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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김지은'과 '새로운 성관계의 규칙'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8월15일 10시27분    조회: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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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4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 서부지방법원 재판부의 선고문을 여러 차례 읽다가 개인적으로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 있었습니다. 재판부가 성폭력 무죄 판결 선고문에서 김지은 씨를 줄곧 ‘피해자’로 명명한 겁니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가해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고문에서 김 씨는 ‘존재하지 않는 성폭력 가해의 피해자’로, 형식 논리적으론 다소 어색하게 호명됩니다.  

서울 서부지방법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공소 사실에서 김지은 씨가 피해자로 언급돼 재판 과정에서 주로 피해자로 호칭됐고, 이를 그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며 "형식논리상으론 어색해 보일 수 있지만 아주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판결을 선고한 조병구 재판장에게 정확한 이유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만, 수차례 윤문을 거쳤을 선고문에서 단어 하나를 허투루 썼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취재파일에서는 이 형식 논리상의 균열 사이로 엿볼 수 있는 재판부의 고민과 함께 '첫 미투 사건 판결' 이후 우리 사회에 주어진 과제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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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정 무죄' 가른 쟁점…위력 여부 · 성적 자기결정권

● "성적 자기결정권 가진 여성 김지은"

재판부는 이 사건 선고의 상당 시간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설명하는데 할애했습니다.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된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가 제정될 당시 우리 사회의 여성은 ‘정조’를 보호받고 이를 지켜야 할 수동적 대상으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독자적 주체로 자리매김했다고 재판부는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전제와 개별 공소 사실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재판부는 '김지은 씨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성' 이라고 전제합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안희정 지사가 김 씨의 '성적 자기결정 능력'을 침해할 만한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 증거는 부족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재판부 판단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선고문에는 이 개별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심증과 함께 재판부의 사회적 고려 방향이 드러나는 대목도 등장합니다. 재판부는 “여성이 상대방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것인가의 여부를 자유의사의 제압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하였음에도,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면서 상대방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라고 판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성적 자기결정)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해석은 오히려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고, 나아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부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도 밝혔습니다. 자발적 의지로 성관계를 하고서 나중에 그 결정을 번복해 형사적 처벌을 구하는 건 ‘독자적 판단 주체’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위협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겁니다.

법원은 이 사건 무죄 선고의 근거로 다른 정황 증거들 (김지은-다른 증인 간 텔레그램, 김지은 씨가 피해 상황 전후로 주변에게 보였던 말과 행동)과 함께, 김지은 씨가 ‘명시적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것을 들기도 했습니다. 여러 증거를 들어 김지은 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하는 선고문의 행간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본인이 행사한 성(姓)적 의사 결정에 대해 일관되고 명시적인 행동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시각이 읽힙니다.

● "권력자 앞의 '여성 노동자' 김지은"



재판부의 논리에 대해 여성계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판결 선고 이후 안희정 사건 공대위 등 여성계와 김지은 씨의 변호사가 발표한 입장엔 모두 “재판부가 안희정이라는 거대 권력자와 그를 보좌하는 ‘여성 노동자’ 김지은이라는 사건의 상황적 맥락을 철저히 거세했다”는 시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성은 법적 권리행사의 주체인 것과 별개로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비교해 '사회적 약자'로 존재하는데, ‘여성’ 김지은은 여기에 ‘남성 유력 정치인’ 안희정의 위력에까지 짓눌린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여성계는 그럼에도 재판부가 ‘위력의 존재만으로는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지 않았다’고 해석한 건 지극히 편협한 처사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부 법조인들은 이러한 1심 판결이 ‘유·무형의 위력’을 모두 인정하고 있는 최근의 대법원 판례 흐름과도 상반된다고 주장합니다.

  

또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는 매우 교묘하게 일어나는데, 재판부가 이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안희정이 안아달라고 했을 때 안았다’, ‘안희정이 오라고 했는데 대전에서 서울까지 갔다’는 것은 판결 선고에서 김지은 씨에게 불리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하지만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양상의 지극히 표면적인 부분만 반영한 것이라는 비판이 여성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 합법적 성관계는 무엇인가?…'새로운 성관계의 규칙' 만들어야 하는 한국 사회

이러한 비판을 일부 예상했는지 법원은 선고문에서 실정법의 한계를 토로합니다. 현행법, 특히 죄형법정주의를 통해 엄격하게 작동하는 형사법 체계에서는 피해자의 마음이나 피해자 나름대로의 저항을 근거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회적 의미에서의 '성폭력 행위'와 법적 의미에서의 '성폭력 범죄'가 달라, 사회도덕적 책임과 법률적 책임 사이에 '불합리한 괴리'가 발생한다고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와 관련된 것은 사회적 논의를 통한 입법을 통해 해결돼야 한다며 입법부와 사회에 공을 돌렸습니다. 형사법의 엄밀한 해석자로서의 법원이 '미투 운동'의 상징이 된 이번 사건에서 하나의 행위자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을 매우 염려하는 대목입니다.

 

여성계는 이에 대해 “책임 떠미루기”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를 계기로 성범죄 처벌에 대한 보다 정교한 입법 논의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해외에는 No means No rule (‘아니다’라고 했는데 성관계를 하면 무조건 처벌하는 규칙), Yesmeans Yes rule ('명확한 동의가 있는 성관계 외에는 모두 처벌하는 규칙)과 같은 사례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새롭게 규정하게 될 ‘합법적 성관계’엔 이처럼 다양한 층위의 의사표시가 요구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지난해부터 진행된 미투 운동과 이번 판결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때로는 어물쩍 이뤄졌던 '성관계'에 대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 내야 하는 과제를 맞게 됐습니다. 자신 혹은 타인의 성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 질서 창출 과정에 생산적인 방식으로 참여하는 게 과제 해결의 관건이 될 겁니다. 특정인을 ‘꽃뱀’등으로 표현하며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은 형사적으로 처벌될 수 있는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던져진 큰 숙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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