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16)-청산리대첩(1)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10일 00시00분    조회:57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독안에 든 침략군 삼단처럼 쓰러지고

반일무장부대 백운평서 첫 승리 맞아

백운평전적지 직소 동쪽 구간

결전전야

화룡시 부흥향 청산리마을에서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일명 증봉산)이 커다란 베개마냥 뭇산의 두령으로 덩그렇게 누워있는 것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마을어구의 작은 산언덕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기념비는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60메터의 굉장한 화강석으로 다듬어 세워졌다. 보기만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석비 앞면에는‘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조한문자로 새겨져있었고 밑면에는 일제와 격전을 벌리고 있는 반일무장전사들의 군상이 조각되여있다.

청산리마을에서 해란강 상류를 향해 4—5리 쯤 올라가면 유명한 백운평참안지가 나타난다. 찬찬히 살펴보면 불에 그을린 기초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은 황페한 쑥밭으로 되여버렸고 벌목공들이 거처하는 귀틀집이 있을 뿐이지만 당년에는 몇십호가 오붓하게 모여 살던 조선인마을이였다.

가리마처럼 뻗은 산길을 따라 산을 계속 오르노라면 개울물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오는데 고요한 산곡간이여서 그 물소리가 더욱 청쾌한 것 같다. 이렇게 6-7리 더 올라가면 발밑 낭떠러지 아래에 맑은 개울이 여울치며 흐르는 작은 소를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흐르던 개울물이 락차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소를 이루었다고 하여 직소택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소이다. 물론 봉오동전투에서 혼쌀이 난 일제 륙군소좌 야스가와가 지휘하는 제73련대 선봉부대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에 의해 전멸되다 싶이 한 곳이여서 더 이름을 떨친 곳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던 반일무장부대들은 일제의 ‘토벌’에 대비하여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청산리 직소택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의 반일무장부대의 이동정황을 설명해주었다. 봉오동전투 후 명월구(묘구)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안도현 장백산록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 21일경에는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의란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있던 안무가 인솔하는 국민회군은 8월 31일 안도현방면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말경에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군부는 초모정자와 탁반구를 거쳐 9월말경 왕청현 라자구에 도착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은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월 12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도착하였다.

10월 2일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10월 14일 간도침략을 선언하고16일에는 연길 도윤에게 17일 0시를 기하여 간도에서 반일부대 ‘토벌’의 군사행동을 시작함을 알렸다.

룡정, 국자가, 투도구 방면의 ‘토벌’을 책임진 아즈마지대는 10월 17일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가 어랑촌, 청산리 부근에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월18일에 부대를 나누어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와룡구 어랑촌 부근에 있는 홍범도부대를 ‘토벌’할 목적으로 부대를 움직였다. 이렇게 되여 일본침략군과 반일부대의 청산리전역은 불가피하게 되였다.

“전투를 앞둔 10월 19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 수뇌자들은 묘령에서 일본침략군의 ‘토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주전파와 피전파간에 론쟁이 붙었는데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이 력량을 보존하려면 절대 일본주력부대와 결전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피전책을 취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하여 북로군정서군은 왕팔어구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저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청산리 쪽으로 철퇴하게 되였습니다. 부대는 이튿날 백운평에 도착하게 되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설명이다.

10월 17일 아즈마지대장의 작전명령을 받은 야마다련대는 좌우종대로 나누어 좌종대는 야마다대좌가 직접 거느리고 팔가자, 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에 청산리에 도착하였으며 우종대는 나까무라 대대장이 인솔하고 이도구를 거쳐 봉밀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군의 북쪽 퇴로를 차단하고 좌우종대와 대응하여 북로군정서군을 포위하려 시도하였다.

백운평전투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장 리범석은 김좌진장군의 지령에 쫓아 직소부근에 부대를 배치,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적을 제어하면서 본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려 했다. 하여 교성대 200여명을 직소택 량면에 매복시키고 림범석은 정면에서 전반 전투를 지휘하게 하였다.

김좌진장군

북로군정서군이 포치한 매복진은 좌우 량켠에 톺아오르기 힘든 산이 있고 그 사이에 끼인 골짜기는 20—30메터 되나 마나 하고 넓은 곳이라야 40-50메터 밖에 안되는 매복전에 더없이 리상적인 장소였다.

때는 상강절기를 앞둔 마가을,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은 한기가 뼈속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 밤을 패야 했지만 래일의 격전을 생각하면서 긴장한 마음을 도사려야 했다. 몸에 락엽을 뒤집어쓰고 지루한 밤을 보낸 전사들은 초조한 심정으로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협곡 량켠 산기슭에 반일부대 용사들이 매복해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한 침략군은 거들먹거리면서 좁은 산길을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월강추격대’를 거느리고 들어왔다가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야스가와 소좌가 이번에도 선발부대 한개 중대 90여명을 거느리고 죽음의 포위망 속으로 기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서쪽 2키로메터 지점인 공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이 밤에 숙영했던 곳과 60여개의 불무지흔적을 발견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한줄로 쭉 늘어서서 북로군정서군의 행적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땅!”

연성대장 리범석의 공격을 알리는 첫 총소리가 산곡간을 찢으면서 맵짜게 울렸다. 앞 뒤 산마루에 매복해있던 200여개의 총구에서 삽시에 불벼락이 터졌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돌연적인 습격에 당황해난 적들은 사면으로 날아드는 총탄을 피하느라 갈팡질팡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적들은 대응사격으로 발악도 해보았지만 반일부대의 매복지점을 판단할 수 없어 헛총질만 할 뿐이였다. 코앞에다 적을 둔 반일부대는 복수의 총탄을 여지없이 내뿜었다. 전투는 속결전으로 끝났는데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다. 전투에서 적군 90여명이 거의 소멸되다싶이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이 제1제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동하면서 제2제대에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할 것과 다음날 새벽 2시전에 봉밀구 갑산촌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쫓아 제2제대는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한근원중대를 후위로 안도 로령으로 철퇴하는 것처럼 하다가 급전환하여 밀림을 헤치고 북상하여 밤도와 갑산촌으로 철수했다.

청산리대참안

백운평전투에서 참패를 본 일본침략군 야마다련대는 반일부대가 안도현 쪽으로 후퇴한줄 알고 추격하다가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게 되자 오후 2시에 추격을 중지하고 되돌아와서 그 분풀이로 무고한 백운평백성들에게 ‘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은 집들을 전부 불살라버리고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지어 어린애마저 생매장하거나 총으로 쏘아죽였다. 전하는 데 의하면 그 날 외지로 친척방문 갔던 두 사람이 살아남고는 다 살해되였다고 한다.

청산리마을 전경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0, 60세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세대당 평균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찬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인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 사이에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사람을 만나는 족족 죽였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백운평에서 사흘동안 연기가 피여올랐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적들은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사용하여 수많은 조선인마을을 재더미로 만들었고 무고한 백성을 죽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에 차 하는 말이다.

길림신문/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48
  • 지난 28일 고고학을 테마로 한 산시(陝西)고고학박물관이 대중에 개방됐다. 산시고고학박물관은 고고학 작업 과정과 기술, 연구 방향 및 학과 발전 등을 중심으로 꾸며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문 출처: 신화사
  • 2022-05-03
  • 90년대 북경 옛 모습을 공유합니다   ▲1990년 비가 내리던 어느날   ▲1991년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는 학생들   ▲1992년 길가 신난 꼬마들은 누굴가?   ▲1993년 골목 리발소  지난 세기 90년대 우리 나라는 국제 패션 흐름의 영향으로 헤어스타일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가 날로 높아졌고 ...
  • 2022-03-28
  • 편집자의 말 :   본지는 올해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5돐을 경축하면서 2년반 동안 련재했던 항일전문연구가 리광인 선생의 을 이어 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저 한다. 본편은 당년 가렬처절했던 남만의 항일무장싸움터에서 피흘려 싸운 조선족 당공작일군들과 장병들의 영웅형상을 처음으로 전방위적으로 체계적으로 부...
  • 2022-03-09
  • 1925년에 청색벽돌로 지은 4층짜리 서양식 다층건물 봉천기독교청년회 옛터(奉天基督教青年会旧址)는 심양시 심하구 조양가151-1호에 위치, 심양시기독교량회양성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곳은 1925년에 청색벽돌로 지은 4층짜리 서양식 다층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널직한 홀과 목제 계단, 마루가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 2022-02-21
  • 한진(韩震, 1900-1936)은 1900년에 서울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중학시절에 진보단체인 ‘반일애국기독교청년회’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1928년에 반일투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길림성 반석현에 와서 반일단체를 찾았다. 그는 반석현의 초석산소학교에서 교사로...
  • 2022-02-18
  • 리송파(李松波, 1904-1935)는 일명 최송파라고도 하며 1904년에 반석현 역마박자(驿马泊子)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0년 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8월에 중공반석중심현위에서 조직한 특무대에 가입하여 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감조감식 등 투쟁에 적극 참가했으며 1931년에는 특무대 대장을 맡게...
  • 2022-02-18
  • “길림성당위 조직부에서는 중국 혁명사에서 남쪽에 강서성 서금이 있다면 북쪽엔 길림성 반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서 길림성 항일혁명사에서의 반석의 중요한 지위를 충분히 긍정했다.” 새해 양력설을 사흘 앞둔 2021년 12월 29일, 길림성당위 선전부의 인솔하에 반석시를 찾은 국가급과 성급 매체들로 무...
  • 2022-01-06
  • 리계순(녀) 동지는 1914년 11월에 길림성 화룡현 덕신사 금곡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리계순동지(자료사진) 리계순은 14살에 이 마을의 사립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늘쌍 학교에서 조직하는 문예대에 참가하여 반일투쟁을 선전하였으며 아동단을 조직하여 마을에서 보초를 서주었다...
  • 2022-01-04
  • “그는 적군 또치까를 잡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총탄은 척추를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그 전역을 치른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위생병 왕청진은 여전히 황계광 렬사가 희생될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텔레비죤 경기 단계의 네번째 경연에서 해설원 온택의 감동적인 해설을 들으며 ...
  • 2021-12-30
  •   국가문물국은 14일 북경에서 ‘고고중국’ 중대항목 중요진전사업회를 소집하고 섬서 서안 강촌대묘 등 3가지 중요한 고고성과를 통보했다. 고고일군들은 서안시 동교의 강총대묘에 대한 고고탐사를 진행했는데 부분적 외장갱과 배장묘에 대해 구조성 발굴을 실시했다. 최근에 전문가들은 강촌대묘의 &ls...
  • 2021-12-16
  • 4 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
  • 2021-12-13
  • 연구팀 "안데스산맥 고지대 지역 살던 사람의 것" 페루 산 마르코스 국립대학 연구진이 리마 근처의 카하마르킬라 유적지 마을 광장 지하에서 발굴한 미라. /사진=CNN 캡처 페루의 수도 리마 인근에서 최소 8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의 미라가 발견됐다. 미라의 온몸은 밧줄로 꽁꽁 묶여있었다. 28일...
  • 2021-11-30
  • 중국 력사상 마지막 황후인 완용의 생평전이 일전 연길에서 개방식으로 열렸다. 전시지점은 원 연변예술극장 남측이다. 이곳은 말대황후 사망당시의 연길감옥 옛터이다. 완용은 1946년 6월 20일 5시경 이곳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전시는 주로 "재모겸비, 귀족규수", "흠정입궁, 황후책봉...
  • 2021-11-18
  • 1 지난 세기 30년대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연변 화룡땅에는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이며 동북 경내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과 이름난 혁명가인 그의 남편 소성규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물론 홍혜순의 최후와 희생이 그 시절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제7면...
  • 2021-11-15
  • [서울신문 나우뉴스] 고대문명이 남긴 묘지가 남미 페루에서 잇따라 발견돼 고고학계가 흥분하고 있다. 10일(현지시간) 현지 언론에 따르면 페루 리베르탓 지방 내 유적지 찬찬에서 발견된 묘지는 2층 구조로 지금까지 유골 25구가 발굴됐다. 깊이 땅을 파고 시신을 안장한 뒤 다시 무덤을 파 그 위에 또 다른 시...
  • 2021-11-11
  • [사이언스카페] 네이처에 투르크어·몽골어·일본어 포함하는 트랜스유라시아어 기원 발표 트랜스유라시아어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지도. 한국어(분홍색)와 일본어(짙은 황색), 투르크어(노란색), 몽골어(연회색), 퉁구스어(진회색) 등 트랜스유라시 어족 언어들이 9000년 전 중국 요하(붉은색)에서 조상 언어...
  • 2021-11-11
  • 지난 5일 , 중국 침략 일본군 남경대학살 조난동포기념관은 ‘남경대학살 사실(史实)전시 ’로비에서 남경대학살 생존자 황류씨, 부조증, 마수영 3명 로인을 위한 소등 의식을 거행했다. 등록된 생존자는 근근히 61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날 세 로인의 가족에서 각각 로인들의 생전 유품을 기념관에 기증했다. &...
  • 2021-11-08
  •   두물루프나르 대학 발굴팀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각) 터키 서부 아이노자이의 그리스·로마 유적지에서 발견한 '술의 신' 디오니소스 조각상. 연합뉴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술의 신 디오니소스 조각의 머리가 터키의 그리스·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1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 메일 등...
  • 2021-11-06
  • 작년 독일 농가서 발견된 유물 13점, 멕시코·과테말라에 돌려줘 독일이 멕시코에 반환한 테오티우아칸 인물상 (베를린 EPA=연합뉴스) 독일이 지난해 한 농가 지하실에서 발견해 5일(현지시간) 멕시코에 반환한 옛 테오티우아칸 유물. 2021.11.6. photo@yna.co.kr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
  • 2021-11-06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