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일제 때 中이주 조선인 고난사 담은 기록집 일본서 출간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28일 09시39분    조회:341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이광평
'이주 2세대' 이광평 씨의 '만주로 건너간 조선족들'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와중에 한반도에서 중국 만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한 조선인 약 600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기록집이 일본에서 출간됐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이주 2세대인 이광평(74) 씨가 최근 이주 조선인들의 애환을 담은 기록집 '만주로 건너간 조선족들-사진으로 더듬는 기억과 흔적'(世織書房)을 펴냈다.

도쿄신문은 25일 자 지면에 이 책을 소개하면서 당시 고향에서 쫓겨났던 조선인들이 겪은 고난의 배경에는 한반도를 식민지 지배한 일본의 집단 이주정책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씨가 만주의 조선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시 문화관장으로 일할 때인 1999년 약 1천명이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진 한 마을에서 충격적인 증언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 


저자 이광평 씨 [출처:도쿄신문]

"경작할 수 있는 좋은 땅이 있다는 말을 믿고 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속았다. 조선에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90세가 넘는 노인들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이 씨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부모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와 양친도 함경북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1939년 일본군 창고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땅을 빼앗기고 북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룽징으로 이주했던 것.

당시 조선인 만주 이주정책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간토군(關東軍)이 주도했다.

이 정책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인 1945년 시점에 만주 지역에 살게 된 조선인은 200만명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현지 중국인들 사이에선 '일본인 앞잡이' 취급을 당하는 등 복잡한 처지로 인해 관심을 제대로 못 받았고, 그 결과로 변변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이 씨는 뭔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 씨는 "조선족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유일한 이주민족"이라며 "우리 역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 사명감을 갖게 된 이 씨는 조기퇴직을 선택한 뒤 자비로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장만해 조선족의 흔적이 있는 95개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10년여에 걸친 여정을 통해 일본군의 강제징병 등을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 거듭 얘기를 들었다.

1937년 만주로 집단 이주했다는 조선인. 이주 초기에 흙으로 쌓는 성채 공사에 동원됐다가 허리를 다쳐 만년에 하반신을 못 쓰게 됐다고 한다. 2003년 지린성에서 촬영. [출처 도쿄신문]
1937년 만주로 집단 이주했다는 조선인. 이주 초기에 흙으로 쌓는 성채 공사에 동원됐다가 허리를 다쳐 만년에 하반신을 못 쓰게 됐다고 한다. 2003년 지린성에서 촬영. [출처 도쿄신문]

그는 얼음과 눈 덮인 황무지에서 거적 생활을 하며 땅을 일구느라 고생했던 일화나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온 가족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증언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주 초기에 흙으로 쌓는 성채 공사에 동원됐다가 허리를 다쳐 만년에 하반신을 못 쓰게 된 노인, 일본군이 주민을 살해한 토치카(진지) 흔적, 조선에서 가져온 절구나 도기 같은 생활용품들….

이 씨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던 조선족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런 광경들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위안부 출신 여성을 찾아갔을 때는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씨는 수차례의 방문을 통해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고 간곡히 설득한 끝에 '일본 병사를 매일 상대하다가 병에 걸려 위안소에서 쫓겨났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록집 편집 작업에 참여한 김부자 도쿄외국어대대학원 교수는 도쿄신문에 "만주에서 활약한 일본인 개척단 얘기는 잘 알려졌지만, 그곳에 일본인보다 더 많은 조선 이주민이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주의 유산을 파악하는 데 이 씨의 연구 자료는 매우 귀중하다"며 "이 책을 통해 지배한 쪽인 일본 국민이 배우는 바도 클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씨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출간 동기를 밝혔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
  •    눈 오는 날 오토바이를 타고 민속 답사 길에 오른 리광평선생. 2020년 8월 길림성문화관광청에서는 성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전승인 60명 명단을 발표했는데 그중 룡정시 리광평선생은 조선족 정월 대보름 전통민속놀이인 ‘지신밟기’와 ‘달집태우기’로 성급 무형문화유산전승인으로...
  • 2020-09-22
  • '이주 2세대' 이광평 씨의 '만주로 건너간 조선족들'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와중에 한반도에서 중국 만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한 조선인 약 600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기록집이 일본에서 출간됐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이주 2세대인 이광평(74) 씨가 최근 이주 조선인들...
  • 2019-06-28
  • 독립기념관, 제14회 독립기념관 학술상에 ‘김춘선 교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저변 확대와 독립운동 역사인식 이해 기여   한국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광복 73주년 및 개관 31주년을 맞이해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와 역사학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김춘선 교수(중국 연변대 민족역사연구소)를 제14회 ...
  • 2018-08-13
  • 김성민씨가 수집해온 731부대 문물을 살펴보고 있다.(2015년)   (흑룡강신문=하얼빈) 박해연 기자=그는 중국 최초로 '731부대'유적지 보호 계획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중국 최초로 '731부대' 가해자의 진술을 법적인 공증으로 남길 것을 제안했고 이를 완성시킨 사람이다. 그는 중국 최초로 '731부...
  • 2016-05-03
  • 《대학은 얼마나 많은 고층빌딩을 갖고있는가에 따라 지명도가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대가를 갖고있는가에 의해 그 지명도가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창욱선생은 그야말로 전반 조선민족항일투쟁사의 대가로서 우리 연변대학의 보배요 모든 사학도의 사표라 하겠다.》   연변대학 전임 교장 박문일선생...
  • 2014-06-13
  • 연변해천국제여행사 총경리 노학수   (흑룡강신문=연변) 김명록지사장 = 연변해천국제여행사가 지난 3월 2일에 고고성을 울렸다. 전신은 연변해협국제여행사 하남분공사이다.   "백지장 한장의 두께와 같은 선택의 차이라도 결과는 판판 다르다. 일단 자기의 선택이 정확하다고 인정된다면 두말없이 밀고나가야 성공 한...
  • 2012-04-23
  •   샤타로 기록한 이민사, 렌즈에 담아 십여년   집단이주사 다큐멘터리사진작가 리광평선생 인터뷰   7개 현(시), 34개 향(진), 94개 마을… 500여명 이주민 취재 민족사에 가장 비참했던 강제 집단이주사… 왜 증발했나?   글 사진: 신철국 박군걸 기자 “리광평”. 초면에 스쳐...
  • 2012-04-2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