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제9차 재한중국인민지원군 렬사 88명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에 안장됐다.
“항미원조전쟁중 19.7만여명 영웅의 아들딸들이 조국을 위해, 인민을 위해, 평화를 위해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에 있는 높이 3미터, 길이 약 200미터의 렬사영명벽에는 거의 모든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 해설원 두약비가 전했다.
1953년 3월 3일부터 5일까지, 심양 각계 인민들이 손점원, 황계광, 구소운 3명 렬사 추도식에 참가했다.
이 렬사릉원은 1951년에 건축되였는데 건설과 동시에 렬사의 유해가 잇따라 안장되였다. 1953년 2월, 손점원, 황계광, 구소운 등 3명 렬사의 유해가 심양으로 운송되여 이곳에 안장되였다.
1953년 3월, 심양 각계 인민은 손점원, 황계광, 구소운 등 3명의 항미원조렬사를 위해 추모활동과 추도대회를 장엄하게 거행했다.
《동북일보》는 련속 3일간 이어진 추모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도했다. “3월 2일, 한차례 봄눈이 심양에 내리자 따뜻해진 날씨가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튿날, 가슴에 하얀꽃을 단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눈길에 추위를 무릅쓴채 화환을 들고 중국인민지원군 전투영웅과 공신인 손점원, 황계광, 구소운 3명의 렬사를 추모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1953년 3월 6일, 심양 만인추도식이 진행됐다.
“령당 우에는 세 렬사의 초상이 걸려있고 수많은 화환 속에 세 렬사의 령구가 놓여져 있었으며 령당의 주위에는 렬사의 영웅사적을 추모하는 만련이 가득 걸려져 있었다.”
1953년 3월 6일, 만인추도대회가 심양에서 거행되였다. 《동북일보》는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6일, 추도대회가 시작되자 심양 각계 인민대표 2.2만여명이 광장에 모였다. 비록 이날 모래바람이 거셌지만 이들은 숙연하게 2, 3시간을 서있었고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추도회가 끝난 후 수많은 사람들은 의장 앞에서 세 렬사의 령구가 묘지에 안장되도록 호송했다.”
갈 때는 소년이였으나 영웅혼으로 돌아오다.
그 때부터 영웅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우리 공동의 념원으로 되였다. 2014년부터 913명의 재한지원렬사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맞이하는 재한지원군렬사 유해는 관곽에 담겨 릉원기념광장의 지궁에 안치된다. 현재 30여명의 렬사만이 신원이 확인됐고 10여명의 렬사가 가족을 찾았다.”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 해설원 두약비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다음 단계 우리는 지원군렬사유해 DNA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는 등 기술을 통해 귀국 안치될 지원군렬사유해의 신원감정에 도움을 주고 전시자료와 도장 등 유물로 단서를 찾는 것을 결합해 렬사들을 위해 가족을 찾아줄 것이다.”
천하가 평안하니 조국에서 안식하길!
렬사들이 하루빨리 가족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료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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