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식의 조선족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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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계주소설의 이민성과 향토성 댓글:  조회:488  추천:0  2020-05-27
박계주소설의 이민성과 향토성 장춘식   1. 박계주의 생애와 연구사   박계주는 1913년 7월 26일 간도 룡정에서 태여났다. 룡정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7세에 구산(邱山)소학교에 입학하였고 5년제인 구산소학교를 졸업하고는 룡정의 영신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였다. 1930년 17세 되던해에 처녀작으로 단편소설 《赤貧》을 《間島日報》에 발표하며 이듬해인 1931년에 단편소설 《혁명전선에 나서는 소년형제》, 콩트 《월야》를 《民聲報》 한글판에 발표하고 이외에도 시 50여편을 당시 간행되던 여러 잡지에 게재했다고 한다. 간도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한셈이다. 그러나 박계주가 문명을 알리게 된것은 1938년 《殉愛譜》가 입선되고 다음해 간행되면서부터이다. 19세 나던 1932년에 고국에 나간후 6년만의 일이다. 같은해에 그는 《인간제물》을 비롯하여 《화성녀》, 《애광자》, 《실화》 등 여러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하는데 이때부터 박계주의 본격적인 작가활동이 시작된것으로 볼수 있다. 그후 그는 많은 작품을 창작하는데 그중 상당수는 이민체험에서 취재한것이다. 1966년 서울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박계주(朴啓周)는 룡정에서 출생한 작가이다. 흔히 말하는 이민 2세에 속하는것이다. 그런데 룡정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으면서 정작 활발한 문단활동을 진행한것은 조선에 나간후부터였다. 따라서 그를 조선족이민작가로 보는데는 이의가 있을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박계주를 이민작가로 보고 이민문학의 시각에서 그의 광복전문학을 살펴보게 된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이민자적 정체성인식때문이다. 첫 단편집인 에 수록된 8편의 작품 대부분이 이민지에서 취재하고있을뿐만아니라 주제의식에서도 이민자적 특성이 뚜렷이 드러나는것이다. 박계주에 대한 연구는 문단에서의 영향에 비하면 상당히 빈약한편이다. 작품량적으로 빈약하기때문은 절대 아니다. 장편소설도 있고 단편집도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장편 는 당대 독서계를 놀래운 큰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것은 아무래도 박계주가 본격소설보다는 대중소설작가로 알려졌기때문으로 파악된다. 대중소설의 가치에 대한 시비는 잠시 접고 본격소설만 보더라도 지금처럼 소외될 작가는 아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특히 이민문학의 립장에서 볼 때 더구나 간과할 수 없는 작가인것이다. 박계주의 소설을 연구하면서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원본과 개작품의 관계문제이다. 박계주의 이민소설과 관련하여 현재까지 발굴된 광복전 발표 소설 원본은 7편이다. 그리고 단편집 《처녀지》에 수록된 소설 8편을 포함하여, 개작품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전하는 박계주의 광복전 작품은 모두 10편인데 그렇다면 기타 3편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원본과 개작품의 차이를 비교하는것은 박계주 이민소설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지 않을수 없다. 사실 《딸따리족》을 《무명지사의 최후》로 개작한것, 《육표》를 중편소설 《지옥에도 꽃은 핀다》로 개작한것, 《오랑캐》를 《사형수》로 개작한것 그리고 그외 미발표원작들을 광복후 손보아 창작집 《처녀지》에 수록한것 등은 론의에 큰 어려움은 주지 않는다. 대개 반일저항적인 내용들을 가첨한 정도에 불과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유방》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친일부왜의 혐의가 있는 작품을 반일저항적인 작품으로 분식하였다는 비판이 가능하기때문이다. 먼저 원작과 개작 도입부분의 내용을 대조 인용해본다.   남원공략전(南苑攻略戰)을 비롯하여 태원성함낙(太原城陷落)에 이르기까지 혁혁한 무훈을 세운 김석원(金錫源) 부대장은 북지전선에서 첫번 돌아왔었을 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준것을 여기에 옮겨 쓰기로 한다.   제정(帝政)일본 학정자의 채쭉에 못이겨 지원병이라는 미명밑에서 이를 갈며 화북(華北) 전투지구에 출정 했던 학도병(學徒兵) 정태호군은 이번 중국 연안(延安)에서 귀환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 준 것을 여기에 옮겨 쓰기로 한다.   나중에 전문적으로 론의하게 되겠지만 이 작품의 개작에서 가장 큰 변화는 도입액자의 내용 즉 이야기 전달자의 신분이다. 원작에는 일제의 충견으로 중국전장에서 일제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조선인 김석원 부대장이 전해준 이야기로 되여있지만 개작에서는 이야기 주인공의 친구인 학도병 정태호가 전해준것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일본인 부대장을 사살한다는 주인공 정태호의 몽중담을 가첨함으로써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춘 반일저항소설이 되게 하였다. 얼핏 보면 다른 개작품과 비슷한 결과를 나타내지만 도입액자부분에서 친일적인 이야기의 전달자로 하여, 또 이 친일적인 이야기 전달자에 대한 칭송의 표현으로 하여, 개작품에 가첨된 종결액자부분의 내용을 통해 친일적인 작품의 혐의를 가지고있는 작품을 반일저항적인 작품으로 개작했다는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런 점들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박계주의 이민소설들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분석 평가해보고자 한다.   2. 작품소재의 특이성과 렵기성   작품소재의 특이성과 렵기성은 박계주소설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당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적을 주인공으로 한다든지(《사형수》), 그런 마적에게 잡힌 “육표”의 이야기를 쓴다든지(《육표》), 현대의 문명과는 전혀 담을 쌓고 사는 산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것(《처녀지》), 간도와 강동, 러시아 지역을 전전하면서 특수한 경력을 가진 조선인을 그린다든지(《딸따리족》), 인간성을 상실한 마약중독자를 그린것, 심지어 눈과 귀가 먼 부상자가 어머니의 유방을 피부로 감촉하고 어머니를 알아본다는 이야기나(《유방》) 간도 조선인과 러시아처녀의 사랑이야기(《아라사처녀》) 등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혹자는 이런 박계주소설의 특징을 그의 통속소설창작과 관련시키면서 평가절하할지도 모르겠으나 통속적인 방식으로 본격적인 소설의 주제를 해명해나간다고 나쁠것은 없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속에 가치있는 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다면 이는 오히려 성공적인 작품행위로 보아야 할것이다. 소설의 탄생은 흥미성에서 비롯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박계주는 이처럼 특이하고 심지어 렵기적이기까지 한 소재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을까?   3.1 문명비판과 그 의미 《처녀지》(1941)에서 박계주는 원시적인 이주민 “산ㅅ사람”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산ㅅ사람” 일가족이 사는 자연환경 또한 지극히 원시적이다. 소설에서는 모두에서 먼저 그러한 환경의 원시성을 강조하여 묘사한다. 쟁영(崢嶸)한 장백산 연봉(長白山連峰)을 앞으로 쳐다보며 해란강(海蘭江)의 근원을 찾아 어질령(嶺)을 넘으면, 거기엔 원생림(原生林)으로 바다를 이룬 처녀지가 있다. 아직 문명의 유린을 당해보지 못한 이 처녀지엔 곰과 멧돼지와 이리와 여우와 노루 등, 산짐승들이 생존을 다투며 서로 제 살림을 경영하기에 온갖 지혜를 윤택(潤澤)ㅎ게 하여 원시의 세계인양 그 품이 매우 소박하지만, 이러한 고산벽지길래 봄이 와도 눈은 그대로 덮여있어서 봄을 모르고, 그때문에 눈이 녹기 시작하는 늦인 봄철로부터 다시 눈나리기 시작하는 중추(仲秋)의 그 기간을 걸쳐 이 끝없는 수해(樹海)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점점(漸漸)에 은신의 소굴을 조영하는 극히 소ㅅ수의 마적(馬賊)의 출입을 보는 외엔 별로 인간의 침약을 당해보지 못하던 이 무인경에 조선사람의 집 한채가 있다는것은 한개의 경의(驚異)가 아닐수 없다.   이러한 환경묘사는 당시 이주민문단에서 자주 언급되고 또 한국 본토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이른바 만주대륙의 모습 그자체라고 할수가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주민의 눈에 비친 만주대륙의 모습이였을것이다. 지극히 원시적인, “아직 문명의 유린을 당해보지 못한 이 처녀지”였던것이다. 이 소설에서 박계주는 수십년간 해란강의 발원지, 장백산련봉속에서 사냥을 하고 함지나 파면서 그것을 가까운 동네에 내려가든지 물건 바꾸러 오는 사람과 바꾸든지 하면서 세상과 거의 동떨어져사는 산사람 일가족의 생활과 경력을 그리고있다. 이름도 분명하지 않고 다만 “산ㅅ사람”이라 불려지는 주인공은 마적들이나 혹 지나갈가 하는 원생림속에서 앙까이(안해)와 아들애 둘을 거느리고 살아간다. 물론 그들은 조선이주민의 가족이다. 이렇게 문명과 두절된 평범한 세월을 부친대에서부터 살아오는데 어느날 난데없이 삼림측량대가 나타나서 극히 제한적인 산사람의 나무 채벌을 제지시킨다. 그리고는 이곳에 철도가 부설될것이며 삼림 또한 국유림이라 한다. 일제의 삼림개발정책이 이 두메산골에까지 미쳐온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나무를 벤다고 하여 문명사회의 관리인들은 그가 문명사회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며 바보니 미쳤느니 하며 귀뺨을 마구 치는데 그 모든것이 산사람에게는 오히려 미친 행위로 비쳐진다. 류치장에 갇혔다가 그래도 삼림주의 호의로 생존수단을 개인적인 나무베기에서 채벌공사에 나가 일하는것으로 바꾸게 되고 그 일터에서 일을 조금이라도 적게 하기 위해 꾀나 부리고 일이 끝나면 색주가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떠들고 싸우고 하는 문명사회의 미친듯한 행위를 보게 되며 문명의 예기인 불술기(기차)도 보게 된다. 이러던중 점차 그들과 같게 되는 자신에 놀란 그는 다시 더 깊은 산속으로 이사를 가려 작심하고 짐까지 쌌다가 그 행위가 자신의 패배를 의미하는것임을 깨닫고는 다시 문명사회에 적응해 살기로 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의 근본적인 갈등구조는 원시성과 문명성의 대결이다. 현대의 문명은 원시적삶을 살아가는 산사람 일가족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게 사실이다. 산사람의 아이들은 무슨 나무에 열리는지 모르는 개누깔사탕이 너무도 신기하고 매력적이며 장사군녀인이 “닳을까봐 신지 못하고 머리에 이고왔”다는 고무신 또한 산사람의 안해에게는 “폭신하고 몽글몽글한게 참 좋다”. 그리고 삼림측량대원들의 “옷 채림채림이라던가, 신은 신이라던가, 쓴 모자라던가, 어느것 하나 처음 보지 않는것이 없고, 신기하지 않은것이 없다.”“의복도 의복이려니와 더욱 놀라운것은 뜰악에 천막을 치고 보지 않던 그릇에 보지 않던 요리를 만들어내는것은 참말 희한한 구경꺼리였다.” 그러한 경이를 산사람의 안해는 “웃티(옷이) 벨랐으꼬마.”로 표현하며 산사람은 “그 눔으 총으 한개만 가졌으문 그저 이 산속에 있는 짐생이란 짐생은 왼통 잡아낼거르!”라고 부러움까지 보인다. 나중에는 “무엇이 끌지도 않는데 끄는 이상의 속력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를 보고 더구나 “신통하다못해 놀랍다” 하고 “제에마 정게 저 내굴(연기)이 나오는 방속에 말이 들어가 닳고 잇음메?”라고 한 산사람 아들애의 의혹은 그들의 문명에 대한 경이를 잘 나타내주고있다 하겠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래도 호의적인 반응이다. 그러한 문명이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데 대해서는 당연히 호의를 느낄수가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불청객인 삼림측량대원들이 나타나서 산속의 나무가 국유림이 되여 “허가없이 자르면 처벌받”는다는것이다. “처벌”이 무엇인지 “형벌”이 무엇인지를 알리없는 그들이지만 나무를 자르지 못한다고 하는것은 명백히 생존에 대한 위협이였다. 이제 여기에서 원시성과 문명성은 날카롭게 맞선다. 산사람은 조상때부터 마음대로 잘라도 아무 시비 없던 나무를 갑자기 자르지 못한다고 한것은 정신이 제 상태에 있는 사람의 소위일수 없다고 보며 특히 알아들을수도 없는 조선말을 늘어놓는것이라든가, 사람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웃음을 탁 터뜨리는것, 갑자기 웃다가 갑자기 성을 내는것 등이 모두 정신이상의 한 징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무를 자르라고 하더라도 기차가 개통되면서 그렇게 수많은 나무를 매일 기차에 실어다가 함지를 만들고 숯을 구워내면 생계가 끊어질것이라는 불안이 심각해진다. “왜 저렇게 많은 나무를 실어가면서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릴까.” 이는 산사람이 그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된다.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에서 그냥 나무를 자르다가 벌목인부감독에게 잡혀갔을 때 그는 존대말 대신 “야, 자” 하며 나무를 자르면 콩밥을 준다 하고 “처음 말과 다음 말이 전혀 어긋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만 하여 또다시 “정신병자”가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그걸 확인하고자 했더니 앙천대소를 하며 그쪽에서 오히려 산사람을 “미친놈”, “불쌍한 인간”, “바보”라 하며 뺨까지 치니 마침내 “쌔시개(정신병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게다가 경관이라는 사람마저 자꾸 알아들을수도 없는―호적이니 국적이니 빠가야로니 고노야로니 하며 알아들을 소리만 해도 못다할 이 세상에서 필요이상의 말을 자꾸 만들어내는것이 역시 정신이상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직한 말을 했다고 하여 성냈다 때렸다 하며 필요이상의 흥분과 필요이상의 피대를 올리고 펄펄 뛰는것이 암만 생각해도 미친사람의 짓이라고 생각한다. 참다못해 “무세레, 당신네들은 나르 붙잡아다놓고 시비만 걸려구 하오?” 하고 항의하는데 “나으리”로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 불렀다고 또 화를 낸다. 결국 그는 “세상엔 모두 정신병자만 사는것 같애서 세상이 우울해”지고만다. 산사람의 이와 같은 현실인식 혹은 세상인식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그러한 문명이 일제의 식민지경영에 의해 강요된것이므로 일제의 식민지략탈에 대한 비판이고 풍자로도 된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산사람이 그러한 문명과의 대결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이 사람들과 섞여서 살다가는 나두 쌔시개(정신병자)가 되겠”다는 우려때문에 장백산 오지로 들어가려 결심했던것을 생각을 바꾸어 다시 “‘나’를 파괴하는 모든 거짓과 어둠과 싸워서 이기자. 그들속에 있으면서 그들을 닮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잃지 않는것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승리일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성공이기도 하리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것에서 이러한 판단은 더욱 힘을 얻는다. 사실 따지고보면 산사람의 이같은 각오는 산사람의 각오라기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각오이고 작가의 문명인식이며 현실인식이라고 보는것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이 作品에서 내가 意圖한것은 쫓겨가는 處女地의 山사람을 朝鮮民族으로 代身했고, 機械文明을 背景한 特權階級을 侵略者 日本으로 代身하였을뿐아니라 ‘人間’을 벌거벗겨놓고 거기에서 ‘너’와 ‘나’를 보려 했던것이다.”고 한 작가자신의 진술 또한 이런 판단을 반증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비판의식은 요즘 학계의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되고있는 환경문학 혹은 생태문학의 시각에서 볼 때도 가치가 있는것이다. 작품에서 “왜 저렇게 많은 나무를 실어가면서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릴까.”라는 표현이라든가, “알아들을 소리만 해도 못다할 이 세상에서 필요이상의 말을 자꾸 만들어내는것” 등은 공업문명의 파괴성에 대한 비판으로 볼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표현은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네 국적이 조선에 있어서 황국신민(皇國臣民), 이를테면 일본사람이 됐느냐? 그렇쟎으면 만주국에 입적해서 만주국백성이 됐느냐 말이다.” 하고, 성을 펄쩍 내며 묻는다. “나는 조선사람이오.” “이놈아, 조선사람인줄 누가 모른대?” 그는 다시 깔깔 웃는다. “그럼 왜 조선사람인줄 알면서 나보구 일본사람이냐 만주국사람이냐 하구 묻소?” 산ㅅ사람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사람인줄 빠안히 보면서 일본사람이냐 만주국사람이냐 묻는 그 한가지만 보아도 분명히 정신상태가 온전한 사람의 말일수는 없쟎은가. “그럼 너는 일본백성이 아니란 말이냐?” “내가 왜 일본사람이란 말이오? 이렇게 조선웃티(옷)르 입구 조선말으 하는데…….” “이놈아, 너는 비국민(非國民)이다!” “비국민이라니오?” “빠가야로!” “……?……빠가야로라는 건 또 무시겜둥?” 비국민이니 빠가야로니 하고 점점 더 모를 소리만 연발하는데는 산ㅅ사람의 정신은 더욱 얼떨떨해진다.   이때 산사람의 “비국민”적인 행위는 그의 현실사회에 대한 무지를 전제로 했기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지 모르나 “그는 그날밤에 匪賊(침약자 일본에게는 匪賊일지 몰라도 기실은 비적이 아니라 反滿軍의 게릴라部隊였던것이다.)을 잡으면 호송할 때까지 임시 가둬두는, 그러나 아직 한번도 가두어본 일이 없는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였다.”는 표현에서 괄호안의 부분은 해방후 가필한것이 분명하다. 1948년 박문출판사판 박계주창작집 《처녀지》에 처음 공개발표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주제에는 큰 변화가 없어보인다. 이에 대한 박계주 본인의 진술을 들어보이면 다음과 같다.   檢閱말이 났으니 말이지, 《處女地》는 李泰俊氏가 主宰하던 《文章》誌의 一九四一年版인 三十四人集 特別欄에 揭載키로 되어 造版까지 했던것인데, 이 作品이 問題가 되어 檢閱官은 “왜 雜誌를 廢刊시키구싶어서 이러느냐” 하고 야단을 쳤을뿐더러 作者의 呼出까지 있어 톡톡히 說諭를 듣고 요행 原稿만을 찾아내어왔었다. 그뒤, 《文章》 終刊號에 다시 한篇 쓰라 하여 《處女地》의 下中을 改作해서 드렸더니 亦是 全文削除를 당하고 말았었다. 한해를 묵혀서 다시 이 作品을 全面的으로 改作하여 綜合雜誌 《春秋》에 發表하기로 했는데 또한 全文削除를 당하고말았으니, 解放뒤 文學家同盟機關紙 《文章》에 실리려고 仝同盟小說部委員長 安懷南兄이 가져갔었는데 同盟이 地下로 들어가다싶이 되고 또한 機關紙가 언제 나올지 몰라 單行本에 놓으려고 찾아내어왔었다. 그래서 이 作品은 끝끝내 發表되지 못하고말았던것이다. 그렇게 虐待받고 出世못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나는 내 作品中에서 이 작품을 몹시 좋아한다.   이상의 분석에서 우리는 박계주가 《처녀지》를 통하여 원시적순수성과 현대문명의 탐욕을 대결시킴으로써 현대문명의 파괴성을 밝히고 그러한 문명을 강요한 일제 식민지경영을 비판하고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거기에 만주대륙의 혹한과 울창한 숲, 거친 지리적, 지형적 이미지가 뒤받침되여 소위 “대륙문학”적인 미적효과를 창출하고있다. 이는 또한 일제말기 암담한 현실에서 검열제도를 통한 언론, 문화의 통제를 우회하여 현실에의 저항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한 상징적대안이였다는 사실도 간과할수 없을것 같다. 물론 그러한 작가의 시도는 수차 삭제되면서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실패했다고 볼수밖에 없는것이다.   3.2 마적의 내막에 대한 해명 박계주의 작품에서 이민지의 마적에 관련된 작품은 2편이다. 《육표》와 《사형수》가 그것이다. 《육표》는 마적과 마적에게 육표 즉 인질로 잡힌 이주민과의 갈등을 보여주고 《사형수》는 마적자체를, 정확하게는 王德이라는 마적단의 두목이 당시 관청격인 륙군에 잡혀 래일이면 사형당할 최후의 밤과 사형장으로 가는길에 길거리에서의 조리돌림, 그리고 사형장에서의 죽음과 거지들의 옷벗기기 경쟁을 그리고있다. 《사형수》에서 왕덕은 사생아라고, 진짜가 아닐지도 모를 부모에게서 자라 고학으로 공부를 했으나 오랑캐의 후예라고 벼슬을 할수가 없었다. 그는 마적이 되였고 인테리라 하여 두목까지 되여 갖은 살인, 방화, 략탈, 간음을 일삼다가 잡혔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래세가 있을지, 인간은 물질에서 왔다가 죽으면 다시 물질로 돌아가는것인지를 가지고 고민한다. 그러나 이튿날 사형장에 나가는 길에서는 용감히 죽기로 맹세하고 륙군을 마적보다 더한, 심지어 위선까지 덧붙여 더 많은 죄를 진 놈들이라 사형집행자들을 수백, 수천명의 군중앞에서 규탄한다. 그래도 속으로는 혹 구출을 올 마적들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총살하게 될 다른 두 마적중 하나는 사형전에 마음대로 먹을것을 먹게 하는 전통에 의해 죽을둥살둥 모르고 먹기만 한다. 또 다른 한 녀석은 이미 판결이 끝났음에도 자기는 살인도 방화도, 아무 나쁜짓도 하지 않고 잡혀가서 별수없이 마적들을 따라만 다녔노라고 비굴하게 변명한다. 그러니까 사형장에 나가는 세 인간의 세계, 아니 거기에 그것을 집행하는 륙군의 마적보다 더한 세계,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며 구경하는 군중들도 또 이 네개의 세계와 별 다를바없는 형형색색의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설파하고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사형이라는, 분명히 내다볼수 있는 죽음을, 극한적상황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로출시키고있다. 죽음의 공포를 깨달으면서도 떳떳이 죽으려는, 그러면서도 혹 이 위기를 면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는 왕덕과 그에 곁들여서 죽기전에 마음껏 먹으려는 죄수와 살려달라 애걸하는 죄수, 그리고 왕덕의 말처럼 마적보다 더한 마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인민의 보호자라 자처하는 병정들의 모습을 그리고있다. 다음 례문은 이러한 상황 특히 인민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륙군의 마적보다도 더한 악덕의 진면모를 잘 보여준다.   세개의 세계가 행진한다. 아니, 병정의 세계까지 합하면 네개의 세계가 행진한다. 왕덕의 말과 같이 그들 병정과 관리는 마적과 다를것이 없었다. 도리여 위선이라는 죄를 하나 더 뒤집어쓴 마적과 다를것이 없었다. 도리여 위선이라는 죄를 하나 더 뒤집어 쓴 마적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강압, 착취, 학정, 공갈, 무법……그러나 그의 이름은 인민의 보호자였다. 평화의 사자(使者)였다. 위풍이 등등하다. 뻐젓하다. 죄인이 죄인을 심판한다. 죄인이 죄인을 사형한다. 어디서 온 진리냐.   이 작품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특이한 소재를 선택하여 결국 인간일반의 본질을 파헤쳐보이고있는셈이다. “세 세계가 움직이고있다. 죽음을 향해 지금 행진하고있다. 아니, 네 세계다. 아니, 수백수천의 세계가 움직이고있다. 인간은 누구나 마지막엔 죽음에 부딪치고야 마는것이다. 군중―수백수천의 군중속에도 세 마적의 인간타입이 있고, 그리고 병정들의 인간타입이 있는것이다. 너도 나도 죽음을 향해 전진 또 전진.” 라는 표현에서 이점이 확인된다. 특히 백성을 지켜준다는 관청역을 하는 륙군이 마적보다 더한 마적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당대 간도사회의 력사적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였다 하겠다. 그리고 죽음과 래세, 령혼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고민은 박계주의 기독교적 사상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육표》는 《사형수》에서 죽음을 앞두고 나약한 면을 보이고있는 마적들의 악마적인 측면과 그러한 악마에게 구속당해 시시각각 죽음을 맞아야 하는 두 이주민의 생존상태와 인간적인 본질을 문제삼고있다. 이 작품의 모두에는 당시 이민작가의 작품에서 가끔 볼수 있는 부언설명이 붙어있다. “―이 小說의 舞臺는 白頭山東北으로 뻗은 長白山支脈의 山谷. 때는 지금으로부터 二十年前 張作霖治政時代임을 미리 말해둔다.” 여기서 20년전 장작림정권시대라는 설명이 필요했던것은 일제의 검열때문이 아니였을까 짐작된다. “오족협화”요 “대동아공영권”이요 하여 만주국의 안정과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에 마적이 출몰하며 인명을 해치는 상황을 버젓이 그린다는것은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있었을것이기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강달귀(규)는 재피거우에서는 누구나 두려워하는 명물이요 망나니다. “매일 술만 처먹고는 싸우는것이 그의 하루하루의 일과요 직업이요 락”이다. 그런 망나니지만 그에게도 번뇌는 있었으니 바로 영춘옥의 옥녀때문이다. 옥녀는 술집에서 일하지만 인물뿐만아니라 행실이 단정해서 뭇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 그리고 옥녀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마을에서 자라난 성호라는 젊은이였다. 성호는 옥녀가 색주가에 팔려오게 되자 전차금을 내고 그녀를 빼내려고 이곳에 와서 광부가 되였다. 어느날 옥녀와 술상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강달귀가 나타나 싸움을 건다. 둘이 사투를 벌리는 사이에 밖에서 총소리가 나며 년례행사처럼 닥쳐오는 마적들의 습래가 발생했고 둘은 돈있는 사람으로 오인되여 그만 마적들에게 육표로 잡혀가게 된다. 적굴에 잡혀가서 둘은 마적들의 강박에 어쩔수 없이 편지를 썼고 강달귀는 광주에게, 성호는 옥녀에게 보냈다. 도망할 꾀를 생각하던중 어쩌다가 강달귀가 먼저 포승을 풀고 도망하면서도 성호는 그대로 두었다. 성호에게 복수하고 옥녀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달귀는 되잡혀오고 다리에 총상을 입은채 밖에 있는 나무에 매달렸다. 그 고통스런 모습을 보는 성호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적들은 마약이 바닥이 나자 두명만 소굴에 남겨두고 습격을 나갔고 성호는 기회를 타서 마적 둘을 제압하고 도망치게 되였다. 그리고 강달귀에게 복수하고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자신은 악을 악으로 갚을수 없다며 그를 풀어준다. 그러나 총상을 입고 사흘이나 밖에서 시달린 강달귀는 성호에게 업히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산속을 탈출하던중 자신의 과거를 회오하며 죽어버린다. 성호는 무덤앞에 “조선인강달규지묘”라는 묘비를 세워준다. 무덤의 임자가 마적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인데 어쩌면 더러 렵기적인것 같은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 주제는 인간성의 발견이다. 천하의 망나니 강달귀는 성호의 무조건적인 사랑앞에서 악을 버리고 선으로 재생한다. 삶과 죽음사이에서 인간의 선과 악은 극한적인 대결을 벌리며 결국 선이 악을 이긴것이다. 또다시 작가의 기독교적인 박애사상을 표현한것임을 알수 있다. 다음 례문에서는 그런 작가의 사상이 극명하게 표현된다.   “여보게. 나는 살아서 마적굴을 탈출하게 되는것을 기뻐하는것이 아니라, 죄악덩어리였던 그 ‘나’를 탈출하여 새로운 ‘나’를 찾은것을 기뻐하는것일세. 이렇게 나를 옛사람에게서 탈출시켜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한것은 전혀 자네의 사랑일세. 나는 사랑이라는것이 무엇인것도 지금 처음 알았고, 맛보기도 지금이 처음일세.” 띠염띠염 간신히 말하는 그는 또다시 성호의 등에 눈물을 떨어뜨린다.   “여보게, 자네 재피거우에 돌아가거든 강달귀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의 속사람만은 죄악에서 살아났드라고 전해주게.” 한마디를 남겨놓고, 그 움푹 패인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채 숨을 걷우어 버리고말았다.   인식적인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이 작품에는 이주민들의 생활터전인 북간도지역 마적들의 행적과 삶의 양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중국어의 인용과 마적들의 노래 등 이국적인 정서와 더불어 주목을 끌었을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당연히 력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있다 하겠다. 결국 박계주가 마적의 내막을 해명하고자 했던것은 이민지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는 사실주의의 기본원칙외에도 마적 및 마적과 관련된, 흔히 극한적인 상황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읽어내기 위해서가 아니였던가싶다. 이는 박계주의 기독교신도라는 신분과도 어울리기때문에 한층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3.3 오지(奧地)문화에 대한 관심 소재의 특이성이라는 박계주소설의 한 특징은 오지문화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연장된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처녀지》나 《육표》, 《사형수》 등에도 오지문화의 특징이 상당정도 포함되였다 할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 작가의 주되는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그러나 《딸따리족》이나 《질라깨녀인》, 《개》 등 작품에서는 기본적으로 오지문화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먼저 《딸따리족》의 경우 러시아에 이민을 갔다가 현재는 북간도에 정착해 살고있는 강동령감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가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경험한 딸따리족의 삶과 그들과 련관되여 한때 거부가 되였던 강동령감의 이야기를 엮고있다. 강동령감은 러시아혁명때 구당과 함께 로만국경을 넘어 북간도땅에 들어와 이야기서술자인 “나”가 살던 얼두거우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국수집 잡일을 보아주면서 호구하였으나 러시아에 있을 때는 해삼위에 훌륭한 양옥저택을 가지고 러시아미인을 안해로 맞아 한때는 호화롭게 살던 거부였었다. 그러던것이 혁명군에게 일조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안해마저 그들의 손에 잃은뒤에 알몸으로 뛰쳐나왔단다. 따라서 공산당은 그의 철천지원쑤였다. 이야기하기를 즐긴 강동령감은 가끔 “나”가 다니는 서당에 놀러와서 이국풍속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감자를 구워먹다가 감자와 관련된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에 간 초기에는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보따리를 들고 시베리아 북쪽 삼림지대에 들어가서 우선 사냥부터 시작했다. 사냥으로 돈을 좀 벌다가 자신이 짐승이 된 느낌이 들어 짐승을 잡기 싫어졌다. 그에 총을 들고 산속을 다니기만 하다가 딸따리족이 사는 부락에 들어가게 되였는데 거기서 딸따리족들이 아이들 장난감으로 주어왔다는 금덩이를 발견하고는 이들을 구슬려 그 금덩이를 다 가지고 시가지에 나와서 진탕 먹고 놀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감자와 금덩이를 바꾸기도 하고 감자씨를 심도록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금과 바꾸었는데 딸따리족들이 감자 심을줄을 몰라서 가을에 수확하라고 한것을 사흘만에 파보고는 강동령감이 거짓말을 했다며 내쫓았다. 그래도 전에 감자와 바꿔온 금이 많아서 그 금으로 거부가 되였다는것이다. 지금이래도 사냥을 해서 팔자를 고치지 왜 국수집 망이나 봐주냐고 하니까 강동령감은 그런 생각이 없지 않으나 지금은 늙고 피가 식어서 안된다며 쓸쓸히 웃었다는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작품에는 상당정도 반공적인 의미가 드러나고있고 그래서인지 해방후 작가는 이 작품을 《무명지사의 최후》로 개작하여 저항적인 의미를 가미하고있으나 실상 이야기의 핵심은 한 이주민의 파란많은 류랑의 경력과 러시아 소수민족인 딸따리족의 원시적인 삶과 련관된 오지체험이다. 강동령감의 오지체험에서는 딸따리족의 소박하고 원시적인 삶과 욕심덩어리 현대인의 삶이 대조를 이룬다. 금이 생기니 산속에서 사냥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던 사람에게 끝없는 욕구가 생기고 그래서 금을 판 돈을 술과 계집으로 금방 탕진해버렸다는 강동령감의 경력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러시아혁명과 자신의 재산을 몰수한 공산당을 원쑤로 보면서 이를 갈기도 하지만 국수집의 망이나 보아주면서 만년을 보내는것에 만족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부질없는 허욕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질라깨녀인》에서는 흑룡강류역에서 일생을 배타고 고기잡는것을 업으로 생활해가는 소수민족인 질라깨족과 조선인간의 특이한 관계를 그리고있다. 질라깨족은 흥룡강류역의 토착민으로서 그들의 주가(住家)는 고기잡는 목선이요 정주지(定住地)가 따로 없이 사는 그들에게는 흑룡강이 집터요 직장이요 고향이다. 이들은 생선을 생으로 먹는 야생적이요 원시적인 삶을 살아간다. 한번은 이들이 조선인이 사는 마을에 들어와 저녁 짓는 모습을 보게 된다. 쌀을 두번이나 씻어서 밥을 짓는것을 보고는 너무 깨끗한 민족이라고 감탄하며 밥을 물에 말아먹는것을 보고는 두번 씻어 지은 밥을 또 씻어먹는다고 끔찍한 민족이라고 딸을 이런 깨끗한 민족에게 시집보내겠다고까지 한다. 그런데 밥을 다 먹고나서 그 밥 말았던 물로 양치질을 하고 꿀꺽 삼키는것을 보고는 “그들이 씻어낸 물을 도루 마시는거나, 우리가 씻지 않고 먹는거나 더러운것 먹기야 마찬가지지. 머 다를것 있나. 역시 내 딸은 내 족속에게 시집보내야겠는걸.”하고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 콩트 정도의 이 짧은 이야기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싶었던것은 아무래도 이들의 원시적인 평화와 소박함이였던것 같다. 다음 례문에서 작가는 이점을 확인시킨다.   그렇게 야만답고 원시인그대로이기때문에 이 족속의 생활에서 우리는 소박(素朴)함과 순진함과, 목가적(牧歌的)인 평화를 엿볼수 있는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마우재”(露西亞人)와 피를 달리한 동양인이라는데서 우리는 이웃사촌의 정도 갖게 되는것이다.   특별히 설정한 주제도 없고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국땅 오지 원시적인 민족의 삶과 이들의 민족성을 그대로 드러내고있는셈이다. 그렇다면 박계주는 이들 오지체험을 다룬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여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의미가 있는것 같다. 첫째는 소재자체의 특이성이다. 독자에게 이국적인 풍속과 이민족의 삶의 양상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에 만족을 줄수 있었기때문이다. 둘째는 원시성과 현대문명의 대조이다. 물론 이러한 대조속에는 현대의 문명에 대한 어느 정도의 비판성이 내포되여있다. 이것을 앞에서 이미 살펴본 《처녀지》에서의 문명비판과 련관시켜보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리해된다.   3. 《유방》의 전복성과 해체적 의미   《유방》은 박계주의 소설에서 친일적인 혐의가 가장 뚜렷한 작품이라 할수 있다. 액자소설의 형태를 갖춘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전달자는 중원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석원부대장이 전해준 이야기를 작가가 적은 형국으로 되여있는데 주인공은 조선인병정 ○○군이다. 실명을 숨긴것은 아마도 실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것이다. 이 조선인 병정은 이른바 “‘나’없는 투혼(鬪魂)에서 격렬히 싸우며 전화(戰火)속을 헤염”치다가 랑자관(娘子關)전투에서 부상하여 눈과 귀가 멀게 된다. 그는 그를 찾아간 김부대장을 보고도 누구인지를 모르고 어머니만을 찾는다. 자신이 눈과 귀외에도 어깨밑과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어 생명이 오래가지 못할것임을 느낀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애통한것은 정작 어머니가 찾아왔어도 알아볼수가 없다는것이다. 어머니가 아무리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어머니임을 호소하지만 아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이때 어머니는 갑자기 유방을 꺼내 아들의 입에 물려준다. 그제야 아들은 어머니임을 알고 모자가 부둥켜안고 운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도입액자만 있고 종결액자는 없는 액자소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야기전달자의 신분이다.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에서 혁혁한 무훈을 세운 김석원부대장을 그 이야기의 전달자로 선택했던것이다. 김석원은 실존했던 인물로 당시 신문에 널리 보도되였다고 한다. 이때문에 이 작품을 친일적인 작품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무심히 보면 그렇게 보는것도 무리는 아니라 하겠다. 작품에서 군데군데 눈에 띄는 표현들 가령,   그 조선인 병정 역시 「나」없는 투혼(鬪魂)에서 격렬히 싸우며 전화(戰火)속을 헤염쳤던것이오. 사실, 물욕이라는것, 명예욕이라는것, 지위욕이라는것……등등의 사욕은, 위대한 「죽엄」속에 나를 바쳐서 제물이 되려는 자에게는 이미 작별된것이 아니겠소.   (낭자관 전선에서 악전고투하던 부상병들이 낭자관이 함낙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얼마나 기뻐하랴.)   나는 ○○군의 어머니에게, 먼 길에 고생이 많았을것을 인사 드린 뒤에, 전선에서 당신의 아드님은 용감히 싸왔던것과, 그리고 명예의 부상을 입게 된것등을 이야기 하며 그의 마음을 위무(慰撫)해 주며, 군의와 간호부들과 함께 그를 인도해 가지고 ○○군의 병실로 들어갔었소.   등에서도 그렇고 주인공이 전장에서 “나”없는 투혼을 불태우며 격렬히 싸웠다고 한것, 김부대장이 눈과 귀가 멀고 몸에 관통상을 입어 생명이 곧 다하게 될 부하 병정이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것을 가엾게 여겨 어머니를 모셔다 만나게 하려 한것, 또 군에서 어머니를 오도록 전보를 쳤다는 점, 군의나 간호사들은 물론 사령관마저 그 병정이 어머니를 찾는 애통한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점 등은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또 침략자들의 인간미를 칭송했다고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더 확대해석하면 조선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는 혐의도 없지 않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작가가 해방후 이 작품을 개작하면서 이야기의 서술자를 김부대장에서 학도병 정태호로, 주인공을 일제에 강제출정을 당한 농촌출신의 병정 김인철로 하고 정태호가 김군과 함께 일본인 부대장을 죽이고 달아나는 꿈을 꾼다는 내용을 삽입함으로써 반일저항적인 작품으로 탈바꿈한것은 그러한 친일적인 혐의를 벗기 위해서였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이 작품을 읽어보면 이상에서 살펴본 친일적인 내용이나 반일저항적인 내용 모두가 작품의 핵심적인 서사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작품의 핵심적인 서사는 전선에서의 부상에 의한 아들의 시청각장애와 아들의 촉각을 발동시킨 어머니와의 관계 이야기이다. 즉 시각과 청각을 모두 상실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아들의 정상을 보고 촉각의 기억을 되살려모자가 알아보게 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것만 없으면 이 소설은 소설이 되지 못한다. 다음 례문을 보면 그러한 서사의 의미가 곧 드러난다.   (울대로 내여버려두어라. 세상에 눈물처럼 정직한것도 없으려니와 눈물처럼 진실된것도 없는것이니, 하물며 어머니의 눈물에 있어서랴. 어머니의 눈물이야말로 사랑의 극치(極致)요, 정화(精華)니라. 어서 울고싶은대로 실컨 울어라.)   이야기서술자인 김부대장의 심리묘사인데 결국 소설의 주제는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인간의 사모(思母)본능과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의 본능 표현이라 하겠다. 박계주소설에서 일관적으로 표현되는 본능적인 선(善) 혹은 인간성의 문제는 이 작품에도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통해 독자가 느끼는것은 어떤 조선인병정이 중국전장에서 일제를 위해 투혼을 불살라 잘 싸웠다는 사실이 아니라 전쟁때문에 아들이 어머니를 알아볼수 없는 비극적상황이 아닐까 한다. 이것을 일제의 대륙침략전쟁 혹은 전쟁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 내지는 부정이라 보면 지나친 독단일까?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전쟁자체 나아가서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전복적인 표현이라 할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박계주가 의식적으로 이와 같은 전복적인 주제를 표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혼종성의 시각에서 보면 김부대장의 무훈에 관련된 칭송이나 주인공의 투혼에 대한 서술은 일제 침략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전복을 위한 계획적인 장치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제의 대중국전쟁에 무고한 조선인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상황은 작가의 무의식속에서 달갑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전사가 눈물을 흘릴 때 그의 직접상관인 김부대장이 사내답지 못하다고, 전사로서 낯뜨거운 일이라고 생각할대신 오히려 실컷 울어라고, 그 눈물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요 정화라고 생각했을까. 다시 박계주의 전반 이민소설을 살펴보면 이 작품에서처럼 직설적인 서술을 통해 일제를 칭송하거나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한 작품은 없다. 혹자는 《오리온성좌》에서 “국토방위(國土防衛)를 위해서, 그리고 조선의 아들과 딸들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 밤낮의 분별도 없고, 여름과 겨울의 가림도 없이 적기(敵機)의 내습(來襲)을 감시하는 방공감시초(防空監視哨)의 생활” 운운한것을 친일적인 표현이라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분명 아니다. 일제를 위해 전선에 나가 싸운다는것과 적군의 공습 피해를 막기 위해 방공감시를 한다는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이기때문이다. 물론 여러가지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지만 이 경우 일제의 구미에 맞지 않는, 어느 정도 반전의 의식이 표현된 이야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더러 친일적인 분장을 서사적장치로 리용했다고 해도 론리는 통한다.   4. 《향토》와 작가의 정체성인식   박계주는 많은 작품을 이민지체험에서 취재하고있으면서도 정작 이주민의 가장 큰 관심사라 할수 있는 이민과 정착의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은것처럼 보인다. 이는 아무래도 작가가 본격적으로 문학창작에 림할 때쯤 고국땅에 정착해 살았던것과 무관하지 않은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서해처럼 정체성인식이 간도이민자에서 점차 조선인으로 회귀하지는 않고있다. 이는 아마도 박계주가 이민지에서 출생한 이민의 2세라는 사정과도 관련될것이지만 초기작품에 속하는 《인간제물》과 후기작품에 속하는 《향토》를 통해 박계주는 이민자적 정체성인식을 충분히 드러내고있다. 초기작품에 속하는 《인간제물》은 출세작인 《순애보》와 같은해에 발표했다. 작품의 주인공 련희와 남편 철규는 중국에 이민온 지식인이면서 시골에서 농사를 하면서 이주농민들을 돕고자 한다. 그런데 련희가 일 나간 남편의 찬을 함지에 담아이고가는데 지팡주 팡개의 아들 팡룩싼이 불쑥 나타나서 그녀를 겁탈하려 한다. 다행히도 마을청년 김갑수가 나타나서 위기는 면한다. 사실 련희의 남편 임철규는 이태리에서 성악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대학교 교수인 동시에 개인교습까지 하는 인기가수였다. 그런데 누명을 쓰고 학교에 있을수 없게 되자 북간도행을 결심하는데 이때 그를 사모하던 성악교습생 련희가 그를 따라나섬으로써 둘은 북간도에서 살림을 차리게 되였다. 북간도에서도 북간도 문화중심인 룡정이 아니라 시골에 나가서 농사질을 하며 식자반과 문맹퇴치, 청년회조직 등을 운영하여 이주민의 문화사업에 힘쓴다. 그러다가 지난해 전염병이 유행하던 이 마을에 와서 병을 치료해주며 살게 되였던것이다. 갑수가 야욕을 파탄시켰다는 리유로 팡룩싼은 갑수네가 빚을 갚지 않는다고 공안국에 고소를 하여 갑수네 부자간이 다 구속된다. 그것도 만족되지 않아 팡룩싼은 공안경찰을 꼬여 련희의 남편 철규에게 있지도 않은 도박죄를 씌워 벌금 80원형을 내린다. 이는 사실 팡룩싼이 련희더러 자기돈을 꿔서 남편을 구출하도록 하려는 잔꾀였는데 련희는 오히려 이사오기 전에 살던 곳의 청년회에 편지를 띄워 지원을 요청한다. 한편 공안국에서 유일한 조선인인 송통사가 철규의 벌금을 빨리 내지 않으면 일년반 옥살이를 하게 된다고 련희에게 을러메면서 자기 말을 따라 육욕을 만족시키면 금방 풀려날수도 있다고 얼른다. 그것을 거절하자 며칠동안 나타나서 얼리고 닥치고 하다가 마침내는 술을 먹고 찾아와서 겁탈을 시도하는데 련희는 안간힘으로 항거하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칼로 송통사가 아니라 자기 가슴을 찌른다. 바로 이때 철규와 갑수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갑수는 다짜고짜로 송통사를 쓰러뜨리며 철규 또한 안해의 가슴에 꽂힌 칼을 뽑아 송통사를 찔러죽이려는데 안해는 이국땅에까지 와서 동포끼리 싸워서야 되겠냐며 용서해주라고 하고는 곧 죽는다. 그렇게 송통사는 목숨을 살렸으나 련희의 용서때문인지 이튿날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는다. 장례를 치른 철규는 평생을 북간도에서 살며 동포들을 위해 일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다음의 례문은 작품의 취지를 잘 밝혀주고있다.   노래를 다 하고난 철규는 “죽는날까지 이곳에서 내 형제를 위하야 일하자. 제물이 되자. 그리고 이미 제물이 된 연히의 무덤곁에 내 백골을 파묻자!” 이렇게 마음에 맹약하고는 고요히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굳게 잡는다.   작품에서 주인공인 련희와 철규의 불행은 이민자 모두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중국인 지팡주의 행패나 송통사로 대표되는 관청과 지배계층의 압박은 이주민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였고 주인공들의 운명은 이주민이 정착을 위해 치를수밖에 없는 대가라 할수 있다. 이와 같은 기본주제외에도 이 작품에는 두개의 소주제가 뚜렷이 표현된다. 송통사를 용서해주는 주인공 련희의 행위와 이들이 식자반과 문맹퇴치, 청년회조직 등을 운영하여 이주민의 문화사업을 돕고자 했다는 내용이다. 전자의 경우 기독교신자였던 작가의 박애주의와 용서의 사상이 표현된것이라 하겠고 후자는 당대 문학의 한 흐름을 이루었던 농촌계몽운동의 영향을 드러낸것이라 할수 있다. 여하튼 상기의 례문에서 확인되는것처럼 작품에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이민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는 이주민의 의지 즉 이민자의 정체성인식이 강하게 표현되였다 하겠다. 이 작품에서는 중국에 이민온지 십년 미만의 주인공을 그리면서 북간도에 백골을 묻기를 결심하고 동포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이주 지식인의 의지를 보여주었다면 《향토》에서는 그보다 썩 많은 세월동안 이민지에서 살던 이주민의 향토의식을 통해 이제 하나의 정체성을 굳혀가고있는 이주민의 삶을 다루었다 할수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어머니의 작은 아들의 시점에서 일인칭으로 씌어졌는데, “내가 출생한지 아홉달만에 아버지는 같은 그 집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었다.”“내가 간도에서 출생해서 간도에서 이십년간이나 성장”했다고 한것으로 보아, 그리고 이를 박계주의 경력에 대입해 보면 이 작품이 자서전적인 작품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작품 인물의 시각이나 정체성은 상당 정도 작가의 분신이 될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나”가 태여난지 아홉달만에, 젊은 나이에 남편을 병때문에 잃고 내일 발인하게 될 바로 전날 밤에 화재를 당해 그나마 남았던 집마저 잃고 한지에 나앉은 어머니. 그녀는 그러나 고향에 가서 살라는 시형(“나”의 백부)의 권고도 마다하고 남편이 남긴 빚을 갚고야 고향에 나간다고 고집한다. 그러나 실은 남편이 묻힌 땅을 떠나고싶지 않아서이다. 그후 어머니는 갈보들의 삭빨래, 삭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심지어 간도에서도 저 오지의 “동내”라는 마을에 가보았으나 그것은 쌀이 아니라 좁쌀마저 구경해보지 못한, 감자나 심어먹는 화전민마을이였다. 그래서 “네 아비는 글두 알았는데……”라는 백부의 말이 가슴에 맺혀 다시 룡정에 나와 아글타글 일하여 마침내 자기집을 짓고 살게 되였다. 형이 어떻게 되였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나”가 내지(조선)의 모 잡지사에서 근무한다고 한것으로 보아 결국 아들을 공부시켰다는 말이 될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환갑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에 내다가 향토에 묻어주기를 아들에게 청한다. 조상을 잘 모셔야 자식들이 잘된다면서. 그런데 사실 “나”는 룡정에서 태여나서 그런지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의 고향에 내다 모시고싶지 않다. 그래서 고향이나 간도나 다 한지구위에 있다고 어머니를 설득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마음놓고 눈감게 하려면 아버지를 고향에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자기 자신도 이제 룡정보다는 고향이 더 친근하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룡정에 들어서면서 무의식적으로 고향에 돌아왔다는, 향수가 풀릴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고향에 모시려는 뜻을 밝혔을 때 어머니는 생각밖에 이를 반대한다. 이제 어머니도 간도땅에 정이 들었던것이다. 이것이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되는데, 아래의 예문은 작가의 정체성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고향에 대해서는 정을 느끼지 못했고, 따라서 그 곳에 아버지의 유골을 꼭 파묻어야할 아무 미련이나 애착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간도에서 출생했던 탓으로 내 잠재의식이 간도를 향토로 여기는 때문일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태도가 오늘까지 그렇게 아버지의 유골에 대하여 염려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무관심하게 지나게 했을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머니와 나와 고향을 달리한 무의식중의 암투이기도 하리라.   향수(鄕愁)끝에 맛보는 즐거움이라 할까, 무척 반가운 심회를 제어할 길이 없었다. 그 찰나, 내 감정은 또 분열되기 시작한다. 내 향토가 될수 없다던 용정을 무의식중에 고향으로 여기군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무의식중에 고향으로 느껴지는 곳이 진정한 내 고향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간도땅에 깊은 애착을 느끼셨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있어서 이곳은 당신의 땀과 눈물로 물 들여진 혈전장(血戰場)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의 피와 땀이 섞인 땅은 버리고싶지 않은것이다.   이민 2세인 “나”의 경우 출생하여 청소년시절을 보낸 관계로 항상 이민지를 고향으로 생각하며 그런 생각은 무의식속에까지 배여있다. 게다가 그 고향에는 인간이 흔히 느끼는 “집”의 상징인 어머니가 살고있기때문에 몸은 고국에서 살면서도 항상 귀소본능을 버리지 못한다. 아마 이민 2세의 정체성이 고국에 귀환한 상태에서도 이민자의 그것을 탈출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민 1세인 어머니의 경우는 아들과는 반대인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마찬가지 리치다. 례문에서처럼 “자기의 피와 땀이 섞인 땅”이기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 남편의 유골이 묻혀있기때문에 어머니의 정체성은 이제 “간도인”일 수밖에 없는것이다. 문화적인 신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구비할 때 인간의 정체성은 바뀌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도 확인할수 있다. 박계주는 아마도 자서전적인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1944년이라는 시점에서 보면 박계주가 고국땅에 나간지 12년이 된다. 물론 중국 룡정에 어머니와 형이 있었으므로 그동안 가끔 들어와 만났을것이다. 소설에서도 이점은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인이 되여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민자의 정체성을 느끼는 자신의 고민이 담겨진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는 말이다. 결국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박계주가 왜 《순애보》와 같은 통속물로 작가로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오히려 중국체험의 소설에 보다 애착을 가졌는지, 왜 《처녀지》가 수차 전문 삭제되면서도 발표하고자 했었는지를 짐작할수 있을것 같다. 그는 모국땅에 정착해살면서도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이주민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고있었던것이다. 본고에서 박계주를 조선족이민작가로 보고 이민문학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다룬것도 사실은 이점에 주목해서였다. 여기서 다시 《향토》의 한부분을 더 인용하여 이러한 분석과 판단을 재확인해보도록 한다.   그렇게 눈에 쓸쓸하고 마음에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간도지만,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잊을수 없는 곳이오, 그립고 반가운 곳임을 어쩔수가 없다. 그것은 아마 내가 간도에서 출생해서 간도에서 이십년간이나 성장했던 탓이겠지만, 아직도 간도에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고 형님이 계시다는 것도 한 원인이리라. 그보다도 간도는 내 적은 사상의 세계에 젖을 주던 모토(母土)였던 때문일지도 모른다.   5. 극한적인 상황설정과 사투리의 미학   박계주의 소설은 내용적측면에서뿐만아니라 형식적측면에서도 뚜렷한 개성과 특징을 보이고있다. 가장 전형적인것이 극한적인 상황설정과 북도사투리의 적절한 사용이다.   5.1 극한적인 상황설정 초기작품에 해당되는 《인간제물》에서부터 박계주는 소설구성에서 극한적인 상황설정을 중요한 서사적장치로 리용하고있다. 우선 지팡주의 아들 팡룩싼이 주인공인 련희를 간음하려 한다. 첫번째 위기상황이다. 그런데 그 위기상황이 잠시 풀리자 곧바로 두번째 위기가 닥쳐온다. 팡룩싼이 련희의 남편에게 있지도 않은 도박죄를 씌워 갚지도 못할 액수의 벌금을 부과시킨다. 련희더러 팡룩싼의 돈을 꿔서 남편을 구출하도록 함으로써 빚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두번째 위기상황이 해소되기도 전에 결국 극한적인 위기상황을 맞는다. 팡룩싼의 앞잡이요 공안국의 대표자인 송통사가 련희를 간음하려 한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련희가 칼로 자신을 찌름으로써 위기가 해결되지만 작품에서는 이처럼 서로 련결된 위기상황을 극한에까지 이끌어감으로써 긴장감을 조성하여 독자를 끌고있다. 어찌 보면 이는 대중소설이 상용하는 서사전략이기도 한데 대중소설과는 달리 우연의 구조가 아닌 사실적구조를 유지함으로써 본격소설의 원리를 지키고있다. 즉 그러한 극한적인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악을 악으로써가 아니라 선으로 이긴다는 기독교적인 사상을 설득력있게 표현한것이다. 작가의 뛰여난 소설구성력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육표》에서는 좀더 강력한 극한적상황을 설정하고있다. 주인공이 사람 죽이기를 닭잡듯하는 마적에게 육표로 잡힌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위기상황이 점차 강화되는것이 아니라 하나의 극한적인 위기상황을 평면적으로 끌고가면서 위기탈출의 가능성을 긴장감의 요소로 삼고있다. 누가 돈으로 육표를 빼내갈 사람도 없는 두사람이 양복을 입었다는 리유때문에 육표로 잡혔다는것 자체가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위기상황이다. 그런데 어느 기회에 함께 육표로 잡혀온, 주인공 성호와는 원쑤간인 강달귀가 먼저 탈출하면서 성호를 구해주지 않는다. 강달귀의 립장에서는 합리적인 행위방식이다. 그런데 그는 도망치지 못하고 도로 잡혀온다. 이제 강달귀뿐만아니라 성호마저 도망할 희망이 묘망해졌다. 도망의 경력이 있으니 더욱 눈밝혀 직힐것은 당연한 일인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기회가 생긴다. 마적들이 필수로 하는 마약이 떨어진것이다. 마적들은 두명만 남겨두고 마약 탈취하러 나가게 된다. 이번에는 성호가 기회를 타서 자신들을 지키는 마적을 제압하고 도망한다. 물론 성호는 강달귀를 혼자 두지 않고 함께 탈주한다. 문제는 강달귀가 부상을 입은데다 밖에 매달아두어서 기력이 쇠진했다는 점이다. 탈출과정에 또다시 잡혀올 위험이 따르는 소지이다. 그러한 긴장감을 동반하면서 결국 생각지 않던 결말이 나온다. 천하의 악한 강달귀가 성호의 구출에 감동하여 악을 버리고 선에로 돌아오면서 죽은것이다. 순수 대중소설의 립장에서 보면 이 작품의 위기상황과 그 해결의 과정은 조금 허술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악마같은 마적에게 육표로 잡힌 두사람이 각각 한번씩 탈출이 가능하다는것은 어느 정도 우연의 소지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이것을 흠잡지 않는것은 또다른 위기설정때문이다. 즉 선의 대표자인 성호와 악의 대표자인 강달귀가 작품 초반부터 갈등을 빚고 대결하면서 또다른 위기상황을 이어간것이다. 결국 두가지 위기가 겹쳐 전개되는 형국인데 진짜 위기의 해결은 이 두사람사이에서 발생한 선과 악의 대결에서 악이 선에 자리를 내준데서 이루어진것이다. 특히 강달귀가 죽음을 앞두고 악에서 탈출함으로써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를 해명해주고있다. 《사형수》의 극한적 대결상황도 《육표》와 비슷한 구조를 이루고있다. 등장인물과 사형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을 설정하여놓고 그 위기상황에서 인물들이 보여준 천태만상을 전개시킨것이다. 주인공들의 립장에서 보면 극형을 받고 실제 집행하기까지는 짧으나마 생의 시간이 존재하고 또 여전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남아있기때문에 긴장감은 끝까지 유지된다. 그 긴장감속에서 인물들이 보여준 심리와 행위는 결국 인간의 본질에서 비롯된것이여서 독자의 공명을 동반한다. 거기에 마적을 사형에 언도한 륙군의 마적보다 더한 악행, 사형수의 시체에서 뭔가 리익을 얻으려고 싸우는 거지들의 행위가 곁들여지면서 인간의 본질들이 적라라하게 표현됨으로써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있다. 상기 세 작품외에도 《유방》에서의 귀머거리, 눈봉사의 인물과 모자의 확인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모토》에서의 마약중독으로 인한 죽음의 림박과 모토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극한상황을 포함하여 “극한적인 상황설정”은 박계주소설의 중요한 서사적특징이 되고있다. 요컨대 박계주는 대중소설의 서사전략을 본격소설에 성공적으로 적용한 작가라 하겠다. 이점은 소설미학적인 측면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5.2 사투리의 미학 박계주는 함경도사투리를 소설미학적으로 적절히 리용한 최초의 작가라 할수 있다. 이점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른 사투리를 리용한 작가들은 더러 있었지만 박계주처럼 함경도사투리를 대량, 그리고 적절히 소설에 리용한 경우는 없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언어미학의 한부분으로서 사투리의 적절한 사용은 인물의 개성과 지역색을 살리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여름이 돼서 그렇지비, 동삼(겨울)만 돼두 될뻔이나 한 노릇이오?” 하여서, 곰이나 여우를 놓쳐버렸을 때마다 뇌이는 푸념이 돼버렸던것이다. “제엔장, 눈만 오문야 내 그눔으 잡아놓쟁이능가 어디 두고보라안데, 그눔 두셋쯤만 잡는대두 괴긴 그저 먹구 능담(웅담)은 능담대루 팔아서 이눔의 짓(함지 만드는 일)으 하쟁이쿠두 벰베이 살아갈께 앙이오?” 함지를 깎으면서 그는 앞에 앉아 담배를 빠는 이대동이라는 곁집 령감더러 노상 장담이였다. 이럴 때마다 이대동령감은, “그렇쟁이쿠, 굄이(곰)두 굄이지만 그눔으 여끼(여우)만 해두 어디메오. 이글년에는 여끄가쥑이두 값이 무섭게 올랐답더구만.” 하고, 맞받아 장단질이다.   “아즈망이, 그지간에 탈이 없이들 잘 지냈음둥?” 처음에는 누군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으나 가까이 이르는것을 보고서야, “앙이, 난 뉘기라구. 오느라구 되우 욕으 봤겠으꼬마.” 산가의 아낙네는 사뭇 반가워하며, 가치 온 다른 두 손님(그중의 한 사람은 녀인이다)과도 인사를 건넨다. 두사람 다 전에 오지 않던분들이다. “욕이다뿐이갰오? 알구 한번이지비 이눔으데루 뉘귀 오갰음둥? 그런데 쥔 령감두 패난하오?” 그는 히잉 두손가락으로 코를 풀어서 보기 좋게 땅위에 멧다때린다. “야앙, 우린 별탈 없으꼬마.” 하고, 대답하는 산가의 녀인은, 발귀(썰매)에서 물건을 풀어내리려는 손님더러, “건 내중에 풀기루 하구 날래 방으루 들어갑지.” 한다. “야앙, 좋스꼬마.” “앙이, 들어가쟌대두…….”   《처녀지》에서 임의로 따온 두단락이다. 함경도사투리의 기본적인 특징은 물론 산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이 살아난다. 작품에서는 또한 “시걱(끼니)”, “에미내(녀성, 안해”, “놀가지(노루)”, “아슴챙이꼬마(고맙습니다)”, “웃티(옷)”, “되비(도로)”, “불술기(기차)”, “쌔시개(정신병자)”, “동삼(겨울)”, “발귀(썰매)”, “쾌마우재(톱)” 등 함경도특유의 어휘나 표현들을 대량 리용하고있고 이를 표준어로 병기해주는 배려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뿐만아니라 《딸따리족》에서도 함경도사투리는 강동령감이라는 주인공의 개성적인 형상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리용되고있다. 언어적표현의 특징과 관련하여 함경도사투리의 적절한 리용외에 또 한가지 짚고넘어가야 할것이 있다. 바로 한어원음의 적절한 인용이다. 《육표》와 《사형수》에서 특히 많이 볼수 있는데 작가는 이를 통하여 이민지의 언어환경을 생동감있게 제시해준 동시에 이민족인 한족에 대한 이주민의 느낌마저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작품의 형상성을 크게 향상시켜준다.   “어이, 비에차울라 렌쟈 쑤에이쟈오니 저거 투재즈!”(아 웨 이래? 남 잠 못자게시리, 응? 이 예병하다가 열뻔 고꾸라져도 씨원ㅎ쟎을 녀석 같으니란!)   “콰이 쉬죠바. 쩜마 저양 지지거야?”(어서들 자. 웨 이리 짖거리는 거야!)   “전 타마이나가비! 쎈재 나우란디 부쓰 저거 우즈마?”(제에길 할 자식들! 방금 떠버리던 방이 이 방이 안야?)   “니 쩐 부숴마? 왕바당 차우디!”(아 그래 안댈테야? 이 빌어 먹다 뒈질 자식들아!)   《사형수》에서 임의로 따온것인데 한어의 발음이나 우리말 번역 모두에 일부 정확하지 못한 부분도 있으나 그것마저도 이주민의 한어감각의 실상이여서 생동감이 넘친다. 《육표》에서는 한어대화의 리용은 물론 마적들이 부르는 노래마저 인용하여 작가의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上等人們該找錢(特權階級에게선 돈이나 걷우자.) 中等人們莫管閒(中産階級에게는 상관 말자.) 下等人們快來吧(無産大衆은 어서 오라.) 跟我上山來過年(우리 함께 산에서 즐겨 지내자.)   함경도사투리와 한어원어의 적절한 리용은 박계주소설의 중요한 특징이여서 소설미학의 시각에서뿐만아니라 어학적인 측면에서도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6. 마무리   박계주는 룡정출신의 이민 2세 작가이다. 그는 대중소설작가였을뿐만아니라 본격소설분야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쌓은 조선족이민작가였다. 그는 중국적 특징이 뚜렷한 소재를 선택하여 식민지하 현대문명을 비판하였고 동시에 인간의 악과 선을 대결시켜 기독교적인 박애주의사상을 드러냈다. 《유방》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식민지지식인의 문화적혼종성을 로출하기도 하였으나 《인간제물》, 《향토》 등 작품에서는 이민자의 정체성인식을 확인해보고자 했다. 조선족이민작가임을 확인할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형식의 탐구에서도 박계주는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극한적인 상황설정을 통해 소설의 긴장감을 확보하면서 대중소설의 우연적 구조의 약점을 극복였으며 함경도사투리와 한어원어를 적절히 리용하여 작품의 표현력을 극대화하였다. 이점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작가들의 귀감이 될만하다.
2    김창걸의 소설사적 위치 재고 댓글:  조회:1239  추천:0  2009-11-16
  김창걸1)의 소설사적 위치 재고 장춘식 1.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가 해방 전의 작품을 논의할 때 그 대상 작품은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다. 즉 당시 창작되어 당시의 지면에 발표된 경우(이 경우가 다수임) 당시에 창작되었으나 발표가 되지 않았다가 해방 후에 발표된 경우(윤동주의 시가 이에 해당됨)와 당시 발표되었으나 인멸되었거나 당시 창작했으나 발표되지 못했다가 인멸되어 해방 후에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새로 쓴 경우(김창걸의 작품이 이에 해당됨), 그리고 당시 발표되었다가 해방 후에 다시 수정하여 발표한 경우 등 가지각색이다. 여기서 원칙적으로는 첫 번째 경우의 것이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 통례이고 두 번째, 즉 윤동주의 작품처럼 당대에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당대의 창작품이 확실한 경우에도 어느 정도 연구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경우는 사실상 별로 연구가치가 없고 간혹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 우리는 김창걸을 해방 전 우리 소설사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별로 여겨 찬미의 미사려구를 아끼지 않았다.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1990)에서는 그를 해방 전 소설가로서는 유일하게 다루고 있고 김호웅은 더구나 “‘간도땅’을 토양으로 ‘문화부대’의 영향 밑에 자라난 첫 향토작가이며 평생을 이 땅의 인민들과 운명을 같이 한 우리 문학의 개척자이며 선구자이다.”(김호웅: ������在滿朝鮮人文學硏究������, 국학자료원, 1998) 라고 하여 최고의 평가를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오늘까지도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과거 최서해, 강경애, 안수길, 현경준, 박계주 등 나중에 조선 땅에 나갔거나 일찍 작고한 작가들의 작품을 조선문학의 범주에 귀속시켜 우리 현대소설연구에서는 제외시킨 상태에서 내려진 것이어서 현재의 시점에서는 재고의 여지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한다. 2. ������김창걸단편소설선집������(해방전편)에 대하여   ������김창걸단편소설선집������(해방전편)에는 13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지새는 밤」과 「낙제」는 현재 발표 당시의 원문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현재 발굴된 작품 7편(원시 텍스트)을 그 11편에 더하면 모두 18편으로서 우리가 김창걸을 소설가로서 평가할 수 있는 자료는 결국 이 18편의 단편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暗夜」(즉 「지새는 밤」)와 「靑空」을 제외하면 작품선집 외의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콩트 수준이고, 앞에서 든 김창걸에 대한 평가의 근거로 된 작품은 대부분 1982년에 출판된 ������김창걸단편소설선집������(해방전편)의 수록작품들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선집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김창걸의 소설사적 위치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관건으로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창걸은 이 작품선집의 머리말에 해당되는 ������작품집을 내면서������에서 “그때의 작품 중에서 자서전적 제재의 것은 회상이 되어 스토리를 되살려 정리할 수 있었다. …시대배경도 그렇거니와 사상성도 원래의 것으로 복자(伏字)를 고쳐놓는 정도로 하려 했으나 현재의 것이 섞여 들어와 더러는 어색하게 되었다.” 고 적고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원래의 것으로 복자(伏字)를 고쳐놓”은 것이고 어느 정도가 “현재의 것이 섞여 들어와” “어색하게” 된 것일까가 문제이다.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선집에 수록된 것과 현재 발굴된 원시텍스트 가운데서 상응되는 작품을 찾아야 할 것인데, 현재까지 조사된 데 의하면 이에 속하는 작품은 「暗夜」(작품선집에서는 「지새는 밤」)와 「락제」 두 편뿐이다. 그 중에서 「暗夜」는 “복자를 고쳐놓는 정도”의 수정을 한 듯 거의 원문과 일치한데2), 「락제」는 상당히 큰 차이가 난다. 아마도 “현재의 것이 섞여들어”온 경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작품선집에 수록된 「락제」와 ������만선일보������에 발표된 「落第」를 비교해보는 것은 작품집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두 작품은 기본적인 줄거리는 큰 차이가 없다. 주인공(사이상)이 벼락같이 용원으로 승급한 용선이의 “거저 먹이면 다 된다”는 말을 듣고 뇌물을 사들고 구미쪼를 찾아가다가 차마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되돌아와 친구들과 그걸 먹으며 “나야말로 천생 락제야. 락제한 덕으로 오늘 저녁은 잘먹는다”고 했다는 것이 「落第」의 줄거리이고; 장호라는 주인공이 일본인 청년들이 쉽게 용원이 된 것을 보고 박이라는 사람의 제안을 따라 뇌물을 사들고 조장을 찾아가다가 되돌아와 그것을 “락제”한 턱이라며 친구들과 먹었다는 것이 「락제」의 줄거리다. 그런데 여기서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용원이 된 사람이 「落第」에서는 용선이라는 조선인인 반면 「락제」에서는 일본인 청년이라는 점이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락제」에서는 「落第」에 없는 일본인 청년 둘이 어떻게 장호를 “선생님”으로 부르던 것이 금방 “해라” 계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에피소드를 덧붙이고 있다. 「落第」에서는 그냥 “구미쪼”에게 귤 두 궤와 술 세 병을 사들고 간다고 되어 있으나 「락제」에서는 일본인 조장에게 “코밑에 진상”을 하고자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落第」에서는 불만, 혹은 비난의 대상이 비정상적인 절차로 용원이 된 용선이라는 조선인이고 부패한 조장도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데 비해 「락제」에서는 그것이 일본인으로 확실히 밝혀져 있고 그 일본인 청년들 또한 「락제」에서는 며칠 사이에 “선생님”에게 “해라” 계칭을 쓸 정도로 간사하고 무례하다는 에피소드, 그리고 뇌물을 받아먹는 조장 또한 일본인으로 분명히 밝혀져 있음이 크게 구별된다. 이런 차이에 의해 감지되는 작품의 의미는 물론 반일적 정서이다. 다시 말하면 「落第」의 주제가 “「야마시」판”인 현실에 대한 비판인데 반해 「락제」의 주제는 그런 부패한 세상에 대한 비판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락제」는 그 주제의식에서 「落第」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 된다. 사실상 「락제」의 주제의식은 당대 사회에서는 전혀 공개적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지새는 밤」(원명 「暗夜」)의 경우가 당대 사회에서는 가능한 소설적 표현이 된다 하겠다.   그 밖의 작품들도 이 「락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당 정도 “현재의 것이 섞여들어”와서 어디까지가 당대의 것이고 어디부터가 현재의 것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다. 가령 “김약천선생이란, …‘독립운동’에 몸바쳐 애써온 애국지사이다.”3)라든가, “이제라도 홍대장부대로 가야 할텐데…”4), 그리고 「전형」(원명 「개아들」) 등 작품에 나오는 일제의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 그리고 「강교장」에서의 직접적인 항일의식 표현 등은 모두가 “현재의 것”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경우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무빈골전설」이나 「두번째 고향」, 「어머니의 반생」(원제 「밀수」) 등의 경우는 “현재의 것”이 상당 정도 섞여들어 있으나 당대의 것이 보다 우세한 듯하다. 참고로 분석해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빈골전설」에서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약 오륙십년전, 그러니 간도 개척초기의 일”이라고 하여 간도 개척 모티프임을 우선 시사해주고 있다. 김서방이 아내 박성녀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룡정촌에 이주를 가다가 무빈골에 사는 천서방을 만난다. 천서방의 만류로 무빈골에 자리를 잡는데 꾸어먹은 양식과 콩알만한 까만 약을 얻어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반항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아내는 자살하여 아들만 남게 된다. 그러나 김서방은 한이 맺혀 혼백으로 나타나 간악한 중국인 지주 무빈 일가에게 복수한다는 것이 단편 「무빈골전설」의 기본 줄거리다. 이주민들이 겪는 고난과 불행의 현장을 생생히 그려 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결말 부분에서 김서방의 혼백이 나타나 복수한다는 모티프는 경향파 작가들의 그것에 맥이 닿아있다. 지주와 소작농의 대결이라는 갈등구조에서 보면 뒤에 살펴볼 「暗夜」와도 맥이 닿는다.   이 작품은 서두 부분에 이야기의 출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이야기는 김약천교장이 하고 박선생이 전하는것이니 나로서는 믿음성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실지의 목격담인지 전해들은 이야기인지 오늘날 김교장마저 세상뜬 뒤여서 알길 없으나, 이제 원 이야기에 별로 붙이지도 않고 그대로 적는다.” 소위 액자소설의 구도를 갖추어준 것이라 하겠는데, 이는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이 혼백이 되어 나타난다는 장면을 합리화하려는 구조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가 김약천교장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모두의 설명을 감안하면 반일적 혹은 계급적 의식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김약천선생이란, 간도에서 너무나 이름있는 M학교창립자로서 ‘3.13’이전에 중학교졸업생 8회나 길러낸 교육가이고, 일찍 ‘××회’회장으로 있을 때 쏘련연해주지방에도 드나들면서 ‘독립운동’에 몸바쳐 애써온 애국지사이다.” 라는 설명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복수했다는 이야기의 대목에 가서는, 자기자신은 그런 미신을 믿지 않으므로 꼭 그랬다고 말하기는 점직하나 그대로 말한다고 부언하더라는것이였다.”고 한 것은 앞에서 언급된 허탄한 이야기를 합리화하려는 구조적 수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출처와 관련된 모두의 설명은 “현재의 것”이 섞여 들어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총체적으로 보아 「무빈골전설」에서는 이주민의 정착이라는 모티프가 등장하기는 하나 액자 속 이야기의 모두에 “간도 개척초기의 일”라고 제시한 것과는 달리 초점은 오히려 부자와 빈자의 대결에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두번째 고향」에서는 이주민들의 정착과정에 무게가 실려있다 하겠다.   소설은 모두에에서 조선 회령에서 중국 간도에 들어오는 길에 있는 “스물네댓 되는 경철이란 젊은이가 에누리없이 열이나 되는 식구를 데리고 간도땅에 들어와 처음 자리잡은 수남촌이란 마을”을 지리적 위치로부터 주위 환경, 마을의 기본 상황, 거기서도 “간도의 첫학교라고 하는 M학교”가 있어 “간도일대는 말할것도 없고 조선이나 로씨야 연해주에서도 류학생들이 모여들어 매우 성황을 이루고있었다”고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개척 초기의 이주민생활은 아니지만 새로 이주해온 주인공, “아직 북상투를 쫓은데다 갓망건을 쓴 젊은 경철이”에 대해 말하면 이주민으로서의 정착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씨그러지다가 괴운 말장에 의하여 채 넘어지지 못한 초가 륙간집”에 경철이까지 열한 조손 “삼대가 옳이거꾸로 누워자는 형편”이다. “참말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사람이 되는가? 그렇다면 타향살이가 몇해일가, 몇십년일가, 아니 몇백년일가―몇백년 산다치고―”5) 이것이 일가를 간도 땅에 이주시키고 나서 주인공 경철이가 느낀 심경이다. 그렇게 간도 땅에 이주를 오게 된 것은 “간도땅은 미운놈 기장밥 주는 곳, 홍두깨같은 강냉이이삭과 베개만한 감자를 먹”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이제 더 이상 배를 불릴 수 없는 상황에서다. 그러기에 “왜 강산이 이렇게 다른가? 이쪽에는 송림이 울창하고 양지바르고 한데, 저쪽이 마도강이라고 하지, 왜 저쪽은 저리도 펀하고 뿌옇고 자욱하고 어두운가?” 라는 아버지의 말에 경철이는 “아무려나 우리는 북으로 가게마련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서 좋은 고장으로 만들어얍지우!” “고향이야 어디 살아나기나름입지요. 살면 다 고향이 되는 법이 아닙니까?”6) 경철이의 이 말은 작품의 제2 고향의 주제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간도 땅의 정착은 바로 이 제2의 고향 건설이라는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다. 원래의 고향을 떠나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국 땅에 이주했다면 이국 땅도 역시 제2의 고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의 고향은 고국 땅에서의 제2의 고향과는 큰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산천이 생소할 뿐만 아니라 법과 정치도 다르다. 그리고 상대해야 할 이웃도 민족이 다른 이국민이다. 이주한지 얼마 안 되어 뒷따라 이주해온 먼 일가를 유숙시킨 것이 법을 어겼단다. 객주허가를 내지 않고 손님을 유숙시켰다 하여 순경국에 끌려가 벌금 3원에 관청문턱을 넘었다고 하여 “문턱세” 2원 하여 5원이나 물어라고 한다. 겨우 사정하여 3원으로 낮추기는 하였으나 억울함은 어쩔 수가 없다.   여기서 작품의 흐름은 크게 바뀐다. 주인공 경철이가 상투머리를 자르고 M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3.13운동에 참가하며 나중에는 의병에 들어갔다고 한다. 작가가 “현재의 것”이 섞여들어갔다고 표현한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작품의 전반부는 개척민의 이민 모티프를 전개해 나가다가 중반부터는 저항의 주제로 전향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하면 「어머니의 반생」은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자서전적 제재의 것”이여서인지 주로 당대의 것으로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인다. 아들의 치료비를 대기 위하여 계란 장사, 옹기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소금 밀수, 면포 밀수까지 하며 고생하고 수모를 당하던 이야기로 된 이 작품은 당대 사회의 비리와 불합리를 비판했다는 저항적 성격 외에도 이주민으로서, 특히 여성으로 겪어야 했던 모진 고난과 불행을 일인칭 기법으로 친근감있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당대 사회의 비리와 불합리를 비판함에 있어서도 여타의 작품에서처럼 당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표현이 아니라 어머니의 경력과 운명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정신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그러나 아무리 “현재의 것”이 적게 섞여 들어온 경우라고 하여도 어느 정도의 정신사적인 가치는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을 당대의 작품으로 간주하여 왈가왈부하며 작가의 소설사적 위치를 확인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김창걸의 해방 전 소설을 논의할 때 현재 확실하게 발굴된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정확한 학문적 자세라 할 것이다. 3. 단편 「暗夜」에 대하여   지금까지 김창걸의 작품을 논의할 때 거의 모든 논자들이 「暗夜」를 김창걸의 대표작으로 꼽고있고 또 해방 전 조선족 소설창작의 가장 큰 성과작으로 평가하고 있다.7) 여기에는 이 작품의 가치 자체 외에도 다른 작품은 당대의 작품이 아니라는 상황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작품구조의 엄밀성이나 표현의 생동성, 주제의식의 전형성 등 면에서 볼 때 ������김창걸단편소설선집������에는 「暗夜」를 능가하는 작품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여도 「暗夜」의 가치는 여전히 충분히 인정된다고 보여진다.   이 작품의 가치는 우선 갈등을 이룬 양대 세력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점, 즉 계급적 대립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갔다는데 있을 것이다. “어쨌든 양복쟁이신사보다도 보리마당질에 보리거스러미를 잔뜩 뒤집어쓴 내 얼굴이 고분이에게 더 좋은 것은 회박을 뒤집어쓴 거리계집보다도 보리방아 찧고 보리겨를 담뿍 쓰고 나온 고분이 얼굴이 나에게 더 어여쁘고 더 좋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뾰죽구두 짜리에게 장가 못 갈 것이나 고분이가 양복쟁이한테 시집 못 갈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이긴 하다. 그러니 촌사람은 촌사람끼리, 없는 놈은 없는 놈끼리가 늘 좋은 법이다.”8) 이는 이 작품의 주제를 분석할 때 흔히 인용되는 예문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형상적으로 잘 표현한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작품에서는 그러한 갈등을 주인공인 명손이라는 시골 젊은이의 시점에서 고분이라는 처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관련시켜 전개시킴으로써 보다 리얼리티를 획득하고있다. 이러한 분석은 다수의 평자들이 일반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매매혼인이라는 사건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이해하고 싶다. 즉 고분이는 빚 때문에 외통눈이 남가가 아니면 나이 오십에 아들이 없어 소실로 고분이를 사려는 윤주사에게 팔려가야 할 운명이다. 최령감네 빚을 변리까지 일백오십 원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령감은 딸을 팔아 부자가 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 얻은 빚은 도무지 미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응, 네놈의 딸은 궁녀더냐, 선녀더냐, 대감집 규수더냐? 이놈아, 내 돈도 딸을 팔아 모은 돈이다. 네 자식만 딸이더냐? 나두 다리 저는 놈에게 후실루 딸을 줄 때에는 생각이 좋지 못했다. 내 딸은 썩은 호박새낀 줄 아느냐?” 이것이 최령감의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된 이유가 되는 셈이다. 우리 민족 이주민들이 간도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가슴아픈 대가를 치렀는지를 보여준 대목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모아 부자가 된 최령감은 자신의 지난날의 아픔을 또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전가(轉嫁)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갈등이 다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이는 「지새는 밤」의 결구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성호는 “특히 소설의 주인공 청년 남녀의 야간도주는 비록 그것이 소극적이고 자연발생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부정(否定)하고 현실극복의 자세와 저항적 의지를 표명함에 있어서는 커다란 문학적 의의를 산생시킨다. 그리하여 작자는 야간도주를 하고 있는 그들의 앞길에 밝은 미래를 제시하였던 것이다.”9)고 평가하고있다. 대체적으로 정확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따져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연애위기의 해소라는 시각에서 보면 주인공의 행위는 적극적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제기한 가난의 문제, 즉 부자와 빈자의 갈등의 문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소설은 끝났다. 돈주고 고분이를 사려던 윤주사에게 분풀이를 했다고 하여 반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반항은 반항이지만 계급적 반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분이가 아니면 그는 또 다른 처녀를 사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분이가 야밤도주를 하면 고분이네 집에서는 고분이를 팔 수가 없다. 그러면 빚은 여전히 남아있게 되고 계속 갚지 못하면 끊임없이 변리가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최령감은 또다시 딸 팔아 모은 돈을 내놓으라고 야단을 칠 것이며 고분이의 아버지는 그것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간단히 야밤도주의 길을 택하고 만다. 야밤도주는 주인공의 단순한 분풀이나 연애위기의 해소에 지나지 않으며 빈자와 부자와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심각한 모순을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 혐의가 보이기 때문이다. 4. 단편 「靑空」에서의 현식인식의 자세 문제   전성호는 김창걸의 「靑空」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소설 「靑空」은 우리 민족 ‘간도’ 이주민들의 극도의 궁핍에 의한 타락의 일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물론 이 소설은 뒷부분에 가서 당시 ‘만선일보’에서 권장하던 이른바 ‘금연운동’에 야합하여 주인공이 금연을 맹세하고 새 인간이 되려는 정신면모를 보이고 있다.”10) 어떻게 보면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원래 “한달에 이십원도 못되는” 월급을 받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골 학교 교사였는데 “돈을 만이 모여서 사회를 위하야 더 조흔 일을 하”고자 “올치 못한 길을 것는 친구를 최후지 채직하는 경춘이”이의 간곡한 만류도 마다하고 교사 노릇을 그만두고 아편장사를 하는 관식이라는 한 마을 친구를 찾아간다.   돈벌이를 떠나는 “나”의 목적은 꼭 금전에 양심을 빼앗긴 것 같지는 않게 보인다. “첫재로 먹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지만은 가정생활에 잇서서 물질적 구속을 밧고서는 사회를 위하야 쥐리만큼도 할 수 업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음으로는 몃만 원 돈을 감이 쥐기만 한다면 세상이  놀래인 훌륭한 일을 하리라 생각햇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이삼 층 벽돌집에서 술 먹고 게집에 지고 하는 생활을 동경하야 돈을 모흐련다면 차라리 굼고래도 나지 안켓다. 나는 이지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는 고사하고 늘 경멸햇든 것이다.” “나는 올흔 길을 위하야는 수단(手段)을 가리지 안는다고 미덧든 것과 가티 돈 모흐는 길을 위하야는 그 수단을 가릴 수 업다고 미덧다. 그것은 모흔 다음에 갑잇게 쓸려는 욕망에서라고 변명햇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하겠다고 하는 “세상이  놀래인 훌륭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돈벌이에 나서서 처음에는 아편장사는 아편쟁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관식의 충고대로 아편을 팔기만 하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편에 탐닉하여 아편중독자로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아내에게마저도 아편을 강요하여 중독자로 되게 한다.   그러던 “나”는 “나”를 아편장사에 입문시켜준 관식이가 아편중독자가 되어 아내를 팔고 자신마저 기차에 치워죽자 재생을 시도한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집에 돌아왔으나 금연이 여의치가 않자 아내와 함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때의 “나”의 심리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하다. “나는 다시 살어난다면 첫재 아편금단운동을 하고 십어 어 방법으로 할가는 아즉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업스니---어면 중독자들 맨들가 하는 것은 만이 생각햇으나---알 수 업으나 무조건하고 그것부터 하고 십다.”“천행으로 다시 살어나기를 바랄런지도 모르겟스나 그 한 가닥의 희망은 든든이 부고 잇다. 그러면 이 사회는 나를 다시 용납하여 줄가. 내가 좀먹게 한 이 나라가 나를 바더 용납하여 줄가.”   물론 아편, 즉 마약 흡입 혹은 중독은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당시 만주국 전역에 걸쳐 아편중독의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였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중독자와 관련된 작품이 상당수 보이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하겠다. 그러나 “내가 좀먹게 한 이 나라가 나를 바더 용납하여 줄가”라는 표현은 당시 만주국의 국책의 하나로 되었던 금연운동에 동조한 흔적이 너무도 뚜렷하다. 특히 「靑空」이 당시 ������만선일보������의 신춘문예에 3등으로 당선된 작품임을 감안할 때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 ������만선일보������에서 실시했던 禁煙文藝作品大懸賞募集의 광고문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阿片의 斷禁은 我國 建國以來의 重要 國策으로서 이래 그 完遂에 官民 全力을 傾注하야온 結果 建國第十年을 맞이한 今日 그 成果는 顯著한 것이 있고 國內의 民生은 이로 말미암아 面目을 一新하였습니다. (中略) 建國十周年 紀念事業으로서 排煙拒毒의 警鐘을 울리며 다시 各種의 事業을 計劃하야 最後의 完璧을 期하랴함에 伴하야 本社에서는 本國策에 協力하고자 禁煙文藝作品의 一大懸賞募集을 하기로 되었아오니…(後略)11)   비록 「靑空」이 발표되던 1940년보다는 한 해 뒤인 1941년의 것이어서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겠으나 여기서 “阿片의 斷禁은 我國 建國以來의 重要 國策”이라고 한 걸 보면 신춘문예작품현상모집에도 상당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김창걸 자신도 「붓을 꺾으며」에서 언급하고 있다.   원체 나의 작품이 당선된 데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다. 당시 어떤 작품이 당선되는가를 미리부터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현재 당국의 정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불만을 보여서는 안되고 될 수 있는 대로 썩 좋다고 하면 그럴수록 “합격”된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나는 알고있었으나 그 정도를 딱히는 몰랐다.   아무래도 당선은 돼야 하리라고 생각한 나는 그 “비위”에 맞춰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표준”으로 원고를 올리 훑고 내리 훑고 하면서 마치 현 사회가 “태평성대”인 듯이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그런데 한번은 목단강에서, 한 아편중독자-그도 사회운동을 하노라던 사람이 중독자로 되어 헌 마대를 걸치고 다니다가 목숨을 끝맺는 것을 보고 「그의 끝장」이란 작품을 써 신문사에 보내었다. 그런데 신문사의 학예면 사람들에게서 “필봉을 낮추어 쓰라. 발표될 가능성여부를 생각해서 쓰라.”는 편지가 왔다.12)   그리고 작품에 “수일 전에 관식이가 마대양복을 입고 구두를 두 켜레나 훔처가지고 어 모히 파는 집으로 들어가”더라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혹 「그의 끝장」이란 작품과 소재상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사실상 만주국의 국책에 동조했거나 적어도 “‘비위’에 맞춰” 쓴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겠다. “공립학교로 개편된 후 교장으로 건실히 교육가의 참된 길을 것는 경춘이” 등 여기 저기서 볼 수 있는 체제 협력적인 문구들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된다.13) 5. 기타 소설 작품   이제 남은 작품은 「거울」(������만선일보������, 1940.7.14-16), 「天使와 妖術」(������만선일보������, 1940. 7.19-20), 「소고기」(������만선일보������, 1940.7.21-23), 「“마리아”」(������만선일보������, 1940.8.6-7) 등 네 편인데, 그 중에서 「거울」이 단편소설이고 나머지는 콩트 수준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 중에서도 적어도 「거울」 한 편은 「暗夜」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나긴 여름 여물기전부터 감자알갱이를 파다가 겨우 연명한 최첨지는 가을철을 잡어들어 배고픈 고생만은 그래도 얼마 눅처젓다.” 그러나 세월 덕분에 그만큼 농사가 된 것도 최첨지에게 있어서는 간도 들어와 삼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밧은 말할 것도 업지만 소도 업시 남의 밧을 좀 어더 지은 농사”여서 “일시 먹을 것은 생겻스나 당장 치위는 닥처오는데 헐벗은 몸이 문제다. 아이들지 다섯 씩구 솜옷을 하여입을려면 올 가튼 물건갑으로는 일년농사를 다 팔어도 어림도 업다.”   최첨지 일가가 얼마나 째지게 가난한 살림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 서두의 장면이다. 물론 여기에는 부자와 빈자의 절대적 대결의 국면은 전개되지 않는다. 가난 자체만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어 최첨지는 “소곰과 석냥이 러진 것도 큰문제지만 그 보담도 넉마 견지나 사기 위하야 나무 한 짐을 잔 질머지고 장으로 갓다.” 그러나 소금과 석냥을 사고나니 넝마 견지도 살 여지가 없다. 그는 출출한 김에 호주 한 잔을 걸치고는 세상이 미워져서 저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망할놈들 가트니라구, 네놈들은 머시게(무엇이) 잘나서 거들거리구 응 돈푼이나 잇스문 다 되는줄 아나? 원 세상이 곤두루 설나니 어 취한다, 취해”   최첨지는 누구에게라고 지정도 업시 장판을 흘겨보고 잇섯다. 세상 사람을 모다 욕하고 리고 물어고도 십헛다.14)   자신의 가난이 사회의 불합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계급적 대립은 분명히 제시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만인게”(萬人契)라고 불리는 유민채표를 꺼내놓는다. “웃마울 박주사네두 만인게 썻다가 마저나서 만원을” 탔다는 데 욕심이 생겨 산 것이다. “맑은 하늘에 이 잇지비. 우리네가튼 가난뱅이를 마처 안주문 그래 돈잇는 놈만 마처날텐가” 하는 것이 최첨지의 주장이다. 그러나 복권은 꼴등에도 당첨이 되지 않는다.   “괜히 청에나 싸다 여먹을 걸 일년내 고기리 한 번 못 어더먹는 신세에”   하고 안해는 두덜거리면서 뒷방 아랫목 문지속에 파뭇친 어진 거울을 차자 몽당치마로 한 번 문지른 다음에 최첨지 안해는 불숙 내밀엇다.   “엣수 쎅경(거울)이나 보우. 만원이 꿈으루 굴러들어올 신순가”   “원 이웃말 박주사는 별루 낫든가 흥, 하기는 아래두 이 아랫수염에 어 재물 붓기는 틀렷서”   “벌서 섹경으 밧드문 일원도 안 일헛지비”   결국 가난의 원인은 신수 팔자에 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난 셈이다. 요컨대 가난의 제시라는 점에서는 경향파 문학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으나 그 가난의 원인이 사회적 불합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팔자 탓이라고 한 데서는 계급문학의 흔적을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최첨지가 세계와의 대결에서 취한 태도는 겨우 “(안해와) 서로 처다보면서  모를 웃음을 웃”는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체념, 즉 숙명론적인 현실순응의 태도라 할 수 있다. 「暗夜」의 주제의식에서 한 걸음 퇴보한 것임에 분명하다.   「“마리아”」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작품에서는 카페 여급인 마리아와 시골 신사의 엇갈린 인생 태도를 통하여 시골과 도시의 삶을 대결시켜놓고 있다. 물론 마리아의 불행한 운명을 제시함으로써 작가의 지향은 시골의 삶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두 문명의 대결을 주제 해결의 중심에 놓고 있음은 분명하다.   거리의 전등, 자동차, 라디오, 네온, 아스팔트, 고루거각, 파마네트의 물결, 그리고 돈, 돈… 그것들 문에 거리로만 모여드는 이 사나이와 가튼 촌사람들이나 거리의 퇴폐적 생활에 실증은 극도로 늣기면서도 인생의 본향(本鄕)으로 돌아갈 수 업는 자긔나 무엇이 다르랴.15)   두 문명의 대결은 바로 이런 형태로 형성되어 있다. 마리아는 여학교 졸업반 시절 최라는 사내와 죽자살자 했고 그와 관계를 가지면서 학교에서도 퇴학을 맞고 집에서도 쫓겨나 그 사내와 살림을 시작했으나 둬달 후에 나타난 사내의 본처에게 쫓겨나 카페의 여급이 되었었다. 그녀는 이제 도시 문명에는 진저리를 느끼며 보리밥을 먹어도, 베치마 입어도, 김을 매면서도, 나무를 베면서도, 파마네트를 못하면서도, 뾰족구두를 못 신어도, “오도꼬”와 연애를 못해도, 즉 도시 문명의 모든 즐거움을 버리고서라도 시골에 가고싶어 하나 갈 수가 없다. “농촌으로 갓섯자 닭의 무리에 병아리가치 되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카페에 온 시골 신사는 마리아 같은 “네에쌍”이 있어서, 즉 인용문에 제시된 도시의 찬란한 유혹이 있어서 “남을 잡지 못해 배만 알는데두”, “모든 죄악만이 넘치는 곳이래두”, “매독균이 우글우글 하는 곳이래두” 도시가 좋다고 한다. 인생은 짧은 것이므로 촌구석에서 썩을 수 없으며 순간이라도 극락이나 천당에서 살겠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도시 문명을 “모든 죄악만이 넘치는 곳”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비판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특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농촌에 돌아갈 수 없다고 한 점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승급시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록 “촌사람덜은 거리루 못 와서 병나구 지랄”한다고 한 점에서는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도시 문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주인공 “마리아”의 타락의 원인이 사회적인 원인에서가 아닌, 개인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되어있으므로 그것을 사회 비판적인 작가적 태도에 연관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정 세태적인 의미가 더 짙다 하겠다.   「天使와 妖術」과 「소고기」의 경우는 더구나 거의 시정 세태소설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소고기」에서는 추석 전날, 전에 이름을 알다가 누구의 소개로 만난 K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자게 되고 다음날, 즉 추석날 아침에 들어온 아침상에 K의 국그릇에는 소고기가 많이 담긴 반면 “나”의 국그릇에는 “소고기 기름 이지 고기점은 겨우 하나 둘 하고 아모리 헤어보아야 에누리 업시  석 점”이 놓여있어서 K가 얼굴이 붉어지고 그 아내의 행위를 “배곱파 울어도 젓을 주고 배불러 울어도 젓을 주는 조선 어머니들의 전통을 그대로 받”은 것이라고 변명하였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남편 사랑 때문에 손님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고나 할까? 사회적 의미는 별로 없는 그렇고 그런 시정 세태소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天使와 妖術」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아이 둘을 가진 명환이라는 사내가 아내와는 이혼하기로 약속하고 금자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졌었는데, 나중에 보니 명환이가 나가고 있는 회사 사장의 맏아들과 함께 활동사진 구경을 갔다는 이야기로 되어있다. “금자는 나의천사가 아니”라 “돈만 잇스면 누구나 안흘 수 잇는 뭇사람의 천사엿”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다시 조강지처에게 돌아간다는 결말에서는 역시 사랑의 윤리를 확인한 것 외의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상의 네 편의 소설에서는 작가의 전기 작품의 사회 비판적 문제의식이 약화 내지는 사라지고 시정 세태에 빠져버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6. 김창걸의 소설사적 위치 규명   이상에서 우리는 김창걸의 해방 전 소설작품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번째 유형에서는 ������김창걸단편소설선집������(해방전편)의 소설사적 가치에 대해 재고해보았는데, 비록 더러 “당대의 것”이 주류를 이루는 작품이 있기는 했으나 다수 작품에 “현재의 것”이 섞여 들어와 1982년 간행 당시 작품으로 가치를 가지는 외에 일부 정신사적인 의미에서 참고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해방전 김창걸의 소설사적 위치를 확인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다음 김창걸을 논의한 거의 모든 논자들이 중요한 자리에 놓고 분석하고 있는 「暗夜」를 살펴보았는데, 작품 구조의 치밀성과 묘사의 형상성 등 면에서, 그리고 주제적 성향에서의 저항성에서 충분히 인정이 되지만 현실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흠집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별로 논의가 되지 않은 단편소설 「靑空」을 분석해보았는데, 만주국이라는 일제 괴뢰정부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는 하기 어려우나 체제 순응적인 성격이 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滿鮮日報������에 발표된 기타 작품들을 살펴보았는데, 일부는 「暗夜」의 연장선상에서 현실 비판적 성격이 더러 인정되기도 하나 다수 경우 시정 세태적인 성향이 짙게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중국 조선족 소설문학이 형성 발전한 시기는 1930년대 중반인데, 이 시기는 일제 통치의 말기에 해당되며, 따라서 이때의 작가로서 철저한 반일적, 반체제적 성향을 지니고 활동한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의 체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성향을 지닌 작가라 해도 그러한 작품을 발표할 수가 없었다. 문학사, 특히 발표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소설사의 경우 연구 대상은 자연히 지면이나 다른 형태로 공개 발표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당시 발표되지 않은 작품으로 작가의 소설사적 위치를 확인한다는 것은 올바른 학문적 태도가 아닐 것이다.   김창걸도 안수길이나 현경준 등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저항적인 작품도 있지만 체제 협력적 혹은 현실 순응적 작품도 있고 순수 시정 세태적인 작품도 창작 발표하였다. 그러니까 김창걸을 해방 전 우리 조선족 소설사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별로 지나치게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최서해나 강경애, 안수길, 현경준과 더불어 김창걸도 해방 전 우리 조선족 소설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역사적인 기여를 한 작가임은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김창걸과 그의 소설작품에 대한 정확한 자리 매김이 되지 아닐까 한다.
1    어두운 시대 생명 존재의 의미-함형수의 시세계 댓글:  조회:2056  추천:0  2009-11-16
  어두운 시대 생명 존재의 의미 ― 咸亨洙의 시세계                                                                                            장춘식   1. 서  론   함형수(1914~1946)가 시작활동을 했던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까지의 10여년간을 우리는 문학사적으로 흔히 일제말 암흑기라고 부른다. 1935년의 카프 강제 해산을 전후하여 민족문학의 사회적 환경은 일제말기라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었고, 따라서 민족주의의 신장이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민족문학의 생존 자체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때 우리 시문학의 전통은 상징주의, 낭만주의, 프로시, 민요시 등 운동을 거쳐 점차 성숙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모더니즘과 생명파, 청록파, 등 여러 가지 유파와 역량 있는 시인들이 대거 출현하여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문학 전통의 성숙과 일제말기 사회환경에서의 표현의 부자유라는 모순된 상황에서 시인들의 고민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함형수라는 한 시인과 그의 시작품을 이러한 역사적 환경 속에 놓고 가늠하여보면 비록 양적으로 얼마 안 되는 시작품1)을 남기긴 하였으나 현실과 민족의 생존을 위해 고민한 모습은 다른 어떤 시인에 못지 않게 값진 것이라 여겨진다.   함형수는 1914년 함북 鏡城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함흥고보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가담, 그로 하여 퇴학당한 그는 같은 해 4월, 中央佛敎專門學校 文科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徐廷柱, 金東里 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생활이 어려워 불교전문학교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가 소학교 훈도시험에 합격하여 圖們公立白鳳優級學校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이 당선되어 정식 등단의 절차를 거치기도 하였다. 만주에서도 교원생활을 하면서 시작활동을 계속하여 ������滿洲詩人集������, ������在滿朝鮮詩人集������2) 등에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정신 착란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여타의 재만시인에 비해 함형수는 비교적 여러 사람들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3)   김광림은 함형수를 少年趣味의 典型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대부분의 시들이 5행 내외의 짧은 것들뿐이며 「해바라기의 碑銘」을 능가할만한 작품이 없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적 수준을 낮게 평가하였다. 그의 시작품에서 닫힌 세계의 이미지나 囚人意識을 읽어낸 김시태는 함형수가 인간적으로 보나 문학적으로 보나 시대의 압력에 의해 붕괴되어버린 역사의 한 상처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에게는 출발의 의미가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다. 조규익의 논의가 보다 본격적으로 개진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앞에 든 두 논자들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김시태의 관점에 편중하여 시인의 문학관을 자세히 검토한 동시에 이미지 분석을 통하여 주제적 의미를 이끌어내고 그러한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표현기법까지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함형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생명의 이미지에 담긴 보다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연구들을 참고로 하면서 선행연구에서 파악하지 못한 함형수 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좀더 세밀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2. 현실에 대한 공포와 감상주의   현재까지 함형수의 시를 논의하면서 사실상 그의 첫 작품이 되는 「오늘 생긴 일」(1932)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치한 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16세 약관의 나이로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는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프로시의 영향이 엿보여 의미를 더해준다. 어느 봄날 한 시골 마을의 진실된 생활 모습을 전경화의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첫 연은 그냥 소년의 눈에 비친 봄날의 시골 모습이 펼쳐지고 있는데, 2연과 3연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진솔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三吉이네 아버지 집이 빚 때문에 차압당했다든가, 煙草工場에 다니는 宋아저씨가 “스트라익 密謀” 때문에 ××에 들어간 모양이라 한 것이라든가, 李君이 월사금 6개월 분이 밀려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는 것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시인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송아저씨가 “스트라익 密謀” 때문에 ××에 들어간 모양이라고 한 것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조직적인 투쟁 모습도 암시되고 있다. 시적인 압축이나 승화가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전경화의 표현기법은 오히려 한 마을의 피폐상을 현장감 있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비판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면은 보이지 않는다.   3년 후에 발표된 「마음의 斷片」(1935)에서는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작품에는 하강적, 퇴영적인 이미지로 꽉 차있다. 화자는 “山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즉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도피하지는 않고 “水晶처럼 차게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꽃 꺾으러” 갔다가는 “한줌의 샛(芒)대를 꺾어”온다. 항상 패배로 이어지는 삶이다. 그리고 뭔가를 자꾸만 잃어간다. 기러기떼는 울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배도 수평선 멀리 사라진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어디든지 헤매”는 일 뿐이다. 그래서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일생을 “울도 웃도 못하고” 이 세상을 걸어간 사람으로 규정한다. “울도 웃도 못”하는 삶이라는 이미지는 함형수의 시에서 중요한 주제의식으로 표현된다. 「詩」(1935)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은 비뚜로 붙인 “세잔느 한 폭”, “신경과민된 詩人”이 시를 그렇게 비뚜로 본다고 했으나 사실 그것은 시인이 세상을 보는 시각임을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마음의 촛불」(1935)에서 화자는 “밤 되어야 눈뜨는/가련한 이내 몸이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밤에만 자기 자신이 된다. 낮은 이때 부정의 존재다. “눈부신 아침 태양”을 화자는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화자에게 있어서 낮과 밤은 거꾸로 받아들여진다. 낮을 부정적인 현실로, 밤을 이상적인 현실로 본 것이다. “黎明을 무서워 떠는/새까만 이 내 눈동자여”에서는 현실에 대응할 수 없는 공포가 표현된다. 「손구락」, 「담뇨」 등에서도 작중의 화자는 현실에 대응할 수가 없어 늘 공포에 떨고 있다. 그리고 “납덩지처럼 무거운 침묵의 세계”를 살고 있다.   1935년을 전후하여 발표한 시들은 상당수가 습작품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위에서 분석해본 작품들도 작품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성숙을 보이지만 주제의식은 센티멘탈적인 면을 많이 노출하고 있다. 암담한 현실에 직면하여 공포에 떨면서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20년대 초반의 낭만주의 시풍을 연상케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 대하여 체념하거나 절망적으로 새로운 삶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직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울도 웃도 못”한다는 화자의 태도와 세상을 비뚜로 본다는 표현은 어느 정도의 비판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3. 생명의 예찬   흔히 시인 함형수 하면 「해바라기의 碑銘」을 떠올릴 정도로 함형수의 대표작으로 「해바라기의 碑銘」을 꼽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 한 편으로 함형수의 시사적인 위치를 규정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유가 빈약하다. 그와 같은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험들과 또 상당수의 유사 수준의 작품들이 씌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車中快走스켓치」(1935.8)의 경우 처녀작인 「오늘 생긴 일」과 비슷한 전경화의 기법을 이용하면서도 1935년 전반기의 작품들과는 크게 구별되는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말미에 “一九三五, 七七, 午後 一時 南陽到着”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남양은 당시 조선땅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러니까 화자는 咸鏡線 열차를 타고 南陽 즉 당시 조선과 만주 사이의 국경 도시에 이르기까지의 구간 눈으로 보며 체험한 에피소드를 스케치 식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1   자리를 내여주니 저춤거리다가 안즌 村각시는   될수잇는 대로 나의 視線을 피하러고 애썻다.     4   크다란 村색시 하나 부끄러워도 한하고 국다란 두다리를   잔디우에 뻐더버린채 泰然히 汽車를 처본다.   (이 亂暴하고도 無禮한 過客한테는 禮義가 必要업다고 생각한 게지)     5   논(田)두던에 쉬면서 理由모를 빙글우슴을 車窓에 던지든 얼골 싯거믄村내외.     6   넓다란 新作路를 列을 지어가는 거러지의 一群이 잇다.     7   거츠른 長崎辯의 온나는 늘나의 얼골을 도적질하여 보면서 必要以上으로 어린아이와 짓거렷다.     8   都市와는 퍽 떠러저 잇는가 보아서 바닷가에서 작난치는 계집아히나 사내아히나 샤쓰를 입은 애는 하나도 업다.     9   나어린 보통학교생이 門을 열어주어서 겨우 老人은 便所로 들어갓다.     18   오랜 절도사碑들이 쓸쓸하게 서잇는 고향山이 보인다.   차창 안팎의 전경은 곧 당시 조선 사회의 진실한 모습이다. 윗통을 홀딱 벗은 남녀 아이들, 다리를 퍼더버린 촌색시, 다정한 촌부부 등 차창 밖의 풍경은 자유롭고 고단하나마 생명력을 지닌 조선적 모습이다. “나”의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 부끄럼 잘 타는 村각시, 보통학교생의 도움으로 변소에 가는 노인도 조금은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역시 조선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넓다란 新作路를 列을 지어가는 거러지의 一群은 조선 사회의 피폐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차창밖의 세계와 차 속의 세계가 상당히 대조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문명사회와 비문명사회의 대조로 볼 수 있다고 하면 기차 속의 촌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두려워하고 부자연스러운 반면 차창밖의 촌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보다 자연 친화적이다. 그리고 이때 문명사회가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 사회라는 사실이 밑바탕에 깔려있어 보다 부정적인 것이 된다. 거기에 어딘가 경박해 보이는 온나(일본 여인?)의 거동이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총체적인 이미지는 자연 친화적인, 혹은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생명력이다. 거기에 조선적인 분위기가 가미되면서 민족의 생명력이라는 주제의식이 감지되는 것이다.   1) 소년의 천진무구한 이미지   이 「車中快走스켓치」를 시작으로, 혹은 이 작품을 전후하여 시인은 유사 작품을 많이 창작하고 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이 소년의 천진무구한 이미지이다.   내만 집에 있으면 그애는 배재밖 電信ㅅ대에 기댄채 종시 드러오질 몯하였다. 바삐 바삐 쌔하얀 운동복을 가라닙고 내가 웃방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야 그애는 우리집에 드러갔다. 인제는 그애가 갔을쯤 할때 내가 가만히 집으로 드러가 얼골을 붉히고 어머니에게 무르면 그애는 어머니가 권하는 고기도 안넣은 시라지 장물에 풋콩 조밥을 마러 맛있게 먹고 갔다고 한다. 오랫 만에 한번 식 저의 어머니의 신부럼으로 우리 집에 오든 그애는 우리집에 오는 것이 조왔나? 나뻤나? 퉁퉁한 얼골에 말이 없든 애--- 그애의 일흠은 무에라고 불렀더라?(「그 애--少年行抄」(������시인부락������ 1집, 1936.11.)   「그애: 少年行抄」(������시인부락������ 1집, 1936.11)의 전문이다. 사춘기 소년의 아리송한 연정이 차분히 그려진 산문시이다. 여기서 특히 가난하지만 천진무구한 소녀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명이 숨쉬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간난이는어머니의잔등에업혀찬란한星座를향하여단풍잎같은양손을내어저었고어두운后園에서늙은할머니가경건히合掌하고來生을믿었다. (「星座」)   어머니의 잔등에 업힌 간난이와 星座, 後園에서 경건히 合掌하고 來生의 평안을 비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다분히 조선 서민의 삶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꿈을 안고 길을 떠나는 소년들의 이미지(「求花行」), 사춘기 소년의 눈에 비친 소녀의 이미지(「橋上의 少女」), 활기차게 자전거를 타는 소년의 이미지(「自轉車上의 少年」), 반딧불을 쫓아다니는 소년의 이미지(「螢火」), 빨간 복숭아의 속살을 먹는 소년의 이미지(「紅桃」) 등은 모두 같은 유형에 속한다. 아직 때묻지 않은 소년 소녀들의 천진무구한 이미지는 어쩌면 암울했던 당시 사회의 현실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서민적인 삶이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정체성은 지켜질 수 있다고 할 때, “少年行抄” 계열의 작품을 시인의 자폐적 혹은 퇴행적 의식의 반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2) 해바라기의 碑銘   제목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죽음을 주제로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무덤 앞”이나 “나의 무덤 주위”라는 이미지가 “碑ㅅ돌”이라는 이미지와 연관되면 당연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죽음은 현재의 죽음이 아니라 미래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죽음은 오히려 보다 강한 생명력의 반어적 표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래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래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 없난 보리 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래기는 늘 太陽 같이 太陽같이 하던 華麗한 나의 사랑 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 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나러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해바라기의 碑銘: 靑年畵家L을爲하야」(������시인부락������ 1집, 1936.11)   “차거운 碑ㅅ돌”을 거절하고 선택한 “노오란 해바래기”와 “해바래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 없난 보리 밭”, “푸른 보리 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 등 모두 밝고 싱싱한 생명의 존재들이다. 해바라기는 이름 그대로 태양과 직접 닿아있는 생명의 이미지이고, 보리밭은 다분히 한국적인 생명 상징이다. 푸른 작물이라는 일반적인 식물로서의 생명력 외에도 “보릿고개”라는 말도 있듯이 직접적으로 한국인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특수한 존재가 바로 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는 화자 개인의 꿈, 즉 擴張力을 가진 생명의 상징이다. 거기에 앞에서도 언급했던 “차거운 碑ㅅ돌”로 상징되는 죽음(생명의 다른 형태)의 이미지가 곁들여지면서 생명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신시 75년사상 한 편의 시 때문에(그것도 고작 5행짜리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히 시인이라 불리고 또 시인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사람으로서 咸亨洙를 들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시로 상기 「해바래기의 碑銘」을 들고 있다.4) 그러나 작품이 알려지고 그 작품의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저자에 대한 연구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얘기일 뿐이다. 다음, 시만 알려지고 시인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 말의 이면에는 그 시인에게 그 작품 외에 이렇다 할만한 작품이 별로 없다는 의미도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함형수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앞 절의 분석에서 이미 생명력을 지닌 소년의 이미지에 대해 살펴보았거니와 그러한 소년의 이미지에는 원시 상태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다음 항에서 살펴볼 현실과의 대결을 통하여 어려운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확인된다.  3) 탈출을 시도하는 소년의 이미지   찢어진문풍지로쏘아들어오는차디찬바람에남폿불은몇번이고으스러졌다가는다시살아나고.어두운불빛아래소년은몇번이고눈을감고는창백한과거를그리고암담한미래를낮고부수려애썼다.어지로운四壁은괴롭다괴로운침묵속에잠기고.반이나열려진채힘없는숨을쉬는어머니의입술.소년의얼굴은고통으로가득찼었고.소년의두눈은殺氣를띠고빛났다.아아하룻동안의고달픈노동의피로는그래도어머니에게不自然한熟睡를가져왔으며.가엾은어머니의간난이는지금은시들어버린어머니의젖꼭지도잊어버리고귀여운꿈가운데서천진한그얼굴에기뻤던일슬펐던일두나절光景을쫓고있었다.(「回想의 房」 전문)   이 작품의 이미지는 “어지러운四壁은괴롭디괴로운침묵속에잠기고”를 경계로 하여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즉 앞부분에서는 “창백한과거”와 “암담한미래” 그리고 “차디찬바람에” “몇번이고으스러졌다가는다시살아나”는 현실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그 다음은 그런 암담한 현실과 미래 속을 살면서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견디며 절망하지 않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현실이 암담하고 부정적이지만 서민은 살아있고, 따라서 민족도 살아있다는, 그래서 절망할 수는 없다는 시인의 처절한 믿음이 표현되었다고나 할까.   「무서운 밤」에서는 그러한 시인의 믿음이 현실 부정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사나운몸부림치며밤내하누바람은연약한바람벽을뒤흔들고.미친듣우름치며긴긴밤을눈보라는가난한볏짚이영에모라쳤으나.굳게굳게다치운憎惡의窓에밤은깊어도깊어도한그루의붉은純情의燈불이꺼질줄을모르고.무서웁게어두운밖앝을노려보는날카로운적---은눈동자들이빛났다. (「무서운 밤」)   보다시피 이 작품에서는 띄어쓰기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시작품은 대체로 시인이 <少年行>을 쓰던 1936-1937년경에 보여준 창작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발표연대가 밝혀진 이 유형의 작품은 1937년 1월의 「父親後日譚」이 최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대를 잡아보면 이 시기 시인은 소년시절의 추억을 통하여 어두운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서운 밤」에서 화자는 닫힌 공간에 갇혀있다. 그러나 “하누바람”, “눈보라”, “어두운밖앝” 등 화자를 위협하는 이미지들이 아무리 무시무시하더라도 “한그루의붉은純情의燈불”은 꺼지지 않고 “날카로운적-은눈동자”들을 빛내며 “무서웁게어두운밖앝을노려보”고 있다. 화자는 “굳게굳게” “憎惡의窓”을 닫고 있기는 하지만 체념하지 않고, 실망도 하지 않으며, 더구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며 증오하며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父親後日譚」에서는 그러한 현실 부정이 보다 적극적인 탈출의 시도를 암시하고 있다.   조-그만房안에가친채시껌은눈섭밑으로눈시울을異常하게번뜩이시며아버지는每日몬테크리스트라는길다-- 란小說을읽으셨다.먼-- 放浪의路程에서받은것은무서운疲勞와깨여진神經과그리고어두운追憶.갈곧도맞날사람도인제는없었다.(父親後日譚」, ������시인부락������ 2집, 1937.1)   이 작품에 관련하여 徐廷柱의 회고는 큰 참고가 된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스무살짜리로 그도 나처럼 소년시절에 咸北 鏡城의 고향에서 學生事件에 主謀하여 감옥 구경을 한 뒤였으며, 그는 또 그와 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獄死했다는 그 아버지의 遺書를 그 洋服 저고리 한쪽 안 포켙에 실로 密封해 지니고 있다고 내게 告白해 주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에게도 보일 수는 없다고 해 내게도 그건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5)   아버지는 “눈시울을異常하게번뜩이시며” “몬테크리스트”를 읽는다. 이 소설은 외딴 섬에 갇혔던 억울한 “수인”의 탈출 이야기다.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방랑으로 피로해지고 깨여진 신경, 어두운 추억만을 가진 “아버지”의 탈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위의 서정주의 회고 내용과 관련시켜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탈출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라는 현실에 대한 부정임을 알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화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화자와 아버지의 탈출 시도가 일치한다는 말이 된다. 단순한 현실 부정이 아니라 탈출을 염두에 둔, 탈출을 꿈꾸는 현실 부정이어서 적극적이다.   앞에서도 띄어쓰기가 무시된 작품을 살펴보았지만 발표 년대가 분명한 작품으로서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띄어쓰기와 행, 연, 단의 구분을 전혀 하지 않은 작품들을 많이 발표한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은 대체로 산문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문체적 의미에서 보면 띄어쓰기의 포기는 시에서의 분명한 표현을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희미한, 몽롱한 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독자의 측면에서 1937년이라는 시점에서 일제의 강력한 문화통제 하에서 보다 강한 현실부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몽롱한 표현을 의식적으로 이용했으리라는 점과 시인의 몽롱한 현실인식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요컨대 함형수는 「해바래기의 碑銘」을 전후하여 인간의 생명의식을 시의 주제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한 생명의식은 이른바 조선정조라고 하는 민족적 생명력과 연관되면서 암울한 시대 한민족의 끈질긴 생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의 생존 확인은 현실 부정과 현실에서의 탈출이라는 적극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지면서 이 시인의 시사적 가치를 인정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4. 암울한 현실과 민족 생존   함형수가 정확히 어느 해에 만주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家族」이라는 시를 ������滿鮮日報������ 1940년 3월 1일부에 발표한 것을 보면 이때에는 이미 만주에 정착한 뒤인 것 같다. 같은 해에 발표한 「正午의 모랄」(������滿鮮日報������, 1940.6.30)은 그 이전의 작품들과는 뚜렷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이전의 작품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유파의 영향이 감지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는 자동기술법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화자에게 있어 모랄은 이제 도덕이 아니다. 어디에도 있고 그래서 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파편같은 이미지들이 난무하며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다. “모-랄은 웃는다 모-든 눈물뒤에서/모-랄은 운다 모-든 웃음뒤에서” 했을 때 모랄은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행동의 기준으로서의 모랄이 아니다. 자동기술법에 의해 기술된 무질서 속에서 총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설과 풍자와 불만의 정서다. “모-랄은 계란속의 都市計劃/―계란을 삼킨 D孃의 주동아리” 했을 때 모랄은 풍자의 대상이다. “어디에서도/무수히 무수히/ 지절거리고/不平하고/싸히고/밀려드는/모-랄 모-랄……”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불만과 비판의 정서이다. 거기에 나의 “그라쓰컵속에서” 우는 “시름꼿”과 떠도는 “구름”이 어울리면 시인이 늘 가지고 있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세계에 대한 인식이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아미와 같이」(������人文評論������, 1940.10)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작품에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다분히 느낄 수 있다. 연결된 의식이나 개념의 파악이 아닌, 이미지의 파편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총체적인 이미지의 느낌은 불만이고 역설이다. 「개아미와 같이」라는 표제는 아스팔트에 넘쳐나는 사람이라는 비유로 쓰인 외에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 다음 나열된 이미지들은 그 개아미와 같이 많은 인간 속의 사연들이다. 「나의 神은」(������만주시인집������, 1942.9)도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역설과 풍자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하나의 손바닥 우에」 오면 왜서 시인이 현실을 역설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나는 하나의 피투성이된 손바닥밋테 숨은 天使를보앗다   時間의 魔術이여 物質이여 몬지 갓튼 感傷이여   天使가 깨여나면 찟어진 空間을 내음새가 돈다   아름다운 皮膚의 湖水여 노래의 忘却者여 깨라   眞理의 빗(光)치여 어두운 寢床이여 돌(石)이여 눈물이여   나는 하나의피투성이된 손바닥우에 異常스러운 天使를 보앗다.           (「나는 하나의 손바닥 우에」 전문, ������만주시인집������, 1942.9)   여기서 天使는 眞理의 상징이다. 현실세계가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이라고 할 때, 부조리에 파묻혔던 진리가 깨어나면 “찢어진 空間”에는 냄새가 돈다. “노래의 忘却者”라고 할 때 진리는 그런 난투장 같은 현실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화자는 비분강개한다. 그리고 불합리한 현실세계 속에서 진리는 이상스러워 보인다. 현실이 너무도 참혹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인은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白衣詞」와 「高麗磁器頌」이 그 증거이다. “白衣”가 백의동포 즉 한민족의 상징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현실세계의 모든 것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백의는 그저 “고요한 관념 속에서/침착한 思慮를 돌이킬 뿐”이다. 그리고 늘 반성하고 淨潔을 고집한다. 그것이 민족정신일 것이다. 무서운 혼란과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고귀한 정신, 거기에 정숙한 예절과 차디찬 觀照가 잠겨 있다고 했으니 현실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정신만은 아직도 정히 살아 있음을 시인이 믿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高麗磁器頌」도 마찬가지다. 곡선과 색채를 통해 감지해낸 고려자기에 대한 시인의 극찬은 바로 한민족의 생명력에 대한 확인임에 다름 아니다. “고귀한 思念”이요, “不死의 靈氣”라고 한데서 우리는 그러한 민족적 정기에 대한 암시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민족의 역사와 예술혼에 대한 경도는 곧 민족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놀란 듯 쫓긴 듯 黃昏의 江畔에   옹송그리는 우아한 무리   오오 높다라히 울지도 못하고   검은 땅만 파헤치며   구슬피 코울음 운다.   노을진 핏빛 하늘에   貴로운 뿔 고추들어 사슴아   저무는 아리나리 江畔에   눈 내리감고 초조를 눌러라.   아아 江畔에 해는 깜박 저물었다.   연약한 네 다리   자꾸만 구르지 말고 사슴아   아득한 역사의 흐름에 귀 기울여라.               (「黃昏의 아리나리曲」 전문, 권철교수의 기록에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사슴이다. 황혼의 아리나리라는 강반에서 사슴은 “높다라히 울지도 못하고/검은 땅만 파헤치며/구슬피 코울음 운다” 그래서 화자는 “저무는 아리나리 江畔에/눈 내리감고 초조를 눌러라”고 위안하고는 이제 깜박 저문 후에 “아득한 역사의 흐름에 귀 기울여라”고 한다. 역사는 길며 그 역사에 귀 기울이면, 즉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사회는 섭리에 따라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시인의 믿음일 것이다. 이것을 시인이 살았던(작품의 창작 연도가 밝혀지지 않아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식민지 시대 말기의 현실과 관련시켜 생각해보면 시인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 역사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5. 결  론   함형수는 일제말 암흑기에 시단에 나타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체험하며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시인이다. 당시의 시인들이 대개가 그러하지만 그는 너무도 짧은 삶을 살았고 남겨놓은 작품 또한 매우 적다. 그러나 작품이 적다고 「해바래기의 碑銘」 한 편만을 남긴 시인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해바래기의 碑銘」을 전후하여 그는 적잖은 유사 작품을 창작 발표하고 있다. 천진무구한 소년의 이미지를 통해 생명의 원시적 상태를 보여주었고 「회상의 방」, 「부친후일담」 등 작품을 통해서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 부정적인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언제나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실이었고 비뚜로 혹은 거꾸로 된 현실이었다. 그래서 「정오의 모랄」이나 「개아미와 같이」 등을 통해서는 역설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였으나 민족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적극적이었고 역사 속에 민족은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은 잃지 않았다.   요컨대 함형수는 어두운 시대 생명 존재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면서 생명에 대한 예찬으로 민족의 생존을 확인하였고 그것을 통해 역사의 공정성을 믿었던 시인으로 우리 시사에 의미있는 자취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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