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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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치가의 꿈과 좌절-공산당 대학원시기
2012년 12월 03일 11시 23분  조회:2692  추천:5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9. 정치가의 꿈과 좌절-공산당 대학원시기
 
 내가 대학원(중국에서는 연구생이라 함)을 선택한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이대로 졸업하고 사회에 들어간다면 아직도 지식이나 사회인맥의 힘이 부족하기에 좀 더 자기의 힘을 키우는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대학에서 4년동안 리더로 활동하고 2학년 때에 학년에서 첫 공상당원으로 되고 하니 이런 정치 자본을 활용하는데는 정치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대학의 친구와 함께 중공중앙당교에 연수차로 온 연변주정부의 모 간부(나중에 연변주장이 됨)와 함께 식사하고 의화원공원에서 같이 산책한 적이 있다.  그 때 처음으로 당간부를 양성하는 당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졸업하기 전에 당교에 연구생모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교연구생 시험을 쳐보기로 했다. 허나 당교시험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고 모집 인원수도 10여명 밖에 안되였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고 시험을 보았는데 결과는 중앙당교에는 입학이 못되고 망설이고 있는데 중공북경시위당교에서 처음으로 연구생반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당교 교수의 부인(우리대학의 교수)이 나한테 전해주고 입학할 의향이 있는가고 타진하였다. 나는 서슴없이 ‘예쓰’사인을 보냈더니 일주일 후에 면접을 와 달라는 것이였다. 그 뒤는 순조롭게 통과되여 공산당권력자를 양성하는 당교의 대학원생으로 되였다.

당교에서의 전공은 철학, 정치경제학, 과학적사회주의, 당건설, 당사 등으로 나누어졌는데 나는 당의건설(党建)전업에 배치되였다. 철학전공을 지향했는데 당건설 전공에 학생이 필요하니 바꾸어 달라는 것이였다. 당건설이 무얼 연구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의 요구이니 공산당원으로써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그때 당시의 상식이였다. 그리하여 공산당의 역사로부터 집정당의 건설이라든가 령도학이라든가 맑스주의 이론전반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당교에서는 연구생에게 각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일반대학의 연구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월한 교육환경이 주어졌다. 일반대학에서는 숙소를 4명정도가 공유하나 당교에서는 2명 1실이고 조학금(助學金-장학금에 상당함)도 대학의 연구생보다 한급 높고 중공중앙의 문헌들도 자유롭게 열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당교의 강의도 가서 들을 수 있었다. 대학의 연구생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당교에 와 보고는 ‘당교는 귀족학교네’라고 부러워 하였다.  권력의 중추에 가까워 질수록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피부로 느끼게 되는 시점이였다.

2년동안의 당교생활과 연구는 나의 정신세계를 많이 개변시켰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여러면에서 부족감이 많고 자신감도 모자랐다. 헌데 당교에 들어가 있는 기간 나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장래의 큰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였다. 그것은 곧 정치가의 길이였다. 그 때 당교를 졸업하면 북경시 당정기관은 물론 중앙당기관에서 자리를 찾을 수도 있었다. 1년 후에 나한테 들어온 소식이 중공중앙 규률검사위원회와 통일전선부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였다. 나는 규률검사위원회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헌데 그 무렵에 중국에서 나의 인생을 바꾸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1월에 호요방(胡耀邦)공상당 총서기가 착오를 범했다고 총서기직에서 사임당했다. 신문매체에서 발표되기 전에 공산당 내부 문건으로 우리들 한테 전달되였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 왜냐하면 1980년대 대학생활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어떤 정치자본을 얻어보자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다만 공산당이 개혁개방으로 중국에 새로운 광명을 주었기에 자기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분투하자는 의미에서 공산당원에 가입한 것이었다. 즉 공산당이 중국을 개변할 수 있고 국민을 잘 이끌 수 있다는 신임감에서 접근한 것이였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물론 등소평이 실질상에서는 중심에 있었지만)이며 최고지위에 있는 인물이 바로 호요방이며 그는 또한 중공중앙당교의 교장(공산당중앙의 최고지도자로 될 인물이 당교교장을 겸임하는 것이 내부규정으로 되여 있음) 을 한 적도 있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민은 물론 젊은 인테리들의 애대와 신임을 받았었다. 그의 현명한 정책하에서 대학생당원으로 되고 또한 내가 배양한 대학생 당원만해도 10여명이나 된다. 즉 나도 당간부 (학생당지부 조직부장)로 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하루아침에 사임당하다니?! 그 충격속에서 나는 랭정히 자신의 미래상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치가로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정치가로 될 수 있겠는가? 예전의 단순한 생각으로서는 나는 순 농민출신이고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으니 농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가로 되고 싶다는 것이였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정치가로 될 수 있겠는가?  결론은 ‘나는 정치가로 되기에는 부족하거나 적합하지 않다’였다. 그 이유는 정치가로 될려면 3가지 조건이 필수하다고 생각했다. 첫째 조건은 공산당원으로써의 기본수양과 사업능력이고 둘째 조건은 백그라운드(누가 봐주고 길러주고 밀어주는 인맥관계)이고 셋째 조건은 조직이나 상사(上司) 에게 아부할 줄 알아야 하고 너무 솔직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이였다.내가 정치가의 길을 선택한다면 첫째 조건에는 부합되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두번째와 세번째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여 대학교에 가서 자유로운 학자로 되자고 생각하고 대학의 취직자리를 자체로 찾았다. 그것이 중국의 공회(노동조합)간부를 양성하는 중화전국총공회 (中華全國總工會)산하의 중국공운학원(中國工運學院)대학이였다. 이렇게 농민으로부터 6년의 시간을 거쳐 대학교수로 탈바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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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진달래
날자:2012-12-06 12:34:22
해도 해도 너무 진실합니다
이곳의 문장이 너무 진실하면 어떨가요????
1   작성자 : 111
날자:2012-12-03 13:01:39
너무 진실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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