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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계림문화상 은상 수상작품] 손아래동서 ‘수이러우’
2020년 11월 20일 09시 37분  조회:652  추천:0  작성자: 청년생활
2020《청년생활》제4회 계림문화상 은상 수상작품
 
손아래동서 ‘수이러우’
리정림

 
 
‘리옥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수이러우(水肉)’라고 하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리옥희’라는 본명보다는 ‘수이러우’라는 소품의 명대사가 어쩌면 더 정답고 부담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시간은 1987년 연변TV의 음력설야회 현장에 가 멈추어선다. 지금도 허다한 조선족시청자들을 배꼽 잡게 만드는 명대사인 ‘수이러우’는 바로 그 해 음력설야회의 소품 〈사촌언니〉에서 나온 명대사이다.

도시에 사는 사촌녀동생의 애 돌잔치에도 참가할 겸 호도거리후 집에서 기른 양어장의 물고기도 팔 겸 겸사겸사 도시에 나타난 꾀죄죄한 시골 아줌마 차림의 물고기장사군(리옥희 역)이 물고기를 팔아야겠는데 한어로 물고기를 뭐라고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개고기는 ‘꺼우러우(狗肉)’, 소고기는 ‘뉴러우(牛肉)’, 양고기는 ‘양러우(羊肉)’라고 한다는 데서 ‘큰 계발’을 받고 대담히 물고기는 물 ‘수이(水)’에 고기 ‘러우(肉)’를 더해 ‘수이러우’라고 불러버린 것, “수이러우 매바, 푸둥푸둥디 수이러우 매바.(물고기 사세요, 살찐 물고기 사세요.)” 하고 조선어와 한어로 뒤범벅이 된 엉터리 싸구려를 웨쳐 시청자들은 참지 못하고 빵 터져버렸다. 그후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리옥희란 이름 대신 ‘수이러우’라고 불렀다.

후에 우리 연변조선족인민들의 삶을 생동하고 감칠맛 나게 표현한 그녀의 〈새새발로친〉은 제2회 전국소수민족구연콩쿠르에서 연기 2등상을 수상하며 중앙텔레비죤 1채널 〈곡예잡답〉프로그람에 방송되였고 그후 중앙텔레비죤 1, 3, 4, 7채널에서도 방송되였다. 이렇게 그녀는 또 한번 인기를 모았다. 리옥희배우의 인기는 당시에도 하늘을 찌를듯 치솟았지만 10년, 20년,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식을 줄 모르고 여전히 뜨겁다. 모바일통신이 발달한 지금 위챗을 열면 리옥희배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리옥희는 40여년의 예술생애에서 주옥 같은 작품들을 천부적인 연기력으로 연기하여 대중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은 나무로 자리매김하였다.

2013년에는 일본군위안부의 참상을 고발한 영화 《소리굽쇠》에서 중국의 위안부할머니 역으로 출연하여 한국 관람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최근에는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조선족동포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런 인기배우, 명배우와 나는 한집안에서 동서간으로 4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무대에서 온갖 재주로 관객들의 웃음을 터뜨리며 만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명배우가 집안에서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1981년 1월 2일, 나는 성망이 높은 교장선생님댁 맏아들과 3년 련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바로 같은 해 10월 2일, 나이가 꽉 찼던 시동생도 잔치를 치렀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해에 나는 교장집 맏며느리로, 그녀는 둘째며느리로 되였다. 그런데 문제는 시동생은 나보다 한살 년상이였는데 시동생이 데려온 새색시, 나의 손아래동서도 시동생과 동갑이였던 것이다. 손우동서로 ‘형님’인 내가 의례히 손아래동서보다 나이가 이상이면 순리 대로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인물체격도 나는 그녀와 비교가 안되였다. 동서는 그 때 벌써룡정문공단에서 소품배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 때 시아버님은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지명도가 있고 존경을 받는 교장선생님이였다. 나는 이런 어마어마한 가문의 맏며느리였지만 당시 일개 향위생소의 보통 회계였던지라 별로 내세울 게 없었다. 더구나 인기배우인 동서보다 한살 어리기까지 하니 그녀 앞에서 어쩐지 위축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보다 한살 많다고 손아래동서에게 존대말을 쓰면 남편한테는 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참 어색하였고 고민되였다. 그녀도 내가 손우동서라 해도 나이가 자기보다 어리니 어떻게 부를지 몰라 고심하는 눈치였다.

지금도 동서의 결혼식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가을풍경이 그려지는 시골마을의 시집 울바자에는 울긋불긋한 줄당콩들이 줄줄이 늘어섰고 그 사이로 나팔꽃들이 방실방실 웃으며 새 사람 맞이에 성수가 났다. 또한 자그마한 촌마을에서 교장선생님댁의 둘째며느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집 앞마당을 채웠다. 동서를 태운 해방표 트럭은 늦은 오후에야 도착하였다. 시동생은 차에서 내리면서 동서를 훌쩍 안아내리웠다.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서 있는 동서는 정말 한떨기 코스모스와 같았다. 아미를 숙이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몸에서는 도시 녀인의 상큼함이 물씬 풍겼다. 날씬한 몸매, 생글생글 웃는 눈, 이슬을 머금은듯한 입술, 함초롬한 얼굴, 하얀 너울을 쓰고 눈꽃 같은 한복을 입은 그녀는 마치 선녀와 같았다. 그 날 나는 동서의 ‘대반’으로 옆에서 큰상을 받는 것도 거들면서 나보다 한살 많은 동서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동서 역시 한살 어린 형님에게 분명하게 존대말을 쓰지 않았다.

동서가 시집 와서 며칠후의 어느 아침이였다. 세 아들을 거느리고 웃방 밥상머리에서 시아버님은 아래 정지쪽 밥상에 앉은 두 며느리와 딸, 시어머님을 넌지시 보면서 “새 식구가 한명 늘었는데…” 하고 말씀을 떼시더니 “물은 우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집안의 위치에 따라 행동하고 말도 했으면 좋겠다.”라며 동서와 나에게 눈길을 슬쩍 돌렸다. 무슨 말씀인지 우리는 인차 알아들었다. 평시에 집안에서 동서와 내가 말이 오갈 때면 한동안은 서로가 말끝을 흐렸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시아버님이 정확히 선을 그어주셔서 내 립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랐다. 감독은 시어머님이였다. 사람이란 자기 나이 대로 대접 받고 자신의 나이에 련련해지는 게 당연하다. 현명한 동서 역시 그런 마음이였겠지만 시아버님의 분부 대로 시댁 서렬에 맞추어 어느 순간부터 동서는 나를 ‘형님’이라 부르고 존대말을 꼬박꼬박하였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동서가 말끝을 흐릴 때는 서운하기보다는 좀 애매했다. 그러다가 정작 존대말을 쓰니까 오히려 내가 불편하고 더 송구스러웠다.

동서는 시집의 어떤 일에서나 앞장을 섰다. 시부모님이 집을 살 때에도 동서가 먼저 얼마를 내놓아 나도 그 금액에 맞추어 시부모님의 집을 사는 데 보태드렸다. 그리고 시아버님의 환갑잔치 때에는 큰며느리인 내가 먼저 얼마를 부조금으로 내놓았다. 그러자 ‘수이러우’동서와 작은동서, 시누이도 모두 두말 없이 같은 금액의 부조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이러우’동서는 부조는 부조 대로 하고 또 시어머님께 한복까지 한벌 더 사드렸다.

시아버님의 환갑날의 하이라이트는 동서가 따로 준비하였다. 우리는 시아버님의 환갑상을 시골의 학교 교실에 차렸다. 시부모님은 아들며느리, 딸과 사위, 손주, 그리고 친척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환갑상을 받으셨다. 이 때 동서는 숱한 친척과 동네사람들 앞에서 〈새새발 로친〉이라는 소품을 큰 극장에서 하던 그대로 표현하였다. 교실에 난로를 피워 뽀얀 연기가 피여올랐지만 그녀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환갑잔치에 오신 손님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였고 분위기를 돋구었다. 시어머님은 격동되여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셨다. 하여 우리 세 며느리도 덩달아 서로 껴안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아버님은 퇴직후에 향의 로간부당지부 서기로 일하셨다. 시아버님은 고희의 나이에도 허리 하나 굽지 않았다. 희슥한 반곱슬머리, 걀죽한 얼굴에 특별히 짙은 눈섭, 속쌍겹눈, 웃으실 때 보이는 하얀 치아, 어디라 빼놓을 데 없는 미남할아버지이다. 시아버님은 전 향의 문예시합 때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로인합창단의 노래지휘를 하실 때면 청춘의 기백이 넘쳐났다. 그러던 시아버님이 뇌출혈로 쓰러져 7~8년을 오금을 잘 쓰지 못하였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생신날이였다. 그 전날은 눈도 많이 내렸다. ‘수이러우’동서와 시동생은 연길에서 퉁소를 미리 준비하여 왔고 작은동서와 나는 시장에서 장을 푸짐히 봐가지고 시어머님댁으로 갔다. 남편과 큰시동생은 예전 대로 팔을 걷고 바로 그 많은 채소와 고기, 생선들을 손질하였다. 작은시동생은 집 앞마당을 깨끗이 쓸고 정리하고 가쯘하게 패놓은 나무를 한아름씩 날라서 부억에 채우고 불을 지필 준비를 하였다.

시아버님의 생신날 아침이였다. 항시 그러했듯이 우리 녀자들은 분공 대로 척척 움직였다. 볶음료리 담당은 6.1유치원의 교원인 작은동서가 맡았다. 잰 음식솜씨로 달달 볶으면 시누이가 예쁘게 접시에 담았고 랭채무침 등속은 ‘수이러우’동서가 일회용 장갑을 끼고 새콤달콤하게 무치고 입쌀만두 담당은 시어머님과 나였다. 시어머님은 만두 속에 넣을 양배추와 고기를 손수 칼로 썰었다. 시어머님은 고기를 기계에 갈면 맛이 없다고 하면서 항상 칼판에서 다졌다. 그렇게 우리들은 손을 맞추어 시아버님의 생신상을 풍성히 차렸다.

그 날 저녁, ‘수이러우’동서는 따뜻한 물 한 소래를 떠가지고 방안에서 시아버님의 발을 두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씻겨드렸다. 딸도 아니고 둘째며느리로서 효성을 다하는 동서를 나는 다시 보았고 모두가 말 없이 감동했다. 그리고 큰시동생은 아버님이 즐겨듣는 〈칠갑산〉, 〈라질가〉를 퉁소 독주로 연주하였다. 밤중에 은은히 들려오는 퉁소소리가 고즈넉한 시골의 적막을 깨뜨렸다. ‘수이러우’동서는 아버님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드리면서 춤도 추었고 우리 남편의 세무일군 복장을 차려입고 현실인지 연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응원대장〉이라는 소품도 간단히 표현하였다. 병환에 계신 이후로 처음으로 시아버님의 웃음을 보았다. 큰시동생은 마지막으로 〈어매〉라는 노래를 불러 가족 모두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노래하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아버님의 눈에는 이슬이 반짝였다. 그렇게 시아버님은 78세에 최고로 행복한 생신날을 보내고 보름 뒤에 조용히 저세상으로 돌아가셨다.

‘수이러우’동서 같은 열혈축구팬도 많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녀의 목책을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연변축구팀 감독, 선수들의 이름과 생년월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동서는 축구 규칙 같은 거 다 알고 있어요?”

축구에 문외한인 내가 따지고 물었다.

“형님, 그래도 난 명색이 연변축구팀 ‘응원대장’인데 규칙을 모르면 어떻게 응원을 조직하겠습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나한테 규칙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까지 해주었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 연변축구팀이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의 한결같은 응원을 받으면서 전국 갑급무대에서 휘황한 전과들을 올릴 때 그녀는 거의 매 게임마다 열혈축구팬들의 앞에 나서서 연변축구팀의 ‘응원대장’으로 되여 본인의 독특한 인격적 매력과 인기로 연변축구팀을 향한 축구팬들의 응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때 ‘응원대장’을 하면서 만나보았던 허다한 축구팬들을 작품에 담은 1인극 〈응원대장〉은 바로 리옥희가 생활과 연기를 서로 잘 결부시킨 성공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해 음력설에 동서는 한국에서 연길에 왔다가 한달 동안 시어머님댁에 머물렀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동서와 나는 이렇게 한집에서 함께 보내보기는 처음이다. 동서가 몸이 아픈 것은 알았지만 이다지도 심할 줄은 몰랐다. 무대 우에서나 아래에서나 항상 행복하고 활기 차고 웃음만 있는 줄 알았다. 온몸이 아프고 통증이 나서 장밤을 잠들지 못하고 때로는 밤중에 일어나 약을 먹을 때면 이런 아픔을 참으며 항상 웃어야 하고 항상 안 아픈 척하며 몇십년이나 배우생활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났다. 가족들도 이렇게 밤마다 병과 사투를 벌이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알았지 관객이나 팬들은 동서의 웃음만 알고 고통은 모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동서는 낮이면 시어머님을 모시고 맛 있는 것도 사서 대접하고 목욕탕에도 가고 저녁이면 시어머님이 제일 즐겨하는 화투치기도 함께 하였다. 사실 시어머님은 인젠 손놀림이 굼뜨고 전에 같지 않게 어눌하여 함께 화투를 치는 게 정말 재미가 없었다. 동서는 조금이라도 재미와 웃음을 주려고 화투를 치다가도 노래 한가락을 뽑기도 했고 또 벌떡 일어나 손에 닿는 대로 수건이면 수건, 시어머님의 지팡이 등을 쥐고 양걸춤, 조선춤을 몸이 가는 대로 췄는데 어떻게 해도 멋 있었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화투를 치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더 길었지만 애쓰는 동서를 보는 우리의 마음은 한 없이 아팠다. 시어머님도 조글조글한 얼굴의 주름을 펼 새도 없이 웃었다. 큰아들을 먼저 보내고 처음 보는 시어머님의 환한 웃음이였다. 동서는 시어머님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드리려고 무등 애를 썼다. 시어머님은 동네에서 ‘수이러우 아매’라는 별명을 가졌다며 항상 기뻐하셨고 “나는 며느리복이 있는 사람이다”고 늘 자랑을 하였다. 래일 또 마을에 나가 ‘수이러우’며느리를 자랑할 이야기거리가 생겼다며 기뻐하시면서도 또 한켠으로는 아픈 며느리의 걱정으로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자신이 자시던 약을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수이러우’, 리옥희는 비록 손아래동서이지만 내가 힘들 때마다 언니처럼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어 나는 오늘까지 버텨왔던 것 같다. 예고 없이 남편을 보내고 펑펑 울 때 동서는 따뜻한 손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힘들어 휘청거릴 때 말 없이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동서는 지금 내가 문학아카데미에서 활동하는 것을 누구보다 자랑하고 지지해주고 있다.

올 3월초의 어느 날이였다. 핸드폰 너머에서 “여보세요, 형님— 한국입니다.” 하는 동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순을 넘긴 동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챙챙하다.

“형님, 내가 신식 한복 한벌을 금방 인편에 보냈습니다. 내 몸에 맞춰서 산 것이니 형님께도 맞을 겁니다. 문학아카데미행사를 한다면서요. 곱게 차려입고 인젠 형님 마음이 가는 대로 활동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과 정을 담은 동서의 말에 난 눈앞이 흐릿해졌다.

지난 시절, 동서는 문공단에서 순회공연을 다닐 때에도 살림이 곤난한 시누이를 항상 보살피며 도와주었다. 쌀도 사주고 애들의 학비도 대주었다. 지금도 시누이는 두 애들에게 더운 여름날에도 얼음과자 한대 사줄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둘째형님이 도와주어 그 어려운 고비를 용케 넘기며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가는 눈물이 핑 돌아서 울먹거린다.

동서와 한해에 결혼하여 한가문에서 ‘형님’, ‘동서’로 희로애락을 같이한 지도 어언 40여년이 된다. 평상시에는 동서에게 존대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진정 존경하는 사람은 나의 손아래동서, ‘수이러우’—리옥희이다. 앞으로도 영원한 ‘수이러우’의 ‘형님’으로 살며 한살 많은 손아래동서에게 존대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며 나머지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다…

《청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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