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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사로 되던 날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2월19일 08시39분    조회: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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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군 한다.

1976년 10월,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았다. 병원의 규정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일년간의 실습과 단독야간근무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의사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실습생활을 시작한 지 열달 만에 우리 병원 기술부문에서 최고권위자이고 나의 지도교수인 양계란(杨桂兰)선생님이 나에게 “혼자 한번 야간당직을 서보는 것이 어떠하냐?”고 의향을 물어왔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당시 우리 병원에는 전문 간병을 진료하는 ‘간염과’와 잡병을 진료하는 ‘전염과’ 2개 과가 있었는데 의사들은 일년에 한번씩 륜번으로 교대했다. 그리고 매개 과마다 야간근무 시에는 12시를 전후하여 각기 간호사 한명씩 두었다.

내가 처음 야간당직을 서던 그 날은 1977년 8월 16일(화요일)이였다. 그 날 저녁 4시 반에 주간당직의사와 교대한 나는 먼저 병원 각 병실마다 한바퀴 돌아보고는 별로 처리할 사무가 보이지 않자 의사사무실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나를 믿어주고 밤당직을 시킨데 대해 흥분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으나 한면으로는 ‘내가 잘해낼 수 있을가?’ 하는 근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런 나의 심사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간호사들은 나 보고 “남선생님, 괜찮아요. 병 보이러 오는 사람들은 저녁 6, 7시 전으로 와서 진료받고는 곧 돌아가요.” “그래요, 남선생님. 저녁 9시까지만 잘 지켜내면 되니 절대 근심하지 마세요 .” 이어 9시가 다가오자 한 간호사가 말했다. “남선생님, 오늘은 무사할 것 같으니 어서 당직실로 가서 휴식하세요. 만약 환자가 찾게 되면 곧 부를게요.”

그런데 세상의 일이란 참 이상하고도 묘했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가겠지…’ 하며 벽시계를 주시하고 있는데 저녁 9시 경에 목단강시 시립병원에서 우리 병원으로 5살 난 어린 남환자를 전송해왔다. 환자 상황은 매우 위중했다. 환자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저녁식사 후 어린애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울더니 대변 차수가 점점 잦아지고 처음에는 희멀건 거품이던 분변에 후에는 가끔 피까지 섞여나왔다고 했다.

나는 급히 한 젊은 간호사에게 어린 환자의 피와 대소변 견본을 채취하여 화험실에 보내게 했다. 입원 당시 어린 환자는 흐리멍텅한 정신에 기운이 없었고 불러도 응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체온이 41도를 넘었고 심장박동수가 점차 빨라지면서 호흡절주가 균일하지 못하고 정서가 아주 불안했다. 나는 급성세균성리질 ‘중독형’으로 진단하고 신속히 5%포도당용액에다 겐토미친(庆大霉素)을 6시간 간격으로 정맥에 점적주입시켰다. 그리고 탈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0.85% 루화나트륨(氯化钠)용액을 천천히 점적주입시키고 스트레프토미친(链霉素) 근육주사도 놓아주었다. 이 때 화험결과도 나왔는데 적혀있는 적혈구수와 농세포수를 보고 나는 나의 진단이 정확했음을 재차 확인했다.

매년 무더운 7, 8월이면 세균성 리질에 걸리는 환자들이 많았기에 약국에 준비해두었던 얼음주머니는 야간에는 한개도 남지 않았다. ‘약국에 얼음주머니가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하지? 만약에 어린 환자가 고열로 경련이 일어나거나 호흡곤난, 혼미상태… 아, 아니, 아니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초조히 ‘얼음… 얼음… 어디에서 구해야지…’ 하는데 문뜩 머리 한구석에 얼음과자가 떠올랐다. ‘옳지, 얼음과자! 바로 이것이였구나!’ 나는 급히 부근 소매점으로 뛰여가 얼음과자 20개를 사왔다. 손잡이의 막대기 부분을 끊어버리고 비닐봉지에 넣은 후 수건으로 감싸서 어린 환자의 량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4곳에 각각 5개씩 갈라 넣어주었다. 그리고 머리에다는 차거운 물수건을 올려놓고 50%알콜로 마찰욕을 시켜주었다. 또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환자에게 클로르프로마진(氯丙嗪)과 페네르간(异丙嗪)을 번갈아가며 근육주사하여 진정시켰다.

환자의 생명은 분초를 다툰다. 이 방면에 나는 뼈아픈 기억이 있다. 나의 부모는 목단강시 조선족국영식당 종업원이였다. 아버지는 1968년에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1972년, 어머니가 급성뇌출혈이 와서 우리가 시립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에는 오후 4시 반경, 주간과 야간 교대시간이였다. 운명이 조석에 달린 우리 어머니를 그들은 서로 떠밀면서 1시간 넘게 방치하였기에 치료의 황금시기를 놓쳐버려 어머니는 50세의 젊은 나이에 우리 4남매를 고아로 남겨놓고 눈을 감으셨다. 그 당시 10살 남짓한 나어린 세 동생이 어머님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목놓아 울던 그 처참한 모습을 나는 지금도 눈앞에 선히 보는 것만 같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그 이듬해 아무런 빽도 없고 의지가지 없는 조선족 고아인 나는1000여명이나 되는 목단강국영인쇄공장에서 오직 한명 뿐인 대학생 명액에 추천받아 어머님의 유언대로 의사가 되였다.

‘이 어린 환자에게는 절대로 나의 5년 전의 그 비참했던 장면을 재생시켜서는 안된다.’ 나는 어떻게 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쟁취하여 꼭 이 어린 환자의 생명을 구해내고야 말리라고 다짐했다. 간호사 4명을 두 팀으로 나누어 4시간씩 교대로 잠간씩 눈을 붙이게 하고 번갈아가며 정신을 가다듬고 어린 환자의 곁을 지키게 했으며 수시로 맥박과 체온, 혈압을 체크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8시간에 걸친 의사와 간호사들의 적절한 협조와 노력으로 새벽 5시에 어린 환자의 의식상태는 많이 맑아지고 병증세도 차츰 호전을 가져왔다. 사선에서 벗어난 어린 환자를 보는 우리 모두의 얼굴에는 성공의 희열이 감돌았고 천근 짐을 부리운듯 전신이 홀가분해났다.

어린 환자의 부모들은 우리들에게 “선생님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라고 연신 진심에서 우러나는 인사와 찬사를 하면서 우리들의 아침간식까지 푸짐히 준비해주었다.

그러나 환자의 부모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자식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가 처음으로 야간당직을 선, 아직 정식 의사자격도 못 얻은 애숭이 실습의사라는 것을! 만약 실지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 햇내기 의사에게 자기의 귀중한 아들의 생명을 실습용으로 내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튿날, 어린 환자의 부모는 감사편지를 병원에 보내왔으며 급기야 나의 이름과 사적은 온 병원에 퍼졌고 병원 원장도 만족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서는 밤당직을 뜬눈으로 지새운 나는 몹시 피로했지만 성공의 희열은 피로를 가시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번의 당직을 통하여 의사로서의 과단성과 책임성의 중요함, 훌륭한 의사로 되려면 풍부한 의학지식과 진료기술이 있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환자에게는 시간이 곧 생명이다, 무슨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된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되였으며 앞으로의 의사생애에 더욱더 충직할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다.

어언 의사 직업에 종사한 지도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네번은 변했을 이 기나긴 의사생애에 나는 의사의 량심을 걸고서 수많은 환자들의 병을 정성껏 진료하였고 완쾌시켰으며 항상 모든 면에서 1등의 목표를 향해 분투해왔다. 그리고 항상 ‘나는 자랑찬 조선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그 영예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전국, 성, 시 ‘의학과학기술학술회의’에 수차례 참석했고 각종 간행물과 서적에 적지 않은 론문을 발표했다. 더 나아가 우리 병원 한 방면에서의 권위자로 일인자로 자리매김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 주년 경축’ 병원계통 응모활동에서 단 한명 뿐인 1등상의 영예를 수상했고 의학연구생으로, 모범 공산당원으로 성장했다.

내가 진정한 의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해준 그 첫날 밤당직을 나는 오늘날까지도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날 야간을 함께 하였던 고마운 간호사들도 잊지 않고 자주 문안을 전하군 한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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