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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구술시리즈 13] 동희철의 처녀작 〈녀성행진곡〉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8월1일 13시35분    조회: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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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3](동희철 편-1)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는 공화국창건 70돐에 즈음하여 중국조선족의 문화와 력사를 널리 알리고 그 발전비전을 찾으려고 본사가 특별기획한 프로입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하나인 구술을 통하여 조선족의 력사와 문화를 새롭게 발굴하고 보존하며 나아가 발전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술의 진실성, 취미성, 학술성을 높여 다매체시대에 《길림신문》의 보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독자들의 기대에 보답하려 합니다.

2019년 3월 28일부터 6월 26일까지 오프라인, 온라인 <길림신문>을 통해 <김희관 편>을 12기로 이미 펴냈습니다. 많은 독자들과 시청자들이 성원을 보내왔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 제2편으로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 동희철옹의 음악이야기를 8기로 나누어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동희철(董希哲)프로필

1928년 5월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남산동 출생

1943년 조양천국민우급학교 졸업 이듬해 연길간도사도학교 입학

1946년 7월 중국인민해방군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공단에 입단 바리톤, 손풍금 연주원으로 활약

1950년-1956년 연변제1고급중학교 연변한어사범학교 연변제2고급중학교 음악교원으로 종사

1956년 3월부터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 조장, 주임 력임

1965년 길림성민족문공단 창작조 조장, 1966년 연변인민방송국에 귀환

1989년 정년리직

대표작: 처녀작 현남극 작사 <녀성행진곡>(1947년) 발표

데뷔작 김경석 작사 <고향산기슭에서>(1955년)

김철 작사 <선생님들창가 지날 때마다>(1978년)

허동철 작사 <형제민족 한자리에 모였네>(1978년)

주요저서:

<고향산기슭에서 >(1978년), <배움터의 노래>(2000년)

<사랑의 멜로디>(2005년) <인생의 반려>(2005년)

국가 1급 작곡가 동희철선생은 《중국소수민족음악사전》,《중국당대예술가명인록》,《세계예술가명인록》,《중국당대조선족인명사전》에 수록되였으며 북경국제방송국, 중국인민해방군(복건)《해협지성》방송국, 한국KBS제2방송국 등 방송매체를 통해 해내외에 널리 소개되였다. ,

기자들의 취재를 접수하며 "참 잘들 왔수다. 가기 전에 할 말을 다 하게 됐구만"

머슴군의 아들

내가 여섯살 나던 해 아버지 어머니는 일본놈들의 등살에 못 이겨 나를 업고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남산동을 떠났소.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길교외에 있는 인평촌에 와 왕가네 지팡살이를 하게 되였소.

중국에 들어온 이듬해에는 월선이라고 부르는 맏누이가 빚 때문에 늙은 령감한테 끌려갔소. 나는 누이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못 간다고 가지 말라고 울며 애원을 했지. 나를 엄마처럼 보살펴주던 큰누이를 그렇게 빼앗겼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구만.

남들은 여덟살이면 학교를 다니지만 나는 열살이 되도록 학교문앞도 못 가고 동척회사의 땅을 다루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지. 그러다가 열살때 마을에서 5리 떨어진 동불사 대기촌 소학교에 붙었소. 대기촌소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는데 형편이 어려워 부모들은 나를 잘사는 집 양아들로 들여보내 공부를 시켰소. 몇 달이 지나 친부모들도 있는 내가 남의 집에 와있는 것이 내키지 않아 양부모들께 큰 절을 올리고 그 집을 나왔소.

그뒤로 조양천에 내려와 교장선생님네 집에 가서 심부름군으로 일하면서 월사금을 내지 않고 6학년을 졸업하게 되였지. 공부는 참 잘했었소. 그랬는데 상급학교로 갈 때가 되자 학비가 낮은 연길간도사도학교쪽으로 선택을 했지. 거기에서 문하연이라는 음악교원을 만나게 된 것이였소. 그분이 바로 나의 계몽선생이였소.

1946년 7월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예공작단에 가입(자료사진).

문하연선생은 일본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룡정녀자고등학교 음악교원을 하던 분인데 내가 발풍금을 치는 것을 보고 장차 음악을 할 감이라고 하면서 학교에 한대밖에 없는 피아노열쇠를 쥐여주었소.

"이제부터 너만은 마음놓고 와서 연습하라."

마음 속으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그때부터 정말 음악을 사랑하게 되였고 틈만 나면 열심히 피아노연습을 했지. 선생님은 이듬해에 학교취주악대에까지 소개해 넣어주더구만…

‘함화전’과 음악창작학습반

해방이 된 후 1946년 7월 3일 연길에 있는 중국인민해방군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예공작단(원래 조양천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전대였음)에 입대하였는데 취주악대의 대원으로 참군하였지.

취주악대 대원들(자료사진).

당시는 전쟁년대라 전방에 나가 전사들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고 적진지에 다가가서 적들을 상대로 함화(喊话)전을 벌리기도 하였소. 1947년 장춘포위전을 할 때였는데 부대전사들을 위한 공연을 한 뒤 저녁 10시쯤 되여 박우랑 함께 적들의 진지까지 기여가 ‘함화전’을 펼쳤소. 박우가 기타를 치고 내가 손풍금을 타면서 ‘고롤로도의 달밤’과 같은 세계명곡들을 연주하였지. 적들로 하여금 고향생각, 부모처자 생각을 하게 하고 다른 한 선전원은 메가폰으로 우리 군의 포로정책을 선전하였소. 그러면서 어떻게 투항하여 오는가 하는 방법도 알려주었지.

야외에서 무용련습을 하고 있는 문예병들(자료사진).

그랬더니 과연 이튿날 새벽에 적들은 흰기를 들고 련장이 앞장서서 우리가 알려준 길로 투항해오는 것이 아니겠소. 음악으로 적들에 대한 와해전을 펼친 것이였지. 장춘전역이 승리하고 우리 군이 길림시로 입성할 때 군악대는 손에 흰장갑을 끼고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보무당당하게 앞장서고 그 뒤로 전투부대가 따르면서 입성하였는데 아주 장관이였소.

모주석께서는 "현대전쟁은 문무가 결합되여야 한다"고 지시를 하셨소. 나는 그때 문예병으로 춤도 추고 나팔도 불고 손품금도 치고 바리톤도 연주하고 했는데 주로 바리톤으로 선률을 이끄는 역할을 많이 했소. 그때 항일가곡은 물론 조선민요련곡이며 쏘련행진곡(1, 2, 3번), 독일행진곡 <붉은 날래> 등 세계명곡들을 많이 연주했지.

1947년 주문련주비위원회의 이름으로 처음 음악창작학습반이 열렸댔소. 가사를 쓰는 시인들이며 연변가무단 창작일군들도 모두 참가하였소 연변대학 조선어문교원 현남극 선생이 쓴 <녀성행진곡>이 참 마음에 들었소. 그리하여 학습반에서 전문가들의 강의를 새겨들으며 처음으로 작곡이라는 것을 했더랬소.

대오를 맞추어 새무대에 오르라

우리는 명랑한 새시대의 녀성

부대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의 한 장면(자료사진).

이 노래는 전선지원가나 다름없었소. 새시대 녀성들은 전선을 지원하고 지방건설을 잘하고 봉건속박에서 벗어나 새사회를 위해 헌신하자는 내용이였지.

그번 학습반에서 채택룡선생의 아동가요 <까치가 짖네>와 현남극선생의 아동가요 <왜 또 왔을가> 이 가사에도 작곡을 했더랬소. 그 가사들은 당시 형세에 꼭 맞는 내용들이였지. 채택룡선생과 현남극 선생은 모두 우리 문단의 대단한 시인들이잖소.

그 뒤 음악창작학습반에 참가한 사람들의 잘된 작품으로 연변문공단에서 편집을 맡고 연변의 첫 가곡집을 편찬하였는데 세곡이 다 수록되였더랬소.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그후 <녀성행진곡>은 3.8절기념가처럼 널리 불려졌고 상당히 보급되였지. 이곡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연무대에 올라 씩씩한 현대녀성들의 기상을 전하는 가요로 되고 있소.

그때 내가 열아홉살인가 됐는데 그렇게 생명력이 있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은 평소 연주원으로 각종 악기를 다루면서 우리 민족 민요와 수많은 세계명곡들, 예술성이 상당히 깊은 명곡들을 접하면서 많은 음악형상들이 머리 속에 들어와 있었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거기에다 음악창작학습반에 참가하여 계발을 받으니 나래를 달게 된 것이 아닐가 생각되오.

길림신문/글: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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