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8)―경도선렬차습격전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26일 14시20분    조회:59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하발령 대서서 일본군 렬차 전복

군수품 로획, 일본군 장군도 체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창립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창립된 후 비록 많은 좌절을 당했지만 유격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확대하는 가운데서 부단히 장대해져 1,200여명의 병력을 가지게 되였다. 1935년 5월 30일, 중공동만특위와 독립사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부를 정식으로 창립할 데 대한 선언〉을 발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 창립되였음을 세상에 선포했다.

〈선언〉은 제2군의 성질과 임무를 이렇게 지적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중국인, 조선인 등 여러 민족 인민과 애국지사들의 무장력량이다. 혁명군은 동만에서 일만군과의 장기적인 류혈투쟁 속에서 영용무쌍하다는 위망을 얻게 되였다. 혁명군의 위대한 임무는 군중을 조직하고 무장시켜 일본강도의 일체 세력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빼앗긴 동북령토를 되찾아 중국의 령토완정을 회복한 후 동북에 인민의 깨끗한 정권을 세워 중화민족의 독립해방과 자유를 취득하는 것이다.

 

 

 

소왕청 마촌의 유격대지휘부 귀틀집

제2군의 병력배치에 대하여 연변대학 최홍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2군의 총 병력은 1,200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조선인이 3분의 2를 차지하였습니다. 조건의 제한으로 군 밑에 사를 세우지 않고 의연히 4개 퇀과 유격대대를 증설하여 활동하도록 결정 지었습니다.”

군장에 왕덕태, 정위에 위증민, 정치부 주임에 리학충, 참모장에 유한흥이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안태학, 정위에 주수동, 제2퇀 퇀장에 장천옥, 정위에 조아범,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윤성, 유격대대장에 전영림, 정위에 김산호가 임명되였다. 그외 군부 밑에 직속경위련과 교도대를 두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중공만주성위의 “2군은 서쪽과 북쪽으로 주동적으로 출격하라”는 지시정신과 용영구회의에서 구상한 전략적 결책에 따라 부대를 두갈래로 나누어 유격 활동범위를 늘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1퇀과 제2퇀은 돈화, 화전과 녕안, 동녕, 액목 방향으로 나아가 유격 활동범위를 늘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1퇀과 제2퇀은 돈화, 액목을 향해 정진하였고 제3퇀과 제4퇀은 녕안 지구를 전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과 배합작전하기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경도선 렬차습격전을 벌려 국내외를 진동시킨 제1퇀의 영용무쌍한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발령렬차습격전

퇀장 안봉학의 령솔하에 제1퇀은 명령에 좇아 처창즈유격근거지를 떠나 경도선(신경-도문)의 길림―돈화 구간을 따라 돈화, 액목, 교하, 서란 등지로 진군하면서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개척, 제3군과 련락을 맺어야 했다.

경도선은 일제가 동북자원을 강탈해가는 주요한 동맥이였다. 일제는 군사, 경제 면에서 이 철도선에 매우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 있었다. 제2군 지휘부에서는 적의 기염을 꺾어놓고 근거지 군민들의 필수품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1퇀에 경도선 렬차를 습격할 것을 명령했다. 제1퇀은 행군 도중 련속하여 적들을 매복습격, 1935년 5월 2일에 일어난 하발령에서의 일만군 렬차습격전은 가장 유명한 전투중의 하나이다.

5월 1일 저녁, 제1퇀 5련은 임무를 접수한 후 주동적으로 항일의용군인 평일군, 천량군과 련합하여 대석두와 하발령 철도구간의 예정된 지점에 도착하였다. 아군의 병력은 200명이였다. 기차를 정복할 지점은 깎아지른듯한 가파로운 산 굽인돌이였다. 아군은 안도와 대석두 쪽에 각각 방어조를 배치하고 기관총로획조, 습격조, 파괴조를 철도 량켠에 대기시켰다. 기관총로획조에는 렬차 앞뒤에 달린 장갑차를 탈취할 임무가 주어졌다.

5월 2일 새벽 1시경이였다. 안도쪽 2.5키로메터 지점에 배치되여있던 신호병으로부터 장갑차가 온다는 신호가 왔다. 김철진 련장이 인솔하는 5명의 파괴조는 재빨리 철길에 뛰여들어 지레대, 스파나, 못뽑이 등으로 레루의 치목에서 못을 반 쯤 뽑아놓았다. 놈들은 기차와 안전통행을 위해 선로 검사차를 앞세우고 뒤에는 포를 건 장갑차에 호송대원을 앉혀 후위를 서게 하였다.

얼마 안지나 적의 선로감시용 장갑차가 나타났다. 장갑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나갔다. 파괴조 성원들은 다시 날쌔게 뛰여내려가 침목에 반 쯤 박혀있는 못을 전부 뽑아버리고 레루를 들어 한쪽으로 약간 드티여놓았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진행되였다.

긴장한 순간이 한초한초 흘러갔다. 얼마 후, 놈들의 렬차가 온다는 신호가 전해져왔다. 습격조는 총가목을 틀어쥐고 기차가 나타날 산 굽인돌이만을 주시하며 기다렸다. 레루장이 울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더니 기관차의 전조등이 어둠을 쫙 가르면서 비쳐왔다. 이것은 조선 라진으로부터 신경(장춘)으로 가는 202호 ‘국제렬차’였다.

기차가 매복권내에 들어서자 습격조는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사격소리와 함께 요란한 폭음소리가 나더니 기관차가 탈선되였다. 기관차는 연통을 땅에 들이박은 채 15메터나 앞으로 달려갔다.

탈선된 차량들이 서로 요란하게 충돌하더니 마치 큰 바위라도 굴러떨어지듯이 기관차가 궤도 옆으로 나뒹굴었다. 순간 화통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확 피여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기관차 뒤에 달렸던 7개의 차량도 련달아 쓰러졌다. 쓰러진 차량들에서 놈들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가 단발마적으로 들려나왔다. 호송대원들이 앉은 맨 뒤의 장갑차만이 넘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습격조와 기관총로획조는 쓰러진 렬차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 수류탄을 던지면서 비호마냥 돌진해나갔다. 한동안 지나서야 장갑차 안의 적들이 정신을 차리고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군의 수류탄 공세와 집중사격으로 장갑차 안의 적들은 인차 소멸되였다.

습격조는 쓰러진 렬차를 수색하고 살아남은 적들을 생포했다. 전투는 한시간 만에 결속되였다. 이번 습격에서 아군은 적 30여명을 소멸하고 군정요인 17명을 포로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일본황족 한사람과 일본군 장군 한사람이 있었다. 그 밖에 대량의 군수물자와 만주국 화페 20여만원을 로획했다.

대서렬차습격전

하발령기차습격이 있은 후 제1퇀은 안도현 경내에서 유격전을 벌리다가 처창즈유격근거지로 돌아와 잠시 휴식정돈했다. 충분히 휴식한 부대는 8월 19일, 경도선 량병태와 남구 구간의 대서에서 또 놈들의 군용화물차를 습격하였다.

퇀장 안봉학은 제2련의 패장들인 주춘일 등을 철도선에 파견하여 그 곳 형편을 알아오게 하였다. 백성으로 가장한 그들은 철도연선에 내려가 며칠동안의 정찰을 거쳐 8월 19일 새벽에 신경으로부터 조선으로 나가는 제291호 군용화물차가 량병태역을 지난다는 정보를 탐지하였다.

8월 18일 저녁, 제1퇀의 주력과 반일의용군 해룡부대, 도합 200여명은 량병태 서쪽의 대서 부근에 도착하였다. 대서는 지금의 안도현 량병태에서 서쪽으로 약 5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있다. 대서촌 서쪽에는 가파로운 산이 서북쪽으로 뻗었는데 북쪽의 가파로운 산 밑으로 경도선철길이 동서로 뻗었고 철길 북쪽으로는 개활지가 펼쳐져있었다. 부대는 재빨리 산굽이의 지정된 곳에 매복하였다. 4명으로 구성된 파괴조는 날렵하게 철길에 뛰여올라 스파나, 지레대 등으로 레루장을 련결한 못을 반쯤 뽑아놓았다.

8월 19일 새벽, 남구쪽에 있던 정찰병으로부터 선로감시용 장갑차가 온다는 전지불 신호가 왔다. 이윽하여 선로감시용 장갑차가 전조등을 환하게 켜고 달려오더니 량병태 쪽으로 사라졌다. 파괴조는 철길에 다시 뛰여올라 날랜 솜씨로 반쯤 뽑아놓았던 못을 마저 뽑아버린 후 한쪽 레루를 안으로 굽혀 다른 한쪽 레루와 어긋나게 해놓고 번개마냥 사라졌다.

파괴조 성원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지 1분도 채 못되였을 때였다. 귀청을 째는듯한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숱한 차량을 단 조선행 제291호 화물차가 쏜살같이 내달아왔다.

“꽈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폭음이 산곡간을 들었다놓았다. 기차는 레루장을 똬리처럼 틀면서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나가다가 왼쪽의 개활지로 곤두박혀 굴러내려갔던 것이다. 10여개의 차바곤도 뒤따라 깊이 3메터나 되는 진펄 속에 곤두박혔다. 맨 뒤의 장갑차도 어쩔 새 없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기관차의 증기가마가 폭발되여 세찬 불길과 증기를 내뿜었다.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전사들은 총창을 비껴들고 전복된 기차를 향해 돌진해갔다. 제5련 련장 김철진은 전사들을 지휘해 장갑차에 삐죽이 나온 기관총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기관총은 그만 벙어리로 되고 말았다. 장갑차에 앉았던 일본군은 모조리 격사되였다.

차량의 문을 열어제끼고 보니 천, 쌀, 사탕가루, 담배 등이 가득하였다. 전사들은 조선인 기관사와 화부는 적에게 피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량해를 구하고 포승으로 묶어놓은 후 제가끔 물자들을 잔뜩 짊어지고 인차 퇴각해버렸다. 이 때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대가 금방 떠나자 놈들이 잇달아 추격해왔다. 아군은 뒤따르는 적들을 물리친 후 사흘 동안 강행군하여 안전하게 처창즈에 도착하였다. 이번 기차습격전에서 아군은 1명의 손실도 없이 적 10여명을 소멸하고 400여필의 천과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이번 기차전복전투에서 대하여 《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는 일제의 자료(‘8월 19일 량병태와 남구간에서의 렬차습격전’, ‘현대사자료’(30), ‘조선’(6), 제245페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8월 19일 길림발 도문행 291호 화물렬차(기관차 한바곤, 화물차 21바곤, 호위차 한바곤, 도합 23바곤)는 같은 날 오후 9시 15분 정각에 남구역에서 발차하여 경도선 남구아래 3,000메터(신경에서 390키로메터)지점을 지날 때 오후 9시 30분경에 공비 약 130명의 습격을 받아 기관차가 탈선되여 전복되면서 기관차에 련결된 화물차 여섯바곤도 탈선되여 전복되였다. 적은 차장 조선인 장진석을 총살하고(기관사 및 화부 1명은 무사하고 화부 2명은 행방불명) 화물이 있는 각 차량에 휘발유를 치고 불을 달아 23바곤을 몽땅 소각했다.

그 해 9월 23일, 제1퇀은 교하현 경내의 이도하자와 황송전의 철도구간에서 또 한차례의 기차습격전을 벌리였다. 이번에 전복된 기차도 신경으로부터 조선 청진으로 가는 국제렬차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18
  • 1966년 이른 봄 어느날, 도문시 외사과의 주동현 과장과 시인사국책임자로 기억되는 남현후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달라자) 정치대장과 공청단 지부서기를 담임했었다.     손님들이 나를 찾아 온 사연이다.   ㅡ 우리가 달라자에 훌륭한 농업기술원을 소개 할터니...
  • 2022-05-29
  • 이는 20세기 50년대말 혹은 60년대초 음력설에 연길시에서 찍은 귀중한 사진이다. 이 사진 속 중산복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성은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당위 서기이며 주장인 주덕해(본명: 오기섭)이고 옆에는 그의 부인과 네 자녀이다.   오영채(뒤줄 중간), 오양청(앞줄 왼쪽 첫번째)   ...
  • 2022-05-26
  • 한진(韩震, 1900-1936)은 1900년에 서울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중학시절에 진보단체인 ‘반일애국기독교청년회’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1928년에 반일투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길림성 반석현에 와서 반일단체를 찾았다. 그는 반석현의 초석산소학교에서 교사로...
  • 2022-02-18
  • 리송파(李松波, 1904-1935)는 일명 최송파라고도 하며 1904년에 반석현 역마박자(驿马泊子)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0년 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8월에 중공반석중심현위에서 조직한 특무대에 가입하여 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감조감식 등 투쟁에 적극 참가했으며 1931년에는 특무대 대장을 맡게...
  • 2022-02-18
  • 4 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
  • 2021-12-13
  • 1 지난 세기 30년대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연변 화룡땅에는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이며 동북 경내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과 이름난 혁명가인 그의 남편 소성규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물론 홍혜순의 최후와 희생이 그 시절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제7면...
  • 2021-11-15
  • 1 1930년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지부가 지도한 연변 ‘5.30’폭동의 총책임자는 김근이고 실제 총지휘자는 김철(金哲, 1902ㅡ1930)이다. 김철은 일명 김창호(金昌昊)라고도 하는데 1902년 태생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고향이 어디고 가정형편은 어떠하고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초기투쟁은 어디에서 나섰는지 ...
  • 2021-08-23
  • 한청(1912-1996), 성은 신(慎)이고 이름은 익성이다. 혁명사업의 수요에 따라 이름을 선후로 신해룡, 장원복, 고바야시 신사부로(小林慎三郎), 신억 등으로 고치였고 8.15광복후 한청(韩青)이라고 고친 후 계속 그 이름을 썼다.   한청은 1912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 무월동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
  • 2021-08-11
  • 이날은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휘황찬란한 날이다. 2021년 7월 1일,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중국공산당이 창건 100돐을 맞이했다! 100년 전의 7월에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때부터 갖은 시련을 겪어온 중화민족은 궐기, 부흥의 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수많은 중화의 아들딸은 견정한 신앙,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전...
  • 2021-07-01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27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내가 보유하고 있는 락연의 유작중 한두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서북지역에서 창작한 작품이다. 우리는 1944년에 란주에 도착했다. 그 해에 그린 그림은 란주와 란주 부근의 풍경과 인민생활이 위주다. 1945년 봄에 그는 청해 탑이사를 방문했고 탑이사에서 ...
  • 2020-11-10
  •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락연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락연은 나에게 그는 동북의 연변 룡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적에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에서 곡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림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을 외...
  • 2020-11-09
  • ▨ 사효명(史晓明) 세상에 둘도 없는 키질석굴은 신강 배성현 키질향 동남으로 약 8키로메터 떨어진 명옥타걸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있다. 현재 236개 동굴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굴내 벽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불교벽화 예술이 약 4,000평방메터의 면적으로 보존되여있는데 그 년대는 대략 기원 3세기에서 ...
  • 2020-10-27
  • 반춘방의 아들 이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새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
  • 2020-10-20
  •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 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
  • 2020-09-08
  • 9월 1일, 이름난 항일민족영웅이며 동북항일련군 주요 창건자와 지도자인 양정우 장군 순국전 전투 서류가 최초로 공포되였다. 서류는 희생되기전 100여일간 양정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본군, 위만군 경찰들과 벌린 47차의 전투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함으로써 동북항일련군 연구에 참신한 자료를 제공했다. 길림성서류관...
  • 2020-09-07
  •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에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 출판 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의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 밑에서 해방되였다. 우리 민...
  • 2020-08-27
  • 조선민족 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우리 민족들은 자기 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로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
  • 2020-08-03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