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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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평] 장학규: 나보다도 못난 친구 댓글:  조회:219  추천:0  2019-07-11
나보다도 못난 친구 장학규   량영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인간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를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나보다도 못난 친구가 우리 사회에 희한하게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였다.  량영철은 쉽게 눈에 띄는 타입이다. 빼빼 마른 체구에 윷칠하듯 새까만 피부가 우선 주목의 대상이라면 머리털을 희한하게 여러가지 칼러로 염색하고 손가락이며 옷가지며 어디라 없이 악세서리를 덜렁덜렁 달고 다니는 것이 제법 왁자하게 사는 사람 같았다.  나는 천성이 조용한 사람이다. 말수도 적어 옆에서 우격다짐으로 시켜야 겨우 동에 닿지 않는 말 몇마디를 지껄이는 편이다. 어떤 모임에 가도 항상 구석 쪽에 앉아서 귀만 열어두는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 나를 보는 사람들은 글과 나를 매칭시키지 못해 무척 곤혹스러워한다.  그런 나와 량영철이가 도킹되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20여년을 정말로 친한 친구로 지내왔다. 내가 소금을 몇년 더 씹은 관계로 량영철은 지금까지 나를 형이라 부르고 있다.  나와 량영철은 1996년 초봄에 연길 송기호텔에서 있은 어느 문학상에 가지런히 당첨되면서 처음으로 만났다. 지금은 기억이 색바래져서 희미하지만 새벽까지 곤죽이 되도록 술을 마시면서 공자왈 맹자왈 했던 것만은 생각난다. 열정적인 그에 비해 나는 많이 맹추 같았을 거란 느낌은 지금도 진하다.  량영철은 그 때 고루한 문단상황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미문과 프레임에 집념하는 반면 인간세상을 정밀 해부하는 문학의 기능은 무시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단이 호도하고 작가들이 우야 몰려가는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 언젠가는 좁은 골목에 갇혀서 숨 막혀버릴 거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그의 고민은 그 때로부터 시작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으로 본 것이 전부가 아니고 귀로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니라는 말처럼 무지 살가울 것 같았던 량영철은 후에 겪으면서 보니 나보다도 더 둘변이 없고 아주 차거웠다. 어쩌면 내가 퍼그나 신사적이여서 마지 못해 차겁다는 표현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는 화려한 표피와 전혀 달리 내남에 담을 쌓고 사는 사람 같았다. 사업상 관계로 나는 자주 연길을 들락거렸다. 갈 때마다 량영철한테 전화를 했지만 무조건 단둘만 만나자는 요구를 해왔다. 제한된 시간 내에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일을 처리해야 했던 나는 그런 짬시간마저 낼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지척에 있으면서도 시종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몇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햇내기 글쟁이 하나를 대동하고 예고도 없이 목단강에 있는 출판사로 나를 찾아왔다. 그 때는 우리 집에서 대형사고가 터진 직후였고 나는 거의 페인 상태로 하루하루 원기를 잃어가는 중이였다. 량영철이가 어디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지는 알 바 없으나 아무튼 그는 무작정 나를 끌고 시골에 있는 윤림호선생 댁으로 찾아갔다.  그 날 우리는 밤을 패면서 인생과 문학을 지지벌거렸었다. 그는 경직된 우리의 문학토양에 대해 성토를 아끼지 않았다. 흩어진듯 자유로운 형식을 고집하고 내용에 이미지화를 삽입하기를 즐기는 그의 문학주장은 어딘가 초현실주의에 근접하여 실험적이고 탐구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문단에서 받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소설을 주로 쓰는 량영철은 비교적 자유스러운 짜임새를 구성하기를 즐겼다. 얼핏 읽을 때면 소설이 산문처럼 무지 흩어진 느낌이고 조잡해보였다. 나름 전통적인 창작관성에 도전하느라고 노력하는 흔적이 엿보였지만 쉽게 먹혀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량영철한테는 그게 큰 억울함이였고 또 옹이였다.  그 후 우리는 동서에서 다시 남북으로 갈라졌다. 나는 피치 못할 사연으로 산해관을 넘어 멀리 강남으로 내려갔었다. 그리고 다시 북상하여 청도에 뿌리를 내리는 10여년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목단강에서 리별한 후 나는 글 쓸 마음의 여유가 없어 10년 동안 붓을 꺾어버렸었다. 하여 문단상황을 잘 모르고 살았다.  다행히 그 사이 컴퓨터가 새로이 부상되면서 우리는 메신저로 간간히 문안을 주고 받았다. 여전히 량영철이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적었다. 목단강까지 찾아와 나를 힐링시켜주던 친구답지 않게 말대꾸 자체도 항상 미지근했다. 혀 짧은 사람처럼 말을 길게 하는 법이 없었다. 알았소, 그러기오 하면 끝이였다.  그렇게 몇마디 주고받지 않는 와중에서도 나는 그가 문학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요즘 글들이 장난이 좀 심하오 하면서 낄낄거리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게 그의 진심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소위 장난은 또 색다른 소설을 만들고 있다는 무언의 선언이였던 것이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 남들과 구별되지 않는 작가는 생존의 가치가 없다가 소설 프레임을 타파하는 그의 동기라면 인간을 적라라하게 벗겨놓고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해부에 집념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였다.  청도로 귀환한 후에도 여전히 그 식이 장식이였다. 북경 로신문학원에 다니면서 시간이 나져서 청도에 오겠노라고 간만에 어쩌다 전화가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 시간이 꽤나 흘러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웬일이냐고 물었고 그제서야 그는 량산현으로 가서 수호지 현장을 답사하고 돌아갔다고 대답했다. 친구를 실컷 물 먹여놓고 미안한 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 로신문학원에서 량영철은 한결 성숙된 작가의식을 가져온다. 그가 진정으로 잠수 타고 동면을 한 리유이기도 했다. 그는 마음의 옹이를 풀어야 했고 스스로에게 문학의 답장을 내야 했다. 그렇게 랭철해지기를 꼭 나처럼 10년을 했다.  철저히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던 이 시기에도 량영철은 참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 같다. 내가 특이하게 느꼈던 점은 완정한 스토리가 없더라도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였다. 작가가 다 말하는 해피엔딩식의 소설은 진저리가 난다고도 했다. 그 뒤로도 연변에 나갈 일이 서너번 더 있었다. 어쩐지 나는 고집불통으로 번마다 나보다도 못난 량영철한테 내가 연길 가게 되는 사연을 꼭꼭 알렸고 그러면 량영철은 알았소, 오면 전화 주오 하면 끝이였다. 분명 내가 온 걸 알면서도 전화 한통 주는 법이 없었다. 물론 나도 이미 거기에 습관되여버려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을 보다가 잊고 미처 전화를 주지 못해도, 장소 때문에 그를 호출하지 못해도 미안한 감정이거나 아쉬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7월 그가 한국으로 나가면서 청도에서 여덟시간 정도 밖에 함께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되려 매일 보던 친구를 보내듯 유감없이 떠나보냈었다.  첫 만남이 있어서부터 22년 사이에 우리는 모두 세번 밖에 만나보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참 오랜 친구이고 또 가까운 친구란 감각이다. 내가 마음속 말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친구 중의 한사람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려왔다. 가끔 열정적이지도 않고 약속도 지킬 줄 모르고 볼 데도 없는 이 친구를 내가 왜서 그렇게 좋아하냐고 자문해본다. 그 때마다 마음에 딱 맞혀오는 게 있다.  우선은 편안함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나에게 선택과 행동의 여지를 넓게 남겨준 게 분명하다. 물처럼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소용돌이처럼 진한 정을 가슴 밑바닥에 깔고 있었다. 마치도 그의 글과 같이 여유로움과 느긋함을 엿볼 수 있다. 서로간에 부담감이 작용했더라면 아마 우리의 우정은 오늘날까지 이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굳이 길게 수다를 떨지 않아도 말 한마디로 우리는 상대의 뜻을 인차 알아먹는다. 인생도 문학과 마찬가지로 말로써 다 풀면 재미가 슬하다. 글에서도 량영철이는 그런 식이 아니였던가. 항상 그러듯 량영철이는 결말을 매듭지어주는 법이 거의 없고 마치 새로 글을 시작한듯하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믿어주는 너그러움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그런 믿음 속에서 서로를 적응해왔고 어감 하나로도 피차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서로가 목숨처럼 생각하는 문학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량영철이가 알맞는 타이밍이 나지면 꼭 컴백할 것이라 믿어왔다. 그의 투철한 인생관과 남다른 문학주장은 언제든지 접수될 것이고 빛을 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뛰여난 문학재주는 썪혀서는 절대 아니될 일이다.  용케 똑같이 못난 사람이 친구로 되여서 나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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