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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농민들과 한덩어리가 된 사람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월24일 09시54분    조회:7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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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오기철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65)

농촌에 돌아온 당의 사절 도덕모범 오기철의 귀향 15년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 당지부서기 겸 촌주임 오기철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의 당지부서기이며 촌주임인 오기철은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평의선발활동에서 연변에서 유일하게, 그것도 유일한 농촌분야의 걸출인물로 선정되여 표창받았다.

《돼지를 키우려고 고향에 돌아온 내가 영예를 받고보니 송구스럽습니다.》《전국 216만명의 조선족들중에서 <감동인물>로 선정된것이 2700여만명 인구의 길림성에서 <10대감동인물>로 선정된것보다 더 자랑스럽고 그래서 압력이 더 큽니다.》오기철의 속심말이다..

1956년,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에서 태여난 오기철은 무슨 일이나 시작하면 꼭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였다. 《문화대혁명》때문에 아쉽게 대학꿈을 접고 농사일을 하면서도 흥취로 손에 쥔 손풍금만은 절대 놓지 않았다. 집식구들이 시끄러워하니 김치움에 들어가 련습을 계속하는 오기도 부려보았다.

그 보람으로 1975년도에 해방군특종병을 모집할 때 오기철은 손품금연주재간이 하도 뛰여나서 신체검사도 없이 당장에서 군복을 발급받았다. 입대후 입당을 하고 부대의 추천으로 길림성예술학원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손풍금을 전공한데서 손풍금연주 수준이 길림성에서 첫손꼽힌다는 평을 받았다.

1977년 8월, 오기철은 장춘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 배치받고 업무관장으로 발탁되였다가 1994년에 성대외무역그룹에 전근되여 무역담당경리를 지내면서 년간무역수출액을 천만딸라이상씩 올리는 경제적재능도 보였다.

《지금까지 해보자고 하던 일이 안된것이 없습니다.》《나는 무슨 일을 하나 1등밖에 모릅니다》

오기철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하는 말이다.

남들이 못하는 일을 내가 나서서 해보자

오기철은 20년간 장춘에서 돈도 괜찮게 벌고 넓은 인맥관계로 장춘의《조선족령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1997년 여름,오기철씨는18살에 떠난 봉림촌을 처음 방문하였다.

개혁개방덕분으로 촌민들은 많이 좋아졌다고 했지만 어수선한 마을과 큰 빈부차이가 느껴져 기철씨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어렵게 지내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현금을100원씩 드렸더니 《뻘건돈》을 처음 손에 쥔다며 그렇게도 감격해마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기철씨는 생각이 많았다.

(계속 장춘서 사업을 한다면 승급하면서 잘살것이지만 무미하게 잘살아서 무슨 보람이 있는가? 남들이 못하는 일을 내가 나서서 해보자!)

1998년 8월, 오기철씨는 장춘도시생활을 접고 귀향을 결심했다. 장춘제1자동차공장 기술과에서 일하는 안해는 하필이면 농촌을 선택한 남편의 마음을 리해할수 없었다.

《나의 여생을 고향건설에 바치겠소. 인간으로 태여나서 보람있게 사는것이 나의 소원이니 함께 가기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있는 안해는 결국 오기철씨의 귀향고집을 꺾을수 없었다.

지적장애자들과 불구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귀향하자 기철씨는 당조직을 먼저 찾아 자기의 당원신분을 밝히고 규모화 양돈업을 창업대상으로 선정하고 창업과 극빈호부축을 병행하였다.

100여만원을 투자하여 규모화한 양돈장을 꾸리고 극빈호를 대상으로 양돈장일군을 모집하였다.극빈호들에게 일할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오기철은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가고 헐망한 집에서 로모와 둘이 사는 벙어리 애순강(한족)을 사양원으로 모집했다.

애순강이 손버릇이 나쁜데서 동네서는 기철이를 양무리에 승냥이를 끌어들였다며 걱정을 했지만 기철씨는 늘 애순강을 불러 함께 밥을 먹고 공공장소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인간대접을 했다. 그에게 창고열쇠까지 맡기며 믿음을 줬고 1000원짜리 핸드폰을 사주며 문자메시지(短信)를 보내는 방법까지 배워주었다.

오기철은 애순강에게 60여평방짜리 벽돌기와집을 지어주고 집안장식,가전제품, 침실가구까지 전담했고 결혼이불까지 마련해줬다. 기철씨의 덕분으로 애순강네 년수입이 만여원에 달했고 2006년에는 연길의 벙어리처녀와 결혼까지 하였다.

서성촌에서 바보와 정신환자 취급을 받는 예민익(한족,23살 )은 제 나이도 모르는 장기환자형님과 시각장애인 로모와 헐망한 집에서 살고있었는데 민익이가 어릴 때 산속오막굴에서 살다보니 15살에 소학교에 입학해 21살에 졸업하고 돈이 없어 24살에 방청생으로 초중을 다녔다.

민익이의 집을 찾아 가정형편을 료해하는 오기철/ 김성걸 기자

민익이는 동네서 닥치는대로 훔치고 동네를 다니며 창문유리를 까부시는 등 사단을 일으키군 해서 애군으로 소문났다.

오기철은 예민익네 집에 땔나무는 물론 옷,신발,입쌀, 소금, 간장, 콩기름 등 장간새와 색텔레비죤까지 사주고 온돌까지 고쳐주었다. 민익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역겨운 때를 밀어주고 리발관에 가서 머리를 깎아주고 예민익의 전년 리발비를 선불했다.

3700원을 투자해 송아지가 달린 암소와 작두까지 마련해주었다.해당 부문과 련계해 민익이네 경작지를 해결하고 해당 부문의 보조금 6000원에 자기 돈 4만원을 보충해 벽돌집을 지어주고 가전제품까지 마련해주었다. 지금 민익이네는 뜨락또르까지 마련하고 생활을 자립하고 있다.

《기철이를 알려면 병원, 목욕탕, 리발소, 상점에 가서 물어보라.》

이는 배초구에서 오기철을 두고 화전되는 미담이다.

《내가 도와준 사람들은 도문시의 최원을 내놓고는(최원의 자서전인 <휄체어의 노래> 출판을 협찬)몽땅 지적장애자들입니다.》《민익이가 내 자랑을 한다는것이 동네를 다니며 오형님이 내 집을 짓고 몇만원을 벌었다고 실없는 소리를 합니다.》 기철씨는 지적장애자들의 실수까지도 너그러이 감싸주며 웃음을 지었다.

기철씨가 돕는 지체장애자들과 극빈호가 20여세대(한족 10세대)나 된다. 오기철은 그밖에도 고향마을의 공익사업과 문화생활에 거금을 투자했다. 기철씨는 자기가 빈곤부축에 쓴 돈이 100만원은 될것이라고 하는데 기철씨의 혜택을 본 수혜자들의 통계는 140만원이 넘는다.

고향에 돌아온후 빈곤부축에 목돈을 쓰는 기철씨지만 담배돈이 아까워 담배까지 끊은 《짠돌이》로 변했다.

오기철이 말하는 귀향3단계

기철씨는 귀향 15년을 등잔밑이 어둡던 10년,빛을 본 2년,후회되는 3년이란 세 단계로 나눈다.

《등잔밑이 어둡던 10년》은 사회서나 조직에서 기철씨를 화제로 《그 많은 돈이 어디서 오는가?》며 그가 외국의 자금지원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하는 정치적색채를 띤 인물로 의심하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종교활동으로 여기던 불리해의 시기이다.

일부 간부들은 앞에서는 입발린 좋은 말을 하고 뒤에서 (그 사람이 자기에게 좋은 혜택이(好处) 없다면 왜 그렇게 하겠는가? )며 쓴소리를 하였다.

오기철이 농민들의 합법적인 리익을 위해 여러모로 나서서 문제해결에 유관부문들을 찾아나서자 일부 사람들이 《그런 일에 적게 삐치라》며 엄포를 놓았고 한차례 현에서 조직한 모임에서 해당 책임자가《당신은 누군가?》 《왜 당신의 선동력이 그렇게 대단한가?》며 회장에서 축출시킨 일도 있었다. 심지어 해당 부문에서 기철씨를 《격리대상》명단에 올리기도 하였다.

장애자가정을 방문하면서 용기를 붇돋아주는 오기철(왼쪽)/ 김성걸 기자

《나의 사적이 상급에 반영되지 않기때문에 나는 모범이나 선진인물과 인연이 없습니다. 당원으로서 명예를 따지는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오기철은 충실한 사람으로 당원답다고 말한다면 만족입니다》 오기쳘씨의 진솔한 이야기였다.

오기철씨는 《등잔밑이 어둡던 10년간, 나의 사적을 세상에 알린것은 나를 잘 아는 장춘의 <길림신문>과 연변의<지부생활>잡지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오기철이 귀향한후 배초구진의 당위서기가 6번 바뀌였다.

오기철이 등잔불밑에서 볕을 보기 시작한 계기는 그가 《우리의 노력으로 사회를 더욱 조화롭게 만듭시다》라는 제목으로 왕청현당위 조직부 등 당조직에 올린《귀향10년 사업회보》때문이였다.

그가 올린 사업회보를 통하여 오기철을 알게 된 배초구진 당위서기 송문호가 2008년 9월에 오기철을 찾아와서 함께 《장춘농업박람회》에 가자고 하였다.

오기철은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가는 길에서 송서기는 기철씨한테 《농업박람회》 먼저 그가 사업하던 원 단위를 가보자고 하였다. 기철씨가 즉시 핸드폰으로 원 단위 처장한테 《배초구진 사람들을 모시고 갈테니 점심을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처장이 직접 출면하여 송서기일행을 격이 높게 접대하면서 오기철의 위인됨을 상세히 소개했다.

후에야 할게 된 일이지만 당시 송서기의 장춘행 목적은 박람회참관이 아닌 오기철의 뒤조사였다.도대체 오기철이 어떤 사람이며 왜 농촌에 내려와 농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급시우로 되였는가 하는 의문을 풀기위한것이였다.

그번 걸음에서 오기철의 대공무사한 정신과 농촌농민들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읽은 송서기는 오기철더러 당금 당조식소개신을 배초구진에 옮겨오라고 부탁했으며 현당위 조직부와 인대에 오기철의 사적을 회보하겠다고 했다

《그 좋은 단위에서 왜 제 돈을 팔면서 농촌서 고생합니까?》

《그건 제가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니깐요》

《정말 리해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오선생 같은 사람은 없을겁니다》

송서기와 기철씨는 속심을 나누었다.

2009년 조직에서는 사심없이 불우이웃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오기철의 정신을 높이 인정하고 그에게 봉림촌의 당지부서기 겸 촌주임의 중임을 맡기였다. 처음 농촌에 찾아왔을 때는 한개 가정, 한개 군체의 어려움과 곤난을 돕고 해결해나서는데 주력했다면 이젠 한개 마을과 수백명 농민들의 곤난과 어려움을 돕고 해결해나가야 하니 더욱 범위와 가치가 커진것이다.

봉림촌에 갓 부임되여갔을 때 마을을 돌아보는 오기철

봉림촌에 부임된 4년간 오기철씨는 농민들에게 유익한 일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더니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을 주더라면서 그렇게 했기때문에 마을건설에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올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오기철은 농촌산업발전과 농민들의 생산생활환경개선을 위해 많은 실제적인 일들을 했으며 보급가치가 있는 경험과 방법들을 더듬어냈다. 실례로 당지실정에 맞는 농민치부의 방법으로 농민들을 검정귀버섯재배의 길로 이끌었는데 당지 농민들의 수입을 크게 제고시켰다.

상급 해당 부문의 지지로 빈곤호들의 위험한 집을 고쳐주었고 초가집개조에 지붕개조, 심지어 울바자까지 몽땅 바꾸어주었다. 마을길도 몽땅 새롭게 수건했고 수리시설개조에 문화정원건설까지… 살맛나는 새 농촌건설에서 마을의 면모가 일신된것이다.

청명이나 추석이면 고향 떠났던 사람들이 성묘차 고향에 돌아와 보고는 마을의 변화와 발전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오기철은 소개했다. 시내에서 살던 사람들도 조만간 고향에 돌아올 의향을 내비친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2011년 8월 18일,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며 전국정협 상무위원인 리덕수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와 연변주정협,왕청현당위 등 부문 책임자들의 안내하에 봉림촌을 시찰하였다.

그때 리덕수는 《나는 <길림신문>에서 기획한 <60주년에 만난 60인> 책을 읽고 오기철을 알게 되였다.》며 기철씨의 고상한 당성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고향을 열애하고 열심히 자선한다(熱愛家乡 熱心慈善)》는 친필제사를 오기철에게 선물했다. 왕청현의 책임일군 곽학이는 《오기철은 왕청현 200여개의 촌, 툰에서 제일 우수한 농촌간부다. 그는 양돈에서 번 돈으로 20여가구의 빈곤가정에 벽돌집을 지어줘 정부의 부담을 크게 덜어줬다》고 소개하였다.

 
봉림촌을 시찰온 리덕수, 강광자 등 지도일군들을 안내하는 오기철(오른쪽).

2012년 7월, 길림성당위 손정재서기는 중공중앙위원, 중국장애인련합회당조서기, 리사장인 왕신헌(王新宪)을 접견할 때 《오기철은 진정한 도덕모범이다.》고 소개하였다. 2012년 11월15일 왕청현당위에서는 오기철사적보고회를 성대히 열고 오기철을 따라배울데 관한 현당위의 결정을 반포했다.

오기철은 2012년《감동길림10대인물》로,2013년 9월에는 유일한 조선족대표로 중국장애인련합회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는 영광을 누리였다.

오기철씨가 말하는《후회되는3년》은 촌간부로 된후의 3년을 말한다.

《촌간부로 된후에 정력부족으로 원래 하던 양돈업이 망가지진거나 다름없습니다. 계속하여 양돈업을 잘했더라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했을것인데…》

이렇게 말하는 기철씨는 촌사업을 하면서 어쩔수없이 힘들고 아무리 해도 남들이 그의 마음을 잘 알아주지 못하기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여러분들의 행복이 바로 저의 기쁨입니다》라고 오기철씨는 말하군 한다

현재 오기철씨의 촌간부 보수는 1년에 겨우 4~5000원, 그러나 자기에게 좋은 리득이라도 있으니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위인됨을 의심하는 오해의 뒤소리를 들을 때가 가장 안타깝고 서운하다고 오기철씨는 말했다.

《나는 봉림촌에 집도 없고 밭도 없으며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단 바람이 있다면 부나 권력이 아닌 보통인간으로 세상에 태여나서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 가치를 창조했는가를 검증해보려는것뿐입니다.》

《원래는 빈곤세대만 대상하고 시작한 사업이 새농촌을 건설하는 중책에로 옮겨졌으니 이젠 더더욱 농촌농민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잘해내야지요.》《봉림촌을 왕청현의 제일가는 촌으로 건설하는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이제 3년이면 검증될것입니다. 꼭 노력하여 이루어낼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면 자기가 즐거워지고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기가 즐겁다》(服务大家 快乐自己, 幸福大家 快乐自己)는 말을 오기철씨는 가장 좋아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가운데서 본인의 행복감과 성취감도 높아져 즐거운 인생이 된다는것이다.

길림신문/오기활 안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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