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효명(史晓明)
세상에 둘도 없는 키질석굴은 신강 배성현 키질향 동남으로 약 8키로메터 떨어진 명옥타걸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있다. 현재 236개 동굴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굴내 벽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불교벽화 예술이 약 4,000평방메터의 면적으로 보존되여있는데 그 년대는 대략 기원 3세기에서 8, 9세기 좌우에 이른다. 그 진귀함과 가치는 돈황막고굴의 벽화와 겨룰 만한 것으로서 중국 4대 석굴의 하나로 불린다. 키질석굴은 1961년 우리 나라에서 첫 진으로 중점 문물보호단위에 들었다.
키질석굴 벽화는 중서방 문화의 정수를 집성하고 당지 구자민족의 뛰여난 재능을 융합했다. 형식상 장식 고안이 다분하고 창작수법이 소탈하며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 있으며 예술적 기예와 풍격은 독특한 격식을 창조하고 있는데 중세기 인류 문명사에서 혁혁한 지위를 차지한다.
키질석굴에 남긴 한락연선생의 제사는 민족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깊은 정의 진실한 발로였다.
중원 북제의 중아시아 화가 조중달(曹仲达)이 그린 그림 〈조가양(曹家样)〉에는 서역 회화의 특점이 다분하다. 그가 그린 불상은 몸에 걸친 옷이 인체 모양을 따라 이룬 무늬 구조가 기복과 전환을 이루며 그 치밀한 곡선이 마치 금방 물속에서 나온듯 옷이 몸에 바싹 달라붙어 인체의 우미한 감각을 충분히 드러낸 데서 세칭 ‘조의출수(曹衣出水)’라고 했다.
당대 그림 력사상 전국에 명성이 자자한 서역 화가 대위지, 소위지 부자의 〈굴철반사(屈铁盘丝)〉, 〈요철훈염(凹凸晕染)〉의 화풍은 당나라 회화의 발전에 신선하면서도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풍부히 했다. 당나라의 주경현은 《당조명화록》에서 “선배들 왈: 위지을승은 염립본에 견줄 만하겠도다… 그 그림은 신선의 작품이라고할 수 있겠고.” 라고 쓰고 있다. 당나라 화단의 성인 오도자는 ‘필법이 절묘’ 했는데 (탕후: 《화감(画鉴)》)그가 바로 중원의 화법과 서역의 기교를 하나로 융합한 후 당대의 회화를 절정에로 끌어올렸다.
키질벽화는 당시 서역의 전형적인 대표로서 이를 떠나서 조중달과 위지의 화풍의 친필 흔적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회화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불교예술을 피할 수 없는데 인도의 불교가 동양으로 들어오는 과정에 ‘비단의 길’ 요로에 위치한 키질석굴은 제일 먼저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중국 회화 력사에서 키질석굴 예술이 가지는 의의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으로 되였다. 더우기 남북조 회화의 발전과 진화중에 키질석굴 예술의 지위는 더욱 중요해지게 된 것이다.
키질벽화 예술연구에서 앞사람들의 업적을 소급할라 치면 중국 근대 미술계에서 여기에 가장 일찍 발을 들여놓은 이로 한락연선생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저명한 화가이고 학자이며 돈황연구원 명예원장인 상서홍 로선생은 한선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사업성적은 바로 돈황예술 연구에 보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대천선생이 일찍 하고저 했으나 못해낸 일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락연이가 멀리 관새를 지나고 산악을 넘어 뜨거운 고비사막에 와서 완성했다…” (《사회과학전선》에서)
한락연(1898―1947년)은 본명이 한광우, 길림성 룡정의 한 조선족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1920년 류해속이 세운 상해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후에 심양에 가서 심양미술전문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주관했다. 1929년 프랑스에 가서 근공검학을 했는데 프랑스 국립루버르예술학원을 졸업하고 쏘련, 폴란드, 독일, 이딸리아, 벨기에, 화란, 스위스 등 나라를 주유하며 참관, 사생을 했으며 1937년에 귀국했다.
1944년 서북에 와서 사업했는데 선후로 타르사, 돈황, 신강 등지에 다니며 고고발굴, 문물정리, 벽화모사 등 사업들을 몸소 했다. 고대 민족 문화 전통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한 그는 서북의 문물고고 사업과 서역 미술사의 연구 령역에 개척적인 기석을 다져놓았다.
국내외에서 선후로 개인 그림전시를 20차 진행한 한락연선생은 격정이 충만되고 재능이 출중한 예술가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국제공산주의전사였으며 또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일찍 공산주의 각오를 구비한 미술가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4년 동북지역에 와서 건당 기획 준비 사업을 했다. 유럽 류학 때에는 프랑스공산당의 반파쑈투쟁에 참가했으며 《빠리석간》 촬영기자로도 있었다. 귀국 후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해 중국인민해방투쟁에 대량의 조직, 선전, 통전 등 사업들을 했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1947년 7월 30일, 한락연선생은 한차례 비행기사고로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그는 49세였다. 한선생의 한창나이에 요절은 우리 나라 서북 근대 문명사에서 하나의 보상할 수 없는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사회과학전선》에서)
한락연의 유화작품 〈경마〉(64cm × 50cm, 1945년)
한락연선생은 생전에 키질석굴을 두번 다녀왔다. 당시 극단적으로 어려운 환경 조건에서 천신만고를 무릅쓰고 먼길을 걸어 고비사막 깊은 곳에 자리한 키질석굴을 찾은 이 행동은 조국의 고대문물에 대한 그의 애착과 사랑, 그리고 민족의 찬란한 문화예술을 발양시키고저 하는 원대한 포부를 남김없이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세상 뜨기 얼마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5년 시간을 들여 쿠처, 카스, 화전, 차말, 약강에 대한 고찰을 마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목적은 서북박물관을 세우는 것이였다. 당년에 그가 키질석굴에 남긴 제사(题记)는 바로 그가 민족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정의 진실한 발로였다.(《신강예술》 1984년 2기에 실린 조기의 〈화가 한락연을 회억하며〉)
그 제사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나는 들레르쿠크가 쓴 〈신강문화보물고〉 및 인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기〉를 읽고 신강에는 고대예술품이 아주 많이 간직되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으며 따라서 신강에 가볼 생각을 하게 되였다.
하여 1946년 6월 5일, 홀로 이곳에 와서 벽화를 흔상했는데 눈부시게 현란한 데다 전부 고상한 예술가치가 있는 것들로서 우리 나라 각지의 동굴들은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벽 표면이 외국의 고고팀들에 의해 벗겨져가고 없었다. 실로 문화 력사상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유화 몇폭을 시험적으로 모사하면서 14일을 묵으며 충실히 준비했다. 그 다음해 4월 19일에 조보기, 진천, 번국강, 손필동을 거느리고 두번째로 이곳에 왔다. 우선 번호를 매겼는데 정, 부 번호 동굴 75채를 기록한 후 각기 모사, 연구, 기록, 촬영, 발굴을 하여 6월 19일에 잠시 한단락을 마무리했다.
고대문화가 널리 발전되고 빛나도록 하기 위해 참관자 여러분들께서는 이를 특별히 애호하며 보호해줄 것을 삼가 바라는 바이다!
한락연 6. 10
마지막으로 13호 동굴 아래에서 완정한 동굴 하나를 발굴해냈는데 6일 60공으로 계산하고 벽화가 신기한지라 특1호로 번호를 매긴다.
6. 16
한락연선생이 키질석굴에서 사업한 주요한 성적(벽화 모사품, 사진 등을 포함) 모두가 비행기 추락중에 소각되였다. 이는 신강 문물 고고사업에서 하나의 큰 한스러운 일로 되였다. 실로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40여년간 이에 관심을 갖는 학자도 드물었다. 하기에 한선생이 키질석굴에 관한 기여를 깊이 료해하려면 단지 그가 발표한 문장이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가족, 친우 및 학생들의 추억, 남겨진 유작과 키질석굴의 현황 등 지나간 자질구레한 것들에만 의거해 그 단서들을 탐구, 분석하는 것으로 한선생의 웅대한 뜻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되였다.
키질석굴 벽화 예술에 대한 한선생의 명철한 견해를 우리는 해당 자료―한락연의 《키질고고기》에 근거해 대체상 아래의 세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1) 키질 벽화 예술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서 중국의 다른 동굴과 사찰들은 이에 닿지 못할 정도이며 년대가 가장 일찍한 것이다. 수량상에서는 돈황보다 많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림의 가치와 풍격은 그와 견줄 만큼 휘황찬란하다.
(2) 키질 벽화는 이미 빛의 표현을 알고 있었다. 인체가 특히 정밀하고 우미한 데다가 인체 해부, 골격과 근육에도 상당한 고찰과 연구가 있었으며 화면 구도가 정밀하고 착색이 현란한 것이 단순한 화공의 그림이 아니다.
(3) 키질 벽화는 당시의 신도, 화가들의 종교 사상과 사회 철학의 객관적인 반영이다. 중국 문화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것이다. 아무도 훼멸시킬 수 없다.
키질석굴에 대한 한선생의 구체적인 번호 작업과 관련해 지금껏 당시의 문자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정부(正附) 번호 75자리(벽화가 있음)를 개괄적으로 알고 있을 뿐인데 비교적 완정한 동굴이 100여개 된다(《신강예술》 1984년 2기에 실린 조기의 글 〈화가 한락연을 회억하여〉). 이에 비추어 우리는 동굴의 현재 유물들에 실제조사를 진행했는데 아래는 필자가 근래에 답사한 결과이다. 그 설명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한선생이 번호를 매긴 순서는 대체상 동굴이 절벽에 나있는 자연 상태 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렬되였다.(②키질석굴은 산체의 자연 면모에 따라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각기 곡서구, 곡내구, 공동구, 후산구이다.) 이는 해방 후에 통일적으로 번호를 매긴 순서와 대체상 같다. 동굴 내외의 사암 우에 먼저 둔기로 사암을 갈아 평평하게 만든 다음 암면에 길이와 너비가 25센치메터 좌우 되는 테두리 홈을 갈아 파내고 그 테두리 안에 아라비아수자를 써넣었는데 수자의 깊이는 테두리 홈보다 좀더 들어가 있다(약 1센치메터). 여기에 전부 흰색 안료를 칠했다. 이런 것은 다 한선생이 매긴 번호이다(개별적인 일부 번호는 례외).
그러나 해방 후 문물보관소를 세우고 선후로 동굴에 상응한 보호작업을 진행하면서 부분적인 한씨 굴번호가 후에 세운 방벽에 가리워졌거나 혹은 자연붕괴되였기에 금후 동굴을 대규모로 보수할 때를 기다려 다시 보충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 아래에서 ‘지레(-)’ 뒤의 수자가 현재 키질석굴의 통일 번호이다.
1—조사 필요, 부1—7, 2—조사 필요, 3—32, 4—34, 부4—27, 5—조사 필요, 6—39, 7—47, 8—48, 9—조사 필요, 10—58, 11—60, 12—63, 13—67, 특1—69, 14—77, 15—조사 필요, 부15—83, 16—92, 부16—85, 17—97, 18—98, 19—99, 20—100, 21—101, 22, 23, 24, 25—조사 필요, 26—11, 27—117, 28 —118, 부28—123, 29—조사 필요, 30—조사 필요, 31—조사 필요, 32—159, 33—161, 34—163, 35—165, 36—167, 37, 38, 39—조사 필요, 40—175, 41—176, 42—178, 43—179, 44—180, 45—183, 46—184, 47—185, 48—186, 49—187, 50—188, 51—189, 52—192, 53—193, 54—196, 55—197, 56—198, 57—205,58—206, 59—207, 60—208, 61—211, 62—212, 63, 64—조사 필요, 65—222, 66—224, 67—227, 68—229.
이상의 분석에 근거하면 이런 번호들은 하나는 벽화가 있는 동굴이고 다른 하나는 ‘75채’ 가운데의 번호(정, 부 번호를 포함)이다. 여기에 특1호를 합치면 합계 76채가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57개 밖에 찾아내지 못했고 ‘100여개 동굴에 번호를 매겼다’는 기록으로 말하면 ‘도안 30여종을 촬영, 발굴하고 모사했다’ 등 작업(①《문물》 1984. 12)은 잠시 직접적인 자료가 없기에 금후의 문제로 남긴다.
한락연의 수채화작품 〈까자흐족 부녀가 쌀을 찧다〉(47cm × 31.5cm, 1945년)
아래에 현재의 번호가 제10굴과 제69굴로 되여있는 두 동굴의 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
제10굴은 1947년 한선생이 제사를 쓴 동굴(제사의 앞부분)이다. 이 굴은 곡서구 서단에 위치했는데 지면과 약 10여메터 거리를 두고 있으며 키질석굴의 전형적인 승방굴(당시 승니들이 생활한 장소)로서 벽화가 없다.
건축구조는 다음과 같다. 출입통로, 문창, 벽난로, 침대가 있는데 주실은 대체로 방형을 이루고 천정은 효혼식횡권(枭混式横券)이다. 제사는 북쪽 벽의 상반부에 있는데 동에서 서에로 세로 새긴 글로서 길이 3.35메터, 높이 0.95메터이다.
벽면 현황으로 볼 때 제작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벽면에 있는 너덜너덜해진 진흙 표면을 평평하게 깎아내고 암벽 면을 마모한 다음 통일적으로 네모칸을 치고 그 다음 다시 둔기로 글을 새겼다. 글자의 크기는 평균 8 × 10센치메터, 깊이는 0.5센치메터이며 마지막에 흰색을 칠했다.
필자가 당년의 한선생의 조수였던 진천(陈天)의 친척으로부터 알아본 데 따르면 당시의 제사는 한락연이 원고를 작성하고 진천선생이 구체 제작을 완성했다. 글을 새긴 도구는 꺾쇠였으며 도료는 흰색이였다.
제69굴은 한락연선생이 1947년 최후 작업을 하던 며칠간에 발견한 특1호 동굴이다. 이 굴은 곡서구 중단 동부에 위치했는데 굴의 형태는 키질석굴에서 비교적 전형적인 중심 기둥 굴로서 ‘벽화가 신기’하고 굴을 판 년대는 기원 6세기 좌우이다. (《문물》1984년 12기) 전실(前室)은 거의다 훼손되였으나 방형 구조를 이루고 있음은 여전히 보아낼 수 있다. 소상(塑像)은 훼손되였고 벽화도 아주 볼모양이 없이 되였으며 주실 소상은 훼손되여있다(감실 안과 좌우 벽 앞).
현존하는 벽화들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문벽 웃측에는 록야원(사르나트) 초전 법륜이 그려져있고 꼭대기 부분에는 릉격 본생경(자타카) 이야기가 그려져있으며 좌우 벽에는 부처, 보살, 공양인, 법기와 도안 등이 보존되여 있다.
좌우 통로에는 부처, 보살, 제자, 비천, 공양인이 잔존해있다.
후실의 소상은 훼손되고 부처 열반대가 남아있으며 벽화에는 애도제자, 비천, 법륜, 법기, 도안, 보살, 보리수 등이 있다. 이외에 또 부처의 후광과 보리수 줄기가 부소(浮塑)되여있다.
69굴에는 비교적 특수한 현상이 있다.
즉 굴 천정과 문벽 웃측의 벽화는 진흙 표면에 그린 것(즉 건화법)이 아니라 평평하게 갈아 다듬은 사암 벽면에 직접 그린 것이다(해당 전문가는 이 화법을 습벽화(湿壁画)라고 함. —《문물》 1984년 12기). 이 화법의 특점은 안료를 물 등과 배합한 후 색상이 어둑스레하면서도 흡수가 재빠른 건조한 사암 우에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그려지는 벽화는 아주 독특한데 화면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또한 보일락말락 하는 기묘한 효과가 나타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아롱다롱해진 결과이다. 게다가 안료의 변이로 하여 화면에 신비한 색채가 더해지면서 후인들로 하여금 볼수록 흥미를 자아내도록 한다.
여기서 제시할 것은 동굴을 발견한 후 한선생은 전문 장인을 청해다 이 굴을 봉했는데 문을 달고 자물쇠를 잠구어 관리와 보호를 더했다는 것이다.
1988년 12월, 한락연선생 탄신 90돐을 기념해 북경 민족문화궁에서 한락연 유작 전람을 거행했다. 합계 165폭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중에 키질석굴 관련 작품이 29폭(수채화와 유화)이였다. 우리는 이런 벽화 모사와 풍경 인물 사생 작품들에서 한선생의 밝고 깨끗한 마음, 호매로운 성격, 스스로 향상하며 자강하는 정신과 인류 진보 문명에 대한 견정한 신념을 보아낼 수 있었다.
이런 작품들은 기법이 숙련되고 구상이 주도면밀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키질 벽화의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와 풍격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는데 그 자료의 진귀한 정도, 그리고 시대의 숨결감과 함께 우리가 특별히 소중히 여길 만한 것으로 되고 있다. 이외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한락연선생의 소묘 자화상 한폭이다. 이 자화상 화면의 륜곽은 진정 사람을 감화시킨다. 회화수법이 홀가분하고 자유자재로울 뿐만 아니라 그 미소 짓는 표정은 방불히 키질석굴 예술 사업의 휘황한 미래를 더없이 기대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선생의 원대한 념원이 중국의 서북 변강에서 하루빨리 현실로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1989년 6월 10일 키질석굴에서
사효명(史晓明, 1956년— ):
1984년―1997년 키질 천불동에서 사업.
1997년 9월부터 1998년까지 신강예술학원 교수.
/번역: 《길림신문》김정함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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