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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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별세, 향년 58세 댓글:  조회:338  추천:0  2021-07-11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별세, 향년 58세     연변대학 조한문학원 우상렬(禹尚烈) 교수가 2021년 7월 10일 오후, 지병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향년 58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2021년 7월 13일(화요일) 오전 9시 연길장의관에서 엄수된다.     고 우상렬 교수는 1963년 3월 심양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후 선후로 조선 김일성종합대학 객좌 교수, 한국 배재대학교 객원 교수, 사천대학 박사후 연구원 등으로 강의와 학술연구에 정진했다.     주요저서로는《광복후 조선족현대문학연구》,《서방미학사개론》,《한국학산책》등 다수가 있다.  
4    무제 댓글:  조회:2899  추천:78  2007-11-16
  뚜푸~ 연변이 어떤 곳이냐? 조선족이 많이 사는 곳. 조선족이 많이 사는 곳이니 술놀음이 많은 곳.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연변에 있을 때 술에 절여 있었다. 몸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났다. 1차, 2차, 3차에 새벽에 두부-뚜푸~ 소리가 날 때까지 퍼 마시다나면 녹초가 될 때가 많았다. 여기에 이튼 날 땡하고 해 뜰 날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고 머리가 땡 해나서 하루 점도록 누워있는 꼬락서니는 내 스스로도 못봐주겠다. 그래서 이제 술은 절대 안 마셔, 술 마시면 개아들놈이야 하면서도 또순이, 갑순이, 금순이를 붙여주면 또 한잔 하는 내 꼬락서니라구야 정말 못 말리지. 그리고 또 후회하고...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것이 저 멀리로 도망가기. 그런데 바로 이때 학교당국에서  포스트닥인지 무언지 나도 잘 모르는 닥을 하러 저 멀리로 가라니 어디 이렇게 아다리가 맞아떨어질 수 있으랴! 이래저래 나는 복 있는 놈이다. 그래 나는 비행기를 타고 훨훨 날아 이 머나먼 남쪽 땅에 와 있다. 처음에는 그래도 노마에 가면 노마법을 따르는 식으로 적응을 하느라고 호기심에 신비감까지 느끼며 그럭저럭 보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영 말이 아니다. 내 꼬락서니를 좀 보라. 하루 점 도록 앉아 하는 짓이란 책하고 씨름하기. 그래 이젠 지겹다, 지겨워, 책도. 어떤 놈도 나를 한잔 하자고 불러주지 않는다. 연변에서 그렇게 흔하게 마신 술 한 잔 할 친구 없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내 친구가 없다. 외롭다. 쓸쓸하다. 왕따 당한 느낌이다. 한없이 잡쳐지는 기분. 그래서 ‘잔 들고 권할 이 없으니/달을 불러 마시노라/달빛에 내 그림자 해서 세 사람이니/술 맛이 절로 나네’,「月下獨酌」의 이백시가 절로 읊어진다. 나도 시인이 되려는가봐. 오랜만에, 정확히 말해서 가물이 콩 나듯이 어쩌다 술 장소가 생기면 나의 기분은 붕 뜬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나의 기분은 풍선이 펑 하고 터지듯이 곧바로 터지고 만다. 술은 있으되 술 마실 친구들이 없다. 냠냠 맥 물 같은 포도주나 맥주를 한 잔 부어놓고 마시는 흉내만 내고 안주만 냅다 먹어주기에 여념이 없는 작자들. 점잖고 세련된 척 하지만 먹기에 바쁜 너희들, 내 보기에 탁하다 못해 민하다. 그래서 내가 붙여준 이름 먹자주의들, 딱 맞다 딱 맞아. 모두들 잘 먹어 얼굴에 게기름이 번지르하다. 못 먹은 나만은 비루먹은 개처럼 깨죄죄하다. 실은 술만 퍼 마시는 사이 먹자주의자들이 어느새 싹 먹어치우고 말았으니, 못 먹는 것도 당연지사지. 아, 연변아, 그립다.‘床前明月光,疑是地上霜./擧頭望明月,低頭思故鄕.’이백의‘靜夜思’가 아니라 나의 ‘靜夜思’로 받아주렴. 나의 그 술친구들 그립다. 먹자주의자들보다 세련되지 못한 것 같지만 훨씬 멋이 있는 나의 마시기주의 친구들이 그립다. 철이야, 돌이야, 땡이야, 내 연변에 가면 술 사줘야 해. 많이많이. 내 여기서 마시지 못해 기갈 들었던 만큼. 아니, 더 많이. 또순이, 갑순이, 금순이도 부르고. 우리 술상에서 세속의 골치 아픈 모든 거 다 털어버리고 형님에, 동생에, 아저바이, 조카... 권커니 작커니 참 재미있고 멋있었다. ‘한 잔 먹세그래, 한 잔 먹세그래...’‘將進酒 ’의 송강정철이 우리가 아니냐? 그래 영웅호걸이 따로 있냐?  한 잔 하고 호쾌하게 천하를 호령해보는 것도 내 멋이지. 사실 나는 영웅호걸이고 자시고 다 떠나 그저 통하는 수컷들 몇이 만나 별 볼 일 없이 한 잔 하며 시시컬컬 희희작작 거리는 것이 내 인생의 최대낙의 하나다. 여기에 암컷 몇이 끼어들면 더 좋고. 암컷이야 통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다다익선. 아이 다 키운 놓은 아준마들이 할 일 없이 만나서 맥 물 놓고 인생에 최대의 낙인양 수다를 떨듯이 말이다. 근엄한 책보기와 논문 쓰기에만 돌입한 중대가리 같은 내 여기 인생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래 술 마신다고 못해내는 일이 어디 있냐? 더 잘 해내는 우리가 아니냐? 잘 나도 내 청춘, 못 나도 내 청춘... 우리 내 멋대로 살기요. 이제 우리 연변에서 뚜푸~ 소리날 때까지 마시기요! 2007.11.1 中國左翼作家聯盟 1920-30년대는 적어도 동아시아 범위에서 무산계급문학운동이 팽배하던 시기이다. 일본, 조선, 중국에서 무산계급문학단체들이 연이어 결성되었다. 일본의 ‘나프’, 조선의 ‘카프’, 중국의 ‘左聯’이 그 전형적인 보기다. ‘左聯’은 ‘中國左翼作家聯盟’의 약칭으로서 1930년 3월 2일 上海犊樂安(DARROCK)路233號에 있는 중화예술대학 청사에서 성립을 선포했다. 현재의 上海多倫路文化名人街에 있는 虹口區多倫路201弄2號가 그 자리다. 이 청사는 남향으로 좌정한 3층 서양식 건물이다. 이 청사는 1980년 상해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고 2003년 1월에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명명되었다.               ‘左聯’성립대회가 열린 중화예술대학청사정면   ‘左聯’성립대회터기념관의 1층에는 성립대회터가 있다. 당시 50여명이 성립대회에 참석했다. 연단 바로 앞 석에는 대회에서 천거한 3인의 주석단성원인 魯迅,沈端先(夏衍), 钱杏顿이 앉았다.         ‘左聯’성립대회가 열린 회의실   ‘左聯’성립대회에서 潘汉年이 중국국공산당을 대표하여 연설을 했다. 그리고 冯乃超가 준비경과보고를 하고 郑伯奇가 강령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그 다음 ‘左聯’의 이론강령과 행동강령을 통과하고 ‘맑스주의문예이론연구회’를 성립하였다. 마지막에 魯迅이 「좌익작가연맹에 대한 건의」란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대회에서는 魯迅,沈端先、冯乃超,钱杏顿,田汉,郑伯奇,洪灵菲으로 구성된 7인 집행위원을 선거하였다. 그리고 蒋光慈,周全平이 후보집행위원으로 선거되었다. 魯迅을 비롯한‘左聯’의 7인 집행위원   회의는 오후 2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행되었다. ‘左聯’성립대회터기념관 2층에는 ‘창건․발전’, ‘문학성과’, ‘반항․희생’,‘기념․연구’4개 부분으로 된 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별도로 한 칸에는 ‘左聯’맹원들이 사용하던 일부 유물들이 놓여져 있다. ‘左聯’맹원들이 사용하던 일부 유물 ‘左聯’의 길은 험난하였다. 그것은 국민당 반동정부의 진압을 받기도 한 피비린내 나는 길이었다. ‘左聯’5열사는 이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1931년 1월 17일, 5명의 ‘左聯’맹원이 漢口路에 있는 上海東方旅館에서 회의하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는데 결국 2월 7일 龍華에서 희생되었다. 魯迅은 ‘左聯’5열사의 비보를 듣고는 馮雪峰과 더불어『前哨 ․ 紀念戰死者專號』라는 ‘左聯’기관간행물을 펴냈다. 그리고 국민당 반동정부를 성토하는 많은 글을 썼다.「잊어버리기 위한 기념」이라는 유명한 글은 바로 이때 쓴 것이다. ‘左聯’성립대회터기념관 뒷 화원 내에는 ‘左聯’5열사의 조각상이 있다. ‘左聯’5열사 조각상 ‘左聯’은 1936년 봄에 해산되었다. ‘左聯’은 중국공산당이 리드하고 魯迅을 기수로 한 혁명문학단체였다. ‘左聯’은 ‘5.4’신문학전통을 계승하고 맑스주의문예이론을 소개하고 전파하였으며 무산계급혁명문학을 제창하고 진보적인 문예대오를 육성하였으며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문예작품을 창작하였고 국민당의 반혁명문화 ‘토벌’을 분쇄하는 등 면에서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중국현대문학사 및 혁명사에서 빛나는 한 폐지를 장식하고 있다. ‘左聯’은 새 중국의 혁명문학 전통의 시원으로 된다. 그런 만큼 상해의 ‘左聯’성립대회터는 중국 무산계급 혁명문학의 한 메카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2007. 10. 30 바가지콤플렉스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넓은 세상에 짧은 인생의 아이러니를 여행이 많이 커버해주니 말이다. 새로운 곳에 가서 호기심과 신비감의 만족과 충족만으로 나는 만족한다. 그런데 여행자들 제일 골치 아픈 거 하나가 바가지콤플렉스다. 형형색색의 토산품들이 구매욕을 자극한다. 그런데 사자니 바가지요금을 안기지 않는지~ 맞아, 바가지요금이다하고 제풀에 놀라 구매욕이 쏙 수그러들고 만다. 그래 집에 돌아가서는 샀어야 되는데, 샀어야 되는데 후회막급이다가 인편에 다시 부탁하는 해프닝도 벌어지기도 한다. 바가지콤플렉스에 놀아난 것이다. 인간의 악마 같은 존재와 요사한 존재가 만들어낸 바가지콤플렉스. 이 바가지콤플렉스는 우리를 괴롭힌다. 특히 여행의 암적 존재다. 즐거운 여행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이 바가지콤플렉스를 떨쳐버려야 한다.    자, 그럼 바가지콤플렉스를 떨쳐버리는 비결 공개. 아예 안 사는 원칙. 아무리 싸게 주니깐 사라고 물고 늘어져도 본체만체 안 사주기. 그런데 이것은 너무 소극적이고 쫀쫀하다 보니 쉽게 기분 나쁘게 번질 수 있다. 그러니 적극적이고 대범하게 생각해보자. 모든 것은 생각의 문제이니 말이다. 그래 道적인 경지로 생각을 바꾸어보자. 적어도 道敎적인 경지로 말이다. 大音稀聲, 大象無象이 아니냐. 그러니 大買無買 경지를 창출하면 된다. 아무 것도 안 샀지만 모든 것을 산 듯한 그런 느낌. 여기에 身外之物 운운까지 곁들이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 정말 物外에서 노는 道적인 경지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가령 바가지를 썼다고 하자. 바가지를 썼으니 기분 좋을 리 없지. 그렇다고 안달아 해보았자 내속만 더 상하기. 그러니 아Q적인 정신승리법이 없지 않아 있지만 베푼다고 생각하면 홀가분하다. 거지한테 베푼다는 그런 식 말이다. 내 소비수준에서 놓고 볼 때 바가지가 아니다는 생각. 일반적으로 자기 나라보다 뒤떨어진 나라에 가면 돈이 맥 있어 진다. 그래서 일반 소비는 느끈이 감당할 수 있다. 그 나라 생활수준에서 보면 비싸게 바가지를 쓴 것 같지만 자기 나라 수준에서 보면 그리 부담되는 소비는 아니다. 내 소비가 감당할 수 있을진대 왜 하필 바가지로 생각하겠는가? 기분 나쁘게 스리 말이다.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진짜 베푸는 신사숙녀 스타일도 이런 것이다. 적어도 이 몇 가지를 뇌리에 떠올려보면 바가지콤플렉스는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 2007.11.1 나와 선생 인생은 아이러니다. 내가 샌님이 되었으니 말이다. 워낙 나와 선생은 악연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선생들한테 많이 당한 느낌이다.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학벌이 높아지면 질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몇 가지를 들어본다. 소학교 때 별로 잘 못한 거 없는 것 같은데 젊은 체육선생한테 한번 맞아 터졌다. 초중 때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여 내내 지각을 지는데 세워놓고 제 자리로 잘 들여보내지 않는데 불만을 표시하느라고 항상 쉬엇 자세로 비뚤하게 서 있다가 그만 우리 담임선생한테 복사뼈가 채여 탱탱 부어나기도 했다. 내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본 우락부락 싸움 잘 하기로 이름난 둘째 형이 주먹을 휘두르며 윽윽 하자, ‘거저 때렸겠나? 맞을 짓을 했으니깐 때렸지. 뇌두라!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준게다’라고 아버지가 으흠하며 말렸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중에 올라와서 수학시간에 소설 <수호전>을 보다가 수학선생한테 들켜 그 남한테 빌린 소설을 갈기갈기 찢기우기도 했다. 나의 문학꿈이 산산이 쪼각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소학교에서 고중을 다닐 때까지는 분명 사도존엄을 비판하던 때이건만 우리 선생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드센지? 우리는 많이들 기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지위 臭老九고 무어고 떠나 선생하면 질색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 연변대학교 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 졸업하면 중학교 샌님이 된다는 말에 입학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 대학 붙기가 하늘에 별 따기건만. 그런데 그때 입학통지서가 온 대학에 가지 않으면 1년간 대학입학시험 자격을 취소하는 판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 것이 연변대학교이다. 1년간 놀며 그럭저럭 공부하다가 돌아오기로 작심하고. 그런데 1년간 공부하는 사이에 어느 새 대학공부가 재미났고 연변대학에 정 들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샌님으로 배치 받아가는 나는 꼭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가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강의는 그럭저럭 떼우고 이판사판으로 석사연구생시험을 준비했다. 붙으면 새로 공부하고 못 붙으면 下海하고. 그런데 개빵으로 붙었다. 연구생공부를 무난히 끝마쳤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나를 대학교 샌님으로 들어앉힌다. 대학교 샌님이고 뭐고 선생노릇은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하면 된다, 잘 한다 식으로 짜른 바지 춰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 2-3년하고 박사를 한답시고 한국에 유학행을 떠났다. 그런데 지도교수와의 악연은 나를 너무나 피곤하게 하였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번역 출판한 책을  갖다 바치면 그 책을 탕, 탕 책상에 매치며 전공에 아무런 관계도 안 되는 이 잘난 책을 왜 번역하는가하며 야단이다. 용돈 좀 마련하느라고 진행한 번역을 이렇게 닥달하니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가난한 중국유학생의 처지를 못 알아주는 지도교수가 너무나 야속하고 얄미웠다. 이래저래 나는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꼬이고 꼬여 결국 박사학위 논문도 10년 가까이 가서야 겨우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박사학위는 정말 눈물 젖은 박사학위.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줄곧 대학교 샌님노릇을 해왔다. 어쩐지 이때쯤은 대학교 샌님이 싫지 않았다. 나는 항상 학생들을 너그럽게 대해왔다. 嚴師出高徒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하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 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로 대입해본다. 선생은 시어머니, 학생은 며느리, 여기에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듯이 학생도 선생으로 될 수 있고... 그리고 시어머니가 된 며느리가 새로운 며느리를 대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를 상정해본다. 시어머니 위엄을 살려 내가 당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보아라하는 식. 그리고 이해심이 앞서며 오히려 인간적인 배려를 많이 해주는 식. 선생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도 이 두 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다 할 때 나는 단연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웃으며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식으로 보다 많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자율에 맡기는 유연함을 보인다. 2007. 11.2   작은 것의 미 미학에는 어떤 대상물이 미로 되는 데는 적중한 크기여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중함을 벗어나는 적중함보다 큰 것에서 미를 찾기 좋아하는 듯하다. 여하튼 많이, 큰 것, 다다익선... 맹목에 가까운 아집. 인간의 욕망의 팽창으로 보아야 하나. 그런데 인간은 분명 적중함보다 작은 것에서 미를 찾는 경향도 있다. 작은 것의 미가 바로 그것이겠다. 멋대가리 없이 훌쩍 커버린 어른보다는 강보에 싸인 어린이가 고와 보인다.  우리가 애완용이라고 키우는 것들도 보면 전부 손에 가지고 놀게 좋도록 작은 것. 큰 개가 아니고 강아지... 이런 거. 커쿨지게 큰 남자보다는 가날프게 작은 여자가 곱다. 조비연, 중국 한나라 때 미인. 작은 미인. 너무 작아 한성제의 손바닥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정말 매미허리에 버들가지 같은 작은 유연함에 바레라도 추었겠지.  등소평, 이름처럼 작고 평평한 머리. 큰 것들은 쿵 하고 넘어져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 해도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군 하는 영원히 넘어질 줄 모르는 오또기. 작은 고추 매운 식의 작은 거인. 이런 역설이 등소평을 더 없이 멋있는 사나이로 만든다. 서양사람과 우리 동양사람을 비하면 우리 동양사람이 작다. 육식을 하는 그들과 곡식을 먹는 우리의 차이라 할가. 서양사람은 키가 큰 만큼 주먹질 권투에 능하다. 그러나 작은 우리는 아랫도리 발놀림을 잘 한다. 중국의 무술이고 한국의 태권도라는 것도 주로 이런 발놀림이다. 키가 작은 한국군인하고 키가 큰 미국군인이 싸움을 할 때 키가 작은 한국군인이 발놀림으로 키가 큰 미국군인의 아랫도리를 공격하면 이기기는 떼놓은 당상이라고 한다. 그 거시기라는 것도 그렇단다. 여자들 꺼는 잘 모르지만 남자들 꺼는 분명 ‘양놈’들이 우리보다 크단다. 그래서 우리를 기죽게 한단다. 그런데 우리 것은 작지만 그들보다 더 빻빻하게 뻐기고 고사포를 더 멋지게 쏴댄단다. 사실 이런 힘의 논리만이 아니고 작은 취미를 많이 드러내는 우리 동양은 바로 이 작은 것으로 승부한단다. 미국사람, 마우제이의 한 종류. 기발한 창의력은 있어 기상천외의 희기한 것을 잘도 만들어낸다. 반도체 라디오, 처음 그들이 만들어낼 때 들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정도로 컸다고 한다. 그런데 모방을 잘 하는 일본이 어느새 모방하여 포켓 반도체를 만들어내니 그것이 세계에 유행했단다. 그리고 미국에서 컴퓨터를 집채 같이 크게 만들어내니 일본에서는 깜찍하게 만들어내고 냉장고를 우둑지게 만들어내니 산듯하게 만들어내고... 결국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벌어들이는 격. 그래서 미국에서 무슨 세계지식재산권보호니 하는 것을 만들어내기에 용을 뺏다는 것이다. 깜직한 소일본은 분명 작은 것의 미의 재미를 톡톡히 본 듯하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한국의 석학 이어령이 지적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정말로 적중하다.   나는 조 작달마한 새기들이 어떻게 시집가지 하고 항상 노파심을 태울 때가 많다. 그런데  고 작달마한 새기들이 시집만 잘도 간다. 나는 한국 드라마『소문난 칠공주』를 보면서 고 조그마한 땡칠이를 누가 데려갈고 하고 은근히 근심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법대생이 프러포즈고 자시고 막 달려들지 않는가? 고 작지만 또르르한 땡칠이의 눈에 법대생은 빠져들고 말았네. 세계 많은 도시를 죽 살펴보면 수도는 한 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많은 것의 중심지가 되면서 인구, 면적 할 것 없이 비대해진다. 사람이 바글바글 하다 보니 사람이 귀찮아질 때가 많다. 그러나 저 흑룡강 북대황에 사람이 하도 적다 보니 사람을 보기만 해도 반가울 때가 많단다. 비대해진 수도를 줄이기 위해 왕왕 주위에 작은 위성도시를 건설하여 인구의 흐름을 유도한다. 나는 북경이나 상해 같은 큰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만나자해도 버스 타고 택시 타고 지하철 타고 찾아가기가 바쁘다. 만나는 즐거움보다 가는 과정이 더 고통스럽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기가 반갑지 않다. 아예 포기하고 싶을 때가 더 많다. 나는 우리 연길을 좋아한다. 걸어서 1시간 이내로 동서남북 어느 방향이든지 가 닿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연길의 아담사이즈보다도 작아 보이는 1시간 생활권이 참 좋다. 현재 연룡도니 뭐니 하며 큰 도시를 만든다고 야단들인 것 같은데 나는 그리 반갑지 않다. 현재 내가 잠간 와 있는 가히 세계적으로 제일 큰 도시라고 할 수 있는 3200만 인구의 중경직할시를 보니 시내에서 한 번 옮기는데 차만 타다나면 하루해가 어느새 다 가고 마니 좋은 세월 다 보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땅이 넓은 중국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워낙 출장을 가기 좋아하고 여행을 하기 좋아하는데 정말 내 인생에 지겨운 차속에서 보낸 시간만 해도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안티테제로 한국을 좋아한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1일 생활권의 소한민국이 좋다. 하루면 온 나라 어디든지 휘젖고 다닐 수 있어 좋다. 어느 경제학자의 말을 들어보니 현 단계 전 세계가 시장경제의 네트웍으로 돌아가는 마당에는 덩치가 작은 나라가 기동영활하게 잘 적응하고 대처할 수 있어 좋단다. 같은 논리로 대기업이나 그룹보다는 중소기업이 시장경제를 휘젖고 다닐 수 있는 여지가 더 많다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분명 작은 것을 더 선호해 왔다. 러시아 마우제이 큰 명태보다는 우리의 작은 명태가 더 맛있고 좋다. 한족들 큰 오이보다는 작은 조선오이가 더 좋고, 한족들 큰 고추보다는 작은 조선고추가 더 맵고 맛있고. 그렇쟈? 2007. 11.12 내 이름은 돈 개도 안 먹는 돈, 더러워! 퉤 하고 땅에 던져 보았다(나는 이렇게 부실하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개미떼들처럼 달려든다. 너도 나도 줏겠느라고. 에익, 사람들 개보다 더 더럽다. 나는 매일 강의를 한다. 학생이고 자시고 고 새별 같은 눈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금전으로 되어 보인다. 식당에 손님들이 와자작 들어온다. 순간 식당사장의 눈에 와그르르 돈이 굴러들어오는 모습으로 변한다. 의사는 병 주고 약 준다. 죽기는 바라지 않는다. 죽지 않고 겔겔 하면서 비싼 약 많이 쓰기 바란다. 병 주고 약 주기의 아이러니, 이 역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지? 세계 예술거장 챠플린은 자기의 영화『도시의 빛』인가에서 아이가 유리를 깨면 어른이 가서 해 넣어주고 돈을 버는 이 세상 돈에 얽힌 황당한 먹이사슬의 세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돈이 생겨나서부터 이런 거다. 見錢眼開가 아니냐? 돈이 우상이다. 그러니 세계문학사에 3대 수전노가 생겨나지 않았느냐? 쉐익스피어 주인공의 돈타령-검은 것을 희게 하고 파파 늙은 노파를 새파란 처녀로 둔갑시킨단다. 우리 문학사의 흥부의 돈, 돈, 돈 돈타령... 나는 요새 이상한 병에 걸렸다. 돈병에 걸렸다.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는지 아랫도리가 맥이 쫙 빠지는 것이 두 다리가 휘청휘청해난다. 그래서 부부 간에 천륜지락이고 자시고 정말 귀찮기만 하다. 그런데 나의 거시기는 돈을 보면 흥분한다. 그래서 우리 마누라가 그 짓을 하고 싶으면 야, 돈 봐라! 하고 빨락빨락 백 원 짜리 한 장 내들고 꼬신다. 그러면 그 놈은 슬슬 발동이 걸린다. 그기에 야, 한 장 더 하면, 좀 더 머리를 쳐들고, 잘 한다, 또 한 장 더 하면 머리를 중천에 들고 , 잘 한다, 또 한 장 더 하면 완연한 고사포가 된다. 그래서 우리 마누라가 나에게 지어준 이름-남자기생. 2007. 11.13 하늘을 쳐다 봐!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짧은 인생에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요 연길 좁은 세상에만 맴돌아 치겠나, 이 넓은 세상에 말이다. 이렇게 생각만 하면 나는 곧 바로 떠나간다. 저 멀리로. 기차를 탄다. 지겹도록 타는 기차에 좀 질린다. 그래서 옆에 사람과 말을 걸어본다. 그런데 말은 한두 마디 안팍에 끊기고 만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는 말을 하기 싫어하는 법인가봐. 그래서 저 앞에 예쁜 처녀동지를 미학적으로 감상한다. 그런데 그 처녀동지는 나의 정겨운 눈을 ‘流氓’이라는 한 마디 말로 밀막아 버린다. 참,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말할 사람이 없고 보아 줄 사람이 없다. 외롭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차창으로 저 먼 산, 먼 하늘을 바라보기. 세월아, 네월아, 하루 종일 쉼 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영혼은 흰 백지상태가 되고 만다. 나는 이 백지상태의 영혼으로 이곳저곳을 헤맨다. 이곳저곳을 헤매다보면 오만가지 사람을 다 만나건만 나는 늘 외롭다 못해 쓸쓸해난다. 그러면 나의 영혼은 멍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떠났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는 만나 왁자지껄 한 잔 하며 잘 놀아댄다. 그런데 나는 계속 외롭고 쓸쓸하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처럼 자기를 알아 줄 사람이 어디 있나 말이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잘 모르는 인간이 아니냐? 그래서 옛 사람들은 말했던가, 한 생에 知己 하나만 생겨도 만족스럽고 행복한 일이라고. 그래서 나는 등산을 좋아한다. 오늘도 산을 찾아 간다. 李白의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의 「獨坐敬亭山」을 외우며. 산꼭대기에 앉아, 외롭고 힘이 들 때는 하늘을 봐!하고 외쳐본다. 2007. 11.12 바가지콤플렉스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넓은 세상에 짧은 인생의 아이러니를 여행이 많이 커버해주니 말이다. 새로운 곳에 가서 호기심과 신비감의 만족과 충족만으로 나는 만족한다. 그런데 여행자들 제일 골치 아픈 거 하나가 바가지콤플렉스다. 형형색색의 토산품들이 구매욕을 자극한다. 그런데 사자니 바가지요금을 안기지 않는지~ 맞아, 바가지요금이다하고 제풀에 놀라 구매욕이 쏙 수그러들고 만다. 그래 집에 돌아가서는 샀어야 되는데, 샀어야 되는데 후회막급이다가 인편에 다시 부탁하는 해프닝도 벌어지기도 한다. 바가지콤플렉스에 놀아난 것이다. 인간의 악마 같은 존재와 요사한 존재가 만들어낸 바가지콤플렉스. 이 바가지콤플렉스는 우리를 괴롭힌다. 특히 여행의 암적 존재다. 즐거운 여행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이 바가지콤플렉스를 떨쳐버려야 한다.    자, 그럼 바가지콤플렉스를 떨쳐버리는 비결 공개. 아예 안 사는 원칙. 아무리 싸게 주니깐 사라고 물고 늘어져도 본체만체 안 사주기. 그런데 이것은 너무 소극적이고 쫀쫀하다 보니 쉽게 기분 나쁘게 번질 수 있다. 그러니 적극적이고 대범하게 생각해보자. 모든 것은 생각의 문제이니 말이다. 그래 道적인 경지로 생각을 바꾸어보자. 적어도 道敎적인 경지로 말이다. 大音稀聲, 大象無象이 아니냐. 그러니 大買無買 경지를 창출하면 된다. 아무 것도 안 샀지만 모든 것을 산 듯한 그런 느낌. 여기에 身外之物 운운까지 곁들이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 정말 物外에서 노는 道적인 경지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가령 바가지를 썼다고 하자. 바가지를 썼으니 기분 좋을 리 없지. 그렇다고 안달아 해보았자 내속만 더 상하기. 그러니 아Q적인 정신승리법이 없지 않아 있지만 베푼다고 생각하면 홀가분하다. 거지한테 베푼다는 그런 식 말이다. 내 소비수준에서 놓고 볼 때 바가지가 아니다는 생각. 일반적으로 자기 나라보다 뒤떨어진 나라에 가면 돈이 맥 있어 진다. 그래서 일반 소비는 느끈이 감당할 수 있다. 그 나라 생활수준에서 보면 비싸게 바가지를 쓴 것 같지만 자기 나라 수준에서 보면 그리 부담되는 소비는 아니다. 내 소비가 감당할 수 있을진대 왜 하필 바가지로 생각하겠는가? 기분 나쁘게 스리 말이다.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진짜 베푸는 신사숙녀 스타일도 이런 것이다. 적어도 이 몇 가지를 뇌리에 떠올려보면 바가지콤플렉스는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 2007.11.1
3    ‘打倒毛主席,邓小平上台’(우상렬107) 댓글:  조회:2601  추천:86  2007-11-02
‘打倒毛主席,邓小平上台’우상렬그 친구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지? 알고 싶다. 내 이 글은 그 친구를 위해 쓴다.소학교 5학년 때다. 1975년, 온 나라가 등소평의 右倾翻案风을 反击한다고 야단법석. 그런데 어느 하루 아침 학교에 도착하니 공안들이 삼엄한 경계망을 늘였다. 전반 학교분위기가 무시무시했다. 이상하게 여기며 종종 걸음으로 우리 반 교실 앞으로 달려가니 사람들이 욱 모여 서있다. 우리 반 교실 문 앞을 원점으로 하여 회가루로 큰 반경선을 죽 끄어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반경선을 둘러싸고 게사니목을 해가지고 교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기에는 선생도 있었고 학생도 있었다. 우리 반 흑판에 반동구호가 씌어 있다는 것이다.‘打倒毛主席,邓小平上台’, 참, 기겁을 할 일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다. 어떤 나쁜 놈이 썼지? 흰 옷을 입은 공안들이 들락날락하고 사진을 찍고 자로 재고 수첩에 적고 바삐 돌아쳤다. 우리는 내심이 기다렸다. 그 나쁜 놈을 저주하면서, 아니 빨리 잡히기를 기도하면서. 그날 우리는 온 하루 공부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한 사람 한 사람 흑판 앞에 나와 분필 글 쓰 보이기도 하고 전날 저녁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를 써내기도 하며 공안들의 안건수사에 협조했다. 공안들이 인민대중을 충분히 발동한 덕택인지, 여하튼 반동구호  쓴 범죄자를 몇 일이 안되어 쉽게 잡아냈다. 그런데 잡아내고 보니 좀 맹랑했다. 우리 반에서 말이 적고 너무도 온순한 새애기 같은 친구가 잡혀 나왔다. 자기의 죄과에 대해 순순히 승인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맹랑하다 못해 저어기  놀랐다. 공안이나 학교당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그 친구 뒤에 꼭 教唆犯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 온순한 친구가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 청소년범죄 뒤에 꼭 教唆犯이 있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계급투쟁의 복잡성을 이렇게 풀이했다, 하물며 천인공노할 정치범죄사건임에라! 그래서 그 친구를 성토하는 대회의 구호의 하나가 教唆犯을 교대하라, 教唆犯을 잡아내자!였다. 그런데 정말 教唆犯이 있는지 없는지, 그 친구는 教唆犯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단독범죄로 단정짓고 그 친구를 청소년노동교양소에 보내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이 어마어마한 ‘정치범죄’사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직 세상물정을 알기에는 어리고, 더구나 복잡한 정치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에는 한참 어린 12살 좌우의 코흘리기 나이의 그 친구가 어떻게 당시 모주석의 용인 하에 ‘4인무리’가 주도하는 反击右倾翻案风运动을 정면으로 맞받아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다. 이른바 반동정치구호‘打倒毛主席,邓小平上台’를 다시 한번 보자. 당시 모주석은 계속 좌적인 노선을 견지하는 데다가 인생만년에 사물에 대한 판단도 많이 흐려져 야심가들인 ‘4인무리’들한테 이용당하는 형국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한 시기 등용되어 난국을 수습하며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고 있는 등소평을 타도하는 右倾翻案风运动을 일으킨다. 그러니 이 시기 모주석은 잘 못해도 한참 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친구 반동정치구호‘打倒’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실사구시적으로 일 잘하는 등소평이 하루 빨리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그 당시 중국 역사발전의 객관적인 요구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打倒毛主席,邓小平上台’는 잘 못된 것이 없다. 당시 시점에서 대단한 선견지명을 보이기도 한다. 그 이듬해 모주석이 서거하고 ‘4인무리’가 타도되고 등소평이 부상하면서 실제로 역사는 그와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그래 그 친구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썼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못한 감을 준다. 나는 그 친구 뒤에 ‘教唆犯’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문화대혁명말기라 등소평을 옹호하고 ‘4인무리’를 반대하는 선구자들이 실제로 역사에 등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청명 날 천안문광장에서 인민들의 주은래에 대한 추모와 ‘4인무리’에 대한 성토는 그 집중적인 폭발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教唆犯’이 코흘리기 어린이를 시켜 교실흑판에 그런 엄청난 반동정치구호를 쓰게 했다고 보기에도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이 남는다. 그런데 ‘4인무리’가 타도되고 잘 못된 것을 바로 잡는 그 시점에도 ‘教唆犯’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친구를 괴짜라고 할밖에. 그런데 그 친구의 이 반동정치구호 사건은 거저 그 친구 청소년노동교양소에 갔다 온 것으로 끝날 것인가? 그 친구 애매한 역사의 희생품으로 되고 말 것인가? 이 점 또한 석연치 않다. 2007-06-11
2    연안과 조선사람 댓글:  조회:3036  추천:106  2007-02-11
  언젠가 연안에 꼭 가보고 싶었다. 연안은 이래저래 나를 흡인하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이 순수한 혁명정열을 안고 연안으로 모여들었던가?   1.중국혁명 승리의 메카-연안  1934년 10월 모택동이 이끄는 중앙공농홍군은 정강산혁명근거지를 떠나 북상항일의 기치를 들고 첩첩으로 되는 장개석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을 뚫고 1년 여 만에 유명한 2만5천리 장정을 끝마치고 연안에 도착하여 섬감녕혁명근거지를 세운다. 중국혁명은 바로 정강산에서 불길을 지펴 연안에서 승리의 서광을 안아왔던 것이다.    나는 연안에 도착하는 길로 중국혁명의 사령탑 역할을 한 楊家嶺을 찾았다. 楊家嶺에는 연안에 도착한 중국공산당의 최고리더들인 모택동, 유소기, 주덕, 주은래, 임필시가 살던 窯洞이 있다. 이들 窯洞은 야트막한 산언덕에 나란히 있었다. 생각보다는 아담하고 깔끔하였다.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환했다. 벽은 흰칠이 되어 있었다. 안은 모두 두 칸이었는데 바로 들어서는 칸은 접객실이고 접객실과 좌우로 뚫려 있는 안쪽은 침실용이다. 사무용 책상이고 걸상, 그리고 침대 등 모든 집물은 사치함과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소박함 그 자체다. 그러나 窯洞안은 안온했다. 12월말의 맹겨울이건만. 冬暖夏凉의 窯洞이라는 말에 실감이 갔다.   모택동은 바로 이 窯洞 안의 흰 보를 덮은 더 없이 수수한 책상 위에서『모순론』,『지구전을 논함』등 중국혁명을 이끌어간 많은 노작들을 집필했다. 모택동은 자기의 窯洞 앞에 있는 돌걸상에 돌상으로 이루어진 담화장에서 미국 기자 스터랑과 담화를 하면서 모든 반동파와 제국주의는 종이범에 불과하다는 호매로운 말을 내밷기도 했다.朱德의 窯洞 앞에 있는 돌상에는 장기판과 다른 놀이판이 새겨져 있는데 그는 자기의 경위원이나 부하들과 때때로 여기서 장기를 두며 휴식의 한 때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격의 없이 후덥고 따뜻한 인정미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가고 없는 일말의 허전함을 달래보고자 그들이 잡아본듯한 우물손잡이를 楊家嶺을 떠나면서 잡아본다.  후에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楊家嶺을 떠나 대추가 많이 난다는 棗園으로 옮겨갔다. 모택동은 바로 이 棗園의 窯洞에서 주로 밤에 석유등을 밝혀놓고 중국혁명의 진로를 밝히는 많은 글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棗園의 불빛이 중국혁명의 길을 밝힌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棗園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朱德의 窯洞 안에 그때에는 꽤나 고급상스러운 긴 소파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때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임필시 등 중국 공산당의 최고급 간부들이라도 특수화라는 것이 없고 일류로 평등하게 물품을 분배받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구소련에서 증정 받은 짚차를 폐기처분하면서 스프링이 있는 앉음자리를 이용하여 그 소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스프링이 있는 소파는 고급품으로 취급되어 모택동이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가 가장 많은 주덕에게 선물로 그 소파를 주었다고 한다.   나는 중국혁명의 거장들의 체취가 슴배어있는 楊家嶺과 棗園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택동과 유소기, 그들은 동지였고 연안에서부터 손발이 잘 맞아 돌아갔다. 바로 이 楊家嶺의 中央大禮堂에서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새 중국이 건립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들 사이에는 일대 회오리바람이 인다. 정치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하는 전형적인 한 보기.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그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가 생각키웠다. 연안문예좌담회는 바로 楊家嶺에 있는 中央辦公廳樓에서 소집되었다. 中央辦公廳樓는 1941년에 지었는데 그 당시로는 상당히 멋진 청사였다. 비행기 모양으로 지어 ‘飛機樓’라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도합 3층으로 되었는데 1층의 북쪽 ‘날개’ 부분은 중앙도서실이었다. 그리고 남쪽 ‘날개’ 부분은 식당 칸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1942년 5월 2일부터 23일까지 중앙선전부에서 조직한 ‘연안문예좌담회’가 진행되었다. 근 100명에 가까운 문예일군들이 참가했다.    모택동은 바로 이 좌담회에서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을 했다. 문예는 혁명의 기본 역량인 로농병을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는 근본성적인 방향을 제시했으며 정치 제1, 예술 제2의 문예비평의 표준을 제시했다. 그리고 광범한 예술인들은 인민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사상을 개조하고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며 그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창작해야 된다고 호소했다. 모택동의 이 연설은 상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丁玲은 바로 이 연안문예좌담회 후 산서 태항산의 농촌으로 내려가 토지개혁을 반영한 유명한『태양은 상간하를 비춘다』라는 장편소설을 써서 일약 새로운 작가면모를 보이며 성장한다. 당시 가열처절한 항일의 나날에 한가히 화조월석이나 노래하고 ‘발가락이 닮았다’식을 쓰고 있을 계제가 못된다. 문학은 정치를 위해 복무하는 투쟁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시 자아의 협소한 감정에 매몰되고 센티맨탈한 감상성에 잘 빠지는 소부르죠아출신의 문예일군들이 대부분인 상황 하에서 문예의 적절한 방향설정이고 자리매김이다. 그런데 이것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며 새 중국이 성립된 평화적 시기에 좌적 정치경향에 이용되어 문학예술이나 예술가들을 일대 수난으로 내몬 것은 중국 당대역사에서 지극히 빗나간 한 보기가 아닐 수 없다.중국공산당은 문학예술을 혁명투쟁의 무기로 여기며 항상 중시해왔다. 그래서 연안시기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로신예술학원을 세웠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예술인재들은 바로 이 로신예술학원을 통해 커 갔다.  중국 공산당은 항상 선전사업을 중시해왔다. 延河를 끼고 있는 유명한 도교성지의 하나인 청량산의 ‘萬佛寺’ 입구에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중앙인쇄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陸定一 등이 골간이 되어『解放日報』등을 꾸렸다. 여기에는 또 모택동이 친필로 쓴 ‘新華書店’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신문, 잡지들을 발행하던 총 본산이었다. 현재 중국 각 곳의  ‘新華書店’의 기원도 바로 여기다. 현재 바로 이 중공중앙인쇄소와 ‘新華書店’ 자리와 멀지 않은 청량산 아래에 ‘연안신문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연안하면 우리에게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寶塔이다. 그럼 寶塔이 무엇이냐? 사실 이 寶塔은 혁명과 그리 관계가 없다. 그것은 송나라 때 세운 불교전탑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이 일어난 곳의 전탑이요, 혁명가들이 활동하던 곳의 전탑이 되면서 연안을 상징하는 명물의 하나로 되었다. 窯洞도 마찬가지다. 窯洞은 사실 정말 별 볼일 없는 주거다. 원시적인 穴居에 가까운 가장 간단한 주거방식이다. 적어도 채광도나 공기순환도 면에서 문제가 있는 줄로 안다. 그러나 연안지구 사람들은 토질 등 자연조건에 따라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 窯洞을 구축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일종 전통적인 주거형태로 고착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혁명의 수령들인 모택동, 주덕, 주은래. 유소기, 임필시 등이 窯洞에 기거하게 되면서 窯洞은 일종 중국 혁명의 요람이 되고 승리의 상징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窯洞은 홍색낭만의 기호가 되기도 했다. 연안사람들은 이 기호에 일종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연안대학 캠퍼스 운동장 오른 쪽의 산언덕에 한일자로 줄줄이 늘어선 窯洞集落은 멋지다 못해 숭엄하기까지 한다. 연안사람들은 현재 窯洞기호를 브랜드화하여 호텔 같은 현대식 건축에도 窯洞 특색을 살려 눈길을 끌고 있다.  혁명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가치를 창조하고 천지개벽을 일으키기도 한다. 연안사람들도 바로 이 혁명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서안에서 버스를 타고 연안으로 가는 도중의 도로표지판만 놓고 보아도 그것은 거저 연안이 아니고 꼭 ‘혁명성지 연안’이라 표기한다. 연안대학 교직원들은 연안대학이 중국의과대학을 비롯한 연안의 여러 대학을 통합하여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세운 종합대학이라는데도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모택동이 말한 ‘小米加步銃’에서 小米는 연안의 小米-좁쌀을 말한다. 중국혁명은 연안의 좁쌀에 떠받들여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안은 토질상 좁쌀이 잘 된다고 한다. 지금도 연안사람은 좁쌀을 잘 먹는 것 같다. 좁쌀이 찰지고 구수하다. 아침 식사로 좁쌀죽을 먹어보았더니 참 맛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연안대학의 배소기 교수는 나에게 토산품 선물로 좁쌀을 선물한다.   연안은 홍군을 키워냈다. 그래서 그들은 회색바탕에 붉은 별과 견장이 달린 소박한 홍군의 군복을 연안의 명물로 내세운다. 관광명소마다 홍군 군복을 마련해놓고 사진 한방 박아라고 야단이다. 그래야 멋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홍군의 진모습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이 찌고 머리카락이 길고 어줍잖은 표정이건만 홍군의 군복을 한번 입어보고 폼을 잡아보았다.   연안사람들은 중국 혁명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고 수령들과 같이 했다는 자부심 또한 대단한 것 같다. 棗園에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최고 수령들인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임필시의 조각상이 있다.  당지의 많은 사람들이 이 조각상 앞에 와 참배하는 것 같다. 이들 혁명수령들은 일종 신적인 존재로 부상되기도 한다. 연안사람들은 이 혁명수령들을 많이 그린 것 같다. 그들은 모택동이 연안을 떠난 후 한 번도 찾아주지 않은데 대해 좀 섭섭함을 금치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1960년대인가 1970년대에 주은래 총리가 연안을 찾아주었을 때 연안은 온통 감격과 환호성으로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 주은래 총리가 탄 승용차가 보탑 앞 길거리에서 진흙탕에 빠지자 연안인민들이 차를 들고 나아갔다고 한다. 그들은 재작년에 호금도 서기가 연안에 와서 구정을 쉰데 대해 많이 외운다. 중앙의 고위급 간부들이 자기네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데 감사해한다.   연안은 혁명의 성지이되 물질적으로 그리 풍족하게 잘 사는 것 같지 않다. 시내도 좋고 사람들의 몸에서 소박함이 많이 묻어난다. 내가 楊家嶺에 갔을 때 마침 한 窯洞에서 剪紙를 팔고 있었다. 가위로 색종이를 오려 여러 가지 모양을 낸 것이 剪紙다. 섬서성의 대표성적인 민간예술인데 어느 한 현은 전문 이 剪紙로 먹고 산단다. 그런데 이 窯洞에서 剪紙를 파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전국 剪紙시합에서 1등을 한 李福愛 여사이다. 그래서 剪紙집 하나를 골라 잡았다. 그런데 돈을 안 받겠단다. 나를 배동해간 연안대학 剪紙 전문가 배소기 교수와 잘 아는 처지라 돈을 안 받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싸움하다시피 하면서 돈을 찔러주었다. 그리고 무료로 섬북 민요 ‘信天遊’調를 듣도록 했다. 그녀의 민요는 애절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이 약동했다. 녹음을 못 해온 것이 아쉬웠다. 푸더분하게 생긴 맏며늘감 같은 李福愛 여사가 그립다.  나는 연안이 우리와 비슷한 데가 많다고 생각된다. 延河를 끼고 형성된 도시. 연안의 延河는 똑 마치 우리 연길의 부르하퉁하 같다. 그 물줄기, 그 위에 놓인 다리...   우리도 중국 혁명에 대한 자부심 대단하다.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열사비, 너무도 우리에게 와 닿는다. 그래서 우리도 위로부터의 관심을 바랐고 갈망했다. 주은래, 주덕, 동필무... 중앙의 고위급 간부들이 우리를 찾아줄 때 우리는 감격하고 환호했다. ‘연변촌놈’으로 뒤떨어지거나 왕따 당하지나 않을가 하는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서북대개발 정책과 전략, 연안사람들 대환호한다. 우리도 대환호다. 그 혜택이 우리에게도 미친다. 우리 연변대학만 해도 서북대개발 정책의 혜택을 받는 대학이다. 내가 이 말을 했더니 연안대학 교수들 말이 참 재미있다. 연변대학은 연안대학과 한 글자 차이라 형제자매나 다름 없으니 서북이고 뭐고 떠나서 응당 그런 혜택을 받아야 된다고 한다.  연안사람들 잘 살아보려고 움직인다. 우리도 움직인다. 연안사람과 우리 연변사람, 다 같이 홍색낭만에 새로운 경제낭만 꿈꾸어 볼 차례다.     2. 연안과 조선사람  연안은 우리 조선사람과 인연이 깊다. 우리 조선사람과 연안의 인연은 뭐니뭐니 해도 혁명이다. 조선의 열혈남아들이 혁명의 정열을 안고 혁명성지-연안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정률성의「연안송」, 김산의「아리랑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 하고 무정장군의 다구진 모매가 선히 보이는 듯하다...  정률성, 음악천재. 그의 음악적 재능, 영감도 사랑도 연안에서 피어난다. 1937년 10월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금빛 정장본『세계명곡집』을 들고 연안에 와서 陝北公學에서 공부한다. 1938년 3월에 졸업하고 성립된지 얼마 되지 않는 노신예술학원 음악계에 들어가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한다. 8월에 졸업한 후 항일군정대학 선전과에서 음악지도를 담당한다. 그는 1938년과 1939년 사이 음악창작의 첫 고조를 연안에서 맞이한다. 그는 1938년 봄 노신예술학원의 학생신분으로「연안송」을 창작한다. 졸업한 후에는「10월혁명가」, 「항일돌격운동가」, 「연수요」,「생산요」, 「아랑에 부쳐」 등 일련의 가곡을 짓는다. 이후 그는 노신예술학원의 성악선생으로 활약한다. 합창시리즈곡『팔로군대합창』은 이 시기에 짓는다.「연안송」과『팔로군대합창』은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음악사의 명작으로 꼽힌다.「연안송」은 정률성이 노신예술학원의 뒷산에서 연안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혁명성지 연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격정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후에 연안강당에서 열린 문예야회에서 이 노래를 불러 모택동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연안송」은 연안에서뿐만 아니라 섬감녕변구를 비롯한 항일근거지 내지는 국민당통치구 및 동남아화교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불리워지며 연안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고 항일의 뜻을 키웠다고 한다. 公木를 비롯한 많은 젊은 청년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연안으로 달려왔다고 한다.『팔로군합창곡』가운데「팔로군진행곡」은 가장 성공적인 군가로 평가되고 있다. 『팔로군합창곡』은 1940년 초에 정률성의 지휘로 연안중앙대강당에서 공연을 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1941년 5 ․ 4청년절에는 ‘음악갑등상’을 받는다.「팔로군진행곡」은 항일전쟁시기 각 항일부대와 항일혁명근거지에서 불리다가 1945년 후에는 화북지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이름이 바뀌고 점차 중국인민해방군의 군가역할을 하다가 새 중국이 성립된 후 정식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명명된다. 정률성은 1942년 5월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한다.   정률성의 이런 음악적 재능은 처녀들의 사랑을 얻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1941년 드디어 당시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대장으로 있은 사천처녀 정설송과 노신예술학원의 큰 교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무정, 군사천재. 중국 포병부대 창설자의 한 사람. 유일하게 중국 공농홍군 2만5천리장전부대를 따라 연안에 도착한 조선사람.   무정은 연안을 조선인혁명성지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1937년 1월에 조선인 공산당원 서휘와 연안에서 담화하면서 ‘화북지구의 조선청년들을 연안으로 불러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1939년에 무정은 자기가 솔선하여 사인한 섬북조선청년연명신을 발표하여 관내 각지의 많은 조선청년들을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으로 불러들여 정치교육을 받게 한다. 이때 무정의 배려 하에 이화림은 연안의 중국의과대학에 가서 배우게 된다. 그의 노력 하에 1940년대에 들어서 화북조선독립동맹본부는 진기로예변구로부터 결국 연안으로 옮겨오게 된다. 그 분회는 섬감녕변구와 진찰기변구에 두게 된다.  무정은 포병퇀의 퇀장으로 있을 때인 1941년초 주덕의 명령을 받들고 연안의 남쪽에 있는 南泥灣으로 최초로 들어가 황무지 개간운동을 벌렸다.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전범을 보였다.   1941년 9월21일 오후 2시 연안군민구락부에서 주덕사령의 조직 하에 동방 각 민족 友人이 참가한 좌담회가 열렸는데 무정은 조선인대표로 참가했으며 발언을 했다. 22일 그의 발연이 연안의『해방일보』에 실렸다. 10월 26일 무정은 연안에서 진행한 동방각민족반파시즘대표대회에서 대회주석단성원으로 선거된다. 그는 대회에서 조선인대표로서 발언을 했고 폐막사를 했다.   김산, 박학다식한 견정한 혁명가. 그는 1936년 8월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파견을 받고 섬서의 중화소베트구역으로 들어온다. 연안에 도착한 후 중앙군위의 요청에 의해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 및 화학, 물리 등 과목을 주로 강의했다. 그런데 그는 康生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내부의 좌적인 경향에 의해 결국 별 볼일 없는 소외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연안 중앙도서실의 맑스주의 원작들을 독파하며 사색의 즐거움을 즐기고 있다가 미국 기자 님 웨일즈에게 연안의 공산당 대선비로 발견된다. 그래서 그가 드팀없는 혁명가의 일생을 들려주게 되는데 님 웨일즈의『아리랑의 노래』는 이로부터 탄생된다.  조선의용군, 강철의 부대. 일찍 1938년 10월 한구가 점령당할 때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성원들은 견결히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기타 조선 혁명단체들이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하는 항일근거지 연안으로 철수 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조선의용군이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나아가는 한 계기가 된다. 그러다가 1943년 말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조선의용군 각 지대로 하여금 연안으로 들어가 군정훈련을 받을 것을 지시한다. 이리하여 백여 명의 조선의용군이 1944년 4월 7일에 연안에 도착한다. 조선의용군 총부는 연안에서 5키로 떨어진 羅家坪溝에 자리 잡는다. 이때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터가 마련된다. 1945년 2월 5일에 羅家坪溝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된다. 주덕, 임백거 등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간부들이 출석하여 축하연설을 하였다. 교장에 김백연, 부교장에 박일우가 맡았으며 과목으로는 맑스주의철학, 정치경제학, 군사학, 일본문제, 조선문제를 개설했으며 간부를 키우고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는 것을 기본 종지로 내세웠다. 이 군정대학은 변구정부로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3개의 지대로 나뉘어졌는데 제1지대 40여명은 농장생산대원이 되어 연안에서 약 15키로 떨어진 西南甘川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메밀을 심었다. 제2지대 15명은 東邊橋二購에 가서 窯洞을 파고 숙소를 짓는 작업을 했다. 제3지대는 벽돌공장을 세워 벽돌과 기와를 굽어냈다. 이외에 채소조, 목공조, 방사조, 사탕조 등을 무었다. 일부 노약자는 시내에 ‘三 . 一’상점을 세워 연안의 군민을 위해 복무했다. 후에 80여명의 조선의용군은 몇 천 명의 연안의 항일군민과 더불어 延河 강변에 연안비행장을 건설했는데 비행장건설지휘부로부터 몇 차례나 되는 표창을 받고 붉은 기를 수여받았다. 실로 조선의용군은 당시 연안의 대생산운동에서 솔선수범을 보였다.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은 실로 중국 공산당의 동지였고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국제주의전사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행사에도 초청받는다. 1945년 4월 23일부터 5월 하순까지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연안에서 열렸다. 여기에 조선인 박일우, 서휘가 정식대표로 참가하고 최창익, 박효삼이 방청대표로 참가했다. 박일우가 대회발언을 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4일 일제의 폐망소식이 전해지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사생들은 무정 등의 인솔 하에서 홰불을 들고 羅家坪溝에서 축하행진을 했다.   일제가 완전히 패망한 1945년 8월 말 신화사12일 주덕사령의 제6호 명령에 의해 조선의용군은 조선군정학교의 전체학생을 새로이 편입하여 동북에로의 진군을 다그치면서 조선인과 연안의 인연은 일단 끝난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가,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들어서 연안과 조선인은 다시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는 듯하다. 연안 시내를 돌아보노라니 보탑산과 그리 멀지 않은 번화한 거리에 있는 한 대형상가의 3층에 한국상품센터라는 간판이 버젓이 보인다. 나와 같이 다니던 배교수에게 주로 무슨 물건을 파는가고 물으니 옷류가 대종을 이룬다고 했다. 이른바 한류라는 것이 이 연안에도 불고 있는 것 같다. 고중에 다니는 배교수의 따님이 CD나 MP3로 열심히 듣고 있는 노래가 바로 한국노래라고 한다. 대서북의 편벽한 오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연안의 젊은이들에게는 ‘한류’나 나 같은 ‘조선인’들을 이젠 그리 생소하게 느끼지 않는 눈치다. 그런데 정률성, 무정, 김산... 이런 조선의 건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워낙 연안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연안대학의 배교수에게 이들 조선인들을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무정, 김산은 잘 모르겠는데 정률성은 좀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연안사람에게 그래도 정률성은 얼마간 알려진가봐. 그래서 나는 정률성에 관한 무엇 좀 없는가고 물었다. 그녀는 박물관에 가면 일부 자료들이 있을거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 박물관문은 닫아걸고, 그래서 터벅터벅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1    우상렬 프로필 댓글:  조회:4664  추천:49  2005-02-02
우상렬(禹尚烈)---------------------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과 교수1963년 3월 심양 출생.간력1971.9-1981.7 료녕성 심양시에서 조선족소,중학교 졸업.1981.9-1985.7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1985.9-1987.7 료녕성 무순시 조선족제1중학교 교원.1987.9-1990.7 연변대학조문학부 석사연구생.석사학위 취득.1990.9-1993.7 연변대학조문학부 강사1993.8-1998.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박사연구생.1998.9-2000.3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강사.2000.3-2001.3 조선김일성종합대학 조문학부 객좌교수.2001.3-2002.2 연변대학조문학부 부교수.2002. 3-2002. 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전국어전업 박사학위 취득.2002.8-현재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문예리론교연실 인민교원.2005. 3-2006. 2 한국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2007년~2009년 현재, 사천대학교 박사후 과정.(성도에 체류중)이메일: yushangli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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