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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이야기17]군모에 깃든 약속
조글로미디어(ZOGLO) 2026년4월13일 16시58분    조회: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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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룡

중학교시절 군모를 쓰고 찍은 사진

사진첩을 펼치다 문득 한장의 흑백사진 앞에서 손이 멈추었다. 곤색 중산복에 군모를 쓴 중학교시절의 내 모습이였다. 그 순간, 오래도록 마음 한켠에 묻어두었던 한 사람과의 약속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그 약속은 내 머리 우에 얹혀 있던 군모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소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우리는 ‘설대산’이라는 외진 마을로 이사했다. 마을 끝을 돌아 한참을 더 가야 닿는‘마영’이라는 작은 동네는 늘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사 온 지 3년 만에 중학교에 들어섰다. 그 때는 1970년대 중반, 남학생들에겐 하나의 숨은 열망이 있었다. 바로 군모를 쓰는 일이였다. 군인에 대한 동경보다도 그 록색 군모 자체가 ‘멋짐’과 ‘용기’의 상징이였 다. 동네에서 군모를 쓴 젊은이를 보면 모두 시선이 꽂혔고 누군가 군모를 얻었다는 소문이 나면 친구들은 부러움과 선망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짜 군모는 구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군필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갈망하는 '성스러운 물건'이였다.

중학교에 들어간 어느 봄날, 록색 군복에 군모를 쓴 한 청년이 이 마을 큰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낯선 얼굴이 궁금해 같은 반 친구에게 물었더니 마영에서 사는 남씨 성을 가진 제대군인이라고 했다. 그의 군모는 붉은 별과 휘장이 없이 수수했지만 어린 나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물건으로 보였다. ‘저걸 한번 써보는 건 평생 무리일 거야.’체념하듯 생각하며 그저 부럽게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며칠 뒤, 그가 우리 학교에 나타났다. 교장선생님과 함께 체조대 우에 선 그를 바라보며 운동장은 술렁였다. 생면부지의 그가 우리의 ‘군사훈련 교관’이 되신다는 말에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일주일간의 훈련은 기존의 체육과당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였다. “앞으로 걸엇!” “정보! 걸음!” 그의 호령에 맞춰 팔을 힘차게 저으며 땅을 내리찍는 제자리 걸음은 우리로 하여금 천안문 광장의 열병식을 떠올리게 할만큼 장엄했다. 가장 어려웠지만 가장 멋졌던 것은 전교생이 하나 되여 가로세로 줄을 맞춰 쿵쿵거리며 행진할 때였다. 나는 교관의 군모, 그 갈망의 상징을 가까이서 똑똑히 보았다. 그 초록빛은 휴식시간에 우리에게 부대 이야기를 해주실 때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군대 가려면 기초부터 탄탄해야 한다.” 교관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그 군모를 쓰고 싶다는 욕심을 간신히 삼켰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기적 같은 날이 찾아왔다. 군사훈련이 끝난 날, 교관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였다. 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용기를 다해 다가갔다.  

“교관님, 그 군모… 한번 써봐도 될가요?”

그는 아무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모자를 벗어 내 손에 건네 주었다. 나는 군모를 받아 쓰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어린 가슴이 터질 듯 뛰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맞는구나. 정 마음에 든다면 네가 가져라. 나는 집에 하나 더 있으니까.”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너무 크고 소중해서 믿기지 않는 선물에 나는 어쩔 바를 몰랐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되뇌였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없이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어머니께 돈을 드리자고 했다. 그러자 교관님의 얼굴이 단호해졌다.

“창룡아, 내가 돈을 받으려고 주는 게 아냐. 절대 안된다. 대신 나와 약속 하나 하자. 꼭 공부를 열심히 해서 네 아버지처럼 훌륭한 교원이 되 는 거다.”

그 한마디가 내 가슴속 깊이 꽂혔다. 나는 모자를 벗지도 못한 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내 한평생을 건 맹세의 순간이였다. 

그 날 밤, 나는 군모를 자꾸 만져보고 꼭 껴안은 채 들여다 보군 하였다. 자꾸 교관의 고마운 마음이 떠오르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발령이 내려 시내로 떠났기에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5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내 사진첩 속에는 군모를 쓴채 찍었던 중학교시절의 내 흑백사진이 여전히 선명하게 빛난다. 수많은 사진이 흐려졌어도 이 사진만은 영원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내 인생의 등대이자 출발의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 군모는 단순한 모자가 아니였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건네준 가장 값진 선물, 즉 ‘믿음’ 그 자체였다. “훌륭한 교원이 되여라.”는 그 한마디는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가 되여 모든 학업의 고비와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는 든든한 기둥이 되였다. 그 약속 덕분에 나는 대학에 가는 꿈을 이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37년 동안 교단에서 학생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 그가 건넨 믿음이 나의 인생을 바꾸고 그렇게 바뀐 내가 또 다른 수많은 인생에 빛이 될 수 있었다.

남교관님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가? 그 분이 건네주신 그 한마디 약속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속에 고이 모셔진 채 오늘을 견고히 살아가게 하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다. 만약 다시 교관선생님을 만난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교관님, 그 작은 군모에 담아주신 믿음과 기대, 그 변치 않는 약속의 무게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 날 교관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깊은 믿음 덕분에 저의 오늘이 있게 되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진첩을 덮으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 군모는 단지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마음에 새겨 쓰는 것임을. 세월이 흘러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도 그 약속만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선명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신창룡프로필

1984년부터 2020년까지 훈춘시 영안중학교, 훈춘시제6중학교, 훈춘시교원진수학교 등에서 교육사업에 종사.

현재 퇴직하고 훈춘시에 거주.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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