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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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동북아 4국지》

5. 아버지와 계선을 나누라
2012년 10월 30일 08시 54분  조회:2702  추천:3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5. 아버지와 계선을 나누라 -문화대혁명의 풍파속에서
 
내가 소학교1학년에 입학할 때는 1967년이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 후였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몰랐다. 마을에서는 옛날의 지주[1] 나 부농[2] ,반혁명분자들에게 고깔모자를 씌워놓고 투쟁대회를 벌렸다. 나는 멋도 모르고 재미있다고 사람들의 무리에 끼여들어 놀음질 했다.

소학교에 입학하여 제일 먼저 배운말은 “모주석 만세!”였다. 그때 당시에는 모택동주석은 ‘중국인민의 태양’이며 ‘세계인민의 태양’이라고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위에서 처럼 ‘나는 모주석이다’라는 말이 튀여 나왔던 것은 바로 이런 교육을 받았기에 나도 공부를 잘하니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천진한 마음속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면 ‘모주석은 중국의 태양이지만 세계의 태양은 누굴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하루는 집마당에서 넷째누나와 함께 집일을 도우면서 누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누구요?”하고 물어 보았는데 누나의 대답은 “모주석이지 누구겠니?”라고  대답하니 나는 납득이 안가서 머리만 갸우뚱 하였다.

기실 내가 생각한 제일  위대한 사람이란 지금의 의미에서 말하면 세계적 지도자 다시말하면 ‘세계의 대통령’ (현실에는 ‘련합국사무총장’)의 뜻이였으나 그런 지식이 없었기에 그 이상 질문할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부터 어린나이에 극단적 공산주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나는 세계(글로벌) 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당시에는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모택동주석의 ‘학제는 단축하고 교육은 혁명을 해야한다’는 교육방침과 학생들은 ‘공농병의 교육’ 즉 로동자, 농민, 병사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최고지시’하에 학교교육이 혼란상태에 빠졌던 상태였다. 소학교를 6년제로부터5년제로 단축하고 초중과 고중도 모두3년제로부터 2년제로,   9년제 교육이 실시되였던 것이다.

 또한 농촌에서는 어릴 때부터 농업을 배우고 농민의 로동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방침이기에 매년 농사가 다망한 시기에는 방학을 하고 생산대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다.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시간이 오전뿐이고 오후에는 기본상 하학을 하여 숙제도 얼마 없고 하기에 놀음에 열중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기말시험을 치면 언제나 1위나 2위로 되였지만 농촌소학교에서 공부하는 량과 질이 아주 부족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생활이 비록 가난은 하지만 아주 즐거웠다. 지금처럼 컴퓨터게임이나 텔레비는 없었어도 매일 친구들과 뽈도 차고 썰매도 타고 밤이면 새둥지도 들추고 싸움도하고 하면서 너무나 재미있게 보냈다. 놀음 도구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으니 기본상 자체로 만들거나 아버지한데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무를 깍아서 권총을 만들고 썰매도 만들고 진흙을 비벼서 놀음다마를 만들고 고무줄과 쇠줄로 새총도 만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문에 손재간이 늘어나고 창조적 사유가 생겨난 것이 아닐가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손재간이 괜찮아 채소밭도 가꾸어 연변에서 먹던 채소를 일본에서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자기집 정원도 잘 가꾸어 멎진 화원처럼 만들고 있다. 안해는 나보고 “오또산(당신) 정말 촌놈이네. 부지런하고 재간도 많아요” 라고 놀려도 주고 칭찬도 준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일본사람들과 술마실 때면 농담으로 “나는 진짜 촌놈이요(이나까 모노)”라고 자아소개를 하고 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놀음시간은 적어지고 사회노동이 많이 늘어나면서 공부할 시간이 더더욱 줄어들었다. 봄에는 모내기  2,3주간, 여름에는 기음매기1,2주간, 가을에는 가을 수확돕기 2,3주간,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적비임무(소똥이나 돼지똥 등 비료를 주어 모으는것)가 있으니 공부할 시간은 아주 적었다. 때문에 위에서 말하다 싶이  나의 두뇌는 ‘지식결함품’이였다. 고중졸업 후 내가 농촌에서 일을 하면서도 혹시나 대학시험이라도 쳐보고 싶어서 1978년 처음으로 리과시험을 치렀는데 정치나 어문 한어는 그래도50-60점 정도 맞았으나 수리화과목은 17,18,19점밖에 맞지 못하였다. 중학교 때 물리과 시간에는 손잡이뜨락또르(경운기)에 관해서 배우고 화학시간에는 농가비료 화학비료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배웠으니 그럴 수 밖에. 

허지만 그런 환경속에서도 언제나 열정적으로 모든 일에 임했다. 반급에서 성적도 상위고 반급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소학3학년에는 홍소병[3]에 가입했고 초중1학년에는 홍위병[4] 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고중에 올라가서는 공청단[5]에 가입하려고 노력했다.

허나 당시는 문화대혁명 시기여서 ‘계급투쟁’[6]형세하에서 가족이나 친족에게 계급문제가 있다고 의심을 받으면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입단신청을 냈으나 반주임선생은 “동무는 아버지와 계선을 나누어야 합니다”라고 사상교육[7] 을 했다. 이유인즉 아버지가 ‘일제 식민지 때 일본에 귀순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였다. 후에 판명된 일이지만 역사조사에서 아버지와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일본에 귀순하여 일본놈의 앞잡이로 악행을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혐의는 아버지가 토지개혁 때 공산당에 가입하였다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공산당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에 자원퇴당을 했는데 그것이 문화대혁명중에서 “왜서 공상당에서 퇴당했는가, 원인이 불분명하므로 혐의대상으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 혐의 때문에 순수한 공상당의 후대조직인 공청단에 가입할려면 아버지와 사상상에서 계선을 나누라는 것이다. 아버지인데 어떻게 계선을 나누어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도 없었다. 후에 역사조사에서 아버지의 문제가 해명되자 나는 고중2학년에서 졸업을 앞두고 공청단에 가입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역사문제’ 때문에 군인으로 있던 맏형도 공산당입당에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해명되였기에 입당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우리집에는 또 하나의 큰 불행이 들이닥쳤다. 세계급 운동건장으로 활약하던 둘째 누나가 장춘에서 어떤 사람들의 압송하에 우리집으로 왔다. 내가 10세 때의 일이다. 왜서인지 우리 집에는 매일 눈물이 많아졌다. 둘째 누나는 가난속에서도 분투하여 자전거 시합에서 국가대표로 인도네시아 쟈카르타에서 개최된 신흥국가 운동회(올림픽대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회주의권과 신흥민족독립을 한 100여개 국가가 개최한 세계대회) 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받았으며 국가급 운동건장이 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조선특무(스파이)로 의심을 받아 구류소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 결혼을 금방 하였기에 임신한 몸이여서 더 이상 구류소에 감금할 수 없게되자 감시인을 파견하여 본가집인 우리집에 보내왔다. 그리고 생산대의 문혁소조(총칭 문화대혁명령도소조)에 감시를 위탁하였다. 헌데 우리집에서는 당시 문혁에서 활약하는 누나 형님들이 있어 계급의 적대관계가 가족내부에서 발생했다. 혁명을 하고 있는 누나 형님들과 혁명의 대상으로 되는 둘째 누나와의 싸울 수도 없는 갈등이 가족내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이면 식탁앞에서 먼저 모택동에게 충성을 표시하고 식사하였는데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서로간에 눈물로 보내고 있는 장면을 어린나이에 가슴아프게 쳐다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몇 년 후에 둘째 누나의 특무혐의는 증거부족으로 부정되고 가족내 계급투쟁은 끝내 종말되였다.

내가 공청단에 가입할 때는 둘째 누나의 일은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공청단에 가입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우수한 학생이였으나 그 후의 발전전도는 훌륭한 농민이 되는 길 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자식이면 노동자로 취직할 수 있으나 농민의 자식은 시골 생산대에 돌아가 농사짖는 길뿐이였다. 옛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농민의 자식이 농민으로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였다. 하지만 근대화를 시작한 중국사회에서 농민은 실제적으로 사회의 최하층 국민으로 취급받았다.


[1] 지주: 토지를 많이가지고 있어 소작농을 고용했기에 다른사람을 착취하였다고 공산당의 진압 대상으로 지정되엿다.
 
[2] 부유한 농민; 다른사람을 착취하지는 않았으나 보통 농민들 보다 재산이 좀 있고 생활상 여유가있는 사람들로서 역시 경계의 대상으로 지정되였다
 
[3] 홍소병(紅小兵)이란 공산주의 리념하에 국민의 관리를 군대식으로 생각하여 모주석과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붉은 어린이 병사라는 의미로 우수한 소학생을 선발하는 방식이다. 문화대혁명 종결후에는 페지되여 [우수 소선대](우수한 소년선봉대)로 개칭함.
 
[4] 홍위병(紅衛兵)도 마찬가지로 붉은 전위대 병사라는 의미. 문화대혁명 종결후에는 페지됨.
 
[5] 공청단(共靑團)은 공산주의 청년단의 략칭이다. 공산당조직의 젊은 후대의 양성 조직 으로써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한 조직이다. 공산당에 가입하기전의 관문(關門)이기도 하다.
 
[6] 전체국민을 9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사람을 분류했다. 좋은 계급부터 순서를 매긴다면 공인(도시로동자)계급, 농민계급, 병사 계급, 학생계급, 그뒤는 잘 기억하지 못했으나 지식분자계급은 9번째 등급에 분류되여 [쿠린내나는 아홉번째로](중국말로 臭老九)로 불리우고 많이 구타당하고 피해를 받았다.
 
[7] 사상교육(思想敎育)이란 인민들의 사상을 공산주의 의식을 수립하도록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공부하고 공산주의 의식으로 통일할려고 한 문화대혁명 정책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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