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두만강
지난해 가을 화룡시 조카네 잔치집에 갔다가 결혼잔치를 촬영하는 촬영가를 만났다. 흔히 볼수있는 촬영가라 무심하게 지나치는데 갑자기 나를 촬영하는게 아닌가? "아니 나를 찍어서는 뭘하게?" 내가 한사코 사양하자 촬영가는 나에게 손을 내민다. "반갑당께 이게 몇해 만이요? 여기서 만날줄은 생각도 못했구만" "엉? 누구신지 ?" 얼떨떨해서 내미는 손을 맞잡고 악수하다가 갑자기 눈에 익은 얼굴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 남달리 량쪽 광골이 툭 튀여나온 얼굴에 허연 수염이 한벌 깔린 얼굴, 누굴 보나 반갑게 웃는 저 얼굴은 한번도 잊어본적 없는 나의 라이벌이 아닌가?
해방전부터 화룡시 두도구에는 《전라도 라씨네 개장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툭하면 삼천리라고 말재간이 청산류수인 개장집 로친이 얼마나 말 잘했으면 조선영화 《꽃파는 처녀》에 나오는 《나물파는 로친》이라고 했겠는가? 라씨개장집 개고기도 좋지만 라선배가 꾸리는 사진관이 사진을 너무나도 잘 찍어서 평강벌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두도 사진관》에다 추억을 걸어 놓았다. 유치원때부터 소학교, 중학교, 로인회, 부련회, 당조직까지 라선배의 손끝에서 동년의 추억을 새기고 만년의 행복까지 마감했다. 해마다 열리는 향진 운동대회와 봄, 가을 들놀이까지 라선배의 렌즈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평강벌의 백년력사를 기록해 온 라선배였다. 우리집 사진에도 나의 결혼기념사진이며 아들의 첫돐사진과 어머 님의 환갑사진 역시 라선배의 손끝에서 창작된것이였다.
그런데 세월탓이냐? 사람탓이냐? 나는 라선배와 철천지《원쑤》라이벌로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맡은 문화소사업은 개혁바람에 질서가 변하기 시작했다. 《꿩잡는게 매》란다. 상급에서는 이제부터 돈을 벌어서 사업비용을 해결하라고 목을 조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문화소를 《건달소》라고 빈정댔다. 향정부에서는 할일없이 국록을 타 먹는다고 문화소일군들 은《이붓자식》으로 몰리웠다. 이런 국면을 철저하게 개변하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겠다는 위기의식도 느꼈다. 뾰족한 궁리가 나지 않는데 누군가 사진관을 꾸리면 마른 돈을 벌수있다고 귀띔했다. 80년대초에 칼라사진이 나와서 선호하는 시대라 안성맞춤이란다. 칼라사진은 아무런 기술도 필요없이 달랑 사진기 한대만 들고 나서면 아무곳에서나 찰칼찰각 찍을수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때기》다. 향진문화소 권리까지 리용하면 전향의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졸업사진까지 몽땅 독차지해서 부자가 되는건 시간문제일것 같았다. 나는 전 향진 각 촌과 중학교, 소학교, 유치원에 이제부터 모든 사진을 문화소 사진관에서 찍으라고, 저렴한 가격으로 찍어 준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십년간 라선배가 꾸리는 《두 도사진관》에서 사진찍는게 습관이 되여서 아무리 교육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는 《국영사진관》을 억제시켜야 한다. 값을 낮추어서 개미가 제방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틀을 차리던 《두도사진관》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진촬영기술은 라선배가 신 벗어놓은 자리에도 못 미치지만 절반 값도 안되는 저렴한 가격이 라선배를 조급하게했다.
치렬한 시장경쟁은 인정사정없이 몰아갔다. 가는곳 마다 국영사진관을 공격하고 흑선전하면서 인신공격까지 들이댔다. 때마침 상급에서 더는 국영사진관에 젖을(로임) 주지 않았다. 《약한 다리에 침질》이라고 직원들이 슬금슬금 새더니 두도구사진관이 당장 영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날 개장집 로친이 나를 찾아왔다. 영업이 안되는데다 가정에 불란이 생겨서 사는게 말이 아니란다. 옛정을 봐서라도 라선배를 살려주면 안되는가? 뭐라고 위안할수 없었다. 그렇다고 영업을 중지할수는 없지 않는가? 며칠 안되여서 웬일인지 라선배의 마누라가 자살했고 그 이듬해 개장집 로친까지 사망했다. 라선배도 밥을 먹기 위하여 무거운 록화기를 메고 농촌으로 직접 촬영하려 다녔다. 철밥통이란 무너지기 시작하니 막아낼수가 없었다. 무거운 비디오를 메고 동분서주하는 한선배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는 정말 죄송하다고 빌었다….
인정사정 보지않고 끈질기게 노력한 덕분에 두도문화소는《전성농 촌문화전형》으로 표창받았고 나는 추천받고 연길로 전근하게 되였다. 라선배가 지키던 국영사진관은 물먹은 담벽마냥 무너지고 말았다. 라이벌을 몰락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남의 발등을 딛고 일어선 나는 속으로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겉으로는 이겼지만 속으로는 실패한 졸장군이였다. 연길에 온 후에도 사진을 찍을 때마다 라선배기 생각났다. 매번 라선배가 남겨준 나의 결혼사진과 귀여운 나의 아들들의 첫돐사진을 볼때마다 라선배의 따뜻한 마음을 찔러놓는듯 괴롭기만 했다. 언젠가 한번 만나서 속심을 털어 놓으리라고 맹세했지만 어째서 그게 말처럼 잘 되지 않는지? 내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라선배를 생각밖에 여기에서 만날줄이야… 라선배는 끝내 두도구에서 배기지 못하고 화룡에다 사진관을 꾸렸단다. 사람마다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세월이라 갈수록 심산이란다. 긴말이 필요없었다. 여북했으면 환갑을 넘긴 로인이 오늘도 무거운 비디오를 메고서 잔치집에 나타났겠는가?
세월을 피해가는 장군이 없다더니 한때는 평강벌의 소문난 촬영가였던 라선배가 어느새 피골이 상접하고 앞이까지 훌렁 빠져서 매마른 박달나무가 되였다. 얼굴은 말라버린 논밭처럼 척박한데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부어주는 술잔을 받는 순간,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리소장이 문화소를 맡았을 때가 제일 좋았지, 촌마다 문예경색대회도 열어서 흥성흥성했는데 지금은 돈밖에 모르는 세월이라 문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오. 리소장이 쓴 작품이 신문, 방송, 잡지에 발표될 때마다 평강벌에서 명작가가 나왔다고 자랑했당께. 허허허 " 진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소리인지 아니면 원망끝에 묻어나오는 비방소리인지 가늠할수 없었다.
아! 세월이 약이라고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가? 인제는 로친도 없이 혼자서 기막힌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가? 사람이 늙으면 약자가 되여서 모든걸 용서하기 마련인가?... 나의 잘못을 무정한 세월속에 묻어놓고 아직도 나를 《평강벌의 룡》으로 기억하는 선배가 어쩐지 더욱 측은해난다. 나의 라이벌은 바로 이런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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