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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컵] 족보의 종착역은 어디?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8월7일 08시29분    조회: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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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종착역은 어디?
첨서 
 
나는 어릴 적 큰아버지가 왜 족보란 물건을 보배인양 숨겨놓고 우리한테 보이지 않았는지 지금껏 알지 못하고 있다. 하긴 큰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어느덧 25년이 지났고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23년 철을 잡으니 어데 가서 물을 데도 없다. 간혹 있다 해도 아리숭한 추측이거나 짐작에 그칠 뿐이여서 애매하기 그지없다. 
 
실상 지난 세기 70년대초에 소학교라고 이름 지은 학교에 입학하기는 했음에도 모든 걸 혁명적이고 선진적인 사상, 의식, 관념으로 도배하던 세월이였던 만큼 이름만 들어도 케케묵은 족보란 걸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3학년 때인가, 방학이 되여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그 땐 아득히 멀다 할 수 있는 통화로 놀러 갔을 때 맏형이 아버지와 무심결에 주고받는 한담 속에서 처음으로 족보란 걸 귀동냥으로 들은 적 있다. 맏형 보고 족보란 게 무언가 물었더니 “아, 그러고 보니 큰아버지가 얘들한테 족보를 보이지 않았군요, 아무튼 큰아버지 무섭긴 무섭습니다. 그게 뭐 보물이라고 그렇게 감추는지…”라고 하더니 “그런 옛날 책이 있어, 말하자면 우리 가문의 어른들을 하나하나 적어놓은 책 말이야. ‘문화대혁명’ 때는 그걸 몽땅 걷어내 불태워버렸는데 큰아버지가 그걸 용하게 지켜냈더라. 먼저번에 집에 갔을 때 꺼내는 걸 보니 오래돼서 그렇지 멀쩡하더라. 언제인가 큰아버지한테 한번 보자고 해라.”하고 슬쩍 알려주었다. 
 
인간이란 하찮은 것도 궁금증만 부풀려주면 더구나 알고 싶어 감질나 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맏형네 집에서 돌아온 후 한마을 한집 건너에 있는 큰아버지네 집을 찾아가 족보란 게 뭔지 보여달라 하니 큰아버지는 대뜸 얼굴이 정색해지더니 일언지하에 일축해버렸다. 
 
“족보라니, 어디서 잠꼬대 같은 소릴. 나한테 그런 게 없어.”
 
“큰형이 마다바이한테 있다 하던데요…”
 
“어느 세월 때 소리를. 너 형이 고중 다닐 때까지만 있었지, 그 뒤 다 불태워버렸다.”
 
그 때 아버지는 오십대 중반을 넘기고 큰아버지는 이미 회갑년세를 훌쩍 넘긴 60대 중반이였다. 그 때 어른들은 예순만 지나도 나이티가 푹푹 나보였다. 굳이 곰방대를 꼬나들고 길다란 수염을 매만져서만이 아니였다. 어쨌든 인상 속에 그렇게 깊숙이 각인되여있었다. 그러니 어른이 “어험, 안된다는데…” 하거나 “모른다는데 왜 이래.” 하고 눈을 부라리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일자무식이나 다름없는 아버지와 달리 큰아버지는 글을 깊이 깨치고 있었다. 맏이를 편애하던 당시의 세태 속에서 서당 훈장을 지냈다는 할아버지가 큰아버지한테만 글을 배워주고 막내인 아버지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으리라 추정한다만 아버지가 가타부타 할아버지를 나무리는 걸 우리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글이 그 때에는 지푸래기거나 동아줄보다 더 절박하였다. 그 이듬해 겨울인가 큰아버지가 척추질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는 방학하자마자 나를 데리고 큰아버지를 찾아갔다. 
 
“형님, 얘더러 곁에서 형님을 돌보게 할 테니 이 참에 애한테 천자문이나 가르쳐주시구려.”
 
“아, 그게 좋겠네. 지금 애들은 학교에서 배운는다는 게 전문 글 같은 글은 아니구…”
 
큰아버지는 큰집 누이 보고 웃방 궤 속에서 천자문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큰집 누이가 우유빛 비단에 감싼 묵직한 책을 내놓자 큰아버지는 대뜸 버럭 소리질렀다. 
 
“이 년아, 천자문이 그처럼 묵직한 줄 아니? 천자문이 뭔지도 모르는 요즘 애들을 어디다 쓴단 말이요, 허 참.”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큰집 누나가 한참이나 뒤져서야 겨우 온통 보풀이 인 천자문을 찾아냈다.
 
그제야 큰아버지는 기대에 가득차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이래다간 앞으로 족보를 물려받을 인간이 나오겠는지도 모르겠다. 천자문을 배우려면 끈질겨야 한다. 중간에 물러날 거면 아예 시작하지도 말고… 그리고 학교에 가서 천자문 배운다는 말을 해선 절대 안돼. 명심해라.”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10살 터울이였다. 글에서는 큰아버지한테 비기지 못하더라도 일찍 사평해방, 장춘해방 때 인민해방군의 담가대로 지원해 전선을 헤집고 다닌 아버지는 세상을 보는 안목에서는 큰아버지보다 한수 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원에 가입했겠다, 살구평마을의 초대 촌장이겠다, 그 세대에 딱 맞는 인물이였다. 그러한 아버지였건만 자기 한계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1965년 연길현(지금의 룡정시)당교에 학습을 다녀온 후, 그 해말에 아버지는 사원들의 만류도 기어이 뿌리치고 촌장 자리를 내놓았다. 파격적인 행보였다. 물론 그 때 세살도 되나마나한 나로서는 기억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나중에 우리 촌에서 교원으로 있는 큰누님한테서 아버지가 자리를 내놓은 까닭을 전해듣게 되였다.
 
“아버지는 현에 회의 갔다 와서 며칠 아무 말씀도 안하셨단다. 그러더니 어느 날 자기가 글을모르거니와 문화도 없어서 간부질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면서 자리를 내놓겠다더라. 실은 자리를 내놓기 힘들어 며칠을 고민했을 거다.
 
솔직히 아버지는 당시 위신이 대단했다. 자리란 게 크든작든 정작 내놓자면 어디 쉬웠을가? 그러든 말든 해냈으니 아버지는 대단한 거다. 큰누님은 우리 집 맏이인지라 부모님으로부터 막내인 내가 자라나는 과정을 그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거기에 선생이랍시고 아버지의 용퇴에 어쩌면 애잔한 푸념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때 내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아니? 서당 훈장을 했다면서 아버지에게도 글을 좀 배워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아버지가 글을 조금만 알아도 현급 간부는 문제없이 되였을 거다. 큰아버지를 잔뜩 배워준들 무슨 쓸모가 있니. 집에서 쉬천이나 놀고 ‘하늘천, 따지’나 쓸데없이 외우다 해 갈 거 아니야?” 큰누이가 뭐라든 그 때 이미 대학물이나 먹었다는 나로서는 아버지의 깊은 사려를 어느 만큼 읽을 수 있었다. 왜 아버지가 자식 공부에 그처럼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6남매였다. 그 험한 세월에도 큰형님은 연변1중을 졸업한 후 어느 광무국에 배치받았고 가문의 맏이인 누님도 초중을 졸업하고 소학교 교원으로 들어갔다. 둘째누이도 도시 제대군인한테 시집 가서 어렵잖게 직업을 얻게 되였다. 문제는 두살 터울로 줄줄이 태여난 우리 삼형제였다. 그 세월 아버지는 어디에서 그 귀한 ‘영구’, ‘봉황’, ‘비둘기’표 자전거 표를 얻어 둘째형님이 그 때의 이른바 고중을 다니던 해에 해마다 바꿔주었다. 아버지의 외압에 눌려 둘째형은 우리 촌에서 20여리 되는 다른 지방의 고중을 마친 유일한 졸업생이 되였다. 셋째형도 그 학교에서는 공부를 제일 잘했다 했는데 결국 고등학교입학시험이 회복된 이듬해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아버지가 그냥 더 부딪쳐보라는데도 시골교육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한 둘째형은 한사코 나서지 않았다. 나도 그 당시 일년후로 대학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아버지는 우리 가정을 송두리채 흔드는 중대한 결정을 전격적으로 내리게 되였다.
 
말하자면 이사였다. 큰아버지네와 한집 건너에 산 지도 50년이 넘을 만큼 두 형제의 정분은 끈끈했다. 내가 시골학교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해봤자 결국 우물 안 개구리로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서 아버지는 마침 시내 채소대대로 넘는다는 룡정의 시교농촌에 이사하기로 마음을 잡은 것이였다. 이러면 시내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가 한참이나 뜸을 들여 이사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큰아버지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보게 동생, 난 마지막까지 동생하고 살려 했는데… 내가 이제 살면 몇해나 더 살겠는가? 이렇게 나를 뿌리치고 가면 나는 어쩌라고…” 그 해 큰아버지는 여든을 지척에 두고 있었다.
 
“형님, 형님께 죄를 짓는 걸 압니다. 그렇다고 저대로 놔두면 저 막내까지 셋이 다 소궁둥이를 두드리겠으니 무슨 낯으로 조상을 보겠습니까? 내가 자주 와서 형님을 찾아뵙겠으니 허락해주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낯선 고장으로 이사하게 되였다. 그때가 1978년이였으니 어언 43년이 지나갔음에도 큰아버지가 뿌리던 눈물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때 나는 남자에게도, 로인에게도 사품치는 감정의 격랑이 있다는 걸 깨치게 되였다. 
 
이른바 시내학교에 들어서니 앞이 캄캄했다. 시골학교에서는 그나마 학년의 3위권에서 오르내리던 점수가 여기에 와서 첫 시험을 치니 반급에서 거꾸로 여덟번째였다. 절망은 시시각각 조여오고 있었다. 더우기 담임선생이 성적표에 적어보낸 한마디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학급 마지막 팔등, 수학을 이대로 놔두면 절대 대학에 갈 수 없다.”
 
마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공부했는지 지금 전혀 기억이 없다. 다만 나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가 전적으로 우월한 교육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백번, 천번이라도 믿는다. 나보다 퍽 우수했음에도 그 시골 고중에서 앉은 석동 하느라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대학문과 인연을 접게 된 애들을 보면 정말 마음이 괴로워난다. 
 
하늘의 도움으로 대학문이라고 노크하고 이어 사업단위에 배치받아서 3년이 지났을 때 통화에 있던 맏형이 오게 되여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과 함께 아직도 그 고향마을에서 보내고 있는 큰아버지댁을 찾게 되였다. 두 가문이 같이 모여앉기는 1978년에 이사한 뒤로 처음이였다. 그 사이 두 가문 모두 많은 변화를 겪었다. 말하자면 량가 부모님들은 로쇠하고 사촌들은 우여곡절이 있든 말든 이미 결혼이라는 걸 다 겪어보았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완벽하지 못하였다. 
 
음식상을 차리다가 큰아버지가 역시 이번에도 큰집 누이 보고 궤에서 비단에 싼 책을 꺼내놓으라고 시켰다. 큰집 누이가 비단에 싼 짐을 들고 오자 큰아버지는 정중하게, 근엄하게 조심조심 보따리를 풀었다. 그 속에서는 16절 크기로 된, 파란색 페지에 누른 종이로 된 책이 세개 나왔다. 
 
“막내가 언제부터 족보, 족보 하는 걸 없다고 한 건 족보를 두고 있다면 남들이 뭐라 할가 싫어서였다. 가문에서 족보는 목숨과도 같이 소중하다. 선조를 모르고 우리가 어찌 자기가 뭔지 알 수 있겠니? 자기 피가 뭔지도 모르고 살면 인간 대접 못 받는 거야.”
 
이어 큰아버지는 기대 가득히 우리를 일일이 둘러보았다.
 
“내가 너네 할아버지한테서 이 족보를 넘겨받은 지도 어언 50년이 넘는구나. 이만큼 건사했으면 조상한테 미안하지 않다고 할 만하구나. 다만 정말 속에 걸리는 게 있다. 가법 대로라면 가문의 장자인 우리 아들한테 넘겨줘야겠는데 그러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럴 수 없구나. 대대손손 족보를 더 빛내야겠는데 나는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지 못했구나…”
 
큰아버지는 이어 아버지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난 동생한테 감격하네. 나는 자식 셋, 동생은 자식이 여섯이고 생활도 우리가 더 편한데 동생은 그나마 자식들을 다 공부시켰으니 나는 자식농사를 망쳤다고 할 수 있지. 앞날도 래일 모레니 오늘 이 족보를 넘겨주려고 하네. 다만 동생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 족보를 통화 애(나의 맏형)한테 넘기려고 그러네. 그 놈은 그래도 가문의 영광이잖아.”
통화 형은 한사코 사절했다. 
 
“큰아버지, 믿어줘서 고맙다만 저희 그 곳에서는 이 족보를 가져갔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큰집 동생이 받아두는 게 제일 리상적입니다. 아무 때든 찾아보기도 편하고…”
 
큰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네가 가문을 빛냈으니 그래도 자네가 건사하는 게 마땅해. 안 그러면 족보의 가치가 내려가. 아무렇게나 다루면 조상들께 죄를 지어. 후대들도 흉 볼 거고.”
 
맏형은 달갑지 않는 대로 중등전문학교를 나온 뒤 3,000명 가량의 광부를 둔 대형 국영탄광에 배치받아 기술원으로부터 총공정사로 승진한 우리 가문의 영광이였다. 큰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그 족보를 맏형이 넘겨받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큰아버지가 족보를 가문의 자존심으로 보니 말이다.
 
그래도 분촌을 지킬 줄 아는 맏형은 슬쩍 에둘러 사절했다. 어쩌면 그보다도 부담스러웠을 거라고 짐작하고 싶다.
 
“그래도 족보는 가문의 큰집에서 갖고 있는 게 례의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큰집 동생한테 맡깁시다.”
 
예상외로 큰아버지한테서는 격양된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건 안돼, 내 자식들은 물려받을 자격이 없어, 나는 자식농사를 잘못 지었어. 그러니 우리 애들이 족보를 이어받으면 가문이 어지러워져…”
 
굳이 미신 같은 걸 안 믿으면서도 우리는 생활 속에서 흔히 미신적이고 봉건적인 물건에 기웃거리는 때가 있다. 정말 그게 걱정스러웠는지 아버지는 큰형을 의미 있게 바라보았다. 거절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큰아버지가 너한테 맡기시니 그대로 받거라.” 
 
그렇게 맏형은 막무가내로 족보를 넘겨받았다. 어디까지나 맏형은 례의로 받은 거였다. 과연 집에 돌아오자마자 맏형은 그 족보를 아버지한테 밀어놓았다.
 
“아버지,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제가 언제 족보 같은 걸 들여다볼 겨를이란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페품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식구들이 모여사는 연변에 족보를 두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막내한테 맡깁시다.”
 
아버지는 낡은 사회를 퍼그나 살았어도 관념상, 전통상 고루하지도 고집스럽지도 않은 편이였다.
 
“그래, 너희들 편한 대로 하거라.”
 
이렇게 가문의 족보는 나한테 옮겨왔다. 웬 일인지 그처럼 호기심을 흔들던 족보가 몇해 지나니 시들해지는 게 나로서도 이상해났다. 나는 어디까지나 족보가 나타난 사회와 지금 사회의 차이에 있다고 짚고 싶다. 말하자면 족보의 실용성이 바닥을 드러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거뜬하게 살아가고 싶어한다. 이름을 달랑 남겨놓고 언제 태여나고 언제 사망하고 가문의 몇째이고 자식(그것도 아들)은 몇이고… 이런 걸 후손들이 보면 히죽 웃고 말 게 아닐가? 관념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삶의 추구가 달라진 오늘날 가문의 족보도 물론 무작정 뿌리친다는 것도 어딘가 허리가 시려나는 일이라도 더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다. 이웃이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나오게 된 맥락도 다시 되돌아봐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이제 가문을 벗어난 더 넓은 세상과 포옹하고 살아가야 한다. 족보를 받고 보니 괜히 부담스럽다. 만약 일고의 가치라도 있으면 연구용으로 박물관에라도 증정하고 싶다. 그러면 큰아버지도 아버지도 나를 못난 후손이라고 삿대질하지는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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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기업인 천진청송화약(青松华药)의약회사에서 최근 천진시인민정부에 3만장의 한국 의료용 마스크를 기증했다.   신종코로나가 발생후 1선 방역에 필요한 마스크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이 회사 심재관 리사장과 직원들이 설 휴식도 마다하고 여러경로를 통해 해외공급상과 연락했다. 드디여...
  • 2020-02-05
  • 나는 꿈을 꾼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해빛이 창문에 따갑게 비추던 어느 하루, 여섯살 난 나는 집에서 이야기책을 보고 있었고 어디선가 뿡뿡하는 기분 나쁜 승용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빚쟁이들이 들이닥친다. “엄마는 어디 갔니?” 이젠 “아빠는 어디 갔냐”도 생략이다. 얼어붙...
  • 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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