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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반세기
2016년 04월 14일 19시 15분  조회:574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우정 반세기 
 
 
 
지난해 가을 43년만에 서울나들이를 갔다가 옛친구 몇몇을 만났는데 그중 한 친구와의 해후는 참으로 뜻밖의 일이였다. 그 친구가 78살 늙은 나이에 아직도 살아있을줄은 전혀 예기를 못했었기때문이다.
 
 
해후상봉
 
그날 오후 객실의 문을 누가 와 두드리기에 나는 그저 례사롭게 “어서 들어오세요.” 했더니 문을 열고 들어선것은 백발의 로인이 한분, 한쪽다리가 불인한 모양으로 단장을 짚고 불편스레 걷는데 허름한 잠바차림의 의표는 그리 선명하지가 못하고 좀 추레했다.
내가 얼른 쏘파에서 일어나며 래의를 묻는 눈치를 보이니 그 로인은 뜻밖에도 “학철이, 날 몰라보겠나?” 하고 곧 절뚝거리며 앞으로 다가드는것이였다.
나는 의아스레 그 얼굴을 살펴보았으나 피뜩 떠올라주지를 않아서 고개를 비틀었다. “뉘신지 잘…”
“내가 류만화(刘晚华)야, 류만화… 공병(工兵)… 몰라? 공병!”
50년만에 해후상봉을 한 두 늙은 절름발이는 력사적이고도 감동적인 포옹을 했다. 1939년 가을 중국 강남(양자강남안)전선에서 서로 갈라진 뒤 꼭 50년, 해수와 달수로 꼭 50년만이였다.
“난 임자가 여적 살아있으리라곤 꿈에두 생각을 못했었네.”
“나두 마찬가지야.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꿈엔들 생각을 했을라구.”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줄은 어떻게 알았지?”
“아따 이 사람아, 날 고만 주변두 없는 페물인줄 알았나? 귀가 있구 눈이 있는데.”
“아무튼 반가웨. 자 어서 앉으라구.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구.”
“아무렴 앉아야지.”
앞상에 콜라 두캔이 놓여지는 동안 이야기는 잠시 동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 댁내는 다 평안하구?”
“그 댁내가 전연 평안치를 못하니까 탈이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여?”
“마누라가 죽은지가 벌써 10년이나 됐다구.”
“음 그래… 거참 안됐구먼. —그럼 아이들은?…”
“응, 아이들이야 있지. 4남매… 아들 둘에 딸이 둘 있긴 있지만 말야… 아들놈들은 다 이민인가 뭔가를 가버리구 하나두 없어. 그리구 딸년두 큰년은 제멋대루 떠다니느라구 코빼기두 볼수가 없구.”
“그럼?…”
“응, 막내년 하나 데리구있지. 하지만 이건 또 관절염인가 뭔가루 운신을 제대루 못하지 뭐야. 그러니 제년이 날 시봉하는게 아니라 내가 제년을 시봉하는 셈이지. 참 세상에 별놈의 팔자두 다 많지!”
이렇게 말하고 류만화가 자탄조로 허허 웃는데 나도 동정하는 웃음을 따라 웃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임자를 찾아온건 신세타령을 하려구 온게 아니여. 40여년 동안 이 가슴속에 맺혔던 억울함을 호소하려구 온거여. 그 억울함을 풀어보려구 온거란 말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여?”
“들어봐, 임자는 인민군출신이지… 난 국민당출신이구. 안 그런가?”
나는 대답없이 그저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쉴새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일어나 창문을 좀 열어놓고 다시 앉았다.
“하지만 우린 항일전쟁때 같은 지대(支队)에 속했던 전우가 아닌가. 강남전선에서 우리 다같이 총을 메구 달아다니잖았나. 임자나 내나 다 김원봉(金元风)의 부하구 박효삼(朴孝三)의 부하가 아니였던가. 안 그런가?”
“그래 맞았어, 틀림없다구.”
“그러니까 우린 다 항일동지지? 독립군. 조선의용대 대원.”
“음 그렇지.”
“그런데 너희가 날 어떻게 그렇게 섭섭하게 대해줄수 있니?”
나는 짚이는데가 있어서 속이 뜨끔해 아무 대꾸도 안하고 그저 가만있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잡아줄수 있니? 내 이 량심이 말야… 제 항일동지를 말야… 응? 어디 말 좀 해봐라!”
“이봐 류만화, 그렇게 격해하지 말구 내 얘길 좀 들어.”
그는 담배를 뻑뻑 빨면서도 애써 자제하며 근청할 자세를 취했다.
“그땐 형편이 그렇게 됐었다구.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건 없어. 립장을 바꿔가지구—우리 립장에 서서—한번 좀 생각해보라구.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였는가. 임자가 섭섭해하는건 나두 충분히 리해를 해.”
 
 
강남전선
 
30년대, 중국의 웨스트 포인트(西点军校)라는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는 조선학생이 상당수 있었다. 그 대부분이 다 보병과나 기병과 또는 포병과를 택했었는데 전무후무로 오직 한 사람만이 공병과를 택했었다. 그 단 하나밖에 없는 공병과출신의 항일군인이 곧 이 류만화였다.
류만화는 얼굴빛이 워낙 희고 코날이 서고 또 머리까지 노르께한 까닭에 “트기”라는 별명으로 당시 항일부대에서는 불렸었다. 이런 친구가 만 50년—반세기가 지나서, 43년만에 서울나들이를 온 나를 호텔로 찾아와 항의를 한것이다.
항일전쟁 당시 우리가 소속했던 조선의용대에는 포병도 기병도 다 없었던 까닭에 어느 “과”를 졸업했든간에 례외없이 다 보병노릇을 해야 했다. 그래서 공병과를 졸업한 류만화도 보병이 아니될수 없었는데 그는 그게 맞갖잖아 이따금씩 볼멘소리를 하군 했다.
“까마귀둥지에 소리개를 앉히라지!”
그러면 여느 친구들이 듣고 가만있잖고 의례 얄망스레 이죽거리며 한마디씩 하는것이였다.
“그러게 말야, 범더러 나비를 잡으라는 격이야.”
“아냐, 코끼리더러 파리를 잡으라는 격이야.”
“틀렸어, 항우(项羽)더러 송사리를 뜨라는 격이야.”
또는 “우리가 맞아죽으면 그러묻는건 땅파기전문가가 다 맡아해줄테니까 뒤걱정 없구 좋지 뭐. 그렇지 ‘트기’?”
“그러다가 그 ‘트기’전문가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
“미리 저 들어갈 구뎅일 파놓으래지, 공병삽으루.”
“와하하!…”
“낄낄… 낄낄…”
이러한 상태로 류만화는 우리와 함께 그럭저럭 양자강이남지역의 전장들을 전전(转战)했다. 그는 성질이 좀 고독한편이여서 전우들과 터놓고 사귀지를 잘 못하는 까닭에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존재로 됐다. 무슨 우스운 일이 있어서 모두들 폭소를 터뜨리는 마당에도 그는 그저 싱글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고 놀려줘도 대꾸를 아니하고 그저 시물거리기만 할뿐, 생전 골이란건 낼줄을 몰랐다.
이러한 그가 전에없이 질색을 하며 펄쩍 뛴적이 꼭 한번 있었는데 그것은 어느 친구가 죽어자빠진 적병의 시체에서 군화를 벗겨냈을 때였다.
“죽었으면 그만이지 또 발까지 벗겨? 저, 저, 저 승냥이!”
이렇게 내뱉으며 그가 낯색까지 변하는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음, 저 친구 맘이 어지간히 무던하군그래.)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었다.
한데 그가 부족점이라면 정치학습을 게을리하는것이였다. 우리가 다들 맑스—레닌주의서적을 파고드는 판에 그만은 아주 딴세상에 사는 사람같이 무관심했었다. 학습토론때도 그는 입 한번 열어본적이 없다. 그저 무료하게 앉아 듣기만 했다. 꾸어다놓은 보리자루인지 전당잡은 초대인지 알수가 없을 지경이였다.
그러므로 1939년 가을, 소상강반에 주류하고있던 조선의용대 제1지대(지대장 박효삼)가 좌와 우로 갈라져 좌파들이 팔로군(공산군)과 합류할 목적으로 북상을 할 때 그가 우파에 속해 그대로 머무른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해야 할것이다.
“이봐 류만화, 우리 간다구, 잘 있어.”
“응, 잘 가.”
그와 나는 이 지경 기치가 선명하게 또 간단스레 작별을 했다. 그때 누가 그 초연 자욱한 전쟁판에서 살아남아 50년후에 다시 서울에서 해후를 하게 될줄 알았으랴!
후에 류만화는 한국광복군에 입대를 하고 그리고 나는 또 나대로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하다가 중상을 입고 붙들려 일본감옥으로 압송이 됐다.
1945년 10월 9일, 맥아더사령부의 정치범석방명령으로 일본 전국 각 감옥의 정치범들이 일시에 석방될 때 나도 풀려났다. 그리하여 3주일후에는 다시금 서울땅을 밟게 됐다. 서울서 보성고의 교복을 입은채 상해로 떠나간지 만 10년만에 귀환을 한것이였다.
서울에 돌아온 다음다음날 나는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와 련계가 닿아 옛 전우들과 4년만에 다시 상봉을 했다. 내가 일본군에게 잡혀간 뒤에도 그들은 계속 태항산일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하자 강행군으로 귀국을 해 그중의 일부가 서울에 진출한것은 바로 두달전의 일이라는것이였다.
서울위원회의 조직부장 심성운(沈星云)만은 1942년에 적군 점령하의 천진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 징역을 살다가 8.15때 풀려났었다. 그는 본디 서울사람이였으므로 말하자면 고향에 돌아와 감옥살이를 한 셈이였다. 그도 역시 나와는 사관학교 동기생이였다.
해가 바뀌여 1946년도 어느덧 여름철에 접어들었을무렵이다. 하루는 심성운이 전에 조선의용대에 소속했던 몇몇 동지만을 따로 불러가지고 정황을 소개한 뒤 잇달아서 주의를 주는데—
“다들 류만화를 알지? 공병 말이야. 조선의용대에 있던… ‘트기’… 노랑머리… 응. 그치가 광복군의 신분으루 귀국한건 다들 잘 알잖아. 한데 요놈이 이번에 군정청엘 들어가 경무부의 뭔가가 됐다는거야. 워낙 인간이 변변치 못하니까 기껏해야 무슨 끄나불노릇이나 하겠지만서두… 우리 몇몇은—그놈의 얼굴을 다 아니까—아주 재미가 적게 됐단 말야. 그놈앞에선 어떻게 숨을 재간이 있어야 말이지. 도깨비감투나 쓴다면 또 모를가. 그러니 이제부턴 그놈을 각별히 경계하구 어떡해서든 그놈하구 맞다들잖두룩 신경을 써야겠어. 이건 경무부에 들어가있는 우리 프락찌야가 빼내온 정보니까… 그쯤 알구 명심들 하두룩.”
심성운의 신칙을 받고 하도 기가 막혀 내가 “공병을 보병으루 써먹는다구 소리개가 어쩌구 까마귀가 저쩌구 불평을 하던 놈이 이제 그놈의델 들어가선 뭘 할 작정인구? 거긴 까마귀둥지가 아니구 소리개둥지던가!” 하고 푸념을 했더니 련락부장 김창규(金昌奎, 일명 王克强)가 듣고 코살을 짊어졌다.
“범이 배가 고프면 가제두 뒤진다잖는가. 공병삽으루 땅이나 파먹자니 구차할게구.”
심성운은 감옥살이 팔자를 타고났던지 다음다음해 봄에 당국에 체포돼 또다시 서대문교도소에 갇혀있다가 남북전쟁이 터지고 사흘만에 인민군의 땅크가 벽돌담을 무너뜨리며 들이닥치는통에 해방을 받아 다시 월북을 했다. 그리고 김창규는 정보공작을 하는 관계로 미제의 고용간첩인 리승엽의 은사(隐私)를 너무 많이 알았던 까닭에 남북전쟁시기 한때 점령된 서울에서 위풍을 떨치던 그자에게 꺼리는바 돼 마침내는 그 일당이 조작해낸 터무니없는 죄명을 들쓰고 학살을 당했다.
김창규는 강원도 강릉사람으로서 그와 나는 30년대에 상해에서 반일테로활동을 같이했을뿐아니라 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의 동기생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그의 말만 믿고 그도 우리 같은 총각으로만 여겼었는데 귀국한 뒤에 보니 안해가 있을뿐아니라 딸까지 하나 있었다. 어느 일요일날 그가 웬 녀자대학생을 데리고 공원에 놀러 왔다가 리소민(李苏民, 일명 李景山)이라는 친구에게 들켰다. 리소민은 그가 젊은 녀자와 련애를 하는줄 알고 “당장 소개를 못하겠냐.”고 족쳤더니 그는 시물거리며 “실은 내 딸이다. —아저씨께 인사드려.” 하고 실토를 해 비로소 그의 가짜총각이 들통이 났었다.
이것을 나중에 알고 우리 진짜총각출신들은 모두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멀쩡한 핫애비놈이 사람을 속였지 뭐야.”
심성운은 그 조카사위 조규홍과 한날에 풀려나 역시 한날에 월북을 했는데 그 조카딸 김녕현만은 서울에 떨어져 유복자를 낳아 키웠다. 그 유복자 조관현은 현재 서울에서 한 해운회사를 경영하고있단다.
46년 11월에 내가 월북하기 직전에 며칠간 숨어있던 집이 바로 서대문구 행촌동에 있는 김녕현의 집이였는데 그들 모자의 소식을 내가 알게 된것은 바로 지난 2월. 내가 서울을 떠난 뒤에 KBS 1TV가 방영한 “연변동포작가 김학철”에서 김녕현이 죽은줄만 알았던 김학철을 발견. KBS에 물어가지고 국제전화를 걸어와서였다.
이밖에 예비지식으로 또 좀 밝혀둘것들이 있다. 류만화가 앞에서 언급을 했듯이 나는 남북전쟁 발발이전에 한때 인민군총사령부에 몸담아있었다. 그리고 류만화로 말하면 국방군에서 공병부대를 창건하는데 공적을 세운 사람이란다. 이 사실을 나는 나중에 한국독립동지회 회장 김승곤(金胜坤, 일명 黄民)을 통해 알았다. 김승곤도 역시 처음에는 조선의용대 대원이였으나 후에 우리가 북상할 때 리념상의 문제로 혼자 탈영을 해 한국광복군으로 넘어갔던 사람이다.
 
 
외나무다리
 
류만화가 적대적인 존재로 부상했다는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한 심성운이 그후 한달이 채 못돼 자기 자신이 그 적대적인 존재와 길거리에서 맞닥뜨린다는 아이러니컬한 우연지사가 발생했다. 그날 오후 볼일이 있어 인사동에서 락원동으로 가다가 외나무다리가 아닌 파고다공원 북문께서 둘이 딱 마주쳤던것이다.
심성운은 하릴없이 연극쟁이로 급변해 엉너리를 쳐야 했다.
“아니 이게 누구여? 류만화가 아닌가!”
“심성운!”
반갑게 손을 맞잡고
“우리가 이거 몇해만인가. 가만있자, 그게 아마 39년이였지. 그렇지? 그럼…”
손가락을 꼽으면서
“40, 41, 42, 43, 44, 45, 46, …7년만이군그래… 아하하!…”
“여느 동무들도 다 무고한가? 박대장(박효삼)이랑 김학무(金学武)랑…”
“박대장은 무고하지만 김학무는—저세상으루 간지가 벌써 옛날이야. 태항산에서 희생이 됐다구. 태항산에서 희생된 사람이 숱해. 림평(林平)이랑 호철명(胡哲明)이랑 진락삼(陈乐三)이랑…”
“으응, 그럼 석정(石鼎, 일명 尹世胃)선생은?…”
“석정선생두—42년에 전사했지 뭐야. 문명철(文明哲)이, 호유백(胡维伯)이, 김정희(金鼎熙), 마덕산(马德山)이… 뭐 숱하다니까.”
“거참 안됐구먼. 뛰여난 인재들이였는데…”
“누가 아니래여.”
심성운은 새삼스레 애석한듯 고개를 비틀어꽂았다.
“우리 길거리에 서서 이럴게 아니라 어디 조용한데 좀 가앉아 얘기하는게 어때, 바쁜가?”
“아니 바쁘잖아. 좋아, 어서 가자구.”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허름한 다방을 찾아들어가 한쪽 구석방에 자리잡아 앉았다.
“뭐 할가. 커피 할가?”
“아무려나, 좋겠지.”
류만화는 강남전선에서 갈라진 뒤 여러 해포 격조하게 지내느라고 피차에 생사도 모르는 옛친구들의 일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였다. 그러나 심성운은 속으로 (요놈이 연극을 참 잘 노는구나. 아주 수단군이 돼버렸단 말야. 하지만 네따위에게 넘어갈 심성운이 아니다.) 하고 정신을 도사렸다.
(요놈을 떼쳐야겠는데… 어떡한다?…)
류만화가 또 궁금한 소식들을 잇달아 물어보는것을 심성운은 “가만, 내 잠간 좀…” 하고 화장실에를 다녀오려는것처럼 꾸미며 얼른 일어나 자리를 떴다.
류만화는 심상히 여기고 다시 권연 한대를 피워물고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다방 뒤문으로 구차스레 빠져나온 심성운은 그물을 벗어난 새가 돼가지고 훨훨 날지 못해 성화가 날 지경이였다.
이튿날 다시 우리를 모아놓고 심성운은 “고놈의 ‘트기’가 아주 딴 사람으로 돼버렸더라니까. 특무훈련을 받아두 단단히 받았어. 얼뜨게 걸려드는걸… 정말이지 천우신조야.” 하고 아슬아슬하게 모면한것을 자추한 뒤 “다들 전철을 밟지 말라.”고 다시한번 신신당부를 하는것이였다.
“그 새끼 아주 꺼버리는게 더 낫잖을가?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아예.”
“그것두 좋긴 하지만… 그러자면 일이 너무 좀 거창하잖을가?”
“저놈들에게 구실을 주게 되기가 쉽지… 좌익을 탄압할.”
“그것두 그래.”
“좀더 두구보다가… 차차 형편 봐가며 하는게 좋을것 같은데.”
“그게 온당해. 구태여 긁어 부스럼 만들것 없지 뭐.”
이리하여 적극적인 대책의 강구는 뒤로 미루어지고 그날의 모임은 일단 헤쳐졌다.
이무렵부터 공산당본부—정판사(精版舍)가 습격을 받고 또 독립동맹 서울위원회—수산회관(水产会馆)이 습격을 받는 등 폭력사태가 잇달린데다가 군정청파 CIC에 박혀있는 우리 프락찌야의 보고로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 우리 사람들의 이름이 밝혀져 박달(朴达)과 나는 행동이 불편하므로 먼저 피신을 시켜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당시 박달은 대학병원 문외과(文外科)에 입원해있었고 또 나는 소아과 과장 리병남이 우리 액내사람이였던 관계로 소아과에 숨어있었다. 박달은 8.15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날 때 벌써 척추카리에스로 걷지를 못했는데 그후 죽을 때까지 종시 침대에서 일어나보지를 못하고말았다.
박달은 10월말에 륙로로 38선을 넘고 그리고 나는 11월초에 해로로 해주에 득달했다.
조선의용군출신의 저명한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이 당국에 체포돼 사형을 당하고 또 같은 조선의용군출신의 탁월한 정보원 성시백(成时伯)이 역시 간첩죄로 처형을 당한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나는 평양에서 김태준의 부인 박진홍(朴镇洪)을 만나 저간의 소식을 소상히 들었다.
“가장 믿어온 제자가 밀고를 했지 뭡니까. 정말 아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니까요.”
박진홍의 이 말을 듣고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성시백은 중국팔로군에서도 띵샹밍(丁向明)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정보전문가로서 우리의 조르게라고 할만한 사람이였다. 조르게(1895—1944)는 일본정부의 비밀, 주일독일대사관의 비밀 등을 쏘련에 통보한 죄로 일본군국주의에게 처형당한 독일인공산주의자다.
아무튼 나는 그와 맞다들가봐 겁이 나는 인물—류만화의 존안(尊颜)을 우러르는 영광을 끝내 지니지 못한채 서울을 떠나게 된것만을 못내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얼마 아니하여 류만화라는 존재는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의 본이름도 나는 모른다. 서울에서 쓰는 이름도 역시 모른다.
남북전쟁기간 나는 북경에 들어와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문학공부를 하고 또 서대문교도소에서 풀려나 입북을 한 심성운은 북경대사관에 파견돼와 무슨 비밀적인 일을 하고있었는데 그와 나의 담화에서는 단 한번도 류만화가 거론된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류만화는 우리들의 뇌리에서 아주 사라져버렸던것이다.
그때 심성운의 안해는 서울에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이미 목숨을 바친 뒤였으므로 그는 철부지 어린 남매와 나라일에 외동딸을 바친 장모를 모셔다가 대사관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있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은 오로지 그 외조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이렇듯 내 머리속에서 수십년 동안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던 류만화가 어두운 밤에 홍두깨모양 불시에 들이닥쳐가지고 “가슴속에 맺힌 억울함을 호소하러 왔다”고 가슴을 짓찧으니 내가 어리둥절한것도 무리는 아니잖은가.
 
 
두 독립군
 
“이봐 류만화, 그렇게 흥분하지 말구 내 얘길 들어봐.”
이야기는 가리산, 지리산으로 50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는가 하면 또 남북조선과 중국천지를 갈팡질팡하다가 마침내는 서울의 한 호텔의 객실로 되돌아온다. 류만화(78) 대 김학철(74).
“아냐, 내 얘기부터 먼저 좀 다하구. 임자 얘긴 나중에 들어두 늦잖아.”
류만화가 권연 든 손을 내저으며 고집을 쓰는 바람에 나는 하릴없이 공세에서 수세로 전략전술을 바꿔야만 했다.
“좋아, 그럼 어서 속시원히 다 쏟아놓으라구.”
“난 말야, 그날 심성운일 만나서 여간만 반갑지가 않았어. 그 지긋지긋한 전쟁판에서 제나 내나 죽잖구 살아남아 조국땅을 밟게 됐으니 그게 왜 대견하잖겠나. 더구나 피차간… 칠팔년 동안… 소식들두 모르구 지낸터가 아닌가. 그래 옛친구들 소식을 알구싶은게 하두 많아서 앞에 놓인 커피가 다 식어뻐드러지두룩 마시잖구 난 그냥 기다렸지. ‘화장실엘 간 친구가 왜 이리 더딘고.’ 하구 말야. 그런데 결국은 날 따버리구 달아났어. 날 따버리구 달아났단 말야!
임자 날더러 립장을 바꿔놓고 한번 생각해보랬지? 바루 그거여. 임자가 다 식어뻐드러진 커피 두잔을 앞에 놓구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하구 앉아있다면 그 맘이 어떻겠는가. 한번 좀 처지를 바꿔놓구 생각해보라구.”
따분한 침묵.
“내가 그래 전쟁터에서 한솥의 밥을 먹구 한전호에서 잠을 잔 옛친구, 옛 전우를 잡아바칠 사람이야? 아무리 리념적으루 좌우인지 전후인지 갈라졌다구 하더라두 말야.”
“임자의 그 심정은 나두 충분히 리해를 해. 하지만 그후에 발생한 일들이 왜 있잖은가. 그러니 우리루서야 경각성을 높이잖을수 없었지.”
“그후의 일들이라니?…”
“김태준사건, 성시백사건… 그리구 심성운이랑 다 잡혀서 갇혀있다가 전쟁통에 겨우 풀려나잖았는가.”
“김태준인 난 애당초에 알지두 못하는 사람이야. 얼굴도 못 봤어. 그 사람은 후에 태항산으루 들어갔던 사람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알아? 난 태항산을 구경두 못했는데!”
“옳아, 그건 그래. 김사량(金史良)이랑 다 나중에 들어왔던 사람이니까.”
“그것 봐, 내가 알턱이 없잖은가. 그러구 그 성시백이… 성시백인 나두 물론 잘 알지. 잘 알지만서두 성시백인 내가 잡아준게 아니거든. 내 얘길 좀 들어봐. 난 그때 심성운이한테 따돌리우구 큰 충격을 받았어.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정도루 말야. 그래 심기일전해 단호히 군정청을 나와버렸어. ‘이러다간 내가 옛친구들한테 사람취급을 못 받겠구나.’ 생각하구 말야. 그렇지만 성시백일 잡아바칠라면 그럴 계제가 없는건 아니였어. 기회는 있었어.
그가 잡히기 서너달전이였을거야 아마. 혜화동 로타리 좀 못미쳐서 둘이 딱 마주쳤지 뭐야. 전연 우연이였지. 그가 이남에 내려와 뭘 하구있는걸 내가 왜 모르겠어. 너무나 잘 알구있었지. 그러구 그를 물어놓으면 어떤 보람이 있을지두 잘 알구있었지. 사실 난 그때 반실업자나 다름이 없었어. 구차하게 지냈지. 그렇지만 난—하늘이 굽어보지—조금치두 맘이 움직이질 않았어. 한잔 나누구싶었어. 하지만 어떡해? 그는 나를 한눈 보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야. 그러게 당황한 기색이 환히 알리게 얼른 외면을 했어. 난 어떡했겠어? 할수 있나. 나두 외면을 했지. 그럴 밖에 무슨 도리 있어. 참 기가 막히지. 옛친구끼리 만나서두 서루 모른체하구 그냥 지나쳐야 하다니!…”
이때 전화의 벨이 울려서 이야기는 잠시 중동이 끊겼다.
“무슨 긴한 일인가? 내가 너무 시간을 잡아먹는거 아냐?”
“아냐아냐, 괜찮아. 어서 얘기 마저 하라구.”
“뭐 더 얘기할것두 없어. 죽기전에 임자를 만나서—임자하구 심성운하구 단짝이 아닌가—그러니까 임자를 만나서… 이속에 맺힌 억울함을 호소하려구 한것뿐이야. 내 진정을 피력하고싶었을뿐이야.”
그의 가슴속에 40여년을 서렸다가 일시에 뿜겨져나오는 원정(冤情)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의 진정을 나는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우리는 새삼스레 두손을 굳게 맞잡았다. 살아남은 두 독립군. 해묵은 소나무 같은 두 독립군. 풍상 겪은 두 독립군—그 두 독립군의 거칠고도 정겨운 악수였다.
“잘 알았어. 나두 긴 해명은 않겠어, 하지만 슬프게두 심성운인 이런걸 모르구 저세상으루 갔을게야. 그들의 생사두 모르구 난 이렇게 30년을 살아왔다니까, 56년 하반년부터.”
“그두 당했을가?”
“누군들 무사했겠어? 그 피바람속에서!”
류만화는 신음소리와도 같은 탄식을 했다.
“우린 그동안 다 비극의 주역들을 담당했었어. 력사적비극, 민족적비극. 안 그런가?”
“동감이야.”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고 둘이 다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하긴 해탈한 웃음이였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그는 앞상에다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놓으며 말하는것이였다.
“옛친구가 먼데서 왔으니 의당 제 집에다 모셔야겠지만 내 집안형편이 지금 엉망이야. 딸년 시중드느라구 허리뼈가 휠 지경이지. 80의 고개와 이마받이를 하게 된 사람이 무슨 놈의 판국인지 나두 모르겠다니까. 그러니 림시처변으루 임자 객비를 한달이구 두달이구 있는 동안은… 내가 대기루 했어. 이거야, 우선 받아둬.”
“이거 봐 류만화, 그런 념려는 고만두구 제몸이나 돌봐요. 알겠어? 내 객비는 다 출판사가 부담하는거야. 그러구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강연료가 또 꽤나 된다구.”
류만화는 저를 무시한다고—친구를 외대한다고—골을 펄쩍 냈다. 나는 사정사정해 겨우 그 봉투를 호주머니에 도루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등에다 손을 얹으며 관곡히 충고를 했다.
“그 담배 제발 좀 끊어요. 통일이 되는걸 보자면 좀더 살아야잖겠나.”
류만화는 대답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을 씀벅씀벅하더니 또 한번 허구픈 웃음을 웃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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