 환관도 모자라 조선에서 빌려다 썼다는 기록도 있다. 환관들이 아무리 판쳐도 제국의 통치이념은 여전히 유가적인 것이며 유생출신들이 관장을 휩쓴 것은 사실이었다.   사. 천하위공과 관원대리 제국 이전, 예하면 주나라 말기까지 제후국들의 재산은 주나라 왕의 소유가 아니라 각 제후들 및 그 밑에 있는 대부들의 사유재산이었다. 당시 관원이라 말할 수 있는 계층은 대부와 사 두 계층인데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부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귀족세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재부가 사유재산이면 타락은 있을지언정 부패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사유재산인데 그 재산을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고 부패를 저지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시 대부와 사가 주색에 빠져 제가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을 경우 재부를 탕진하여 날려버릴 수 있는데 이는 부화타락이지 부패가 아니다. 부패는 제국시대부터 생겨났던 것이다. 제국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하늘 아래 전체 모든 재부는 공(公)가의 소유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드넓은 하늘 아래 황제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皇土)”고 표현하였다. 제국시대 혹시 사유 토지가 있어 매매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관원의 사유 토지를 황제가 몰수할 수 있고 지주 호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유 토지는 황제를 위해 일하는 아문에서 언제든 맘만 먹으면 몰수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천하의 모든 것은 공가의 소유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라 말한다. 이로부터 정부에서 사무에 관계되는 직종을 공직,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공무원, 정부에서 만든 문서는 공문, 국가재정에 의해 닦은 길은 공로라고 하였던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것이 공가의 것, 천하위공이기 때문에 국가의 구성원인 백성 개개인도 공민인 것이다. 그러나 제국시대 백성은 공민의 권리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공민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백성은 전부 황제의 신민(臣民)일 따름이었다. 어찌되었든 제국의 재부(땅과 백성)가 모양새로 천하위공이기 때문에 그 엄청난 재부를 황제 1인이 절대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를 대신하여 다스려 줄 사람이 필요하였고 그 사람들을 관원이라 부르고 황제가 임명하며 임명받은 관원은 황제를 대신하여 맡은 땅과 백성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황제를 대신하는 대리관원이 될 자격이 있을까? 우선 천하의 모든 것이 공가의 것이기 때문에 대리관원이 될 사람은 덕을 갖춰야 한다. 제국시대 겉으로는 유가, 내부적으로는 법가로 천하를 다스리는 외유암법(外儒暗法)이었으나 가장 강조한 것은 덕치(德治)였다. 중국인이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거나 조금만 상식에 어긋난 짓을 해도 ‘결덕(缺德)’라는 말을 곧잘 쓰는 것이 바로 2천여 년 동안 덕치사회를 걸쳤기 때문이다. 윤리치국이란 말도 있는데 이덕치국(以德治國)과 쌍둥이형제이다. 게다가 예치와 효렴을 빼놓을 수 없었다. 제국시대 이덕치국과 윤리치국 및 예치와 효렴의 실천자로서 가장 적합한 부류가 바로 유생출신들이다. 2132년의 중국제국역사에서 번진(藩鎭)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모를 꾸민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유생출신 관료들이 반기를 든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 조선왕조가 518년 지속된 비결 중국 수나라 시대 때부터 시작된 과거제가 한반도에는 788년(신라 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과’라는 형식으로 전래되었다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 시대 초기이다. 958년(광종 9년)에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했다. 이는 신분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던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과거제 대신 신분을 기준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음서제가 더 융성했다. 또한 문과(문관)와 잡과(기술관)만 시행되고, 군인을 뽑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와서야 과거제가 일반적인 관직 진출 수단이 되었고, 무과도 시행되었다. 학자들은 고려시대 국가통치이념을 불교였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고려 초기부터 실시된 과거제에 의해 유가학설이 선비 층에선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 고려 말기 양대 산맥을 이룬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유생출신이며 가장 걸출한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목숨 걸고 반대하였는데 반해 정도전은 목숨 걸고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주도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따지고 보면 정몽주는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왕족은 대종이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으며 대체하여서도 절대 안 되는 일이다. 만약 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거꾸로 정도전은 고려가 썩을 대로 썩어 맹자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조선조를 창건하는데 일등공신으로 역할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몽주는 유가의 가장 보수적인 인물이고 정도전은 맹자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는 유가의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역사는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어 고려를 뒤엎고 조선조를 창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무장이고 정도전을 비롯하여 권력층에 포진된 인물들은 거의가 유생출신들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제약하려고 왕족의 정치참여를 금지시켰다. 단종 때 왕이 어린 탓에 김종서가 천하를 호령하였다. 수양대군이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금기를 깨고 정치에 뛰어들었고 결국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전체 조선조를 통 털어 수많은 역모와 반란이 있었지만 왕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은 단 하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원인이 바로 유생들이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생들은 왕도에 붙어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 목적만 달성되면 더 큰 욕망이 없다. 따라서 왕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게 되면 사서오경을 들먹이면서 왕에게 한 방 먹이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조선조를 통 털어 권력의 중심에는 항상 유생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조선조 초기인 1446년 세종대왕이 백성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자 유생집단이 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만약 백성이 눈뜨면 자신들의 권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학문을 독점함으로써 유생집단이 영원히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한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경우 본산지인 중국에서는 무릇 하자가 없는 양민이면 전부 시험응시자격을 부여받은데 비해 조선은 양반 자식만, 그것도 양반의 적자만 시험응시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는 권력을 소수양반층이 독점하여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왕권을 제한하여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현 관료집단에 불만을 품고 조선시대 선비들은 대쪽 같이 자신들의 할 말을 다 했고 정의를 주장하고 수호한 인물 또 청렴하고 도덕적이고 아무튼 한 입으로 자랑하기엔 모자라는 것 같다. 요즘 관료사회와 조선조의 관료사회는 차이가 엄청 크다. 우선 조선조의 관료사회에 진출하려면 도덕적이고 사리가 밝아야 한다. 요즘 세월엔 도덕을 우선시 하지 않는다. 무슨 학교를 나왔고 이력이 어떻고 무슨 공적이 있고 사회인맥이 어떻고, 이를 기준으로 선발한다. 또 예전엔 재부가 많지 않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청렴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지만 요즘은 경제시대라 금전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만치 재부가 중요한 사회로 변질하였기에 청렴을 크게 보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이니 윤리이니 하는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세상사가 동전의 양면처럼 절대적인 것이 없는 것처럼 조선조의 선비도 공부하여 과거제를 통해 관료사회에 진출하기까지 굉장히 도덕적이고 정의적이고 대바르지만 일단 관장에 발을 담그면 파벌정치에 휘둘리어 사리사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자신이 모시는 직접 상관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모른 체하다가 나중에는 한통속이 되어 함께 부정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매사에 너무 정직하고 정의적이면 정계 및 관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정치와 권력이란 본래 치사스런 것이다. 내가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것이 정치의 생리이므로 정치의 중심에 선 선비라 하여 마냥 정직하고 정의적일 수 없다. 개별적으로 해서(海瑞)와 같은 관원이 조선조에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고 또 다수 관원들이 본받을 우상도 아니었다. 선비출신의 다수 관원들은 역사가 평가하는 것처럼 대쪽 같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관장에서 권력을 부여잡고 생존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전반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마무리 지어 말하자면 선비는 털이고 권력은 가죽이다. 털은 가죽에 붙어야 생존한다. 털은 가죽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비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자신들의 생존무대가 사라질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글 가르치는 훈장 선비도 있고 모든 선비의 역할이 반드시 권력과 유착된 것은 아니지만 큰들에서 말하자면 한무제 이후 중국역사와 조선반도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선비사회가 권력과의 유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이와 같은 맥락을 짚어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325    조선족 동거녀 살인 왜? 댓글:  조회:6792  추천:13  2015-01-23
조선족 동거녀 살인 왜?   다사다난했던 2014년을 한 달 남짓 앞둔 11월 26일 수원 팔달산에서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살인자는 조선족 박춘봉이었다. 이 사건이 언론을 비롯해 세간의 주목을 크게 끈 것은 2년 전 같은 지역에서 같은 토막 살인이 있었고 같은 조선족이 범인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를 크게 떠들썩하게 만든 박춘봉 살인사건이 있은 한 달여 되는 12월 29일 저녁 9시 10분경 김포 통진읍의 한 다방 앞길에서 여자를 흉기로 2차례 찔러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범인은 조선족이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2015년 새해 벽두인 1월 3일 저녁 10시 40분경 경기도 부천 한 아파트에서 역시 조선족이 자신의 동거녀를 살해하였다. 위 세 살인사건의 공통점은 범인이 모두 조선족이라는 것, 피해자는 모두 가해자들의 동거녀들이라는 것이다. 왜 예전에 보기 드문 조선족 동거녀살인 사건이 최근 들어 부쩍 늘고 있을까? 필자는 코리안 드림 20여 년의 흐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았다.   계약동거시기엔 동거녀 살인사건이 없었다. 2007년 3월 4일 방문취업비자(H-2)가 실시되기 전, 그 후 한국어능력시험에 의해 무연고동포 한국입국을 허락하기 전에는 한 가구에 한 사람, 즉 남편 혹은 아내 일방이 한국에 와서 체류한 사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족이 한국에 떠날 때 “몇 년 동안 감옥에 간 셈 치고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눈 지긋이 감고 돈만 벌고 돌아오겠노라.”고 맹세한다. 그러나 한국은 감옥이 아니고 자유개방적인 나라이다. 또 대한민국은 스님들만 모여 사는 절간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이고 인간의 욕구를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자유세계이다. 한국에 온 조선족들은 처음엔 결심대로 살다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몸속에 꿈틀거리는 욕망과 욕구가 그 비장했던 결심을 팽개치고 세속생활을 추구하게 만든다. ‘먼 곳의 물이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고향에 두고 온 남편이나 아내들이 타향살이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지 못하고 고독과 외로움을 말려주지 못한다. 더욱이 인간의 지극히 본능적인 생리상의 욕구를 해소하려면 가까운 데서 물을 구하여 불을 꺼야 한다. 재한조선족사회 서로 다른 외간 남녀끼리 동거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재한조선족사회 외간 남녀끼리 동거가 단순히 생리적인 욕구해소라고만 볼 수 없고 그 외에 경제문제가 깊숙이 개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색을 제공하고 남자는 반표(飯票)를 보장하는 삶이 수천 년 인류사회 패턴이었다. 재한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향 동창생 사이, 고향 선후배 남녀 사이 동거가 많았고 한 직장에서 만나 동거하거나 소개에 의한 동거도 있었고 한 울안 여러 쪽방에 살고 있는 ‘홀아비’와 ‘과부’가 동거하는 등 모든 동거 남녀들의 생활패턴이 하나 같이 비슷하였다. 남자가 집세 책임지고 생활비 부담하고 여자에게 생일 선물하고 간단한 용돈만 챙겨준다. 여자는 남자 집에 얹혀살면서 집 거두고 밥 짓고 빨래를 책임진다. 동거생활 보내다가 어느 일방의 아내나 남편이 한국에 오게 될 경우 서로 마찰이 없이 자연스레 헤어진다. 절대다수 동거 남녀들이 이 정도 조건이면 쌍방이 서로 오케이였다. 왜냐하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 이자 돈을 빚지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빨리 빚 갚아야 하고 한편으로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 송금해야 하고 자녀 공부뒷바라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번 돈을 맡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여자도 그것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서로 약속대로 지키면서 다툼이 없이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당시 재한조선족사회 외간남녀간의 동거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제한되어 있었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약속한 선을 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남남도 살 섞고 살아가노라면 정이 들기 마련이나 당시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리어 남자나 여자나 사랑타령이 개입될 틈이 아주 적었다. 사랑은 서로 상대를 소유하려고 들기 마련이고 이것은 지극히 인지상정이다. 당시엔 서로 정이 들 수 있었으나 사랑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소유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일방의 배우자가 한국에 오게 되면 쉽게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임시동거가 가희진작(假戲眞作)이 되어 서로 깊이 사랑하여 중국에 있는 배우자한테 연락도 끊고 사분(私奔)하다시피 한 경우도 있었으나 다수는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상대를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동거녀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랑동거는 소유가 목적인데 이뤄지지 않으면 상대를 해칠 수 있다. 중국어에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증오한다.”는 말이 있다. 남녀 간에 미움은 사랑이 전제한다. 사랑이 없는 미움이 없다. 또 사랑의 기본 속성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는데 소유하지 못한다면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기에 이른다. 좋아하는 여자와 혼인이 이뤄지지 못하면 혼사를 말리는 여자 부모를 가해한다든지 당사자인 여자에게 화풀이로 가해하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흔하게 발생하고 있다. 소유 때문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20여 년의 코리안 드림을 거쳐 이젠 계약동거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 한국에서 생활하는 비례가 급증하였고 가족이 모여 사는 경우가 많은 것도 계약동거가 사라진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요즘 재한조선족 여자들이 다수가 먹고 살만한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굳이 돈을 아끼려고 사랑이 전제하지 않는 계약동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홀로 사는 여자들은 이젠 정식으로 부부로 살 수 있는 남자를 원하고 있다. 돈 좀 아껴보려고 부평초 같은 떠도는 불안정적인 생활보다 상대에게 돈 좀 쓰면서 여러모로 헌신하더라도 이젠 안정적인 부부연을 맺어 가족생활을 보내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계약동거가 사라진 결정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남이 만나 혼인에 이르자면 서로에 대한 요해가 충분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도리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 알고 하는 혼인은 없다. 더욱이 상대를 만나 눈에 콩깍지가 끼면 상대에 대한 요해를 하고 말고 없이 금방 동거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 부류 사람들은 처음엔 공주가 백마 탄 왕자를 만난 것처럼 서로 좋아하다가 이런저런 문제가 드러나게 되면 또 금방 갈등을 빚게 된다. 박춘봉의 동거녀가 살해된 것은 그녀가 6개월 동거하는 과정에 박춘봉이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불법체류자라면 안정적인 일자리 찾기도 힘들고 따라서 보장된 수입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싫어지고 이를 계기로 기타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녀가 헤어질 것을 통보하였으나 박춘봉은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계속 살기를 원했고 여자는 기어코 헤어지려고 결심하자 내가 소유 못할 바엔 상대를 해치려는 반발 심리가 작동하여 여자를 가해한 것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탈북녀들이 조선족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보편적 김포 통진읍과 경기도 부천에서 발생한 조선족 동거녀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두 여자는 모두 탈북녀이고 범인 두 명의 진술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여자가 나를 무시하여 홧김에 흉기로 가해하였다.” 다수 탈북녀들은 조선족남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그녀들은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잊는 것처럼 중국에서 조선족남자들의 신세를 헌신짝처럼 여긴다. 이북에서 배고픈 고생을 죽도록 하다가 중국에 와서 조선족과 살면 최저한도로 배불리 먹고 살았다. 조선족남자와 아이도 낳고 살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남한에 가려한다. 본래 탈북녀들의 목적지가 중국이 아니고 중국은 남한으로 가는 건널목쯤으로 여기고 임시 배고픈 고생에서 벗어나고 나중에 때를 기다렸다가 남한에 간다. 이 과정에 아이도 낳고 또 한국에 올 때 남자의 경제적인 도움도 받는다. 중국에서 조선족 남자와 살던 탈북녀들 중 한국에 온 후 처음에는 그래도 중국에서 낳은 아이를 잊지 못하고 남자에게 신세진 ‘빚’을 잊지 못해 한국에 호적을 올리고 데려오기 위해 초청한다. 이 과정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 수개월 혹은 1년여 걸린다. 그런 와중에 탈북녀는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정착금을 받아 아파트도 해결하고 직장도 구한다. 이쯤 되면 남한의 넥타이부대 사내들이 집적거리는 자가 많아지고 중국에 있는 시골 남자는 너무 촌스러워 헤어지려는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필자는 한 탈북녀가 애 아빠가 남한에 온지 3일 만에 촌스런 조선족 남자를 중국에 돌려보내기 위해 경찰에 위장결혼이라 신고한 사례를 상담한 적이 있다. 굳이 조선족 남자를 중국에 돌려보내려는 악의 선택은 하지 않아도 남한에서 만나 살게 되면 탈북녀들은 자신의 우월감으로 조선족남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와 같은 탈북녀들의 행위에 조선족남자들은 중국에 있을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해주었고 또 한국에 올 때 돈까지 대주었건만 나를 무시할 수 있느냐면서 격분해하고 종당에 가서 홧김에 동거녀를 가해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되는 말로 표현하자면 탈북녀들이 중국에 있을 때는 형편없는 을의 위치에 있다가 한국에 오면 갑이 되고 중국남자는 중국에 있을 때는 갑이 되었다가 한국에 오면 형편없는 을의 위치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갑이 된 탈북녀들이 을이 된 조선족남자에게 갑질의 횡포로 무시하고 있다. 참고로 탈북녀들이 중국에 두고 온 자기 아이한테 생활비를 보내는 사례가 절반도, 아니 십 중 팔구는 아이한테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여론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30대 중반 조선족 남자 한 분이 찾아왔다. 탈북녀가 중국에서 사경을 헤맬 때 구해주었고 의지할 곳 없는 그녀와 부부(법적 등록이 안 됨)로 동거하였고 한국에 오게 되니 인민폐 3만 위안에 한화 580만원 대주었다. 탈북녀가 한국에 와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 남자보고 한국에 오라 하여 왔는데 오자마자 헤어지자면서 피해 다닌다는 것이다. 위 당사자인 조선족 남자의 심정이 어떠할까? 독자들이 상상으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324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댓글:  조회:5624  추천:1  2015-01-03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도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까지 중국 도시골목마다 공용변소가 많았고 아침이면 줄 서 순번을 기다리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당시 연길시에 1천여 소에 달하는 공용변소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정확한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공용변소가 그만큼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중국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 분야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법적 인가를 받은 00꿍스(公司)가 자고 깨면 생겨날 정도로 우후죽순마냥 많이 나타났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당시 다수 꿍스(公司)들을 내실도 실적도 없고 하여 허수아비라는 뜻이 담긴 피바오꿍스(皮包公司)라 불렀고 꿍스(公司)의 법인(法人) 경리(經理)들을 빗대어 “경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고 비꼬았다. 당시 피바오꿍스(皮包公司) 중국식 경리들을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사장님들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사장님이 변소간보다 더 많았다”는 말이 성립된다. 중국에선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업체의 법인을 경리 혹은 규모가 크면 총경리라 부르고 규모가 굉장히 작은 업체 혹은 구멍가게의 법적등록인은 보편적으로 ‘라오반(老板)’이라 부르고 개별적으로 ‘짱꾸이(掌櫃)’라 부른다. 한국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다못해 부부가 운영하거나 심지어 혼자 운영하는 구멍가게 책임자조차도 전부 사장이라 부른다. 거기에 한국식 특유 경어를 붙여 ‘사장님’이라 부른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선 길가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할 경우 상대를 높여 사부(師傅)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이럴 경우에도 상대를 ‘사장님’이라 한다. 한국엔 ‘사장님’이 어떻게나 많은지 인파가 북적거리는 동대문상가에서 “감사장!”라고 부르면 열에 다섯이 머리를 돌린다고 한다. 이 경우 김씨가 많다는 말이 되겠지만 그만큼 ‘사장님’의 호칭이 남발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이란 호칭이 서로 다르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회장이란 호칭도 사용법이 엄청 다르다. 중국에선 계열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 오너를 ‘동사장(董事長)’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회장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중국에서 말하는 주임(主任)이 한국에선 회장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를테면 시골마을이나 도시 부녀회 책임자를 중국에선 ‘주임’이라 부르고 한국에선 ‘회장’이라 부른다. 정부기구도 중국에서는 인대(人大) 책임자를 중앙기구는 위원장이라 부르고 성급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주임이라 부른다. 화교사무실, 외사사무실 등등의 많은 기구의 책임자도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정부기구의 모든 직책에 거의 다 ‘장(長)’자를 붙이는 호칭이 보편적이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중국에선 가도(街道) 책임자를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장(長)’자를 붙여 ‘동장(洞長)’이라 부른다.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과 회장이란 호칭이 왜 이토록 다르게 사용되고 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사장이란 ‘사(社)’의 역사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고 또 회장이란 말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에 의하면 ‘社’는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한다. 그런데 아무 사람이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흙을 뫼어놓으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 부족이 조상을 기리기 위한 징표로 흙을 쌓아놓았고 그 징표를 중심으로, 즉 사(社)를 중심으로 족장이 백성을 거느리고 생산 활동을 진행하고 제사를 지내며 종교 활동을 하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회란 이 사(社)에 모여서 삶을 영위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社)’란 뜻이 워낙 이렇듯 거창하기에 중국역사엔 ‘사장(社長)’이란 말이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남발로 사용하고 있는 사장이란 호칭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본이 동양 삼국에서 서양의 근대화를 따라 배우는 선두에 섰고 많은 서양의 어휘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어낸 것들, 이를테면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등등이 일본이 지어낸 어휘들이 중국에 수출되었고 따라서 한반도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 중에 사장이란 호칭도 포함되어 있다. 변소를 화장실(けしょうしつ:化粧室)이라 하는 용어도 일본인이 지어낸 어휘이다. 일본이 사장이란 말을 지어낸 것은 중국식 번역인 서양식 꿍스(公司)를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에 결부시킨 결과였다. 즉 사람이 모여 기도 올리며 종교 활동을 진행하는 곳을 ‘신사(神社)’라 부르는 것처럼 사람이 모여 경제활동을 벌이는 업체를 ‘회사(會社)’라 지어내고 그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적인 용어인 사회를 거꾸로 하여 회사란 용어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즉 사회를 거꾸로 하면 회사가 되는데 사회는 ‘사(社)’가 포인트이며 사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뜻이라면 회사는 ‘회(會)’가 포인트로서 사람이 모여 ‘사(社)’를 꾸린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은 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여러 포기라는 표현을 빌려 ‘주식회사(かぶしきかいしや(株式會社)’라고 불렀다. 사장이란 호칭은 본래 이렇듯 주식회사 대표자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는데 지금 한국에선 구멍가게 주인, 길 가는 아저씨한테도 사장님이라 남발하고 있다. 회장이란 말도 중국역사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어휘인데 일본이 동양에서는 매우 낯설었던 서양의 상공회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조직의 책임자를 회장, 또 NGO단체 같은 사람이 많이 모여 시민 활동하는 조직의 책임자를 역시 회장이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영향에 의해 사장, 회장이란 호칭을 도입하였으나 중국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있는데 반해 한국에선 진짜 변소간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에선 큰가마밥 제도가 실시되던 인민공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불렀고 당시 사장이 관할하는 인구는 적어도 수천 명이었다. 또 신문사, 출판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기는 하였으나 사장보다 편집과 편제(編制)를 총괄한다는 의미로서 총편(總編)이란 호칭을 더 선호하였던 것이다. 신해혁명 전 역사에 없었고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사장과 회장 호칭을 적게 사용하는데 비해 한국에선 남발로 사용하고 있을까? 첫째 한국은 중국보다 일본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둘째 한국인은 멋을 추구하는 겉치레 문화를 즐기기 때문에 아무데나 무작정 ‘長’을 붙이기를 굉장히 선호한다. 셋째 양반과 상놈의 문화에 한이 맺혔던 한국인은 일단 ‘長’을 붙이면 출세의 의미가 다분하기에 사장, 회장을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유 민주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각종 비영리단체 등록이 쉬워지고 따라서 그 단체들을 협회라 부르는데서 회장이란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상기 한국사회 물에 듬뿍 젖어 역시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사장, 회장 호칭을 남발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업체를 꾸려봤자 무역업체나 제조업체는 매우 적고 또 대규모의 음식점이 없고 절대다수가 소규모의 음식점이나 식품상점 등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명함에 사장이라 박고 공중장소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스스로 ‘사장’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인은 보편적으로 스스로에게 사장을 붙이지 않고 “00를 운영하고 있는 00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자아소개 한다. 그리고 한국식을 따라 배워 영양가 없는 협회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 실체도 내실도 없이 회장님이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한조선족사회 다수 사장님, 회장님들은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 즉 한국에서 ‘長’을 스스로 붙이고 아Q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리하므로 무조건 나쁜 일이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323    개가 사나우면 술장사 망친다 댓글:  조회:5154  추천:2  2014-12-16
개가 사나우면 술장사 망친다 구맹주산(狗猛酒酸)   전국시대 송(宋)나라 사람 중에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는 술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고 손님들에게 친절하며 항상 양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보다 술이 잘 팔리지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마을 어른 양천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양천이 물었다. “자네 집에 개가 있는가?” “있습니다만” “그 개가 사나운가?” “네!” “그래서 술장사가 안 된다네.” “아니 개가 사납다고 술이 안 팔리다니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어린 자식을 시켜 호리병에 술을 받아 오라고 했는데 술집 개가 덤벼들어 그 아이를 물었소. 그리고 맛은 점점 시큼해지는 거요.” 한비자(韓非子)의 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나라를 위해 어진 신하(臣下)가 기용되지 못함을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즉, 아무리 옳은 정책을 군주께 아뢰어도 조정안에 사나운 간신배가 있으면 불가능함을 강조한 말이다. 여기서 간신배는 옳지 못한 실세를 의미한다. 요즘 전체 대한민국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다. 이른바 ‘땅콩 리턴’ 사건이다. 이번 사건은 재벌가에서 벌어진 못마땅한 일이라 국민들은 아마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싶다. 지난 12월 5일(금) 저녁 뉴욕발 인천행 대한항공 KE086 여객기가 게이트를 떠나 활주로로 향하고 있던 그 시각 VIP좌석에 앉은 한 40세 되는 여인에게 스튜어디스가 땅콩을 건넸는데 그 땅콩 때문에 세계 항공역사에 없는 지구촌을 웃기는, 아니 웃긴다는 표현보다 경악케 한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40세 되는 VIP여성은 다름 아닌 대한항공이 소속되어 있는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맏딸이자 대한항공 기내식을 관리하는 조현아 부사장이었다. 그녀는 승무원이 땅콩을 접시에 담아 손님에게 건네지 않고 봉치 채로 가져왔다고 한바탕 고함을 질렀다. 곁에 있던 다른 승무원이 저의 불찰이라 말하자 “넌 또 뭐야? 사무장을 불러 와.”고 또 크게 소리쳤다. 사무장한테 영문을 따지니 사무장이 긴장하여 대답이 어눌하자 그녀는 “이 XX야, 기장한테 비행기를 돌리라 하고 넌 내려.”라고 입에 담지 못할 상욕을 해대며 명령을 내렸다. 결국 비행기는 머리를 돌려 게이트로 돌아갔고 사무장이 내리고서야 다시 비행기가 뉴욕공항을 떠났다. 이 간단해 보이는 사건에 얽히고설킨 사연이 많고도 많다. 또 법과 관련된 문제제기가 만만치 않아 대한항공이 후폭풍을 거세게 맞고 있다.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언론은 한겨레였다, 사회적인 여론이 뜨거워지자 대한항공은 8일 저녁 늦은 시간에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사과문은 사과가 아니라 사단을 일으킨 조현아 부사장이 당연히 할 일을 했기에 아무 잘못이 없다고 두둔한 내용으로 가득 찼다. 그러니까 사과문이 조현아 부사장을 위해 변명하는 하나의 지극히 옳지 못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9일 하루 종일 대한민국이 떠들썩하게 여러 분야에서 대한항공을 공격하고 나섰다. 진중권 진보논객은 “여기가 북조선이냐?”고 발끈했고, 공지영 소설가는 “그 땅콩이 불쌍하다.”고 조현아 부사장의 행실을 꼬집었다. 국내언론들이 메인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CNN, 영국 BBC 등 유명 외신들도 한바탕 떠들었고 일본은 만화를 그려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비꼬았다. 어떤 외신은 심지어 “대한항공이 고려항공(북한 국영항공)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말레시아 에아아시아 항공 페르난데스 회장은 “우리 항공사는 땅콩을 봉지채로 승객에게 나눠주겠다.”는 말로 대한항공을 우회적으로 비꼬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사과문을 발표하지 않은 것보다 못했다. 옳지 못한 사과문은 오히려 국민들의 정서를 건드리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늘 그래왔듯이 사고는 총수일가가 치고 직원들의 입을 단속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건을 몰고 가려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 또 비행기를 돌린 것은 기장과 협의하고 내린 결정이었다느니 앞뒤가 맞지 않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다 여론의 물매를 맞은 9일 저녁 늦게 조현아 부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국제 IOC회의를 마치고 국내에 도착하자마자 인천공항 사무실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사과를 하고 동시에 조현아 씨의 대한항공 부사장 직무를 보직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매일 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문제는 조현아 부사장이 대한항공 기내식을 관리하는 부사장 직에서 물러났을 뿐 등기이사 자리와 호텔관리직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관심은 조현아 싸기 어떤 직에서 물러나고 어떤 직을 유지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사건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관심은 대통령도 할 수 없는 비행기를 함부로 회항시켰고 비행기 내 책임자인 사무장을 내리게 함으로써 250명 승객의 안전을 우습게 여긴데 대한 사과가 전혀 없다는데 있는 것이다. 요즘 조사에 의하면 이른바 ‘땅콩 사건’은 승무원이 매뉴얼에 따라 했기 때문에 잘못이 전혀 없고 조현아 부사장이 직권을 남용하여 생떼를 써 사단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과도 한 마디 없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는 것이다. 테러위협이나 갑자기 생긴 기상악화 등 승객의 안전위험성을 대비해 기장의 판단에 의해 비행기를 돌리는 사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비행기를 회항시킬 권리가 없다. 그래서 국토부가 이미 조사에 착수했고 참여연대는 조현아 부사장을 기장만이 갖는 권리를 월권하여 항공법과 항공안전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만약 위법행위로 판결나면 10년 징역도 가능하다고 한다. 국토부가 12일 조사에 응하는 출두를 하라고 통보하였으나 출두가 곤란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11일 오후 검찰이 대한항공 사무실을 압수수색을 실시하자 조현아 부사장이 12일 출두하겠다는 뜻을 검찰에 전했다. 매일 여론이 뜨겁게 들끓고 국민들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큰딸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리턴' 사건과 관련해 1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직접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조 회장은 "저의 여식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대한항공 회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국민께 진심으로 사과한다"면서 "너그러운 용서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이어 "조현아 전 부사장이 부사장은 물론 계열사 등기이사와 대표 등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국민들이 이번 사건에 분노하는 것은 재벌가의 고질적인 ‘갑의 횡포’ 때문이다. 조현아 부사장의 남동생인 조원태 부사장도 수년 전 70대 할머니를 밀쳐 넘어뜨려 고소당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갑의 횡포가 단지 대한항공의 총수 일가의 문제일까? 전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수 굴지의 기업문화가 직원들을 종을 부리듯 대하고 언어폭력은 기본이고 정신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총수 일가의 보편적인 횡포행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40년 내지 50년 전 정주영 회장시대 부하를 마음대로 발길질 하던 갑의 횡포가 요즘 조금 양식이 바뀌었을 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곧바로 양반과 상놈의 문화가 재벌가의 DNA로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조현아 부사장에 대한 형사적 책임추구가 결론이 어떻게 나든 대한항공은 그녀의 사납고 못마땅한 실세의 행실에 의해 대한항공뿐만 아니라 조현아 씨가 책임지고 추진 중이던 경복궁 부근 7성급 호텔 건설계획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큰 등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예측은 삼척동자도 빤히 알고 있는 사안이다. 요즘 재미한인사회에서 대한항공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후폭풍이 심각하다는 증거이다. 이번 사태는 기실 처음부터 잘 대체하였다면 이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줄 모르고 뻣뻣한 태도를 취하다가 여론의 물매를 맞아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요즘 들어 승무원은 폭언, 폭력을 당했다고 하고 조현아 씨는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여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려 한다는 지탄을 받고 있다. 대한항공의 잘못된 대응에 의해 사태는 갈수록 심산이다. 한비자의 개가 사나우면 술장사를 망친다는 ‘구맹주산’ 고사가 마치 조현아 씨의 사나운 행실이 개인 한공사가 아닌 대한민국 얼굴을 대표하는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사건을 두고 생겨난 것 같아 이 글을 정리해보았다.  
322    한국바람 너무 매도하지 말자 댓글:  조회:7712  추천:11  2014-12-07
한국바람 너무 매도하지 말자 재한조선족사회 현황과 전망 강의고   현실 떠난 허황한 구호들 6`7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연길아리랑방송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여성시대 심리상담 생방송 프로가 있었다. 방송에 출연한 심리상담자는 최선생이라 부르는 양반이었다. 청취자들이 전화 오면 해답해주고 조언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프로는 당시 처음으로 이와 같은 진행방식을 도입하여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청취자들이 자기 가족이 한국에 가 있다는 말과 자신도 한국에 갈 타산이란 얘기만 나오면 최선생이란 양반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한족들은 한국에 안 가도 당지에서 잘 살고 있는데 왜 조선족들은 한국에 가나? 당지에 남아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문화혁명 때 구호를 외치듯 소리높이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최선생이란 양반은 한국에 공무로 나들이 했던 분이고 자신은 한국에 가서 노무에 종사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여유가 있지만 절대다수 백성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한국행이 최선이란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소리만 치고 있는 모양새가 굉장히 아니꼽게 느껴졌다. 필자는 그 방송을 듣다가 ‘한국에 가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말리고 나선다면 당신이 그 집 아이 공부뒷바라지를 해줄 거냐?’는 생각이 떠올라 라디오를 꺼버렸다. 당시 최선생이란 심리상담자의 설득에 의해 한국행을 포기하고 당지에 남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정말 아라비안나이트(천방야담)와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족사회 분위기는 한국 때문에 중국조선족사회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정 파탄이 증가하고 자녀교육 문제가 발생한 핵심주범으로 한국을 꼽으며 한국이 ‘나쁜 나라’로 지목되는 분위기였다. 분명한 것은 한국정부에서 조선족 보고 한국에 오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행에 나선 것은 어디까지나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봇물처럼 한국행에 목숨까지 거는 상황에서 최선생이란 양반처럼 한국에 가지 말고 당지에서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주장은 진짜 호랑이한테 고기를 탐하지 말고 풀 뜯어먹고 살라는 권유와 같이 황당무계하다. 최선생이 방송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조선족의 한국행을 말릴 때 한국에 체류하고 있은 조선족이 10여 만밖에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70만에 육박하고 있다. 방송이 조선족의 한국행을 저지하는데 실패했고 메아리 없는 허무한 외침뿐이었다.   만약 한국바람이 없었더라면 조선족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20여 년의 코리안 드림에 의해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정파탄이 증가하고 자녀교육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바꿔놓고 생각한다면 만약 한국바람이 없이 농촌에 현재까지 묶여 살고 있다면 조선족생활수준이 어떤 형편일까? 소위 지각이 있는 양반들이란 분들이 흔히 한국바람 얘기만 나오면 이혼율을 들먹이는데 농촌이나 도시 밑바닥 조선족들이 한국행에 나서지 않고 가난 속에서 계속 헤맨다면 가정을 지킬 수 있었을까? 1990년도부터 연길에 가라오케와 나이트 바람이 불었다. 당시 유흥업소에 종사한 아가씨들은 농촌에서 온 처녀이거나 도시여성이라면 갓 결혼하였으나 경제사정이 너무 안 좋아 먹고 살기 위해 가난을 벗어나려고 천한 것을 알면서도 그 직업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결혼한 지가 오래지 않는 신혼신부가 유흥업소에 종사할까!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자기가 먹고살만하니깐 이와 같은 현장의 실제요해도 없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아가씨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 그녀들의 가정은 한국바람이 아니었다면 100% 깨졌을 것이다. 그나마 코리안 드림 덕분에 부부 일방이 먼저 한국행에 나서고 아이가 큰 다음 따라서 한국에 가서 합류하여 잘 살고 있는 부부도 있다는 것이다. 자녀교육문제도 마찬가지, 밑바닥 인생살이에서 헤매던 부모들이 한국바람이 아니고 째지게 가난하다면 자녀를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 있는 조선족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자녀교육이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경제시대에 한국바람 덕분에 자녀를 대학공부까지 마친 조선족이 수없이 많아졌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왜 못 보고 있을까? 경제시대에 가만히 농촌을 계속 지킨다 해서 조선족사회가 과연 행복했을까? 도시에서 구조조정에 의해 직장을 잃은 조선족들이 경제사정이 굉장히 어려운데 한국행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정이 저절로 지켜질 수 있었을까? 돈이 없는데 자녀교육은 부모가 곁에 있다고 해서 잘 되었을까? 흑룡강신문 연길 주재 00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필자는 동감을 표한다. “조선족은 한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런 일이며 마땅히 고마워해야 한다.” 몰론 부정적인 문제들을 무시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소질문제로 취업분야가 단순노무 위주 필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조선족사회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고향을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관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조선족이 고향을 떠나기 시작한 루트로서 우선 관내 진출이었다. 김치나 짠지 장사로부터 시작한 것이 부의 길을 창조하는 선택이었다. 그 후 1980년대 중 후반부터 러시아진출 바람이 일었고 1992년 중한수교를 계기로 한국기업 중국진출에 의해 취업길이 대폭 열렸고 한국관광객이 중국여행이 급증함에 따라 여행업종사자가 부쩍 늘었었다. 관내 진출이든 러시아진출이든 몸으로 때우는 품팔이 아니고 머리로 하는 일이 절대다수였기 때문에 그 당시 고향을 떠난 조선족들은 지능지수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여기도 저기도 가기 힘든 조선족들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때우면서 품팔이로 돈벌이 할 수 있는 루트는 오로지 한국행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재일조선족사회는 1980년 초반부터 유학생 주류로 형성되었던데 비해 재한조선족은 시골 농민 출신과 도시 밑바닥 생활하던 조선족들이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소질이 그 어느 사회에 비해 보편적으로 낮은 편이다. 재한조선족사회의 취업실태를 살펴보면 여성들은 음식점, 가사도우미, 간병인이 많고 남성들은 건설현장 일명 노가다 종사자가 가장 많고 제조회사에 근무하는 수가 많다. 요즘 3세들이 시청 구청 경찰공무원, 은행공무원, 연구기관, 학계, 대기업, 무역회사, 여행사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아직도 단순노무종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재한조선족 1세대들은 한국 올 때 보편적으로 10만 위안 정도 빚지고 왔기 때문에 한 달 두 번 휴무 직업을 선택하였고 그 두 날도 아까워 쉬지 않고 다른 직장에 파출을 뛰면서 정말 피땀으로 돈을 벌었다. 아무리 육신이 힘들어도 조선족사회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그 길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원망 없이 참고 견뎌 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요 몇 년래 재한조선족사회도 먹고 살만하니깐 한 달 4회 휴무 아니면 취직하지 않고 심지어 남편이 숙련공으로 돈을 잘 버는 아내들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정집에 출근하여 월급 100만원쯤 받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다. 일부 중국에서 교사했던 분들이 한국에서 교사로 채용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의 목소리가 있지만 필자는 한국에서 교사하려면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 및 소질 문제에 의해 시켜도 감당이 되지 않는 조선족이 절대다수라고 본다. 삼사십 대 결혼이민 조선족출신 여성들 중 일부가 한국에서 교사하는 사례가 꽤 되는데 그들은 한국에서 교대를 다녀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 교단에 서는 것이다.   문화차이와 소질문제로 직장생활이 어려워 문화차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자면 두 집단 사이 살아온 삶의 방식, 방법, 양식이 서로 다르다는 뜻인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간단명료하게 ‘활법(活法)’의 차이라고 표현한다. 조선족은 한반도 조상들의 문화도 소유하고 있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중국문화도 몸에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한국인과의 문화차이이다. 또 재한조선족은 다수가 농민출신이고 도시에서 왔다 해도 밑바닥 인생살이였기 때문에 서울과 같은 현대화 도시문명에 적응이 잘 될 수가 없다. 중국에서 비행기 타보지 못하고 한국에 온 수가 90% 이상 된다. 돈을 벌었으니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다녀오겠는데 비행기표 한 장 예약하려면 직원을 정말 짜증나게 한다. “중국 가는 비행기표 있나?” “언제 가시려고요?” “중국 어디로 가시는데요?” “편도를 요구합니까? 아니면 왕복입니까? 한 달 이내 아니면 6개월 이상짜리로 예약해 드릴까요?” 조선족한테 비행기표 한 장 팔아먹으려면 이렇듯 직원들이 수많은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좌석이 없다고 하면 서서 가는 표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한국 올 때 검은 배 타고 밀입국했다가 돈을 벌어 처음 비행기 타기 때문에 기차처럼 서서 가도 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종합 소질이 낮은데다가 한 때 중국에서 큰가마밥 먹던 의식이 몸에 배어 자본주의경제와 직장생리를 이해하지 못해 직장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한국 업주들이 조선족직원을 채용하면 가장 힘든 문제로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억양이 다른데다가 한국인은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말귀를 알아먹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눈치가 빠른 조선족은 빨리 적응하고 다수 조선족은 눈치조차 무뎌서 자꾸 직장을 바꿔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조선족은 다수가 성향이 직설적이어서 한국인직원들과 어울리는데 애 먹고 있다. 가령 한국음식점에서 한국아줌마들이 호박잎을 데쳐 쌈을 싸 먹으면 조선족아줌마들이 “한국 사람들은 잘 산다면서 별거 다 먹네, 우리 중국에선 호박잎을 돼지를 먹이지 사람이 먹는 법이 없다”고 쏘아댄다. 조선족아줌마의 말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상대와 불편해진다. 한국개그코너에 ‘불편한 진실’이란 프로가 있었듯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말하는 것은 트러블이 생기기 쉽다. 한국아줌마들이 조선족아줌마의 말을 듣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게 잘 살면서 왜 한국에 돈 벌려 왔나?”고 맞받아친다. 한국아줌마의 말도 사실이다. 앞뒤 말이 모두 진실이지만 이를 통해 서로 간에 앙금이 생기고 결국 힘든 쪽은 강 건너에서 굴러온 돌 신세인 조선족아줌마들이다. 또 조선족은 직장에서 가뜩이나 언어표현이 어눌한데다 중국은 전통 유교 국가이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쳐 예의 문화가 많이 깨져버려 언어를 비롯해 예모예절이 차해 흔히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문화에 적응 잘하려면 조선족밀집지역이 사라져야 필자가 아는 친구의 13세 되는 딸애가 중국 지방 교육국에서 조직한 방학 한국방문의 혜택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 친구의 집은 남구로역 근처였다. 딸애가 3일 지나서 서울에 가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아빠가 여기가 바로 서울이라고 하니 딸애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해불가의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다. 그 딸애의 상상 속의 서울은 가는 곳마다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고 굉장히 깨끗하고 굉장히 호화로운 현대화도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구로역 부근은 어떠한가? 고층 빌딩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50%가량 되는 조선족이 복장도 깔끔하지 못한데다 길거리에서 떠들어대고 가래침을 뱉고 술 마시면 길가에서 소리 질러대고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큰길을 중국처럼 맘대로 가로지르고 도처에 쓰레기들이 무단 방치되어 냄새가 진동하니 그 딸애가 상상하던 서울과는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차이가 컸던 것이다. 조선족밀집지역 일번지인 가리봉, 요즘 대한민국에서 조선족이 가장 북적거리는 대림동을 비롯해 중국음식점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섰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중국명칭으로 하면 복무원들이 음식그릇을 손님에게 던지는 식이고 서비스 질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음식 먹는 손님자체도 다수가 중국 사람들이며 먹고 난 식탁이 지저분하고 바닥도 담배꽁초를 비롯해 휴지조각들이 사처에 널려 어지럽기 말이 아닌 음식점들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쩍하면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은 음식점에서 자기네끼리 다투고 싸우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 속에 홀로 생활하는 조선족은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한다. 가리봉에 모임이 있어 간혹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생활에 물젖은 조선족이 남구로역 3번 출구에서 내리막길로 100미터 내려오면 가리봉3거리 횡단보도가 있는데 빨간불이어서 기다리면 맞은편에 마중 나온 친구가 “왜 빨리 건너오지 않고 뭐하냐?”고 소리친다. “빨간불인데 어떻게 건너느냐?”고 하면 “이 동네는 빨간불도 괜찮다. 그냥 무시하고 빨리 와라.”고 조른다. 이것이 조선족밀집지역 공공질서의 현주소이다. 대림역 7호선을 낀 대로 양측은 쓰레기가 지저분하기로 말이 아니다. 저녁마다 특히 주말마다 조선족 주정뱅이 너무 많아 택시 기사들은 이곳에서 손님 태우기를 매우 꺼려한다. 택시 안에서 금연인데 담배 피워 기사와 싸우는 사례는 흔한 일이고 심지어 택시 안에서 해바라기를 까고 바닥에 껍질을 버리는 조선족도 있다. 여러모로 볼 때 밀집지역 조선족은 앞으로 십년 이십년 더 살아도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릿고개를 넘어 소강수준(小康水準)에 이르러 이주민사회(재한조선족)가 타자세계(他者世界:한국)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우선 조건으로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재한조선족의 경제형편을 살펴보면 먹고 살만한 보릿고개를 넘어서 ‘소강’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코리안 드림에 나선 조선족이 중국에 집 한 채쯤은 거의 다 마련해놓았고 자녀공부뒷바라지, 가족 생활비를 대고 있었다. 조선족노무일군의 매년 송금액이 정부 재정수입을 초과한다는 얘기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있은 일이다. 문제는 한국 내에서 조선족들이 아직도 지하 혹은 반지하나 지상이라도 쪽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그 분들이 조금 더 쾌적한 방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여건이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체류문제가 확실히 온정 되지 못해 대한민국은 임시 스쳐지나가는 둥지이기 때문에 대충 엉덩이나 붙일 보금자리로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따라서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도 현대화 새것으로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건이 충분하나 아직도 중고를 사서 사용하는 수가 다수이다. 올해 여름 필자가 큰방 세 칸 1억2천만짜리 전세로 이사하니 주변사람들이 식구 둘이서 왜 그 큰집에 이사했는가? 못 마땅하다는 표정들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중국에, 그것도 살지도 않고 비워두면서 아무리 큰집을 사놓아도 아무 말들이 없는데 비해 한국에서 근사한 집에서 살면 이해불가라는 식이다. 뭘 말해주는가? 아직도 조선족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그냥 임시 돈벌이 하는 곳으로서 진정한 둥지의식이 없다는 증거이리라. 갓 입국한 젊은이들 전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닐 정도로 여유로워졌지만 현재 한국에 내로라하는 조선족기업가, 사업가가 없는 실정이다. 기껏해야 음식점운영으로 돈을 꽤 번 조선족의 수는 많을 수 있으나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큼 성장한 기업가나 사업가는 없는 실정이다. 이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취미생활이 풍부해져 이주민사회가 타자세계서 성공하는 두 번째 조건이 바로 문화적으로 적응이 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적응은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이주민집단의 문화생활이 풍부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타자세계 문화에 적응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먹고살만한 여유가 생기면 취미생활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기 때문에 각종 취미생활이 풍부해졌다. 가령 축구를 좋아하는 자는 축구단체, 배구를 즐기는 자는 배구협회, 민속장기를 좋아하는 자는 장기협회에 가입하고 등산, 낚시, 심지어 제기차기 동호회까지 생겨나 주말이면 각자가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가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동포축구협회, 동포배구협회, 동포장기협회 등세 가지 단체이다. 축구협회는 산하에 30개 축구단이 있고 해마다 리그에 참여하는 팀만 해도 14개나 된다. 배구는 한국 측 생활체육에 포함되어 각종 시합에 많이 참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민속장기는 올해로 5회째 큰 대회를 치렀는데 해마다 참석자가 120명에서 150명이다. 조선족장기수준이 너무 높아 한국 프로9단들을 가볍게 누르고 해마다 공식적인 시합에서 우승을 싹쓸이 하고 있다. 한국문화 적응은 주로 공공질서문화 지키기인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재한조선족은 공공질서의식이 굉장히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정치참여가 저조하다 정치참여가 활발해야 한다는 것이 이주민으로서 타자세계에서 성공조건의 세 번째 요소이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의 정치참여는 어떤 형편일까? 한국은 선거정치이다. 선거는 투표에 의해 이뤄진다. 재한조선족의 정치참여, 즉 투표정치가 저조하다. 현재 대선이나 총선 선거권이 있는 자를 유권자라 표현하는데 한국국적 취득자를 의미한다. 그 외 영주권자나 재외동포비자로서 3년 이상 주소변경(타시 타구) 없이 거주자는 지자체단체장 선거권이 있다. 현재 조선족출신 국적자는 대략 13만이고 영주권자가 7만, 재외동포비자 20만 정도이다. 국적자 가운데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갔다가 후에 한국에 와서 국적을 회복한 조선족 분들 가운데 대한민국을 진짜 사랑해서 국적을 회복한 경우가 많지 않고 수년 전까지만 해도 자녀들이 한국에 오기 힘드니까 초청자격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국적 회복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 분들 중에는 차남이 한국에 있다면 장남은 몇 해 전 밀입국 혹은 위명여권 사용경력 때문에 입국규제에 걸려 한국에 오지 못해 속 태우는 분들이 꽤 된다. 그리고 이 분들의 거주환경은 거의 다 지하 반지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언제 재한조선족문제에 관심 갖고 신나서 양복에 넥타이 챙겨 매고 투표장에 갈 겨를이 없다. 또 결혼이주민 조선족출신여성들은 다수가 한국 속에서 살고 있으며 재한조선족사회에 아예 관심이 없다. 이 부류도 투표에 관심이 별로 없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투표에 나서는 수가 극히 저조하다. 문제는 선거 때마다 조선족출신 유권자들의 표가 선거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다면서 정치권에서 조선족사회를 이용하고 있거나 일부 조선족들이 정치권을 이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의 정체성 재한조선족은 입국한 지가 오래지 않은 자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10여 년 살아도 한국을 할아버지 고향, 한국인을 같은 핏줄이란 의식이 아주 미약하며 한국과 한국인을 보는 입장이 다수가 중국과 중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아직도 한국에 오랫동안 살아도 중국에 대한 감정이 한국에 대한 감정보다 더 깊다는 것이다. 그 주요 이유가 아마 중국소수민족정책 덕분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 다수는 대국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김호웅 교수는 ‘사과배’ 논리로 풀이하였고 정판룡 교수는 ‘며느리론’을 주장하였다. 두 분 모두 훌륭한 분이고 또 모두 조선족정체에 맞는 이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한국 분들은 필자에게 조선족정체성에 대해 많이 질문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한다. 5년 전 연길에서 족저안마(足底按摩)방에 간 적이 있다. 큰 가게였는데 마담한테 조선족아가씨가 있는가? 물었더니 40여 명 아가씨 중에 조선족 둘 있긴 한데 일하고 있는 중이라 대답하였다. 그럼 한족아가씨도 좋다고 말했다. 필자는 한족아가씨 안마사 앞에서 한마디 입을 연 적이 없는데 10여 분 지나 “당신 조선족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네가 어떻게 아냐?” “행동거지를 보면 한족인지 조선족 손님인지 안다.” 그 아가씨의 말에 의하면 한족 손님은 보편적으로 윗옷과 바지를 벗어 빈 침대에 던져 놓거나 아무렇게 놓고 싶은 곳에 놓는데 비해 조선족 손님은 옷을 반드시 옷거리 찾아 걸어놓는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 행위만을 보더라도 어느 민족인지 자신은 쉽게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정체성이란 거창하게 풀이하자면 거창해지고 쉽게 풀이하면 쉬워진다. 필자는 한국인들 앞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정체성이라고 대답해준다.   재한조선족사회 전망 과거 재한조선족 1세대들은 거리에 나서거나 공공장소에 나타나면 촌스러운 티가 물씬 풍겨 입을 다물고 있어도 한 눈에 조선족이라고 짚어낼 수가 있었다. 현재 젊은이들은 한국젊은이들에 비해 외관상 차이가 없다. 외모만 보고 한국젊은이인지 조선족젊은이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어릴 때부터 안방에서 한국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성장하였고 가령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도시에 가서 자랐거나 일부는 한국회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 1세대들과 달리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외관상 세련되었다고 해서 머리까지 세련된 것은 아니다. 한국문화에 적응하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구해 근무하는 사례는 늘고 있지만 한국 주류사회 진출은 아직도 먼 이야기이다. 그리고 재한조선족이 70만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이는 굉장한 집단이다. 문제는 이 굉장한 집단을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이다. 70만의 집단을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되려면 도덕적으로 검증이 되어야 하고 학식도 갖춰야 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리더가 현재 없다는 것이다. 한 이주민사회 리더는 유학생출신, 언론인, 기업가, 종교계에서 배출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수교 직후 조선족출신유학생(석`박사)을 한국에 남을 수 있게 만든 시점이 겨우 2008년 1월부터이니 6년이란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6년 동안 무슨 큰 인재가 배출될 것인가? 다음 재한조선족을 상대로 하는 언론들은 보편적으로 학벌이 낮고 경제적으로 아침을 먹으면 점심 걱정을 해야 하는 경제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배출되려면 아직도 먼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재한조선족사회에 리더다운 리더가 나타나고 기업가다운, 사업가다운 훌륭한 분들이 배출되려면 아직도 삼사십 년의 세월이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한국생활에 정착하려면 의식전환이 이뤄져야 재한조선족 다수한테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냐 물으면 중국에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돌아가는 조선족은 극소수일 것이다. 3년만 벌고 간다. 5년 만기 되면 때려죽여도 한국에 있지 않고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던 조선족도 만기가 도래하면 어떻게 하면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을 수 있는가는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다. 2012년 4월 11일부터 실시한 국가공인 기술자격증을 취득하면 재외동포비자로 변경해준다는 정책이 발표되자 재한조선족사회는 천지개벽이 일어날 정도로 학원가에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2012년과 2013년 말 금속재창호 자격증시험에 도전한 조선족이 2만4천명이고 합격률이 50%미만이었으니 1만 명쯤 이 한 가지 항목으로만 재외동포비자를 발급받게 되었다. 그 외 요리, 미용, 제빵제과, 세탁 등 많은 항목에 도전하여 재외동포비자 자격을 얻은 수도 수만 명에 이른다. 재외동포비자변경에 힘쓰지 않는 조선족이라 해서 만기가 되면 고향에 돌아갈 것인가? 아니다. 한국정부는 재입국정책을 계속 실시하여 본인이 원한다면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다. 수년 전 필자는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조선족이란 주제로 연변여성 잡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때 돌아가지 않는 이유에 관련해 상세하게 밝혔기 때문에 여기서 중복하지 않겠다. 사람들은 흔히 재한조선족사회에 국회의원이 배출되면 마치 획기적으로 바뀔 것처럼 부풀어 있는데 필자는 국회의원이 5명 10명 나와도 재한조선족사회는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재한조선족사회가 바뀌려면 국회의원 배출보다 개개인의 의식전환이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우리를 무시하면 자꾸 한국 사람이 나쁘다고 나무라지 말고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고 무시당하지 않도록 자질제고에 힘써야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영원한 진리이리라. 개개인의 자질제고 동시에 한국에서 살아갈 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한조선족사회는 보험가입의식이 미약하다. 노후나 갑자기 병이 나는 것을 대비해 각종 보험가입에 준비하는 등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다수가 모임만 있으면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양꼬치집 가고 그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여가문화 즐길 거리를 개발하여 옛날 코스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문명한 삶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클 것이다. 또 재한조선족은 이제는 한국에 돈 벌러 왔다는 생각에만 빠져버리지 말고 한국인처럼 돈을 버는 동시에 나의 삶을 어떻게 하면 보다 문화적이고 질적으로 보내겠는가에 신경을 쓸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으면 정신적으로도 여유로울 줄 알아야 삶이 보람이 있을 것이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이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 최선의 길이리라. .  
321    "재기 재기 옵소" 댓글:  조회:5377  추천:2  2014-11-18
“재기 재기 옵소” 인상 깊은 제주도 특산 조랑말과 감귤   “재기 재기 옵소”는 “얼른 얼른 오세요”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제주도에서 2박3일 동안 유람하면서 그 많은 관광지 가운데 유일하게 조랑말에 대해 설명하는 곳과 감귤체험 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구수한 제주도 지방사투리이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바람 많고, 여자가 많고 돌이 많은 삼다도이며 토지가 황량하고 척박하여 농사가 되지 않는 고장이다. 기자가 2박3일 돌아다니는 동안 곡식밭을 보지 못했고 야채도 무 한 종류만 있고 기타 종류는 보지 못했다. 간간히 푸른 말농장과 무밭과 서귀포 감귤나무가 눈에 안겨올 뿐 나머지는 전부 황무지였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홍콩시민들처럼 육지에서 공급하는 곡식과 야채를 막고 산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였고 물류 유통이 잘되어 제주도에도 없는 것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땅에서 먹을 것이 나지 않으니 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에 해녀가 유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얼마 전에 00지상파 방송에서 제주해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92세 할머니가 아직도 건강한 모습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해녀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90 넘는 고령에 아직도 해녀생활 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의료진의 검진에 의하면 92세 해녀할머니의 뼈가 생리상 50대 여인의 뼈와 같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바로 제주도 특산인 조랑말뼈를 자주 고아먹은 덕분이라는 것이다. 조랑말은 보통말보다 키가 조금 작은 편이다. 세상의 동물 치고 잠을 서서 자는 것까지 포함해 날씨가 좋던 굳던 사시절 내내 평생 누워 있는 법이 없는 동물이 바로 제주도 조랑말이라고 한다. 조랑말 평균 수명이 30세라고 하니 30년 동안 한 번도 눕지를 않고 서서 생활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기타 말이나 소는 팔다리뼈들이 두 개로 뻗어 있는데 비해 조랑말뼈는 통뼈라고 한다. 일 년 사시절 평생 서 있으니 조랑말뼈가 얼마나 단단할 것인가? 가히 짐작하고도 나머지가 있을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이 약재로 좋은 자료이다. 조랑말뼈는 250도 고온에 48시간 고으면 사골을 우린 것처럼 우윳빛이 나고 기름기가 풍부하다. 당지 사람들은 소뼈를 우린 소탕을 마시듯 마실 수 있으나 보관상 편리를 위해 지금은 환을 지어 병에 넣고 먹는다. 이렇게 하니 먼 곳에로의 이동이 편리해져 서울을 비롯한 한국 내 방방곳곳 사람들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이 구매하가고 있다. 조랑말뼈는 관절염, 골절, 오십견, 골다공증 등 뼈가 문제가 있거나 부실한데 모두 사용되며 효과가 뛰어나다. 제주도 한 민속마을은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정부에 ‘해체신청’을 제출하였는데 정부에서 300호나 되는 큰 마을의 해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연간 50억 원씩 지원하고 있다. 정부가 거액의 돈을 지원하는 이유가 바로 조랑말 보호 때문이라 한다. 지금 이 민속마을은 나라 지원에 의해 협동농장 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 마을 도민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만큼 많이 향상되고 있다. 제주도 감귤이 유명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전체 제주도에서 감귤농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귀포 일대에만 재배가 가능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예로부터 감귤 농사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해왔다. 광복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식을 출세시키려고 열심히 감귤 농사를 지어 뒷바라지를 해왔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부른다는 속설까지 생겨났다. 감귤나무는 성인의 보통 키를 넘지 않을 만큼 작다. 한 나무에 달리는 숫자가 많아 매우 탐스럽게 보였다. 감귤 수확은 절대 손으로 사과나 배처럼 송치 채로 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위로 송치를 자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듬해에 열매가 맺지를 않는다고 한다. 제주도 감귤은 맛이 좋아 한국 내 육지에서 선호할 뿐만 아니라 국외에로 수출하고 있다. 감귤 농사도 현대화시대에 맞게 협동조합 식으로 운영하여 판로를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감귤쵸콜렛을 비롯해 식품도 만들어 상품화시키고 있어 수입이 짭짤하다. 감귤 농사를 짓는 협동조합에서는 균을 재배하여 몸의 독소를 제거하고 장을 청소해주고 면역력을 높이는데 일품으로 꼽히는 상황버섯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판로가 굉장히 좋다. 제주도 특산품을 정리하면 상황버섯, 조랑말뼈, 동충하초가 유명하다. “재기 재기 옵서”를 반복해 다그치는 조합의 간부 안내 말에 의하면 이 특산품들은 중국관광객 즉 유우커(遊客)들이 굉장히 많이 사 간다고 한다. 제주도를 찾는 중국인관광객은 연간 3백만 명을 넘기고 있다. 관광지마다 중국인관광객으로 차고 넘치고 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투자자들이 자고 깨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본래 5억을 투자하면 영주권을 부여하는 혜택이 최근 들어 돈 들고 오는 중국인 투자자가 너무 많아 법을 고칠 것을 검토 중이라 한다.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오는데 대해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제주경제발전에 도움이 크다는 주장과 중국인투자가 급증하면서 난개발 우려와 자본독식 우려가 깊다는 주장이 팽팽하다. 중국인관광객이 떠들고 질서를 지키지 않고 아무데나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 매너가 좋지 못한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는 아일랜드호텔에 묵었는데 아침 식사(뷔페) 때 남방여인으로 보이는 한 여사가 한참 음식을 먹던 도중 접시와 젓가락 들고 음식코너에서 서성거리더니 생선구이를 한 점 자기 젓가락으로 집어 코에 대고 냄새 맡더니 도로 놓는 것이었다. 분명히 음식코너엔 공용 집게가 비치되어 있건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입안에 들락날락거리던 젓가락으로 집고 또 코에 대고 냄새까지 맡고는 도로 놓아버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음식 맛이 사라져 굶다시피 하였다. 제주도관광은 본래 천연자원을 우세로 하는 자연관광이 주류여야 하는데 요즘 인위적인 관광지가 많아 조금 식상했다. 유리성, 선녀와 나무꾼, 폴니벨리, 서커스 등 인위적인 것들이 매우 많았고 서커스는 중국인오락이고 폴니벨리는 몽골기마기교를 보여주는 코스였다. 우리민족 전통문화 오락관광은 제로여서 아쉬웠다. 좁은 제주도가 미어터질 지경으로 관광객이 많이 몰려오고 있지만 그들 중 절대다수는 재차 찾지를 않는다고 한다. 일회성 관광으로 그친다면 무궁무진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수가 다시 오고 싶게 만들어야 아름다운 제주가 영원히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附說 : 이 글이 2014. 11. 17일자 아침시간에 발행된 중국동포타운신문 283호에 실렸는데 점심때쯤 독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독자 왈, “저도 작년 여름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호텔에서 아침식사 때 불쾌한 일을 겪었다. 음식코너 앞에 줄지어 선 중국아줌마들이 어찌나 큰소리로 떠드는지, 떠드는 것은 중국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어떤 아줌마들의 입에서 침이 튕겨 나왔고 그 더러운 침이 고스란히 음식에 발사되고 있었다. 그 불미스런 광경을 목격하고 몸을 돌려 나와 버렸다. 배는 고프고 하여 할 수 없이 마트에서 빵을 사 갖고 아침식사로 때웠다. 2박3일 여행인데 도착한 이튿날 아침에 불쾌한 일이 생겼고 나머지 시간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다시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다.” 필자는 중국인관광객이 해외에서 매너가 좋지 못하면 국가 이미지에 손상되는데, 이 점을 감안하여 중국여유총국에서 중시를 일으키고 해외관광에 나서는 유우커들에게 기초공공질서 교육과 매너 지키기 교육을 실시하면 좋지 않을까라는 바람을 갖고 있다.
320    영화 소리굽쇠 주인공 왜 죽였을까? 댓글:  조회:5716  추천:0  2014-10-28
영화 소리굽쇠, 주인공을 왜 죽였을까? 영화 제작사들이 연변거리라 부르는 조선족밀집지역 일번지 가리봉에 와서 영화를 많이 찍어 시사회 참가 초청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한 번도 가지 않다가 조선족1급 배우 ‘쑤이러우(水肉)’로 소문난 이옥희 씨가 조선족으로 처음 한국영화에 캐스팅 된 영화 시사회 초청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10월 23일 서울 왕십리 CGV에서 영화 소리굽쇠 시사회가 있었다. 시사회에 참석하는 것은 영화관에 개봉되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는 특권이 있으나 특권을 향수하는 대신 홍보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의무가 있다. 기자의 신분으로 참석하였으니 소식보도 식으로 기사만 쓰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필자는 조선족 위안부 할머니(이옥희)의 파란만장한 삶의 고통과 손녀 향옥(조안)의 코리안 드림을 담은 스토리로 만들어진 영화라 기사도 기사지만 영화평을 써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한국에서 위안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것은 여러 편 있었지만 영화로는 소리굽쇠가 처음이라는 것, 조선족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이기 때문에 조선족 배우가 출연하여 공감을 진실성 있게 느끼게 되는 것, 감독을 비롯해 배우와 스탭 전원이 재능기부로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것 등등의 의미가 있다. 일제 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천진난만한 소녀가 일본순사한테 속이어 만주 방직공장에 취직되는 줄 믿고 따라 나선 것이 일본군 위안부 생활의 시작이었다.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면서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족 할머니로 중국 흑룡강성 오지에서 살아왔다. 할머니에겐 유일한 핏줄로서 손녀 향옥이다. 향옥이는 중국 심양에서 통역 일 하다가 한국에 어학연수 기회가 생겨 코리안 드림의 꿈을 안고 입국한다. 향옥이는 통역사 공부하는 한편 조상의 연줄로 귀화수속을 밟는다. 이 과정에 신원보증을 선다고 나선 한국인이 돈을 사기치고 사라져 절망하게 된다. 귀화하면 할머니를 한국에 데려가겠다던 약속이 물거품이 되자 귀국하려고 서두른다. 이 때 덕수(김민상)라는 한국인 노총각이 나서 향옥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덕수는 할머니 소녀 때 첫사랑으로 좋아하던 동네 오빠의 손자이다. 향옥이가 한국에 떠날 때 할머니가 자신의 첫사랑 영감을 찾아보라고 부탁하면서 60여 년 간직해 오던 소리굽쇠를 목에 걸어준다. 마침 덕수 총각도 소리굽쇠를 간직하고 있어 과거 할머니가 맘에 품고 살아온 분의 손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덕수 아버지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피해자이다. 원폭이 덕수 가족에게 남긴 피해가 영화에서 드러난다. 덕수가 향옥이를 설득하여 한국에 남게 하고 두 사람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덕수는 시골에서 딸기 농사를 지으면서 심성이 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의 열매가 생겨 향옥이가 임신한다. 허나 태아가 뱃속에서 죽는 비극을 맞이한다. 원인이 바로 덕수 아버지가 원폭피해자인데 아들에게까지 후유증이 미쳤던 것이다. 덕수가 절망하여 망가진 모습으로 일인시위도 해보고 하다가 향옥의 곁으로 찾아온다. 잘 살아보려고 결심하는데 동네 양아치들이 국제결혼한 조선족여성들의 흉을 보는 소리 듣고 참지 못하고 싸우다가 죽는다. 부부가 알콩달콩 깨알 쏟아지게 잘 살고 있을 무렵 출입국 공무원이 덕수의 집을 방문하여 위장결혼여부를 확인한다. 진짜 결혼이 맞냐를 확인하려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훑어보며 하는 소리가 “요즘 국제결혼 온 여성들을 믿지 마라. 돈 관리를 마누라에게 맡기지 마라.”는 등 마뜩치 않는 말들을 늘여놓고 사라진다. 덕수가 죽자 출입국 공무원이 또 나타나 향옥에게 출국명령을 내린다. 남편이 죽었으니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에 불법체류자가 되기 전에 출국하라는 것이다. 남편이 죽자 향옥이는 재산을 정신대연구소에 기부하고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식당을 운영하는 남편 의형제한테 인사하고 귀국하려고 찾아갔는데 문밖에서 출입국 공무원의 “요즘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들이 남편의 재산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죽었으니 지금쯤 오디서 좋아 웃고 있을 것이다. 다시 이 가게에 나타나면 제보하라. 중국에 추방하게.”라는 억울하고 한심하고 괘씸하기 그지없는 말을 듣게 된다. 향옥이는 이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절망을 느끼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정처 없이 걷고 걷다가 다리 위에서 화물차에 치여 젊은 생을 마감한다. 너무 슬프다. 코리안 드림이 너무 슬프다는 얘기다. 주인공인 조선족 젊은 여성을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가? 살릴 수는 없었을까?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 절망에 빠져 자결하려고 한강에서 투신하려고 할 찰나 평생 자기(손녀) 하나만 바라보고 모진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오신 할머니가 눈에 밟혀 멈추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재기에 성공하려고 이를 악문다. 학원에 계속 다니고 통역사의 꿈을 이뤄 한국에서 맹활약하는 해피엔딩으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예술을 모르는 나의 천박한 생각일 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리굽쇠를 포인트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감독의 설정에 주인공 향옥이가 죽기로 되어 있는지 모른다. 소리굽쇠의 특성을 보면 할머니 일생이 불행하니 덕수 가족도 불행했다. 남편 덕수가 죽으니 아내인 향옥이도 죽는 게 맞는 것 같다. 이것이 곧 예술이다. 내가 아무리 코리안 드림이 너무 비극적으로 묘사되어 영화가 아쉽다고 외쳐도 무가내다. 그렇다면 소리굽쇠란 어떤 존재일까? 소리굽쇠의 특성을 모르면 영화가 도대체 어떤 판국인지 이해할 수 없다. 영화란 처음을 조금 보면 결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면 그건 예술이 아니다. 시종 아리송하다가 웬 막판에 무릎을 치며 그러면 그렇지가 나와야 진짜 예술적으로 잘 된 영화이다. 소리굽쇠 영화 예술 묘기가 또 하나 있다. 향옥이가 코리안 드림이 비극적으로 끝나자 고향 집에 돌아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영화 첫 시작 화면이 향옥이가 밧줄에 목을 매는 것으로 전개된다. 중간 중간 때때로 향옥이가 밥을 먹지 않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는 장면이 나오고 할머니가 너무 속상해 듣지 않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다가 영화 끝날 무렵 한국에서 유골함이 날아온다. 마지막 화면은 할머니가 향옥이한테 너를 먹이려고 씨암탉을 잡는다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렇다면 처음 화면부터 끝날 무렵까지 향옥이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돌아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심할 때엔 밧줄에 목을 매는 장면들은 현실일까? 할머니의 꿈(환각)일까? 할머니가 위안부 생활하면서 겪은 고통이 너무 심하고 후에 한족 사내와 살면서 더러운 기생이라는 욕을 먹으며 모진 매 맞던 고통 때문에 몸은 살아 있어도 정신은 이미 죽어 영혼이 떠도는, 꿈과 현실이 망각되는 비몽사몽 속에서 살아가는 비극,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예술묘기이다. 관객들이 이 예술묘기를 알아내려면 역시 소리굽쇠의 특성을 파악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배우들의 언어표현이다. 쑤이러우 배우의 구수한 연변말도 좋았지만 향옥이 배우를 맡은 조안 씨의 연변말 구사가 오리지날 연변말에 가까워 칭찬하고 싶다. 과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변말 한다는 것이 평양말 본 따 어색하기 그지없는 연변말이랍시고 스크린에 올리고 가정 집 안방을 휘저은 사실이 메스꺼울 정도로 거부감을 느꼈었는데 소리굽쇠 영화는 연변말 구사가 잘 되어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어 좋았다.
319    중도입국은 중간낭패 댓글:  조회:5435  추천:0  2014-10-18
재한중국동포 자녀의 조기 적응을 위한 교육방안 동덕여대와 재한동포교사협회 공동 주최한 재한조선족 자녀교육 관련 세미나 발표문 학생교육은 학부모, 학교, 사회 등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삼위일체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가령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어느 한 가지가 부실해도 교육을 망칠 확률이 높다. 학생교육이란 이와 같이 엄밀한 구조를 요구하지만 현재 재한중국동포 자녀교육은 세 가지가 모두 결핍해 있으니 조기 적응하는데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소질문제 우선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은 절대다수가 농민 혹은 도시 밑바닥 생활환경에서 지내다가 코리안 드림에 의해 대한민국에 왔기 때문에 그들의 소질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비록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를 공부시킨다,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키는 민족 교육전통 정신은 확고하나 현대화 교육에 따른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중도 입국 자녀의 부모들이 한창 방황하기 쉬운 연령대 자녀가 한국에 와서 부모의 도움으로 조기 정착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들은 조리 있게 자녀 안착을 돕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니들 중국에 가든지 한국에 남든지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는 식의 닦달에 의거해 억지춘향 식으로 남게 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부모가 자녀를 한국에 데려왔는데 아이가 3일 지나 서울이 어디 있는가? 물었다. “여기가 서울이다”라는 대답에 아이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고 한다. 동포밀집지역이 고층건물도 별로 없는데다 더럽고, 어지럽고, 떠들고 하는 환경이 아이들이 꿈에 그리던 서울과는 십만팔천 리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부모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는 어설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많이 발달해 있다는 것을 많이 부각시켜주어 아이를 안착케 해야 한다. 이런 교육이 따라 가지 못해 아이 눈에 비친 어설픈 한국모습이 머리에서 맴돌아 안착하지 못해 공부는 더 말할 것 없이 떨어지고 있다.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소통문제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로서 소통을 들 수 있다. 조선족 학부모들은 자녀를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보내놓고 학부모끼리 소통이 이뤄져야 자녀교육에 도움이 되겠으나 그렇지 못해 아이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통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조선족 학부모들이 한국여성에 비해 지적 수준도 떨어지고, 사회를 인지하는 능력도 부족하고 언어수준도 부실하기 때문에 한국학부모들과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소통이 없는 상황이다. 간혹 같은 조선족학부모끼리 소통하고 있으나 이는 자녀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또 학부모끼리 소통도 문제이거니와 교사와의 소통도 문제가 있어 자녀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대안제시 : 조선족학부모들에게 소양교육과 소질제고 교육을 정기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재한동포교사협회가 꾸린 주말학교는 학생교육만 진행하지 말고 마땅히 학부모교육을 병행해야 중국동포 자녀 조기적응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신문사와 같은 언론기관의 도움으로 학부모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사회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다. 주거환경문제 코리안 드림 20여 년이 되어 재한조선족사회는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한 보릿고개를 넘어 조금 여유로울 뿐 쾌적한 주거환경을 마련하여 자녀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선족의 수가 아직도 극히 적은 숫자일 것이다. 중도입국 자녀의 학부모 중 적지 않는 수가 아직도 쪽방이나 원룸, 심지어 반지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마이너스 작용을 하고 있다. 자녀교육은 학교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정거주환경도 매우 중요하다. 쪽방이 탐탐한 분위기이고 햇빛 보지 못하는 반지하 방은 아이들이 흔히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아이를 한국에 데려다 공부시키려면 적어도 아이 공부방을 따로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온 집 식구가 한방에서 뒹굴면서 아이한테 공부 잘하라고 닦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 아니 다수 조선족은 아직도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중국에 돌아갈 것이냐는 방향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중이 종치듯 하루하루 그럭저럭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인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쾌적한 집에 이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심지어 아이는 데려왔으나 비좁은 방에서 TV를 비롯해 중고 가전제품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구차한 생활을 보내 자녀한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안제시 : 자녀를 한국에 데려온 재한조선족 부모들은 하루 빨리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중국에 돌아간다면 하루속히 돌아가 자리 잡든가, 아니면 한국에 남아 생활하고 싶다면 하루 빨리 쾌적한 주거환경을 마련하고 아이 조기적응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맞춤식 교육이 효과적 교육방식 한국에서 태어난 중국동포자녀의 경우 한국학교에 다니는 것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점차 성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을 수 있겠으나 조기정착이 문제로 대두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중도입국 중국동포 자녀들이다. 이들은 중국 문화 환경과 생활환경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한국 적응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학교가 따로 설립되어야 한다. 그 명칭은 조선족학교 혹은 동포학교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립 가능성 여부가 중요하다. 필자가 조선족 학교를 고집하려는 이유는 중도입국 자녀들이 한국학교에 입학하면 문화적인 갈등과 생활상 갈등을 겪는 외에 중국어를 배우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지 못해 안달 떠는 마당에 중국국적 아이가 한국에서 중국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을 것이다. 또 중국국적 아이가 중국역사를 배우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중국국적 조선족 아이가 한국에서 중국어와 중국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면 장차 중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로 거듭날 수 있다. 맞춤식 교육의 성공사례로서 화교학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화교들은 자녀가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민족의 문화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화교학교를 설립하여 대대로 교육을 진행하여 뿌리의식을 키우고 이중 언어 및 삼중 언어교육을 받아 우수한 인재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 대안제시 : 정부와 관련가관을 설득하여 주말어울림학교를 필두로 점차 확대되어 조선족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 불안정한 체류문제가 조기 적응에 있어서 걸림돌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다수는 체류자격이 방문취업 비자(H-2)이다. 2012년부터 국가공인 기술자격증 취득자는 재외동포비자(F-4)로 변경해주어 대폭 증가하여 현재 조선족 재외동포비자 소지자가 2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 외 결혼이민자, 영주권자와 국적취득자 등등인데 이 또한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방문취업비자는 만기가 있어 재입국정책에 의해 일정기간 중국에 가 있어야 하는 유예기간이 있어 자녀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친다. 재외동포비자 다수는 불법취업에 종사하고 있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언제 단속에 걸려 벌금내야 할지, 두 차례 넘으면 강제추방 당한다는 불안감으로 살아가고 있는 학부모가 적지 않다. 국적자를 제외한 모든 비자 중에 과거 위명여권 사용 전례가 있는 학부모들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언제 강제퇴거조치를 받을지? 적어도 재입국 정책에 따른다 해도 중국에 가서 1년 혹은 6개월 머물러야 한다. 국적자 중에도 과거 신분과 현재신분이 일치하지 못하면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결론적으로 학부모들의 체류가 보장되지 않는 시점에서 자녀를 한국에 데려와 공부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안제시 : 한국정부는 자녀를 데려온 학부모에겐 재입국정책을 적용하지 말고 체류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함이 마땅할 것이다. 또 F-4소지자에게는 취업을 자유롭게 하는 정책이 시급히 필요한 실정이다. 부모가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이가 어찌 시름 놓고 공부할 수 있겠는가? 정부당국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왕따문화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단일민족, 단일혈통 의식이 강해 배타심리가 심각한 수준에 있다. 피부색이 다르거나 언어가 다르거나 심지어 억양이 달라도 왕따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성인사회 왕따 분위기가 학교에서 그대로 체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양부모가 모두 중국국적이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잘 나가는 아빠지만 한국어가 어눌하면 학부모 회의에 가지 않는다. 한국어가 능한 엄마가 가야 한다. 결혼이민자라면 엄마는 학부형 회의에 가지 않고 한국인 아빠가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양부모 중 누가 회의에 가든 문제는 중국에서 왔다는 것과 조선족이거나 조선족출신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알면 위축되고 주변 어린이들이 알게 되면 왕따 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안 학부모들이 중국조선족출신 신분을 속이지 말고 떳떳하게 우리 아이는 한국아이들이 갖지 못한 두 가지 언어우세를 이용하여 아이의 기를 살려 주어야 조기적응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결론 사람들은 흔히 부모가 한국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아이를 중도에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이들이 중도입국하면 교육을 망칠 수 있으며 망칠 확률이 매우 높아 데려오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중국에서 나고 자라 그 문화와 생활환경에서 교육 받고 그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또 중국에서는 그나마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주거환경도 쾌적하고 이미 교육환경도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방황이 적겠으나 한국에 중도입국하면 위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에 의해 자녀를 망치기 쉽다는 결론이다. 만약 부모들의 체류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되고 안정적인 체류가 이뤄지고, 언어가 어눌하다고 왕따 당하지 않는 환경, 부모들의 거주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중국어와 중국역사를 마음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려된 학교가 설립되고 그 수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자녀를 한국에 데려오는 것이 마땅하며 자녀에게 유익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의 환경이라면 아이를 오히려 중도입국이 중간낭패를 보게 할 확률이 매우 높아 중국에 두는 것이 한국에 데려오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318    남북축구, 조선족은 누굴 응원할까? 댓글:  조회:7904  추천:7  2014-10-15
남북축구, 조선족은 누굴 응원할까? 지난 세월 한국인은 조선족이 중국과 한국이 축구하면 누굴 응원할까? 궁금했고 큰 화제 거리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만약 중국을 응원한다면 조선족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핏줄 나눈 민족인데 그럴 수 있느냐며 매우 서운해 하였고 조선족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요즘 필자는 이와 비슷한 새로운 화제 거리를 만들어 보았다. 10월 2일 저녁 8시 인천문학경기장에서 ‘2014인천아세아게임’ 축구결승전이 열렸는데 묘하게도 남과 북이 금메달 놓고 생사결판을 내는 승부를 펼쳤다. 결과는 남한의 승리로 끝났다. 필자는 재한조선족이 남과 북 누굴 응원했을까? 궁금했다. 가. 나이 많을수록 조선(북한), 나이 어릴수록 남한을 응원 주변인 20여 명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해보았다. 40대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다수 조선족이 북한을 응원했다는 대답이고, 30대는 거의 반반이고 20대는 남한 응원수자가 더 많았다. 결론적으로 조선족사회 연령층이 높을수록 북한을 응원하는 수가 많고 연령층이 내려올수록 남한을 응원하는 비례가 늘었다. 만약 이 ‘설문조사’ 결과가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사회 반응이라면 얼마든지 수긍이 가겠으나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이와 같은 반응이 나온 것은 조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70만 명에 육박하는 조선족이 남한의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져 자녀 대학공부 시키고 중국에 집 사놓고 어느 정도 노후를 보장하고 있으면 남한의 신세를 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왜 아직도 이북을 응원하고 있을까? 나. 조선(북한)을 응원하는 이유들 중국과 이북은 같은 사회주의 체제로서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 교육을 공유해 왔기 때문에 조선족사회 40대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아 뿌리가 굳건히 내려 아직도 이북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어 이북을 응원하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남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굳건히 하였고 중국과 반세기 동안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긴 하나 남한에 감정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감정을 단지 코리안 드림을 통해 돌려세우기는 너무 멀리와 있어 앞으로 더 긴 세월이 필요할 것 같다. 그 외 언어를 비롯해 문화적으로 중국조선족은 이북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이북을 지지하는 수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또 일부는 이북에 연고가 있어 그 영향에 의해 이북을 응원하고 있다. 이른바 안쪽으로 불리는 흑룍강성이나 심양에서 온 조선족도 부모가 이북출신이기에 이북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다. 또한 일부는 남과 북이란 개념을 떠나 축구팬으로서 약체를 응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에 북한을 응원한다고 말한다. 즉 이북은 열악한 경제 여건 속에서 결승전까지 올랐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응원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일부 20대 젊은이들은 이북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기에 현실에 충실하여 남한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다. 다. 한국은 좋은데 한국인이 싫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즉 한국인이 미국에 가면 미국은 좋은데 양키가 싫다, 일본에 가면 일본은 좋은데 쪽발이 싫다는 식으로 조선족도 한국은 좋지만 한국인이 싫다는 것이다. 잘사는 나라 사람이 못사는 나라에 가면 대접받고 거꾸로 못사는 나라 사람이 잘사는 나라에 가면 무시당하는 것이 인류사회 보편적인 흐름이일진대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한국인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닐 것이다. 다만 조선족은 대한민국을 할아버지가 살던 고향으로서 같은 피를 나눈 족속끼리 너무 무시하는 것이 싫다는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조선족으로 하여금 정서적으로 한국은 좋지만 한국인은 싫다는 심리를 키워왔던 것이다. 또 한국정부가 조선족을 외국인 취급하면서 불법체류자는 그렇다 치고 열심히 일을 해 잘살고 있는 조선족 일부를 비자문제(F-4)로 벌금 때리고 강제추방 시키는 등 너무 각박하게 대해 싫다는 정서도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라. 조선(북한)을 응원하나 한국을 떠나지 않는 조선족 이유가 어찌되었든 남한 신세에 의해 돈을 벌면서 잘사는 조선족이 북한을 응원한다면 남한 사람들의 감정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당신들, 북한을 응원하겠으면 남한을 떠나 북한에 갈 것이지 왜 가지 않고 남한에 머무르고 있느냐?”고 질타를 받아도 사실 할 대답은 없다. 재한조선족은 참으로 남과 북 사이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매우 비극적이다. 이 비극이 오로지 통일로 치유되는 길밖에 없다.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조선족이 하나의 코리아를 응원하는 세상을 맞이한다면 현재에 비해 어깨에 힘주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 조선족이 조선(북한)을 응원하는 것은 미래의 큰 자산 남한정부와 국민들이 북한을 응원하는 재한조선족이 많은 것을 단지 서운해만 할 일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으로 볼 때 오히려 득이 되는 자산이라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유지인사들은 조선족의 고국에 대한 기여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기여하였고, 한국기업 중국진출에 기여하였고, 남북통일에 가교역할 기여를 할 것이다. 조선족 집단이 남과 북 통일 가교역할을 하려면 신세 지고 있는 남한에만 치중하고 감정적으로 이북을 멀리하거나 심지어 싫어한다면 다리역할에 나서지 않을 것이나, 북한과의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가교역할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점 한국정부와 한국국민들이 상기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317    두뇌문명과 마음문명 논고 댓글:  조회:4356  추천:4  2014-07-01
 요즘 신세대들은 아침에 “아이 러브 유!”를 외치고는 오후에 헤어지자고 통보한다. 며칠 전까지 아니 어제 “사랑해!”를 날리고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혼서류에 도장 찍을 것을 요구한다. 이 세상 남녀들이 “아이 러브 유!” “사랑해!”를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지만 이혼율이 높다 못해 부부가 한 사람 건너 헤어지는 세월이다. 왜일까? 사랑이란 ‘애(愛)’자에 마음 ‘心’이 들어 있듯이 사랑은 머리로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연애(戀愛)란 연자에도 마음 ‘心’이 들어 있다. 연애는 머리로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선조들은 평생 “사랑해!”를 입 밖에 번지지 않고 살아왔어도 금슬 좋게 잘만 지내왔다. 무슨 영문일까? 사랑을 머리로 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했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들은 연애를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고 스킨십도 사람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통신이 발달하여 데이트도 쉽고 수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통신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사랑하는 상대와 데이트 한 번 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더욱이 그 당시엔 연애를 사람들 앞에서 내놓고 할 수 없어 ‘도둑연애’ 하느라 가슴을 조일 때도 많았다. 그토록 애타는 연애를 하려면 머리로 입으로는 절대 성사될 수가 없다. 진지하게 가슴으로 연애한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맺어진 인연이기에 쉽게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세대들의 연애는 너무 쉬워 쉽게 사귀고 쉽게 깨진다. 그 이유가 바로 남녀 사이 가슴으로 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입으로 친하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나 사랑을 하나 가슴으로 하는 것은 동양문명전통이고 머리로 입으로 하는 것은 서양문명의 영향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서양은 대개 사물을 가슴으로 대하지 않고 머리로 대한다. 연애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인 석학 임어당 선생은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서양인은 여자를 대함에 있어서 그냥 섹스파트너로만 여길 뿐이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서양에도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있지만 대체로 서양인의 성향은 남녀 사이 머리로 입으로 하는 사랑이 많고 진정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적다. 요즘 세대들이 “사랑해!”를 남발하는 현상은 역시 서양두뇌문명의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다. 서양은 여자를 연구함에 있어서 해부학적으로 생리학으로 호르몬이 어떻고 난소와 자궁세포조직이 어떻고 하면서 물건 연구하듯 세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가령 음모가 없는 여자를 서양에서는 생리학으로 체내 모(毛)를 생산하는 인자(因子)가 모자라 그렇다는 식으로 연구할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조금 부연하자면 음모에 균이 차 있을 확률이 높아 위생청결을 지키려면 음모를 제거해야한다는 식으로만 떠들 뿐이다. 중국인은 여성의 특징을 생산성에 포인트를 맞추고 여자의 음모는 대지의 초목과 같다. 대지에 초목에 없으면 곡식생산도 되지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음모 없는 여성은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열심히 ‘가꿔봐야’ 헛수고여서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이와 같은 여성관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관념의 문제인데 역시 마음문명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여자에 대한 연구는 단연 노자가 으뜸이다. 노자는 여자를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이 여인처럼 부드럽고 약하면서도 강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강한 것을 공략하는 데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맞는 말이다. 돌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물방울에 뚫린다. 흙이 물보다 단단하지만 빗물에 쓸려간다. 노자는 유약한 물이 강한 돌을 이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부드럽고 유약한 여자가 강하고 힘이 센 남자를 이긴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기는가?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비하(卑下)’이다. 여자도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비하’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하’는 남존여비의 뜻이 전혀 없다. 노자는 남존여비를 주장한 적이 없고 오히려 여존남비를 외친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비하’는 무엇일까? 바로 위치이다. 무슨 위치인가? 바로 남녀성교에 있어서 여자가 낮은 곳, 즉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상위에서 먼저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공격을 가하기 때문에 강해 보인다. 그러나 물 뺀 거시기란 속담이 있듯이 일단 파정하면 기고만장하던 태세가 서리 맞은 뱀처럼 온몸이 나른해 얌전해진다. 남자는 비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체력을 소진하고 최고급 단백질을 주는 ‘밑지는 장사’이다. 여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쾌락도 얻고 잉태도 가능하다. 노자의 생각을 빌려 말하자면 여자는 움직이지 않고 피동적이기 때문에 좋다. 여자는 누워서 남자를 기다린다. 노자는 이를 “고요하기 때문에 아래에 스스로 머문다. 천하의 성교는 암컷의 부드러움이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의 강함을 이긴다.”고 했다. 이와 같은 성교관계를 역중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좋다. 아래가 위보다 좋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보다 좋다.” 노자는 이를 보편적인 진리로 여기고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치국이나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큰 나라는 마치 강의 하류와 같아서 부드러운 암컷의 위치에 있다.” 따라서 노자는 국가도 여인처럼 자세를 낮추고 겸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대해 자신을 낮추면 작은 나라를 끌어 모을 수 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스스로 낮추어 큰 나라의 보호를 받는다.” 노자의 방중술로 천하의 이치를 보는 세계관에 대해 역중천 교수는 멋들어지게 개괄하고 있다. “노자는 그저 한 걸음에 방중술에서 제왕술(帝王術), 음도에서 패도(覇道)까지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서양에서는 여자를 생리학적으로 연구하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도의 원리로 연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두뇌문명과 중국의 마음문명의 차이이다. 서양의 머리로 세상을 사는 두뇌문명과 중국인의 가슴으로 세상을 사는 마음문명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서양인은 ‘정확성(精確性)’이 강한데 비해 중국인은 ‘정확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지적한 이는 100년 전 미국 선교사 아더 스미스였다. 아더·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설명했다. 중국인은 상대가 나이를 물을 경우 똑 부러지게 정확한 나이를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이 먼저 물어온 상대에게 얼마 되어 보이는 가고 되묻는다. 그러고 나서 겨우 하는 대답이 “불혹의 나이요, 환갑이 지났소, 고희에 가갑지요.”라고 대충 나이를 말한다. 노인들은 흔히 61세이면서도 “올해 60~70 먹었어요.”라고 나이를 말한다. 만약 61세를 정확히 똑 부러지게 말한다면 그것은 머리의 나이이고 60~70 살은 마음의 나이인데 중국인과 한국인은 흔히 머리의 나이를 말하지 않고 마음의 나이를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마음문명의 표현이다. 중국인은 일반 사물에 대해 정확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자적인 것에까지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그렇지만 남이 나의 흉을 보면 용납 못하듯이 중국지식인들은 아더·스미스의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지적하자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아더·스미스는 중국인에 대해 유(流)만 말했을 뿐 원(源)을 짚지 못했으니 편견이다.”라고 비판하고 나서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모든 사물을 머리로 따지지 않고 맘으로 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인의 정신》의 저자인 고홍명(辜鴻銘)은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심령미를 추구한 까닭”이라고 받아쳤다. 서양인은 사람의 나이를 매개인의 생일을 기준으로 따진다. 동양에서는 모든 사람이 춘절을 기준으로 한 살 더 먹는다(요즘에는 양력설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음). 한반도 사람들은 엄마 뱃속의 나이까지 계산한다. 돌이 갓 지난 아이가 세 살일 경우가 많다. 머리로 따진 나이가 아니라 역시 가슴으로 먹는 나이이다. 사람의 나이를 정확히 계산하듯 모든 것이 정확(正確)하고 또 정확(精確)하기 때문에 머리를 잘 쓰는 서양에서는 과학을 발명 발전시킨데 반해 중국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보니 과학은 발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 서양인이 ‘정확성’에 집착한 결과 과학이 발달하고 중국인은 고대에 사대발명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발명으로 인류문명에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확성’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이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충지(祖充之)의 원주율 계산이 세계적으로 가장 앞섰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중국인은 화약으로 기껏해야 폭죽을 만들었는데 비해 서양은 중국의 화약을 도입해 총포를 만들었다. 서양인의 정확성은 상무문화(商貿文化)와 큰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상무문화는 주고받는 장사이기 때문에 신뢰가 우선이고 다음 모든 것이 정확(正確)하고 또 정확(精確)해야 한다. 서양의 과학이 발달한 것은 물론 이 세상 너머 미지세계에 대한 동경을 추구하는데서 창의성이 발달한 측면도 있지만 그들의 정확성이 과학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의 과학이 인류역사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너무 두뇌문명에 치중하다 보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우스꽝스런 사건도 있었다. 되지 귀에 황금 귀걸이를 걸어 넣고 항문에 온도계를 꽂아 체온을 측정한다. 체온이 올라가면 되지가 흥분되어 있다는 증거라나. 참 이상한 과학도 있다. 왜 이와 같은 우스꽝스런 과학이 나타나는가? 두뇌문명에 너무 집착한 결과라 볼 수밖에 없다. 중국이 고대에 서양에 비해 훨씬 앞서 있다가 근대화시기에 들어 밀리기 시작한 것은 과학과 철학과 법률이 낙후돼 있은 탓이었다. 고대 중국에 철학이 있어나? 물론 음양철학도 철학이니 철학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논리추리를 추구하는 철학인데 비해 중국철학은 인간 삶의 생활 철학이며 서양철학에 비해 논리성이 매우 미약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인은 논리적사유가 발달되지 못했을까? 그 원인은 바로 중국인은 이성적 사고가 부족하고 대신 정감과 심미적 사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 법률이 있었나? 법은 있어도 법률은 없었다. 고대 중국의 법은 주로 형법이 위주였고 법이 완벽한 ‘율’로 이뤄진 ‘법률’로 자리매김 되지 못했다. 중국에서 법이 법률로 흐르지 못했던 것은 사람 위에 법이 있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법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역사는 진 제국 이 후 명유암법(明儒暗法)의 형식으로 흘러왔지만 실제로는 인치, 덕치였고 인간세상을 지배한 것은 예치(禮治)였다. 법치는 인간이 죄를 범하면 처벌하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예치는 범죄예방 역할이 강하다. 어찌되었든 법률 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말은 법치사회에서 생겨난 것이고 예치사회에서는 법률 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할 수가 없으며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 병폐가 많이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법치는 두뇌문명의 산물이고 인치, 덕치, 예치는 마음문명의 산물이다. 머리로 살아가는 서양인은 성격이 대체로 강인해 보이는데 비해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온 중국인은 성격이 온화한 편이다. 공자는 주공의 혼인으로 이뤄진 가정을 나라와 연관시켜 국과 가가 합쳐진 개념인 ‘국가’의 관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예와 의를 겸비하게하고, 조상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제사제도를 완벽하게 함과 동시에 이를 천자에 대한 충성에 이르게 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고, 인의예지신이 겸비된 인간이 되는 군자의 도를 제시했으며, 대의명분을 지켜 사회질서에 따를 것을 호소함과 아울러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량시민이 되기를 호소했다. 공자는 또 군자의 도는 부부생활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부부, 부모자식, 형제, 친척, 친구, 나아가서 모든 사회구성원은 맘(정:情)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호소했다. 공자는 이러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으로 중국인의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 따라서 중국인의 인간타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곧 ‘온화함’이다. 고홍명은 저서《중국인의 정신》에서 중국인의 ‘온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한 중국인은 간혹 거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저속하지는 않다. 간혹 못생긴 느낌이 없진 않지만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추하지는 않다. 간혹 덤벙거려 비속함이 없진 않지만 방자하거나 오만하지는 않다. 간혹 무딘 면이 없진 않지만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간혹 성격이 원만하고 영리한 면이 없진 않지만 남을 해칠 정도로 사악하지는 않다. 진정한 중국인의 마음이나 품행에 나타나는 결점이나 흠집을 굳이 말한다 해도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점은 없다. 중국의 구식학교에서 성가신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설령 그 사람이 사회의 최하위 계층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공자는 타인에게만 온화함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온화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예수는 제자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나의 문중에 들어오려면 세금 거두는 공무원은 두말없이 장부정리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오라하고, 고기잡이는 고기그물을 당장 집어던지고 오라고 닦달하였다. 공자는 나의 문하에 들어오겠으면 적당히 부모와 밥도 먹고 인사도 깍듯이 나누고 오라고 타이른다. 예수는 사랑하겠으면 나보다 못한 자의 발을 씻어주라고 한다. 극단적인 사랑법이다. 공자는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만큼만 사랑하라고 주장하며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이른다. 예수와 공자를 비교해 보면 여러모로 예수는 머리로 세상을 대하고 공자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자는 마을과 마을 사이 개가 짓고 닭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리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제창하면서 인위적인 도시문명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른바 도시문명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규칙과 법칙, 원칙 및 이러저런 룰이 소털처럼 많다. 인간이 도시에서 살자면 이런저런 일에 신경을 쓰면서 사노라면 자연스레 가슴이 아닌 머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자는 인간이 조물주가 만들어준 대로 생긴 대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제창한다. 이것이 바로 노자철학 핵심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장자는 노자보다 한 술 더 떠 공자를 심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인’이니, ‘의’이니, ‘예’이니, ‘지’이니 하는 따위가 인간의 본성을 말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호소한다. 임어당 선생이 저서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든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인이 왜 질서 없는지?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중국인이 ‘도’가 제창한 ‘무위자연’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쯤해서 왜 서양인은 머리로 세상을 살아왔고 동양인은 왜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오게 되었을까? 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유목문명이다. 유목문명의 특징은 이동이다. 어디로 이동하는가? 풀을 따라 이동한다. 풀을 발견하는 자가 구세주이다. 그것이 어린 아이, 즉 목동이든 노인이든 상관없다. 노인은 이동이 불편하여 풀을 발견하는 확률이 낮은데 비해 목동은 생기가 넘쳐 이동성이 강해서 풀을 발견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래서 서양문명에는 노인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예(禮)’와 ‘효(孝)’ 문화가 없다. 서양의 상업문명은 그리스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는 땅이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먹고 살기 굉장히 힘들었다. 다행히 지중해를 끼고 있고 아프리카, 아세아 쪽에 가는 교통이 편리했다. 고대그리스인은 편리한 교통의 장점을 발휘하여 무역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무역은 신뢰가 필요하고 계약이 필요하고 상도의 룰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가슴으로 대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무역은 정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계산되는 머리로 해야 한다. 고로 서양인은 머리로 하는 두뇌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를 보면 은나라 시기 공(工)과 상(商)이 발달하여 그 시기 문화를 ‘공상문화’로 명명한다. 은나라 시기 상업이 발달하여 은나라를 商나라라고 부르며 오늘날까지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이라 부른다. 만약 은나라 공상문화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면 중국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흘러왔을 것이다. 허나 역사는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재방송도 없다. 오로지 생방송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다. 3천 년 전 주나라가 은나라를 대체함에 따라 공상문화가 자취를 감추고 농경문화가 자리하게 되었다. 그 후 진 제국부터 청 말까지 2천 년 제국역사는 농경문명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가령 송나라 초기처럼 시장이 발달하고 지폐가 등장하여 자본주의맹아가 싹튼 시기도 있었지만 제국의 수장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줄곧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실시해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농경문명의 기본 특징은 정착과 경험이다. 농경문화는 이동하면 농사를 망친다. 한 곳에서 꾸준히 정착하며 지어야 한다. 정착문화는 낯선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매우 적고 아침에 만난 사람 점심에 만나고 저녁에 또 만난다. 자주 얼굴을 맞대게 되면 자연스레 정이 들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들면 머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농사는 목동이 풀을 발견하면 메시아가 되듯 그런 문화가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쌓아야 한다. 24절기를 잘 파악하는 것은 물론 3일 개이고 3일 비 내리는 기후 규칙부터 시작하여 책에 없는 경험을 많이 습득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농사는 경험을 수요로 하고 따라서 경험을 많이 쌓으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 나이가 지긋할수록 경험이 더 풍부하다. 농경문화에서 노인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양학자들이 중국고전을 번역할 초기에 ‘예’와 ‘효’를 서양언어로 어떻게 옮길지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서양은 유목문화 전통이기에 ‘예’와 ‘효’와 같은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논의가 있었듯이 은나라시기에 공상이 발달했다가 주나라에 들어 전면 농경문화로 바뀌면서 머리로 살아가던 패턴이 가슴으로 살아가는 패턴으로 전이되어 마음문명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두뇌문명과 마음문명을 연구하면서 확실하고 정확한 근거를 찾아보려고 신화자전을 뒤적여 보았다. 한문은 편방부수(偏旁部首)가 붙어 이뤄진 문자이다. 재미나는 것은 그 많은 편방부수 중 마음 ‘心’을 뜻하는 수심(竪心) 변(忄)이 붙은 글자가 가장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문은 뜻글자로서 문자는 문화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문명에서 마음문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마치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나의 연구가 부질없는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확실하고 정확한 근거를 찾은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마음 ‘心’이 붙은 글자가 가장 많은 것은 중국문명은 마음문명이고 따라서 마음문명은 ‘정의 문명(情文明)’이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서양은 유목문명이고 유목문명의 특징이 이동이기 때문에 늘 이동하여 낯선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정이 존재할 겨를이 매우 적다. 이에 비해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고 정착문화의 특징은 만난 사람을 늘 만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관 인간 사이 자연스레 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로서 농경문화의 특징을 ‘정의 문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뿐 아니라 한반도문명도 ‘정의 문명’이라 말할 수 있고 아울러 한반도의 ‘정의 문명’은 중국에 비해 훨씬 농도가 짙었다. 한반도는 산이 75%이고 평야가 25%이며 가장 북쪽에 있는 백두산이 산세가 험악하고 웅장하여 남성형(男性型) 산인 외에 그 밑의 묘향산부터 남쪽에 이르는 모든 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아늑하고 온화하여 여성형(女性型) 산이다. 여성의 특징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포용성이 강하다. 그래서 한반도문화를 아기자기한 보자기문화로 표현한다. 보자기문화의 핵심이 바로 ‘정의 문화’이다. 따라서 정은 한반도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우리생활에서 사용하는 정과 관련한 어휘를 보면 유정, 무정, 격정, 열정, 온정, 냉정, 동정, 역정, 진정, 위정, 상정, 비정, 순정, 사정, 다정, 세정이 있는데 이는 한문에서 온 것이다. 이 외에 우리말로 된 덧정, 속정, 옛정, 잔정, 풋정, 미운 정, 고운 정, 정들다, 정겹다, 정을 두다, 정을 붙이다, 정을 떼다, 정을 주다, 정을 뺐다 등등은 우리민족의 생활문화정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여타 다른 민족에게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이다. 삼천리금수강산이란 말이 있듯이 한반도는 자연환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인간의 심리에 투영되어 한반도 사람은 멋을 추구해왔다. 또 옛날 한반도 마을은 절대다수가 방곡이었는데 방곡이란 산 밑에 샘물이 있고 샘물이 내를 이루고 내가 양 옆에 나지막한 산맥이 있고 그 산 아래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그러한 거주 환경을 방곡이라 불렀던 것이다. 방곡의 자연환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오순도순 모여 사는 마을사람들은 서로 정이 좋게 살아왔으며 멋을 추구하고 살맛나게 살아왔다. 요즘 중국인 관광객이 밀물처럼 한국에 밀려드는데 그들은 한국의 화장품, 복장, 성형수술에 가장 관심이 많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멋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한국인이 멋을 발전시켜온 결과이다. 맛이란 것도 우리민족의 특유한 문화인데 음식문화에서 말하는 맛 외에 사람 살맛이 난다는 뜻이 말해주듯 멋과 맛은 인간의 심미적인 정감에서 생겨난 것이고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역시 마음문명의 산물이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특징을 구분 짓자면 서양인은 두뇌문명에 의해 과학, 철학, 법률 및 상무업이 발달하여 사회 전반에 이르러 정확한 것이 많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 잘 지켜져 민주화가 잘 되어 선진국에 먼저 진입하였지만 인간세상이 너무 딱딱하고 삭막하여 사람 살맛이 매우 적다. 이에 비해 동양은 서양에 비해 과학, 철학, 법률 및 상무업이 발달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빈곤하였으나 인간사회는 정이 많아 사람 살맛나는 사회였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어느 문명이 우월하고 어느 문명이 비천하다는 판단은 맞지 않으며 서로 각자 장단점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같은 유교와 한문을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명권에 속하는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 비해 문명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일본열도는 땅이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고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아 삶이 각박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세상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2천 년 전 농사를 시작한 것은 서부 나라지역인데 그곳은 진(津)과 포(浦)가 많았으며 그 변두리에서 자그마한 땅을 개간하여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왔다. 진과 포는 모두 못이며 못의 특징은 유동이 아닌 고인물이다. 일본인의 성격은 마치 고인 물처럼 고독하다. 아울러 고인 물이 서로 교류가 없듯 일본인은 친구 간 외식해도 식비를 똑 같이 분담하는 ‘와리끼리’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총적으로 말해서 일본인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정의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정의 문명이 발달하지 못하고 머리로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서양과 비슷한 두뇌문명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동양 삼국 중 일본이 가장 먼저 서양문물에 눈을 뜨고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일본에서 생활해본 중국인과 한국인은 모두 일본이 여러모로 발달하여 좋긴 하지만 기계처럼 너무 딱딱하여 정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어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미사회나 일본은 두뇌문명이 강해 사람 사는 맛이 부족하고 중국은 비록 한반도와 같은 문화에 속하지만 너무 크고 넓어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지는데 비해 한반도는 아기자기한 자연환경에 정의 문명이 발달하여 사람살기 좋은 고장이라 말하고 싶다. 동포문학2호
316    김종서와 장성택, 2인자의 비운 댓글:  조회:4936  추천:4  2014-06-14
김종서는 조선왕조 초기 세종부터 단종까지 삼대 왕을 거쳐 요직에서 활약했던 인물이고 장성택은 이북 현대사에서 역시 삼대 ‘임금’을 거치는 과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2인자 역을 맡았던 이력이 같으면서 삼대 ‘임금’을 거친 역사도 비슷하며 최후 ‘왕실세력’에 의해 제거된 운명도 비슷하다. 다만 김종서는 세종대왕의 손자 단종의 왕위를 지키려다가 수양대군한테 철퇴를 맞고 저승에 갖고 장성택은 현 ‘임금’한테 형장의 이슬이 된 점 조금 다를 뿐이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여러 ‘임금’을 거치면서 정치적 입지가 그 누구보다 확고하여 2인자가 되었는데 왜 제거 당했을까?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역모를 일으켜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조선왕조 왕실법에 의하면 왕족은 조정의 요직에 출마할 수 없다. 수양대군은 장차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면 일단 먼저 조정에 진출하여 정치성과를 올려야 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의도를 강력하게 가로막은 인물이 바로 김종서였기에 수양대군이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왜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하였을까? 11세에 왕이 된 단종이 나이 탓에 김종서를 비롯한 사대부들에게 휘둘리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실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수양대군이 나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강력한 군주가 되어 이씨조선의 위엄을 다지려는 목적이 강렬하였다. 단종뿐만 아니라 518년 조선왕조역사에서 어린 왕을 올려놓고 아낙네들이 수렴청정하고 사대부들이 천하를 쥐락펴락 하는 사례가 많았다. 중국 청나라말기   자희태후가 수렴청정 하였고 사대부들이 나라를 이끌어 간 사례와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에서 수렴청정 하는 아낙네들이 자희태후처럼 강한 인물이 못 되면 천하는 사대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대부란 구경 어떤 존재인가? 중국 주나라 시기 대부(大夫)는 제후 밑에서 나라 살림을 맡은 자이며 세습귀족이었다. 사(士)는 공부한 선비이다. 본래 대부와 사는 분명히 계급이 달랐지만 제국시대 진입한 이래 공부를 통해 출세하여 권력을 쥐면 사대부(士大夫)가 된다. 중국에서는 제국시기에 진입한 이래 사대부들이 세습귀족이 아니고 임명제를 통한 관리였으며 수나라 이후로는 과거제를 통해 출세한 관료들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중국 사대부역사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사대부들 중 으뜸의 요직에 있었던 사대부라고 보면 하자가 없을듯하다. 두 인물이 다르다면 김종서는 비왕족출신이라면 장성택은 김일성 주석의 사위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이며 김정은의 고모부 되니 ‘왕족’ 출신관료라 말할 수 있다. 왕족출신이든 비왕족출신이든 두 사람 모두 ‘사대부’이며 또 두 사람은 기존의 ‘왕’에 충성하는 사대부정치 본연을 지킨 인물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중국이든 조선이든 지방토호세력들이 반기를 들고 역모를 일으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도한 사례는 있어도 사대부들이 역성혁명을 일으킨 사례는 중국도 조선에도 없었다. 이것이 조선왕조 518년 장수비결 중 하나이다. 사대부들은 왜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정확히 말해서 왜 일으키지 못했을까? 중국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가 군주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다는 이른바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주장하고 따라서 군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은 신의 영역을 건드리는 으뜸의 죄로서 신성불가침의 성역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이 유교의 왕도법칙이 되었고 사대부들은 유생출신으로서 모두 이 왕도법칙을 철칙처럼 지켜야 했다. 고려 말기 무너져가고 있는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와 썩어빠진 고려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려는 정도전 모두 유생출신 사대부들이다. 다만 그들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가는 길이 달랐던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고달픈 고난생활을 친히 목격하고 몸으로 부대끼며 체험하였기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 즉 백성은 배를 태울 수도 있고 배를 번질 수도 있어 군주의 도보다 백성의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맹자의 이상국가를 표방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려고 유교에서 가장 꺼리는 역성혁명마저 불사하였던 것이다. 정몽주는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목숨처럼 받들고 왕씨 일가의 군주통치를 지켜내려고 온몸을 던져 싸웠던 것이다. 결과는 정몽주가 실패하고 정도전이 성공하였지만 그 이면을 따져보면 이성계라는 막강한 무관이 결국 승패를 가르는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즉 모택동이 즐겨 말하던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가 진리로 작용하여 470여년의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의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조선조 518년 동안 정도전의 백성 위주의 왕도정치 이상과 이념이 먹힌 것이 아니라 정몽주의 성리학을 사대부들이 받들어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절대 진리로 간주하고 크고 작은 당파싸움과 역모사건이 빈번하였으나 종당에는 518년 동안 이씨 성이 바꾸지 않은 왕조정치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사대부들이 왕조정치를 지키는 첨병이 되어 왕조의 수명이 길어졌지만 김종서와 같이 중종 때 2인자 역을 맡았던 조광조 역시 제거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이퇴계와 같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던 선비들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2인자 역을 맡았던 사대부들 및 그 추종자들은 그 당시 왕한테 제거당하지 않았다면 후세 왕한테 변을 당하거나 한명회처럼 연산군한테 죽어서까지 부관참사(剖棺斬死)를 당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대권도전에 최대 걸림돌이 되어 제거 당했고 장성택은 현 ‘임금’이 조카라 어릴 적부터 자라는 모습을 겪어오면서 내심의 존경이 부족해 절대권력 군림에 걸림돌이 되어 역시 비운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장성택의 처형사건을 두고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말들이 많은데 이북은 유교적인 사회주의국가(지도자의 세습제)로서 ‘짐(朕)’의 한마디가 곧 법인 왕조시대의 예치가 잔존해 있기에 민주사회 법치 잣대로 논할 일이 아니다.
315    재한동포의 生日 ‘중국동포의 날’ 탄생에 부쳐 댓글:  조회:6058  추천:5  2014-05-06
올해로 한중수교가 22주년이 되고, 한국체류 중국동포가 58만 명에 이르고 있는 가운데 중국동포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문호개방이 더욱 확대되면서 앞으로 고국으로의 '동포 자유왕래'가 빈번해지고 국내 유입이 더욱 많아질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이처럼 한국내채류 동포가 늘어남에 따라 그동안 동포사회에서 이들을 상대로 비교적 큰 규모의 단합된 정기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대두되 왔다. 이에 한중동포신문, 중국동포타운신문, 동북아신문 등 언론 3사가 발의하고, 여러 중국동포 언론사와 단체들이 적극 동참하여 2014년을 '중국동포의 날' 생일 원년으로 삼고, 해마다 추석 전일을 '중국동포의 날'로 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이 뜻 깊은 경사를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금년 9월7일에 '제1회 중국동포민속문화大축제'를 개최하고자 한다. 우리 민족의 민속문화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민족의 애환과 삶의 철학을 담고 점철되면서, 발전 되고 계승되어 세계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문화로 거듭났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 민속문화가 많이 사라졌고 사람들 속에 잊혀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속문화의 소실을 대책 없이 지켜만 볼 수 없다. 모두가 힘을 합쳐 적극적으로 민속문화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면 민속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중국 이주 조선족의 역사가 150여 년 흘렀다. 해외 750만 명의 재외동포 중, 중국조선족은 고국의 민속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20여 년의 코리안드림의 여파로 말미암아 집거지는 해체 되었고 인구도 급격히 줄어들어 민속문화가 예전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 거주 중국동포의 수가 6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민속장기 한 가지만 활성화되어 있을 뿐, 기타 민속문화 활동은 점차 고갈되어가고 있다. 이번에 개최 예정인 '중국동포민속문화대축제'는 한민족의 전통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60만 중국동포사회가 하나로 어울려지는 큰 잔치로서, 우리 선조들의 민속문화를 되살리고 고국의 민속문화 발전에 기여하며, 재한중국동포사회가 지역사회에 잘 정착하고, 또 고국에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과거 중국동북 3성에는 조선족집거지 향진들에서 매년 조선족운동대회를 개최하는 사례가 있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이 과거 향수를 못 잊고 있으며, 중국동포들은 워낙 집단민속오락 활동과 가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국 땅에서 처음으로 열리게 되는 이번 축제에 적어도 5만 명 이상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중국동포의 날' 제정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이날을 재한중국동포들의 소중한 명절이 되기를 기대한다. 재한외국인방송
314    동포사회 이해 키워드 찾아야 댓글:  조회:6565  추천:2  2014-02-03
동포사회 이해 키워드를 찾아야   재외동포 이해교육 국민 참여 확대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이며 재외동포 신분인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해’, 이해는 인간사회 구성원 사이 화합과 공존을 도모하는 촉매제이며 갈등을 해소하고 없애는 용해제(溶解濟)이다. 중국에서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리제완쑤이!(理解萬歲!)’란 말이 전반사회에 널리 퍼져 유행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가령 술좌석에 말썽이 생기거나 가정불화가 있거나 심지어 시정장사치들끼리 다툼이 생겨도 입버릇처럼 ‘理解萬歲!’를 들먹였는데 전사회적으로 확실히 갈등해소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중수교 20년이 넘었고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포의 수가 6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한국사회와 동포사회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지난 동안에 한국사회, 특히 한국정부는 동포들이 고국을 이해할 것만 강조하는 반면 동포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이 일방통행 식으로 흘러와 동포정책이 실패를 거듭 겪어왔고 따라서 한국사회도 동포사회를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아왔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과 공존을 이루려면 현시점에서 과거 일방통행 식 이해가 아닌 한국사회도 동포사회에 대한 이해가 매우 필수적이다.   민족이란 개념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이듯 동포란 개념도 혈통보다 문화가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문화란 한 인간집단의 ‘활법(活法)’이다. 활법이란 삶의 방법, 방식, 양태, 양식이다. 활법은 곧 한 인간집단의 정서이며 결국 문화란 정서이다. 중국조선족의 경우 선조들의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가 몸에 배인 이중성문화 소유자이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적인 문화공동체로서 한국사회 문화와 같으면서도 다른 문화를 지닌 복잡한 집단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은 한국인과 정서가 다른 점이 굉장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는 사과는 사과이고 배는 배이지 사과배란 것이 없다. 중국조선족의 상징인 연변엔 사과배가 있다. 이북의 북청 사과나무가지를 만주(연길현 로투구진 소기촌)의 돌배나무에 접목시켜 맺은 과일이 곧 사과배인데 사과 맛도 있고 배 맛도 있는 과일이며 중국조선족은 마치 사과배처럼 이 중 ‘맛(문화)’을 지니고 있는 공동체이다. 한국사회는 동포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과배와 같은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족사회는 사과 맛의 비중이 더 크냐, 배의 맛이 더 있냐는 것인데 이것이 곧 조선족사회 정서이며 이 조선족사회 정서를 파악하는 것이 곧 조선족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지난 12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길 가던 한국인 자매가 조선족들이 떠들어댄다고 ‘짱깨’라 욕한 것이 집단폭행사건이 발생하는 발단이 되었다. 경찰서에 가서까지 한국인자매가 끝까지 조선족들을 ‘짱깨’라 욕해 담당경찰을 놀라게 했는데 이럴 경우 한국인이 조선족 몸속에 배인 중국의 시끌벅적 떠드는 문화를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내국인과 동포사회 갈등을 줄이려면 한국인은 동포들의 정서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시급하다.     2년 전 강원도에서 조선족이 중국축구를 응원하는 문제를 갖고 한국인과 다투다가 칼부림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한국인이 중국축구를 응원하는 조선족을 배신자라 욕하고 이 땅을 떠나라는 등 과격하게 밀어붙여 생겨난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난 주요 원인이 바로 한국인이 동포들의 정서를 모르고 일방적으로 혈통관념에 의해 서운한 감정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은 단일민족 의식에 따른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는 하나의 진리만 알고 있을 뿐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또 다른 하나의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키운 정이란 무엇일까? 조선족역사는 한반도인이 미국이나 일본 진출처럼 기성 사회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1세대들이 만주에 이주해 개간한 토지가 한반도 2배 되는데 이는 삶의 터전을 직접 개척했다는 뜻이다. 공산당은 집권 후 조선인과 한 약속을 지켰고 아울러 조선족자치주도 세워주고 소수민족정책을 우월하게 펼쳐 우대해 주었다. 그러므로 조선족이 공산당을 자연스레 따르게 되었고 주인의식을 갖고 생활해오다 보니 중국축구를 응원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이와 같은 조선족의 역사맥락을 이해한다면 서운한 감정이 많이 해소될 것이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은 다수가 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로 접근하여 제정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초기 장춘에 있는 대학들에서는 밀가루음식이 위주였고 가끔 강냉이떡을 먹기도 하였다. 한 주 쌀밥은 월, 수, 금, 일 점심 네 끼만 주는데 조선족학생은 쌀밥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입쌀권을 8근 주고 한족은 2근밖에 주지 않아 우리는 남아돌고 한족은 모자라 하는 말이 “니네 조선족은 왜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는지 모르겠다.”고 부러워하였다. 또 10위안이면 한 달 생활비로 족할 시절에 소수민족비 4위안을 주어 한족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처럼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서를 잘 파악하고 상응한 정책을 펼쳐 소수민족들이 중국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화교정책을 들먹이면 화교들이 해외에서 모두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좋은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국인은 반응하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1960년대 말기 4~5 만 명에 이르는 화교들이 대거 조국에 밀려들었는데 중국정부는 아무런 거부 반응이 없이 전부 안치하고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화교자녀에게 가산점을 부여하고 화교자녀 취직문제와 승진문제에 있어서 우대정책을 펴기도 하는 등 우월한 정책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 중국은 일원화 지도체제이기 때문에 국무원 화교사무실에서 제정한 정책이면 교육부를 비롯해 일사분란하게 기층까지 시달되고 있다. 한국은 중국화교사무실에 해당되는 재외동포 전담기구가 없어 출입국은 법무부, 취업은 고용노동부가 관리하여 시어머니가 여럿 있어 복잡하다.   1993년 동남아관광 길에 올라 중국 심천에서 홍콩을 경유하는데 뤄후커우안과 홍콩입국장에 ‘회향창구(回鄕窓口)’가 있었다. 하루 10만 명에 달하는 홍콩시민이 대륙을 방문하고 또 돌아가는 출입경(출입국) 창구가 한국처럼 외국인 창구가 아니라 ‘회향창구’였다. 중국은 이렇게 해외 화교들의 심리와 그에 따른 정서를 잘 파악하고 입국창구하나라도 입맛에 맞게 설치하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김포국제공항과 인천국제공항은 코리안드림 20년이 넘어 외국인창구를 이용하다가 2013년에 새누리당 김회선 국회의원의 제의에 의해 인천국제공항에 ‘재외동포창구’가 생겼는데 ‘재외동포창구’보다 ‘회향창구’가 훨씬 정서적으로 다가온다고 본다. 중국은 조선족의 정서를 배려해 연변에서는 신분증에 아버지, 할아버지가 지어준 한글 이름을 버젓이 적고 있는데 할아버지 고향인 한국은 그 이름을 못 쓰게 하고 있다. 이유는 여권에 적힌 영문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는 조선족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외국인법에 맞춰 그냥 법으로만 밀어붙이기 때문에 조선족을 고국에 대한 감정이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법무부는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으로서 위의 사례와 같이 융통성 없이 따분하게 법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이해된다. 그렇다면 정서를 파악하고 동포들의 입맛에 맞게 동포정책을 펼치게끔 노력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재외동포재단과 학계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재외동포를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해서는 교육현장에서 전 세계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의 역사적 배경과 현실상황을 알아가는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실교육은 재외동포의 정서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실효성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정부 동포정책이 성공하려면 동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서를 잘 파악하고 제정해야 하며 한국국민들이 동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역시 동포들의 정서를 살피고 이해해야만이 공존과 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지난 1월 28일 주제로 열린 재외동포재단 포럼 토론고
313    현대여성은 왜 꽃미남을 좋아할까? 댓글:  조회:6106  추천:10  2014-01-10
현대여성은 왜 꽃미남을 좋아할까?   남자들의 미녀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다르듯이 여자들도 미남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우선 과거 전통시대 미녀의 기준은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안성 맞춤해야 한다. 시쳇말로 보기 좋아야 한다. 어떤 키가 보기 좋은가? 중국고대 4대 미녀로 꼽히는 양귀비가 지금의 치수로 158센티였다고 하니 아마 155~160센티 사이가 보기 좋은 키였을 것이다. 필자가 어릴 적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키 큰 여자를 싱거워 보인다느니 두렛줄 같다느니 수숫대 같이 멀뚱하게 보인다느니 하면서 쩍하면 흉보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키 큰 여자는 죽었다 깨도 미녀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전통사회 미녀의 얼굴은 동그스름하고 복스럽게 생겨야지 길쭉한 말대가리 형의 얼굴은 빵점이다. 몸매는 오동통해야 한다. 말라빠진 여자는 죽었다 깨도 미녀 될 수 없다. 왜냐? 농경문화는 다자다복문화이며 따라서 생식숭배가 종교처럼 사람들의 머리에 뿌리박혔다. 아이를 많이 낳아야 가문이 번성해지는데 말라빠진 여자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몸매가 오동통한 여자를 선호한다. 미녀의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현대인은 모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발이 작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귀비가 당현종과 같이 쫓겨 다니다가 지금의 사천성 일대에서 추적군한테 목 졸려 죽었다. 한 노파가 그 자리에서 양귀비의 한쪽 신발을 주었는데 크기가 지금의 치수로 10센티 되나마나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중국에서 전족(쫑발)문화가 생겨난 것이 송나라인 점을 미뤄볼 때 양귀비의 발은 천족(天足)으로서 소족(小足)을 타고났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스월드, 미스코리아, 미스차이나 등등의 미녀선발대회에서 미녀의 기준에 있어서 발의 대소를 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고대사회에서 왜 발이 작아야 미녀로 될 수 있는가? 단순히 작은 발이 깜찍하다는 인식뿐만이 아니었다. 발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데 발이 작은 여성은 거시기도 작아 매력적이라는 소족숭배 성문화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송나라에 이르러 돈 많고 할 일이 없었던 객가(客家)들이 전족문화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현대사회의 미녀 기준은 우선 신장이 굉장히 커야한다. 160센티를 넘지 못하면 난장이에 속하므로 미스선발대회에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얼굴형은 마형(馬形)이 좋고 작아야 한다. 몸매는 메스꺼울 정도로 마간(麻竿)처럼 마르면 마를수록 좋다(전통 관념에 의해 하는 말). 이렇게 현대 미녀 기준은 전통문화가 결여된 상업시대에 TV화면발을 잘 받기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이다. 다음 미남의 조건에 대해 논의해보자. 미남에 대한 조건과 그에 따르는 시대적 관점 및 여자들이 선호하는 이상형이 다른 것은 주로 전쟁연대와 평화 시대로 획분 된다. 필자가 어릴 적 연변에서는 잘 생긴 남자를 김일성 같다고 비유했다. 김일성 주석은 얼굴이 잘 생긴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도 사람을 압도하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전쟁을 거친 지도자이다. 전쟁은 힘을 필요로 한다. 군대를 이끄는 장군은 얼굴이 미남형으로 잘 생기면 좋겠지만 그 보다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처럼 말이다. 중국 10대 원수들을 살펴보면 모두 힘을 상징하는 사나이다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호한들이었다. 전쟁연대 및 전쟁이 지나고 일정 시기에는 전쟁 후유증에 의해 여자들이 선호하는 남자는 영웅 같은 모습이다. 평화시대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남자들이 강력한 힘을 잃어가고 여자들도 선호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청나라 초기 팔기군(八旗軍)은 강력한 힘과 카리스마와 용맹이 넘치는 기병들이었다. 평화시대가 200년이 넘어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이들이 하는 일이란 한가하게 한나절 새장을 들여다보고 차나 품평하고 여자를 품평하는 일이었다. 사나이다운 기질을 잃어가고 있어 남불남(男不男) 같은 ‘병신남자’로 변하고 말았고 온 사회 남자는 홍루몽에 등장하는 가보옥처럼 사나이 기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연약한 남자들이었다. 따라서 여자들도 가보옥 같은 연약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대세였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다보니 늘 불안하게 살아왔다. 그리하여 한반도 여성들은 힘을 상징하는 사나이다운 남자를 선호해왔다. 6.25전쟁이 끝나고 반세기 가까이 전쟁 후유증에 의해 여전히 영웅 같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남자를 선호했다. 그러다가 평화시대가 반세기 넘어서면서 힘을 상징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계집애처럼 곱살하게 생긴 꽃미남을 좋아한다. 연예인을 말하자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민수 같은 배우를 좋아하던 데로부터 요즘은 김수현 같은 꽃미남을 좋아하는 것이 대세이다. 20세기 말까지 꽃미남형 남자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고 꺼려하던 것이 21세기 들어 여자들이 남자를 선호하는 기준이 확 바뀌어 버렸다. 요즘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기준이 바뀌게 된 객관적인 원인이 또 하나 있다. 과거 농경문화에서 여자들이 힘(체력적인 힘)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농사는 남자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남자란 남(男)은 상형문자로서 문자 그대로 밭(田)에서 힘(力)쓰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농사는 남자의 힘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여자들이 아들애를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 중에서도 가장 큰 죄로 몰렸던 것이다. 현시대는 여자들이 아들애를 낳지 못해도 괜찮다. 아울러 과거처럼 남편들의 농사에 필수였던 체력적인 힘이 필요 없다. 여자도 남자처럼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 굳이 힘을 상징하는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강력한 카리스마보다 아기자기한 꽃미남이 더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정서로 변화되어가고 있어 남자다운 최민수보다 곱살하게 생긴 김수현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312    중국인관광객 추태는 문화관성 댓글:  조회:6240  추천:16  2013-11-25
중국인관광객 추태는 문화관성   중국경제가 급속 성장함에 따라 국민들의 주머니가 두툼해지자 해외관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필자가 20년 전 동남아에 갔을 때 태국관광지는 온통 중국인의 천하였다. 한국 통계청에 의하면 2011년 내한중국인관광객이 220만 명이고 올해는 300만을 거뜬히 초과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수년 후이면 중국인관광객이 해외에서 도는 숫자가 1억 명이 될 것이라 한다. 중국인관광객이 엄청 밀려오는 제주도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맞이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중국인의 추태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올해 상반년에만 100만이 넘는 중국인관광객이 몰려온 제주도는 몸살을 앓고 있다. 참다못해 일부 서비스업 업주들(노천 카폐)이 중국인관광객의 돈 벌기를 포기하고 ‘중국인관광객 사절’이란 간판을 내 걸기에 이르렀다. 주변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떠들기, 아무데나 가래침 뱉고,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기, 줄서기 의식 부족, 교통질서 무시 등등이 추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중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하여 생겨난 추태들이다. 중국인은 왜 공중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할까? 중국역사는 국가의 형성이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출현과 발달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 바탕이 농경문화의 틀 기초 위에서 세워지고 발전해왔던 것이다. 농경문화는 특성상 공공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해도 그런대로 사회는 굴러간다. 서구 국가 형성의 기초로 되는 도시는, 예를 들어 그리스 도시국가는 무역과 상업을 기초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질서가 정연할 수 있다. 상업발달과 무역발달은 공공질서문화의식을 필요로 하고 아울러 이와 같은 역사시기를 오래 걸치게 되면 국민의식이 자연스레 높아지게 된다. 중국이 2천 년 동안 국제무역시장에서 최대 수혜자였지만 상호 평등의 입장에서 상도의 룰에 의해 무역을 진행해 온 것이 아니다. 차와 도자기를 일방적으로 팔아먹은 역사였지 서로 주고받는 무역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서구처럼 무역에 따른 상업을 통한 사회공공질서문화의식이 결핍되었던 것이다. 중국 2천년 일방적인 무역역사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국제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의식을 짙게 만들었다. 중국인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주의가 비교적 강한 민족인데 이는 이 세상너머 이상사회에 대한 동경이 없고 신앙이 없이 철저히 현실주의로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서양인은 빨간 신호등을 만났는데 주변에 경찰이 없고 보는 사람이 없어도 파란신호를 기다린다. 서양인은 경찰이 없고 행인이 없어도 나를 보고 감시하는 존재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다. 내가 빨간 신호등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이 나를 처벌한다. 중국인은 하느님의 감시를 받는 문화가 없다. 신앙이 없으니 현실주의를 추구하고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추태는 자기중심주의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많다. 객관적인 도덕과 양심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떠들고 아무데나 버리고 줄 서지 않고 등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한편 중국인이 공공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한 이유를 전통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전통문화는 유교와 도교 양대 산맥으로 흘러왔다. 유교는 인문전통문화를, 도교는 본능적인 생활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해왔다. 유교와 도교의 차이점은 유교는 예와 효를 비롯해 인위적인 도덕윤리로서 인간을 교화한데 비해 도교는 유교가 주장하는 인위적인 문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비난하고 사람은 생겨난 대로 스스로 내버려두면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이른바 ‘무위자연’을 주창하였다. 중국인이 질서 없고 산만한 관습은 도교의 영향 때문이다. 추상적인 얘기는 그만두고 실질적인 삶과 직접 관련된 문제를 짚어보자. 우선 중국인관광객 추태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떠들기이다. 중국인(조선족 포함)은 한둘이 모여도 시끌벅적하게 떠든다. 음식점에서도 한두 상만 있어도 되게 시끄럽게 떠든다. 이는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굳이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으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타문화권에 가면 문제가 되고 손가락질 받게 된다. 한국에 사는 조선족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에서 조선족집거지 일번지로 불리는 가리봉시장 골목은 내가 7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인업주들이 적지 않았는데 요즘은 쌀에 뉘처럼 눈에 띄지 않게 줄어들었다. 왜 그들은 떠나야만 했을까?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이곳 00한국음식점에서 조선족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굴고 말썽을 피우자 업주가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이 업주한테서 사실경과를 들어보고 하는 말이 가관이다. “이 동네에서 장사하려면 이쯤은 감수해야 한다. 시끄러워 싫다면 당신이 차라리 장사를 그만두는 것이 편하지 않겠냐!” 중국인은 왜 떠들까? 역사적 유래가 있다. 고대 중국인의 유일한 오락은 희극이었다. 역사적인 관성에 의해 현대중국인도 희극을 굉장히 좋아한다. 희극의 특징은 남장여분(男裝女扮)하고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소리높이 떠들어댄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연들도 시끌벅적하게 떠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백 년 전 미국 선교사 아더 스미스는 저서 에서 “중국인이 왁작 떠드는 관습은 사람마다 자신을 희극 중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조용히 말할 일도 소리 높이 말하고 만약 자신의 말이 먹히면 흥분하여 떠들고 먹히지 않으면 체면이 깎인다(下不了台)고 여기고 타인이 듣던 말든 점점 소리를 더 높이는데 이런 생활문화에서 형성되었다.” 유독 중국부녀들에게서 나타나는 길거리에서 욕하기(骂街) 현상도 희극문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중국인이 아무데나 가래침 뱉는 관습은 전통가옥생활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전통가옥구조는 주방과 침실 바닥이 크고 흙으로 되어 있다. 신발을 신고 생활하며 가옥 바닥에 코 풀고 가래침을 뱉는다. 집안에서 코 풀고 가래침 뱉으니 밖에서는 아무데나 자유롭게 뱉을 것이다. 문화의 관성 힘은 막강하다. 막강한 힘에 의해 형성된 추태는 법과 제도로만 단기간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시간이 보약이란 말이 있듯이 지구촌에 편입되어 보고 듣는 일이 많게 살아가노라면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참고로 중국인관광객 추태는 해방 후 공중도덕교육과 인성교육이 결핍했던 원인, 8억 농민국가 국민이 현대도시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원인, 개혁개방 후 급속도로 성장한 경제발전에 비해 국민들의 의식은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거나 오히려 벼락부자 되어 안하무인으로 추태를 부리는 경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원인이 많으나 본문은 역사문화맥락을 짚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311    ‘꽌시(關係)는 ’식(食)‘을 토대로 이뤄진다 댓글:  조회:5284  추천:3  2013-11-01
  ‘꽌시(關係)는 ’식(食)‘을 토대로 이뤄진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수교를 맺은 후 한국인이 중국진출이 많아짐에 따라 중국에서 사업하는데 있어서 우선 중국의 ‘꽌시문화’의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 애로를 겪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중국의 ‘꽌시문화’에 대해 담론을 많이 하게 되고 아울러 ‘꽌시문화’에 대한 글도 많이 발표하고 있다. 중국의 ‘꽌시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중국 국가모습은 ‘가(家)’의 확대모델이다. ‘가’ 내에서 부모의 의무는 가족의 식을 해결한다. ‘국’의 천자는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치국방침 중 으뜸의 대사로 간주하고 백성들의 식을 해결하는 최고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군부(君父)’, ‘국부(國父)’, ‘황모(皇母)’, ‘국모(國母)’란 말은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천자가 ‘민이식위천’을 실천하는 상징물이 바로 보정(寶鼎:보귀한 가마솥)이다. 중국인의 시조인 황제(黃帝)가 만년에 보정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鼎)은 소, 말, 양, 돼지, 닭, 물고기 등 가축을 삼는데 사용되며 수요에 따라 대소가 다르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큰 보정은 은허무관촌사모무대방정(殷墟武官村司母戊大方鼎)인데 높이 133센티, 길이 110센티, 넓이 78센티, 무게 875키로다. 가마솥인 정(鼎)은 고대에서 국가정권을 의미하는데 삼국정립(三國鼎立)이란 곧 세 나라 정권의 대치를 뜻한다. 권력자들이 정(鼎)을 둘러싸고 연회를 베푸는데 주요자리가 주석(主席)이다. 천자가 직접 보정을 챙기지만 구체적으로 관리하는 자의 직급은 재상(宰相)이다. 재상은 가축도살을 책임진 자를 뜻하는 말인데 고대 중국에서는 제사용 가축도살을 맡은 자로서 그 직책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오늘날 총리급에 해당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역중천 교수는 “내각을 주방 내 설치하고 요리사를 파견하여 재상을 맡게 하는 것은 실로 ‘중국특색’이 농후하다.”고 밝혔다. 천자를 중심으로 재상 및 조정대소신료들은 ‘보정을 둘러싸고 각자 맡은바 소임을 다 한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식을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고 조정에 근무하는 크고 작은 여러 관직도 역시 식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국(國)’의 구조가 ‘가(家)’의 구조와 본질적으로 같은 패턴이라 보면 된다. ‘가(家)’는 부모를 중심으로 식을 공동으로 영위한다. 자녀가 성장하여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것은 곧바로 사회 성인이 되기 전까지 먹여 키웠기 때문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가 각별히 친해지는 이유가 역시 바로 한솥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더 큰 이유는 자녀에게 젖을 먹였고 밥 지어 먹였기 때문이다. 동부이모(同父異母)의 형제자매보다 동모이부(同母異父)의 형제자매끼리 더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역시 같은 엄마의 젖을 먹고 컸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적 관계는 혈연, 지연, 학연으로 맺어진다. 여러 가지 관계 중 혈연관계가 가장 굳건한 것은 역시 식을 공유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팔촌까지 한온돌에서 살았다고 한다. 한온돌에서 살았다는 것은 식을 공유했다는 뜻이다. 가난했던 시절 형제간에 누룽지를 빼앗아 먹으면서 서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식을 공유하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서로 우애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팔촌 사이도 한온돌에서 살면서 먹거리 때문에 많이 싸우기는 했겠지만 종국적으로 식을 공유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대가족문화가 혈연관계를 굳건히 하는 장점이 있으나 너무 번잡하여 분가하는 문화가 생겨났지만 고대사회에서는 멀리 떠나지 않고 한마을에 지내는 경우가 다수였다. 비록 분가해서 다른 살림을 차렸으나 한마을에서 살다보면 서로 식을 공유하는 일이 타남보다 빈번하여 여전히 정이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근현대화사회에 진입하여 형제, 사촌이 고향을 떠나 멀리 낯선 곳에 이주하여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 바뀌었다. 식을 공유할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났다는 속담은 이웃은 식을 해결하는 농사일을 서로 돕고 맛 나는 음식이 생기면 서로 나눠먹는 데서 정이 깊어 유래된 말이다. 지연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는 역시 어릴 적 짜개바지 친구이다. 짜개바지 친구는 서로 상대의 집에 가서 음식을 얻어먹는 기회가 많다. 사회친구가 배신을 때리면 나 혼자 속을 앓지만 짜개바지 친구가 배신을 때리면 엄마보기 미안해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엄마가 짜개바지 친구에게 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 어릴 적 짜개바지 친구가 세상 그 어떤 관계 중 가장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어릴 적 누룽지를 함께 나눠 먹었고 차매 서리를 함께 해 나눠먹었고 콩밭에 가서 콩서리를 함께 해 먹었고 미꾸라지를 잡아 함께 먹었던 추억이 그 어떤 추억보다 가장 머리에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친구배신보다 짜개바지 친구한테 배신당하면 흔히 상처를 크게 입게 되는 것이다. 짜개바지 친구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흔히 한고향 사람끼리 서로 친근하게 느끼는 감정은 한고장의 물을 함께 마셨고 같은 강물을 먹고 살았으며 같은 흙을 파먹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식’을 매개체로 서로 친근한 감정이 쌓여지게 된다. 학연이란 관계는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패턴이 달라질 수 있는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동창도 학연에 속하고 대학동창도 학연에 속한다. 하지만 어릴 적 동창과 대학동창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거리가 멀다. 어릴 적 동창은 한고향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식을 공유하며 성장해 왔기에 정이 더 끈끈할 수밖에 없는데 비해 대학동창은 사면팔방, 방방곡곡에서 모이기 때문에 성장기 식을 공유했던 감정이 없어 정이 쉽게 들지 못한다. 대학동창은 다만 서로 이익관계를 우선으로 친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진출해 서로 각자 다른 위치에서 서로 도울 수 있는 길이 생기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중국에서 직장을 단위(單位)라 하는데 중국인의 직장은 하나의 가정과 같은 존재이다. 오너는 직원들의 식을 해결해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직원의 부부갈등 사생활까지 책임지는, 마치 부모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단위를 확대된 가정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한직장 내에서 서로 다투다가도 일단 다른 단위 직원들과 시비 붙으면 모두 한편이 되는 것이 바로 식을 토대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동양 삼국에서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에 비해 혈연, 지연, 학연관계의식이 빈약하다. 한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위 삼대 관계를 매우 중시하지만 중국인의 ‘꽌시문화’에 비하면 역시 빈약하다. 이 지구상에서 ‘꽌시문화’를 가장 중시하는 민족은 중국인이라 말해도 전혀 어폐가 없다. 중국인은 ‘꽌시’를 하나의 네트웍으로 인식하고 ‘꽌시왕(關係网)’이라 부른다. 한국인이 중국진출 초창기에 “중국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되는 일도 즉석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아주 적고 차일피일 미룬다. ‘꽌시’를 통하지 않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 일단 ‘꽌시’를 통하면 해결이 쉬운 것이 중국사회 보편적인 현상이다. 참고로 밝히자면 세상의 다수 민족들은 비즈니스에 있어서 일이 성사되면 축하의 의미로 연회를 베푸는데 비해 중국인은 사무실에서 매듭지을 일도 미뤄 술상에서 성사시키는 사례가 많은데 이 또한 중국특색이 농후한 비즈니스이다.    
310    화약으로 기껏 폭죽 만든 중국 댓글:  조회:5564  추천:18  2013-10-26
화약으로 기껏해야 폭죽 만든 중국  김정룡 5천년의 중국역사는 발명의 왕국이었다. 황제(黃帝)는 농기구, 깃발, 가옥, 육십갑자, 의학을 발명했다. 복희씨는 팔괘를 발명하여 음양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은나라 시기 방위론을 발명해냈고, 점복에서 갑골문이 생겨나 한문의 토대가 되었다. 주나라 초기 음양으로 우주를 관찰하는 을 지어냈다. 공자는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사교육을 창설하였고 수나라부터 시행한 과거제는 근현대에 시험제로 지구촌에 전파되었다. 이외 도자기 문화는 이웃나라 고려와 일본은 물론이고 중세기 서양에까지 전파되었다. 고대 중국은 이루다 나열할 수 없는 발명을 이뤄냈는데 그 많은 발명 중에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은 사대발명(화약, 제지술, 인쇄술, 나침반)이다. 수인씨(燧人氏)가 불의 사용을 발명하여 날것으로 먹던 야식이 숙식문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을 구하기 어려워 한 번 지핀 불을 살려 불씨로 보존하여 사용하는 것이 몹시 번거로웠다. 그래서 고대중국인은 화약을 발명하게 되었고 장소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중국인은 화약으로 오락용인 폭죽을 만들었다. 400년을 거쳐 서양에 전파된 화약은 그들이 총과 대포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혹자는 중국인이 머리가 둔해 화약으로 기껏해야 폭죽을 만들어냈지만 서양인은 머리가 좋아 총과 대포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만약 중국인이 머리가 둔하거나 서양인에 비해 머리가 딸린다면 왜 서양인이 화약을 발명하지 못하고 중국인이 화약을 발명해냈는가? 화약으로 폭죽, 화약으로 총포를 만들어낸 것은 머리문제가 아니라 문화배경에 따른 결과로 보아야 마땅하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농경문화였고 서양은 역사적으로 유목문화였다.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특징이 중국은 기껏해야 화약으로 폭죽을 만들었고, 서양인은 총과 대포를 만들어내는 소이연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고 유목문화의 특징은 이동이다. 정착문화는 낯선 사람을 만날 기회가 아주 적다. 아침에 만난 사람 점심에 만나고 또 저녁에 볼 수 있다. 마을사람끼리 자주 만나다 보면 정이 들게 된다. 정이 들었기 때문에 서로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유목문화는 풀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늘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서로 경계심을 갖게 되고 풀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 풀은 유목문화에서 생존의 가장 귀중한 존재이다. 풀을 점령하면 생존할 수 있고 풀을 잃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풀싸움은 네가 죽고 내가 사는 서로 죽이고 죽는 극단적인 혈투이다. 농경문화는 사람끼리 정이 들기 때문에 화목을 추구한다. 공자의 에 ‘이화위귀(以和爲貴)’란 문구가 있다. 세상만사 중 화목, 화합이 으뜸이다. 농경문화는 마을사람끼리 서로 협동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화’가 으뜸이다. ‘화’하면 협동이 이뤄지고 ‘화’하지 못하면 마을공동체구성이 깨지게 되고 농사를 망치고 생존에 크나큰 영향이 미친다. 유목문화는 인간관계가 늘 서먹서먹하여 정이라는 것이 존재할 공간이 없다. ‘화’하고 싶어도 생활환경이 허락지 않는다. 오로지 힘의 경쟁에 의해 생존이 결정된다. 이쯤 되면 결론이 나온다. 농경문화에는 살상무기가 필요 없는데 반해 유목문화는 살상무기가 필수적이다. 중국인이 화약으로 기껏해야 오락용 폭죽을 만든데 비해 서양인이 중국의 화약을 수입하여 총과 대포 같은 살상무기를 만들어낸 것은 머리의 총명여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문화 환경에 의해 빚어진 결과였다. 악수하는 인사문화는 서양에서 유입된 것이며 그 유래는 살상무기와 관련이 있다. 즉 유목민은 수시로 살상무기를 휴대한다. 흔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서로 경계하게 되는데 내가 상대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뜻을 전하는 방식으로 나의 손에 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뜻을 확인하는 방법이 곧 서로 상대의 손을 잡아 보이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중국인은 내성적인 성격에 의해 인사할 때 손에 손을 얹고 자기 몸에 붙이는데 반해 서양인은 외향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인사할 때 손을 밖으로 뻗는다고 말한다. 견강부회의 주장이다. 악수의 유래를 안다면 억지춘향식으로 두들겨 맞추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 늦게 개발된 아메리칸 대륙(미국)에서 아직도 총기휴대가 합법이고 세상에서 안전이 가장 불안한 이스라엘에서 총기휴대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유목문화 잔재에 의한 현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농경문화 전통국가에서는 총기휴대가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는 것이고 총기휴대가 허락되고 있는 나라는 모두 유목문화 전통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중국이 사대발명에 의해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부유한 나라였지만 세월 흐름에 따라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치명적인 이유가 자신들의 발명품인 화약과 나침반이 서양에 도입되어 서양이 그것을 활용하여 중국을 침략하고 마치 살찐 돼지고기를 나눠 먹듯이 중국을 자기네 나름대로 분할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찬란했던 2천년 제국이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309    재한조선족 왜 주눅 드나? 댓글:  조회:8646  추천:48  2013-10-22
재한조선족 왜 주눅 드나?   재한조선족이 60만 명에 육박함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의 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좋은 일이다. 이른바 조선족 지성인들은 재한조선족의 정체성 문제를 많이 고민하고 있는듯하다. 역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정체성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아무데나 반창고 붙이듯 갖다 붙이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 지나치게 억지스러워 보인다. 요즘 는 글이 여러 인터넷매체를 달구고 있다. 재한조선족이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현상은 잘 짚었다. 그러나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본질을 짚지 못했다. 본질을 짚지 못하다 보니 그 이유를 심지어 왜곡하고 있다. 저자는 재한조선족이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이유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조선족역사’를 몰라서라고 보고 있다. 모르니까 주눅 들어 시든 배추신세로 살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채영춘 선생이 미국에 다녀와 쓴 글 ‘중국인은 뒤로’하는 문장을 보면 중국인이 서양에서 무시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우 무시당하는 중국인이 “우리 중국은 5천년 찬란한 문화를 지니고 있고 고대에 수많은 발명으로 세계문명에 기여했는데 왜 당신들이 우리를 무시하는가?” 이런 식으로 큰소리친다면 서양인한테 씨알이나 먹힐까? 서양인이 중국인을 무시하는 것은 중국인의 국민소질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조선족이 한국 땅에서 무시당하는 것 역시 조선족의 소질문제이다. 88서울올림픽 전후 초창기에 한국에 다녀온 조선족은 동정의 대상으로 대접을 받았지 무시당하지 않았다. 그 후 1992년 8월 24일 중한수교를 계기로 코리안드림 바람이 거세게 불어 조선족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특히 2007년 3월 4일 방문취업비자가 생겨남에 따라 30여 만으로 늘었다가 지금은 국적취득자까지 포함하여 60만에 가까운 조선족이 한국에 살고 있다. 이들이 한국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조선족이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무시한다고 해서 “우리는 당당한 중국조선족, 과경민족의 자랑,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고 국공내전에 적극 참전하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데 왜 당신들이 우리를 무시하는가?”고 호소한다면 정신병 취급받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자랑스러운 조선족역사’가 한국생활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날 개방된 사회에서 한 집단이 타자(他者)세계에서 무시당하는 것은 그 집단의 과거 역사와 관련이 없다. 미국이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가? 미국은 뿌리도 없고 ‘잡혈통’들이 모여 세운 나라로서 내세울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타자세계에서 대접받는 것은 경제대국이자 국민소질 때문이다. 일본은 얄미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인이 타자세계에서 대접받고 있는 것은 역시 경제대국이자 일본인개개인의 국민소질 때문이다. 현시대에 있어서 한 집단이 대접받느냐, 무시당하느냐 하는 것은 그 집단이 속한 나라의 경제실력과 국민소질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실력과 국민소질을 말하자면 전자에 비해 후자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경제가 승승장구하고 있고 G2로 부상하였지만 중국인이 타자 세계에서 대접받지 못한 주요 이유가 바로 국민소질이다. 아무데나 낙서하고, 떠들고, 침 뱉고, 휴지를 아무데나 버리고,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는 등등의 낙후된 사회공공질서 의식이 부족하여 외면당하고 심지어 말밥에 오르고 있다. 전에 필자가 밝혔듯이 재일조선족사회는 유학생을 주류로 형성되었다면 재한조선족사회는 노무일군이 주류로 이뤄졌다. 하늘과 땅 차이이다. 노무일군의 출신을 보면 농민이 많고 가령 도시 호구를 갖고 있더라도 사회 밑바닥에서 왔거나 혹은 도시에 진출한 시간이 짧거나 아무튼 예전의 농경사회 낙후된 문화의식과 폐쇄된 언저리문화의식을 갖고 있는 집단인 조선족이 한국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의 본질적인 소질문제란 무엇일까? 우선 조선족은 공공질서의식이 형편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횡단보도를 가로 지르고, 아무데나 침을 뱉고, 전화 통화소리 높고,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금연택시에서도 기어코 담배를 피워 기사와 싸우고, 택시에서 해바라기 까고, 술 마시고 싸움이 많고, 노상방뇨하고, 쓰레기를 아무렇게 아무데나 버리고, 쓸데없는 일에 경찰과 대들고 싸우고, 일 보러 가선 묻는 말에 대답 잘 안 하고, 인사성이 밝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고집만 세고, 사회주의 큰가마밥 의식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경제문화에 익숙지 못하고, 이루다 열거하자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주말 저녁 대림역 일대를 보면 담배꽁초를 비롯한 온갖 쓰레기들이 난장판을 이루고 술주정에 쌈박질이 많고 택시기사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난잡하다. 이것이 재한조선족사회 추한 자화상의 축소판이다. 조선족은 자신들의 잘못은 모르고 한다하는 소리가 한국과 한국인이 어떻게 나쁘고 속 좁고 마치 상종할 수 없는 나라나 사람처럼 흉보기 일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한국과 한국인의 흉을 보면서도 정작 가라면 돌아갈 사람이 기본상 없다는 것이다. 한 이주 집단(장기체류 포함)이 타자세계에서 성공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야 한다. 재한조선족사회는 경제적으로 부자는 아니지만 코리안드림 20여 년을 통해 먹고 사는 보릿고개를 이미 넘었다.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중국어로 표현하자면 ‘小康’ 수준에 이르렀다. 둘째 문화적으로 적응이 잘 되어야 한다. 지금 재한조선족사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에 적응이 어려운 것이다. 문화라면 방대한 개념이지만 간단하게 줄여 말하자면 공공사회질서만 잘 지켜도 초보적으로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재한조선족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지금의 상태대로 문화적 적응이 어렵다면 재한조선족사회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셋째 정치참여가 활발해야 한다. 정치참여가 활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위 두 가지에 비하면 재한조선족발전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이 나오면 마치 재한조선족사회가 천지개벽을 맞아 획기적으로 바뀔 것처럼 떠들고 있는데 필자는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재한조선족사회발전은 한두 명의 국회의원 배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308    월세, 전세에 우는 재한조선족들 댓글:  조회:6354  추천:0  2013-10-17
월세, 전세에 우는 재한조선족들 일부 악덕 주인들 체류만기 악용해 보증금 돌려 안 줘 고충 심각해   한국에 사는 조선족이 60만 명에 가깝다. 연길시 인구를 초과하는 숫자 거의 모두 월세방, 전세방을 구해 거주하고 있다. 내 집이 아닌 임시 세 들어 살다보니 여러 가지 고충이 많다. 한국부동산 계약은 내용이 아주 간단하다. 임대인과 임차인 인적사항이 있고 보증금 금액과 월세 액수 및 계약기간을 명시하는 것이 전부이다. 세 들어 살다보면 자질구레한 일이 많지만 계약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 문제가 생기면 서로 책임을 상대에게 떠밀어 갈등을 빚기가 일쑤이다. 보일러가 고장 나면 수리비 혹은 교체비를 세입자가 부담하느냐 주인이 안느냐는 마찰을 비롯해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 갈등을 많이 겪는다. 맘씨 고운 주인을 만나면 그나마 편히 살 수 있지만 시비도리에 밝지 못한 주인을 만나면 혼줄 날 정도로 맘고생이 심하다.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 가장 큰 마찰은 보증금이다. 한국부동산법에 의하면 계약기간 만료 전에 임의적으로 보증금을 올릴 수 없다. 가령 올린다 해도 5%를 초과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부 주인은 10%~20% 마음대로 올린다. 임대인이 반발하면 살기 싫으면 집을 빼라고 닦달한다. 법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시간 팔고 돈 팔고 수지가 맞지 않는다. 부동산법에 의하면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세입자가 집을 뺄 수 있다. 다만 1개월 전에 미리 주인에게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입자는 법대로 하였으나 주인은 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맘대로 처리한다. 예를 들어 계약기간이 만료되든 1개월 전에 통보 받았든 주인은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다. 조선족 Y씨 여인은 3년 전 영등포구 봉천동에서 1,000만원 보증금 월 30만원짜리 세집을 구했다. 2년 전 딸애가 한국에 왔고 강남 00무역회사에 근무하고 Y씨 여인도 강남 00음식점에 근무하고 있어 1년 전 모녀 직장이 가까운 건대입구 근처에 이사 갔다. 그때부터 큰 문제가 생겼다. 봉천동 주인이 집이 나가든 안 나가든 1개월 이내로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3개월 지나도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막무가내였다. 6개월 될 즈음 보증금을 돌려받았지만 황당한 사건이 생겼다. 주인이 6개월 비여 있은 기간의 월세 값 30만원씩 6개월 치 180만원을 보증금에서 까고 송금했다. 이 사건은 현재 민사소송 중에 있다. 요 몇 년래 재한조선족의 소득이 증가하고 가족이 늘어남에 따라 전세에 사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전세 보증금은 보통 수천만원이다. 한국에서 번 돈 저축을 거의 털어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상식적으로 전세 보증금은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돌려받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제때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고 또 보증금을 날려버리는 사례도 일부 나타나고 있어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사건도 일어나고 있다. 조선족 H씨는 4년 전 구로구 개봉동에서 5,000만원짜리 전세를 구했다. 1년 전 개인 사정이 생겨 중국에 돌아가려고 집을 빼겠다고 주인에게 통보했다. 그런데 주인이 사업이 부도나고 집도 경매에 들어가 돈을 돌려받을 수가 없어 조카에게 맡기고 귀국했다. 주인이 경제형편이 나아졌지만 본인이 아니고 조카한테 돌려줄 수 없다는 핑계로 아직까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H-2비자 소지자가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체류만기가 있는데 일부 주인들은 만기라는 약점을 잡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수많은 조선족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전세에 살던 만 55세 이상자들 중 3개월씩 임시 체류하고 귀국하는데 주인들이 이 약점을 잡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사례도 허다하다.
307    연변지명유래 해석 오류 댓글:  조회:6475  추천:1  2013-10-11
연변지명유래 해석 오류     요 몇 년래 연변에서 지명유래와 유적유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역사문화에 연구에 심히 취미를 갖고 있는 필자는 여러 선생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김호림 선생은 고구려유적부터 시작해 연변역사유적에 대한 연구가 깊고 넓으며 또 지명연구에도 기여가 크다. 개인적으로 일면식조차 없지만 이 기회를 빌어 경의 인사를 전한다. 역사유적과 지명연구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고고학지식, 역사문화지식, 인류사회학지식, 민속학지식 등 세상만사 지식을 갖춰야 한다. 가령 숱한 고생을 쏟고 연구해내도 사회적으로 인기가 별로이다. 인기 없는 일에 매진한다는 것은 웬만한 결심이 없이는 해낼 수 없다. 그래서 이 분야의 지식인들을 탄복하고 존경한다. 유적연구와 지명연구는 워낙 어려운 일이기에 가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유래를 정확히 짚지 못하면 세밀한 이성적 학문이 그냥 감성적인 개인 느낌에 의해 견강부회의 억지 해석이 될 수 있어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요즘 조글로에 실린 김호림 선생의 연변지명유래 해석에 있어서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필을 들게 되었다. 김호림 선생의 본문 중 한 단락이다. “연변의 많은 지명은 이처럼 이민들의 주거지 환경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용정이라는 이름은 19세기 말 이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옛 우물을 발견하면서 작명되었고 도문은 도문이라는 이름 먼저 워낙 석회 가루가 날리는 동네라는 의미의 회막동(灰幕洞, 일명 회막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벌을 찾아 또 샘물을 찾아 이삿짐을 풀었던 조선인들은 간평間坪처럼 골짜기 사이에 들 평坪을 넣어 지명을 만들었고 또 약수동藥水洞처럼 샘물가에 삼수변의 동洞을 넣어 감칠맛 나는 이름을 지었다.” 위 문장에서 동(洞)에 대한 해석이 애매할 뿐만 아니라 洞의 유래가 설명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지명에서 나타난 洞은 감칠맛 나는 삼수변이 붙은 동이 아니다. 한반도 행정구역 나눔을 보면 道, 郡, 面, 里와 市, 區, 洞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洞은 원시인류가 산에서 대지에 내려와 거주할 때 일정기간 동굴에서 살았던 데서 유래되었고 里는 동굴 속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선 里를 마을 리라 해석한다. 洞과 里가 합쳐 洞里이며 우리 말 동네는 土話이고 표준어로 洞里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인류가 무리지어 거주하는 곳이 洞里라는 뜻에서 오늘날까지도 동네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원시인류 생활모습에서 유래된 洞이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사용하고 있을까? 현대인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 원시적 어휘 잔재가 굉장히 많은데 일례로 驛은 본래 말을 쉬우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오늘날 기차역이나 버스역은 말이 쉬는 곳이 아니나 원시적인 문화유래 때문에 세금 변인 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馬변인 驛을 사용하고 있다. 자동차의 힘을 馬力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시를 비롯해 한국 도시사람들이 동굴 안에서 살고 있어 禿山洞, 大林洞, 加山洞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또 洞마다 洞長이 있는데 동굴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개 최소행정구역인 洞을 관리하는 직급이다. 한반도의 인류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洞里라 부른 것이 유래가 깊기 때문에 만주에 이주한 초기에 조선인 마을을 이루면 洞을 붙여 부른 사례가 많았을 것이고(실제로 해방 전에는 洞이 붙은 지명이 많았으나 해방 후 중국식 행정구역 나눔에 따라 洞이 사라지고 村이라 부르게 되었음)연변지명에 나타난 洞은 이와 같은 역사적인 맥락을 거슬러 살펴보아야 정학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식 행정구역엔 洞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살아온 조선족은 洞, 里, 洞里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할 수 있어 애매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유래를 연구하는 것은 학문이며 학문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근거를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감성적인 느낌에 의해 해석한다면 견강부회 억지해석이 되어 학문적인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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