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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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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의 생일 댓글:  조회:350  추천:0  2016-04-14
나의 생일       나의 생일은 11월 4일로 돼있다. 그냥 “어느날”이라면 될것을 구태여 “어느날로 돼있다”고 하는데는 까닭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난것은 1916년—호랑이가 담배를 먹을 시절이였으므로 음력이 여전히 판을 치던 세월이였다. 그러므로 서민층에서 양력은 양코배기들의 루습쯤으로 여겨져 “쓴오이”취급을 받았었다. “네 생일은 시월 초나흗날이다. 잊지 말아.” 내가 처음 소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는 분명히 이렇게 일러주셨다. 호적에 올라있는것과는 꼭 한달이 틀리는 생일이였다. 그 틀리는 까닭인즉 우리 아버지가 무식해서 당초에 출생신고라는것을 어정쩡하게 한탓이였다.(내가 소학교에 들어갈 때는 이미 아버지의 일주기 즉 소상이 지났었다.) 호적계원이 갓난아이(김학철)의 생일을 묻는데 우리 아버지가 음력으로 대답을 올렸더니 “출생신고는 양력으루 해야 하우.” 하고 호적계원이 왼고개를 치는 바람에 우리 아버지—가련한 인생은 어안이 벙벙해 꿀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양코배기의 루습을 관청에서 봉행(奉行)할줄은 까맣게 몰랐던것이다. 한심한 무지렁이를 데리고 더 실랑이질을 하기가 귀찮았던지 호적계원이 “양력은 대개 음력보다 한달가량 이른 법이요. 그러니 11월 4일루 하는게 어떻겠소?” 하고 의향을 묻는데 우리 아버지는 너무도 황감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당하올시다.” 하고 소인을 개여올렸다. 이리하여 나의 생일은 두 사람의 타합으로 대개 11월 4일로 정해졌는데 그후 장장 70여년 동안 나는 그 타합된 생일을 만고불후의 진리인양 추호의 의심도 없이 신봉해왔었다. 아, 그런데 바로 요 몇해전에 우연히 무슨 만년력이라는걸 뒤적여보았더니 어렵쇼, 1916년의 음력 시월 초나흗날은 양력으로 11월 4일인게 아니라 10월 30일. 무려 닷새나 어긋났었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한동안 어이없어 나오는 웃음을 혼자 자꾸 웃었다. 닷새라면 웬만한 려객기를 타고서도 지구를 두어바퀴 넉근히 돌만한 시간이 아닌가.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생일이 셋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어머니가 낳아주신 생일, 하나는 법적으로 규정된 호적상의 생일 그리고 또 하나는 만년력이 뒤늦게 찾아준 과학적으로 정확한 생일. 나는 생일부자다. “남의 멀쩡한 생일을 왜 이렇게 되는대로 다루었냐”고 시비를 붙여볼래도 그 관료주의적 호적계원은 이미 저승으로 간지가 옛날일터니 어디 가 해볼데도 없는 형편. 그러니 죽는 날까지 해마다 억울하게 닷새씩을 밑져가며 사는수 밖에. 호적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떠오르는게 하나 있다. 목단강출판사의 황현구씨에게도 나와 비슷한 사연—억울한 사연이 있다. 웃지 못할 사연이 있는것이다. 황씨의 부친도 역시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서민계급이였던 모양으로 호구조사를 나온 순사나리가 아들아이의 이름을 묻는데 “황현순이올시다.” 대답을 올렸지만서도 “한문자로 어떻게 쓰느냐?”고 재차 묻는데는 그만 대답이 콱 막혀버렸다. 까막눈이하고 더 물어봤자 소용이 없을것을 깨달았던지 그 순사는 아무렇게나 적당히 한문자를 적어넣는데 흔히 쓰이는 “순할 순(顺)”자나 “순박할 순(淳)”자 따위는 다 놓아두고 좀체로 잘 쓰지 않는 “열흘 순(旬)”자를 적어넣었다. 그자가 왜 하필이면 그런 괴벽한 글자를 골라서 썼는지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나 아실노릇이다. 하긴 그 “순”자밖에 몰라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열흘 순”자 황현순이 소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돼 입학수속을 하는데 무식쟁이소리에 한이 맺힌 아버지야 부지런히 호적초본부터 내러 갔을 밖에. 개학 첫날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출석부에 적힌 신입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얼굴들을 익히는데 “황현구”라는 이름만은 암만 불러도 “예.” 하고 일어서는 놈이 없었다. 괴이쩍게 생각한 선생님이 나중에 다 부르고나서 “이름 안 부른 학생 있거든 손을 들라.”며 죽 둘러보니까 그제야 호명에 빠졌던 아이 하나가 손을 쳐드는것이였다. 선생님은 화증이 나서 “제 이름도 모르느냐?”고 꾸짖었으나 아이는 그저 멍청해 눈만 끔벅끔벅할뿐. “네 이름이 뭐냐?” “황현순입니다.” 아이가 얼른 일어서서 공손히 대답했다. “뭐라구? 다시한번 말해봐.” “황현순입니다.” “황현순이가 뭐야? 황현구지! 제 이름두 하나 모르구…” “?…” “황현구, 똑똑히 외워둬. 네 이름은 황현구야.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황현구!” “옛.” “됐어, 이젠 고만 앉아.” 데면데면한 관료주의적 호적계원나리께서 호적초본을 내주시는데 “열흘 순(旬)”을 잘못 보고 획 하나를 빼먹고 “글귀 구(句)”자를 만들어놓은것을 담임선생님이 어찌 알것이며 황현순소년인들 어찌 알았을것인가.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나 아실노릇이였다. 황현순의 부친은 애당초에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분이니까 획 하나가 빠졌는지 어쨌는지 알턱이 없으므로 일이 꼬인데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것이 없다. 이리하여 황현순은 소학교 1학년 때부터 팔자에 없는 황현구로 행세를 하다가 마침내는 60 환갑의 고개까지 넘은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벼슬아치, 구실아치 따위 공무원들의 관료주의란 “고이유지(古已有之)”로 예전부터 벌써 있었던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주변에서 성행하는 관료주의도 그 무슨 독창적이거나 최신류행인게 아니라 영원(깊고 멂)한 일종의 전통적풍습이라고 보는게 타당할것 같다. 단지 하나 좀 유감스러운것은 그놈의 관료주의때문에 참신한 사회주의시대와 낡아빠진 구시대를 확연히 갈라놓기가 어렵다는 점, 그 식이 장식이라는 인상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관료주의에 대해 권위자들이 내린 정의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민의를 무시하고 관권을 펴려는 압제적주의. 상관에 대해서는 무조건으로 아부하고 아래사람에 대해서는 권력을 미끼로 포악한짓을 자행함. 전제적이며 획일적이며 비밀적인 정책을 쓰면서 독선적인 행동을 하는 등의 나쁜 경향. 또는 인민들로부터 리탈한 관료들이 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해 국가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체계 또는 통치방법.   끝으로 장장 70여년 동안 억울하게 해마다 닷새씩을 밑져가며 살고있는 김학철의 소견을 피력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이 말썽거리의 관료주의를 철저히 뿌리뽑지 않는다면 우리도 별조없이 그전 사회들의 전철을 밟게 될것이다. 력사의 흐름모래속에 묻혀버릴거란 말이다.
13    락양—서울 댓글:  조회:467  추천:0  2016-04-14
제2부 락양—서울     락양—서울           1941년 4월, 전화(전쟁의 불길)속에 위태롭던 중국의 락양, 그 락양에서 발생했던 한 탈영사건. 그 탈영사건의 주인공이 현재 서울에 살아있다. 현 한국광복회 회장 김승곤(金胜坤, 일명 黄民)씨가 바로 그이다.     탈영사건   독립군시절 김승곤씨가 쓰고있던 이름은 황민. 황민은 나와 한부대에 소속했던 조선의용대 대원으로서 말하자면 포연탄우속에서 생사와 고락을 같이해온 전우였다. 우리가 맨처음 일본군과 맞부딪친것은 호남성과 호북성의 성계(省界)인 막부산전선(幕阜山战线), 1938년 11월의 일이다. 당시 적군은 무한(武汉)을 함락시킨 여세로 승승장구를 하고있었다. 우리는 중국군과 함께 분전력투, 끝내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을 하기는 했으니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숱한 사상자가 난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전투의 나날을 긴장속에서 보내던중 우리들의 앞에는 뜻하지 않은 일 하나가 생겨났다. 우리의 우군(友军)이자 후원자인 국민당군대가 그 전략을 차츰 소극적인 항전으로 바꾸기 시작한것이다. 그 바람에 전쟁이 부지하세월이 돼버려 우리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됐다. 압록강을 건너서 본국으로 진격한다는 계획. 그 계획의 실현이 아주 묘망해진것이다. 우리는 다들 좌절감에 사로잡히고 또 초조감에 모대겼다. 우리들의 부모형제와 친지들은 다 압록강 저쪽에 살고있었다. 당시 우리는 병력이 약해 단독작전이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였다. 말하자면 중국군대에 얹혀사는것이나 다를바 없는 처지였다. —이왕 얹혀살바엔 차라리 적극적인 항전을 계속하는 군대에 얹혀살자. 우리가 팔로군에 합류를 하게 된것은 바로 이런 사정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리유는 병원(兵员)을 보충하기가 용이하다는것. 우리의 거류민들이 가장 많은게 바로 화북(华北)—팔로군이 활동하고있는 지역이였으므로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을 널리 배포할수가 있었기때문이다. 1940년 초겨울에서 이듬해 봄에 걸쳐 양자강 남북안(岸) 각 전선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의 여러 지대들과 분대들이 륙속 락양에 집결을 한것은 태항산항일근거지(팔로군총사령부소재지)로 탈출을 하기 위한 행동의 일환이였다. 선견대   군(军)통제하의 맹진(孟津)나루에서 배를 타고 황하를 북으로 건는다는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였으므로 시탐적으로 우선 선견대 하나를 파견하게 됐는데 마침 황민과 나도 그 선견대에 편입이 됐었다. “9시 정각에 출발할테니까 그동안에 행장들을 챙기도록.” 선견대원들을 모아놓고 지대장이 명령을 내린것은 8시 정각이였다. “락양아, 잘 있거라. 우리는 간다.” “북망산(北邙山)도 안녕히, 우리는 간다.” 긴장한 가운데도 이와 같이 시룽거리며 행장들을 갖춰가지고 정렬을 하고보니 “이게 웬 일이냐” 사람 하나가 모자라잖는가. 다들 서로 돌아보며 괴이쩍게 여기는중에 “도대체 사라진게 누구지?” “아마 황민인가 봅니다.” 지대장과 선견대장의 주고받는 말소리가 귀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탈영! —배반도주! 사태는 엄중했다. 국민당의 헌병대가 우리 영사(营舍)에서 지척이였다. 걸어서 20분도 걸릴가말가한 거리였다. 황민이 뛰여들어가 한마디만 꽂아바치면 우리는 전원(全员) 끝장이 나는 판이였다. 저승행차들을 할판이였다. —그놈의 따꾸냥(大姑娘)이 설마 이럴줄이야! “따꾸냥”은 “큰애기”란 뜻으로 황민의 별명이다. 다들 이를 갈았다. 모주먹은 돼지 벼르듯 별렀다. 잔뜩 별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시위에 먹여든 화살. 아니 떠날래야 아니 떠날수 없는 형편이였다. —하느님!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황민은 좌익군대인 팔로군에 합류하는게 싫어서 출발명령을 받자 곧 영사를 벗어나 정거장으로 달려갔었다. 달려가는 길로 그는 서행(西行)렬차를 잡아타고 서안으로 향했었다. 당시 서안에 주류하던 한국광복군을 찾아간것이였다. 그 당시 우리가 밀고를 당할가봐 떤것은 기우(杞忧)였다. 황민은 광복군에 몸담아있으면서도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체로 함구(缄口)—단 한마디도 루설을 하지 않았다. 황민은 독립군의 의리를 지켰다. 리념을 초월해가지고 항일하는 전우들을 보호했다.     문명철의 죽음   문명철(文明哲)은 본명이 김일곤(金逸坤)이라는것을 내가 알게 된것은 그가 태항산에서 전사를 하고도 더 40여년이나 지나서의 일이다. 89년 가을에 내가 서울나들이를 했을 때 당시 한국독립동지회 회장이던 김승곤 즉 황민의 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됐던것이다. “문명철의 본명은 김일곤—나하곤 사촌간이야. 여태까지 몰랐었지?” 나는 지금까지도 승곤, 일곤 두 종형제중에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지를 모르고있다. 문명철은 나의 중국군관학교 동기생이자 또 조선의용군의 동료이기도 했다. 졸저《항전별곡(抗战别曲)》에 이런 단락이 있다.   문명철에게는 남다르게 괴상한 버릇 하나가 있었다. 여름이 되면 머리를 기르고 겨울이 되면 홀딱 깎아 중머리가 되는것이다. 그는 분명히 인류—고등동물이였다. 식물—락엽교목이 아니였다. 그런데 어째 여름에 피고 겨울에 지는 락엽수적습성이 그에겐 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였다.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한번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는 막 삭도질을 해 새파랗게 된 중머리를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고있었다. “겨울엔 더운물이 없는데… 머리 감기 귀찮잖아?”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자라목 오무라들듯하며 쑥스레 웃는것이였다.   문명철은 끝내 더운물에 머리를 감아보지 못하고 순국(殉国)을 했다. 태항산 험한 골짜기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진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들은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딱히는 모른다. 좌권현(左权县)경내인것밖에 모른다. 《항전별곡》   《항전별곡》은 중국에서 1984년에 간행이 됐다. 그후 이 책이 서울에서 재판된것을 나는 모르고있었다. 미국 펜실바니아대학의 리정식(李庭植)교수가 주선을 했다는 뒤소문은 나중에 들었다.(간접적으로) 나는《항전별곡》에다 황민의 탈영사건도 사실대로 기록했고 또 문명철의 전사한 경위도 사실대로 기록했다. 그들의 본명이 뭔지도 또 그들이 사촌지간인지도 다 모르는터였으므로 나는 두 사건을 아무 련관성 없게 따로따로 기록했다. 황민이 이 세상에 살아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상황하에서(그 책이 서울에서 재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상황에서) 오직 우리 독립군들의 진실한 력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충실하게 기록을 했던것이다. 1988년 여름, 연변대학의 교수 한분이 느닷없이 찾아와 서울서 맡아가지고 왔다는 편지 한통을 전하는것이였다. 낯선 편지의 피봉을 들여다보니 발신인의 성명은 김승곤(황민). —어, 황민이 아직 살아있었구나! 나는 일변 놀라고 또 일변 기뻐했다. 황민도《항전별곡》(서울판)을 읽어보고서야 옛 전우인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 연변대학의 교수분을 통해 확인을 했던것이다. 나는 황민의 그 편지를 읽어보고 비로소 김홍일(金弘台)장군이라는이가 40여년전 군관학교때 우리의 교관이였던 왕웅대좌(王雄大佐)라는것도 알게 됐다. 《항전별곡》이 서울에서 재판이 되지 않았던들 우리는 영원히 해후상봉을 못하고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장 49년만의 락양—서울을 이루어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2    참배풍파 댓글:  조회:1090  추천:0  2016-04-14
참배풍파        지난해 가을 43년만에 서울나들이를 갔다가 예상 못한 풍파를 겪고 아직까지도 뒤맛이 씁쓸하다. 국립묘지에서 참배를 거절해야 한다는 춘사(椿事)가 발생했었기때문이다. 그 전말인즉 대개 이러하다. 한국정부에서 항일전쟁 당시 조선의용대에 소속했던 우리 몇몇을 한국광복군출신의 “독립유공자”로 등록을 해놓은게 사건의 발단이였다. 우리는 한국광복군과 전연 관계가 없다. 한데도 그 대원명단속에 문정일 등 우리 몇몇의 이름이 분명히 들어있으니 문제가 아닌가. 1940년, 조선의용대의 약 80퍼센트의 대원이 황하를 북으로 건너 팔로군과 합류를 하게 되자 뒤에 남은 총대장 김원봉씨는 처지가 여간만 곤난해지지를 아니하였다. 그는 생각다 못해 남아있는 소수의 부하들을 수습해 거느리고 광복군과 병합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느린 병력이 너무 적으니까 림시처변으로 이미 떠나간 우리들의 명단까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갔다. 고골리의《죽은 넋》을 방불케 하는 처사였다. 그 결과 우리들은 분명히 해방구에 들어와 활동을 하고있었지만 이름만은 광복군에 등록이 되여 그야말로 유령적인 존재로 되여버렸다. 그러니까 한국정부는 그《죽은 넋》적이고 유령적인 명단에 근거해 우리 몇몇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해버린것이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독립유공자는 국무총리가 한번 청해다 환대를 하는게 관례인 모양이여서 유독 나라고 례외일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총리부에서 보내온 차에 올라 구경스레 차창밖을 내다보며 생소한 거리를 한동안 달렸다. 달리던 차가 차선을 벗어나며 곧 어떤 굉장한 건물의 구내로 들어가기에 나는 그저 “오, 다 왔나보다”쯤 생각하고 다시한번 유심히 살펴본즉 놀랍게도 눈속으로 뛰여드는것은 “국립묘지”라는 네 글자였다. 나는 아연 긴장해 “여기가 어디냐?”고 다우치듯 물었다. 하니까 두 수행원중의 하나가 깍듯이 대답하기를 “녜, 여긴 국립묘지올시다. 먼저 참배를 하신 다음에 총리공관으루 모시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나는 기가 딱 막혔다. —보나마나 국방군의 무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있을게 아닌가! 차가 미처 멎어서기도전에 중대문안에서 사람 넷이 맞아나오는데 얼굴마다 환영하는 미소가 가득하였다. 이어 애도곡이 울려퍼지며 우리 부부가 차에서 내려 분향, 례배할 차례가 되였다. 전연 예상을 못했던 사태에 부닥쳐 난처하기짝이 없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원칙을 포기할수는 없었다. “참배는 못하겠습니다!” “녜—?” 두 수행원은 너무도 의외로와 눈들을 크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맞아나온 네 사람의 얼굴에도 깡그리 경악의 빛이 얼어붙었다. “사전에—국립묘지에 들린단 얘기가 없잖았습니까?” “하지만 이건 관례입니다—외국손님들을 총리부루 모실 때의.” “미안하지만 차머리를 돌려주십시오.” 한 공산당원으로서 인민군, 지원군과 맞싸우다 죽은 국방군의 묘소를 참배할수야 없잖은가. 얼굴빛들이 푸르락붉으락해진데다가 안면근육까지 경련을 일으켜 푸들거리는 두 수행원은 하릴없이 서로 눈으로 의논하고 차머리를 그냥 돌리게 하였다. 맞아나왔던 네 사람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 자리를 떴다. 사실 말이지 나도 죽을 지경이였다. (호텔에 그냥 편안히 누워있을걸 부질없이 따라나서가지고 이런 곡경을 치르다니!) 집사람도 문틈에 손을 끼인것 같은 얼굴로 벙어리 랭가슴앓이를 하고있었다. 부부가 다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은데 이 빌어먹을 놈의 차가 또 서지 않는가! “내리시지요 선생님, 여긴 애국지사묘역입니다.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수행원이 또 깍듯이 청하는데 나는 곧 차에서 뛰여내려 도망을 치고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만약 거기 묻혀있는 사람들이 과연 다 항일투사, 반일투사라면 나는 좌익, 우익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내려 분향, 례배를 했을것이다. 현충사(显忠祠)에서 충무공 리순신장군을 추모해 분향, 례배를 했듯이. 그러나 한국정부의 애국지사를 가늠하는 표준이 어떤지 나는 아는바가 없었다. 그가운데 단 하나라도 우리 표준에 맞지 않는 “애국지사”가 들어있다면—내 꼴이 뭐가 될건가! “여기두 못 내립니다.” “아니, 애국지사묘역인데두요?” “사전에 안내서를 주셨더라면 좋았을걸…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차를 돌리시지요.”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배짱을 부렸다. 그밖에 딴 도리가 없잖은가! 총리부를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나는 머리속이 어수선하였다. 총리를 대할 일이 면구스러웠다. (그가 내 이런 딱한 사정을 헤아려줄리 없잖은가.) 헌데 뜻밖에도 강영훈총리는 아주 혼연춘풍으로 나를 대해주는게 아닌가. 그는 고대 연주되였던 불협화음에 대해서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큰 그릇이 다르긴 다르다!) 나는 일변 감복하며 일변 방심하였다. 우리 부부는 환대를 받고 그리고 푸짐한 선물까지 한아름 안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이 다 끝난것은 아니였다. 그날 저녁때부터 제복 입은 호텔의 웨이터 두 녀석이 12층 내 방문밖에 딱 지켜서서 아무도 얼씬을 못하게 사람의 출입을 금하기 시작한것이다. 아무리 호텔의 웨이터로 꾸몄어도 그치들이 안기부(정보부)의 요원들인것을 누가 모르랴! 나는 꼼짝없이 격리를 당하게 되였다. 그 녀석들이 밀막는 바람에 들어오지 못한 기자들이 아래층 로비(복도, 대합실)에서 전화를 걸어오고 또 16층 커피숍(茶室)에서 전화를 걸어오고 하는데—그 사연인즉 다 “그자들이 막무가내로 가로막으니 어떡하면 좀 만나뵐수 있겠느냐”는것이였다. 나는 처음에는 그 녀석들하고 싸우기가 싫어서 기자들의 요청대로 아래 내려가 만나고 또 우에 올라가 만나고 하였다. 한데 감시가 시작된지 사흘째 되는 날 밤 저녁의 일이다. 진보적인 사회활동을 하다가 붙들려 들어가 고문을 톡톡히 받고 나온, 몸이 건장한 기자 하나가 그자들하고 호텔이 떠나갈 정도로 대판싸움을 벌인 끝에 용케 뚫고 들어오는데 성공을 하였다. 가로막는데 실패를 한 두 녀석은 실내까지 따라들어올수는 없으니까 문밖에서 그 기자를 모주먹은 돼지 벼르듯 벼르기만 하였다. 기자는 화증이 덜 가라앉아 씩씩하면서 내게다 호소를 하는것이였다. “선생님 보셨죠? 기자를 범죄자취급하는 민주주의! 기자를 죄인 다루듯하는 언론의 자유! 돌아가시거든 매스컴을 통해 싹 다 폭로해주세요!”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의 신변안전을 위해 나는 아래층까지 그를 호송해주었다. 내가 같이 따라나오니까 두 녀석은 어떻게 손을 써볼 재간이 없던지—독을 보아 쥐를 못 친다잖는가—이마너머로 맞갖잖이 노려보기만 하였다. 기자가 차에 올라 떠나가는것까지 지켜보고 되돌아들어오다가 나는 방문밖에서 비로소 두 녀석에게 말을 건네였다. “여보시오, 당신네가 이건 나를 보호하는게요, 감시하는게요?” “보호하는겁니다. 저흰 외국손님의 안전을 책임져야니까요.” “그런 고마운 념려는 두었다가 다른 손님에게나 하시오. 난 필요가 없으니.” “언제 암살단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거든요.” 그자들이 유들유들하게 대꾸질하는데 나는 화증이 났다. “만약시 래일아침에 일어나봐서 당신네가 또 내 눈에 띌 때는 그 즉시 강영훈총리께 전화를 걸테니까 그쯤 알구 현명하게들 처사를 하시오. 알겠소?” 이렇게 으름장을 놓고 나는 군장단까지 넣었다. “잔고기 가시 세다더니!” 기실 나는 강영훈총리의 전화번호도 모르는 형편이였다. 그러니까 아이들 보고 “선생님께 일러바치겠다. 그런 못된짓 또 하겠니?” 하는거나 마찬가지—엄포에 불과한것이다. 하건만 효험은 아주 신통하였다. 벼락같이 맞는 단방약이였다. 이튿날부터 나는 마음놓고 자유로이 기자들과 접촉을 할수가 있게 되였다. “옥추경(玉枢经)”바람에 놀란 귀신들이 싹 도망을 쳐버렸던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다 끝난것은 또 아니다. 또 하나 있다. 내 일본감옥 동기생 송지영(KBS 전 리사장)의 묘소를 찾아보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가을에 서울서 둘이 만나기로 기약을 한 그 친구가 장장 40여년은 참으면서도 마지막 반년을 못 참아서 봄에 타계를 해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이 돼있었던것이다. 서울국립묘지사건을 생각하니 아쓱하여 대전국립묘지를 찾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국립묘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누가 카메라에다나 담아가지고 외곡된 선전을 하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앞을 서서였다. 우리 부부는 국립묘지라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였다. 생각다 못해 나는 옛친구의 묘소를 찾아보자던 계획을 포기해버렸다.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기전에는 이런저런 걸림돌때문에 하고싶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아마 적잖을것 같다. 아쉬운노릇이고 답답한노릇이다.
11    우정 반세기 댓글:  조회:570  추천:0  2016-04-14
우정 반세기        지난해 가을 43년만에 서울나들이를 갔다가 옛친구 몇몇을 만났는데 그중 한 친구와의 해후는 참으로 뜻밖의 일이였다. 그 친구가 78살 늙은 나이에 아직도 살아있을줄은 전혀 예기를 못했었기때문이다.     해후상봉   그날 오후 객실의 문을 누가 와 두드리기에 나는 그저 례사롭게 “어서 들어오세요.” 했더니 문을 열고 들어선것은 백발의 로인이 한분, 한쪽다리가 불인한 모양으로 단장을 짚고 불편스레 걷는데 허름한 잠바차림의 의표는 그리 선명하지가 못하고 좀 추레했다. 내가 얼른 쏘파에서 일어나며 래의를 묻는 눈치를 보이니 그 로인은 뜻밖에도 “학철이, 날 몰라보겠나?” 하고 곧 절뚝거리며 앞으로 다가드는것이였다. 나는 의아스레 그 얼굴을 살펴보았으나 피뜩 떠올라주지를 않아서 고개를 비틀었다. “뉘신지 잘…” “내가 류만화(刘晚华)야, 류만화… 공병(工兵)… 몰라? 공병!” 50년만에 해후상봉을 한 두 늙은 절름발이는 력사적이고도 감동적인 포옹을 했다. 1939년 가을 중국 강남(양자강남안)전선에서 서로 갈라진 뒤 꼭 50년, 해수와 달수로 꼭 50년만이였다. “난 임자가 여적 살아있으리라곤 꿈에두 생각을 못했었네.” “나두 마찬가지야.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꿈엔들 생각을 했을라구.”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줄은 어떻게 알았지?” “아따 이 사람아, 날 고만 주변두 없는 페물인줄 알았나? 귀가 있구 눈이 있는데.” “아무튼 반가웨. 자 어서 앉으라구.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구.” “아무렴 앉아야지.” 앞상에 콜라 두캔이 놓여지는 동안 이야기는 잠시 동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 댁내는 다 평안하구?” “그 댁내가 전연 평안치를 못하니까 탈이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여?” “마누라가 죽은지가 벌써 10년이나 됐다구.” “음 그래… 거참 안됐구먼. —그럼 아이들은?…” “응, 아이들이야 있지. 4남매… 아들 둘에 딸이 둘 있긴 있지만 말야… 아들놈들은 다 이민인가 뭔가를 가버리구 하나두 없어. 그리구 딸년두 큰년은 제멋대루 떠다니느라구 코빼기두 볼수가 없구.” “그럼?…” “응, 막내년 하나 데리구있지. 하지만 이건 또 관절염인가 뭔가루 운신을 제대루 못하지 뭐야. 그러니 제년이 날 시봉하는게 아니라 내가 제년을 시봉하는 셈이지. 참 세상에 별놈의 팔자두 다 많지!” 이렇게 말하고 류만화가 자탄조로 허허 웃는데 나도 동정하는 웃음을 따라 웃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임자를 찾아온건 신세타령을 하려구 온게 아니여. 40여년 동안 이 가슴속에 맺혔던 억울함을 호소하려구 온거여. 그 억울함을 풀어보려구 온거란 말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여?” “들어봐, 임자는 인민군출신이지… 난 국민당출신이구. 안 그런가?” 나는 대답없이 그저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쉴새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일어나 창문을 좀 열어놓고 다시 앉았다. “하지만 우린 항일전쟁때 같은 지대(支队)에 속했던 전우가 아닌가. 강남전선에서 우리 다같이 총을 메구 달아다니잖았나. 임자나 내나 다 김원봉(金元风)의 부하구 박효삼(朴孝三)의 부하가 아니였던가. 안 그런가?” “그래 맞았어, 틀림없다구.” “그러니까 우린 다 항일동지지? 독립군. 조선의용대 대원.” “음 그렇지.” “그런데 너희가 날 어떻게 그렇게 섭섭하게 대해줄수 있니?” 나는 짚이는데가 있어서 속이 뜨끔해 아무 대꾸도 안하고 그저 가만있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잡아줄수 있니? 내 이 량심이 말야… 제 항일동지를 말야… 응? 어디 말 좀 해봐라!” “이봐 류만화, 그렇게 격해하지 말구 내 얘길 좀 들어.” 그는 담배를 뻑뻑 빨면서도 애써 자제하며 근청할 자세를 취했다. “그땐 형편이 그렇게 됐었다구.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건 없어. 립장을 바꿔가지구—우리 립장에 서서—한번 좀 생각해보라구.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였는가. 임자가 섭섭해하는건 나두 충분히 리해를 해.”     강남전선   30년대, 중국의 웨스트 포인트(西点军校)라는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는 조선학생이 상당수 있었다. 그 대부분이 다 보병과나 기병과 또는 포병과를 택했었는데 전무후무로 오직 한 사람만이 공병과를 택했었다. 그 단 하나밖에 없는 공병과출신의 항일군인이 곧 이 류만화였다. 류만화는 얼굴빛이 워낙 희고 코날이 서고 또 머리까지 노르께한 까닭에 “트기”라는 별명으로 당시 항일부대에서는 불렸었다. 이런 친구가 만 50년—반세기가 지나서, 43년만에 서울나들이를 온 나를 호텔로 찾아와 항의를 한것이다. 항일전쟁 당시 우리가 소속했던 조선의용대에는 포병도 기병도 다 없었던 까닭에 어느 “과”를 졸업했든간에 례외없이 다 보병노릇을 해야 했다. 그래서 공병과를 졸업한 류만화도 보병이 아니될수 없었는데 그는 그게 맞갖잖아 이따금씩 볼멘소리를 하군 했다. “까마귀둥지에 소리개를 앉히라지!” 그러면 여느 친구들이 듣고 가만있잖고 의례 얄망스레 이죽거리며 한마디씩 하는것이였다. “그러게 말야, 범더러 나비를 잡으라는 격이야.” “아냐, 코끼리더러 파리를 잡으라는 격이야.” “틀렸어, 항우(项羽)더러 송사리를 뜨라는 격이야.” 또는 “우리가 맞아죽으면 그러묻는건 땅파기전문가가 다 맡아해줄테니까 뒤걱정 없구 좋지 뭐. 그렇지 ‘트기’?” “그러다가 그 ‘트기’전문가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 “미리 저 들어갈 구뎅일 파놓으래지, 공병삽으루.” “와하하!…” “낄낄… 낄낄…” 이러한 상태로 류만화는 우리와 함께 그럭저럭 양자강이남지역의 전장들을 전전(转战)했다. 그는 성질이 좀 고독한편이여서 전우들과 터놓고 사귀지를 잘 못하는 까닭에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존재로 됐다. 무슨 우스운 일이 있어서 모두들 폭소를 터뜨리는 마당에도 그는 그저 싱글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고 놀려줘도 대꾸를 아니하고 그저 시물거리기만 할뿐, 생전 골이란건 낼줄을 몰랐다. 이러한 그가 전에없이 질색을 하며 펄쩍 뛴적이 꼭 한번 있었는데 그것은 어느 친구가 죽어자빠진 적병의 시체에서 군화를 벗겨냈을 때였다. “죽었으면 그만이지 또 발까지 벗겨? 저, 저, 저 승냥이!” 이렇게 내뱉으며 그가 낯색까지 변하는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음, 저 친구 맘이 어지간히 무던하군그래.)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었다. 한데 그가 부족점이라면 정치학습을 게을리하는것이였다. 우리가 다들 맑스—레닌주의서적을 파고드는 판에 그만은 아주 딴세상에 사는 사람같이 무관심했었다. 학습토론때도 그는 입 한번 열어본적이 없다. 그저 무료하게 앉아 듣기만 했다. 꾸어다놓은 보리자루인지 전당잡은 초대인지 알수가 없을 지경이였다. 그러므로 1939년 가을, 소상강반에 주류하고있던 조선의용대 제1지대(지대장 박효삼)가 좌와 우로 갈라져 좌파들이 팔로군(공산군)과 합류할 목적으로 북상을 할 때 그가 우파에 속해 그대로 머무른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해야 할것이다. “이봐 류만화, 우리 간다구, 잘 있어.” “응, 잘 가.” 그와 나는 이 지경 기치가 선명하게 또 간단스레 작별을 했다. 그때 누가 그 초연 자욱한 전쟁판에서 살아남아 50년후에 다시 서울에서 해후를 하게 될줄 알았으랴! 후에 류만화는 한국광복군에 입대를 하고 그리고 나는 또 나대로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하다가 중상을 입고 붙들려 일본감옥으로 압송이 됐다. 1945년 10월 9일, 맥아더사령부의 정치범석방명령으로 일본 전국 각 감옥의 정치범들이 일시에 석방될 때 나도 풀려났다. 그리하여 3주일후에는 다시금 서울땅을 밟게 됐다. 서울서 보성고의 교복을 입은채 상해로 떠나간지 만 10년만에 귀환을 한것이였다. 서울에 돌아온 다음다음날 나는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와 련계가 닿아 옛 전우들과 4년만에 다시 상봉을 했다. 내가 일본군에게 잡혀간 뒤에도 그들은 계속 태항산일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하자 강행군으로 귀국을 해 그중의 일부가 서울에 진출한것은 바로 두달전의 일이라는것이였다. 서울위원회의 조직부장 심성운(沈星云)만은 1942년에 적군 점령하의 천진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 징역을 살다가 8.15때 풀려났었다. 그는 본디 서울사람이였으므로 말하자면 고향에 돌아와 감옥살이를 한 셈이였다. 그도 역시 나와는 사관학교 동기생이였다. 해가 바뀌여 1946년도 어느덧 여름철에 접어들었을무렵이다. 하루는 심성운이 전에 조선의용대에 소속했던 몇몇 동지만을 따로 불러가지고 정황을 소개한 뒤 잇달아서 주의를 주는데— “다들 류만화를 알지? 공병 말이야. 조선의용대에 있던… ‘트기’… 노랑머리… 응. 그치가 광복군의 신분으루 귀국한건 다들 잘 알잖아. 한데 요놈이 이번에 군정청엘 들어가 경무부의 뭔가가 됐다는거야. 워낙 인간이 변변치 못하니까 기껏해야 무슨 끄나불노릇이나 하겠지만서두… 우리 몇몇은—그놈의 얼굴을 다 아니까—아주 재미가 적게 됐단 말야. 그놈앞에선 어떻게 숨을 재간이 있어야 말이지. 도깨비감투나 쓴다면 또 모를가. 그러니 이제부턴 그놈을 각별히 경계하구 어떡해서든 그놈하구 맞다들잖두룩 신경을 써야겠어. 이건 경무부에 들어가있는 우리 프락찌야가 빼내온 정보니까… 그쯤 알구 명심들 하두룩.” 심성운의 신칙을 받고 하도 기가 막혀 내가 “공병을 보병으루 써먹는다구 소리개가 어쩌구 까마귀가 저쩌구 불평을 하던 놈이 이제 그놈의델 들어가선 뭘 할 작정인구? 거긴 까마귀둥지가 아니구 소리개둥지던가!” 하고 푸념을 했더니 련락부장 김창규(金昌奎, 일명 王克强)가 듣고 코살을 짊어졌다. “범이 배가 고프면 가제두 뒤진다잖는가. 공병삽으루 땅이나 파먹자니 구차할게구.” 심성운은 감옥살이 팔자를 타고났던지 다음다음해 봄에 당국에 체포돼 또다시 서대문교도소에 갇혀있다가 남북전쟁이 터지고 사흘만에 인민군의 땅크가 벽돌담을 무너뜨리며 들이닥치는통에 해방을 받아 다시 월북을 했다. 그리고 김창규는 정보공작을 하는 관계로 미제의 고용간첩인 리승엽의 은사(隐私)를 너무 많이 알았던 까닭에 남북전쟁시기 한때 점령된 서울에서 위풍을 떨치던 그자에게 꺼리는바 돼 마침내는 그 일당이 조작해낸 터무니없는 죄명을 들쓰고 학살을 당했다. 김창규는 강원도 강릉사람으로서 그와 나는 30년대에 상해에서 반일테로활동을 같이했을뿐아니라 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의 동기생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그의 말만 믿고 그도 우리 같은 총각으로만 여겼었는데 귀국한 뒤에 보니 안해가 있을뿐아니라 딸까지 하나 있었다. 어느 일요일날 그가 웬 녀자대학생을 데리고 공원에 놀러 왔다가 리소민(李苏民, 일명 李景山)이라는 친구에게 들켰다. 리소민은 그가 젊은 녀자와 련애를 하는줄 알고 “당장 소개를 못하겠냐.”고 족쳤더니 그는 시물거리며 “실은 내 딸이다. —아저씨께 인사드려.” 하고 실토를 해 비로소 그의 가짜총각이 들통이 났었다. 이것을 나중에 알고 우리 진짜총각출신들은 모두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멀쩡한 핫애비놈이 사람을 속였지 뭐야.” 심성운은 그 조카사위 조규홍과 한날에 풀려나 역시 한날에 월북을 했는데 그 조카딸 김녕현만은 서울에 떨어져 유복자를 낳아 키웠다. 그 유복자 조관현은 현재 서울에서 한 해운회사를 경영하고있단다. 46년 11월에 내가 월북하기 직전에 며칠간 숨어있던 집이 바로 서대문구 행촌동에 있는 김녕현의 집이였는데 그들 모자의 소식을 내가 알게 된것은 바로 지난 2월. 내가 서울을 떠난 뒤에 KBS 1TV가 방영한 “연변동포작가 김학철”에서 김녕현이 죽은줄만 알았던 김학철을 발견. KBS에 물어가지고 국제전화를 걸어와서였다. 이밖에 예비지식으로 또 좀 밝혀둘것들이 있다. 류만화가 앞에서 언급을 했듯이 나는 남북전쟁 발발이전에 한때 인민군총사령부에 몸담아있었다. 그리고 류만화로 말하면 국방군에서 공병부대를 창건하는데 공적을 세운 사람이란다. 이 사실을 나는 나중에 한국독립동지회 회장 김승곤(金胜坤, 일명 黄民)을 통해 알았다. 김승곤도 역시 처음에는 조선의용대 대원이였으나 후에 우리가 북상할 때 리념상의 문제로 혼자 탈영을 해 한국광복군으로 넘어갔던 사람이다.     외나무다리   류만화가 적대적인 존재로 부상했다는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한 심성운이 그후 한달이 채 못돼 자기 자신이 그 적대적인 존재와 길거리에서 맞닥뜨린다는 아이러니컬한 우연지사가 발생했다. 그날 오후 볼일이 있어 인사동에서 락원동으로 가다가 외나무다리가 아닌 파고다공원 북문께서 둘이 딱 마주쳤던것이다. 심성운은 하릴없이 연극쟁이로 급변해 엉너리를 쳐야 했다. “아니 이게 누구여? 류만화가 아닌가!” “심성운!” 반갑게 손을 맞잡고 “우리가 이거 몇해만인가. 가만있자, 그게 아마 39년이였지. 그렇지? 그럼…” 손가락을 꼽으면서 “40, 41, 42, 43, 44, 45, 46, …7년만이군그래… 아하하!…” “여느 동무들도 다 무고한가? 박대장(박효삼)이랑 김학무(金学武)랑…” “박대장은 무고하지만 김학무는—저세상으루 간지가 벌써 옛날이야. 태항산에서 희생이 됐다구. 태항산에서 희생된 사람이 숱해. 림평(林平)이랑 호철명(胡哲明)이랑 진락삼(陈乐三)이랑…” “으응, 그럼 석정(石鼎, 일명 尹世胃)선생은?…” “석정선생두—42년에 전사했지 뭐야. 문명철(文明哲)이, 호유백(胡维伯)이, 김정희(金鼎熙), 마덕산(马德山)이… 뭐 숱하다니까.” “거참 안됐구먼. 뛰여난 인재들이였는데…” “누가 아니래여.” 심성운은 새삼스레 애석한듯 고개를 비틀어꽂았다. “우리 길거리에 서서 이럴게 아니라 어디 조용한데 좀 가앉아 얘기하는게 어때, 바쁜가?” “아니 바쁘잖아. 좋아, 어서 가자구.”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허름한 다방을 찾아들어가 한쪽 구석방에 자리잡아 앉았다. “뭐 할가. 커피 할가?” “아무려나, 좋겠지.” 류만화는 강남전선에서 갈라진 뒤 여러 해포 격조하게 지내느라고 피차에 생사도 모르는 옛친구들의 일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였다. 그러나 심성운은 속으로 (요놈이 연극을 참 잘 노는구나. 아주 수단군이 돼버렸단 말야. 하지만 네따위에게 넘어갈 심성운이 아니다.) 하고 정신을 도사렸다. (요놈을 떼쳐야겠는데… 어떡한다?…) 류만화가 또 궁금한 소식들을 잇달아 물어보는것을 심성운은 “가만, 내 잠간 좀…” 하고 화장실에를 다녀오려는것처럼 꾸미며 얼른 일어나 자리를 떴다. 류만화는 심상히 여기고 다시 권연 한대를 피워물고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다방 뒤문으로 구차스레 빠져나온 심성운은 그물을 벗어난 새가 돼가지고 훨훨 날지 못해 성화가 날 지경이였다. 이튿날 다시 우리를 모아놓고 심성운은 “고놈의 ‘트기’가 아주 딴 사람으로 돼버렸더라니까. 특무훈련을 받아두 단단히 받았어. 얼뜨게 걸려드는걸… 정말이지 천우신조야.” 하고 아슬아슬하게 모면한것을 자추한 뒤 “다들 전철을 밟지 말라.”고 다시한번 신신당부를 하는것이였다. “그 새끼 아주 꺼버리는게 더 낫잖을가?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아예.” “그것두 좋긴 하지만… 그러자면 일이 너무 좀 거창하잖을가?” “저놈들에게 구실을 주게 되기가 쉽지… 좌익을 탄압할.” “그것두 그래.” “좀더 두구보다가… 차차 형편 봐가며 하는게 좋을것 같은데.” “그게 온당해. 구태여 긁어 부스럼 만들것 없지 뭐.” 이리하여 적극적인 대책의 강구는 뒤로 미루어지고 그날의 모임은 일단 헤쳐졌다. 이무렵부터 공산당본부—정판사(精版舍)가 습격을 받고 또 독립동맹 서울위원회—수산회관(水产会馆)이 습격을 받는 등 폭력사태가 잇달린데다가 군정청파 CIC에 박혀있는 우리 프락찌야의 보고로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 우리 사람들의 이름이 밝혀져 박달(朴达)과 나는 행동이 불편하므로 먼저 피신을 시켜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당시 박달은 대학병원 문외과(文外科)에 입원해있었고 또 나는 소아과 과장 리병남이 우리 액내사람이였던 관계로 소아과에 숨어있었다. 박달은 8.15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날 때 벌써 척추카리에스로 걷지를 못했는데 그후 죽을 때까지 종시 침대에서 일어나보지를 못하고말았다. 박달은 10월말에 륙로로 38선을 넘고 그리고 나는 11월초에 해로로 해주에 득달했다. 조선의용군출신의 저명한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이 당국에 체포돼 사형을 당하고 또 같은 조선의용군출신의 탁월한 정보원 성시백(成时伯)이 역시 간첩죄로 처형을 당한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나는 평양에서 김태준의 부인 박진홍(朴镇洪)을 만나 저간의 소식을 소상히 들었다. “가장 믿어온 제자가 밀고를 했지 뭡니까. 정말 아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니까요.” 박진홍의 이 말을 듣고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성시백은 중국팔로군에서도 띵샹밍(丁向明)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정보전문가로서 우리의 조르게라고 할만한 사람이였다. 조르게(1895—1944)는 일본정부의 비밀, 주일독일대사관의 비밀 등을 쏘련에 통보한 죄로 일본군국주의에게 처형당한 독일인공산주의자다. 아무튼 나는 그와 맞다들가봐 겁이 나는 인물—류만화의 존안(尊颜)을 우러르는 영광을 끝내 지니지 못한채 서울을 떠나게 된것만을 못내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얼마 아니하여 류만화라는 존재는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의 본이름도 나는 모른다. 서울에서 쓰는 이름도 역시 모른다. 남북전쟁기간 나는 북경에 들어와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문학공부를 하고 또 서대문교도소에서 풀려나 입북을 한 심성운은 북경대사관에 파견돼와 무슨 비밀적인 일을 하고있었는데 그와 나의 담화에서는 단 한번도 류만화가 거론된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류만화는 우리들의 뇌리에서 아주 사라져버렸던것이다. 그때 심성운의 안해는 서울에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이미 목숨을 바친 뒤였으므로 그는 철부지 어린 남매와 나라일에 외동딸을 바친 장모를 모셔다가 대사관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있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은 오로지 그 외조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이렇듯 내 머리속에서 수십년 동안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던 류만화가 어두운 밤에 홍두깨모양 불시에 들이닥쳐가지고 “가슴속에 맺힌 억울함을 호소하러 왔다”고 가슴을 짓찧으니 내가 어리둥절한것도 무리는 아니잖은가.     두 독립군   “이봐 류만화, 그렇게 흥분하지 말구 내 얘길 들어봐.” 이야기는 가리산, 지리산으로 50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는가 하면 또 남북조선과 중국천지를 갈팡질팡하다가 마침내는 서울의 한 호텔의 객실로 되돌아온다. 류만화(78) 대 김학철(74). “아냐, 내 얘기부터 먼저 좀 다하구. 임자 얘긴 나중에 들어두 늦잖아.” 류만화가 권연 든 손을 내저으며 고집을 쓰는 바람에 나는 하릴없이 공세에서 수세로 전략전술을 바꿔야만 했다. “좋아, 그럼 어서 속시원히 다 쏟아놓으라구.” “난 말야, 그날 심성운일 만나서 여간만 반갑지가 않았어. 그 지긋지긋한 전쟁판에서 제나 내나 죽잖구 살아남아 조국땅을 밟게 됐으니 그게 왜 대견하잖겠나. 더구나 피차간… 칠팔년 동안… 소식들두 모르구 지낸터가 아닌가. 그래 옛친구들 소식을 알구싶은게 하두 많아서 앞에 놓인 커피가 다 식어뻐드러지두룩 마시잖구 난 그냥 기다렸지. ‘화장실엘 간 친구가 왜 이리 더딘고.’ 하구 말야. 그런데 결국은 날 따버리구 달아났어. 날 따버리구 달아났단 말야! 임자 날더러 립장을 바꿔놓고 한번 생각해보랬지? 바루 그거여. 임자가 다 식어뻐드러진 커피 두잔을 앞에 놓구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하구 앉아있다면 그 맘이 어떻겠는가. 한번 좀 처지를 바꿔놓구 생각해보라구.” 따분한 침묵. “내가 그래 전쟁터에서 한솥의 밥을 먹구 한전호에서 잠을 잔 옛친구, 옛 전우를 잡아바칠 사람이야? 아무리 리념적으루 좌우인지 전후인지 갈라졌다구 하더라두 말야.” “임자의 그 심정은 나두 충분히 리해를 해. 하지만 그후에 발생한 일들이 왜 있잖은가. 그러니 우리루서야 경각성을 높이잖을수 없었지.” “그후의 일들이라니?…” “김태준사건, 성시백사건… 그리구 심성운이랑 다 잡혀서 갇혀있다가 전쟁통에 겨우 풀려나잖았는가.” “김태준인 난 애당초에 알지두 못하는 사람이야. 얼굴도 못 봤어. 그 사람은 후에 태항산으루 들어갔던 사람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알아? 난 태항산을 구경두 못했는데!” “옳아, 그건 그래. 김사량(金史良)이랑 다 나중에 들어왔던 사람이니까.” “그것 봐, 내가 알턱이 없잖은가. 그러구 그 성시백이… 성시백인 나두 물론 잘 알지. 잘 알지만서두 성시백인 내가 잡아준게 아니거든. 내 얘길 좀 들어봐. 난 그때 심성운이한테 따돌리우구 큰 충격을 받았어.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정도루 말야. 그래 심기일전해 단호히 군정청을 나와버렸어. ‘이러다간 내가 옛친구들한테 사람취급을 못 받겠구나.’ 생각하구 말야. 그렇지만 성시백일 잡아바칠라면 그럴 계제가 없는건 아니였어. 기회는 있었어. 그가 잡히기 서너달전이였을거야 아마. 혜화동 로타리 좀 못미쳐서 둘이 딱 마주쳤지 뭐야. 전연 우연이였지. 그가 이남에 내려와 뭘 하구있는걸 내가 왜 모르겠어. 너무나 잘 알구있었지. 그러구 그를 물어놓으면 어떤 보람이 있을지두 잘 알구있었지. 사실 난 그때 반실업자나 다름이 없었어. 구차하게 지냈지. 그렇지만 난—하늘이 굽어보지—조금치두 맘이 움직이질 않았어. 한잔 나누구싶었어. 하지만 어떡해? 그는 나를 한눈 보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야. 그러게 당황한 기색이 환히 알리게 얼른 외면을 했어. 난 어떡했겠어? 할수 있나. 나두 외면을 했지. 그럴 밖에 무슨 도리 있어. 참 기가 막히지. 옛친구끼리 만나서두 서루 모른체하구 그냥 지나쳐야 하다니!…” 이때 전화의 벨이 울려서 이야기는 잠시 중동이 끊겼다. “무슨 긴한 일인가? 내가 너무 시간을 잡아먹는거 아냐?” “아냐아냐, 괜찮아. 어서 얘기 마저 하라구.” “뭐 더 얘기할것두 없어. 죽기전에 임자를 만나서—임자하구 심성운하구 단짝이 아닌가—그러니까 임자를 만나서… 이속에 맺힌 억울함을 호소하려구 한것뿐이야. 내 진정을 피력하고싶었을뿐이야.” 그의 가슴속에 40여년을 서렸다가 일시에 뿜겨져나오는 원정(冤情)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의 진정을 나는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우리는 새삼스레 두손을 굳게 맞잡았다. 살아남은 두 독립군. 해묵은 소나무 같은 두 독립군. 풍상 겪은 두 독립군—그 두 독립군의 거칠고도 정겨운 악수였다. “잘 알았어. 나두 긴 해명은 않겠어, 하지만 슬프게두 심성운인 이런걸 모르구 저세상으루 갔을게야. 그들의 생사두 모르구 난 이렇게 30년을 살아왔다니까, 56년 하반년부터.” “그두 당했을가?” “누군들 무사했겠어? 그 피바람속에서!” 류만화는 신음소리와도 같은 탄식을 했다. “우린 그동안 다 비극의 주역들을 담당했었어. 력사적비극, 민족적비극. 안 그런가?” “동감이야.”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고 둘이 다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하긴 해탈한 웃음이였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그는 앞상에다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놓으며 말하는것이였다. “옛친구가 먼데서 왔으니 의당 제 집에다 모셔야겠지만 내 집안형편이 지금 엉망이야. 딸년 시중드느라구 허리뼈가 휠 지경이지. 80의 고개와 이마받이를 하게 된 사람이 무슨 놈의 판국인지 나두 모르겠다니까. 그러니 림시처변으루 임자 객비를 한달이구 두달이구 있는 동안은… 내가 대기루 했어. 이거야, 우선 받아둬.” “이거 봐 류만화, 그런 념려는 고만두구 제몸이나 돌봐요. 알겠어? 내 객비는 다 출판사가 부담하는거야. 그러구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강연료가 또 꽤나 된다구.” 류만화는 저를 무시한다고—친구를 외대한다고—골을 펄쩍 냈다. 나는 사정사정해 겨우 그 봉투를 호주머니에 도루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등에다 손을 얹으며 관곡히 충고를 했다. “그 담배 제발 좀 끊어요. 통일이 되는걸 보자면 좀더 살아야잖겠나.” 류만화는 대답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을 씀벅씀벅하더니 또 한번 허구픈 웃음을 웃는것이였다.
10    서울나들이 댓글:  조회:540  추천:0  2016-04-14
서울나들이        지지난해 가을, 우리 부부는 40몇년만에 서울나들이를 갔다가 거리거리가 놀랄만큼 변한데에 어리벙벙해 웃음거리극을 적잖이 놀았다.     자동판매기   난생처음으로 자동판매기라는것을 봤는데 거기다가 동전을 밀어넣으면 따근따근한 커피가 저절로 나오는것을 보고 신기해했는가 하면 또 라면이 제창 컵에 들어있고 사발에 들어있고 해서 우리 부부는 감탄하다 못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을 정도다. 우유까지 갑속에 넣어 판다는것을 알고는. (우리가 이거 마법의 세계를 유람하고있잖나?) 의심이 들 지경이였다. 천지개벽이래 “우유는 의례 병속에 들어있기 마련”이라는 관념이 무너지는 마당이였다. 커피를 한잔씩 사 마셔볼 생각으로 우선 100원짜리 동전 한개를 넣어보았더니 아니나다르랴 기분 좋은 덜꺼덕소리와 함께 1회용컵에 골막하게 담긴 커피가 척 놓여지는게 아닌가. 그런데 웬 일인지 거스름돈 50원은 나오지를 않는거다. 암만 기다려도 나오지를 않는거다. (나오다가 어디 걸렸나?) 걸린것을 밀어낼 료량으로 100원짜리 동전 두개를 또 밀어넣어봤더니 이번에도 역시 커피만 나오고 거스름돈은 감감무소식이다. 나는 슬그머니 화증이 났다. (서울놈들이 워낙 새알 볶아먹을 놈들이라더니… 요놈의 판매기마저 고 못된 버릇을 따잖나!) 협잡에 걸려 억울하게 50원씩 더 주고 산 커피를 두 늙은이가 마주서서 마시고있을즈음에 웬 젊은이 하나가 다가오며 곧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뒤져내는품이 아무래도 또 우리처럼 올가미를 쓸 모양이라 “이보 젊은이, 그놈이 거스름돈을 떼먹는 버릇이 있으니 그런줄 알라구.” 귀띔을 해주었다. “거스름돈요?” 그 젊은이는 판매기의 어느 부위를 한번 눈여겨보더니 곧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이면서 “할아버지, 여기 거스름돈 다 나가구 없다구 불이 켜졌는걸 못 보셨군요.” 도리여 나를 일깨워주는것이였다. 촌닭 관청에 잡아다놓은것 같은 우리 두 늙은이는 네 눈을 마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그런 복잡한 문서를 알턱이 있나. 허 참, 욕은 괜히 했지, 새알을 볶아먹느니뭐니.     블랙커피   커피하고는 무슨 업원인지 이것 말고도 또 한번 곡경을 치러야 했다. 어느 점잖은분이 끄는대로 강남의 무슨 리버사이드라나 레이크사이드라나 하는 호텔의 커피숍에를 들어가봤는데 사단은 거기서 났다. 그분이 웨이터에게 주문을 하는데 “여기 블랙커피 하나,—선생님은 뭘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나는 졸지에 “오, 블랙커피라는게 아마 제일 비싸고 제일 고급인 모양”이라고 판단, “여기두 블랙 하나.” 하고 가장 익숙한체 웨이터에게 손가락까지 하나 뻗쳐보였다. 마치 일생의 태반을 힐튼호텔 같은데서만 살아온 무슨 직업외교관따위를 방불케 하는 풍도였다. 여기까지는 아주 멋이 있었는데 그다음이 급전직하, 글자 그대로의 “고배를 들다”였다. 앞에 갖다놔주는 검은색의 커피를 태연자약하게 한모금 마신 나는 (아이고, 이거 탕약 아냐?) 혼자 속으로 왼새끼를 꼬았다. 이렇게 소태같이 쓴것을 좋다고 마시는 놈들의 취미를 정말 모를노릇이였다. 그러나 고상한 신사적인 풍도를 흐트러뜨려서는 아니되니까 의식적으로 얼굴에다 두가지 표정을 조화롭게 지어야만 했다. 그 하나는 깊은 맛을 음미하는것 같은 우아한 표정. 그리고 또 하나는 사뭇 즐거운양 환하게 밝은 표정. 이 두가지였다. 거기다가 행복한것 같으면서도 또 대수롭잖게 여기는것 같은 표정까지를 가미한다면 더욱 효과적일터이나 아쉽게도 그 경지에까지는 도달하지를 못한 모양이였다. 예로부터 전제군주—또는 공화의 간판을 건 독재자—의 가혹한 통치하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백성들은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시시각각 “소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를 웨쳐야 하고 또 “상감님 만수무강 엎드려 비나이다”를 웨쳐야만 했었다. 안 그랬다가는 당장에 목이 달아날판인데 뉘라서 감히? 그 쓰디쓴 블랙커피 한잔을 가장 감미로운듯이 들내면서 나는 가련한 백성들의 신세를 톡톡히 체험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면서도 “행복합니다”를 웨쳐야 하는 백성들의 고된 신세를.     사발면   파고다공원에서 우리 부부는 이 세상에 컵면이라는것과 사발면이라는게 있다는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그때까지 라면이라는것은 의례 종이봉지나 비닐봉지에 들어있기 마련, 다른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걸로, 존재하지 못하는걸로 알고있었다. 달팽이란 의례 라선형껍질속에 들어있기 마련인것처럼. 처음에 웬 로인이 벤취에 걸터앉아 컵면을 들고있는것을 보고 신기해서 “그게 뭐라는거죠?” 물었더니 그 로인은 나를 아래우로 한번 훑어보고나서 “컵면이요.” 대답을 해주는데 그 여운에 “저게 대체 어느 산골에서 기여나온 무지렁이야.”가 력연했다. 그도그럴것이 이 넓은 서울바닥에서 나이 70이 넘도록 컵면이 뭔지를 모르는 인간이 어찌 사람대접을 받을것인가. 매점에다 주문을 하니 들었다 봤다 하고 55초가 채 못 걸려 뜨거운 컵면 두개를 갖다주는데 열어보니 “하느님 맙소서” 왜 하필이면 시래기고명일고. 나는 기가 막혔다. “문화대혁명”때 10년 동안 감옥에서 허구한 날 시래기국만 들이대는 바람에 이젠 보기만 해도 이에서 신물이 날 지경인 시래기를 이 좋은 서울에 와 또 복습을 하라다니! 시래기를 마다하지 않는 김학철 부인에게 컵 둘을 다 떠맡기고 “이런거 말고 다른건 없느냐?”고 교섭을 하니까 “육개장이 어떨가요?” 한다. 육개장소리에 귀가 번쩍 띄여 “어서 가져오라.”니까 이번엔 또 “사발면으루 할갑쇼?” 한다. “사발면? 사발면이란게 뭐지요?” 나의 이런 무식한 물음에 조금도 개의찮고 그 사람은 일편단심 오로지 팔 욕심에 “녜, 저 컵면보다 갑절이나 큰거. 이렇게 큰겁니다.” 하고 두손으로 사발의 원둘레를 형용해보이기까지 하는것이였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그 육개장사발면은 그때까지 먹어본 무슨 호텔의 뷔페, 무슨 하우스의 정식, 무슨 관의 뭐라는 료리들이 다 무색해질 지경으로 인상적이였다. 한마디로 내 식성에 꼭 들어맞는 절품이였다. 하긴 값이 굉장히 싸다는것도 일정한 작용을 했을것이다. 필연적인 귀결로 나는 파고다공원 매점의 육개장사발면 단골손님이 돼버렸다. 한주일에 적어도 한두번씩은 꼭꼭 그곳을 찾았다. 그렇거늘 하늘도 무심하지, 이 웬 날벼락이냐. —공업용소기름으로 만들었다는게 들춰 드러나다니!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그 라면이 공업용소기름으로 만들어진거라니! 신문, 텔레비들이 대서특필… 시끌벅적… 아침저녁으로 보도하는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나는 어이가 없었다. (비행기를 세번씩이나 갈아타며 나흘닷새 걸려서 어렵사리 찾아온 서울. 내가 그래 어려운 서울나들이를 고작 공업용소기름을 먹으러 왔단 말인가? 무에 먹을게 없어서!) 나는 식도로부터 위를 거쳐 소장, 대장에 이르기까지 온통 와셀린과 모빌유를 혼합한것 같은 끈적끈적한 물질로 맥질을 해놓은것 같아 속이 구질구질한게 자꾸 메스꺼워났다. 아무리 돈벌이에 눈이 뒤집혔다 한들 그런 큰 회사가 성예도 돌보잖고 신용도 저버리고 엄청난 량의 공업용소기름을 들여다가 속임수를 써서 퍼먹이다니. 인사불성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꾸 먹는 이야기만 하는것 같아 죄송스러우나 서술의 순서가 워낙 그렇게 걸신스럽게 돼먹었으니 널리 량해를 해주시기 바란다.     대구탕   대구탕의 정식명칭은 대구탕반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반(饭)”자를 떼고 그저 대구탕이라고 하는데 그전 세월에는 한그릇에 15전씩 했었다. 당시 한그릇에 12전씩 하던 설렁탕과 더불어 서민층이 즐기는 음식으로서 일종 서울의 명물이였다. 대구탕이란 경상도 대구식(大邱式)으로 끓인 장국밥. 주로 곱창, 곤자소니, 흘떼기, 양 따위를 푹 고아서 양념을 하고 맵게 만드는게 그 특징이다. 이 그리운 대구탕을 40여년만에 한번 먹음으로써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어보려고 애를 쓴 보람도 없이 우리 부부는 끝내 그 원을 풀어보지 못하고말았다.—아쉬운지고! 서울의 한 40대 후반의 친구더러 대구탕을 한번 먹어보기가 소원이랬더니 “아 그게 뭐 어려운 일입니까. 가시죠.” 통쾌하게 자담하고 그 친구는 곧 우리 부부를 차에 태우고 신바람나게 몰아대는것이였다. 이윽고 동숭동 어느 식당(그의 단골집인 모양)앞에 차를 세우는데 보니 아닌게아니라 그 립간판에 명시된 음식목록가운데 “대구탕” 석자가 뚜렷이 들어있잖는가.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보고 회심의 미소를 띠였다. “이젠 먹어놓은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였다. 그러나 하느님 맙소사. 급기야 한그릇씩 입에다 갖다놔주는걸 보니 이게 웬 일이냐. 대구탕하고는 애당초에 사돈의 팔촌도 되기가 어려운 무슨 정체를 알수 없는 괴물탕이 아닌가! “이게 뭔가요?” “선생님, 대구탕을 잡숫겠다잖았습니까? 이 집 대구탕이 아주 유명하다구요. 자 어서들 드세요.” 그 친구가 가장 잘한듯이 또 요공하듯이 자꾸 권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하릴없이 숟가락을 들기는 들었으나 참으로 기가 찼다. 그건 우리가 바라던 그 대구탕과는 거리가 멀어도 이만저만 멀지 않은, 해산물인 생선 대구로 끓인 국—생선국이였다. 하나는 포유류 태생동물이고 하나는 란생류 짠물고기니까 말하자면 륙군참모장을 찾아간다는게 길을 잘못 들어 해군참모장을 방문한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50대 이하의 서울친구들은 진짜대구탕이라는것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이 그저 그렇게 마음 편히 살고들 있었다. 공룡이나 류인원(미사리) 따위는 알아도 맵디매운 장국밥 대구탕은 모르고들 살았다. 홍어회   KBS친구들과 고성의 통일전망대를 가다가 속초에서 하루밤을 묵는데 저녁에 바다가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특별주문인듯 싱싱한 홍어회라는것을 들여왔는데 년장자라고 그러는지 홍어의 머리가 나를 향하게 놓아주었다. 굉장히 큰 길둥그런 접시에 너부죽이 엎드려있는 홍어의 등에는 갖가지 고명들이 얹혀있는데 회칼에 온몸이 저며졌건만 홍어는 그냥 살아서 두눈을 똑바로 뜬채 부울룩부울룩 숨을 쉬고있잖은가. 그 잔인함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닭을 잡는것만 보아도 끔찍해서 고개를 외치고 도망질을 치는 사람의 턱밑에다 왜 하필이면 이런걸 놓아줄가. 참 야속도 하지. 나는 술만 입에 대지 않는게 아니라 무릇 회라고 이름이 붙은것은 다 먹지를 않는다. 내가 괴짜가 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아무튼 그 저녁식사를 나는 체면에 몰려 불고기추렴에 끼여든 노루모양 매우 멋적게 치렀다. 일찌기 광동, 광서 사람들이 산 원숭이의 골통을 까고 골을 파먹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서도 실지로 보지는 못했었는데 서울나들이를 한 덕에 숨이 붙어있는 홍어가 술안주로 되는것을 눈앞에 보았으니 그만큼 견식이 넓어졌다고 해야겠는지 모르겠다. 먹는 이야기만 하다가 첫회의 편폭이 다 차버렸다. 하지만 “민이식위천(民以食为天)”이라고 우리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아마도 먹는게 제일 중한 모양이니 크게 흠잡힐것까지 없을것 같다. 옛집   60년전에 살던 옛집을 한번 찾아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놀라우리만큼 변모한 서울의 거리거리를 둘러볼 때, 관훈동 69번지 옛집이 그대로 남아있어주기를 바란다는것은 한낱 허황한 꿈만 같았다. 그래도 종시 미련을 떨쳐버릴수가 없어서 검불밭에서 수은찾기로 한번 나서봤다. 허허실실로 안국동 네거리에서 인사동을 향하고 걸으면서 왼손편 골목을 하나하나 세여나갔다. 세번째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다가 왼손편으로 두번째 집. 놀랍게도 나지막한 조선기와집이 그대로 남아있잖은가! 전날의 대문간과 행랑방은 “할머니집”이라는 음식점으로 변했고 또 사랑채는 무어라나 하는 표구점으로 변했지만서도 한눈에 알아볼수 있는 우리 집. 옛날의 우리 집이 틀림없었다. 나는 오랜 세월 실전(失传)됐던 족보라도 찾아낸듯 대견해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표구점의 열려있는 가게문안에다 고개를 디밀었다. “여기가 혹시 관훈동 69번지가 아닌가요?” “녜 맞습니다, 69번지.” 대답하며 주인은 찾아온 뜻을 묻는듯이 나를 뻔히 바라보았다. “아니 저… 실은 무슨 볼일이 있는게 아니라… 저 이 집이 옛날에… 그러니까 지금으루부터 한 오륙십년전에… 우리가 살던 집이였죠. 그래 그저 괜히… 지나던 걸음이라 한번 들려본거예요. 딴 일은 없습니다.” 발명하듯 말하고 나는 총총히 발길을 돌렸다. 당나라 시인 하지장(贺知章)이 50년만에 귀향을 하니까 동네아이들이 몰라보고 “어디서 오시는 손님이냐”고 묻는 바람에 감구지회가 더한층 깊었다는 시가 있다. 그 시의 그윽한 경지와는 거리가 먼 현대판시경(诗境)속에 잠긴채 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락원동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바로 옆방인 308호에는 일본 와세다대학교 교수 오오무라씨 부부가 투숙하고있었다. 오오무라씨는 벌써 오래전부터 내 작품들을 일본에다 소개를 하고있었다. 그들 부부와 우리 부부는 그들 부부가 연변대학에 1년간 와있는 동안에 상종이 잦았던 까닭에 아주 친숙한 사이였다. 내가 옛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니까 오오무라씨는 크게 흥미를 가지는것이였다. “래일 한번 같이 가보십시다. 사진을 좀 찍어야겠습니다.” 이튿날 두쌍 네 사람이 “할머니집”에 가 식사를 하면서 녀주인에게 연유를 설명하고 “안채를 좀 구경해도 좋으냐”니까 “어서 그러세요.”라는 한마디로 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안에를 들어가보니 놀랍게도 60년전의 옛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잖은가. 오오무라 부인은 속사포식으로 신바람나게 샤타를 눌러댔다. 여기까지는 아주 만점이였다. 그러나 나중에 “일본말하는 외국손님”대접으로 바가지료금을 씌우는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할래도 락제점이였다. “안채관람료가 너무 비싸군!” 우리 네 사람은 녀주인이 알아들을가봐 일본말로 이렇게 지껄이고 한바탕 웃었다. 우리가 바가지료금을 알면서도 모르는체 흔연스레 치러주는것을 보고 약삭빠른 녀주인은 후회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뿔싸, 좀더 우려내도 되는걸!) 밖으로 나오자 출입문에서 엇비슥이 좀 떨어진 길바닥을 가리켜보이면서 “여기가 바루 방학때마다 내가 나와 서서 우편배달을 기다리던 곳”이라고 거두절미(去头切尾)하고 안내를 하니까 오오무라씨는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우편배달은 왜요?…” “까닭이 있죠.” 하고 잇달아서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해드렸는데 그 사연인즉 대개 이런것이였다. 내가 서울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다들 기말시험이 끝나는 날이 곧 방학날이였다. 방학만 하면 시골에서 올라온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썰물처럼 서울을 빠져나갔으므로 통신부(성적표)는 다 며칠후에 우편으로 부쳐주게끔 돼있었다. 그런데 나는 자신의 받을 점수가 어느 정도일것을 매양 손금에 다 쥐고있었으므로. —뻔하잖은가! 그런 휘황찬란한 통신부를 죽어도 어른들의 눈에 띄게 할수는 없는 형편이였다. 참으로 딱한 사정이였다. 그래서 통신부가 배달될무렵이면 미리 나의 물샐틈없는 경비진을 쳤었다. 눈에 화등잔을 켜고 보초를 서는것이다. 그리하여 영낙없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통신부는 영원한 비밀에 붙여지군 하는것이였다. 설명을 마치고 우리 넷은 그 보초 서던 유적에 서서 또 한바탕 웃음판을 벌였다. 퇴페리발소   서울서는 리발소를 듣기 매우 고아하게 리용원이라는것 같으나 나는 습관되지 않아 그냥 우리 식으로 부르니 널리 량해를 해주시기 바란다. “머리가 귀를 덮으니 저게 뭐냐”고 안늙은이가 잔소리를 하는게 듣기 싫어 리발소를 찾아나섰다가 나는 뜻하지 않은 웃음거리극을 또 한번 놀아야 했다. 락원상가 어느 건물 지하층에 자리잡은 리발소를 찾아들어간것까지는 무난했었는데 그다음 장(章)이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노릇이였다. 널직한 층층대를 다 내려왔는데도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를 않는지라 그전 식으로 “이리 오너라!” 부르려다가 고만두고 “여보시오, 여기가 리발하는데요?” 들떼여놓고 큰소리로 불러봤더니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아무튼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는게 있는지라 정신을 수습하고 자세히 살펴본즉 젊은 녀자가 둘이다. 그것이 두 젊은 녀자임을 확인한 순간 내 머리속을 스쳐지나간것은 어느 신문에서 읽어본 “퇴페리발소”. 그러자 사유가 다시 엉뚱하게 비약을 하더니 이번에는 “에이즈(AIDS)!” 나는 속으로 켕기면서도 짐짓 태연스레 용건을 밝혔다. “리발을 하러 왔는데요.” 두 녀자는 참새 굴레 씌우게 약은 눈으로 내 주제꼴을 한번 가늠을 해보더니 그중의 하나가 쟁그럽게 웃으면서 “할아버지, 여긴 리발료금이 아주 비싼데야요. 만원씩 받는다구요.” 그러니 당신 같은 촌늙은이는 어서 딴데나 가보라는 수작이였다. 나는 핑게모가 좋은지라 “마침 잘됐다.” 생각하고 아주 능청스레 “그렇게 비싸면야 안되지.” 하고 길을 잘못 든 촌보리동지역을 완벽하게 놀았다. 내가 말썽없이 돌아서는것을 보자 자칫 젊은 녀자가 얼른 다가오더니 곁부축을 해주면서 “조심하세요, 층층대.” 하고 친절을 베푸는데 그것만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자원봉사가 틀림이 없었다. 하마트면 걸릴번한 에이즈의 공포에서 해방이 된 나는 한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마침내 좀 허술해보이는 리발소 하나를 찾아내는데 성공을 했다. 성공은 했지만서도 막상 들어가보니 놀랍게도 리발소라는게 1인1실—독거감방식으로 돼있잖은가. 그전의 서울서처럼 또는 현재의 중국서처럼 리발의자가 죽 늘어놓인 광실형(广室型)이 아니더란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비겁하게 가재걸음을 칠수는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또 한편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원이니 천원이니 하고 얼렁뚱땅 배송을 내지 않는것만도 고마운 처분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리발사(리용사)분이 지시하는대로 체경앞에 조심스레 착석을 했다. 깔끔한 솜씨의 가위질이였다. 우리 연길서처럼 전기바리캉을 사용하지 않는게 인상적이였다.(우리 그 바리캉들은 항시 헌털뱅이오토바이가 비포장도로를 질주하는것 같은 소음을 동반한다.) 그리고 분초를 다투는 초고속으로 양털깎기경기처럼 눈 깜박할 사이에 한 사람씩 해내뜨리고는 점호(点呼)라도 하듯이 “다음분!” 하고 웨치는 우리의 리발법과도 아주 대조적이였다.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괴이한것은 가위질이 끝나자 리발사분은 꺼지듯이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젊은 녀자분 하나가 갈마들어서 면도를 해주겠단다. 우리 연길서는 남자리발사든 녀자리발사든 다 일관작업이다. 자초지종 다 혼자서 책임을 진다. 이런 해괴한 분공합작현상은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는 또다시 속을 끓이기 시작했다. 에이즈가 공기전염도 하는지 어쩌는지를 몰라 속이 다는것이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미리 좀 똑똑히 알아뒀을걸!) 그 면도사분이 마개를 따서 친절스레 건네주는 그 무슨 음료를 내가 그래 받아마실듯싶은가. 천만에! 원두쟁이 쓴 외 보듯했으면 오히려도 괜찮게. 나는 숫제 거부적으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장관의 리발이 다 끝이 나서 료금은 5천원이란다. 만원의 절반밖에 안됐다. 그렇지만 우리 중국의 리발료금과는 비교도 할수 없는 고액—무려 30배였다.     동창생   방아동에 새로 지은 보성중고등학교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혼연일체를 이루어 프랑스의 어느 궁전을 련상케 할만큼 단아하면서도 또 장중했다. 50여년전에 내가 다니던 시절의 혜화동 교사와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교우회를 통해 반세기 이전 동창생들을 찾아보니까 서울시내에는 예닐곱 친구가 겨우 남아있을뿐 나머지는 다 외지에 살지 않으면 거처불명, 타계를 한이도 적지 않았다. 오랜 세월 제각기 제 갈길만 가다보니 기억이 삭막해져 옛친구를 만나도 알아보지를 못할 지경이였다. 은종윤(殷钟尹)이라는 친구를 만나기는 만났으나 소시적의 얼굴모습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떠올라주지를 않아 한참동안 낑낑거리다가 일본말로 부르던 이름이 생각나서 “오, 그러니까 임자가 ‘인쇼인’이구먼!” 하고 손목을 덥석 잡는 진풍경까지 연출을 했다. “은종윤” 석자를 일본말로 부르면 바로 부르나 거꾸로 부르나 다 “인쇼인”이 되는 까닭에 그게 우습다고 놀려주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었던것이다. 일본군과 맞서 싸우느라고 값진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버린 내가 옛친구의 이름을 원쑤의 말 일본말로만 기억을 하고있다니. 참으로 웃지 못할 아이로니—기괴한 인연이였다. 하지만 은종윤 당자도 “그래그래 인쇼인. 바로 그 인쇼인.”이라며 반가운 웃음을 웃는 바람에 우리들의 우정은 갑자기 들물처럼 치런치런해졌다. 다행히도 은종윤과의 해후는 이루었지만 또 한 친구 오월봉은 만나지를 못하고말았다. 저세상으로 가고도 또 3년이 지났었기때문이다. 오월봉은 전라도 뭐라나 하는 천석군의 아들로서 남들이 다 열서너살에 입학하는 중학교를 나이도 자그마치 스무살에 입학을 했을뿐더러 집에는 또 조혼한 안해까지 있었다. 안해만 있는게 아니라 그 안해에게는 또 두 아들까지 딸려있었다. 그래서 우리 “잔고기”들은 그를 놀려먹는것을 인생의 락으로 삼았었다. 졸저《격정시대》에 이런 단락이 있다.   오월봉이는 워낙 넉살이 좋아 누가 무어라고 놀려도 골을 내는 법이 없었다. 휴식시간에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는 오월봉이를 선장이가 일부러 찾아가서 “오월봉, 느 색시 얼굴이 곱니?” 하고 놀려주니까 오월봉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담배연기를 선장이 얼굴에다 훅 뿜어주면서 “느 그 엄마 말이냐?” 하고 이죽거렸다. “아들이 몇살이라구요?” “느 그 형님 말이지? 니보다 두어살씩 더 먹었다. 이담에 만나거든 ‘형님, 나 사탕 좀 사주.’ 그래라.” “너 술두 먹지?” “약주 받아갖구 와서 무릎 꿇구 따라올려봐라. 잡숫나 안 잡숫나.” “너 없는 동안에 느 색시 바람피우면 어떡하니?” “요놈의 새깡아, 아직 꼭대기 피두 안 마른것이 벌써 고런 주둥아릴 놀려? 니두 불알이 영글라거든 어서 와서 내 담배연기나 더 맡아라.” 세상에 이렇게 욕을 타지 않는 놈을 선장이는 처음 봤었다. 오리나 게사니의 털에는 기름기가 있어서 물이 와닿으면 묻지 않고 대굴대굴 방울져 굴러내린단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월봉이도 살가죽에 욕을 타지 않는 무슨 기름기가 있어서 욕이 달라붙지를 못하고 대굴대굴 굴러떨어지는 모양이였다.   오월봉이 살아서 이 단락을 읽어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아쉽기 그지없구나. 방이동 신교사에 가 강연을 한것과 소설가 조정래교우와 혜화동 구교사를 찾아본것으로 모교와 동창생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나 볼가, 이 먼나라의 하늘아래서.     주택사정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초대를 받아 어떤분의 아빠트를 한번 가본적이 있다. 엘레베터를 타고 올라가 청해들이는 객실에 멋도 모르고 들어서다가 나는 새삼스레 제몸에서 촌티가 지르르 흐름을 감득했다. “으리으리한 옥루금궐이 그 어떻더냐”는 글귀가 떠올라서 몸가짐이 어줍어졌다. 그런데다가 또 불을 끄고 시원하게 트인 창문으로 내다보는 밤한강의 야경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할 지경이였다. 그 초청이 “촌놈의 어진 혼을 한번 빼보자”는 속셈에서 나온거라면 주인은 소기의 목적을 달했다고 자부를 해도 좋을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내 어진 혼을 뺐다는 그 “옥루금궐”도 서울서는 중류층을 좀 벗어난거란다. 그러니까 옛날식으로 점수를 매긴다면 “을상(乙上)”과 “갑하(甲下)” 사이에 놓인다는 얘기가 되는것이다. 그러니 “갑”이나 “갑상”쯤은 어떠하리라는것을 가히 짐작할수가 있잖은가. 우리 같은 촌놈들은 어진 혼만 빠지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졸도를 해버려 구급차가 출동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형편이 이렇건만 또 한편으로는 구태여 달동네나 란지도까지 찾아가지를 않더라도 다른 한 극(极)을 보아내기는 어렵지가 않은게 서울이였다. 락원상가 뒤골목에 아직도 보존돼있는 조선기와집들을 “용케 아직도 남아있다”고 감탄하며 둘러보다가 나는 어느 열려있는 대문으로 무심코 안을 한번 엿보았다. 그전 격식대로 한다면 대문간옆에 달린 행랑방이 되겠는데 그 방문앞 쪽마루 량쪽에는 드나드는 길만 터놓고 살림제구들이 포갬포갬 덧놓였었다. 그리고 쪽마루밑에는 크고작은 신발들이 네댓컬레 어지러이 벗어놓여있었다. 그러니까 그 되박만한 단방에서 현재 네댓명 식구가 살고있다는 얘기가 될밖에 없다. 달동네, 란지도의 점수를 “정(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병(丙)”이나 “병하”쯤 될것이다. 비닐로 지은 가건물에서 한가구가 살면서도 철거령이 내릴가봐 전전긍긍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런 주거를 점수로 따진다면 “정”도 못될거니 “무(戊)”나 “기(己)”라고 특별히 창안한 점수를 매겨야 할것이다. 이러하기에 나는 아름다운 서울을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는 곳”이라고 특징지었던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이쯤 되면 사회적인 동란은 의례 일어나기 마련이다. 불우에 올려놓은 물이 끓지 않기를 바란다는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할노릇이다. 선량한 사람들의 자비심에 의해 인류사회의 불평등이 사라질것을 바란다는것은 가련한 인생의 아름다운 환상이 아니면 의도적인 기만밖에 더될게 없을것이다.     감구지회   몇몇 문학의 벗들과의 좌담이 끝난 뒤 “북악산엘 한번 올라가 보잖겠느냐”는것이다. 북악산은 학창시절에 삼청동을 거쳐 늘 올라가 놀았던 곳이다. 해방후 일본감옥에서 돌아와보니 그 북악산 꼭대기가 람벌을 당해 보기 흉한 번대머리로 변했었다. 일본군대가 고사포진지를 만드느라고 그 꼴을 만들어놨다는것이다. 그 옛 자취를 한번 찾아보고싶은 마음은 꼴딱하나 목발을 짚고 다니는 신세인지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구 선생님두, 포장도로가 전망대까지 직통했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다하십니까. 자 떠나시죠.” 경의선을 통일렬차가 달린다는 소식을 들은것만큼이나 반가우면서도 또 놀라왔다. —한 꿈이 이리도 쉽사리 이루어질줄이야! 무슨 암살단사건이라는게 계기가 돼가지고 이 포장도로가 닦아졌다는 설명이였다. 전화위복인지 새옹지마인지 아무튼 결과가 좋으니 경사랄 밖에. 전망대우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나는 서울의 대기오염이 심각함을 절감했다. 그리고 세금정을 굽어보고는 전에 없던 집들이 다다귀다다귀 들어앉은데 놀랐다. 30년대의 세금정에는 천연 반, 인공 반으로 된 수영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형지조차 찾아볼수가 없게 됐었다. 여름철만 되면 수영복을 타올로 동여매 들고 창의문을 넘나들며 개헤염, 개구리헤염, 송장헤염, 자맥질에 크롤(자유형)까지 익히던 수영장. 그 수영장이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것이다. 그 세월에는 전자오락실 같은 비건강형놀이터가 없었다. 햄버거도 보온도시락도 다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아마 콩나물국, 고추장찌개를 인삼, 록용으로 잘못 알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놀랄만큼 잘들 자랐다. 《동아일보》사에 불리워갔을 때 40대 중년의 기자분을 보고 “옥상에 지금도 비둘기가 있느냐?”니까 그 기자분은 “비둘기? 무슨 비둘기?” 하고 마치 페르샤말로 질문을 받기라도 한것처럼 어리둥절해하는것이였다. “30년대엔 기자들이 지방으루 출장을 갈 때 이 옥상에서 기르는 전서구(传书鸠)를 한두마리씩 꼭꼭 갖구 갔었죠. 그때만 해두 지방은 통신시설이 엉망이였으니까요.” 나는 갑자기 권위있는 력사학교수라도 된것 같았고. “녜에 그래요. 처음 듣습니다. 그랬었군요.” 하는 그 기자분은 흡사 락제나 겨우 면할 정도의 신입생 같았다. 보성고 2학년 때 선생님 인솔하에 견학을 왔다가 옥상 비둘기장앞에서 들은 이야기를 60년후에 신바람나게 되팔아먹는 나 이 김학철도 김학철이지만 본사의 그런 연혁도 모르고 근무를 해온 그 기자량반도 또 유쾌할만큼 유쾌했다. 한마디로 세상이 변한것이다. 상전벽해가 틀림이 없는것이다. 안국동 네거리에서 종로 2가(왜정때는 2정목)까지 가려면 인사동길을 가야 하는데 그전에는 길이 포장이 되지 않았던 까닭에 해가 나고 마르면 흙먼지가 일고 또 날이 궂어 비가 오면 길바닥이 온통 곤죽이 됐었다. 그래서 구두를 진날 개발모양을 만들지 않으려면 오버슈즈(고무덧신)라는것을 구두에 덧씌워야 했었다. 특히 여름에는 먼지를 재우느라고 살수차가 물을 뿌리며 다녔는데 그 살수차에도 층하가 있어서 종로 같은 큰 거리를 오가는것은 자동차식살수차였고 또 인사동길처럼 지엽적인 거리를 오가는것은 손수레(구루마)식살수차였다. 그러니까 손수레군이 그 “물구루마”를 끌고 하루종일 물을 뿌리며 다녔던것이다. 비오는 날은 뿌리지 않아도 되는지 “구루마”고 사람이고 다 눈에 띄지 않아 한번도 보지를 못했다. 방학에 원산 고향에를 내려가니까 서울구경을 못해본 친구들이 서울이야기를 해들리라고 졸라서 살수차가 거리로 물을 뿌리며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야 임마, 우릴 촌놈이라구 뻥을 까는거냐?” “자동차가 물을 뿌려? 오줌은 안 뿌리구?” “듣자듣자 하니까 그 새끼 정말.” “서울가서 임마, 월사금 바치구 배워왔다는게 고작 대포놓는거냐?” 온통 모다들어 여지없이 몰아세우는것이였다. 그때 원산에서는 아직 불자동차도 없어서 불이 나면 소방대들이 바퀴 달린 무자위를 끌며 밀며 달아다니는 판이였다. 그러니 우물안 개구리 같은 원산 토배기녀석들이 살수차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소학생에게 미분방정식, 적분방정식을 가르치겠다는 놈이 미친놈이지. 그때부터 나는 아무리 위대한 만고의 진리일지라도 대상 봐가며 적당히 주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소귀에 경읽기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꾀가 생겼다. 슬기가 생겼다. 서울나들이를 “개 바위에 갔다왔다” 식으로 하지 않은것이 못내 다행이다. 서울이여, 안녕!
9    집사람과 나 댓글:  조회:588  추천:0  2016-04-14
집사람과 나        우리 집사람 김혜원(金惠媛)은 1928년생으로서 경기도 인천사람이다. 1947년 4월 평양에서 나와 결혼해가지고 이듬해 2월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도 이젠 40의 고개를 넘어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 하나가 있다. 아들의 이름은 해양(海洋)이고 손자의 이름은 우정(友情)이다.     38선   나는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 뒤에 일본감옥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에서 일하다가 1년 뒤에 미군정청(美军正厅)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越北)을 했다. 그때 조직에서 내 신체조건을 감안해 경호원노릇, 간호원노릇을 해줄만한 동행 둘을 딸려보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곧 집사람이다. 서울 마포에서 배(발동기선)를 타고 한강을 내려와 웅진반도를 거쳐 해주까지 와야 하는데 중간에 남조선 해병대의 검문소를 거쳐야 하므로 동행에 녀자가 끼는것이 의심을 덜 살거라는 타산에서 동행을 1남1녀로 선정했던 모양이다. 나의 월북로선은 조직부장 심성운과 련락부장 왕극강(즉 김창규)이 상의해 결정한것인바 심과 왕은 다 나의 중앙군교 동기생으로서 항일전쟁시기에는 조선의용군의 동료들이기도 했었다. 일행은 우리 녀동생까지 합쳐 남녀 모두 넷인데 우리는 꾸미기를 어떻게 꾸몄는가 하면—두 동행은 내 조카들, 우리 모두의 고향은 웅진. 나는 중국 무한에서 동전수매업을 경영하다가 폭격에 부상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누이동생과 두 조카는 서울까지 마중을 나와가지고 배행을 하는중. 이와 같이 꾸몄었다. 당시 웅진반도의 끄트머리는 38선이남, 즉 남조선에 속했었다. 그리고 항일전쟁시기, 물자부족으로 허덕이던 일본군부는 중국의 동전(구리돈)들을 대량으로 긁어모아가지고 조병창(병기창)에 공급을 했었다. 다리 한짝 없는 사람에 녀자가 둘씩이나 되니까 허술하게 다룰것 같기도 했으나 젊은 해병하사관의 검문은 의외로 깐깐했다. 더구나 일행의 대변인격인 “큰조카(남자동행)” 안승옥씨가 “이북가는 짐이지?” 하고 해병하사관이 넘겨짚어 묻는것을 “이불짐이지?”로 빗듣고 “그렇다.”고 대답을 해 한바탕 당할번하기까지 했다. 이불짐에 무슨 위험물이 들어있나 해서 몽땅 풀어헤치고 분탕질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한때 “이거 잘못되는것 아니냐”고 조바심들을 했었다. 어렵사리 웅진에 득달해 배를 내리니 늦가을 짧은 해가 서해바다에 가라앉아 어슬녘이라 선창에서 초간히 떨어진, 허술한 식당에를 찾아들어가 저녁들을 먹었다. 이 “황해식당”이라는 식당의 주인은 나이 지긋한 얼금뱅이인데 바로 이 사람이 우리의 밀항을 도와주기로 돼있었다. 벽시계가 12시를 친 뒤에 비로소 밤배를 띄워 우리 일행을 해주까지 건네주는데 우리를 태운 그 고기비린내 풍기는 돛단 배의 사공인즉 주인의 조카벌이 되는 사람으로서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중년사나이였다. 하늘에 달은 없고 별들만 총총한데 어두운 밤바다를 두어시간 잘되게 달리는 동안 우리는 줄곧 마음들이 조마조마했다. 금세 경비정에 들킬것만 같아서였다. 줄곧 고물에 앉아 벙어리처럼 잠자코 키만 잡고있던 사공이 불시에 “자, 다 왔으니 이젠 내릴 채비들 하시우.” 하고 우리를 재촉하는 바람에 (아, 해주! 그러니까 38선은 무사히 넘었구나.) 우리는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경비정 아닌 밀물이 우리를 엄습했기때문이다. 나중에 날이 밝은 뒤에 비로소 안 일이지만 사공이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뭍(륙지)이 아니고 개펄(간석지)이였다. 조수의 간만이 심한 서해에서는 썰물때 개펄이 수백메터 폭으로 드러나는데 그 개펄끝에다(그러니까 바다바닥에다) 우리를 내려놓고 배는 부랴부랴(북조선의 경비정이 무서워서) 삼십륙계를 불러버린것이였다. 이불짐이고뭐고 짐들을 미처 챙길 겨를도 없이 밀물이 들이닥치며 삽시간 무릎까지 물속에 잠기는 바람에 우리는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짐이고뭐고 다 내팽개치고 뭍(해안)을 향해 어두운 개펄을 천방지축 달려야 했다. 남녀 넷 일행이 다 비맞은 수탉모양이 돼가지고 찾아들어간 곳은 바다물로 소금 고아만드는 염막, 호젓한 바다가에 불빛이 빤한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었다. 우리는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젖은 옷들을 대충 말려입었으나 날이 샐라면 아직도 멀었었다. 나는 곧 아궁이 불빛에 글쪽지 하나를 적었다. 황해도 보안부장(내무부장)에게 보낼것이였다. 나는 글쪽지를 세골접이로 접어서 안씨에게 건네주며 말을 일렀다. “날이 밝을 땔 언제 기다리겠소. 지금 곧 떠나시오. 보안부쯤은 한밤중에라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게요.” 당시의 황해도 보안부장 리춘암도 역시 나의 팔로군시절의 전우였다. 날이 밝은 뒤에 밖에를 나와보니 눈앞에 펼쳐진것은 무연한 개펄이 아니고 흐린 물이 치런치런한 바다였다. 우리는 새삼스레 어이가 없었다. 새삼스레 어이가 없어하고있을즈음에 갑자기 엔진소리를 울리며 싸이드카 2대가 들이닥치고는 또 잇달아서 승용차 한대가 들이닥쳤다. 안씨가 리춘암부장을 인도해온것이였다. 리춘암과 나는 방축우에 서서 “알거지는 됐지만 목숨들은 부지했으니까 그래두 다행이잖아.” 하고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나 우리 누이동생과 김혜원—두 처녀에게는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앞으로 어차피 시집들은 가야겠는데 남은거라곤 몸에 걸친 단벌옷 한벌뿐. 내색은 안했지만 속들은 그리 편치가 못했을것이다. 압록강   두 알거지가 결혼을 해가지고 살림을 좀 장만했을즈음 조선전쟁이 터져 우리는 또다시 알거지신세가 돼야만 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미군과 국방군의 선두부대가 사리원까지 쳐들어오는 바람에 평양시내가 란장판이 돼버려 인심이 흉흉한 판에 그전 부하(내가 신문사에 봉직할 때 수하에 있던 기자) 하나가 헐레벌떡 찾아왔다. “이러구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디루든 피난을 가야지요.” “여태 뭘 하고있었어? 빨리 떠나잖구!” “선생님은?…” “내 걱정을랑 말고 어서 떠나요. 식구 다 데리구.” “어디루 가랍니까?” “어디루 가다니?” “남으루 가랍니까, 북으루 가랍니까?” “이 사람아, 남이 왜 있어? 북으로 가야지!” “예, 잘 알았습니다.” “강계방향으루 달아나요. 신의주쪽은 함포사격을 받기가 쉬우니까.” “예,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내 걱정은 말구… 냉큼 떠나란데두!” “예,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그러구 저 재봉침은 대가리만 떼갖구 가는게 좋겠지요.” “그건 좋두룩 해요.” 그 친구가 황망히 뛰쳐나가는것을 보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당원이란 사람이 벌써 사상이 흔들려 남으로 뛸지 북으로 뛸지 결정을 못해 갈팡질팡하고있었다. 그래도 다행한것은 그 친구가 유일한 재산인 재봉침대가리를 떼 짊어지고 그리고 식구까지 끌고 강제까지 무사히 후퇴를 해 20여일후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것이였다. 우리는 어머니와 세살짜리 아들을 고모에게 맡겨 먼저 떠나보내고 덩그렇게 빈집에 둘이서만 남았다. 누이동생도 그동안에 결혼을 했으나 아직 아이가 없었다. 그 남편은 나와 같은 조선의용군출신으로서 당시는 인민군의 공군사령관. 그런 관계로 공군사령부의 부관이 장령들의 가족을 호송하는 편에 우리 어머니와 아들도 딸려보냈던것이다. 이틀뒤, 바람결에 먼 포성이 은은히 들릴 때 우리는 리상조(후일의 주쏘대사)의 가족이랑 함께 소형트럭으로 평양을 빠져나오는데 차는 작고 사람은 많아서 짐이라고는 가방 하나와 배낭 하나를 겨우 가지고 올랐다. 그러니까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놔두고 몸만 겨우 빠져나온 셈이다. 마지막으로 짐을 챙길 때 내가 굳이《고요한 돈》 상, 하 두권만은 꼭 넣어가지고 가야 한다니까 23살의 젊은 색시였던 집사람은 두말없이 가방속에 들어있던 화장품상자를 꺼내고 그 자리에 책 두권을 대신 밀어넣었다. “그건 뭐요. 그 삐주룩한거?” “이건 김두봉선생님이 우리 결혼식때 보내주신 은수저예요.” 집사람은 그 은수저 한벌을 소중스레 수건으로 싸서 가방속에 묻었었다. 나는 어렵사리 모아놓은 책들을 책장채 고스란히 놓아두고 떠나는게 허전하고 아쉬워 곧 눈물이 날 지경이였다. 사내꼬부랑이가 이럴진대 가재도구를 몽땅 놓아두고 떠나는 집사람의 사정이야 어떠했으랴! 그때 내가 호신용으로 차고 온 권총을 후날 주덕해를 통해 연길시공안국에 바쳤고 그리고 가족사진들은 어머니의 사진암질러 몽땅 “문화대혁명”의 제물로 돼버려 한장도 남아있는게 없다. 당시의 물건으로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집에 남아있는것은《고요한 돈》 두권과 은수저 한벌뿐, 우리 집 가장집물의 조종이라고나 할가. 청천강 다리목까지 온즉 부대에서 검문소를 설치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하는데 그 총지휘관이 다름아닌 림천규였다. 나는 림천규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행들과 갈라졌다. 그리고 림천규가 내주는 월리스(쏘련제찌프차)로 계속 후퇴를 하는데 림의 부인과 젖먹이아들을 맡아서 뒤좌석에다 태웠다. 폭격기는 투탄목표가 지정돼있으므로 운행중의 개별적인 차량은 공격을 하지 않는다. 운행중의 차량들을 극성스레 따라다니며 심악스레 공격하는것은 쌕쌔기(분기식추격기)뿐이였다. 그렇건만 림천규의 부인이 높이 떠오는 폭격기만 보아도 질겁을 하는지라 번번이 대피를 아니할수가 없어서 길이 예상밖으로 더뎠다. 밤이 안전하다고 낮에 자고 밤에 달리다가 무인지경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권총으로 격퇴를 하는 등 별별 일을 다 겪으며 목적하는 강계를 다달은즉 “정황이 위급해졌다”며 먼저 와있는 누이동생네 일행은 다시 압록강가의 만포까지 후퇴할 준비를 서두르고있었다. 사회질서가 뒤죽박죽이 돼버린 가운데 다시 만포까지 와가지고 “공군사령부의 장령 가족들은 신의주로 집결하라”는 지시에 따라 누이동생네 일행은 차머리들을 서남으로 돌리는데 할머니품에 안겨있을 우리 아들녀석은 오직 할머니만이 “제일강산”이므로 뒤에 떨어지는 애비에미에게는 례사롭게 “빠이빠이!” 하고 손 한번을 흔드는게 고작이였다. 우리는 만포에 그대로 눌러붙을 료량이였으므로 상당한 기간 몸담아있을 집부터 하나 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려장들을 막 풀었을즈음 압록강에 림시로 가설한 배다리(桥)로 지원군부대들이 홍수처럼 밀려드는게 아닌가. 그걸 보자 나는 (이젠 살았구나!) 한숨이 트이였다. 나라가 망할 념려는 이제 없어졌기때문이다.   그런데 더구나 의외롭고 또 반가운것은 문정일이 그 부대의 후근처(후방부) 대표로 만포에 나타난것이였다. 문정일과 나는 중앙군교의 동창이자 또 조선의용군의 동료. 그러니까 동란중의 국경선상에서 옛 전우들과 해후상봉을 한것이다. “폭탄이 자꾸 떨어지는 판에 절름발이가 여기서 뭐 할테냐. 더구나 안식구들 데리구. 당장 월강을 해. 내 우리 후근처에다 소개신을 써줄테니까. 그럭해. 여기선 못 배겨낸다구. 쌈이 그래 한두달에 끝날것 같아. 그런 꿈은 꾸지도 말아.” 우리는 당일 밤으로 끝이 없이 잇달린 자동차들 틈에 끼여서 압록강의 배다리를 북으로 건넜다. 차를 모는 하사관암질러 우리 모두에게 만주는 생소한 땅—낯선 고장이였다. 집사람은 유명짜하면서도 또 괴상야릇한 남편을 얻은 덕에 또 한번 알거지가 돼가지고 국경선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고생이 다 끝난것은 아니였다. 진짜고생은 뒤에 또 기다리고있었다. 홑으로가 아니고 겹으로 기다리고있었다. 후근처의 정치위원도 나와 같은 팔로군출신이였으므로 대우를 잘해줘 우리는 집안초대소에서 며칠동안 편안히 드러누워 로독을 풀었다. 며칠후, 전쟁 지는통에 패잔병꼴이 다돼버린 림천규가 따발총을 엇멘 호위병 둘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다. 나는 그의 부인과 아들을 깔축없이 돌려줌으로써 소임을 다하고 집사람과 단둘이 홀가분한 몸으로 됐다. 집안(集安)에 머무는 동안 나는 조선의용군출신의 장령들을 여럿 만났다. 거의다 패전장군들이였다. 개개다 군대는 어디다 어떻게 줴깔렸는지, 풍비박산이 됐는지 아무튼 사단지휘부는 전원이라는게 사단장 본인까지 합쳐 모두 4명씩. 그 구성요소를 볼작시면—“왕별짜리” 하나, 중위부관 또는 소위부관 하나, 운전사(대개는 하사관) 하나 그리고 젊고 예쁜 녀자하사관 하나, 개개 지휘부가 다 무슨 공식처럼 꼭꼭 이렇게 짜여있었다. 전쟁판에 다들 놀아난게 아닌가싶었다. 정치총국장 대리로 통화사령부에 와있던 서휘를 만난것이 나의 그후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는 부관 하나와 예쁜 녀비서 하나를 뒤좌석에 태우고 고산진사령부로 가는 길이였다.(서휘는 당시 아직 독신이였으므로 예쁜 녀비서를 달고 다녀도 도덕적으로 별문제는 없었다.) “어떡할 작정이야?” “주덕해하구 최채가 연변에 있다구 그리 가라구 문정일이가 권하던데…” “그런 촌구석엔 가 뭘 해. 북경으루 가라. 띵링(丁玲)이 지금 중앙문학연구소 소장이다. 거기 가 공부나 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절름발이가 이런데서 얼쩡거리는건 보기에 안 좋다. 내 후쵸무(胡乔木)한테 소개신을 써주마. 그러구 난 사흘후에 돌아올테니까 먼저 통화에 가있어. 왕자인(부총참모장)이가 거기 있으니까 초대소에 들게 해달라구 그래.” 저녁차로 통화역에 내리기는 내렸으나 우리 부부는 추워서 죽을 지경이였다. 왕자인이 부관을 시켜 내보낸 차를 타고 사령부에 도착하니 맞아나온 왕자인이 그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며 히죽거렸다. “왜들 그 모양이야?” “말 말아. 얼어죽잖구 예까지 온것두 다 하느님 덕분이다.” “하하, 동북은 처음 와보지?” “처음이니뭐니… 이렇게 추운델줄이야… 정말 난생처음이라니까.” 우리는 당장에서 솜군복 한벌씩 얻어입고 그리고 초대소에 와 더운 저녁(때가 지났으므로 다시 데워다주는 저녁)을 달게 먹고 소생한 기분이 돼 얼굴을 마주보며 새삼스레 웃었다.(집사람의 얼굴은 축이 많이 갔었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는 식구들의 안위가 걱정이 돼 잠들이 잘 오지를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가 통화에 다달았을무렵 신의주에 집결했던 장령 가족들은 다 길림성 이통현초대소에 안치들이 됐었다. 대엿새뒤에 우리는 연길에 와 최채를 만나고 또 왕련(王连, 공군사령관)을 만났다. 왕련은 연길에다 인민군의 항공학교를 옮겨올 문제를 교섭하느라고 와있었다. 주덕해는 마침 출장중이여서 못 만나고 최동광을 만났다. 우리는 곧 이통으로 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만났다. 그리고 아들을 도로 찾아 데리고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서는 먼저 와있던 정설송(丁雪松, 정률성의 부인)이 우리의 안내역을 맡아줬다. 호교목을 만나러 갈 때도 그녀가 안내를 해주었다. 정률성은 조선전선에 나가고 없었고 그 집에서는 70 로파인 정률성의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손녀 쏘티(小提)와 전라도사투리의 조선말과 중국말을 섞어작으로 해가며 재미나게 살고있었다. 이야기의 순서가 좀 바뀌기는 하지만 이통에서 있었던 일을 몇줄 더 보태기로 한다. 우리 부부가 느닷없이 이통초대소를 찾아들어갔을 때 아들녀석은 마침 무슨 막대기 같은것을 들고 혼자 놀고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우리를 한눈 보더니 쑥스레 한번 킥 웃고는 모르는체하고 제 놀것만 그대로 노는게 아닌가. 참으로 별난 녀석이였다. 순전히 동양적인 감정의 표현방식이였다. 애비와는 전연 다른 성격이였다. 하긴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녀석은 역시 그렇긴 하지만. 또 한가지 우스운것은 그 녀석이 이통에 와서 난생처음으로 눈(雪)이라는것을 봤을 때의 반응이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다가 마당에 첫눈이 하얗게 깔린것을 보자 그 녀석은 손벽을 딱 치며 “아이야, 소금 많이이!” 하고 경탄성을 발하는것이였다. 북경에서 나는 정령(띵링)의 주선으로 중앙문학연구소에 들어가 근 이태동안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문학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연변에 자치주가 성립된 뒤에 연길에 와 정착을 했다. 그리하여 오늘까지 파란곡절을 겪으며 40년이란 세월을 만만찮게 살아왔다. “반우파투쟁”   연변에 와서는 4년 남짓한 동안 일을 했을뿐이다. 1957년에 터진 “반우파투쟁”으로부터 강청일당이 특별법정의 피고석에 서는 80년말까지 장장 24년 동안을 우리 일가는 그야말로 지옥살이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24년 동안에 집사람이 당한 수모와 받은 고통은 필설(笔舌)에 절(绝)한다. 글과 말로는 다할수가 없다는 말이다. 어제까지 항전간부라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남편이 하루아침사이에 극악한 반동분자로 락인찍혀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때 그 안해가 받는 충격은 과연 어떠했을가. 소학교 2학년생인 외아들이 반동분자의 자식이라고 학교에서 담임선생에게 붉은넥타이—소선대원에게는 목숨같이 소중한 붉은넥타이—를 회수당하고 눈물과 코물이 범벅이 돼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 엄마의 가슴은 또 어떠했을가. 이 세상의 불행은 단독으로 오지 않는다. 정치적인 타격에 잇달아서 들이닥친것은 경제적타격. 당시의 소문으로는 내가 책을 많이 써내서 원고료를 굉장히 번다고들 했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것이 없다”고 실속은 그리 탁탁하지를 못했다. 평양에 남아계신 어머니의 생활비를 외아들인 내가 부담해야 했기때문에 집사람은 효부소리를 들으려고 그랬는지 아무튼 시어머니 바라지를 최대한으로 잘했다. 항공학교 교장이 평양사령부에 비행기(군용기)로 출장을 갈적마다 그 편에 양복지를 몇필씩 부쳐드렸던것이다. 그래서 교장의 장모님이 늘 “나도 저런 며느리나 하나 두었더면.” 하고 푸념을 했던것이다. 이런 “속 빈 강정의 잉어등(灯)” 같은 살림에 돌연 불어닥친것은 “대약진”의 강풍. 한알에 7전씩 하던 닭알이 불과 두달 사이에 60전으로 껑충 뛰여오르고 그리고 양배추가 2원에 한포기가 아닌 반포기. 이런 판국에 내 월급은 생활비라는걸로 변하면서 홑 50원으로 돼버렸다. 그러니까 집사람은 양배추 13포기쯤을 겨우 살수 있는 돈으로 세식구를 한달동안 먹여살려야 했었다. 집사람은 무어나 좀 값이 나감직한게 눈에 띄면 띄는족족 들고 나가 먹거리를 바꿔들였다. 허구한 날 풀떼기로 연명을 하는데 그나마 어른들은 점심을 거르고 아들만 세끼를 먹이는 까닭에 나는 배가 홀쪽해서 점점 더 개미허리가 됐다. 개미허리가 되니 바지가 자꾸 흘러내려 적어도 두어달에 한번씩은 꼭꼭 혁대에다 구멍을 더 뚫어야 했다. 집사람은 나보다도 그 정도가 더욱 심해 아예 세요궁(细腰宫)의 궁녀꼴이 돼버렸다. 옛날 초(楚)나라의 세요궁에서는 허리가 가늘수록 왕의 굄(宠爱)을 받았던 까닭에 궁녀들이 너도나도 허리통을 줄이려고 밥을 굶다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굶어죽은 페단까지 있었다. 형편이 이쯤 되다보니 집사람이 먹거리 구하기에 안깐힘을 쓴것도 무리는 아니랄수 밖에. 피나무껍질로 떡을 해먹어보기도 하고 또 무슨 나무잎을 빻아서 개떡수제비라는걸 해먹어보기도 하고… 식생활이 차차 너저분해지고 또 다양해졌다. 나중에는 마당에 자란 피마주를 따다가 매돌에 갈아서 무슨 지짐을 지져먹으려다가 세식구가 구역질이 나는통에 못 먹고 그냥 내다버리기까지 했다. 워낙 시어머니를 몇달 못 모셔본데다가 일가친척이라는게 하나도 없었던 까닭에 집사람은 살림살이를 전혀 할줄 몰랐다. 아예 손방이였다고나 할가. 옹이에 마디로 엄동설한에 목숨을 걸고 사는 움속의 김치를 어느 거룩한 성인군자분이 하루밤사이에 몽땅 퍼가는 바람에 우리는 한때 절망에 빠지기까지 했다. 가까스로 그 지리감스러운 겨울을 나고 봄이 되자 집사람은 이웃에 사는 80 로인을 따라 시내에서 10여리 잘 떨어진 산자락에 가 그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가며 난생처음으로 콩을 심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몇번인가 가 김을 매주었다. 나는 “괜스레 헛수고를 하지”쯤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었는데 가을이 되자 뜻밖에도 집사람이 콩을 두어말 잘되게 머리에 이고 들이닥치는게 아닌가. 한 절반은 깐 콩이고 한 절반은 꼬투리채로였지만 그렇게도 대견할데라구야! 우리는 금세 무슨 큰 부자라도 된것 같이 흐뭇해 먹지 않은 배가 절로 부를 지경이였다. 어렵사리 4학년생이 된 아들이 농촌에 가을걷이를 도우러 나갔다가 여러날만에 돌아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가슴이 아팠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 날콩들을 까먹는데 날콩이 너무 비려서 다들 코를 쥐고 먹었다는것이다. “그렇지만 엄마가 심어온 이 콩은 익혀서 먹을테니까 좀 좋아.” 하고 아들이 손벽을 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이런 원시인 같기도 하고 또 하등동물 같기도 한 생활을 몇해 동안 하고나니 우리 집은 또 알거지가 돼버렸다. 그러니까 집사람은 세번째로 알거지가 된 셈이다. “문화대혁명”   3년후에 내 월급이 다시 원래대로 나오게 되고 또 번역이라도 해서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게쯤 되자 우리는 안도의 숨들을 내쉬였다. “이젠 살게 됐나보다”고.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 다섯해가 채 못돼서 “력사상 전례가 없다”는 정치의 소용돌이속에 또다시 휘말려들줄을. “신(新)8.27”이라는 반란조직에서 통첩이 오기를 “24시간 이내에 주당위원회에 출두해 주덕해의 죄행을 적발하라.” 연거퍼 세번 통첩을 받고도 모두 무시해버렸더니 한밤중에 대여섯명의 폭도가 쳐들어와 나를 랍치해 차에다 싣고 쏜살로 하남다리를 건너는것이였다. 하남다리를 건느자 그자들은 내 눈을 가려가지고 어디를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 아무튼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갇혀있는 곳은 자치주정부 3층의 끝에서 두번째 독방이였다. 며칠후 전인영이 잡혀와 내 바로 옆방에 갇혔다. 옥상에 중기관총까지 배치를 한 까닭에 주정부청사는 마치 나치스의 포로수용소와도 같았다. 집사람은 그때로부터 4년 7개월 동안 남편의 행방을 모르고 살았다. 나중에 문화궁전에다 천여명 사람을 모아놓고 공판을 할 때도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아 그 장관의 재판놀음을 집사람은 방청하지 못했다.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고 추리구감옥으로 압송되기 직전에 간수소(구류소)에서 한 15분 동안 집사람과 아들을 면회했는데 집사람은 모습이 초라하고 그리고 아들은 다 자란 청년이였다. 감옥에서 복역하는 몇해 동안 나는 가족들에게 면회를 오지 말라고 했다. 어려운 살림에 려비 팔고 싱겁게 뭣 하러 오느냐는것이였다. 나는 한 가장으로서 제 식구를 벌어먹이지도 못하는게 여간 한스럽지가 않았다. 집사람은 만 10년 동안 내 대신 가장노릇을 해야 했다. 폭도들은 그후에도 우리 집을 여러번 들이덮쳐 로략질을 랑자하게 했다. 당시야말로 혁명의 이름으로 죄악이 살판치는 무법천지가 아니였던가! 처음에 집사람은 공중변소를 맡아 청소하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한달에 10전씩 위생비를 거둔것으로 아들과 둘이서 연명을 했다. 그후 신세가 좀 펴이여 맞벌이부부네 어린아이들을 맡아보게 됐다. 이때가 말하자면 중흥기(中兴期)쯤 될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검은 그림자는 여기에도 드리웠다. —반혁명분자의 가족에게 사회주의의 소중한 꽃봉오리들을 맡기는것은 혁명적경각성이 부족한탓.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에게 반동사상을 전파하거나 독약을 먹여 죽일수도 있잖은가—이런 뜻이 되겠다. 맡아볼 어린아이가 없어진 집사람은 아들하고 둘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채소농장에 날품팔이로 들어갔다. 일은 고돼도 반혁명분자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아 마음만은 편했다. 그러나 날품팔이는 일거리가 없어지면 해고를 당하기 마련. 이른바 계절로동자다. 집사람은 부득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직업을 바꿨다. 벽돌공장의 날품팔이군이 된것이다. 그러나 엄동설한이 되면 벅돌공장도 조업을 단축하므로 날품팔이군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길을 가야 했다. 살길이 막막해진 집사람은 염마청(阎魔厅)만큼이나 섬뜩한 공안국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산 입에 거미줄이 치게 할수는 없잖습니까?” 공안국에서는 사람을 내보내 우리 집 살림형편을 뒤조사해보고 씻은듯 부신듯한 적빈임을 확인한 뒤 “그 정도로 구차할줄은 미처 몰랐다.”고 새삼스레 놀라며 신흥가판사처에 소개신을 써줬다. 직업을 알선해주라는 내용이였다. 그때 마침 신흥가에서는 가두(街道)공업으로 비누공장 하나를 막 세웠었다. 그러나 반혁명분자의 가족을 받아들여 일을 시키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혁명적이고 프로레타리아적이였다. 그들의 혁명적경각성은 공안국보다 훨씬 더 높았던것이다. 하긴 다른 직공들이 반혁명분자의 가족과 접촉하기를 꺼린다는 리유도 없지는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남에 있는 도자기공장에다 소개신을 써줘 집사람을 배송하기로 했다. 역신마마(疫神妈妈)를 배송하듯 배송을 한것이다. 집사람은 그 공장에서 삽으로 도토(陶土), 백토(白土) 따위를 퍼담고 퍼넣는 일을 한 칠팔년 동안 잘했다. 내가 10년 만기출옥을 하고도 또 3년 뒤에 다시 열린 공판정에서 무죄선고를 받을 때까지 줄곧 그 일을 했다. 정년이 돼 쫓겨날가봐 나이를 속이고 54살까지 그 일을 했다. 그러게 나중에 퇴직수속을 할 때 인사과장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 “멀쩡한 28년생이구먼… 여직껏 나이를 속였었구먼!” 집사람은 출근도 해야지, 집안살림도 해야지… 일년 열두달 삼백예순날을 부지런히 날뛰여야 하는데 공장이 멀어서 출퇴근에 시간을 굉장히 잡아먹는게 큰 문제였다. 그래서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늦깎이로 자전거타기를 배웠다. 그리고 죽어라 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 고정공으로 정식채용이 됐다. 50이 거의다 돼가지고서의 일이다. 그런데 풍자적인것은 집사람을 따돌렸던 가두의 붉디붉은 비누공장이 도산(倒产)을 한것이다. 경영의 부실로 도산을 해 가장 혁명적이던 녀성들이 모두 실업을 한것이였다. 어머니가 혼자서 고생하는것을 보다 못한 아들이 진학을 포기하고 화학비료공장에 들어가 운탄공이 됐을 때 집사람의 착잡했던 심정은 무어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대학에를 갈 대신 굴뚝속에서 빠져나온 괴물처럼 새까맣게 돼가지고 온종일 석탄하고 씨름을 하는것을 바라보는 집사람의 가슴속에는 한이 오갔을가, 체념이 오갔을가. 지꿎게도 화학비료공장과 도자기공장은 쌍둥이같이 서로 딱 달라붙은 바로 이웃이였다. 다음은 내가 그맘때 추리구감옥에서 집사람에게 써보낸 한통의 편지의 전문이다.   혜원: 30년전 이달 스무나흗날 대동강변 경제리(镜齐里)에서 맺어진 인연은 곡절 많은 삶의 흐름을 이루고 때로는 흐려졌다 때로는 맑아졌다 꾸준히 또 줄기차게 흘러내렸습니다. 은혼의 여울목은 이미 지났고 금혼의 나루터는 아직 멉니다. 애되던 당신의 얼굴에는 년륜의 거미줄이 희미하게 얽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에 푸르싱싱 자라나는 후대들을 봅니다. 부푼 희망속에 기대에 찬 눈으로 푸르싱싱 자라나는 후대들을 봅니다. 삶의 흐름은 앞으로도 의연히 밤에 낮을 이어 흐르고 또 흐르고 자꾸만 자꾸만 흐를겁니다. 이른봄 종다리의 희열을 늦가을 기러기의 적막을 아울러 이 가슴에 안겨주신이 조선의 어엿한 딸 혜원녀사께 삼가 이 몇줄 글을 바치옵니다 삼가 이 몇줄 글을 바치옵니다   학철 1977년 4월 초하루 산에 둘린, 물에 둘린 추리구에서   원래 살던 넓은 집에서 밀려난 집사람은 되박만한 단간방에서 며느리를 맞아야 했다. 아들의 나이가 어느덧 28살이 돼 더는 기다릴수가 없었던것이다. 내가 만기출옥을 해가지고 집이란데를 돌아와보니 다섯달이 아직 채 못된 젖먹이손자가 기저귀를 차고 반듯이 누워서 토실토실한 팔다리를 쉴새없이 놀리고있는데 그 모양이 흡사 발랑 잦혀놓은 거부기 같았다. 여러해 동안 서로 갈라져있다가 다시 만난 부부의 감정이란 글과 말로 다하기가 어려운것.   山叠未遮千里梦 산이 첩첩해도 천리의 꿈을 가리지 못하고 月孤相照两乡心 달이 외로와도 두 고을의 마음을 비춰준다   전기철조망으로 둘린 감옥안에서 금년에도 또 래년에도 봄이 오고 가을이 가고 그리고 여름과 겨울이 섞바뀌는 동안 이런 시를 조용히 읊조리며 혼자 살아온 이 남편이 아니였던가. 집사람이 혼자서 며느리 맞고 손자 보느라고 너무너무 고생을 해 피기없이 마르고 핼쑥해진것을 보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련민의 정이 이 가슴을 한가득 채웠다. 그 뼈와 가죽만 남은 집사람이 꾸려놓은 살림은 어찌나 넉넉했던지 손자를 업어도 두르고 나갈 담요가 없을 지경이였다. 그래도 우리는 원래의 세식구가 30년만에 다섯식구로 늘어나가지고 한자리에 둘러앉게 된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로부터 3년후에 내가 다시 공판정에 나서서 무죄판결을 받던 날 아침, 집사람은 갑작스레 급병이 나 연변병원에 입원을 했다. 시집온지 33년만에 처음 해보는 입원이였다. 닷새뒤에 거짓말같이 병이 다 나아 퇴원을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공교롭기가 똑 뭐 같은 일이였다. 남편이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을 때도 방청을 못했고 또 그 남편이 무죄판결을 받을 때도 방청을 못하고—하느님의 뜻은 알길이 없다고나 해야 할가. 집사람은 별 특징이라는게 없는 녀자—보통녀자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나는 잡목처럼 눈에 띄지 않는 녀자다. 그러나 칠전팔기(七颠八起)하는 끈덕진 성질과 온화한 성정을 아울러 지닌 녀자다. 집사람이 내 눈에는 양귀비보다 더 예뻐보이고 성모 마리아보다 더 어질어보이고 또 쟌 다르크(프랑스의 애국소녀)보다 더 용감해보인다. 뿐만아니라 성춘향 찜쪄먹게 절개가 곧아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집사람앞에서 꼼짝을 못하고 쩔쩔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8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댓글:  조회:516  추천:1  2016-04-14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1949년 여름에 나는 평양에서 원산을 거쳐 화진포까지 한번 가봤었다. 그리고 40년 하고 또 넉달이 지난 89년 겨울에는 그와 정반대의 코스로 다시한번 화진포를 찾았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속초를 거쳐 갔던것이다. 산산한 류리표박(流离漂泊)의 인생력정. 그 력정의 한 단락 치고는 어지간히 랑만적인 나그네길이였다.     “떼사공의 한평생”   내 고향 원산은 화진포에서 또 북으로 삼사백리, 아무도 넘나들지 못하는 군사분계선너머로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손꼽아보면 내가 고향땅을 밟아본지도 어언 마흔두해가 되는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영원히 아물줄 모르는 나의 야속한 향수의 딱지를 어느 무심한 손이 또 다쳐서 덧들여놓았다.《뿌리 깊은 나무》가 펴낸 “떼사공의 한평생”(신경란 편집)이 바로 그 무심한 손, 얄망궂은 손이다. 원산은 함경도와 강원도 접경에 위치했으므로 그 말씨가 함경도보다는 강원도에 더 가깝다. “하구설라무네”라든가 “하나깐두루”라든가 하는따위. 이런것들은 다 어린 시절의 나를 마치 공기처럼 둘러싸고있던 말들이다. 한데 “떼사공의 한평생”에서 나는 그 “설라무네”, “깐두루”들과 뜻하지 않게 감격의 해후를 한것이다. 아득한 옛날에 어머니가 부르시던 자장가를 이역만리에서 다시 듣기라도 한것 같은 감구지회를 나는 금할수가 없었다. 강원도땅 정선구석에 외로이 살고있는 한 로인의 구술을 서울에서 엮어서 펴낸것이 먼 이국의 하늘아래 살고있는 한 실향자 아닌 실향자의 가슴을 이다지도 향수에 설레게 할줄이야. 원산 우리 고향집 울안에는 복숭아나무 한그루가 박혀있었다. 해마다 복숭아가 채 익기도전에 아귀같이 걸탐스럽던 나의 먹새때문에 한번도 제대로 익어보지를 못한 가련한 복숭아나무, 청상과부인양 애처로운 복숭아나무였다. 하지만 바로 그 복숭아나무밑에서 소년시절의 나의 위대한 첫 련금술(alchemy)의 실험은 실시됐던것이다. 차돌을 석필로 변신시킨다는 마술적인 실험이였다. 찍어서 말하면 실험인게 아니라 곧 제조였다. 단짝 하나가 살틀한 우정의 표시로 가르쳐준 가전(家传)의 비방을 일급비밀로 실천에 옮긴것이였다. 복숭아나무밑에다 차돌 한개를 파묻어놓고 거기다가 백날 동안 경건한 마음으로 오줌을 누면 그 차돌이 극상품의 석필로 변한다는것이다. 나는 너무도 감격해 비방전수료라고는 할수 없지만서도 아무튼 촌지(寸志)삼아 한턱을 푸짐히 냈다. 깨엿 10전어치 6가락을 사가지고 둘이서 공평하게 세가락씩 나눠먹은것이다. 낱개로는 2전씩 했지만 5전을 내면 박리다매의 원칙에 따라 써비스를 해서 3가락을 주는게 당시의 불문률적상도덕이였다.     석필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고보니 그 실험 겸 제조에는 어려움이 적잖이 따랐다. 첫째 어려움은, 당시 나는 매 토요일날 오후마다 큰집에 가 할머니하고 하루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오후에 돌아와야 했는데 그렇게 하면 옹근 하루종일 오줌공양을 거르게 되는것이였다. 그렇다고 할머니한테 자러 가지 않지는 못할 형편이였다. 효성이 류별난 고모가 라장(罗将) 같고 군뢰(军牢) 같은 큰조카(내 사촌형)를 급파해 득돌같이 나를 잡아다 대령을 시키기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아비없이 자라는게 불쌍하다”며 수명장수하라고 자기전에 꼭꼭 절편에다 꿀을 발라 먹이는 식이료법을 시행했었다. 그 우매한 식이료법때문에 먹새 좋기로 가근방에 소문이 난 나였지만 식체로 침의한테 중완(中脘)을 맞으며 다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천륜때문에 막부득이 한주일에 하루씩 거르는것은 하늘도 굽어살펴주시리라 믿었지만서도 그놈의 수학려행만은 확실히 문제였다. 서울의 경복궁, 개성의 선죽교(善竹桥), 인천의 월미도를 한바퀴 둘러보고 오는데 무려 엿새씩이나 걸렸으니까 말이다. 물론 우리는 무슨 국회의원따위가 아니였으니까 뢰물외유니 부부동반이니 쇼핑빽이니 하는따위의 비도덕적행위는 없었다. 하지만 장장 엿새동안 오줌공양이 끊긴것만은 엄연한 사실이였다. 하긴 오줌공양때문에 수학려행을 안 간다고 버텼다가는 어머니가 대번에 비자루찜질을 서슴잖았을터니까 이것도 역시 천륜의 범주에 속하는거라고 억지로 끌어다붙이면 끌어다붙일수는 있었다. 이와 같이 사이사이 이가 빠진 장관의 백날을 달력상으로만 간신히 채우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해가며 그 위대한 첫 실험물을 호미로 캐내본즉 “아이고 요 내 팔자야!” 깔축없는 그 차돌 그대로가 아닌가. 애당초에 석필의 냄새도 아니 났다. 석필이 돼보려고 마음을 먹어본 흔적조차 없었다. 변한것이라면 그동안 장복으로 들이대는 날오줌에 시달려 꺼칫하게 병이 들어버린 복숭아나무뿐이였다. 나는 락방거자모양 아주 파김치가 돼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 실패작을 손에 들고 일찌기 깨엿 3가락 코아래진상을 한바 있는 그 녀석을 찾아떠난것이다. “거참 이상하다. 그럴리가 없는데.” 내가 건네주는 그 지린내나는 실패작을 받아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빼여난 수재형(秀才型)의 그 녀석은 고개를 비틀었다. 하지만 제놈이 아무리 고개를 비틀어꽂는다 해도 시원한 해답은 나올리가 만무했다. “너 백날 동안 하루도 빼놓잖구 꼭꼭 오줌은 눴겠지?” 그 녀석의 이 단적인 물음에 나는 당황해났다. 얼굴이 지지벌개져가지고 몹시 어줌살스레 이실직고를 하잖을수 없었다. “그러면 그렇겠지!” 꼭 맞아떨어지는 답안을 찾아낸 그 녀석은 무릎을 치다싶이 하며 개가를 올리는것이였다. “정성이 부족하면 안된다구 내 처음부터 말하잖던.—버력을 입잖은것만두 임마, 다행한줄 알아라. 멍텅구리.” 모든게 다 자업자득인데 무슨 할 말이 또 있으랴.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돼버리는수 밖에 없었다. “이 돌은 이젠 부정이 들어 못쓴다. 갖다가 땅속에 묻어라. 깊숙이 파묻구 꼭꼭 밟아. 괜히 또 살아나오면 큰일이다.” 나는 고지식하게 그 지린내나는 돌을 도로 받아들고 돌아와 시키는대로 땅속에 파묻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오지 못하게 선자리에서 보리밟기를 했다.     병마개돈   나의 첫 실험을 비참한 실패로 이끌어준 그 엉터리련금사가 순 허풍선이였다는것을 내가 깨닫게 된것은 그후 여러해가 지나서였다. 상급학교에 진학해 물리, 화학이라는것을 배운 뒤의 일이였으니까.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 그치가 아직도 원산에 살고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천하의 엉터리 같으니라구. 순 봉이 김선달 같으니라구.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이다지도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지. 나는 소년시절은 상술한바와 같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오또기모양 아무렇게나 굴러도 오똑오똑 잘 일어서는 만만찮은 속성을 지녔던 까닭에 비록 련금부문에서는 엉터리비방에 속아 참패를 봤지만서도 돈을 만드는 조페(造币)부문에 들어서는 백퍼센트의 성공을 거둬 나는 짭짤하게, 탁탁하게 재미를 보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가히 분투의 시절, 분투의 력사라고 할만도 했다. 맥주병이나 사이다병의 금속마개들을 주어모아가지고 경원선(京元线, 당시는 기차가 원산까지만 오갔다) 레루우에다 죽 늘어놓고 서성거리며 한동안 기다리느라면 이윽고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그럴 때 얼른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귀를 레루에 갖다대고 들으면 기차가 힘차게 달려오는게 환히 알린다. 그러면 잽싸게 철로뚝밑으로 뛰여내려가 납작 엎드려 대기태세로 돌입한다. 증기기관차에 끌리는 렬차가 굉음을 울리며 머리우를 통과할 때는 배밑의 땅이 움씰움씰 드논다. 렬차가 멀리 간것을 확인한 뒤에 벌떡 일어나 철로뚝우로 달려올라가 보면 그 병마개들은 몽땅 더할수없이 예쁜, 동글납작한 돈들로 변해서 슬기로운 주인을 기다리고있다. 그러니까 나 이 김학철을 기다리고있다는 얘기가 되는것이다. 구접스레 오줌을 줄 필요도 없고 또 석달 열흘씩이나 늘어지게 근사를 모아가며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애써 오줌을 주어가며 석필을 제조하는 과정을 다분한 농사일에다 비긴다면 국영철도의 육중한 힘을 몰래 빌어서 순식간에 병마개들을 돈으로 변조하는 과정은 이를테면 땅투기로 벼락부자가 되는거나 비슷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 예쁜 병마개돈들을 짤랑짤랑 자랑하며 친구들의 부러워함 속에 없는 상투가 국수버섯 솟듯해가지고 돌아다니던것이 바로 어제런듯한데 벌써 반세기 하고 또 10여년이 지나다니.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이다지도 오래오래 머리속에 살아남아 가시지를 않는지. 내 고향 원산에서는 아직도 서로사이 “설라무네”와 “깐두루”를 주고받으며 련금술에 실망하고 조페에 성공하는 새끼김학철들이 분투를 하고있는지. 벼락부자가 돼가지고 코가 우뚝해 돌아치는 새끼김학철들이 내노라 하고 자신들의 력사를 엮고있는지. 분투의 력사를 엮고있는지.
7    녀류작가 리선희 댓글:  조회:484  추천:0  2016-04-14
녀류작가 리선희      서울에서 발간된 총서《우리 시대의 한국문학》(3)을 받았는데 거기에 수록된 작가들은 대개 아래와 같았다. 조명희, 리태준, 송영, 최명익, 김남천, 박태원, 안회남, 김사량 등 28인. 한데 그 맨끝에 마치 화물렬차의 차장칸처럼 색다른 이름 둘이 달려있었다.—김학철, 류원무. “일러두기”에는 “문단 데뷔(첫 등단)년도를 기준”한것이라지만 나만은 “작품의 수준을 기준”으로 했대도 이의(异议)가 없다. 그 28인가운데 녀류작가가 둘인데—리선희, 지하련—다 내가 잘 아는이들이였다.     총서에서의 해후   이 글에서 내가 서술하려는것은 리선희와 나 사이에 얽힌 사연이다. 얽힌 사연이란다고 또 무슨 엉뚱한 오해나 지레짐작은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리선희는 1911년생으로 나보다 5살이나 손우일뿐더러 우리 작은이모의 단짝 동창생이였던 까닭에 나는 그녀를 “아줌마”라고 불렀었다. 리선희는 해방이 되는것도 보지 못하고 타계를 했단다. 그러니까 30대초—아까운 나이에 요절을 한것이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 만난것은 1936년 봄 서울 운현궁(云岘宫)앞에서였으니까 손꼽아보면 57년전—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겠다. “운현궁”은 저 유명한 력사인물 흥선대원군(兴宣大院君)이 저택으로 쓰던 궁. 그리고 김동인의 장편력사소설《운현궁의 봄》의 무대로 되기도 했던 곳. 리선희는 우리 작은이모와 원산 루씨(미국녀자)녀학교 동기동창이자 또 서울 리화녀전의 동기동창이기도 했다. 우리 외가집에서는 자식들이 모두 서울에 올라와 학교를 다니게 되자 아예 솔가해 서울로 이사를 했던 까닭에 리선희도 관훈동 69번지 외가집에 와있으면서 우리 작은이모하고 작반해 학교를 다녔었다. 당시 나는 머리 빡빡 깎고 교복 입은 중학생. 리선희는 트레머리에 하이힐(뾰족구두). 피차간 격차가 이런 상태로 그녀와 나는 한지붕밑에서 한솥의 밥을 먹으며 근 3년 동안을 같이 지냈다. 그후 내가 상해로 건너온 뒤에는 그녀와 나 사이에 안부편지 한장도 오간것이 없었다. 다만 작은이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피차간 소식을 알았을뿐이다. 그나마 중일전쟁이 터진 뒤에는 음신(音信)이 아주 두절돼버렸다. 김사량의 입을 통해   내가 리선희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것은 그로부터 10년후인 1947년 봄 평양에서였다. 김사량의 입을 통해 들은것이다. “박영호 알지? 극작가.” “알잖구. 우리 원산사람인데. 나 서울서 학교 다닐 때 그 친구 정말 뜨르르했었다구. 조선극장 레파토리에 박영호 석자가 빠지면 큰일날 지경이였으니까.” “맞았어 그 친구. 그 친구하구 결혼했다구.” “누가?…” “누군 누구야. 리선희지.” “그래애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간만 의외롭지가 않았기때문이다. “그런데 말야, 전처 자식이 둘이나 있었지 뭐야.” “후처루 들어갔나?” “후천지 전천지 아무튼 둘이 결혼을 해가지구 원산을 내려가 살았었는데…” 나는 김사량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 “살았었는데”에 무슨 개운찮은 여운 같은게 느껴져서였다. “정말 모를 일이야. 리선희 같은 녀자가. 그런 지성적인 녀자가.” “…?” “전처 아이들을 구박했다는거야.” “그래애애? 그럴것 같잖은데…” 나는 고개를 이리 비틀고 또 저리 비틀고 했다. 잘 믿어지지가 않은것이다. “그나저나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니까.” “지나간 일이라니?” “죽어버렸으니까 지나간 일이지 뭐야.” “죽어버려, 누가?…” “아 리선희가 죽었지 누가 죽어.” “죽었는가?!” 나는 순간 염통밑에서 무언가가—두더지 같은 소동물이—꼬옴틀 돌아눕는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전쟁통에 생활고가 극심할 때 죽었으니까… 저두 불쌍하기야 불쌍하지.” 이윽고 나는 뻐근한 가슴을 눙치고 다시 물었다. “그래 살아있는 동안 글은 계속 썼는가?” “응, 수필을 주로 썼지. 소설은 더 쓴것 같잖아.” “수준이 어땠는가? 그 수필들.” “응. 섬세하구 예리하구… 간단찮았지.”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물론 간단찮았을테지. 그게 어떤 녀자라구.)     “저누만 매미가 환생한게야”   리화녀전시절 리선희는 처음에 일단 음악과에를 들어갔다가 1년후에 다시 문과로 옮겨왔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쏘프라노는 완전히 본격적인것이였다. 그녀가 뜰아래방에서 오르간을 타며 마스네의 “엘레지(悲歌)”를 부를 때면 그 애절한 멜로디에 나는 사랑방에 있으면서도 마치 타들어가는 나무껍질마냥 몸이 오그라들군 했었다. 하건만 우리 외조부는 돋보기를 끼고《삼국연의》를 읽다가 고개를 쳐들고 “저누만 아무래두 매미가 환생(还生)을 한게야.” 하고 쓴웃음을 웃는것이였다. “양산도”나 “방아타령” 같은것을 불렀으면 좋으련만 밤낮 부른다는건 모짜르트, 멘델스존, 슈베르트… 맨 알아듣지 못할것뿐이니 구악파(旧乐派)인 외조부가 왜 덜 좋아하지 않았을것인가. “저누만”은 “저놈아이는”의 원산사투리. 내가 리선희를 경모(존경하고 사모한)한것은 그녀의 용모가《홍루몽》의 녀주인공 림대옥과 일본녀배우 야마구찌 모모에를 반반씩 닮았다는데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경제적인 원인이였다. 그 원인을 그대로 밝히면 내 인격이 좀 추잡해지긴 하겠지만서두 부득이 량심대로 적을수 밖에 없다. 리선희는 내가 심부름을 열심히 잘해줄라 치면 꼭 “옜다. 이거… 호떡 사먹어.” 하고 5전짜리 백통전 한잎을 내 손에 쥐여주는 버릇이 있었다. 그 고상한 품격에서 우러나오는 버릇에 매료(魅了)된 나머지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아무때고 칼산지옥에도 뛰여들 각오가 돼있었다. 뚜르게네브의《전야(前夜)》에서, 안날 문을 열어주고 안내를 해주었던 하숙집 계집아이가 이튿날 다시 찾아온 귀족아가씨를 보자 얼른 하숙집 청년에게 연통을 하기를— “어제 제게다 50꼬뻬이까 주시던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팁(봉사료)으로 받은 50꼬뻬이까가 아예 귀족아가씨의 대명사로 돼버릴만큼 돈의 위력은 크다. 어쩌면 나도 그 시절 이와 비슷한 심리상태였었는지 모르겠다. 5전짜리 백통전이 리선희아가씨를 아예 대체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싱거운 배행   “배행(培行)”이란 “모시고 따라간다”는 뜻이다. 한데 그 엄숙해야 할 배행이 싱겁게 됐으니 문제일수 밖에 없다. 우리 큰이모는 일본 어느 대학(고마자와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여름방학에 귀국했다가 맞선을 보고 부랴부랴 혼례를 치르고 일본으로 데려갔던 까닭에 그 신랑이 졸업을 할 때까지 이태동안을 우리 큰이모는 도꾜에서 살았었다. 당시 대학생들이 결혼을 하는것은 보통이였다. 우리는 결혼을 하는 날이 대학에서 쫓겨나는 날이지만. 김사량도 도꾜제대재학중에 일시 귀국해 결혼을 했는데 그 신부(리화녀전졸) 역시 신랑을 따라 도일(渡日)해 도꾜에서 한 3년 잘 신혼생활을 했었다. 큰이모가 맞선을 볼 때 원래는 신랑감 신부감 1대1로 단둘이서만 만나기로 약속이 됐었는데 남녀 칠세 부동석(男女七岁不同席)이라는 낡은 관념이 아직 다분히 남아있던 시절이라 큰이모는 주니가 나서 마음을 고쳐먹고 나를 옵써버 겸 경호원 겸 데리고 갔었다. 그래도 우리 그 장래의 큰이모부가 사람이 워낙 소탈했던지 구태여 가로 꿰지지 않고 무사히 OK를 불러 경사롭게 쌍쌍이 꼴인을 했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까닭에 후에 리선희도 일본류학생과 맞선을 보게 됐을 때 서슴없이 나 이 “길남(吉男)”을 데리고 가기로 했었다.(조카가 없었으므로) 아마 장마다 망둥이가 날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번 신랑감은 우리 큰이모부와 팔팔결 달랐다. 놈팽이가 생김새부터(부자집 아들이라는게) 벌써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자식이 어떻게 생겼든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긴 했지만서도. 우리 큰이모부는 경상도치라 염소를 얌생이라고 하는게 좀 우스울뿐이지 사람은 텁텁하면서도 또 시원시원했었다. 그런데 이번 자식은 똑 “조조(曹操)간질래비”같이 생긴 주제에 첫눈에 벌써 나를 눈에 가시로 여기는게 환히 알렸다. 하긴 같이 가잔다고 철딱서니없이 덜레덜레 따라나선 내게도 잘못은 있었다. 대가리가 커다래가지고 정말 싱겁잖은가. 감독관도 아니고 립회인도 아니고 도시 명분이란게 없잖은가. 나 이 “길남”이 “흉남(凶男)”으로 될것은 처음부터 뻔했다. 장관의 맞선의식(仪式)을 겨우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리선희가 상글거리며 물었다. “이제 그 사람 너 어떻게 생각하니?” “어떻게 생각하다뇨?” “인상이 어떻더냔 말야.” “쥐코조리 좁쌀여우.” 리선희는 허리를 잡고 웃느라고 길을 못 걸었다. 나중에는 배살이 켕기는지 길바닥에 주저앉을듯이 몸을 쪼그라뜨렸다. 나도 뇌꼴스럽던김에 불쑥 한마디 혹평을 해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우스워서 덩달아 킬킬거렸다. 둘이 다시 나란히 걷다가 집에 거의다 왔을 때 리선희는 느닷없이 한마디를 하는것이였다. “난 아무때구 너 같은 남자라야 시집갈거야.” 그녀의 이 결심 같기도 하고 또 고백 같기도 한 한마디 말은 나의 사내대장부로서의 자부심을 크게 북돋아주었다. 최소한 고놈의 “쥐코조리 좁쌀여우”와는 비할바없이 우월하다는 자신심을 그 한마디는 불러일으켜주었다. 이날부터 나는 더욱더 리선희를 따르게 됐다. 내게 있어서 그녀의 말은 곧 칙명이자 하느님의 뜻이였다.     허전한 집, 허전한 마음   리선희는 학교를 그만두고《개벽(开辟)》사에 녀기자로 입사를 하자 이내 집을 옮겼다. 우리 외가집에서 나가버린것이다.《개벽》은 당시 권위있는 월간지였다. 옮기기 사나흘전에 리선희는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더니 수진본(袖珍本)책 한권을 건네주며 물어보는것이였다. “이거 읽어봤어?” 그 책인즉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본(岩波文库本)으로서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고뇌》였다. 당연한 일로 나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럼 한번 읽어봐, 얻어지는게 있을테니.” 나는 당시 죽어라 하고 일본의 무예물(武艺物)만 읽고있었다. 학교공부는 아예 제쳐놓고 노상 그속에 빠져있었다. 그저 탐독정도가 아니였다. “그렇게 밤낮 칼쌈하는 책만 읽어가지군 어떡하지? 어린애모양.” 하건만 그《젊은 베르테르의 고뇌》는 내게다 아무것도 갖다주지 못했다. 아무런 공명도 불러일으키지를 못한것이다. 이를테면 부룩송아지더러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한번 보라고 한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신비적인 미소의 뜻을 해득할리가 만무했다. “어때 소감이?” 내가 돌려주는 책을 받아들고 리선희는 은근한 기대속에 이렇게 물었다. “별 흥미 없소.—그 사람 자살은 왜 하지? 다른 녀자하구 결혼하면 될걸 가지구.” 크게 실망한 모양으로 리선희는 다시 더 말이 없이 새초롬하니 토라져버렸다. (외손자를 안느니 절구공이를 안지!) 이쯤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서고금 수천만명 독자들가운데 베르테르의 자살에 비단 동정의 눈물을 뿌리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도리여 못마땅하게까지 여긴 인간은 나 하나뿐이였을테니 리선희가 어찌 나에게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것인가. 한데 급기야 그 환멸을 느끼는 리선희가 옮겨가고나니 집안이 허전하기가 마치 빈 절간 같았다. 그리고 내 마음도 가을 끝난 목화밭처럼 허전해지고 또 어수선산란해졌다.   우리 외조부까지도 이따금씩 쓴웃음을 웃으며 뇌는것이였다. “그누메(그놈의) 매미가 없어지니까 집안이 별나게 고자누룩해진것 같구나. 거참.” 그후 리선희는 몇달 건너로 일요일에 관훈동집에를 들렸었으나 번번이 다 나만은 만나지를 못했다. 일요일이면 특히 무사분주해지는게 내 버릇이였으므로 잠시도 집에 붙어있지를 않아서였다. 리선희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것은 이무렵이였다. 나도 신기해서 더러 읽어보긴 했지만 번번이 다 실망했다. 젊은 베르테르가 자살한것을 못마땅스레 여기는 놈이 그와 비슷한 맥락의 소설을 알아줄게나 무언가. 개 머루먹기지—그 진미(참된 맛)를 알턱이 무언가. 리선희는《개벽》사에 약 1년간 근무하다가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퇴사를 하더니 당시로서는 사람들을 깜짝 놀래울짓—엄청난짓을 했다. 카바레의 녀급이 됐던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식술집의 접대부가 된것이다. —돈때문인가? —허영심때문인가? —아니면 무슨 실련따위 사유로 자포자기를 한건가? “걔가 도대체 왜 저러는거지? 아주 미치잖았다면야 타락을 해두 저 지경에까지야 할리가 있나. 카바레가 뭐야 카바레가. 나 참!” 작은이모가 푸념하는것을 한옆에 앉아 잠자코 들으면서 나는 머리속에다 홍등록주(红灯绿酒)로 질탕스러울 카바레의 정경을 떠올렸다. 그러자 나는 이름하기 어려운 일종의 느낌—배신당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재작년, 40여년만에 서울나들이를 했을 때 나는 마음 먹고 관훈동집을 한번 찾아보았다. 허허실실로 한번 찾아본것인데 놀랍게도 옛집이 거의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서 나는 참으로 감구지회(感旧之怀)를 이기기가 어려웠다. 운현궁 맞은편의 천도교기념관도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리선희가 근무하던 시절의《개벽》사는 이 건물 정문옆에 간판을 걸었었다. 파고다공원옆 리선희가 나가던 카바레도 찾아보았으나 그 건물은 형적도 남지 않았었다. 공원이 부지(敷地)를 넓히는통에 뭉그러져버렸던것이다.     작별이자 영결이자   나는 상해로 림시정부를 찾아가기로 작심한 뒤 어른들 몰래 슬금슬금 로자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오다가다 우연히 운현궁앞에서 리선희와 마주쳤다. 세련된 옷차림새가 품위가 있어보여 야하다는 느낌은 꼬물도 주지를 않았다. 어느 대가집 작은아씨라면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것 같았다. 순간 나는 웬지 “동백꽃아가씨(椿姬)”의 녀주인공—마르그리트 고오쩨를 떠올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나는 제잡담하고 꾸벅 절 한번을 했다. “아니, 이렇게 컸어.” 나는 한번 히쭉 웃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눈결에 그녀의 왼손 무명지에 끼여있는 보석반지를 보았다. 물론 전에는 없었던것이다. “그저 칼쌈하는 책에만 파묻혀있니?” “그건 호랑이 담배 먹을적 얘기요.” “말하는게 제법이구나. 다 큰 총각 같구나.” “벌써《부활》을 다 끝내구《전쟁과 평화》에 접어들었다구요.” “널 내가 아무래두 눈을 씻구 다시 봐야겠구나.” “그런데 왜 좀 놀러 오시잖우?” “몇번 갔어두 넌 없더라. 번번이.” 일종의 허영심때문에 나는 그 말을 제앞으로 당겨들었다. (오, 그러니까 나를 보러 왔었구나. 나를 보러 왔다가 내가 없으니까 락심했구나.) 그러자 걷잡을수 없는 충동이 강한 전류처럼 나를 꿰뚫었다. (이 녀자만은 내 행동을 리해해줄게다. 고백해야지. 다 털어놓자.) 나는 리선희를 끌고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운현궁 돌다리목으로 외워섰다. 이 돌다리는 란간이 없는게 특징인데 지금은 개천에다 복개공사를 한 까닭에 아예 다리 자체가 없어졌다. “내 얘기하는건 비밀 꼭 지켜주시죠?” “새삼스레 뭔데?” 우리의 약조의 표시로 새끼손가락부터 걸었다. “나 상해 가우.” “상해? 상해라니? 어느? 중국?…” “응.” “아니, 거긴 또 왜 갑자기?” “림시정부를 찾아갈 작정이요.” “넌 미치잖았니?” 나는 구변껏 그녀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맑은 정신으로 행동하고있다.”는것을 납득시켰다. “집에서들 알구있니?” “‘집에서’! 집에서 알았다간 당장 란리가 날판인데 ‘집에서’!” “집에두 안 알리구!” 리선희는 펄쩍 뛰였다. “그러게 내 뭐랍디까? 비밀을 지켜줘얀다잖습디까?” 결국 리선희는 내키지 않았으나 익은 밥을 설릴수 없다는것을 깨달은 모양이였다. “네가 능히 해낼수 있을가.” “인간도처유청산(人间到处有青山)—뛰여들어놓구볼판이지.” “그래 언제 떠날 작정이냐?” “불일간.” “난 정신이 얼떨하다.” “그럼 아줌마, 이걸루 하직이요.” “얘, 잠간만.” 리선희는 부지런히 핸드빽을 열고 빨락빨락한 10원짜리 지페 한장을 꺼내더니 그것을 내 학생복 웃호주머니에 밀어넣어주는것이였다. “이래두 되는거요?” “괜찮아.” “그럼 난 가우.” “조심해.” “네버 마인드(념려 마세요).” 나는 영어로 대꾸하고 한번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꼿꼿이 락원동을 향해 걸었다. 이것이 리선희와의 영결이 될줄이야! 여기서 한마디 덧붙여야 할것은 당시의 돈값이다. 10원은 쌀 한가마니 값. 후일 남경에서 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리더(지도자) 김원봉님의 편지심부름을 한 일이 있다. 림시정부 주석 김구선생께 갖다 전하라는 편지였다. 김구선생은 내가 갖다바치는 그 편지를 받아서 읽어보더니 “수고했다”면서 곧 비서더러 내게다 차삯을 주어보내라고 분부했다. 말하자면 금일봉(金一封)인 셈이다. 한데 그 금액이 얼마인고 하니 단돈 1원야(也)였다. 당시의 환률(외환률)은 일본은행권, 조선은행권, 중국은행권이 다 1대1이였다. 미국딸라와의 환률도 다 똑같은 3.3대1이였다. 그리고 남경택시도 서울택시처럼 시내 어디를 가나 다 1원 균일이였다. 그러니까 림시정부 주석이 준 돈의 10배를 리선희는 운현궁앞에서 내게다 전별로 주었던것이다. 하건만 내가 그 1원짜리 금일봉을 얻어가지고—20전이 아까와 인력거도 안 타고—어깨바람나게 걸어서 돌아오니까 화로강(花露岗)의 동료들은 모두 부러워 뭐 야단들이였다.(화로강은 민족혁명당 본부 소재지) “그 완고쟁이한테서 돈을 뜯어낸건 네가 처음이다.” “그놈의 령감한테 좀 잘 보일라구 삽살개노릇을 했을테지. 꼬리를 살랑살랑 쳐가면서.” “그야 물론이지. 그러찮구서야 그놈의 구두쇠가 아까와서 단돈 1원인들 어떻게 내놔.” “야, 한턱 내라, 공짜루 생긴 돈인데. 꿀돼지처럼 혼자 다 먹겠니.” 이와 같이 중구난방으로 지껄여대는것이였다. 마치 내가 뜻밖에 횡재라도 한것마냥. 여기서 한마디 공정한 말을 해야 하겠다. 김구선생이 구두쇠인게 아니라 당시 림시정부가 심한 재정난을 겪고있었던것이다.     사람은 가고 작품은 남고   그때로부터 반세기도 더 지나서 느닷없이 리선희의 작품을 대하게 되니 자연 감개가 무량하다. 더구나 이젠 나도 총각때와는 달리 작품을 제대로 볼줄 아는 눈을 갖추고있음에랴. 《우리 시대의 한국문학》에 수록된 리선희의 소설은 “탕자(荡子)”. 그 줄거리는 극히 간단하다. 약혼자가 있는 녀자가 동행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섬으로 등대를 구경하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등대지기에게 마음이 끌려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야기. 그녀의 약혼자는 청년학자로서 대학의 조교수, 나무랄데 없는 남자, 그가 자신의 이런 심적동요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괘씸해할가, 이렇게 자책하며 그녀는 굴레벗은 말같이 돼버린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를 쓰나 외딴섬의 등대불은 불가항력적인 마력(魔力)을 가지고 끈질기게 그녀를 잡아당긴다. 이상은 그 전부의 내용이다. 나는 어쩐지 작자 자신의 그림자를 그 녀주인공에게서 본것 같아 마음이 야릇하다. 인습도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서의 들뜬 마음, 리선희 자신이 바로 그런 반항적인 녀자가 아니였던가, 도전자, 반역자가 아니였던가. 더구나 기이한것은 내가 총각때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떠올렸던 련상과 작중인물—녀주인공이 떠올리는 련상이 맞아떨어지는것이다.   나는 뚱딴지같이 동백나무를 보자 동백꽃을 사랑했다는 마르그리트 고오쩨의 그 슬픈 이야기를 생각해서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외딴섬 등대밑에 자란 동백나무 그늘에 선 작중인물, 운현궁앞에서 나와 마주쳤을 때의 작자. 작중인물과 작자가 다 하나의 형상—마르그리트 고오쩨로 혼연일체를 이루어버리는것이다. 리선희는 또 이렇게도 썼다.   나는 어쩐지 건드려놓은 대합조개처럼 입이 꼭 다물어져 다시는 열기가 싫었다.   이것은 바다를 잘 알고 또 바다를 무한히 사랑하는 사람만이 쓸수 있는 비유일것이다. 문학의 길에서 나보다 까맣게 앞선 선배이자 또 나의 총각시절의 우상이였던 리선희아줌마, 고이 쉬시라.
6    제2차 공판 댓글:  조회:321  추천:0  2016-04-14
제2차 공판        인권의 황무지   나는 일생동안에 모두 세번 공판이라는것을 받아봤다. 아직까지는 그렇단 말이다. 세번 다 정치범이라는 신분으로 일본 또는 중국 법정의 피고석에 섰었다. 그중 방청자가 제일 많았던것은—성황을 이루었던것은—1975년 5월에 열렸던 제2차 공판이다. 무려 천삼백명. 그러니까 공판정으로 림시사용된 문화궁전 아래웃층의 좌석이 하나의 공석도 없이 꽉 들어찼다는 얘기가 되는것이다. 그러고도 또 모자라 밖에서는 입장 못한 방청희망자들이 장날 장군들처럼 복닥거렸다. 죄명은 반혁명현행범. 장장 7년 4개월이라는 세계기록적인 예심을 거친 끝에 비로소 조명 휘황한 무대우에 나는 섰다. 당국에서 최대한의 공판효과를 노린 모양으로 피고석을 무대우에다 안배했었다. 피고인의 흉악한 몰골이 잘 보이라고 의도적으로 한짓이 분명했다. 그래놓고는 계획적으로 신문사, 출판사, 방송국, 대학, 연구소, 극단, 가무단, 문화관 등을 포함한 각계층의 대표적인물들을 골고루 방청자로 초청했었다. 그러니까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복닥거리는축들은 방청권이 없이 공짜구경을 하려고 몰려든 “비대표적”인물들이였다. 말하자면 구경속 좋은 어중이떠중이였다. 구류소철창으로 바라보이는, 높은 벽돌담너머의 비술나무가 봄에 잎피고 가을에 잎지기를 일곱차례 되풀이하는 동안에 나는 어느덧 예순살. 뼈만 앙상한 산송장꼴이 됐었다. 야수적인 고문의 자국들도 화장터까지 동행할것만 빼놓고는 얼추 다 아물었다. 이러한 어느날 불시에 왈가닥덜거덕 삐이걱 감방문이 열리더니 “모다구”라는 별명의 간수가 호출을 하는것이였다. “나와!” 문초실(취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있는것은 자치주법원의 법관. “오늘 당신 공판이 있으니까 갑시다.” 실로 어두운데 주먹내밀기였다. “지금 당장?…” “밖에서 차가 기다리구있소.” 1943년 6월에 일본 나가사끼재판소가 나를 공판할 때, 사법당국은 열흘전에 미리 공판날자를 피고인에게 알려주었었다. 뿐만아니라 변호사까지 하나 알선해주었다. 내가 무일푼인것을 잘 알고있는터였으므로 관선(국선)변호사를 얻어준것이였다. 관선변호사란 사법당국의 위촉을 받고 변호사협회에서 사회봉사로 나와 무보수로 변호를 해주는 변호사다. 그런데 이번 공판은 근근 10분전에 그도 이미 차까지 대기를 시켜놓은 상태에서 알리는것이다. 그러니 변호사니 뭐니 하는따위는 애당초에 거론될나위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난 공판정에서 자기 변호를 할테니까 그런줄 아시오.” 이러한 나의 단호한 태도에 법관은 잠시 멍청한 얼굴을 했다. 그로서는 난생처음 당하는 경계였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그는 마지못해 “그럭합시다.” 대답을 하기는 하는데 도무지 석연치가 못한 말투였다. 아니나다르랴, 그는 반시간이 채 못돼 “떳떳하게” 식언을 했다. 일단 뱉었던 말을 도로 집어삼킨것이다. 구류소에서 문화궁전은 지척이라 자동차로 한 5분밖에 안 걸린다. 그 짧은 5분 동안에 나는 컴퓨터 같은 속도로 자기 변호할 말을 머리속에다 정리해넣었다. 시체말로 하면 입력을 한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웨칠 구호까지 결정했다. —맑스 만세! —엥겔스 만세! —레닌 만세! —팽덕회 만세! 최후의 각오를 한것이다. 최후의 각오를 했기에 관례를 깨버린것이다. 독재들을 제외한것이다.     공판놀음   문화궁전 정문앞에서 밀려드는 인파를 헤가르느라고 차가 한동안 지체를 했다. 극악한 반혁명 우두머리의 흉악한 몰골을 한번 보기가 평생소원이기라도 한듯 사람들이 마구 들이덤벼서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전무후무한 인기의 절정에 오른 셈이였다. —나중엔 별놈의 팔자도 다 많지! 카우보이식탄띠를 두르고 권총을 찬, 맵짜게 생긴 경관의 압령하에 나는 협장을 짚고 무대 한복판에 방청석을 향하고 섰다. 그러자 곧 흑판만한 패를 목에 갖다 거는데 거기에는 흰 글자로 씌여있기를— 반혁명현행범 김학철   제 생각에도 결코 보기 좋은 현상은 아니였다. 예순살 먹은 외다리피고인이 장승처럼 떡 뻗지르고 서있는데 보기 좋을게 무언가! 32년전에 일본제국주의 법정에 설 때는 총 맞은 다리에다 붕대는 감고있었지만서도 아직 다리를 자르지는 않았던 까닭에 협장은 짚지 않았었다. 그래도 재판장은 정리(庭吏)를 시켜 걸상 하나를 갖다가 앉게 해주었다. 나라고 뭐 특별히 우대를 한게 아니라 그저 정해진 규례대로 한것이였다. 이른바 인도주의적대우인것이다. 나는 아래웃층 천삼백개 좌석에 잘 여문 옥수수알 박히듯한 방청자들을 웃층 한번 둘러보고 아래층 한번 둘러본 다음 다시 고개를 돌이켜 뒤를 살펴보았다. 무대 왼손편 안침 특별석에 대단한분들이 제터(祭基) 방축에 줄남생이 늘어앉듯하셨는데 개중에는 아는 얼굴도 한둘 있었다. 내가 망하는것을 깨고소해할 량반들이였다. 내 거동이 피고인답잖아 뇌꼴스러웠던지 뒤에 물러서있던 카우보이식경관이 뚜벅뚜벅 걸어와 도적놈 개 꾸짖듯 나를 꾸짖었다. “고개 숙엿! 허리 굽혓!” 나는 고개를 숙일 대신 얼른 뒤로 젖혔다. 그리고 허리를 쭉 펴고 주먹 쥔 손으로 등허리를 쾅쾅 쳤다. 한껏 펴자는 뜻이다. “문화대혁명”이 터진이래 칠팔년 동안에 무릇 “계급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다—하나의 례외도 없이—명령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이고 허리를 깊숙이 굽혀야 했다. “디터우(低头)” 하면 고개를 숙여야 하고 “하야오(哈腰)” 하면 허리를 굽혀야 했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줍시사”는 표시였다. 한데 놀랍게도 이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모욕적인 자세가 아예 의식화(仪式化)돼버려 사회생활속에 이미 정착을 했었다. 항다반이 돼버려 아무도 해되스레 여기지를 않았다. 나는 이에 도전할 결심을 내렸던것이다.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숙이고 굽히고는 안할 작정이였다. 극좌분자들이 벽돌 넉장을 가느다란 쇠줄로 얽어매가지고 “계급의 적”이라는 교장선생의 허리 굽힌 목덜미에다 두세시간씩 걸어놓는것쯤은 례사로운 세월이였다. 화가 치민 경관이 달려들어 우악스러운 손으로 내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숙이게 하려는것이다. 천삼백쌍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우에서 진짜활극이 벌어졌다. 관람료를 받지 못하는게 원통할 지경이다. 내가 끝끝내 버티니까 카우보이식경관은 하릴없이 벗겨들었던 레닌모를 도로 내 머리에 콱 씌워주었다. 채양이 뒤로 가게 아무렇게 씌워준것을 나는 벗어들고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쓱쓱 쓰다듬은 다음 방정히 썼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의식적으로 했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저희들 마음대로 안되는 일도 있다는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여기까지는 무대동작이 상당히 멋이 있었으나 그다음부터가 뒤죽박죽—아주 란장판이 돼버렸다. 난데없이 범강장달이 같은 도시민병 둘이 달려들더니 그중 하나가 등뒤에서 바줄로 내 목을 옭아가지고 왈칵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나는 협장 따로 사람 따로 그만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그러자 역시 등뒤에서 법관나리의 급해맞게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갈잡이, 아갈잡이!” 언하에 량손에다 쇠막대기와 걸레짝을 갈라쥔 또 하나의 범강장달이가 대들었다. 그는 목이 졸리는통에 벌어진 내 입속에다 쇠막대기로 그 더러운 걸레를 깊숙이 쑤셔넣었다. —완벽한 아갈잡이! 이런 상태로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천삼백명 방청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웨쳐대는 구호소리는 우뢰와 같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반혁명분자를 타도하라!” “김학철을 타도하라!” 징역 10년의 판결로 장관의 공판이 끝이 나는데—시의(时宜)에 맞지 않게 나는 허기증이 났다. 아침에 먹은 강낭떡 한개와 시래기국 한사발이 어느새 다 꺼져버렸던것이다. 구류소에서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배가 고픈 법인데 무대우에서 한바탕 용을 썼으니 배가 어찌 아니 고프랴. 지미뜨로브가 조작된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으로 체포돼 나치스 독일의 기세등등한 법정에 섰을 때, 그는 론리정연한 자기 변호로써 재판장 괴링(원수)의 기염을 누르고 마침내 무죄방면을 쟁취하는데 성공을 했었다. 이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야만적인 나치스 독일의 법정도 피고인의 자기 변호를 가로막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것이다. 자기 변호를 못하게 목을 졸라 쓰러뜨리고 아갈잡이를 하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것이다.     문명한 감옥   공판이 끝난 뒤 나는 곧 감옥으로 압송이 됐다.(아무 소용짝도 없을게 뻔한 상소를 깨끗이 포기했기때문에) 세면실도 목욕탕도 도서실도 아무것도 없는 감옥으로 압송이 됐다. 서너달후 그 문명한 감옥안에서 나는 그 유명짜한 문화궁전 공판사건의 반향을 들었다. 갓 투옥된 신참죄수들이 전하는 말을 들은것이다. “그런 놈은 무기징역을 콱 안겨야 한다.”는 폄사(贬辞)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별”이라는 찬사가 엇갈린다는것이였다. 그나저나 나는 발표도 하지 않은 한편의 소설때문에 단 하루의 깔축도 없은 만 10년 동안을 그 지긋지긋한 철창속에서 허구한 날 배를 곯으며 죄수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못내 통쾌한것은 사법당국이 그토록 면밀하게 용의주도하게 획책했던 공판놀음을 보기 좋게 뒤엎어 박산을 내준것이였다. 당시 그 수치스러운 공판놀음을 방청한분들의 거개가 아직도 이 자치주와 연길시에 생존해있다. 물론 그중의 대부분은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못해 “김학철 타도”를 웨쳤던분들이다. 개중의 한 시인은 그 비인도적인 공판놀음을 분격한 나머지 “이럴 땐 우리가 다 손을 맞잡아 저 무대로 올라가야 해.”라며 방청석에서 발을 굴렀다는것이다. 하긴 내가 감옥안에서 옥사를 하지 않고 살아나온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부류도 없지는 않다. 그들의 눈에는 아직도 내가 대역죄인으로만 보이는것이다. 그 공판이 있은지도 어언 열일곱해, 내 나이도 이젠 일흔일곱살. 죽기전에 력사적교훈을 후세들에게 남겨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돼 이와 같이 이왕지사를 한번 되새겨보는것인데 또 무슨 구설수나 듣잖겠는지 모르겠다. 제4차 공판을 벌어다주지나 않겠는지 모르겠다.   1572년 8월 23일 성(圣)바톨로뮤의 날, 프랑스국왕 샤를9세는 신교도들을 학살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하루밤사이에 무고한 신교도들이 약 5만명이나 학살을 당했다. 그 샤를9세가 이번에 그러니까 죄를 지은지 무려 419년만에 빠리시형사법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와 공공행사방해죄”로 재판을 받게 됐단다. 일단 지은 죄는 아무때고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단적인 례라 하겠다. 나의 반혁명죄행의 증거물로 됐던것은 1965년 3월 탈고한 졸작《20세기의 신화》 27만자—분노에 찬 정치소설이였다. 발표도 하기전에 폭도들의 범죄적인 가택수색으로 들추어낸것을 극좌의 늪속에 턱밑까지 빠져들어갔던 사법당국은 오히려 천하의 진보(진귀한 보배)라도 얻은듯이 흔희작약(欣喜雀跃). 반동문인들의 괴수를 철저히 응징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 그리하여 사법당국은 머리가 급상승으로 뜨거워나 한때 아예 리성을 잃었던것이다.     만기출옥은 했건만   제3차 공판의 전말을 생략하면 꽁지 빠진 수탉모양이 돼버릴것 같아서 간략히 덧붙여 기술한다. 1977년 12월에 만기출옥을 한 뒤 옹근 3년 동안을 나는 반혁명전과자라는 극히 고귀한 신분으로 완전실업자들의 대렬에 끼였다. 안해가 공장에 다니며 벌어다주는것을 얻어먹으며 근근히 살아가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동안에 고등법원에다 여러차례 불복상고를 했으나 번번이 다 “원판결유지”로 기각을 당했다. 참다 못해 3년만에 최고법원에다 직소를 해서야 비로소 일이 락착이 되는데 그 마무리과정 또한 순탄치가 못했다. 작가협회에서 나의 복권을 일대 경사라고 대회장을 마련하고 숱한 손님을 청했는데 불시에 핵심부문에서 까닭 모를 금령(禁令)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대회장은 온통 란장판이 돼버렸다. 그 금령의 요지인즉 “그렇게 요란스레 하지 말고 작가협회내부에서 조용히 치르라”는것이였다. 그러니까 작가협회 임직원 20여명이 좁은 칸에 모여앉아 구메혼인하듯 소리소문없이 해치우라는 뜻이다. 참을 줄이 끊어진 나는 한때 풀어놓았던 투구끈을 다시 졸라맸다. 그리고 비양조로 맞불을 놓았다. “문화궁전에다 지난번 공판때와 똑같은 규모로 천삼백명을 모아놓고 개정(开庭)할것을 요구한다. 불연이면 불참—결석재판을 할테면 하라.” 그 결과 타협이 이루어져 당학교 강당에다 외부인사 100명 가량을 청해다놓고 담당판사가 장중히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다”는 판결서를 랑독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1980년의 12월도 이미 하반월에 접어들어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라고 읊은 어느분의 시조가 떠오르는 계절의 일이였다.     가시지 않은 여운   국가배상법이나 형사보상법 따위 개념은 아직까지 형성도 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그놈의 10년징역은 말하자면 외상으로 살아준 셈이다. 그리고 문제거리의《20세기의 신화》는 제3차 공판이 끝난 뒤에도 계속 법원 캐비닛속에 갇혀있다가 7년후인 1987년 8월에야 비로소 “불허발표”라는 조건부로 임자에게 돌려졌다. 이 세상에 태여난지 스물일곱해가 되는《20세기의 신화》는 현재 서랍속에서 볕을 보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있는 처지—답답한 처지다.   친애하는 문화궁전은 지금도 백산호텔 동쪽 100메터 지점에 건재하신다.
5    아, 태항산 댓글:  조회:545  추천:0  2016-04-14
아, 태항산        조선작가 김사량이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태항산에 들어와 제일 처음 만난 조선의용군이 곧 털보 김철원(金铁远)이였다. 김철원이는 당시 전초지역에 설치된 련락처에서 비밀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하고있었다. “아하, 당신이 김사량이요?” 안내원의 소개를 받고 김철원이는 륙사키(배낭)를 짊어지고 어줍은 자세로 서있는 김사량을 아래우로 한번 훑어보더니 이와 같이 시큰둥한 소리를 하더라는것이다. 련락처에서 하루밤을 드새는데 그 무섭게 생긴 털보에게 좀 잘 보이려고 김사량이 소중히 간직해온 위스키 한병을 코아래진상했더니 그놈의 털보가 대번에 180도의 전환을 하더라는것이다. 태항산은 원래 술담배라는게 아예 없는 세상이라 여러 해포만에 한잔 얻어 하니 얼큰한게 어지간히 좋았던 모양이다. “우리 의용군에두 원래 작가가 둘이 있었소. 김학철이란 친구하구 나하구… 이렇게 둘이 있었지. 하지만 그 친구 지금 일본에 끌려가 감옥살일 하구있거든. 그러다나니 작가라곤 현재 나 혼자뿐이지 뭐요. 그런 판에 마침가락으루 당신이 들어왔으니… 어허허! …일이 참 잘됐단 말이야. 우리 한번 손잡구 본때있게 해봅시다.” 김철원이가 호기롭게 장담을 하는 바람에 김사량은 정말 그런줄 알고 진심으로 그 호걸풍의 털보를 우러러보며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된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는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구보니까 그 친구… 순전한 허풍이였지 뭐야.” 해방후, 김사량이 나를 보고 어이없는듯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다. 김사량도 엉터리박사에게 속은게 새삼스레 우습던지 허리를 잡고 웃었다. 털보 김철원이는 원래 상해에서 나와 같이 테로활동을 하던 친구로서 문학하고는 거리가 멀기를 남극하고 북극만큼이나 먼 친구였다. 그 대신에 군인으로서는 쩍말없는 사나이였으므로 조선전쟁때 그는 기갑부대 참모장으로 맹활약을 했다. 김사량이 태항산에서 “노마만리(驽马万里)”를 쓰는데 원고지는 고사하고 그냥 종이도 없어서 시계를 팔아 꺼칠꺼칠한 토산종이를 사 썼다는 이야기는 태항산의 경제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실감나게 설명해준다. 그 김사량외에 진짜작가라고 할만한 사람이 태항산에는 없었다. 몇몇 있었다는것은 다 김학철 같은 “대용품”작가들이였다. 아, 왜 “이가 없으면 이몸으로 산다”잖는가. “꿩 대신에 닭도 쓴다”잖는가.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이몸” 같고 “닭” 같은 작가명색이 몇몇 있기는 분명히 있었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붓이고 종이고 다 집어던지고 총을 들고 달려나가야 하는 이른바 작가들이 오죽했으랴. 우리는 지난날을 너무 랑만적으로 미화(美化)하지는 말아야겠다. 그렇다고 구태여 평가절하(评价切下)를 하거나 신화같이 과장하란 말은 아니지만. 사실 말이지 반세기가 지나 70의 고개를 넘어선지도 한참 되는 지금도 나는 어디 나가 “나는 작가”라고 말하기가 좀 게면쩍다. 나의 고등학교 후배 조정래(나는 26기, 조씨는 52기)의《태백산맥》이 200만부가 팔렸다는 소식에 접한 뒤부터는 더욱 그러하다. 주눅이 아니 들래야 아니 들수가 없다.     실패작   각설(却说)하고, 태항산시절에 내가 쓴 각본 “등대”이야기를 좀 해보자. “등대”의 연출은 최채(崔采)가 맡았었다. 그는 일찌기 촬영소에 재직한바 있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를 배우가 도무지 맞갖잖았다. 그래서 숫제 최채와 내가 역을 하나씩 맡아버렸다. 그러고도 또 모자라서 조선의용군에 하나밖에 없는 일본녀자 권혁(본명 데라모도 아사꼬)까지 동원을 했다. 무대장치는 박무(朴茂)가 맡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극보다 무대장치가 더 찬란해 “한푼짜리 푸닥거리에 오푼짜리 두부”격이 돼버렸다. 게다가 리명선(李明善)이 맡은 음향효과 또한 어찌나 박진했던지 배우들의 대사가 무색해질 지경이였다. 그러니까 공정히 평가해 아주 실패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준(准)실패작은 틀림이 없었다. 박무는 해방후 통신사의 사장이 됐고 또 리명선은 조선전쟁때 인천에서 전사를 했다. 그리고 일본 녀대원 권혁은 조선에 아직 살아있음직하나 련신은 없이 지낸다. 최채와 나는 아직 건재. 연변의 터주대감 비슷한 존재들이 돼버렸다. 태항산시절 우리 선전부에는 미술가 장진광(张振光)과 작곡가 류신(柳新, 본명은 전용섭)도 있었는데 그들 둘만은 “대용품”이 아니였다. 진짜였다. 장진광은 태평양상에 둥실 떠있는 섬—하와이에서 태여났다. 그는 여라문살 때 상해로 건너왔는데 나중에 반일단체의 군자금을 마련하다가 붙잡혀 일본 나가사끼감옥에서 7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죄명은 “강도”였다. 후일 그는 조선의용군에 입대를 했다. 입대를 한 뒤에도 그는 계속 시사만화를 그렸는데 화필이 없어서 탄피에 양털을 박아 만든 붓을 썼었다. 41년에 내가 총을 맞고 일본으로 끌려가 징역을 산것도 역시 장진광이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감옥이였다. 그러니까 장진광과 나는 일본감옥의 동창생으로서 선후배사이인 셈이다. 그가 선배 내가 후배.     원쑤의 옥수수   류신은 본래 간도 룡정사람으로서 양주소(술도가)집 아들이였다. 별명은 “깽깽이”. 바이올린이 항상 그와 더불어있었기때문이다. 광동 중산대학에서 중앙군교로 전학해와 나하고 동기동창이 됐었는데 태항산에 들어온 뒤에도 역시 선전부의 동료로 같이 일을 했었다. 그나 내나 다 프로레타리아출신이 아니였으므로 사실 말이지 옥수수밥이란건 태항산에 들어와 난생처음 먹어봤었다. 끼니마다 옥수수가짐을 하는데는 둘이 다 손을 바짝 들었다. 옥수수밥이 곧 원쑤 같았으나 다른 선택이란 있을수 없는 환경이였으므로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허구한 날 그놈의 “원쑤”에 목숨을 걸었다. 어느날 또 “김학철 작사 류신 작곡”을 하는데 류신은 그의 유일한 악기인 하모니카로 구차스레 작업을 했다. 잦은 반“토벌”작전바람에 바이올린이고뭐고 다 풍비박산이 돼버렸기때문이다. 우리 영사(营舍)에서 한 네댓마장 떨어진 곳에 그리 크지 않은 성문 하나가 헐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데 우리는 그 문루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며 운치있게 한번 해볼 작정을 했다. 한데 막상 올라가보니 전후 좌우 사방에 바라보이는거라곤 몽땅 옥수수밭뿐. 따가운 가을볕에 어지간히 마른 잎들이 선들바람에 서로 부딪쳐 버석버석 소리를 내는게 흡사 갑옷 입은 군사들이 출동이라도 하는것 같았다. 류신과 나는 그놈의 옥수수밭이 꼴도 딱 보기가 싫었다. “저 숱한 옥수수가 다 우리 입으로 들어올거구나.” 생각하니 지긋지긋했던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쌓인 울분을 속시원히 날려버리기로 했다. 롱지거리로 속시원히 날려버리자는것이다. “이담에 우리가 정권을 쥐게 되면 까짓거 포고령 제1호를 내리자.” “뭐라구 내려?…” “포고령 제1호. 무릇 옥수수를 심는자는 다 엄벌에 처함.” “그냥 엄벌에만 처해가지군 어떡해.” “그럼?…” “포고령 제1호. 무릇 옥수수를 심는자는 깡그리 사형에 처함.” “됐어 됐어. 와하하!…” 그때 손벽을 치며 너털웃음을 치던 류신도 역시 조선전쟁에서 전사를 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것일가.   태항산의 그윽한 추억이여, 영원하라.
4    황포동학회 댓글:  조회:463  추천:0  2016-04-14
황포동학회        황포동학회(黄埔同学会)란 황포군관학교 동학회의 략칭인바 동학회는 우리 말로 한다면 교우회(校友会)나 동창회가 될것이다. 지난 5월 4일, 나는 중앙군관학교(즉 황포)를 졸업한지 장장 53년만에 비로소 막차를 타듯이 그 동학회의 회원으로 되였다. 지지난해 정월, 그러니까 89년 정월, 49년만에 공산당당적을 회복하고 또 같은 해 가을에는 서울에 가서 무려 55년만에 보성고등학교 교우회 회원으로 된것들과 아울러 감안할 때, 어쩐지 전기적(传奇的)인 색채가 좀 비낀듯한 내 신상(身上)이다. 1924년, 손중산이 광주 황포에다 황포군관학교를 세울 때는 국공합작시기였으므로 학교의 교장은 비록 장개석이였을망정 정치부 주임 주은래를 비롯해 엽검영, 섭영진 등 많은 공산당원들이 교직을 담당했었다. 그리고 학생대오에도 림표, 서향전, 진갱, 속유 등 후일의 쟁쟁한 홍군장령들이 많이 재학했었다. 이 황포학교에는 그 초창기부터 조선학생들이 여간 많지가 않았다. 30년대초, 서울에서 간행되던 우리 말 잡지《조광(朝光)》에 사진까지 곁들여져 실린 “황포군관학교의 조선학생들”이란 기사를 읽어보고 나는 당시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황포학교를 찾아갈 결심까지를 내리게 됐던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언론통제가 그때만 해도 상당히 “관용적”이였다는 점이다. 당시는 맑스의《자본론》도 다 공개발행, 자유판매했었다. 49년 4월 “백만웅사하강남(百万雄师下江南)”때, 남경을 함락시킨 해방군은 국민정부가 미처 처치 못한 비밀문서들을 깡그리 로획해다 보관을 했는데 그가운데는 황포학교 매기(每期) 졸업생들의 명단과 졸업사진들도 다 들어있었다.(1기에서 23기까지. 그중의 한기치만이 분실됐음.) “이번에 가 졸업사진을 보니까 김선배(김학철)는 맨 앞줄 왼쪽으루 두번째구 그리구 문선배(문정일)는 둘째줄인데… 김선배는 체격이 아주 름름하시던걸요.” 이것은 나보다 10기 후배인 손건지(한족, 66세)가 장춘에서 맡아온 회원증을 내게다 건네면서 한 말이다. “한번 꼭 가보십시오. 50여년전 사진인데… 궁금하시잖습니까. 소시적 동창생들의 얼굴두 한번 보실겸.” 아닌게아니라 가볼 생각이 간절하다. 그중에 아직 살아있는게 과연 몇이나 될는지. 그리고 한쪽뺨에 깊은 칼자국이 비낀 대대장(별명 씰룩이)의 무서운 얼굴도 한번 보고싶다. “그런데 성회(省会)에 보관돼있는 묵은 등기부에는 김선배의 본적이 룡정으루 돼있더라구요. 정말 룡정태생이십니까? 이번 리력서엔 분명 조선 원산이라구 기입하신걸루 아는데…” 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뭐라구? 내 본적이 룡정으로 돼있더라구? 아하하!” 나로서도 처음 듣는 자신의 본적지였다. 나는 청년시절에 서울서 상해로 직행을 했던 까닭에 룡정이라는게 어디 가 붙어있는지도 몰랐었다. “그건 까닭이 있는거요. 당시 황포학교가 조선학생들을 자꾸 받아들여 군사인재루 길러내니까—일본놈들은 그걸 몹시 맞갖잖아했었죠. 그래 참다 못해 남경정부에다 항의를 한거예요. 조선학생들을 싹 다 쫓아내라구. 장개석이가 그 압력에 굴복해 눈가림으로 조선학생들을 일단 다 출학처분하긴 했지만서두… 이튿날 도루 다 뒤문으루 끌어들여다가 다시 등록을 시키는데 ‘이름을 모두 중국식으루 갈구 그리구 본적두 다 동북삼성으루 고치라’는거예요. 그통에 내 본적두 아마 룡정이 돼버렸던 모양이요. 누군진 몰라두 간도에서 온 어느 친구가 대신 써넣어줬겠지. 내가 지리를 몰라서 어리뻥하니까.” “아하하, 그런 속내평이였군요.”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한바탕 재미스레 웃었다. 현재 중국땅에 살아있는 조선족 황포교우는 모두 7명으로서 북경의 문정일과 로민, 심양의 한청과 저소경, 서안의 홍순관, 합비의 리홍빈 및 연변의 김학철이 곧 그 일곱 사람이다. 그리고 연변의 황재연과 안휘의 료천탁은 이미 타계를 했으니까 산 사람의 명단에는 들지를 못한다. 남북조선에는 아직도 적잖이 살아있을테지만 그것은 국경밖의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오 참, 쏘련 민스크에 또 하나—리상조가 살아있다. 나이 77세에 귀는 절벽이래도 아직 멀쩡히 살아서 무언가를 쓰고있다. 조소경은 완전실명, 홍순관은 수전증으로 편지 한장 쓰기도 어려운 형편. 그러나 76세의 김학철은 여전히 현역작가로 최후의 분발을 하고있다. 50년전에는 개개 다 일당십(一当十)의 역군들이였으나 세월은 아무래도 당해내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21세기에 접어들면 이 땅에 남아있는 7명의 조선족 황포교우도 늦가을의 철새들처럼 다 떠날테니까 뒤에는 두어줄의 희미한 력사기재만이 남게 될것이다.
3    나의 젊은 시절 댓글:  조회:424  추천:1  2016-04-14
나의 젊은 시절        테로활동과 전쟁과 감옥살이로 20대 젊은 시절을 나는 고스란히 바쳤다. 나름대로의 신념에다 바쳤다. 스무살에 상해에서 반일테로활동에 뛰여들어 맥아더사령부의 정치범 석방명령으로 일본감옥에서 풀려나는 서른살까지 나는 지겨운줄도 모르고 또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한길을 걸어나왔다. 제멋에 겨워서 자신만만하게 걸어나왔다. 하긴 자신만만한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의 젊은 시절의 동료들은 다 민족의 정화(精华)였다. 물론 부족점들도 있었다. 실수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서도 빼여난 인물들임에는 역시 틀림이 없었다. 내가 상해에서 첫시작으로 겪었던 일은 어이없는 실패로 끝이 나기는 했었지만서도 그 기억은 유리에 난 줄칼자국마냥 반세기가 지나도록 가시지 않고 내 머리속에 생생히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우리 행동대의 대장은 최성장(崔成章)이였다. 그리고 대원들로는 서각(徐觉), 라중민(罗仲敏), 왕극강(王克强), 안창손(安昶孙), 김학철(金学铁) 등이 있었다. 그러나 “햇병아리”신참이라고 권총을 주지 않아서 나는 “비무장”으로 참여를 해야 했다. 일본경찰의 끄나불을 처단하는 행동이였는데 내 소임은 나팔을 부는것이였다. 총소리를 엄페하기 위해 크게 소리만 내면 되는것이였으니까 아무리 불줄 모르는 손방이라도 능준히 다해낼수 있는 일이였다. 최성장과 서각이 그자가 거처하는 2층으로 올라가고 안창손은 뒤문을 지키는데 나는 현관문을 등지고 서서 죽어라 하고 나팔을 불어댔다. 나팔소리를 듣자 골목어구에서 딱지치기를 하던 조무래기 서넛이 무슨 구경거리가 난줄 알고 부지런히 쫓아와 눈들이 동그래져가지고 쳐다보는게 못마땅해 나는 “저리들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싶었으나 나팔소리를 잠시도 멈춰서는 아니되므로 입을 비울 재간이 없어서 소리도 못 질렀다. 내가 목에 피대를 세우고 나팔을 불어대고있을즈음, 비갈망으로 현관문우에 덧댄 세멘트채양에서 별안간 사람 하나가 쿵 뛰여내리더니 곧 불 채인 중놈 달아나듯하는것이였다. 나는 무슨 영문을 모르는 까닭에 그놈이 뺑소니치는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계속 열심히 나팔만 불었다. 불시에 우악스러운 주먹 하나가 내 잔등판을 한번 콱 쥐여박더니 “듣기 싫다, 고만 불어라. 멍청이!” 하기에 놀라서 돌아보니 최성장이였다. 화가 잔뜩 난 그의 얼굴은 군데군데 불긋불긋하고 또 세비로의 호졸곤한 앞자락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있었다. 그의 등뒤에는 시무룩한 얼굴을 한 서각이 따라섰는데 이 역시 풍년거지 쪽박 깨뜨린 형상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와 서가 들이닥치는것을 보자 그자는 잽싸게 손을 썼었다. 상우의 보온병을 집어들어 앞장선 최성장을 겨누고 내던져서 뜨거운 물벼락을 안긴것이다. 그 바람에 최성장이 주춤하자 그자는 열려있는 창문으로 날쌔게 몸을 빼쳐 채양우에 일단 뛰여내렸다가 다시 땅바닥에 뛰여내려 삼십륙계를 부른것이였다. 그날 덴둥이가 됐던 최성장이 10여년후에는 군단참모장이 돼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불과 몇해 안 가서 그는 모종 사건으로 허무하게 처형을 당했다. 그날 뒤문을 지켰던 안창손은 후에 포병사단의 참모장이 됐으나 애석하게도 전사를 했는데 직격탄(폭탄)을 맞았던 까닭에 시신도 수습을 못했다. 서각은 항일전쟁시기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오는 강행군도중 급병이 나서 할수없이 점아평(店儿坪)부근의 한 촌락에다 맡겼었는데 후에 찾으러 가니까 촌장이 새 무덤 하나를 가리켜보이며 “병사를 했다.”는것이다. 정말 병사를 했는지 아니면 일본군이 들락날락하는 곳이라서 항일군인을 보호했다가 들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도륙이 날테니까 미리 손을 썼는지, 아무튼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았다. 당시 우리 대 소속이였던 왕극강도 10여년후에 이 역시 모종 사건으로 허무하게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라중민도 사단장이 됐었으나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들어 과실치사혐의로 철직을 당했다.(오발로 인해 중앙부장급인물 하나가 즉사를 했던것이다.) 그는 군복을 벗기우고 어느 림산사업소로 쫓겨내려갔는데 그후의 소식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태항산에 묻힌 서각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8년항전을 끝까지 겪어낸 독립군들인데 그 어느 하나도 제명에 죽는거라곤 없다. 나는 또 나대로 일본감옥에서 4년, 중국감옥에서 10년, 징역살이 복이 터진데다가 또 다리 한짝은 미리 일본감옥 묘지에 묻어놓고있는 형편이다. 나까지 죽었더라면 이 글은 누가 썼을가. 도대체 우리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개개 다 운명이 이 모양이다. 민족의 사업에 청춘들을 고스란히 바친 죄인가.
2    나의 길 댓글:  조회:1423  추천:0  2016-04-14
나의 길      1916년에 아름다운 항구도시 원산에서 나는 누룩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여났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공부를 잘하지 못해 언제나 통신부에서는 새 을(乙)자들이 판을 쳤다. “또 오리(乙)투성이구나. 넉가래(甲)는 하나두 없구.” 어머니가 체념적으로 탄식하시는것을 들을적마다 나는 몹시 열적었다. 그래도 “다음 학기엔 잘할테니까 엄마 념려 마” 소리는 한번도 안했다. “넉가래”는 애당초에 나하고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것을 자신이 잘 알고있었기때문이다. 그 대신에 어머니가 “네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 홀어미 자식 소리를 듣는다. 알겠느냐?” 하신 말씀만은 명심해 철저히 지켰다. 70년 동안을 청교도처럼 술담배와 담을 쌓고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우리 큰아버지는 대서업자였으므로 대일본제국의 “6법전서”를 성전(圣典)으로 받들어모셨다. 그래서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루루이 타이르는것이였다. “공산당이란 불한당패니까 아예 가까이할 생의를 말아.” 후에 내가 총을 맞고 일본감옥으로 끌려갔을 때 바로 그 큰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보고 “제놈이 총 한자루 들구 숫제 제국군대와 맞서보겠다구? 그놈이 아주 돌지 않았다면야 언감생심 그따위짓을 할리가 있나. 허 참!” 하는 바람에 우리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천지간에 용납 못될 대역죄를 지은줄 알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는것이다. 그 큰아버지가 나를 훈계하고있을 바로 그무렵에 우리 외삼촌의 처남인 안몽룡(安梦龙)은 ML파였으므로 “치안유지법위반”에 걸려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있었다.(해방후 그는 원산시의 초대시장으로 됐다.) 이런 무슨 갈래판인지를 도무지 알수 없는 환경속에서 자라던 나는 서울 보성고 재학중에 리상화의 시를 접하게 된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부르짖음에 열광한 나머지 나는 그 빼앗긴 땅에서 살아야 하는게 새삼스레 절통했다. 그런데다가 또 입쎈의 “민중의 적”에서 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것은 혼자 따로 서는 사람”이라고 갈파하는것을 보고는 그만 아주 환심장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문학지《조선문단》이 복간됐을 때 나는 볼런티어(자원봉사자)로 뛰여들어 심부름군이 됐다. 심부름을 다니면서도 은근히 딴마음이 있어서 제 주제도 돌보잖고 명색소설 한편을 써다가 편집부에 디밀었더니 편집장 리학인(李学仁, 보성고와 일본대졸)이 읽어보고 “이봐 총각, 이두 안 나서 뼈다귀추렴부터 하겠나?” 하는 바람에 나는 도리여 웃음이 나왔다. 등뒤에서 몰래 어른의 흉내를 내다가 들킨 아이모양 쑥스러웠다. —빼앗긴 땅을 붓으로 되찾지 못한다면 총으로 찾지! 그리하여 나는 상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 김원봉(金元凤)의 부하가 돼 반일테로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나는 웽그리아 애국시인 뻬뙤피의 시를 접하게 된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하지만 사랑이여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외아들인 나는 홀어머니도 돌보지 않고 외국으로 달아나와있었다. 무엇때문에? 목숨보다 더 중한 사랑, 그 사랑보다 더 중한 자유, 그 자유때문에! 그후 나는 중앙륙군군관학교(교장 장개석)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에 입대하게 된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장총을 멘 조선독립군이 된것이다. 1938년 10월, 일본군에게 함락되기 직전의 무한—당시 세계반파쑈진영에서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부르던 무한—에서의 일이다. 그때부터 긴장한 전투의 나날을 보내던중에 우습기도 하고 또 한심스럽기도 한 일 하나가 생겼다. 전투중에서 우리가 사살한 적병의 잡낭(멜가방)속에서 우리 글로 된 수진판책 한권을 뒤져냈는데 거기에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단편 하나가 수록돼있었던것이다. 책뚜껑이 다 떨어져나갔던 까닭에 누구의 작품인지는 몰랐지만서도 아무튼 우리 문인들의 “걸작”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후 여러해가 지나 해방된 서울에서 나는 리태준, 김남천 등을 통해 비로소 그 작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때 사살한 적병이 우리 동포라 추측하니 웬지 마음이 아팠다. 학도병 같은 무슨 그런 사람이였으리라. 1941년 12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나는 홍사익(洪思翊)휘하의 일본군과 접전을 하다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가 나가사끼(长崎)감옥에서 그물 뜨는 작업을 하다가 같은 복역수인 송지영(宋志英)과 사귀게 됐다.(송은 해방후 한국문예진흥원장 등을 력임했다.) 나를 “비국민(非国民)”이라고 극도로 미워하는 감옥의사가 총상입은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아 나는 3년 동안 내내 고름을 흘리며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45년초에 그 못된 놈의 의무과장이 전근이 되는 바람에 겨우 소망의 절단수술을 받게 되니 나는 곧 살것 같았다. 않던 이가 빠진것 같이 거뜬했다. 그러나 마음 여린 송지영은 도리여 나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는것이였다. “이봐요 송형, 내가 우산귀신이 됐으니 이제부턴 비맞을 걱정은 안해두 돼.”(우산귀신은 외다리로 통통 뛰여다닌단다.) 이런 롱담을 하기는 하면서도 국민학교 교원으로 있는 누이동생에게 사실을 그대로 알리기는 좀 난감했다. 그러나 결국은 알리지 않을수 없어서 편지를 쓰는데 짐짓 호기롭게 이렇게 썼다. “사람의 정의(定义)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짝쯤 없어도 문제없다. 걱정 말아!” 나는 혁명군인으로서의 출로가 아주 막혀버린 고비에서 문학의 길로 전환할 결심을 내렸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격이다. 1945년 10월 9일, 맥아더사령부(련합군사령부)의 명령으로 일본 전국의 정치범들이 일제히 풀려날 때 송지영과 나도 출옥하여 시모노세끼(下关)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서 1년 동안 소설명색의 글들을 부지런히 써서 발표하다가 정치정세가 험악해지는 바람에 나는 조직의 결정으로 부득이 월북(越北)을 하잖을수 없게 됐다. 평양에서는 김사량과 친교를 맺었고 또 리태준과도 래왕이 잦았다. 그러다가 장편소설 하나 넉넉히 엮을만큼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1950년 가을 북경으로 들어와 중앙문학연구소[소장은 녀류작가 정령(丁玲)]에서 연구원으로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1952년 가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뒤에 나는 역시 아직은 밝히기 어려운 사정들이 있어서 연변에 와 정착을 했다. 그러나 창작활동은 4년 정도 했을뿐이다. 1957년 “반우파투쟁”때 나는 숙청을 당해 장장 24년 동안 붓을 꺾어야만 했다. 그간에 또 분노에 찬 정치소설《20세기의 신화》(27만자, 미발표)를 쓴 죄로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도 다시 3년 동안을 반혁명전과자라는 극히 “고귀”한 신분으로 안해가 공장에 다니며 벌어다주는것을 얻어먹고 사는 신세가 될줄이야. 그러다가 1980년 12월에 다시 열린 공판정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고보니 내 나이 자그마치 65살이였다. 나의 현재 진행중인 라스트 헤비—최후의 분발은 그때부터 시작된것이다. 그리고《격정시대》가 서울에서 출간되는것을 계기로 나의 활동령역은 갑자기 넓어졌다. 문학의 정상에로의 등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젠 잘 알았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견지할 작정이다. 민족의 질을 돋워올리는데 이바지하지 않는 문학이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런 무의미한 문학에다는 정력을 허비하지 않는다는것이 나의 소신이자 신조다.
1    [회고록] "나의 길" 목차 댓글:  조회:371  추천:0  2016-04-14
제1부 나의 길 나의 길 1 나의 젊은 시절 7 황포동학회 11 아, 태항산 15 제2차 공판 21 녀류작가 리선희 31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47 집사람과 나 54 서울나들이 74 우정 반세기 95 참배풍파 112   제2부 락양―서울 락양—서울 119 나의 생일 126 나의 필기장 131 서안나들이 137 나의 하루 142 만장일치 153 덕담신문 159 타부와 십계명 166 부도수표 175 소리의 세계 181 호박엮음 186 제1부인 193 닭알폭탄 197 미이라 202 련금술 208 담배대승차 214 반디불남편 219 거장의 손 224 만신창이 230 이 녀성들 236 코끼리띠 242 동추하춘 247     제3부 나의 동기생 날조의 자유 249 추운 물 253 바람과 기발 256 신판《림꺽정》 260 보물찾기 266 너구리현상 271 동물성격 275 “그놈이 그놈” 280 꽁지 빠진 수꿩 285 참매미 288 “벤츠”는 달린다 292 명언 가지가지 298 고혈압병 306 정문이, 잘 가오 311 독서삼매 315 영웅론난 321 론난 “한번만” 325 문객문학 331 성장과정 337 나의 동기생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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