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혁명렬사비” 저명한 시인 하경지의 이 시구는 혁명선렬들의 피가 어린 연변대지에 대한 고도로 함축된 표현이다. 항일투쟁으로부터 해방전쟁에 이르기까지 근 2만명에 달하는 연변의 아들딸들은 자신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고 그중에는 이름 석자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쓸쓸히 누워있는 렬사들도 적지 않다.
27일, 무명렬사들의 혁명사적을 추적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여 비석을 세워주는 김문필(87세)로인을 만나보았다.
룡정시 개산툰진에 거주하고있는 김문필은 1949년 2월에 입당한 건국전 로공산당원이다. 당령이 65년에 나는 김문필은 사평해방전쟁, 료서전쟁 등 국내전쟁은 물론 항미원조에 참전했었다.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긴것도 수십번, 11년동안의 긴긴 전쟁에서 그에게 남은건 훈장처럼 남은 온몸의 상처이다.
불편한 몸을 끌고 오늘도 로인은 수풀을 가르며 산을 넘어 어디론가로 향했다. 무명렬사였던 항일소년영웅 김증만의 렬사비로 가는 길이였다. 1932년, 12살에 나는 김증만은 룡정시 개산툰구위 통신원을 맡아하면서 긴급 정보를 전달하던중 일본토벌대를 만나게 되자 정보를 인차 입안에 삼키였다. 비밀은 루설되지 않았지만 일본놈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였다. 김문필은 “이분의 부모는 1932년 5월에 사망되였고 김증만렬사는 그해 8월에 희생 되였으니 누가 비석을 세워주겠수. 어린 나이에 희생되였으니 참 안타깝지…”라며 비석을 쓰다듬었다.
그가 무명렬사들에게 비석을 세워준것이 김증만렬사 한사람뿐이 아니다. 김문필로인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망된지 61년만인 2000년 청명날에 아버지의 묘소로 제를 지내러 간 김문필은 묘소에서 항일로전사 류경수동지와 강위룡동지가 써서 묻어놓고 간 편지를 발견하였다. 편지에는 항일투사였던 아버지의 공훈을 인정하는 글들이 적혀있었고 이 편지로 인해 아버지는 61년만에 혁명렬사로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의 렬사증을 받고나니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지유. 우리 아버지처럼 이름없이 묻혀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유.” 그후로 그는 개산툰과 그 주변지구를 돌아다니며 수십명 무명렬사들의 사적을 발굴했으며 4개의 비석을 세워 여러 무명렬사들의 이름을 함께 또는 단독으로 새겨놓기도 했다. 이렇게 무명렬사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김문필로인의 마음에는 아직도 내려가지 않는 한가지가 있다. “옛날에 배나무골(지금의 룡정시 덕신향) 에서 공산당원 17명이 회의를 하다가 모조리 붙잡혔지유. 일본토벌대들이 하루아침에 총으로 란사를 해 17명이 모두 희생되였지유. 하지만 지금 그 사람들이 희생된 자리에 비석을 세워주지 못했어유.”라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김문필로인은 “우리들은 혁명렬사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생명으로 바꾸어온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말입니다.”라며 이름석자 남기지 못한 무명렬사들이 너무도 안타깝다고 한다.
연변일보 김미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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