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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12)락연을 회억하며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9일 08시00분    조회: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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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락연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락연은 나에게 그는 동북의 연변 룡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적에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에서 곡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림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을 외각의 묘지에서 몰래 그림을 그렸다.

 
한락연과 부인 류옥하(1944년)

그는 9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장남으로서 그는 겨우 한뙈기 밖에 안되는 땅을 가난했던 큰아버지에게 주었다. 이에 어머니는 몹시 화가 났다. 하지는 그는 “나는 밖에 나가 일할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그 후로 그는 품팔이를 시작했고 후에는 세관에서 잡일을 했다. 세관에서 매일 청소하고 물을 배달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면 그 곳에 남아 책이나 화보를 보았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지도도 그려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영국 사람이 순찰을 하다가 그가 그린 지도를 보게 되였고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그는 일일이 말해주었다. 영국 사람은 이런 한락연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였다. 그 영국 사람은 한락연을 계속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세관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했고 로임을 주었다.

락연이 살던 집은 중국, 로씨야, 조선 3국 접경지대에 있었다. 어려서 부터 조선어와 한어를 할 수 있었고 후에는 일본어와 로씨야어도 배웠다. 로씨야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가 동북에서 한동안 로씨야인의 집에서 생활해서이다. 그 후 또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유럽을 돌아다니며 영어, 독일어, 이딸리아어 등을 배웠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 곳의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당지의 언어를 배웠다. 그는 언어상의 재능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다. 게다가 열심히 공부하기 때문에 10여가지 언어를 알고 있었고 어딜 가도 막힘이 없었다. 이는 금후 그가 하는 사업에 아주 훌륭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락연은 책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 한번 락연은 상해의 손중산 거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방안에 가득찬 책을 보면서 “이렇게 많은 책을 갖게 되면 얼마나 좋을가!”라고 탄복했다. 손중산의 거처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 일을 사람들에게 여러번 이야기했고 항상 “사람은 부단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후에도 그는 시간을 짜내여 책을 읽었다. 어느 하루 그는 머리와 눈에 심한 통증이 생겨 책을 읽지 못하자 나 보고 읽어달라고 했다. 그 책은 서북 고고학에 관한 책이였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그는 우리 나라 문화유산이 외국에 략탈당하는 것에 대해 극한 분노를 보였고 우리는 긴 시간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후 그는 끝내 서북으로 가게 되였고 현지 고찰을 통해 애국주의 사상을 격발시켰으며 서북에 박물관을 건설할 것을 맹세하면서 앞으로 일본놈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으면 박물관과 기념비의 건설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락연의 일생은 민족독립을 위한 것이고 혁명을 위한 것이였다. 짧은 일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습을 놓지 않았다. 학습하고 그림을 그릴뿐더러 화필을 들고 그림을 엄호로 훌륭하게 혁명사업을 완수했다.

락연은 사람을 돕기 좋아했다

락연은 항상 락관적이고 사람 돕기를 좋아했다. 그는 고정된 수입이 없고 생활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한끼니를 때우고 나면 다음 끼니를 어디가 먹어야 할지 몰랐다. 매일 이러하니 이미 습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에게 한가지 일을 말한 바가 있다. 그가 상해미술전문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방학이 되자 락연은 원래 살던 세집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한 녀학생 친구가 과자를 한봉지를 선물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아주 기뻐하면서 ‘설명절에 먹을 것도 없었는데 이 과자로 배고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거처로 돌아와 하루밤을 잤다. 이튿날 아침에 이웃에 사는 소녀가 락연이 돌아온 것을 알고 즐겁게 찾아왔다. 락연도 기쁜 마음으로 그 꼬마친구를 접대했다. 락연은 천성적으로 아이를 좋아했고 청년들을 좋아했으며 함께 잘 어울렸다. 둘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꼬마친구는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마침 새해도 되였으니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을 줄가 잠간 고민하다가 눈에 띄는 과자를 꼬마친구에게 건네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말했다. 그 꼬마친구는 매우 기뻐하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과자를 안고 깡충깡충 뛰여 집으로 돌아갔다. 흔쾌히 소녀를 보내고 고개 돌려 작은 방을 보니 그제서야 설명절에 먹을 음식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이틀 동안 굶었다. 그이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우리 집에는 늘 사람이 왔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심지어 더 늦게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로동자, 농민, 학생, 상인, 관원이 있었다. 그 사람들중에 일반 사람도 있었고 국민당 고위층 인물도 있었으며 우리 공산당 당원도 있었다. 그의 그림을 좋아해 그림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려운 사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청해에서 악덕 상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악덕 상인은 작은 목화 한포대로 장족 동포들과 짐승 가죽을 바꾸려고 했다. 장족 동포가 거절하자 강제로 뺏으려고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락연은 인츰 제지시켰고 그 악덕 상인을 호되게 꾸짖었다. 이 때로부터 락연은 장족 동포들과 친하게 되였다. 루이 ·애리(路易·艾黎)가 주관하는 산단페리학교(山丹培黎学校)의 학생들도 자주 왔었다. 그들은 락연이 하는 혁명이야기를 좋아했고 어떻게 연안에 가서 혁명에 참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하군 했다. 애리가 키운 섭씨 사형제중 맏아들 섭광찬, 둘째아들 섭광함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국민당 도치악 장군은 란주에 오기만 하면 우리 집을 찾는다. 한번은 밤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다. 락연은 장군과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때 장군은 어떻게 공산당에 가담해 신강을 해방할 것인가를 론의했다. 그는 진심으로 공산당과 합작을 원했고 해방을 위해 공헌을 했다.

한번은 락연이 집에 돌아와서 나에게 “수시로 준비해야 한다.” 고 말했다. 하서회랑의 국민당 책임자 조수산 장군은 어떻게 군대를 거느리고 연안으로 갈 수 있는가고 물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련거퍼 세번이나 락연을 찾아와 묻기에 락연은 흔쾌히 알려주었다. 그 후 조수산 장군은 진짜로 군대를 거느리고 왔다. 해방 후 그는 섬서성 부주석으로 있었다. 50년대에 그는 북경에 있는 나와 두 아이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에게 “필요하다면 나는 자료를 작성해 한락연의 신분을 증명하겠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락연이 글 가르치다

락연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상해미용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몇년간 동북 심양에서 심양미용전문학교를 창설했고 할빈제3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몇몇 지역에서 글을 가르친 적도 있다. 나는 그게 어느 도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락연이 거기에 도착하였을 때 친척, 친구가 없었다. 오로지 거기에 동북철도중학교가 있다는 것만 알고있었다. 이 학교는 쏘련에서 설립한 학교이자 그 도시에서 가장 이름이 있는 중학교였다. 학생 대부분이 부유한 가정의 자식들이였다. 락연은 그 학교의 미술교사로 일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때마침 학교 옆에 사진관이 있었다. 그는 사진관에서 청소부로 있다가 한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꽤 유명한 사람이였다. 후에 이 사람의 소개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가 사진관에서 일하는 청소부라는 것을 알아보고 깔보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락연의 작은 칼에 욕심을 들였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그 학생에게 칼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그 학생을 되돌려줄 생각은 아예 없었고 오히려 자기 아버지가 선물한 것이라고 우겼다. 락연은 몹시 화가 났지만 참았다.

그는 수업시간에 그림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야외로 나가 사생을 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사생 수업을 좋아했다. 한번은 락연이 학생들에게 그림을 잘 그려 나중에 학생만을 위한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그 도시에서 한번도 전시회를 주최한 적이 없었다. 이 일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전시회가 끝나고 다른 중학교에서 그를 요청해 미술수업을 강의하게 하였는데 철도중학교 교장은 그가 다른 학교로 떠날가봐 락연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락연은 교장에게 다른 학교로 떠나지 않는 대신 학생들이 꼭 미술시험에 합격해야 졸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건을 내걸었다. 교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 후로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다시는 미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락연이 잘 가르쳤고 활발하였기에 학생들이 락연을 많이 따랐다. 더 이상 락연을 깔보는 학생이 없었고 다 그를 존경했다.

락연은 청년들을 좋아했다. 그는 늘 그들에게 쏘련10월혁명에 관한 이야기와 사람은 반드시 간고분투하고 자립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유럽에서의 보고 들은 것을 아주 생동하게 이야기해주었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해주어 청년들이 그를 좋아하게 되였다.

락연이 감옥에서 투쟁했던 몇건의 사례

한락연은 1940년 보계시에서 국민당 대립의 부하 특무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 갇혔다. 당시 그는 국공합작에 참가했고 국민당 전지당정위원회(战地党政委员会)로 파견되여 소장 지도원으로 있었다. 체포될 때도 국민당 장군 복장을 입고 있었다. 첫해는 서안 국민당 당부에 갇혔고 이듬해는 서안 태양묘문 특종 구류소에 갇혔다. 락연은 감옥에서 그의 혁명정신을 발양시켜 감옥 수감자들의 리익을 위해 감옥 당국과 여러번 투쟁하였다.

다음은 몇차례 투쟁 사례이다.

그 때(1940―1943년), 서안은 일본침략자의 공습을 많이 당했다. 감옥은 수감자들이 도망 갈가봐 경보를 피하지 못하게 했다. 락연은 감옥의 수감자들과 함께 감옥 관리당국에 그들이 무책임을 호되게 규탄하는 쪽지를 썼고 만일 감옥이 폭격을 당한다면 국민당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수감자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는 항일전쟁에 대한 큰 죄를 저지르는 것으로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관리자들은 감옥을 관리하는 권리는 있으나 그들을 밖으로 피난 보낼 권리는 없고 그렇다고 감옥내에 방공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변명했다. 락연은 모두 함께 힘을 합쳐 감옥내에 방공 시설을 건설할 것을 제기했지만 관리자들은 경비가 부족하다고 했다. 락연이 건축 경험과 그림을 그린 경험이 있어 자기가 설계도를 그리겠다고 하자 관리자들도 할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방공시설을 건설하는 투쟁에서 승리하게 되였다.

방공시설을 건설하는 과정에 수감자들은 족쇄를 차고 일했는데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방공시설이 신속하게 건설될 수 있는 것도 아니였다. 락연은 또 한번 수감자들과 함께 투쟁을 벌렸다. 처음에는 관리자들이 이런저런 핑게로 거절했지만 매일되는 습격과 당시의 형세 및 사람들의 항의에 관리자들은 끝내 굴복하고 수감자들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락연과 수감자들은 한번 또 한번의 승리를 거듭했다.

방공시설을 건설하는 과정에 큰비가 내렸다. 이미 파놓은 물도랑은 비물에 잠겼다. 락연이 솔선수범하여 그 비물에 몸을 담그고 수감자들을 이끌고 비물을 퍼냈다.

상급에서는 이미 감옥의 확장건설에 수요되는 자금을 조달했지만 물가 폭등으로 인해 자금을 받았을 때 건축 예산은 계획 당시의 예산보다 엄첨 차이가 났다. 락연은 자세하게 계산하고 나서 그가 건축을 대신할 수 있으니 유일한 조건은 락연이 직접 재료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여다. 이는 한편으로 중개자가 건축 비용을 탐오하는 것을 방지해 방공시설의 건설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감옥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위해서이다.

감옥 당국은 그의 설계도와 계산서를 보고 부득이 동의할 수 밖에 없었고 이번 투쟁에서 또 한번 승리하게 되였다.

감옥의 간수들이 수감자의 식비를 가로채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락연이 수감되여있는 감옥도 례외가 아니였다. 늘 썩은 채소와 곰팡이가 낀 밥을 먹어야 했는데 이마저 배불리 먹지 못했고 사람들의 건강은 날로 악화됐다. 병으로 앓는 수감자들이 날로 늘어났고 락연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는 륵막염이 가끔 발작해 영양이 있는 음식을 먹어야 했지만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영양을 따지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였다! 조사한 결과 락연은 만약 상급에서 지급하는 식비를 관리만 잘하면 지금보다 잘 먹을 수 있는데 문제는 간수들이 식비를 너무 심하게 가로채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식비를 간수가 관리하는 제도를 페기하고 수감자들이 자체로 식사관리위원회를 조직할 데 관한 의견을 제기했다. 이번 투쟁은 아주 치렬했다. 간수들의 리익을 건드렸기에 그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심하게 보복을 했다. 하지만 락연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간수들의 비리를 폭로했다. 전체 수감자들은 하나가 되여 자기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견지했다. 투쟁 결과 그들은 또 한번 승리했다. 그는 또 수감자들이 생활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되였다. 어떤 사람은 병으로 약을 구매해야 했고 어떤 사람은 생활용품 혹은 필요한 영양제를 구매해야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구매할 수 없었다. 락연은 수감자들과 함께 종이모형이나 장난감을 만들어 서점에 넘겨 대리판매하게 했다. 이런 방법으로 수감자들이 약간의 용돈을 벌게 되였고 생활도 개선되였다. 내가 서안에 갔을 때도 그는 여러 사람들을 위해 부채, 인단, 만금유 등을 대리 구매해주었다.

이상의 몇몇 사건들이 그가 감옥에서 투쟁을 했던 일들이다.

락연이 서북에 있을 때

락연은 비록 자유 출입을 할 수 있었지만 가석방 상태라 서안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많은 리유를 만들어 서안을 떠날 기회를 노렸다. 처음에는 륵막염이 재발해 날씨가 무더운 서안을 떠나 화산으로 1~2주 휴양을 가겠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락연은 아이가 너무나 어리다고 하면서 성도에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온다고 했다. 성도에 도착한 후 그는 서안에 편지를 보내 아이가 너무 어리고 서안에 습격 경보가 많이 울려 너무나 불편하여 란주로 이주하겠다고 했다. 란주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번은 나에게 어떤 사람이 국민당 특무라고 알려주면서 그들과 말할 때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듣고 나서 매우 의아해했다. 그는 계속해 “그들(국민당 특무)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요. 나는 계속해 나의 예술사업을 해야 하오…”라고 말했다. 란주의 짧디짧은 3년동안 락연은 청해 탑이사(塔尔寺), 감숙 하하라불렁사(夏河拉卜楞寺), 하서회랑, 돈황 등지에 갔다. 그는 또 신강에 두번이나 갔고 천산 남북을 모두 방문했으며 여러 민족 인민들의 생활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자기의 전시회가 많은 로동인민(도시 로동자,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에 대해 아주 기뻐했다. 그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들이 나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그린 사물은 그들이 잘 아는 것이기 때문이요.” 그는 사람들의 전원 생활을 그렸고 도시의 수공업자를 그렸으며 란주시에 식용수를 제공하는 로동자를 그렸다. 그는 학습하는 청년들의 모습, 작업장에서 일하는 근로자, 교통 철도 등을 그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춤, 경마, 유원지(游园) 등 여러 민족 인민들의 고유하고 있는 즐거운 생활을 그렸다. 이외 그는 서북의 독특한 풍경을 많이 그렸다. 또 그는 많은 동굴의 벽화를 모사했다. 돈황, 특히 천산 남로 배성 키질석굴의 그림을 많이 모사했다. 서북의 풍부한 고고학에 흠뻑 빠진 그는 많은 고고학 서적을 읽었고 직접 고고학사업에 종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6년, 처음으로 신강에 갔을 때 그는 천산남로를 방문했고 배성 부근의 키질석굴에 대해 료해하게 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키질석굴의 예술작품은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고 키질석굴의 예술가치는 아주 높다. 많은 동굴중 한 동굴에서 그는 완전한 인체 해부도를 발견했다. 이 그림은 진정한 예술사가 이곳에서 회화 원리를 강의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 동굴의 벽화는 일반 화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회화예술에 연구가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봄에 그는 2차 신강려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는 많은 화포, 회화 재료, 사진 재료를 준비했고 조수 두명도 동행시켰다. 진천동지와 조보기동지 그리고 산단페리학교 학생(락연이 두 학생을 키질에 데려간 것에 대해 애리는 당지 정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말했다. 왜냐 하면 락연은 공산당원이였기 때문이다.)들은 키질에서 40여일을 일했다. 동굴의 벽화를 모사한외에 대량의 유화, 수채화, 연필화를 그렸다.

1947년 7월 30일 적화(우룸치)에서 그는 생전 마지막 전시회를 원만하게 마치고 란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더 이상 가족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략연은 한평생 많은 그림을 그렸다. 사진도 많이 촬영하였다. 작품 대부분이 유럽과 국내 여러 곳에 널려졌고 일부분은 친구들이 소장하고 있다. 례를 들면 중국인민의 오래된 벗이자 중국 혁명에 걸출한 공헌을 한 루이 · 애리는 해방전 일부분 작품을 뉴질랜드로 보냈고 또 일부분은 미국의 친구가 소장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 있는 친구들도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락연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림중에서 내 손으로 정리한 것만 165폭이 된다. 이외 또 일부 스케치북 원고(速写底稿)를 합치면 200폭이 된다. 그의 그림은 모두 생활감이 넘쳤고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강산과 근로인민의 생활을 노래했으며 사람들을 분발하게 한다. 나는 그의 그림은 가치가 있고 적극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평생을 독립과 당의 사업, 공산주의를 위하여 분투했다. 때문에 그는 당과 인민에게 속하며 그의 그림도 국가와 인민에게 속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으로 몇폭을 남겼고 아이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할 때 그의 자화상와 근로인민에 대한 묘사를 보여주면서 영원히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여 국가와 인민에게 기여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1953년에 염보항, 고숭민 등 친한 친구들과의 상의 및 문화부 사회문화사업관리국 정진탁선생과의 합의를 거쳐 내가 남긴 모든 그림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는 그에 대한 가장 좋은 기념이다.

한락연은 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화가이다. 반드시 전국, 전세계 인민들에게 그의 그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류옥하(1905년―1988년): 한락연의 부인, 광동성 태산 출신. 1925년 남경 금릉녀자대학 생물학부를 졸업. 1929년 기독교 녀성청년회전국협회(상해)에서 농촌부 간사로 있었고 1934 년부터 1935년까지 미국 콜롬비아대학 사회학 석사학위를 수여. 귀국후 녀성청년회 전국협회 향촌부 주임간사로 일했고 부녀아동수용소를 건설. 호남성 한수현, 호북성 조시, 사천 장수 등지에서 항일선전대를 조직. 1938년 려산에서 소집된 전국각계부녀항일구국대표대회에 참석. 1939년 한락연과 결혼. 1944년에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남편 한락연을 따라 서북에서 엄호 등 사업을 진행. 1947년 한락연 희생 후 란주대학에서 영어학부 교수로 근무했고 1956년 《중국건설》잡지사에서 근무. 선후하여 대외 통신, 련락 및 도서자료 정리 등 사업에 종사. 1972년 리직.

번역: 《길림신문》 정현관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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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1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27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내가 보유하고 있는 락연의 유작중 한두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서북지역에서 창작한 작품이다. 우리는 1944년에 란주에 도착했다. 그 해에 그린 그림은 란주와 란주 부근의 풍경과 인민생활이 위주다. 1945년 봄에 그는 청해 탑이사를 방문했고 탑이사에서 ...
  • 2020-11-10
  •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락연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락연은 나에게 그는 동북의 연변 룡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적에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에서 곡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림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을 외...
  • 2020-11-09
  • ▨ 사효명(史晓明) 세상에 둘도 없는 키질석굴은 신강 배성현 키질향 동남으로 약 8키로메터 떨어진 명옥타걸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있다. 현재 236개 동굴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굴내 벽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불교벽화 예술이 약 4,000평방메터의 면적으로 보존되여있는데 그 년대는 대략 기원 3세기에서 ...
  • 2020-10-27
  • 반춘방의 아들 이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새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
  • 2020-10-20
  •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 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
  • 2020-09-08
  • 9월 1일, 이름난 항일민족영웅이며 동북항일련군 주요 창건자와 지도자인 양정우 장군 순국전 전투 서류가 최초로 공포되였다. 서류는 희생되기전 100여일간 양정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본군, 위만군 경찰들과 벌린 47차의 전투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함으로써 동북항일련군 연구에 참신한 자료를 제공했다. 길림성서류관...
  • 2020-09-07
  •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에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 출판 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의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 밑에서 해방되였다. 우리 민...
  • 2020-08-27
  • 조선민족 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우리 민족들은 자기 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로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
  •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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