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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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선비는 죽일 수는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댓글:  조회:676  추천:0  2021-09-26
김학철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김학철이라 하면 두 장면이 먼저 눈앞에 떠오른다. 하나는 1975년 그가 공판(公判)을 받던 장면이요, 다른 하나는 1980년 그가 무죄판결을 받던 장면이다. 1966년 김학철은 최고지도자의 개인숭배와 지식인에 대한 탄압을 비판한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한 까닭에 "문혁"시기의 공안당국에 의해 철창에 갇혔고 마침내 7년 4개월만에 공판을 받게 되었다. 1975년 4월 3일, 연길시 로동자문화궁전에는 1천 3백여명의 인파가, 그야말로 립추(立錐)의 여지도 없이 꽉 들어찼는데 김학철은 두 무지막지한 경관에 의해 단상에 끌려 올라왔다. 외다리에 엽장을 짚고 서있는 김학철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경관들은 그의 뒤통수를 치며 내리눌렀다. 김학철은 뒤통수를 내리치면 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날은 자아변호도 용허되지 않았다. 김학철이 자신의 무죄를 두고 항변하자 경관들은 부랴부랴 걸레를 뜯어다가 그의 입에 아갈잡이를 했다. 김학철은 아예 엽장을 내던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삽시에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공판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군자는 죽어도 관(冠)을 벗지 않는다고 김학철은 일거수일투족을 다 의식적으로 했던것이다. 1980년 김학철은 24년이라는 비극적인 생활을 마치고 무죄판결을 받게 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감지덕지해서 눈물을 흘릴 일이지만 김학철은 달랐다. 공판을 받을때처럼 무죄판결 공포대회에 1천 3백명의 시민이 참가하지 않으면 불참이라고 선언했다. 12월 15일, 무죄판결 공포대회는 당교(當校)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다른 당사자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이제라도 살려주어 고맙습니다, 하고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김학철은 다음과 같이 소감발표를 했다. '나는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사람잡이를 업으로 삼는 인간백정들의 말로(末路)'에 쾌재를 부른다. 하지만 지난날 함께 싸웠던 친구들을 볼수 없어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광신(狂信)과 맹동(盲動)으로 소란스러웠던 "문혁"의 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초연히 회장을 떠나버렸다. 이처럼 김학철은 신념과 의지의 사나이다. 그는 비정한 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할줄 몰랐다.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여러 번이나 "죽일수는 있으되 욕보일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는 선비의 덕목과 위용을 생생하게 보여준 혁명투사요, 참다운 문학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망국노가 된 마당에 일신의 영달과 부귀만을 위해 공부만 할수는 없었다. 그는 분연히 고국을 떠나 상해로 갔고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태항산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일본군에 잡혀 나카사키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지만 비굴하게 전향서(轉向書를) 쓰고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총상을 입은 다리는 썩어서 잘라낼수밖에 없었다. 그 다리는 지금도 감옥담장 옆에 묻혀있을 것이다. 새파란 나이에 한 다리를 잃었으니 무엇을 할것인가? 집안의 기둥같은 오빠가 한 다리를 잃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겠소? 하고 누이동생 성자가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내오자 김학철은 다리 한짝쯤 없어도 별문제다, 인간은 결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야, 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는 총대를 붓대로 바꾸어들고 문학창작에 매진한다. 어디 그뿐인가? 광복 후에도 아시아의 독재자들과 차례로 맞서 싸우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쪽으로 밀려갈 때 혼자서 해 솟을 동쪽으로 달려갔다. 65세에 복권이 되고 85세에 운명하기까지 김학철문학이라는 탑을 쌓아올리고 삶에 련련하지 않고 20여 일 곡기(穀氣)를 끊은 끝에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정한 권력에는 물론이요, 인간의 생리적인 한계와 죽음의 공포마저도 이겨낸 이 시대의 강자요, 철인(鐵人)다. 김학철은 권세에 아부굴종하고 권력의 앞잡이로 무고한 사람을 물어뜯은 "설치류(齧齒類)"들, 명철보신하고 시세에 편승하는 "숙주나물"들, 더욱이 자신의 과오와 허물을 감추고 오리발을 내미는 "카멜레온"들, 벼슬에 미친 "벼슬중독자들"을 눈이 찢어지게 미워했다. 아니, 절대 용서를 하지 않았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것에 도전하라." 적잖은 사람들은 이를 김학철의 유일한 유언으로 알고있지만 기실 유언이 또 하나 따로 있다. 김학철은 세상을 떠나면서 12명의 후배작가들을 불렀다. 유언 한장을 남기고 아드님더러 타이핑을 해서 출력한 후 하나하나 사인을 했다. 그 유언인즉 이러하다― 내가 여태껏 지켜본 바에 의하면 김, 임, 장 아무개는 자신을 뉘우칠줄 모르는 전대미문의 악인이고 박 아무개는 세상에 드문 어진 사람이다, 이를 세상에 알리고 가노라, 대개 이런 뜻이다. 이 세 "악인"이란 유다처럼 김학철을 팔아먹었지만 단 한번도 찾아와 반성하지 않은 배신자요, 악한들이다. 김학철은 평생 로신을 좋아했는데 그 역시 물에 빠진 개는 호되게 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요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유태계 작가이자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증언문학 "이것이 인간인가"(1947)를 보았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잔악한 행위와 비굴한 행위를 두고 "인간이 이처럼 잔혹할수 있는가? 또 인간이 이처럼 비굴할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학철 역시 인간의 잔혹함과 권력의 비정함을 질타함과 동시에 권력에 비굴하게 빌붙어 동지를 팔아먹고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꾀한 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들은 때가 되면 비정한 권력의 온상(溫床)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원광대학의 김재용박사는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에 김학철과 김사량 두분의 항일문학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다. 소쩍새 우는 호가장의 모텔에서 나는 김재용박사를 보고 왜 한국과 중국 사이를 넘나들면서, 호가장이라는 이 오지까지 찾아와서 김학철항일문학비를 세우고자 애를 쓰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학철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서울 파고다공원 길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2층 모텔에서였어요. 좁은 목조계단으로 삐걱삐걱 올라가면 2층에 5, 6평 되나마나한 방이 있는데 선생님은 아드님과 함께 거처하고 계셨습니다. 그 날 선생님 부자간을 모시고 육개장 한 그릇씩 나누어 먹는데 제가 '선생님은 어떻게 이 험악한 세상을 헤쳐나올수 있었구 이처럼 큰 인간승리의 탑을 세울 수 있었습니까? 선생님의 신조(信條)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선생님은 싱그레 미소를 짓더니 '사의 신(神)은 우리 인간들이 풀수 있는 숙제만 주는거야. 우리 인간이 풀수 없는 역사의 숙제란 없어. 다만 사람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느냐 마느냐의 차역이가 있을 따름이야." 김재용 박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확 뜨거워지더라고 했다. 그때부터 김재용 선생은 김학철 선생을 무조건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김재용 박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있다. 우리 모두 역사를 관장(管掌)하는 신(神)이 있다고 생각하고 약하고 어질고 성실한 자들의 편에 서서 비정과 불의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다. 제 일신의 영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일가족 생계 때문에, 자식의 진로 때문에 상하좌우 눈치만 본다. 밤중에 술판에서는 비분강개한 선비가 되지만 날이 새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산토끼처럼 조심스러운 소시민이 되고만다. 이 눈치 저 눈치만 보다가 몸을 사리는 여우같은 인간이 되고만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김학철이 필요하고 그의 의로움과 의젓함과 세상을 꿰뚫어보는 그의 추상같은 눈매가 필요한 것이다.   2016년 5월 29일 동북아신문
7    [칼럼]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 (김호웅) 댓글:  조회:829  추천:1  2020-09-14
칼럼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 김호웅        1990년 늦가을, 정판룡 선생께서 학술회의 참가 차 미국을 거쳐 일본에 들렸다가 동경의 어느 호텔에서 재일조선인 거물급 인사들을 상대로 일본어로 강연을 했다. 그 무렵 나는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신분으로 동경에 체류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의 시중도 들겸 며칠 동안 함께 지냈다. 그래서 자연 강연장에 가서 정판룡선생께서 일본어로 강연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경청하게 되었다. 좀 발음이 어색했지만 워낙 배포 유하고 유머러스한 어른이라 당신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유감없이 펼쳤고 무시로 청중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일제시기 소학교 3학년 밖에 다니지 못한 선생께서 반백년이 지난 오늘도 슬슬 유모아까지 써가며 일본어로 강연하는데도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강연 뒤끝에 결론 삼아 남긴 이야기는 지금도 새삼스레 내 뇌리를 친다. 그날 선생께서는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력사와 현실을 이야기하고 나서 조선족과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재외동포들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난 100년 세월을 되돌아보면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 형제들은 재일동포나 재미동포에 비해 한가지를 잘하지 못했고 한가지를 잘했습니다. 잘하지 못한 것이라면 재일, 재미 동포에 비해 볼 때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한 것이라면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을 이겨내고 민족교육을 지켜내고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일, 재미 동포들에 비해 보다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미국과 일본을 두루 돌아보니 재일, 재미 동포들은 2세, 3세에 와서 거의 다 우리말과 글을 잃어버렸습디다. 일단 잃어버린 언어는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잘사는 일은 조만간에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등소평시대를 맞아 가난의 때를 벗고 유족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이미 마련했습니다. 그런즉 21세기에 우리는 재일, 재미 동포들 못지 않게 잘 살수 있을 뿐만아니라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쓰는〈조선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과 글을 잃은 재일, 재미 동포들은 더는〈조선사람〉으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좀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저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박수를 좀 쳐주십시오.》      청중들은 한참 어정쩡해 있다가 역시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우리 조선족형제들이 민족교육을 통해 이민사 100년을 기록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조선사람》으로 살게 된 일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허리에 천금을 두른 재일동포들 앞에서도 떵떵 큰소리를 치면서 자랑했던 것이다.      정판룡선생의 말씀에는 사실 깊은 철리가 깃들어있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세기 독일의 철학가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두고《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언어는 민족의 력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한 민족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로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명한 언어학자인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 역시《우리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던 것이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력사도, 문화도, 정신도 다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이는 청나라 동릉(清东陵)에 가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동릉은 하북성 준화시(遵化市) 경내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북경에서 서쪽으로 250리 떨어져 있어 자가용으로 두어시간이면 족히 가볼 수 있다. 나는 2008년 초겨울 북경포럼 때 주최 측의 배려로 가보았다. 북경에 있는 명황릉(明皇陵)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 않으나 1928년과 1945년 두번이나 도굴(盜掘)을 당해서 빈껍데기만 남은 황릉이라 좀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동릉에는 순치(1638~1661), 강희(1654~1722), 건륭(1711~1799), 함풍(1831~1861), 동치(1856~1874) 등 다섯 황제의 릉묘가 있는데 그들의 비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원에 들어온 첫 황제인 순치의 비석을 보면 그 복판에 꼬불꼬불한 만주어가 커다랗게 새겨져있다. 하지만 그 뒤 황제들의 비석으로 오면서 그 복판에는 중국어와 만주어가 나란히 새겨진다. 이제 함풍황제의 비석을 거쳐 동치황제의 비석에 오면 그 복판에 중국어가 대문짝만하게 자리를 잡고 주인행세를 하고 만주어는 비석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무늬구실을 하고 있다.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언어를 잃으면 민족도, 나라도 다 잃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도 대과(大过)는 없을 것이다.      정판룡선생의 일화를 꺼낸 김에 동릉을 견학했던 일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의 현실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조선족 중, 소학교가 점점 줄어들고 조선족학생들이 한족학교에 몰려가고 있다. 일부 학부모들은 이왕 중국에서 사는 것만큼 중국어만 잘하면 됐지, 조선어는 배워서 뭘 하느냐 하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우리 조선족자치주의 언어생활도 말이 아니다. 특히 간판이 그러하다. 조선어에 대한 무지, 지어는 왜곡과 경멸로 얼룩진 간판들이 버젓하게 거리와 관광명소들을 도배하고 있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고문구, 지어는 외설적인 표현들에 어른들마저 고개를 들기 어려운데 이러한 란잡한 언어문화 속에서 자라나는 후세들이 어떻게 바른 언어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다른 민족과 선의적인 경쟁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우리 언어환경이 무너지면 자치주도 몸담을 곳이 없게 되고 기껏해야 허울 좋은 개살구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속수무책으로 수수방관할 수 있는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애착과 배움의 열정, 그리고 그 면면히 이어지던 전통은 어디로 갔는가? 언어를 잃고 영영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만주족의 전철을 우리가  다시 밟아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삼척동자에서 학발로인까지, 특히 조선어교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이를 관장하는 인사들이 모여앉아 시급히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2018년 8월 19일 연길에서  
6    [칼럼] 야브네학교와 명동학교(김호웅) 댓글:  조회:840  추천:0  2020-08-27
    유태인 천년사"라는 좋은 책이 나왔다. 유태인의 파란만장한 력사와 그들의 종교와 문화, 교육과 지혜, 그들의 세계적인 활약상을 소상히 소개했다. 유태사회에서는 제관장(祭官長)을 랍비라고 하는데 랍비는 유태인에게는 교사가 되기도 하고 재판관이 되기도 한다. 이 책에도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와 야브네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나온다. 그 이야기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6년 유태민족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크게 활약한 랍비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요하난 벤 자카이다. 로마군대가 유태의 사원을 봉쇄하고 유태인을 전멸시키려고 했을 때 요하난은 온건파의 수령으로 있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강경파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다. 그는 유태민족이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가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로마의 장군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요하난은 로마의 장군을 만나기 위해 큰 병에 걸린 것처럼 꾸며가지고 일부러 침상에 드러누웠다.그는 대승정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마침내 그가 죽어간다는 소문이 퍼졌고 얼마 있다가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의 제자들은 성안에는 묘지가 없다는 구실을 대고 그를 관에 넣어가지고 성밖으로 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경파 수비병들은 그가 정말 죽었는지 확인해 보겠다 했다. 그들은 칼로 관을 찌르려 하였다.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필사적으로 막아나섰다. 요하난은 제자들이 보호해준 덕분에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로마의 장군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요하난은 로마장군을 보고  "나는 당신에게 로마 황제에 대한 경의와 똑같은 경의를 표합니다." 하고 말했다. 로마 장군은 자기네 황제를 모욕했다고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당신은 분명 다음에 황제로 될 것입니다." 하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장군은 쓴웃음을 짓더니 "그렇게 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의 부탁은 무엇이요?" 하고 요하난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요하난은 정색을 하고 "단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방 한칸이라도 좋으니 10여명의 랍비들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 하나를 남겨주십시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학교만은 다치지 말아주십시오." 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요하난은 예루살렘이 로마군사에 의해 조만간 점령, 붕괴되고 대학살이 자행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있었다. 그러나 학교 하나만 있다면 유태의 력사와 전통은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마침내 요하난은 로마장군으로부터 "생각해보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얼마 후 황제가 죽고 장군이 황위에 올랐다. 예루살렘은 무지한 로마군사들에게 짓밟혀 그야말로 "돌 우에 돌이 없을 지경"으로 풍비박산이 났고 십자가마다에 유태인의 시신들이 디룽디룽 매달려있는 살풍경을 이루었다. 하지만 새 황제는 요하난과의 약속만은 지켰다. 그는 로마의 군사들에게 "작은 학교 하나만을 남겨두라"고 명령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야브네학교였다. 이 학교에 남은 랍비들이 유태의 력사, 전통과 지식을 지켜내고 후세들을 키워냈음은 물론이다.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의 생활방식 역시 그 자그마한 야브네학교에 의해 지켜졌던 것이다. 이는 유태인에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전통이 얼마나 유구한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사실 세계에서 유태인만큼 오랜 세월 수난과 고통을 받은 민족은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만 나치 독일의 반유태주의 광란에 의해 600만명의 유태인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교육을 숭상하고 스승을 아버지보다도 더 존경하면서 대를 이어 열심히 공부했고 구름처럼 떠도는 디아스포라로 살았지만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세계 최고의 두뇌들을 육성해냈다. 유태인은 "세계에 세 위대한 두뇌를 기여했다"고 말하는데 이 세 두뇌란 바로  맑스, 프로이드,아인슈타인이다. 이들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령역에서 전대미문의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고 인류사회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유태인의 력사를 읽노라면 자연 우리 조선민족도 교육을 숭상하고 스승을 존경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민족이 아닐가 생각한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조선족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리상설 등은 이민초기인 1906년 10월 룡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1907년 리상설이 고종의 특사로 이준과 함께 네들란드 수도 헤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룡정촌을 떠나는 바람에, 특히 경제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서전서숙은 1907년 9월 1년만에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였다. 하지만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1908년 4월에 설립된 명동학교는 김약연 선생이 교장을 맡았는데 사면팔방에서 빼여난 선비들을 모셔다 교편을 잡게 하였다. 명동학교는 갈수록 명성을 드날려서 남북만과 로씨야 연해주,심지어는 조선에서까지 배움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명동학교는 역시 일제의 간섭과 경영난으로 1930년대 초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10여년간 신문화의 보급과 민족의식의 함양에 크게 기여하면서 1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에는 항일운동가와 교육자로 방명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 민족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아리랑"을 만든 라운규, 통일운동가 문익환,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소설가이며 교육자인 김창걸, 불멸의 시인 윤동주, 주덕해를 혁명의 길로 이끈 공산주의자 김광진 등 수많은 영재들을 키워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약연은 우리 조선족의 요하난 벤 자카이요, 서전서숙이나 명동학교는 우리 조선족의 야브네학교라고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요즘 명동에 가보면 명동학교가 옛모습 그대로 복원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김약연선생의 공덕비는 웃머리 한 귀퉁이가 뭉텅 떨어져나갔고 비문도 마모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였다. 해방후 김약연 일가가 지주로 성분을 받은 연고로 이 공덕비도 기석에서 뿌리가 뽑혀나가 마을 앞 개울가의 징검다리로 쓰였는데 이를 1980년대 초에 다시 가져다가 세운것이라 한다. 참으로 볼썽사납다 하겠다. 하루 빨리 원질이 좋은 백옥을 구해다가 곱게 다듬어 김약연 선생의 공덕을 돋을새김해서 세웠으면 한다. 우리 조선족교육의 터전을 만든 위대한 교육자의 공덕비이기 때문이다. 2016년 1월 9일
5    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댓글:  조회:868  추천:5  2020-08-11
    김호웅/연변대학조한문학원교수   요즘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최학송, , 길림신문, 2019.3.4.)이란 글과 (대가 숲을 이룰 때, , zhixinzhe512.)라는 글을 읽었다.   의 작자는 라는 글에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안티이오스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공동체의 붕괴 또는 부재를 기성사실화 하고 있다. 안티이오스는 천하의 장사였지만 대지에서 발을 떼는 순간 힘이 빠져 웬만한 상대에게도 번쩍 들려 바다에 처박힌다고 한다. 조선족사회도 대지를 떠난 안티이오스가 되여버렸으니 우리 족보와 같은 것들을 일찌감치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저장할수밖에 없다고 했다. 조선족공동체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들불처럼 타오르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을 도무지 리해할수 없다.   하지만 오늘은 주로 라는 글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이 글은“누구도 같은 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두번 발을 담글 때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그도 같은 사람이 아니기때문이다”라는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만물류전(万物流转)의 사상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력사는 반복되며 력사는 오늘의 거울이 된다는 진리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산해관이남의 대도시에 자리잡은 젊은이들이 그 옛날 선비족(鲜卑族)처럼 강세문화속에 깊이 들어가 스스로 발을 빼지 못하고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철을 밟지 않을가 생각한다.   선비족은 옛날 북방에서 우리민족과 이웃해 살았고 종횡무진으로 맹활약을 했다. 그들은 선후로 10여개의 나라를 건립했고 중국의 절반 강산을 통치했다. 하지만 오늘 중국의 56개 민족중에는 선비족이 없다. 지금 선비족의 일부 후예들이 시버족(锡伯族)이라는 이름으로 신강, 료녕성과 길림성의 일부 지역에 남아있다만 그들은 이미 망망대해와 같은 중국에서 창해일속과 같은 존재로 되여버렸다.   물론 의 작자는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 산해관 이남의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고충을 대변하고 있다. 현지에 조선족유치원이나 소학교가 없으니 자녀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설사 가정교육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배웠다해도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는 어차피 한어를 써야 하고 한어의 수준여하가 학업성적과 졸업배치를 좌우지하게 된다. 그러니 어차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는게 현명한 처사라고 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절해고도와 같은 상황에서도, 디아스포라로 천애지각을 떠도는 경우에도 자식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유태인이 그러하고 중국인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제가 (김호웅, , 연변인민출판사, 2019년판.)라는 글에서 사례로 든 연변대학의 유일한 러시아인교수 다위도브선생의 자녀들이 그러하고 한국대전의 홍문장중화료리집주인 왕씨네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중언어구사능력을 글로벌시대의 중요한 자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도시에서 끝끝내 자식들을 모국어를 아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자식들에게 모국어를 배워주자면 적어도 자식을 가정에서나마 모국어환경에 로출시켜야 하는데 이는 우리 젊은 부모들의 목표와 의지여하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 젊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때문에 자식을 모국어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다.   그런데 라는 글을 보면 론리적으로 앞뒤가 서로 모순이다. 전반부에서는“이제 우리와 조선어의 관계는 가부장제혼인에서 벗어난 자유련애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와서는‘엄마의 언어’즉 모국어의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강조했다. 참으로 자가당착이 아닐수 없다. 도대체 모국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게 바람직하다는 말인지, 아니면‘엄마의 언어’모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인지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자의 론지는 분명하다.‘강물’이 바뀌였고‘사람’도 바뀌였다는 것이다. 즉 세상이 변한것만큼“누구도 우리에게 민족주의를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더욱이 우리 자녀들에게‘민족’을 부담으로 넘겨줄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를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로운 령혼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체성을 잃고 주류문화에 두손을 들고 나앉은 사람들, 달갑게 주류문화에 동화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이란 력사성을 띤 개념이요, 민족주의 역시 모든 력사단계에서 다 부정해야 할 명제가 아니다. 민족이란 개념을 두고 많은 견해들이 대립, 충돌하고 있다.   원초론과 근대론이 대표적이다. 스딸린은 원초론적 관점에서 민족이란 력사적으로 형성되였으며 공통의 언어, 공통의 지역, 공통의 경제생활 및 공통의 문화생활에서 보여준 공통의 심리자질을 가진 안정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하지만 베네딕트앤더슨은 민족은 근대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력사적구성물로서 그것은‘상상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베네딕트앤더슨 저,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 2003.) 앤서니스미스 같은 학자는 원초론과 근대론의 종합과 절충을 시도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초적요소에 기반을 둔 근대적민족을 강조했다. 즉“민족은 공간적으로 위치 지어진 과거를 공유하는 전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적정체성”을 그 표지로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민족은 근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시간속에 뿌리 박은‘손에 잡히는 민족정체성’의 재료로부터 구성된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화의 공유뿐만아니라 력사적 기억의 공유가 있고 언어적, 문화적 전통의 공유라는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다.(앤서니스미스 저,이재석 역, , 그린비, 2018.)   민족이란 이렇게 숙명적인 존재인가 하면 또 오랜 세월을 거쳐 그 구성원들의 삶의 둥지로, 운명공동체로 되여왔다. 하기에 이어령선생은 민족은 옷처럼 추우면 입고 우면 벗어던지는 그러한 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잘리면 병신이 되는 손과 발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하였다.   민족공동체를 잃었을 때,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할 없을 때 인간은 무서운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게 된다. 조선왕조 인조왕시기 연경(燕京)에 파견되였던 사신들이 이러한 아픔과 치욕을 경험한바 있고 알제리인의 후예이며 마르티니크 출신인 프란츠파농(1925~1961)이 이러한 아픔과 고뇌를 경험한바 있다.(프란츠파농 저, 이석호 역, 〈>, 인간사랑, 1998.) 또한 김사량의 단편 , 이창래의 장편 허련순의 장편 에 오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이 보존되고 그 민족이 강해야 그 구성원은 안정된 삶을 살수 있고 사람답게 살수 있다. 민족 또는 민족국가를 잃었을 때 우리는 창씨개명, 치발역복과 같은 치욕을 받아야 했다.   민족이란 이처럼 소중한 이기에 우리 민족의 선렬들은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도 서슴없이 바쳤다. 우리 조선족의 선인들도 중국의 자유와 해방, 모국의 국권회복이라는 이중 력사사명을 짊어지고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은 연변 땅에서 일어났고 우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항일부대의 주요한 성원들이였다. 이러한 민족의 자랑스런 력사를 우리 후세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공연히 우리 자식들에게‘민족’이란 부담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될까?   민족과 언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의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수 있고 보존할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민족의 력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다. 하기에 외솔 최현배(1894~1970)선생은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 "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다.   언어는 민족구성원들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될뿐만아니라 해당 민족의 사고방식과 심성(心性)을 가장 잘 드러낸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력사와 얼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에 고스란히 담겨져 살아 숨쉬고 있다.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지만 말과 글이 없으면 우리의 유구한 력사도 내 가슴에서 너의 가슴으로 전달될 없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얼도 그 모습을 갖출수 없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것을 잃게 된다. 력사도, 문화도, 정신도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은 서로 다른 방언계통을 갖고 어 남북사이에 서로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지금도 간혹 복건성 남부(闽南) 출신의 인사가 북방에 와서 연설을 하면 상용중국어(普通话)를 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통역을 해야만 현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한족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으로 되였을까?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자가 있었기 문입니다. 한자는 지극히 중요한 문화통일의 역할을 했다. 한자에 내재한 일맥상통하는 안정된 계승성, 공용성과 민족성은 거대한 응집작용을 했다. 한자가 없다면 한족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한자가 표의문자가 아니고 표음문자였더라면 역시 강대한 한족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럽처럼 몇십개 민족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은 그 민족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에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경이 없고 민족의 계선이 없는 대동세계가 된줄로 착각하고 있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너나없이 한집이 되는 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아름다운 리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멀고먼 장래의 일이지 현실의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세계화의 진전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민족주의 물결이 거세차게 일고 있다. 세계화는 개별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반면, 민족주의를 야기하고 다문화주의와 병행하게 한다. 따라서 세계화와 민족주의(또는 다문화주의)는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두바퀴 구실을 하고 있다.   라는 글에서도‘다양화 자체가 미덕’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촌은‘세계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중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켜든지 오보에를 불든지 팀파니를 치든지 자기특유의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도 자기 문화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야 한다. 공자의 말씀 그대로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계가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민족마다 최선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최선의 문화를 일구어내서 다른 민족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중변주곡이요, 우리가 동경하는 미래 상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도 훌륭한 민족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 조선족만 해도 민족자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고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스스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고 있다. 사실 우리말과 글처럼 아름답고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언어와 문자도 세상에 별로 많지 않다. 총명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칠수 있고 설사 머리가 좀 둔한 사람이라 해도 열흘이면 깨칠수 있다. 또한 컴퓨터에 기초프로그램을 깔아야 기타 프로그램을 깔수 있듯이 먼저 모국어를 확고하게 배워두어야 다른 언어도 쉽게 배울수 있다.   이렇게 갈고 닦은 이중언어의 능력은 우리 조선족의 쌍날개로 된다.그런데 일부 젊은 부모들은 모국어라는 한 날개를 애초에 꺾어버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정판룡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게 바로 다문화주의 사상이다. 다문화주의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리유로 차별하지 않고‘평등’을 리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다원일체의 조화로운 사회이다.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락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도움만 받을게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조선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 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내서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모두 사랑과 존중을 받을수 있다.(정판룡,,제2권,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판.)   우리 조선족의 이중문화 신분을 념두에 둘 때, 또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력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선생의‘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진로를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립각해 정판룡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 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 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였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그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령토를 넓혀나갔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사회의 주체가 될수 없다. 허구한 세월 자포자기하고 주류사회에 얹혀사는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키면서도 총명과 지혜, 헌신성으로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기여를 함으로써 이 공동체의 존경받는 구성원으로 되여야 한다. 흑룡강신문
4    [두만강칼럼]사랑과 믿음의 기적 댓글:  조회:1148  추천:0  2019-12-05
나는 《민중의 벗― 정판룡교수》를 쓴 후 《림민호평전》을 펴내면서 정판룡선생이 림민호 교장을 많이 닮았고 림민호 교장은 쏘련의 저명한 교육가 마카렌코선생과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카렌코(1888-1939)는 쏘련의 불량아 보호시설 원장으로 3천여명의 불량아들을 사회의 유용한 인재로 키워낸 유명한 교육가이다. 그는 교육의 뿌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라고 인정했고 “훌륭한 아이도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 금세 어린 야수가 된다”, 청소년들에 대한 “신임, 그것은 으뜸가는 중요한 법률”이라고 했다. 그의 교육소설 〈탑 우에 휘날리는 기발〉(1938)을 보면 ‘악마’와 같은 부랑아와 비행소년들을 ‘천사’로 키워낸 과정, 특히 이 교육시설에 숨어있는 ‘악마’ 이고리 체르냐빈을 ‘천사’로 전변시키는 과정은 오늘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림민호 교장이 1928년에서 1932년까지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공부했으니 마카렌코의 사상과 철학을 배웠을 것이고 후에는 그의 소설들도 읽었을 것이다. 림민호 교장이 큰 사랑과 믿음으로 북만에서 물 첨벙 불 첨벙 찾아온 열일곱살의 홍안의 소년 정판룡을 큰 인물로 키워낸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정판룡선생을 두고 여러 편의 글을 쓰면서도, 더더구나 좋은 소재 하나를 손에 잡고서도 당사자가 생전이라 쓰지 못했다. 그 이야기인즉 이러하다. 어느 날 아침, 정판룡선생이 댁에서 양치질을 하는데 조용히 출입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하고 문을 따주니 얼굴이 퉁퉁 부은 남녀 두 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니 덮어놓고 넙죽 절을 한다.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일인지 이야기부터 해봐.” 그제야 남학생이 고개를 들고 정판룡선생을 쳐다보다 말고 쿨쩍거린다. “선생님, 제가 혜자와 좋아하는 사이인 줄 아시지요?” “그래, 조금은 알고 있지.” 하고 정판룡선생이 허허 웃는데 이 자식이 다시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서 “저의 불찰로 혜자가 아이를 뱄어요. 이 일을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혜자라는 녀학생도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더니 고개를 폭 숙인다. “어허, 이런 녀석들을 봤나? 이런 녀석들을! 난 1, 2절 강의가 있어. 그러니 저녁에 다시 와.” 하고 정판룡선생은 가방을 들고 나갔다. 남학생의 이름은 진수, 대가집 도련님처럼 이목구비가 수려한데 연변예술계의 거목 박선생의 아들이다. 혜자는 진수가 남몰래 좋아하는 녀학생인데 예쁘장하게 생겼고 공부도 썩 잘했다. 정판룡선생은 혜자가 임신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온종일 강의에 여러가지 사무를 처리하고 저녁에 댁으로 돌아올 때 정판룡선생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잠간 잊고 있었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두 녀석이 또 넙죽 절을 한다. 정판룡선생은 너무 억이 막혀 한참 창 밖을 보다 말고 물었다. “진수, 이 일을 아버님께서 알고 계셔?”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그럼 혜자는?” 혜자는 진수를 흘깃 건너다보더니 빌빌 울기만 한다. 정판룡선생은 “에끼 못난 녀석들!” 하고 픽 웃더니 “진수는 아버님께도 귀뺨을 맞을 각오를 하고 이실직고하란 말이야. 저 강건너에 진수네 고모님이 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자네 아버님께 말씀을 드릴 터이니 일단 혜자를 고모님네 댁에 맡기는 거야. 거기서 애를 낳고 1년간 있다가 돌아와 복학을 해요. 진수는 그냥 여기 남아 공부를 하란 말이야! 이 일은 나만 알면 됐어.” 라고 했다. 정판룡선생의 하늘같은 음덕으로 무난히 세상에 나온 진수와 혜자의 아들이 연변1중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청화대학을 거쳐 미국에 가서 석, 박사학위를 받더니 유명한 국립연구소에 취직했다고 한다. 진수선생네 내외는 그 아들 덕분에 여러 번 미국나들이를 했고 슬그머니 아들자랑을 하며 다녔다. 언제인가 진수선생이 나를 보고 “호웅씨는 정판룡선생과 같은 훌륭한 어른을 지도교수로 모셨으니 얼마나 좋겠어!” 라고 하면서 정판룡선생 덕분에 아들을 보게 된 일을 이야기한 적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에피소드를 〈정판룡, 우리 모두가 그이를 그리는 까닭〉이라는 글에 쓰고 그 초고를 진수선생에게 보였더니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결코 자랑거리가 아닐세. 호웅씨도 알지만 우리 집사람은 좀 예민한 편이거든. 제발 그 장면만은 빼주게!” 하고 신신당부를 하는지라 하는 수 없이 빼고 말았다… 각설하고 로신선생도 말했지만 “교육의 뿌리는 사랑에 있다.” 젊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이 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경사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는 만나기 쉽지 않다(经师易遇,人士难遇). 즉 경서의 자구(字句)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만 제자에게 공정한 도의를 가르치고 사람이 가야 할 옳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의 인격과 장끼를 인정하고 그 소중한 싹을 키울 줄 모른다.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젊은이들을 요구한다. 젊은이들은 실수하고 사고를 치기 마련인데 오늘의 교육시스템에서는 단 한번의 실수나 사고로 일생을 망치기 십상이다. 문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좀 마카렌코나 림민호, 정판룡 선생과 같이 젊은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고 키워주는 아량과 지혜를 보여줄 수는 없을가? 한번 실수하거나 사달을 쳤다고 해서 단매에 때려눕힐 게 아니라 회과자신할 기회를 주는 게 어른이나 지도자가 할 일이다. 인간은 시련 속에서 자라는 법, 순탄하게 자란 애들보다 오히려 유명한 장난꾸러기나 애군이 그 어떤 계기, 또는 훌륭한 어른을 만나 대성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기 때문이다. 량산박의 영웅들이나 청석골의 영웅들을 보시라. 그들은 생김새와 성미도, 무예와 재능도 각각 달랐다.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면서 제각기 자기 솜씨를 보였다는 말도 있지만, 다 같이 호랑이를 잡았으되 무송과 리규 역시 성격이 판판 달랐다. 소심한 무송은 술 열여덟 사발을 마시고야 산에 올랐다. 하지만 리규는 아예 범의 굴에 들어가 박도를 쥐고 한잠 늘어지게 자면서 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이러한 다양한 개성의 인간들을 존중하고 묶어세우는 게,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가슴을 터놓고 의 좋게 지낼 수 있는 ‘산채’를 만드는 게 멋진 지도자의 재능이요, 리더십이라고 하겠다. 길림신문 
3    [수필]격정과 랑만의 화신-림휘교수님 댓글:  조회:1026  추천:0  2019-07-14
격정과 랑만의 화신-림휘교수님 김호웅     2018년 5월 1일 아침, 연변의 천산만야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고 있는데 천하 명기 황진이黄真伊가 노래했듯이 인걸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는 법이라,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1기 졸업생이며 저명한 교수인 림휘林辉 선생께서 88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 누리고 승천하셨습니다.  선생네 가문의 원적은 함경북도 명천군, 선생은 1930년 연길현 덕신구 안방촌德新区 安邦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습니다. 선생은 덕신소학교, 룡정중학교를 거쳐 1949년 4월 연변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선생은 정판룡, 권철, 최윤갑 등 동창생들과 함께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1952년 12월부터 1956년 2월까지 3년 반 동안 동북사범대학 연구부에서 쏘련문학을 전공했고 1956년 2월부터 1991년 정년을 할 때까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주로 로씨야문학과 쏘베트문학을 강의하셨습니다. 선생은 연변대학 조문학부 외국문학교연실 강좌장, 전국고등학교 동방문학연구회 리사, 길림성 외국문학연구회 부회장, 연변외국문학학회 부회장 등 직책을 맡고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해 일했습니다. 하여 선생은 1984년 길림성 고등학교 우수교사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인데 젊은 시절부터 팔방미인으로 불릴 만큼 다재다능했습니다. 학생연극단의 배우 겸 감독으로 뛰여난 연기와 리더십을 선보였고 학생시절에는 축구장을 주름잡는 미드필더로 맹활약을 하였으며 한때 연변대학 학생축구팀 코치를 맡기도 했습니다. 교수시절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축구팀 감독으로 ‘장기집권’을 하셨는데 선수 선발도 엄격하게 했지만 아무리 유명 선수라 해도 개인영웅주의를 부리면 가차없이 갈아치우곤 했습니다. 후보선수들은 선생의 지시에 따라 그라운드 밖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몸을 풀기도 했지만 정작 그라운드를 밟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애주가이신 선생은 권철선생 버금으로 두주불사斗酒不辞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气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호음이불란豪饮而不乱이라고 호쾌하게 마시되 단 한번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이 계시는 장소는 늘 흥성거렸고 선생이 없는 조문학부의 놀이판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기에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창립자이며 소설가인 김창걸선생은 “림휘는 천재야!” 하고 치하를 했다가 정치운동 때 학생들에게 영웅사관英雄史觀을 고취했다고 반성까지 한 적 있습니다. 선생의 강의는 연변대학에 정평이 나있고 거의 예술에 가깝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학생들을 단번에 휘여잡는 정열적인 눈빛, 조리정연하면서도 격정으로 넘치는 강의, 때로는 로씨야나 쏘련의 가곡이나 아리아까지 부르는데 그 노래솜씨 또한 프로가수를 뺨 칠 지경이였습니다. 이 시각도 “아 고요한 돈의 물결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눈물로 넘치누나” 하고 노벨상 수상자 숄로호브의 문학에 대해 강의하던 모습이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합니다.    선생의 제자사랑은 남다른 데 있었습니다. 선생은 정색을 하고 학생들에게 설교를 하거나 학문적인 문제만 미주알고주알 캐는 고리타분한 교수가 아니였습니다. 선생은 학생들의 친근한 벗이 되여주었습니다. 그 어려운 세월에도 학생들은 물론이요, 대학을 찾아오는 학부모들까지 따뜻하게 식사대접을 해주었습니다. 술 한잔 사주면서 허물없이 인생을 론하고 문학과 철학을 론하던 선생, 그래서 우리 제자들은 선생을 영영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은 사모님께서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강의와 연구에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황차 선생은 박봉으로 로모를 모시고 동생과 네 자녀를 키우고 공부시키면서 어렵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외국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훌륭한 저서들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정판룡, 허호일, 서일권 등 교수들과 함께 부지런히 붓을 날려 1980년에 조문판으로 《세계문학간사》를 펴낸 데 이어 1985년에 중문판으로 《동방문학간사》를 펴냈으며 허문섭교수와 손잡고 《조선고전문학선집》 전 20권을 펴내는 데도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특히 《동방문학간사》 는 국내 22개 소의 대학 교수들이 편찬한 국가통용교과서인데 선생께서 쏘련문학 부분을 맡아 집필하셨습니다. 이 저서는 유럽중심주의 문학사관을 뒤엎고 동방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적 위치에 놓고 서술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명리와는 담을 쌓고 달갑게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셨습니다. 사실 선생은 정판룡선생보다는 두어살 선배이지만 평생 그 분을 도와 성심성의로 일했습니다. 이처럼 정판룡, 림휘, 허호일, 서일권 네분 교수가 일심동체가 되여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노력했기에 외국문학교연실은 국내 일류의 교연실로 평가를 받았고 국내 외국문학연구를 리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평생 강좌장 이상의 벼슬은 한 적 없지만 언제나 학자의 량심과 혜안을 가지고 학과건설에 나서는 문제들을 정곡을 찔러 지적했고 자라나는 제자들을 이끌어주고 밀어주셨습니다. 축구감독의 혜안은 신진교사 양성에도 그대로 나타났는데 김관웅, 최웅권, 우상렬 등 박사도 선생께서 알심 들여 선발하고 키워준 덕분에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였습니다. 여러분,  로년에 사모님을 잃고 중풍으로 고생하던 선생께서 이제는 만단시름을 털고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 남긴 고매한 인격, 불같은 격정과 랑만, 그리고 선생의 빛나는 업적과 아름다운 일화는 우리 모두의 귀감으로 될 것이며 우리 학원 내지 우리 대학 발전의 소중한 자산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우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과 같은 원로 교수님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가르침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학원은 국가중점학과를 거쳐 글로벌 일류학과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쾌거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께서 물려준 계주봉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비롯한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반석 우에 올려놓기 위해 대를 이어 노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황진이의 시조로 우리 모두의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선생의 명복을 빌고저 합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평생의 지기들인 정판룡, 허호일, 서일권 등 선생들을 앞세우고 선생께서도 하늘나라에 가시게 되였으니 오랜만에 서로 얼싸안고 술 한잔 나누면서 그간의 회포를 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 하늘의 별이 되여 우리 제자들이 가는 길을 비추어주시옵소서!   출처:2018 제4호
2    [칼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 댓글:  조회:981  추천:0  2019-07-12
김호웅(연변대학교 교수, 평론가)   무명씨(1917-2002)는 1940년대 초반 중경에서 항일명장 리범석을 만나 취재하고 사귀면서 장편소설 《북극풍정화北极风情画》를 펴냈다. 이 소설은 항일전쟁 직후 중경의 신문에 련재되여 그야말로 락양의 지가를 한껏 올렸고 1946년 대만에서 10만여부나 팔렸다. 2010년에는 하련생(夏辇生, 1948-)이《배에 걸린 달님船月》이라는 장편소설을 펴냈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가 있은 후 김구는 강소성 가흥에 있는 남호에 가서 한동안 피신해있었다. 그 곳에서 착하고 아름다운 배사공 처녀 주애보朱爱宝와 만나고 그 후 5년 동안 부부처럼 지냈는데 남경을 떠나 중경으로 갈 때 하는 수 없이 헤여진다. 김구는 이 애틋한 사랑과 리별을 두고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남경서 출발할 때 주애보를 본향인 가흥으로 보냈다. 그 후에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 시에 려비 백원 밖에 주지를 못했던 일이였다. 근 5년 동안 나를 위해 한갓 광동인으로 알고 살았지만 부지중 류사类似 부부이기도 했다. 나에게 공로가 없지 않은데 후기后期가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였다.” 하련생은 깊은 조사와 연구를 거쳐 이 한단락의 애정관계를 가공, 부연하여 김구와 중국처녀와의 전기적인 사랑이야기를 장편소설의 편폭으로 생동하게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신규식申圭植은 신해혁명에 참가한 유일무이한 외국인이라 손중산은 그를 두고 “나의 가장 절친한 조선의 동지” 라고 불렀다. 그는 또 “민국의 제일 호쾌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나이民国第一豪侠”인 진기미陈其美와 같은 거물과도 친구로 사귀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다. 류자명柳子明은 또 어떠한가? 무정부주의 즉 폭력혁명을 주장한 분이지만 더없이 깊은 정감과 의리, 겸허한 자세로 중국인들과 널리 사귀였고 그들에게서 성인圣人으로 대접을 받았다. 류자명과 파금巴金은 50여년 동안 의형제처럼 사귀였는데 파금은 류자명의 애국심과 인격에 매료되여 그를 모델로 소설까지 썼다.  이제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고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2018 제3호
1    아름다운 노래는 세월의 언덕을 넘어 댓글:  조회:3279  추천:5  2013-09-23
 지난 2012년 12월 초 조룡남(趙龍男)시인과 함께 길림성장백산문예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2박 3일로 장춘을 다녀오게 되었다. 최근 선생은 중병으로 여러번 병원신세를 졌다고 하지만 오진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건강하고 낙관적이였다. 하루밤은 열차에서, 하룻밤은 자그마한 호텔에서 원로시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선생이 한창 시적재능을 꽃피우던 20세 초반에 재수없이 “우파(右派)”로 몰려 장장 20여년동안 이 풍진세상에서 무진고생을 하였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선생의 지지리 고달팠던 인생의 갈피갈피에 기막힌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눈물겨운 이야기의 하나가《황성의 달(荒城の月)》이라는 일본가곡에 얽히고설킨 일화(逸話)라 하겠다.     맨 처음 《황성의 달》이라는 일본가곡에 접한것은 국민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란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이 노래를 미칠듯이 좋아한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어느 자그마한 양복점에서였다. 1940년대 초반 선생네 일가족은 로씨야 연해주와 이웃한 훈춘의 어느 자그마한 읍내에 살았다. 이 동네에는 아낙네들의 허드레치마나 애들의 옷가지를 만들어주거나 기워주는 조그마한 양복점 하나 있었고 또 동네에서 사오리 떨어진 산기슭에는 일본군병영이 있었다. 주말이면 젊은 일본군인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와서 읍내 장터를 돌아보거나 양복점에 들려 훈련중 찢어지거나 구멍이 난 군복따위를 수선해가지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토끼장만한 양복점 바람벽에 바이올린 하나가 댕그라니 걸려있었다. 이 집에는 애들도 보이지 않는데 이놈의 바이올린을 누가 켜는걸가? 군복을 맡겨놓고 걸상에 앉아 기다리던 일본군인들이 재봉사를 보고     “저 바이올린은 주인장이 켜는 겁니까?”     하고 물으매 사람 좋은 재봉사 아저씨는 잠간 고개를 돌리고 안경너머로 일본군인들을 뻐금히 건너다보더니    “심심할 땐 가끔씩 한곡 켜지요 뭐.”     하고 한 손으로 재봉기 바퀴를 그냥 돌리는데 일본군인들이 중구난방으로    “자, 그럼 어디 한곡 좀 들어봅시다.”     하고 청을 드는지라 재봉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일어나더니    “이거 오늘 망신하게 되었구려. 무얼 켜드린다? … 을 한 번 켜볼가요.”     하고 벽에 걸린 바이올린을 벗겨가지고 활을 당겨 몇번 음을 조정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장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일본군인들이 재봉사 아저씨의 연주에 맞추어 침울한 어조로 노래를 따라 부르더니 다들 시뻘겋게 눈시울들을 적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벌써 쿨쩍거리고있었다.     바로 그때 꿰진 홑바지를 들고 문지방 옆에 서서 오도카니 차례를 기다리던 개구쟁이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룡남이였다. 아니, 이게 《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아닌가. 이 노래가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소년은 진작 배워서 알고있었던것이다.     그해 여름 국민학교에서 무슨 연주회가 있었는데 여선생님의 손풍금 연주에 맞추어 조룡남네 학급의 단발머리 소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비처럼 하늘하늘 독무를 추었다. 그때 연주한 노래 역시《황성의 달》이였다. 이 공연은 차차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합창으로 번져갔고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앞좌석에 앉아있던 일본인 교장이 성큼 무대우로 뛰어올라가더니 소녀를 닁큼 안고 한 바퀴 빙 도는 것이었다. 팔자수염을 기르고 평소 근엄한 표정으로 교사와 학생들에게 무섭게 굴던 교장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있었다. 조룡남은 이 이상야릇한 관경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황성의 달》이라는 노래만 들으면 왜 바늘로 찔러도 피도 나지 않을 일본인들이 눈물을 보이는것일가?     선생이 두 번째로 《황성의 달》에 접한것은 1950년대 중반이였다. 연변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인데 자료실에 있는 묵은 책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일본잡지 몇권을 발견했고 그것을 심심풀이로 펼쳐보았는데 그 잡지에《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실려있었다. 선생은 가사를 반복적으로 뜯어서 읽어보았다. 뜻은 대개 알만 한데 어려운 한자와 평소 잘 쓰지 않는 일본 고유어들이 많았다. 국민학교시절 일본인 군인들과 교장선생님이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짓지 않았던가. 선생은 이 일본가곡을 우리말로 확실하게 옮겨가지고 갖고싶었다. 하지만 선생의 일본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일본어사전도 없을 때였다. 이리저리 고심(苦心)하던 끝에 휴식시간에 백호연(白浩然) 선생을 찾았다. 그 무렵 백호연 선생은 연변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소설을 창작, 발표해 꽤나 문명을 날리고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도 일본사람을 뺨치게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호연선생은 잡지를 받아 얼핏 보더니    “일본의 명곡이거든. 헌데 이를 번역해선 뭘 하려나?”    “어릴 때 불렀었는데 곡도 좋고 가사도 맘에 들어서 그럽니다.”    “그럼 수업이 끝나거든 교연실로 와.”     45분 수업이 끝나자 교연실로 천방지축 뛰어갔더니 백호연선생은 원고지에 정히 번역한 원고를 건네주면서 빙그레 웃는다. 꾸벅 큰 절을 올리고 원고지를 받아가지고 교실에 돌아와 읽어보니 단편소설《꽃은 새 사랑속에서》를 쓴 작가답게 우리말로 미끈하게 변역해놓았다. 그후 선생은 《황성의 달》의 일본어가사와 함께 백호연선생이 번역한 조선어가사를 몽땅 외웠는데 지금까지도 한 글자 빠짐없이 기억하고있었다.     “홍위병들이 백호연 선생 친필 번역문을 압수해가는바람에 아쉽게도 영영 분실하고 말았지요. 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한 글자도 빼앗아가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자 나는 여러가지 언어로 된 번역본들을 두루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우리 집에는 이 노래가 실려있는 《일본의 노래(日本のうた)》1, 2, 3집과 삽화와 사진까지 실려있는 대형일본가곡집《고향의 노래(ふるさとのうた)》가 있어요. 내가 보건대는 한국의 번역, 중국의 번역, 지어는 김학철선생의 번역까지 다 가져다 비교해보아도 백호연선생의 번역이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해요. 노래를 완전히 감정화하고 번역한것이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지요. 그것도 단 45분, 수업 한번 보는 시간에 번역한것이니 감탄할수밖에 없거든요. 정말 아까운 인재였지요.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한번 백호연선생의 번역으로 된 을 읊었더니 그때 자리를 같이하고있던 임효원시인이‘누군지 참 멋지게 번역했구만!’하고 찬탄하던 일이 기억되는군요.”     아무튼 조룡남선생은 은사님이 번역해 준 일본가곡을 보배처럼 정히 간수했다. 그런데 이 일본가곡때문에 또 한번 졸경을 치를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선생은 “우파”로 락인이 찍혀 훈춘지역의 구석진 시골을 전전하면서 말단교사로 일했는데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홍위병들이 선참으로 달려들어 가택수색을 하는바람에 자료함에 정히 보관해두었던 《황성의 달》이 나왔던것이다. 홍위병들과 그 막후에 서있는 좌파교원들은 “우파”가 일본가곡을 번역해 사사로이 숨기고있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을 했고 황성(荒城)을 천왕페하가 있는 황성(皇城)으로 해석하면서 “네놈이 지금도 황성의 달을 그리고있느냐?”고 무섭게 닦달질을 했다.“우파”감투를 쓰고 시골소학교에서 조용히 살던 선생은 날마다 고깔모자를 쓰고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고 선생네 댁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황성의 달》이라면 신물이 날법도 한데 그때로부터 또 18년이 지난 1983년, 조룡남선생은 김학철선생의《항전별곡》을 읽다가 세번째로 《황성의 달》과 마주치게 된것이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태항산지역에서 싸울 때, 밤마다 일본군과“대화(對話)”라는것을 하였다. 말하자면 적진 150메터쯤까지 접근하면 우선 징소리 대신 수류탄 한발을 터뜨려 “개막”을 알렸다. 고요한 적막이 뒤덮인 끝없는 전야에 이 느닷없는 폭발음에 놀라 깨지 않는 놈은 없다. 그런 다음 “프롤로그”로 일본여자 이무라 요시코(井村芳子, 당시 스물한살인 포로)가 고운 목소리로 《황성의 달》,《반디불의 빛(莹の光)》과 같은 일본노래를 부른다. 적군의 살벌한 마음을 녹이기 위한 수단이다. 연후에 반전(反戰)을 종용하는 강화(講話) 즉 정치선동을 한다. 모두 끝나면 “에필로그”로 밤하늘에 대고 총 몇방을 쏜다.“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뜻인 셈이다.      조룡남선생이 어느 날 김학철 선생을 찾아뵙고《항전별곡》에 나오는 《황성의 달》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니까 김학철 선생은 그 특징적인 천진무구한 미소를 짓고 껄껄 웃더란다.    “아무렴 잊을수 없는 곡이지요. 그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 일본군인들이 향수병에 걸려 밤잠을 설쳤고 전의(戰意)를 상실해간것은 더 말할나위가 없지요. 사실은 그 무렵 태항산에는 일본의 반전작가(反戰作家) 가지 와다루씨와 그의 부인 이께다 사찌꼬씨가 와있었어요. 그때 나는 일본놈이라면 무조건 악귀, 살인귀로만 보여서 이를 갈았는데 이들 부부를 보고서야 ‘이런 일본사람도 있구나!’하고 시야가 갑자기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구요. 밤에는 가끔 오락회를 열곤 했는데 사찌꼬 부인이 을 불렀고 어느새 만좌(滿座)가 다 같이 따라서 불렀지요.‘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하고 말입니다. 가지씨 부부도 그렇고 조선용군 젊은이들도 그렇고 일본제구주의가 망하지 않으면 다들 고국땅을 밟아볼수 없는 신세들였기때문이지요. … 마침 잘 됐어요. 며칠 후면 오오무라 선생이 연변에 오시게 되는데 그 량반이 무슨 선물을 할가 하고 고민을 하기에 을 담은 녹음테이프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우리 해양에게 말해서 조선생에게도 하나 복사해드려야지요.”     오오무라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요, 해양(海洋)씨는 김학철 선생의 아드님인줄은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해양씨는 녹음테이프를 CD로 바꾸어 드린다고 했으나 워낙 바쁜 사람이라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다. 그만 참을줄이 끊어진 조룡남선생은 한국 원광대학교에서 류학하고있는 아들에게 부탁해 《황성의 달》과 함께 10여명의 일본 유명가수들이 부른 노래파일을 이메일로 받았다고 한다. 조룡남 선생은 요즘도 《황성의 달》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옛일을 되새기는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그 날 장춘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룡남 선생은 언제든지 한번 놀러오면 들려주겠노라고 하였지만 나 역시 참을줄이 끊어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놓고 한멜 검색창에 “황성의 달”을 입력했다. 몇초 사이에 일본의 남녀가수들이 부른 《황성의 달》이 떠오를뿐만아니라 이 가곡의 작사자와 작곡자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해석도 실려있었다. 그중 하나를 풀어놓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창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봄날 고루(高樓)에 꽃의 향연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천년송(千年松) 가지 사이로 비추는 달빛        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전쟁터의 가을에 서리 내리고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 몇 마리        빛나던 긴 칼에 비추이던        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황성의 밤하늘에 떠있는 저 달        변함없는 달빛은 누굴 위함인가?        성곽에 남은 건 칡넝쿨뿐        소나무에 노래하는 건 바람뿐        밤하늘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영고성쇠(榮枯盛衰)는 세상의 모습        비추려함인가 지금도 역시        아아, 황성의 달이여     가만히 들어보니“나라는 망해했어도 산천은 의구해/ 봄 깃든 성곽에 초목만 우거졌네 ”라고 노래했던 당나라 대시인 두보의 명시《춘망(春望)》을 련상케 하는 노래요,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페허에 실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라고 노래했던 1930년대 초 우리 류행가 《황성옛터》에 큰 영향을 끼친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사는 일본 고유의 음영의 미(陰影の美)가 서려있고 곡은 비창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이 들었다. 4절로 된 노래를 다 듣고보니 부서진 성터, 옛날의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는 오간데 없고 천년 묵은 솔가지 사이로 무심한 달빛만 흘러드는데 영고(榮枯)와 성쇠(盛衰)는 세상의 섭리인듯 어디선가 거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풀어놓고 다른 자료들을 검색해본즉, 이 노래는 도이 반스이(土井晩翠, 1871-1952) 작사에 타키 렌타로(瀧廉太郎, 1879-1903)의 작곡으로 되여있었다. 도이 반스이는 동경제국대학 영문학과 출신의 유명한 시인으로서 오래동안 문명을 날리면서 81세를 살아 천수(天壽)를 다 누렸지만 타키 렌타로는 24살의 애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타키 렌다로는 1879년 8월 24일 도쿄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요시히로(弘吉)는 대장성에서 근무하다가 내무성의 지방관리로 전직하여 가나카와현, 토야마현, 오이타현 다케다시 등지로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타키 렌타로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일본 각지를 떠돌게 되였다. 그는 1894년 도쿄음악학교(현재는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해 1994년 본과를 졸업하고 연구과에 진학해 작곡과 피아노로 재능을 키워갔다.      명치시대 전반기에 많은 번역창가가 생겼으나 일본어가사를 무리하게 끼워 넣은 어색한 노래가 많아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오리지날의 노래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지고있었다. 그러한 요청에 가장 빨리 응한 작곡가가 바로 타키 렌다로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황성의 달》,《하코네 80리(箱根八十里》,《꽃(花)》,《사계(四季)》 등이 있는데 그중《황성의 달》은 1900년, 그러니까 그가 21살때 지어서 1901년 3월 《중학창가(中學唱歌)》에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서 일본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곡이였다. 이 곡을 구상한 곳은 오이타현 다케다시에 있는 오카성지(岡城址)다. 성안에는 타키 렌타로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지금도 다케다역(竹田驛)에 렬차가 도착할 때면 이 곡을 들려주고있다고 한다. 이 곡은 세계로 펴져나가 1910년에서 1930년까지 구라파의 벨기에서 찬송가로 부르기도 하였다.     타키 렌다로는 1901년 일본인 음악가로는 두번째로 문부성 장학생으로 뽑혀 독일의 Leipzig음악원에 류학해 피아노와 대위법(對位法) 등을 배우게 되였다. 하지만 불과 2개월 후에 불행하게도 페결핵을 얻게 되어 1년 만에 귀국했고 부친의 고향인 오이타현에서 료양하지 않으면 아니 되였다. 하지만 1903년 6월 29일 그는 24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아쉽게도 세상을 하직하고말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어느 철인의 말도 떠오르지만,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국경을 넘고 민족과 리념의 벽을 넘어 영원히 정직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메아리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그 험난한 항일전쟁시절에 벌써 흑백논리를 벗어나 오히려 적국(敵國)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지고 향수를 달랬던 우리 조선의용군용사들의 넓은 흉금과 안목을 생각할 때, 무릇 자본주의나라의 작품이면 덮어놓고“황색가곡”이라고 벌벌 떨거나 길길이 뛰였던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였던가를  깊이 반성하게 된다. 더우기 모진 세파에 부대끼면서도《황성의 달》.《반디불의 빛》과 같은 명곡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고 또 그러한 명작들을 밑거름으로 인생의 아픔을 딛고 《반디불》, 《황소》,《옥을 파간 자리》와 같은 주옥같은 명시들을 남긴 우리 원로시인 조룡남 선생의 한평생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진정한 예술작품은 그 누가 만들었는지를 막론하고 그것은 력사의 상흔(傷痕)밑에 돋아나는 새살이요, 세계의 모든 인종과 민족의 마음을 소통시키는 맑은 령혼의 샘물이며 별빛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에 요즘도 나는 조룡남 시인의 바이러스에 전염되여《황성의 달》을 내 애창곡의 하나로 간주하고 짬만 나면 컴퓨터를 틀어놓고 흥얼거린다.     “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동북아신문 9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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