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재혼 안 된다"유언에 첩 들인 신사임당 남편..예술혼 불태운 조선여인2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0월12일 05시22분    조회:52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사진설명전 신사임당 필 조충도.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여류예술가로서 조선 사대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폐쇄적인 조선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여류예술가도 있다. 바로 율곡 이이(1536~1584)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이다. 

고전은 여성을 차별하던 조선 선비들도 유독 신사임당에 대해서만은 "최고의 예술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 학자 어숙권이 저술한 <패관잡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은 동양 신 씨(東陽申氏)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도와 산수는 절묘해 사람들이 안견 다음 간다고 평했다. 아! 어찌 부인의 필치라고 소홀히 다뤄져서야 되겠는가. 또 어찌 부인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책망할 것인가." 

걸출한 남성 화가들이 많았을 텐데도 당대 평론가들은 그녀의 이름을 당당히 안견 다음에 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패관잡기>는 신사임당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녀의 아들이자 조선 선비들의 대스승인 율곡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당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신사임당의 위상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저술한 <근역서화징> 역시 신사임당을 기록하고 있다. "신사임당은 규방에 매인 몸이었지만, 그녀가 살던 당시에도 사대부 사이에서 높은 경지의 예술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아들인 이이가 지은 <율곡집>도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바느질에 능해 수놓은 것까지 정교하고 묘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일곱 살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기 시작해 산수화, 포도화를 그렸는데 세상에서 견줄 자가 없었다. 어머니가 그린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수없이 전해졌다"고 기술했다. 

이이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진 신사임당의 글씨와 그림을 다시 찾아 갖기를 소원했다. 이이의 후손 중 한명인 이백종은 신사임당의 추초군접도(秋草群蝶圖)를 어렵게 손에 넣어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1607~1689)에게 발제(跋題)를 부탁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이를 보고 "손가락으로 그려낸 것이지만 사람의 힘을 쓰지 않은 것 같다. 그림을 절대로 허술하게 보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작자 미상의 시화집 <좌계부담>은 신사임당과 관련한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다룬다. 이에 의하면, 그녀의 남편 이원수(1501~1561)는 공부가 충실하지 못하고 행실도 부족한 면이 많았다. 남편이 을사사화의 원흉 중 한 명으로 비난받은 영의정 이기(1476~1552)의 문하에 출입하자 사임당은 이를 극구 만류했다. 아내 덕분에 이원수는 선조 즉위 후 윤원형과 이기가 처벌 받을 때 다행히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신사임당은 명이 그리 길지 못해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으면서 남편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내가 이미 네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수는 장가를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사임당은 종신토록 혼인하지 않은 증자(공자의 제자)와 주자(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희)의 예를 들어 만류했다. 결국 이원수는 말문이 막혔다. 신사임당이 죽고 난 뒤 이원수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결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첩을 들였다. 

신라 28대 왕 진덕여왕(재위 647∼654·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은 뜻밖에도 문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 후기 노론, 그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던 서포 김만중(1637~1692)은 그녀의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고루한 그의 눈으로 보기에 아녀자가 쓴 문장으로서는 수준이 지나치게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 작품의 진위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진덕여왕이 비단에 수놓아 당나라 태종에게 보낸 `송덕시`는 시 전체가 세련되고 우아해서 동방 이민족으로서의 기이한 풍습이 전혀 없다. 그 당시 삼한의 문자가 이와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니 황금으로 중국인에게서 사온 것이 아닐까." 여기서의 `송덕시`는 "훌륭한 당나라가 큰일을 여니, 드높은 황제의 교화가 창성하구나"로 시작되는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말한다. 
 

국보 제110호 익제 이제현 초상(일부). 피는 못속인다는 말이 있듯 이제현의 손녀 역시 명문장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설명국보 제110호 익제 이제현 초상(일부). 피는 못속인다는 말이 있듯 이제현의 손녀 역시 명문장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말 문신이자 학자인 익제 이제현(1287~1367)의 손녀 경주 이 씨도 명문장가로 사대부들에게 명성을 떨쳤다. 이조판서를 지낸 신공제(1469∼1536)가 쓴 <해동명적>에 따르면, 그녀의 외손자 좌의정 홍응(1428∼1492)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외조모의 시문과 필적이 한 상자 가득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젊었을 적에 쉽게 여겨 잘 보관하지 못했다." 이 씨는 그림에도 능했다. 홍응은 "지금 김유가 소장하고 있는 8장의 그림을 보니 진실로 따라갈 수 없는 경지로구나"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양기생학교에서 서화수업을 받는 기생들. 일제강점기. 고전은 조선시대 사회적 차별에도 재능을 발휘한 여류예술가를 다수 소개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진설명평양기생학교에서 서화수업을 받는 기생들. 일제강점기. 고전은 조선시대 사회적 차별에도 재능을 발휘한 여류예술가를 다수 소개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3절`로 불렸던 황진이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로 시작하는 시조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녀는 사대부들에게 그다지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김만중은 그녀의 작품을 깎아 내렸다. "기녀 황진이의 시가 `속청구풍아(세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시인들의 작품을 뽑아 엮은 책)`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졸작에 불과하다. 부녀자가 쓴 시여서 사람들이 간혹 외워 전하고 있을 뿐이다." 

[배한철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08
  • [인터뷰] "즉위 前後 어려운 일 겪었던 임금… 대체로 술 좋아하는 분들이었죠"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쓴 정구선씨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요즘도 술로 인한 사건·사고가 많잖아요. 조선시대에는 어땠는지 궁금했어요. 실록엔 술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 많이 나...
  • 2014-05-03
  • 주위는 어둠이 내리고 곧 폭설이 내릴 기세다. 허나 청명한 달빛만은 고고하게 풍전등화의 세상을 비춘다. 나라 위한 마음이 어찌 이와 다를까. 추운 겨울이면 백성의 고충이 더욱 와 닿지만, 매화의 절개를 되새기며 뜻을 펼 때를 기다린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친필 한시 한 편이 새로 발굴됐다. 지...
  • 2014-04-23
  • 진양 하씨 가문 분재기 공개 홀로 남은 첩의 쓸쓸한 노후 염려… 상속권과 연계 서모에 대한 효심 유도 하원의 첩 감장이 서조모인 자신에게 효심을 다한 손자 철민에게 유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을 담은 분재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배우자에게 유산의 최대 절반까지를 먼저 떼어 주도록 하는 상속법 개정안...
  • 2014-01-29
  • 돈화에 있는 발해 3대왕 대흠무의 둘째 딸 정혜공주묘.   훈춘에 있는 팔련성. 8개의 성곽이 이어져있다 하여 팔련성이라 명명. 발해는 돈화에서 시작하여 두번째는 화룡에 도읍을 옮겼고 세번째로 훈춘에 도읍을 정했다.   돈화에 있는 오동성.   돈화에 있는 강동 24석. 이 돌들이 있던 위치는 당시의 역...
  • 2014-01-29
  • 22일 충북 청주시 금속활자주조전수관에서 열린 '직지 금속활자 복원사업' 최종보고회에서 복원된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공개됐다. 임인호 활자장(오른쪽)이 직지 금속활자 복원인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시스, 뉴스1]       
  • 2014-01-23
  • ▲ 사대부 남성들의 축첩은 그들이 지향하는 유교사회 이상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그림은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중 한 면인 ‘우물가의 대화’. 한 선비가 여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사회는 처첩제를 동반한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첩은 때...
  • 2014-01-21
  • 훈춘시 하다문향 명신촌(이전에는 용신촌) 동쪽의 옛 장성 성벽. 이 성벽이 훈춘경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옛 장성의 성벽이다.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언덕을 타고 뻗어올라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본 성벽, 그리고 멀리 용신촌 마을   이 장성의 총 길이는 50리, 훈춘시 영안(英安)진의 관문저자(关门...
  • 2013-10-09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