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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평]짜개바지친구-작가 리승국
2019년 07월 17일 09시 34분  조회:352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짜개바지친구-작가 리승국

채운산

 

나와 리승국선생은 죽마고우-짜개바지친구이다. 허지만 한동네에서 함께 자라고 같은 시기에 문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고 또 지금까지 문단에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활약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 생각된다. 결국 우리 두 사람은 문단에서도 ‘짜개바지친구’가 된 셈이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아마 나와 리승국선생을 두고 한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긴 두메산골에서 고작 책 몇권을 읽고 언감생심 문학이라는 아름찬 꿈에 도전하였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아마 문학붐이 한창 일던 지난 세기 80년대 초, 그러니까 막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였을 것이다. 사실 그때 우리는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창작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심지어 작품을 편집부에 투고할 때 원고지의 규격에 따라서 옮겨써야 한다는 것마저 몰랐다. 그냥 편지지나 백로지에다 휘갈겨 써서 우편으로 부쳐보내군 하였다. 하긴 원고지가 무엇인지도 몰랐으니 그럴 수 밖에. 우리는 원고지를 그냥 ‘작문책’이라고 하였다. 그 ‘작문책’마저 사기 어려워 어쩌다 정부부문이나 어느 단위의 전문용 원고지가 생기면 애지중지하면서 아끼고 또 아껴서 썼다. 촌놈들! 썩 후의 이야기이지만 지난 세기 90년대 초에 내가 《지부생활》잡지사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원고지를 한묶음 가져다주었더니 리승국선생은 마치 보물을 얻은 듯 기뻐하면서 책장 깊숙이 넣어두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리승국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농사를 지으면서 문학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동네의 문학청년들을 묶어세워 ‘문학흥취소조’를 내오고 정기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나는 타지에 가서 고중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방학에 집으로 갔던 김에 리승국선생을 찾아갔더니 밥상에 마주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나는 그냥 시(리승국선생은 시창작으로 문단에 데뷔하였음)를 쓰고 있는 줄로 알았다. 헌데 가만히 보니 그것이 아니라 강필로 등사지에다 원고를 옮겨쓰고 있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리승국선생은 시무룩이 웃으면서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던, 백로지로 묶은 ‘잡지’를 하나 꺼내 쑥 내밀었다. 지금은 그 ‘잡지’의 명칭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은 이른바 ‘문학흥취소조’의 기관지였다. 강필글씨는 물론 배판, 설계 심지어 삽화까지 모두 리승국선생의 솜씨였다. 새는 작아도 오장륙부가 다 갖춰져있다고 ‘잡지’는 내용이 아주 풍부하였는데 소설, 시, 수필은 물론 창간호에 즈음하여 보내준 문인들의 축하문까지 실려있었다. 비록 초라하고 볼품없었지만 거기에 깃든 리승국선생의 로고와 문학에 대한 애착심이 고스란히 슴배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학흥취소조’의 성원들이 맥을 버리고 하나둘 떨어져나가거나 일부 녀성멤버들이 시집을 가는 바람에 비록 그 ‘잡지’가 제2호까지 나오고 ‘페간’되였지만 이는 리승국선생이 문학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였다.

그러던 리승국선생이 촌문예선전대에 들어가서 춤을 추더니 2년 후에 공주령시조선족예술단의 무용수로 뽑혀가게 되였다. 이른바 ‘딴따라’가 된 것이다. 그 해에 나는 고중을 졸업하고 연길에 들어와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리승국선생이 찾아왔다. 그는 무용과 문학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전도를 두고 나는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 없어 그냥 좋은 말만 해주었다. 후에 예술단이 파산 직전에 이르고 또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어 리승국선생은 무용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시 농민이 되였다.

어떻게 된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연변일보》에 시를 처녀작으로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리승국선생은 후에 소설로 전향하였다. 내가 방학(당시 나는 연변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음) 때마다 놀러 가면 리승국선생은 헐망한 초가집 구들, 그것도 열평방메터도 안되는 구들에 밥상을 놓고 앉아서 뭔가 끄적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안해와 아이가 방해가 된다면서 한 동네에 있는 처가집으로 ‘축출령’을 내리군 하였다. 리승국선생은 항상 나한테 자기가 쓴 소설을 보여주면서 수정의견을 제기해달라고 하였다. 제 코가 석자인데 무슨 수정의견인가고 하면 그는 찰거마리처럼 들어붙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한마디라도 해야 그는 직성이 풀려하였다. 당시 리승국선생이나 나의 소설은 소설로서의 구색은 갖추었지만 모방성이 강하고 구성이 째이지 못하였다. 허지만 굵직한 이야기를 소설의 주선으로 끌고 나가는 나와 달리 리승국선생은 세부를 아주 중요시하였다. 그러다나니 그의 소설은 아주 디테일한 특점이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자기들 끼리 갑론을박하면서 날을 새울 때도 있었다. 가끔 술을 한잔 마시고는 얼근해서 편집들이 ‘명작’을 알아보지 못하고 퇴짜를 놓는다면서 투덜거리기도 하였다. 하긴 퇴짜를 맞은 소설원고만 해도 몇자루나 되였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가끔 리승국선생은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풍부한 감성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준다. 작가는 감성이 없으면 글을 못 쓴다. 감성은 작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가끔 안해한테 핀잔도 들었다고 한다. 남자가 눈물이 헤프다고. 하긴 리승국선생은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았다. 사소한 일에도 녀자애들처럼 쿨쩍거리거나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군 하였는데 눈물이 가득 고여있는 그의 커다란 눈이 아주 인상적이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치 그때의 리승국선생을 보는 것만 같다. 한마디로 리승국선생은 천부적으로 감성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싶다. 

후에 고 윤광수선생이 삼합진 문화소의 문학보도원으로 내려오면서 새롭게 문학단체를 내왔다. 구체적으로 문학단체의 명칭은 없었지만 그때까지도 문학에 뜻을 둔 청년들이 꽤 많아 시문화관이나 《천지》(지금의 《연변문학》)월간사에서 자주 내려와서 문학창작학습반을 열군 하였다. 당시 주요멤버로는 고 윤광수선생, 윤희언선생, 리승국선생 그리고 나였다. 매번 창작학습반이 열릴 때마다 리승국선생과 나는 한겨울이라도 자전거를 타고 20여리 길을 달려가군 하였다. 회의실에 모여앉아 한사람씩 자기 작품을 랑독하면 작가나 편집들이 평을 해주었는데 림원춘선생, 리상각선생, 고 김창석선생, 홍천룡선생, 고 황병락선생, 리태수선생, 고 김재권선생, 류흥식선생 등 분들이 인상 깊었다. 가끔 여름에 창작학습반이 열릴 때면 개나 양을 잡아서 두만강 버들방천에 나가 불고기도 해먹고 고 김호근선생의 사회로 오락판도 벌리군 하였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감회가 새롭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리승국선생은 드디여 크게 한발자국 내디뎠다. 단편소설 <꽃없는>로 《천지》 신인상을 받게 되였던 것이다. 시상식을 하는 날 상패와 상금을 가지고 철남(연길)에 있는 나의 세집으로 찾아와 술을 마시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우리 둘은 취했다. 20평방메터도 안되는 코구멍만한 세집이 떠나갈 듯 왁자지껄 떠들면서 문학을 담론하였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리승국선생의 출세작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소설을 발표한 후 진문화소 문학보도원으로 발탁되였고 농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였다. 그 후로 승승장구하여 근 몇년 사이에는 《도라지》문학상도 타고 제4회 김학철문학상도 탔다. 

허지만 리승국선생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다. 아마 룡정시문화관으로 전근되여온 후 일에 바삐 돌아쳐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인젠 소설을 안 쓰는가?”고 물으니 문학이 자기한테서 멀리 사라져가고 있다고 했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문학을 생명처럼 여기던 리승국의 입에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오다니? 밭갈이를 하다가도 항상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 순간순간 떠오르는 령감들을 메모해놓고 또 동네에서 “아무나 작가가 되는가? 올챙이가 변해봐야 개구리이지 룡이 되겠는가?” 하면서 비아냥거릴 때에도 초연하게 마이동풍으로 여기던 그가 아닌가? 허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슬럼프를 겪는다고 해서 나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을 가지고 지나온 문학생애를 뒤돌아보고 앞으로 자기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킬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결국 리승국선생은 다시 필을 들었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그의 소설은 농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부분 소설들이 고향- 두만강기슭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발생했던 일들이고 그 주인공도 동네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의 소설에서는 흙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정감이 듬뿍 배여있다. 리승국선생의 리력은 별로 화려하지 않다. 허지만 평범함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작가적 삶을 살아왔고 문학을 숙명으로 여기고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어왔다. 리승국선생은 일찍 농사군이였다. 지금도 ‘농사군’이다. ‘글농사군’이다. 언제나 고향과 더불어 울고 웃는 작가-리승국, 나는 감히 그를 고향이 낳은 소설가이고 두만강의 얼을 지닌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출처:<장백산>2017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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