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난 “한번만”
우리 민요에 이런것이 있다.
담 넘어들 때는 큰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시내가 강변서 빨래질하니
정든 님 만나서 돌베개 벴소
밤중에 남의 집 담을 넘어들어가지 않나, 백주대낮에 강변에서 만나가지고 “로천굴착”을 하지 않나―풍기문란, 상풍패속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岁不同席)”이 사회생활의 준칙으로 돼있던 그 세월에 말이다.
이보다 더 심한것도 우리 민요에는 있다.
시내강변에 가는비 오나마나
어린 서방은 있으나마나
노랑두대가리 쥐나 콱 물어가라
동네집 총각이 내 서방 되리라
사내구실 못하는 서방을 뭐가 콱 물어나 가줬으면 오죽 고마우랴. 그러면 저는 마음에 드는 동네집 총각하고 같이 살수도 있을게 아닌가. 독부(악독한 계집)도 이만저만한 독부가 아니다. 간통죄, 살인예비죄가 왔다갔다할 정도다.
봉건적륜리
한데 문제는 이런 봉건적륜리에 크게 어긋나는 행위를 반영한 민요들이 통치배의 벼락방망이를 맞아 박산이 나지 않고 그대로 고스란히 살아남아 오늘까지 전해져내려오는것이다.
추측하건대 그것들이 생활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에―세상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반영을 했기에―어떠한 풍상도 겪어내는 검질긴 생명력을 지니고있는게 아닐가.
두어달전에 나는 작곡가 최삼명씨의 “꼭 하나 곡을 붙여봤으면 좋겠다”는 청탁을 받았다. 그래서 전연 엉뚱하게 가사 한편을 써야 한다는 심상찮은 운명에 직면했다.
서양에 “코끼리는 토끼를 칠 때나 사자를 칠 때나 다 똑같은 힘을 들인다”는 격언이 있다. 나도 그 격언을 따르는 습관이 있는지라
―이왕 쓸바에야 하나 빼여나게 써야지.
이렇게 뼈물고 아주 정식으로 달라붙었다.
“위대한 조국”, “어머니의 당(党)”, “아름다운 연변”,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어머니”, “존경하는 선생님”, “정다운 벗”, “즐겁게 노래하자”, “신나게 춤추자”, “처녀야”, “총각아”, “푸른 동산이여”, “맑은 시내여”, “달이여”, “꽃이여”, “꿈이여”, “안개여”, “함박눈이여”, “가랑비여”, “흰구름이여”, “7색의 무지개여”… 갖가지로 다 음미를 해봤으나 그 어느것도 다 너무 많이 들어놔서―밤낮 들어놔서―신선미가 없는것 같았다. 그 식이 장식인것 같았다.
―이걸 어떡한다?
궁리를 하고 머리를 짜고 또 고민을 하던중에 2주일하고 또 하루만에 문득 령감이 떠올랐다. 실로 침침칠야의 번개불 같은 령감이였다. 나는 너무도 흥분해 잽싸게 볼펜을 집어들었다. 령감을 놓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손에 집히는 헌 신문지란외에다 단숨에 냅다 갈겨썼다―
당신없이 그동안 곱게 지키다
아차실수 한번 좀 그랬는데도
더러운것 나가라 보기도 싫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으신가요
이번 한번 용서만 해주신다면
뼈에 새겨 다시는 안 그러리다
사내대장부답게 어서 그래라
시원한 대답으로 잊어주세요
헌데 이것이 일단 신문에 실리자 예상했던바의 또는 예상 못했던바의 일장풍파가 일어났다. 년전에 졸작 “동서남북풍”이 겪었던것만 못지 않은 풍파였다.
옹졸한 위선자들
책상을 치며 “이런걸 다 신문에다 내는가”고 노발대발하는분, “그 늙은이 이젠 아주 로망을 부린다”며 개탄을 하고 또 비웃는분, “뉘 집 녀편네 바람을 내줄라구 이따위를 쓰는가”고 개 벼룩 씹듯하며 도리머리를 흔드는분… 각양각색의 반응들을 보이는 가운데 “고거 야 재치있다. 아하하!” 하고 긍정을 하는분도 더러는 있는게 실정이다.
가사의 사의(词意)마따나 “아차실수 한번 좀 그런” 녀성이 우리 주변에는 과히 심심찮을 정도로 있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한번 용서만 해주신다면” 다시 안 그러겠다고 다짐두는 녀성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있는 사실을 몇줄 글로 간단히 다듬어보는게 그래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럼 어째 그런 점잖은 도학군자분들이
“아니 뭐? 처녀계집애가 돌베개를 베? 저런 집안 망할 년 같으니라구!” 하고 책상을 치며 노발대발은 하지 않는가. 그런 점잖은 도학군자분들이 그럼 어째
“있으나마나한 서방 콱 물려나 가라? 동네총각눔하구 붙어살겠다? 조런 발칙한 년 좀 봤나!” 하고 개 벼룩 씹듯하며 도리머리를 흔들잖는가?
녀자가 바람을 피우자면 반드시 상대자가 있어야 한다. 바꾸어말하면 바람쟁이사내놈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녀자가 바람을 피우는 경우 잘못한 책임은 절반만 지면 되는것이다. 더 죽일 놈은 사내놈이니까.
정직한 사람들, 수양 쌓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안해가 부정한짓을 할가봐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덕성에 비추어 믿음이 있기때문이다. 이에 반해 바람쟁이들은 항시 (우리 녀편네도 또 그런짓을 하면 어쩌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제 지정머리가 워낙 지저분하니까 거기 비추어 안해의 인격에 대한 믿음 역시 무너져버렸기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한 론리라 하겠다.
그러므로 “한번만”을 읽어보고 책상을 치며 노발대발하거나 못마땅해서 “로망을 부린다”고 비웃거나 또는 “뉘 집 녀편네 바람을 내주려는가”고 도리머리를 흔드는 도학군자분들은 대개 다 찜찜한데가 좀씩 있는분들이기도 쉽다. 추측컨대 그렇다는 말일뿐. 뭐 꼭 찝어서 어떻고 어떻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오해가 없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도무지 리해가 잘 가지 않는것은 그런분들이 어떻게 비싼 값을 치르고―그도 우리 돈이 아닌 외화를 치르고―사들여오는 외국영화나 비디오는 군말없이 받아들이는지? 어떻게 팬티바람의 남녀가 롱탕치는 징그러운 장면을 태연자약하게 또는 흥미진진하게 관람을 하시는지?
“팬티”란 서양식속곳. “롱탕”이란 남녀가 음탕한 소리와 란잡한 행동으로 갈개면서 흐지부지한다는 뜻.
그런분들이 어찌해 돈 한푼 안 드는 국산품인 “한번만”을 보고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날뛰시는지?
20세기 90년대의 사회주의사회에 사시는분들이 봉건통치배만도 못한 문학감상력을 갖고계신다면 그것은 일종의 비극일것이다. 시대적비극일것이다. 치료할 약이 없는 고질일것이다. 죽기전에는 못 고치는 고질일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인생은 해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도학군자”가 아닐가싶다. 피라미드속의 미이라처럼 물기 하나 없이 꽛꽛해진 “도학군자”가 아닐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