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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년세계》잡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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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천우컵] 우리는 까치둥지마을에서 살았다 댓글:  조회:427  추천:0  2020-10-09
우리는 까치둥지 마을에서 살았다 남옥란    토박이가 아닌 우리 엄마는 조양천에서 유명하다 할 ‘수레집’의 딸이였고 아버지는 철로에서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면서 입살이나 하던 막일군이였다.    해방 난 이듬해, 아버지는 한분 뿐인 백부를 따라서 구수하마을로 이사를 했고 그 곳에서 우리 다섯 남매를 낳아 키우셨는데 예쁘지만 키가 작은 엄마를 닮아서인지 다섯 남매는 모두 일매지게 키가 작달막했어도 생김새만은 야무졌다. 우로는 언니와 나 그리고 밑으로는 남동생 둘, 막내녀동생 이렇게 줄줄이 다섯을 두었다.    우리 형제는 이렇게 구수하벌 까치둥지마을에서 뒹굴면서 자랐다. 우리 집 동쪽 논밭에는 백년된 아름드리 백양나무가 있었는데 우듬지의 가지 사이에 역시 아득히 오래돼보이는 까치둥지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까치둥지마을이라고 불렀다. 또 물이 아홉갈래로 흐른다고 해서 구수하라고도 불렀는데 수전과 한전이 반반인 산간지대였다. 우리 마을은 학교, 위생소, 촌공급판매합작사를 구전하게 갖추고 있었다. 마을에서 도보로 40분 정도 가면 조양천 기차역에 닿을 수 있어 교통이 편리한 데다 쌀밥을 먹을 수 있고 학교도 가깝고 동네사람들의 인심 또한 좋은 살기 좋은 시골마을이였다.    이렇듯 흑백사진처럼 진한 풍경이 안겨오는 내 고향마을에는 도합 30여가구가 오붓하게 모여서 살았다. 마을의 맨 뒤끝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터밭이 운동장 만큼이나 넓었다. 터밭 중심에는 20평방메터 남짓한 초가집이 큰 버섯송이처럼 댕그라니 솟아있었다. 집 동쪽에는 큰길이 나있었고 큰길과 터밭 사이로 도랑물이 졸졸 쉬임없이 흘렀다. 동생들의 기저귀며 온집 식구들의 옷이며 흙이 게발린 신이며 농기구들은 모두 도랑에서 말끔하게 씻어냈고 터밭에 가물이 들어 곡식들이 폴싹 고개 숙이면 퍼내도 퍼내도 마를 줄 모르는 그 도랑물로 메마른 터밭을 적셔주었다. 그러면 농작물이 금시 푸르싱싱하게 생기를 띠고 고개를 쳐들었다. 가축들에게도 그 도랑물을 먹이였다. 아홉살 난 큰남동생이 소고삐를 쥐고 앞에서 걸으면 소는 엉기적엉기적 따라나서서 도랑에 머리를 푹 파묻고 바닥이라도 낼 것처럼 걸탐스럽게 도랑물을 들이켰다.    집에서 기르는 가금, 가축이 어지간히 많은 게 아니였다. 오리, 닭, 게사니, 집 지키는 누렁이, 외양간에는 동생이 물을 먹이던 생산대의 소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봄부터 산란기에 들어선 오리와 게사니는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아무때나 알을 낳았다. 닭들처럼 널판자로 된 다락 우에서 자는 것도 아니고 외양간 구석에 벼짚으로 틀어 덩그렇게 달아맨 둥주리 안에서 알을 낳는 것도 아니였다. 그래서 보다 못한 아버지가 여섯살짜리 남동생의 키 만큼한 높이로 집 동쪽의 벽에 기대게 해서 굴 하나를 지어주었는데 거기에서 꽥꽥거리면서 게사니와 오리가 동무하며 춘하추동을 지냈다. 봄부터는 가금알을 받아서 삶아서도 먹고 염장을 해서도 먹고 일부는 동네에서 가깝게 지내는 이웃에 바가지에 담아서 나누어도 주면서 이웃끼리 오고가는 정 가득히 오붓하게 지냈다.   마을과 조금 동떨어진 우리 집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봄이 되니 마당에는 초록색 풀들이 뾰족뾰족 돋아났고 메꽃이 그 큰 마당을 가득 채웠다. 민들레도 노란 꽃을 떠이고 수줍게 서있었고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노랑나비, 흰나비가 한들한들 춤을 추고 구제비도 옛집을 용케 찾아와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웠다. 짚으로 이영을 올린 음달진 쪽은 참새떼들이 날아와 터를 잡고 사시절 살아갔다. 여섯살짜리 남동생과 세살짜리 녀동생은 싸리나무가지를 손에 쥐고 나비를 쫓아다녔고 마당에 내려앉아 꼬리를 달싹거리며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새떼들을 쫓느라고 재미나서 깔깔 웃고 떠들었다. 강아지도 덩달아 애들과 섭쓸려서 엎어지고 뒹굴면서 신나게 놀아댔다. 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흰구름송이가 시름없이 떠도는데 우리 집 풍경과 어울려서 한폭의 생생한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아늑하게 안겨왔다.   봄은 파종계절이다. 채소 씨앗은 동네에 사는 여러집들에서 서로 바꿔가며 심었다. 엄마가 콩종자를 순희네 집에 주면 순희네는 우리 집에 없는 수수종자를 보내왔고 뒤집에 사는 한족색시 왕연이는 오이가 크고 산량이 많으니 심어보라면서 오이씨를 들고 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늘 숨 돌릴 새도 없이 바삐 움직였다. 앞마당에는 오이, 고추, 상추, 마늘, 도마도, 가지를 심고 서쪽 마당에는 옥수수, 수수, 콩 등 늦가을 곡식을 심었다. 동쪽 마당에는 감자, 무우, 배추, 키낮은 떡호박이며를 옹기종기 심어놓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이 동쪽으로 나있기에 시야를 가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는 화학비료를 별로 안 쓰고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의 배설물을 흙에 섞어서 만든 유기농 비료를 쓰던 때라 토지가 깨끗하고 비옥했다.   록색이 짙어가는 여름이 오면 우리 집 터밭과 울바자 주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아롱다롱 곱게 피여나 꽃내음이 뜨락에 차고넘쳐났다. 모닥모닥 피여난 새하얀 감자꽃, 노란 호박꽃, 하얀 완두꽃이 있는가 하면 울바자 밑에는 아버지가 심어놓은 봉선화, 가지가 무성한 분꽃, 수수한 란초꽃, 가을국화와 ‘꽃중의 왕’이라 불리우는 모란꽃, 키다리아저씨 같은 해바라기꽃도 있었다. 이젠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말 그대로 꽃바다였다. 이 때가 되면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서 돌에다 봉선화를 짓이겨 손톱에 바르고는 버들잎으로 동여매고 물들기를 기다린다. 반시간 쯤 지나서 버들잎을 풀어내면 손톱은 연분홍빛으로 물 들어있다. 서로들 제 손톱이 더 이쁘다고 뽐내면서 자랑을 한다. 분꽃은 까만색 씨앗이 맺히는데 그 씨앗을 터치우면 하얀 분가루가 쏟아져나온다. 그것을 손톱으로 후벼서는 얼굴에 문지르면 얼굴은 대뜸 새뽀얗게 된다. 화장품이 없었던 우리에게 대자연이 준 선물인 셈이였다.   어디 이뿐이랴. 먹을거리도 마당 가득했다. 울바자 안에는 오롱조롱 탐스럽게 열린 빨간 도마도, 한족색시가 준 씨앗이라고 해서 한족 오이라고 부르던 빨래방치 같은 오이들이 주렁주렁 보기 좋게 달려 있다. 다른 채소들은 언제 크는지 전혀 신경이 안 쓰였지만 날것으로 먹을 수 있는 오이 만큼은 우리들의 눈에서 빠져나가기가 어려웠다. 엄마 몰래 도적고양이마냥 살금살금 오이밭에 기여들어가서는 올리훑고 내리훑고 한다. 노란꽃이 떨어지기 바쁘게 남자애 ‘고추’ 만한 크기의 오이가 달린다. 이틀이 지나면 중지 길이 만큼 자라고 또 며칠이 지나면 드디여 먹을 수 있게 커진다. 꼼꼼하고 령리한 큰남동생은 오이를 따서 먹고도 모르쇠를 대군 했다. 입가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 폴폴 풍기는 오이냄새에 금방 들켜버리면서 말이다. 엄마는 우리가 오이밭을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하고도 오이넝쿨 모양새만 보고 감쪽같이 알아맞추었다. 오이는 따도 괜찮으나 넝쿨은 잡아채듯 다치지 말라, 그러면 넝쿨이 상해서 오이가 열리지 못한다고 늘 똑같은 잔소리를 하군 하셨다. 아무튼 파랗고 싱싱한 오이는 한달 가량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오이가 늙으면 그냥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매일매일 한 구럭씩 따서는 세 동생들의 어깨에 지워서 이웃집에 보냈다. 그래도 며칠이 지나면 팔뚝 같은 누런 오이들이 넝쿨 여기저기에 달려서 밭고랑에 척척 드러누워 잠을 청한다.    개꼬리가 올리솟으면 옥수수 알이 잉태하기 시작한다. 옥수수 이삭들은 금발 같은 수염을 곱게 드리우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 모양새로 그 자리에 서있는다. 그래도 매일이 다르게 통통하게 살이 찐다. 중복이 지나면 따먹을 수가 있는데 엄마는 세살짜리 막내동생에게 간식으로 먹이려고 매일 새벽이면 나가서 손톱으로 껍질을 살짝 벗기고 알맹이를 꼬집어본다. 어지간하게 여물었다 싶으면 딱 하나를 따다가 밥가마 한쪽에 넣고 삶아서 막내에게 먹이군 했다. 살짝 여문 옥수수의 단물이 감칠맛이 있어서인지 막내는 그렇게도 맛나게 냠냠 먹어주었다.   드디여 감자, 고구마를 먹을 수 있고 호박이 영글고 옥수수도 마음 대로 따먹을 수 있는 수확의 계절이 왔다. 그 무렵이면 이웃집 엄마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기쁨의 잔치를 벌린다. 영이 엄마, 순이 엄마, 정금이 엄마, 미선이 엄마, 원석이 엄마가 아침부터 갓 젖을 뗀 아이와 젖먹이를 업고 안고 우리 집 앞마당에 모여든다. 정금이 엄마는 중복에 심은 배추 이파리로 담근 물김치를 들고 왔고 원석이 엄마는 고추장을 사발에 담아들고 왔다. 순이 엄마는 정원에서 갓 익은 오얏을 따가지고 왔는데 애들이 신이 나서 한웅큼씩 쥐고서 맛나게 먹었다. 동생 셋은 꼬마들이 많이 와서 좋다고 야단법석이다. 엄마들은 왁작 웃고 떠들면서 여름 내내 밖에 걸어놓았던 딴가마에 먼저 옥수수를 안치고 그 우에 호박과 고구마, 감자를 올려놓는다. 드살이 센 순이 엄마가 마른 쑥대를 안아다가 불을 지핀다. 한시간 가량 지나면 가마 안에서 구수한 냄새와 함께 단김이 가마뚜껑 틈으로 새여나오는데 마치 증기를 내뿜는 기관차 같다. 애들은 빨리 먹고 싶어서 군침을 질질 흘리며 엄마한테 졸라댄다. 우리 아버지가 마당 한가운데 여름 내내 해볕에 말리웠던 쑥단을 풀어서 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우에 둥그렇게 모여앉는다. 엄마는 집안의 크고 작은 그릇들을 모조리 들고 나와서는 가마 안의 음식들을 꺼내여 보기 좋게 담아 조무래기들에게 먼저 나눠준다. 때마침 지나가는 이웃동네 분들에게도 맛 보라고 손에 듬뿍 쥐여주었는데 농가의 인심은 그렇게도 풋풋했다.    까치둥지마을에서 살다보면 산해진미라도 당기는 게 없고 무릉도원이 부러울 게 없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속이 출출할 때 먹는 상추쌈은 왕의 수라상도 저리 가라 한다. 남정네들은 한켠에서 마늘, 파, 가마에 쪄낸 가지, 풋고추를 토장에 꾹꾹 찍어서 술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말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땅거미가 아물아물 밀려오면 아버지는 모기떼를 쫓느라 쑥을 태우고 동생과 동네 조무래기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반디불을 쫓느라 여념이 없다. 외양간의 누렁소와 기타 가축들이 기척없이 조용해진다. 하루 동안 먹거리를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엄마들은 밤이 깊어 잠투정을 하는 애들을 데리고 각자 자기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동네 조무래기 친구들과 하루종일 즐겁게 뛰놀았던 동생들도 머리가 베개에 닿기 바쁘게 단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까치둥지마을에서 우리 남매들도, 동네의 조무래기들도 대자연의 품속에서,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는 모두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백년된 까치둥지는 력사의 견증인으로서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 그 곳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해주고 있다. 아, 꿈속에서도 가고 싶은 고향의 초가집, 태를 묻고 잔뼈를 굳히고 꿈을 키웠던 내 고향 까치둥지마을이여, 새하얀 억새풀이 들녘에서 춤을 추며 우리를 지켜보던 자랑스러운 구수하벌이여, 대를 이어 천년만년 길이길이 전해가리.   2020년 9호 
9    [천우컵] 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댓글:  조회:475  추천:0  2020-09-21
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한영철 지난해에 우리 집 세식구는 한국에 가서 음력설을 쇠게 되였다. 그전까지 공무차로든 친척방문차로든 한국에 여러번 다녀왔지만 거기서 음력설을 쇠기는 처음이였다. 하긴 뭐 요즘에는 형님을 비롯한 형제들과 조카들 그리고 친척들 대부분이 한국에 머물러있는지라 설명절이나 련휴 때면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움직이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에 간 지 얼마 안되여 형님은 이번 걸음에 아버지의 고향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물었다. 아버지의 고향을 한번 다녀오는 것이 오랜 념원이였던지라 나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정월 초사흗날, 형님, 누나, 조카 그리고 나까지 넷이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떠났다. 평택에서 떠난 차는 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달렸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온통 산이였다. 차가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버지의 동년의 발자취와 청춘의 숨결이 남아있을 땅을 밟게 된다는 격동과 더불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북받쳐오르는 이름 모를 감동 때문이였다. 사전에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큰집의 형수님이 우리가 어떻게 오고 몇시에 도착하는가고 여러번 전화로 문의해왔다. 그러고도 걱정스러웠는지 포항에 있는 딸한테 전화를 해서 우리를 마중해서 모시고 오라고 분부까지 했다. 차는 경주에 들어서기 전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버지의 고향인 산내면 쪽으로 달렸다. 조상들의 뼈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고향과 가까워질수록 초조감 때문에 나는 차창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길옆에 무심히 자란 일초일목마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을 차창 쪽으로 바짝 밀어붙이고 더욱 유심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떤 곳일가? 옛날에는 어떠했을가? 지금은 또 어떤 모습으로 되여있을가?’ 나로 말하면 조상들의 넋이 슴배여있고 그들의 숨소리가 은은하게 다가올 것만 같은 고향에 다가선다는 그 자체가 감동이고 격동이였다. “다 왔어. 여기야!” 그 소리에 흠칫 놀라서 깊은 사색에서 깨여났다. 차에서 내려보니 시골 내음이 다분한 오붓한 동네였다. 우리가 찾아간 사촌형님네는 새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자못 아담해보였다. 널판자로 울타리를 빙 둘렀고 뜰안에는 경운기 한대와 네바퀴 오토바이가 세워져있었다. 집 뒤에는 참대나무가 빼곡이 자라있었다. 대문을 열고 뜨락에 들어서는데 사촌형님과 형수님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뛰여나온다. 큰아버지네 아들과 며느리 되는 분이니까 우리 가문의 종가집 후손들이였다. “아이고야, 너들이 왔고나…” “형수님, 안녕하셨습니까?” 한바탕 수인사가 끝나고 나서 사촌형님 내외가 정좌하자 우리는 례법 대로 큰절을 올렸다. “너그들이 오니 참으로 반갑다야. 오노락꼬 욕 보았다.” “많이들 기다렸다. 고생들 했다.” 처음으로 듣는 한씨 집안만의 고유한 남도말투였다.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듯했지만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말투가 떠올라서 그랬던지 그 소리가 듣그럽게 들리지 않았다. ‘아, 이것이 바로 혈통이라는 거구나. 옛말이 그른 데 없다더니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구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에 어느덧 저녁 때가 되였다. 형수님은 75세의 고령이였지만 제사와 같은 대소사를 자주 치르는 종가집 며느리라 그랬는지 저녁 차리는 솜씨가 여간 잽싼 게 아니였다. 년세에 비해 목소리도 챙챙하고 기억력도 아주 좋았다. 저녁상을 둘러싸고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큰아버지는 생전에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엄청 즐거워했단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중국에 간 우리 아버지가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큰아버지랑 삼촌들이랑 함께 아버지 제사까지 지냈다니 그 심정을 가히 헤아릴 수 있었다. 이런 얘기들을 그전에 인편으로 듣기는 했다만 이번에 아버지의 고향에 와서 직접 들으니 그 충격은 배로 늘어났다. 정든 고향을 떠나 부모형제와 생리별을 하게 된 것도 엄청 고통스럽고 서러운 시련이였을 텐데 한몸이 성한 채로 퍼렇게 살아있는 데도 부모와 형제들은 그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제사까지 지냈다고 하니 너무나도 억이 막혔다. 순간 이국타향에서 혼자서 향수를 달래며 죽도록 고생만 해온 아버지의 얼굴이 우렷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1921년, 한국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에서 한씨 가문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한일합병’으로 일제의 치하가 시작되여서부터 침략자의 마수는 조선 팔도강산 그 어디든 뻗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편벽한 시골 오지인 아버지의 고향도 영낙없이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면에 주둔한 일본경찰은 마을에 있는 청년들을 강제로 징병하기 위해 시골 오지인 아버지의 고향 산내면까지 쫓아왔다. 식구가 많아서 내남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동네에는 저 북쪽에 땅이 넓고 사람이 적은 중국의 동북평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런 와중에 일본놈들의 징병 위험까지 들이닥치자 아버지는 18살 되던 해에 혼자서 불철주야 북상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들 중의 남도(南道) 이주민 1세의 반렬에 오르게 되였다. 정작 건너오니 동북땅도 호락호락한 고장은 아니였다.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는 어디로 가든 똑같은 세월이였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몰랐던 아버지는 이국타향의 허허벌판에서 탄광과 벌목장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그 과정에 별의별 고역을 다 치렀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투항을 선포하던 그 무렵 아버지는 연길에 계셨다. 그 뒤, 아버지는 지인의 소개로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한 처녀를 만나 지금의 연길시 근교의 소영촌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아버지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이런 자식들이 중국에 정착한 남도 이주민 2세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식구들의 생계를 위하여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평시에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농한기에는 부업으로 소방목도 하고 양봉업도 했다. 식구들을 배를 곯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신념 하나로 아버지는 억척스레 일하며 평생 고생에 부대꼈다. 그러다가 1985년, 파상균감염으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6~7년만 더 앉았어도 꿈속에서도 사무치게 그리던 고향땅을 밟아볼 수 있었으련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다. 우리가 사는 소영촌에는 남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기에 마을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경상도사투리를 들으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동네에서는 아버지를 남도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혈혈단신으로 중국에 건너왔기에 우리한테는 사촌과 같은 가까운 친척들이 없었다. 어린시절, 내 또래 친구들은 쩍하면 오늘은 할아버지네 집이요, 래일은 큰집이요 하면서 하루 건너 친척집에 다녀왔지만 우리가 드나들 수 있는 친척집이라곤 외삼촌네 집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우리에게 당신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조전리(枣田里)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대추가 유명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언젠가는 우리 식구 모두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셨다. 하지만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난 지 40여년이 되도록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40년은 인류력사의 긴 강으로 말하면 일순간에 불과할지 몰라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말하면 반평생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동안 아버지는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고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과 친척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가? 지난 세기 70년대말부터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서신거래가 잦아졌다. 그 때 우리 마을의 누구네 집에서도 한국에 있는 친척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친척의 주소를 모르는 사람들은 방송에서 나오는 리산가족찾기 프로그람을 듣군 했다. 당시 아버지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늘 그 방송프로그람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아버지는 또 둘째형님한테 부탁해 연길시에 살고 있는 한××가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찾는다는 내용으로 메아리방송에 편지를 보내게 했다. 그 편지를 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더욱 메아리방송에 신경을 기울였다. 얼마후 한마을에 사는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가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 나왔다는 것이였다. 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을 찾았다고 자랑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자청해서 술까지 한잔했다. 오매불망 애 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지는 어린애마냥 즐거워했다. 얼마후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가 혈육의 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주소도 아버지가 기억한 것과 거의 비슷했다. “아우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로 알았던 네가 살아있다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기쁘기가 한량없구나. 타향에서 고생은 또 얼마나 했고…” 그 날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우리 집안의 소중한 력사기록물로 남을 만큼 조심스럽게 간직되고 있는 편지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 한국방문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어떤 집들에서는 친척방문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허나 우리 집의 사정은 좀 특별했다. 아버지가 망인으로 기재된 것이 화근이였다. 그런 상황이니 큰아버지도 우리를 요청할 수 없었다. 2001년, 큰형님은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고 그 뒤 한국에서 쭉 일하면서 생활하게 되였다. 그 당시 큰형님은 우리 집의 대표로 처음 아버지의 고향집을 찾았다. 그 때 아버지의 형제 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고 산내면에는 사촌형님네 내외간만 살고 있었다. 사촌형님은 아버지의 고향에 찾아온 사촌동생을 그토록 반갑게 반겨주었단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집안제사 때면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했다. 진짜 가슴이 미여지도록 아픈 이야기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삼촌의 제를 지내주었다니 감격에 목이 메는 순간이였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갑산집이요, 룡포동집이요 하는 조상들 고향마을 이름을 붙인 집들이 많았다. 그 법 대로라면 우리 집은 조전리집이였을 것이다. 남도 사람들의 생활 특징은 우리 집에서도 려과없이 나타났다. 과거에 동네에서 고추장을 담그는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다. 아버지는 비빔밥도 좋아하고 랭국도 반겼다. 학교에서 들놀이 갈 때 내가 고추장을 발라서 구운 더덕반찬을 가져갔더니 모두 맛 있다고 야단이였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어언 35년이 된다. 그 사이 나도 한국에 여러번 다녀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육이였기에 40여년의 리별 속에서도 서로 잊지 않고 끈끈한 정을 이어오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수천수만명의 이주민 력사중의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리별과 상봉, 슬픔과 환락이 어우러져있는 진실한 력사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남도 조상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강들이 모여서 주야장천 바다로 흘러가듯 쉼없이 엮어지고 있다.   2020년 9호 
8    [천우컵] 꽃 피는 춘삼월은 지나갔어도 댓글:  조회:535  추천:0  2020-09-21
꽃 피는 춘삼월은 지나갔어도 김옥자 살구꽃 활짝 피는 춘삼월이면 나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일을 맞게 된다. 연분홍 살구꽃, 눈송이처럼 흰 배꽃, 휘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파랗게 돋아난 연록색 잎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늘어나는 나이를 다시한번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나는 대자연 속의 모든 생물체들이 기지개를 켜며 대자연을 맞이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무작정 좋다. “인간 칠십 고래희”란 말이 무색해질 만큼 곳곳에서 ‘백세시대’를 높이 웨치고 있다. 80 고개를 지척에 두고 있는 나 역시 요즘 따라 여생을 어떻게 보낼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질 때가 많다.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은 하늘의 구름마냥 흘러가고 붉은 해살 따라 걸어가는 여생엔 웃음의 꽃, 행복의 꽃이 만발하길 기대하며 또 한번의 춘삼월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올해 춘삼월에는 꽃도 어김없이 피고 화창한 봄날도 왔건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송두리채 흔들리고 말았다. 요긴한 일이 아니면 될수록 집 밖을 나가는 걸 자제해야 했고 거리에 나가도 전부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린 무표정한 얼굴들이 태반이였다. 꽃 피는 춘삼월은 그렇게 적막과 공포 속에서 우리 곁을 소리없이 스쳐지났다. 자식들이 그립고 보고 싶어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겨끔내기로 전화를 걸어와서 안부를 묻는 딸들한테 엄마는 괜찮으니 너희들 몸이나 잘 챙기라고 부탁하고도 전화를 끊고 나면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한동안 멍하니 있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렇게 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머리 속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이렇게 멍청하게 생활의 노예가 되여 나를 걱정해주는 친인들에게 걱정만 끼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무명 영웅들이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사투를 벌리고 있는데 나만 성 쌓고 남은 돌처럼 이렇게 집에 붙박여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하루를 살더라도 후회없이 살아야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나서 이튿날부터 곧바로 움직였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잠시 접었던, 십여년간 꾸준히 익혀온 태극권부터 골랐다. 별다른 장비가 필요 없는 운동인지라 실내에서도 넉근히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시간에 맞추어 온라인 수업을 시청했다. 건강상식, 방역 등 방면의 내용을 시청하면서 관련 지식들을 습득했고 독서와 글쓰기를 날마다 놓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또 텔레비죤을 시청하면서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최신 동향들을 살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보람차게 지나가는 가운데 생일날이 소리없이 다가왔고 내 머리 속엔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집에 갇혀있어도 초라하게 무너지고 있는 파파 할머니가 아니라 꾸준히 도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멀리에 있는 자식들, 근처에 있어도 만날 수 없는 친지, 동료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이내 동영상을 찍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한곳에 모아놓았다. 아무리 저울질해봐도 실내에서 태극권을 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아내는 게 자신 있었다.                                    실내인지라 제일 얇은 태극권 복장을 골라입고 창문을 열어젖혀도 흐르는 구슬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운동을 마치고 나면 땀에 흠뻑 젖은 옷들은 물자루가 되였다. 그래도 동작 하나하나 제대로 하느라 나름 대로 신경을 가다듬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십여벌도 넘는 태극옷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입고 정성 들여 화장하였다. 몇달 동안 다듬지 못한 흰머리는 가발로 가리웠다. 이어 사위한테 부탁하여 동영상 제작에 들어갔다. 생일 전날, 내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워이신을 통해 여러 친인들에게 보내주었다. 저녁에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더니 감동을 먹었다는 메시지들로 꽉 차있었다. 메시지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나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히 젖어들었다. 주변의 긍정과 응원이 이토록 큰 힘이 될 줄 미처 몰랐기에 그 감동이 곱절로 와닿는 순간이였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머나먼 복건땅에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먼 사돈 벌 되는 조카가 99원의 훙뽀(红包)와 함께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돈할머니, 생일을 축하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앉으라는 의미에서 99원의 훙뽀를 함께 보냅니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심양에서 지내고 있는 외손녀가 문자를 보내왔다. “외할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 500원은 할머니한테 드리는 생일선물입니다. 내 생에 처음으로 탄 월급을 음력설에 할머니 집에 가서 절을 올리면서 드리려고 했는데 바이러스 때문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너무 아쉽네요. 이 돈으로 맛 있는 걸 사드세요. 그리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앉으세요.”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 생일이라고 인생에서의 첫 수확을 이렇게 메시지와 함께 보내오니 그 순간 울컥하며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은 이미 황혼에 접어들었더라도 혹독한 역경 속에서도 꽃 피는 춘삼월에 생일을 변함없이 즐길 수 있었던 건 마음속에 늘 푸른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20년 9호 
7    《로년세계》2020년 9호 댓글:  조회:1079  추천:0  2020-09-08
6    《로년세계》2021년3호 댓글:  조회:234  추천:0  2020-06-14
5    《로년세계》2021년6호 댓글:  조회:233  추천:0  2020-06-14
4    《로년세계》2021년5호 댓글:  조회:214  추천:0  2020-06-14
3    《로년세계》2021년4호 댓글:  조회:207  추천:0  2020-06-14
2    2012년 8월호 차례 댓글:  조회:1561  추천:1  2012-08-08
1    2012년 7월호 차례 댓글:  조회:1329  추천:0  201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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