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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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수필]고부간의 일상 그리고 소소한 행복-남영도 댓글:  조회:467  추천:0  2019-07-18
  남영도  고부간의 일상 그리고 소소한 행복   “야, 맛있는 냄새! 오늘 저녁엔 뭘 하오?”   어머님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미소 띤 얼굴로 묻는다.   도마질하기에 바쁜 나는 대답대신 국가마를 눈짓한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요즘 우리 집 어느 저녁나절의 풍경이다.   작년에 팔순에 난 시어머님이 무릎수술을 받으면서부터 주방은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되였다. 정년퇴직까지 하고 나니 더구나 내 령역으로 자리 굳혔다. 이제 어머님은 재활치료에 힘쓰면서 주방에는 가끔씩 들어오신다. 서서히 고부간의 역할이 바뀌여가고 있는 것이다.   주방에서 어머님의 입맛에 맞게 음식을 만들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팔순을 넘기시면서 어머님은 점차 맵고 시고 짠 음식을 못 드신다. 내가 한 랭채가 시면 맛이 별로라고 대놓고 말씀은 하지 않지만 얼굴을 찡그리며 드시는 표정에서 식초를 많이 넣었음을 눈치 채고 후회를 하게 된다. 소금을 덜 넣고 식초를 살짝 두고 고추가루는 아예 넣지 않고 담백하게 만들면 맛있다면서 금세 표정이 밝아진다.   짤가 봐, 매울가 봐, 실가 봐 보들보들 떨며 양념을 치고 음식을 만들면서 문득 지난 27년간의 그 많은 나날 이 주방에서 집식구들의 입맛에 맞게, 이 며느리의 입맛에 맞게 음식을 만들려 남모르게 애쓰셨을 어머님께 고마운 마음이 일며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돌아보니 28년이라는 세월이 살같이 흘러갔다.   젊은 시절 퇴근하고 돌아와 어머님이 차려준 밥상에 마주앉아 식사할 때면 음식이 짜다고, 맛이 이상하다고 은근히 타발도 많이 했었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어머님이 김치를 ‘짠지’라고 해서 짠지를 내오기도 하고 후추를 ‘고추’라고 해서 후추를 쳐야 될 대목에 고추가루를 치기도 하는 등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가끔 생기군 하면서 사투리 때문에 헷갈린다고 꼬치꼬치 따지기도 했었지. 직업이 출판사 편집이노라고 쩍하면 어머님의 평안도 사투리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았으니 얼마나 신경이 쓰였으랴!   엘리베터 타고 올라오는데 어머님이 집에서 전화하는 소리가 다 들리더라고 목청 높은 어머님한테 은근슬쩍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었지! 아침 일찍 식전운동을 나가시는 어머님이 화장품을 바르고 나가시기에 그 화장품 냄새에 잠을 더 잘 수 없다고 투정을 부리니 어머님은 바로 알아들으시고 그 후부턴 세수를 하지 않고 바로 운동하러 나가셨더랬지…   지난해 어머님의 무릎수술을 계기로 어머님을 향한 내 마음에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달간 청가를 맡고 서울의 모 병원에 가서 간병을 하면서, 음식을 해나르면서 로인과 가족의 의미에 대해 한차례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였다.   그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주방을 지켜오셨는데 이제는 내가 받아안은 사랑을 되돌려줄 때가 온 것이라고, 시아버님에 친정부모님까지 다 세상을 뜨시고 어르신이라고는 시어머님 한분만 남아계신 상황에 아직 건재해계신다는 것만도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잘 보이는 것 같았다. 때로는 단순한 눈으로 바라보면 더 잘 보인다는 것을 그때야 깨친 것이다.   고부사이가 어쩜 그렇게도 좋으냐고 칭찬들을 해오면 내 노력인양 당연지사로 받아들였는데 이제 단순한 눈으로 바라보니 어떻게든 이 며느리에게 맞추려고 여러 모로 절제를 하신 어머님의 노력 덕분인 줄 이제야 알겠구나…   무릎수술을 하고 나면 씨엉씨엉 려행도 다니면서 여생을 즐기시려던 소원 그대로 올해는 제주도에 다녀오게 되였다.   해변가에 가서 “야호!” 하고 소리도 쳐보고 수목원에 가서는 아름다운 꽃 속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기념사진도 많이 남겼다.   그날은 어머님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가까운 민속박물관에 가게 되였다.   민속박물관이라면 대체로 가장 민속적인 생활상들을 그대로 진렬하기 일쑤라 별 감흥 없이 돌아보는데 예상외로 어머님이 연신 탄성을 지른다. 워낙 ‘호기심천국’인 어머님이시니 그러려니 하는데 박물관은 처음이라고 하시니 은연중 가책이 느껴진다.   해녀들이 바다에서 물질하는 장면도 나오고 녀인들의 물 긷는 도구인 물허벅도 등장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보았던 터라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려는데 “이건 뭐니?” 하며 어머님의 호기심이 또 발동한다. 우리의 물동이와 비슷한 건데 지게처럼 지게 만들었다고 말씀드리자 “우리도 물지게를 지고 다녔지… 수도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라고 하신다. 그러자 나도 물동이를 이고 물 긷던 옛날 생각이 나서 몇마디 주고받았다.   1970년대 초, 공사(향)중학교에 출근하는 부모님이 거의 매일 회의를 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나는 아홉살 때부터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긷지 않으면 안되였다. 물독이 크지 않아서 큰 동이로 두번만 길어오면 차는데 아홉살내기가 큰 동이를 일 수 없으니 엄마가 작은 동이를 사주어서 매일 그 동이를 이고 네번씩 물펌프가 있는 집을 드나들었었다. 그럼에도 키는 쑥쑥 빨리도 자라 몇년 후에는 큰 동이로 바꾸었고 물펌프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꼬박 10년 동안 하루같이 물동이를 이고 다녔으니 물동이라고 하면 나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또 있을가?   놀음에 탐해 저녁 늦게까지 또래들과 고무줄 놀이를 놀다가 깜빡 잊고 물을 긷지 않은 날엔 엄마한테 한바탕 욕을 먹고 울면서 물 길러 가기도 하였다. 후에 친정엄마와 어릴 적 일을 얘기하다가 물 긷던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다 잊으셨는지 “내가 그랬니? 훗엄마구나!”라고 하셔서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보낼 수 있었다.   내 추억은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있는데 이제 친정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시고 시어머님과 더불어 그때 추억을 얘기하고 있다니…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는 없으나 공감을 할 수 있는 사이, 그래서 우리 고부사이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다. 저녁밥을 먹다가 텔레비죤화면에 벼가을 하는 장면이 비치면 어머님은 영낙없이 벼가을 얘기를 꺼내신다. 그러다가 곧 탈곡 얘기로 이어지고… 중학시절에 벼가을 하러 많이 다녔던 터라 나는 바로 추임새를 넣으며 이야기판을 둥글게 만들어간다. 식사가 끝난 지도 이슥하건만 우리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박물관의 다음 진렬장은 부엌에서 고부간인 듯한 두 녀인이 밥을 짓는 정경인데 실감나게 빨간 불이 타오르도록 전기를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거기서 어머님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시는 말씀이 신기하다.   동네에서 모여서 되놀이를 할 때면 시루떡을 하게 되는데 암만 기다려도 김이 올라오지 않으면 가마목에서 떡을 하던 녀인이 불을 때는 녀인보고 “어이, 너 그거 왔지?”라고 묻는단다. 그러면 불 때던 녀인이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불 때는 사람을 바꾸면 바로 김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눈이 휘둥그래지는 신기한 얘기다. 달거리가 오는 녀자가 불을 때면 김이 올라오지 않는다? 어떻게 과학적으로 풀이가 가능한지 모를 이야기이다. ‘어머님의 백과사전’에서는 이런 얘기들이 불쑥불쑥 튀여나와 가끔씩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서책에서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이런 얘기들을 들으며 역시 사람은 늙어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구나 하고 중얼거려본다.   유리박물관에 이르자 어머님은 또 천진한 유치원생으로 변한다. 장고를 둥기당당 쳐보시다가 호박꽃을 가리키며 한장 찍어달라고 응석을 부리신다. 시무룩이 웃으며 남편이 연신 샤타를 눌러댄다.   반평생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20여년간 부녀주임으로 일하면서 많을 일들을 겪었음직한데 그런 경력은 어느 세포 속에 숨어들었는지 늘 저런 단순하고 천진한 소녀 같은 표정이시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남들은 배배 탈아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어머님은 단순화시키고 간단하게 생각하신다.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는 법 모르고 모든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신다.   그런가 하면 의지력이 강해서 뭔가를 한다면 꼭 끝을 보고 마는 성격이다. 로년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우면서 일주일동안 가사를 외워오라고 포치하는데 돌아온 그날 저녁으로 노래를 오십번 반복해들으며 열심히 가사를 외우신다. “북경에 계시는 모주석 나는 본 적 없어도…”라고 조선어와 한어로 번갈아가며 주방에까지 나와 흥얼거리시니 합창단 모임에 가면 가사를 제일 잘 외워왔다고 칭찬받지 않을 수 있으랴. 위챗을 하는 법을 가르쳐드렸더니 모르는 건 알 때까지 끝까지 물어서 이제는 능숙하게 다루며 음성메시지도 잘 보내시니 그 의지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격이 급하셔 수도꼭지를“촥--”하고 쎄게 틀어 옆사람한테 물방울이 튕기기도 하지만 그 급한 성격을 고치지 못한다. 나한테 물방울이 튕겼다고 일부러 표정을 일그러뜨리면 혀를 홀랑 내밀면서 “뚜이부치아!(对不起啊)…”라고 사과를 하시는데 어찌 미워할 수 있으랴!   가끔 그 천진함의 원천이 어디일가고 거슬러 올라가본다.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에서 오빠와 형님 손에서 자라다 보니 눈치밥을 먹으며 공부도 많이 못하셨다고, 끝도끝도 없는 가마니 짜기에 신물이 났었다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결혼을 하고 아들 셋을 낳아키우며 들끓는 농촌사회주의건설에 반평생을 바치셨다고 하신다. 그 락천적 성격의 뿌리를 찾을 수 없으니 천성적인 것이라고 해두고 싶다.     이제 팔순을 넘기면서 당년에 모내기능수로 그토록 날렵하던 어머님도 점차 반응이 굼떠지고 망각증도 심해진다.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시고 안과에 갔더니 의사가 백내장수술을 권고한다. 돌아와 남편에게 말했더니 팔순이 넘도록 여태 백내장 수술을 안한 것 자체가 건강한 표현이라고 위로한다. 그런데 어머님은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리는가”고 아주 천진한 표정이다. 80여년이나 그 기계를 쭉 써왔는데 이제 로화가 될 때도 되지 않았겠냐고 우스개를 하니 덩달아 허허 웃으시기는 한데 이튿날 일어나서 그동안 부지런히 눈운동을 했는데 왜 이런 병에 걸리는가고 “에잇, 이젠 그 운동 안할란다!”라고 하시니 천진한 소녀가 따로 없다.   손자와 손자며느리 앞에서도 애교를 부리니 손자며느리는 어머님의 표정만 봐도 귀엽다고 박수를 치며 탄복이다. 지금은 미니멀시대라고 하는데 동심으로 돌아가 이렇게 단순하게 사는 것도 좋지 아니 한가…   한 집에서 한 가마밥을 오래 먹어서인가, 우리 고부간이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주방에서 같이 동자질하면서 “더기, 더기 그거 가져와!”라고 모호하게 말씀하셔도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맞추고 척척 대령할 수 있는 우리 고부사이, 28년간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면서 이제 고부사이가 점차 모녀사이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늘 클래식음악을 가까이하고 책과 씨름하면서 우아한 척을 하는 나지만 어머님 앞에만 서면 그 모든 ‘척’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져내린다. 그리고 덩달아 단순모드로 변해간다.   산다는 건 워낙 단순한 것이 아니던가, 복잡한 것을 간단한 것으로 만들고 간단한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며 리해득실을 적게 따지며 살다 보면 세상이 단순하게 보이는 것이 아닐가…   오늘도 고부간의 평범한 일상에서 자잘한 리치를 발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7    [수필] ‘청담동사모님’(외1편)-남영도 댓글:  조회:387  추천:0  2019-07-18
남영도 ‘청담동사모님’    지난해 5월, 시어머님이 무릎관절수술로 서울 청담동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한국에서 류학하는 아들이 반년전에 연줄을 달아 찾은 병원인데 의술이 좋고 말이 통하는데다 친절하다는 등 여러가지 좋은 점들을 렬거하며 수술을 권고하였다. 애지중지 키웠더니 이제 손자 덕을 보게 되였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 작용을 하였던지 오랜 고민 끝에 어머님이 드디여 수술을 결정하신 것이다. 한평생 농사일로 뼈가 굵으신 어머님이시다. 팔순이 넘도록 입원수술란 것을 별로 해본 적이 없으셨던지라 신기해하면서도 두려운 표정이 살짝 어려있다. 집안의 대사인지라 며느리인 내가 청가를 맡고 간병한답시고 한달간 함께하게 되였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침대에 앉아있으려니 “조××님―” 하고 어머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들어보니 식사가 들어온다. 친절한 말투에 간이 녹는 듯한데 반찬들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굴 것 같은 김치며 생선류들이다. 말이 통하는데다 서비스까지 좋으니 어머님의 표정이 금시 밝아진다. “녀사님!” 이번에는 나를 부르는 줄 알고 뒤를 돌아다보니 맞은켠 침대의 간병인이 간호사를 따라 나간다. 간병인을 그렇게 호칭하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이 나라 스타일인지 아니면 강남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시 우리와는 다르게 참 교양있는 동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인공관절수술은 두번에 나누어 하기로 되여있다. 먼저 오른쪽무릎부터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간병 일이 장난이 아니다. 의학 전문용어들을 동반한 그 모든 세부적인 일들을 제대로 할 엄두가 나지 않아 간병인을 청하기로 하였다. 전문 훈련을 거쳐서인가, 간병인들은 간호사가 할 법한 일들까지도 알아서 척척 잘해내는 것이였다. 우리 간병인은 칠십이 넘었다는데 외모나 날씬한 모습을 봐선 60도 안돼보인다. 표준적인 서울말씨를 쓰는데 첫 인상에 아주 교양 있어보이고 일도 깐지게 할 것 같아서 쓰기로 하였다. 우리의 신분을 알리니 가리봉동 구로공단에서 많이 봤다고 하면서 괴이찮아하는 듯한 표정인데 앉아있는 법 없이 내내 서 있고 밥도 창턱에 기대서서 먹는 품이 참 자세가 돼있다고 탄복하였는데 며칠 더 지내보니 어딘가 성격이 까다롭고 요구사항도 많아 맞추기가 좀 힘들었다. 모든 것을 환자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타일에 맞추려는 것이 좀 거슬렸다. “병원 밥? 내레 그까짓 거 못 먹을 가 봐…” 평소에 식사를 잘하시던 어머님이 입원전에 이렇게 장담을 하시더니 수술을 하고 나서 링게르를 맞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통 음식을 못 드신다. 이상하게 병원음식에는 죽이 나오지 않는다. 아침부터 삼시세끼 계속 밥이다. 깔깔하시다며 집에서 먹던 죽이며 국수가 드시고 싶다고 하니 어머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려고 마트와 슈퍼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병원 근처에 따로 얻은 월세방에서 아침부터 각가지 영양죽이며 칼국수, 냉면 등을 만들어 병실로 날랐는데 의외로 내가 해간 음식은 맛있다며 잘 드시니 그나마 다행이다. 27년간 한가마밥을 먹었으니 집밥의 위력이 아닐가 싶다. 거리에 나서니 우아하고 기품 있어보이는 모습의 사모님들이 유유히 지나간다. 병원에서 숙소, 숙소에서 마트, 그렇게 세곳만 뱅뱅 돌아치다가 어느 날 저녁 산책 삼아 좀더 걸어나가보니 곳곳에 성형수술광고판이 란무하고 눈부신 명품거리가 펼쳐지는데 완전히 딴세상이다. 쇼윈도 가까이 다가가보니 유리창너머 세련된 옷차림의 모델과 후줄근한 운동복차림에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 내 모습이 한데 겹치며 크게 비교된다. 무릎수술을 두번 하는 동안 병문안을 오는 친척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10여년을 못 보던 친척들이 이국땅에서 만났으니 왜 반갑지 않으랴, 남자들은 건설현장에서, 녀자들은 식당과 가정집에서 일하느라 많이 지친 모습들이다. “일이 어드래? 많이 힘들지?”   천성적으로 목청 높은 어머님과 고향 친척들이 그간의 회포를 푼다고 온 병실에 평안도사투리가 차고 넘친다. 병실의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이 불편한 시선을 보내오는가 싶더니 아닐세라 우리 간병인이 다음번에 병문안 오면 어머님을 휠체어에 앉히고 1층에 내려가서 휴계실에서 만나라고 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선 죄송한 마음이 들었으나 말투 속에 약간 비하하는 뉴앙스가 풍겨 어딘가 거부감이 들었다. 조선에서 태여나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동북으로 이주한 어머님의 말투에는 진한 평안도사투리 외에 중국말도 섞여있었다. “우리 며느리 찾으시우? 금방 1층에 빤쓸(办事―일보다)하러 갔시요.”, “맛이 어드렇소? 거 빙샹(冰箱―랭장고)안에 얼음주머니 좀 꺼내주시겠소?” 조선족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중국말들을 섞어가면서 기분이 좋을 때면 농촌에서 벼모 꽂던 얘기, 탈곡하던 얘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시는데 거침이 없고 당당하다. 그러면 옆에 환자들은 신기한 표정을 짓고 주의깊게 듣다가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참 말씀을 잘하신다!”라고 진심으로 탄복한다. 동창들도 나를 볼 겸 병문안을 온다. 청담동이 부자동네라 그런가, 참 찾기 힘들다고 하면서 나보고 “너 청담동에 있으니 청담동사모님이네.” 라고 우스개를 한다. “어, 그런가? 거 말 되네! 뭐 그렇다 치지 뭐…” 웃으며 되받아친다. 그런데 우리 간병인에 대한 불편한 생각들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 며칠 후에 판명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내가 없는 사이에 간병인들끼리 대판싸움이 벌어지더니 우리 간병인을 내쫓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내내 서성거리면서 쓰레기가 나오는 족족 병실 밖으로 들고나가며 쓸데없이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맞은켠 침대의 뚱뚱한 간병인이 정신 사납다고 뿔이 나있더니 드디여 맞붙었는데 그 간병인의 말을 빈다면 “머리뚜껑이 제대로 열린” 것이였다. 알고 보니 우리 간병인은 다른 용역회사에서 보내온 ‘이방인’이였고 그녀가 쩍하면 “저 봐, 돼지처럼 맨날 누워있으니 뚱뚱한 거 좀 봐.”라고 비꼬던 그 뚱보간병인은 바로 이 병원 원장의 친척으로 간병인들의 녀왕이였던 것이다. 터세, 무시하는 태도 등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엉켜 일어난 사건이였다. 간병인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갈등에 그만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거기도 또 다른 사회였던 것이다. “와? 그분이 가시겠대?” 간병인들끼리의 그런 복잡미묘한 관계를 알길 없는 어머님이 의아해하며 물으신다. 성격 등 여러가지 리유를 들어 설명을 드렸더니 성격이 까다로운 건 있지만 며칠만 꾹 참고 계속 쓰자고 하신다. 자기절로 그만두고 가겠다는데 차라리 잘된 것 아니냐고 하고 간병비를 후하게 주어 내보냈다. 복도에 나가니 간병인들끼리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동안 풋면목을 익힌 다른 병실 환자분들이 말을 걸어온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처음엔 우리가 모녀간인 줄 알았는데 고부간이라고 하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라는 눈치들이다.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비슷한듯, 딸들이 간병을 하는 경우는 많아도 며느리가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면서 방송에 날 일이라고 한다. 한 병실에 든 안로인의 경우를 보아도 일주일이 넘도록 며느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수술까지 반대한다고 하니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닌가. 매일 침대에 누워 천정만 쳐다보면서 수술날자를 기다리는 그 할머니를 보노라니 늙어간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관절수술은 재활치료가 관건이다. 무릎수술의 경우 무릎을 꺾는 것이 제일 힘든 고역이다. 물리치료기에서 130도가 최고목표수치인데 80도에서부터 90, 100… 이렇게 조금씩 강도를 높이며 꺾기를 한다. 기계가 꺾어주기에 일단 다리를 묶이우면 도망칠 구멍이 없다. 매일 꺾을 때마다 어머님은 이를 사려물고 참으신다. 젊은 시절 남정들과 같이 100키로그람짜리 마대를 메고 씽씽 뛰여다니던 그 기세 그대로 매일 재활치료에 림한다. 두 무릎관절을 열흘 간격으로 련이어 수술하다 보니 재활치료실에 들어서는 것이 도살장 들어가는 기분이라는 말이 그저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치료실에 정작 들어서면 또 통증을 참으며 다리를 맡긴다. 자전거를 타는데 너무 아파서 새된 소리를 지른다. 이튿날 주치의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재활치료 담당의사는 또 그 나름대로의 욕심이 있어서 자꾸 강도를 높인다. 너무 아파서 젊은 치료사가 잡아준 손을 저도 몰래 꼬집기까지 했다고 한다. 병실에 돌아와서도 쉬지 않고 다리 굽히기를 계속하길래 뭘 그렇게 열성이냐고 다른 간병인들이 말하면 의사선생이 매일 300번씩 하라고 숙제를 줬는데 열심히 안하면 되냐고 하신다. 그럼 의사선생한테 300번 했다고 거짓말하면 될게 아니냐고 간병인들이 방법까지 알려준다. “난 길케 못해요!”라고 웃으시고는 계속 숙제를 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매일 무릎 굽히기, 발목 굽히기,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드디여 130도를 꺾고 병실에 들어서던 날, 온 병실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130도를 꺾지 못하고 퇴원하는 환자들도 많은데 나흘 만에 꺾었으니 환자고 간병인이고 모두 그 의지력에 진심으로 탄복을 한 것이다. 병실에만 있기 답답하여 입원한 지 20여일 만에 보조기에 의지하여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가 잠간 벤취에 앉았다. 거리에서 유유히 오가는 선남선녀들을 부러운 눈매로 바라보신다. 당신도 언제면 저렇게 걸을가는 기대가 가득 차있는 눈빛이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르다. 청담동 네거리에서 활보하는 그네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비록 논판에서 틔운 걸걸한 목청에 진한 평안도사투리를 쓰는 평범한 할머니지만 늘 당당하고 씩씩하신 어머님, 간병인한테 종래로 불평 부릴 줄 모르고 재활치료에 어느 환자보다 모범적이고 의지력이 강한 어머님이 너무도 의젓해보여 동창들이 나에게 선물한 그 ‘청담동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선뜻 어머님에게 선물하고 싶어진다. 그런 어머님이야말로 진짜 품위 있는 사모님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그로부터 어느덧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귀국한 후 매일 정해진 시간에 걷기운동, 무릎 300번 굽히기 등 재활치료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더니 석달 만에 보조기, 지팽이를 팽개치고 한시간을 넉근히 걸어내시였고 이제는 계단도 척척 잘 오르내리시고 동네 헬스장에 가면 자전거를 1,000바퀴씩 돌리시는 어머님, 그렇게 완강한 의지력으로 재활치료에 최선을 다한 보람으로 금년 5월에는 또다시 로년중창단 일원으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열연하시는 어머님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내가 언제 벌써 팔십이 됐을가…”라고 입버릇처럼 외우며 소녀처럼 깔깔 웃으시는 어머님, 오늘도 ‘청담동사모님’은 예나 다름없이 씨엉씨엉 거리를 활보하신다.     ▣ 수필 / 남영도 로씨야음악의 날개에 실려 -로씨야기행(3)   9박10일간의 로씨야려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해외려행의 경우 흔히 말 타고 꽃구경식의 려행이 되기 쉽상인지라 아쉬움 같은 것들이 앙금처럼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랠 양으로 로씨야음악을 틀어놓고 사진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중한 선률이 방안을 한가득 메운다. 그 친숙한 음악을 들으니 또다시 기차를 타고 가없는 씨비리벌판을 가로지르는 듯하다. 옳거니, 음악은 그래서 국경 없는 예술이라 했던가? 려행지에서 이미 돌아왔음에도 음악의 날개에 실려 다시 그 현지로 날아갈 수 있다는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이더냐! 로씨야에 대한 나의 동경은 로씨야음악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씨야음악, 아니 정확히 ‘쏘련음악’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뜸 1950년대에 우리 나라에 불어쳤던 쏘련음악열풍을 떠올리게 된다. 그 선풍적인 인기에 대해서 그 년대에 태여나지도 않은 내가 속속들이 알리 만무하지만 그 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느 정도 감지할 수는 있었다. 1970년대, 평강벌의 어느 향(공사)소재지 마을에서 살 때다. 모든 것은 농업을 위하던 때라 탈곡철이 되면 낮에만 전기를 주고 밤이 되면 자주 정전이 되였다. 초불이 있으면 물론 더없이 좋겠지만 초가 없을 때면 접시에 콩기름을 붓고 솜을 비벼서 심지를 만들어 콩기름에 적시고는 성냥을 드윽 그어서 불을 켠다. 그 불빛에 책을 읽기에는 너무 희미하고 잠 들기에는 이른 초저녁때라 심심해할 때쯤이면 의례 엄마의 노래소리가 울린다. “작디작은 집에 등불이 반짝이네 / 나젊은 방직처녀 창가에 앉았네…” 1950년대말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학교합창단에서 솔로를 담당했었다는 엄마의 구수한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쏘련노래’들이 유장하게 울려퍼진다. 듣는 이들에게 끝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선률의 〈모스크바교외의 밤〉으로부터 시작하여 〈방직처녀〉, 〈붉은 딸기꽃 필 때〉 그리고 〈산사나무〉에 이르기까지… ‘문화대혁명’후기라 본보기극노래외에 부를 수 있는 건 조선노래와 쏘련노래 뿐, 한번 부르기 시작하면 계속 부르고 싶고 그 속에서 헤여나올 수 없도록 만드는 그 ‘쏘련음악’ 특유의 마성의 선률때문에 강냉이밥에 시래기국을 먹던 가난한 시절이였지만 앞날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을 한가득 안고 잠시나마 행복감에 젖어 부르고 또 불렀었다. 인간개성이 많이 억압당하던 시절 그나마 이런 노래들을 부를 수 있음으로 하여 숨구멍이 좀 틔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쩍하면 “수정주의 퇴페한 생활방식을 추구한다”고 매도당하며 혼났기 때문이였을가, 엄마는 학교선전대에 그토록 들고 싶어하는 나의 소망을 단번에 묵살해버리고 그저 공부만 하라고 딱 잡아뗀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음악시간도 전부 전투적 기백이 넘치는 노래로 채워졌으니 오선보를 배운다는 것은 사치였으며 음악과 예술을 향한 갈증은 늘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때를 돌아보면 지금도 리해되지 않는 한가지 일이 있다. 연변가무단소분대가 처음으로 우리 고장에 와서 가무공연을 한다는데 너무 보고 싶어 엄마한테 애걸하다 싶이 하여 겨우 입장권을 얻어 극장에 들어는 갔는데 황홀한 무대를 지켜보면서도 한쪽 가슴이 콩당거리며 내내 불안했다.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이 언제라도 나타나 덥석 잡아갈가 봐서였다. 공부보다는 생산로동을 강조하던 시대인데 왜 어른들은 볼 수 있는 그런 공연을 학생들은 보면 안된다는 금지령을 내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한이 맺혀서일가, 그후로 대학입시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늘 라지오를 틀고 음악방송을 들으며 공부를 했는가 하면 그 습관이 쭉 지금까지 이어져 집에만 들어오면 음악을 틀어놓고서야 하고픈 일을 하군 한다. 시대의 변천과 함께 ‘쏘련음악’의 존재를 거의 잊고 산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던 로씨야음악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백학〉이였다. 1990년대 한국의 인기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으로 우리의 가슴을 흠뻑 적셨던〈백학〉의 여운은 주인공의 이미지와 더불어 오래도록 지속되였었다. 그 장중하면서도 애잔한 선률의 음악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은 전혀 모른 채 한동안 그 마성의 음악에 빠져있었었다. 클래식음악에 어섯눈을 떠가며 CD를 사들이고 곡명도 작곡가도 모른 채 그냥 틀어놓고 듣기만 하던 시절 로씨야의 음악거장 챠이꼽스끼의 〈백조의 호수〉 음악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선률로 사람의 마음을 휘여잡았다. 우리의 심혼을 뒤흔드는 그 교향악의 세계는 더구나 어마어마하여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범주이기도 하다. 다행히 우리와 같은 아마추어들에겐 음악가들의 일화가 곁들여지면 그 음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이 생기기도 한다. 챠이꼽스끼의 제4교향곡에는 그의 음악을 사랑한 메크부인의 이야기가 숨겨져있다고 한다. 독학으로 공부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까지 되였으나 챠이꼽스끼는 너무나 적은 월급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시기 철도경영자의 미망인으로 메크부인이라는 엄청난 재력가가 있었는데 챠이꼽스끼의 음악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14년간 6천루블에 달하는 돈을 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긴 세월 동안 그들은 서신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진정으로 선생님을 뵙고 싶을 때도 있지만, 선생님의 음악을 들을수록 두려워졌습니다. 오직 음악을 통해서만 선생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메크부인의 마음을 전해받은 챠이꼽스끼는 “저와의 만남을 통해 제 음악에 대한 사랑이 깨져버릴가 우려하시는 부인의 마음을 충분히 리해합니다. 저 역시 인간이기에 부인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라고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애틋한 련민의 정은 서신으로만 전해졌을 뿐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모스크바 교외의 호수가에서 한번 마주친 적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그냥 지나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메크부인을 위해 작곡한 것이 바로 제4교향곡이고 메크부인의 청에 따라 〈나의 가장 좋은 벗에게〉라는 부제가 붙여졌다고 한다. 챠이꼽스끼의 제4교향곡을 들을 때면 이런 일화를 떠올리며 100여년전 로씨야음악가의 그 경지에 들어가보고저 한다. 흔히 음악이나 예술작품 감상에는 정해진 답이 없이 천사람이 천가지의 해석을 가지는 게 정상이라고들 하지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인생사를 많이 겪고 내공이 쌓이다 보면 그 예술의 깊이라든가, 진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지 않을가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도 챠이꼽스끼의 교향곡을 들으며 장편소설 한권 분량을 쓰고도 남을 법한 그 넓이와 깊이에 감탄하면서도 그런 섬세한 느낌들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음에 내 언어의 빈곤을 한탄하게 된다. 다행히 작가 보르헤스의 “우리는 우리의 언어보다 더 복잡한 언어를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언어이다.”라고 한 명언이 있어 내 언어의 빈곤을 변명할 수 있는 방패막이 되여주어 저으기 위안이 된다. 실제로 이번 로씨야방문길에 우리는 가는 곳마다에서 음악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5월 17일 저녁, 식사하러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음악밴드가 한창 소형공연을 하고있었다. 중후한 중저음의 남성보컬이 한창 목청을 뽑고 있었는데 빠른 템포의 곡이 끝나자 이번에는 바로 그 〈모스크바교외의 밤〉이다! 이런 운 좋을 변이라구야! 식사할 생각도 잊고 따라부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거리에 나서니 버스킹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인다.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지지 않는 거리에서 흥겹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이 자유분방해서 보기 좋았다. 에르미타쥐박물관에서 참관을 하면서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팀에서 떨어져 다른 방향으로 새게 되였는데 거기서 남성3인조의 노래와 맞띄울 줄이야. 나이 지숙한 세분이 내가 익숙히 알고 있는 그 〈볼가강의 배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박물관이라면 조용히 전시된 것들을 구경한다는 통념을 깨는 대목이다. 화음을 넣으며 부르는 품이 프로성악가들임에 틀림없었다. 관광객들이 모두 발길을 멈추고 주의깊게 듣고 있다. 얼른 그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온통 회화예술로 넘치는 박물관에 소리의 예술이 가져다준 하모니, 뜻밖의 수확이였다. 발레 공연을 볼 때는 끄덕끄덕 졸다가 이렇게 뜻밖에 조우한 성악예술 앞에선 정신이 펄쩍 드는 자신이 조금은 리해불가이다. 그리고 5월 18일, 우리 관광팀일행이 여름궁전에 도착하여 단체입장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취주악이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중국에서 관광지에 도착하면 자기 특산물을 사라고 들이미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은 풍경이다. 우리를 한국관광객으로 알았던지 〈그리운 금강산〉을 연주해준다. 겉모습을 보아 할아버지들로 무어진 아마추어밴드 같은데 연주가 프로 못지 않게 수준급이다. 내 십팔번이 나오는데 어찌 ‘함구무언’할 수 있으랴, 저도 모르게 한 목청 뽑았다. 그날 이동하는 관광뻐스에서 우리의 화제는 단연 전날 저녁 쫑파티에서 인기몰이를 한 음악 〈백학〉반주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연기한 뮤지컬이였다. 로어로 된 가사여서 대충 짐작해서 전선에서 돌아온 전사의 캐릭터를 잡아 조강지처와 련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의 사랑과 고민을 연기하였는데 히트를 친 것이다. 모두들 히히호호 웃으며 그 뮤지컬이야기로 열을 올리는데 뒤켠에 앉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가린호텔 권사장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는다. 바로 음악 〈백학〉이 창작되던 배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국보위전쟁 당시 많은 가정들에서 자식들을 전장으로 내보냈는데 어느 한 가정에 8명의 아들이 다 그렇게 전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우편배달부가 그 집에 전사통지서를 배달하고 또 배달하다가 더는 그 어머니가 비통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배달을 포기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장내를 숙연하게 만든다. 솜씨 빠른 누군가의 클릭으로 〈백학〉이 또다시 뻐스 안에 울려퍼진다. 우리 말로 번역된 가사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난다.   가끔 생각하지,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용사들이 잠시 고향땅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백학으로 변해버린 듯하여 그들은 그 옛적부터 지금까지 날아만 갔어 그리고 우리를 불렀어 왜 우리는 자주 슬픔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잊는걸가…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하늘에 지친 학의 무리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는 아닐런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더불어 나는 회청색의 그 어스름 속을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 모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놓아 부르면서…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니 가사의 깊은 의미가 더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그 나무들 사이로 백학이 무리 지어 날아오르는 듯하여 감회가 새롭다. 로씨야땅에서 직접 듣는 〈백학〉, 그리고 돌아와서 안방에서 다시 듣는 똑같은 선률, 그렇게 나는 려행지와 안방 사이를 넘나들며 음악 속에서 추억하고 음악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려행은 일시적이지만 려행이 주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지 않다.” 괴테의 이 말이 이제야 나에게로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 말을 패러디하여 “려행은 일시적이지만 려행이 주는 깨달음은 일시적이지 않다”는 말로 이번 로씨야기행을 마무리 짓는다.  
6    [수필] 사할린의 망향가(외1편)-남영도 댓글:  조회:372  추천:0  2019-07-17
남영도   사할린의 망향가(외1편) ―로씨야기행1     “로씨야로 가지 않을래요?” 오래전부터 문학작품과 음악을 통해, 그리고 영화를 통해 알았던 그 나라에 직접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여 찾아왔다. 전국 각지 녀성단체장들과 국제회의 참석차 함께하는 려행이라, 기대와 설레임으로 뇌리에선 벌써부터 “모스크바 교외의 밤” 선률이 흐른다. 그런데 가기 전부터 국제무대에 올릴 한복쇼요, 소품(토막극)이요 하면서 련습으로 긴장하게 돌아치다 보니 기대와 흥분이 반나마 가셔져버렸다. 출발전 날 인천공항 환승호텔 로비에서까지 한일자로 서서 한복쇼련습을 한다고 극성을 부렸으니 진짜 못 말리는 녀자들이다. ‘씨스뜨라’(로어로 ‘자매’라는 뜻)들과의 본격적인 려행이 서막을 연 것이다.   사할린의 망향가   5월 11일 오후, 드디여 사할린 도착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로씨야땅을 밟는 순간, 찬바람이 휙 불어와 옷속을 파고든다. 어느 정도 예상치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5월 중순인데라고 가졌던 요행심리가 보기 좋게 저격당한 것이다.   “남선생, 이게 바로 씨비리바람이라는 게요!” 일행중 연극배우 리옥희씨가 뒤따라오며 말을 건넨다. “아, 글쎄 씨비리바람이 어찌나 쎈지 10메터 밖으로 날려가 하마트면 로씨야아바이 품에 안길 번했단데…” 입국절차를 밟느라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동안, 그녀가 수시로 빵빵 터뜨리는 유모아에 일행은 한바탕 웃으며 무료함을 날려보낼 수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유즈노사할린스크시는 자그마한 산간도시였고 여기저기 이색적인 로씨야풍의 건물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사할린은 지도에서 보면 우리 나라 흑룡강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있는 물고기처럼 생긴 큰 섬인데 전체 인구가 50만명 좌우이고 조선인은 3만명정도 산다고 한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는 사할린주의 수부로서 인구 19만명의 작은 도시로 1905년부터 40년간 일본통치하에 있다가 1945년에 쏘련으로 넘어갔다. 국제회의 행사는 사흘 일정이다. 도착한 날 저녁 가가린호텔에서 간단한 환영식이 있었다. 물 흐르듯이 류창한 것 같은 젊은 사회자의 말투가 억양이나 발음상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 말을 배웠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이튿날 주제발표, 동영상, 강제징용되였던 현지인들의 체험담 등을 통해서야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의 망향의 아픔이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막대한 것이였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사할린주 한인회 박순옥 회장이 “사할린 한인들의 아픔”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는데 전부 로어로 한다. 얼굴모습을 봐선 분명 우리와 같은 민족인데 우리 말을 전혀 못하니 통역을 내세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코가 큰 로씨야 녀성이 통역을 하는 것이였다. 알고 보니 그 녀성은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과 교수인데 어릴 때부터 취미가 우리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어 사할린 조선인들의 망향의 아픔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방영되였다. 사할린 조선인의 력사는 19세기 70년대로부터 시작되는데 1897년에 있은 첫 인구조사에 따르면 사할린에는 67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고 한다.(《사할린한인사》13페지 참조) 1910년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화시킴에 따라 조선인들의 사할린으로의 이주가 현저하게 증가되였고 그후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이주하는 조선인수가 급증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후 남사할린이 쏘련령으로 넘어가면서 이곳의 조선인들은 일본과 쏘련 그리고 한국 세 나라의 무관심 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무국적인로 살아오다가 1992년에야 영주귀국이 이루어졌는데 2007년까지 약 천명이 영주귀국하였고 2015년 기준으로 약 3,500명의 조선인들이 한국에 영주귀국하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65세이상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여서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자식과 친지와 헤여져 살며 제2의 리산가족이 량산되기도 하였다. 현지 조선인 로인 두 분이 강단에 올랐다. 바로 1940년대,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40여년간 광산에서 광부로 지내면서 온갖 설음과 차별시를 다 받아온 김윤덕(91세)옹의 이야기가 눈굽을 적시게 한다. 또한 장차분할머니가 어린 나이에 사할린에 시집 와서 어렵게 살아오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렬악한 조건에서도 여섯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대학공부 시켜 성공시킨 회상담을 들려주는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지난날 살아오던 이야기와 너무도 비슷하여 커다란 공명이 일었다. 중간 휴식시간에 당지 조선인들의 력사를 보여주는 사진전을 돌아보면서 오랜 세월동안 무국적인으로 죄인취급,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고 사할린을 떠날 수도, 국내에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서신거래를 할 수도 없었다는 그들의 “망향의 한”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무시와 차별시 속에서 인고하며 살아온 그들의 삶에 가슴이 먹먹해났다. 낮동안에 보고 들은 많은 것들은 그날 저녁 우리가 소품 〈웰컴투 사할린〉을 연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전까지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사할린에 대한 인상들에 많은 색갈을 입혀 대사 한마디한마디에 사할린 동포들의 아픔을 더한층 깊이있게 담게 되였는 바 관중들은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어느새 끝난 공연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보는 사람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사할린 주최측에서는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는데 중국대표단들이 큰 힘이 되여주었다고 하면서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꼬르사꼬브의 아픔   13일 날 우리는 계속하여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약 40키로메터 떨어진 꼬르사꼬브에 가서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사할린희생동포 위령탑을 돌아보았다. 이 위령탑은 배모양으로 되였는데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버림받은 채 이곳 ‘망향의 언덕’에 서서 고국으로 데려다 줄 배를 한없이 기다리다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간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1945년 8월 일제패망후 일본측은 마지막 배를 띄우며 조선인들도 데려가겠노라고 꼬르사꼬브항구에 다 모이라고 하였다. 많은 조선인들이 항구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그들이 더는 일본국적이 아니라는 리유로 그냥 내버려둔 채 떠나가버렸다. 이민국에 찾아가 무릎 꿇고 책상다리 부여잡고 집에 보내달라고, 어서 집에 보내달라고, 처자들이 집에서 기다린다고 그렇게 통곡하며 하소연했건만 다 소용이 없었다. 무국적인이라고 쏘련당국도, 혼란상태에 있던 고국도 그들을 돌보지 못했다. 위령탑 비문에 새겨진 문구가 가슴을 허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속에서 / 굶주림을 견디며 / 고국으로 갈 배를 /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 혹은 굶어죽고 / 혹은 얼어죽고 / 혹은 미쳐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 배는 오지 않아 / 하릴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김문환) 반세기동안 서로 생사도 모르고 살아오던 조선인 1세들의 피타는 노력 덕분에 많은 2세들이 성공하였다. 국적을 네번이나 바꿔야 했던 어렵고 힘든 삶이였지만 현재 사할린에서 사는 2만 6,000여명의 동포들은 우리 민족 특유의 끈기와 근면성으로 각 분야에서 전문가, 엘리트로, 중소기업을 이끄는 훌륭한 기업가들로 성공을 이루었다. 현지조선인 권행자사장이 경영하는 ‘가가린호텔’에 투숙하여 로씨야료리와 조선료리맛이 결합된 퓨전료리를 먹으면서, 그리고 ‘송뚝배기’라는 꽤 큰 규모의 조선인식당에서 동태찌개를 먹으면서 이 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할린 우리말방송국 김춘자국장이 다년간 로씨야에서 우리말방송국을 운영하면서 우리 말과 우리 문화를 지킨 공이 크게 인정받아 로씨야련방공화국의 문화공로자로 국가급 상을 받고 뿌찐대통령메달까지 수여받았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로씨야땅인데도 이상하게 사할린에서는 어디 가나 친근감이 느껴졌다. 시장에 가봐도 옷가게, 화장품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중에 동포들이 꽤 있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미소로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로씨야에는 어디 가나 동상이 많은것이 특징이다. 사할린미술관 가는 길에는 체호브동상이, 레닌광장에는 레닌동상이 있었다. 듣자니 이 레닌동상은 로씨야에서 제일 큰 동상이라고 한다. 뉴스를 통해서 레닌동상을 다 철거했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당년에 결혼식을 치를 때면 신혼부부들이 이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하니 그들에겐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리라. ‘씨스뜨라’들도 당년의 ‘벨리끼(위대한)’ 레닌을 생각하면서 진격의 포즈를 취하고 사진들을 남겼다. 사할린미술관은 2층건물로 당년에 일본은행이였다고 하는데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서민들의 일상을 담은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여있었고 조선의 미술작품과 시를 곁들인 한국의 작품들도 전시되여있어 일시 그곳이 로씨야라는 것을 잊게 만들기도 하였다.   꼬르사꼬브로 가는 길에 길녘 화장실에 들리게 되였는데 화장을 진하게 하고 돈을 받으며 휴지를 내주던 전형적 로씨야녀인의 얼굴모습이 다시한번 거기가 로씨야임을 일깨워준다. 호피무늬의 복장을 입은 그 모습에서 로씨야 서민의 일상을 알 수 있었고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자존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사할린을 떠나던 날 현지가이드가 하던 말이 인상 깊다. “엄마는 1932년생인데 사할린에서 태여났어요. 국적이 없어서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고향생각만 나면 담배를 피웠어요. 저는 2세인데 우리 세자매중 제가 우리 말 제일 잘해요. 지금는(은) 그런 차별이 없어요. 우리 3세들이 차별없이 사는 것이 너무 좋아요.” 어눌한 우리 말이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이면서 또 희망에 넘치는 이야기이다. 통한의 력사를 간직한 사할린 동포들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며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수필 / 남영도   문학과 예술이 존중받는 나라 ―로씨야기행2     예술이 탁월한 나라   사할린에서부터 장장 8시간의 비행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한 우리는 드디여 로씨야 력사와 문화의 산 증거인 붉은 광장에 서게 되였다. 사실 ‘붉은 광장’에서 말하는 ‘붉다(끄라스니)’는 고대로어에서 ‘아름답다’는 뜻으로 사용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붉다’는 뜻으로 전이되였다고 한다. 실제로 가보면 광장주변을 둘러싼 건축물들이 수려하기 그지없어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붉은 광장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축물은 단연 성바실리성당이였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세워졌는데 그 8개의 양파모양의 지붕을 얼핏 보면 같은듯하나 자세히 보면 높이도 색상도 무늬도 다 다르다. 이슬람사원과 흡사하여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당시 로씨야는 다민족국가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존경한다는 뜻에서 이슬람사원 비슷하게 지었다고 한다. 이 성당이 완공되자 그 아름다움에 도취된 황제 이반 4세가 다른 곳에 같은 건축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건축가의 눈을 멀게 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은 력사적근거가 없는 설이라고 하는데 그런 설이 있고도 남을 법하게 성당은 웅장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동화책에서 금방 튀여나온 듯한 독특한 건축물, 그 내부가 궁금했으나 시간의 촉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붉은 광장은 실제 듣던 소문과는 달리 천안문광장보다 크지 않았다. 해도 모스크바의 상징인지라 못 말리는 ‘씨스뜨라’들이 각가지 포즈들을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는데 마치도 “내가 여기 왔노라”라고 선고하는 듯했다. 로씨야는 그렇게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후에는 크레믈리궁을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 태여나 영화관에서 맨처음 본 영화가 《1917년의 레닌》이 되겠는데 그때부터 익숙히 들었던 그 크레믈리궁,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 도착해보니 그것은 궁전이 아니라 커다란 건축군체였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축물들은 붉은 성벽에 둘러져있었는데 망루, 대성당, 박물관, 정부기관사무청사에 대통령집무청사까지 다 들어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군이였다. 그러니 력사적인 건축물인 동시에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생생한 문화재인 것이다. 곧 이어 박물관을 참관하면서도 입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이 부실 정도의 금은보화들, 화려한 궁중의상들, 그리고 미술작품을 방불케 하는 마차들, 몇세기 지났으나 그 당시 짜리로씨야 대제들이 누렸을 부귀와 영화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로씨야의 옛수도인 싼끄뜨뻬쩨르부르그의 에르미타쥐궁전에 가보니 모스크바에서 본 것은 아무 것도 아니였다. 세계3대박물관의 하나인 이 궁전에는 몇백만점의 예술품이 소장되여있다고 하는데 단 겨울궁전만 돌아보았는데도 10여년전에 가본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보다 더 큰 규모와 웅장 화려함으로 우리의 넋을 앗아갔다. 이름난 명화들과 샹들리에와 황금빛무늬 벽지로 도배된 겨울궁전의 모습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어디 그뿐이랴, 지하철을 타보면 또 지하궁전을 련상시킬 정도로 지하철역 곳곳에 새겨진 조각상과 미술품들, 저녁산책길에 다리를 지나는데 노을이 지는 네바강의 경치를 유화로 그려내는 수수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그렇게 로씨야는 건축, 미술, 등 모든 예술분야에서 탁월한 나라임을 수시로 일깨워주고 있었다. 일찍 위대한 음악가 챠이꼽스끼의〈백조의 호수〉의 음악과 발레에 매료되였었는데 려행스케줄 덕분에 이번에 마린스끼극장에서 발레를 구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발레를 관람하는 현지인들의 옷차림을 보면 단정하면서도 수려하여 예술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함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한껏 차려입고 입장하는데 5층으로 된 관람석이 전부 만석이다. 우리는 2층에서 관람하는데도 무대우의 배우들이 개미같이 보여 집중이 잘 안되는데 그 5층의 관중들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피로가 몰려와 잠간 졸다가 요란한 박수소리에 놀라 깨여 주위를 살펴보니 공연은 끝났고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공연의 성공을 축하하며 박수를 보내는데 가히 지루하다 할 정도로 오래오래 지속되였다. 구경이 끝나 나오니 밤 11시, 그때에야 저녁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당지의 관례에 따르면 옷에 음식냄새가 밴다고 공연구경전에는 일절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과 예술인에 대한 존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15일 저녁, 모스크바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구경하면서 ‘씨스뜨라’들의 기분은 완전히 고조되였다.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던 모스크바에 왔는데 어찌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깊이 잠든 화원은 고요해 / 산들바람 속삭이네 / 아름다워라 / 내 맘 이끄는 황홀한 이 밤이여 / …” 독창이 중창으로, 그리고 합창으로 번지며 〈모스크바 교외의 밤〉의 노래소리가 모스크바의 밤하늘을 가르며 멀리 울려퍼졌다.   우리를 심취케 했던 로씨야문학   모스크바에서 싼끄뜨뻬쩨르부르그로 가기 위하여 우리는 기차역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역이 없었다. 알고 보니 기차역 이름에 도착지 지명을 쓰기 때문이란다.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되였는데 한번 타보니 그 기발한 발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파로 북적이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잘못 타는 실수는 흔히 생길 수 있는 일, 그렇지만 로씨야에서는 기차역만 제대로 찾아가면 기차를 잘못 탈 념려는 전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모스크바에는 이런 기차역이 9개나 있다고 하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기차에 앉으니 30여년전 일이 생각난다. 대학시절 어느 여름방학에 한달동안 로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쏘련문학석사시험을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쏘련작품을 펼치면 첫페지부터 일여덟페지 쭉 환경묘사가 이어지고 심리묘사가 또 지루하게 계속되여서 그까짓 따분한 쏘련문학공부를 안한다고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구석이 없지 않으나 이십대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자아위안을 해본다. 차창으로 스쳐지나는 가없는 들판을 바라보노라니 그때 읽었던 문학작품속의 그 지루한 환경묘사가 련상되며 그만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 맞은켠에 앉은 소박한 차림의 모녀가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어디 가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우리네 풍경과 크게 대조된다. 어릴 적 생일날 엄마가 준 용돈으로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를 사서 보던 일이 떠오르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는 소설속의 빠웰 꼴챠낀의 정신을 따라배우던 일도 생각나면서 몇세대에 걸쳐 미친 쏘련문학의 영향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대학시절 쏘련문학을 가르치던 림교수님이 머리를 뒤로 빗어넘기며 수업을 하던 정경이 떠오른다. 그때 로씨야사실주의문학의 거장 레브 똘스또이와 그의 장편소설 《부활》이 나에게 준 영향은 거대한 것이였다. 소설속의 남주인공 네흘류도브가 쩍하면 들먹이던 “참인간의 참생활”이 오래동안 나의 사상을 지배하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소설이랍시고 쓴 소설속의 주인공 이름도 안나였다. 로씨야사람들의 위대한 작가에 대한 존중과 숭배는 곳곳에 세워져있는 도스또엽스끼, 체호브, 똘스또이, 뿌쉬낀 동상을 통해서, 그리고 정성껏 조성해놓은 작가들의 생가, 박물관 등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 뿌쉬낀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뿌쉬낀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시인의 령감이 그 손끝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뿌쉬낀의 명시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를 조용히 읊조려보았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 서러워 말아, 노여워 말아 / 울적한 날은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돌아오리니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고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니 /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 지나간 일은 그리우니라.” 30여년전 천방지축 뛰여다닐 때 멋모르고 읊었던 시, 세월이 흘러 이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너나없이 어슷비슷하게 살아온 우리네 삶이란 것을 뒤돌아보면 아픔과 슬픔을 겪지 않은 인생이란 거의 없다. 그래도 꿋꿋이 살아가는 것은 아직도 꿈 한자락 가슴속에 품고있기 때문이 아닐가? 로씨야문학은 그렇게 우리 생활에서 사라진 듯하나 우리의 령혼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고 뇌리속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전 자료를 뒤지다가 1935년 《북향》지에 련재된 작가 안수길의 글과 맞띄우게 되였는데 그중 한 단락에 시선이 멈춰선다. “수년전에 《죄와 벌》을 읽다 팽개쳤던 것을 수개월전에 다시 읽었는데 그것을 재독하는 사이에 자연히 도스또엽스끼의 위대한데 감격… 도스또엽스끼의 작품은 읽기 힘들다고 해서 그 가치가 감수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작가와 달라 철저한 현미경적인 리얼리스트이다… 그 앞에서 자연 머리가 숙여진다.”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심리적통찰력으로, 특히 령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도스또엽스끼, 이제 로씨야국립도서관앞에 그 동상이 세워진 리유를 알겠다. 그리고 또 괴테이후 세계문학을 지배한 소설가였고 커다란 문화적 각성을 일으킨 사상가였던 똘스또이, 이번 려행길에 스케줄사정으로 도스또엽스끼의 생가와 똘스또이박물관을 가보지 못한 것이 큰 한으로 남았으나 지루하다고 내팽개쳤던 명작들을 다시 집어들고 하나하나 독파하는 것으로 그 한을 치유하리라. 그런 명작들이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을 주리라는 기대에 벌써 가슴은 부풀어오른다. 10일간의 로씨야려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부랴부랴 된장찌개를 끓였다. 로씨야의 문학과 예술은 즐기면서 그 음식에는 쉽게 질려버리는 이 오십대 아낙을 어찌하랴. 된장냄새가 온 방안에 퍼지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이 익숙함. 국거리가 없어 김치를 넣었더니 된장맛이 좀 덜하긴 해도 열흘간 로씨야음식물로 느끼해질 대로 느끼해진 내 위에 위로를 주기엔 충분한 맛이였다. 배부른 오후나절, 문득 사할린의 그 ‘망향의 언덕’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간 겨레들이 생각났다. 나는 고작 열흘 된장국을 먹지 못한 것이 이렇게도 한스러운데 그들은, 그들은… 그 처절한 심정이 가슴에 맞혀오며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난다. 로씨야려행은 그렇게 사할린과 모스크바를 별개로 각인시키며 내 추억의 고간속에 저장되여간다. 이제 또다시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슴없이 그 품에 안기리라!
5    [수필] 아직도 꿈꾸는 녀자-남영도 댓글:  조회:436  추천:0  2019-07-16
  남영도      아직도 꿈꾸는 녀자    올해 3월은 내 나이 쉰다섯이 되는 생일이 있는 달이다. 이제는 ‘쉰내가 풀풀 나는’ 나이, 그럼에도 소녀적 감성은 여전히 살아있어 유치찬란하게도 이 세상에 온 지 ‘660개월이 되는 달’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의미를 부여해본다. 게다가 정년퇴직을 맞이하는 조금은 특별한 달인 것 같아 3월중 임의의 사흘간의 일지를 여기 옮겨본다.   사이판의 꿈―3월 4일   말로만 듣던 유명한 관광지 사이판(塞班)에 드디여 왔다. 오랜만의 일상탈출, 가없이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으로 신비스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일년 내내 글밭에서 헤매다가 푸른 바다와 잔디가 어우러진 필드에 나오니 후련함이 페부속까지 파고든다. 부부동반으로 어울려 서툴기는 하나 이쪽에서 친 골프공이 태평양을 날아넘어 저쪽 그린에 가 떨어지는 신기한 경험도 하면서 련 며칠 천혜(天惠)의 자연세계에서 맘껏 휴가를 즐겼다. 한달 전, 사이판관광을 오기로 하고 관광 일정을 살펴보다가 눈이 반짝 빛났었다. 바로 그 일정 속에 내 생일이 끼여있었으니… 이제 흥분 같은 것을 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설렘 같은 것이 살짝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낮에는 골프와 관광, 저녁에는 화려한 디너쇼다. 여러 나라 관광객들의 취미에 맞게 〈만남〉(한국), 〈달빛이 제 마음을 대신하네요(月亮代表我的心)〉, 일본엔카(演歌) 등 기타반주로 된 남성이중창이 절묘한 화음 속에 어우러지고 무희들의 현란한 전통춤사위 또한 아릿다웠다. 4개 국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광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회자의 능란한 말솜씨에 홀리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저녁나절을 보냈다. 이튿날, 가이드의 안내로 사이판에서 해발이 제일 높다는 포차우산 정상에 올라보니 사이판섬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제주도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섬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머지않은 곳에서 유혹하는 에메랄드빛의 바다, 알고 보니 그것은 바다밑바닥에 가득 깔려있는 산호가루가 해빛을 받아서 옥색으로 빛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최대격전지로 두달간 불바다가 되였다는 이 섬, 미군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항복을 하고 민간인 수천명이 천황페하 만세를 부르며 절벽에서 뛰여내려 집단자결을 했다는 만세절벽, 그 속에는 강제로 징병, 징용되여온 조선인과 위안부들도 적잖게 들어있었다고 한다. “한국인위령평화탑”앞에서 기념비들을 돌아보노라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한때 나라를 잃고 이 머나먼 곳에까지 끌려와 망향의 한을 달래며 비참하게 쓰러져갔을 겨레의 넋들! 70여년이 지난 오늘 그런 피눈물의 력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파도만이 흰 포말을 날리며 처절썩처절썩 바위를 때릴 뿐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티니안섬은 당시 핵폭탄을 저장했던 력사적 장소로 바로 여기서 폭격기에 핵폭탄을 싣고 일본에 날아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군들이 원주민들을 마구 수장해버려서 더이상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여버린 저기 저 호수, 지금도 저기서 유골이 나오고 있다니 평화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여기 정상에 예수상을 세운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이곳은 1990년대 유명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라고도 한다. 극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간 의사 장하림과 종군위안부 윤여옥이 극적으로 만난 장소가 바로 여기 사이판의 제프리비치,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일본군이 그녀들을 집단 사살한 뒤 용케도 살아남은 윤여옥이 만삭의 몸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곳이였던 것이다. 20여년전 이 드라마를 보며 너무도 가슴이 먹먹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여 가이드의 소개를 들으며 연신 그곳을 뒤돌아보았다. 가슴이 알알해났다. 려행가기 전 목적지에 대한 사전공부를 하지 않고 떠나군 하는 내 습관이 또 한번 보기 좋게 저격당한 것이다! 겉보건대 ‘화려한 의상을 떨쳐입은’ 이 열대섬이 워낙은 이렇게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슬픈 력사를 간직한 곳인 줄 그제야 안 것이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의 관광과 디너쇼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강렬한 자외선 탓인지 구리빛 얼굴이지만 편안함이 느껴지는 원주민들의 미소 띤 모습에서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1990년대 방직공 모집때 왔다가 이곳에 아예 뿌리를 내린 조선족들이 통역, 가이드 등으로 생업에 종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또한 보기 좋았다. 저녁은 사이판에서의 마지막 식사, 예정대로 나의 생일축하파티가 열렸다. 유서 깊은 사이판에서의 생일파티, 일행 중 맏언니가 미리 준비한 깜짝 선물이 있었으니 바로 플루메리아꽃과 생일케익이다. 그 꽃을 목에 걸고 생일초불을 불며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뜻깊은 생일을 쇘다. 아침부터 위챗 대화방에서 생일축하세례를 받았던 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여온다. 26년간 잊지 않고 내 생일을 꼭꼭 챙겨주셨던 시어머님이 안 계시는 이국땅에서의 생일파티라 그런지 울컥해난다. 그리고 겉으로 별로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지난 30여년간 적정온도와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이 자리까지 쭉 함께 와준 남편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 남편이 옆에서 빙그레 웃어준다. 남세스럽게 닭살 돋는 멘트를 날리지 않아도 이제 미소 하나로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나이에까지 온 것이다. 지금 이대로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범사에 감사하며 살어리랏다!   ‘베푸는 자’의 자세―3월 18일   “그 당시 그 돈이 어떤 분들에게는 1%일 수 있었겠지만 우리에게는 100%였습니다!” 3월 18일,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설립 15주년 기념행사에서 대학시절 장학금 지원을 받았던 수혜자(졸업생)들의 감격의 목소리가 울린다. 당시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는 어려운 조선족학생들을 후원하기로 뜻을 모은 분들이 애심장학회를 만든 지도 어언 15년, 이제 북경조선족사회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고 그 기념행사에 후원자신분으로 표창을 받는 자리에 섰다. 10여년간 후원을 했으니 표창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베푼 자’의 심리로 말이다. 뒤이어 장학회의 사랑을 동력으로 꿈을 키워왔고 졸업 후 취업, 창업 경험담을 주고받는 졸업생들의 토크쇼이다. 볍률사무소를 차리고 회사를 차리면서 얻은 경험을 소개하면서 큰 꿈을 그리고 있는 여유 있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며 비전을 제시하는 말솜씨들이 대단해서 회장에서는 수시로 웃음이 터지고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오후에 진행된 후원자 간담회에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는 계속되였다. 그중 왜소한 체구의 어느 한국 녀성의 이야기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 젊은 시절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시골학교에 내려가 근무한 적 있는데 지적 우월감에 잔뜩 젖어 몇달 만 가있기로 하고 도착한 첫날, 녀학생들이 마실 물이 귀한 당지에서 생수며 생활필수품들을 가지고 나타나 “선생님도 곧 가실 거죠?”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시골학교 근무 기피는 보편적 현상인지라 그렇게 묻는 것에는 리해가 가는데 곧 떠나갈 선생한테 생활필수품들을 가지고 나타난 학생들의 마음씀씀이에 커다란 감동을 받고 몇달 만 있기로 한 것을 몇년을 근무하다가 돌아왔다고 한다. 지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교만한 자신을 시골학교의 순수한 학생들이 치유해주었다고 하면서 그런 경력이 그 후로도 잘났노라, 베풀었노라 교만에 젖어있을 때면 흔히 가질 법한 교만과 편견을 깨도록 수시로 채찍질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 학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중국에 와서도 애심장학회를 통해 조선족학생들을 계속 만나고 있는데 순수한 조선족학생들한테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그런데 그 낮은 톤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관통하는듯 충격적이다. 이른바 ‘베푸는 자’의 교만한 심리로 그 자리에 앉아 학생들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던 내 뒤통수를 치는 순간이다. 첫 몇년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처럼 저자세로 조용히 지냈지만 차츰 후원자 모임에 불리워나가면서 점차 ‘오른손’이 알게 되고 세상이 알게 됨에 따라 은근히 교만심리가 자라났던 것 같다.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키워주기 위한 주최측의 의도를 파악하고 몇년간 대학생성장포럼에 참가하여 심사위원을 맡아하면서도 줄곧 작간했던 그 무서운 ‘베푼 자’의 교만… 충격을 받고 가슴을 어루쓸며 생각해보니 후원자들과 학생들의 평범한 듯한 말속에 많은 의미심장한 말들이 들어있는 것이였다. 어느 졸업생이 어릴 때 자기의 꿈은 선생이 되는 것이였는데 지금은 그 꿈을 이루어 대학선생이 되였다고 하면서 그때 한 학급의 어느 남학생이 자기의 꿈은 “아바이가 되는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인재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되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하면서 자기는 이제 좀더 멋진 선생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면서 말을 마치는데 한바탕 웃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말이 참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바이가 되고” 멋진 “아바이로 되기”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베푸는 자’의 교만한 꼬리를 내리우고 이제 멋있게 나이 드는 법을 하나하나 터득해나가야겠다. 모든 이들에게서 배우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또 낮추어야겠다.   직업인생에 마침표 찍는 날―3월 30일   퇴직환송회가 끝났다. 간단한 작별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후배들이 정성껏 준비해준 생화와 선물을 받아안고 또다시 혼자가 되였다. 산책삼아 걸으며 생각해보니 감구지회가 몰려온다. 이변은 없었다. 온통 칭찬일색이다. 정든 후배들과 이제 더는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은 심히 서러운 일이나 그렇다고 남들처럼 울고불고하는 해프닝을 벌이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굳이 이변이라고 한다면 부사장과의 담화에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부사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맞은켠에 앉으라고 한다. 정년퇴직할 때에 있을 법한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나오면 되리라는 단순한 생각에 의자에 앉았다. 부지중 흰 하다가 날아오며 내 목에 걸린다. 부사장이 장족이라 자기 민족의 풍습에 따라 례의를 갖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32년간 수고했다고, 편집일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고, 몇마디 하지 않았는데 벌써 울컥한다. 무덤덤하게 앉아있다가 예상외로 감동폭탄을 맞은 것이다. 돌이켜보니 32년간 한 직장에서 오롯이 도서편집이라는 한 우물만 파면서 달려왔고 몸 여기저기서 적신호를 보내오는 시점에서 직업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저도 모르게 32년전 북경에 도착하던 첫날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애인과 함께 출판사에 도착보고만 올리고 근처에 있는 신광식당이라는데 들어가 점심밥을 사 먹으려고 돈을 내미니 카운터 복무원이 량표(粮票)를 내라고 한다. 물론 전국적으로 배급제를 실시하던 시기라 준비해갔던 전국량표를 내놓으니 안된다고, 딱 북경량표여야 한다고 잡아뗀다. 아, 북경의 높은 터세여! 하고 한탄하고 있는데 우리 뒤에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던 나이 지숙한 분이 북경량표 6량을 내주는것 이였다. 꿔준 것이 아니라 그저 주는것 이였다. 덕분에 낯선 북경에서의 첫 끼니를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 고마운 북경사람 덕분에 북경에서의 첫 출발을 잘하게 되였고 32년간 쭉 관건적인 모멘트마다 귀인들을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는 생각에 그 에피소드를 잊지 못하는 것 같다. 1980년대 대학졸업생이라고 우쭐하며 ‘염황자손’이며 ‘스찔’이라는 낱말을 모르는 선생님들을 은근히 깔보면서도 정작 자기가 번역할 때는 ‘역할’을 전부 ‘역활’로 잘못 적어 혼나던 일, 처음으로 편집해놓은 원고를 조장선생님이 페지마다 빨간 볼펜으로 가득 고쳐놓은 것을 보고 억울해하면서도 수긍하던 일, 그렇게 선생님들의 손에 이끌려 한발자국한발자국 성장하며 걸어온 길이다. 편집은 잡가가 되여야 한다고 하시던 선생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감염되여 학구적인 태도로 배우고 실천하며 묵묵히 걸어온 길, 그렇게 나이 들어가면서 똑같은 자대로 젊은 편집들에게 엄하게 요구하면서 여러명 울리기도 했었지. 일각에서는 우리가 만든 조선어도서를 보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된다고 그렇게 애쓰냐고 하지만 오랜 편집생활에 생긴 직업병이 고질병으로 자리 잡아 틀린 문구를 보면 그저 넘어가질 못하고 번역을 하다 해결 못한 것이 있으면 밤을 패서라도 꼭 답안을 찾아내고야 만다. 퇴직을 앞두고 묵은 원고들을 정리해 페품으로 팔아버릴 양으로 20여년전의 원고들을 펼쳐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수정한 원고들마다에 내 젊은 날 고뇌의 흔적들이 거기 력력하니 찍혀있는데 왜 아니랴, 여느 도서를 편집할 때는 경추가 너무 아파 울기까지 하였고 여느 도서를 편집할 때는 삼복철 땀을 철철 흘리며 먼 교외에 있는 80고령의 저자선생님에 다녀오며 의문점들을 해결하였었지. 편집실분위기 또한 가족 같은 분위기라 선배님들이 가끔씩 베풀어준 작은 은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기숙사에서 혼자 지낼 때 삶은 옥수수를 가져다주시던 L선생님, 취직한 첫해 겨울 음력설 쇠러 집으로 가는데 기차간에서 먹으라며 손수 만드신 가지김치를 도시락에 싸서 건네주시던 X선생님, 그리고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1살이 채 못된 아들을 업고 혼자 몸으로 동북에 있는 시집으로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려고 친히 역에 나가 기차표를 끊어준 Q선생님… 신랑과 말다툼을 한 이튿날 출근하여 하소연을 하면 저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던 친정엄마처럼 후더운 교정조 선생님들… 그렇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정작 자기가 로편집이 되여서는 젊은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도움 제대로 준 적 없으니 어찌 가책이 아니 될가! 집에 도착해 퇴직을 했다고 위챗으로 알리니 어느 선배님이 퇴직간부 위챗대화방으로 안내한다. 들어가 보니 90여명이나 운집해계시는데 익숙한 분들 성함과 얼굴이 보여서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제 또다시 막내로 그들 앞에 선 것이다. 인생후반전 이렇게 다시 막내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다. 직장의 울타리에 갇혀 못해본 것들을 하나하나 시도해보고 이루어가고저 또다시 길우에 선 것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과의 경계선에서 고민할 필요없이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여 마음이 시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생후 660개월 된 녀자여! 다리 떨릴 때 말고 심장이 떨릴 때 떠나자! 꿈이 손짓해 부르는 저기 저 언덕너머로…  
4    [수필] 책의 향기에 취했더이다-남영도 댓글:  조회:293  추천:0  2019-07-15
남영도 책의 향기에 취했더이다     “선생님, 완전히 책 속에 묻히셨네요.” 젊은 편집들이 나에게 원고 맡기러 왔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씩 던진다. 그 말에 부지중 주위를 둘러보니 말 그대로 책더미 속에 내가 갇혀있는 형국이여서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책귀신’으로 불리우던 내가 대학을 마치고 출판사에 배치 받아와서 책 만드는 일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32년, 이제 여기서 정년퇴직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책과 씨름하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나를 키운 8할이 책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독서의 힘으로 버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이 별로 많지 않았던 소녀시절, 활자라고 찍힌 것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고 그것도 오감을 총동원하여 ‘잘근잘근 씹어 소화까지 시키군 하였’으니 말 그대로 활자중독자인 셈이다. 처음으로 《반짝이는 붉은 별》이라는 장편소설을 읽고 나서 그 작품세계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채 동네집에 가서 물을 길어 동이에 이고 집에 왔는데 방안의 어느 시커먼 구석에서 소설 속의 악패지주 호한삼이 당장 뛰쳐나올 것만 같아서 집안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무서운 기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생일날 어머니가 맛있는 걸 사먹으라고 준 용돈으로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를 사서 보았는가 하면 황계광, 구소운 등 영웅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각색한 그림책(련환화)들을 한가득 사서 벽에 쭉 걸어놓고 소조공부를 하러 온 학급친구들과 함께 재미나게 보면서 방과 후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었다. 그럼에도 시대적 제한성으로 유년의 심령에 최초의 륜리로 크게 작용한다는 명작동화들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커다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의 풀을 요구할지언정 자본주의의 곡식은 요구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판을 치던 계급투쟁년대에 서방 자본주의나라 명작들은 모두 출판이 금지되던 때의 일이였으니 조금 늦게 태여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수 밖에… 물론 그후 아이를 키우면서, 책을 만들면서 더러 보충을 하였으나 아직도 동화라면 콤플렉스 비슷한 감정들이 살아나 가끔씩 나를 괴롭히군 한다. 그러던 시골소녀가 처음으로 연길이라는 대도시에 작문경연에 참가하러 갔다가 외국문 서점이라는 데서 조선의 문학작품집들을 사들었을 때의 그 기쁨과 행복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가? 그 책들에 심취하여 류려한 문구와 숨막히는 묘사들을 수첩에 베껴넣으며 꿈에 부풀어있던 나날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문학의 꿈을 한가득 안고 대학문에 들어섰을 때 대학도서관의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책들은 나를 주눅들게 하기에 족했다. 그 책들을 다 독파하려는 오기로 책을 읽었으나 전공서와 관련된 책만 읽기에도 버거웠다. 소설책을 읽는 것도 숙제라고 하니 처음엔 신났지만 그것도 잠시, 점차 방대한 열독숙제의 높은 벽에 한계를 느끼게 되였다.   얼마전, 오랜만에 책장에서 묵은 자료들을 뒤지다가 먼지투성이 속에서 옛날 수첩들이 눈에 띄여 펼쳐보았더니 페지마다 깨알같이 박아쓴 독서필기들이다! 무려 20권도 더 되는 그 수첩들을 30여년만에 다시 보니 마치 잃었던 무언가를 되찾은 듯 가슴이 뭉클해난다.  “창밖의 무관한 일에 관여하지 말고 일심으로 만권서를 독파하라(莫闻窗外无关事,一心读破万卷书)”는 아버지의 멋진 친필제사가 유난히 눈에 띈다. 맨아래에 “81년 10월 4일”이라고 씌여있는 걸 봐서 아마도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해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수첩을 선물하면서 써주신 글귀 같다. 다음 페지에 “독파만권서, 하필여유신(读破万卷书,下笔如有神)”이라는 글귀를 적어넣고 독서필기를 열심히 한 흔적들이 거기 고스란히 남아있다. 《붉은 것과 검은 것》,《두번째 악수》, 파금의 《봄》을 보고 쓴 독서필기가 있는가 하면 조선 현대문학선집들에 나오는 리기영, 강경애, 한설야의 작품 그리고 천세봉의 《고난의 력사》에 관한 것도 있었으며 북경에 와서는 한국 대표문학선집들을 본 독서필기가 주를 이루고 그후에는 또 장애령, 왕소파, 여광중, 여추우 등 중국문단 작가들의 산문과 수필들을 읽은 흔적도 보인다. 40년전부터 시작된 이 독서필기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울 때까지도 가끔씩 이어져왔으나 언젠가는 독서필기가 없는 독서로 되였고 컴퓨터가 보급된 후 독서의 량이 점점 줄어들다가 이제 스마트폰시대에 이르러서는 두석달이 지나도록 책 한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면서 나는 서서히 성장해왔다. 따분한 듯한 정책 리론 도서를 번역, 편집하면서 정책을 리해하는 안목을 키웠고 우리 민족의 력사, 민속,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의 창작도서를 편집하면서 종합지식을 쌓는 동시에 사고의 폭을 넓혀갔으며 각양각색의 저자들의 원고를 만나면서 책임감과 사명감 비슷한 것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였다. 그중 《한세대의 별》과 《그리움의 시공을 넘어》의 작가를 만난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전국 각지에 금싸락처럼 널려 있는 조선족 과학자들을 취재하기 위하여 사비를 털어 만리답사길에 올랐고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과학자들에 대한 취재를 멈추지 않은 놀라운 정신력의 소유자--김영금 선생님의 《한세대의 별》을 편집하면서 우리 민족 청소년들에게 탐구정신과 꿈을 심어주기 위한 그 작가적 사명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암환자의 투병일기--박경식 선생님의 《그리움의 시공을 넘어》라는 책의 편집을 맡았다.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투병환자가 쓴 원고라 편집과정을 다그쳐야 했기에 선생님댁을 여섯차례 방문하면서 인간적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70여세 고령의 저자와 망년지교를 맺게 되였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의 눈물을 쏟으며 출판을 다그친 결과 제 시간에 저자에게 책을 안겨드릴 수 있어서 보람을 느끼게 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 제자들의 옹위 속에서 출판식까지 원만히 치른 선생님은 몇달 뒤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때를 같이 하여 이 책의 편집을 끝내고 쓴 라는 서평이 《도라지》잡지에 발표되였는데 하늘나라로 가시는 고인에게 드리는 의미 있는 추념문으로 된 것 같아 슬픔 속에서도 저으기 위안이 되였다. 이와 같이 책을 만드는 나에게 있어 책은 가까우면서도 또한 먼 존재인 것 같다. 업무적으로 일과 관련되는 책들만 보고 만지다보니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는데서 오는 ‘욕구불만’의 정서, 비슷한 감정이 가슴 한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욕심나는 책들이 눈에 뜨이기만 하면 수시로 사들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입을 다문 채 책장에만 꽂혀있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누군가 독서는 “살아가기에 필요한 행위가 아니라 랑만적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한 행위”라고 했던가, 랑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답게 살아가는”데는 불가결의 요소이리라. 굳이 랑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에게 독서는 하루 세끼 밥을 챙겨먹는 것처럼 내 삶의 일차적인 수요이고, 눈만 뜨면 몸이 먼저 원해오는 행위임에랴… 혹자는 요즘과 같은 인터넷시대에 검색만 하면 모든 정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굳이 옛날식으로 만권서를 독파할 필요가 있는가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종이로 된 책의 존재가 자칫 아날로그적인 고물로 취급받기 십상인 세상이 온 것이다. 오래된 것, 고전적인 것들이 소중히 여겨지기보다는 새로운 것, 획기적인 것, 이색적인 것들이 점차 대세로 떠오르는 변화무쌍한 세태 속에서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제품의 무한한 가능성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스마트한 전자제품들을 거부할 정도로 고루한 편은 아니지만 가슴 한켠에는 늘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서려오르며 알알해나기도 한다 만시름을 푹 놓은 채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옛날처럼 오감을 총동원하여 손때를 묻혀가며 내 사랑하는 책들을 원없이 읽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의 락오자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10년전이나 100년전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여전히 행복의 문제일 것이요,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한 것들은 물질이 아닌 정신이라는 사실, 어린시절부터 쭉 그래왔 듯이 이제 남은 인생도 책에 심취하고 책과 교감하며 살고 싶다는 꿈이 변함이 없다. 여태까지는 남의 책을 읽고 남의 책을 만들며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책도 써서 서가에 꽂고 싶다는 야무진 꿈도 살짝 얹어서 말이다. 유태인들이 성경책 겉표지에 꿀을 발라놓고 아기들더러 빨아먹게 하여 책은 꿀처럼 달콤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하는 종이책에 관한 전설들도 이제 고루한 옛이야기로 남게 될 테지만 아직도 책이 우리를 키워주는 어마어마한 파워라는 것에 대해서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펼쳐지지 않은 책은 존재할 뿐 살아있지 않다. 고운 먼지들의 품에 감싸안긴 책은 어쩌면 속이 텅 빈 직륙면체 상자에 불과하리라.”프랑스의 유명한 독서광 샤를 단치의 말이다. 아무리 스마트한 전자제품들이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잠간이라도 종이책을 촉감으로 느껴보고 책장에 밑줄을 그어가며 글을 읽는 그런 여유를 가져보고 싶다. 머지않은 앞날 종이책 읽기가 고전적인 아취로 취급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지금부터라도 책의 향기에 푹 취해보고 싶다.
3    [수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남영도 댓글:  조회:147  추천:0  2019-07-15
 남영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녜? 구멍탄? 아, 북경에도 구멍탄이 있었슴까? 전 한국에만 있는줄 알았슴다!” 한 사무실 젊은 동료의 놀라움에 찬 소리다. 북경에서 30여년 살아오는 동안 구멍탄(蜂窝煤)만 8년 가까이 때며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내가 듣기에 그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경탄이여서 일순간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지만 또한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반증으로도 되기에 일단 웃음으로 넘기고 내 추억의 메모리에서 구멍탄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내였다. 누구와 더불어 지난날을 이야기하랴! 북경에서 1980년대중반에 결혼을 하고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조그마한 뙤창문이 달린 단칸방에서 구멍탄을 때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신혼초, 구멍탄불이 자주 꺼져서 이튿날 출근하여 한 사무실 선생님들께 하소연할라치면 “그거 요령을 모색 잘하믄 차차 될게요!”라고 하면서 구멍탄 때는 요령을 알려주군 하였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제일 싫은것이 추운 새벽에 잠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채 집게로 새 구멍탄을 집어다 갈아야 하는 일이였다. 두말할것없이 이는 주로 남편 담당이였는데 난로뚜껑을 열었을 때 석탄불이 빨갛게 살아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꺼져있으면 추운대로 꾹 참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새 구멍탄을 들고 이웃집에 가서 빨갛게 달아있는 구멍탄을 바꿔다가 다시 불을 살구는데 그 불길이 쉽게 올라오지 않아서 아침밥을 해먹으려면 한겻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그나마 이웃간에 오고가는 인정이 있어서 많이 위안이 되였다. 아들애가 태여난뒤 구멍탄불우에 우유를 올려놓고 끓이는데 불길은 올라오지 않지, 아이는 배고프다고 보채지 급한 마음에 숟가락으로 우유를 저으며 “우유야, 우유야, 빨리 끓어라, 우리 아기 맘마 빨리 끓어라…”라고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어부르며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고생하며 어렵게 키운 아들이 어느덧 장성하여 장가까지 갔으니 격세지감이란 바로 이런것을 두고 말하리라! 그때 우리 사는 창고에서 바로 맞은켠에 있는 이층집에서 화려한 선률의 피아노소리가 들려오고 집에 손님들을 청한듯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그보다 더 부러운 귀족생활이 또 없었다.   아들애가 한살이 됐을무렵의 어느 휴일날, 참대로 결은 유모차(당시 26원)에 아들애를 태우고 산책을 나갔다가 부식물상점에 들어갔다. 유모차안에 서있던 녀석이 어느결에 매대우에 있는 앉은뱅이 저울을 확 잡아당기는바람에 저울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저울대가 절반으로 동강나는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영업원이 당장 저울을 배상하라고 잡아뗀다. 그래도 사정을 봐줘서 절반값만 내라는데 그게 자그만치 그때의 반달로임과 맞먹는 30원이였던것이다. 때는 한창 아이 키울 때라 가꾸지 않은 내 행색이 초라했던지 나를 녀석의 보모쯤으로 알고, 가서 빨리 주인을 데려오란다. 기가 막혔지만 그런 억울한 세절같은건 모두 생략한채 남편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입을 하 벌린채 천정만 쳐다본다. 월말이라 생활비가 거의 다 떨어지고 새달 로임이 나오려면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어디 가서 그 돈을 구한다? 그때의 막막함이 아직도 가슴에 맞혀오는듯 한데 기억을 더듬으니 남편이 선배동료를 찾아가 사정얘기를 한후 어렵사리 남의 돈을 꾸어다 저울값을 갚았던것 같다. 가을이면 겨우내 땔 구멍탄을 사서 바람벽에 차곡차곡 쌓아놓느라 얼굴에 석탄검댕이가 묻은줄도 모르고 환하게 웃음 짓던 남편 얼굴과 김장용 배추를 쌓아놓고 김장을 한다고 분주스레 돌아치던 새댁, 아니, 그보다도 보모로 오인될 정도로 초라한 행색의 내 얼굴모습이 한데 오버랩되며 일시에 감구지회가 몰려온다. 그렇게 가난할지라도 꿈과 희망이라는것을 버리지 않고 살던 옛날 일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기억속에 남아있는데 세월은 사정없이 흘러 먹고 입는것때문에 고뇌하던 우리를 이제 물질의 풍요앞에 세워놓은것이다. 느닷없이 튀여나온 구멍탄얘기가 사라진듯 했던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될줄 몰랐다. 선배님들이 쩍하면 옛날얘기를 꺼낼 때면 고리타분한 얘기를 또 꺼낸다고 속으로 웃었는데 내가 이제는 젊은이들과 더불어 지난날의 그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는 나이가 된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한편 고태스러워보이기는 하겠지만 엉뚱하고 발랄한 매력을 풍기며 톡톡 튀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지난 옛일을 얘기하는 멋 또한 좋다. 돌이켜보면 저 유명하다는 동화 한편 읽어보지 못하고 오로지 “투쟁정신”만 강조하는 책들만 읽으면서 자란 우리 세대, “독서무용론”이 살판치고 오로지 로동생산만 강조하는 풍조속에서 원만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그나마 문학을 지상에서 가장 숭고한것으로 간주하였었던 우리 세대다. 지금의 젊은이들과 마주하고 그때 나에게 있어 “문학은 숙명과도 같은것”이였다는 등으로 얘기를 할라치면 여러 코드들이 들어맞지 않아서 키득키득 웃으며 “리해불가”라는 표정을 짓는 그들이 역시 리해불가이지만 그래도 그들과 마주하고 지적대화를 나누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그들의 지식축적량에 한번 놀라고 솔직함과 당돌함에 두번 놀라면서 신선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세대들에게 내가 늘 가졌던 자대는 “지금의 젊은 애들은 참…”라고 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웃세대들이 우리한테 가졌었던 바로 그 자대이다. 그래서 지금의 젊은이들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뇌와 방황을 털어놓을 때면 속으로 “고까짓 일로 무슨…우리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심리를 가지며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준적 없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제대로 보듬어준적 없다. 내 젊은 시절 사노라 정신없이 돌아치면서 한 고뇌만이 아픈것이고 구멍탄을 사들이는것같이 당장 입에 풀칠하는것때문에 신경 쓸 일 없는 “물질의 풍요” 시대에 사는 요즘 청년들의 고뇌는 고뇌도 아니라고 간주했었다. 한편 력사를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보다 훨씬 살기 힘들었던 100여년전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의 고뇌와 방황인들 어찌 적었으랴. 째지게 가난할지라도 피를 팔아서 책을 사보았다는 우리 아버지세대의 이야기에 기가 차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그 절실함이 쉽게 피부에 닿지 않듯이 현대 젊은이들의 정신적고뇌와 방황 역시 피부로 다가오지 않기는 매일반이였다. 몇년간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각계각층 젊은이들의 글과 만나 그들의 령혼심처에 깊숙이 들어가볼 기회가 많아지게 되였다. 높은 학력을 쌓고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과정에 부딪치는 높은 현실의 벽만치나 그들의 고뇌와 방황은 심각한것이였다. 그런 그들에게 년장자노라고 어설프게 이도저도 아닌 대안을 제시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옛날에 비해 살기는 더할나위없이 편해졌는데 인간의 고뇌는 왜 줄어들줄 모르고 갈수록 더 많아지고 깊어지는것일가? 다시금 인간의 정신적추구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앞에 마주서게 된다. 결국 청춘의 고뇌란 시대에 따라 그 고뇌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을뿐 인생의 의미나 삶의 가치 그리고 꿈의 실현을 두고 가지게 되는 고뇌나 방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청춘들을 울리고 아프게 한다는걸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글을 쓰는 과정은 정직하게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볼수 있는 시간인것 같다. 글을 쓰면서 자기의 고뇌와 방황을 털어놓고 자기를 성찰하면서 사유의 뜰을 정리하는 과정에 어느덧 혼란스럽던것들이 가닥이 잡히면서 상처들이 치유된다고 그네들은 말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힐링이 되는 과정이라고 기뻐하는 그네들과 격이 없는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것에 보람을 느낀다.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서른즈음에”라는 노래가 애된 목소리를 타고 절절하게 울린다. 멀어져가는것이 어찌 청춘뿐이랴, 이른바 꽃중년도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훌쩍 가버리는것임을… 가고나면 상실의 아픔과 함께 후회가 남고 통탄이 남는다는것을 지나온 사람은 다 알리라! 한편 나이를 먹어가며 잃는것도 많지만 얻는것 또한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를 먹는다는것은 자신의 고집스런 편견과 세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가는 과정이며 이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눈을 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한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들었음에도 젊은이들과 어울릴수 있다는것을 분복으로 삼고 그들의 고뇌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토로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작은 일상에, 별치 않은것을 두고도 목에 피대를 세우며 한바탕 열변을 토하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싶기도 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는 안도현의 시가 허를 찌르는 겨울밤이다. 아직도 철이 덜 든채 서른즈음에 머물고싶어하는 어느 오십대 아낙의 하루가 또 멀어져간다.  
2    [수필] '치타치타'(외 2편) 댓글:  조회:224  추천:0  2019-07-14
‘치타치타’(외2편) 남영도   “우리 모두 함께 해요 치타송 같이 같이 치타치타 우~우~ 할 수 있어요…”   한국 TV에서 과 함께 치타댄스가 한창이다. 남녀로소 함께 나와서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체조 비슷한 춤을 추는데 배우기 쉬울 것 같았다. 어머님도 화면을 보면서 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치타? 그게 뭔데요?…”  눈여겨보니 ‘치타’란 ‘치매타파’의 준말이였다. 듣자니 한국에는 10명 중에 1명이 치매환자라고 하니 예방 차원에서 국민적 댄스를 만들어 보급시키는 모양이다. 팔순이 넘는 시어머님과 함께 살아서인가, 치매는 은근히 신경 쓰이는 병이다. 방송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게 치매예방 관련 프로들을 내보내는데 들을수록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집에 치매환자가 있으면 가족들이 더 힘들다는 얘기에 더럭 겁이 나기까지 한다. 겉보건대는 밝고 명랑하지만 팔순을 넘기면서 어머님의 동작이 예전보다 느려지고 청력도 떨어지고 감각도 무뎌가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아서인지 남의 일 같지 않다. 주방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면서 보니 깜빡깜빡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팔순이 넘었다고 주방일을 전혀 안하는 것이 치매예방에는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어머님보고 전기밥솥으로 밥짓는 것만 책임지시라고 했더니 때로는 전기밥솥 단추를 누르는 것을 잊는다든지 밥을 다 푸고도 보온상태로 그냥 놓아두어서 밥솥 안의 물이 펄펄 끓는다든지 수도꼭지를 잘 닫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자주 생기군 한다. 매번 그러실 때면 “절대 정신줄 놓으시면 안돼요!” 하고 잔소리를 해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제주도에 려행을 갔다가 귀국하던 날 공항에 나오면서 매일같이 들고 다니던 손가방을 숙소에 둔 채 그대로 나와버려서 공항까지 나왔다가 숙소에 되돌아가 찾아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력에 줄곧 자신감이 있었던 어머님은 그 일로 크게 락담을 하시면서 “이 로친네 이젠 안되겠다。 이제부턴 내 뒤를 살펴!”라고 부탁을 해왔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옛날부터 ‘산 백과사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억력 비상한(?) 녀자로, 누구네가 몇년 몇월 며칠에 이사를 했다든지 하는 별 쓰잘데기 없는 것까지 다 기억을 해서 ‘별걸 다 기억하는 녀자’로 통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30여년간 편집생활을 한 직업병이 남아서인지 뭐든지 정확하지 않으면 반드시 바로잡아놓아야 시름을 놓는 녀자로, 요즘엔 갱년기증상까지 겹쳐서 주방에서 밥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자꾸 이것저것 따지는 못된 습관이 있다.  어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옥수수를 사왔다고 미국의 단옥수수甜玉米가 아닌 국산옥수수를 사왔다고 하면서 미국산이 아니라거니 단옥수수가 맞다거니 하면서 어머니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는 못 말리는 녀자이기도 하다. 사심을 다 빼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옥신각신 다툴 때는 ‘고급편심’이 아니라 영낙없는 농촌아낙네다. 당시 다툴 때에 이런 것들을 미리 인지를 하였더라면 가정의 평화와 화목에 일조를 하였으련만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뒤늦게 인지를 하는 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후회막급병이여!  후에 먹어보니 국산옥수수도 마찬가지로 달고 맛이 있었다는 눈물겨운(?)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란 간사하기 짝이 없어 “나도 인간인데 뭐…” 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상대에겐 높은 자대를 들이대면서 몹쓸 자존심 때문에 사후에도 사과 같은 것을 하려 들지 않는다.  퇴직 후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자질구레한 일상을 동반하며 흘러간다. 거의 30년간 한가마밥을 먹으며 살아온 고부 사이, 하루 삼시 어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생활의 지혜를 배우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말 뒤끝에 쩍하면 치매를 들먹이니 듣기가 거북했던지 어느날 어머님이 “그 치매소리 좀 그만해라, 무섭다!”고 하면서 질색을 하시는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 걱정인지 나를 위한 걱정인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약속이 있어서 나갔다가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잔뜩 사들고 차에 오르며 길을 떠나려는데 갑자기 오른쪽 바지주머니에 있어야 할 휴대폰이 만져지지 않았다. “앗, 휴대폰!” 하고 새된 소리를 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데 왼손에 쥐여있는 휴대폰이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이구…  아줌마!…”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동승한 친구들이랑 한바탕 유쾌한 웃음으로 날려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제주도에 려행 갔다가 생긴 일은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였다. 다름 아닌 지갑을 택시에 두고 내린 것이다. 차에서 내린 지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지갑이 없어진 것을 인지하였으니 ‘산 백과사전’은 무슨! 돈도 돈이지만 그 숱한 은행카드들을 분실신고할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났다. 각가지 상상을 다 하며 오로지 그 지갑이 되돌아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리나케 호텔 프런트를 찾아가 사정얘기를 했더니 호텔보이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여 감시카메라에 찍힌 차번호를 확인하고 택시회사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는듯하더니 눈물나게도 택시 기사가 반시간 후에 도착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마울 변이라구야! 기사님의 말에 의하면 지갑이 앞좌석 밑에 떨어졌는데 자기는 물론 보지 못했거니와 손님이 3명이나 갈아타도록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그 문제의 지갑을 내민다. 아까 택시에 탔을 때 좀 수다스러워보이던 기사아저씨가 그렇게 멋있어보일 수가 없다. 도민들의 높은 수양에 감사한 마음이 일면서 기사님께는 물론 사례금을 후하게 드렸지만 방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건 완전 환장할 일이다. 내 인생사전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내 몸에서 발생한 것이다. 슬프지만 내 기억력 심지어 건망증이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상반신이 스멀스멀 달아오른다. 갱년기증상 치료약을 꺼내 한알 먹었다. 몇년 전 갱년기가 시작될 무렵에 가족들 앞에서 “이제 갱년기니까 제가 화를 내더라도 리해 바랍니다!”라고 엄포를 놓았었는데 일은 엉뚱한 데서 터진 것이다. 설명서를 보니 ‘건망증’이니 뭐니 하는 글자들이 안겨온다. 몸이 갑자기 더웠다 추웠다 하는 증상이 심해서 사먹는 약인데 그 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문구들이 이제야 보이다니… ‘수면장애, 신경과민증, 우울증…’ 그런 문구들이 나를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위축되게 한다.  잠이 오지 않는 실면의 날들이 이어지면서 오만가지 생각들이 엄습해온다.  갱년기증상과 치매증상을 두루 살펴보니 의외로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아직은 젊다는 것을 턱대고 자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던 치매증상들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갱년기증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섭게 한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가족일지라도 타인의 일일 때는 여전히 ‘먼산보기’이고 가족을 위한 걱정도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미칠 루를 짐작한 걱정이였고 자기 몸에 진짜로 닥쳐야 그 심각성을 느끼게 됨을 아프게 인지를 해냈다… 이제 ‘치매’는 팔순 시어머님만의 걱정이 아닌 내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심각한 것이였다.  얼마 전 친구의 어머니가 4년간 치매로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저 잘사는 집의 어머니로, 본인에게나 가족에게나 다 해탈이라고 간단히 생각했는데 장례식장에서 장남이 읽는 추모문에서 젊은 날 그 어머님의 고생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우파로 갇혀있고 형제자매들이 조롱조롱 세명이나 되는데 한달에 생활비 8원으로 살아가려니 너무나 막막해서 콕스 줏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면서 힘든 세월 질긴 모성애로 자식들을 키워온 어머니를 그리는 장남의 목멘 소리가 그대로 전달이 되여 눈물을 쏟게 한다. 그런 어머니를 어찌 ‘치매환자’라는 한마디로, 해탈이니 뭐니 하는 말로 일축할 수 있으랴… 공교롭게도 친정아버지와 친정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던 바로 그 장소인지라 여러가지 복합적 감정들로 눈물이 솟구친다. 몇해 전 엄마가 생전일 때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나서 한동안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일들까지 마구 겹치며 가슴을 허빈다.  치매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돌아온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진짜 효녀라고 그동안 정말 수고했다고 위안을 했더니 몇번이고 포기하고 양로원에 보내고 싶은 것을 남편이 보내지 말자고 우겨서 4년을 버텼다고 하니 그 사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4년간 버틴 그 가족의 막막함과 어려움을 외인들이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만 그렇게 장례식장은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삶에 대해, 가족에 대해 다시 반추하게 만드는 장소인 것 같다.  “설명절이 오는 건 좋은데 나이 먹는 건 싫구나!”  이번 음력설에 시어머님이 하신 말씀이다. 팔순이 넘은 로인의 페부지언肺腑之言이였을 텐데 당시는 친척들 음식상을 갖추는 고달픔에 그저 귀등으로 흘려보냈다가 요즘에야 문득 생각히우다니… 3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압록강을 건너온 그 꼬마가 어느덧 팔순고개를 넘으신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오로지 앞만 보고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왔으나 백년인생이라는 명제 앞에 서면 다 그러하듯이 몰려오는 절대적 고독을 어찌할 수 없으셨으리라.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 /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다 /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누군가 모멘트에 올린 이라는 노래가 유별나게 가슴을 친다.  ‘하나’도 모르면서 잘난 척을 하며 쩍하면 공부 못한 어머님을 가르치려 들었던 나 같은 인간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세월 앞에 고개 수그리고 유자孺子의 소가 되여 그동안 내가 받아안은 사랑을 되갚는다는 마음으로 림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한편 자식들한테 페를 끼치지 않겠다고 로인합창단에 다니며 부지런히 가사를 외우고 꾸준히 걷기운동을 하며 건강을 다지는 어머님이 한없이 고마워난다. 내가 어머님의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지도, 가령 그 나이까지 산다 하더라도 저렇게 명랑하고 단순하게 락천적으로 살 수 있을지도 장담 못할 일이니 늘 ‘어머님의 산 교과서’에서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겠다. “100살까지 문제 없겠수다!”  며칠 전 어머님과 함께 건강검진을 갔을 때 의사선생이 불쑥 던진 한마디가 어머님을 다시 ‘미소할머니’로 만들어준다.     “나 늙어 로인 되고 로인 젊어 나였네.  로인과 나는 둘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네.”   오래 전 한국의 어느 치매센터에서 보았던 시구절이 떠오르는 요즈음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미소할머니’와 함께 ‘치타송’을 부르며 단순하게 살고 싶어진다. 세월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싶다.   마음의 금선을 튕기며 가야금이 나에게로 왔다. 오십 평생을 살도록 악기라고는 하나도 다룰 줄 아는 게 없어서 늘 가슴 한켠에 서운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가야금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순 우리말로 ‘가얏고’라고 하는 가야금은 옛날 가야국에서 유래됐다는 궁중악기로 대체로 문인묵객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는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우아한 악기이기도 하다. 이름만 들어도 고전적 랑만의 대명사나 다름없어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에게는 한낱 막연하게만 바라보게 되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악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20여년 전, 어느 수필에서 TV화면에 비친 거문고 연주가의 차분한 연주모습을 보면서 거문고의 우아한 음색에 반하여 엉뚱하게도 그 연주가의 고독한 인생길에 길동무가 되고 싶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데 2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하게도 그 고전적 악기가 내게로 온 것이다. 애심녀성문화원의 배려로 가야금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차례지면서 쉰다섯에 내 생애 악기 다루기의 첫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자, 오늘은 먼저 뜯고 튕기는 주법입니다…” 한국문화원의 권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가야금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오선보도 볼 줄 몰라서 크게 걱정을 했는데 그저 12줄 가야금선만 잘 기억하고 주법만 잘 배우면 된다고 알기 쉽게 가르쳐주어서 리론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뜯고 튕기려니 생각처럼 되여주질 않는다.  “4,6~ 8,6,8,7~ 6,5,4…” 가야금선을 외우며 부지런히 뜯는데 대바람에 식지에 물집이 생기더니 피까지 난다.  “선생님, 반창고 붙이고 하면 안돼요?” “아니돼요.”  고운 목청의 선생님이 미소를 띄우며 말한다. 반드시 물집이 생겼다 터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뜯고 튕기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는 게 선생님의 지론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오른손은 닭알 쥐는 모양을 하되 식지를 절대 치켜들지 말라고 한다. 앞에 앉은 임금님을 손가락질하는 거로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제야 품위 있는 궁중악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정신이 번쩍 든다. 꼬박 2시간 동안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있으려니 다리가 저려났지만 꾹 참아야 했다.  가야금에 관해서는 재직 당시 민족음악 관련 책들을 편집하면서 가야금 산조며 계면조며 두루 얻어들은 풍월이 있어 처음에는 선생님과 궁금한 것들을 물어가며 대담을 하는 멋이 좋았다. 그리고 12현 가야금과 23현 개량가야금이며를 두고 아는 만큼 나누는 멋 또한 좋았다.  그런데 실전은 영 아니다. 더구나 ‘쌍튕김’은 아무리 해도 손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누가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고 했는가. 별로 련습을 한 것 같지도 않은 젊은 사람들은 알아서 척척 진도를 나가는데 내 손가락은 굵은 탓인지 아니면 감각이 둔한 탓인지 잘 튕겨지지 않고 그냥 제자리걸음이다.  결국 ‘나머지공부’ 신세가 되였다. 내 공부생애에 없던 일이다. 선생님을 마주보고 앉아 공부하다가 이제 선생님 곁으로 자리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곁에 앉으면 선생님이 손동작을 바로바로 잡아준다는 좋은 점이 있다. 여태껏 들어오던 “총명이 과인过人하다”는 이제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소리로 되였다.  좀 창피했지만 선생님과 나란히 앉으니 수업 시작할 때 학생들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 숙이며 하는 인사도 함께 받을 수 있어 좋다고 너스레를 떨며 마음을 비웠다. 자존심 따위를 다 내려놓고 유치원생의 자세로 돌아가야 제대로 배워낼 수 있음을 터득한 것이다.  어느덧 가야금을 사기에 이르렀다. 추운 겨울날 련습한다고 맨날 문화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좀 좋은가. 그토록 갖고 싶던 가야금을 사놓으니 집에서 언제든지 련습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처음 얼마간은 호기심에 열정까지 붙어 좀 련습하는가 싶더니 얼마 안되여 바로 꿔온 보리자루 신세다. 책을 사놓으면 빌려서 볼 때보다 더 보지 않는 격이 되고 만 것이다.  스모그를 무릅쓰고 가야금 들고 수업하러 다니는데 뻐스에서 숱한 사람들이 쳐다본다. 아닐세라 늦은 밤 가야금 들고 귀가하면 남편이 “당신 무슨 악단 단원이요?”라고 칭찬인지 타발인지 모를 소리를 한다. 모르긴 해도 그 화외음은 그렇게 폼 잡고 다닐 거면 제대로 하라는 말일 것이다. 배운 지 한달이 될가 말가 했는데 벌써 공연을 나간단다. 협회 내의 송년회 무대라 크게 부담은 되지 않지만 연주와 노래를 병행하는 병창으로 나간다니 왼심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도 나지 않았는데 콩밥 먹는 격, 게다가 후렴부분의 휘모리장단은 리듬이 빨라 난이도가 있었지만 말 그대로 ‘휘몰아가며’ 맹연습을 하였더니 예상 외로 공연은 대성공이였다. 문화원 원장님을 비롯해서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여기저기서 부러운 시선들을 보내온다.  조금씩 진도를 나가면서 중모리요, 계면조(슬픈소리)요 하면서 롱현弄絃이라는 것도 배우게 되였다. 왼손으로 현을 눌러 떨면서 하는 주법인데 눈물이 뚝 떨어지는 슬픈 소리를 내라고 가르친다. 바로 말로만 듣던 가야금 산조에 입문한 것이다. 힘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음이 그렇게 여러가지로 달라질 줄 몰랐다. 세상은 그렇게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온통 신기한 것들이 나를 맞이한다. 그 기예의 깊이를 재일 길이 없으니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그저 잠간만 머물러있을 생각을 한다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음을 실감한다. 배운 지 반년이 되자 또다시 공연에 나간다고 한다. 이번에는 조금 난이도가 가미된 ‘다스름’이 들어있는 곡인데 음을 조률하듯 쉴 새 없이 뜯고 튕기며 익숙히 해야 한다. 따분하고 지루한 련습이 이어진다. 몇달간 한곡만 련습하니 때론 싫증이 나기도 하지만 인내하며 버텨야 한다.  멀리서 볼 때는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이 가까이에 다가가보니 실은 고된 련습과 노력의 결과물임을 몸으로 인지한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유명인사들까지 감동적인 연주였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짜증을 내여서 무엇하나, 성화를 내여서 무엇하나…” 어쩌다 짜증 나는 일이 생기면 오랜 련습으로 입에 오른 그 가사를 외우며 심리평형을 잡는다. 어느 때부턴가는 가야금 앞에 마주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가야금과의 친밀한 접촉도 반년이 넘었다. 같이 배우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더니 반으로 줄어들었다. 각자 그럴 만한 리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지 않는다. 악기라는 것을 처음 다뤄보는 아마추어의 설레임 같은 것이 동반되여 삶에 권태를 느낄 즈음에 적당하게 신선함을 불어넣어주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제는 취미로 하던 그 선에서 잠간 멈춰서서 고민을 해보며 그 선을 넘어서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시점에 온 것이다. 따분한 련습들에 지쳐갈 즈음에 선생이 연주하는 익숙한 음악이 귀맛좋게 들려온다. 중국의 전통민요인 가 가야금으로 연주해도 그렇게 고전적인 아취가 풍길 줄 몰랐다. 가담가담 고쟁古筝의 중국풍 선률이 묻어나와 더 은은하게 들린다. 가야금이 옛날 중국의 고쟁에서 왔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곡,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어느 사극드라마에 나오는 주제가처럼 선률이 너무 우아하여 물어보니 아니란다. 유명한 시인 나태주의 이라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란다. 시도 처음 들어보지만 가야금선률을 입히니 더 매력적이다.  마지막 를 듣는데 누군가에게서 고백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오십대 아줌마를 십대 소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가야금의 마력에 빠지며 나태주의 시까지 좋아지기 시작한다.  가야금은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로 나를 사로잡았다면 이제는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하게 끈기 있게 다가갈 때 더 깊은 매력을 뿜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금예琴艺의 경지를 말할 것 같으면 옛날 춘추 전국 시대의 성련成连과 유백아俞佰牙와 같은 거문고의 달인을 손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런 높은 기예를 갖추려 애쓰지 않으련다. 또한 종자기钟子期가 유백아의 거문고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어 지음知音이라는 낱말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그런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고도 굳이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버거운 일이다.  그저 물 흐르듯이 순리에 따라 살면서 가야금을 배우며 터득한 삶의 리치를 내 소소한 일상에 적용하여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지음이 되고 지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세히 보고 오래오래 보면서” 사랑하노라면 언젠가는 마음이 통하리라 믿으며 오늘도 마음의 금선을 튕겨본다.   독서와 려행이라는 듀엣 “내가 읽거나 전해들은 것은 내가 직접 려행하면서 본 것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13세기의 대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한 말이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거의 알지 못했던 그 시대에 동양에서 2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탐험려행을 하면서 동서양 문화의 충격을 수없이 경험하였을 마르코 폴로로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내고 싶었을가? 그런 심경이 담겨진 말이였으니 당시에는 물론 명언이였을 터이다.  그러나 려행이 바야흐로 류행처럼 번지는 21세기 ‘지구촌시대’의 맥락에서 봤을 때는 고명한 데가 하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말일 뿐, 그럼에도 뒤늦게 나에게로 와서 나를 철들게 만들었으니 고마운 명언이라고 해두고 싶다. 글을 읽을 줄 알기 시작해서부터 책에 빠져있었고 출판사에 몸 담고 30여년을 일하면서도 줄곧 책 속에 묻혀있었던 나, 지금까지의 나를 키운 8할은 책이였다고 할 만큼 ‘책벌레’인 나에게 이 말은 조금은 충격적인 데가 있다. 오로지 글밭만 헤매면서 책으로부터의 ‘영양섭취’에 많이 기대여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 려행에 대해서는 다소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해왔으니까.  그 무덤덤함이란 아마도 목표려행지에 대한 기대나 궁금증 같은 것이 별로 없이 그저 ‘동무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팀을 따라 려행을 다녀오는 관습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알랭드 보통의 《려행의 기술》에 나오는 19세기의 그 고루한 데제생트 같은 심각한 려행기피증은 아니고 다만 려행을 갔다 오더라도 책을 통해서 얼마든지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는 ‘책만능주의’ 오기 같은 것이 장난쳤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유럽의 몇개 나라와 미국을 다녀왔고 돌아와 려행기 비슷한 글도 썼지만 그런 려행들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기보다 려행사에서 보여주는 것만 보고 왔기에 자기만의 느낌과 발견이란  사진 찍기와 함께 거의 증발된 것 같다. 그러니 려행기라고 해봤자 책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정보를 한가득 깔고 될 수 있으면 멋진 말로 포장을 해서 썼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정년퇴직을 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자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기회만 되면 려행에 나섰다. 돌아와서 괜찮은 려행기를 써야겠다는 야무진(?) 꿈까지 한자락 얹어 사진촬영에 록음까지 곁들이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림하니 서서히 려행의 묘미가 느껴졌다. 지난 1년간 사이판에서 사할린에서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제주도와 강원도에서 자연이 하사한 천혜의 모든 것들과 인문적인 아름다움들을 책에서 본 통념적인 시각이 아닌 나의 눈으로 나의 귀로 나의 모든 오감을 총동원하여 받아들이고 느끼려고 하니 비로소 뭔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해외려행의 경우 팀을 따라가게 되면 함께 어울리는 멋은 좋지만 흔히 틀에 박힌 코스에 따라 관광명소를 가기 때문에 이색적이고 대단한 것을 보더라도 큰 울림 같은 것이 적다. 그렇게 대단하니까 우리가 보러 온 게 아닌가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씨야의 유명한 에르미타쥐궁전에서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 그 눈부신 것들이 허세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다.  오히려 관광명소가 아닌 곳에서 우연히 보았던 사소한 것들과 생생한 체험들이 더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도 한다. 로씨야의 네바강 다리 우에서 우연히 만났던 유화 그리던 주름진 얼굴의 할아버지, 저녁 무렵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외롭게 버스킹을 하던 청년, 사할린의 어느 화장실에서 휴지 팔던 짙은 화장에 호피무늬옷을 요란하게 떨쳐입은 녀성, 기차 안에서 열심히 책을 읽던 단아한 모습의 어떤 모녀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로씨야녀인과 귀여운 아기… 이런저런 사연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사는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대화가 가능했더라면 그런 궁금증을 풀 수도 있었을테지만 굳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그 이색적인 옷차림과 말투, 표정 그리고 제스츄어에서 나름대로 상상하며 동질감과 이질감을 찾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복 항공권 값을 다 건진 기분이 든다.  한편 말이 잘 통하는 제주도에서 팀을 따라 바다가를 산책할 때에는 이국적인 느낌은 없지만 스모그의 피해가 없는 푸른 바다와 청정한 공기의 자연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거닐면서 령혼까지 정화되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스케줄 때문에 사진만 몇장 남기고 급급히 떠나야 했던 려행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아마도 그런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던 것일가? 똑같은 코스를 시어머님을 모시고 또다시 밟게 되였다. 로인들이 걷기에 좋은 코스라는 판단에 모시고 갔는데 예상 외로 어머님이 흡족스러워하시니 그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무릎수술 후 그렇게 직접 당신의 다리로 걸어 곳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하시는 것 같다. 나 또한 여유 있게 걸으면서 오롯이 바람소리와 바다냄새에 집중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았고 어머님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면서 천천히 걷는 멋 또한 좋았다.  집에서 하루 삼시 얼굴을 맞대고 사는 고부간이지만 려행지에 오면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별 감흥없이 바라보는 열대식물도 처음 보는 식물이라며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고 즐거워하시는 모습, 숲속의 작은 기차를 타고 곶자왈을 누비면서 소녀처럼 그네를 타기도 하고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환히 웃는 모습이 황홀하여 부지런히 샤타를 누르며 좋은 추억을 많이 쌓도록 배려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내가 짠 려행코스이기에 소소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고 예기치 않은 것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묘미가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역시 “려행은 좋은 것”이였다.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려행을 다니던 어느 날, 공항서점에서 책이 눈에 띄여 집어들었다. 첫페지를 읽어내려가는데 잔잔한 문구들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며 감성을 자극한다. 순간, 독서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온몸에 퍼지며 행복감이 몰려온다.  려행이 끝나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쳐들었을 때 몰려오는 편안함은 또다시 나를 깊숙한 쏘파에, 침대에 붙들어맨다. 붕 떠있던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은둔형인가보다고 개탄을 한다.  하지만 이 때의 나는 원래의 나가 아닐 것이다. 알게 모르게 책에서는 배울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들을 한가득 안고 이 세상을 보다 넓게 그리고 깊게 바라보는 눈을 달고 돌아온, 많이 성장한 나일 것이리라. 그렇게 흡족해있을 즈음에 아우구스티누스의 한마디가 강하게 울린다.  “세상은 한권의 책이다. 려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책의 한페지만을 읽을 뿐이다.”  려행에 갓 어섯눈을 뜨기 시작한 이 ‘책벌레’에겐 직격탄이 아닐 수 없다. 말 그대로 책 한페지에만 머물러서는 책 전체가 주려는 메시지를 제대로 리해할 수 없을 것이 뻔하다. 이제 겨우 열페지 정도 읽었으니 ‘세상’이라는 그 ‘책’을 완독하기 위해서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겠다.  한편 정적인 독서와 동적인 려행, 간접적인 경험과 직접적인 경험으로 내 령혼을 살찌우며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나는 결국 이 세상의 한낱 과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려행을 꿈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일상 자체가 려행이기도 하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올 수 없는 이 세상의 시간 속을 려행하며 어제의 자기와 작별을 고하는 우리는 모두 고독한 나그네가 아니던가.  이 세상에서의 긴긴 려행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기왕이면  려행 잘 다녀왔노라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씩씩하게 말할 수 있는 좀 괜찮은 과객이고 싶다. 오늘도 나는 모든 오감을 열어젖히고 ‘세상’이라는 책과 마주한다. ‘세상’을 읽고 ‘세상’ 속을 거닐며 나만의 ‘려행기’를 쓰고 싶어진다.
1    [작가노트] 부끄러운 고백 댓글:  조회:294  추천:0  2019-07-14
부끄러운 고백 남영도   드디여 수필 3편을 탈고했다.  해탈감과 함께 아쉬움이 남는데 톱에 싣겠다고 창작담까지 보내오라고 한다. “내 글을? 톱에?…”  일순간 멍해진다. 문단의 한 귀퉁이에서 나지막한 톤으로 작은 목소리를 내는 수필가일 뿐인데, 치열한 작가정신이란 운운할 것도 없는, 그저 수필이 좋아서 가끔씩 글을 끄적이는 오십대 아낙일 뿐인데 이렇게 톱에 지면을 할애해주셔서 그지없이 황공한 마음이다.  나에게 수필쓰기는 아직도 넘기 어려운 가파로운 열두고개이다. 투고 마감일까지 머리를 싸쥐고 쩔쩔 매는 꼴이란… 몇년 전, 나의 수필집 《문학의 곁에 음악이 흐를 때》가 출간된 뒤 여러가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이제는 원래의 틀을 깨는 시도를 해보라는 기대의 목소리가 컸다. 그런 비평의 목소리에 주목하며 수필기법 면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려고 애쓰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지난해 모 문학지의 청탁으로 수필 12편을 써내려갈 때도 나름 여러가지 시도를 비치려고 하였으나 글을 쓰다 보면 어느덧 원래의 상투적인 기법 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면 꼭 떠오르는 후배의 한마디가 있었으니, 바로 나에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런 재치가 없다”는 사실이다. 천부적인 재주가 없으니 그저 우직하게 진지함을 꾹꾹 담아 또박또박 써내려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늘 그러하지만 나는 수필을 쓸 때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일기를 쓰는 자세로 림하게 된다. 그래서 고백적이고 그래서 진솔함이 묻어날 것이다. 이번에 쓴 수필 〈치타치타〉에서 나는 시어머님과 다투고 사과하지 않은 속사정을 려과없이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이른바 고상한 척을 하는 나 같은 인테리의 진실한 모습을 발가벗김으로써 은퇴를 하고 보면 인테리든, 팔순 할머니든 다 보통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저 하였다. 작은 시도이지만 쓰고 나니 속까지 다 후련해난다.   그런데 객관적 시각에서 내 문풍을 되살펴보니 나더러 진지함과 경건함을 조금씩 내려놓고 좀더 소탈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한 후배들의 부탁은 오간 데 없고 펜을 들자 가슴은 또다시 뜨거워져 원래의 진지한 모드로 고스란히 돌아와있은 것이다. 못 말리는 벽창호다.  얼마 전 위챗계정의 덕택으로 20여년 전에 쓴 나의 글 〈창에 카텐을 내리우고〉가 재조명을 받게 되였다. 이라는 부제가 붙은 글인데 예상 외로 독자들 반향이 좋았고 나 또한 덕분에 다시 읽으면서 옛날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볼 수 있었다. 30대의 나는 혼자만의 방에 기대여 책을 읽고 음악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서정적 주인공이였는바 글에서는 나름 절제의 미가 풍겼다.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도 변하고 내 문풍도 많이 변해있었다. 30대의 서정적 주인공이 50대의 우아한 사모님으로 변해있었으면 좋으련만 완전 수다쟁이 아줌마로 변해있어서 허구픈 웃음이 나온다. 서정과 랑만과 동경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년륜을 자랑이나 하듯이 온통 추억과 회한과 개탄으로 가득찬 넉두리가 차고 넘친다. 30대의 주인공은 소음과 공해의 도심 속에서도 혼자만의 방을 만들 수 있다고 랑만에 차있는데 50대에 이르러서는 귀청을 째는듯한 웃집의 인테리어 소음에 책을 볼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노라고 마구 토설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아낙으로 변해있었다.  그래도 문우들은 옛날보다 많이 넉넉해지고 구수해졌다고 듣기 좋은 평을 해주지만 이제는 틀을 깨는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시점에 와있음을 나 자신이 잘 안다.  그러한 시도로 세번째 수필 〈독서와 려행이라는 듀엣〉을 쓰게 되였다. 맨처음 제목을 ‘이중주’라고 달았다가 더 포괄적인 의미의 ‘듀엣’이라는 단어를 골라보았다. 요즘 류행하는 말로 “독서와 려행, 육체와 령혼 중 하나는 반드시 길 우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독서와 려행은 인간의 삶에 있어 쌍둥이자매, 려행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책벌레’의 시각에서 설파하고저 하였다. 또한 려행지에서의 자기만의 느낌과 발견을 오롯이 담은 려행기를 써보고 싶은 희망사항을 술회하였다.  요즘 우리는 눈만 뜨면 도처에 글들이 란무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다. 자칭 ‘활자’중독이라고 하지만 이제 란무하는 모든 글들을 다 읽어낼 수 없는 이른바 ‘글의 전성시대’에 문학의 효용성 내지는 가치라는 것에 대해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에 마침 조선족‘60후’작가작품연구토론회가 있어 중국현대문학관에 다녀오게 되였다. 고난과 고통이 점철되여있는 삶 속에서 오로지 문학이라는 한 우물만 파면서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배출해낸 그들, ‘60후’ 대표적 작가들에 대한 탄복과 함께 존경심이 인다. 같은 년배이지만 치열한 작가정신을 운운할 수조차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보면서 글쓰기에 림하는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재미있고 쉽게 읽혀지는 감동적인 글들은 사실 작가의 깊은 고뇌의 산물이다. 천부적인 재질이 없다면 노력으로 승부할 일이다.  말끝마다 ‘책벌레’라고 하지만 내 독서량의 빈약함을 수시로 느낀다. 쉽게, 함부로 펜을 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만의 방에 기대여 고독을 즐기며 책을 탐독하고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글로 독자들과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 출처:2018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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