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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실록] 페스카마 호의 선상(船上)반란 살육사건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7월7일 09시23분    조회: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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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0일 베트남 선원들에 의해 일어난 광현호 선상살인 사건은 선장과 선원 사이의 갈등, 외국인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 수법의 잔인함 등 여러가지 면에서 1996년 8월 페스카마호 호 선상 살육사건을 떠올린다. 광현호 베트남 선원들은 선상에서 벌어진 회식 자리에서 선장과 말다툼을 벌인 뒤 선장과 기관장을 살해했다. 페스카마호의 조선족 선원들은 선장의 하선명령에 반발해 배를 탈취하기로 모의하고 끔찍한 살육을 저질렀다. 아래 <월간조선> 2001년 2월호에 실렸던 페스카마 호 선상반란 사건을 재게한다.-월간조선

한국인 선장과 조선족 선원 사이의 갈등, 오해와 증오는 피비린내나는 동족(同族) 살육을 불렀다. 6명의 조선족은 강제하선당하면 신세를 망친다는 생각에 배를 빼앗기로 결심하고, 한밤중의 야수적(野獸的) 도륙을 시작한다. 그들은 맹장염 환자 선원까지 바다로 던져넣었다. 그들이 살려준 유일한 한국인 생존자 이인석(李仁錫) 항해사가 납치된 배를 22일간 몰아주다가 살인자들을 냉동실 안으로 몽땅 유인한 뒤 바깥에서 잠그고 구조를 요청함으로써 이들은 일본 해상보안청에 검거되었다
 
1996년8월24일 일본 남부 해상에 떠있는 페스카마 15호의 모습. 1996년 8월초 남태평양에서 조업 중 서사모아로 귀항하다가 조선족들의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한국선원 7명을 포함한 11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진은 일본 행상보안청이 비디오로 촬영한 것이다./조선DB

『유족들에게 속죄하지만 나는 두목이 아니다』
 
  사형수번(死刑囚番) 6501. 부산 구치소 면회실 유리벽 건너편으로 왼쪽 가슴에 붉은색 사형수번이 새겨진 명찰이 달린 죄수복을 입은 자그마한 키의 사형수(死刑囚)가 모습을 드러냈다. 뿔테 안경을 쓴 사내는 쾌활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사형이 확정된 해인 1997년 말, 그곳 구치소에서는 사형수 4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해 겨울을 포함해 네 번째의 겨울을 맞을 때까지 살아서 면회객을 맞고 있다. 그를 면회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늘 한결 같다. 이번 면회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나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렸습니다.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어머니와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바랄 뿐입니다』
 
  그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고, 지금도 선상(船上)반란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과 유족들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전재천(全在千). 중국 국적의 조선족인 그는 호적상으로는 1958년 生이다. 실제로는 1952년 生이다. 원양어선을 타기 위해 나이를 줄였다고 한다. 쇠는 나이로 마흔 아홉 살인 것이다.
 
  全씨는 1996년 8월2일 참치잡이 원양어선인 페스카마 15호 船上에서 한국인 선원 7명을 포함해 11명을 살해한 중국 조선족 범인 6명 가운데 두목으로 지목돼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 대기중이다. 나머지 조선족 범인 5명은 1심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로 감형돼 대전교도소 등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범인 6명 가운데 全씨에게만 사형이 선고된 이유는 간단하다. 全씨가 두목격으로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全씨 자신도 검찰조사 과정은 물론이고 재판과정에서도 자신이 범행을 주도한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 全씨는 『그 사건 당시 나는 두목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산 구치소 면회에서 全씨는 『나는 상황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면서 『(사건에)가담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나까지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목의 위치에서 사건을 주도적으로 모의하고 실행을 지시한 게 아니라 자신도 다른 범인들처럼 상황에 휩쓸린 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全씨의 변론을 맡았던 문재인 변호사는 『그 사건에는 두목이 없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고 전제하면서 『다만 중죄를 받을 단 한 사람이 필요하다면 나이나 학력이나 경력이나 페스카마호에서의 지위로 볼 때 全씨가 지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두목이 있었다면 全씨가 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사건은 우발적 충동에 의해 시작됐다는 견해다.
 
  페스카마호에 승선한 중국 국적 조선족은 全씨를 포함해 7명이다. 이 가운데 6명이 범행에 가담했고 1명은 이들에 의해 살해됐다. 全씨는 호적상 나이로도 페스카마호에 승선한 다른 조선족들보다 10여 세 많다. 학력에 있어서도 다른 조선족들의 최고 학력이 고졸인 데 비해 천진사범대학교를 나왔다. 직업도 다른 조선족들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던 데 비해 10여 년 간 중국 길림성 소재 조선중학교에서 음악과 한문을 가르친 교사였다. 페스카마호에서의 그의 위치는 2등 항해사로 사관선원(자격증을 가진 간부선원)이었고 나머지 조선족들은 막일을 하는 선원들이었다. 全씨는 이전에도 일반 선원으로 乘船(승선)한 경험이 있었지만 나머지 조선족들은 페스카마호 승선이 처음이었다.
 
  두목을 꼽으라면 全씨를 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런 배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全씨는 수사과정에서 자기가 두목임을 인정하면 다른 조선족 범인들은 물론이고 자신까지도 빠른 시일 內에 중국으로 추방될 것으로 믿고 스스로를 두목이라고 인정하고, 다른 조선족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라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족들이 船上에서 저지른 범죄의 끔찍함 여부를 떠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두목이었다는 이유로 범인 중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全씨로서는 다른 범인들과 비교해 형량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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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카마 15호 선상폭동으로 숨진 선원들의 분향소가 1996년8월25일 오후 선원송출회사인 부산시 동구 초량동 (주)제양 부산사무소에 차려진 가운데 유족들이 분향준비를 하고 있다.


  
 
조선족 사회 들끓다
 
  페스카마호 船上 반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사회와 범인들이 속한 중국 조선족 사회의 사건을 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렸다. 한국 사회는 범인들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고, 조선족은 범인들에게 「악마의 마음」을 갖게 한 한국 선원들의 船上 폭력에 치를 떨었다.
 
  한국 사회가 이 사건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한 독지가의 성금 기탁 취소 해프닝을 들 수 있다.
 
  조선족들이 船上반란 사건으로 구속된 직후인 1996년 9월 初 세무사인 한 독지가가 全씨의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1000만원을 언론사에 기탁했다. 당시 언론에는 사건 수사 소식과 함께, 全씨가 딸의 학자금 마련을 위해 배를 타게 됐다는 등 全씨의 안타까운 가족사가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독지가가 『잔혹한 범죄는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중국에 있는 그의 가족을 생각하면 같은 동포로서 측은한 마음이 든다』며 全씨 딸의 학자금 등의 명목으로 1000만원을 기탁했던 것이다.
 
  이 소식이 언론에 보도된 후 독지가는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할 정도로 협박 전화에 시달렸고, 끝내는 성금 기탁을 철회하고 말았다.
 
  반면 1997년 4월에 있었던 2심 판결을 앞두고 조선족 사회에서 발행되고 있는 「료녕조선문보」는 「하늘이여 자비를 내려달라!」 題下(제하)의 논평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페스카마호 船上 살인사건은 우리 민족 력사에 흑색의 한 페이지를 남겨놓은 특대참극이다. 특히 우리를 경악케 했고 가슴아프게 했던 것은 이 사건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100년 정착사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없고 모국과의 관계사에서 있을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착 100년 력사에서 중국의 조선족들이 언제 한 번 모국에 대해 이같이 원한의 감정을 가져봤던가? 장장 100년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모체에서 떨어진 아기와 같이 모국에 대한 련정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왜 모국의 동포들을 살해해야만 했을까>
 
  이 논평은 조선족들의 船上반란 원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그 첫째 요인은 장기간 非인간적인 인격모독에서 비롯된 울분의 분출이요, 두 번째 요인은 인간을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갈 때 본능적인 결사저항이라는 것이다>
 
  중국 국적 조선족들의 船上반란 사건에서는 한국인 선원 7명, 조선족 선원 1명, 인도네시아 선원 3명 등 11명이 숨졌다. 이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범인들은 칼로 피해자들을 무자비하게 난자했으며 심지어는 도끼로 찍어 죽이기도 했다. 저항력이 없는 환자를 산 채로 바다에 내던져 죽이기도 했다.
 
  1심 법원이 사형을 선고하며 그들의 범죄행위를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도 없고 하여서도 아니 되는 행위』로 규정한 대로 범인들은 「악마적 본능」을 제어하지 못한 채 살인극을 벌였다.
 
  한국 사회는 그들이 보여준 「악마적 본능」에 치를 떤 것이고, 조선족 사회는 범인들이 「악마적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환경을 조성한 한국 선원들에게도 책임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경찰과 검찰에서의 범인들의 진술 조서와 재판 기록, 그리고 페스카마호에 승선했던 한국인 선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李仁錫(이인석·32)씨의 증언 등을 토대로 「죽음의 배」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다큐멘터리로 再구성한다.
 
 
 
의욕이 넘친 부산 남항에서의 출항
 
  1996년 6월7일 오후 1시30분 부산 남항. 온두라스 국적 294t급 원양참치연승어선 페스카마 15호는 선장 최기택(당시 33세·이하 한국 선원들 나이는 사건 당시 기준임), 갑판장 강인호(33), 기관사 박종승(32), 조기장(기관실 반장) 김창열(36), 조리장 서장주(45), 기관장 김신일(58) 그리고 1등 항해사 이인석(李仁錫)씨 등 한국인 선원 7명과 인도네시아 선원 10명을 태우고 남태평양으로 떠난다.
 
  李仁錫씨는 『출항 당시 崔선장은 선장으로서는 첫 출항이었기 때문에 의욕에 넘쳐 있었다』면서 『그런 의욕이 어떤 측면에서는 船上반란 사건의 한 원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승선 경험이 전무한 조선족들이 첫 출항시 모든 선장들이 갖게 마련인 「넘치는 의욕」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李씨는 페스카마호 승선이 두 번째였다. 1991년에 군산수산대학교를 졸업하면서 3급 항해사 면허를 취득한 李씨는 다른 참치잡이 원양어선에 승선하다가 1995년 4월 선원송출회사인 (주)제양의 송출선원으로 페스카마호에 2등 항해사로 승선한다. 다음해 4월 1년 간의 승선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가 병역특례자 의무 근무기간을 채우기 위해 다시 (주)제양의 송출선원으로 페스카마호에 승선하게 된 것이다.
 
  1995년 승선시의 선장 전병록씨가 몸이 아파 당시 1등 항해사였던 최기택씨가 선장으로 승진됐고, 李씨 역시 1등 항해사로 승진한 상태에서의 출항이라 한국 선원들로서는 기분 좋은 출항이었다.
 
  李씨의 기억으로는 당시 항해중이거나 조업을 할 때의 대부분은 날씨가 좋았다고 한다.
 
  페스카마호의 최종 목적지는 남태평양 해상의 미국령 피닉스섬 근처의 해상으로 그곳에서 참치잡이를 할 계획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페스카마호는 티니안 섬에 들르게 돼 있었다. 그곳에서 중국 국적의 조선족 선원 7명을 태우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남항 출발 1주일 후인 6월14일 페스카마호는 예정대로 티니안 섬에 도착, 이등항해사 全在千씨를 비롯해 朴君男(박군남·33), 崔錦浩(최금호·31), 崔日奎(최일규·31), 李春勝(이춘승·33), 白忠范(백충범·32), 崔萬奉(최만봉·사망·당시 30세) 등 조선족 선원 7명을 태웠다. 티니안섬에서 본격적인 조업을 위해 이틀을 쉰 후 페스카마호는 6월16일 티니안항을 출항했다.
 
 
 
끔찍한 사건의 전주곡-한국 선원과 중국 선원의 대치극
 
  티니안항을 출발해 피닉스섬 근처에서의 첫 조업이 시작될 때까지 순조로운 항해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外樣(외양)으로 보이는 평화」였다는 게 조선족들의 주장이다. 6월27일의 첫 조업을 앞두고 조업해역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중국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조업준비 작업을 시키면서 선장과 갑판장 등 간부 선원들의 구타와 욕설 등 학대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全씨는 1996년 10월17일자로 부산지법에 보낸 탄원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18일 갑판장은 중국 선원을 희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갑판장은 이춘승에게 『야 암캐 있냐, 새끼 있냐』고 물었지만 이춘승이 알아듣지 못하니 『야, 애기 있냐, 너 암캐의 홍문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냐』고 말하자 한국 사람인 1항해사, 조기장 등은 손뼉을 치고 웃으며 갑판장은 손으로 이춘승의 머리를 돌리며 밀어 넘어뜨렸습니다. 동물처럼 장난을 쳤습니다. 선원들은 속을 눌러가며 쓴 웃음을 삼켰습니다. 이때부터 선원들은 한국인의 심심풀이가 되었고 희롱, 구타, 폭행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족 선원 崔錦浩씨도 검찰조서에서 한국 선원들의 폭행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출항을 한 지 이틀이 지난 후에 갑판장 강인호가 밧줄을 잇는 작업에 대하여 교육을 시키고 나서 일을 시켰는데, 제가 일을 잘못하니까 갑판장이 주먹으로 저의 목덜미를 한 대 때렸고, 다른 중국 선원이나 인도네시아 선원들도 그런 식으로 맞았으며, 그 뒤부터는 작업을 시켜놓고 잘못하면 선장이나 갑판장이 주먹이나 쇠파이프, 몽둥이로 중국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마구 때렸고…>
 
  1등 항해사 李仁錫씨도 조선족들에 대한 폭행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다만 그 폭행이 조선족들이 주장하는 만큼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으며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선박이 조업구역으로 항해를 하는 동안 어구라든가 장비를 손질하여 조업준비를 하여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선장이나 사관선원들이 시키는 대로 행동을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고 게으름을 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船上 생활은 항상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규율을 잡기 위해서 가끔 간부선원들이 선원들을 주먹으로 한 차례 때리거나 매질을 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당시 어떤 참치잡이 배에서도 있는 일이었고, 맞는 사람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족들의, 몽둥이나 쇠파이프로도 때렸다는 주장에 대해서 李씨는 『구타는 있었지만 몽둥이나 쇠파이프로 때린 일은 없었다』면서 『다만 그해 6월27일 첫 조업을 시작하면서 선장이 조선족인 이춘승씨를 쇠파이프로 때린 적은 있는데 그 외에는 그런 사실이 없으며 그 날 이후 중국인들에게는 구타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업 특성상 폭언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李씨가 말하는, 6월27일 첫조업을 하면서 선장이 조선족인 이춘승씨를 쇠파이프로 때린 사건은 한국 선원과 조선족 선원이 흉기를 든 대치극을 일으켰고, 끝내는 한 달여 후 船上 참극을 부르는 시발점이 된다.
 
 
 
무장 대치극
 
  첫 조업이 시작된 6월27일 오전 5시. 선장과 갑판장 등 대부분의 선원이 참가한 가운데 투승 작업(참치를 잡기 위해 낚시에 고등어 등의 미끼를 끼워 바다로 던지는 작업)이 벌어졌다. 선원들은 조를 나눠 꽁꽁 언 미끼를 낚시에 끼우고 에다(직경 8mm 정도의 참치잡이 낚싯줄)를 풀고, 낚시를 바다에 던지며 조업에 들어갔다. 한국 선원들과 말이 통하는 조선족들이 앞에 섰고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뒤에서 작업을 했다.
 
  최기택 선장은 손에 쇠파이프를 들고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처음 배를 탄 조선족들의 손이 빠를 리 없었다. 조선족들은 崔선장이 작업이 서툰 선원들을 막대기로 때려가며 작업을 다그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족 崔錦浩씨는 검찰진술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 선장, 갑판장이 나와 투승작업을 지시하여 투승작업을 하던 중 선원들이 작업을 잘못하니까 선장이 쇠파이프로 선원들의 팔, 등, 엉덩이 등을 때렸고 그 뒤 전원을 갑판으로 모이라고 하여 저희들이 갑판으로 갈 때, 전재천이 저희들에게 오늘 심하게 두들겨 맞겠다고 말을 하기에 저희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갑판으로 갔는데, 선장이 제일 먼저 이춘승에게 바닥에 꿇어앉으라고 한 후 쇠파이프로 때리는 것을 이춘승이 두 번 피하고 세 번째 때릴 때 어깨에 맞았는데, 이춘승이 갑자기 선장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선장의 얼굴을 한 대 쳤고…>
 
  李仁錫씨의 진술은 崔씨와 약간 다르다.
 
 < 조업해역에 도착하여 첫 투승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선원들이 모두 신규 선원이고 경험이 없다 보니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선장이 갑판상에 全선원을 집합시킨 다음 투승요령을 직접 설명해주는 과정에서 저는 확실한 이유를 알지 못하겠으나 선장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들어 이춘승의 어깻죽지 부분을 한 차례 때린 다음 다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이춘승이 선장의 뺨을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갑판상에 있던 참치 처리용 칼을 집어들고 선장을 찌를 듯이 겨누면서 위협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족과 한국 선원들은 칼과 몽둥이, 도끼를 든 상태에서 대치극을 벌인다. 조선족들은 조타실 위 갑판에서, 한국 선원들은 조타실 앞 갑판에서 흉기를 든 상태로 장시간 맞섰다. 조선족들은 한국 선원들과의 대치 때 인도네시아 선원들도 자신들의 뜻에 동조해 자신들 편에 합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생존한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검찰 진술을 보면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조선족들에게 합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검찰 수사관의 질문에 대한 인도네시아 선원 프란시어 순다의 답변.
 
  ─6·27의 폭행사건 때 사태가 어떠하였는가요.
 
  『그날 선장이 이춘승을 때린 일로 인해 중국 선원들과 한국 선원들 간에 편싸움이 될 정도로 사태가 험악해진 상태에서 중국 선원들은 칼 등을 들고서 조타실 위에 올라가 조업을 거부하고, 인도네시아 선원들도 중국 선원들에게 가세하여 조타실 위에 올라가 조업 거부를 하였습니다』
 
  ─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중국 선원들에게 가세했는가요.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선장에게 맞은 것이 일을 할 줄 모르는 대가인 것으로 생각하고서 조업 거부할 생각이 없었는데, 중국 선원들이 같이 가세하라고 하여 그냥 조타실 위에 올라가서 중국 선원들 옆에 서 있었습니다>
 
  진술조서의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 즉 선원들 간의 분위기를 묻는 질문에 대해 프란시어 순다가 『그 전에는 그런대로 분위기가 좋은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중국 선원들은 일하기 싫다면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조선족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선장 사과로 대치극 끝내
 
  조선족 崔日奎씨는 이때의 대치 시간을 세 시간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全在千씨는 조선족에 합세하지 않고 양측의 중재역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李仁錫씨도 법정진술에서 『6월27일 첫 대치時에는 선장님이 피고인 전재천에게 설득을 하라고 요청을 했다』고 말해 全씨가 대치극에서 중재역을 맡았었음을 인정했다.
 
  全씨가 탄원서에서 묘사한 당시 상황과 다른 조선족 선원 그리고 李仁錫씨의 증언과 진술을 한데 합쳐보면 사태는 이렇게 전개된 것 같다.
 
  대치상태가 벌어져 조선족들이 조타실 위 갑판으로 올라가자 선장은 노발대발하고 욕을 하며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조선족들은 갑판에서 내려오지 않고 육지로 데려다 줄 것을 요구했다. 선장은 全씨에게 조선족들을 설득하라고 했다. 全씨는 조타실 위 갑판으로 올라가 조선족들의 주장을 들었다. 더 이상 배에서 작업을 못하겠으니 집으로 돌려 보내달라는 요구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족들은 그 전날인 26일 조선족 6명이 「때리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데리고 일을 하면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1등 항해사에게 건네면서 선장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족들은 그 편지에 대한 보복으로 선장이 심하게 폭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타실 위 갑판에서 내려온 全씨는 이 사실을 선장에게 보고했고, 선장은 1등 항해사인 李仁錫씨를 불러 사실 확인을 했다. 李씨는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바빠서 깜빡 잊고 있었다고 했다. 선장은 1등 항해사를 야단치고 조선족들을 불러오라고 全씨에게 시켰다.
 
  조타실 앞 갑판으로 내려온 조선족들 앞에서 선장은 폭력의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사과를 했다. 폭행으로 조선족들의 원성을 샀던 갑판장도 조선족들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조선족과 한국 선원 간의 대치는 끝났다.
 
  여기까지는 생존자 李씨의 주장이나 범행을 저지른 조선족들의 주장이 거의 일치한다. 문제는 대치극 이후의 상황이다. 李씨는 이 사건 이후 조선족에 대한 구타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작업 지시를 하는 가운데 폭언이 있었음은 인정했다.
 
  全씨의 주장은 다르다. 대치사건 이후에도 갑판장 등에 의한 폭행이 지속됐다는 것이다. 반면 같은 조선족인 崔錦浩씨의 진술은 李씨 주장에 가깝다. 崔씨의 진술.
 
 < 그 뒤부터는 저희들이 작업을 잘못하여도 때리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욕을 하고>
 
  대치사건 이후에는 폭행이 없었다는 李씨의 주장과 崔씨의 주장이 일치하는 것이다.
 
  白忠范씨의 진술은 全씨 주장에 가깝다. 白씨의 진술.
 
 < 선장의 사과로 더 이상 충돌없이 상황이 끝났지만 그후 선장과 갑판장 강인호는 전보다는 그 횟수가 줄었지만 수시로 특별한 이유없이 중국인 선원들을 폭행하였고, 선장보다는 갑판장의 폭행 횟수가 많았기 때문에 6월27일부터 하선 결정時까지 기간중에는 갑판장이 중국인 선원들로부터 집중적인 미움을 받았고, 선장은 하선 결정을 하는 바람에 중국인 선원들의 미움을 심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갑판장과 선장이 조선족들로부터 다른 한국 선원들보다 더 큰 미움을 받았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초기 진술이나 탄원서에서 조선족 범인들은 처음에는 두 사람만을 살해한 후 자신들도 자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치극에 이은 下船 명령
 
  全씨 등은 페스카마호 船上에서 한국선원들에 의한 폭행이 만연했던 사례로 인도네시아 선원이었던 로비의 하선을 예로 들고 있다. 로비는 폭력에 견디다 못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7월28일에 하선을 요청해, 결국 하선을 위해 다른 배로 옮겨 탔다는 것이다. 실제 로비라는 선원은 페스카마호에 승선했다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건 발생 직전에 하선한 일이 있다. 로비의 하선으로 페스카마호에는 인도네시아 선원이 10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페스카마호에 함께 승선했다가 생존한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법정 진술에서 한국 선원들이 인도네시아 선원들에 대해 심하게 폭행한 적은 없다고 증언했다.
 
  물리적인 폭행이 있었는지 아닌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조선족 선원들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던 것만은 분명하고, 그런 조건도 자신들에 대한 학대만큼이나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崔錦浩씨는 『하루에 2~6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하고 작업을 해야 되는 때가 많아서 저희들이 몸이 조금 아파도, 그것을 핑계로 쉬겠다고 말을 하고 일을 하지 않아 하루에 1~2명씩 작업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李仁錫씨는 한국 선원들이 조선족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다그쳐가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임금구조를 들었다. 조선족이나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경우는 매달 일정액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한국 선원들의 경우는 어획량에 따라 실적급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외국 선원들은 어획량의 많고 적음에 개의할 바가 아니었지만, 한국 선원들은 높은 수당을 받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외국 선원들을 다그쳐야 했다는 것이다. 차별적인 임금구조도 사태발전에 한몫한 것이다.
 
  李씨는 『참치잡이는 초기 3개월이 힘들고 그 기간만 잘 견뎌내면 일이 수월해지게 마련인데 조선족들은 그 기간을 견뎌내지 못했다』는 말도 곁들였다.
 
  조선족 崔씨의 진술대로 대치극이 끝난 이후에 조선족들은 거의 매일 하루에 1~2명씩 아프다는 이유로 조업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게 조사를 맡았던 검찰의 판단이다. 全씨의 주장은 다르다.
 
  『1996년 7월26일 백충범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작업을 하지 못하겠다고 했고, 최일규도 허리가 아프다고 작업을 거부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춘승의 일(船上 대치사건)이 있고 나서 한 달 정도는 작업을 거부하는 일이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 그러나 다른 조선족들은 崔씨의 말처럼 육체적·정신적인 학대에다 실제로 몸이 아픈 것도 겹쳐 조업에 참여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조업개시 한 달여가 지난 7월28일 중국국적 조선족 6명(최만봉씨 포함)은 하선을 요구하며 작업거부에 들어갔다. 선장이 全씨와 李씨를 동원해 설득하자 조선족들은 다시 조업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선장은 허리가 아프다는 崔日奎씨, 배가 아프다는 白忠范씨, 맹장 수술을 한 자리가 아프다는 朴君男씨에게 약을 지급했고, 다음날인 29일 오후까지 사기 진작 차원에서 휴무를 실시했다.
 
  全씨는 조선족들의 작업거부가 있기 하루 전인 7월27일 갑판장과의 대립 때문에 더 이상 船上생활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방광결석으로 인해 하선해야겠다며 하선보고서를 써서 李씨에게 주었다고 한다. 법정에서는 조선족들의 조업 거부가 있기 하루 전에 全씨가 하선 신청을 함으로써 다른 조선족들의 조업 거부를 유도 또는 지시한 것이 아니냐, 하는 논란이 벌어졌지만 全씨가 조업 거부에 나선 조선족들 설득에 나서기도 했고, 또 하선시까지 당직 근무는 계속할 것 등을 약속한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조업 거부를 유도 또는 지시한 것 같지는 않다. 이후 곧바로 조선족들의 작업 거부가 이어졌을 때도 全씨는 사망한 崔萬奉씨와 함께 조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선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휴식이 끝난 29일 오후 3시 李仁錫씨는 조선족들에게 조업참가를 지시한다. 그러나 全씨와 崔萬奉씨를 제외한 조선족 선원 5명은 아프다면서 다시 조업을 거부하고 하선을 요구했다. 李씨의 보고를 받은 최기택 선장은 하선을 요구하는 조선족들을 하나씩 조타실로 불러 의사를 물어보았다. 이 자리에서 조선족들은 下船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7월30일에는 한국인 선원들이 징계위원회를 열어 全씨 등 조선족 5인에 대한 下船을 결정한다. 비극의 씨앗은 그렇게 발아되기 시작한 것이다.
 
 
 
거부당한 『다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7월30일 밤 8시. 최기택 선장은 崔萬奉씨를 제외한 조선족들을 차례로 불러 下船증명서와 각서를 보여주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崔錦浩씨는 진술조서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 선장이 하선증명서와 각서를 보여주면서 도장을 찍으라고 하여 그 내용을 보니, 조업거부, 船上난동으로 下船을 한다는 내용이 기재가 되어 있고, 저희들을 사모아항에 下船시키는데 그곳까지 가는 데 소용되는 기름값, 중국으로 가는 데 소용되는 항공비, 그 동안에 고기를 못 잡아 손해를 본 것 등 일체의 비용을 저희들이 부담해야 된다는 내용이 있어 저희들에게 엄청나게 불리한 내용이 적혀져 있었으나 손도장을 찍고 나왔으며 위와 같은 내용으로 하여 下船을 하게 되면 저희들 모두가 파멸된다는 것을 알고서는 한국인 선원들을 죽이기로 했던 것입니다>
 
  全씨도 『각서에 서명무인을 하면서 본 선장이 작성한 下船증명서에는 下船하게 된 경위가 중국인들이 船上에서 난동을 부려 下船을 시킨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고, 下船으로 인하여 발생하게 되는 비용은 모두가 下船者가 부담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全씨는 선장이 각서를 받으며 그 자리에서 『너희들은 (船上난동을 벌였기 때문에)사모아 경찰서에서 3개월 간 갇혀 있어야 된다』며 『조업손실로 인한 경비 등 모든 손해비용을 너희들이 물어야 한다고 소리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全씨를 비롯한 조선족들은 승선시 송출회사에 중국돈으로 1만원씩(당시 한국돈으로 100만원 정도)의 소개비를 지급했는데, 이 돈은 중국에서 보통 노동자들의 수십개월분 월급에 해당한다<李春勝씨는 검찰진술조서에서 「보통 집 한 채에 (중국 돈으로)2만5000원 가량 하며, 월급생활자의 월급은 공무원의 경우 한 달에 600원 내지 700원 가량 받고, 교사는 400원 이상을 받고 일반 노동자의 경우 제가 한 달에 240원을 받았으니 이것을 비교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겁니다(李씨는 배에 승선하기 전 5년 간 점원 생활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下船을 하면 소개비 1만원은 그냥 떼이는 돈이다.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손해인데도 이들은 下船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선장의 말을 들은 뒤 소개비를 떼이는 것은 물론이고, 선원회사에 담보물로 제공한 중국돈 5만원도 떼이고 거기에 항공비, 조업손실비, 사모아 3개월 간 체제비까지 물 생각을 하니까 암담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全씨는 탄원서에 그 비용을 계산해놓고 있는데 중국돈으로 대략 20만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실제로 이들이 下船을 하게 됨으로써 물어야 할 비용은 담보물 5만원 중 중국과 조업지와의 왕복 항공료 및 사모아 항공 등에서의 체류비만 공제된다고 한다. 조선족들이 말하는 下船각서도 사모아 경찰에 제출되는 것이 아니라 선박회사에만 제출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조선족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장은 사실과 다른 말을 함으로써 조선족 선원들을 절망감 속으로 빠뜨린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들이 말하는 下船 각서를 작성한 李씨의 주장은 崔씨와 全씨의 주장과 다르다. 全씨가 말하는 下船증명서란 下船시키는 이유를 적은 징계결의서를 말하는 것으로 이 징계결의서는 李仁錫씨가 작성했다고 한다.
 
  『징계결의서에는 조업거부 등 있었던 사실만 적혀 있었지 船上난동을 일으켜 선장을 죽이려 했다는 등의 내용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선장이 각서에 날인한 조선족들에게 했다는 이야기 중 경찰서 구류 이야기는 몰라도 일체의 손해비용을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했을지도 모른다는 입장이다.
 
  『조선족 선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나 역시 그들이 조업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 下船하여 귀국하는 데 사모아에서 오래 걸릴 경우 4개월까지도 지체되는 경우를 보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당시 그들은 별 것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각서에 날인할 당시는 李씨의 말대로 선장이나 李씨의 말에 조선족들이 개의치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조선족들은 다음날 다시 일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全씨의 계산에서 나온 중국돈 20만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감당할 손해비용은 자자손손 갚아가더라도 못 갚을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全씨는 개인적으로 선장에게 다시 일을 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나머지 5명의 조선족은 白忠范씨를 대표로 1등 항해사인 李씨에게 다시 조업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답은 거절이었다.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배는 조선족 선원들의 下船을 위해 이미 사모아 기지로 회항을 하고 있었다. 李仁錫씨의 증언.
 
  『전재천씨가 다시 일을 하겠다고 선장을 찾아가고, 백충범씨는 나를 찾아와 다시 일을 하겠다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들의 下船이 결정돼 교체선원이 대기중이었기 때문에 결정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 이전에도 조업 거부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절망감 속에서 한국선원들을 살해하기로 하다
 
  다시 조업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선장과 1등 항해사로부터 거부를 당하자 조선족 선원들은 암담한 심정이 되었다. 암담함과 참담한 심정 속에서 崔萬奉씨를 제외한 조선족 선원들은 崔日奎씨가 사용하는 침실에 모였다. 그때가 1996년 8월1일 저녁 8시. 바다는 항해를 시작한 후 줄곧 그랬듯이 조용했지만, 崔씨의 침실에서는 狂風(광풍)이 몰아칠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全씨는 탄원서에서 그때의 침실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8월1일 나는 브리지(조타실) 당직을 서며 혹시 선장이나 1항사로부터 무슨 기별이 오겠나 하여 애타게 (조업에 참여하라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애타게 기다렸지만 아무런 얘기도 없었습니다. 정말 애가 탔습니다. 오후 당직을 서는데 백충범이 소변을 보러 나왔습니다.
 
  나는 평소에 백충범에게 열쇠를 주며 『술을 갖다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날도) 백씨에게 술을 가져다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당직을 마치고 나는 최일규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심정이 좋지 않기에 속이나 풀어볼까 하였습니다. 내가 침실에 들어서니 모두 고개를 떨구고 수심에 잠겨 있었습니다. 가련한 상황입니다.
 
  모두 수심과 불안 속에서 서로 말없이 담배만 피울 뿐이었습니다. 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모아에 가서 달아날 계획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중국에 가도 집으로 안 들어가고 평생 객지에 있을 계획을 말했습니다…>
 
  이야기 끝에 신세 한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全씨를 제외한 조선족 선원 6명은 배를 타기 위해 1994년에 중국 장춘 송출회사에 빚을 얻어 1만원을 내고 2년을 기다렸고, 그 사이 빚은 2만원으로 늘어난 상태에서 배를 타게 되었다는 등의 한탄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李仁錫씨는 『그 자리에서 정확히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자리에 술이 없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면서 확신의 이유를 『술창고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었으며 술은 사고를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특히 船上생활에서 술은 철저히 통제되는 품목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족 범인들이 술을 마신 때는 『船上반란으로 페스카마호를 장악한 이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탄원서에서 全씨는 「鮮소주」를 마셨다고 적고 있다.
 
  술을 마셨든 안 마셨든 분명한 것은 신세 한탄으로 시작된 그 자리의 분위기가 절망감에서 자포자기로 나아가다가 한국 선원들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선장을 비롯한 한국선원들이 자신들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崔日奎씨의 검찰 진술이다. 이 진술의 특색은 全씨의 경우 탄원서에서 다른 조선족들의 술자리가 만들어진 후 자신은 나중에 참석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데 반해, 全씨가 그 모임을 주도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범인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는데, 全씨는 그 이유를 『하루 빨리 중국으로 추방되기 위해 내가 그렇게 진술하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 1996년 8월1일 20시경 저녁을 먹은 다음 제가 사용하는 침실에 2항사(전재천)가 저와 최금호 이춘승, 박군남, 백충범 등을 모이게 한 다음 『우리가 下船을 하는 징계 의결서를 보니 우리가 조업을 거부하고 船上에서 난동을 일으켜 下船을 시킨다는 내용으로 적혀 있더라. 우리가 下船하게 될 사모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이고 우리가 집에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항공료가 중국에서 송금되어야 귀국할 수가 있는데 빨라야 세 달이라고 한다.
 
  게다가 조업손실비용 등을 모두 물어주어야 하는데 배를 타면서 중국 회사와 계약한 약정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망하고 만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가 보아야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정파탄이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이대로 下船을 당하느니 한국인들을 살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와 저희들 전원이 한국 선원들을 죽이고 배를 빼앗아 팔아 치우든지 무인도로 가든지 하자고 의견일치를 보았던 것입니다>
 
 
 
선장부터 죽이기로 하다
 
  全씨가 주도를 했든 안 했든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 선원들을 죽이자고 의견일치를 본 시간은 밤 9시. 한 시간 만에 범행계획이 세워진 것이다. 항해에 필요한 1등 항해사 李仁錫씨는 우선 살해 대상에서 제외됐고 첫 대상은 선장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나니 필요한 것은 흉기였다. 참치잡이 어선에서 흉기를 구한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조선족 李春勝은 선장에게 폭행을 당한 후 자신의 침실에다 숨겨놓았던 칼 두 자루를 꺼내와 한 자루는 崔錦浩에게 주었다. 白忠范도 갑판에 있는 창고에서 칼 세 자루를 가져와 朴君男과 崔日奎에게 나눠주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한국 선원들이 잠든 틈을 타 선장부터 시작해 한 명씩 죽여나가기로 하고 일단 잠을 청했다. 모두 잠든 다음 全在千이 한 명 한 명 불러내 죽이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다음날인 8월2일 새벽 1시. 全在千은 李仁錫씨와 당직을 교대했다. 막상 한국선원들을 죽이려고 하니 심정이 착잡했다. 1시30분경 통신실에서 무선교신을 하던 선장이 全씨가 당직을 서고 있는 조타실에 들어왔다. 선장 최기택씨는 全在千에게 『당직을 잘 서라』면서 『다른 배에서 연락이 오면 깨우라』고 했다. 全在千의 『잘 알겠다』는 대답을 들으며 선장은 조타실 바로 뒤편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로 사라지는 선장의 뒷모습을 보며 全在千은 인간적인 연민에서 오는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결국은 내가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난 갈등을 잠재웠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자신도 다른 조선족들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런 갈등 속에서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되었다. 全在千은 「곧 죽어야 할」 선장을 빼고는 당직을 서느라 한국선원들 중 마지막으로 잠든 李씨의 침실을 살폈다.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른 조선족 선원들을 깨웠다. 朴君男과 崔日奎가 침실 중앙통로 사이에 칼을 들고 숨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선장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李春勝, 崔錦浩, 白忠范 등은 선장을 살해한 현장인 조타실에 숨었다. 이제 全在千이 선장을 조타실로 유인만 해오면 살해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선박의 심장인 조타실과 침실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배의 船首(선수)를 기준으로 조타실의 후면 중앙에는 선박을 縱(종)으로 관통하는 통로가 나온다. 조타실에서 내려서서 船尾(선미) 방향으로 진행하면 좌측으로는 海圖室(해도실), 항해사 李仁錫씨와 全의 침실, 갑판장 강인호씨와 인도네시아 선원 렛타가 사용하는 침실, 기관사 박종승씨와 朴君男가 함께 쓰는 침실이 이어져 있다. 우측으로는 선장 최기택씨의 단독 침실, 통신실, 崔錦浩·崔日奎·아삿·닉슨 등 4명이 사용하는 침실이 있다.
 
  중앙통로로 이어지는 침실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선박을 횡단하는 길이 5.15m, 폭 60cm의 통로가 나온다. 이 통로를 통해 갑판으로 나갈 수 있다. 중앙통로 건너편으로는 기관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건너편의 좌측으로는 白忠范, 요크, 순다, 로비(7월28일 下船)가 사용하는 침실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우측에는 화장실과 목욕실이 있고 반대편으로는 계단 아래 기관실이 있다. 그 중앙에 식탁 2개와 의자 4개가 비치된 식당이 있고 우측에는 기관장 김신일씨의 침실과 崔萬奉, 李春勝, 로사디, 레인 등의 침실이 있고 좌측에는 조리장과 조리장 서장주, 조기장 김창열, 페리, 누차만 등이 사용하는 침실이 있다.
 
 
 
선장을 찔러 죽인 뒤 바다에 던지다
 
  2일 새벽 3시 경. 조타실을 나온 全在千은 선장의 침실로 향했다. 全在千은 문을 열고 『선장님 타선박에서 호출이 왔습니다』고 말했다. 선장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全씨는 맞은 편 海圖室로 들어가 허리를 숙이고 해도를 보는 척했다. 선장이 조타실로 들어갔다. 全在千은 선장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재빨리 밖에서 조타실 문을 잠갔다.
 
  조타실 내부. 조타실 안은 어두웠다. 빛이 있었다면 狂氣어린 6개의 눈동자에서 나오는 빛이었을 것이다. 선장이 들어서는 순간 李春勝이 들고 있던 참치처리용 칼로 崔선장의 복부를 찔렀다. 참치잡이 만큼이나 서툰 동작이었지만 칼은 복부 깊숙이 박혔다. 崔선장이 맥을 못추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李春勝은 쓰러지는 崔선장의 목 뒤를 재차 찔렀다.
 
  조타실 안에 있던 白忠范과 崔錦浩도 참치처리용 칼로 崔선장의 무릎과 복부를 잇따라 찔렀다. 崔선장이 죽으며 남긴 말은 『악』하는 외마디 비명뿐이었다. 밖에서 문을 닫고 있던 全在千이 문을 열고 조타실로 들어왔다. 조타실 안에 있던 세 사람은 공포를 잊으려는 듯 다시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崔선장을 살해할 당시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던 것 같다.
 
  李春勝의 검찰에서의 고백.
 
  『저는 그 당시 공포에 질려 있었던 상태였고 선장을 바다로 던질 때도 저는 선장의 한쪽 다리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선장이 숨을 쉬면서 헐떡거렸는지 아니면 완전히 숨을 멈춰버렸는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상황을 검찰 공소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 …피해자를 살해하고 즉시 그곳에서 피고인 전재천이 『됐다, 죽었으니 그만 바다에 내다 버려라』고 지시하자 피고인 최금호, 백충범, 이춘승은 피해자의 전신을 잡고 조타실 우측 출입문으로 끌고 가고 조타실 밖에 있던 박군남 최일규도 조타실 안으로 들어와 합세하여 피해자를 조타실 우현 방현대 밖 해상으로 던져서 사체를 유기하고…>
 
  全在千이 탄원서에 쓴 상황묘사는 약간 다르다.
 
 < 1~2분 가량 후 브리지(조타실)에서 선장이 『악』하고 소리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브리지 문을 열었습니다. 해도실 등불이 비쳐 (조타실 내부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선장이 넘어졌는데 이춘승이 칼을 들고 선장의 등을 또다시 찌르려 하였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여이』하고 소리가 나갔습니다. 끔찍해서 그랬는지 불쌍해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됐다. 죽었잖아. 빨리 처리하자. 1항사가 나오면 큰일이다』 하니 이 사람들이 모두 붙어 (사체를) 들고 우측 통로 문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全在千은 자신이 살해에서 사체 처리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남태평양 바닷물 속으로 선장의 사체를 버린, 全在千을 제외한 조선족 범인들은 바닷물로, 崔선장을 살해하면서 손에 묻은 피를 씻는다. 그리고 첫 살인으로 인한 흥분이 가시기도 前에 그들은 다음 살인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새벽 3시30분. 두 번째 살해 대상자로 지목된 한국 선원은 갑판장 강인호씨였다. 선장 유인에서 살해 그리고 사체유기 후 2차 살해 준비까지 30여 분 정도 걸린 셈이다.
 
 
 
도끼 날을 잡은 갑판장의 등을 찌르다
 
  殺意(살의)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던 탓일까. 조선족 선원들은 서둘러 崔선장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조타실에서 곧바로 2차 살해 준비에 들어간다. 全在千은 우선 1차 선장 살해 후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李春勝에게는 잠시 쉬고 있으라고 했다. 李春勝의 狂氣가 오히려 같은 편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李春勝은 崔선장을 죽이고 난 다음의 자신의 심리 상태를 검찰조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 생각으로는 처음 사람을 죽이고 나니까 갑자기 멍해지더니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전재천이는 저한테 말하기를 확실히 죽였으니까 나가서 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살인은 李春勝이 빠진 상태에서 진행된다. 조타실 안에는 崔錦浩가 도끼를 들고 조타실 우측 문 곁에 붙어 서 있었고 그 곁에 칼을 든 崔日奎가 서 있었다. 白忠范은 갑판장이 도망을 칠 것에 대비 船尾 갑판에 배치됐고, 조타실 우측 후미에는 朴君男이 매복했다.
 
  배치가 끝난 후 全在千은 갑판장의 침실로 갔다. 全在千은 잠든 갑판장을, 『선장이 조타실에서 부른다』며 깨웠다. 강인호 갑판장이 『알았다』며 일어서는 것을 보고 全在千은 먼저 조타실로 갔다. 조타실에 들어온 全在千은 『갑판장이 들어온다』고 조타실에 매복해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살해 준비를 하라는 말이었다.
 
  침실을 나온 강인호 갑판장은 중앙통로를 통하지 않고 우측 통로를 통해 조타실로 향했다. 조타실 우측 출입문으로 들어오기 위해 갑판장은 일곱 개의 철제 계단을 올라섰다. 문을 열었다. 문이 채 열리기 전에 어둠 속에서 갑판장의 머리를 향해 도끼 날이 날아왔다. 갑판장은 재빨리 문을 다시 닫았다. 도끼날이 미처 닫히지 못한 문틈에 끼었다. 갑판장은 몸으로 문이 더 이상 열리지 않도록 문을 밀면서 도끼의 날 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조타실 안에서는 崔錦浩가 도끼 자루 부분을 잡고 있었다.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全在千은 조타실 안에서 곁에 있던 崔日奎에게 손짓으로 중앙 출입문을 통해 나간 후 우측 통로로 가서 도끼날을 잡고 버티고 있는 강인호 갑판장을 칼로 찌르라고 지시했다. 崔日奎는 재빨리 중앙 통로를 빠져나가 갑판장의 등 뒤로 갔다. 몸으로 출입문이 열리지 못하도록 버티면서 도끼 날을 잡고 온 신경을 조타실 안에 집중시키고 있던 갑판장은 崔日奎가 뒤로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강인호 갑판장의 등 뒤에 선 崔日奎의 참치잡이용 칼이 갑판장의 엉덩이를 찔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갑판장이 잡고 있던 도끼날을 놓으며 맥없이 철제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문이 열리면서 崔錦浩가 도끼를 들고 나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도끼는 통로 밑으로 떨어진 갑판장의 목을 향해 내리 찍힌다. 어느새 조타실 우측 후미 부분에 있던 朴君男도 달려와 갑판장의 복부 부위에 칼을 꽂는다. 그리고 崔선장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갑판장의 사체를 태평양 한가운데로 내던진다.
 
  李仁錫씨는 『崔錦浩씨의 도끼를 피한 후 갑판장이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다면 사태가 더 이상 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갑판장은 1m80cm에 가까운 키에 몸무게가 130Kg이나 나가는 거구였다고 한다. 맨주먹이라면 두 세명은 상대할 수 있는 체력과 운동신경을 가졌기 때문에 일단 그 자리를 피한 후 불의의 습격만 당하지 않았다면 거꾸로 범인들을 제압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李씨의 말.
 
  『문제는 조선족 선원들이 집단적으로 船上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미처 생각을 못한 겁니다. 불만을 가진 한 두명이 그러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흉기만 빼앗으면 조타실 안에 있는 그 한 두명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 자리만 피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겁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조선족 범인들이 세 번째 대상자로 지목한 한국선원은 李仁錫씨였다. 다행히 조선족 선원들은 항해에 필요한 李씨는 살려두기로 한다. 다만 완전한 船上 장악을 위해서는 李씨를 자유롭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장과 갑판장은 지금 상어와 놀고 있다』
 
  새벽 4시. 조선족 선원들은 李仁錫씨를 결박해 구금하기로 하고 행동에 들어갔다. 선장과 갑판장을 죽이고 사체를 처리하는 데 한 시간 가량이 소요된 것이다.
 
  全在千은 朴君男 등 조선족 船上반란 가담자들이 모인 조타실에서 『다음은 1항사인데 1항사는 죽이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는 李씨의 침실로 갔다. 나머지 범인들은 조타실에서 대기하고 있고 全在千은 갑판장을 살해할 때 했던 방법대로 『선장이 조타실에서 찾는다』며 李씨를 조타실로 유인한다.
 
  처음에 李씨는 전날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곧바로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全在千이 재차 왔을 때 비로소 李씨는 일어날 수 있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李씨는 취침중이라도 급한 일이나 의논할 일이 있을 때 선장이 찾는 것은 간혹 있는 일이므로 아무 의심 없이 조타실로 향했다.
 
  우측 출입문을 열고 조타실로 들어섰다. 선장이 기다린다는 조타실은 너무 어두웠다. 불을 켜야겠다는 생각을 막 했을 때였다. 우악스런 팔이 그의 몸을 나꿔챘다. 누군가 목에 줄을 걸었다. 뿌리쳤다. 다시 목을 조였다. 숨막힘을 느낄 겨를도 없이 얼굴 위로 연달아 억센 주먹이 날아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손이 뒤로 꺾이며 줄에 묶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물체의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장과 갑판장은 지금 상어와 놀고 있다.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따르라』
 
  全在千의 음성이었다. 全은 李씨의 입에다 청테이프를 붙였다. 李씨는 선장과 갑판장이 상어와 놀고 있다는 全在千의 말에 그들이 이미 죽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船上반란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조선족 선원들은 결박한 李씨를 끌어다가 船首에 있는 음료수 창고에 가뒀다. 그곳에서 李씨는 오전 8시 30분 경까지 4시간 30분 동안 갇혀 있었다. 그 사이에 한국인 선원 7명을 죽인 「1차 죽음의 狂亂」은 계속됐고, 결박에서 풀려났을 때 페스카마호에는 그가 아는 한국 선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全씨는 탄원서에서 李仁錫씨 결박과 관련된 자신의 검찰진술을 번복하고 있다. 자신은 李씨에게 『선장과 갑판장이 상어와 놀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全씨의 탄원서 중 李씨 결박과 관련한 주장이다.
 
 < 같은 방법으로 중국인은 조타실에서 기다리고 나는 침실에 가서 1항사(李仁錫)를 깨웠습니다. 1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시 들어가 『빨리 일어나요. 선장이 부릅니다』 하였습니다. 나는 海圖實에서 엎드려 海圖 보는 척했습니다.잠깐 후 1항사는 나를 지나 조타실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뒤에서 문을 닫았습니다. 한 5분 가량 지난 후 조타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어둠 속에서 1항사를 눕혀놓고 손을 묶고 있었습니다. 1항사는 『사람 살려라』하며 고함쳤습니다. 백충범씨는 수건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이때 1항사가 『수건으로 막지 말고 테이프로 붙여라. 숨 좀 쉬게』하여 나는 테이프를 찾아 입에 붙였습니다.
 
  나는 『1항사! 우리를 원망하지 말라. 너희들을 원망하라. 우리가 오죽하면 부모 형제 자식 두고 이 망망한 바다에 나왔겠는가. 우리가 손이 닳도록 빌고 용서를 청했을 때 받아주었으면 너희들도 우리들도 다 살았잖아. 무엇 때문에 우리를 거지로 만들고 가족까지 못 살게 하나. 심지어 집에도 못 가게 경찰서까지…. 악한 놈들, 너희들의 죽음은 너희들이 만든 것이다. 1항사는 상하지 않을테니 마음을 놓고 잠시 선수 창고에 가 있어요』라고 말하며 나와 최일규, 박군남이 1항사를 데리고 음료수 창고에 가두었습니다. 『선장과 갑판장은 상어와 논다』는 말은 누구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소리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李씨는 『나는 분명히 선장과 갑판장이 상어와 놀고 있다는 전재천씨의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생존율 0%의 바다에 산 채로 던져
 
  같은 날 4시20분 경. 조선족 선원들은 세 번째의 살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대상은 기관사 박종승씨. 방법은 갑판장 살해시와 동일. 살해를 위한 조선족 선원들의 배치에는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조타실 안 대신 조타실 오른 쪽 앞으로 崔日奎, 崔錦浩, 朴君男이 숨어 있고, 李春勝은 죄측 통로에, 白忠范은 배의 오른쪽 끝머리 부분에 숨어 있었다.
 
  船尾 부분에 있는 기관실 당직자인 박종승씨를 全在千이 조타실 부근으로 유인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그는 식당에서 라면을 끓여 먹은 후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朴씨는 殺意를 전혀 못 느꼈는지 全在千을 보고는 『당직을 서고 있느냐』면서 앉으라고 권했다. 그 이전까지 全在千과 기관사 朴씨와의 관계는 당직을 서면 서로 음식을 가져다 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全在千은 당시의 심정을 「이제 곧 죽을 기관사를 보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탄원서에 적어놓고 있다. 朴씨 곁에 앉은 全在千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주며 『선장이 조타실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朴씨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全在千은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답하곤 조타실로 향했다.
 
  기관사도 곧바로 우측 통로를 따라 조타실로 왔다. 조타실에서 朴씨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본 全在千은 창문을 두드려 밖에 매복해 있는 조선족 선원들에게 朴씨가 오고 있음을 알렸다.
 
  조타실 우측 문 앞에 도착한 朴씨는 출입문을 잡아당겼다. 조선족 선원들이 조타실 바깥에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朴씨가 조타실 안으로 들어가면 살해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타실 안에 있던 全在千은 朴씨가 조타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여는 순간 朴씨를 발로 차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朴君男이 달려와 朴씨의 가슴을 찔렀다. 뒤이어 매복해 있던 다른 조선족 선원들도 달려들어 朴씨의 등, 엉덩이 부분 등을 찔렀다.
 
  이때 피해자는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조선족 선원들은 애원하는 朴씨를, 선장과 갑판장을 던진 그 자리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바다를 향해 던졌다. 선장과 갑판장을 살해하고 바다에 던질 때와 차이가 있다면 산 채로 던져졌다는 것이다.
 
  李仁錫씨는 『그 해상은 상어가 많아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해도 생존율은 0%에 가까운 곳』이라고 말했다.
 
  살인 기술은 빨리도 숙련됐다. 조선족 선원들의 네 번째 살인은 기관사 朴씨를 바다로 던져 살해한 지 20분 만에 시도된다. 이번의 대상은 조기장 김창열씨. 박종승씨를 살해할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족 선원들은 조타실 바깥에 매복을 했다. 全在千은 관성처럼 김창열씨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 습관처럼 『선장님이 조타실에서 찾으십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익숙한 몸놀림으로 조타실로 향했다. 金씨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별 의심 없이 조타실을 향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金씨는 조타실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우측 창문을 통해 조타실 안을 살폈다. 조타실 안을 살피던 金씨는 조타실 우측에서 매복을 하고 있던 崔日奎 등의 조선족 선원을 발견한다. 순간적으로 金씨는 배 後尾로 도망하기 위해 몸을 틀어 도망을 친다. 몇 걸음 안 가서 金씨는 崔日奎가 휘두른 칼에 왼쪽 갈비뼈 부근을 찔리면서 쓰러졌다. 범인들은 쓰러진 후 더 이상 칼질을 하지 않았다. 대신 네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살아 있는 金씨를, 박종승씨를 그랬던 것처럼 번쩍 들어올려 바다로 던졌다.
 
  그러나 金씨는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방현대(조업이나 통행시 안전을 위해 설치한 난간)를 붙잡고 매달렸다. 김창열씨는 방현대에 매달려 『이러면 안 돼 난 조기장이다, 난 조기장이다』라고 외치며 살려줄 것을 애원했다. 金씨의 애원에 대한 조선족 선원들의 대답은 들고 있던 칼로 방현대를 잡고 있는 金씨의 손등을 내려치고, 손가락을 젖히고 발로 차서 바닷물로 金씨를 떨어뜨리는 짓이었다. 네 번째의 살인은 그렇게 끝났다.
 
 
 
맹장염 걸린 19세 실습 선원도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다
 
  다섯 번째의 살인은 새벽 5시에 시작됐다. 대상은 조리장 서장주씨. 全在千은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 조리장을 조타실 쪽으로 유인했다. 서씨 역시 아무 의심 없이 조타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全在千이 발로 서씨의 배를 찼지만 빗나갔다. 위험을 직감한 서씨는 재빨리 船尾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서씨는 한국 선원들이 도망을 칠 것에 대비해 船尾에서 매복해 있던 白忠范에게 걸려 그가 휘두르는 쇠파이프를 맞고 쓰러졌다. 황망중에 서씨는 조선족 선원들에게 살려줄 것을 간청하지만 그 역시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여섯 번째로 살해당한 사람은 페스카마 15호 승선 선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기관장 김신일씨였다. 시작 시간은 5시20분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全在千은 역시 앞서와 같은 방법으로 기관장 金씨를 조타실 부근으로 유인했다. 全在千은 우측 문으로 들어오는 金씨의 복부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재빨리 일어난 金씨는 조리장 서씨가 그랬던 것처럼 船尾로 도망을 쳤다. 도망을 치던 金씨는 船尾부분에 채 가기도 전에 우측 통로에서 넘어진다. 조타실 부근에서 매복을 하고 있던 조선족 선원들은 넘어져 있는 金씨를 들어올려 역시 산 채로 바다에 던졌다. 칼이나 쇠파이프에 맞지 않아 놀란 것 빼고는 정신이 말짱했던 金씨가 『살려달라』는 애원을 했음은 물론이고, 그 애원을 조선족 선원들이 무시했음도 물론이다.
 
  이 여섯 번째의 죽음은 또 한 명의 한국인 희생자를 만든다. 金씨는 바다에 던져져 떠내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인도네시아 선원인 페리, 요크, 순다가 金기관장의 살해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살해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조선족 선원들이 알게 된 것이다.
 
  조선족 선원들은 예상치 못한 이 사태를 놓고 긴급히 모여 대책을 숙의했다. 그때 나온 해결책이 인도네시아 선원들도 한국인 선원을 살해토록 함으로써 공범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李仁錫씨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한국인 선원이 없었다. 그러나 항해를 하려면 李씨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李씨를 당장 죽일 수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한국인 선원이 한 명 더 있다』고 말했다.
 
  실습생인 최동호(당시 19세)군을 말하는 것이었다. 崔군은 원양어선 실습을 위해 동원212호에 승선했다가 맹장염 때문에 조선족 선원을 下船시키기 위해 사모아항으로 회항하는 페스카마호로 옮겨 탔다. 동원212호에서 페스카마호로 옮겨 탄 시간은 살인의 狂風이 몰아치기 직전인 2일 0시30분이었다. 선장 최기택씨가 죽기 불과 두 시간 반 전에 페스카마호에 승선했던 것이다.
 
  따사로운 남태평양의 햇볕이 페스카마호 船上 위로 내리 쬐기 시작하던 8월2일 오전 6시에 가장 불행했던 일곱 번째 희생자의 죽음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조선족 선원들은 먼저 살해장면을 목격한 인도네시아 선원 세 명을 배 우측 통로로 불러냈다. 조선족 선원들은 모두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같은 시간 全在千은 최동호군의 침실로 가서 『조타실에 주사를 맞으러 가자』고 깨운 다음 조선족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 3명이 있는 곳으로 崔군을 데려갔다. 그 장면을 본 崔군은 체념한 듯했다. 양손으로 방현대를 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네고(선원들이 쓰는 말로 물건 등을 바다에 투하시 사용한다고 함), 네고』라면서 崔군을 바다로 떨어뜨리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칼을 들고 위협하는 조선족들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겁을 잔뜩 먹은 인도네시아 선원 3명은 아무런 저항도 없고 말도 없는 崔군을 번쩍 들어올려 바다로 던졌다. 崔군을 바다로 던지는 일에 동원됐던 인도네시아 선원 순다는 검찰진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다에 떨어지기 전 실기사(최동호)는 두 주먹을 힘껏 쥐었고 막 떨어지기 직전에는 등을 핸드레일(방현대)에 기댄 상태에서 양손으로 핸드레일을 거머쥐고서 「아, 아」라는 말을 하였고 별다른 저항은 없었습니다』
 
 
 
2차 살인 狂風:냉동실에 4명을 감금한 뒤!
 
  崔군의 죽음을 끝으로 한국인 선원을 대상으로 한 페스카마 15호 船上에서의 1차 살인광풍은 끝났다. 조선족과 인도네시아 선원 등 4명을 대상으로 벌인 2차 살인 狂風의 준비는 같은 날 아침 7시부터 시작됐다.
 
  조선족들은 페스카마호에 계속 남아 조업에 참가하기로 한 조선족 崔萬奉씨와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를 위해 全在千이 船尾쪽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인도네시아인들을 깨워 창고에 가서 미끼를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나오지 않고 崔萬奉씨만 밖으로 나왔다. 全在千은 선수갑판으로 갔다.
 
  그곳에는 마침 인도네시아인 선원 루롭만, 로사디, 레타가 그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全在千은 자신을 따라 올라온 崔씨와 그들에게 미끼 50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全在千의 지시를 받은 崔씨와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미끼를 가져오기 위해 어창 준비실로 들어갔다.
 
  여기서 잠깐, 어창의 구조를 살펴보자. 조타실 하부에는 길이 8.4m, 넓이 2.83m 공간에 4개의 급냉실이 사방에 있으며 중앙에는 가로 1.13m, 세로 1.45m, 깊이 1m의 어창 준비실이 있고 사방 벽에는 냉동코일이 부착돼 있다. 어창은 곧 냉동창고인 셈이다. 출입문은 철문으로 돼 있다.
 
  조선족 선원들은 崔씨와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어창으로 들어가자 마자 문을 닫은 다음 잠가 버렸다. 그런 다음 잠금 장치가 혹시 열릴까 봐 잠금 장치를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평상시 어창 안의 온도가 영하 45도 정도라고 생각하고 하루만 지나면 어창에 갇힌 선원들이 동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3일 밤 8시 경 全在千은 어창에 갇힌 선원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朴君男을 데리고 창고 앞으로 가서 저울추로 문을 두드려 보았다. 안에서도 똑같은 신호가 왔다. 살아 있는 것이다. 냉동기가 가동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 후인 5일 저녁 8시에 조선족들은 몽둥이를 들고 어창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1번 급냉실에서 죽창과 흉기가 튀어나오며 조선족 선원들을 공격했다. 조선족 선원들은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문을 잠갔다.
 
  6일 저녁에도 全在千은 조선족 두 명을 데리고 어창을 찾았다. 어창을 조금 열고 내부 동태를 살필 때 崔씨가 『형님 살려 주십시오. 인도네시아인들을 죽이라면 죽이고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고 외쳤다. 全在千은 『알았다』며 『지금은 밤이니까 날이 새면 풀어주겠다』고 말하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조선족들은 다음날인 7일 저녁 8시 경에 몽둥이를 들고 어창으로 갔다. 全在千이 문을 열고 들어가 崔씨를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밖으로 나온 崔씨는 밖에서 기다리던 조선족 선원들의 몽둥이에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崔씨는 곧바로 바다에 버려졌다. 다음으로는 루롭만이 崔씨와 똑같은 방법으로 바다에 버려졌다. 뒤이어 나온 로사디와 레타에게는 몽둥이질이 면제됐다. 너무 오래 굶어 이미 힘이 없었기 때문에 때리지 않고도 손쉽게 바다로 던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 2차에 걸친 狂亂의 살인극이 끝난 것이다.
 
 
 
「죽음의 배」에서 22일 간 계속
 
  조선족 선원들은 한국 선원 7명을 살해하고 崔萬奉씨와 인도네시아 선원 3명을 어창에 가둔 후 대항할 세력을 일단 제거했다고 판단하고 오전 8시30분경 일등 항해사 李仁錫씨를 선수 창고에서 조타실로 끌고와 결박을 풀어주었다. 나머지 인도네시아 선원 6명도 조타실로 불러 조선족 선원들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처음에 이들은 李씨에게 한국으로 밀항하겠다며 한국으로의 항해를 지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족 선원들은 마음을 바꿔 일본으로 뱃머리를 향하게 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페스카마호는 외관상으로는 평온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선족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 선원들과 조선족 선원들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끊이지 않았다. 李仁錫씨 역시 조선족 선원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건 은폐를 위해 결국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처음 며칠은 아랫배가 팽팽해질 정도로 오줌이 마려운데도 막상 오줌을 눌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지를 않으니까요. 며칠 간을 그랬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던 거죠』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생존에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는 없었다. 늘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 말은 안 통하지만 인도네시아 선원들도 李씨의 편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李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도네시아 선원 아삿에게 『스탠바이』라고 말하며 언제든 준비를 조선족 선원을 제압할 하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船上반란이 일어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단 한 번의 기회도 오지 않았다. 조선족 선원들은 일본 밀항에 대비해 이미 4인용과 2인용 뗏목 2척을 제작해놓고 있었다. 조선족 선원들이 6명만 탈 수 있게 뗏목을 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李씨와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李씨를 돕고 있었다. 배의 연료통은 좌우로 나뉘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한쪽의 연료만 계속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쪽이 연료만 소비할 때 짐으로라도 무게 균형을 맞춰주지 않으면 배는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李씨는 살아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船上반란이 일어난 지 22일 째인 8월24일 오전 9시 경. 李씨는 배를 급회전시켰다. 짐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李씨의 의도는 성공을 했다. 배가 우측으로 10도 가량 기울었기 때문이다. 배가 기울자 全在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인도네시아와 조선족 선원 전부에게 어창에 들어가 짐을 좌측으로 옮기라고 시켰다.
 
 
 
살인범들을 거꾸로 냉동실에 가두다
 
  그 순간 李씨는 인도네시아 선원 아삿에게 어창에서 빨리 빠져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삿은 李씨의 뜻을 알아듣고 어창에 들어가 있는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인도네시아 말로 『빨리 나오라』고 했다. 조선족 선원들이 눈치채기 전 어창을 빠져나온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나오자마자 어창의 문을 잠갔다.
 
  조선족 선원들이 뒤늦게 어창의 문이 잠긴 사실을 알아채고 소리를 치자 조타실에 있던 全在千이 창고로 달려갔으나 李씨가 뒤에서 몸을 잡고, 달려온 아삿이 全在千의 다리를 잡아 결박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全在千은 조타실에서 묶인 채, 나머지 조선족 선원들은 어창에 갇힌 채 다음날 아침 일본 해상 보안청의 순시선을 맞는다.
 
  李仁錫씨의 기지가 船上반란이라는 무시무시한 사건을 제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아삿은 검찰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도 1항사가 저에게 영어로 스탠바이라는 말을 하여 1항사가 중국 선원들을 제압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저희들도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페스카마호 船上반란 사건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존에의 꿈을 놓지 않고 준비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피살자를 생각하며 救命운동 벌여야
 
  조선족 범인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일 때도 물론이지만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이후에도 중국內 조선족들은 한국 정부 등 관계 요로에 지속적으로 범인들의 감형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냈다. 이들은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후에도 사형수 全씨에 대한 감형 요청을 잇따라 내고 있다.
 
  全씨가 근무하던 중국 길림성 휘남현 조선족 중학교 교직원, 길림성 휘남현 로인협회 등 과거 全씨와 함게 일하던 동료들은 물론이고 조선족 사회 단체들까지 全씨의 감형을 한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요청은 船上반란 사건은 한국 선원들의 같은 민족인 조선족들에 대한 모욕적인 처우 때문에 일어난 일이므로 같은 민족의 입장에서 아량을 베풀어달라는 것이다.
 
  조선족 구명을 위한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부산외국인노동자 인권모임(대표 鄭貴順·정귀순) 등 부산 지역의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全씨 등 조선족 범인들의 중국 현지 가족에 대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한편, 법무부 장관 및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全씨의 감형을 촉구하는 탄원서에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산참여연대, 민주개혁국민연합 중앙본부, 부산지방변호사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특히 사형선고를 받은 全씨의 구명을 위해서는 1998년 6월에 「페스카마호 사건 사형수 전재천을 위한 모임」이 결성돼 全씨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형수 구명운동으로 유명한 朴三中 스님도 全씨 구명에 나서고 있다.
 
  2000년 7월에 8·15 광복절 사면시 全씨의 무기수로의 감형을 바라고 각 정당 대표자 및 주무 당국에 보낸 탄원서에서 全씨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호소했다.
 
 < …그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칠순 노모의 병원비, 두 딸의 교육비, 아들아이의 교통사고로 이어진 불행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불가피하게 선택했던 한국 어선에 승선한 것이 그의 고생을 덜어주기는커녕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고 이제 영영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형수의 신세가 되리라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페스카마호 船上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고질적인 船上폭력의 극단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며, 가난한 나라에서 한국인 선원을 대신해 들어온 외국인 선원들에 대한 무인권의 단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산외국인노동자인권모임의 鄭貴順 대표는 『페스카마호 船上반란 사건은 죽인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피해자인 사건』이라면서 『이 사건으로 숨진 유족들의 아픔도 이해하기 위해 애써가면서 전재천씨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全在千씨 부인
 
  金春玉씨 인터뷰 『아내로서 남편이 사형만이라도 면했으면 하는 바람을 버리지 못합니다』

 
  金春玉(김춘옥·47)씨는 남편 全在千씨를 면회하고 있는 동안 부산 구치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全씨 면회를 마치고 나오자 金씨는 남편의 건강을 물었다. 三中스님이 아주 건강하게 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자 그녀는 금방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金씨는 1997년 11월 남편의 면회를 왔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불법체류 중이다. 때문에 사형수인 남편이 있는 구치소를 눈앞에 두고도 면회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법체류 중인 그녀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식당에서의 허드렛일뿐이다. 월급을 「90만원이나 주는 식당」에서 야간 일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90만원이 꽤 커보이는 것 같다. 「90만원밖에」가 아니라 「90만원이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에게 남편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가를 물었다.
 
  『남편이 지은 죄를 봐서는 감히 살려달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로서 사형만이라도 면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을 저로서도 어쩌질 못하겠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全在千씨의 구속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서요.
 
  『남편이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나쁘신 어머니가 충격으로 쓰러질까봐서죠』
 
  면회를 할 때 全씨는 짧은 면회시간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어머니가 자꾸 꿈에 나타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든다』는 말을 수차례 했다.
 
  ―유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무슨 면목으로… 너무너무 죄스러워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미안하고 죄송하고…한국에 올 때는 사실 그분들을 찾아 뵙고 사죄를 드리려 했는데 그렇게 못했어요』
 
  ―고향에서는 한국 선원들의 모멸적인 대우가 선상반란 사건의 원인이라고 보는 분위기인 것으로 아는데 부인께서도 그런 생각이십니까.
 
  『조선족 사회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도 인간인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인 것이 아닌 가끔 드는 생각일 뿐입니다』
 
  ―조선족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남편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아내로서 희망은 가져보려고 애쓰지요. 하지만…』
 
  사형수의 아내는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남편의 구명 다음으로 그녀가 바라는 것은 齒牙(치아)가 잘못된 둘째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 치료비 마련은 全씨가 배를 탄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制壓한 영웅 李仁錫씨
 
  『삶과 생존에의 의지를 꺾지 않은 것이 선상반란 制壓의 힘이었다』

 
  『사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말한다면 용서를 해줄 때도 된 것 같습니다. 빨리 잊어야 하니까요』
 
  사건 당시 1등 항해사로 한국 선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李仁錫씨는 그런 말로 입을 열었다.
 
  변산반도에서 격포와 위도 간을 운행하는 화물선 선장으로 일하고 있는 李씨는 『페스카마호 사건 이후로 원양어선은 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원양어선은 안 탈 겁니까.
 
  『나 자신도 겁이 나기도 하지만 주위에서 워낙 반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충격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사고 후 6개월 동안 정신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사고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거의 다 나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자도 만나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아마 작년 연말에만 연락했어도 기자를 안 만났을 겁니다. 2001년을 맞는 것을 계기로 훌훌 털어버릴 결심을 작년 연말에 세웠다는 뜻이죠』
 
  ―선상반란을 제압하기 전에 생존 인도네시아 선원들과는 「스탠바이」 등의 영어와 몸짓 눈짓으로 사전에 의사를 교환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사고가 난 후 사나흘 후부터 인도네시아 선원들과 의사를 교환했습니다. 다행이었던 것은 조선족 선원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경우는 영어 한 두 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조선족 선원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상반란 제압을 얘기하면서 李씨는 「天佑神助(천우신조)」라는 말을 거듭 썼다. 좌우로 나뉘어 있는 연료통에서는 항해중에 골고루 연료가 공급되게 마련인데 한 쪽 통의 연료만 공급된 것도 그렇고, 함께 짐을 옮기기 위해 어창에 갔던 선원 가운데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빠져나올 때까지 조선족 선원들이 눈치를 못 챈 것도 天佑神助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삶과 생존에 대한 의지를 끝까지 꺾지 않았던 것이 무엇보다 船上반란을 제압할 수 있는 큰 힘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흔 살이 넘으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펴낼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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