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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약속] 어머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1월12일 10시38분    조회: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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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성옥  · 방송 구서림

 

    우리 엄마 기쁘게 한번 웃으면 구름속의 해님도 방긋 웃고요, 우리 엄마 즐겁게 한번 웃으면 아름다운 꽃들도 피여납니다. 고생속에 살아 오신 우리 어머니 웃으시면 온 집 안에 꽃이 핍니다.

    바로 이 노래 가사처럼 우리 집안은 아버지가 28년간 휠체어를 타시는 장애인으로 생활이 극히 곤난하였지만 강인한 어머니의 웃음이 있었기에 온 집안에 꽃이 피였다.

    오늘도 새해 달력을 보며 불현듯 어머니 돌아가신 날자에 눈을 멈췄다. 벌써 10년이네. 어느새 어머니에 대한 동경의 옛 추억이 떠오른다…

    어머니 전헤순( 1932_2012)은 19세에 아버지와 결혼해 몇 년후 교원직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목단강 교구 동승 마을에 정착하였다.

    그런데 1967년 아버지가 38세, 어머니가 36세인 그해 가을, 아버지가 특수시기 ‘’로동 개조’’로 추운데서 일 하시다가 병독성 중감기에 걸리셨는데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장장 35일만에 정신을 차리고 전면 검사를 하니 급성 뇌막염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못쓰는 지체장애인으로 판정받았다.

    지체장애인? 어제는 백메터를 15초 안에 달리는 륙상 선수, 일 잘하여 시교육국의 선진사업자로 북경 천안문 성루에 오르신 그이가… !? 하늘도 무심하다. 삽시에 어머니는 눈앞이 아찔하고 귀에서 윙윙 소리가 들렸다. 온 몸은 물에 담그어 풀어진 미역마냥 해나른하고…

    곁에서 이 진단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아버지도 큰 충격을 받아 다시 의식을 잃은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 어머니와 같이 매일 아버지 눈 뜨기를 기다렸던 오빠(17살)가 금방 기뻐하기도 전에 또 아버지가 눈을 감으니 애타게 부른다. 아버지가 겨우 눈을 뜨자 오빠는 다시 어머니 손을 잡으며  ‘’어머니 우리가 있잖아요,힘 내세요!’’라고 말했다. 

    하루 아침에 장애인이 된 아빠를 본 이 불행한 어린 자식이 엄마를 달래는 그 가엾는 말에 어머니는 눈물을 삼키고 기운을 차렸다. ‘’그래 ,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이제부터 내가 잘 섬기고 이 가정도 내가 지킬거야.’’ 

    어머니는 아버지가 ‘’왜 나를 살렸냐, 이러고 살 바엔 죽어 버리겠다’’는 등 별의별 말씀을 해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들어만 주었다. 이윽고 ’’여보세요,애들(내가 15살 남동생10살 막내 동생 5살)을 봐서라도 살아야지요.’’

    차분한 한마디 한마디 어머니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했던지 아버지의 정서는 안정되고 오빠더러 휠체어를 만들 고무 바퀴 두개만 사오라 하셔서 직접 휠체어를 만드셨다.  

    이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내가 당신의 손과 발이 되여 앞뒤로 뛰여 다니겠으니 매일 기분만 좋게 휠체어 타세요’’라고 한다. 그 말을 어머니는 곧 행동에 옮겼다. 농촌 호구인 여섯 식구 식량값을 벌기 위하여 일년치고 소대에서 공동으로 쉬는 날 빼고는 별도로 쉬는 날이 없었다.

    오빠가 19살 나던 해 마을에서 특이하게 공군 후근부대 징병이 있어서 청년들이 너도나도 참군한다고  들떠 있었다. 오빠는 가정 형편을 고려하여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이를  눈치챈 어머니는 무작정 네가 가고 싶으면 가라고 오빠 등을 떠밀다싶이 하여 마침 신체 검사에 합격하고 나가서 6년만에 돌아왔다. 

    6년이란 이 길고긴 사이 어려웠던 형편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제대하고 와서 도와달라고 할 법도 했지만 어머니는 단 한번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낸적이 없다. 

    오빠가 입대한 이듬해에 내가 9년 의무교육을 졸업하고 생산대 일에 나가게 되였다. 당시 단체로 농사하니 벼짚이랑 모두 생산대 소유이고 개인 화목은 소대에서 제정한 시간내 즉 봄, 가을 두차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어머니와 나도 나섰다. 동북의 봄 3월이면 산의 눈이 녹았다얼었다하여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어 집에서 준비한 새끼로 솜신 중간을 동여매고 보온 도시락이 없으니 점심은 허리에 차고 손 도끼등으로 자작나무 뿌리를 쳐서 새끼로 한단 한단 묶어 소수레에 실을 수 있는 아래평지까지 끌어 내려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깊은 산에서 녀성 둘이 나무를 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웠을가라는 생각도 드는데 결국은 역시 대단하신 어머니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루는 나무를 실어 오던중 이외의 사고가 났다. 큰 수레에 나무를 꽉 박아 싣고 소몰이군이 소를 몰며 앞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나와 어머니는 뒤에서 걸었다. 그런데 앞에 가던 소수레가 울퉁불퉁한 산길에서 몇번 이쪽저쪽 기우뚱하더니 그만 전복했다.

    ‘’야-어떡하지 어떡하지‘’ 겁부터 난 나는 마치 소리라도 치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두 손을 비비며 아우성만 질렀다. 어머니는 나에게 눈짓하며 나무를 실은 차에 깔린 소가 위험하다며 빨리 손을 쓰자고 한다. 나와 어머니, 소수레군 셋이서 겨우 수레채를 들고 소를 빼내고 우리는 다시 그렇게 싣기 힘든 나무를 한단한단 실었다. 수레에 실은 나무단이 높이 올라 갈수록 밑에서 섬기는 어머니와 나는 점점 더 힘들었다. 키가 작아서 겨우 나무단을 세워 수레군에게 주면 그분이 다 잡아당겨야 하니 그분도 짜증이 났다. 날도 어두워지고 배도 고프고, 모진 고생을 다하며 집에까지 도착하니 7시가 넘었다. 

    사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서럽고 눈물이 나련만 어머니는 여전히 별일 없었다는 듯 아버지 앞에서 투정 한마디 없었고 이튿날에는 우리집이 길목이라 빨리 자리를 내야함으로 인츰 가쯘하게 패서 나무가리를 잘 쌓아 놓았다. 나는 또 한번 어머니 일 솜씨에 감탄이 갔다.

    가을 나무는 주로 싸리 나무를 하는데 많지 않아 낫을 들고 찾아 다녀야 했다. 산에 나무숲과 억센 풀이 우거져 옆에 나쁜 사람이 숨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다 뱀이 슬슬 기여 다니고 또 사람의 살을 파고드는 ‘’어에’’라는 벌레가 많아 진짜 일하기가 무시무시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힘들게 한 나무를 남들은 당일로 실어 오는데 우리집은 남성이 없어 소수레를 몰지 못해 소대에서 배치하기를 기다렸다가 두 번이나 도적 맞혔다…

    어머니에 대한 자랑은 이뿐이 아니다. 내가 24살 되던 해, 1976년 공농병 대학생 모집이 나왔을 때, 집안의 사정으로 어머니가 안된다고 하면 가지못하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지 성원으로 오매불망 가고 싶었던 연변대학 조문 학부에 갈 수 있었다. 

    남동생도 목단강 사범학교, 녀동생도 고중을 졸업하였다.

    1991년 남동생네가 120평 넘는 덩실한 벽돌집을 짓고 아버지 환갑 잔치도 멋지게 차렸다. 동생이 아버지를 업고 환갑상에 앉을 때 아버지는 ‘’내 이런 병신이 여태 이처럼 훌륭한 복을 누리는 것 모두가 너의 엄마 덕이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사업도 잘하고 가정도 잘 꾸려 가고 있지만 앞으로 어머니를 더 잘 모셔야 한다.’’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은 자리에 앉은 모든 하객들을 깊이 감동 시켰다. 

    아버지의 말씀은 천만 지당하셨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28년간 휠체어 타는 남편을 알뜰히 섬기며 오빠를 군대에 ,나를 대학에 보내며 그 힘든 가정의 모든  짐을 다 지시고도 언제 한번 원망하거나 짜증내는 소리를 못 들어봤고 더우기 어머니가 나약하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대신 강인한 힘으로 아버지 병에 좋다는 약은 빼놓지 않고 다 지어드렸다. 아버지가 소변이 시원치 않은데 옥수수 수염이 좋다는 말을 듣고 2년간 온 동네를 다니며 옥수수 수염을 구해 달여드렸고 다리가 아픈데 솔나무 찜질이 좋다하여 수차 산에 가서 솔나무 잎을 해다가 집 가마에 쪄서 찜질을 해드리고 뜸이 좋다하여 온 몸에 뜸자리 없는데 없이 떠드리고, 이외에 아버지께 달여드린 중약만 해도 한 수레는 넘는다. 매운 것을 못 드시니 꼭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백김치를 해드려 우리 식탁에는 일년 사시절 두가지 색갈의 김치가 있었다. 

    또 어머니는 손재간이 좋은 것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동네 결혼식, 환갑집에 참석 못하니 안쓰러워하는 대신 대사가 있는 집에 가서 밤을 새며 쉰떡을 맛깔스레 해드려 이튿날 아버지 앞으로 언제나 큰  잔치상이 들어오군 했다. 

    주말에 시내에 있는 자식들이 오면 마을의 재밌는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주고 그것도 부족하여 또 손풍구를 돌려 새 밥을 지어 된장국에 김치라도 마치 진수성찬 먹듯이 맛나게 밤참을 먹게 하는 그런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시였다. 

    녀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꼭 우리 어머니를 두고한 명언 같다. 체중이 겨우 55키로, 키 155메터,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여 가방끈도 짧은 평범한 일반 녀성이지만 바로 ‘’어머니’’라는 이 대명사가 우리 어머니로 하여금 열두폭 치마보다 흉금이 더 넓으시고 강철보다 더 강인한 분으로 만들어 편찮은 남편 시중 잘 들고 이남이녀 네 자식 훌륭히 잘 키워 사회에 얼마만이라도 공헌한 게 아닌가고 생각해본다.

    어머니 전헤순! 고생속에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꿈결에도 웃으시면 우리집은 꽃이 핍니다. 어머니,어머니! 고이고이 잠드세요!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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