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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50)―로흑산전투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10일 08시39분    조회: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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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군 사도하자를 피로 물들이고

인민혁명군 지혜롭게 정안군 괴멸

피로 물든 사도하자

라자구와 동녕현 부근의 로흑산은 지형이 복잡하여 우리 군이 활동을 활발히 벌리는 데 매우 유리한 지구였다. 곡창지대인 로흑산 부근은 또 아군의 식량기지이기도 했다. 일제는 항일군의 식량공급을 단절시키고 유격활동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일찍 1934년말에 정안군을 로흑산에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정안군은 악패지주와 한간주구들의 자제들을 긁어모아 조직한 부대였는데 일본군 지휘관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정안군은 무기장비가 월등했는바 스스로 황군의 ‘철군’이라고 자칭했다.

정안군은 백성들에게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하는 비적무리였다. 놈들은 쩍하면 행패를 부리면서 백성들이 소, 돼지, 닭을 닥치는 대로 략탈하여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악질적으로 항일부대를 추격, ‘토벌’했기에 비적무리에 대한 반동기염은 실로 하늘을 찌르는듯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조선인 장병들

팔소매에 ‘토벌’이라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린다고 하여 백성들은 이 자들을 ‘훙수톨(紅袖頭)’이라고 불렀다. 어디에 ‘토벌’이 나타나면 그 곳 백성들의 머리 우에는 재난이 날아들었다.

라자구에서 서쪽으로 7.5키로메터쯤 들어가면 28호 농가가 오붓이 모여 사는 사도하자라는 마을이 있다. 시도하자에서 5키로메터 더 들어가면 사간방이라는 곳인데 동북인민군 제3퇀의 밀영경계소였다. 이 경계소에서 15키로메터 들어가면 투로퍼띵즈인데 바로 3퇀의 밀영지가 있었다.

사도하자에는 세칸짜리 큰 기와집 한채가 있었는데 혁명군은 사도하자에 올 때마다 그 집에서 회의를 하고 혁명가곡을 배워주면서 항일선전을 하였다. 주보중, 김일성, 시세영 등 항일명장들이 자주 나든다고 하여 사람들은 사도하자를 ‘공산당사령부’라고 불렀다.

음력 12월, 일본놈 절름발이 퇀장이 령솔하는 정안군이 동녕으로부터 5갑(라자구 下河)에 와서 음력설을 쇨 때였다. 개다리 본성을 고치지 못하고 있던 주구 서일남이 절름발이 퇀장을 찾아와서 “사도하자는 공산당의 둥지이다. 몽땅 공산당이다.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고자질했다. 보고를 접한 절름발이의 얼굴엔 지독한 랭기가 감돌았다.

1935년 음력 정월보름날 밤, 사도하자 주민들이 깊이 잠들어있을 때 절름발이 일본놈은 대포와 중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백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사도하자를 포위해왔다. 날이 밝을 무렵이였다.

“쿵쾅!”

“뚜루룩...”

난데없이 날아들어와 터지는 포탄소리와 자지러진 기관총소리에 마을의 새벽 정적은 산산쪼각이 났다. 마을은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포연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아츠럽게 울려나왔다. 한시간 만에 마을은 재더미로 되고 말았다.

한창 포격을 하고 기관총사격을 퍼부은 후, 놈들은 마을로 돌격해 들어와 살아남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대학살은 마을 동쪽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오우준, 김군삼 등 몇집 식구들이 제일 먼저 살해당했다. 봉사였던 총수산의 어머니는 날창에 찔려 창자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미 숨진 두 손자의 손목을 꼭 잡고 피못 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녀의 셋째 아들(19세)은 차몰이군 주로인과 한데 묶이여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물가에서 참살당했다. 머리에 총알을 여러 발 맞아 대뇌가 랑자하게 터져나와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홀아비 은령감은 물만두를 삶다가 놈들의 총창에 찔려 가마목에 쓰러져 숨졌다. 잔인무도한 놈들은 살아남은 마을주민들을 밀짚가리 곁에 몰아다 세우고 기관총을 휘둘렀다. 그 속엔 외지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삼도하자의 오명학로인은 산에 가 올무를 놓다가 놈들에게 살해당했고 훈춘현의 지하공작원인 리영실과 그의 딸은 김군삼네 집에 왔다가 참살당했다. 놈들은 도합 57명을 참살했는데 그중 16명이 총창에 찔려 죽었다.

이번 참살에서 마을 서쪽에 살고 있던 세집 식구가 요행 죽음을 면했다. 총소리에 깨여나 밖에 나온 리용덕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을이 삽시에 포화에 휩싸이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군이 마을을 향해 포와 기관총을 쏠 수는 없었다. 적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리로인은 가까이의 설씨, 정씨네 집을 향해 소리쳤다.

“놈들이요! 빨리 강 쪽으로 뛰오!”

리로인의 웨침소리에 정신을 차린 세집 식구는 강 쪽으로 달음쳐가서 버들숲 속에 숨었다. 하여 세집 식구 12명이 요행 죽음을 면하게 되였다.

놈들은 돌아갈 때 주령감네 말 두필을 몰고 갔다.

날이 희붐히 밝자 린근마을 주민들이 사도하자에 달려왔다. 사람들은 밀짚가리 앞에 쓰러진 시체 속에서 요행 살아있는 조선인 어린애 8명을 찾아냈다. 김룡운이 8명 녀자애중 하나를 자기가 키우기로 하고 나머지 7명은 안아다 한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척이 있는 집에서는 그래도 대강 짠 관에라도 시체를 넣어 묻을 수 있었으나 친척이 없는 주검은 움 속에 묻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지혜로 정안군을 소멸

한족청년 총수산과 조선족청년 리씨는 식구들의 주검을 묻고 나니 혈혈단신이 되였다. 비분에 찬 그들은 그날로 3퇀 밀영으로 찾아갔다. 정위 김일성이 그들을 만나주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을의 참살정황을 낱낱이 보고했다.

“우리를 혁명군에 받아주십시오. 우리는 꼭 원쑤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김일성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은 후, 즉시로 한개 반 전사들을 현지에 보내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과연 모든 것이 사실이였다. 사도하자 참변소식을 접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퇀과 제4퇀은 어찌해서든 이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김일성, 후국충 등 지휘관들은 정안군을 소멸하기 위해 정찰병들을 파견, 적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장악했다.

1935년 6월, 라자구에서 단오명절을 쇤 인민혁명군 부대는 라자구 석두하를 떠나 로흑산 방면으로 향발, 황혼 무렵 동남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을 통하여 정안군이 겨울에만 ‘토벌’을 하고 여름에는 될수록 항일군과 교전을 피하면서 삼림대나 토비 같은 것만 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이에 적들을 끌어내여 매복소멸하기로 작전을 짰다.

3, 4퇀 주력부대는 적들이 보는데서 일부러 대낮에 부대를 라자구로 철수시켰다가 그 날 밤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로흑산에서 서쪽으로 10키로메터 떨어진 투도구로 돌아왔다. 부대는 골짜기 심처의 남북 량측 산에 은밀히 매복했다. 아군은 높이 약 200―300메터 되는 좌우 산릉선과 골짜기 가까이의 산기슭을 따라 전호를 파고 기여드는 적을 기다리기로 했다.

연후에 한개 소분대를 출동시켜 적들을 꿰여오게 했다. 소분대는 중국말을 잘하는 대원들로 구성됐다. 전사들은 삼림대로 가장하고 왕보만으로 내려갔다. 마을에 내려간 소분대는 삼림대 행세를 하면서 백성들의 소를 빼앗기도 하고 가재도구를 차서 굴리기도 하고 남새밭의 바자를 뽑아버리기도 하면서 한바탕 야료를 부리는 척하다가 부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떻게 된 판인지 정안군은 아군의 유인에 걸려들지 않았다. 아군은 매복지점에서 하루밤을 무료하게 보내야 했다.

다음날에도 소분대는 마을에 내려가 삼림대 행세를 하고 식량을 가득 실은 소수레를 몰고 오면서 삼림대만이 통용하는 용어로 떠들어댔다.

적들은 끝내 낚시찌를 물고야 말았다. 아침 8시 쯤 되여 소분대를 삼림대인줄로 안 적들은 소분대의 발자취를 물고 골짜기로 졸졸 따라 들어왔다. 100여명이나 되는 적들은 소분대를 놓칠세라 바싹 뒤쫓았다. 척후를 앞세운 적들은 인민혁명군이 감쪽같이 매복해있는 줄도 모르고 기름냄새를 맡은 고양이마냥 포위권 안으로 들어섰다. 놈들의 발걸음소리마저 금방 귀가에 들려왔다. 놈들이 지나가는 어떤 곳은 가까이 10메터 가량 되기도 했다. 드디여 적들의 전 부대가 사격권 안에 들어섰다.

“땅!”

사격을 알리는 총소리가 야무지게 골짜기의 고요를 깨뜨렸다. 아군의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였다. 이와 동시에 골짜기를 들었다 놓는 혁명군 전사들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무장을 요구하지 목숨을 요구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누구를 위해 일본놈의 총마개로 되여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인민혁명군 전사들은 맹호마냥 적들을 향해 돌격해 내려갔다. 비발치듯 퍼붓는 혁명군의 총탄에 적들은 삼대마냥 쓰러졌다. 전투는 30분 만에 아군의 철저한 승리로 끝났다. 전투에서 인민혁명군은 일본지휘관을 비롯한 적 100여명을 완전히 섬멸하고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문, 경기관총 1정, 보총 80여자루, 목갑총 7자루, 박격포탄을 비롯한 각종 탄환과 군수품을 로획했다. ‘철군’이라 자랑하던 일제의 정안군은 이렇게 괴멸되고 말았다.

로흑산전투의 승리로 인면혁명군의 북만원정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준비를 더 잘하게 되였다.

북만원정

로흑산전투 후 인민혁명군 제3퇀, 제4퇀은 왕청현 수분대전자에 돌아와 휴식정돈하면서 녕안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유격구에 3퇀의 제1, 제2, 제3련, 4퇀의 제4련 등 3분의 1 병력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대는 제3퇀 퇀장 방진성, 정위 김일성, 제4퇀 퇀장 후국충 등이 인솔하는 북만원정대를 구성, 6월말에 녕안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 원정의 목적은 유격구를 확대시켜 길동유격구와 이어놓고 길동지구에서 활동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5군과 련계를 맺으며 배합작전하려는 데 있었다.

부대는 서북령, 로야령 등 고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산악행군을 해야 했다. 살을 지지는 것 같은 뙤약볕과 모기떼의 성화를 이겨내면서 로야령을 넘기란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부대는 무수한 곤난을 극복하면서 7월에 승리적으로 녕안현 로청구의 산동 이주민들이 모여사는 산동툰에 이르렀다.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은 동만원정대와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의 회사를 막기 위해 목단강, 녕안, 동경성 등지로부터 800여명 병력을 모아가지고 산동툰을 향해 진격해왔다. 적들의 진공은 아군의 드센 반격을 받았다. 반나절의 전투 끝에 적들은 끝내 물러가고야 말았다. 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주보중이 인솔하는 제5군과 회사했다.

두 부대의 지휘원들은 녕안현 이도하자에서 제2군, 제5군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제2군 3퇀 4련, 4퇀 2련과 청년의용군, 제5군 1, 2, 4퇀으로 서부파견대를 무어 2군 3퇀 정위 김일성, 5군의 시세영, 리형박 등의 인솔하에 액목, 돈화 일대로 나가 활동하면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하고 류한흥, 후국충 등이 지휘하는 2군 3퇀 5련, 4퇀 3련, 5련은 녕안에 남아 5군과 함께 활동하며 왕윤성이 이끄는 2군 4퇀 1련, 6련, 7련은 왕청, 훈춘에 돌아가 남아있는 부대와 함께 유격전을 견지하기로 결의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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