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만든 효종의 어보도 함께 환수
소장해온 재미교포 최근 기증 뜻 밝혀
국새엔 서양인 소유자 이름도 새겨져
22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미국서 환수한 국새 ‘대군주보’. 거북이 모양 손잡이인 귀뉴가 인장을 찍는 인면 위에 붙어있다.
효종어보를 옆에서 본 모습.
1882년 5월, 재위 19년째를 맞은 고종 임금은 나라를 대표하는 도장인 ‘국새’들을 잇따라 만들라고 중신들에게 명령한다. 그해 7월 완성된 국새에는 ‘대군주보(大君主寶)’‘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 ‘대조선대군주보(大朝鮮大君主寶)’ 등등의 긴 명칭이 붙었다.
당시 막 30살을 넘긴 젊은 고종은 국새 이름 속 대군처럼 자신만만했다. 그해 5월 서구 나라들 중에서는 처음 미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왕조는 근대기 국제 외교무대에 첫 발을 디뎠다. 고종은 수백년 상국으로 군림해온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들과도 폭넓게 자주외교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해 7월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여러 개의 국새들을 자체 제작해 외교 국서뿐 아니라 다른 행정 분야의 공문서에도 찍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만든 국새들은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별도의 국새를 만들면서 용도가 쪼그라들었고, 30년도 못가 나라가 한일병합으로 망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사라졌다.
그 국새가 나타났다. 고종이 조선왕조의 자주외교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만들어 사용한 ‘대군주보(大君主寶)’가 최근 미국 땅에서 확인돼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문화재청은 국새 ‘대군주보’와, 1740년 영조가 선왕 효종을 기리려 만든 기념인장 ‘효종어보(孝宗御寶)’를 지난해 12월 재미동포 원로사업가 이대수(84) 씨한테서 기증 받아 최근 환수했다고 19일 발표했다. 국새란 나라의 국권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외교·행정 등의 공문서에 쓰이는 도장을 뜻한다. 어보는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사후 찬양하기 위해 나라에서 만들어 관리해온 의례용 도장이다.
문화재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대군주보는 높이 7.9
cm, 길이 12.7
cm 크기다. 거북의 형상을 새긴 도장 손잡이인 ‘귀뉴(龜紐)’가 도장의 몸체인 인판(印板) 위에 붙여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손잡이 뉴 아래 몸체 뒷부분에 ‘
WB. Tom’이라는 서양인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국새가 미국으로 유출돼 유통될 당시 손에 넣었던 이가 자신의 소장품임을 알리기 위해 새긴 이름으로 보인다. 청 쪽은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의 사서기록을 감안하면, 고종의 지시에 따라 1882년 외교 업무에 쓰기위해 제작된 국새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대군주보’의 앞부분. 머리를 쳐든 거북의 얼굴에 매서운 기상이 서려있다.
‘대군주보’인면과 찍은 인면.
국새 대군주보 뒷부분. 손잡이 뉴 아래 몸체에 ‘WB. Tom’이라는 서양인 이름이 새겨져 있다. 미국으로 유출된 국새를 손에 넣었던 이의 이름으로 보인다.
조선왕조는 1897년 고종이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까지 중국 대륙의 명나라와 청나라한테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글자가 새겨진 국새를 인수받아 나라의 상징물로 계속 썼다. 이번에 환수된 국새는 1882년 고종의 지시로 ‘조선국왕’ 국새가 아닌 ‘대(大)조선국’의 ‘대군주(大君主)’라는 글씨를 새긴 ‘대군주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하게 된 내력을 보여준다. 고종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1882년) 등 당시 외교 정세 변화에 호응해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끝내고 조선을 온전한 주권을 지닌 독립국으로 격상시키고자 노력한 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세부 자료를 파악한 결과, 대군주보의 공식적 사용 시기는 1882년 제작된 이래 1897년까지로 파악되고 있다. 외국과의 통상조약 업무를 맡는 전권대신(全權大臣)을 임명하는 문서(1883년)에 실제 날인된 예를 찾아냈다고 한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새롭게 제정된 공문서 제도를 바탕으로 대군주(국왕) 명의로 반포되는 법률, 칙령, 조칙과 관원의 임명문서 등에 사용된 용례까지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효종어보는 높이 8.8
cm, 길이 12.6
cm로, 황색의 거북 모양 손잡이(뉴)가 올려져 있다. 영조가 재위 16년째 되던 1740년 선왕 효종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라는 존호를 올리며 만들었다. 효종이 세상을 떠난 승하 직후인 1659년에 아들 현종이 시호를 올렸고, 1740년과 1900년에 영조와 고종이 각각 존호를 올렸으며 이때 어보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기록에 보이는 효종어보 3점 가운데 지금껏 남아서 전해진 건 1900년에 만든 국립박물관 소장 어보가 유일했고, 나머지는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었으나, 이번 기증으로 묻혔던 효종의 어보유물 하나를 추가로 찾게 됐다.
효종어보의 앞모습.
효종어보 인면과 찍힌 인면.
국새와 어보는 재미동포 이씨가 1990년대 후반 경매사이트 등을 통해 사들여 소장해온 것들이다. 애초 두 유물이 국외로 흘러나간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씨는 지난 2014년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이 미국 당국의 수사 끝에 국내로 대거 환수되고, 2017년에도 문정왕후와 현종의 어보가 미국에서 국내로 돌아가게 됐다는 소식을 언론 보도로 알게된 뒤 기증하겠다는 뜻을 문화재청에 전했다고 한다. 그 뒤로 <미주현대불교> 발행인 김형근(64)씨와 아도모례원 성역화위원장 신영근(71) 씨가 소통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환수작업이 진척됐다는 설명이다.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조선 왕조 치세기 만든 국새와 어보는 모두 412점에 달한다. 이번에 돌아온 2점을 제외해도 73점의 행방은 아직 모른다. 국새·어보는 조선 왕실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자, 정부의 공식 재산이어서 일반인들은 소장 행위 자체가 불법이다. 사라진 73점의 조선왕실 인장류는 유네스코 123개 회원국을 비롯해 인터폴과 미국국토안보수사국 등이 공유하는 행방불명 유물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청 관계자는 “그동안 국새나 어보의 환수는 한국과 미국 당국의 압수, 수사와 같은 강제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적이 많았는데, 이번 환수는 3자의 도움을 받아 소유자 스스로 기증을 결심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청은 돌아온 대군주보와 효종어보를 19일 오후 2시 서울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취재진 앞에 먼저 내보인다. 뒤이어 22일부터 3월 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 ‘조선의 국왕’실에서 특별 공개 전시회를 열어 일반 국민에게도 유물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
hani.co.kr, 도판 문화재청 제공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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