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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새 집을 짓던 나날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0월4일 19시38분    조회: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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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을 짓던 나날들
김삼철


요지음 나는 103평방메터의 화려한 아빠트에서 혼자 생활하느라니 가난했던 1970년대 연변과는 수천리 떨어진 길림성 동북쪽 맨 끝자락의 길림성 유수현 연화조선족향에서 근무할 때 내 손으로 초가집을 짓던 어려운 나날들이 추억의 쪽문을 열고 밀려나온다.
 
1970년 가을 나는 지인의 소개로 ‘풍각쟁이’를 요구한다는 연화조선족향에 가서 시험을 보고 그곳에서 문예선전사업을 하게 되였다. 이 고장은 망망한 초원인 데 땅이 많아 알곡이 흔하고 인심 또한 아주 후한 곳이였다. 호수가 많아 물고기도 흔했다. 그 해 가을에 이사한 나는 1년 남짓이 촌에서 해결해준 30여평방메터 되는 작은 초가집 한칸에서 살았다. 집이 너무 헐망하고 비좁기도 하고 그리고 계속 공짜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새해에는 꼭 조선족식 새 집을 지으리라 작심하고 일찍부터 서둘렀다.
 
식구는 넷이였는데 안해는 소학교 교원이였고 큰딸은 여섯살, 작은딸은 세살, 단촐한 식구였지만 아이들이란 오이 자라듯 금방이라 일찌감치 칸이 다른 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 살고 있는 집은 단칸방이라 부억에는 알곡, 채소까지 저비하다 나니 집안은 다니기 조차 불편하였고 쥐가 욱실거려 집안 구석구석이 쥐들이 파놓은 흙들로 꼴불견이였다. 아무튼 집은 제집도 아니거니와 너무 비좁고 불편하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제집만은 초가집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와 안해의 결론이였다. 그래서 나는 벌써 그 전해 늦가을 벌판의 새초밭에 3,000여장의 떼장도 떼여놓은 터였다. 이곳에서는 집을 지을 때면 모두 떼장으로 벽을 쌓는다. 길이 30여센치메터, 너비 20여센치메터, 높이 10여센치메터의 떼장은 촘촘한 ‘새초’ 뿌리로 엉켜져 가볍고도 보온능력이 강하여 연변보다 겨울 기온이 3, 4도 가량 더 추운 이곳에서는 방한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였다. 그런데 유수현은 광활한 평원지대로서 삼림 원천이 없어 집 재료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래서 나는 목재 원천이 풍부한 연변에 나가 집 재료를 구해오리라 계획하고 이미 연변에서 근무하고 있는 장인을 통해 목재 운송과 관련된 수속을 끝마쳤다. 3월초순이 되자 나는 연변의 심산골을 누비며 골안에 방치되여있는 헌집들을 찾아다녔는데 결국 연길현의 약수동 골안에서 집 한채, 안도현의 유민골안에서 집 한채를 사서 허물어서는 그 재료를 화물차를 통해 '안쪽'이라고 불리는 유수현 연화향 즉 내가 사는 곳으로 부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왕년에 4월 중순이면 해동하던 라림강이 그 해 봄에는 일찍부터 날씨가 따스해지더니 라림강 얼음이 풀렸던 것이다. 배음하 기차역으로 가자면 우리 곳에서는 라림강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너기 힘들었다. 라림강은 길림성의 맨 동북 흑룡강성과의 경계선에 있는데 송화강의 상류이다. 물류량은 연변 해란강의 몇십배 되며 강수면 거리는 150메터 잘 된다. 물심은 보통 1메터 잘 되는데 제일 깊은 곳은 2메터도 넘는다. 그런데 강 얼음 웃층이 풀려서 얼음 성에가 강물을 타고 떠내렸는데 다행히도 그 밑에는 아직 채 풀리지 않은 두꺼운 얼음층이 받쳐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만일의 경우 밑층 얼음이 꺼져 사고가 발생할 우려는 있었다. 모두 근심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소몰이 군들은 고무 옷으로 전신무장 하였고 나도 고무 옷을 입고 먼저 차대 앞에서 한자깊이 잘되는 강물에서 강바닥 얼음층을 더듬으며 수레 길을 안내하였다. 좀 있으니 차디찬 얼음물에 솜옷을 입은 아래다리가 얼어들며 점점 지각을 잃어가는듯 하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마지막까지 수레 길을 안내했다. 집 재료를 실은 수레들이 모두 무사히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강 건너 쪽에서는 생산대에서 파견한 일군들이 싣고 온 벼짚으로 크나큰 우등불을 피워놓고 건너가는 수레군들의 몸을 덮혀주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걱정하던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마지막 소수레가 지나는 데 얼음이 꺼지며 강물에 빠졌다. 모두들 달려와서 짐을 부리우고 벼짚을 싣고 온 수레에 짐을 옮겨싣고 하며 소와 수레를 구출하였다. 다행히 소나 사람이나 수레도 별일 없었다. 이렇게 집 재료를 실은 소수레의 도강작전은 순조롭게 끝났다.
 
집 재료를 구경하러 마을의 숱한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모두 집 재료가 아주 좋다고 부러워하였다. 안해도 집 재료를 보고 좋아하였다. 이튿날부터 나는 집 짓기 공정을 시작하였다. 생산대에서 떼여준 집터에 흙을 실어들여 돋구고 기둥을 세울 곳마다 면이 반듯한 주추돌을 잘 받쳐놓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을에 있는 서목수는 조선족집을 지을 줄 모른다고 했다. 그 곳은 대부분 한족 집 식으로 집을 지었고 조선족 초가집은 얼마 안되였다. 그래서 나는 목수한테 문틀과 문만 만들게 하고 기타는 내가 도끼를 차고 집짓기를 시작하였다. 목수가 아닌 내가 집을 짓자니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러나 나는 제 힘으로 집을 지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나는 25세 때 헐망한 맏형님의 초가집을 허물어 다시 지은 경험이 있어 파악은 있었다.
 
톱과 도끼로 대들보를 짜고 기둥감을 만들어 규격에 맞춰 촘촘히 세우고 그 우에 빙 둘러 ‘도리목’을 앉히고 두가지 대들보를 올리고 연목을 걸었다. 일주일 간에 초가집 체대가 모두 세워졌다. 그리고 이틀간에 마을 청년들이 와서 ‘떼장’ 벽을 쌓아놓으니 집 외모가 기본상 다 되였다. 거기에 서목수가 출입구와 창문틀을 세워놓으니 그럴듯하였다. 이제 벽을 바르고 ‘즌새’ 만 올리면 집은 다 되는 셈이다. 벽 바르기는 언녕부터 안해가 자진하여 나선터라 공일을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공일을 맞아 아침부터 젊은 청년 두분을 데려다 벽을 바를 아시벌 흙을 실어다 이기기 시작하였다. ‘벼짚적심’도 알맞게 썰어넣으니 진흙의 풀기가 대단하였다. 기다리던 공일날이 당도하였다. 나와 안해는 일찍 아침밥을 먹고 벽 바르기를 시작하였다. 어제 이겨놓은 찰흙은 잘 퍼져 아시벌 흙질에는 제격이였다. 때마침 벽을 바르는 마을 청년 두분도 왔다. 안해는 내가 셍기는 흙을 흙손에 받는 족족 그대로 벽에 바르는 데 내가 미처 흙을 셍기기 바빴다. 이것을 지켜보는 마을 청년들은 일은 하지 않고 구경하다 칭찬에 열을 올리였다. “야∼재간이 대단하다. 녀자가 저렇게 흙칼 질 잘하는 건 처음 본다. 팔맥도 참 좋네” 하며 서로 입방아를 찧었다. 안해의 집은 농촌에 있었는데 장인이 현정부에서 공작하며 수리현장 지도를 다니다 나니 한달에 한번 혹은 몇달에 한번씩 집으로 오게 돼서 집의 흙질은 안해가 전담하였다. 거기에 아버지가 어릴 때 딸애한테 인삼을 먹여서인지는 몰라도 팔맥이 좋아 학교 남자선생님들과 팔씨름을 하면 안해를 이기는 선생님이 없어 소문난 녀자였다. 그래서인지 흙칼 질에는 웬간한 남자들이 어림도 없었다. 한시간 푼 벽을 발랐는데 발라놓은 벽이 벌써 3분의 1은 바른 것 같았다. 마을 청년들도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흙칼 질 하지만 안해와는 비교가 안되였다. 나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비오듯 하는 데 안해는 땀은커녕 힘들다는 내색도 없었다. 이렇게 아시벌 흙질은 안해의 뛰여난 솜씨와 마을 청년들의 도움으로 50여평방메터 되는 초가집 흙질이 하루 일찍 끝났다.
 
그런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마을 청년들이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중심소학교의 임선생님이 흙칼 질 솜씨가 대단하다.” 는 소문이 전 향에 알려져 향내의 숱한 남성 미쟁이(흙칼 질 하는 사람)들이 련이어 집 짓는 현장으로 찾아와 문의하였다. 나는 다음번의 두벌 흙질 날자를 알려주며 “보겠으면 그 때 오라”고 했다.
 
그날은 안해가 학교에서 청가를 맡았다. 흙도 전날에 모래를 살짝 섞고 ‘적심’ 도 보드라운 것으로 맞춤하게 넣어 두벌 흙질에 알맞게 이기였다. 드디여 두벌 흙질이 시작되였다. 나와 안해는 마을 일군들이 오기 전에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였다. 좀 있으니 전번에 아시벌 흙질할 때 왔던 청년 두분이 왔다. 두 청년은 일은 하지 않고 또 한참 안해의 흙칼 솜씨를 구경하였다. 흙칼로 흙을 엿가락처럼 늘구어 벽에 부치는 솜씨를 보고 청년들은 찬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임선생님은 학생들만 잘 배워주는가 하였더니 흙칼 질도 진짜 잘합니다. 대단합니다” 라고 하며 칭찬했다. 오전 아홉시가 되니 향내의 이름난 미쟁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은 가까이에 빙 둘러서서 안해의 흙칼 솜씨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안해는 신이 나서 재간을 피워댔다. ‘흙손’ 에 흙을 담아 하늘 반공중까지 늘구었다 벽에 붙이는 솜씨가 마치 엿가락을 가지고 재간 피우는 마술쟁이 같아 정말 볼만하였다. 흙을 한발씩 늘궈서 벽에 붙이다가도 흙칼이 번뜩하면 금방 붙인 흙이 반듯하게 윤기를 내는데 사방에서 박수소리가 울려터졌다. “임선생님의 흙칼 솜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백문 불여일견’ 이라고 오늘 와보니 진정 감탄합니다. 녀자가 이렇게 흙칼 질을 잘하는 것을 처음 봅니다. 우리 남자들도 두손 들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고 찬탄했다. 이렇게 우리 집 새 집짓기는 안해의 흙칼 솜씨로 전 향에 이름을 날리며 일사천리로 진척되였다. 지붕에 ‘즌새’ 를 올리고 이영까지 예니 초가삼간은 멋지게 변하여가고 있었다. 5월초순의 날씨는 세찬 바람이 자주 불어 초가집 짓기에는 제격이였다. 세벌 벽을 다 바르고 온돌을 놓고 문까지 달고 하늘색 뼁끼칠까지 하니 나의 집은 온 마을에서 1등 집으로 되였으며 여러분들의 부러움 속에서 새 집들이를 하게 되였다.
 
새 집들이에는 온 마을 분들과 대대 및 향정부, 생산대 간부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개 두마리에 닭도 10여마리 잡고 여러가지 채소에 술과 맥주를 동반한 그럴듯한 연회를 베풀었다. 새 집 세칸에는 축하 하러온 마을 분들로 차고 넘쳤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술잔마다 술을 붓고 “마을 여러분들의 신세에 새 집을 짓게 된 것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건배를 제기하자 장내는 우뢰와 같은 소리로 “건배!” 라고 웨치며 모두 술잔을 비웠다.
 
마을 분들은 자기 힘으로 새 집을 지은 우리 부부간을 높이 치하하며 안해에 대한 칭찬도 자자했다. 장내는 남녀로소 모두 주흥이 도도해지고 노래와 춤판이 벌어졌다. 저녁까지 이어진 술판은 점점 흥을 돋구었다. 나도 손풍금을 타며 반주에 열을 올리였다. 춤 재간이 뛰여난 안해가 독무를 추자 장내는 새 집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는데 그 풍경이 정말 가관이였다. 잔등에 물 바가지를 밀어놓고 ‘곰새춤’ 을 추는이가 있는가 하면 수절통에 수절을 넣고 내흔들며 음악 절주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 울림이 좋은 소래를 두드리며 춤을 추는 사람, 장단과 새장구를 치는 사람, 우리 집 새 집들이는 무연한 연화벌에 행복의 메아리를 전달하며 고조에 올랐다. 오락회는 새벽 녘에야 끝났다.
 
잠이 많은 어린 두 딸은 그런 복새판에서도 한구석에서 달콤히 잠자고 있었다. 주방에 널려있는 그릇들과 집안을 정리하고 나니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오더니 붉은 노을이 퍼지며 아침해가 두둥실 솟아오르고 있었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안해와 같이 밖에 나섰다. 뜨락에 있는 비닐하우스 온실에는 푸른 벼모가 이슬을 머금고 아침해살에 기지개를 켜며 우썩우썩 자라는 듯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해살은 새로 지은 우리 집을 조명이라도 하는 듯 밝게 비추었고 새 집은 더없이 아담하고 아름다왔다. 이 집이 우리 부부 자체의 힘으로 지었다고 생각하니 우리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안해의 손을 잡고 “여보,출근하면서 집 짓느라 숱한 고생을 했소, 고맙소.”라고 하니 안해는 “아니, 나보다 당신이 몇십배 더 고생하였지요. 당신은 정말 훌륭한 나의 남편이요. 나는 정말 행복해요.”라고 하며 나의 손을 굳게 잡았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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