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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먼곳의 작은절 -행자스님의 수행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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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먼곳의 작은 절 행자오능의 수행일지8-그때는 어느때 댓글:  조회:2151  추천:1  2016-02-23
  산사의 단풍은 빨리도 진다. 울긋불긋 단풍을 구경할 사이도 없이 그냥 지여버린다. 단풍은 아름답지만 단풍을 구경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죽어가는 나무잎 일뿐이다. 살다보면 마음의 경지에 따라 인생의 환경과 경지가 변화는걸 느낄수가 있다. 오진에게 금강경 기본 장절을 외우도록 시키고 스승님이 떠나신 다음날부터 가르치려고 했는데 그만 감기 몸살에 걸려버렸다. 병이란 그렇게 갑자기 오는듯 싶다. 아무 예고 없이 그냥 몸살이 나니 춥고 떨리고 힘이 없다. 코물 흐르고 목이 아픈것 정도는 참을수 있으나 온몸에서 열이 나고 힘이 빠질때에는 도무지 육신을 이길수가 없어서 끝내는 알아눕고야 말았다. 가르치려던 오진이 오히려 이럴땐 큰 힘이 되여서 병수발을 들어주었다. 내가 가르치려다가 한수 배우듯이 전혀 예견치 않던 사람한테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기도 한다. 예고없이 걸리는 감기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언젠가는 예고없이 끝날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런것을 모르고 있다. 예고없이 병이 오듯이 삶도 예고없이 끝남을 인지한다면 일찍부터 불법을 수지하고 따라야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지혜를 가진 인간은 오히려 많지 못하다.   우리 절에는 감기약이 준비되여 있었지만 오래전에 사다놓은것이라서 그런지 유효유통기한이 지난것이였다. 유통기한이 지난것이라서 불안하여 먹지않고 버틸려고 했는데 며칠째 몸이 떨리고 아파서 젊은 청춘인 나도 육신을 이길수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유통기한이 지난 약이였지만 그냥 먹었더니 어제부터 서서히 열이 내리고 안정을 찾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도 때로는 효과를 볼수 있는가 본다. (다른분들은 따라하지 마시길.^^) 약은 유통기한이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지혜는 유통기한이 없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욱 빛을 발하고 우리의 앞길을 비출뿐이다. 잠시 그늘에 가리울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빛을 뿌릴수 있는것이 불법의 지혜일듯 싶다. 벌써 열흘째 오진을 가르치지 못했다. 스승님이 와서 시험칠일이 걱정되여 오진을 불러서 금강경을 외우게 하여보았더니 제법 잘 외운다. 감독이 없었는데도 열심히 외웠나 본다.   ‘금강경’ 제 일품을 보면 일시(一時)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금강경’을 처음 설법하실때 시간을 가르킨다.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지수급고독원에서 금강경을 설하셨는데 그때가 일시이다. 일시라는 말은 불교경전에서 많이 나오는데 우리 현대말로 풀이한다면 그때 그 시간에라는 말이 된다. 지금같으면 기원 몇년몇월몇일 몇시에 어디에서 어떤 주제로 누가 어떤사람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귀찮고 의미없는 것이였다. 긴 우주의 계보속에서 인간의 시간이란 하찮고 볼일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것이다. 거의 모든 불경에는 명확한 시간의 표시가 없다. 현재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양문화와 당시 인도와 교류했던 서양사회의 역사시기와 결부하여 불교역사을 추리할뿐 분명한 시간을 알아낸다는것은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금강경에서만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경전에서 나오는 일시(一時)라는 말은 그때 시간에라는 말이 된다. 약 17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동서양의 일부 학자들의 공동 연구로서 비로서 인도 역사책이 만들어 졌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상세히 역사와 연대가 기록되여 있으나 인도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때에는 왕들의 역사일뿐이다. 왕국의 흥망성쇠와 왕들의 희노애락을 적은것을 우리는 역사로 배운다. 일반 백성들의 삶까지 다 적기에는 너무 부족한것이 많았다. 그래서 역사 다음으로 남은것이 야사이고 민간이야기와 설화같은 것이였다.  어떤 학자들과 스님들은 현재 인도나 스리랑카에 가서 힌두어나 고대 범문을 배워서 불법을 배우련다고한다. 그러나 알아야할것은 긴긴 세월동안 우리의 언어는 변화되여 오고있고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정치의 변화와 함께 모든 언어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만 보아도 경상도 사투리나 전라도 사투리는 지금도 잘 알아들을수 없는 경향이 있다. 물론 지방마다 다른 사투리와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함경북도 방언과 남단의 제주도 방언은 서로 큰차이가 난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삼십년전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들은적 있는데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억양마저도 현대와는 천양지차로 느껴졌던적이 있다. 그렇듯이 현재의 범문은 17세기이후의 범문이고 우리나라 삼국시기 이전의 경전은 지금 거의 찾아볼수가 없다. 게다가 밀종에서 가르친다는 주문과 범어 역시 남인도, 북인도,동인도 서인도, 중인도 등 지역별로 전해져와서 발음과 표기법전부 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그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다. 그런데 아직도 인도나 스리랑카, 혹은 네팔에 가서 진정한 불법을 구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생각인것이다. 가까운곳에 있는것을 버리고 멀리걸 구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양인들 특히는 근대 영국인들은 인도를 식민지화하여서야 비로서 인도의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민지화된 인도의 문화를 부정하려고 하였고 그것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애를썼다. 그러나 인도의 문화는 마치 한장의 스폰지처럼 모든 문화를 흡수하고 동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천성적인 철학자들이였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배우기위해서 범문을 배운다고 하는데 그것은 시간낭비일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삼천아승지겁의 긴 시간동안 천천히 불법을 찾을 시간이 있다면 그렇게 이 세상 저 세상 찾아다닐수 있겠지만 진정한 불법은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에 잘 보존되여 있는것이다. 그것만이라도 불법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중생에게 필요한것이 전부의 불법이 아닐지라도 금강경 한권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불도를 닦는 정신이다.  이미 불교가 쇠퇴하여 이교도가 가득차 있는 인도에 가서 말도안되는 범어를 배워서 불경을 배우려는  생각은 동양문학에 관한 박사학위를 미국에가서 따와서 국내에서 이름을 날리려는 어리숙한 학자들과 다름이 없다. 물론 범어도 어학중의 하나로서 어학을 배운다는 의미로서는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굳이 범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것이 내 생각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히려 중국어를 잘 배워서 옛날 우리말로 직역되여 알아보기 힘든 경전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게 풀이해 내는것이 훨씬 더 큰 공덕이 될것이다.   어느 의사가 말하기를 치매에 걸리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상실한다고 한다. 자기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간에대한 개념도 없다고 한다. 밥을 먹고도 먹었는지 모르고 저녁이되여도 오전인줄 안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그렇듯이 시간에대한 개념이 없었다. 비록 현재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가 실지 아라비아인들이 만든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만든것을 아라비아인들이 사용하다가 발견되여서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지만 그런 위대한 숫자기호를 만든 인도인들은 시간에대한 관념도 숫자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던듯 싶다. 그래서 불경을 보면 거의 대개가 일시(一時)라는 말이 나온다. 즉 그때 그 시간에라는 말이다. 그때가 언제였나하면 바로 그때였다는것이다. 불교다운 용어이다. 무한한 우주와 그 우주와 함께 무한한 존재인 시간을 굳히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것이 불교다운 사상이다. 불교문학이나 서적들을 보면 쩍하면 팔만사천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에 팔만사천, 저기에 팔만사천이다. 서유기를 보면 십만팔천이란 표현도 많이 나오는데 손오공이 한번 곤두박질 하는데 십만팔천리를 간다고 한다. 인도인들의 팔만사천이란 말은 우리말로 굳이 표현한다면 엄청나게, 혹은 무지무지라는 말로 표현할수 있을듯 싶다. ‘무지무지 먼 옛날’에라고 표현하던가 아니면 ‘아주멀고먼 옛날에…’ 라고 표현할수도 있다. ‘호랑이가 담배피우고 토끼가 이야기하던 시절에…’ 하면 우리는 아주 옛날이야기구나하고 생각한다. 때문에 “일시”라는 그말 하나에도 깨달음의 뜻이 담겨있다.  “금강경”에는 “과거심불가득,현재심불가득,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있다. 시간은 상대적인것이고 영원한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 모두 버리라는 말이다. 시간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깨달음을 뒤로하게 한다. 불기요, 서기요, 기원이요, 기원전이요, 하는 모든것은 광대무변한 불법의 의미에서는 너무나도 무의미한것이다.   몇일 앓아 누워있을라니 모든 일들을 오정과 오진이 맡아서 해주었다. 아파서 누워있는 나도 정말 하루가 삼추(三秋)처럼 길어보였다. 그러나 정말 불법에 도취되여 있을때는 몇달 몇일이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고 후딱 보낼때도 많았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은 상대적인것이고 한편 절대적인것이다.   단풍을 쳐다보면서 느끼는것이지만 이런 단풍을 보는 ‘일시’를 인생에 몇번이나 경험할수 있을지 궁금하다. 서유기를 보면 수보리 조사가 손오공에게 도술을 가르칠때 산속에 온지 몇해 되였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손오공이 말하기를 가끔 뒤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하면서 온 산에 복숭아 나무가 많아 그 복숭아를 일곱번 실컷 먹었던적 있다고 고하는 장면이있다. 복숭아를 일곱번 실컷 먹었으니 일곱해가 지난것이다. 서유기에서 나오는 손오공에게 72가지 지살수(地煞數)의 변화의 방법과 능력을 가르쳐준 스승이 바로 수보리이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금강경’의 주인공 수보리인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조사(祖師)로 표현되여 나오고 또 도사인듯 표현되였지만 바로 금강경의 주역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부처님께 도를 물어주신 고마운 분이신것이다. 손오공마저도 그분의 제자이니 우리도 허심히 배워야 할듯 싶다.^^   단풍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인생에 맛있게 복숭아를 먹고 아름다운 단풍을 구경하는 그런 일시가 대체 몇번이나 있을까 고민해보기도한다. 이 세상의 부와 권리와 명예를 다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一時)일 뿐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금강경’의 무언의 경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다고 하겠다. 이에 맞을듯한 게시(偈頌) 한편이 떠올라 적어본다.   길다고 하는것은 짧은것이 있기때문이고 무겁다고 하는것은 가벼움이 있기 때문이다 늙어간다는것은 청춘이 있었음이요 열매가 달림은 꽃이 피였음이라 저 늙은이 힘없다 웃지마소서 청춘도 일시(一時)고 힘도 일시라네.   과거에도 부처님은 그자리에 계셨고 현재에도 부처님은 함께 하신다. 미래 현재와 과거에는 내가 있고 어제 오늘 내일도 불법은 상재한다. 아픈자 약하다고 싫어마소서 건강도 일시(一時) 행복도 일시라네.
먼곳의 작은 절-행자오능의 수행일지7-如是我闻   먼길을 떠나시는 스승님과 오공사형은 새벽녁에 길을 떠났다. 봉래마을에서 직접 서울로 들어가는 버스가 없어서 봉래마을에서 인근 도시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기차를 바꾸어 타야 했다. 그래서 새벽예불을 드리기전에 일찍 향공을 올리고 길을 떠나는것이다. 스승님과 오공사형이 없으니 절 전체가 텅 빈 감이 든다. 주지스님은 요즘따라 더욱 정진하시는듯 거의 예불전을 벗어나지 않고 계신다. 주지스님의 염불소리가 아름답게 들린다. 실은 내가 듣기에는 주지스님은 목탁도 잘 두드리시는것같다. 우리 스승님은 목소리는 참 아름답고 좋으시나 목탁을 잘 두드리지 못하신다. 스승님의 말처럼 음치인듯 싶다. 스승님은 목탁소리없이 경전을 외우시라면 줄줄 잘도 외우시나 목탁을 두드리기만 하면 잘못하신다. 그래서 옛날에 주지스님께 많이 야단맞으셨다고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그렇게 음치인거야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타고난 고유함을 가지고 있는듯 싶다. 아침 예불때 몇년전까지만 해도 목탁치는 일은 내가 했었는데 이제는 오진의 몪이 되였다. 목탁을 치면서 경전을 읽다보면 그 아름다운 운율에 심신이 취해버리기도 한다.  왜서 목탁을 치는지 물어보는 나에게 그것은 정진의  정신이라고 스승님은 말해주었셨다. 목탁은 중국어로 보면 목어(木魚)라고도 한다. 우리 절에는 없지만 어떤 큰 사찰에 가게되면 물고기모양의 큰 목어가 있는데 그것을 줄인것이 현재의 목탁이다. 물고기는 밤이고 낮이고 간에 눈을 뜨고 있다. 물고기의 휴식은 눈을뜬채 가만이 있으면 자는것이다. 잠간의 휴식이면 된다. 절에서 우리가 목탁을 두드리는것은 그런 물고기의 정신을 따라배우자는데 있다. 수련하고 깨우침을 얻으려는 사람은 그런 정진하려는 정신이 있어야한다. 주야를 불문하고 깨우침을 얻으려는 노력이 비로서 결과를 가져다 줄수있는것이다. 금강경 제 일품의 뜻은 바로 모든것은 인연의 다름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온다고 설하고 있다.   절에서 우리는 공부할때 스승님의 법문이나 경전에 대해서 의문이 있을때면 열렬한 토론을 벌린다. 토론을 벌릴때는 사형, 사제도 없고 스승제자도 없다. 분명하게 서로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 이해를 검증받는다. 그렇게 하시라고 주지스님부터 가르치신다. 때로는 선이나 명상도 좋지만 경전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고 하는 수행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 개인적인 느낌일지 모르지만 을 수지하려면 단순히 선 이나 명상으로는 부족하다. 길을 헤쳐나가는 사람을 우리는 지도자라고 하고 리더라고도 한다. 그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는 사람을 우리는 추종자라 부른다. 부처님은 그러한 길을 먼저 걸으셨고 그 과정에서의 심득과 빨리 얻을수 있는 그 길을 가르쳐주셨다. 인생에는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중요하다. 스승님과 오공사형이 서울로 갔지만 떠나실때 한참을 고민하셨다. 그냥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시 버스터미널에서 서울가는 버스로 갈것인지 아니면 기차를 갈아타고 갈것인지를 고민했던것이다. 그러다가 최종 가까운 버스터미널까지는 버스로 가고 서울까지는 다시 기차로 가기로 결정내린것이다. 수행을 하는 우리도 그러한 검토가 필요하다. 도 보고 이해하고  도 배우고 수지하고 연구하고 공부할필요가 있다. 경전하나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는 분들도 가끔 불교 공안(公案)을 보면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사례들이다. 내가 볼때는 그렇게 돈오(頓悟)를 이룬사람들은 전생의 수많은 세월동안 쌓은 수련과 노력의 결과로서 금생에 깨달음을 얻은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분의 깨달음의 인연이 되는것이다.   제대로 수행을 통하여 금생에 부처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팔만대장경중에서 어찌 우리 자신에게 잘 맞는 수행법이 없을것인가. 모두 방법반야바라밀일뿐이다. 오진은 스승님의 말씀이나 주지스님의 말씀을 전달할때면 장난처럼 항상 “여시아문, 스승님께서 능엄경을 가져오시랍니다.” 하고 말한다. 꼭 그앞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을 붙인다. 여시아문이란 말은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책임지는 태도에서 적은 말이라고 할수 있다.   은 아난존자가 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것이다. 불경을 읽다보면 모든 경전의 앞머리에 “여시아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아난이 그 말씀을 외워서 적어놓은것이다. 이 정도 상식은 초심불자정도면 다 알 상황이지만 오진은 의문이 있었다. 팔만대장경의 그 많은 경전을 한사람의 머리로 기억한다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신은 중국한자 천자문 공부도 머리가 터지게 아픈데 아난존자는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하는가 하는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불가사의한 부분이있다. 그러나 불가사의가 불가능사는 아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록할 사명을 가지고 태여났다고 한다. 부처님에 대한 일대기나 전설은 많고 많으나 아난존자에 대한 전설은 별로 없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사람의 뒤에는 그 분을 받쳐주고 힘이 되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모든 경전을 아난존자가 전부 외운것은 아니였다. 일부 빠뜨리거나 기억을 못하는 부분은 그 당시 함께 경을 들었던 기타 오백명의 이미 깨달음을 얻은 라한님들이 보충하고 증명함으로서 경전의 수록을 마친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난존자는 범천의 신이셨는데 사바세계에 탄생하셔서 부처를 이루시는 부처님을 보필하기 위하여 부처님을 따라 태여났다고 한다. 어찌됐건 부처님의 동생으로 태여났고 부처님을 평생 모시며 경전을 배우고 나중에는 마침내 득도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경으로 남기는 일을 하게 된것이다.   우리 스승님은 주지 스님한테서 법문을 배우셨다고 한다. 우리 절도 왕년에는 스님들도 많았고 시주공양도 많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주지스님께서 주지가 되신후부터는 법문을 하고 신도들의 보시공양을 받는것 보다는 수련과 정진에 힘을 쏟으셨다고 한다. 내가 절에 들어오던 그때까지만해도 절에는 여러스님들이 계셨다. 후에는 이런저런 사유로 혹은 수행정진을 목적으로 각자 절을 떠나가신것이다. 스승님은 주지스님의 법문을 듣고 이해하신것을 다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나도 스승님한테 듣고 이해한것을 지금 오진에게 가르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들은바를 전달하는 이다. 우리는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불법에 귀의하고 승단에 귀의한다고 한다. 그러나 승려들은 부처님과 불법에 귀의하면 된다. “여시아문”의 많은 경전들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르게 되는것이다. 모든 불법을 배우는 첫째가 수지와 독송이다. 수지한다는것은 믿고 따른다는 말이다. 이어서 경전을 독송하는것이 중요하다. 경전을 독송할때 오진처럼 뜻도 모르고 그냥 외우고 읽는것도 좋지만 제일 좋게는 그 뜻을 이해하고 읽는것이 중요하다.   오진을 가르치려고 보니 오히려 내가 배우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처음 금강경 법문을 들으면서 알뚱말뚱 떠오르는 느낌을 적었던 수행 일지가 생각나서 찾아보니 책장밑의 종이박스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때 금강경의 법문을 배우면서 그 여시아문이란 말을 듣고 밤중에 잠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적어놓았던 시 한편이 있다.   잠을 자면 꿈이 오고 눈을 뜨면 근심이다.   얻음을 기뻐말라 하면서도 기뻐하고 잃음을 슬퍼말라 하면서도 슬퍼한다.   오늘 듣고 내일 잊으니 아난존자 부러웁고 알면서 행하지 아니하니 부처님께 부끄럽다.   도라고 부르는것은 도가 아니요 사랑이라 부르는것은 사랑이 아니다.   애타게  찾는것은 쉽게 흩어지고 찾지 않아도 함께 있는 그것은 영원하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여서 불법이고 들었으나 들은것이 없으니 이다.     스승님은 출장을 가시면서 몇번이나 당부를하셨다. 가을에는 바람이 심하니 저녁에 불당의 창문을 잘 단속하고 불을 조심하라고 몇번이나 이르셨다. “예, 예”하면서 잔소리처럼 흘렸지만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일어나서 절 건물들을 돌면서 한번 다시 살펴보았다. 부처님께서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까봐 45년간 “잔소리”를 하셨다. 우리의 마음속도 산사의 창문처럼 단속을 잘해야 한다. 좋은 말을 듣고 좋은 법문을 배우되 해롭고 나쁜 말은 들어도 생각해서도 안된다. 잘못 들어온 그 바람에 불법을 밝히던 촛불이 쓰러지면 오히려 화재가 나듯이 우리 맘속의 촛불도 잘못된 바람에 휩쓸리면 불타버리고 재가 되여 우리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항상 의 법을 따라야한다.
6    먼곳의 작은 절6-행자오능의 수행일지-글을 읽는 인연 댓글:  조회:1743  추천:1  2016-02-07
  우리 절 옆에는 산을 끼고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다. 여름이면 제법 물이 많으나 가을이 되면 작은 냇물처럼 졸졸 흐를뿐이다. 그 계곡을 따라 산위로 올라가다보면 자그마한 호수가 있다. 아니 호수라기보다는 물웅뎅이라는 편이 더 잘 어울릴것이다. 비록 자그만하지만 제법 깊어서 여름이면 우리 몇몇이 수영도 하고 휴식을 즐기는 곳이도 하다. 가을이 되면 그 물웅덩이의 수면이 많이 낮아져서 무릎을 조금 넘을 정도로 준다. 물가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가득 떠있지만 물속에서 헤염치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숨기지는 못한다. 그 물웅덩이의 옆에는 커다란 바위산이 있다. 그 바위산 옆으로 세가닥의 샘물이 흘러내리는데 아무리 추운 겨울철에도 얼지않는다. 우리절에는       옛날 어느때 놓았는지 알수 없으나 수도물이 연결되여 있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밥을 짓거나 마실물은 전부 이곳의 샘물을 떠오게끔한다. 세가닥 샘물중 두가닥은 호수 안쪽으로 떨어지기에 가을철엔 물을 받지 못하여 한쪽에서만 물을 받아가군한다. 우리 여섯명이 밥을 짓고 음료수로 마시는 물의 양은 많이도 필요없어서 하루에 네댓번만 지게로 날라와도 충분하다. 우리는 절에서 규칙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각각 나누어서 한다. 나는 매일 우리들의 마실물과 공양음식을 지을 식료수를 길어야 한다.  삼시공양은 오정사제가 주로 했고 오공사형은 절안의 청소를 맡았다. 오진은 아직 어려서 땔감이나 주어오면 된다. 그런데 가장 쉬울것 같은 그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 여럿이 여가가 있으면 서로서로를 돕지 않으면 안된다. 가을이 되기전에 나무들을 많이 해와서 창고 옆 담벼락을 따라 가득 쌓아놓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일과처럼 되여서 계속 주어다 쌓는다. 가끔 산에 폭설이 내릴때가 있는데 그럴때 땔나무가 준비되여 있지 않으면 진짜 얼어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는 항상 준비하고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풍요로울때 준비하고 있어야 위기가 왔을때 비로서 잘 헤쳐나갈수 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정진을 많이 해야지 죽음의 임박에 닥쳤을때가서 부처님께 매달린들 무슨 소용있겠는가. 공부를 하다보면 하나,둘 모르는것이 생기기 시작하던데로부터 전체를 이해할수 없게 된다. 모르는것이 당연한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배우고 공부하는것이다. 처음 경전을 공부할때 나는 을 번역하신 분들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생각을 할때가 많았다. 경,률,장 세가지를 기본적으로 소화하지 못했다면 번역이 어려웠을것이지만 더 중요한것은 반야바라밀을 이루지 못했다면 진짜 번역을 할수 있었을까 의문이 갔다. 스승님이 내가 아주 어릴적 에 대해서 강해하시면서 말씀하실때 금강이라는 금강은  금강석이라는 금강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금강석이란 무엇입니까?’  물어보니 ‘금강석은 다이아몬드라고도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이다.’라고 하셨다. 당시 다이야몬드를 구경도 못한 나는 금강석은 그냥 아주 단단한 돌멩이 정도로 상상을 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진짜 금강석을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이제는 사진으로나마 보아서 금강석이 어떤 금속인지 대충 알만하다. 금강석으로 만든 칼은 모든것을 벨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법을 벨수 있고 또 모든법을 이룰수도 있는 최고의 경전이라고 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우리가 보통 보는 은 구마라집의 번역본인데 어떤 번역본을 보면 그 앞에 능단”能斷”이라고 번역한것도 있었다. 모든걸 끊을수 있다는뜻으로 그렇게 번역하였을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뇌를 끊고 성불할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된것이다. 가능하게 구마라집은 번역하면서 경전안에 이미 그 끊는다는 뜻이 포함되였다고 생각하여 경의 이름에 그 두글자를 넣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반야는 지혜임을 다 잘 알듯이 바라밀 이란 대안(피안-彼岸-강의 저쪽언덕 즉 지혜의 언덕)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경전을 보면 경명(경의 이름)의 마지막끝에 ‘다’자를 붙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 라고 읽는것이다. 몇번 써서 올린 내글의 댓글 읽어보면 뒤에 꼬리말을 다는 분들이 마하반야바라밀’다’ 라고 써놓은걸 볼수가 있었다. 우리가 읽는 260자의 을 어떤 사람들은 그냥 줄여서 ‘다심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유기를 읽어보면 손오공사제가 오조선사를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오조선사가 당삼장에게 가르쳐준 경이 바로 이 ‘다심경’이다. 서유기에서 앞의 마하반야바라밀이란 글을 빼버리고 그냥 ‘다심경’이라고 부른데서 우리도 쉽게 그냥 다심경이라고 부르는것이다.    금강경을 번역한 요진삼장법사구마라집(姚秦三藏法師鳩摩羅什)이 없다면 그렇게 우리의 모든 번뇌와 고통을 멸할 이 경전을 언제 접하게 되였을지도 모를일이다. 구마라집의 아버지는 당시 인도의 재상이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재상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려고 하였는데  그의 어머니의 반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의 공주였는데 그 재상이였던 남자를 압박하여 환속하게 한후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구마라집이다. 그런데 그 이후 아들을 낳은후 그 공주가 오히려 자신이 출가하려고 했다. 재상인 남편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다. 스님으로 출가하여 수련하고 있는 자신을 억지로 환속을 시켜 결혼까지 해놓고는 당신이 되려 출가한다니 안된다는것이다. 영화 한편을 찍어도 될만한 스토리다. 어찌됐건 그런 부모의 피를 받아 구마라집이 태여났다. 그는 열한두살때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수 있었다. 서른몇살때 그는 중국에 왔고 당시 중국은 역사상 남북조 시기였다. 당시 중국에서도 이 위대한 학자를 모셔오기 위해서 전쟁을 하여 세개의 나라가 소멸되기까지 했다. 고금중외 역사상 놀랄만한 사건인것이다. 이런 대 법사를 모셔오기 위해서 각나라에서는 모두 최선을 다했고 경제나 정치보다도 그를 청해오는것을 최대 목표로 삼기도 했다. 한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소멸하고 또 다른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평정하는등 당시 역사를 보면 정말 옛날 사람들이 철학과 인생에 대해 깊이 연구하려했으며 노력도 했음을 보아낼수 있다.    중국판본으로 된 을 보면 발원문같은것이 먼저 있다. 요즘 어떤 사찰에서 찍는 은 앞의 발원문이나 계송을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문을 이해하는데 모두 필요한 의의가 있기때문이다. 첫 계송을 보면 이렇게 되여 있다.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아금견문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我今見聞得受持, 愿解如來眞實意)    이 계송은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였던 무측천이 썼다고 한다. 무측천도 을 연구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정말 무측천의 글이라면 그의 경지가 당시에도 상당했음을 보아낼수 있다. 특히는 운하범(雲何梵)계 역시 그가 썼다고 하는데 정말 사실이라면 무측천 여황제의 높은 문학적인 경지를 엿볼수 있는 계기라 하겠다.             雲何得長壽, 金鋼不坏身      復以何因緣,得大堅固力      雲何于此经,究竟到彼岸      愿佛開微密,廣爲衆生說   우리글은 소리글이라서 중국글을 직역한 경전을 읽다보면 암호를 읽는것 같고 머리가 띵하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우리중 오진이 그런한데 중국글 배우기 싫어한다. 우리글을 배우면 되지 남의 글까지 배워서 뭐하냐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것은 민족적인것과 국가적인 차원을 벗어나서 배워야 한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뜻을 알고 읽은 경전의 효과성을 잘 알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영원한것이 없다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과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국가와 민족 모두 언젠가는 없어질수 있다. 중국이 더 이상 중국이 아닐수도 있고 대한민국이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닐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그런 깨침을 얻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는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부지런히 갈고 닦는 방법밖에 없다. 앞의 계송에서 물어보았듯이 “雲何得長壽, 金鋼不坏身”이라고 물었다. 즉 어떻게 하면 청정함과 장수와 영생불사를 얻을수 있을까요 하고 물어본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것이다. 어떻게 하면 길게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여야만 생명의 영원한 불멸의 그 본래를 찾을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한것이다. 이어서 ‘복이하인연,득대견고력’이라고 질문하였는데 그런 대 견고력(堅固力-굳고 튼튼한 힘)이란 우리 모든 인류가 얻고자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인연이 되여야만 그런 견고한 힘을 얻을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온것이다. 인간세상의 모든것은 완벽하게 튼튼한것은 없다. 견고하지도 않다. 수명도 길지 않다. 기껏살아봐야 백년 이백년이 최고다. 가정, 부모, 자녀, 부부의 사랑 모든것이 견고하지 않다. 언젠가는 헤여지게 돼 있다. 불경에서 많이 나오는 말인데 모임이 있으면 흩어질때가 있다는 말이다.  모일때의 인연이 다하면 우리는 헤여지게 된다. 중국말 속담에는 ‘천하에 끝나지 않는 연석이 없다.’란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불교철학에서 나온 속담이다. 오늘은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였다가도 어느날인가 또 돈을 잃을때가 있다. 죽으면 가져갈수도 없다. 권리도 손에 왔다가도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튼튼한 집을 지은것 같아도 언젠가는 무너질때가 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았다가 어느 순간 바람에 날려 없어지고 물결에 씻겨 사라지는것처럼 인생의 모든것은 그러하다. ‘雲何于此经,究竟到彼岸’이란 말은 우리가 을 연구하여 어떻게 그중의 방법을 찾으며 어떻게 삼계의 고해를 벗어나서 청정하고 항상 즐거움으로 가득찬 극락의 세계를 찾을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마지막 한마디는 부처님께서 그 미묘하고 비밀스런 법문의 문을 열어 우리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하는 뜻이다.   을 외울때 32장절로 되여 그 장절에 나누어 외우니 뜻의 이해도 쉬웠고 외우기도 용이했던 기억이 난다. 의 원시번역에는 장과 절을 나누지 않았다. 장절을 나눈것은 후세의 작품이라고 한다. 을 최종 삽십이품으로 나뉜분은 중국의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이다. 요즘 중국바람이 불어서 조기 유학을 보낸다고 중국으로 자식들을 보내여 공부시키는 부모님들이 많은데 그렇게 배워서는 현대의 중국어밖에 배워낼수 없다. 장사하고 사업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인 인생공부를 하려면 중국의 고대문학을 배워야한다. 중국문학을 배우려면 근대의 소설보다는 소명태자가 직접 편찬해서 묶은 (昭明文選)정도는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스승님이 멀리 길떠나실때면 오진의  공부를 나한테 맡기시는데 그만큼 머리 아픈 일이 없다. 오진은 장난이 심하고 뛰여다니기 좋아해서 억지로 쓰고 억지로 외워야만 머리에 넣는 중국글을 배우는것이 좋을리가 없다. 그러나 중국글을 모르면 그 뜻을 설명해줄수가 없어서 나중에 스승님이 돌아오셔서 질문하시면 큰 일 날 지도 모른다. 소명태자가 그렇게 품목을 나누고 분류를 하고 표제를 달아 놓으니 공부하는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그 표제를 단것도 정말 매 장절의 중심과 주제에 맞추어서 해놓아서 내 수준에 오진을 가르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오공사형은 속세의 나이로는 나보다 몇달 이상이여서 사형으로 됐지만 절에 들어온 시간은 나보다 늦다. 그러나 나보다 구족계도 먼저 받았다. 주지스님은 일년가야 한두번정도 법문을 해주시고 대부분 스승님이 직접 강해하신다. 절안밖의 일들도 모두 스승님이 대신 하신다. 그래서 많이 바쁘시다. 스승님을 모시고 절밖에 나가서 일보는 경우는 우리 셋이서 엇바꾸어 다녀오고 우리가 심부름을 다녀올때는 오진을 데리고 나간다. 스승님이 동안거 준비로 서울다녀올 일이 있으시다고 길차비를 하신다. 이번에는 오공사형이 따라갈 차례여서 우리 모두는 부러워했다. 오공사형은 스승님을 따라 서울 두번이나 다녀왔으나 나머지 우리 몇은 서울 구경도 못한 촌중이다. 이제 내일이면 스승님과 오공사형이 서울길로 떠나고 오정사형은 주지스님과 우리의 삼시공양때문에 바쁠것이다. 매일 산에 가서 물을 긷는 일은 이제는 신체도 단련할겸 산천구경도 할겸 참 좋은데 오진을 공부시키는 일에는 걱정이 앞선다. 의 제일 첫 장절은 “법회인유분”(法會因有分)이다. 법회를 열게된 인연을 설한 장이다. 내일부터 오진과 공부를 하게 된 인연은 무엇일까? 내가 여기서 이 생을 살게된 인연은 또 무엇이며 인터넷 앞에서 이런 글을 쓰게 된 인연 또한 무엇일까? 의문이 가득 피여오른다.
5    먼곳의 작은절 행자오능의 수행일지5-오진의 도포 댓글:  조회:1570  추천:0  2016-02-03
  오늘은 주지스님의 심부름으로 우리 절에서 가장 가까운 봉래마을(가명임)로 내려왔다. 오고가는데 몇시간씩 걸리고 교통 또한 불편해서 마을사람들도 우리 절을 많이 찾지 않는다. 거리와 교통이 불편한것도 있겠지만 마을 인근에 또 다른 사찰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봉래마을의 동북쪽 산골짜기에 (가명임)라는 아름다운 사찰이 하나 더 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사찰은 명당자리에 자리잡은듯 했다. 마을에서 얼마 멀지도 않고 길도 잘 포장되여 차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었다. 게다가 절 주변의 단풍나무들이 가을이면 그 빛갈이 짙어져서 여간 아름답지 않다. 가을의 향이 짙어지면 단풍 보러오는 선남선녀들로 북적이는 봉래마을의 작은 명소이기도 했다. 봉래사는 신도들도 꽤 있는듯 싶어서 정기 법회도 많이 연다. 우리 절 하고는 한마디로 천양지차다. 우리 절은 다니는 신도도 일년가야 이십여명정도고 그것도 주지스님이나 우리 스승님의 옛 도반들이 대부분이셨다. 봉래사 주지스님과 우리 주지 스님은 서로 가끔씩 서신이 오고 갔는데 우체국이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일은 우리 같은 행자승들이 해야했다. 봉래사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거나 행사가 있을때면 꼭 우리 주지스님께 서찰을 보내오는데 주지스님이 그래서 절문을 내려가시는걸 나는 여직 본 기억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회신을 써서 보내는 정도이고 일년에 한두번 정도 우리 스승님이 내려가셔서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우리 넷중에서는 어린 오진을 빼고는 모두 봉래사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스승님이랑 참가했던적 있다. 그때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놀라기도 했다. 이번에 서신전하러 갈때 오진이 너무 따라가겠다고 졸라서 스승님께 허락을 구하고 데리고 나섰다. 봉래사에 우리 주지스님의 서신을 전하고 점심공양을 먹고 다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났다. 오진은 절 밖에만 나오면 뭐나 신기한듯 두리번 거린다. 하긴 나도 오진만한 나이때는 그랬었다. 요즘은 봉래마을도 좀 한산한듯한 느낌을 준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지나다니는 젊은이와 아이들을 볼수 있었는데 오늘따라 다니는 거리는 많이 썰렁한 기분이다. 가끔씩 길에 다니시는 분들을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직장 찾아서 더 큰 도시로 나가고 없는것이다.  우리 절로 들어가는 길목에 이르렀을때 까만 고급승용차 한대가 우리 옆에 서더니 한분이 차안에서 합장하며 말을 건넨다. “스님, 여기 봉래사 어떻게 갑니까?” 길을 물어보는것이다.          봉래사 가는 방향을 알려주고 돌아서는데 그 차에서 한사람이 내리더니 합장하고 인사하며 물어온다. “스님, 스님은 봉래사 스님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요앞 남산사(가명)에 있습니다.” 오진이 앞질러 대답했다. 그분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아, 여기에 봉래사 말구도 다른 사찰이 있었나보죠? 그럼 왔던김에 스님들 절에 다녀옵시다.” 그분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사찰은 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은 암자에 가까운데 손님들을 모시고 간다는것은 무리였다. 일단은 차가 통하지 않는 산길이라 걸어서 올라가야 하고 빨리걸어서 두시간정도 걸리는데 요즘은 가을 태양이라 네시가 좀 넘으면 날씨가 어두워진다. 손님방이 전혀 없어서 손님들이 기거할 곳도 없다. 한번은 스승님을 찾아온 손님을 오공사형의 방에 모시고 오공사형은 어쩔수 없이 불당 한구석에 자리를 마련하였었는데 그때문에 스승님이 주지스님께 한참을 야단맞기도 했던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지스님은 손님을 별로 반가와 하지 않으신다. 우리 절이 커지지 못하는것은 그런 원인도 있다. 주지스님의 그 영향을 우리 스승님도 바로 전수 받아서 수행정진하는데 방해가 된다면서 법회도 열지 않고있다. 신도들이 많이 찾아온다면 절의 물질적인면에서는 보충이 되겠으나 수행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크고 작은걸 견주어볼때 조금 어렵더라도 조용히 정진하는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 봉래사로 가보시라고 권고했더니 오히려 더 열성스레 우리 절에 가보겠다며 졸랐다. 늦으면 늦는대로 알아서 내려올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막을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냥 놔두고 오진을 이끌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뒤로 승용차가 따라 오는듯 하더니 얼마못가서 멈추고 말았다. 우리 절로 가는 길은 본래 수레가 다닐수 있는 길이였기에 옛날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차들도 다닐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마을사람들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산에 올라와서 일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몇년새 길가에 가득 자란 싸리나무와 엉겅퀴 나무들이 이제는 길을 다 메우고 있었다. 한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작은 오솔길밖에 없고 그길도 비가 내리면 진흙으로 가득차서 두 발사이에 흙덩이가 들어붙어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게 된다. 하기는 요즘 이 길을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 절 사람들밖에 없는듯 했다. 뒤따라 오던 두 거사님은 한시간 정도 따라 걷더니 힘든듯 숨을 몰아쉰다. 구두를 신고온것이 후회된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잠간 멈추어서 그 거사님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서 무엇때문에 우리 절로 가려고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분들의 뜻은 이러했다. 요즘 경기가 좋지 않은것도 있지만 오랜시간동안 사업이 부진하여 속을 태우고 있던중 그분의 어머님이 점치러 갔는데 그 점치는 사람이 이야기 하기를 봉래마을 부근에 절이 있는데 그 곳 절에 깨우침을 얻은  스님이 입던 도포자락을 조금베여 몸에 지니면 사업이 크게 다시 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봉래마을로 내려왔다는것이다.  그분들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수 있었기에 나는 오히려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내려고 했다. “우리 절에는 깨우침을 얻은 스님도 없고 그냥 자그마한 암자일뿐입니다. 아직도 한시간 정도 더 올라가야 할텐데 그 시간이면 아예 봉래사로 다녀오시는것이 나을겁니다. 봉래사의 주지스님은 덕이 높으신 큰 스님이십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그 거사님 또한 고집이 셌다. 이런 깊은 산골 절속에는 반드시 덕이 높은 큰 스님들이 산다는 것이다. 웃음이 나갔지만 그냥 내버려 둘수밖에 없었다. 세속에서 부귀와 영화를 쫒는것은 뜬 구름을 잡으려하고 물속의 달을 건지려는것과 같은 행동이지만 사람들은 큰 스님의 도포자락을 잡으면 그 뜬구름을 잡을수 있고 물속의 달을 건질수 있을줄로 안다. 진정 발심하고 불도를 따르는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얻어 성불하려는것이나 사람들은 세속적인 부귀와 평안을 찾으려고만 한다. 본말(本末-시작과 결과)이 거꾸로 된 선택인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그 거사님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맞습니다. 스님,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나이가 이미 오십이 됐고 어머님도 모셔야 하고, 아내와 자식들도 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 팽개칠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이다. 같은 피로 엉킨 사랑하는 권솔들을 버리고 입산 수도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할것이다. 내가 그분이라도 쉽게 결단을 못했을것이다. 우리가 반야바라밀을 제대로 깨우치려면 먼길을 걸어야 한다. 반야바라밀에도 친척 친구, 가족들이 있다. 그것이 육도(六度)이다. 육도윤회의 육도가 아니라 여섯가지를 넘어야 반야바라밀을 이룰수 있는 그 육도이다.  보시(布施), 지계(持戒),인욕(仁辱),정진(精進), 선정(禪定),반야(般若)를 이루어야 원만해진다. 이것을 수지하고 행하는것을 불교에서는 행원(行愿)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시를 행하며 어떻게 계를 지키며 어떻게 욕됨을 참으며 어떻게 부지런히 해야하며 어떻게 선정의 공부를 하여 그 결과를 몸소 이룰것인가하는것이다. 그래야 비로서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마침내 부처가 되는것이다.  반야의 그 앞의 다섯가지가 바로 반야의 친척과 친구들이다. 그 다섯가지를 수지하고 검증하여야 비로소 반야지혜에 이른다.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를 떠나서 출가하는 스님들을 비속하고 인정없고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족과 친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어찌 중생을 사랑할수 있으리오. 가족과 친지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더 큰 자비행을 실천하는것이 불도를 닦는 진정한 마음인것이다. 그것을 권속반야(眷屬般若) 라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우리절에 도착했다. 주지스님은 선방에서 예불중이여서 나오지 못하고 스승님만 나와서 맞아주셨다. 스승님은 나와 오진을 나무람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와 오진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저녁 공양준비를 하는 오정스님을 돕는사이 스승님이 불러서 나가보았더니 두 거사님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공양을 드시고 가라고 해도 그냥 내려간다고 했다. 아까 올라올때 나의 이야기를 들어서 절의 형편을 알고 있는데다 정작 와보니 정말 자그마한 절에서 저녁공양까지 먹고갈 마음도 없나보았다.  벌써 산사에는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해졌다. 스승님은 우리더러 오진의 옛날 입던 도포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 거사님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잠간 어렸다. 오진이 아까 함께 산을 오르던 그 어린 동자중임을 알고 있는 까닥에서였다. 나는 옛날 오진이 입던 옷중 가장 낡은것을 창고에서 골라서 스승님께 건네주었다. 스승님은 그 옷을 정성들여 싸써 드리며 말했다. “두분 거사님이 모처럼 우리 절에 오셔서 보시도 하시고 도움도 주셨지만 우리절에는 정말 득도한 스님이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마음을 비우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절에서 제일 아무 생각없이 경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오진일것입니다. 아무 욕심도 바램도 없이 경을 읽지요.. 잘살게 해달라는 생각도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경을 읽는 오진의 도포가 영험하다면 아마 제일 영험할것입니다.” 그 거사님들도 스승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더 이상 말못하고 그 도포를 받아 넣고 산을 내려갔다. 마침 옆에 있던 오공 사형이 물었다. “스승님,정말 오진의 도포가 제일 영험한건가요? 그럼 오진이 크기전에 도포를 많이 사줘야 겠어요.” 그 말에 스승님도 빙그레 웃으셨다. “너희들중 버릴 옷이 어디있느냐, 오진은 아직 어리고 한창 키가 크고 있으니 옛날 작아서 못입는 도포를 줄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말에 우리 모두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럼 그 거사님께 하신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않습니까?” 오정사형이 의아한듯 물었다. “그게 어찌 거짓말이더냐, 너희들중 내가 보기에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비우는데는 오진이 첫째다. 비록 깨달음을 얻은 비움은 아니지만 우리절에서 누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수 있겠느냐. ” “그럼 주지스님은요?” 오정사형이 다시 물어본다. 그말에 스승님이 머리를 긁적이다 말고 오정의 머리를 탁 치신다. “얼른 저녁공양 준비를 하거라. 주지스님의 몇벌안되는 도포를 그분들한테 주었다가는 우리 모두 절에서 쫒겨날거다.” 그말에 우리는 희희낙낙거리며 공양전으로 달려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스승님의 말씀에 도리가 있는것이다. 경전을 읽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내용도 느낌도 없이 그냥 중얼중얼 읽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겉으로는 경을 읽으나 마음속에는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찬 사람들 또한 있다. 득도한 스님의 도포자락으로 행운을 찾으려는 것이나 스승님이 오진의 도포를 주어보낸것이나 모두 방편일 뿐이다. 우리 스승님이 우리에게 법문을 강해(講解)하실때면 머리에 잘 들어오는데 주지스님이 법문을 이야기하시면 너무 심오하게 말씀하셔서 우리는 대부분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세미나나 강의에 참가하게 되면 강의 잘하시는 분들은 자그마한 사례하나 만으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이해하게끔 만든다. 불경을 보아도 부처님께서 많은 비유를 들어서 제자들에게 그 뜻을 이해시키고 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마찬가지로 법문을 잘하시는 스님이 있는가하면 문자반야에 능통하신 스님들이 계신다. 법문을 잘하고 문장을 잘 다듬어서 법문을 듣고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환희심을 가질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중의 방편(方便)반야인것이다. 우리말에 더 가깝게 번역한다면 방법반야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얻는과정에서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다. 방법반야를 깨우친 스승님을 옆에모신 제자는 행운스럽기 그지 없다. 어떤 사찰에는 천수관음을 모시기도 하는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영험과 능력을 모신것같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뜻이 포함되여 있다. 한 사람에게 천수천안(千手千眼)이 있다면 그 능력과 신통력은 대단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보살행이란 대자대비의 마음이고 그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천수천안의 신통력과 같은 무수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방법반야바라밀이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다양한 분류로 나눌수 있고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수지하는 방법 역시 다양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득도하여 입적하시기 전까지 45년간 무수히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경전마다 사례와 이야기가 다르고 방법이 틀리다. 어느것이 맞고 틀린것이 없다. 모두가 맞고 모두가 틀렸다.   반야바라밀은 그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또 구하기도 어렵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수지하고 인증하고 공부하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이다.
4    먼곳의 작은절- 행자오능의 수행일지 4-반야지혜아니? 댓글:  조회:1546  추천:0  2016-01-27
산사의 가을은 도시보다 훨씬 빨리 다가온다. 산기슭의 단풍나무가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하는듯 하더니 어느새 서리가 내리고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가을 추위에 승복을 여미게 된다. 산사의 가을 하늘도 도시의 가을하늘보다 훨씬 푸른듯 싶다. 가끔씩 우리 절 주변의 도시들에 내려가 보면 뿌연 자동차 매연에 하늘마저 뿌옇게 보일때가 많다. 도시와 시골의 경계는 요즘 그렇게 공기로 구분할수 있는듯 싶다. 도시의 사람들은 삼림욕을 한답시고 시골을 찾는다. 시골사람들은 삼림욕이고 뭐고 보다는 돈이 중요하여 그냥 무작정 서울을 바라고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서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자리와 경계를 찾게 된다. 경계(境界)라는 말은 중국글자의 직역문이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라고 한다면 현상(現象)이라는말이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주해까지 단다면 현상을 나타낸 그 자리라고 말할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연계에서의 관념일뿐 진정한 번역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우리말의 가장 가까운 뜻은 경계의 직역보다는 경지라는 번역이 더 가깝다. 경지는 경지일뿐이다.  번역의 정확성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직역을 하고 그 뜻에 주해를 다는것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당나라의 시인은 ‘천강유수 천강월, 만리무운 만리천’이라는 시로 자신의 경지를 나타냈다. 하늘에는 달이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땅위에 있는 천만갈래 강물속에 비워진 달은 매 강물마다 그 그림자를 나타낸다. 하늘에 구름한점 없을때면 하늘은 일망무제한 맑은 하늘일 뿐이다. 깨달음이나 앎이나 도(道)를 닦는 사람들이 이러한 경지를 가지고 있다면 쉬운일이 아닐것이다. 그만큼 시인이나 도인이나 작가나 아니면 음악가나 모든 직업과 인생살이에 사람들은 그 경지를 담고있다. 중국의 고대의 약산(藥山)선사는 ‘구름은 청천하늘가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다네’ 라고 읊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된 표현인것이다. 하늘의 구름은 하늘가에 떠있고 병속에 물은 그대로 상위에 놓여져 있다. 하나는 높은 하늘가에 떠있어서 멀고 요원(遙遠)하지만 하나는 바로 손끝이 닿는 탁상위에 있어서 그렇게 가까운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인생에는 수시로 이러한 경지를 느끼게 된다. 고통스러울때는 고통스러운 생각이 가득 머리속에 차고 고통이 아직 오지 않을때에는 고통이 곧 다가올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것은 고뇌의 경지일것이다. 기쁠때는 생각만해도 흥이나고 득의양양하다.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기 싫어한다. 앞을 내다보면 얼마남지 않은 세월이지만 힘들고 어려운것만 떠올라서 싫다. 우리의 주지스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시다. 우리 절은 비록 작지만 절안의 마당 변두리에는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서 나무그루터기로 자그마한 걸상들을 만들어서 놓은것들이 있다. 이 가을날 해볕이 내리쬐일때면 주지스님도 해볕쪼임을 할겸 그 나무걸상에 가끔씩 앉아계신다. 주지스님은 참으로 자애롭고 편한 분이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참으로 어렵게 대한다. 특히 우리 중 제일 어린 오진은 주지스님을 무서워까지 한다. 나는 절에 있으면서 한번도 주지스님이 오진을 꾸짖거나 나무람하는걸 들어본적이 없다. 그런데도 오진은 주지스님을 어려워하신다. 물론 나도 주지스님이 많이 어려운것은 사실이다. 주지스님께서는 그 나무걸상에 혼자 앉아 계시다 저도 몰래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을때가 있다. 무슨 생각을 하시다 그러시는지는 알수 없으나 아마 당신의 소년시절을 생각하면서 그러시는게 아닐까 싶다.  어르신들은 옛일을 떠오리며 그때 그 경지를 되살려 보는것이다. 그때는 참 철도 없었지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것이 모두 경지라면 경지이다. 경지는 느낌으로 깨달아야지 말로서 전달할수가 없는것이다. 부처님께서 부족한 인간의 언어로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려고 하셨지만 그것은 방법이고 방편일뿐이다. 수련을 하던 공부를 하던 우리 모두는 한순간 한걸음마다 부동한 경지를 느낀다.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이라면 오늘은 이러한 영감이 떠올랐다가 내일은 또 다른 영감이 떠오른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어떤 그림을 그릴때 문뜩 특별한 심득을 느낄때가 있다. 그것이 그 상황에서의 경지인것이다. 장인이라면 집 리모델링 일을 하면서 벽돌 한장 올려놓고 시멘트를 한번 바르는데 다시 손댈곳이 없이 평평하고 깨끗하게 될때가 있다. 그때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어떤 느낌을 얻는다.  ‘아~원래는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는 그 순간이 그의 경지인것이다. 때문에 경지는 모든것을 담고 있다. 불법을 배우고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한치의 진보가 있어도 그 순간의 경지가 다르게 느껴진다. 수련의 높이만큼 인생의 경지가 달라지는것이다. 맹자(孟子)는 그의 저서에서 ‘공자는 동산에 올라서 내려다 보고 노(魯)나라가 작다고 여기고, 더 높은 태산(泰山)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천하는 작다고 했다.’ 그것이 높이 올라가면서 느낀 공자의 경지를 말한것이다. 불법을 배우지 않고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경지가 있을까싶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경지는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고뇌의 경지가 있는것이다. 옛사람들의 시를 보면 “백년 삼만육천일 병중이 아니면 근심속이라네” 라고 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경지이다. 번뇌망상으로 가득차고 아픈 걱정, 늙어가는 두려움등으로 가득찼다. 안질이 어두워져서 걱정이고 머리가 희여져서 안타깝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번뇌망상을 은근히 즐기는듯 하다.   불법을 배우는것은 지대한 용기가 없으면 할수 없다. 삼보에 귀의 한다고 ‘삼귀의’노래도 부르지만 진정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하는 경지가 중요하다. 옛사람들은 ‘불법을 배우는것은 대장부가 하는 일이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용기로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제왕장상은 가지기 위한 용기라면 불법을 배우는것은 버리기 위한 용기이기 때문이다. 진정 불법을 수지하는 사람들은 뛰여난 경지, 흉금, 기백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그들의 그런 경지를 제왕장상의 욕심으로 가득찬 자그마한 용기가 어찌 비할것인가? 이러한 경지는 모두 실상반야(實相般若)에서 온다. 그 근본적인 도, 혹은 깨달음, 혹은 그 형이상학적인 무언의 지혜의 반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진정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지혜는 무궁무진한것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을 라고 부르기도 하고 자연지(自然智)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기 본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의 창고가 깨달음을 통하여 활짝 열리는 순간 스승이 없이도 이 세상의 지혜를 다 알게 되는것이다. 그렇게 천상천하 모르는것이 없는 경지가 바로 경지반야인것이다. 반야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문자반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수 또한 없다. 이 글을 쓰게된 인연(緣起)은 블로그에서 누군가 우연히 보고 남긴 꼬리말때문이다. 글을 쓸때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나절로 써서 즐기려고 했었는데 누군가가 보고 꼬리말을 하나 단것이 인연이 되여 게으름을 죽이고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것이다. 문자를 다듬는다는것은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문자속에는 엄청난 지혜가 들어있다. 문자는 우리의 언어를 기록하는 작용을 하면서 만들어졌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사상과 생각을 부호로 적어놓은것이 한글이고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부호로서 표현한것이 중국글이다. 기타 영어나, 독일어나, 러시아어 같은것도 모두 그들의 사상, 언어의 기호인것이다. 문자 역시 그 경지가 있다. 아름다운 글을 읽으면 마음속에 형언할수 없는 환희심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문자의 경지인것이다. 아름다운 글을 만들려면 문자에 대한 지혜가 있어야만한다. 어떤 사람들은 필만 들면 명필이고 명작이 나온다. 어떤사람들은 말 한마디 해도 문장이 만들어지고 멋지게 표현된다. 한마디 한마디가 아름답고 우아한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높은 문학적 경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자반야이다. 한국의 사찰에서 가장 많이, 널리 읽히는 책이 일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 경전을 우리는 중국을 거쳐서 들여왔다. 중국에서도 금강경은 아주 중요한 경전으로 종단에서는 널리 읽히고 있다. 금강경을 번역한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뛰여난 문자반야 덕분이 아니겠는가 싶다. 우리 글은 소리글이기에 그 소리만 들어서는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래서 경전을 이해하고 수지하기 위해서는 중국어 공부가 필요한것이다. 인도나 스리랑카에 가서 원시경전을 배우기 위해서 어학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뛰여난 문자 반야를 소지하지 못하고는 그냥 현재 있는 이나 사찰에 소장되여있는 팔만대장경만 가지고도 우리 평생 배우고 닦기에는 충분한 내용이다. 도 그렇고 도 그렇고 그 문장의 한글자 한글자가 빛이나고 아름답다. 중국고대 문학의 또 다른 형태의 문자표현 형식을 이룬것이다.  후에 소설 의 주인공이 였던 현장법사를 비롯한 여러명의 법사님들도 경전을 번역하였지만 (구마라집)의 번역처럼 문자가 아름답고 뛰여난것은 아니였다. 그것이 바로 문자반야의 차이인것이다. 때문에 똑같이 공부하고 글을 읽어도 누구나 다 문학가가 되는것은 아니다. 똑같은 수행자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냥 수행을하는 사람으로 인생을 마감하지만 어떤 사람은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 그것은 문자반야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것이다. 내가 예전에 시를 배우면서 써놓았던 시조 한편이 있다.   소시적 글배울제 기여가다 일어서니 둥글고 네모난건 나이드니 절로풀려 승패영욕이 가슴속 하늘인걸 언제면 알리오.      어릴적에 글을 배울때는 천자문을 외우고 공자, 맹자의 글을 외우느라 진땀을 뺏는데 그것은 공부의 경지때문인것이다. 둥글고 네모난건 이런저런 우리의 인생살이 지식과 경험들인데 억지로 알려고 할때는 안되던것이 어느쯤 나이드니 절로 알리게 되는것임을 말한것이다. (스승님이 보시면 젊은놈이 나이소리 한다고 욕 엄청 먹을 각오하고있음.ㅋㅋ) 승패와 영욕은 어찌보면 우리의 마음속의 경지인데 그걸 깨달을때가 언제일까 하는 감탄을 한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그 당시 글을 적을때의 경지일뿐이다. 논어를 보면 공자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삼십에 서고 사십에 의혹되지 않는다’(三十而立, 四十而不惑)라는 말이다. 너무 유명한 말이기에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듯 싶다. 좀더 확실하게 하기위해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세우고, 삼십에서고 사십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십에 하늘의 명을 알았고 육십에는 이순(耳順-어떤의견에도 순수하게 귀를 기울인다는 말), 칠십에는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었다.”로 돼있다. 공자 스스로의 생애를 요약한 말로 전해지지만 한편 그분의 인생에서 발전을 거듭하는 순간순간의 경지를 기록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에는 뛰여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작가님들이 정말 많다. 그만큼 뛰여난 감수성과을 가진 민족인것이다. 불교계를 볼때만해도 뛰여난 큰스님과 선사님들이 참말 많으시다. 우리 스승이신 단지스승님도 아주 훌륭한 분이시다. 지난번 스승님이 사찰을 내려갔다가 돌아오실때 가져오신 책에는 법정스님의 책도 몇권있었다. 공부시간이 끝나서 휴식할때 우연히 법정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란 책을 읽고 그분의 높은 경지에 환희심이 절로 나는걸 느꼈다. 나는 법정스님을 직접 뵌적은 없지만 그분의 높은 경지와 문자반야가 그러한 주옥같은 글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싶다.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과 환희심이 일게끔 하여주는 그런 문장이 문자반야의 결과물인것이다. 옛날에 중국 청나라시절에 어느 작은 절에 물을 길어나르는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적에 글 한자 배운적 없었는데 어느날인가 깨달음을 얻고 반야바라밀을 얻었다고한다. 그 순간 예전에 배운적없던 글도 쓸줄 알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시마저 지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 시절에는 남자들도 긴 태머리를 길러야 했는데 과거를 보는 젊은이들이 그 스님을 찾아가서 어느어느 문장이 어느 책에서 나온 말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분은 바로 그 말은 어느책 어느페이지에 나온 말이라고 알려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사람들이 찾아가서 중국의 고전 명작인 “홍루몽”중의 한구절을 물어봤는데도 틀림없이 대답하더라는것이다.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이 한창일때였는데 어느 부자가 아편을 떼고 싶으나 그 인이 박혀서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스님을 찾아가서 중이 되겠다고 했다. 스님이 그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줘서 머리를 깍는데 또 아편인이 발작한것이다. 눈물, 코물이 흘러내리고 고통스러워 발버둥치고 있을때 그 스님이 그의 등을 한번 탁 치면서 “벗어라”하는 순간 괴로움이 사라지고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그후부터 그는 다시 아편을 손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좀 신비하게 들리는 이야기지만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보통사람들은 반야를 신통력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우리의 총명으로 생각해내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기억력이 남다르다. 소동파는 “금생(今生)에 글을 읽기는 이미 늦었다”라는 시를 쓴적이 있다. 우리가 많이들 말하는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적절한 시기다.’와 완전히 틀린 말이라서 의아해 하겠지만 소동파가 가리키는 바는 다른곳에 있다. 즉 책은 일찍 읽어야한다는 말이다. 이 생에서 하는 공부와 읽는 책은 내생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었을때는 과거 천만번의 윤회와 삶속에서 배운 모든 지식들이 모두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글 읽는 속도가 느려서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읽는다. 이 글처럼 길게 쓴 글은 읽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한번에 열줄을 읽을수 있으며 한번 읽은 글을 쉽게 잊어먹지도 않은다. 그것이 문자반야의 경지반야 인것이다. 우리 사찰은 너무 작아서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도 몇칸되지 않는다. 지난 봄까지만해도 오정과 오진은 한방을 썼다. 이번 여름에 불전옆의 산중턱을 기둥삼아 세워져 있는 옛날 창고로 쓰던 작은 방을 치우고 따로 자리를 내었다. 스승님이 지휘하시고 우리가 한달간 일해서 마침 가을이 되기전에 마무리지었다. 아직 어린 오진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 그 방에 가기 싫어해서 내방과 바꾸어 주었더니 너무 좋아서 몇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새방이라고는 하나 건물자체가 참 오래된 건물인데다 바로 뒷쪽벽이 산중턱이라 축축한 습기가 배여나왔다. 요즘은 추위때문에 온돌방에 나무를 주워 불을 지피니 제법 따뜻해져서 살만하다. 우리 사찰은 내가 있기전부터 재래식 남방을 써왔다. 요즘은 석유보일러나 전기보일러도 꽤 많이 나왔다고하지만 가난한 절에서 그런걸 살 엄두도 나지않고 또 별 필요도 없었다. 절밖을 나가면 여기저기 널린것이 나무들이라 우리가 부지런만 하면 땔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절 아래 봉래마을(필요상 가명을 썻음)은 그나마 큰 마을인데도 요즘은 경기가 나쁜지 많은 집들에서 석유보일러를 빼버리고 연탄보일러를 쓰고 있다. 그런데 그 연탄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모두들 걱정하는 모습이였다.   텅빈 방안에는 공부할때쓰는 작은 책상 하나하고 이불장 하나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창문이 앞쪽에 한개 달리고 옆면에 한개 있으나 뒤면은 산중턱이라 창이 없다. 그래서 허연벽이 보기가 흉한듯해서 나절로 종이를 얻어 시조 한편 써서 붙혔다.          노자는 도를찾고 부처님은 버리라네        무엇을 얻으려나 상선약수(上善若水)아니더냐        모름을 알면서도 반야지혜 안찾을까.    스승님이 어쩌다 내 방에 들러 보시더니 그 시조를 읽어보고 하시는 말씀에 얼굴이 붉어졌다. “니가 반야지혜를 아냐?”  
3    먼곳의 작은 절-행자오능의 이야기-실상반야 댓글:  조회:1767  추천:1  2016-01-26
  오늘도 새벽 예불을 드리고  아침공양전에 경직된 근육도 풀겸 사찰 주변을 걸으면서 몸을 풀었다. 주지스님께서 우리가 여럿이 뭉쳐다니는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비록 다 합쳐서 몇명 안되는 우리지만 그래도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아침 운동을 한다. 나는 새벽예불을 마치면 한결같이 사찰뒤편에 있는 산길을 따라 산위로 등산한다. 절 뒤편에 있는 산은 높지가 않아서 우리 절에서 출발하면 반시간 정도면 도착할수 있다. 그러나 인근의 마을들에서 산길을 따라 등산하려면 두세시간은 쉬이 걸린다. 오늘 따라 자오록하게 안개가 낀 산길은 유난히 미끄러웠다. 어제 밤 내린 한줄금의 비 때문인듯 했다. 어제 밤새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쳐서 나는 큰비가 내리는줄 알았는데 잠간 소나기가 내리고 그쳤었다. 천둥이 크게 친다고 해서 큰 비가 내리는것은 아닌듯 싶다. 올라가는 사이 몇번인가 넘어질번 했다. 이 산길은 우리 몇몇이 계속 다녀서 낸 산길이나 다름없어서 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워낙 다니는 사람들이 적어서다. 예전에는 나무군들이 많아서 길이 꽤 넓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나무를 하는 사람도 없고 또 이 촌구석으로 뭐 볼일도 없는지라 다니는 사람이 영 없다. 그래서 사찰 주변에서는 작은 동물들을 심심찮게 보군한다. 새벽이면 항상 일찍 일어나는 새들의 삐쬬롱 삐쬬롱 우는 울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산정상에 올라가는데 여느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길이 미끄러워서다. 산위에는 큰 바위가 있다. 그 바위 옆에는 작은 나무가 몇그루 자라고 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산위에 올라가 그 바위위에 서면 멀리 인근의 마을에서 아침공양을 준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수가 있었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때문이다. 안개가 깊이 끼면 우리는 멀리 볼수가 없다. 가까운 곳만이라도 보인다면 그렇게 가겠지만 때로는 바로 눈앞의 길도 보이지 않을때가 있다.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어두운 밤이면 두려워지는것과 같은 도리다. 대부분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것만을 바라보고 멀리 볼줄 모른다. 아니 멀리 보고자 해도 보이지가 않는다. 욕심과 번뇌 망상이 안개처럼 눈앞을 가득 가렸기 때문이다.  아침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산길이 미끄러워 늦게 올라온탓에 내려가는 시간이 늦을듯 했다. 급히 내려오다나니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다. 옷을 더렵혀서 오늘은 꾸중을 들을듯 했다. 아침내 즐겁던 기분이 사라졌다. 옷이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겠지만 넘어져서 옷이 더러워진 작은 일때문에 기분이 잡쳐버렸다. 사람이란 그런가 본다. 방금까지도 즐거웠다가 또 잠간새에 짜증나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것이 번뇌망상일 것이다. 반야지혜는 모든곳에 있다고 하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곳에 반야 지혜는 있다. 내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그 곳에도 어떤 깨달음이 있을듯 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아리숭한 그 감감을 쫒기 위해 다시 한번 쿵 하고 넘어져봤다. 승복이 더욱 더럽혀졌지만 오히려 그 아리숭하게 보이던 깨달음도 사라지고 없어졌다. 그냥 넘어지면서 다친 엉덩이만 얼얼할 뿐이다. 깨달음은 억지로 얻는것이 아니라는 실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억지로 얻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노력마저 포기하면 안된다. 반야지혜중 실상반야(實相般若)라는것이 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을 명심견성(明心見性)의 본질이라고 한다. 보일락 말락한 그 깨달음의 실체를 찾고자 절로 내려오는 내내 뒤로 넘어져도 보고 옆으로 뉘여도 보고 앞으로 쓰러져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고 승복만 버린꼴이 되였다. 중국 한자의 문자로 볼때 깨달음(悟道)이란 길을 찾았다는 뜻이 된다. 그 길은 형이상학적인 어떤 본질이고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모든 사물의 근원이 되는 그 공성(空性)이다. 이걸 가르켜서 불교에서는 실상반야(實相般若)라고 한다. 말그대로 실상(實相)은 진실한 모습이다. 우리 중생은 사물의 진실된 실상을 보지못하고 그 표면만 본다고 부처님께서는 가르치셨다. 대부분 사람들의 수박 겉핥기식의 인생을 말씀하신것이다. 실상반야는 반야지혜의 일부이다. 보통 범인(凡人)의 총명은 의식의 부분이고 우리의 지식 범위내에 국한되여있으며 우리 현재 가지고 있는 경험과 감각으로 상상할수 있는 범위를 가르킨다. 영어로는 그것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깨달음 즉 그 우주본연(本緣)의 반야지혜는 우리의 보통 지식이나 지혜,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거나, 토론하고, 연구하기가 어렵다. 부처님은 항상 불가사의(不可思議)라는 말씀을 쓰셨다. 중생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도무지 언어로서 그것을 설명해서는 안될것에 대하여 그러한 표현을 쓰신것이다.  불가사의는 불능사의(不能思議)가 아니다. 생각하고 깨닫기 어려울뿐이지 불가능한것은 아니란 말이된다. 불가(不可)란 글을 중국한자로 보면 가린다, 막는다. 볼수 없도록 한다,는 등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즉 보통의 지식이나 의식형태로 추측하거나 생각함으로 얻을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뜻이된다. 실상반야의 지혜를 우리의 생각만으로 얻을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망상의식(妄想意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뿐이다. 불가사의란 말은 우리더러 수지하고 체험함으로서 몸과 마음으로 구하고 증명하는 경계(境界)이다. 그것은 생각으로 얻을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에 도를 묻는 젊은이에게 하늘의 달을 가르켜보여 주었더니 그 젊은이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본질적인 지혜를 얻지 못하고 그 겉모습만 쫒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날의 선종 스님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서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도록 도왔다고 한다.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도를 묻는 제자에게 똥막대기를 쑥 내민 스님이 있었는가 하면  바람에 나붓기는 기발을 가르켜서 깨달음을 준 스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지하고 인증하는 과정에서  얻는것이지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해서 얻어지는것은 아니다. 중국의 도교에서 깨달음의 그 경지를 도(道)라고 표현했는데 그 도는 어디에나 어떤 시간에서나 모든 곳에 있다. 그것을 어떤 문자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처님께서 옛날 꽃 한송이를 드시니 마하가섭존자가 빙그레 웃는걸 보고 진정 깨달음을 얻었음을 기뻐하셨다고 했는데  그런 깨달음에는 선후가 있고 깊이가 있는듯 싶다. 깨달음의 그 도를 도라고 표현하면 뭔지 알아듣지 못하고 부처(佛)님이라고 표현하면 사람들은 또 절에 있는 장엄한 불상을 떠올린다. 그것은 금강경에서 말한 형상에 빠져버리는 오류를 범하는것이 되여버린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깨달음의 그 실체를 가르켜서 이제는 도라고 하지도 부처님이라고 하지도 않고 바로 저거다. 바로 이거다 라고 가르친다. 그냥 대명사일 뿐이니까. 에서는 그것을 도라고 해도 되고, 천지(天地)라고 해도 되고 , 하느님 이라고 해도 되고 , 신이라고 해도 되고 주라고 해도 되고 부처님이라고 해도 되고 진여(眞如)라고 해도 되고 열반(涅槃)이라고 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백여개가 넘는 숱한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기호이고 명사일뿐이고 실상반야의 지혜를 나타내는 인간의 한계된 표현의 방식일 뿐이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쫒고 찾아왔지만 진정 그러한 생명의 본연의 지혜를 찾은 사람은 많지 못하다. 실상반야는 수지(受持)하고 인증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반야지혜이기 때문이다.   아침 공양 시간은 이미 놓쳐버렸다. 이미 늦은 바하고는 천천히 내려온다고 이번에는 조심스레 내려왔지만 또 한번 미끌어 넘어졌다. 올라갈때는 이토록 미끈줄 몰랐는데 내려가려니 더 힘들었다. 올라가긴 쉬워도 내려가기 어렵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나본다. 그때문에 많은 사람들도 인생길에서의 올리막보다도 내리막에서 더 많이 쓰러지는가 본다.  승복이 가득 더렵혀진데다 온몸 가득 흙이 묻었다. 더렵혀진 승복은 씻으면 되고 흙이 묻은 몸도 씻으면 된다. 겉모습은 물로 씯으면 깨끗해지지만 내면에 가득 쌓인 더러움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2    먼곳의 작은 절 행자중 오능(悟能)의 이야기 2-반야와 지혜 댓글:  조회:1501  추천:0  2016-01-25
  우리 절 뒷산에는 절 주변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있다. 산중턱에 있는 샘물에서부터 시작되는 그 냇물은 장마철이면 퍼그나 깊어지기도 한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이면 조금만 틈만나면 시냇가에 가서 발을 담근다. 큰 돌위에 앉아 돌돌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그 시원함에 더위가 싹 가신다. 주변에서 뻐꾹뻐꾹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 그렇게 발을 담그고 있노라면 내가 수행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범천의 신선님인지 알수가 없다. 참선을 한다고 승방에 앉아있을때보다도 이럴때면 더 무엇인가 떠오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행복추구가 인생의 목표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이 쾌락을 쫒는 과정이 인생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이 전부 아직 금강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으리란 생각을 해보았다. 금강경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어서 느낀 사람이라면 그렇게 경솔하게 인생을 평가하지는 못할것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불교계에서 학술적인 연구로 굳이 구분을 한다면 반야부에 속한다고 한다. 그럼 무엇이 반야일까? 대체로 말한다면 대지혜, 큰 지혜라는 뜻이라고 한다. 옛날에 불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은 참 책임심과 신앙심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책임심과 신앙심만으로도 그것은 어렵다. 불경에 대한 투철한 이해와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했을것이다. 요즘 사미로서 금강경 외우기에 달라붙은 우리 중 제일 어린 오진(悟眞)은 공부하기 싫어서 뺑소니치기 일쑤다. 너무 외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왜서 반야바라밀을 그냥 대지혜라고 번역하지 않았는가 하는것이다. 그러면 알아보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쉬운데 말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듯 하지만 그 당시 불경을 번역하신 대덕(大德)이나 고승(高僧)들은 대중들이 잘못 이해할 소지가 있거나 문구상 뜻 전달이 오해 소지가 있을 듯한 단어들은 그냥 음으로 직역하고 그 뒤에 주해를 다는 방식을 취했던것이다. 우리 말로는 공기의 기(氣)도 기고, 무술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경락사이에 흐르는 기나, 의학에서 말하는 체내의 기(氣 방귀같은…)도 기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로 그걸 번역하라면 가스라고 하던지 아니면 에너지라고 번역할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하기에는 그 기라는 단어가 단순하지 않은것이다. 당시 반야라는 말을 큰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은것도 아마 그 때문이였던것 같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보통의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득도(得道), 오도(悟道), 해도(解道), 수증(修證) 등 과정을 통하여 생사를 해탈하고 범인의 경지를 벗어난 지혜이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총명하고는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도(道)이며 그 도의 근본적인 지혜를 가르킨다. 근본적인 지혜란 그럼 또 무엇일까? 현대적인 관념으로 비유하자면 일반적인 총명과 보통 지혜를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생명의 본원과 본성을 가르킨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얻어지는것이 아닌 마음과 몸의 수련과 검증을 거쳐 얻어내는 그러한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가 바로 반야인것이다. 그래서 지혜라는 말은 반야라는 말을 대표하지 못한다.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 반야를 얻으려면 몸으로 체험해야만 하는것이다. 체험이 없이 얻는것은 단순한 세속적인 지혜일수 있다. 그러나 반야는 몸소 수지(受持)하지 않으면 얻을수가 없다. 더운 여름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면 시원할것이라는 지혜로운 생각도 좋지만 직접 그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그 느낌을 얻는것처럼 지혜와 반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내가 사는 절은 깊은 산중에 있다. 가까운 도시에서 두세시간 버스로 달려 마을에 도착해서도 차가 통하지 않는 먼길을 두시간 이상 걸어야 사찰에 도착한다. 주지스님과 나의 은사이신 단지(斷知)스님과 나 그리고 나와 동갑내기 행자승 둘 그리고 아직 어린 동자승 한명이 있다. 다 합해서 여섯밖에 안되는 작은 절이다.  우리의 수행은 다른 절과 별로 다를바 없는듯 싶다. 금강경과 화엄경같은 경전을 배우고 수지(受持)하지만 좀 다르다면 다른 암자나 사찰처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조용하고 아늑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부가 더 잘 될것같지만 꼭 그런것 같지도 않다. 우리는 공양보시를 하는 시주님들이 없다싶어서 한달이나 두달에 한번씩 행자승들이 화연(化緣)을 하여야만 한다. 그때면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인근 마을이나 도시로 다녀오기도 한다. 이번 여름철 하안거가 끝나면 또 길을 떠나야만 한다. 지난 겨울 동안거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김거사께서 자신의 회사에서 쓰던것이지만 아직 쓸만하다고 보내온 컴퓨터로 우리 절은 우연히 인터넷을 접하게 되였다. 주지스님은 년세가 많으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관심이 없으셔서 거의 컴퓨터를 만지시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아직 젊은 우리들에게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였다. 나보다 먼저 구족계를 받은 사형인 오공 스님은 컴퓨터를 일찍부터 알고 있은듯 했다. 그래서 여러 사찰의 카페나 홈페이지등을 주지스님께 보여드리면서 허락을 구했는데 주지스님께서 동의를 하셔서 공부를 방해하지 않는 여가시간에 컴퓨터를 만질수 있게 되였다. 나는 열한살때 절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먼곳을 다녀보지도 못하고 절 주변만 뱅뱅 돈 촌중이지만 절에 있는 책들은 두루 많이 읽어보았다. 책이라고 해봐야 불교경전이 대부분이였지만 언젠가 우리 절 뒤산 암자에 홀로와서 수행하시던 이름모를 스님이 두고간 책들도 더러 읽기도 했다. 나는 금강경을 주로 공부했고 경전을 달달 외우기는 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그 지혜의 깨달음은 언제면 얻을수 있을가 한숨이 나간다. 가까운 마을로 새벽녁에 나갔다가 해지기전에 돌아오신다던 스승님이 으슥해지도록 돌아오시지 않으셔서 마중을 나갔다. 사형인 오공스님과 나에게는 사제(師弟)가 되는 오정사제와 함께 셋이서 한시간 정도 걸어서 마중을 갔다. 멀리서 산쪽으로 올라오는 그림자가 보여서 다가가 보았더니 우리 스승님이 맞았다. 어깨에는 꽤 무거운듯한 짐을 지시고 계셨다. “절에 전화라도 주시지요. 일찍 마중나가게요.” 오공스님이 스승님의 그 물건을 받아 어깨에 메면서 말했다. 스승님은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벗으시며 환히 웃으신다.  우리가 그나마 일찍 마중을 나간것이 자못 기쁘신듯 했다. 그때 스승님이 한마디 해주셨다. “몇년전만 해도 이 정도 짐은 짐도 아니였는데 벌써 꼼짝을 못하겠구나. 반도 채 못왔는데 벌써 힘이 빠지더구나. 젊었을때는 무거운줄도 모르고 이보다도 더 무거운것도 씽씽 잘 메여날랐었는데 나이가 드니 깃털도 짐처럼 느껴지누나. 우리 모두는 짐을 지고 가는거야, 이렇게 짐을 내려놓으면 거뜬한줄 안다만 아무나 다 내려놓을줄 아는건 아니지.” 땅거미가 져서 사찰로 돌아오는 길은 자못 어두웠다. 스승님이 손전등을 켜고 앞에서 걷고 그뒤로 오공사형과 오정사제는 내앞에서 씨엉씨엉 잘도 걸었다. 본래 키는 크나 몸이 마른 오공사형이 힘들어 해서 내가 그 짐을 받아메였다. 스승님 말로는 어느 불교단체에서 보내온 책이라고 한다. 지혜가 가득 담긴 책도 두 어깨에 메니 짐이 되나본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러한 메고갈 짐들이 있나 본다. 메고가다가 내려놓을 그 짐을 나는 다시 메고 걸었다. 행자중 오능 수행일지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과 사찰명 사람명은 사정상 꾸민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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