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음악으로 완성된 인생드라마-국가급지휘가 안국민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5월20일 09시09분    조회:151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안국민
연변가무단 원 부단장, 국가급지휘가 안국민

  2001년 7월, 중국음악가협회에서 주최한 중국공산당 창건 80돐 기념 중국교향악작품음악회에서 한 안국민이 창작한 관현악 〈내가 살던 고향〉이 중국교향악단에 의해 힘차게 연주되였다. 연주는 중국조선족 전통민간악기인 횡적, 단소, 장새납, 장고 등을 포함하였기에 음조로부터 음색에 이르기까지 모두 농후한 민족풍격을 띠였다. 이 관현악곡은 해란강반의 아름다운 자연경치와 개혁개방이 조선족인민들에게 가져다준 행복한 생활, 조선족인민들의 분발앙양된 정신풍모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작곡가의 뜨거운 사랑을 체현했다.

  이 작품은 제1회(2001년) 중국음악 금종상 (중 국문학예술계련합회와 중국음악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쥐최하는 중국음악계 종합성전업대상) 우수음악작품 동상을 수상하였다. 더욱 사람들의 부러움 을 자아내게 한 것은 안국민의 다른 한 작품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가 역시 제1회 중국음악 금종상 우수성악작품 은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어서 안국민은 2003년에 가요 〈진달래〉(리영 작사)로 제2회 중국음악 《금종상》 성악작품 동상을 수상하였다. 한 작곡가의 3부의 작품이 중국음악계의 최고상인 금종상을 획득한다는 것은 음악계에서 극히 보기 드문 일이다. 이 특수영예를 따낸 사람이 바로 우수한 조선족작곡가 안국민이다.

  안국민은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다수의 음악작품을 창작하고 수많은 중국 조선족음악작품의 성공적으로 지휘한 탁월한 지휘가이고 중국 조선족 음악계를 리드해온 덕망이 높은 음악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안국민은 중국음악가협회 제4기 리사, 연변음악가협회 제3기 주석단 주석, 제 4 기 명예주석, 중국 조선족음악연구회 제1기, 제2기, 제3기 명예회장과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계련합회 제4기 부주석,연변조선족 자치주정치협상위원회 제2기 위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4기, 제5기 인민 대표를 력임하였다.

  1

  안국민은 1931년 7월 4일, 흑룡강성 밀산현 태평향 장흥촌의 한 빈한한 조선족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안국민은 어릴적 군색한 가정살림에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는 매일이다싶이 마을과 들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였다. 1937년 3월, 안국민은 부모를 따라 장흥촌과 십여리 상거한 대성촌으로 이사했다. 안국민은 일곱살에 소학교에 입학했는데 학업성적이 늘 학급의 앞자리를 차지했다. 안국민은 특히 음악수업을 좋아했다. 당시 농촌학교의 음악수업시간에 음악리론지식을 가르치지 않고 교원이 한구절 시창하면 학생이 한구절 따라 배우는 방식으로 노래를 배워주었다. 일본제국주의 통치시기, 학교는 노화교육을 실시하여 학생들의 조선어사 용을 금지시켰기에 음악수업시간에 대부분 일본노래를 배워주었다. 부모의 영향을 받은 안국민은 혼자 있을 땐 절대 일본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2학 년 때, 새로 오신 음악선생님이 조선의 전통민요 〈아리랑〉을 가르쳐주 셨다. 선생님이 딱 한번 노래를 불렀는데 총기가 과인한 안국민은 전반 가사와 선률을 몽땅 기억하였다. 음악선생님은 안국민의 음악적인 천부에 깜짝 놀랐다.

  대성촌은 궈퀴산 남쪽 기슭, 목릉하 이북에 위치해있다. 지세가 평탄 하고 땅이 비옥하며 수원이 충족했기에 벼농사가 잘돼 마을이 건립된지 몇년 안되여 규모가 커지면서 매우 흥성한 경상을 이루었다.

  당시 마을에는 5, 6명으로 구성된 소형관악대가 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연주활동을 가졌다. 비록 관악대의 악기가 낡고 악단성원들의 연주기교도 높지 못했지만 그들의 연주활동은 안국민의 음악생애에 큰 영 향을 주었다.

  1941년, 마을에서는 발풍금 한대를 사왔다. 안국민의 큰형님이 반주를 맡았다. 이미 음악에 어섯눈이 튼 안국민은 시간만 있으면 큰형님한테서 발풍금을 배웠다. 청력과 음부판별능력에서 뛰여 난 천부를 지닌 안국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악곡을 숙련되게 연주할 수 있었다.

  안국민은 큰형님한테서 2년간 발풍금을 배운 후, 큰형님을 대신해 발풍금반주를 맡아했다. 안국민은 현장반주를 통해 음악감상능력을 양성하고 다성부음악에 대해 더욱 깊은 료해를 갖게 되였다.

  1942년 12 월, 안국민의 부모들은 비적들의 등살에 못이겨 대성촌으로부터 계림향 계림촌으로 이사했다.

  1946년 여름, 안국민은 밀산련합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의 문예선전대에 참가해 문예골간으로 활약하면서 자신의 음악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진취심과 노력은 학급담임선생님의 관심과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특별한 배려를 돌려 정상적인 수업을 제외한 모든 업여시간에 음악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1946년 9월, 계림향 계림촌에서는 토지개혁을 시작했다. 토지개혁 시기, 본래 부유하지 못한 안국민의 가정은 뜻밖에도 부농으로 획분되였다. 밀산련합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안국민은 가정성분의 영향으로 학교에서 학적취소처분을 받게 되였다. 결국 안국민은 학업을 중단하고 마을에 돌아와 농업생산로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8년 10월, 계림향에서 민간성질을 띤 문공단을 조직했다. 당시 계서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안국민은 학교추천에 의해 문공단의 연주가로 되 였다. 문공단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여 그는〈농촌의 가을〉이란 노래를 창작했다. 노래가 공연된지 얼마 안되여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게 되 였다. 일년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사업터를 향해〉, 〈계림문공단단가〉 등 노래와 여러 부의 소형기악곡을 창작했다.

  1950년 11월, 계림향 문공단이 해체되자 안국민은 연변가무단에 초빙시험에 참가했다. 면접에 참가했던 연변가무단 지도자들과 심사워원 들은 안국민의 손풍금연기실력에 높은 점수를 주었지만 안국민은 가정성분때문에 결국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1951년 1월, 안국민은 동북행정사무위원회 민정과 과장 김명 등 로동지들의 추천으로 또 한번 연변가무단 초빙시험에 참가했다. 그의 숙련 된 손풍금기교는 3명의 심사위원과 연변가무단 단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변가무단 지도부에서는 손풍금연주가 편제가 넘어난 상황에서도 안국민을 연변가무단 손풍금연주원으로 받아들였다.

  안국민이 연변가무단에 출근한지 얼마 안되여 지도부에서는 그에게 조선민족악기인 가야금을 배우라는 임무를 주었다. 안국민은 가야금으로 민족선률을 연주하면서 민족정서에 푹 빠져 민족음악진수를 깊이 깨닫게 되였다. 안국민은 가야금을 배우는 한편 민간에서 류전되고 있는 가야금 악보와 음악창작소재를 수집했다.

  한번은 훈춘에 출장갔다가 우연한 기회 에 어느 사진관에서 보존상태가 아주 좋고 음질이 아름다운 가야금 한대를 발견했다. 몇번이나 찾아가 팔라고 사정했지만 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기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안국민은 한달로임을 털어 기타 한대를 사서 가야금과 맞바꾸었다.

  그 때로부터 안국민은 한결 가야금에 애착을 가지고 낮에 밤을 이어 연주기교를 익혀나갔다. 이렇게 안국민은 지난 세기 50년대초, 연변의 첫 가야금 전업연주가로 되였다.

  1953년 5월, 안국민은 가야금의 음성효과를 개진하기 위해 할빈에 있는 지명도 높은 악기제작장인을 찾아가 가야금 현을 실줄로부터 강선으로 바꾸고 12개 현을 13개 현으로 개량하였다. 안국민은 개량한 가야금으로 선후하여 가 요 〈처녀의 노래〉, 판소리 〈떡메의 증오〉 반주에 참가하였고 먼 후날 반주경험을 밑거름으로 가야금조곡 〈심청〉을 창작하여 길림성창작종목평 의(1984년) 1등상을 수상하였다.

  안국민은 각고의 노력을 거쳐 발풍금, 손풍금, 가야금, 바이올린 등 악기들을 숙달하게 다룰수 있게 되였는데 이는 그가 금후 음악창작과 지휘 사업에서 남다른 성과를 거둘수 있는 토대가 되였다.

  2

  안국민은 대학에서 음악리론, 악기연주, 지휘 등 음악지식과 기능을 배운 학원파 인재가 아니라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자습형의 음악가였다. 안국민은 수준급 관현악단의 성장과 우리 민족 교향악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탁월한 지휘가이다.

  안국민은 우연한 기회에 입단 2년 만에 악대지휘를 맡게 되였다. 1953년 12월, 서장방문단이 연변으로 오게 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가무야회로 먼곳에서 온 손님들을 환대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 때 연변가무단의 악대지휘와 악대대장이 모두 외출하고 없었다. 연변 가무단 단장은 악대대원들의 추천에 의해 안국민에게 악대 림시지휘를 맡 겼다. 당시 안국민은 악대지휘봉을 쥐여본 적이 없었고 악대지휘지식도 전무했으나 부득불 지휘봉을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안국민은 해박한 음악지식과 다양한 악기연주경험을 바탕으로 그번 악대지휘임무를 출중하게 완성함으로써 지도부와 동료들의 찬양을 받았다.

  1956년, 안국민은 연변가무단 지도부의 배치에 의해 갓 출범한 중앙 악단에 가서 독일 전문가 그스린이 가르치는 악대지휘강습반에 참가하여 관현악대지휘 및 교향음악리론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갖게 되였다. 그스린은 10여명 되는 학원중에서 음악적 감수상이 뛰여 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안국민을 번번히 학원들 앞에 나와 시범하게 하 였다. 일년 동안의 학습을 거쳐 안국민은 음악리론지식을 체계적으로 장악 하고 음악지휘재능을 숙달하게 되였다. 그번 강습반에 참가한 10여명 학원들은 후에 모두 중국 대형예술단체의 음악지휘로,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로 성장하였다. 안국민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때로부터 안국민은 지휘가, 작곡가, 연주가의 신분으로 광활한 중국의 음악무대에서 활약 하기 시작했다.

  1956년, 연변가무단에서는 베토벤 서거 129주년을 기념하여 베토벤 제7교향곡 제2악장을 무대에 올리기로 하고 안국민에게 지휘를 맡겼다. 저음 현악기들의 조용한 울림으로 시작하는 교향곡은 점차 참여 악기군을 넓혀가다가 결의에 찬듯한 고조부분으로 이어지는데 장송곡풍의 독특한 음악으로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25살밖에 안되는 안국민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교향음악작품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58년, 안국민은 지휘가 이와노브와 아노쏘브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국가교향악단의 교향음악회를 감상하는 기회를 통해 열정적이고 분방한 연주풍격을 배웠는가 하면 당시 얻기 힘든 희귀한 영상자료를 통해 토스카니니의 엄숙하고 과단성 있는 지휘풍격을 터득했다. 안국민은 다년간 배운 지식과 현장지휘경험을 결부시켜 자신만 의 독특한 지휘풍격을 형성하였다. 간단하면서도 유력한 안국민의 지휘 방식은 악사들과 관중들의 일치한 호평을 받았다. 사실 연변가무단은 안국민때부터 전직 지휘자를 가지게 되였으며 연변가무단 관현악단은 그의 지휘하에 점차 전국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1958년 4월, 저명한 작가이며 당시 국가문화부 부장이였던 모순이 연길에서 연변가무단의 가극 〈콩쥐와 팥쥐〉를 관람했다. 공연이 막을 내린 뒤, 모순은 현장음악지휘를 맡았던 안국민에게 “지휘기법이 숙실하고 조예가 깊다. 악사석이 너무 깊어 무대 우의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기가 조련찮은데 지휘기능이 아주 훌륭하여 무대통합을 훌륭하게 이끌어갔 다.”고 높이 평가했다.

  1962년 6월 22일, 주은래총리가 연변에 오셨다. 연변가무단에서는 주은래총리를 환영하여 특별문예공연을 조직했다. 안국민이 음악총지휘를 담당했다. 무대에서의 그의 표현은 신심에 충만되였고 적극적이고 락관적 이였으며 기개가 드높았다. 그는 악사들을 이끌어 전반 공연을 고조에로, 감동에로, 환락에로 끌어올렸다.

  1964년 7월 12일, 동필무는 연변을 방문하는 기간 안국민이 지휘하는 연변가무단의 가무표현을 관람했다. 안국민의 지휘하에 조선족의 전통민요 〈아리랑〉은 새롭게 해석되였으며 현장 지도자들의 한결같은 박 수와 찬양을 받았다.

  1972년 5월, 길림시가무단과 연변가무단은 련합으로 캄보디아국왕 노로돔 시하누크친왕을 환영하는 특별문예공연을 조직했다. 안국민이 악대를 지휘하여 친왕이 직접 작사, 작곡한 〈중국을 그리노라〉는 가요를 연주하였다. 연주가 끝나자 음악을 정통한 친왕은 격동되여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박수를 쳤다. 공연이 끝난 후, 시하누크친왕은 안국민에게 기념상패를 증정했다.

  1976년 4월 10일 저녁, 봄철 광주상품수출입교역회에서 뉴질랜드 총리 로버트 마르덴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렸다. 안국민이 연변가무단 악대 를 지휘하여 뉴질랜드민요 〈자유의 새〉와 〈안개 속의 산맥(雾色山脉)〉 을 연주했다. 태평양서남 섬나라에서 온 로버트 마르덴은 연변가무단 악대의 연주를 듣고 너무나 격동되여 “너무너무 훌륭합니다. 우리 나라 국가악대의 연주보다 더 훌륭합니다.” 라고 높이 평가했다.

  1984년 5월 1일, 당시 호요방총서기가 연변에 오셨다. 환영공연에서 안국민이 악대지휘를 맡아했다. 북경 가수 송일이 안국민이 작곡한 〈어머 니〉를 열창했다. 위대한 모성애를 구가한 이 노래는 아름다운 선률과 진지한 정감으로 호요방총서기를 비롯한 장내 관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중국 조선족 ‘형상대사’와 연변의 명함장으로 통하는 연변가무단은 중국을 대표하여 여러차례 출국방문공연을 진행했다. 1987년 9월, 안국민은 연변가무단을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연변가무단은 평양, 청진 등 다섯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방문공연을 진행했는데 가는 도시마다 조선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민족특색과 지방특색을 겸비한 안국민의 정채로운 지휘예술에 조선예술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안국민은 연박한 음악수양과 드높은 예술정감으로 연주가들을 계발 하고 이끄는데 능숙했다. 안국민은 음악작품을 무대에 올리기전 매 작품의 풍격, 속도, 절주, 색조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고 낱낱이 장악했는데 그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안국민의 지휘풍격은 소탈하고 대범하고 섬세하고 호방했다. 그의 현란한 손놀림에 의해 음악작품은 새롭게 태여났으며 그러한 음악작품은 관중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안국민은 수십년을 지휘봉과 운명을 같이했다. 안국민은 전반 지휘 생애에서 모두 3,000여차의 공연에서 악단을 지휘했다.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챠이꼽스끼의 바이올린협주곡, 〈량산백과 축영대〉 등 국내외 교향작품, 〈백모녀〉, 〈아리랑〉(최삼명, 안국민, 최창규, 허원 식 작곡) 등 가극, 〈눈속의 진달래〉 등 영화음악, 〈고향의 정〉(안국민 작곡, 최옥주 안무) 등 많은 무용음악, 〈완계사〉(허원식 작곡, 모택동 시사)를 비롯한 많은 성악음악도 지휘하였다. 이런 음악들은 모두 안국민 의 깨끗하고 시원스러우며 섬세하고 산뜻한 지휘예술에 힘업어 청중들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저명한 평론가 장정일은 안국민의 지휘생애를 이렇게 총화했다.

  “고차원음악의 선도자와 파수군으로서 안국민은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부터 퇴직할 때까지 간간이 지휘한 연변과 국내외 작곡가들의 교향악, 교향시, 서곡, 협주곡, 명상곡, 기상곡, 조곡, 관현악곡이 무려 50여곡이 된다. 이런 선도적인 실천이 있었기에 연변가무단악대는 전국적으로 소문 나고 오늘 마침내 당당한 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잡게 되였다.”(장정일 〈음악거성 안국민〉)

  원 연변음악가협회 주석이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원장 신호선생은 안국민의 지휘풍격과 인격특점을 이렇게 개괄했다.

  “열정적이면서도 자중하고 호방하면서도 세밀하며 엄숙하면서도 자애 롭고 권위적이면서도 너그러우며 통솔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출줄 아는 품격은 안국민선생의 지휘특점이자 인격특점이다.”

  3

  안국민은 수많은 애창곡을 남긴 재기 넘치는 작곡가였다.

  안국민은 일생 동안 200여부의 음악작품을 발표했다. 그중 기악곡이 10여부, 무용음악이 30여부, 가극이 3부, 성악작품이 150여수에 달한다. 1997년에 안국민은 가곡, 중창곡, 병창창곡, 가극선곡을 무어 《안국민 작곡집》을 출판하였다.

  저명한 평론가 장정일은 안국민의 음악창작성과를 아래와 같이 간결 하고 명료하며 깊이 있게 전면적으로 총화했다.

  “안국민은 연변과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에서까지 공연곡으로 연주 되였던 무용곡 〈물동이춤〉, 우리 민족의 생명과 넋을 담아낸 넓은 음역 의 〈연변목가〉, 음악회의 지정곡으로 자주 불리우는 〈어머니〉, 교향성 이 가미되여 정서적인 깊이가 우러나는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 를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미를 표현한 가야금조곡 〈심청〉, 동요의 선률을 교향악에 용해시킨 차원높은 기악곡 〈나의 살던 고향〉, 그리고 1991년 국가문화부의 ‘문화상’ 대상을 수상한 가극 〈아리랑〉중의 감미 로운 〈사랑가〉는 청중의 심령을 사로잡는 명곡들이다. 중국교향악단이 〈나의 살던 고향〉을 연주하였으며 한국 교향악축제에서도 이 곡이 연주되였다.”

  건국초기 주요작품들로는 기악곡 〈풍년을 경축하네(1964년), 무용곡 〈물동이춤〉(1955년 리인숙 안무), 성악곡 〈연변목가〉 등이 있다.

  안국민은 장새납독주곡 〈풍년 든 기쁨〉(1973년), 무용곡 〈양돈처녀〉(1973년, 최옥주 안무) 등 작품을 남겼다. 무용 〈양 돈처녀〉는 일본, 로므니아, 조선 등 8개 나라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장새 납독주곡〈풍년 든 기쁨〉은 장새납독주와 서양관현악이 어우러져 연주 되는 것인데 민족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기악작품의 하나이다.

  안국민의 창작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는 개혁개방시기이다. 이 시기 에 그는 관현악, 가극, 무용음악, 기악독주곡, 중창, 병창, 독창 등 여러가지 음악쟝르로 걸쳐 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관현악곡 〈라질리〉(1982년),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1998년), 가야금조곡 〈심청〉(1983년), 가극 〈아리랑〉, 성악곡 〈어머니〉(리철룡 작사),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김철학 작사) 등이다.

  안국민은 자신의 음악창작생해를 이렇게 총화했다. “나는 종래로 전문 적으로 작곡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연주와 지휘과정에서 얻은 음악적 수양이 창작의 밑거름으로 되였으며 자습으로 곡식, 화음, 관현악법 등을 장악하였다. 나는 주변의 일체 조건을 충분히 리용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승화하고 우수한 작곡가로 되기 위해 노력했다”.

  안국민의 음악작품은 멜로디가 생동하고 아름다우며 리듬이 감동적 이고 활력적이며 음악색조가 다양하고 사상정감이 진지하고 풍부한 바 순박한 중국조선족의 풍토인정과 열정적인 민족개성을 재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안국민이 생활에 뿌리 박고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조선 민족음악의 자양분을 섭취하여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음악작품을 창작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그의 음악작품은 조선민족특색이 농후하다. 이는 고향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갈라놓을 수 없다. 가야금 조곡 〈심청〉, 가곡 〈밀림 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와 관현악수상곡 〈나의 살던 고향〉 등 대표 작들은 안국민의 작곡풍격을 잘 보여준다.

  1951년 1월, 안국민이 연변가무단에 입단한후 창작한 첫 음악작품은 무용곡 〈물동이춤〉이다. 무용곡 〈물동이 춤〉은 창작 당시 레코드에 취 입이 될만큼 히트를 쳤고 오늘까지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가야금조곡 〈심청〉은 안국민이 조선민족고전소설 《심청천》에 근거 하여 1983년에 창작한 것이다. 당시 조선민족고전소설 《심청전》은 이미 창극, 판소리, 희극 등 여러가지 쟝르로 개편되였지만 관련된 교향 음악작품은 없었다. 안국민은 창작과정에서 경극과 교향음악이 결합된 교향음악작품에서 계발을 받았다. 하여 판소리에서 제련한 주제선률과 산 사(散词)결구를 결합시켜 아예 가야금조곡으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1984년에 길림성 창장종목 1등상을 수상하였다.

  관현악곡 〈나의 살던 고향〉은 안국민이 한국 제10회 교향악절에 참가하기 위해 특별히 창작한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과 연변가무단 교향악단의 출중한 연주표현은 한국 음악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년 후에 개최된 서울국제예술절에서 주최측은 안국민과 부분 연주가들을 요청 하여 〈나의 살던 고향〉을 연주하게 하였다.

  안국민의 민족음악사상은 관현악곡 〈나의 살던 고향〉에서 매우 잘 반영된다. 안국민은 우선 이 교향악곡에 단소, 장소납, 가야금, 장고 등 조선족악기를 편입시켜 농후한 민족색채를 부여했으며 작품이 더욱 생동하고 우아하고 률동감이 있게 했다. 이 관현악곡은 선률진행이 꾸밈 없고 아름다우면서도 소박하고 고상하면서도 숭엄한 기분을 자아낸다.

  예술가들의 창작령감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활속에 오며 예술가들은 평범한 것들 가운데서 예술적 가치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1958년에 안국민은 전국적으로 민가수집열조가 일고 있는 가운데 생활체험차 훈춘 경신벌에 내려가게 되였다. 안국민은 이른 아침 몽롱한 안개 속에서 초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슬 머금은 파란 풀들이 안국민을 반겼다. 천리옥야 평원에는 소영각소리 귀맛 좋게 울려오고 양몰이소년의 피리소기가 구성지게 들려왔다. 이 때 한 농민이 소수레를 몰고 가면서 휘파람을 불었는데 선률이 하도나 좋아 수첩에 기보해 놓 았는데 그 선률이 〈연변목가〉의 창작동기가 되였다. 이듬해 안국민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헌례작품을 창작하고저 연변가무단의 리황훈 등 몇몇 동료들과 생활체험차 동성향에 내려갔다. 그들은 뒤산에 올라 농민들과 함께 방목을 하는 한편 아득히 펼쳐진 벌을 바라보면서 가사와 선률을 구상하였는데 신고 끝에 탄생한 노래가 바로 〈연변목가〉이다. 〈연변목가〉는 고향 연변의 아름다운 산천에 대한 사랑과 연변인민들의 당의 민족정책에 대한 옹호 및 해방에 대한 희열을 구가했다. 1958년 12월, 안국민의 부인 김인숙가수가 길림성문예회보공연에서 처음 으로 가요 〈연변목가〉를 불러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변목가〉의 인기가 늘어감에 따라 중국레코드사에 의해 레코드에 취입 되고 대량 발행되였다.

  1959년 10월, 안국민의 부인 김인숙가수가 북경 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헌례공연에서 〈연변목가〉를 불러 또다시 인기를 모으게 되였다. 〈연변목가〉는 선률이 우아할 뿐만 아니라 연변에서 처음으로 절가형식을 타파한 예술가곡으로 력사적 의의가 크다는것이 음악리론권위인사들의 평이다.

  장백산은 그 범접할 수 없는 웅위하고 숭엄한 자태와 천태만상의 신비한 모습으로 중국 조선족이 우러르는 성산으로 받들리고 있다. 1984년 8월 24일, 안국민은 처음으로 장백산을 밟고 천지에 오르게 되였다. 안국민은 장백산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산천을 굽어보는 한편 변화무쌍한 날씨의 조화를 옴몸으로 느끼면서 세찬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안국민은 집에 돌아온후, 장백산에 대한 경외의 감정을 담아 가요 〈아, 장백산〉을 창작했다. 이 가요는 선률이 호방하고 기백이 넘치는 바 청중들의 가슴을 틔워주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실어준다.

  1989년에 완성된 작품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는 공연차 내두산, 백하, 소사하 일대에 갔을 때 일망무제한 밀림을 걸으면서 느낀 감수를 토대로 창작한 가곡이다. 이 가곡은 쏘프라노독창, 혼성방창, 관현악이 한데 어우러져 연주되는 특이한 작품으로 격조가 드높고 화폭이 웅위하다. 이 가곡은 중국교향악단의 연주로 2001년, 중국공산당창건 80주년 기념공연에서 리심초의 지휘로 연주되여 청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또한 한국 서울예술축제와 한국 제10회 교향악축제에서 연주되였다.

  안국민의 정신세계에서 어머니는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가 창작한 〈어머니〉, 〈어머니의 다듬이소리〉 등 가요들은 선률이 매우 부 드럽고 섬세한 바 작곡가의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어머니의 따스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누구나 고향을 떠올리면 아련한 추억에 젖어들면서 가슴이 달아오르기도 하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안국민은 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민족을 사랑하고 연변을 사랑한다. 연변은 비록 내가 나서 자란 제1고향은 아니지만 20세에 와서 뿌리 내려 기나긴 반세기 남짓한 시간을 생활해온 곳이다. 연변은 나를 감동시켰고 성장시켰고 나에게 음악천국에로 향하는 령감을 주었다. 연변은 나의 진정한 고향이다”. 그의 작품중에는 〈연변목가〉, 〈연변노래〉, 〈아, 연변〉, 〈제일강산 연변이여〉 등 직접 연변이란 지명을 사용한 가요도 있고 〈고향 정〉, 〈나의 고향〉, 〈모아산〉 등 연변을 주제로 노래한 작품도 있다. 이러한 노래들의 선률은 정서적이고 소박하지만 연변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과 깊은 사념의 정이 담겨있다.

  안국민은 음악창작에서 민족조식을 튼튼한 기반으로, 서양음악의 합리한 요소와 중국음악풍격을 접목시킴과 동시에 선률선을 파격적으로 굴곡시킴으로써 민족적 정서가 농후하면서도 이질적인 색채가 다분한 음악작품을 탄생시켰다.

  안국민은 음악작품을 통해 참다운 것, 착한 것,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술의 근원은 생활에 있고 예술은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보편적인 창작원리를 깊이 각인하고 생활에 깊이 침점하고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값지고 소중하고 풍부한 창작소재를 축적한 토대에서 남다른 감성과 천부적 음악적 재능을 결부하여 시대적맥박과이 높뛰고 민족풍격이 농후한, 자기의 색갈과 무늬와 울림이 있는 음악작품을 창작하였기 때문이다.

  4

  중국에는 문여기인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즉 그 글에 그 사람, 글의 풍격은 그 사람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니 음악의 풍격은 그 사람과 같다는 뜻이 되겠다. 한 음악가의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가의 삶과 존재를 읽을 수 있다. 음악에도 생명이 존재한다. 굴절과 왜곡을 배제하고 진실과 정직을 찾아나서는 것, 그것이 곧바로 음악의 생명이다.

  안국민의 음악에는 그의 음악사상과 미학원칙, 창작리념이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안국민은 음악생애에서 평생 동안 진선미라는 인류의 최상의 리념을 추구했는 바 그의 이런 음악창작성과들은 솔직하고 대바른 정직성, 인간에 대한 박애정신,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겸양의 미덕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국민은 “음악작품은 진실한 내용을 전제로 해야 하며 창작자는 음악이란 매개를 통하여 청중들에게 미적 감수를 선물하고 밝은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려면 우선 음악가는 진실하고 겸손하며 자신을 낯출 줄 알아야 하며 자그마한 성적도 여러 사람의 도움과 덕분으로 생각하고 지위의 높고낮음과 년령차이를 가리지 말고 허심하게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가로서의 안국민의 개인매력은 일상생활속에 관통되여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했고 됨됨이가 겸손했으며 옷차림은 소박하고 간단했고 시종 당과 인민에 충실했으며 실제행동으로 문예 사업자로서의 고상한 생활지조를 지켜왔다. 안국민은 학술토론회, 좌담회 등 장소에서 언제나 겸손하면서도 잔잔하게 말씀했으나 청중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안국민과 부인 김인숙은 장장 60년간 부부의 인연을 맺고 서로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가족과 동료, 지인들로부터 존경과 깊은 애대를 받았다

  1948년, 12살밖에 안되는 김인숙은 할빈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에 입대하면서 노래인생을 시작하였다.

  1948년, 김인숙은 조선의용군 제3지대의 꼬마선전대원들과 더불어 할빈민족사무처문공단에 입단하고 1949년, 할빈민족사무처문공단이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과 합병하면서 연변가무단 성악배우로 되였다. 이때로부 터 연변가무단 독창가수로 활약하게 된 김인숙은 아름다운 용모, 감미로운 목소리, 춤을 동반한 우아한 무대표현으로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그후 안국민이 시험을 거쳐 연변문공단 손풍금연주원으로 입단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업무상 자주 왕래하게 되였다. 김인숙이 독창을 할 때마다 손품금 반주를 맡은 안국민은 반주에만 그치지 않고 섬세하게 지도해주면서 예술 기량을 제고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에 김인숙은 안국민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였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사랑이 싹터 1954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리게 되였다.

  1953년, 김인숙은 심양 에서 펼쳐진 동북3성 제 1차 문예콩쿠르에 참가하여 최정연 작사, 정진옥이 작곡한 〈처녀의 노래〉를 불러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59년, 김인숙은 북경에서 거행된 국경 10돐 경축 헌례공연에 참가하여 수도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으며 배우 대표로 국경초대연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렸다.

  지난세기 50, 60년대에 김인숙은 여러 차례나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았으며 그가 부른 〈처녀의 노래〉, 〈연변목가〉, 〈깜둥처녀〉 등 노래 들은 레코드로 출판되여 전국에 보급되였다. 이밖에 김인숙은 또 《콩쥐 팥쥐》, 《백모녀》, 《배나무골》, 《류호란》 등 가극에서 주역을 맡고 뛰여난 연기력을 과시했으며 1960년대말부터는 연변가무단의 무용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에서 쏘프라노를 맡아 각광을 받았다.

  당년에 김인숙은 명배우이다보니 어디를 가나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상점에 가면 판매원들과 고객들, 병원에 가면 의무일군들과 환자들… 그들은 김인숙을 만나기만 하면 노래를 불러달라고 간곡하게 청을 들군 했다. 그 때마다 그는 대중들이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를 불러 주면서 기꺼이 요구를 만족시켜주군 하였다.

  안국민은 슬하에 딸 셋을 두었다. 안국민은 생활면에서 사랑의 마음 으로 세 딸을 한껏 포옹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교양면에서 딸들에 대한 요구가 아주 엄격했다. 안국민은 일찍 딸들에게 세가지 요구를 제출했다. 첫째,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둘째,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 되는것이며 셋째, 마음이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안국민은 자식들이 자유롭게 성장하고 독립적인 생활 가운데서 사회에 유용하고 심신이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하면 그것으로 만족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안국민은 자신의 바른 언행과 생활실천으로 자식들을 무언중에 교화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도록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고 잘 보살피면서 잡초를 제거해주는 훌륭하고도 부지런한 농부형 아버지임에 틀림없었다. 하였기에 세 딸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모두 사회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큰딸 안실은 1975년, 연변예술학교 관현악전업을 졸업하고 선후하여 룡정현 문공단,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에서 수석첼로연주원으로 있었다. 1985년,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 음악편집으로 전근되여 〈예술 인 인터뷰〉, 〈명곡감상〉, 등 특별프로를 담당하여 광대한 청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09년 8월 8일, 안실은 연길에서 거행한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60주년 〈영원한 기념비〉 특별문예공연 총감독을 맡아해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이기도 했다.

  둘째딸 안련실은 중앙민족대학에서 바이올린 연구생지도교수로 재직중이다. 안련실은 저명한 지휘가 정소영의 애락녀악단에서 부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면서 바이올린협주곡 〈량산백과 축영태〉의 독주를 담당하기도 했다. 몇년래 안련실은 선후하여 대형신편 사시경극 〈적벽〉의 부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경극교향시 〈매란방〉의 부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대형민족가극 〈목조의 전설〉의 수석 바이올리니 스트로, 대형뮤지컬 〈나비〉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공연무대에 서기도 했다.

  셋째딸 안성실은 남보다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취미 또한 다양했다. 안성실은 대학을 졸업한후 현재 증권관련업무에 종사하고 있는데 증권가에선 명성이 높다.

  연변가무단의 수석지휘 겸 부단장인 안국민은 흉금이 넓고 겸손하며 소박하고 소탈한 사람이였다. 그는 언제나 “창작에서도 그렇고 사업에서도 그렇고 나는 특별한 성적을 따낸적 없다. 근근히 가무단의 오랜 문예사업일군일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하군 했다. 안국민은 가무단의 사업인원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년장자의 어투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어떨가?”라는 식으로 자기의 관점을 표달하고 타인의 존엄을 지켜 주었다. 간단하면서도 작은 일에서 그의 겸손과 수양을 보아낼 수 있었다. 자연히 그도 다른 사람들의 존중과 애대를 받게 되였고 호흡이 맞고 조화로운 사업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안국민은 지휘에서 통합과 대인관계에 대한 리념을 이렇게 밝혔다. “지휘자라면 무엇보다 고상한 인격수양을 갖추고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관현악에서는 협화 즉 앙상블이 가장 중요하다. 지휘자와 악사들은 서로 존중하고 리해해야만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안국민은 이러한 리념 을 지휘전반과정에 관통시켰기에 그가 지휘한 음악은 언제나 관중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게 되였다.

  평론가 장정일선생은 안국민의 인간성에 대해 높은 평가를 주었다.

  “안국민은 참다운 예술인 고유의 그 순진무구한 인간성만으로도 숭경 의 마음을 자아내는 스승이다. 안국민선생의 자택에는 값이 가는 가장 집물이 별로 없다. 굳이 재산이라면 고작 묵상에 잠긴 베토벤의 초상화와 평화로운 농민 밭갈이산수화, 중국음악가의 주련, 그리고 항상 덮개가 열려있는 피아노뿐이다. 담화나 인터뷰에서 기억력이 비범했던 선생이 였지만 이상하게도 노래방이나 차집 같은 휴식오락장소 이름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신결석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선생은 얼마전까지도 만원 뻐스를 오르내리며 힘겹게 병원출입을 했었다.”

  안국민은 매번 출장 혹은 공연초청을 받고 활동에 참가할 때면 종래로 다른 사람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았다. 자기절로 일찍 기차역 혹은 버스역 에 나가 줄을 서서 표를 사군 했다.

  1991년 10월, 안국민은 퇴직수속을 마치고 평생을 분투해온 사업터 연변가무단을 떠나게 되였다. 안국민은 많은 작품으로 조국과 대중을 위해 복무했고 동시에 자신의 추구와 인생가치를 실현했다. “인생 60에 유감도 많고 아직 해야 할 일들도 많다”. 그는 여생을 리용하여 더욱 좋은 작품 들을 창작하려고 결심했다.

  가무단을 떠난후, 안국민은 더욱 높은 창작열정으로 작품창작에 몰두 했다. 일부 공익성 사회공연과 활동 외에 대부분 시간을 음악리론연구와 음악창작에 돌렸다. 안국민은 퇴직한후 선후하여 〈고향정〉, 〈민들레 추억〉, 〈제일강산 연변이여〉, 〈두만강〉, 〈우리 세월 좋아〉, 〈아, 장백산〉, 〈진달래〉, 〈풍년 든 기쁨〉, 〈장백련가〉 등 80여수의 장르, 내용, 풍격이 부동한 음악작품을 창작한 동시에 《중국 조선족교향음악작품선집》, 《중국조선족민족기악대전》 등 음악도서편찬 사업에 참가했다. 또한 대량의 시간과 정력으로 노래 악보를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요청음악프로 다양화〉 등 10여편의 론문과 평론문장을 써냈다.

  2006년 11월 25일,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연변가무단, 연변음악가협회, 연변대학 예술학원, 《예술세계》잡지사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안국민예술생애 60주 년 음악쎄미나르’가 연길 백산호텔에서 거행되였다. 중국조선족 유명한 작곡가, 작사가, 지휘가, 성악가, 연주가, 안무가, 평론가 60여명이 쎄미나르에 참석했다. 연변가무단 단장 박서성, 연변대학 예술학원 최옥화, 김정, 신호, 장익선, 조인복, 리훈 등 교수와 문예평론가 장정일이〈안국민의 연변가무단에서의 업적〉,〈안국민음악사상에 대한 탐구〉,〈안국민관현악작품에 대한 분석〉, 〈안국민지휘풍격에 대한 탐구〉 등 회고문장과 론문을 발표했다.

  2007년 12월 27일, 연변주당위, 연변주인민정부에서는 안국민에게 ‘민족문화사업특수공헌인물’ 영예칭호를 수여하였다. 2008년 1월, 길림민족음반출판사에서는 음악CD 《안국민작곡선》을 편집, 출판했다.

  안국민은 1951년 1월, 20세에 밀산을 떠난 후, 안국민은 줄곧 자기의 제1고향을 답방할 기회가 없었다. 2011년 12월, 병상에 있던 안국민은 밀산시에서 밀산조선족력사문화작품집 편찬을 위해 작품을 수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동적으로 밀산적 저명한 시인 리상각과 함께 밀산조선족 력사문화예술작 품집 총기획을 맡은 맹고군과 련계하여 공동으로 〈나의 고향 봉밀산〉 노래를 창작하였다. 그는 이 노래를 고향 밀산에 바쳤으며 노래를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

  2014년 10월 21일 아침 7치 45분, 안국민은 북경중일우호병원입원 50일만에 병환으로 타계했다. 우리 음악예술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향년 83세 였다.

  안국민은 우리의 음악생태를 거시적으로 조감한 리성적인 리더요, 음악사상가였다. 천재적인 작곡가 정진옥이 수립한 전통을 이어가면서 안국민은 피라미트형의 음악발전구도를 주장하였다. 세계의 음악을 민족음악에 수용하여 민족특색을 가진 음악을 발전시키되 피라미트와 같이 대중가요, 민요 등 기초우에서 예술가곡, 교향음악같은 높은 차원의 예술 보탑을 쌓아야 한다는것이 그 요체이다. 단순사유를 벗어난 변증법적인 복잡사유, 개방적인 사유를 지향하면서 전통과 현대, 보존과 혁신의 병진을 추진한 결과 오늘 우리의 음악은 창작, 공연 실적을 쌓으며 가히 남부럽지 않은 수준으로 번영발전하고있다.

  안국민은 또한 평론을 쓰고 제자들을 향성해온 다재다능한 음악가이다. 안국민은 1986년부터 3년간 중국통신음악학원 연변분원 지휘과 교수로, 1995년부터 연변대학 예술학원 석좌교수로 후대양성에 심혈을 몰부었다. 그중 안국민을 이어 연변가무단 지휘로 발탁된 최룡국은 바로 그의 수제자이다.

  맹고군 저, 피금련 역/흑룡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44
  • 지난 세기 90년대에 중국에서 맹활약을 했던 구련옥 가수의 ‘새로운 여정’ 음반 발매 기자간담회가 지난 22일에 해내외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앨범 《새로운 여정》 출시한 가수 구련옥 그녀는 한국에서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오랜 시간 팬들 곁을 떠나있다가 다시 돌아오니 가슴이 너무 설레인다&rdq...
  • 2021-10-25
  • 추이젠이 새 앨범 '페이꺼우'를 발표하자 예전의 비판적이던 추이젠이 돌아왔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한물 갔다는 말도 있다. 그는 “유행이 조작됐다면 나는 한물간 게 낫다”고 했다. 기자/퀘이얜장 (隗延章) 추이젠은 올해 이미 예순 살이 되었는데 귀밑머리와 수염에 서리가 한 겹 끼었다....
  • 2021-10-18
  • 연변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 원장 허춘화. 1980년대초, 전국적으로 방송예술단 이름을 가진 단체가 북경, 상해, 연변 세곳 밖에 없었는데 그시절 연변방송예술단에서는 1978년까지 전국에 한대밖에 없었다는 립체식 전자풍금 한대를 어렵사리 장만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국내 한다하는 예술학교들에 전자풍금 전업이 없다보니...
  • 2021-10-14
  • 우리 말 표준화의 전도사 □ 김천   요즘 우리 말 방송계 레전드격인 서방흥 선생이 ‘연변조선족자치주화술학회’를 설립해 세간의 화제에 올랐다. 칠순이 넘은 년세에 이뤄낸 집념의 쾌거다.   서방흥 선생은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수십년간 잔뼈를 굵히며 몸담아온 방송가의 ‘거두’이고 ...
  • 2021-09-26
  • 길가에 피여난 이름없는 풀일지라도    —웃음으로 무대를 주름 잡는 배우 김영식   □리은희          연변에서 ‘앵무새’ 하면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리만치 알려져있다. 성급 무형문화유산 설창예술류 전승인인 김영식, 자신의 본명보다...
  • 2021-09-02
  • “오빠의 편지”로 히트를 치고 “해바라기”, “보리차”, “부모”, “로년을 잘 보내시라” 등 대표곡들로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구련옥 가수가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2015년 연변TV음력설야회 한국편 무대에서 “로년을 잘 보내시라” 노래를...
  • 2021-08-04
  •  팔순 '아마추어화가' 최봉순의 개인전이 7월 2일, 료녕성조선족미술촬영서예협회와 심양시조선족로교사협회의 공동 주최로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열렸다.     최봉순은 심양시조선족제6중학교 퇴직교사다. 1997년에...
  • 2021-07-06
  • 미술은 내 생의 동력이다   장철주 화백   중국미술가협회 회원이며 길림성 조선족 미술인협회 사무 부총장인 장철주 화백(1962년생)은 2006년에 작품 “춘하추동”과 “량산의 자매”로 중국미술가협회 19차 신인신작전시에 입선되였으며 그의 작품 “기억을 잠그다”는 2010년 ...
  • 2021-06-21
  • 〈털 없는 개〉(리종훈, 김웅걸 작, 1991년), 〈헤톨부대〉(리광수 작, 1996년), 〈금개구리〉(김영, 최인호 합작, 1999년) 등 좋은 연극을 만들어 중국 조선족 연극 무대를 다채롭게 장식했던 연출가 최인호(1946년―2007년), 그는 ‘괴재(怪才)’, ‘기재(奇才)’로 불릴 만큼 인간사회의 힘들고 지...
  • 2021-05-27
  • 연변가무단 원 부단장, 국가급지휘가 안국민   2001년 7월, 중국음악가협회에서 주최한 중국공산당 창건 80돐 기념 중국교향악작품음악회에서 한 안국민이 창작한 관현악 〈내가 살던 고향〉이 중국교향악단에 의해 힘차게 연주되였다. 연주는 중국조선족 전통민간악기인 횡적, 단소, 장새납, 장고 등을 포함하였기에...
  • 2021-05-20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