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lh 블로그홈 | 로그인
독고혁의 看圖說話

카테고리

※ 댓글

  •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평론

[수필평] ‘집시’, 육두문자를 날리다
2019년 07월 11일 14시 16분  조회:129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집시’, 육두문자를 날리다

-심명주시인의 수필 3편을 일독하고

독고혁

 

수필을 접하고 보니 제목부터가 눈맛을 확 끄당긴다. 

매운 맛의 쑥차와도 같이 톡톡 쏘는듯한 또한 어딘가 낯가려운듯한 버거운듯한 제목들이다. 

천막수레를 탄 ‘집시’가 주술적인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가 싶더니 저돌적인 육두문자를 날리기도 하고 또한 툽상스러운 개가 등장하기도 한다. 

 

상기하다 싶이 수필습작에 있어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제목은 알심들여 꾸민 상품의 상표와도 같아서 제목만을 보고도 그 상품의 질과 품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장가들이 다는 제목들을 보면 흔히 주제를 집약한 것, 화제를 나타낸 것, 인물명을 빌린 것, 상징적인 것, 분위기를 보여준 것, 문장의 목적을 암시한 것 등등으로 류류별별, 다종다양하다. 그 각양각색 중에 뭐니뭐니해도 글을 읽고 나서도 뚜렷하게 각인되여 내용을 곱씹게 하는 제목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대상세계를 지각知觉하는 작가의 의식은 지각된 내용과 언어가 뒤섞임으로써 구체적인 형상성을 갖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인식적 작용의 형태 그 자체가 작가의 문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심명주시인의 세편의 수필작품은 제목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자신만의 ‘유아唯我’의 문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 버거운 제목, 통렬한 문체로 시인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나? 

우리 함께 간혹 ‘육두문자’가 들려오기도 간혹 변견便犬이 뛰쳐나오기도 하는 집시의 방랑의 길을 시인의 문맥의 들춤과 함께 따라가보기로 하자… 

 

제1편 집시, 이사짐 우의 령혼

세편 중 첫 수필 <집시가 되여>를 읽으며 누군가 위챗 모멘트에 올렸던 니꼴라 디바리의 <마음은 집시>라는 노래를 떠올렸다.

구속에 매이지 않은 집시 녀인의 자유로운 령혼과 삶을 노래한 이딸리아의 대중가요로서 여러 나라들에서 번안된 곡이다.

특유의 리듬에 정열적인 집시음악은 우리 민족에게도 익숙한 음악이 아닐 수 없다. 그 음악에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등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져있다. 늘 길 우에 있는 이들의 음악에서 오늘도 역시 귀추가 없는 리산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은연중 많은 동질감을 느낀다.

 

수필에서 시인은 이사를 하고 텅 빈 집을 다시 찾아 그만 회포에 잠겨버린다. 

“꼬박 11년을 내 둥지로 삼았던 집”을 찾아 “연극이 끝난 무대인양 불 꺼지고 텅 빈 랭장고 안”까지 둘러보고 나서 “못 본 사이에 늙어버린 사람” 같아버린 아빠트에서 독백을 날린다. “흐트러진 내 기억의 퍼즐에서 마음을 되찾”으려 한다.  

시인의 섬세한 필끝에서 이사를 마치고 텅 빈 집에 대한 묘사는 허랑하고도 생생한 사실정물화처럼 다가온다.

“빛과 냄새와 슬픔의 온도까지” 배여버린 집에서 “완전히 이사를 나왔지만”“새롭게 자리 잡을 또 다른 집”에 대해 시인은 “이 세상에서 내 몸을 맡길 믿음직한 지분 한쪼각 같은 것”이라고 주식시장에 몸 맡긴 자와도 같은 불안감 그리고 불안감 속에 동경을 혼반해보인다. 그러면서도 무가내로 다시 이사의 길에 오른다. 

“후드득 일어서는 어린 시절의 추억무늬”를 지우고 시인은 다시 이사의 길에 오른다. 

“대나무가 마디로 이어지듯 인생 또한 한번 또 한번 리별과의 련속적인 만남”이라 되뇌며 다시 이사의 길에 오른다. 

“집시인의 마음에 품은 희망으로 기꺼이” 이사의 길에 오른다. 

그 역마살 낀 사람처럼 떠나는 와중에 마음은 “마디를 딛고 올곧게 서서 건실하게 성장하는 대나무처럼 싱싱해지리라”고 확신하며 이사의 길에 오른다.

 

살아가는 와중에서의 고난과 력정, 향수와 사색을 보여준 글이다. 그것이 개인의 사적 기록에 그친 것 같지만 나름의 인간 보편성과 전형적 세태 풍정을 담아낸 데서 공감을 이끌어낸다.

나아가 시인의 기억 속 어머니, 오빠, 아버지를 이끌어내고 해석과 사색의 확장을 가한 주관성이 돋보인다. 특히 가족이라는 공간에서의 자신과 가족의 출생, 성장을 강렬한 문체로 아프게 드러내였다. 

태여난 가족, 다시 뭇게 되는 가족, 가족이라는 시공체험은 우리 모두들의 삶을 깃들게 하고 또 견인하는 초석이다. 하지만 때론 방해하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아픔을 딛고 우리는 가족을 영위해나가고저 한다. 이는 가족을 터전으로 한 일종의 정신적 은유에 해당한다. 누구일지라도 이러한 각성과 영위는 몸과 정신이 성장하면서 갖게 되는 보편적 특질이다. 

심시인의 글은 이런 보편성을 보여주면서도 개인 일상을 넘어서 삶의 본령을 묻고 삶의 질의 윤택을 추구하고 삶의 의미를 한정한 것으로 읽혀진다. 

이 글이 보편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 추억의 편린들이 가족도 홀홀이 뿌리치고 떠나버리는 들썩거리는 오늘의 풍토에 빗대여 볼 때 다시 소중하게 읽혀지는 리유다.

시인은 수필의 말미에서 “이사는 추억을 갈무리하는 한차례 들춤거림이다”라고 했다.

다시 려로의 ‘풍막수레’에 앉아 정신적 방랑을 떠나는 시인의 떠나는 길 우에 니꼴라의 음악을 틀어주고 싶다. 

 

마음이 떠도는 집시라면

얽매려 하지 말아주세요

마음은 떠도는 집시랍니다

풀밭이 더 푸르러질 때까지

난 내 머리 우에 떠있는 별들을 딸 겁니다

 

제2편 육담, 역설적인 도피의 짓거리

문학의 출발점이면서 창작의 고통과 희열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언어, 인간과 세상에 대하여 사유하고 그것을 표현할 때는 엄정하면서도 적확的确하게 사용하는 것이 문학용어의 정의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름답고 함축된 언어를 매재媒材로 한 양식으로서의 시는 더욱더 언어에 대한 엄정함을 요한다. ‘诗’라는 한자 번체자에서 말씀 언 ‘言’을 굳이 뜯어보면 모호한 소리인 ‘音’이나 말을 나타내는 ‘谈’이 아닌 ‘분명하고 음조가 고른 말’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분명하고 음조가 고른 말을 써야 할 시인이 두번째 수필 <육담이 필요한 날>에서는 외려 육두문자를 권장한다. 

애초에는 육담 같은 것이 ‘나에게 맞지 않는 스타일이 구별되는 옷 같은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것을 거리낌없이 훌쩍 내 몸에 걸치기를 꺼렸’던 시인이였다.

사실 어눌한 사투리로 얼룩진 바탕에 외래어, 신조어까지 혼반이 된 우리의 언어환경은 원색적으로 뱉어내는 말들로 너무 걸판지고 흐더분하여 곤혹스럽기조차 하다. 

“비포장도로 같이 터덜터덜한 생활의 나날들을 경과하다 보면 시종 우아함을 보존하기가 어려웠던” 시인에게서 비속어, 폭력적인 언어로 란무하는 “세상은 때론 너무 슬프고 속상하”게 다가온다. 

“영화 속 폭력 장면을 처음 대할 때마냥 충격”을 머금었던 데로부터 일상 중에 란무하는 거친 언어에 시인은 무가내로 관습의 귀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로서 “육두음들이 나의 후두를 적시고 목청을 매체로 세상에 터지는 것이 어려웠”던 시인은 아름다움으로 길들여진 혀로 내 자신의 목청을 포장해야 하는 어려움을 말하며 “사는 동안 가끔은 시원한 육두문자가 그리웠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포장이 없는 원색의 언어”는 “귀와 뇌도 시원하게 해준다”며 “그동안 힘에 부쳤거나 어려웠거나 여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목젖 아래로 스스로 옥죄여 뱉지 못했던 말의 탕개를 풀라고 한다. “적절한 육담은 어떤 지략이고 유머이며 센스”이기에 어떤 경우에 해도 좋다고 “육담의 담을 넘으라”고 권장한다.  

 

우리는 평생 말을 하면서 산다. 연구에 의하면 동양인들은 보통 하루에 5만마디의 말을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 정성스럽고 소망스러운 말은 10퍼센트도 안된다고 한다.

오늘의 사회관계 속에서 현대인들은 다변적인 미사려구를 주로 사용하며 표현을 회피하고 망설임이나 자신 없는듯한 말투의 애매어법을 쓰는 경우가 많다. 거짓의 부사, 감탄사를 애써 사용하면서 재채기나 트림처럼 터져나오는 본능의 부정어나 금기어의 사용을 감추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다. 

자유로운 표현을 갈망했던 언어가 외려 우리들의 행위와 사고를 억압하는 족쇄가 돼버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흔쾌히 그에 혀를 맡긴다.

 

그렇지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지론을 보면 원체 현실에서 몸에 익숙한 사투리, 육두문자가 뒤섞인 잡담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양태이기도 하다. 이는 그것이 우리들의 원초적 본능과 공동체문화에 대한 구수한 향기를 발산시키게 하는 데서 더더욱 본령을 이룬다.

여기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언어라는 매개로 자신을 표현하고저 했던 애초의 욕망이 ‘문학적’이라는 수사에 묶여 또 다른 구속이 된 아이러니한 자신의 현실에서 당착한다. 그리고 시인은 역설적인 언어에서 비로소 답을 찾는다.

이는 온갖 말들이 악음 혹은 소음처럼 뒤섞인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유페시키기 위해 혹은 보호하기 위해 역설과 부정성의 언어를 간혹 날림으로써 외려 그러한 세계의 오염을 견뎌내려는 고독한 자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날로 다듬어지고 고급스러워지는 말과 말의 대결 속에 불안한 의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을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시인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필요함을 수필은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언어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 와중에 시인은 “그 상스러운 외문猥文에 경도되면 사람은 성품을 잃는다.”는 사족蛇足의 뇌까림을 붙이는 상냥함도 굳이 잊지 않는다.

육담을 ‘권장’하는 녀류시인의 글에서 갸우뚱하며 읽어낼 수 있는 설둥한 유머와 발칙함은 아마도 이러한 의중의 장치일 것이다.

 

제3편 개, ‘짐승’이라 부르고 

‘소울’이라 쓰다 

심시인이 애견가라는 것은 문단이 다 아는 사실이다. 

‘깜순이’라는 지극히 툽상스럽지만 양순하기도 한 이름의 개를 살틀히 키우다가 그 개가 낳은 새끼들을 일일이 분양자들을 다방에 불러 커피를 대접하며 자격을 체크하여 맡기고 돌아서면서 눈물을 지은 일례로 유명하다. 

“황금개띠해를 맞으며” 애견주의 시인은 “그동안 만났던 견犬들과의 일단락 추억을 지어보는 것”으로 “생각의 풋풋함에서 성숙으로 치다르는” 작업을 단행한다. 

 

세번째 수필 <내가 만난 개들>에서 육아를 앞두고 시인은 “깜순이를 키우기가 힘들어서 결국 엄마집으로 보냈다.” “종래로 애견, 애묘가로 차지하던” 시인의 “품은 그 때부터 오롯이 십년째 유아독존 아들의 차지”가 되였다. 

무술년 황금개띠해를 맞아 시인은 품에서 보냈던 그 개를 다시 마음속으로 불러내본다. 추억 속에 꾸깃꾸깃 갈무리된 “어떤 자책과 아픔을 동반한 여한”을 들추어내서 펼쳐본다. “숨 붙은 그들이 생생한 그대로 생활의 에너지원으로 되던 순간 순간들을” 회고해본다. “자식 생산을 위해 수요하던 단백질을 넉근히 내 살집에 찌워주던 견犬들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회한에 싸이기도 한다. 

그리고 애틋한 손짓으로 애견을 소리내 부르듯 만남의 정의에 대해 소환해본다. “시간과의 만남, 계절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 동물과의 만남, 사랑과의 만남, 리별과의 만남…”

그 마당에 애견과 교감을 나누며 물질문명에 포식을 느낀 현대인들에게 결여된 “소울을 지향하고 원한다”.

이는 “어마지두 함께 했던 지난 동물들과의 생활에서” 시인이 쓰다듬으면서 더듬어내고저 했던 결 좋고 윤기 나는 사색의 ‘거죽’이요 ‘살피듬’이다.

 

애견가들이 급증하는 요즘의 시류를 증언하는 테마로 맞춤한 수필이다. 

이미 수많은 작가가 동물과의 교감을 제재로 다룬 글을 써서 발표한 바 있다. 그로 보면 이 제재는 다소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시류를 반영한 류행 테마 글에서 중요한 것은 개성적 시각과 사유의 여부이다. 

이 글에선 자신의 안일을 위해 뿌리쳤던 동물에 대한 작가의 반성적 시각과 삭막한 현실세계가 보여주는 랭혹함 속에 ‘숨 붙은’ 미물에 대한 더운 사랑을 환기하고저 한 점에 주목한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우세로 나는 개나 고양이의 덕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들은 과연 나와 함께라서 진정 행복했을가”하는 자문, 자성과 “내가 만난 개들은 그냥 개가 아니였다. 나에게 무엇인가 남기고 간 개들이였다.”는 감개에서 시인은 단순한 유흥이나 세태기록에 그치지 않고 동물에 대한 회한과 사랑을 자아 삶의 일부, 더 나가 소울적인 교감의 존재의 관계로 련결시킨다.

이 점이 여느 동물 테마 수필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수필로 환승换乘하는 것을 가능케 한듯 싶다.

타자화된, 허나 발랄한 목소리

심명주시인의 수필을 읽으니 흡사 몇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감상하는듯했다. 옴니버스는 본래 합승자동차를 의미하는데 각각 독립된 여러개의 에피소드를 하나의 취향에 따라 조합시킨 단편 스타일의 영화를 가리켜 말한다. 매편의 수필의 전언传言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다 시인의 언어적 개성을 합승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격앙된 메가톤의 소리처럼 그들의 목소리를 순차적으로 도란도란 그리고 볼륨을 높이며 드러낸다.

그 누구나 있을 법한 자신의 삶임에도 시인은 방관자적 목소리를 더 농밀하게 드러내며 타자화된 전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에 그의 문체의 풍격이 있다.

단어, 행간마다에 어딘가 시치미 떼기의 어조가 섞인 글발들에서 작가는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곳에 화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타자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능청스러운 목소리이면서도 나중에는 의외로 차분한 어조는 작가의 의미 전달에 적격이다. 

작품마다 가볍지 않은 주제이지만 이러한 시각과 어조의 선택과 적절한 사용은 보이고저 하고 말하고저 하는 대상물을 희화戏画시켜 독자들더러 어쩔 수 없이 그에 동조하게 하고 몰입하게 한다. 

일상에서 늘 보던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모습이 달라지고 사물의 본질에 다른 대상을 비유하면 또 다른 생소함이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듯이 시종 다르고저 하는 말과 다르고저 하는 앵글로 시인은 그 목소리를 인식하고 그 모습을 포박해보이고 있다.

 

모두가 알다 싶이 심명주시인은 이미 권위적인 문학상도 수차 수상했고 시집도 일찍 펴낸 바 있는 시적 기능을 충분히 인정받은 유수의 시인이다. 

하지만 량과 질에서 들쭉날쭉함이 없는 그의 시작품에 비해 발표된 수필작품은 그닥 많지 않은 줄로 안다.

이번의 세편의 작품을 보면 시인은 수필가로서도 충분한 잠재와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알쭌함에 가까운 작품들임에도 옥석을 가리는 심정으로 짚어 말한다면 수필작법의 원론에 어딘가 충실하지 못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묶어낸 3편의 작품을 루루이 읽노라면 제재를 불러내여 해석하고 다시 적용하는 작법에서 시인은 시 쓰기처럼 능수능란함을 보이지는 못했다.

또 스토리형의 수필로서 마음을 울리는 개성 있는 이야기들임에도 스토리의 골조가 아직 약하다는 점과 이를 수사修辞적 기교가 대신하였다는 점이 아쉬웠다. 난삽함에 가까운 분산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조금 더 완만하게 이어가는 련습이 더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다루려는 과제의 속성을 시인은 다행히도 체화体化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가지는 일반적 속성과 용도는 물론 문학적 상징까지도 진지하게 보듬어 안으려 애썼다. 그런 뒤에 이를 자신의 삶에 대한 감수에 접목하여 의미화에 재치를 보였다. 글의 직조력이나 언어의 세련미로서 가점을 보태여 다소 흠결이 있었으나 훌륭한 수필작들을 만들어내였다. 

다량으로 쏟아내는 시작품과 더불어 수필 쟝르에서도 수작들을 뽑아내여 일가를 이루기를 축언祝言해본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 [수필평] ‘집시’, 육두문자를 날리다 2019-07-11 0 12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