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창작마당
라이벌
2015년5월11일 09시32분    조회:2166    추천:1    작성자: 리태근
라이벌

두만강
 
    지난해 가을 화룡시 조카네 잔치집에 갔다가 결혼잔치를 촬영하는 촬영가를 만났다. 흔히 볼수있는 촬영가라 무심하게 지나치는데 갑자기  나를 촬영하는게 아닌가? "아니 나를 찍어서는 뭘하게?" 내가 한사코 사양하자 촬영가는  나에게 손을 내민다. "반갑당께 이게 몇해 만이요? 여기서 만날줄은 생각도 못했구만"  "엉? 누구신지 ?" 얼떨떨해서 내미는 손을 맞잡고 악수하다가 갑자기 눈에 익은 얼굴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 남달리 량쪽 광골이 툭 튀여나온 얼굴에 허연 수염이 한벌 깔린 얼굴, 누굴 보나 반갑게 웃는 저 얼굴은  한번도 잊어본적 없는 나의 라이벌이 아닌가?
 
    해방전부터 화룡시 두도구에는 《전라도 라씨네 개장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툭하면 삼천리라고 말재간이 청산류수인 개장집 로친이 얼마나 말 잘했으면 조선영화 《꽃파는 처녀》에 나오는 《나물파는 로친》이라고 했겠는가? 라씨개장집  개고기도 좋지만 라선배가 꾸리는 사진관이 사진을 너무나도 잘 찍어서 평강벌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두도 사진관》에다 추억을 걸어 놓았다. 유치원때부터 소학교, 중학교, 로인회, 부련회, 당조직까지 라선배의 손끝에서 동년의 추억을 새기고 만년의 행복까지 마감했다. 해마다 열리는 향진 운동대회와 봄, 가을 들놀이까지 라선배의 렌즈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평강벌의 백년력사를 기록해 온 라선배였다. 우리집 사진에도 나의 결혼기념사진이며  아들의 첫돐사진과 어머 님의 환갑사진 역시 라선배의 손끝에서 창작된것이였다.
 
   그런데 세월탓이냐? 사람탓이냐? 나는 라선배와 철천지《원쑤》라이벌로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맡은 문화소사업은  개혁바람에  질서가 변하기 시작했다. 《꿩잡는게 매》란다. 상급에서는 이제부터  돈을 벌어서 사업비용을 해결하라고 목을 조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문화소를 《건달소》라고 빈정댔다. 향정부에서는 할일없이 국록을 타 먹는다고 문화소일군들 은《이붓자식》으로 몰리웠다. 이런 국면을 철저하게 개변하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겠다는 위기의식도 느꼈다. 뾰족한 궁리가 나지 않는데 누군가 사진관을 꾸리면 마른 돈을 벌수있다고 귀띔했다. 80년대초에 칼라사진이 나와서 선호하는 시대라 안성맞춤이란다. 칼라사진은 아무런 기술도 필요없이 달랑 사진기 한대만 들고 나서면 아무곳에서나 찰칼찰각 찍을수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때기》다. 향진문화소  권리까지 리용하면 전향의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졸업사진까지 몽땅 독차지해서 부자가 되는건 시간문제일것 같았다.  나는 전 향진 각 촌과 중학교, 소학교, 유치원에 이제부터 모든 사진을  문화소 사진관에서 찍으라고, 저렴한 가격으로 찍어 준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십년간 라선배가 꾸리는 《두 도사진관》에서 사진찍는게 습관이 되여서 아무리 교육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는 《국영사진관》을 억제시켜야 한다. 값을  낮추어서 개미가 제방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틀을 차리던 《두도사진관》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진촬영기술은 라선배가 신 벗어놓은 자리에도 못 미치지만 절반 값도 안되는 저렴한 가격이 라선배를 조급하게했다.
 
  치렬한 시장경쟁은  인정사정없이 몰아갔다. 가는곳 마다 국영사진관을 공격하고 흑선전하면서 인신공격까지 들이댔다. 때마침 상급에서 더는 국영사진관에 젖을(로임) 주지 않았다. 《약한 다리에 침질》이라고  직원들이 슬금슬금  새더니 두도구사진관이 당장 영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날 개장집 로친이 나를 찾아왔다. 영업이 안되는데다  가정에  불란이 생겨서 사는게 말이 아니란다. 옛정을 봐서라도 라선배를 살려주면 안되는가?  뭐라고 위안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영업을 중지할수는 없지 않는가? 며칠 안되여서 웬일인지 라선배의 마누라가 자살했고 그 이듬해  개장집 로친까지 사망했다. 라선배도  밥을 먹기 위하여 무거운 록화기를 메고  농촌으로  직접 촬영하려 다녔다. 철밥통이란 무너지기 시작하니 막아낼수가 없었다. 무거운 비디오를 메고 동분서주하는 한선배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는 정말 죄송하다고 빌었다….
 
   인정사정 보지않고 끈질기게 노력한 덕분에 두도문화소는《전성농 촌문화전형》으로 표창받았고 나는 추천받고 연길로 전근하게 되였다. 라선배가 지키던 국영사진관은  물먹은 담벽마냥 무너지고 말았다. 라이벌을  몰락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남의 발등을 딛고 일어선 나는 속으로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겉으로는 이겼지만 속으로는 실패한 졸장군이였다. 연길에 온 후에도 사진을 찍을 때마다 라선배기 생각났다. 매번 라선배가 남겨준 나의 결혼사진과 귀여운 나의 아들들의 첫돐사진을 볼때마다  라선배의 따뜻한 마음을 찔러놓는듯 괴롭기만 했다.  언젠가 한번 만나서 속심을 털어 놓으리라고  맹세했지만 어째서 그게 말처럼 잘 되지 않는지?  내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라선배를  생각밖에 여기에서 만날줄이야… 라선배는 끝내 두도구에서 배기지 못하고 화룡에다 사진관을 꾸렸단다. 사람마다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세월이라 갈수록 심산이란다. 긴말이 필요없었다. 여북했으면  환갑을 넘긴 로인이 오늘도 무거운 비디오를 메고서 잔치집에 나타났겠는가?
 
   세월을 피해가는 장군이 없다더니 한때는 평강벌의 소문난 촬영가였던 라선배가 어느새 피골이 상접하고 앞이까지 훌렁 빠져서 매마른 박달나무가 되였다. 얼굴은 말라버린 논밭처럼 척박한데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부어주는 술잔을 받는 순간,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리소장이 문화소를 맡았을 때가 제일 좋았지, 촌마다 문예경색대회도 열어서 흥성흥성했는데 지금은 돈밖에 모르는 세월이라 문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오. 리소장이 쓴 작품이 신문, 방송, 잡지에  발표될 때마다 평강벌에서 명작가가 나왔다고 자랑했당께. 허허허 " 진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소리인지 아니면 원망끝에 묻어나오는 비방소리인지 가늠할수 없었다.
 
   아! 세월이 약이라고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가?  인제는 로친도 없이 혼자서 기막힌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가? 사람이 늙으면 약자가 되여서 모든걸 용서하기 마련인가?... 나의 잘못을 무정한 세월속에 묻어놓고 아직도 나를 《평강벌의 룡》으로 기억하는 선배가 어쩐지 더욱 측은해난다. 나의 라이벌은 바로 이런분이였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8
  • 세월이 조용히 흘러가면서 지난 세월의 흔적들이 기억속에서 종적을 감추기 시작하였으나 어쩐지 유아에서 아동에로의 과도시기에 겪었던 술로 인한 기억은 눈앞에 새록새록 자주 나타나군 한다. 신사답고 인맥이 좋아 여기저기에서 벌어진 술상을 자주 드나들던 아버지는 어쩐지 술상에만 앉으면 술의 노예가 되여 늘 만취...
  • 2012-03-21
  •  장백현 김승광          쪽진 머리 달님 향해   무릎 꺾고 부른 노래   아리랑 아리랑   원혼의 노래     어차피   갈것은 가고   올것은 오고   세상은 다시금 정리되였는데     저 아리랑 고개에   망부석으로 굳어져   흐느끼는 물결을 바...
  • 2012-03-13
  • 할빈 손봉금   얼마전에 친구의 딸님이 사고로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었다. 다행히도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곁을 떠날수가 없어서 새벽까지 병원에 있어야 했다.   병원에는 아픈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며, 시한부의 판정을 받은 사람들도 ...
  • 2012-03-13
  •   똑같은 하루의 반복, 어제 같은 오늘을 보내며 또 어제 가던 그 길 따라 점심을 먹고 변함이 있을리가 없는 복도를 따라 사무실로 돌아오는 무심한 내 눈에 튀여든 하나가 있었다. 어제와 다른 나의 오늘을 만들어놓은 장본인.   복도 창턱에 올려진, 살짝 먼지가 쌓인 란초, 새삼스럽게 오늘 꽃이 피여있었다. 다소...
  • 2012-03-07
  • (심양)  김희자   남선, 북선이란 말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잘 모르겠으나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갈라 말함에는 틀림이 없을것 같다. 암튼 내가 사는 주위에는 평안도와 경상도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는데 그들은 서로를 “남선집”, “북선댁”으로 호칭을 하면서 옛날 자기들의 로동...
  • 2012-02-27
  • 산 산이 있다.  이름하여 우리의 산이라고 한다. 민족의 령산이라고 한다. 백두산,  화염이 빚어놓은 단군의 뚝배기, 오천년이 발효된 국물그릇이다. 그 그릇에 깨끗한 동해물을 해바가지로 푹푹 퍼담아&n...
  • 2012-02-20
  • 퇴근길에 서시장에 들려 저녁반찬거리를 사려고 채소매대를 한바퀴 돌았다. 첫눈에 띄는것은 달래였다. 겨울철이라 달래값이 엄청 비쌌다. 하지만 달래가 입맛을 당기는지라 한근에 12원을 주고 샀다.야생...
  • 2012-02-20
  • 길림 강순화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간다는게 도대체 뭘가? 가끔씩은 생각해보게 되는데 참 많은것 같다.. 이 세상에 태여나서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것도 보람있는 삶이요, 자식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는것도 보람있는 인생이요, 사업에서 성공한것도 보람있는 인생이요, 불우한 이웃돕기도 보람있는 인...
  • 2012-02-20
  •   (녕안) 남영선   공간이란 쉽게 말해서 빈자리나 빈곳을 말한다. 우리는 생활가운데서 항상 비좁은 공간보다는 널직한 공간을 선호하며 넓은 공간에서는 모든것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지만 반대로 비좁은 공간에서는 숨이 갑갑하여 뛰쳐나가고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생활에서 넓은 공간을 선호한다면 자신의 마음...
  • 2012-02-16
  • (도문) 문화  지난 주말, 오랜만에 놀러온 조카아이를 데리고 도문구경을 시키려고 거리로 나갔다가 얼마전에 새로 선 문화유산전람관으로 들어갔다.   전람관에는 우리 민족 선조들이 사용했던 그제날의 생산도구와 생활용품들이 질서정연하게 진렬되여있었다. 떡메, 항아리, 수탉다리미, 인두, 절구, 도리깨, 나...
  • 2012-02-16
  • 녕안 최영란        세상살이가 만화경처럼 묘하고도 신기해서인지 살다보면 뜻하지 않는 일에 공연히 짜증이 나고 예상밖의 일로 감동을 받으며 희열을 느낄 때가 있어 참으로 살맛이 나서 좋은것 같다.   매일 오후 세시부터 여섯시까지는 나의 일상에서 제일 바삐 보내는 때다. 그날은...
  • 2012-02-06
  •        새로운 한해인 임진년의 룡해가 서서히 들어섰다. 새해를 맞으니 머나먼 타향에서 일하는 아들애에 대하여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아들애가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여난후 당년의 진정부 간부였던 아버지는 ...
  • 2012-02-06
  • 진눈까비 하면 사람들은 얼굴부터 찡그린다.   비도 눈도 아닌 확실치 못한 그의 존재,  비의 서정도 눈의 랑만도 불러올수 없는 너, 비나 눈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달수 없이 진눈까비란 그 어설픈 한마디에 금을 그었기때문일가?   어설픈 너의 존재처럼 어설픈 사람들, 진눈까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런 어...
  • 2012-01-17
  • 째지게 가난했던 60~70년대 내가 살던 고향마을 중장년들은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그 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하얀 고무신의 그 모양새를 빌어 “넙덕고무신”이라고도 불렀다. 큰 아버지께서도 마을의 행사나 동네 나들이에 하얀 넙덕고무신을 즐겨 신으셨다. 어릴적 나는 명절때에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
  • 2012-01-17
  •             1 수년전 미국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서 사다새(鹈鹕)사건이 터졌었다. 굳이 사건이라고까지 하는것은 본래 동물을 지극히 사랑하는 몬터레이주민들로 말하면 그것은...
  • 2012-01-17
  • 수필 김치련가 박옥남     옛 시골에서는 김치를 담그는 날도 잔치집 못지 않게 흥성거렸었다. 김치독을 씻어 마당끝에 대기시켜놓고 간밤에 담근, 초절이가 맞춤하게 된 배추를 건져 맑은 물에 헹구어 물기를 찌우고 찹쌀죽을 곱게 쑤어 양념을 재우고 본격적으로 김치 버무리는 일이 진행되였다. 버무리는 절차...
  • 2011-07-26
  • 수필   나를 깨운 들국화 김홍란         밤기차로 7시간 반의 려행을 거쳐 손님일행을 목적지인 연길까지 모셔다드리고 곧바로 돌아오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또다시 6시간의 긴 려행이 시작된것이다.     고달픈 몸을 의자등받이에 맡긴채 선잠에 들어있던 나는 몸을 일으...
  • 2011-07-26
‹처음  이전 1 2 3 다음  맨뒤›
  • 공지사항
  • 자유토론방
  • 최근리플 | 가장많이본글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