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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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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나의 동기생 댓글:  조회:573  추천:0  2016-04-19
나의 동기생       나의 동기생들에는 유명지인(有名之人)이 적지 않다. 김창만(金昌满), 리상조(李相朝), 문정일(文正一) 같은이들이 다 그중의 손꼽히는이들이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소개를 하려는것은 그들과 전혀 다른 성질의 동기생.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동기생이다. 내가 지금 소개를 하려는것은 “문화대혁명”시기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 나하고 징역을 같이 살았던 동기생―절도범동기생이다.     배고픈 K   그의 명예를 훼손시켜서는 아니되겠기에 본명은 덮어두고 K라는 대명사를 쓰기로 한다. K는 당시 50의 고개를 갓 넘어선 홀아비로서 신체장애자였다. 네댓살 때 병으로 귀가 먹어 말을 못하는것이다. 귀는 아주 절벽이라 등뒤에서 대포를 놓는대도 움찔을 안하지만서도 말만은 어릴 때 배웠던것이라서 토막말을 몇마디쯤은 할수가 있었다. 례컨대 밥을 보면 “바비바비”, 물을 보면 “무리무리”, 곰가죽을 보면 “고미고미” 하는따위. 원래는 같은 롱아(聋哑)인 안해와의 사이에 딸 하나까지 두고 괜찮게 살았으나 나중에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그 안해가 집을 나가버린 까닭에 K는 혼자서 그 딸 하나를 애지중지 키워왔었다. 한데 신체장애자라고 왕왕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는 까닭에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자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슬금슬금 좀도적질을 시작했다. 딸이 초중을 졸업하고 피복공장에 취직을 한 뒤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 그러다가 마침내 붙잡혀 그는 2년 징역형을 받고 영광스럽게도 나의 동기생으로 됐었다. K는 워낙 성질이 급한데다가 말까지 통하지를 않으니까 무어나 맞갖잖기만 하면 성이 나서 열대밀림속의 고릴라(大猩猩)처럼 포효(咆哮)를 했다. 건장한 몸집에 얼굴까지 괴물스레 생긴 까닭에 일을 나가서도 조장(组长, 신임받는 모범죄수)이 휘여잡아 거느리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래서 감옥당국은 그가 생리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감안(참작)해 그에게 로동을 시키지 않기로 했다. 몸이 성한 죄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그러니까 K는 병신의 덕을 보았다고나 할가. 2년 동안 감옥에서 빈둥빈둥 놀고 먹으면 그늘의 개팔자로 대단히 편할것 같지만 세상일이란 그렇게 누워서 떡먹기로 간단하지가 않다. 옥칙(狱则)에 따라 무릇 놀고 먹는 놈에게는 일률적으로 최저표준의 식량이 공급되기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식물인 옥수수떡이 아침에 2냥(100그람), 점심에 3냥, 저녁에 4냥. 모두 합해 9냥(450그람)씩 공급이 되는것이다. 부식물은 물론 끼니마다 남새국 한사발씩. 그러므로 실장정이 이런 최저표준을 먹는다는것은 “쌍태낳은 호랑이 하루살이 하나 먹은 셈”으로 간에 기별도 채 아니 가기 마련이다. K는 몸집이 건장한만큼 식량(먹새) 또한 보통이 아니였다. 이런 사람이 허구한 날 그놈의 하루살이 같은 옥수수떡을 먹고 살자니 필연적인 결과로 눈이 하가마가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K가 어느날 나를 보고 하소연을 하는데 그 하소연이 또한 걸작이였다. 그는 먼저 동쪽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손가락 둘을 뻗쳐보이고 다시 머리우의 하늘을 가리키며 손가락 셋을 뻗쳐보인 다음에 다시 서쪽하늘을 가리키며 손가락 넷을 뻗쳐보였다. 그러고나서 다시 허리를 잔뜩 구푸리더니 두손으로 훌쭉한 배를 부둥키고 처절하게 웨치는것이였다. “배고프다!!!” 그의 이 동작과 토막말을 종합해서 보통말로 옮긴다면 대개 아래와 같을것이다. “아침에 2냥, 점심에 3냥, 저녁에 4냥. 요렇게 먹고 사람이 배고파 어떻게 살라느냐!!!”     수화   수화(手话)란 입으로 말을 못하는 롱아들이 손짓으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멀쩡한 내가 그 수화를 배우게 될줄이야. 사람이 오래 살라니까 나중엔 별일이 다 많았다. K가 집에다 두고 온 딸하고 한달에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는데 그 편지를 대신 써주던 죄수가 만기출옥을 하게 된 까닭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내가 그 후임자가 됐던것이다. 일단 후임자가 된 이상은 그 괴까닭스런 수화를 아니 배울수가 없는 형편이라 나는 그 전임자에게서 늦깎이로나마 수화를 전수받았다. 기초지식을 배운것이다. 한편 K는 노상 배를 곯는통에 기신이 없어졌는지 얼마 안 가 거세우(불 깐 소)모양 사람이 늘컹해졌다. 눈에 보이게 변했다. 그러니까 감때사나운 놈을 길들이는데는 아무래도 기아료법이 제일인 모양이였다. 더구나 신기한것은 K가 아주 늘컹하게 길이 든 뒤에 조장이 시험조로 한번 데리고 나가 일을 시켜보니까 세상에 그렇게도 고분고분 잘 말을 들을데라구야. 이때부터 K는 탈태환골(夺胎换骨)이라도 한것마냥 얼굴에 친근감이 감돌았다. 동료죄수들이 그를 놀려먹느라고 손짓으로 상소리(쌍소리)를 할라 치면 제딴에 우스워죽겠다고 허리를 잡고 낄낄거리는것이였다. K가 이와 같이 180도의 전환을 한것은 그 무슨 사상이 개조가 돼서가 아니라 로동의 강도에 따라 오매에도 그리던 큰 옥수수떡을 먹게 됐었기때문이다. 나는 K의 편지대필을 만기출옥때까지 약 1년 동안 맡아서 해주었다. 그는 나보다 한 반달가량 늦게 출옥을 했다. 그러니까 옥중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그의 대필을 해준 셈이다. “사이표”   K의 딸이 부쳐온 편지를 처음 읽어보고 나는 몹시 감동했다. 감동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그 편지에서는 말 못하는 아버지가 옥중에서 고생할 일을 근심해 속을 끓이는 딸의 애틋한 정―혈육의 정이 글줄밖으로 넘쳐흘렀었다. 그리고 편지를 대필해주는이에 대한 감사도 진정어리게 표했었다. “이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부모는 비록 롱아일지라도 그 틈에서 태여난 딸만은 사내볼 쥐여지르게 똑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적잖이 나를 놀라게 한것은 그 맞춤법. 프랑스어를 방불케 하는 “사이표”들이 군데군데 끼여있잖은가. 그 말썽거리의 “사이표”―손등에 난 사마귀(黑子)모양 거치적거리는 “사이표”―를 걷어치워버린지가 어느 옛날인데 아직도 그것을 그대로 쓰고있다니. 나는 입맛이 씁쓸했다. “총소리”에도 사이표, “물신선”에도 사이표, “등불”에도 사이표, “구두솔”에도 사이표… 어디나 맨 사이표투성이여서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던 세월. 멀쩡한 지식인들이 반무식쟁이노릇을 해야 하던 세월. 그 세월에 “대약진”은 국민경제를 파탄시켰고 또 이 초특급발명품인 “사이표”는 문자세계에 혼란을 가져왔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제 고삐를 남에게 내맡기고 논틀밭틀로 끌려다녀야 하는가? 그럭하는게 정통적이라는겐가? 우리는 태덩이가 아니잖은가! K의 딸은 바로 그 재난적인 “사이표시기”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내 직업전선에 나섰던 까닭에 그후 다시는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봐야겠다. 그렇다면 그놈의 “사이표”는 무슨 천변지이라도 그녀의 신상에 발생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그녀를 따라다닐게 아닌가. 이런 “사이표세대(世代)”가 우리 이 문화권내에 어찌 그녀 하나뿐일것인가! 도대체 이 세기적인 오유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GNP의 격차   일본사람들은 자기네의 글인 “히라가나”와 “가다가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의사를 표달할수 있다. 그 두가지 체(体)를 적당히 섞어쓴다면 더더욱 명확히 표달을 할수가 있다. 하건만 그들은 제한된 소량(少量)의 한자(汉字)를 섞어쓰고있다. 법적으로 그렇게 규정을 해놓은것이다. 더 말할것도 없이 이것은 알아보기가 쉬우라고 하는노릇이다. 능률이 오르라고 하는노릇이다. 그 약아빠진 사람들이 아무 타산없이 엄벙덤벙 한자를 채용했을리는 만무하잖은가. 그 참새 굴레씌우게 약은 위인들이.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일본의 GNP(국민총생산)는 지난 45년 동안에 한자를 완전히 걷어치워버린 나라에 비해 무려 50배나 장성을 했다. ―50대1! 이 얼마나 놀라운 격차―엄청난 격차인가! 한 나라의 갈라진 두 지역에서도 한자를 섞어쓰는 지역의 GNP가 한자를 완전히 배제한 지역에 비해 5배나 장성을 했다. ―5대1. 통계수자란 엄연한 객관적존재이므로 누구도 속이지를 못한다. 펄쩍 뛰며 아니라고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 물론 한자를 섞어쓰는것이 GNP 장성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장성의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을것이다. 최소한 그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을것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높은것을 따라배우지 구태여 가로꿰져 낮은것을 따라배우지는 않을것이다.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이 짐짓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 듣고 따라다니는 시늉을 할 필요는 없다. 남이 고삐를 잡아끈다고 무작정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 “사이표”가 등장했다 퇴장했다 하는통에 우리는 맥없이 끌려다니며 생고생을 했다. 그러니 한자를 섞어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맥없이 끌려다니며 또 생고생을 사서 하지는 말아야겠다. 우리 말, 우리 글의 약 70퍼센트가 한문에 뿌리를 두고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사대(事大)”란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고 섬긴다”는 뜻. “사대사상”이란 “일정한 주견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붙좇아 섬기면서 의지하려는 사상.” 그러나 때로는 “사소(事小)”라는 기이한 현상도 나타날수가 있다.(미안하지만 이 “사소”라는 낱말은 필자가 지어낸것이니 널리 량해를 해주시기 바란다.) 사실상 큰 나라 사람이 작은 나라 사람을 붙좇고 섬기면서 의지하려고 한 괴현상은 우리 주변에도 한때 나타났었다.(하긴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계속 기승을 부리고있다.) 작은 나라 사람을 신주모시듯 모시면서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을 못하게시리 눈을 밝히고 단속을 한다는 괴현상이 한때 확실히 나타났었다. 우리는 남의 잔치에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지도 말고 또 남의 상사(丧事)에 머리도 풀지는 말아야겠다. 더구나 치뜰게 “남의 홍패(红牌) 메고 춤추기”는 하지 말아야겠다.(“홍패”란 지난날 과거에 급제한자에게 내주던 합격증) 일언이페지하고 우리는 떳떳이 제 갈길을 가야 하겠다.     탈옥미수범   K와 나의 교분(交分)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속된다. 우리는 이따금 길거리(연길시내)에서 오다가다 만나면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또 수화로 피차 안부를 묻는다. K의 딸은 이미 결혼을 한지도 오래다. 외손자가 벌써 유치원엘 다닌다. 하건만 K는 사랑하는 딸에게 루가 미칠가봐 혼자 따로 홀아비살림을 하고있다. 외손자가 보고싶어도 꾹 참고있다가 딸이 데리고 오면 한번씩 안아보군 한다. 어리신 왕자님을 안아모시듯 안아모신다. K는 감옥에 있을 때도 그 딸이 차입(差入)해준 새 이불을 덮지 않고 내처 새우잠을 잤었다. ―신성한 이불을 이 어지러운 몸이 어찌 덮을것인가. K에게는 그 딸이 그저 보통 무슨 그런 딸이 아니였다. 그 딸이 그에게 있어서는 곧 쟌 다르크이자 성모 마리아였다. K는 마땅한 일자리가 생겨서 벌이가 괜찮을 때는 싱글벙글 좋아하고 또 그렇지가 못한 때는 안색이 잔뜩 흐려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답답하고 딱하고 안타까울 지경이다. 내가 언제나 옷차림을 허술하게 하고 절뚝거리며 다니니까 K는 나를 몹시 동정한다. 진정으로 동정을 하는것이다. ―늙은데다가 다리까지 한짝 없는 전과자(刑满释放分子)가 먹고 살자니 오죽하랴. 그는 아직까지도 나를 자신과 같은 절도범으로 알고있는것이다. 다리 한짝은 탈옥을 하다가 경비병의 총을 맞고 붙잡혀 감옥병원 수술대에서 잘라버린걸로 알고있다. 그러므로 나를 절도범에다 탈옥미수범까지 겹친 악질전과자로 알고있는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 장난 심한 동기생들이 그를 놀리느라고 그럴사하게 꾸며내서 해들린 말(수화로 해들린 말)을 그는 고지식하게 그대로 믿고있는것이다. 나는 물론 해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 해명할 방도도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고있는 형편이다. 내 수준의 수화를 가지고는 “반혁명현행범(现行反革命)”이라는 뜻을 표현할 재간도 없거니와 설사 표현을 한다손치더라도 그의 지능지수(智能指数,智商)로는 그 뜻을 리해하기가 어려울것이다. 절도, 강도, 강간, 살인 따위라면 곧 알아들을수 있겠지만서도. 나의 동기생 K는 죽는 날까지 나를 절도범에다 탈옥미수범까지 겹친 악질전과자로 여길것이다. 하지만 나를 좋은 친구로 믿는 마음만은 변치 않으리라는것도 나는 알고있다. 그 까닭인즉― 감옥에 있을 때 나의 (대필) 전임자는 편지를 써줄 때마다 K가 사례로 건네주는 옥수수떡 반개씩을 사양 않고 꼭꼭 받아먹었었다.(워낙 배들이 고팠으니까.) 그러나 나는 한번도 받아먹지를 않았다. 그뿐아니라 음력설(春节)에 단 한번 나눠주는 알사탕 2냥(100그람)을 그가 소중스레 봉지채로 갖다주는것도 나는 단호히 물리쳐버렸다. 그가 억지로 이부자리밑에 밀어넣고 달아나는것을 절뚝거리며 뒤쫓아가 기어이 호주머니속에 도로 밀어넣어주고야말았던것이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그는 나를―비록 악질전과자이기는 하지만서도―참된 벗으로 알고있는것이다. 나의 동기생 K가 마땅한 일자리가 생겨서 벌이가 괜찮아지기를 나는 바란다. 그의 싱글벙글 좋아하는 얼굴을 언제나 보게 되기를 바란다. 진정 바란다.
53    성장과정 댓글:  조회:339  추천:0  2016-04-19
성장과정       30년대 조선에 문명기(文明琦)라는 백만장자가 있었다. 이자가 중년에 갑자기 미쳐났는데 어떻게 미쳐났는고 하니 군용기를 헌납하는데 미쳐났었다. 일본군부에다 “애국호”라는 군용기를 헌납하는데 열이 올라 제 돈을 엄청난 액수 바치기만 한게 아니라 남더러도 바치라고 조선팔도가 들썩하도록 떠들어 돌아다녔었다. 총독부가 좋아라고 뒤에서 부추긴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매국역적 리완용이를 찜쪄먹을 친일파였다.     군용기헌납광   그 “애국호”전투폭격기들이 만주의 “비적”들을 소탕하는 사진들이 련일 각 신문의 지면들을 번다스레 메웠다. “비적”들이 기총소사와 폭격을 피해 거미새끼같이 흩어져 달아나는 장면을 공중촬영한 사진을 보고 우리는 환성을 올렸었다. 그때 내 나이 자그마치 16세였다. “우리 애국호가 세긴 세구나.” “세계 제일이라더라 우리 형님이 그러는데.” “물론 그렇겠지!” “고놈의 비적들 고거 야.” “서캐 훑듯 훑는거 아냐?” “씨알머리가 싹 말라버릴거다 머잖아.” 우리는 모두 기고만장해 중구난방으로 이렇게 지껄이며 어깨들을 으쓱거렸다. 우리 “애국호”가 왜 그리도 자랑스러웠던지! 그 못된 놈의 “비적”들이 풍비박산나는게 왜 그리도 통쾌했던지! 군용기헌납광 문명기가 퍼뜨린 친일병균에 우리도 톡톡히 감염이 됐던것이다. 그 전전해 11월에 나는 광주학생운동에 휘말려들어 동맹휴학에 가담했을뿐아니라 수백명의 동창생들과 함께 교정에서 시위를 하며 “일본제국주의 타도”까지 목청껏 웨쳤었다. 일본 헌병과 경찰들이 호시탐탐 노려보는 가운데. 그러던 이 김학철이 이태후에는 “애국호”에 미쳐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돼버렸다. 뒤걸음질을 쳐도 이만저만 친게 아니였다. 그후 불과 5년 뒤에 나는 상해로 건너와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 권총을 차고 반일테로활동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다시 몇해후에는 공산당원이 돼가지고 8로군에 입대를 했다. 이른바 “공산비적”이 된것이다. 그러니까 일본군용기에 소탕당할 대상물이 된것이다. 태항산에서 일본군 전폭기의 공습을 받으면서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우리 애국호가 제일”이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내가 알고있는 범위안에서는 나의 전우들도 거의다 나와 비슷한 꼬부랑길을 걸었었다. 자각적인 맑스주의자로 되기까지는 별의별 “지그자그행진(之字进行)”, 별의별 “곡선항행(曲线航行)”을 다했었다. 그러게 나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여라문살에 벌써 민족의 앞날을 환히 내다보셨다는따위의 신화를. 중학시절에 벌써《자본론》을 통달하셨다는따위의 신화를. 나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김호웅은 비평한다   연변대학의 젊은 학자 김호웅이 지난해 일본의 명문교(名门校) 와세다(早稻田)대학 학보에다 론문 한편을 발표했다. 연구원으로 가있는 동안에 쓴것으로서 만만찮은 실력이라 하잖을수 없다. “후생(后生)이 가외(可畏)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한것이 아닐가. 그 론문가운데 다음과 같은 단락들이 있다.   …(50년대초의 김학철의 작품에는) 정치적설교의 경향이 너무나 짙다. 김학철답지 않은 맛적은 설교. 소설은 정치리념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도식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방약무인한 사자 같은 사나이로부터 소심한 정치교원으로 변신했다. 그의 문학에서는 유유한 유모아와 파동하는 생명체로서의 성격이 사라졌다. 그의 문학은 맛적은 설교와 선행리념(先行理念)에 수동적(受动的)으로 움직이는 인형으로 변해버렸다. …이 시기, 김학철의 소설에는 생활감이 결핍해 그 주인공들은 특정한 사상의 메가폰적인 신분으로 등장을 했다. 50년대 초기, 김학철문학의 이러한 변질은 그가 자신의 강점(强点)인 풍부한 인생체험을 멀리하고 새로운 체재령역에 성급히 뛰여든데서 빚어진것이였다. 해방된 기쁨과 흥분이 지나쳐 새로운 제도에 대한 환상과 절대적인 찬미에 뒤덮이는 바람에 결국은 자기 특유의 작가적성격을 망각한데서 빚어진것이였다.   이와 같이 해부함으로써 가외할 후생 김호웅은 50년대초의 김학철의 방황하는 모습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놓았다. 생생하게 박진감 넘치게 돋을새김해놓았다. 그 시기 작가로서의 김학철은 또 한번 꼬부랑길을 걸었던것이다. “우리 애국호가 세계 제일”이라고 또 한번 진심으로 환성을 올렸던것이다. 30년대에 상해에서 반일테로활동을 할 때도 나는 거의 종교적인 열광으로 굳게 믿었다. 믿어서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몇몇 용사들의 테로활동으로 능히 일본제국주의를 때려눕히고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수 있으리라고.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것도 역시 꼬부랑길로서 부질없는 헛고생을 사서 한것이였다. 보람없는 고생을 제가 좋아 한것이였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이러한 꼬부랑길에서 거듭거듭 골탕을 먹는 동안에 차차 성숙해지다가 모든것을 깨닫고 일대 비약을 한 결과가 곧《20세기의 신화》의 탄생이다. 그러니까 “새집드는 날”과 “뿌리박은 터”는 내가 “소심한 정치교원”으로 전락해서 설교를 일삼았던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괴상한 휴가”는 회의(怀疑)와 반성(反省)의 시기의 산물이 되겠다. 탈피과정, 즉 허물을 벗는 과정의 산물이 되겠다. 이 모든것을 딛고(디디고) 발돋움을 한 상태가 바로《20세기의 신화》란다면 론리적으로 큰 무리는 없을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문화대혁명”때 숱한 개인야심가들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혁명의 이름을 빌어 랑자하게 사람사냥(人间狩猎)을 벌였었다. 그자들은 개개 다 사람의 가죽을 쓴 야수들로 변했었다. 그 시기, 중학생들이 자신을 가르친 은사를 죽일 놈 살릴 놈 욕지거리하며 닥달질하는것을 보고 가슴이 무너앉지 않은 사람이 이 넓은 땅우에 과연 몇이나 있었을가. 하지만 그 아이들은 개인야심가도 아니고 또 사람의 가죽을 쓴 야수의 새끼들도 아니였다. 그 아이들은 그렇게 하는것을 진정 혁명인줄만 알았었다. 비극은 여기에 있는것이다. 내가 한때 “소심한 정치교원”으로 전락해 설교를 일삼았던것도 역시 그렇게 하는것이 곧 인민을 위하는것인줄로 믿어서 의심을 하지 않았기때문이다. 비극은 여기에 있는것이다. ―기막힌 사주팔자!     구체적인 사람   종교화에 나오는 성자(圣者)들의 머리우에는 개개 다 금빛의 후광(后光)이 그려져있다. 성스럽기 그지없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어 살인강도도 대번에 전비를 뉘우치고 착한 사람이 됨직하다. “반란파”, “홍위병”들도 가슴을 짓찧으며 참회의 눈물을 흘림직하다. “성자란 의례 그렇게 대단한거려니”쯤 생각하고 우리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그 성자를 보는 눈이 일종의 타성으로 현실세계에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데도 작용을 해 우리는 “의례 그렇게 대단하려니”쯤 생각하기가 일쑤다. 살아있는 신(神)은 이런 기반우에서 만들어지는것이다. 그런 풍토속에서 점점 더 거창하게 자라나는것이다. 마법사의 완두덩굴처럼 자꾸 자라 하늘을 찌르고 또 하늘을 뒤덮게 되는것이다. 사마천(司马迁)과 그의《사기(史记)》의 불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력사인물들의 머리우에다 후광을 그리지 않고 구체적인 사람 그대로를 돋을새김해놓았기때문이다. 걸출한 면과 너절한 면을 아울러 새김으로써 릉각이 선명하고 명암(明暗)이 뚜렷한 조각상을 이룩해놓았기때문이다. “반우파투쟁”때와 “문화대혁명”때 나는 만악(万恶)의 집대성적(集大成的)인물로 묘사됐었다. “살아있는 악마”라고 곡마단에서 흥행물로 끌고 다녔다면 관람료를 무더기로 벌었을지도 모를 존재였다. 이와는 반대로 “선(善)”의 집대성처럼, “위대”의 권화(权化)처럼 묘사돼서 만인의 숭앙을 받은분도 계셨다. 그러나 이 두가지가 다 편면적이고 편파적이였다는것은 그후의 력사가 이미 실증을 해주었다. “권화”란 “어떤 추상적인것이 구체적인 형상을 쓰고 나타난다”는 뜻이다. 지난해 여름 “5월시회”의 발족회가 백산호텔에서 열렸을 때의 일이다. 연변대학의 허룡구씨가 상글거리며 축사를 하는데 정치성이 너무 짙게 풍기니까 문학예술연구소의 조성일씨가 웃으면서 “여보, 당신 그렇게 선전부장이 할 말까지 다해버리면 선전부장은 어떡하우.” 하고 롱담을 던져서 장내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었다. 매우 시사적(示唆的)이면서도 또 재치있는 롱담이였다. 그러나 더 걸작이고 더 재미있는것은 선전부장 본인의 반응이였다. “난 그런 딱딱한 말 안해. 난 그런 딱딱한 말 안해.” 선전부장이 손을 홰홰 내저으며 이와 같이 성명을 하는 바람에 장내는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면서 화기가 애애해졌다. 금빛의 후광으로 치장하지 않은 사람들. 구체적인 사람들. 현실세계에서 살아움직이는 사람들. 보통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원고지에 그대로 옮겨놔야 하잖을가. 틀에 맞춰 다듬거나 후광을 그러넣거나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미채와 솜이불   1980년 12월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장장 24년에 걸친 나의 수난시대가 막을 내렸다. 공판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복권(复权)을 한것이다. 헌데 그 복권이라는게 된 때부터의 나의 행적(行迹)을 한번 살펴본다면 이 역시 악전고투의 련속―마음 편할 날이 거의 없는 상태다. 써내는 글들이 모두 두루뭉실했으면 아무 탈 없이 순풍에 돛단 배가 될터이나 전연 그렇지가 못한것이다. 신념대로 어김없이 쓰다보니 글이 자연 모가 나고 가시가 돋친다. 그러니 여기저기 자꾸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될 밖에. 집어서 말하면 통과하기가 어려울것 같아서 빙 에두르거나 비유를 해도 “이건 곤난합니다.” “그래두 걸립니다. 안됩니다.” “요 구절은 깎아버리잖구는 발표가 불가능합니다.” “달리 표현을 해주실순 없겠습니까? 좀더 부드럽게.” 친애하는 편집자분들이 이와 같이 골머리를 앓고 도리머리를 흔드는것이다. “내가 쓴게 이게 그래 사실 그대루가 아닌가요? 진리가 아닌가요?” “누가 아니랍니까?” “그렇다면?…” “아이구 참 선생님두. 잘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다 잘 알고있는 그 사정”때문에 진리가 편집부를 통과하기가 마치 락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기만큼이나 어려운것이다. 담벼락에 부딪친것 같은 때가 종종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친애하는 편집자분더러 “당신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하면 되잖느냐”고 무책임한 강요를 할수는 없는 일이다. 피차간의 정의(情谊)를 생각해서라도 목만은 보전(保全)을 하게시리 해줘야 하니까. 그래서 할수없이 궁여지책으로 글에다 얼룩덜룩 미채(迷彩)를 칠해 캄플라지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또 날카로운 비수의 날이 다소나마 가려지게끔 솜이불을 덮씌우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 한 본보기로《도라지》 2호에 실린 “제1부인”을 들수 있다. 그 글을 얼핏 보면 앞뒤가 서로 모순당착해 마치 2원론자가 쓴 글 같다. 심지어 “이거 정신분렬증환자가 쓴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유심히 뜯어보면 의식적으로 얼룩덜룩 미채를 칠한게 환히 알린다. 필자의 고심(苦心)이 환히 알린다. 고육지계(苦肉之计)라는게 환히 알린다. 나이 77세가 되도록 밤낮 이런 구차한짓을 해야만 하는 내 신세가 한심스럽다. 한심스럽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52    문객문학 댓글:  조회:243  추천:0  2016-04-19
문객문학      “문객”이란 (낡은 사회에서) 세력있는 집의 식객 또는 세력있는 집의 덕을 보려고 무시로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을 일컬음이다. 그리고 “식객”이란 물론 대가집에서 얻어먹고 지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문객노릇도 아무나 “내가 하겠소” 해서 되는것은 아니다. 문객노릇을 할만한 자격을 갖춰야지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이다. 주인대감 또는 주인령감과 어울려 풍월도 읊어야 하고 또 서화(书画),금기(琴棋) 따위도 다 축에 끼일만큼은 몹시 배여있어야 하기때문이다.     고급턱찌끼   동서고금은 막론하고 세력있고 돈 많은 집 사랑에는 의례 문객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전국시대 제(齐)나라의 정승 맹상군(孟尝君)이 문객 3천명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그 좋은 례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문객들도 다 똑같은건 아니다. 개중에는 주인을 도와 정사(政事)에 참여해 출모발려(出某发虑)를 하는 참모격도 있고 또 전문적으로 글을 써서 주인의 공덕을 칭송하는 문사(문인)도 있다. 전자(前者)는 대개 주인의 중시를 받았지만 후자는 거지반 허울 좋은 하늘타리로 실상은 사용(私用)광대취급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러므로 후자는 말하자면 고급턱찌끼를 얻어먹고 사는 신세인 셈이다.     신분제도   대커리(영국작가, 1811년―1863년)의《헨리 에스몬드》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귀족의 초대연에 참석한 목사가 식사를 끝까지 다하지 않고 마지막 음식(쿠키와 커피)이 나오기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인귀족을 향해 “죄송하오이다만 급한 볼일이 있어서 소직(小职)은 이만 물러가야겠소이다.” 량해를 구하고―죄만(罪万)을 드리고―조심스레 자리를 뜬다. 귀족의 초대연에서 목사나 신부 따위의 신분으로 감히 끝까지 앉아 식사를 한다는것은 불경스러운 일이기때문인것이다. 레브 똘스또이(1828년―1910년)의《전쟁과 평화》에는 또 이런 대목이 있다. 귀족집의 가정교사가 지식인대접으로 주인집 식구들과 식사를 같이하긴 하지만 시중드는 하인들이 어깨너머로 잔마다 샴팡을 따라줄 때는 꼭 가정교사만은 빼놓고 따라준다. ―주인하고 한상에서 밥을 먹는다뿐이지 네놈도 우리나 마찬가지 고용살이군인데―주제넘게 샴팡까지 마셔? 이런 뜻인것이다. 그럴 때면 자존심이 상한 가정교사는 하릴없이 (난 원래 속에서 받잖아서 샴팡은 접구도 못한다니까.) 이런 표정을 지어야 하는것이다. 이상에서도 알수 있는바 문객노릇이나 식객노릇을 한다는것은 그리 탐탁하지가 못한 일이라 하겠다. 오그랑쪽박 같은 신세가 좋을게 무언가.     신식문객들   자본주의사회에는 지금도 억만장자에게 빌붙어서 없는 꼬리를 살랑살랑 쳐가며 고급턱찌끼를 바라고 아양을 떠는 신식문객들이 없지 않다. 고비사막의 황사(黄砂)가 바람을 타고 바다건너 먼 나라에까지 날아가 하늘을 뒤덮어 황사현상을 일으킨다니 그쪽에서 나타난 사회현상이 우리 여기까지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법 또한 없을것 같다. 신식문객들의 치뜬 소행, 비굴한 소행이 류행성감기나 류행성뇌막염처럼 옮아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을거란 말이다. 한데 그 신식문객들은 워낙 약기가 참새 굴레 씌우게 약은지라 눈치가 빠르기를 모두들 도가집강아지 찜쪄먹게 빠르다. 그래서 언제나 제 그 너절한 행실머리가 겉으로 드러나잖게 어지간히 신경들을 쓰는것이다. 례컨대 억만장자, 대기업가의 전기를 써서 “우리 나라 재계(财界)의 불세출(不世出)의 위인”이라고 치켜세우더라도 정작 그 작자인 자신은 쏙 빠져버리는것이다. 마치 그 불세출의 위인께서 친히 집필을 하신것처럼 꾸미는것이다. 그러니까 자서전으로 둔갑을 시켜버리는것이다. 가랑잎으로 하문(下门)(嚬蹙)(面骂)만 당하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발바리, 삽살개 노릇을 하긴 하더라도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보는데서 하기는 좀 창피하니까 신경들을 쓰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그래도 이쯤이면 최소한 수치라는것은 아니까 인간으로서의 점수가 령점까지 떨어지지는 않는다.     늦게 난 바람   인류사회의 인적(人的)인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언제나 근로자대중이 그 첫자리를 차지한다. 근로자란 우리가 다 알다싶이 “(남의 로력을 착취하지 않고) 자기의 로력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다. 그럴진대 우리 작가들이 다루어야 할 주요대상은 더 말할것없이 이 근로자대중이여야 할것이다. 사회발전의 기본적인 동력을 중시한다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지난날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밤낮 이 근로자대중만 웨쳐댄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외면을 해버린다면 이 역시 잘못일것이다. 요즘 우리 문단에는 “늦바람이 곱새를 벗긴다”는 속담이 절로 떠오를만한 현상이 나타나고있다. 자본주의나라 신식문객들의 추잡한 작태가 류행성병균처럼 묻어들어와 만연을 하고있는것이다. 앞을 다투어 돈 많은 기업가들을 치켜세우는것이다. 그 이른바 공덕이라는것을 칭송하는 글을 쓰느라고 여념들이 없는것이다. 그 결과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나가는건 바로 그 기업가들인줄로 착각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튼 기업가들의 전성시대를 그들은 붓으로써 이룩해놓았다. 량심적인 기업가들이 그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되돌려줌)하는것은 물론 가상한 일이다. 경비부족으로 비틀비틀하는 문화사업에 찬조를 하는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런 갸륵한 행위에 대해서는 의당히 해야 할 평가를 해야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가들은 무슨 불세출의 위인인양 삐까번쩍하게 도금칠을 해주는것은 얄팍한 상혼(商魂)의 소치(所致)라고밖에 달리는 해석할수가 없다. 장사속이 밝은 량반들의 잘 계산된 상행위(商行为)라고밖에 달리는 더 어떻게 해석을 하기가 어렵다. 지난날 중국의 군벌들은 글재주 있는 문객들로 하여금 자기 가문의 가사(家史)라는것을 쓰게 할뿐만아니라 음악가들을 시켜서 가가(家歌)까지 짓게 했었다. “국가”나 “교가”는 다들 알고있지만 이 “가가”라는것은 듣느니 처음으로 아마 모르는이가 많을것이다. 돈 많은 기업가들에게 충성경쟁을 벌이는분들이 왜 돈 없는 근로자들에게는 좀 충성경쟁을 벌이지 않는가. 그 리유는 아주 간단하다. ―먹을알 없는 놈을 써서는 무엇해?! 철면피, 파렴치도 이 지경에 이르면 고칠 약이 없을것이다. 백약(온갖 약)이 무효일것이다. 자본주의나라의 신식문객들은 그래도 수치나 알지. 부채를 들고 행인을 따라오며 자꾸 부채질을 해주는것이다. 돈 한잎을 꺼내줄 때까지 끝끝내 부치며 따라오는것이다. 나도 한번 당해봤는데 그런 놈을 떼치려면 얼른 한잎 꺼내주는게 상책중의 상책이였다. 이런 부채질해주며 따라다니는 수법을 우리 작가들은 아예 따라배울게 아니다. 우리의 인격 있고 자존심 있는 작가들은 절대로 따라배우지를 않을것이다.
51    론난 “한번만” 댓글:  조회:227  추천:0  2016-04-19
론난 “한번만”      우리 민요에 이런것이 있다.   담 넘어들 때는 큰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시내가 강변서 빨래질하니 정든 님 만나서 돌베개 벴소   밤중에 남의 집 담을 넘어들어가지 않나, 백주대낮에 강변에서 만나가지고 “로천굴착”을 하지 않나―풍기문란, 상풍패속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岁不同席)”이 사회생활의 준칙으로 돼있던 그 세월에 말이다. 이보다 더 심한것도 우리 민요에는 있다.   시내강변에 가는비 오나마나 어린 서방은 있으나마나 노랑두대가리 쥐나 콱 물어가라 동네집 총각이 내 서방 되리라   사내구실 못하는 서방을 뭐가 콱 물어나 가줬으면 오죽 고마우랴. 그러면 저는 마음에 드는 동네집 총각하고 같이 살수도 있을게 아닌가. 독부(악독한 계집)도 이만저만한 독부가 아니다. 간통죄, 살인예비죄가 왔다갔다할 정도다.     봉건적륜리   한데 문제는 이런 봉건적륜리에 크게 어긋나는 행위를 반영한 민요들이 통치배의 벼락방망이를 맞아 박산이 나지 않고 그대로 고스란히 살아남아 오늘까지 전해져내려오는것이다. 추측하건대 그것들이 생활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에―세상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반영을 했기에―어떠한 풍상도 겪어내는 검질긴 생명력을 지니고있는게 아닐가. 두어달전에 나는 작곡가 최삼명씨의 “꼭 하나 곡을 붙여봤으면 좋겠다”는 청탁을 받았다. 그래서 전연 엉뚱하게 가사 한편을 써야 한다는 심상찮은 운명에 직면했다. 서양에 “코끼리는 토끼를 칠 때나 사자를 칠 때나 다 똑같은 힘을 들인다”는 격언이 있다. 나도 그 격언을 따르는 습관이 있는지라 ―이왕 쓸바에야 하나 빼여나게 써야지. 이렇게 뼈물고 아주 정식으로 달라붙었다. “위대한 조국”, “어머니의 당(党)”, “아름다운 연변”,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어머니”, “존경하는 선생님”, “정다운 벗”, “즐겁게 노래하자”, “신나게 춤추자”, “처녀야”, “총각아”, “푸른 동산이여”, “맑은 시내여”, “달이여”, “꽃이여”, “꿈이여”, “안개여”, “함박눈이여”, “가랑비여”, “흰구름이여”, “7색의 무지개여”… 갖가지로 다 음미를 해봤으나 그 어느것도 다 너무 많이 들어놔서―밤낮 들어놔서―신선미가 없는것 같았다. 그 식이 장식인것 같았다. ―이걸 어떡한다? 궁리를 하고 머리를 짜고 또 고민을 하던중에 2주일하고 또 하루만에 문득 령감이 떠올랐다. 실로 침침칠야의 번개불 같은 령감이였다. 나는 너무도 흥분해 잽싸게 볼펜을 집어들었다. 령감을 놓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손에 집히는 헌 신문지란외에다 단숨에 냅다 갈겨썼다―   당신없이 그동안 곱게 지키다 아차실수 한번 좀 그랬는데도 더러운것 나가라 보기도 싫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으신가요 이번 한번 용서만 해주신다면 뼈에 새겨 다시는 안 그러리다 사내대장부답게 어서 그래라 시원한 대답으로 잊어주세요   헌데 이것이 일단 신문에 실리자 예상했던바의 또는 예상 못했던바의 일장풍파가 일어났다. 년전에 졸작 “동서남북풍”이 겪었던것만 못지 않은 풍파였다. 옹졸한 위선자들   책상을 치며 “이런걸 다 신문에다 내는가”고 노발대발하는분, “그 늙은이 이젠 아주 로망을 부린다”며 개탄을 하고 또 비웃는분, “뉘 집 녀편네 바람을 내줄라구 이따위를 쓰는가”고 개 벼룩 씹듯하며 도리머리를 흔드는분… 각양각색의 반응들을 보이는 가운데 “고거 야 재치있다. 아하하!” 하고 긍정을 하는분도 더러는 있는게 실정이다. 가사의 사의(词意)마따나 “아차실수 한번 좀 그런” 녀성이 우리 주변에는 과히 심심찮을 정도로 있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한번 용서만 해주신다면” 다시 안 그러겠다고 다짐두는 녀성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있는 사실을 몇줄 글로 간단히 다듬어보는게 그래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럼 어째 그런 점잖은 도학군자분들이 “아니 뭐? 처녀계집애가 돌베개를 베? 저런 집안 망할 년 같으니라구!” 하고 책상을 치며 노발대발은 하지 않는가. 그런 점잖은 도학군자분들이 그럼 어째 “있으나마나한 서방 콱 물려나 가라? 동네총각눔하구 붙어살겠다? 조런 발칙한 년 좀 봤나!” 하고 개 벼룩 씹듯하며 도리머리를 흔들잖는가? 녀자가 바람을 피우자면 반드시 상대자가 있어야 한다. 바꾸어말하면 바람쟁이사내놈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녀자가 바람을 피우는 경우 잘못한 책임은 절반만 지면 되는것이다. 더 죽일 놈은 사내놈이니까. 정직한 사람들, 수양 쌓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안해가 부정한짓을 할가봐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덕성에 비추어 믿음이 있기때문이다. 이에 반해 바람쟁이들은 항시 (우리 녀편네도 또 그런짓을 하면 어쩌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제 지정머리가 워낙 지저분하니까 거기 비추어 안해의 인격에 대한 믿음 역시 무너져버렸기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한 론리라 하겠다. 그러므로 “한번만”을 읽어보고 책상을 치며 노발대발하거나 못마땅해서 “로망을 부린다”고 비웃거나 또는 “뉘 집 녀편네 바람을 내주려는가”고 도리머리를 흔드는 도학군자분들은 대개 다 찜찜한데가 좀씩 있는분들이기도 쉽다. 추측컨대 그렇다는 말일뿐. 뭐 꼭 찝어서 어떻고 어떻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오해가 없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도무지 리해가 잘 가지 않는것은 그런분들이 어떻게 비싼 값을 치르고―그도 우리 돈이 아닌 외화를 치르고―사들여오는 외국영화나 비디오는 군말없이 받아들이는지? 어떻게 팬티바람의 남녀가 롱탕치는 징그러운 장면을 태연자약하게 또는 흥미진진하게 관람을 하시는지? “팬티”란 서양식속곳. “롱탕”이란 남녀가 음탕한 소리와 란잡한 행동으로 갈개면서 흐지부지한다는 뜻. 그런분들이 어찌해 돈 한푼 안 드는 국산품인 “한번만”을 보고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날뛰시는지? 20세기 90년대의 사회주의사회에 사시는분들이 봉건통치배만도 못한 문학감상력을 갖고계신다면 그것은 일종의 비극일것이다. 시대적비극일것이다. 치료할 약이 없는 고질일것이다. 죽기전에는 못 고치는 고질일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인생은 해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도학군자”가 아닐가싶다. 피라미드속의 미이라처럼 물기 하나 없이 꽛꽛해진 “도학군자”가 아닐가싶다.
50    영웅론난 댓글:  조회:218  추천:0  2016-04-19
영웅론난      신기질(辛弃疾, 1140—1207)은 남송(南宋)의 가장 걸출한 사인(词人)이다. 남송이란 금(金)나라에 밀리여 양자강이남지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한 송나라. “사”는 “시”와 “가사”의 혼합체 같은 문학형식. 모택동이 이 신기질의 사들을 특히 애음(爱吟)한것으로 알려졌다. 신기질은 금군(金军) 점령하의 산동 제남에서 태여나 22살 때 2천여명의 무장을 조직해 거느리고 항금(抗金)의병장 경경(耿京)의 대오에 합류해 그 참모장으로 됐다. 그후 정부군과 련합을 해야만 실지수복(失地收复)의 대업을 성취할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자 그는 다시 특사의 사명을 띠고 남송의 수도 건강(建康, 현재의 남경)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황제를 배알하고 남북의 정세를 분석한 끝에 쌍방은 련합군을 내오기로 타합을 한다. 신기질은 사명을 다하고 되짚어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마른하늘에 생벼락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의병장 경경이 반역자 장안국(张安国)에게 상해되고 부대는 몽땅 그놈의 책동으로 반변을 했다는것이다. 민족영웅 신기질   격노한 신기질은 즉시 수하 군사 50기(骑)를 이끌고 제남으로 직행해 5만명의 금군속으로 뚫고 들어가 장안국을 산채로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뿐만아니라 그놈에게 속아서 반변했던 부대를 돌려세우기까지 한다. 우리 일반의 상식으로는 이럴 때 반역자의 목을 잘라 효수(枭首)를 하거나 아니면 수급(首级)을 말목에 매달고 돌아오는것으로 일을 마무리할것이다. 그러나 신기질은 그럭하지를 않았다. 그는 금군기병대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산 놈을 그대로 말등에 실은채 2천여리를 달려서 양자강에 득달해 다시 배를 잡아타고 강을 건느는데 성공을 했다. 신기질이 민족반역자 장안국을 산채로 잡아다 조정(朝廷)에 꿇려놓고 정식으로 토죄(讨罪)한 뒤 목을 잘라 효수하는것을 보고 황제를 비롯해 만조백관이 다 크게 놀라 뒤흔들렸다. 그리하여 민족영웅 신기질은 그 위명을 전국에 떨쳤다. 하건만 불행하게도 워낙 무능한데다 부패할대로 부패한 조정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빼앗긴 국토를 되찾을만한 기맥이 없었다. 그럭할 마음마저 없어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신기질이 자꾸 출병을 요청하는것이 듣기 싫다고 신기질을 저 먼 어느 시골구석에다 변변찮은 낮은 벼슬자리 하나를 주어서 아예 쫓아버렸다. 그가 쫓겨가 살던 강서성 연산(铅山)에는 지금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국의 충정을 기탁할데가 없어진 신기질은 비장한 사(词)를 지어 읊기 시작했다. 음률에 맞춰가지고 부르기 시작했다. 의병장출신의 민족영웅은 이렇게 해 사인(词人)으로 됐던것이다. 이런 인물을 세상에서는 영웅이라 일컫고 또 두고두고 기리는것이다.     준렬한 질책   방효유(方孝孺, 1357—1402)는 명나라의 산문가다. 그는 절강 녕해(宁海)사람으로서 황제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시강(侍讲)의 벼슬까지 지냈다. 후에 그 황제의 동생인 연왕(燕王)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형을 뒤엎고 새 황제가 되면서 명성 높은 방효유를 회유해 써먹을 료량으로 항복을 권유하고 또 등극조서(登极诏书)를 기초(起草)하라고 명했다. 한데 방효유는 붓을 들어 등극조서를 쓸 대신에 “연적찬위(燕贼篡位)”라는 네 글자를 써내던졌다. “임금의 자리를 찬탈한 역적놈이 뻔뻔스레 무슨 수작을 하느냐”고 호령을 한것이다. 그리하여 방효유가 당장에 목을 잘리우고 그 가족이 몰살을 당한것은 더 말할것도 없거니와 애꿎은 일가, 친척, 친우, 제자들까지 무려 870여명의 사람이 그의 언걸을 입어 참살을 당했다. 황제노릇을 형이 해먹든 아우가 해먹든 일반백성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방효유가 한 신하로서 절개를 굳게 지키며 감히 새 황제를 서슬이 푸르게 꾸짖은것은 장하다 아니할수가 없다. 현재 남아있는 방효유의 저서들은 다 썩 후세의 학자들이 수집해 편찬한것으로서 그 연유인즉 그의 사후(死后) 무릇 그의 문장을 감춰둔 사람은 다 무조건적으로 사형을 당했었기때문이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그의 문장을 감춰두었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방효유 같은 인물을 세상사람들이 두고두고 기리는데는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것이다. 혁명가가 무시무시한 적의 법정에서 감히 오연한 기개로 꿋꿋이 맞설 때 세상은 그를 영웅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강도나 강간범 따위가 법정에서 뻔뻔스레 고개를 쳐들고 하등의 뉘우치는 기색도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 하지 않고—망나니라고 한다. 짐승 같은 놈이라고 침 뱉어버린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걸핏하면 “좌석찾기(对号入座)”를 하기 좋아하는 루습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런게 두렵다고 의당 해야 할 말도 아니하고 산다면 이 사회는 전도가 암담해질것이다. 그러니 구데기 무섭다고 장을 아니 담글수는 없는 일이다. 공연히 신경들을 곤두세우지는 않는게 좋을것 같다. 가령 여기 남을 물어먹는따위의 비렬한 행실을 일삼으면서도 그 잘못을 준절히 일깨워주는 사람을 도리여 물려고 덤비는,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있다고 하자. 그런자는 상술한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웅과 망나니를 구별할 능력이 없는 족속이므로 종당은 건실한 사회의 버림을 아니 받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망나니들이 자신을 영웅으로 착각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돌아친다면 그 꼴은 가관이 아닐수 없을것이다. 우리 문학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을 옳이 꿰뚫어보는 예리한 안광을 갖춰야 하겠다. 진짜와 가짜를 식별해내고 영웅과 망나니를 식별해내는—그런 예리한 안광을 갖춰야 하겠다.
49    독서삼매 댓글:  조회:208  추천:0  2016-04-19
독서삼매       “독매삼매(读书三昧)”란 “오직 책읽기에만 골몰한다”는 말이다. 우리 누구나가 다 경험해본 일이다. 아무리 빼여난 천재라 할지라도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학문의 높은 경지에 다달으기는 어렵다. 사람이 늙어가지고 쓰고 버린 건전지 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역시 책읽기는 게을리하지를 말아야겠다. 일본에서는 그런 쓸모 없는 늙은이를 “조대(粗大)쓰레기”라고 한다. 헌 텔레비나 헌 랭장고 따위 드다루기 힘든 쓰레기란 뜻이다. 독서삼매를 하는데는 물론 새 책을 읽는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에 읽은 책들을 한번 읽어보는것도 해롭지는 않은 일이다. 무심중에 지나쳤던것들을 새로 발견할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근간에 다시 읽어본《동주렬국지(东周列周志)》와《삼국연의》에서 새삼스레 우스운 대목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독살하는 장면들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독살이 미수에 그치는 장면들이다. 독살하려는 음모를 미리 알아챈 재상(宰相)이나 장군들이 모르는체하고 받아든 술잔이나 약사발을 갑자기 쏟아버리면(그 독기에) 불이 번쩍 날뿐만아니라 바닥에 깐 벽돌장들이 쩡쩡 갈라지기까지 한다. 그 독약이 얼마나 극렬한지를 보여주려는 작자의 의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세심한 독자들은 납득이 안 가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또는 허허 웃고 그대로 읽어내려가게 될것이다. —닿기만 하면 벽돌장이 쩡쩡 갈라질 정도로 극렬한 독약이 왜 술잔속이나 약사발속에서는 쥐죽은듯 가만있었을가. 그것들도 다 쩡쩡 갈라졌어야 할게 아닌가. 이 역시 리백의 “백발삼천장(白发三千丈)”과 같은 류(类)의 예술적과장으로 받아들이면 무난할것 같다. 그럴진대는 우리 다같이 한번 허허 웃고 그대로 읽어내려가는게 바람직하잖을가.     빈구석   《림꺽정》에도 하찮기는 하지만 아무튼 빈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다. “최서방의 맏딸은 근동에서 얼굴이 이쁘기로 이름난 처녀”였는데 뒤에 가서는 “내 손우에 형님이 하나 있었던 까닭에 내 이름은 작은년이요”로 돼버리는따위가 곧 그것이다. 돈 끼호떼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려 저녁을 시켜먹고 다시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또 주막에 들려 저녁을 시켜먹는거나 마찬가지의 하찮은 소홀일것이다. 소홀치고는 재미있는 소홀—에피소드가 됨직한 소홀이라 하겠다. 《고요한 돈》에서는 주인공 그리고리가 도망치는 적병을 그에 따라가 사벨(군도)로 찍어죽이고나서 (도대체 무엇때문에 내가 저 사람을 죽여야 했나?)로 회의하는 장면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침략전쟁이 어떻게 나쁘고 또 어떻게 나쁘고 설교를 하는것보다 훨씬 더 박진감 있는 묘사였다. 소설에서 설교는 군더더기다. 그것은 얼굴에다 크림을 바를 대신에 부적을 붙이고 다니는거나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표현이다. 졸작에도—그런 설교들이 소고기의 홀떼기모양 갈피갈피에 끼여있는것을 생각하면 낯이 뜨뜻하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나 할가. 그리고리가 좌익이 옳은지 우익이 옳은지 도무지 알수가 없어서 “허허벌판에서 눈보라를 만난것 같다. 향방을 분간 못하겠다.”고 탄식하는 대목은 이 소설의 주안점이다. 짜리정권의 진면모를 간파하자 그는 서슴없이 적군(赤军, 붉은군대)에 가담한다. 그러나 적군의 한 지휘관이 사령부로 압송하라는 포로들을 비인도적으로 죽여버리는것을 보고는 분연히 적군부대를 떠난다. 미구에 그는 자연스럽게 백군의 대렬에 서게 된다. 그러나 백군이 패퇴를 하면서 지휘관과 그 권속을 포함한 상류층만 기선을 타고 도망을 치고 병사들은 죽거나말거나 내팽개치는것을 보자 그는 분연히 백군과 손을 끊는다. 그리고 또다시 적군부대에 가담을 한다. 적군부대에서 그는 속죄를 하려고 열심히 복무해 부련대장으로 승진까지 했으나 결국은 신임을 받지 못해 제대를 하게 된다. 고향집에 돌아온 그를 해당 기관에서 체포하려 하자 그는 또다시 반란군에 가담해 결국은 비적의 무리가 돼버린다. 나중에 비적단마저 풍비박산이 되자 그는 무기와 탄약을 강물에 처넣고 제 발로 걸어서 촌쏘베트를 찾아들어간다. 자수를 하려는것이다. 대동란의 시기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신세를 망치는 한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숄로호브는 극명(克明)하게, 생동하게, 박진감 있게 그려놓았다.     한 인간의 운명   나는 일찌기 똘스또이의《전쟁과 평화》에서도 이렇게까지 깊은 감명을 받지는 못했었다. 그리고리의 운명에 나는 한 인간으로서—계급성을 초월한 한 인간으로서—심심한 동정과 련민의 정을 금할수 없다. 지난여름 서안에 갔다가 40여년만에 만난 어느 옛 전우의 술회가 떠올려진다. —나는 맑스주의적세계관을 확립하기전까지는 맥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였다. 그러나 일단 공산주의자로 된 뒤에는 한눈 팔지 않고 꼿꼿이 한길을 걸어나왔다. 나름대로의 신념에다 평생을 바쳤다. 기막힌 고초를 무수히 겪기는 했지만서도—후회할 일은 없다. —나는 리지적인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풍랑에 부닥치더라도 움쭉을 안한다. 백이 백소리 하고 천이 천소리를 한대도 그저 “왜들 이리 지절대느냐!” 한마디 훌 뿌리는게 고작이다. 독서삼매라는게 어떡하다보니 가리산지리산이 돼버렸다. 각설하고 원줄기를 다시 찾아들어가자. 로신이라고 하면 잡문이 생각나고 잡문이라고 하면 로신이 떠오를만큼 로신의 잡문은 유명하다. 그런데 이 잡문을 그대로 우리 말로 옮겨쓰면 좀 어색한감이 없지 않다. 왜냐면 우리 말에서 잡문이란 “일정한 체계없이 함부로 쓴 글”인데 보통은 “예술적가치가 없는 잡스러운 문학”으로 취급되기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칼럼”이 더 적절할것 같다. 칼럼이란 “시사문제나 사회풍속 등을 촌평하는 글”이니까 말이다. 어쨌든간에—잡문이 되든 칼럼이 되든간에—로신의 글에 이런것이 있다. 유치원짜리 아들의 사진을 찍는데 한번은 일본사진관에 가 찍고 또 한번은 중국사진관에 가 찍었다.(상해에서) 그런데 아이도 같은 아이요 입은 옷도 다 비슷한 옷인데 먼저 사진은 아이가 세찬 장난꾸러기로 찍혀서 꼭 일본아이 같았고 또 나중 사진은 아주 온순한 얌전이로 찍혀서 영낙없는 중국아이였다. 이것은 렌즈앞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의 표정을 찰나적으로 포착하는 사진사의 기량 여하에 따른것으로서 일본사진사가 장난꾸러기형(型)을 선호하는 반면에 중국사진사는 얌전이형을 선호했기때문일것이다. 여기까지가 로신의 글의 대략이다. 다음은 필자나름대로의 견해다. 동일한 인물이나 동일한 사건을 복수(둘 이상)의 작가가 다룰 때 판이한 형상으로 나타나는것도 아마 이와 비슷한 원유(原由)에서일것이다. “계속 흐린게 남보고 집 봐달란 말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소인의 눈에는 정인군자도 다 저 같은 소인으로만 보인다는 뜻일것이다. 그러니까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그려낸 형상도 일그러질 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것이다. 선인이 악인으로 보이고 악인이 선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글을 쓴다면 리순신장군이 해적선의 선장으로 그려질수도 있을거고 또 리완용이가 애국적인 정치가로 그려질수도 있을것이 아닌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재지삼 되새길 필요가 우리 모두에게 있잖을가.
48    정문이, 잘 가오 댓글:  조회:250  추천:0  2016-04-19
정문이, 잘 가오       우리 연변에서 한 사나이가 떠나간다. 리정문(李政文)이가 떠나간다. 우리의 선전부장, 문교서기를 10년 동안 맡아보던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강택민총서기앞에서 열렬히 부르짖은 사나이. “당중앙이 소수민족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당 자신을 믿지 않는거나 마찬가지”라고 불같은 열변으로 열렬히 부르짖은 사나이. 그 사나이가 떠나간다.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10년전의 궁상스런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이 사나이는 떠나간다. 량수청풍(两手清风)의 사나이. 두 소매에 맑은 바람만 감도는 사나이. 줄줄은 알아도 받을줄은 모르는 사나이. 달랄줄은 더더구나 모르는 사나이. 그래서 밤낮 구차하기만 한 사나이. 이런 살림살이의 락제생이 떠나간다. 청렴(清廉)의 대명사 같은 사나이가 떠나간다.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촌놈의 근성이 종시 가시지 않아 자동차를 타면 뭐가 어떻게 잘못되는것만 같아서 마음이 도무지 안 놓여 “에라 모르겠다” 자전거만 타고 다니는 사나이. 아침저녁 궁둥이에 못이 박히도록 자전거만 타고 다니는 사나이. 출퇴근하는 직공들의 대렬에 끼여들어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 사나이. 그래야 마음이 놓이는 사나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나이. 촌티 흐르는 무지렁이 전사한(田舍汉). 이런 괴짜 같은 사나이가 떠나간다.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일부 색다른 지도일군들이 펴는 류론(谬论)에 맞서서 날카롭게 강하게 항변을 한 사나이. “우리 연변은 민족자치를 시행하는만큼 간부를 선발배치함에 있어서 민족간부의 비률을 조금이라도 낮춰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맞바람에 갈기털을 날리며 포효(咆哮)하는 수사자. 그 수사자의 기백을 지닌 사나이, 그러면서도 언제나 겸손하고 또 살가운 사나이. 못나보이기까지 하는 사나이. 이런 사나이가 우리 연변을 떠나간다.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우리 지식인들의 대오는 지난날 정치의 된서리, “계급투쟁”의 우박을 번번이 맞고 또 맞아 한때는 아예 쑥대밭이 돼버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라창진, 리정문콤비(二人组). 리정문, 김성계콤비, 리정문, 장룡준콤비가 문교서기와 선전부장을 각각 맡아보는 10년 동안—우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날벼락걱정을 안하고 살았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태평성대라는걸 누려본 셈이다. 더 말할것도 없이 이것은 리정문이가 주로 우리의 보호산(保护伞)노릇을 해줬기때문이다. 정문이—흔연히 떠나주오. “나는 10년 동안에 우리 지식인들을 하나도 다치지 못하게 막아줬다”는 긍지를 안고, 자부심을 안고. 우린 언제까지도 그대를 잊지 않을거요. 그리고 두고두고 그대의 덕을 기릴거요. 고맙소 정문이. 수고가 너무너무 많았소 정문이. 승상접하(承上接下)의 틈바구니에서 안팎곱사등이노릇을 하느라고 정말 수고가 너무너무 많았소 정문이. 지난날, 착한 정치를 한 원이 떠나갈 때는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그 고을 백성들이 비단으로 만든 만인산(万人伞)을 기념으로 드렸었다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대에게 만인산이 아닌 우리 모두의 석별의 정을 모아보내오. 정성으로 모아보내는 이 석별의 정을 바라건대 길이길이 소중히 간직해주오. 그리고 우리를 잊지 마오. 우리 연변을 잊지 마오. 한 사나이가 떠나간다.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우리의 미더운 보호산이 우리 이 민족의 터전을 떠나간다. 나는 어제, 연변에 온지 40년 하고 또 넉달만에 처음으로 송별회라는 명칭의 모꼬지에 참석을 해봤다. 그러니까 내딴에는 떠나는 보호산에게 대단히 륭숭한 례우를 한 셈이다. 78세의 로구(老躯)로서 40년 하고 또 넉달이라는 세계기록을 안고 들어갔으니까. “청상횡북곽(青山横北郭)”으로 시작돼가지고 “소소반마명(萧萧班马鸣)”으로 마무리는 리백(李白)의 “송우인(送友人)”이 바로 이를 두고 읊은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서정적이면서도 또 랑만적인 석별의 모꼬지. 그 모꼬지에서 나는 떠나가는 우리의 “터우터울(头头儿)”에게 처연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짐짓 우스개소리로 엉너리를 쳐야 했다. 그리고 끝으로 덧붙여서 이런 부탁을 할것도 잊지 않았다. “떠나가는 새는 뒤의 물을 흐리지 않는다는 속담을 기억해달라.” 그리고 또 “떠나가는 ‘터우터울’의 마음은 지내봐서 다들 잘 알고있지만 새로 오는 ‘터우터울’은 그렇지가 못하니 일말의 불안감이 없을수 없다. 그러니 그이에게 당부를 해달라. 우리 작가협회를 다룰 때는 고슴도치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지 말고 어린 양가죽 장갑을 끼라고 당부를 해달라.” 할 때는 잘한다고 했는데 하고나서 생각해보니 다 쓸데없는 군소리였다. —리정문이 어떤 사람인데? 어련히 다 알아서 처리할라구! 우리 연변에서 한 사나이가 떠나간다.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청렴의 대명사가 떠나간다. 우리의 보호산이 떠나간다. 아직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어도 생각할수록 가슴이 뿌듯해지는 민족의 터전을 그는 오늘 마지못해 떠나간다. 정문이, 잘 가오. 우리를 잊지 마오. 우리도 안 잊을테니. 자 그럼 정문이, 잘 가오.
47    고혈압병 댓글:  조회:329  추천:0  2016-04-19
고혈압병      나는 혈압이 언제나 정상이므로 혈압때문에 고생을 해본적은 없다. 그 대신에 고혈압병으로 죽은 사람은 수태 보았다. “문화대혁명”기간 징역살이를 하면서 같은 중대(中队)의 늙은 죄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싶이 하며 죽어나가는것을 목도했는데 그 대부분이—열에 아홉은—다 고혈압병으로 죽었었다. 우리 중대의 죄수의사는 녀자문제로 5년형을 받고 들어온 사람이였는데 그는 늙은 죄수들이 자꾸 죽으니까 한달에 두번씩 정기적으로 꼭꼭 죄수들의 혈압을 재봤었다. 혈압의 정상치는 년령에다 90을 더하는거란 말도 나는 그때 처음 그에게서 들었다. 그러니까 75살 먹은 죄수의 정상치는 165이고 또 80살을 먹은 죄수의 정상치는 170이 되는것이다. 그는 혈압을 잴적마다 “아 정상, 정상… 문제없어, 문제없어.” 이런 말로 늙은 죄수들을 안심시켰다. 죄수의사   하건만 고혈압병으로 죽는 죄수는 여전히 꼬리를 물었다. 한번은 나하고 오전 내내 같이 일을 하고 또 멀쩡히 한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은 늙은 죄수가 다 먹고난 밥그릇을 챙겨서 선반에 얹다가 픽 쓰러지더니 그만 당일밤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또 한번은 기상시간에 죽 늘어앉혀놓고 점호(点呼)를 하는데 제 차례가 됐는데도 17번 늙은 죄수가 기척이 없어서 웬 일인가 살펴보니 그는 병적으로 비뚤어진 입귀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있었다. 곧 들것에 담아 위생소(감옥병원)로 가져갔으나 그 역시 당일밤으로 죽어버렸다. 형편이 이쯤 되다보니 늙은 죄수들사이에 공황이 일어나지 않을수가 없었다. 어느날 74살 먹은 죄수가, 이도 역시 밥그릇을 선반에 얹으려는데 팔꿈치가 갑자기 뻣뻣해지며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동료죄수가 똑같은 동작을 하다가 쓰러져 죽는것을 봤던터이라 그는 겁이 더럭 났다. 그러자 “아이고 끝장이다” 소리가 그 입에서 절로 튀여나왔다. 동료들이 놀라서 쳐다보니 그 죄수는 죄수복의 소매가 못에 걸려 팔이 뻗어지지 않는것을 중풍으로 지레짐작을 한것이였다. 그때부터 감옥안에서는 “아이고 끝장이다(我完啦)”가 류행어로 됐다. 또 한 죄수는 죽는다고 새옷까지 갈아입고 누웠다가 죽지 않고 살아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일이지만 죽기전에 꼭 새옷을 갈아입는것이 한족들의 관습인 모양이였다. 그런데 년령에다 90을 더한것이 정상치라고 굳게 믿으며 혈압을 잴적 “아 정상, 정상… 문제없어, 문제없어.” 하고 우리를 안심시키던 그 죄수의사가 하루는 “어째 골이 좀 아프다”며 자리에 눕더니 놀랍게도 그는 불과 몇시간후에 덜컥 죽어버렸다. 54살 한창나이에 옥사를 한것이다. 나중에 위생소 행정(行政)의사에게 물어봤더니 그도 역시 고혈압병으로 죽었다는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혈압을 재면서도 역시 “년령 더하기 90”이라는 공식을 만고불변의 철칙으로 믿고 “아 정상, 정상… 문제없어, 문제없어.” 했던 모양이다. 행정의사란 감옥에서 근무하는 국가공무원으로서의 의사. 그리고 죄수의사는 중대의사라고도 하는데 복역중 각 중대에 배속돼있는 의사, 그러니까 그들의 행정의사의 보조역인 셈. 어느 사교(邪教)에 아주 빠져버린 어머니가 딸의 병을 떼주겠다고 교리에 따라 사정없이 두드리다가 결국은 그 딸을 때려죽이고말았는데 경찰에서 잡아다 문초를 해보니 그 어머니는 딸의 몸에 범접한 악귀를 몰아낸다는게 그 모양이 됐다는것이였다. “년령 더하기 90”이라는 공식도 그렇고 “악귀가 범접”했다는 교리도 그렇고… 변통성없이 무어나 지나치게 믿는것은 좀 고려해볼 필요가 있는것 같다. 일본감옥   제2차대전말기 나는 일본감옥에서 4년 동안 징역을 살았는데 1945년 5월, 히틀러독일이 패망하자 곧 국민학교 교사로 있는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띄웠었다. 한달에 한통씩 봉함엽서에다 간단히 써야 하는 편지나마 일일이 깐깐한 검열을 거쳐야 했던 까닭에 나는 그저 간단히 함축성 있게 몇줄 적었다. “내가 머잖아 귀가해 어머니를 맡을테니 그때까지만 시집가지 말고 어머니를 모셔주기 바란다.”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홀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외아들의 지극한 효심(孝心)이 담긴 글이라 검열의 통과는 별문제 없으리라 넘겨짚고 한노릇인데 아니나다르랴 편지는 무난히 발송이 됐었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리, 그 편지가 전연 예상 못한 반향을 불러일으킬줄을. 누이동생은 학교에서 그 편지를 받아보고 너무도 기가 막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와 “오빠가 미쳤다”면서 모녀 서로 목을 그러안고 통곡을 했던것이다. 감옥안에서 다리까지 한짝 잘리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오빠가 아무래도 정신이상에 걸렸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백주에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할리가 있나. 오빠가 어떻게 “머잖아 귀가”를 한다고 그래? 감옥서 놔줄리가 만무하잖은가! 그리고 반년이 채 못돼 그 정신이상에 걸린줄 알았던 오빠가 누이동생앞에 나타났다. 우리 누이동생은 대일본제국의 노예교육을 착실히 받았던 까닭에 “무적황군(无敌皇军)”이 패전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그러게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을 한다는것은 그야말로 천변지이나 마찬가지의 이변(异变)이였다. 그저께 어느 잡지에 실린 무슨 김학철이라는 글을 읽어보니까 다음 같은 내용의 구절이 있었다. “김학철을 ‘반당’, ‘반동’이라고 당기관지가 점을 찍었으니 우리쯤이야 그렇게 믿었을 밖에. 그러므로 어린 내 가슴에 박힌 첫인상은 반동분자로서의 김학철의 추한 형상이였다.” 어린 학생이 당기관지의 론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고혈압을 “정상”이라고 굳게 믿은 나머지 남을 해치고 또 자신까지 해친 추리구감옥의 그 죄수의사, 딸의 몸에 범접한 악귀를 떼주겠다고 사랑하는 딸자식을 제 손으로 때려죽인 어머니, 일본이 곧 망할것을 내다보고 “머잖아 귀가”한다고 옥중에서 편지를 띄운 오빠를 정신이상에 걸렸다고 통곡한 우리 누이동생, 멀쩡한 사람을 “반당”, “반동”으로 알았던 어린 학생. 이런것들은 다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잖을가 생각한다. 투철한 리론이나 정세파악이 없이 그저 동무 따라 강남가는 격으로 행동을 하거나 또 남이 치는 장단에 궁둥이춤이나 추는 식으로 처사를 하다가는 결국 랑패를 아니 볼래야 아니 볼수가 없을것이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갖는다는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한 대목이 아닐가싶다.
46    명언 가지가지 댓글:  조회:300  추천:0  2016-04-19
명언 가지가지       “명언(名言)”이란 본래 사리에 들어맞는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또 그저 유명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개나발 같은것도 유명하기만 하면 명언이 된다는 이야기인것이다. 개나발이란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는 엉터리없는 허튼소리.     샹송의 녀왕   프랑스의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는 48살에 세상을 뜰 때까지 샹송의 녀왕으로 군림했었다. “샹송”이란 서민적인 가벼운 내용을 지닌 프랑스의 민요. 헌데 이 에디트 피아프가 생시에 공공연히 내뱉은 말 한마디가 대단히 놀랍다. “침대에서 시험해보지 않고는 남자를 정확히 알수 없다. 침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녀자는 의사가 일일이 건강검진을 하듯이 뭇사내를 침대에 끌어들여 시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몇백명이 되겠는지 몇천명이 되겠는지 아무튼. —하긴 그렇게 하면 틀림이야 없겠지. 참으로 솔직한 천하의 잡년이다. 그녀가 이쯤 돼버린것은 제1차세계대전중에 사창가(私娼街)에서 태여났다는 그 신상(身上)과 갈라놓을수 없는 인간관계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매음녀인 생모(生母)에게서 보고 배운게 그밖에 또 뭐가 있었을것인가. 그녀가 내뱉은게 비록 너절한 수작이긴 하지만서도 역시 명언의 범주에 드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을것 같다.     서울역   서울역은 나하고도 인연이 옅지 않은 정거장이다. 1925년에 문을 연 서울역을 내가 처음 드나들어본것은 1927년. 그리고 상해로 떠나올 때도 바로 그 서울역에서 차에 올랐었다. 그리고 해방후에도 서울역을 나는 여러번 드나들었고 또 40여년후에 서울나들이를 가서도 역시 그 서울역을 드나들었다. 해방후 초대서울역장을 지낸이는 리종림씨(후일의 교통부 장관). 이 리역장이 일제때 려객전무(렬차장)로 근무하다가 당한 수모가 일화로 남아있다. 1등독실(独室)을 검표하던중 한 일본인승객이 침대에 누운채 차표를 발가락에 끼워서 내미는것이였다. 식민주의자의 오만. 쪽발이왜놈만이 저지를수 있는 짐승 같은 행실이다. 리씨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태연스레 보조원에게 말을 일렀다. “거 있잖아. 소독저가락. 응. 얼른 가 한매 가져와요.” 리씨는 그 저가락으로 차표를 받아서 검표한 뒤 자신도 수고스레 구두와 양말을 벗고 차표를 발가락사이에 끼워서 다시 돌려주었다. 오는 방망이, 가는 홍두깨인것이다. 떡으로 치면 떡으로 치고 돌로 치면 돌로 치는것이다. 력대 서울역장중에는 불명예스럽게 퇴임을 한 사람도 더러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아직까지 일화로 남아있다. 대합실 한쪽 구석쟁이에 그림 한폭을 걸어놓았는데 려객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는 이 그림이 실은 꽤나 값이 나가는 그림이였다. 문제의 역장분이 생각하기를 —가게기둥에 립춘이지! 얼마 지나서 또 생각하기를 —돼지우리에 주석자물쇠지! 마침내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 —청맹과니들이 보고도 모르는 그림을 괜히 걸어놓을것 없지. 결론에 도달하는 즉시 그는 역원들을 시켜 그림을 바꿔걸었다. “빛 좋은 개살구”로 대체를 한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하나 미술적가치는 하잘것없는 그림을 대신 갖다 걸게 한것이다. 한데 여기까지는 괜찮았으나 그다음 처사가 문제였다. 이분이 그 떼여낸 그림을 슬그머니 착복(着服)을 해버린것이다. 일이 안될 때라 마침 아침저녁으로 통근렬차(通勤列车)를 리용하는 승객 한분이 미술애호가로서 구석쟁이에 걸린 “주석자물쇠”를 특히 사랑해 날마다 일과처럼 감상을 해왔었다. 그러던 “주석자물쇠”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빛 좋은 개살구”로 바뀌여버리니 이분은 인(瘾)이 발동을 해 견딜수가 없게 됐다. 오매불망 못 잊는 그림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무리도 아니였다. 그래서 발벗고 나서서 추적(追迹)을 한 결과 역장님이 착복을 했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들춰내기에 이르렀다. 이분이 역장을 괘씸스레 여기는 마음이 골똘한김에 이 사실을 해당 기관에 투서를 했더니 그것이 또 어떡하다 대통령 박정희의 귀에까지 입문이 됐다. 화가 난 박정희가 손에 잡히는 종이에다 아무렇게나 한쪼각을 쭉 찢어가지고 몇 글자 끄적거리더니 곧 비서관을 불렀다. “이 쪽지 그 역장녀석 갖다줘.” 청와대(青瓦台)와 비서관이 직접 갖다 전하는 글쪽지를 받아보고 그 역장이 당장에 까무러치지 않은것만도 천만다행이였다. “제자리에 갖다놔. 박정희.” 그 쪽지에는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몇 글자가 적혀있었던것이다. 역장이 당일로 그림을 제자리에 갖다 걸고 그리고 사표를 제출한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독재자 박정희의 이 “제자리에 갖다놔.”도 명언에 속한다면 좀 무리일가? 아무튼 데설궂은 박정희의 성격이 확 끼치는듯한 말투임에는 틀림이 없다. 소설에서 인물의 성격을 돋을새김하려면 이런 말투를 잘 포착해야 할것 같은데—잘은 모르겠다. 묘비명   우리의 지구촌에는 갖가지 묘비명들이 널려있다. 각기 다른 문자로 또 각기 다른 묘지에.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도 그중의 하나다. “자기보다 현명한 인물을 주변에 모으는 방법을 터득한 사나이, 여기에 잠들다.” 강철의 왕으로 천백만 사람들의 존숭(尊崇)을 받아온 사나이에게 걸맞은 묘비명이라 하겠다. 카네기가 얼마나 우수한 “팅크 탱트(智蘘团)”를 수하에 두고 또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력량을 발휘하게시리 했는지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바이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현명해보이는 인물은 싹 다 벌초(伐草)하듯 깎아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현명한 인물”들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다. 류소기, 팽덕회들도 현명해보이지만 않았던들 무사히 살아남아 선종(善终)을 했을것이다. 천수(天寿)를 누렸을거란 말이다. 한고조(汉高朝) 류방(刘邦)이 국방대신 겸 총사령관인 한신(韩信)에게 물었다. “경(卿)이 보기엔 짐(朕)이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수 있을것 같은가?” “페하께선 10만쯤 거느릴수 있으실겝니다.” “더는 안될가?” “더는 좀 어려우실겁니다.” “그렇다면 경은 얼마나 거느릴수 있을것 같은가?” “신(臣)이야 다다익선(多多益善)입지요.” 그러니까 100만도 좋고 200만도 좋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이야기인것이다. “그렇다면 경은 어찌해 짐의 신하가 됐는고?” “신은 군사(军士)를 거느릴줄 알지만 페하께서는 장수(将帅)를 거느릴줄 아시기때문입지요.” 류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한(汉)나라를 세운것은 전적으로 그가 자기보다 현명한 장수들을 주변에 모으는 방법을 터득했었기때문일것이다. 그러나 일단 성공을 한 뒤에는 문제가 좀 달라졌다. 류방은 카네기와 달리 자기보다 현명한 장수들을 꺼리기 시작한것이다. 그래서 대업(大业)을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놀았던 두 사람중의 한 사람인 장량(张良)은 눈치빠르게 피신을 해버렸고 그리고 벼슬자리에 미련을 가졌던 한신은 결국 죽음을 당하고마는것이다. “신이야 다다익선입지요.” 한신이 무심코 한 이 솔직한 말 한마디에 가슴이 뜨끔해난 류방이 드디여 마음을 굳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고, 이런 녀석을 그대로 놔뒀다간 큰일나겠다.) 묘비명은 꼭 죽은 사람의 묘비에만 새겨지는 글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조소하는 방법으로, 존재하지 않는 묘비에 시의 형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문학형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문학형식인것이다.   그대는 린색하셨기에 돌아가셨죠. 그대는 돈이 아까와 병을 고치질 못했죠. 하지만 그대 만일 관차(棺车)값이 얼마인지를 아셨더라면 그대는 자기 시체를 져나르고저 되살아나셨을것이외다.   “파리가 좁쌀 물고 가면 20리를 쫓아갈 놈”이라는 우리 속담에 비해 어떤지 모르겠다. “련주창 앓는 놈의 갓끈을 핥겠다”는 우리 속담에 비해 어떤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묘지명이 자신에게도 씌여지지 않게시리 다들 조심을 해야겠다. 린색한데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비도덕적소행은 다 이런 묘비 없는 묘지명의 대상으로 되니까 말이다.     유고와 마띠   빅또르 유고(1802—1885)는《레 미제라블》의 작자로서만 유명한게 아니라 정치활동가로서도 명망이 극히 높았다. 나뽈레옹3세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는 단호히 공화당이 조직한 의거에 가담해 이를 반대하다가 실패, 장장 19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몇해후 나뽈레옹3세가 대사(大赦)를 베풀어 그의 귀국을 촉구했을 때 그는 단호히 이를 물리쳤다. 그리고 나뽈레옹3세의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귀국을 하는데 수도 빠리의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개선하는 장군을 맞이하듯 맞이했던것이다. 귀국을 하는 즉시 유고는 또 프로시아침략군을 반대하는 전쟁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정부가 실패한 빠리꼼뮨의 사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때 그는 또 한번 일떠나 빠리꼼뮨의 정당성을 변호해주는 한편 쫓기는 꼼뮨의 사원들을 자기 집에 몰래 숨겨주었다. “가장 똑똑한 처신술은 아무 일에도 상관을 않는것이다. 가만히 있는게 가장 안전하다. 죽은체하는 놈은 아무도 건드리지를 않는 법이다. 이게 바로 벌레들의 격언인것이다.” 유고의 이 말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명언으로 된것은 그의 작가로서의 활동과 정치활동가로서의 실천이 이를 안받침해주었기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돌격을 할 때 중대장이 자신은 엄체(掩体)속에 그대로 남아있으면서 전사들더러만 돌격을 하라고 “돌격! 돌격!” 웨치며 지휘도를 내둘러봤자 아무 소용이 없듯이 행동과 실천으로 안받침되지 않은 이른바 명언은 진짜명언으로 될수가 없다. 호세 마띠(1853—1895)도 꾸바의 독립을 위해 감옥살이와 귀양살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전사를 했다. 그러므로 마띠가 한 말은 명언으로 남아서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에 벅찬 감격을 안겨주고 또 전투적인 격정을 불러일으키는것이다. “기본적인권은 눈물로써가 아니라 피로써 얻어진다.” 전인(前人)이 남긴 명언들은 인류의 지혜의 결정으로서 말하자면 언어의 금강석인것이다. 우리가 그 명언들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도움으로 되지 않을가.
45    '벤츠'는 달린다 댓글:  조회:216  추천:1  2016-04-19
“벤츠”는 달린다        대하소설《태백산맥》으로 인기의 절정에 오른 소설가 조정래씨가 연변을 왔을 때 우리 문단의 중견작가들과 대면을 시키면서 나는 얼렁뚱땅 한마디를 했었다. “우리 단체에서 마침 벤츠를 구입하려구 묵은 차를 처분해놔서… 귀한 손님을 우리 차루 모시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음번에 오실 때는 꼭 우리 벤츠루 모실테니 이 점 널리 량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작가협회에는 원래 쑬쑬한 찌프차 한대가 있었다. 그걸 어느 알량한 량반이 자신의 너절한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다가 협잡에 걸리는통에 게도 구럭도 다 놓쳐버렸다. 그런 까닭에 우리 협회에는 애당초에 네바퀴 달린게라곤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조정래씨 같은이들은 다 자가용을 굴리고있는데 우리는 단체 명색이라는게 차 한대도 없다면 사회주의의 낯이 깎일판이라 궁여지책으로 나는 그렇게 어벌쩡했던것이다. 그런데 내 거짓말을 곧이들은 조씨는 대번에 눈이 휘둥그래지는것이였다. “아니 그렇게 비싼 차를 구입해선 어떡하실라구요?” “돼지우리에 주석자물쇠가 웬 말이냐.”는 뜻이 내포된 물음이였다. 이로써도 알수 있는바 서부독일(현재는 통일독일의 서쪽부분)에서 생산하는 벤츠승용차는 그 성능이 좋기로 소문이 나고도 값이 비싸기로도 소문이 난 세계적인 명품(名品)이다.     벤츠바람   《인민일보》의 한 기자가 하북성 어느 궁핍한 현에를 갔더니 현장이란 량반이 벤츠를 타고 다니는데 포장도로가 하나도 없는 곳이라서 벤츠는 흙먼지와 흙탕물을 뒤집어써서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는것이다. 괴이스레 여긴 그 기자가 뒤조사를 해본즉 그 벤츠를 구입하느라고 현의 교육비를 류용한 까닭에 현내에는 창문에 유리가 없는 학교에, 지붕서 비가 새는 학교에, 벽이 무너져내린 학교에, 책상, 걸상이 모자라거나 아예 없는 학교에, 교사들이 석달씩, 넉달씩 봉급을 타지 못한 학교에… 한마디로 교육사업이 엉망진창이더라는것이다. …그놈의 현장, 벤츠가 좋다는 소리는 그래도 어디서 주어들었던 모양이다. 니까라과의 독재자 소모사가 산디노민족해방전선에서 쫓겨나니까 목숨을 부지해보겠다고 빠라과이로 망명을 했다. 1979년의 일이다. 망명을 해서도 떵떵거리며 호화판으로 잘사는데 하루는 젖빛의 벤츠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가 큰 거리에서 마주 오는 한대의 트럭과 맞닥뜨렸다. 한데 이쪽에서 미처 길을 비킬 사이도 없이 저쪽 트럭우에서는 대바람에 기관포를 내갈기는것이였다. 그 바람에 소모사는 젖빛의 벤츠와 더불어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말았다. 범인들은 물론 잡히지 않았다. 누구의 소행인지 억측만 무성할뿐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말았다. 하북성의 그 어느 현장과는 달리 박살이 날 때는 나더라도 소모사쯤은 그래도 벤츠를 탈 자격이나 있었지. 40여년의 독재통치로 긁어모은 재산이 수억만이였을테니까. 지지난달 평양에서 국제의원련맹(LPU)회의가 열렸을 때 한국의원들을 맞으러 군사분계선까지 나왔던 차도 역시 벤츠였다. 서울서 벤츠를 굴리는 집만 골라다니며 강도질을 한 강도단을 일망타진했단다. 두어달전의 일이다. “벤츠 굴리는 집만 노린건 무슨 까닭인가?” 경찰이 이와 같이 신문하니 그놈들은 넉살 좋게 대답하기를 “벤츠를 굴린다는건 벌써 우려낼 건데기가 탁탁하다는걸 의미하잖습니까. 국산차따위나 굴리는 집은 털어봤자 뭐 먹을알이 별루 없거든요.” 하더라는것이다. 그러니까 기왕 시작을 한바에는 직방 노다지굴을 캐자는 수작이다. 이것은 벤츠에 딸려다니는 반갑잖은 부작용이다. 누구도 원치 않는 부작용이다. 벤츠란 대개 이만큼 알려진 명품으로서 말하자면 일종 선망의 대상인것이다. 일본의 세계적인 자동차회사 “도요다”는 그 넓은 공장안에 사람의 그림자란 가물에 콩나듯—75퍼센트가 로보트란다. 이에 반해 벤츠회사는 75퍼센트가 사람—로보트는 25퍼센트에 불과하다는것이다. 그 까닭인즉 벤츠의 기술진이 력대로 지켜오는 모토(표어, 신조, 좌우명)때문. “기계가 아무리 정교하대도 사람의 손은 못 따라온다.” 이런 정신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해 벤츠공장에서는 흐름식의 생산체계의 12곳에다 검사원 2명씩 각각 배치해놓고 면밀한 검사를 하는데 그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서명을 안하면 그 제품은 무조건 시발점으로 되돌려진다. 그러니까 24명의 검사원이 모두 서명을 해야만 비로소 합격증이 붙게 되는것이다. 이 정도로 철저하니까 완성된 제품의 질은 쩍말없지만서도 원가(생산비)가 워낙 높아지니까 그 판매가격은 껑청 비싸질 밖에 없다. 상품이란 품질이 뛰여나면서도 값이 싸야만 불티나게 팔리는 법이다. 하지만 벤츠는 그런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나 값이 굉장히 비싸면서도 너무 잘 팔리는 까닭에 언제나 주문이 밀리는 형편이다. 그러니까 “공불응구(供不应求)”인것이다.     독일인의 긍지   서독정부는 나라의 주요산품인 벤츠를 보호하고 또 전세계에 자랑을 하기 위해 자국내의 모든 고속도로에 속도제한을 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나 다 고속도로의 시속은 100킬로 내지 110킬로 정도로 제한을 하고있다. 그러나 시속 220킬로를 식은 죽 먹기로 거뜬히 달리는 벤츠의 성능을 과시하기 위해 정부는 속도제한을 아예 없애버린것이다. “번개같이 달리는 우리 벤츠를 피하느라구 도요다차따위들이 질겁하며 한옆으루 비켜서는 꼴을 보면 우리는 마음이 아주 통쾌하지요.” 이런 긍지를 독일사람들은 갖고있는것이다. 가만있자, 벤츠회사에서 무슨 커미션(口钱)을 받아챙긴것도 아닌데 내가 이거 선전, 광고를 너무 많이 해준것 같다. 이제 그만 언귀정전(言归正传)을 해야 하겠다. 이렇게 성능이 뛰여나고 빼여난 벤츠차라 할지라도 운전자를 잘 만나야지 그렇지가 못하면 탈이다. 미숙한 운전사나 란폭한 운전사를 만나면 역시 무슨 고장도 날게고 또 무슨 사고도 저지를게니까 말이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 또 차가 부서지고 타버리고 할수도 있단 말이다. 이것은 우리 문학령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적사실주의가 아무리 옳은 창작방법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다루는 솜씨가 미숙하거나 란폭하면 역시 탈은 나기 마련이다. 례컨대 우상숭배를 고취하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거나 또는 환상을 현실이라고 내리먹이는데 앞장을 서라고 부추긴다거나 하는따위의 행위는 다 사회주의적사실주의와 량립(两立)할수 없는것이다. 그동안 사회주의적사실주의가 일부 작가들에게 외면을 당한것은 상술한 “인도”나 “부추김” 따위로 오염이 돼 그 맑은 본래의 면목이 가려졌었기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여난 창작방법인 사회주의적사실주의의 순결성을 되찾기 위해 우리 다같이 분발하자. 그리고 벤츠가 도요다차따위를 아이 다루듯하며 고속도로를 쾌적하게 질주하듯이 우리의 사회주의적사실주의가 가지각색 잡사상들에 구애됨이 없이 제 갈길을 꼿꼿이 달려야 하겠다. 전광석화적인 쾌속으로 꼿꼿이 달려야 하겠다.
44    참매미 댓글:  조회:165  추천:0  2016-04-19
참매미        더운 여름날 숲가의 길을 가다가 참매미 우는 소리에 홀리여 길가기를 아예 그만두고 나무그늘에 주저앉아 빨려들어가듯이 귀를 기울였던 일이 생각난다. 가을밤, 기러기 우는 소리의 적막함에도 그러했고 또 봄바람이 볼을 간지르는 밤, 철머구리 우는 소리의 번화함에도 역시 그러했듯이—나는 젊은 시절 자연의 소리에 몹시 민감했었다. 걸핏하면 느끼기 쉽고 슬퍼하기 쉬운 마음의 상태에 빠져들기가 일쑤였다. 시체말로 한다면 센티멘탈리스트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참매미가 그렇게 청청하게 시원스레 잘 우는것은 제비가 지저귀고 까치가 깍깍거리듯 또 애기들이 심심하면 응애응애 울듯이 그저 본능적으로 수월스레 그렇게 잘 우는줄만 알고있었다. 그랬는데 후에 어느 책—파브르의《곤충기(昆虫记)》(?)를 읽어보고서야 비로소 그게 그렇게 수월스러운게 아님을 깨닫고 새삼스레 놀랐다. 참매미가 일생동안에 그렇게 청청하게 울수 있는것은 죽기전 15일 내지 20일뿐. 그렇게 울기 위해 그는 굼벵이(새끼벌레)형태로 어두운 땅속에서 6년 내지 7년을 지내야 한다는것이다. 이 얼마나 멋없는 울음이며 또 비창한 울음이냐!     불우한 시인   나는 우리 시인 송정환의 시를 읽을 때마다 웬지 모르게 그 참매미의 울음소리를 떠올리군 한다. 무슨 까닭인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이 몸도 갈 때가 되면 꽃처럼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 몸도 살아서 숨쉬는 푸른 잎사귀 죽어서 눈감으면 붉은 잎사귀 이 몸도 마지막 순간까지 저처럼 뜨겁게 타끓고싶습니다!   혹시 이처럼 창자 굽이굽이에 맺히고 서렸다가 터져나오듯 애절한 그의 시의 구절구절이 내 이 가슴을 울려서인가? 송정환과 나는 서로 사귄지 10여년 동안에 마주앉아보기는 전후 꼭 4번을 마주앉아봤을뿐이다. 맨처음 만난것은 작가협회 대회장에서였고 또 그 다음번은 우리가 아직 삼꽃거리에 살고있을 때인데 그는 집을 몰라서 소설가 최홍일을 앞장세우고 찾아왔었다. 세번째는 출판사친구들과 가졌던 연회석상에서였는데 그때 비로소 나는 그가 조룡남, 김응준 두 시인과 중학교 동기생으로서 다같이 김해진선생의 제자였다는것을 알았다. 그리고 네번째 만난것은 현재 살고있는 버들숲거리집에서였다. 역시 집을 몰랐던 까닭에 그는 같은 시인이자《천지》의 주필인 리상각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왔었다. 이와 같이 마주앉을 기회가 적었던 반면에 송정환과 나 사이에는 무수한 편지가 오갔었다. 서간집 한권을 넉넉히 엮을만한 분량의 긴 편지와 짧은 편지들이 오간것이다.     마지막 편지   내가 오늘 현재로 마지막 받은 그의 편지는 그가 작년 11월 12일에 부친것을 금년 8월 11일—하루가 모자라는 아홉달만에 받은것이다. 주소를 한 글자 잘못 적었다고 찜부럭이 난 그 편지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흉내를 내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천신만고로 받을 사람을 찾아왔던것이다. 그보다 앞서 나는 한 외국신문에 실린 어느 유명한 전문의의 “당뇨병도 잘만 치료하면 장수를 누릴수 있다.”는 문장을 가위로 오려내 부쳐주면서 “아주 희소식”이라고 그에게 격려의 편지를 썼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 늑장부리편지를 받자 (오 답장이 왔구나.) 지레짐작하고 부지런히 뜯어보고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였다. 그 편지의 사연인즉 일본을 거쳐 서울을 다녀왔다는 상세한 경과보고였다. 그가 일본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했다가 병약과 과로로 졸도를 했었다는 소식을 나는 그전에 벌써 그와 동참했던 문학평론가 최삼룡을 통해 알고있는터였다. 그리고 월간지《전망》 10월호와 11월호에 각각 실린 그의 2편의 글도 다 읽고있는터였다. 그가 떠나기전에 나는《전망》 편집장 리우성씨에게 미리 “우리의 저명한 시인 겸 력사학자 송정환”이라고 소개장을 써보냈었다. 비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산소를 성묘했다는 사연. 정신박약아인 아들때문에 속썩인다는 사연. 누이동생이 리혼을 하고 돌아와 근심거리 하나가 더 늘었다는 사연… 이런 불행한 사연들로 가득찬 그의 편지들을 받을적마다 나는 “하느님이 아무래도 눈이 멀었나보다.”고 분개를 하고 또 탄식을 했다. 그리고 만강의 동정과 충정이 어린 격려를 보내군 했다. 이틀이면 받아보는 편지를 통해서. 그 송정환이 지금 료양원에 입원을 하고있는데 념려스러울 정도로 쇠약한 상황이란다.—원쑤의 당뇨병! 우리의 송정환은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력사학자다. 그리고 풀피리같이 소박한 서정시인이면서도 또 뼈대가 있는 민족시인이다. 그는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타고난 그대로의 맨 심장으로 이 세상을 살고있는 사람이다. 그의 고된 삶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나는 웬지 모르게 참매미가 떠올려지군 한다. 무슨 까닭인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43    꽁지 빠진 수꿩 댓글:  조회:242  추천:0  2016-04-19
꽁지 빠진 수꿩       닭의 시조는 꿩이라도 하고 또 꿩과에 속하는 야계(메닭)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야생종을 잡아다 사람이 길을 들여 집에서 기르는 새임에는 틀림이 없다. 수탉의 꽁지는 오랜 세월동안의 퇴화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와서는 본래의 비행기관이 아니고 그저 암탉을 호리는데나 써먹는 장신구정도로 돼버렸다. 그러니까 선조들이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시절에 방향타(方向舵)로 써먹던 그 구실은 이젠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꿩의 꽁지는 지금도 여전히 날아다닐 때 방향타의 구실을 할뿐아니라 수꿩(장꿩)의 꽁지는 멋쟁이의 상징으로서 암꿩(까투리)을 호리는데 없어서는 아니될 분장도구이기도 하다. 수탉은 꽁지가 빠지면 볼품이 사나와 암탉을 호리는데 불편을 느끼는게 고작이겠지만 수꿩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수꿩은 꽁지가 빠지면 방향타가 떨어져나간 비행기꼴이 돼버리므로 당장 날지를 못할테니까 그야말로 사활에 관한 문제다. 암꿩을 호리는따위는 차요적인 문제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꽁지 빠진 새”라든가 “꽁지 빠진 수탉” 따위로 하지 않고 구태여 “수꿩”으로 한것은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어서이다. 아니다. 실은 뭐 큰 의도도 없다. 그저 괜히 독자들의 눈길을 끌어보자는 속셈에서 한것뿐이다. 까놓고 말하면 그렇다. 지난해 12월 6일에 나는 한편의 칼럼(잡문이라고 함)을《연변일보》에 보냈었다. 그런데 달이 바뀌고 또 해가 바뀌여 금년 1월 10일이 됐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기에 나는 늘 하던대로 또 지레짐작을 했다. 아하, 시(市)당국을 자극할가봐 싣기를 꺼리는 모양이구나. 그래 나는 말썽이 비교적 적은 외지간행물에다 보내기로 했다. 1월 11일에 문제의 원고를 나는 등기우편으로《장백산》에다 부쳤다. 그리고 또 40일이 지난 2월 20일에 나는 뜻밖에도 그 글이《연변일보》에 실린것을 보게 되였다. 나는 즉시《장백산》편집부 남영전주필앞으로 편지를 띄웠다. 사정이 이쯤 됐으니 앞서 보낸 “미학의 빈곤”은 파기처분을 해달라는 사연이 담긴 그 편지는 21일에 발송됐다. 한편《연변일보》에 실린 그 글을 한번 읽어본즉 맨 마지막 한구절이 몽탕 잘려나갔었다. 그 잘려나간 구절을 고대로 복원하면 아래와 같다.   하느님이여, 미학의 빈곤으로 고생하는 우리의 시당국을 관서하시고 보다 많은 복을 내려주소서. 그들의 소원대로 돈벼락을 콱 안겨주소서. 글의 꽁지에 해당하는 부분이 쑥 빠져버리니 볼품이 과히 좋지를 않았다. 꽁지 빠진 수꿩꼴이 돼버린 느낌이였다. 잔글씨로 몇줄 적어넣은것이다. 나는 그 발표된 “미학의 빈곤”을 복사해가지고 외국잡지사에다 부치는데 그 “빠져버린 꽁지”를 도로 갖다붙였다. 잔글씨로 몇줄 적어넣은것이다. 두어달후, 월간지《전망》 5월호에 실린 “미학의 빈곤”에는 예상한대로 꽁지가 제대로 달라붙어있었다. 그러니까 꽁지가 빠지지 않은 수꿩—멋쟁이수꿩이 돼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오늘, 즉 10월 22일에《장백산》 5호를 받아보니 어렵쇼, 그놈의 꽁지 빠지지 않은 수꿩—멋쟁이수꿩이 또 한마리 들어있잖은가!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가 다시 파안대소를 하느라고 한동안 볼일을 못 볼 지경이였다. 꽁지 빠진 수꿩이야기는 이상으로 끝이다. 좀 싱겁기는 하지만 심심파적으로 재담삼아 들어주시기를 바란다. 현대판 이소프이야기쯤으로 들어주시기를 바란다.
42    '그놈이 그놈' 댓글:  조회:225  추천:0  2016-04-19
“그놈이 그놈”       이 표제에 괄호(묶음표)가 붙은 까닭은 남이 이미 쓴것을 다시 빌어다 쓰기때문이다. 《연변일보》에 언젠가 이와 똑같은 표제의 짧은 글 한편이 실렸었는데 그 기발한 표제를 보고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서 끌려들어가듯 한번 읽어봤다. 그 내용인즉 너절한 식당주인과 역시 너절한 협잡군이 서로 속이고 속는 이야기, 아닌게아니라 두놈이 정말 똑같은 “그놈이 그놈”이였다. (어쩌면 표제와 내용이 요렇게 꼭 맞아떨어질가!) 다 읽어보고 나는 감탄해마지않았다. 갓 구워낸 빵에다 고소한 냄새가 몰몰 날 때 구미가 동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거나 마찬가지. 표제치곤 과연 매혹적인 표제였다. 일전에 어느 좁은 거리를 바장이다보니 “성기(星期)8”이라는 간판을 내건 식당이 눈에 띄였다. 당장 한번 들어가보고싶은 호기심에 사로잡혔으나 몸에 돈을 지닌게 한푼도 없어서 못 들어가보고말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뛰여난 착상이였다. 월화수목금토일에 속하지 않은 요일—제8의 요일이란 도대체 무슨 요일이란 말인가. 나는 서울 어느 거리에서 “겨울나그네”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처음 보고 감탄하던 일이 새삼스러웠다. 추측하건대 그 “성기8”식당의 주인은 필시 약삭바르면서도 생기발랄한 젊은 멋쟁이리라. 영업이 잘되기를 축원한다. 우리 연길도 이젠 탈피를 하고있다. “인민반점(饭店)”이니 “렬군속(烈军属)식당”이니 하는따위의 낡은 껍질—딱딱하고 멋없는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버리고있다.     멋진 글   두보(杜甫)의 시에 “어불경인사불휴(语不惊人死不休)”란 귀(句)가 있다. 세상이 깜짝 놀랄만큼 멋진 글을 써내고야만다는 뜻. 죽어도 써내고야만다는 뜻이다. 이 “죽어도”는 곧 피나는 노력을 의미하는것. 그것 대충대충 아무렇게나 써가지고는 돼줄리가 만무할테니까 말이다. 동서고금의 이름난 문인치고 이 피나는 수련(修练)—붓의 수련을 거치지 않은이는 아마 하나도 없을것이다.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불처럼 뜨겁고 소태맛처럼 쓰고 천사와 같이 부드럽고 사탕과 같이 달콤한 물—커피.” 이 놀라운 한마디를 다듬어내기 위해 그 이름을 알수 없는 문인은 몇날 몇 밤을 모대겼을가. “산우욕래풍만루(山雨欲来风满楼)”나“류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따위 당시(唐诗), 송시(宋诗)의 귀들은 이미 우리의 생활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버렸다. 수백년 내지 천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시구들은 조금치도 퇴색을 하지 않았다. 금강석에 아로새겨진 글자마냥 두고두고 언제나 뚜렷하기만 하다. 이런 시구들이 그래 피나는 노력 없이 저절로 쏟아져나왔겠는가?   우심전전야(忧心辗转夜) 잔월조궁도(残月照弓刀) [나라일이 걱정돼 잠 못 이루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밤 지새는 달이(벽에 걸어놓은) 활과 칼을 비추도다]   이것은 리순신장군의 저 유명한 시의 바깥짝이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자는 조국을 사랑하고있지 않다   이것은 네크라쏘브의 시의 한구절이다. 리순신(1545—1598)은조선의명장.네크라쏘브(1821—1877)는 로씨야의 진보적시인.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또 처지까지 다른 이 두 인물의 시구들이 어쩌면 이리도 그 뜻을 같이하고있을가. 공명(共鸣)을 불러일으키고있을가. 리순신장군은 몰려드는 침략군의 함선들을 무수히 격파, 격침한 뒤 갑판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한편 네크라쏘브는 농민들의 가난과 고생을 동정해 비분(悲愤)에 찬 시를 썼으며 또 농노해방에도 선구적인 구실을 했다. 일신의 영달에만 머리를 쓰고 또 제 가족만을 위해 아글타글하는 이른바 작가들에게서는 영원히 이런 글이 나오지를 못한다. 개꼬리는 3년을 두어도 족제비꼬리가 못되고 또 센 개꼬리는 시궁창에 3년을 묻었다 보아도 역시 센 개꼬리이기때문이다.     조정래의 갈파   한국작가 조정래(赵廷来)는 그 거작《태백산맥》에서 대담하게도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만들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라고 갈파했다. 압박과 착취가 공산당, 빨갱이를 만들어낸다는것이다. 철저한 반공국가인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도 아닌 한 작가가 감히 이런 글을 써내다니! 조정래가 현재 한국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으고있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나는 1989년 겨울, 서울에서 월간지《해외동포》와 주간지《시사저널》에다 “서울은 천당과 지옥이 동거(同居)하는 곳”이라고 썼다. 나의 이 한마디는 당시 서울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어떤 기자들은 전위(专为)해 찾아와 내 손을 두손으로 잡아흔들며 감격해하기도 했다. “해외동포들이 다 한국을 그저 좋다고만 해 답답하고 안타까왔었는데 이제 속이 다 후련합니다.” 그러니까 조정래와 나도 이런 면에서는 호흡이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하겠다. 그와 나는 다같이 서울 보성고등학교출신으로서 내가 26기 선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학적인 성과로는 그가 26기 선배인 셈이다. 이 글을 마감하기전에 미하일 숄로호브의 천재적인 묘사를 한번 감상해보기로 하자. “마을가까이에서 돈(강)은 딸따리기사(骑士)의 휘인 칼처럼 휘여지며 급작스레 오른쪽으로 구부러진다. 그랬다가는 바즈끼부락가까이에서 다시 웅대하게 꼿꼿이 펴져가지고는 엷은 풀색의 투명한 물을, 우안(右岸)의 련산(连山)의 백악암으로 된 지맥(支脉)들의 기슭을 씻으면서 그리고 그 우안에 잇달린 부락들의 옆을 그리고 또 좌안(左岸)의 뜨문뜨문한 촌락들의 옆을 바다까지—푸른 아조브해까지 날라간다.(강물을)” 배를 타고 돈(강)을 유유히 떠내려가며 량쪽기슭의 경관(景观)을 바라보는것 같기도 하고 또 헬리콥터를 타고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웅대한 전경(全景)을 굽어보는것 같기도 하다. 자연묘사도 이 지경에 이르면 신기적(神技的)인 글솜씨라고 할 밖에 없다. 안고수비(眼高手卑)—눈은 높고 마음은 크나 재주가 없는게 한스러울뿐이다.
41    동물성격 댓글:  조회:239  추천:0  2016-04-19
동물성격       사람 아닌 동물에 “성격”이 있다고 하면 어학자들에게 책을 잡히기 쉽다. 하지만 “버릇”이나 “성질”이라고 쓰자니 이 역시 맞갖잖다. 이래저래 맞갖잖을바에는 “에라 모르겠다.” 차라리 그대로 쓰자. 씨비리방향에서 날아온 두루미(백학)들이 일본에서 겨울을 나는데 그 생활상태를 조사하려고 동물학자들이 두루미들의 긴 다리에다 성냥개비만한 무전기 하나씩을 달아준단다. 그러면 약 2년 동안은 계속 송신이 가능하므로 미국의 인공위성을 통해 일본학자들이 수신을 할수가 있다는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무전기를 부착(附着)당하는 두루미들의 각기 다른 반응. 어떤 놈은 먹이를 쪼아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무전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를 않는 반면에 어떤 놈은 낯선 물건이 다리에 와 달라붙는게 이상하고 맞갖잖아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나중에는 걱정이 돼 아예 먹이도 쪼아먹을 생각을 아니한다는것이다. 두루미에게도 항우(项羽)같이 대범한 성격이 있고 또 림대옥같이 소심한 성격이 있는 모양이다.     사자와 곰   역시 일본이야기가 되겠는데 도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다마(多摩)지구에 있는 자연동물원. 그 동물원에서는 사자나 곰 따위 맹수들만이 아니라 다른 초식류들도 다 우리에 갇히지 않고 제멋대로 살게 돼있다. 자연적인 상태로 사는것이다. 관람자들은 관광뻐스를 타고 로선을 따라 이리저리 돌며 이 자연상태의 동물들을 관람하게 된다. 그런데 이 동물원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까마귀들—그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은 까마귀떼가 역시 이 근처에 모여들어 살면서 반갑지 않은 소란을 피워대고있단다. 이 하늘의 불법배들이 노리는것은 동물들의 먹이, 례컨대 사자 한마리에 급여되는 먹이량은 하루에 토끼 2마리, 이런 먹이들을 감히 날치기하자는것이다. 그러니까 새까만 날강도—공중비적들인것이다. 백수(온갖 짐승)의 왕이라는 사자의 아가리로 막 들어가려는 고기점. 그 고기점을 급강하폭격기처럼 날아내려와 날렵하게 가로채는 까마귀, 분연히 덮치는 사자의 앞발, 그 치명적인 발톱밑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까마귀. 이 절기(绝技)! 성이 난 사자가 대가리를 쳐들고 포효(사납게 웨침)를 할 때는 이미 행차뒤의 나발. 까마귀란 놈은 로획물을 움켜쥔채 유유히 승리적으로 날아가고있다. 그따위 포효쯤은 데시근하게도 여기지를 않는다. 곰이란 놈은 워낙 둔하니까 이런 날치기를 더욱 자주 당하기 마련. 하지만 그렇게 여러번을 당하고나면 아무리 미련해도 꾀가 생기는 모양. 한데 그 꾀란 뭐 별게 아니다. 사양원이 던져주는 먹이가 코앞에 와 떨어지기가 바쁘게 얼른 배밑에다 깔고 엎드리는것이다. 깔고 엎드려서도 마음이 안 놓여 고개를 젖혀들고 대공감시를 한다. 머리우를 빙빙 돌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공중비적들을 감시하는것이다. 그렇게 일변 감시를 하면서 일변 앞발로 배밑의 먹이를 떼낸다. 조금씩 떼내서는 얼른 아가리에 처넣어버린다. 일이 이쯤 되면 그 영악스런 날치기능수들도 속수무책일수 밖에. 그러니까 아무리 어리석어도 제 살 궁리들은 다하는 모양이다. 어느 조마사(调马师)의 경험담을 들으니 감사나운 말을 길들이는데도 다같은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것이다. 호주(오스트랄리아)말을 길들이는데는 매질이 제일 효과적이지만 미국말은 때리면 때릴수록 반항을 하는 까닭에 어르고 달래야 한다는것이다. 이로써도 호주말의 성격과 미국말의 성격이 판이하다는것을 우리는 알수 있다. 몽골종 조랑말의 성격과 더러브렛(영국산 순혈종)의 성격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칭키스칸하고 웰링턴만큼이나 다른지 어쩐지. 개와 닭   이전에 우리 집에선 개 한마리를 길렀었다. 이름은 그럴듯하게 “미르”—로어로 “평화”—였지만 실은 보통개로서 흰 점박이 검둥이였다. 헌데 이놈이 아무때고 안주인(우리 집사람)이 마당에 나서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가 이웃집(전인영 댁) 누렁개를 물어놓는것이다. 안주인을 흘금흘금 돌아보며 달려가 까닭없이 행패를 부리는것이다. 주인을 등에 업고 자세를 부리는게 환히 알렸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서도 이웃집 마누라가 마당에 나설 때는 그 집 누렁개가—까닭없이 행패를 당했던 누렁개가—쏜살로 쫓아와 우리 집 미르녀석을 물어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놈이라고 주인자세를 하지 말란 법은 없을테니까. 사실 그렇다면 정말 개 같은 성격들이랄수 밖에 없다. 하긴 사람도 그런것들이 있긴 하지만. 이전에 우리 집에선 닭도 몇마리 길러봤는데 그놈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품격들이 그리 고상하지도 못했다. 너절하게 터세들을 부리는것이다. 나중 온 놈을 모다들어 죽어라 하고 쪼아주는것이다. 비렬하기짝이 없는 성격들이였다. 하긴 사람도 그런것들이 있긴 하지만. 동물들의 성격이 이와 같이 각양각색인것처럼 사람들의 성격 역시 각양각색인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자기 주변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성격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더구나 한직장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성격은 피차간 손금보듯이 잘 알고있다. 하건만 우리가 일부 소설에서 대하는 인물들은 웬지 그렇지가 못하다. 이것은 최근에 선을 보인 우리 문단의 일부 소설들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전부가 아니고 일부분) 천착(穿凿) 같기는 하지만 어쩐지 이런 느낌까지 없지가 않다. 즉 이야기의 줄거리를 미리 만들어놓고 거기 출연할 인물들을 물색해 차례로 하나씩 등장을 시킨다. 트럼프딱지 한장씩을 이마에 붙여주면서 “너는 ‘K’다.” “너는 ‘Q’다.” “너는 ‘J’다. 똑똑히 외워둬.” “그리고 너하고 너는 각각 ‘10’과 ‘9’다. 헛갈리지 말아. 괜히.” “자 이젠 맡은 역을 다들 알았지? 그럼 이제부터 내가 시킨대로—행동 개시!” 이런 식으로 부속을 들이맞춰서 소설을 엮어내지 않았나싶다. 그러니까 인물들이 사건을 엮어내는게 아니라 이미 완성돼있는 가공적인 사건에다 인물들을 밀어넣고 말몰이군처럼 작가가 뒤에서 몰고 다닌것 같단 말이다. 하긴 나도 전에는 이런 말몰이군노릇을 했었다. 꼭두각시를 놀리는 광대노릇을 했었다. 그 결관 자명했다—실패작!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런 실패의 경험을 지양(양기)하지 않고 그냥 답습을 하는이가 만약 있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가. 이 역시 자명하잖은가! 전거지감(前车之鉴)이란 말이 있다. 앞서 간 사람의 실패를 뒤에 오는 사람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살진 놈따라 붓는건 현명하지가 못한 처사다.
40    너구리현상 댓글:  조회:207  추천:0  2016-04-19
너구리현상      여우굴을 덮치다가 또는 오소리굴에다 연기공세를 들이대다가 뚱딴지같이 너구리란 놈이 그 굴속에 엎드려있는것을 발견하는수가 종종 있다. 그 까닭인즉 너구리란 놈은 그 못생긴 주제에 제가 들어가 살 굴을 만드는 법이 절대로 없기때문이다. 여우나 오소리가 만들어놓은 굴을 가로채가지고 뻔뻔스레 제 집으로 삼아버리기가 일쑤이기때문이다. 그러니 집문서나 임대계약 따위는 애당초에 있을리 만무하다. 우편물도 올게 없고 호구조사도 나올리가 만무하니 문패 또한 내걸 필요가 없는것이다. 굴임자가, 그러니까 여우나 오소리가 대단히 분개해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져도 막무가내다. 일단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이상은 절대로 퇴거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갈 곳 없는 굴임자가 멀쩡히 자기 소유의 굴속에서 아래목은 그놈에게 빼앗기고 웃목에서 곁방살이를 하기도 한다. 잡으려던 여우나 오소리는 아니 잡히고 엉뚱한 너구리가 잡히는것은 바로 이런 주택강점사건이 그놈들의 세계에서 빈번히 일어나고있기때문이다. 이런걸 일컬어 “너구리현상”이라고 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 “곁방살이 코곤다.” 이런 속담들은 다 너구리현상과 통하는것으로서 주객이 전도된 현상, 비정상적인 현상을 형상적으로, 해학적으로 지적한것들이다.     학술지   일전에 부쳐온 어느 학술지 앞표지에 중년남자의 사진이 전면을 차지하는 편폭으로 게재됐었다. 나는 “어, 새 문학박사 탄생!”이라고 단정하고 신이 나서 자세히 들여다보았으나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기실 나는 첫밗에 짚기는 김관웅을 짚었었다. 늘 그를 우리 조선족 제1호 문학박사로 지목했었기때문이다. 의아쩍어 목록을 훑어본즉 의외롭게도 그것은 어느 기업의 경영자란다. 순간적으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구리현상! 우리 잡지들이 앞표지를 광고로 제공하기 시작한 력사는 벌써 꽤나 됐다. 시대의 추세니까 부득이한노릇이라고 우리는 그동안 맞갖잖은대로 지그시 눈을 감아왔다. 한데 급기야 아래목까지 내주게 됐다는 현실에 우리는 직면을 하게 됐다. 오해가 없어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새로 나타난 하나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거론하는것이지 어느 특정인물을 너구리 같다고 타박을 하는것은 결코 아니다. 하긴 고만한것도 리해를 못하는 무식쟁이나 벽창호가 우리 자치주에 존재하지 않으리라는것쯤은 나도 잘 알고있는터이다. 그러나 하여튼 새 문학박사 같은 인물의 사진을 게재해야 할 자리에다 학술하고 직접 관련이 없는 어느 기업가의 사진을 대대적으로 모신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잘 안 가는 처사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우스운 이야기라곤 하지만 해방직후에 실지로 있었던 일이다.     통일은 누가…   어느 저명한 평론가가《조국의 통일은 누가 파괴하는가》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안표지(안겉장)에다는 관례에 따라 “최고분”의 초상을 정중히 모셨었다. 그런데 책이 발간된 뒤에 보니 뭔가가 좀 어긋난것 같았다.《누가 파괴하는가》라는 제호(题号)가 찍힌 책뚜껑을 뒤지면 첫밗에 눈속으로 뛰여드는게 그분의 초상인지라 흡사 통일을 파괴하는건 다른 누구가 아니고 바로 그분이라는 인상을 주었기때문이다. “바로 내가” 하는 인상을 주었기때문이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당국에서는 당장 엄명을 내려 일껏 모신 초상들을 도로 싹 뜯어낸다는 법석판을 벌였었다. 그러니까 초상이란 계제를 봐가며 장소를 가려가며 적당히 내걸것이지 그저 무작정 걸어놓는게 장땅이라고 생각하는건 그리 바람직하지가 못한 일이다. 그렇게라도 하잖으면 안될 편집자들의 고심도 모르는바는 아니다. 그 절박한 사정을 짐작 못하는바가 아니다. 간행물의 존속이 흔들릴 정도의 경영난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원칙론만 들이대는건 마치 “네 병이야 낫건 안 낫건 내 약값이나 내라”는것 같아서—마음이 여간만 언짢지가 않다. 하지만 권위있는 학술지가 그 앞표지 전면을 고스란히 학술과 무관계한 특정인물에게 홍보용으로 제공한다는것은 문제로 삼지를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 물론 주된 책임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온 행정당국에 있음은 의론의 여지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집부가 “난 몰라라”고 쏙 빠져버리기는 좀 어렵잖을가, 어떨가. 반갑지 않은 너구리현상은 이미 우리들의 생활속에 실재적인 문제거리로 나타나고있다. 우리의 아래목으로 한치씩한치씩 다가들고있다.
39    보물찾기 댓글:  조회:202  추천:0  2016-04-19
보물찾기        내가 어려서 가장 애독한 소설의 하나가 영국작가 스티븐슨(1850—1894)의《보물섬》이였다. 외딴섬의 재물을 둘러싸고 소년 짐(JLM)과 절름발이해적이 싸우는 내용으로 돼있는 그 소설은 우리또래의 소년환상가, 소년모험가들을 완전히 매료(魅了)했었다. 그 영향을 받아 나는 소학교 5학년 때 실지로 보물섬을 찾아 떠난적이 있었다. 동급생에 어부의 아들들인 박룡성(별명 왕눈깔)이와 전창희(별명 고수머리)가 있었던 까닭에 그들과 짜고 어른들 모르게 잔교(栈桥)에 매여있는 왕눈깔네 거루배를 풀어타고 우리 셋은 떠났었다.     보물섬   셋이서 번갈아가며 노를 저어 두세시간 배질을 해 손바닥들이 다 부르텄건만 우리가 목적한 그 보물섬은 끝내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초조와 실망의 빛이 차차 짙어가는중에 설상가상으로 배(腹)까지 꺼져 세 모험가가 다 허기증으로 배창에 늘어져버리니 노질할 사공이 없는 거루배는 허허바다가운데서 굴레벗은 망아지꼴이 돼버렸다. 얼마를 그렇게 정처없이 떠다니다가 눈이 커서 평소에도 겁이 많았던 왕눈깔이가 수치스럽게 먼저 엉엉 울기 시작하니 고수머리와 나도 참고참았던 울음을 터뜨려서 만경창파(万顷苍波)의 일엽편주(一叶扁舟)는 금세 초상난 집 같이 돼버렸다. 세놈이 바야흐로 통곡트리오(3중주)를 하고있을즈음 하느님께서 굽어살펴 구인이 나타났다. 동네아이들의 입을 통해 뒤늦게 정보를 입수한 박서방과 전서방이 함께 서둘러 고기비린내 풍기는 돛배를 띄워 수색작전을 벌인 결과 해지기전에 마침내 목적물을 포착했던것이다. 그러니까 통곡트리오로 한창 소란한 초상집—떠돌이초상집을 찾아낸것이다. 박서방은 왕눈깔의 아버지, 전서방은 고수머리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없었으므로 당연스레 그분은 수색작전에 참가할 영광을 지니지 못했다. 내가 일생동안에 이런 보물찾기를 하다가 실패를 한것이 요 단 한차례뿐이였다면 구태여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다. 불행하게도 나는 타고난 성질이 워낙 데면데면한 까닭에 그후에도 여러번 이와 비슷한 실패를 거듭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불운아였다. 20대 청년시절에는 몇몇 용사들의 과감한 행동으로 능히 일본침략자를 물리칠수 있다고 굳게 믿은 나머지 테로활동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바늘로 코뿔소(서우)의 엉덩짝을 몇번 찔러주고 쾌재(快哉)를 부른거나 마찬가지로 큰 보람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이 독립운동이라는 보물찾기에서는 희생자가 수태 났으므로 그 손실의 정도가 왕눈깔, 고수머리들과 거루배를 띄웠던것과는 도저히 비할바가 아니였다. 이런 실패는 30대 장년기에 들어서도 또 되풀이됐다. 거의 숙명적으로 되풀이됐다. 농업합작화시기에 나는 오직 그 길만이 억만백성의 살길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또 한번 그 사업에다 전력을 쏟아부었었다. 너무 열심한 나머지 머리가 뜨거워나 백주대낮에 환각상태에 빠지기까지 했다. 당시 나는 “물 한방울에도”라는 소설을 썼었는데 활자화해서 3교(校)까지 다 끝냈다가 결국은 불발로 제쳐놓았다. 그 줄거리인즉 대개 이러하다. 농촌에 왕가물이 든다. 도시주민들이 이를 도우려고 일떠난다. 집집마다 부엌에 박았던 뽐프를 뽑아낸다. 그 숱한 뽐프로써 왕가물에 허덕이는 농촌을 지원한다. 로농대련합! 실로 감동적이고도 또 극적인 내용이다. 당시 이 천하명작 “물 한방울에도”를 가장 날카롭게 비평한이가 바로 이미 작고를 한 최현숙씨였다. “전혀 실정에 맞지를 않는다”는것이였다. 그때 내가 만약 억지를 쓰고 그대로 발표를 했더라면 아마 정신병원에서 구급차를 가지고 나를 모시러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심한 설교   김호웅씨가 나의 “새집드는 날”, “뿌리박은 터” 등등을 한심한 설교라고 꼬집었지만 그건 이 위대한 “물 한방울에도”를 읽어보지 못했기에 하는 소리다. 왜냐하면 이 “물”에 비하면 “새집”이나 “뿌리”쯤은 아주 약과였으니까 말이다. 그가 만약 “물”을 읽어봤더라면 너무 놀라 대번에 “새집”, “뿌리”는 과연 불후의 걸작이 틀림없다고 절찬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나는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처럼 농업합작사의 우점을 찾아보려고 밤낮없이 골몰을 했었다. 이른바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해보이려고 골몰을 한것이다.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은 닮은데를 찾다찾다 못해 결국은 갓난아이의 발가락에서 닮은데를 찾아내고 기뻐날뛴다. 하지만 나는 어떠했는가. 나의 이 30대 장년기의 보물찾기—우점찾기는 어떠했는가. 체격이 건장한 농업사의 한 실농군이 나를 보고 하소연하기를— “꼬독꼬독이나 워리워리나 다 매한가지 개값이니… 이거 어디 일할 맥이 납니까?” 일을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받는 보수는 거의다 같으니 일할 의욕이 나지를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농업합작화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였다. 그야말로 성패의 관건이였다. 하건만 나는 그에 대해 애써 눈을 감으려 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다들 있는 힘껏 일을 해야만 우리 나라가 부강해진다구요. 나라가 부강해지면 우리들의 살림도 자연 늘어날게 아니요.”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기에 나는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부지런히 원고지 줄칸에다 글자를 메워나갔다. 그렇게 하는것만이 만백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굳게 믿으며, 불가동요적으로 철석같이 믿으며. 나의 이러한 보물찾기—우점찾기—진리찾기는 50대, 60대 로년기에 들어서도 또 되풀이됐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련다. 좀더 뜸을 들여가지고 폭탄선언적으로 발표를 할 작정이다. 80의 고개와 이마받이를 하게 된 이 시점에서 랭정히 한번 돌이켜보건대 나의 일생은 아마도 이런 실패적인 보물찾기의 련속이 아니였나싶다. 하긴 본의 아니게 이런 기막힌 곡절들을 겪은것은 나 하나만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38    신판《림꺽정》 댓글:  조회:313  추천:0  2016-04-19
신판《림꺽정》      홍명희의《림꺽정》을 다시 읽어보면 흥미로운게 새록새록 더 많아지는것 같다. 그 한 례로 다음의 몇 단락을 한번 재음미해보자.   5월 이후로 지키지 않은 탑고개를 다시 지키기 시작할 때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물건을 많이 가진 장군이나 로수를 넉넉히 가져보이는 행인들은 탑고개를 지나가는데 세(税)를 바치게 하자고 말하여 꺽정이가 그 말을 좇아서 장군과 행인에게 세를 받되 대개 십일조를 받고 불쌍한것들은 그대로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금교장날 탑고개로 나가는 장군은 대개 청석골서 10리, 20리 이내에 사는 사람들이라 청석골 도중일을 새로 입당한 졸개들보다 더 잘 알았다. 졸개들이 장군들의 길을 막고 세를 내라고 할 때 장군들중에 “림대장은 우리 촌장군의것을 뺏으시는 법이 없는데 이게 혹 자하루들 하시는 일이 아니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어서 “쓸데없는 잔소리 말아!” 하고 두목이 욱박질렀다… 이날 순돌러 나온 두령은 황천왕동인데 주막에 앉아있다가 두목과 졸개들의 일하는것을 보러 나왔다. 그 장군이 황천왕동이 나오는것을 바라보고 “황두령이시군.” 말하고 앞으로 나가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왜들 이렇게 섰나? 어서어서 세를 내구 가지.” “길세를 받으신다니 이 길이 언제 도중에서 내신 길입니까? 세를 무슨 리유로 받으십니까? 이전처럼 그대루 지나다니게 해주십시오.” “대체 자네들 가진게 다 무엇무엇인가?” “저는 콩 2말입니다.” “그다음은?” “닭알뒤는 나무짐… 나무짐뒤는 숯짐… 숯짐뒤는 무언가?” “거피팥이 한말두 못됩니다.” 황천왕동이가 장군들이 가진 물건을 강받듯 물어본 뒤 두목을 불러서 장군들을 다 그대로 보내라고 분부하였다. 그다음 장날 길막봉이가 탑고개에 나와서 두목과 졸개들을 친히 지휘하여 장군에게 세를 받을 때 지난 장날 닭알을 가지고 가던 사람이 장마다 망둥이 날줄 알고 도중에서 내지 않은 길에 무슨 턱으로 길세를 받느냐고 말하다가 길막봉의 주먹에 대가리가 터지고 가지고 가던 물건을 송두리채 빼앗겼다. 법 없는 천지라 세받는 법도 이와 같이 대중이 없었다… 법 없는 천지   “어제 내가 오늘 보내드리마구 말했는데 대장부가 일구이언하겠소. 보내드릴테니 념려 마시우.” 꺽정이 말에 단천령은 놀란 마음이 가라앉아서 “지금 곧 떠나게 해주셨으면 좋겠소.” 하고 바짝 졸랐다. “그리하시우. 서울까지 가실 로수를 드리구싶으나 찐덥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고만두구 정으루 조그만 물건 하나를 빌려주겠소.” 하고 꺽정이가 옷고름에 찬 먹감나무로 만든 제골장도(특별통행증)를 끌러서 단천령에게 주면서 “길에서 혹시 작경하는자들을 만나거든 이걸 내보이시우.” 하고 말하니 단천령은 인사성으로 한번 치사하고 받았다… 어느덧 널문이를 지나서 어룡개앞길에 당도하여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질끈 동인 놈 서넛이 길가에 주저앉아있다가 죽들 일어섰다. 단천령의 하인이 얼른 지나가려고 나귀를 채쳐 모니 세놈이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하인은 뒤로 주춤 물러서며 단천령을 쳐다보고 단천령은 태연하게 나귀등에 앉아서 세놈을 내려다보았다. “어서 내려라!” 하고 한놈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서는데 단천령은 례사언성으로 “왜 내리라느냐?” 하고 뇌까렸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 모르겠느냐? 로수 다 내놓구 나귀까지 두구 가거라!” 길에서 작경하는자들을 만나거든 내보이라던 꺽정이의 장도가 문득 생각나서 단천령은 “보여줄만한 물건은 하나 있거니.” 하고 말하며 창의소매에 든 장도를 꺼내서 앞에 나선 놈을 내주었다. 그놈이 장도를 받아들고 보는데 두놈마저 와서 들여다보더니 세놈이 서로 돌아보면서 혹 입도 벌리고 혹 고개도 흔들었다. 장도 가진 놈이 단천령을 쳐다보며 “이걸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하고 깍듯한 말씨로 물었다. “장도임자에게서 얻었지 어디서 얻어?” “녜 그러십니까. 그러신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자 어서 행차합시오.” “장도는 나를 도루 줘야지.” “녜. 예 있습니다.” 단천령이 어룡개앞길 후미진 곳에서 적환(贼患)을 면한 뒤 꺽정이의 장도가 값있는줄을 밝히 알았다. 이날 밤에 장단 숙소하고 이튿날 낮에 파주 중화하고 고양으로 오는 길에 혜음령 중턱에서 단천령은 또 화적을 만났다. 화적 몇놈이 내달아서 길을 막으며 “나귀 게 세워라!” 하고 소리지를 때 단천령은 화적들을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여 불러다가 창의 겉고름에 찬 장도를 보라고 내밀었다. 화적 한놈이 저의 동무들더러 “청석골 대장의 표신일세.” 하고 말한 뒤 곧 길들을 비켰다.     림꺽정이는 죽었건만   림꺽정이가 죽은지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백주대낮에 이와 비슷한 일이 사회주의나라에서도 일어나고있다면 아마 다들 곧이듣지를 않을것이다. —또 무슨 허튼소리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엄연한 현실로 우리 주변에서 현재 재현이 되고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우리 자치주에서 가장 크다는 병원에를 한번 좀 가보시라. 문명스러운 형태로 그와 똑같은 일이 버젓이 되풀이되고있잖은가. 20세기 90년대에. 바로 지금 이 시각에. 급환으로 운신을 못하는 환자들이 입원을 하려고 택시에 몸을 싣고 병동으로 가자면 탑고개가 아닌 어룡개도, 혜음령도 다 아닌 철문 하나를 꼭 거쳐야 하는데 여기에 굵은 바줄로 된 금줄 하나가 턱 건너질러져있다. 십일조가 아닌 균일제(均一制) 통행세 2원을 내야만 택시가 통과를 할수가 있는것이다. 꺽정이네 청석골패처럼 “불쌍한것들은 그대로 보내라.”는 관후한 법이 여기에는 절대로 없다. “시각이 급한 환자를 세워놓고 통행세를 받아내라.”는 병원당국의 명령만이 철칙으로 돼가지고 깔축없이 시행이 되고있을뿐이다. 황천왕동이의 너그러움은 보이지 않고 길막봉이의 무지스러운 주먹만이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만이면 오히려도 괜찮게! “청석골 대장의 표신”을 지닌것으로 추측되는 고귀한 환자분들의 승용차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무사통과. 2원은 고사하고 단돈 2전도 낼 필요가 없을뿐더러 금줄 자체가 아예 건너질러지지를 아니하고 흡사 죽은 구렝이모양 땅바닥에 축 늘어져가지고는 “어서 이 몸을 깔고 지나갑시오.” 하고 소인을 개여올리는것이다. 참으로 가관, 참으로 절승경개, 참으로 꼴불견이다. 그동안에 병원당국자들은 몽땅 장사군과 아첨쟁이들로 변해버렸나? 고상한 품성을 지닌 지난날의 공산당원들은 아예 씨가 져버렸나? 이상과 같은 신판《림꺽정》은 우리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모독이다. 참을수 없는 모독. 도저히 참기가 어려운 모독이다. 소시적에 내가 서울서 학교를 다니던 때의 일이다. 총독부옆에 세워진 경성의전(京城医专)의 부속병원은 전차정류소에서 약 150메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있었다. 그런데 전차에서 내린 환자들이 고 150메터도 걷기가 어려울가봐 병원의 승용차 한대가 하루종일 병원과 정류소 사이를 오가고있었다. 누구든 병원으로 오는 사람 또는 왔다가는 사람은 다 무료로 그 승용차를 리용할수가 있었다. 자기 병원을 찾아주는 환자들에 대한 병원당국의 주도한 써비스인것이다. 인정미 풍기는 써비스인것이다. 우리의 병원당국이여, 시장경제를 배우려거든 좀 제대로 배우시라!
37    바람과 기발 댓글:  조회:236  추천:0  2016-04-19
바람과 기발        동풍이 불면 기발은 의례 서쪽으로 나붓기기 마련이다. 북풍이 불면 의례 남쪽으로 나붓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와 정반대로 바람이 불어오는쪽으로 기발이 나붓기는 경우도 있다.     “조국이 위태롭다”   쏘독전쟁시기, 쏘련의 한 애국화가가 “조국이 위태롭다”는 유화를 그려서 대호평이라기보다는 절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우리 자치주 성립 초기 연길시에서 달마다 한차례씩 가졌던 “작가의 밤”모임에서 나는 이 “조국이 위태롭다”를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그리고 모두다 따라배울것을 촉구했었다. 그 그림인즉 쏘련해군의 구축함 한척이 전속력으로 증원을 가는 장면을 그린것인데 애국심에 불타는 장병들이 어찌나 구축함을 빨리 몰았던지 순풍임에도 불구하고 마스트의 기발은 뒤쪽으로 나붓기고있었다. 이에 반해 배경으로 돼있는 기선의 선미기(船尾旗)는 반대방향으로 나붓기고있었다. 그러니까 바람따라 정상적으로 나붓기는것이다. 조국을 구할 마음들이 얼마나 급했으면 구축함의 속도가 풍속을 까맣게 초과해 바람이 불어오는쪽으로 기발이 나붓겼을가!—조국이 위태롭다. 빨리빨리! —애국심의 발로의 극치! “이야말로 사회주의적사실주의 전범(典范), 애국적사실주의의 전범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그때 극구 찬송을 했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 “조국이 위태롭다”는 사회주의적사실주의의 전범인게 아니라 유의지론(维意志论)의 대표작인듯싶다. 피카소가 아무리 위대한 화가라 할지라도 그가 사람의 얼굴을 괴상야릇하게 그려놓는데는 수긍이 잘되지를 않는다. 눈이 귀밑에 와붙는가 하면 또 입이 코옆에 와붙기도 하는 그의 괴이한 화법을 나는 도무지 좋게 보지를 않는다. 사회주의적사실주의라면 구축함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마스트의 기발은 바람따라 나붓겨야 할것이고 또 무슨 주의라 하더라도 사람의 얼굴은 역시 눈, 코, 입, 귀가 제자리에 놓여져야 할것이다. 작자의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거나 위치를 바꿔서는 안될것이다. 영화나 텔레비드라마에 등장하는 팔로군이 군복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니는것을 볼적마다 나는 혼자 웃는다. 나도 팔로군출신이지만 군복소매를 걷어붙이고 다니는 팔로군은 보지를 못했기때문이다. 더구나 여름군복—홑군복인데 소매를 걷으면 하얀 안(감)이 드러난다. 내가 알고있는 한 여름군복에는 안이라는게 없었다. 따라서 안팎이 다 초록빛인것이다. 그러니까 설령 소매를 걷었다손치더라도 흰 안감이 드러나는 일은 없는것이다.     장발병   일본군도 그렇다. 일본군은 맨바닥인 2등병으로부터 소장, 중장, 대장에 이르기까지 머리는 다 빡빡 깎기 마련이다. 머리 기른 일본군은 하나도 없다. 머리 기른 일본군이란 지구상에 애당초에 존재하지를 않았다. 연출가가 이것을 몰라서 장발병(长发兵)들을 등장시키는지 아니면 배우들이 삭발(削发)을 거부해 할수없이 그대로 등장을 시키는지, 전자(前者)라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안 들을수 없을것이고 또 후자라면 배우가 될 자격들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의심받지 않을수가 없을것이다. 극중의 손중산이 전화를 받는데 수화기가 현대식수화기인것도 문제다. 옛날 수화기는 지금처럼 수화기와 송화기가 한데 달려있지 않았다. 수화기 따로, 송화기 따로였다. 지난달 일본 어느 출판사의 사장이《쿠데타(정변)》라는 신간서적 한권을 보내주며 독후감을 좀 써달라고 하기에 나는 한번 자세히 읽어보고 곧 간단명료하게 독후감을 써보냈다. “루이 나뽈레옹(후일의 나뽈레옹3세)이 1851년에 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 경시총감이 전화로 그에게 정황보고를 했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전화는 그때로부터 25년 뒤인 1876년, 미국에서 물리학자 벨에 의해 처음 발명이 됐습니다.” 그 위대한 쉐익스피어도 실수를 할 때가 있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 그의 명작《줄리우스 케사르》중에서 부루투스가 말하기를 “케사르, 시계가 벌써 8시를 쳤으니까.” 시간마다 종을 울려서 때를 알리는 자명종이 처음 발명된것은 14세기, 케사르가 죽은것은 기원전 4년. 그러니까 무려 천 4백여년이나 틀리는것이다. 그러고보니 객관적사실을 여실히 재현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발이 바람을 거슬러 나붓기지는 않게끔 노력을 해야 하겠다.
36    추운 물 댓글:  조회:296  추천:0  2016-04-19
추운 물       몇해전 서울에서 있은 일이다. 어느 유치원에서 원장으로 봉직하고있는 우리 생질녀 A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부부는 한바탕 재미스레 웃었었다. 부모를 따라 에스빠냐에 가 여러해를 살다온 어린아이가 그 유치원에 갓 들어왔는데 한번은 이 아이가 물을 먹겠다기에 따뜻한 물을 갖다줬더니 “이런 물 싫어요. 추운 물 주세요.” 하고 고개를 살래살래 젓더라는것이다. “추운 물? 추운 물이란게 무슨 물이지?” A가 물어보니까 아이는 “이런게 있잖아요. 이렇게 추운거.” 하고 추워서 바들바들 떠는 시늉을 해보이더라는것이다. A가 웃으면서 찬물 한컵을 갖다주고나서 저녁나절에 그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러 왔을 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그 어머니도 재미스레 한바탕 웃더라는것이다. “에스빠냐말에는 ‘춥다’와 ‘차다’가 구별이 없지 뭡니까. 그 녀석이 제딴엔 번역을 한껏 잘한다는게 그 모양이 돼버렸군요.” 그러니 조꼬만 녀석이 랭수를 “한수(寒水)”로 번역한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우리 아들이 어렸을 때 이웃집아이하고 같이 놀다가 그 아이가 “그 칼 빠르니?” 하니까 “응 빠르다.” 하는것을 듣고 나도 어이없어한 일이 있다. 한어의 “쾌(快)”자는 “빠르다”도 되고 “예리하다”도 되니까 녀석들이 마구 혼동을 해 쓴것이였다. 나 자신도 KBS에서 텔레비록화를 하는데 “수준”을 “수평”이라고 해서 프로듀서(제작자, 연출자)를 깜짝 놀라게 해준 일이 있었다. 년전에 어느 글에서도 이미 언급을 한바 있거니와《쏘련녀성지》지(志) 조선문판이 “떨어뜨린 동전을 집어주었다”는것을 “동전을 들어주었다”고 한거라든가. NHK(일본방송협회) 조선말방송이 “배를 가르고 죽었다(切腹)”를 “배를 끊고 죽었다”고 한거라든가. “미국의 소리(VOA)” 조선말방송이 한때 “여섯시 30분부터”를 “륙시 30분부터”라고 해 웃음거리가 됐던거라든가 또는 일본학자 오오무라교수의 부인이 연길에 와 난생처음 잘라놓은 소머리(소대가리)를 보고 놀라서 “아이고 소얼굴이 무섭습니다.”고 웨친거라든가 등등. 이런것들은 다 고국을 떠나 다른 언어권(言语圈)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사람들에게 흔히 있을수 있는 실수들이다. 의당히 량해를 해주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또 멋대로 비꾸러지게 내버려둬서도 안될 일이다. “연설”이란 여러 사람앞에서 자기의 주의, 주장 또는 의견을 일정한 체계를 세워 말하는것. “강연”이란 어떤 제목을 가지고 청중앞에서 강의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것. 그리고 “좌담”이란 강연, 강의 따위와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뚜렷하게 가르지 않고 어떤 문제에 관해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서로 아는바나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고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좌담회”에다 “연설”을 갖다붙인다는것은 말하자면 대학생을 유모차에 태워가지고 밀겠다는것과 비슷하다. 전혀 걸맞지를 않는다. “강연”이란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것이다. 대학생을 승용차에 태운거나 마찬가지가 될것이다. 우리는 현재 한어권내에서 살고있으므로 “구독(购读)”을 “띵(订)”이라고 하기쯤은 례사다. “정년퇴직”을 “리슈(离休)”, “퉤이슈(退休)”라는것도 보통이다. 그러나 간행물 같은데다 정식으로 발표할 때는 특히 신중히 다뤄야 하겠다. 당나귀는 당나귀, 노새는 노새, 사슴은 사슴, 노루는 노루… 분명히 갈라서 써야 하겠다.
35    날조의 자유 댓글:  조회:427  추천:0  2016-04-19
날조의 자유        30년대에 내가 서울서 학교를 다녔던 때의 일이다. 아침에 등교를 하다보니 길가 상점의 진렬장들에 규격이 똑같은 포스터들이 일제히 내걸렸었다. 한판에 찍어낸것이였다. “Give us free”라는 미국영화의 광고였는데 일본글로는 “자유를 우리에게”로 돼있었다. 제명부터 벌써 구미가 당기는것이였기에 나는 “오늘밤엔 천하 없어도 ‘단성사’출입을 한번 해야지.” 하고 별렀었다. “단성사(团成社)”란 당시의 유명한 영화관. 현재도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음.     자유와 제멋대로   그런데 방과후에 집으로 돌아오다보니 그 많은 포스터들에 깡그리 다 똑같은 종이쪽지 하나씩이 덧붙여져있잖은가. 먹글씨로 굵게 “갓데(胜手)”라고 쓴 그 종이쪽지들이 덮어가린것은 바로 포스터 원바탕의 “자유” 두 글자였다. “갓데”를 우리 말로 옮기면 “제멋대로”다. 그러니까 불과 몇시간 사이에 “자유”가 일제히 “제멋대로”로 탈바꿈을 해버렸던것이다.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국록을 타자시는 일본나리, 조선나리들의 야멸찬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이로써도 알수 있는바 이 지구촌에는 자유라는 두 글자만 들으면 대번에 귀가 쫑긋해지는 종족도 살고있고 또 그와 정반대로 자유라는 소리만 들으면 몸이 금세 별나게 찌뿌드드해지는 종족도 살고있다. 하지만 그분들도 언제나 그렇게 찌뿌드드만 해지는것은 아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찌뿌드드해지는것은 남의 자유에 대해서만. 자신의 자유는 전연 별개의 문제. 자신의 자유는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자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한다. 웽그리아의 시인 뻬뙤피(1823-1849)는 이런 류형의 사람이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하지만 사랑이여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이와는 달리 남의 자유는 무자비하게 박탈해버리면서도 자신의 자유는 무한대적으로 추구하는 나머지에 아예 환장을 해버리는 얌치도 이 지구촌에는 심심찮을 정도로 존재한다. 그 한 례가 곧 날조의 자유인것이다. 조작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가 아니라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나다.     날조와 조작   “워싱톤은 내 큰외삼촌이다.” “나뽈레옹은 우리 막내삼촌이다.” “진시황은 우리 고조할아버지의 팔촌형이다.” “양귀비는 우리 왕고모의 또 왕고모의 딸이다.” “리순신은 내 칠촌아저씨다.” “홍경래는 우리 큰아버지의 처남의 사촌형이다.” 권좌에 앉아계신분이 그 날조권을 행사해 이런 백주대낮의 잠꼬대를 한다면 그것은 곧 무조건적으로 사책(史册)에 기입돼 버젓한 “왕조실록” 또는 국정력사교과서로 둔갑을 해버린다. “히틀러를 멸망시킨건 나야 나.” “무쏠리니를 처단한것두 나구.” “왜놈들이 왜 망했는지 알아? 바로 나때문이라구, 나때문에!” 이런 잠꼬대도 권좌에 앉아계신 지존(至尊)께서 하실 때에는 다 금과옥조(金科玉条)로 되는 까닭에 력사학자들이 우 모다들어 론문을 써가지고 절대적진리로 만들어놓는다. 그러나 우리 같은 졸때기들이 깜냥없이 감히 그따위 잠꼬대를 했다가는 뼈다귀도 못 추리고 비명횡사를 하기 꼭 알맞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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