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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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잡담143] 영화<황해> 로부터 보여지는 동북인 댓글:  조회:2823  추천:44  2011-05-25
   영화 <<황해>>를 보면서 해남도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여럿이 모인 식사중에  나는 공항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나는 택시를 리용하려고 하였는데 자리에 모인 동북인들중에서 나보다는 몇살 어릴 친구가 꼭  자가용으로 나를 공항으로 데려다준다고 하였다.그는 동북인들의 호기가 넘치도록 <<한고향 사람이 왔는데, 친구가 왔는데.>>를 곱씹었다.첫만남이였지만 직성적이였고 극성적이였다. 근데 그 친구가 몰고 나 오는 차가 <<아우디>>찦차여서 나는 좋았고 또 운전하는 그 친구의 팔뚝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오른팔뚝 왼팔뚝에도 칼자욱들이 질벅하였다! 그래서 나는 부동산업까지를 운영한다는 그 친구는 <<싸움대장>> 이였을거라는 판단을 했다.그의 고향이 백산림장이라니 그 친구는 장백산맥 북쪽에서 살았고 나는 장백산맥 남쪽에서 살았다는 말이 된다.그것을 턱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그 친구가 해남도에서 살아온 궤적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였다.빈 주먹으로 해남도에 와서 주먹질도 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돈 벌고…     개혁개방이래 동북3성은 힘들게 살아오는 지역임은 틀림이 없다.산업이전중에서 동북3성 민초들은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수많은 기업소들이 문닫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위 <<하강>>하고.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관내로 밀려들고,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형사범죄 또는 그러한 내용에 말려드는 업종에 종사하고. 그래서 주강삼각지에서는 <<동북호랑이>>이라는 말에 거의 사람들마다가 허깨비를 만난 얼굴을 해보이고…                   개혁개방 이래 동북인들이 형사범죄를 얼마만큼 송출하였는지는 몰라도, 또 동북의 형사범죄률이 얼마나 높은지는 잘 모르지만, 동북인들은 중국에 동북인은 폭력경향이 크다는 인상을 남긴것은 사실이다. 동북인들의 폭력경향성 바닥에는 동북3성 경제 사회 력사 등 여러가지 배경이 복잡하게 작동한다. 춥고 수확이 적은 생존환경, 이주민사,문화전승…     조선족들도 동북에서 살아왔다.그러한 동북3성의사회 경제 력사 등 배경을 공유한다.그런것들에 물젖어왔다.그래서 한국인들 눈에도 <<폭력적>>으로 보이는건가? 조금 복잡한 문제이다.     동북으로 나가면 연변의 택시기사들은 입이 더럽고 승객들에게도 폭력적인 경향성을 내보이고 있는것은 나에게 인상이 깊었다.    영화 <<황해>> 제작진은 중국 동북3성의 이러저런한 일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가? 연변의 밑바닥 생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가?        근데 중국사람들은 <<황해>>를 警匪오락片으로 보아주는 사람도 있다.   
28    [잡담142] 뚱뚱보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의 가난의 근원 댓글:  조회:2724  추천:32  2011-05-23
   소학교 몇학년을 다닐때던가? 촌마을 조무래기들이 만나면 서로 배를 쭉우욱 내밀면서 <<호한삼이 돌아왔다!>>고 지껄이기를 즐긴적이 있다.영화 <<반짝이는 붉은 별>>에서 지주악당인 호한삼이 총을 들고 반동자라는 아이에게 내뱉던 한마디이였던가? 아무튼 나도 <<호한삼이 돌아왔다!>>을 흉내낸 적이 있다.   어제밤.나는 어느 친구와 내가 어릴적에 구경한 최고급 뚱뚱보는 영화에서 나오는 호한삼이였고 실생활에서는 뚱뚱보 남자를 만난적은 없다는 한담을 해주었다.나는 왜서 어릴적에 촌마을에서 뚱뚱보 남자 하나를 구경도 못했을가? 영화에서 나오는 호한삼에게 뚱뚱보라는 연변사투리의 의미를 리해하여야만 하였을가? 수백명을 초과하여 거의 천명을 이룰 촌마을에서 뚱뚱보 남자 하나를 구경도 못해본 유감스러운 동년을 보내야 하였을가? 그 세월에는 촌마을 어른들도 애들도 거의가 말라꽹이뿐이였을가?     20세기 70년대 연변의 촌마을은 가난하였다. 농사군들이였는데도 흉년도 아니였는데도 잡곡도 배불리 먹지못하게 가난하였다. 그 때문에 나는 동년시절에 촌마을에서 뚱뚱보 남자 하나를 구경도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아야만 하였다.     20세기 60-80년대 연변 시골만 아니라 중국 민초들은 모두가 가난하였다.그 가난의 원인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보고싶다.내가 배운 교과서에는 우리는 과거에 생산력이 락후하고 생산력발전에 적응된 생산관계를 해방하지 못하였으므로 가난하였다고만 적혀있다.물론 생산력이 락후하여 가난하였다는 말에 수긍이 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생산관계의 부실성에 대하여서는 교과서에 적혀있지않는것들에 스스로의 생각을 해보게 된다.      생산관계를 이루는 3요소중에서 분배방법은 중요하다고 하는데 과거에 연변을 비롯한 촌마을에서는 어떠한 분배방법을 하여왔을가? 듣는 말에 의하면 구사회에서 악독한 지주들이 소작농들과 땅세를 소작에서의 50%-70% 받어가고 나라에서 또 인두세를 포함해서 조세라는것과 부역세라는것과 여러가지를 받어가서 농민계급들은 착취당하였고 째지게 가난하였고 그래서 농민봉기가 있었고 또 송강이라는 농민봉기<<투항파>>까지 있었다는데…. 나의 동년시절에 지주도 없었고 인두세도 없었고 부역세도 없었는데 왜서 촌마을은 가난하기만 하였을가? 복잡한 문제여서 대답이 잘 안나온다. 그러나 나는 매년 가을마다 촌마을 탈곡장으로부터 <<糧站>>으로 이전되던<<공량>> 이라는것을 생각해본다.<<공량>>을 싣고 가던 줄지은 달구지들의 삐꺽거리던 소리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땅세든지 조세든지 인두세든지 또 <<공량>>이든지 사실적인 결과는 마찬지이다.어떠한 언어학적인 리론적인 해석을 해주어도 농사군들에게 있어서는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배고픈 가난!그리고 뚱뚱보 남자마저도 구경못하는 동년시절!     중국 민초들의 가난은 수천년을 지속하여왔다.지금도 중국민초들은 상대적인 가난을 누리고 있다.그 가난의 밑바닥에는 체재문화가 가져오는 음영이 깔리여있다.개혁개방 이래 국가경제는 훌쩍훌쩍 뛰여넘기 장끼를 내보이는 발전을 가져왔지만 국가소득과 비교하면 민초들의 소득은 훌쩍훌쩍 뛰여넘기를 표현한적은 크게 없다. 기것해야 조본산이 말한것처럼 <<시골 내려가면 돼지고기를 먹을수 있고 밥을 먹을수 있고>>정도의 변화상이나 가져왔다.수많은 시골사람들과 후진지역의 민초들은 아직도 사실적인 한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중앙집권에 안받침되는 치국사상은 집체와 나라의 리익을 위해서는 개체생명의 리익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나라의 리익을 위해서는 부분지역의 리익을 희생시켜도 괜찮게 합리하다는 사상이다.이 치국사상은 유가의 옷을 차려입고 법가의 지팽이를 짚고 수천년을 행패질하여왔다.중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부분적인 나라에서 동남아에서도…. 이러한 중앙집권에 안받침되는 치국사상에 대하여 나는 질의를 품고 있다.대다수를 위하여 소수를 희생시켜도 된다는,그것도 마음대로 희생시켜도 된다는 말들에 대하여 의문부호를 달아보고 싶다.    이 세상에는 만백성이 부강하여 나라가 부강한 이야기와 나라는 적잖지만 나라가 부강하여 만백성이 부유한 이야기는 찾아보기가 힘들다.구쏘련이 막강한 국력을 키운적은 있었지만 민초들의 삶은 찌들어졌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민초들의 소작이,말하자면 로동성과가 과대하게 집중되면 그 분배권을 행사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배만을 채우기에 열중하고 민초들의 로동성과를 집대성시킨 국력을 은총를 베풀듯이 민초들에게 약간 나누어주면서 그 과정에 부정부패가 성행하고…     텔레비에는 싱가포르 이광요가 정치무대에서 사라진다는 뉴스가 나온다. 미국경제위기뒤에도 좋은 경제성장을 보이는 나라인데, 아세아의 <<갑부구락부>>에 들어있지만은 국민경제성장과 비교하면 싱가포르 민초들의 삶은 고달프다는 …, 그래서 리광요의 무슨 정당이 의회선거에서 조금 참패하였다는 등등…     운이 좋게도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다가 어지러운 글을 갈겨본다. 그리고 중국 근대의 저명한 학자 엄복은 <<나라가 부강한 뒤에 만백성을 잘 살게 만들어주려는 길보다도 만백성이 잘 산 다음에 나라가 스스로 자연스럽게 부강해지는 길이 좋다?>>라는 내용의 언론을 하였다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27    [잡담127] 내가 구경한 <봉황열반> 댓글:  조회:2886  추천:48  2010-07-13
잡담127 내가 구경한 <봉황열반> 허동식  금방 중학교를 들락날락하는척 하던 때, 어느 봄날 학교 가기가 너무 싫어서 친구 몇이서 책가방을 학교 가는 길 풀숲에 묻어두고 외진 한족마을 행차를 하였다. 확실한 목적은 없고, 한족마을 동네에 있는 큰 나무 정상에 있는 까치둥지인지 까마귀둥지인지를 둘추어서 새알 몇개라도 사냥해보자는 어느 친구의 제안에 모두들 동의한것이다. 큰 나무 아래에 이르자, 나무에 잘 기여오르는 친구가 거의 20메터 이상인 백양나무를 기여오르고 나머지는 나무아래에서 학수고대의 멋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고공에서 흘러내리는 말이 < 에씨, 개불알도 없다!>였다. 나무에 잘 기여오르는 친구는 새알 사냥의 맹랑함의 분풀이를 하려고 그랬는지, <에씨, 다 태워버릴테다>를 부르짖으며 호주머니에 지닌 성냥개비로 새둥지에 불을 지펴놓고 나무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높은 백양나무를 절반쯤 내리여서부터는 <에씨, 따가워라 에따, 따가워라>라는 아우성을 련속 내질렀다. 새가 하나하나 물어다가 둥지를 구축한 나무가지는 불이 달리자 원래의 응집상태가 회손되면서 그것들이 아래로 마구 하락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 불똥과 불이 달린 바싹 마른 나무가지들이 떨어지면서 나무를 내리는 중의 친구의 몸속으로  침입한것이였고 나무를 내리는 중에 어쩌할수가 없는 친구는 그래서 <따까워라>를 울부짖은것이였다. 나무아래서 학수고대의 배역을 하던 우리 몇은 참지못하고 그것이 재미있다고 까르르 웃어주었다. 근데 그 환락을 거퍼 몇초도 향유하지 못하고 새둥지로부터 하락되는 불씨가 나무아래 바싹 마른 풀숲에 작은 산불을 지펴놓는 바람에, 우리는 너도나도 학수고대의 자세를 버리고 산불잡이를 하느라고 땀을 풀썩풀썩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나무를 내려온 방화범도 저의 목과 잔등에  생겨난 화상을 검사하지도 못하고  우리와 같이 봄날의 큰 산불로 변해버릴듯한 산불잡이를 하느라고 헉헉 헉헉 신고를 하였다.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깐다>는 이야기는 조금 알고 있었지만도, 우리 몇은 깊고깊은 반성커녕, 새알 사냥에서 당한 맹랑함과 산불잡이에서 당한 울분을 어디에 쏟아보고싶었다. 상론끝에, 한족마을은 조선족마을과 달라 거위를 키우는 집이 있는데 닭고기는 먹어보았지만 거위고기는 먹어보지못한 우리 신세가 얼마나 가엽나! 한마리 잡아다가 해란강가에 가서 구워먹으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고 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에서 나오는 일본군인들이 시골마을로 들어가는 행색을 훙내보이면서 한족마을길을 두리번두리번 하였다. 마침 울바자 아래를 뚱기적거리는 흰 거위 한마리가 보였고 한족마을은 텅 빈여있는듯 하였으므로 누군가 거위의 길고 날씬한 <미인목>을 잡아쥐려는데, 맙시사 누가 거위가 그렇게 흉악스러울줄을 알았을가? 흰 거위가 날개를 퍼득거리고 꽥꽥 소리를 내지르며 길고 날씬한 <미인목>을 거의 땅바닥에 내리드리우며 우리들에게 달려드는것이 아닌가! 겁쟁이 우리들은 잔인한 거위의 기세에 눌리여 뒤걸을 하였고 나중에는 한족마을 개들도 꽁무니를 쫓는 통에 그만 줄행랑을 하고 말았다. 한족마을을 나오자, 친구 하나가 우리에게 털어놓기를 <야, 우리 마다배 그러든데 , 게사니두 집을 잘 지킨다구!>     고중에 들어가서 곽말약의 <봉황열반>을 배우는척 할 때에는 방화범 친구야말로 <봉황>이 될번했다는  중학교 때 우리들 몇이 깜찍하였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가끔은 컴퓨터를 마주하여 전자게임을 하면서 <소고기는 출산지는 랭장고요, 고추의 출산지도 랭장고요>를 되뇌인다는 요즘의 애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여본다. 그런데 이 놈들은 우리를 불쌍하다고 생각해줄가? 어리석다고 생각해줄가?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중화계 력사학자 黄仁宇선생은 <<黄河青山>>에서 大历史观이라는 주장을 펴내였다고 한다. 황인우선생의 대력사관이란 거시적인 력사안목으로 력사를 생각하고 력사의 纵横总体를 출발점으로  구체적인 력사사건을 다루는 력사연구법이다. 황인우선생의 대력사관은 진시황의 개인적품덕이 여차여차게 <<분서갱유>>를 만들었다거나 무측천이 여차여차게 음란하였다는 등등의 놀이식 력사연구법을 멀리 떠난 엄숙하고 랭정한 력사시각으로서 력사를 평함에 있어서 <<반드시 자신의 이델레오기와 정감에만 근거하는 도덕적인 무단적인 시비평판을 하지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력사에 도덕적인 해석을 가첨하는것은 력사의 시공배경을 무시하는 어리석고 불합당한 일이기 때문이며 ,중국력사를 두고 말할라면 150년 또는 더 긴 시간을 하나의 력사單位로 취급한다면  중국 력사사건들의 내재적인 바탕의 진실과 흐름을 잘 알수 있다>>는 력사연구법이며 력사관이라고 한다 . 과거에 우리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만을 줄거리로 하는 력사책에서 일반적으로 사회모순의 집중적인 극단적인 폭팔분출을 농민봉기 또는 민란이라고 말하여왔다. 그러면서 관방과 민간의 모순을 들추어내면 그 모든것을 계급모순과 착취계급의 무진한 탐욕과 비인간성에만 귀결하고 관방과 민간사회의 모순의 내재성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많이도 적었다. 근년에 중국에도 많은 사람들은 중국력사를 보는 독점적시각인 상술한 전통설에서 많이 리탈되고 있다. 그래서 중국대륙적인 대력사관도 출현되고 있다. 費孝通선생은 중국의 끈질긴 중앙집권문화에 집성에 대하여 그 근본원인을 중국이라는 특수한 생존단원(북은 초원문화와 대결하고 서와 남은 지세병풍에 막히고 동은 바다로 하여 세상과 격리된)으로부터 줄거리를 찾아보았고 어느 력사학자는 중세기 중국 북방의 농민봉기는 지주와 소작농들 사이이 발생하는 계급모순이 아닌 관방과 자작농들 사이에 장기적으로 내재하였던 모순의 발로였다는 관점을 펴내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중국력사에는 맑스주의 주장과는 직접적인 관련도 없이 중국식 바탕이 존재할수도 있는것이 아닐가? 맑스도 아시아생산방식이라는 말을 꺼낸적이 있듯이 중국력사는 중국특유의 바탕이 존재하여온것이 아닐가? 만일 그것이 성립된다면 중국력사는 물론이고 중국의 현실도 중국이라는 생존단원과 주위환경변화를 떠나서는 운운할수가 없으며 중국의 력사적인 문화적인 바탕을 떨쳐버릴수가 없는것이다.과거에 지성력사학은 맑스가 배렬해놓은 력사발전단계표에 어긋나 유심적인 기계적인 력사관이라고 비평을 받았고 중국력사의 독특한 바탕으로 보여지는 중국력사속의 관방과 민간의 모순점에 대한 연구는 너무도 적었음은 유감스러운 사실이다, 오늘을 살면서도 우리는 중국력사문화의 중국식 바탕을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북방초원민족의 쇠잔뒤에 륭기된 쏘련과 형제를 맺었다가 아웅다웅하였던 일, 절대적인 중앙집권에 의한 금해쇄국책이 성했던 명청시대 등등은 모두가 중국력사의 지성학적인 력사문화적인 중국식 바탕에 대한 반복적인 기록이 아닐가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중국의 현실까지 련속되는 관방과 민간의 모순점에 대하여서도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개혁개방이래 개체호로 시작된 중국경제의 민간경제는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몇해전부터는 또다시 <<국진민퇴>>의 길을 걸어왔다. 말하자면 중국의 사회물질재부 축적은 어느 정도로 급속상승선을 그어왔지만 국가소속 물질재부의 엄청난  증가에 비하면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의거하는 민간소속 물질재부축적은 국가소속 물질재부축적 상승선에 同步성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다는것이다. 분배학적으로 <<국가것이자 국민의 것이다>>는 말은 리론적인 성립은 된다. 그러나 국가것이 국민의 것으로 전변되는 과정에 중국은 수많은 有機적인 체재적인 비리와 불공정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부 <<재간있는 부류>>가 국가물질재부를 개인호주머니에 꽁꽁 챙기고 있는 중국식 부정태풍은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사법기관도 아직도 그것을 크게 이겨낼 겨를과 조건을 구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사회물질재부의 분배만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여러가지 소유체 사이에 실존하는 공평성부족점에서도 관방과 민간의 모순이라는 중국력사문화의 관성적인 바탕과 약점이 잘도 로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중국은 소위 국계민생에 관련되는 고리윤액경제는 국영에서만 운영하는 전통을 아직 철저하게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미국금융위기를 발탁점으로 하는 국제경제위기속에서 국영업이 싫어하는 분야 또는 국영업의 부속물로만 생존하여온 민간업은 융자 우혜책 등등의 제한을 크게 받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고난의 년대>>를 힘들게 지탱하고 있음은 이번 2회의 위원들과 대표들의 조언속에서도 많이 튕겨아왔다. 여러가지 소유제의 화합성을 부르짖기는 하지만 국영업을 제외하고는 사인업이든지 집체업이든지 약소세력으로 존재함은 큰 화근이 아닐수가 없다. 또 <<체면을 세우고 보여주어야 할>> 국계민생만을 독점운영하는 중앙소속기업들이 2회가 금방 끝난 오늘날에도 감히 국무원 부동산책까지를 엇서면서서 땅부자로 되려는 <<울치기 운동>>에 전력하고 있으며 <지왕> 선출에 열중하는 뉴스가 통보되는것을 보면 나는 중국 국영업의 물질재부획득 비정당성과 비합리성을 크게 의심하지 않을수가 없다. 사회물질재부와 물질재부창조가 거의 대부분이 국가와 국영업에만 집약되고 민생취업에서는 큰 몫을 담당하던 민간업이 중국 국민경제불공평성의 희생품으로 되여있다는것은 중국의 중앙집권문화를 받들어주는 경제문화로서 민주로 나아가는 길에서의 제일 큰 걸림돌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경제기회의 균등화는 관방과 민간의 모순을 완하시키는 령단묘약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경제기회 불균등으로서 관방과 민간의 모순을 가열화시키는것이 안닐가고 근심을 하여본다. (1989년 북경천안문사건의 시작에 개체호들도 아주 열성적이였고 관도를 때려부시자고 울부짖은것도 사실 경제기회 불균등화 비합리성을 반대한것으로 생각하여왔다)  중산층을 재배하고 물질문화전승에 있어서 인도적이고 화합적인 목표를 이루려면 또 중국을 진정한 강대국가로 만들려면 경제운행의 바탕이 력사의 관성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물질재부가 인성에 걸맞는 정상적인 운행과 축적을 이루지 못하면 어느 나라이든지 학비를 내지않을수가 없다.  2차대전시기에 국가사회주의라는 명목과 수단으로 물질재부를 대거집중하였던  파쑈독일이라든가 사회재부1체화로 앞장서서 공산주의로 들어간다던 구쏘련이 하루아침사이에 무너지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러한 력사사실에는 사회물질재부창조와 분배와 점유의 비정상성 그리고 경제기회의 극단적인 불군형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가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25    잡담117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 댓글:  조회:2483  추천:42  2010-03-02
1   1978년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은 주강삼각지와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장강삼각지를 수선발전지로 강요하는 발전책을 실행하여 왔다. 그것은 <<부분적인 사람과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국책중의 <<부분적인 사람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개별지역을 중점지역으로 발선하는  수선발전책으로서 全面식이 아닌 點線식 발전모식이다. 수십년 세월이 지나간 오늘날의 시각으로부터 되돌아보면, 점선식발전책은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나타난 지역경제발전불균형이라는 사회문제가 형성된 원인의 하나로 보여진다. 어떠한 발전책에도 플라스면이 있으면 마이너스면이 동반된다.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발전책은 集權식 국가운영의 산물로서 중앙집권경제발전모식 또는 국가자본주의 변형형태이며 중국경제의 재빠른 성장을 비롯한 여러가지 성취를 따내는 동시에 지역경제발전불균형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문제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부인할수가 외면할수가 없다.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발전책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아직은 量化적인 계산이 확실하게 발포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명제아래에서의 공산주의식국가경제학설과 그 실천 그리고 변종된 凯恩斯主义학설과 그 실천도 만능이 아님을 다소 감안할수가 있다.  목하, 해마다 국민생산액을 둘러싸고 배렬되는 소위 경제大省 납세大省 등 현상들을 살펴보면 그 배후에는 경제후진지역의 고달픔과 무가내가 실존하고 있으며 경제발전지역의 오만무지도 선명하게 보여진다. 주강삼각지도 장강삼각지도 개혁개방중에 중앙집권을 경유한 전중국의 국책지원과 기술지원 인재지원 재정지원 등등이 그들의 오늘날을 만들어주었음이 사실인데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운운하는 사람과 언론이 아주 적음은 공평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또 오늘날에 있어서 경제후진지역이 경제발전지역을 바라보는 눈길과 심리상태에 음영이 짙게 끼여있다는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지역간의 경제발전불균등이 대폭적인 기복을 이룬다면 그것은 부동한 지역간의 광범하고도 내재적인 사회모순을 가져올수도 있는것이다. 2 중국의 어느 경제후진지역도 지역성적인 곤혹을 앓고 있음은 목하 중국의 사회현상이다. 과거에 중국의 조선족이 삶을 집중적으로 영위하던 <<산좋고 물맑은>> 연변도 현재 지역성적인 곤혹을 앓고 있다. 그 지역성적인 곤혹은 우선은 연변의 경제발전 후진성과 침체성에서 기인되고 있으며 경제발전저수준이 가져다주는 사회발전저수준과 밀접히 관련된다. 개혁개방뒤, 경제발전지역과 비교하면 중국1위의 중공업기지였던 동북3성의 고물식중공업(일제시대 생산설비와 건국초기 구쏘련으로부터 도입한 생산설비 생산기술 경제관리를 특성으로 함)과 자원의존성경제(특히는 광산과 삼림자원에 의존함)가 점선식발전책으로부터 리탈되면서부터 동북공상업경제는 정체적으로 침체/하강/엉망이라는 길을 걸어왔다는 평판이 된다. 동북3성의 전통적인 공업경제의 침체/하강/엉망은 끝내는 직접적으로 연변의 전통적인 공업경제의 도산을 초래하였다. 말하자면 동북3성 전통적인 공업경제의 미소한 일부분으로서 低下적인 부품이나 만들어내던 연변의 <<망치공업>>과 규모운영을 론할수가 없었던 경공업, 모주석기념당을 지을때 홍송 백송을 얼마를 보낸다고 자랑하던 림업경제와 중약재재배업은 경제생산액이 보잘것없는 수준으로 하강되였고 연변의 국민경제가 중국국민경제로부터 크게 邊緣화되여 있다.      구식경제가 현대식신형경제로 전환하는데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수된다. 소위 경제학에서 운운하는 자본 기술 시장 지리우세 등등이다. 그러나 연변은 국가발전책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조우중에 그 어떤 유리한 조건도 구비하지를 못하여 왔다. 다만 민간자본의 상대적인 륭기가 상대적인 지역우세로 보여지였을뿐이였다. 연변의 민간자본의 상대적인 륭기란 바로 로무수출수입으로 구축된 민간자본이다. 연변은 사실 지금도 중국에서도 주목을 받는 로무수출 집중지역이다. 그러나 인균액으로는 엄청난 외화벌이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아직도 연변경제발전에 자본촉매제로는 활용되지 못하고 있으며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 로무수출수입으로 표현되는 연변의 민간자본 상대적인 륭기가 연변지역경제의 경제산맥을 이루지못하는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연변의 민간자본이 산업자원으로 전환되지 못하는데는  주요하게는 연변의 로무수출수입이 인균액은 크지만 그 총용량은 현대식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있고 결구적으로는 분산성이 강한 특점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여러가지 기성조건의 결핍과 민간자본운영저수준은 연변경제의 변연화를 개변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3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은 또 지역문화결구의 급변에 있다.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연변의 명함장은 <<조선족>>이다. 그런데 <<조선족>>을 둘러싼 연변의 지역문화결구는 엄중한 위기속에서 날마다 해체되고 있다. 연변의 조선족인구의 감소와 조선족문화영향력의 감소는 지역문화의 내용과 이미지의 급변을 가져오고 있으며 그것은 조선족은 물론 연변을 사는 여러 민족들에게도 큰 손실이 아닐수가 없다. 연변의 국민경제가 변연화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에서의 합당한 定位를 구축하려면 <<조선족>>은 사실 무형자본으로 일급수단으로 사용되여야 한다. <<문화가 대를 쌓고 경제가 주역을 감당한다>>는 말은 사실 때가 지난 말이기는 하지만 연변을 상대하였을 때에는 깊은 참고가치가 있다.   4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을 이루는 연변경제후진성은 언제이면 개변상을 보일것인가? 연변지역경제의 후진성 원인은 연변의 민간자본이 지닌 자아특성외에도 또 동북아지역의 불안정성과 국제정치의 불안정성에 따르는 연변경제결구의 취약성에서도 보여진다.  20세기로부터 21세기까지 연속되는 동북아지역의 불안정성은 주류자본의 연변입주를 방해하고 있으며 연변경제더러 수익주기가 짧은 경제분야에만 매달리게 하는 경제결구를 생성하게 하고있다. 이러한 배경은 연변의 분산된 민간자본이 산업재생산에 계획적으로 과학적으로 투입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가열화시키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연변의 민간자본랑비와 기형적과대적소비경제라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본의 특성으로 볼 때, 투입구를 찾지못하면 자본랑비는 자연히 직접적인 경제곤혹을 가져오게 된다.         목하 중국은 민생사회라는 슬로건외에도 지역경제발전불균형증을 대치하려는 지역경제발전균형을 구상하고 있는중이다. 일부 언론체의 보도에 의하면 2010년부터 중국은 대만해협경제구역과 발해만경제구역 그리고 신강구역을 대표로 하는 변강경제발전규획 그리고 그 규획실천으로이 백열화될것이라고 하며 두만강경제개발구역도 과거의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발전책이 가져온 마이너스면과 지역경제발전불균형을 타파하려는 국책의 돌파구로 될것이라고 한다. 연변은 두만강경제개발구역에 속한다. 한다면 2010년부터 연변도 락후한 <<구석경제>>의 딱지를 떼여버리는 스다트를 내보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연변이 새로운 형세하에서 훈풍을 타고 지역성적인 경제곤혹과 문화곤혹을 이겨내는데는 관료주의를 멀리하는 정부와  정진을 거듭하는 연변인들의 노력이 바람직한 일이다.
24    7월 명동에 다녀왔습니다 댓글:  조회:2550  추천:32  2009-07-27
7월 명동에 다녀왔습니다   비암산을 내리면서 친구는 어디에 가고싶은가 물었다. 명동에 가보고싶다니 승용차는 륙도하 언덕 콩크리트 길을 나는듯이 달린다. 차창밖에 산야가 검푸르고 륙도하는 보이지 않는다. 강우량이 옛적보다 많이 줄어들었을가 아니면 식피회손때문에 강물이 줄어들었을가? 아주 어릴적 룡정에 오면 어느 다리 아래로 종이공장 누우런 거품이 섞인  강이 보이던데 기억에는 그 강을 륙도하로 알고 있는데, 몇칠전에도 로모께서는 어릴적 명동촌에 살적에 큰 물이 나져 집 7채가 물에 밀려나가던 기억을 이야기하시던데 하고 생각을 굴리는 사이에 길가에 옛적이는 명동촌으로 불리웠다는 신화촌이라는 표식이 보인다. 내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느 산마루에 묻혀있는 동네이고 돌아가신 부친의 청소년시절이 잠적하고 있으며 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고향이여서 로모 그리고 외삼촌 이모들의 동년을 희미하게 받아본다. 욕심으로는 주차시키고 조금 둘러보고싶기는 하였지만 체면때문에 차는 어느새 선바위 앞에 이른다. 선바위를 중국말로 어떻게 표현할가 상론하니 达砬子라고 한다. 하지만 달라재라는 말과 선바위란 어원적으로 너무나도 거리가 있고 또 이 지역에 만주족어가 풍기는 지명이 없으므로 이 골연은 내 조상들이 도강해서의 정착하기전에든 무인지대가 아니였을가는 생각을 해본다.   명동에 이르러 남산 산발이 아주 굳었고 그 기세가 연연하게 솟구치여있음을  바라보면서 어딘가 즐거워진다. 저 남산이 책에서 나오는 오랑캐령일가? 어이 저 남산 산기세가 대단하구만 , 풍수는 모르지만 그 즐거움을 나누고싶어 친구들에게 한마디하고 김약연선생의 기념비를 잠간 우러르고 전시실에서 사진들을 쳐다본다. 작은 책매대에는 윤동주시인의 <서시> 원판이 사진으로 복사되여있어 들여다보면서 윤동주시인이 살던 시대의 조상들 심성을 다시 들여다보는 흉내를 해본다. 참으로 마음이 깨끗했어 그리고 바라봄이 순직했어, 박애가 듬뿍한 종교가 성행하였던 시기여서 신앙심이 작간도 하였고 또 고유의 민족적인 심리바탕도 순결하였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판단을 해보면서 복원된 윤동주생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진에서 조금 보아오던 팔간집인던 마루에는 20여명의 한국인들이 도시락식사가 한창이다. 헌데 안경을 끼신 분이 함께 식사하자고 하시면서 대구 어느 대학 교수이고 목사라고 하신다. 그래서 잠간 강의도 받고 민족독립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로 이루어진 단체인데 청산리는 이미 가보시구 래일은 봉오동으로 가신다 한다. 부럽기만 하여 흠모의 이야도 하고 또 김좌진장군과 홍범도장군의 반일무장과 김약연선생의 간도국민회 연관성에 대해 문의도 해보는중에 운 좋게도 나젊은 한분이 윤동주시인의 <하늘 바람 그리고 별>을 선사하신다. 윤동주시인의 시집은 몇권 소장하고 있지만 거의 전집식으로 되여있는 초책자는 처음이라 참으로 즐거웠다. 좋은 려행을 축복하고 나중에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이 골연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중국조선족의 발상지요 그리고 이주 초창기의 경제중심일수도 있소 아는것은 없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자꾸만 지껄이고만 싶었다. 그러다가 15만탈치사건 다리 부근에서 촌락으로 들어가 주덕해생가를 보여준다 한다. 맹랑하게 정문에 자물쇠가 잠겨있기는 하였지만 주덕해생가앞에서 남산을 오래오래 쳐다보면서 이 골연은 참으로 대장연의 정기가 응집된 곳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책을 뒤져보면 이 지역은 선조들의  개명된 문화사상터였는데 행동지였는데 하고 친구들에게 다시 지껄인다.     룡정에 도착하니 그날 술은 참으로 맛있다.     저녁에 연길로 들어오니 로모는 고향에 아주 가보고싶으신지 홀로 명신촌과 명동으로 다녀왔다고 크게 나무람하시다가 선바위가 아직 건재하든가 물으신다. 예 , 선바위는 아직도 깍아지르게 푸름푸름하게 있습더구마 고 나느 답을 하였다.      
23    철학자인 九葉파시인 鄭敏(역고) 댓글:  조회:2796  추천:61  2009-03-11
잡담93               邱景華 九葉파는 40년대 항전시에 서남련합대학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중국신시> 잡지에 현대파 시작을 발표하던 시인군으로서 대표시인들인 辛笛、穆旦、郑敏、杜运燮、陈敬容、杭约赫、唐祈、唐湜、袁可嘉 등 9명의 작품집이 1981년에 <구엽집>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됨으로 하여 구엽파로 이름지어진다 구엽파는 중국의 당대문학사에서 홀시할수없는 존재이며 그 작품집 <구엽집>은 경전시집이라고도 인정되기도 한다.      구엽파 시인중에 현재 홀로 생전인 정민 녀류시인은 1920생 福建성 闽侯태생으로서 1943年 西南联大 哲学系를 졸업하고   1948년<시집:1942—1947>을 출간하였고 1952年 미국 布朗大学研究院의 영국문학석를 졸업, 귀국뒤 中国社会科学院文学研 究所와 北京师范大学 교수로 재직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정민은 서남련대 학창시절에 중국 유명교수들인 冯友兰의 인생철학, 汤用彤의 魏晋玄学 郑昕의 康德철학 冯文潜의 서양철학사 冯至의 괴테 闻一多의 초사 등을 강의받았고 특별히 冯至와 里尔克의 영향을 받아 철학사상을 기반으로 인문정서를 經緯로 <지혜의 시>를 창작했으며 만년에는 실존주의 철학가 海德格尔의  명언인 < 시와 철학은 이웃이다>를 고취하였다.     항전시기 정민은 철학명상과 현실적인 민족재난사이의 모순속에서 허덕이면서 철학적인 지혜야말로 시인더러 고난중에서 생존격정을 불러일으키는 법보라고 인정하였다. 전통적으로 정서와 상상으로 시문을 엮는 중국시풍속에서 철학적인 명상을 누린 정민은 독특한 존재가 아닐수가 없었다.철학을 학문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정민은 < 철학은 민족과 인류의 발걸음, 그리고 생존을 관심하게 한다>고 말했으며 철학적인 사유와 방법으로 민족困境과 인류곤경을 해명하고 탈출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건국초기 미국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정민은 리상주의자였다. 하지만 58년도 우파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쳐 정민은 리상주의를 의심하게 되였으며 후현대주의인 解構주의를 리해하면서부터 고전리상주든 현대리상주의이든 모두가 종극에는 피비린 력사를 만들어내며 < 인류는 다원문화의 공생중에서 寬容적인 합리적인 경쟁을 해야만이 ,리상세계에로의 최대접근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0세기 80-90년대,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이 解構주의에 대하여 오독을 진행하고 解構주의가 전통문화를 반대하는 신식무기로 등장할 무렵,정민이 혜안적인 지혜로 해구주의란 2차대전뒤 냉전시대의 권위주의와 二元주의에 대한 명상이고 비판이라는 판단을 얻은것은 남다른 지혜와 발견이 아닐수가 없었다. 정민이 만년에 < 결구-해구의 시각: 언어 문화 평론> < 시와 철학은 이웃이다> 는 저작을 내놓아  중국 당대의 사회문화에 존재하는 고질병에 대하여 철학적인 진단을 진행하였다. 정민의 경력과 철학적인 사색으로부터 보면, 하나의 민족과 그리고 전통문화의 부활은 철학적인 사고와 실천을 떠날수 없음을 유력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22    여추우선생과 秋雨含淚 댓글:  조회:2934  추천:29  2009-03-09
 [잡담 92]               여추우선생은 중국의 문화명인으로 잡힌다. 20세기 90년대에 상해戱劇학원의 원장직을 사직하고 문화려행을 시작하면서 <문화苦旅>  <山居筆記> 라는 책을 내놓아 문화민중들의 각광을 받았었다. 그 뒤에는 문화평론자 자격으로 홍콩의 봉황첼레비죤방송국 문화순례에 참가하여 <千年一嘆>이라는  책을 내놓았고 중국텔레비방송의 백가강단에 등단하여 꽤나 인기를 모으는 문화인으로 되였다.      헌데 余傑이라는 사람이 인터넷에서 문화대혁명시 여추우선생이 상해시위 선전부의 어용붓대로서 4인방의 여론기구였던 <학습과 비판>에 많은 비판문장을 발표한 과거를 발로시키고 여추위선생더러 공개참회를 하라고 요구하면서부터 , 또 여추우선생이 광채롭지못한 과거를 그거 뭐 하는식으로 얼룽땅둥  넘겨보내려는 心機를 내보이면서부터 여추우선생의 인기가 많이 하락하게 되였다. 사람은 완정된 사람이 없고 옥은 티없는 옥이 없다. 또 인품과 문품을 구별할수도 있는 일이므로 , 나는 여추우선생의 비교적 충실한 독자로 되여있었다. 특히 여추우선생은 중국이 滿淸에 대한 객관적인 력사태도를 지니지못했던 과거를 청산하는데 , 국가와 민족개념에 대한 재정리를 하는데 좋은 역활을 하였다고 생각하여왔다. 몇년전부터 있은 만청연구붐과 <강서건륭성세>붐도 어떻게 보면 여추우선생의 감성이 짙은 <문화苦旅>에서부터 시작되였을지 모른다고 판단해왔고 , 그래서 드문드문 백가강단에서 여추위선생의 강의를 시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 교수님이 조금은 쇼적인 면도 지니고 있고 <허튼소리>도 잘 하는구나고 생각되였다. 90년대 중반까지도 사실 중국에는 이색적인 서적이 많이 출판되지는 못했었다. 지금도 조금 여전하기는 하지만 중국의 인테리들은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독립적인 생각을 내놓기가 많이 힘들다. 소위 주류이델레오기와 빗나가면 재앙을 받을가 공포심에 휩싸인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보이지않는 문자옥이 존재하는건가? 스스로의 대답은 힘든 일이다. 현재 퇴직을 하는 인문과의 어떤 교수들은 < 크게는 나라일을 거론하지 말고 작게는 학교일도 관심하지 말라>는 충고를 서로 선사하고 있다니 중국인테리들의 생존풍기와 학문풍기는 고심해볼만한 일이다. 헌데 여추우선생은 민고를 관심하고 나라를 관심하는것이 그의 고질로 되였는지 작년 문천지진시에 큰 봉변을 당했다.  새로 내놓는 책 원고료를 지진참사에 기부하기는 했지만 지진난민들의 공용시설건설에서 두부공정을 한 관료를 조사하고 징벌해달라는 요구와 상관하여 < 너무 그렇게 떠들지 말라, 외국인들이 그것을 리용하여 중국을 헏뜯는다>는 내용을 담은 “含泪劝告灾民”을 써놓아 네티즌들부터 秋雨含泪는 악어의 눈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산채판사전에 수록되였다. 말하자면 秋雨含泪는 帮闲文人들의 太平粉饰을 비하하는 인기적인 신용어로 낱말로 되여있다. 관료사회에서 帮闲文人의 존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여추우선생의 <실수?>가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다.
21    [잡담58] 댓글:  조회:2715  추천:97  2008-07-30
[잡담58] "권력을 세습할수가 있다"에 대하여허동식     寶鷄시에서 차를 타고 서안으로 이동하는 중, 눈길에 마주치는 고속도로 간판광고에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문자광고를 하나 읽었다.부동산 아파트의 판매광고같아 보였는데  <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내용이였다. **의 첫글자는 金변에 官자를 붙힌, 새로 조작한 한자로 의심되는 한자였고 두번째 글자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는 어느 아파트小區의 명칭인듯했는데 호매로운 판매광고였다.       새로 발포된 광고법은 잘 모르지만도 학교시절 광고관리조례를 배운적이 있으니 내 추측에는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가 있다>는 광고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내재한 민주주주의사상에 어긋나는 광고이므로 위법광고라고 생각된다.       <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광고내용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한켠에 놓아두고 다만 그속에 내재한 무엇인가가 나를 자꾸만 울분하게 만든다.    <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우선 **아파트가 고급아파트로서 일반일들이 아니라 권력자들이 집거를 한다는 의미가 내비친다.물론 <나으리들이 모여드는 아파트로서> 아주 고급아파트구역으로 자처하려는, 경제상업적인 기교를 부리어 <멋진> 광고언어를 만들어내려는 심사가 보이기도 하지만 공공연히 권력숭배와 권력세습을 떠받드는듯한 행위는 좋은 행위가 아니다.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그 광고 아이데어를 낸 사람도 좋고 부동산개발상도 좋고 고속도로광고회사도 좋고 <멋진> 광고 하나로  중국인들이 수천년이란 원가를 지불한 사회정치리상을 경이하게 박산낸다는 느낌이다.       반동광고가 번듯하게 걸려져있다는것은 상기 관련자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회배경문제도 있다.경제개혁을 하고 정치행정개혁도 한다지만은 우리중의 많은 사람들이  권력숭배에 물젖어있고 권력이 본질인 관료사회를 쉽게 받아들이고 그 지속성을 승인하고 참석하려는 문화심리를 내비기도 한다.        .  
20    사랑이라는 낱말 그리고 사랑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2735  추천:85  2008-05-14
해빛이 반짝이고 꽃이 피여 시쓰고싶은 욕정이 잉태되는 봄날, 베란다에 홀로 앉아 사랑이라는 낱말과 사랑을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멍청해진다. 인테넷에서 사랑이라는 낱말의 어원을 검색하면 어느 국어사전의 思郞과 思娘이라는 한자에서 풀이되는 해석과 《사르다》 등 우리 말 고유어에서 풀이되는 해석을 읽을수 있다. 그리고 또 영어로 풀이하는 사람들의 이색적인 장난끼도 읽을수 있다. 사랑이라는 낱말의 어원에 대한 해석이 어느 풀이법이 정설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낱말에 대한 어학적인 해석을 떠나 사랑이라는 낱말과 사랑에 대한 나 스스로의 《풀이법》을 진행하고싶어진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우선 자연을 상대하는 문화심리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생존방식을 내포한 자연관의 표현이 아닐가고 생각된다. 우리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인간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해주며 어느 정도의 농경수확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자연에 묻혀 살아왔다. 때문에 자연의 다변화적인 아름다움과 주기적인 신성함을 만끽하여왔고 그 중에 자연의 실리적인 은총을 받으면서 긴긴 세월속에 자기도 모르게 자연을 사랑하고 경모하고 우러러는 자연관을 키워왔다. 과거 우리는 만물이 령성을 지녔다 주장하는 샤머니즘을 신앙하였고 자연세계에 대한 탐구가 많은 진전을 보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마음깊이 어디에는 자연을 사랑하고 경모하고 우러러는 자각심을 의연히 간직하고있다. 사랑이라는 낱말에 슴배인 우리의 상기 자연관을 더듬어보면서 현재 많이 사용되는 생태평형이라든가 생태주의라는 말과 비교를 해본다. 우리 말 사랑에 내재되고 표현되는 자연관은 소박하고 정서적인 면을 다소 지니여 생태평형이라든가 생태주의라든가 등 과학용어와는 큰 차이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 말 어경이라는 특수 조건하에서는 사랑이라는 낱말에 은밀된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의 대립성보다도 인간과 자연의 화합성을 고집하는 신성한 자연신앙이 엿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우리의 천인합일(天人合一)식 자연관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다음으로는 인륜의 문화심리이고 생존방식이다. 협소한 의미에서는 사랑이란 선조와 가족, 친지와 이웃 등 인간관계를 비롯한 혈연적인, 민족적인, 실용적인 원초이미지가 내비치기도 하지만 작은 울타리를 뛰여넘어 사랑이라는 낱말을 사회적인, 인류적인 차원에 두고 보면 인간리상의 흔적을 크게 내보인다. 사랑이라는 낱말은 기나긴 세월의 흐름속에서 북온대라는 농경권의 경제생성과 문화생성중에 익어온 언어이며 인간상존과 인간상경방식에 대한 귀납적인 결론이며 그 결론에 대한 우리 말 표현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낱말을 접하면 간혹 로천명시인의 시 《사슴》에서 읽을수 있는 사슴의 눈길과 관련시켜보기도 한다. 우수가 조금 흐를듯 말듯 하지만 순진함과 진지함이 빛나는 사슴의 그윽한 눈길은 우리의 낱말 사랑이 지닌 인류추구에 대한 시적인 구체표현이 아닐가? 나는 사랑이란 한자에서의 애욕과 련정이 내보이는 경지를 엄청 뛰여넘은 언어로 생각되고 유가의 인자와 동등하게 빛나는 인륜사상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판단하고싶다. 물론 력사의 흐름속에서는 극악열상도 보였고 현실에서도 회피할수가 없는 민족갈등과 사회계층갈등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무고무연한 사랑은 없다》는 인륜관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우리 말 어경중에서 모든 거치장스러운, 세부적인, 구체적인 전제조건을 내버리면 사랑은 위대한 인류리상이 아닐수가 없다. 우리 말 사랑은 하느님이 인간을 굽어보는 위대한 련민과 부처님이 인간을 고행에서 구해내려는 신성한 책임과도 근사한, 인간으로서 인간을 상대하는 인륜정신의 일로임을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말 사랑은 우리의 좋은 인성에로의 적극적인 행진욕구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또 다음으로는 우리식의 미학적인 존재가 아닐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 말 어경중에서는 현재까지 우리가 느끼고 만들고 추구하는 미물은 사랑이라는 낱말 하나로 귀결이 가능하지 않을가? 사랑이라는 낱말을 접하여 조금이라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만 하면 사랑은 서서히 아름다운 그림전시회로 음악회로 안겨진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고려청자의 탱탱한 목소리가 울리고 노을이 붉게 타는 진달래동산의 기운이 감돈다. 나는 우리 말 사랑에 깃든 이런 아름다운 사연은 바로 우리 말 어경을 조건으로 사랑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의 복합작용아래서 사랑의 과정과 결과가 이루는 하나의 미학적인 경지라고 생각된다. 사랑이라는 말속에는 옥처럼 다듬어진 미가 생성되여있으며 우리의 미학적인 추구가 여실히 보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우리 정신세계의 시성이고 미성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종극에는 지에 대한 학문이다. 지에 대한 학문 즉 철학을 인간이 우주만물의 생성과 인간의 생성에 대해 진행하는 의문이며 인간이 인간본신의 인식능력과 행동능력에 대해 진행하는 의문이며 또 인간이 인간생명의 종극가치에 대해 진행한 의문이라 한다면 사랑이라는 낱말에는 상기의 모든 내용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담겨져 있다. 물론 문화사상사적으로 보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우리 언어로 진행한 형이상학적인 사변적인 의문과 풀이가 비교적 적은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랑이라는 낱말과 애착되고 빈번한 사용에는 우리의 천문적인 사변욕구와 명상이 안받침되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실리성을 따지는 문화권에 속하는 종족이며 또 우리 말이 구축한 정신세계는 어떤 종족들과 비교해볼진대 허약성 세습성 등 약점을 지니고있다. 하지만 우리 말 어경이라는 특수전제조건으로부터 출발하면 나는 사랑이라는 낱말은 로자의 도라든가 캉트의 절대정신이라든가와도 거의 비슷한 어떤 원본적인 철학명상이 잠자고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우리의 지성이고 탐구성이다. 우리 말 사랑을 다른 언어에로의 번역을 시도하면 어떻게 될가?  다른 언어는 잘 모르니 중국어의 애와 련에 맞추어본다. 구체적인 어경을 떠나 자연관적인, 인성적인, 미학적인, 지적인 면에서 보면 애와 련은 우리 말 사랑을 담기에는 작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한다면 우리 말 사랑에 완벽하게 대결되는 중국어는 무엇일가? 부동한 언어와 문자가 구축하는 정신세계는 차이성을 지닌다고 한다. 우리 말과 훈민정음이 우리의 심성에 키워준 이색적이고도 근본적인 근원은 잘 모르지만 나는 용케도 사랑이라는 낱말 하나를 두고 우리의 정신세계의 한 구석을 살펴보았다. 사랑이여, 오늘도 베란다에 앉아 사랑을 또박또박 불러본다. 그러면서 우리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장래가 사랑이라는 위대한 말속에서 빛나지 않을 리유가 없음을 확인해본다.
19    김문학현상初探(역고) 댓글:  조회:3086  추천:118  2008-03-21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이 글을 읽었습니다. 작자는 일본주재를 하는 북경인으로 느껴졌고 이 글의 관점도 분석도 세밀한것은 아니였지만, 김문학현상을 대함에 있어서의 自怒自暴이 아닌 자아반성과 민족자신감에 저는 감복했습니다.  우리가 배울 점이라 생각됩니다.김문학현상 初探 왕동(북경인) 1         2006년 8월 16일, 일본 모모 텔레방송국의 방송에서 중일한인들이 한자리에 모이어 고즈미수상의 참배문제를 두고 각자가  립장을 거론하는 장면을 구경했다.그래서 나는텔레비 화면에서 처음으로 김문학을  만났다. 중국인으로서 중일한문화비교를 한다는 학자라 하지만 중국인의 립장을 견결히 반대하고 고즈미의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김문학의 리유는 무엇일가고 알고싶었지만 김문학의 발언은 없었고 난처한 얼굴상만 드러내고 있었다. 김문학이 어떤 사람일가? 알고싶었다.    2  김문학은 누구인가? 김문학의 일본에서의 자아소개(광고)는 아래와 같다. 金文学さんは、1962年韓国系三世として中国瀋陽市に生まれた。家では韓国語、外では中国語を使っての幼児・少年時代を過ごしたという。 김문학은 한국계3세로서 1962년 심양에서 태여나 가정에서는 한국어, 바깥에서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유소년기를 보냈다 한다. 中国の大学では日本文学を専攻し、卒業してから6年間、大学講師を勤めた。1991年、同志社大学の招きで来日し修士課程を修了、引き続いて広島大学で博士課程を修了した。 중국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졸업뒤 6년간 대학강사로 근무했다.1991년에 동지사대학의 초청으로 도일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계속하여 히로시마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韓国人が中国で生まれ育ち、日本にくると三国人になるんです。三カ国にすごく愛着を感じています」 このように語る金さんは、たいへん落ちついた静かな感じの人で、日本語がすごく上手。とても韓国人や中国人には見えなかった。 한국계로 중국에서 태여나 자랐고 일본에 오니 3국인 되였다.그래서 나는 3국을 애착한다고 말하는 김문학은 듬직하고 조용한 감을 주는 사람으로서 일본어에 아주 능숙하여 중국인 또는 한국인이라고는 보여지지않는다  ◆著書は4冊ともたいへん面白く、日中韓の文化の違いがよく理解できた。저서로는 4권 모두가 재미있고 일중한의 문화차이를 잘 알려준다. 「裸の三国志」は、クールな表現で日中韓の文化の比較がなされていたが、「中国人民に告ぐ」「韓国人民に告ぐ」「反日という甘えを断て」は、いずれも痛烈な表現が目立った。このままの韓国と中国ではいけないという金さんの思い入れが、このように痛烈な文章を生んだのかも知れない。 <벌거숭이 3국지>는 평온한 표현으로서의 일중한문화비교를 진행하였고 <중국국민에게 알린다> <한국국민에게 알린다>  <반일정서를 버리자>는 통렬한 표현이 특징이다. 김문학의 한국과 중국은 현상태를 지속해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이 통렬한 표현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3       중국여론이 일본우익세력의 력사교과서를 견결히 반대하듯이 일본의 우익세력도 중국력사교과서를  견결히 반대하여왔고 그 반대중에 중국인의 참여가 있다면 큰 <설복력>을 내보일수 있다. 김문학이 그런 배역이다.김문학저서에 표현된 對中 증오심과 경멸감은 일본우익세력마저 비교가 아니된다.중국에서 태여나 자랐고 언담중에도  < 우리 중국 >을 내비치는 대학교선생 경력을 지닌 사람이 중국에 대한 염오정서를 꺼리낌없이 내쏘는 현상은 대표성이 있는 연구가치가 있을지도모른다. 우리는 김문학현상을 관상하고 김문학현상에 내재한 <가치>를 알아야 한다.    김문학현상의 원인은 国族인지가  혼란하다는 김문학의 정체불명성이다. 김문학의 언론이 대만의 黄文雄、金美玲을 대표로 하는 친일대만독립파와 설법이 부동하지만은 실질은 동등하다. 그들은 일본군국주의대외침략의 본질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가송하며 일본문화와 혈통의 우월성을 부르짖는다. 김문학이든  친일대만독립파든 모두가 동아시아현대史의 엇갈린 시비가 배태한 현상이다.   黄文雄、金美玲은 자신들의 중국혈통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중국혈통으로 하여 치욕감을 느끼며 또 다른 방면으로는 자신들의 <주체성>과 <독립>을 부르짖으나 일본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모순상태에 처하여 있고 중국혈통이지만 일본을 숭배하고 ,하지만 독립하려는 3립모순속에서 정신압력이 아주 크다.   김문학은 <붉은기 아래서 성장>한 부류로서 일제점령시기와 2차대전뒤 일본과의 특정된 관계환경을 가져야했던 대만신세대와는 조금 다르다. 중국대륙체재가 어떻게 김문학을 만들었을가? 복잡한 문제이다. 4      첫째는 위만주국의 성질과 특점 그리고 발생과정에 대한 리해력과 관계된다. 위만주국력사연구는 중국근현대사에서 아주 황량한 령역이다.김문학은 위만주국을 일본이 <세계와 아시아에 가져온 거대한 은혜>로 착각하고 있으며 <세계화리념>에 부합되는 사실이라 인정한다. 김문학은 <만주가 계속 일본통치하에 있었다면 > <일본과 같은 세계강국으로 부상했을것이다>고 주장하는데 식민지가 식민지통치국과 함께강국으로 전변한다는 말은 력사론리성이 전혀 없지만 그는 우리의 위만주국에 대한 력사인식평가가 너무나도 간략되고 모호한 틈을 탄것이다.    두번째로는 김문학의 조선족이라는 민족배경과 련관이 된다.중국은 티벳 신강 내몽고 등 지역의 분렬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쓰지만 조선족의  国族认知에 존재하는 隐患도 사실 엄중하다.만주에서와 관내에서의 할일전쟁에서 조선인은 특별군체였고 전쟁 뒤 중국적소유자로 되였다. 하지만 국족同感이 거의 없다.김문학의 언론으로부터 보면 위만주국이 강국으로 성장하는 상상에는 <조선반도>도 포함되여 있으며 그가 말하는 민족특성도 <대만민족>이라는 론조와 대응된다. 김문학이 일본에 있지만 중국내의 조선족도 김문학과 同道인 사람이 있다. 몇년전,고구려왕조쟁론중에 국내의 적지않은 조선족학자들과 민중들이 한국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어떤 사람은 홈페지를 만들고 론문을 써 고구려는 중국에 속한적이 없다 하면서 중국동북의 령토주권에 대한 질의를 표하였다. 김문학현상은 개별현상이기는 하지만 실질은 조선족문제의 일종 발로이다. 김문학이 중국대륙체재하의 조선족이라는 점은 우리의 민족정책의 非完善과 비妥当을 설명하기도 한다.       세번째로는 김문학현상의 죄증 전부를 김문학개인에게 돌려서는 아니된다.객관인소의 작용도 실사구시적으로 승인해야한다.       제일 큰 객관인소는 중국대륙의 력사교육이  疏漏、偏颇와 认知错误(김문학의 학생시절은 현재보다도 엄중했다)등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환경변화가 있고 지혜상승과 경력증가가 있으면 <이전에받은 교육은 거짓말이며 속임을 당했다>는 느낌을 가질수가 있으며 극단분자들은 어제날을 전부 부정하고 이단으로 전변할수도 있는 일이다. 김문학의 중국력사교육에 대한 비평을 개괄하여 빌어온다면a 만청-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혹은 김문학의 잘 외우는 만주국도 포함)에 이르기까지의 정권변화에 대하여 력사관이 투철하지 못하고 확실하지못하며 마레주의사확관을 억지공사로 응용하였고 너무나도 승리자의 자태만을 대변하여 暗伤이 많다. b 백여년간 당한 렬강침략으로 하여 중국력사교육은 원한에 사무친 피해자의식으로 차넘친다. 특정한 <반일교육>이 때로는 출현되고(子虚乌有)  <피해자교육>은 아주 일상적이다. 또 일본은 제일 큰 가해자(加害者)로만 보고 중국인의 민족적반성은 전혀 없다 c  력사교육에 있어서 考证이 적고 교육태도가 책임심이 약하며 력사결론이 空泛하여 력사사실세부가 비진실화된 경향이 많이 존재한다. 실례로는  남경대학살의 사망자인수에 대하여서 김문학뿐만아니라 중국대륙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도 앞으로는 질의를 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수자이다. 이상 세가지는 모두가 중국관방이 력사교육에서 개진할 점들이다.     이상이 필자가 김문학현상 출현에 대한 분석이다. 필자는 김문학의 언론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보다도 상기의 분석이 실제적인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偏激적인 사람을 상대해서는 口舌辩论도 창백무력하므로 얼굴을 붉혀 그런 사람과 크게 론전을 한대도 自贬身份만 차려질수가 있다. 또 세계 어느 나라든지 민족이든지 남을 멋지게 욕해서  “四夷宾服” 성과를 본적도 없고 다른 누구한테 된욕을 먹고 나라와 민족이 倾颓衰败한 일도 없다. 김문학더러 말하고싶은것은 다 말하라 하자 .중국이 요구하는것은 중국인의 自强이고 正己이다.
18    미국의 외국적군인과 중국의 농민근로자(역고) 댓글:  조회:2505  추천:80  2008-03-15
  미국의 외국적군인과 중국의 농민근로자   等待戈多 미국의 현역군인중에 3만7천명은 외국籍인으로서 그중 3만명이 이라크주둔 복역중이므로 미국정부는 외국적군인을 대포밥으로 사용한다는 혐의를 받을만 하다. 전쟁에서 죽은뒤에 미국적을 획득했다는 중국인 손명이 그 중의 한사람이다.  손명의 죽음을 두고 각자의 평판은 다를수도 있겠지만 누구도 국적을 물론하고 생명의 가치라든가 생활추구라든가 본질은 一同하다. 때문에 이라크에서 전사한 손명과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참사한 농민근로자 왕건민에 대해서 비교법을 적용해보련다.   1 외국적군인과 농민근로자의 존재의 합리성과 合情성   공민의 권익과 의무로부터 보면 병역과 로동은 일치성을 지닌다. 병역은 생존보호이고 로동은 생존건설이다.   손명은 비록 미국永住권을 획득했지만 미국공민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거권은 없다. 중국적 소유자로서 손명은 미국을 위해 전쟁에 나갈 의무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의 영주권소유자로서 손명은 미국병역법에 따르면 미국을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한다. 워싱톤은 모국은 영국이지만 모국과 자기를 낳아 키워준  미국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엔 미국독립의 령도자로 되였다. 1937년, 독일과 일본이 동맹관계였으므로 만일 독일의 립장에서 출발한다면 독일인 拉贝는 남경대학살시에 중국인을 도와주지 말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10여년간 생활한 그는 무엇인가 중국인을 도와야하겠다는 생각에서 독일 국기를 내거는 수단으로 중국난민들에게 안전구역을 하나 제공하였다. 이런 사실로부터 출발하면 중국적을 지닌 손명이 미군에 입대함도 합리하고 合情한 일이라 생각된다.    왕건민이나 북경인이나 모두가 중국공민이지만 왕건민은 농촌호적이고 북경인은 도시호적이다. 왕건민이 북경인보다 더 소유한것한 촌장선거권이다.하지만 대다수 중국인들이 민주를 증오하듯이 그는 촌장선거권을 포기하고 市長선거권도 주지않는 북경에 가서 막로동에 참가했다. 동일한 나라에서 동일한 도시에서 동일한 중국인으로서 동일한 언어문자를 사용하는 공민이였지만 왕건민은 북경에서 나라법치가 허락하는 부동한 사회대우를(북경동인병원 복도에서 돈이 없어서 각혈하다 참사) 받았다. 왕건민사건의 합리성과 합정성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의문이 된다.      2 손명과 왕건민이 죽지않았다면 어떻게 되였을가?  미국리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만 미국국적획득이 가능하다. 손명이 전쟁터에서 죽지않고 안전귀가를 했더면 영주권을 공민권으로 바꾸어 완전무결한 미국공민이 될수있었다. 또 5년이라는 병역 뒤에 5만달러의 조학금도 신청할수 있고 그 금액이 많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국립대학을 나올수가 있다. 그러면 그의 생활전경이 그렇게는 암담한것은 아니라는 판단은 된다.      만일 왕건민이 同仁병원(얼마나 사랑스러운 병원이름인가?) 급진부 복도에서 죽지않았다면 , 북경에서 5년간 막로동을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가? 북경시 호적을 딴다는것은 불가능할것이고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는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소위 五证(家长或监护人暂住证、在京实际住所居住证明、在京务工就业证明、户口所在地出具的在当地无监护条件证明、全家户口簿) 이 없고 择校费라는 경제래원도 보장이 없다. 또 헌법에는 무료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앞으로도 왕건민의 자녀는 북경에서 그런 권익을 향유할 가능성이 없다. 5증도 그렇고 월급1200원으로는 왕건민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만일 왕건민이 동인병원에서 처참한 객사를 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북경시민과 동등한 생존대우를 받기 위하여 북경호적을 신청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왕건민은 본과대학학력증도 북경房産증도 없어서 , 또 韩寒과 같은 천재도 아니므로 불가능함을 예시해준다. 하지만 왕건민이 꼭 학력과 방산증을 만들어서 북경호적신청을 한다고 하면 적어도 10년은 막로동에 참가해야 하고 또 초중밖에 나오지못한 그는 7년이라는 시간 지불을 해야한다.(왕건민의 월급 1200원이면 7년간의 교육투자와 생활비 10여만원을 만들려면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는 상황에서 7년간을 막로동해야한다)  북경 아파트가 평균가격이 0.78만원/平方米인데 35平方쯤하는 아파트를 하나 소유하려면 또 20여년의 시간이 요구된다. 상술한 산수문제를 풀이해여 보면 왕건민이 북경시호적을 신청하여 북경시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것은 天大笑話로 보여진다 3  손명과 왕건민이 죽은뒤의 비교 어느 나라이든지 나라와 사회를 위해 죽은 군인은 긍정적인 사회지위를 지닌다 .미국은 영주권소유자군인이라 하더라도 전사한 뒤에 훈장을 발급하고 국기를 절반 내리우는 등 대우를 해준다. 일전에 군인 孟祥斌이 见义勇为중에 죽었는데 우리 산동성과 절강성정부는 어떤 대우를 해주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국기를 절반 내리운다는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어떤 나라이든지 공민이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했다면 공정한 조사와 해결책을 댄다. 허나 내가 알건대로는 재판소에 나와 왕건민의 죽음에 대하여 실말을 하련다는 동인병원의 대문지기 보안인원은 보안회사의 배척과 구금을 받었고 재판소에 증인으로 나선 뒤에는 실업을 당했다. 또 왕건민사건에 대해 어느 관리자가 책임추궁을 받었다는 뉴스도 얻어듣지못했다. 만약 령혼이 있다면 왕건민의 령혼은 하늘나라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가?    4  운명의 선택     만일 미군과 중국군이 싸운다면 손명은 어떤 선택을 했을가?      2차대전시에 일본계군인 5000명이 제대를 당하고 안치중심에 있다가 미국에 충성한다는 맹세를 하고 다시 전쟁에 나갔다. 그 중에서 일본계군인들로 편입된 100营과 442团은 미군중에서 용맹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런 실례로부터 보면 손명도 중국이 아닌 미국을 위해서 중국군인과 대결할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제대할지도 모른다는 운명선택이 된다 .  농민근로자 왕건민의 북경에서의 선택은 복잡하고 슬픈 사연이다.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왕건민과 래세에도 또 중국의 농민근로자직업을 선택하라고 권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울고싶어진다.  
17    빈곤하지만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에 대하여 (선역) 댓글:  조회:2772  추천:89  2008-03-12
  景凯旋,남경대학교수   신화넷 뉴스에 의하면 전유고슬라비아지역 주민들은 현재 전쟁과 경제침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주민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테토의 묘지에서 자발적으로 추모활동을 진행한다든가 유고슬라비아主題公園을 건립한다든가 테토와 관련되는 여러가지 기념상품이 판매된다든가 등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다.어느 현지인의 말을 빈다면 < 테토시데는 빈곤했지만 우리는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는 <懷舊주의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한다. < 이전에 빈곤했지만 우리는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언론은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 일전에 구쏘련이 무너질 때 러시아에서도 성행하던 회구주의다. 개혁개방이 시작된지 30여년이 된다. 우리도 늘 회구주의에 젖어있는 경우가 있다. 90년대에 혁명가곡이 류행되던 일과 21세기에 들어서서 옛날 <철밥통>과 <큰솥밥>식 생활을 그리면서 <이전에 우리는 빈곤했지만 우리는 실업자도 없었고 간부들 봉급이 서민들보다 적은 경우도 있었다.> 는 언론을 듣게 된다. 러시아든 유고슬라비아지역이든 중국이든 회구주의가 발생하는것은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의 진입과정에 발생하는 모든 진통을 弱勢군체 홀로 감당하여 무료교육 무료医疗 고정수입 무료주택 등이 소실 된 뒤 주민들의 빈부가 엄청난 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권의 개혁은 계획경제의 실패에서 기원된다. 사실 계획경제 시대는 누구를 상대해도 현재보다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시대임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정신세계도 아주 빈곤한 시대이다. 또 의심할바없이 개혁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적지않는 마이너스면도 지니고있다. 례를 들면 개인자유와 사회평등의 균형발전이라든가 개혁성과분배라든가 개인권리의 보장문제라든가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은 절때 개혁의 결과가 아니다. 개혁의 비완벽성에서 기래된 사회과제들이다. 그러므로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다. 以赛亚・伯林 는 자유를 <사람이 자신의 주인으로 되는 적극자유>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않는 소극자유>로 나누었다.  현재 우리의 출발점은 소극자유임을 잘 알아야한다. 동시에 자유란 물질의 풍부함에 그치는것이 아님을 알아야하고 유고슬라비아 작가 米哈耶罗夫가 말한  <적극적인 불자유 (국과권력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심리적으로 자유에 적응성이 없고 심지어 자유를 거절>에 매몰될 위험성을 제거하여야한다. < 빈곤하지만 많은것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회구주의는 기형년대를 리상화시키는 틀린 작법이다. 개혁은 적어도 우리에게 인생선택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16    파금선생의 진말(선역) 댓글:  조회:2666  추천:81  2008-03-11
            파금선생의 진말(선역)              남경대학교수 景凯旋       우리는 로신은 잘 기억하지만 파금은 별로 의론하지 않는다. 파금은 壽者로서 중국인들이 머리태를 남겼던 만청시대에 태여나 인터넷을 비롯한  소위 글로벌시대에 세상과 작별하였다. 그는 만년에 병으로 하여 사회생활과 리탈되여서도 작가협회주석을 지냈다. 그래서 간혹 파금에 대한 뉴스같은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신호에 불과했던 사실이다 .로신의 이름은 사람들의 격정을 불러일으켰지만 파금의 이름은 그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忠厚한 로인으로서 이 세상을 작별한것이 파금의 해탈이였을지도 모른다.           파금은 소설 <파멸>으로부터 시작하여 만년의 <수감록>에 이르기까지 일생동안 수많은 작품을 써냈다. 사람들에게 익숙된 작품은 구중국의 중국식대가족과 음울한 공관 그리고 청춘의 화원을 묘사한 력작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파금의 청춘시대인 중국대변혁시기의 산물이다. 이 시기는 중국의 언론자유시대로서  각성한 청년들이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태우던 시기로서 파금도 편벽한 성도평원에 살면서도 <신청년>  <매주평론>  <소년중국> 등 잡지를 통해 신문화를 접촉하였다. 그러한 원인으로  파금의 작품은 인성에 대한 탐구보다도 사회개조에 대한 경향성을 내보였고 무정부주의에 대한 신조가 짙다. 그 시기 무정부주의는 하나의 큰 사조로서 리대소 운대영 등 공산당활력자들도 그 영향을 받았다. 누군가 지적한바와 같이 그 시기 중국무정부주의 핵심사상은  모든 强权을 반대하고 개인자유를 추구하는것였다. 파금이라는 필명은 巴枯宁과 克鲁泡特金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라는 一設은 파금 본인의 부정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에서의 나젊은 주인공은 전제주의를 반대하고 서민층을 사랑하는 무정부자의 혼신이다. 당대의 나젊은 물욕주의자들과는 달리 富贫을 물론하고 정신귀족의 형상으로 표현되여 허무와 방종의 행위를 이룬다. 그러므로 파금의 작품은 시대와 청춘기반항정신의 산물이라고 할수있다. 기존세계에 대한 회손과 테로적인 희생적인 民粹主义英雄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들의 반역심리에 응합했고 약자에 대한 동정과 강권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청년들이 파금의 작품을 읽고 혁명에 투신한 사실로부터 그의 작품은 中国式 《汤姆叔叔的小屋》로서 위대한 예술성은 결핍하지만 사회력사변혁에 참석한 작품이라 판명된다.         파금은 종래로 순수예술작가로 되려고는 하지않았다. 그는 원래 사회현실에 참석하려는 강력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심지어 희생될 각오도 지녔던 작가로서 그 연고로 40살에야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40년대  작품 《寒夜》를 발표한 뒤에는 더는 좋은 작품을 못써냈고 건국뒤에는 정계에 몸을 담고 각종 회의와 출국방문 국내시찰 등에 몸매이여 사회변혁을 갈망하던 작가로서 사회변혁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문학창작의 완전쇠퇴기를 보내게 되였다. 그래서 만일 문화대혁명중 파금에 대한 박해가 없었더라면 문화대혁명 뒤에 파금은 < 진말을 하자>는 언론을 할수 있었을가? 하는 의문도 성립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난뒤 창작된 파금의 <수감록>은 다시 파금에게 작가의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파금은 본인도 자신의 제일作으로 생각한 < 수감록>을 통하여 력차의 정치운동중에서의 자신의 언행을 회억하고 남한테 피해를 준 사실들을 자책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재부와 향락에 대한 추구에 일심할 때, 파금은 도리여 청년시절의 성실하고 진지한 기백을 되살려 자신의 참회록을 또박또박 기록하여 문화대혁명재난을 잊지 말기를 호소했다. 파금의 참회록은 권력시스템이 인정하는 참회록이였기에 관방의 존중을 받았고 각종 사회활동에 다시 출면했으며 사회지성인의 형상으로 받들리였다. 파금이 세상을 뜬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중국의 양심>이라 칭르고 그의 <진말을 하자>를 파금의 제일 훌륭한 유산이라 하였다.       파금의 현대사에서의 위치로부터 보면 더 유력한 <진말>을 할수 있는 능력이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그의<수감록>은 본질적으로 상처어루만지기에만 머물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목중에서 로신을 초월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파금의 차실이 아니라 이 시대의 차실이다.           진실이라는 말은 문학 평론가들의 말밥에 잘 오르기는 하지만 문학명제도 아니고 문화명제도 아닌 명제임을  우리는 잘 모른다. 파금이 <진말을 하자> 의론을 진행할적에 체코의 작가 哈维尔도 <진실한 생활을 하자>는 주장을 보이면서 < <어느 과일가게에서 사회조류와 同步하기 위해 가게 문앞에 < 전세계 무산자는 연합하라>는 프랑카트를 걸어놓았는데 그 행위가 가게주인의 진실한 생각이 아니다. 空泛한 이델레오기의 득을 보려고 했지만도 그 이델레오기에 순종하는 치욕을 드러내는 행위이다>>는 실례를 든 것처럼 우리 시대도 그러한 비진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대다수는 일상생활에서도 거짓말속에 살아가고 있다. 파금과  哈维尔는 계몽급 작가로서 허위를 증오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경향성이 농후하고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을 지니어 문학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생활에 개입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結局은 조금 부동하다. 파금이 용감한 걸음을 멈추고 외부세계의 압력하에 침묵을 선택하였을 때 哈维尔은 숭고한 도덕용기로서 진실에 대한 더욱 완벽한 주장을 견지하면서 옥살이도 몇번 겪었고 또한 사람들에게 <진실한 생활의 가능성도>을 보여주었다.          서구에서는 진실과 진리가 같은 낱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시인  赫西奥德의 < 시의 목적은 진실을 제시하는것이다>는 언조로 시작해서 철학가 플라톤과 亚里斯多德을 통하여 희랍문화에서 진실을 종극가치라는 철학중심위치에 모셔왔다. 또 유태문화에서도 사람마다 하느님앞에서 진실에 대한 추구를 보이라는 종교문화지향을  크게 추구하였다. 荒诞派 戏剧家로서 哈维尔는 진실은 인류를 통치하는 <절대적인 지평선>으로서 진실추구를 형이상학적신앙의 위치에 놓았다. 하지만 중국문화에는 진실이라는 종극가치가 담백하다. 진실이라는 관념이 중국어에 나타난것은 불과 백여년간의 일이다. 절대다수의 중국인을 상대해서는 상술한 서구진실관념론이라든가 哈维尔이 든 事例는 분에 넘친 절대적인 ( 苛刻)  관념이고 자아보호를 위해서 <전 세계 무산자는 연합하라>는 프랑카트를 걸면 타인의 생각도 인신도 해치지 않았으니 가히 리해를 할만한 일이라고 판명을 하고 있다. 국내 어느 존경하는 학자가  講座에서 언술의 표준은--- 1 되도록이는 진말을 하자 2 진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침묵을 지키자 3 침묵권마저 소유하지 못해 부득불 거짓말을 할 때에는 타인을 해치지 말자—고 고취한 사실로부터 보아도 우리는 진실에 대한 문장도 쓰고 읽기는 하지만 진실의 함의에 대한 리해력이 결핍함을 설명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진실이란 神性이 력력한 인성추구이고 또한 서구문화는 진실에 대한 추구를 통하여 사람의 자존과 생존을  보존하는(진실앞에서 침묵을 지킴도 죄이다)  문화이므로  索尔仁尼琴 의 “거짓말로는 살지 말자>> 언론이라든가 肖斯塔科维奇의 암암리에 창작한 <<证词》가 출현되였고 哈维尔의 사회진상을 통찰하는 괴력도 출현한다. 서구와 비교하면 상기 중국 학자의 말씀은 인성에 부합되기도 하겠지만 진실에 대한 그의 표준은 유아적이라 할수 있다. 진실이 형이상학적인 근거를(정신적인 추구적인) 근거를 잃으면 인성도 底线을 지키기 힘들다. 현재 우리는 많은 경우에 뜨르르한 套话를 사용하지만 현실의 不义에 침묵을 지키고 있음이 바로 后极权社会의 특점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마음속말이 아닌 거짓말로 또는 침묵으로 리상세계와 거리가 있는 현실에 순종하는 특점을 보이고 권력의 본질적결과를 묵시한다. 진실에 대한 이러한 리해와 태도는 우리들더러 인간의 자아근거를 회멸당하고 哈维尔가 이야기한것처럼 “사람이 실패한 견증물에 지나지 않는” 배역을 할뿐이다           혹시는 일반인으로서 진말을 할 자격과 능력이 없기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파금이 우리 대신 이 시대의 진실을 이야기할것을 바랐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수감록>에서는 진실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힘들다. 문화대혁명뒤 파금이 赫尔岑의 <<往事与随想》을 번역한 사실부터 러시아 위대한 작가를 따라배우려는 몸부림을 엿볼수도 있고 또 < 진말이란 마음을 독자들에게 드리고 마음속의 말을 하고 자신이 믿는 말을 하고 생각이 정리된 말을 하고> 하는 명언을 내놓기는 하였지만 파금은 만년에 이르러서도 중국을 대신해 진말을 할 자아독립성을 갖추지 못하였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중에 거의 중국인 모두가 자아반성이 결핍한 사실과 대조해보면 파금의 아주 성실한 고백이 돋보인다. 파금은 < 호풍을 그리며>에서 심각한 자아반성을 진행했지만 문련회의에서의 정치립장표명과 동시에 진행되였다는 점으로 보면 어딘가 우리에게 유감을 남겨주었다. 큰 재난뒤에도 진말이란 기껏해야 선악에 대한 설교에만 머무르고 인성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없다면 철저한 반성으로 판명할수가 없다.            진실을 가치신앙에 저명하디 않는 경우 , 우리는 거짓말중에 살면서도 犬儒主义를 실행하게 된다. 또한 진실을 사물의 본질로 인지하지 않기에 기본적인 사실을 발견할수도 없다. 파금의 회억록 --<수감록>이 이러한 특점을 지닌다. 우리는 <수감록>독서중에서 파금의식세계에 존재하는 < 진말>과 현실과의 거리를 직감할수 있으며 그의 画地为牢식의 제한성과 진실한 태도를 표명하지 못하여 발로되는 莫名한 고통감을 직감할수 있다.< 수감록>은 파금의 개인경력이기는 하지만 인성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 없다. 독자들에게 준 史實과 평가는 구속되였고 정치정확성이 강하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파금 개인의 소심성이라든가 인지정도라든가에 귀결이 될수도 있다. < 수감록>  落筆뒤에 파금을 연구하는 어느 학자가 파금을 방문했는데 그적의 파금의 수심에 응고된 표정을< 어떤 악몽에서 깨여나지못한 얼굴표정으로서  정치투쟁에서 보였던  吞吞吐吐 欲言又止의 소위동방지혜인 얼굴상이였다> 기록하고 있다.         파금의 진실에 대한 내재결핍증은 개인원인도 있고 시대적인 원인도 있다. 파금은 5.4운동의 산물로서 서구의 자유관념과 사실주의창작법을 흡수하여 처음에는 <인성>이라는 시각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걸음을 시작했지만 과정에 새로운 科学观을 받아들이면서 自由와 진실의 神性에 아무런 리해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종국은 그의 자유관념이  無源之水로 변했고 세속세계의 革命이라는 강에서 말라들고 말았던것이다 . 파금 몸에서 나타나는 상술 부족점이 바로 新文化运动의 부족점이다 . 비록 시대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넘치기는 하지만 무정부주의 영향으로 하여 어떠한 종교의식도 배척하고 형이하학투쟁에만 몰두하였기에 그의 작품은 인성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진정한 진실감이 부족하다. 그래서 40년대에 이르러 폭력투쟁에 실망을 지니고 현시대 서민들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의 작품이 파금의 진정한 력작으로 되여있다. 信仰과 智性이 없는 道德激情은 지속적인 흡인력을 지니지 못한다. 때문에 파금은 <나의 작품들이 로쇠했다. 어떤 분식과 가공을 진행한다 하더라도 생명력을 부입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파금은 문화혁명박물관을 만들자는 건의도 내놓았고 계획경제시대에도 나라의 봉록을 먹지않은 일로부터우리의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사상대가는 아니다. 만년에 너무 신중했고 무정부주의를 신앙했다는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수호지 인물처럼 聚义堂에서 출발하여 결국은 忠义堂에서 생명의 종지부를 찍었다.
15    문화필록5 문화모식 개략 댓글:  조회:2446  추천:89  2008-02-04
문화필록5  문화모식 개략   模式을 사물의 형식의 규칙이라 리해를 한다면 문화모식이란 특정된 인간군체가 특정된 시대에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화정신과 가치취향 그리고 습성과 륜리규칙 등으로 구성된, 비교적 定穩적인 사유방식과 행위방식이의 규칙적인 로출이라 보여진다. 문화모식은 정치제도라든가 사회제도와는 달리, 그 존재의 과정에 소유한 인간군체더러 자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내재적으로 문화모식을 사용하게 한다. 때문에 그 표현과 영향력이 은페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超長期性과 최종결정력을 지니고있다. 문화형태의 구조로부터 보면 문화모식은 물질적인 외곽부분과 제도부분인 내심부분이 아닌,핵심부분에 속하는 정신문화 범주에 속한다. 때문에 문화모식은 문화철학과 문화학연구에 있어서 아주 주요한 一環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모식에 대한 연구가 모든 문화연구방법을 대체할수는 없지만, 비교적 형상적인 연구결론으로서 실용의 가치에 이를수도 있고 여러가지 문화학설도 곁들어야 하므로 중점적인 언술을 진행하고 싶다. 문화모식은 종적인(시간적인) 축과 횡적인(공간분포적인) 축으로 이루어진 좌표에서  표현된다.   1 력사발전이라는 종적인 차원에서의 문화모식(일반성) 인류의 생성과 발전은 각 지역과 민족이 부동하고 우회적인 흔적을 뚜렷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부동한 지역과 민족의 문화정신의 구체적인 차이성을 次요적인 위치에 놓고 대신 력사의 흐름이라는 시간의 천평에 놓으면 종적인 규칙성을 보인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현재까지의 문화모식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원시사회문화모식, 전통농업문명사회문화모식, 현대공업사회문화모식으로 구분되였다. a 원시사회문화모식은 생산력수준과 생산관계수준 그리고 인류의식의 혼돈상태로 말미암아 무의식적이고 동물본성적인 자연주의특징을 기본으로 한다. b 전통농업문명사회문화모식은 3대분업을 경유하여 사회제도와 정신문화의 인문적인 발전을 촉구한 결과 경험주의특징을 기본으로 한다. C 현대공업사회문화모식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중에서 문화정신도 도약을 이루었으며 리성주의특징을 기본으로 한다.   2 다원발전이라는 횡적인 차원에서의 문화모식(차이성) a국가와 민족을 단위로 하는 문화모식:공동한 지역과 공동언어를 소유하고 공동경제를 경유한 민족은 공동한 문화심리를 지니게 되였으며 민족의 대소와는 관계없이 민족문화모식을 지닌다. 례를 들면 영국인의 실증주의,독일인의 사변주의, 미국인의 실용리성주의가 부동한 국가민족문화모식이다. b 문명형태를 단위로 하는 문화모식: 부동한 문명형태는 부동한 생태계통을 소유하였기에 부동한 문명형태문화모식을 배태한다. 례를 들면 오아시스문화, 해양문화,산지고원문화 등이 부동한 문명형태모식이다.  
14    문화필록 4 문화학사조 개략 댓글:  조회:2610  추천:87  2008-02-03
문화학이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발전을 起源한 지역은 서구이다. 서구는 근대 산업화과정에서의 식민지운영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비교적 폭넓은 시각에서 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진행하여 왔으며 현재까지도 문화철학이라는 높은 차원에서 문화학연구의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보존하고 있다. 서구의 여러 문화학사조를 점검하면 크게는 전통공업사회의 문화학과 현대공업사회의 문화학 문화학으로 분류가 된다. 1 전통공업사회의 문화학(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초엽에 이르기까지) a고전주의문화진화론: 생물진화론과 실증주의정신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학설로서 문화의 진화발전성과 각종 문화가 진화발전중에 보여주는 동일성의 보편성에 착안점을 두었다. 고전주의문화진화론의 대표인물은 인류학창시자로 이름높은 泰勒(영국인)와 摩尔根(미국인류학학자,저서로서는 <고대사회>) 巴霍芬(스위스인류학학자,저서로는 <母權論>)이다. b 문화전파론: 문화전파론학파는 고전주의문화진화론의 각종 문화가 진화발전중에 보편적인 동일성을 보여준다는 주장에 내재한 문화多元說에 대응하여 각종 문화는 인류의 一元문화가 전파된 산물이라 주장하였고 인류력사는 문화전파과정이라는 관점을 내놓았다. 문화전파론의 대표인물은 독일계 학자들이다.    C 력사특수론학파: 고전주의문화진화론의 문화의 보편적인 동일성에 대응하여 력사특수론학파는 각종 문화는  각 지역과 각 민족이 특이한 력사발전을 거쳐 생성된 특수산물로서 자아적인 독립적인 특징과 규칙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2 현대공업사회 문화학(20세기 초엽으로부터 현재까지) 전통공업사회의 문화학은 문화의 거시적인 共性에 대한 연구가 특징이라고 한다면 현대공업사회의 문화학은  문화의 구체적인 異性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특징으로 되여있다. a 문화模式론파: 부동한 문화가 지닌 존재특징과 특이성에 대한 비교를 착안점으로 하였다. 대표인물로는 미국의 녀류학자 本尼迪克特로서 인디안의 酒神형문화모식과 日神형문화모식에 대한 걸출한 문화비교와 << 국화와 꽃>>이라는 저서에서의 일본인의 치욕형문화심리와 서양인의 원죄형문화심리의 비교를 통해 경전적인 학술성과를 취득하였다. b문화형태사관론파: 지역과 민족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여러 문명을 배경으로 문화형태비교를 진행하였다. 대표인물로는 斯宾格勒(독일학자,저서로는 <서방의 몰락>)과 汤因比(영국학자, 저서로는 <력사연구>)이다. 斯宾格勒는 보편적인 력사발전규칙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하였고 력사연구는 부동한 문화연구의 전제하에서 진행되여야 한다 주장하였다. 斯宾格勒 부동한 민족과 국가라는 력사사실을 기준으로 인류의 문명형태를 애급문화, 바비론문화, 인도문화, 중국문화, 고전문화(희랍문화), 아랍문화, 마야인문화, 서방문화 등 8가지 형태로 나누었다.  汤因比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동일한 구조속에서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는 문화형태를 애급사회、苏美尔사회(메소포타미아평원 고대원주민)、米诺斯사회(지중해 克里特섬)、고대중국사회、안디스사회(남아메리카安第斯산맥지역)、마야사회、赫梯사회(기원전1900년 소아시아 부족국가)、바빌론사회、고대인도사회、희랍사회、이란페르샤사회、시리아사회(叙利亚)、아랍사회、중국사회、인도사회、조선사회、서방사회、동로마제국사회(拜占庭),러시아사회、메끼시코사회、育加丹사회(남아메리카의 유카탄반도지역) 등 으로 나누었고 그 중에서  先位를 차지하는 6개 문명은 원시사회로부터 탄생한 문명이고 나머지15개문명은 6개문명에서 파생된 문명형태라고 인정하였으며 그밖에 또 요절한 문명으로서는 玻里尼西亚(태평양중부 갈색인종문명)、북유럽사회 애스키모인사회 유목사회,오스만민족사회 ,스파르타사회를 언설하였다. c상술한 문화학사조외에도 문화공능주의학파, 문화 인격학파,결구주의문학학파,인류의식상징학파 등도 문화에 대한 세부적인 구체적인 연구를 치밀히 진행하여왔다.
13    문화필록3 중국근대로부터의 문화비교와 문화운동 맥락 댓글:  조회:2549  추천:108  2008-01-31
문화필록3   중국근대로부터의 문화비교와 문화운동 맥락   문화의 3가지 형태특징에 대한 리해를 하기 위하여 중국근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에서 진행된 동서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의 맥락을 더듬어보는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근대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인의 동서방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은 시작에는 수동적인 표현을 많이 보이였다. 아편전쟁이후 청제국의 기세가 기울어지면서 일부 관료배들은 외래세력의 핍박아래 동서문화비교를 진행하였고 청제국 패망의 원인을  물질문명의 락오성에 귀결하였다. 결과 총과 대포에 대한 갈망과 근대산업에 대한 요구성을 <<양무운동>>이라는 력사사건으로 표현하였다. 그 뒤에는 물질적인 차원을 떠나 사회제도의 차이성에서 원인을 찾는, 강유위 양계초를 대표인물로 하는 유신파들이 광서황제와 자희태후를 리용하여 <<백일유신>> 이라는 력사사건을 만들게 된다. 또  유신실패 뒤에는 진독수 호적을 대표로 하는 문화거인들이 나타나 중국락오의 근원을 정신문화라는 차원에서 탐색하였고 문화운동의 결과는 바로 <<5.4운동>>이다 . <<양무운동>>으로부터 <<백일유신>>에로 다시 <<5.4운동>>의 전환이 바로 근대 중국의 동서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의 맥락이며 물질문화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제도문화에로 다시 정신문화에로 운동한 과정이고 결과이다. 력사는 반복법이라는 우스개를 하기도 한다. 당대에 이르서서 진행된 개혁개방도 사실은 문화비교와 문화운동이라는 근본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화국봉시대에 일본으로부터 생산라인을 구입하여 상해에 큰 강철회사를 만든 일부터 시작하여 80년대 중엽에 일어난 <<문화열>>이라든가 사상개방이라든가 사회문화 현상에로의 진입, 그리고 근년에 다시 나타나는 소위 신유학현상의 출현도 사실은 중국 당대의 동서문화비교와 문화구축이 물질적인 사회제도적인 정신문화적인 3 단계를 걸치고 있다는 입증물이다.  
12    문화필록2 댓글:  조회:2633  추천:74  2008-01-31
문화필록2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문화를 떠나서는 생존할수 없다. 하지만 문화에 대해 전면적인 전문적인 리해를 지닌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익숙한것이 잘 아는 사물이 아닌것처럼(熟悉并不等于熟知)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문화로서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문화를 대체할수는 없다.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언론을 계속하려면 문화의 형태와 특징, 문화의 표현방식에 대한 개괄적인 언술이 필요하다. 그럼 문화란 어떤 형태와 특징을 지니고 있을가? 인간과 인간사회와 련관성을 지닌 사물은 너무나도 복잡다단하며 또한 문화는 動적인 인류력사속에서 수다한 변화성과 표현성을 지니고 있기에 문화현상들을 분류하여 그 형태와 특징을  槪定한다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가능성 중에서 문화의 형태와 특징을 론한 설은 아주 많다. 그 수많은 설중에서 하기의 설법이 비교적 완벽하고 형상적이라 생각되므로 참고로 제공하고 싶다. 문화는 球체로서 3 분분으로 귀결된다. 1외곽부분: 문화가 이루는 물질적인 문명이다 . 인간의 비애성으로도 표현되는 물질의뢰성은 인류의 동물적인 생리성에서 기원이 된다. < 먹어야 량반> < 살아있는 개가 죽은 신선보다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생존에 있어서 의식주가 제1의 결정적인 인자이다. 때문에 어떤 문화이던지 초급적인 목적은 물질생산과 물질생활에서 반영되며 또 물질적인 표현을 이룬다. 그 물질적인 표현은 또 생산도구와 생활용품으로 나뉘여진다. 문화의 물질성은 可視성을 제공하는 露出의 의미를 지닌다. 부동한 문화 또는 부동한 문화권에 대하여 비교를 진행 할 경우,문화의 외곽부분에 대한 비교가 직접적인 비교로 표현되고 있다. 2내심부분: 인간의 군체성은 인간사회의 물질생산과 물질소비의 규모화과정에 사회적인 조직적인 보장을 요구한다. 동일한 자연조건하에서도 생산력수준의 차이로 말미암아 생산조직과 생산방식은 부동할수도 있다. 생산조직과 생산방식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각종 시회제도가 바로 문화의 내심부분이다. 사회제도는 정치제도를 비롯한 여러가지 제도를 유기품이며 흔히는 제도문화라고 표현하는 실례가 많다. 사회제도는 자연적인 선택을 거친 사회운영의 루루로서 외곽문화인 물질문화보다는 은페성을 다소 지니게 된다. 때문에 문화비교에 있어서 문화의 내심부분에 대한 비교는 실증주의방법보다도 사변적인 력사적인 형이상학적인 방법이 많이 도입되여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다.        3핵심부분: 문화의 핵을 이루는 부분은 문화정신으로서 세상을 살어가는 근본적인 태도와 사유방식이다. 문화정신은 문화의 내심부분보다도 은페성이 강하며 <<세상구경>>을 못한 개인과 집단은 부동한 문화정신에 대한 감수성이 락오되여있다. 개방적이고 활동적이고 포용적인 전통과 경력을 지니였으며 사변성 론리성이 강한 개인과 집단은  문화의 핵심부분에 대한 감수와 리해가 민감하지만 그 반면을 이루는 개인과 집단은 문화비교에 있어서 흔히는 외곽부분에 머물기 십상이며 <<누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서 자고 어떻게 다니고>> 하는 물질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면서 간혹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입고 어떻게 자고 어떻게 다니고> 하는 사회제도의 차원에서 문화비교를 하기도 하지만 정신문화라는 차원에서 문화비교를 진행함은 좀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다.      문화의 3부분은 문화표현과 문화형태에 대한 형상적인 분류방식의 결과일뿐이다. 문화의 물질적측면과 사회제도측면 그리고 문화정신측면은 상대적인 독립성을 지녔을뿐이지 3부분 모두가 나머지 2부분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다.  
11    문화필록 1 댓글:  조회:2549  추천:79  2008-01-31
문화필록 1      문화란 무엇일가? 衆言이 잡다하고 아직 권위적인 해석을 만들기는 힘들다. 한자로 文化란 紋의 化로서 언원의 원초적 의미는 인간이 지켜야 할 규칙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조화라고 해석이 된다. 그러므로 동양한자권에서 말하는 문화란 인간생존에 있어서의 준수하여야 할 리용하여야 할 객관법칙을 두드러지게 내보이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명이 되여있다. 하지만 서양권에서 말하는 문화란 고대 라틴어와 영어에서 지닌 어원의 의미가 정신경작으로 해석이 되여있으며 인간생명에 내재하는 생명초월의 욕망을 두드러지게 내보이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판정되여 있다. 이처럼 문화에 대한 언어적인 리해를 동서양식으로 구분한다면 동서양권이 문화에 대한 느낌과 내용표현이 조금 부동하다. 동양은 문화의 결과성과 객관성을 강조했고 서양은 문화의 출발점과 주관성을 강조했다. 문화에 대한 경전적인 해석이 160가지 된다는 설도 있지만 어느 설도 문화란 인류를 떠나서는 존재하할수 없는 현상이고 개념임을 공인한다. 인간생명이 없이는 인간사회가 없이는 문화를 운운할수가 없다. 한다면 왜서 동물세계에는 문화가 없고 인간사회에는 문화가 생성되고 발육되고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고 있는가는 물음에 문화란 인간의 제2자연성이라는 해석이 비교적 합리한 해석으로 생각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고리에서 모든 동물들은 생존에 적합한 신체특징과 기능을 지니고 있지만 유독 인간만은 여러 종 동물들과 겨눌만한 신체특징과 기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힘과 속력에서 많은 동물과 비교가 아니되고 또 비상을 한다든가 물속에 잠입한다든가 등등의 신체적인 우세를 지니지 못했고 또 어떤 종류의 동물처럼 생리의 어느 부분이 특별히 발달되여 생존을 지속할수 있는 생리능력도 없다.(례를 들면 후각 촉각 시각이 고도로 발달된 동물) 때문에 인간은 기나긴 생존과정에 대뇌를 발달시켜 인간의 제2자연성이라는 문화를 촉구하면서 생물고리의 최상을 차지하게 되였다. 문화의 제2자연성은 문화가 존재하는 종극적인 원인으로부터 출발하여 문화에 대해 진행한 해석이다.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문화와 문명이 합일성을 보이는 현상이고 개념이다. 다만 문명이란 문화가 만든 결과이고 표현이라는 점으로 보면 문명이란 문화의 성과성에 대한 해석으로도 보여진다.    문화가 생성된 원인과 문화가 만들어주는 결과 모두가 인간과 인간사회를 떠날수 없듯이 문화가 존재하는 과정도 인간 그리고 인간사회를 떠나지 못한다. 문화의 발생원인과 발전과정 발전결과로부터 보면 문화의 제일 뚜렷한 특징은 인간사회성이라고 인정된다. 문화의 다른 특징은 례를 들면 전파성 군체성 등등도 모두가 문화의 인간사회성이라는 특징으로부터 배태되였고 또 인간사회성으로 귀결이 가능하다.  
10    이천 화재에 부쳐 댓글:  조회:2528  추천:87  2008-01-17
         이천 화재 참사뉴스를 접하면서 울고싶었다. 울었다. 살아가려면 로동을 해야 할거고 로동을 하면 지구땅 어디에서든지 로동사고를 백프로로 면한다는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는데 왜 울고싶었을가? 울었을가?     전번달인가 우루무치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인명손실도 빚어내였는데 나는 큰 관심을 보인적도 없고 울고싶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헌데 왜 이천 화재는 나의 신경을 크게 건드리고 있을가?           10월에 고향에 돌아가니, 일을 할만한 분들은 거의가 한국으로 가있어 보고싶은 형도 형수도 누나도 조카들도 다 못보고, 한국행을 했다가 반년만에 귀국하여 위암을 앓는 매형을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울고싶었다. 울었다.        둔탁한 호미밖에 모르던 족속들이, 좋은 공부 못하여 못배운 사람들이이 땅에 금덩이가 우글우글하다는 고국으로 건너가, 물론 여러가지 악질적인 습성과 인성에 젖어있어 물의를 빚어내고 한국사회에 페단을 끼치기는 하지만, 물론 외화를 벌어 연길에 돌아와 고급아빠트도 사고 식당놀이도 하고 한다지만, 물론 모두가 애기 낳기를 싫어하는 세월이라 하지만은 애기를 업고 다니는 엄마들이 끼이지 않는 연길 풍경속을 거닐면서 울고싶었다. 울었다.        우리들 신세가 나를 울고싶게 만든다. 또 기정된 신세에 도전을 못하는 현황이 나를 더 울고싶게 만든다. 중국의 여러 동네를 다녀보면 자연조건과 인문환경이 연변보다 아니된 동네도 많다. 그런 동네에 사는 족속들이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은 삶을 영위하는 정신세계가 우리보다 많이 좋음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의 고태연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크게 부러웠었다. 가난의 때를 좀 벗기는 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가난의 여백이  많이 남아있다. 물질과 금전에 대한 생각들이, 가정과 사회에 대한 생각들이,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로 하여 빚어지는 드라마는 나를 울고싶게 만든다. 울게 한다. 이천 화재를 두고 내가 할만한 일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남철심시인의 시 한수를 부친다.                                       네가 죽던 날                          남철심   네가 죽던 날 나는 아침을 먹고 이를 닦았다   소가죽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지하철을 타며 하품을 했다   조간지를 펼치다가 얼핏 너의 이름을 보고 시선을 다른 지면으로 넘겨갔다       타임카드에 팔아먹는 시간을 찍어놓고 온 하루 너를 잊고 살았다   지쳐서 돌아오는 길에 한잔 하고 나는 울었다   네가 죽는 날 살아서 나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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