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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선족 무용 가정의 예술에 대한 추구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6월10일 09시27분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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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중국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이 백여년전부터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준 호칭이며 혜택이다.중국조선족은 신민주주의 혁명시기로 부터 항일전쟁,해방전쟁시기에 이르기까지,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시기로부터 개혁개방,사회주의현대화 건설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전국의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조국의 번영과 창성에 모든 힘을 이바지하였다. 그가운데서 조선족 가정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새라새롭게 안겨온다. 오늘부터 길림신문사에서는 전문란 ‘나의 조국, 나의 집’을 개설하여 조선족 가정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을 그려보고저 한다.  

한룡길 가정 구성원 무용 종사 성공의 배후에는 조국의 정책적인 지지가 있다

한룡길 가정은 식구가 3명, 3명이 전부 무용에 종사하고 있다. 한룡길은 40여년간 무용사업에 종사했고 2017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무용교수로 은퇴를 했다.그의 안해 추실은 연변군중예술관에서 무용 사업에 종사했으며 지금은 정년퇴직했다. 딸 한초혜는 북경에서 초혜무용공간을 창설하고 무용 공간의 운영과 함께 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나라의 해택으로 조선에 가서 무료로 무용공부를 했고  <21세기 중국조선족무용체계>라는 과제를 선택했을 때 나라에서 연구 경비를 마련해 주었고 또 연구할수 있도록 공간과 시간을 주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민족정책은 아주 우월합니다. 중국조선족문화가 발전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준 자체가 아주 위대한 정책이지요.” 한룡길교수는 당과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민족정책에 대한 극찬을 이같이 표달한다.

“아마도 중국조선족가운데서 저의 가정이 유일하게 한가정 3식구가 무용에 종사하고 있을 것입니다.”한룡길은 무용가정으로 된 자부감을 안고 자랑스레 한마디 덧붙혔다.

한룡길은 가족 세식구가 모두 무용에 종사할수 있었고 또 훌륭한 성적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세식구가 다 무용을 좋아하고 무용에 전념한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나라의 정책적인 지지가 뒤받침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룡길은 중국조선족은 100여년간 중국의 항일전쟁, 해방전쟁, 사회주의혁명과 건설, 개혁개방 등 부동한 력사시기를 거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무용 예술을 창작하였고 5천년의 찬란한 력사를 자랑하는 중화문화권에 포용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사회적인 발전 공간의 형성 및 그 발전에 대해 깊이있게 풀이했다.

“1980년대 초에 전국문화사업자회의를 연변에서 하게 되면서 그 때 왕청현 배초구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을 조직했는 데 농민 200명이 아주 굉장하게 상모표현을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문화사업자들이 모두 감탄하였고 그 때 왕청배초구가 ‘중국조선족 농악무의 고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농악무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였습니다. 나아가 세계기네스기록에도 올랐습니다.”이처럼 나라에서 조선족문화의 발전 공간을 마련주었기에 중국조선족은 세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민족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한룡길의 페부지언이였다.

“사실 남자가 무용을 한다는 것에 대해 자비감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한룡길은 예술학교 교원으로 발탁할 때의 속마음을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게 마음속 깊이 숨겨진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앞만 내다보고 달려온 한룡길은 〈웨침〉이라는 남성군무작품을 하나 내놓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겪은 여러 곤난과 래일을 위한 희망을 무용으로 담아낸, 곤경에 처한 자신을 격발하여 분투를 하는 파격적인 동작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그런 주제를 반영한 그 작품은 길림성 제1차 예술절 무용 창작 1등상을 수상했고 이어 길림성 제2차‘장백산’문예상까지 탔다. 이에 탄력을 받아 한룡길은 중국조선족의 첫 대형무극 《춘향전》의 창작에도 참여하였다.

한룡길의 안해 추실은 원래 그의 제자였다

"인연이란 참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 선생님(한룡길)의 제자였습니다. 제가 예술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께서 저를 가르쳤거던요. 저는 졸업하고 가무단에 들어갔습니다. 선생님도 거기에 계셨습니다. 가무단에서 선생님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다가 나중에는 선생님의 안해로 되였습니다.”무용지도 추실은 한룡길교수와의 만남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사연에 대해 흠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추실은 17살에 무용을 시작했다.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가무단에서 무용수로 그리고 연변군중예술관으로 조동한 후 정년 퇴직하기전까지 군중 예술지도로 근 40년 동안 무용사업에 종사했다. 40년 동안 무용을 견지할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말해달라고 기자가 물어보니 추실은 그냥 무용이 좋았기에 힘들어도 포기를 하지 않았고 좋았기에 40년을 견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딸애가 무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 추실은 찬성하지 않았단다.

“보통 부모들은 자기가 종사했던 직업을 자식한테 추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무용은 아주 고된 일입니다. 비록 무용수들은 대중들의 멋있고 화려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 짧은 무용 순간들을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딸애만은 제발 이 길로 가지 말기를 바랐지요.”고 말했다.

하지만 딸 한초혜는 어려서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딸애가 4살 때 아버지를 따라 무용수업현장에 가게 되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그날 본 것을 배워도 주지 않았는데 막힘이 없이 추더라구요. 나중에 무용을 하겠다는 딸애를 보고 여러가지로 설득해보았지만 그의 무용에 대한 애착과 무용을 하겠다는 의지는 굽히지 못했습니다. 힘든 무용을 선택한 딸애를 보면서 마음은 몹시 아팠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잘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추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피여올랐다.

지금 북경에서 무용공간을 창설해 잘 운영하고 있지만 그래도 녀자이고 또 사회 경험도 많지 않다 보니 바쁘고 힘들 때가 많다고 한다. “비록 하나하나 잘 풀어가고 해결하고 있지만 한평생 무용에 종사했던 우리가 딸에게 같은 분야의 선배로서 또 부모로서 조언과 도움을 준다는 것이 아주 행복합니다. 정말 무용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구체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못합니다. 그래도 저와 저의 남편이 무용을 했기에 무용에 관해 여러가지로 조언도 해주고 딸의 무용인생에 대해 어느 정도 방향도 잡아줄 수 있었습니다.”추실은 세식구가 무용을 하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고 행복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저의 남편의 말처럼 우리 나라 민족정책이 아주 훌륭하고 우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도 행복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고 한평생 마음 편하게 그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추실은 행복에 겨워 말했다.

 

 

 

 

한초혜: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큰 무대에 멋진 작품을 올리련다

한룡길과 추실의 딸 한초혜의 무용에 대한 리론 연구 결코 부모들보다 짝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용은 사람의 감정을 몸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관중과의 공명을 추구하는 예술로써 그 어떤 시각에서 보면 사람의 언어보다도 시각적, 감각적으로 더욱 직접적이게 전률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무용예술의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무용은 근대 사회, 당대 사회를 막론하고 항상 많이 주목받고 있다.

“요즘 무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뜨거워진 걸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한어로 쉽게 해석하면‘내에서 외로(圈内到圈外)'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한초혜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전에는 무용을 사랑하고 무용을 이어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공자였다면 지금은 더욱 많은 일반 시민들이 함께 방대한 예술 대오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공자로서는 아주 흐뭇하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주요 원인은 두가지란다.

첫째는 많은 방송국들에서 무용가들이 자기의 기량을 마음껏 발산하고 무용을 알릴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전에는 항상 극장을 가끔 방문해서야 관람할수 있었던 멋진 화면들을 집에서 혹은 그 어느 곳에서든지 자유롭게 감상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 젊고 패기 넘치는 멋진 무용가들을 알게 되는 데 한마디로 말해 ‘연예인 효과'이다. 이런 대담한 시도들은 관중과 무용가에게는 아주 좋은 뉴대가 되였다. 관중들은 그런 멋진 무용가들을 보면서 그들의 평소 훈련에 관심을 갖게 되였고 그들의 수업을 받기 위해 전국 곳곳으로 ‘무용려행'을 떠나게 되였다고 한다.

 

 

둘째는 국가 차원에서 인민들에게 광장무 시합이라든가 혹은 여러가지 형식의 무대들을 많이 조직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한다. 항상 멀게만 느껴졌고, 동경만했던,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무대에 자신들도 도전할 기회가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배움이 필요했고, 그 배움터를 찾고 익혀가면서 심미관도 향상되고 자연히 무용에 대한 관심과 추구가 나날이 진해지면서 지금의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한다.

천부적인 재질과 부지런한 배움도 중요하지만,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정책도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각 예술대학교의 석사생 졸업무극지원이라든가, 국가예술기금 혹은 국가대극원에서 주최하는 젊은 안무가 페스티벌 등등의 여러가지 형식들이 많은 데 이는 젊고 꿈있는 무용가들에게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저같은 경우에도 석사를 졸업하면서 북경무용학원의 지지와 성원으로 조선족무극 《갈대》를 무대에 올렸고, 많은 교수님들과 무용수들의 지지와 찬사를 받게 되였으며 더우기는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는 든든한 뒤받침이 되였습니다.”

한초혜는 이렇게 말하면서 지금껏 해왔듯이 항상 초심을 잊지 않고 꾸준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면서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큰 무대에 멋진 작품을 올려 몸으로 사람들에게 나의 마인드와 감동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한룡길과 추실 그리고 한초혜의 무용 배합은 중국조선족 문화의 화원에,나아가서는 중화문화의 화원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갈 것이다.

길림신문 홍길남 정현관 김파 김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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