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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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조선족문학,그 사랑에 빠지다
2019년 07월 17일 09시 29분  조회:210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조선족문학, 그 사랑에 빠지다
오상순&김홍란
 
 
 
초대작가: 오상순(중앙민족대학교 박사생 지도교수, 평론가)
진행자: 김홍란(《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7년 3월 3일
장소: 연변시 백산호텔 커피숍
 
김홍란(이하 김): 오교수님, 안녕하세요? 30여년 전 대학교 시절의 스승님을 오늘 <작가를>는 코너에 모시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저에게는 더없는 영광이예요. ‘작가를 말한다’고 하면 흔히 소설가, 시인을 ‘말하는’ 걸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교수님은 대학교 교직에 몸 담고 계시면서도 그동안 줄곧 우리 문단에서 현장평론을 해오시는 한편 우리 문학의 발전을 위한 수많은 일들을 주최하시고 참여하시고 지원하시면서 한시도 우리 문단을 위해 애끓이지 않으신 적 없으셨죠. 문학교육자로서, 문학연구자로서,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사업 조직자로서, 문학사업 지원자로서 우리 문학의 넓은 령역에서 왕성한 활약을 해오신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이기에 오늘 교수님을 대담 작가로 초대할 수 있어 더구나 감개무량해요.
오상순(이하 오): 과찬이예요. <작가를>의 초대작가로 모시고 싶다는 청탁을 받았을 때 우리 문단에 저명한 작가 분들 많으니 그 분들부터 모시라고 했는데 결국은 이 자리에 나오게 되였네요. 여하를 막론하고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료인 김홍란씨와 안미영양의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하고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또 김홍란씨와 함께 할 수 있어 참으로 반갑네요.
 
김: 오교수님의 략력을 보면 1978년 8월에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과를 졸업하시고 모교에 남아 교편을 잡으신 후에도 끊임없이 공부하신 걸 알 수 있어요. 몇십년 간 꾸준히 공부를 하신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며 그 어려운 걸 어떻게 한번 또 한번 해내셨는지 내심 탄복이 되네요. 바로 그런 쉬임없이 지식을 갱신하시는 정신과 새로운 정보를 장악하시려는 열정이 계셨기에 지금까지 후대들에게 가장 값진 것을 전수할 수 있으셨고 문학연구에서 참신하고 시대에 앞선 것들을 보여주실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되여요.
 
오: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늘날의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저는 그야말로 피타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되였어요. 사실 우리 세대는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어느 한 과목도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없어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두돌 된 애를 집에 둔 채 북경대학교 중문학부에서 1년간 연수를 했고 애가 네살 나던 때는 할머니께 맡기고 남편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교에 가서 연수하고 문학 준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죠. 중 한 수교후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학교 등 기회가 닿는대로 한국을 드나들면서 수차 연수를 했어요. 한국 모 대학교에 가서 박사공부를 시작했다가 아들 교육 등 문제로 포기하고 돌아와서 결국은 늦둥이로 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땄어요. 박사를 졸업할 때 제 나이가 50이였는데 박사론문 답변을 마치고 심사위원들과 학생들 앞에서 펑펑 울기도 했지요. 감회가 깊어서… 
 
현대는 지식폭발의 시대잖아요. 지식이 끊임없이 갱신되고 새로운 리론들이 끊임없이 창출되는 현시대에 조금만 게을리 하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무엇보다 학생들의 구지욕에 만족을 줄 수 없으며 교수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여요. 대학교단에 선 지 40년이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지식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기초를 제대로 닦지 못한 후유증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래서 현재도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평생을 배워갈 것 같아요. 
 
김: 그 끝없는 추구정신에 정말 감동받게 되네요. 교수님, 저희가 대학공부를 할 때까지만 해도 정식 출간한 교재는 적었고 대부분이 프린트한 내부교재였죠. 그게 지난 세기 70, 80년대 전반 중국의 대학교 실정과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해방된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몇십차례의 정치운동에 시달리느라 전국의 다른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학교 교육도 엉망이였던 거죠. 77년도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고 곧 나라 전체적으로 개혁개방이 시작되였다지만 대학교 시스템은 여전히 제 궤도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지 못했어요. 그중에서도 설립된지 10여년 정도 밖에 안되는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과로서는 조건이 더구나 렬악했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을 개변시키기 위해 오교수님께서는 어려움을 하나하나 헤쳐나가면서 학과 건설과 발전을 위해 실제적인 일들을 차곡차곡 해오셨죠. 1980년부터 여러 과목을 창설, 강의하셨고 학술 면에서도 지금까지 쉬임없이 연구를 해오시며 성과를 내셨어요. 
 
중국조선족문학사중 쟝르 별 문학사로는 《조선족희곡사》와 《중국조선족문학평론이 걸어온 길》 외에는 출간된 게 없었지요. 이런 시점에서 2000년도에 출간한 《조선족소설사》는 출간한 의미가 더구나 크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파란만장한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더불어 조선족문학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그런 역경 속에서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문학인들은 붓을 꺾지 않고 민족의 삶을 끈질기게 파헤쳐 문학에 담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력사를 견증하여왔죠. 문학중에서도 소설은 인간생활과 정서를 산 체험으로 가장 진실하고 생동하게 반영할 수 있는 쟝르로서 조선족소설문학 속에는 중국조선족들의 삶의 력사가 그대로 담겨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그러고 보면 《조선족소설사》는 처음으로 조선족소설의 100여년의 발전사를 론술한 첫 저작으로서 이 분야의 공백을 메웠다는 데서 그 의미가 더구나 크며 학생들에게 교재로 사용되고 조선족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죠. 그러고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의 소설도 그 사이 많은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지 않습니까. 혹시 앞으로 《중국조선족소설사》를 다시 펴내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오: 저서를 출판하고 론문을 발표하고 나면 늘 아쉬움이 있고 부끄러움이 따릅니다. 처음엔 직함 때문에 부랴부랴 책을 내고 론문을 발표하군 했고 후에도 하냥 시간에 쫓겨 급급히 투고하군 했어요. 한편의 론문이라도 잘 깎고 다듬어서 투고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요. 《중국조선족소설사》도 교수직함을 위해 급급히 만든 책입니다. 출판 후 대학원생들의 교재로 사용되고 중국이나 한국의 일부 학자들의 연구에 참고가 되기도 하고 조선족문학연구에서 첫 조선족소설사라는 의미는 있습니다만 미흡한 점이 많아요. 당시 가능한 체계적이고 객관적이고 전면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지만 지식의 부족과 조선족문단에 대한 료해 부족으로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그리고 2000년에 출판된 그 소설사에는 1990년대 중반 소설까지만 다루고 있죠. 그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문단에는 수많은 우수한 소설작품들이 쏟아져나왔지요. 마침 저희 학부의 해외한국학 중핵대학육성사업 프로젝트의 한 과제로 《중국조선족소설사》를 수정 보완할 수 있게 되여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김: 오교수님의 많은 저서 가운데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건 《중국조선족문학사》인 것 같아요. 북경시고등교육정품교재 항목, 중앙민족대학교 ‘211공정’ 항목, 한국학술진흥재단 연구과제, 한국재외동포재단 연구과제인 이 저서는 65만자에 달하는 거대한 공정으로서 자료량이 상당히 풍부하죠. 교수님께서는 문학사의 집필을 위해 가장 원시적인 자료와 복원한 자료를 대량 수집하기에 공을 들이셨고 참신한 시각과 과학적인 방법, 엄격한 론리와 개괄, 통속적이고도 류창한 서술로 중국조선족의 150여년간 문학사를 전면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론술하셨어요. 조선족문학 학과 발전과 교재 건설을 새로운 단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중국조선족문학 학과 발전에서의 하나의 리정표라는 평을 받고 있죠. 특히 전문저서와 교재를 하나로 어울리게 하여 량자의 엄연한 경계를 시원히 깨뜨림으로써 개척적인 성과를 이루고 조선족문학 연구에 중요한 추진작용을 함으로써 상당히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중국조선족문학사》는 2012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제2회 사회과학연구성과 3등상의 영예를 받아안게 되죠.
 
오: 네, 저에게 있어서 《중국조선족문학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저희 대학에서는 원래 조성일선생의 《중국조선족문학사》(1990)를 교재로 사용했는데 무엇보다 교재가 완판되였고 또 그 문학사는 1986년까지의 조선족문학만 다루었고 1980년대 말에 집필되여 계급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등 아쉬움이 있어 문학사 강의를 하면서 새로운 문학사 집필이 급선무로 제기되였던 거예요. 마침 2002년에 북경시 대학교 정품교재건설 프로젝트로 신청한 것이 선정되여 그 때부터 집필진을 구성하고 집필을 시작하여 5년 후인 2007년에 출판하게 되였어요. 그만큼 《중국조선족문학사》에 많은 정력을 몰부었습니다. 김동훈, 최삼룡 선생님은 1990년에 이미 조성일, 권철 선생님들과 함께 《중국조선족문학사》를 집필했던 분들이고 장춘식 연구원은 평생을 조선족문학을 연구해온 학자로서 집필진이 탄탄했어요. 
 
조성일, 권철 주필 《중국조선족문학사》를 참조하면서 이 저서에서 취급되지 않은 부분들, 이를테면 집필 후에 발굴된 해방전 작품들과 1987년 이후의 문학, 그리고 1990년대 문학을 상당한 편폭으로 다루었고 해방후 30여년의 문학도 긍정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면서 가급적이면 객관적이고 전면적인 평가를 주어 조선족문학의 정체적인 파악에 도움을 주고저 했어요. 
 
김: 네, 한마디로 《중국조선족문학사》는 내용체계가 완벽하고 글 짜임새가 합리적이고 관점론술이 새로울 뿐더러 연구시야가 넓고 연구방법이 과학적인 저서로 인정받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보다 설레는 건 오교수님께서 한문판(汉文版) 《중국조선족문학사》를 집필중이시라는 소식입니다. 이는 첫 한문판(汉文版) 조선족문학사가 될 것이며 앞으로의 소수민족문학연구 내지 중한문학 비교연구에 중요한 의의와 가치가 있게 될 거예요. 출간될 날이 은근히 기대되는데요. 
 
오: 과찬이예요. 집필 당시에는 가능한 공정하게, 객관적이고 완벽하게 서술하고저 노력했지만 출판한 후에는 그냥 아쉬움이 남아있어요. 
 
그리고 한문판 《중국조선족문학사》 출판은 제가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꿈이였어요. 언젠가 도서실에서 한문판(汉文版) 《몽골족문학사》, 《위글족문학사》, 《장족문학사》는 물론 인구가 적은 민족도 문학사를 출판한 걸 보고 중국 여러 민족중 문화수준이 제일 높고 문학을 가장 활발히 하는 민족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족이 한문판 문학사 하나 펴내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였고 안타까웠어요. 우리 문학이 주류문학에 소개된 게 너무 적은 데다가 한문汉文으로 된 문학사 한권도 없으니 우리는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리 끼리만 놀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사회과학 프로젝트 신청도 해보고 여러 방법을 고민해왔고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고 추진중이예요.
 
그런데 당장은 조문판(朝文版)《중국조선족문학사》 수정판이 더 시급해요. 2007년에 출판된 문학사가 이미 절판이 되여 학생들이 교과서를 복사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2007년 판 문학사는 연구와 교과서로 두루 쓸 수 있게 집필되여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데 이번에는 전문 교재용으로 집필할가 생각중이예요. 
 
김: 네, 그러시군요. 아무튼 수정판도, 한문판(汉文版)도 하루빨리 출판되였으면 좋겠어요. 1997년부터 ‘중국조선족문학’ 연구 방면의 석사연구생 모집을 시작하시다가 2008년부터는 ‘중한문학 비교연구’ 방면의 박사생을 모집, 지도해 오신 오교수님께서는 그동안 ‘조선족문학과 한족문학 비교연구’, ‘조선족문학과 전 쏘련 고려인문학 비교연구’, ‘조선족문학과 재일조선인문학 비교연구’ 과제를 추진해 오셨다죠? 여태껏 조선족문학과 한족문학의 영향관계에 대한 연구는 극히 드물었으며 거의 공백이나 같잖아요. 량자는 서로 처해 있는 각 방면의 환경이 같거나 비슷하지만 또 력사배경, 민족풍속습관 등이 다름으로 하여 많은 류사성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니 그에 대한 탐구와 연구 또한 매우 큰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중국조선족문학과 재일조선인문학, 쏘련 고려인문학과의 비교연구도 그래요. 서로 다른 나라의 사회환경과 그 나라 주류문학의 영향하에 있는 소수민족문학 발전모식과 그 특점을 연구하는 건 자못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역시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오: 조선족문학을 강의하고 연구하면서 비교를 통하여 조선족문학의 특성을 더욱 뚜렷이 부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비교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중한문학 비교연구’는 지금까지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중 한 수교 후 한국이나 중국에서 넘쳐날 정도로 많이 이루어진 반면에 오히려 중국 주류문학과 조선족문학의 비교연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아 미개척지나 다름없지요. 상당히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와 함께 조선족문학과 재일 조선인, 재쏘 고려인, 재미 한인 문학과의 비교연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였고 동족이지만 거주지역의 차이로 문학에서 나타나는 류사성과 차이성에 흥분했어요. 원래는 《조선족문학과 한족문학 비교연구》, 《조선족문학과 재일조선인, 재쏘고려인 문학 비교연구》를 별도로 펴내려고 했는데 결국은 《조선족문학의 비교연구》라는 제목으로 함께 묶어 2015년에 출판했어요. 이 분야의 비교연구는 무진장한 공간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오교수님, 지금까지 조선족문학에 대한 연구는 수많은 학자들이 적지 않은 성과를 냈지만 조선족문학 발전려정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이고 완정하게 정리, 연구한 편년체 저서는 없는 걸로 알아요. 바로 그 공백을 메우는 작업을 오교수님께서 또 추진중이시라죠? 《중국조선족문학편년사》가 출판되면 조선족문학을 연구하고 조선족문학 사료를 풍부히 하고 조선족문학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키는 등 여러 면에서 수많은 유익한 작용을 하게 될 거예요. 이는 조선족문학사에서 첫 《중국조선족문학편년사》가 될 것이고 문학 연구자와 교육자, 애호가들의 좋은 도구서적이 될 것이며 조선족문학 학과발전의 또 하나의 리정표가 될 겁니다. 
 
오: 네. 우리 조선족문학이 걸어온 길 그리고 조선족문학이 쌓은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전부터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004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프로젝트를 신청하여 작업을 시작했는데 책으로 출판하진 못했어요. 그후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침 2016년에 <중국조선족문학편년>이란 제목으로 국가사회과학 일반 프로젝트로 신청하여 선정이 되였어요. 이 프로젝트는 크게 작가편, 작품편, 신문, 잡지, 문학단체편, 문단기사(文坛记事)편으로 구성하고 부록에 조선족문학 관련 저서 목록과 수상작품 목록을 작성할 계획입니다. 
 
이미 2001년에 강련숙의 《중국조선족 100년 문학예술 대사기》가 출간되고 최근에 연변작가협회의 《연변작가협회대사기》가 출간되여 저희 《중국조선족문학편년》 집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보다  체계적이고 전면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립장에서 조선족문학의 발전력사를 옳바로 기술하도록 노력에 노력을 경주할 테니 앞으로 여러 작가 분들의 많은 도움을 부탁드려요. 
 
김: 그야 우리 문단과 작가를 위한 일이니 누구나 지지할 거라 믿어요. 피뜩 돌아보아도 그동안 오교수님께서 우리 문학연구 여러 분야의 적지 않은 공백을 메우면서 그 분야의 첫 저서들을 여러권 써내셨고 또 한창 집필중임을 알 수 있어요. 불모의 땅에 첫 삽을 대여 개척을 하는 일은 어느 분야에 한한 것이든 쉬운 일이 아니죠. 그 어려운 작업을 묵묵히, 끈질기에 해오시며 하나 또 하나의 리정표를 세운다는 건 정말 대단하신 겁니다. 
 
우리 문학을 둘러싸고 오교수님께서 해오신 일은 또 연구분야에만 있는 게 아니죠. 2004년, 북경에서 오교수님이 조직, 주최하신 ‘림원춘 리원길 소설 세미나’에 참석한 기억이 나요. 2009년에는 또 ‘김철 시 문학연구 학술세미나’를 북경에서 주최하셨지요. 그로부터 오교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우리 문단에 들어와서 일을 벌이셨어요. 이어서 2010년에는 매하구에서 ‘박선석 소설연구 학술세미나’를, 2011년에는 심양에서 ‘료녕지역 조선족문학연구 학술세미나’를, 2012년 6월에는 길림시에서 ‘길림지역 조선족문학연구 학술세미나’를, 2012년 7월에는 장춘에서 ‘남영전 시 문학연구 학술세미나’를, 2012년 10월에는 할빈시에서 ‘흑룡강지역 조선족문학연구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셨고 계속하여 2014년에 연길에서 ‘50년대 출생 조선족소설가 소설문학연구 학술세미나’를, 2015년에 연길에서 ‘50년대 출생 조선족시인 시 문학연구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셨어요.
 
보다 싶이 대표적인 작가와 시인, 지역별 그리고 50년대 출생 소설가, 시인에 대한 집중조명을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산재지역 문학을 지역 별로 조명한 게 유난히 인상 깊네요. 그전까지 우리 문단에서 조선족문학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1980년대 이후 산재지역 조선족문학이 전반 조선족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산재지역 조선족문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거든요. 교수님께서는 이를 감안한 듯 산재지역 조선족문학을 지역별로, 체계적으로 집중조명한 건 문학사적으로도 상당히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그 방대한 공정을 오교수님께서 기획하시고 성공적으로 완성하셨을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 이와 관련한 저서 원고를 이미 출판사에 넘기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또 《료녕지역 조선족문학사》를 한창 집필중이시라고 들었는데 정력이 엄청 많이 들어가는 작업들을 하나 또 하나 완성해가시는 그 정신력과 의력이 참 대단하세요.
 
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참으로 많은 국내외 학술대회를 조직, 주최하였는데 저에게는 조선족문학 관련 학술회의가 가장 기억 속에 남아요. 그런데 제가 2004년을 계기로 조선족문학 관련 학술세미나를 여러차례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저희 대학교 문일환 교수님의 덕분입니다. 2004년 당시 조문학부 학부장으로 계셨던 문일환 교수님과 북경대학교 최응구 교수님이 함께 기획하고 후원하여 ‘림원춘 리원길 소설연구 세미나’를 북경에서 원만히 개최할 수 있었어요. 그때 제가 리원길 소설 관련 론문을 쓰기로 했는데 제때에 완성하지 못하여 밤을 꼬박 세운 적이 있어요. 그때 저의 시어머님이 교수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시며 밤낮 밖으로 나도는 저를 리해해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그후 중앙민족대학교 중국소수민족언어문학대학 학장으로 되신 문일환 교수님의 전격적인 지지로 ‘211’, ‘985’ 공정 프로젝트 경비로 조선족 산재지역 문학 관련 학술회의를 여러차례 조직할 수 있었죠. 연변 중심의 조선족문단 구도가 1980년대부터 동북3성으로 확대되고 2000년대에는 동북3성 뿐만 아니라 북경, 청도, 남방으로 확산되는 걸 보면서 산재지역 문학에 대한 중시와 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변은 조선족의 수도이자 상징적 의의가 있어 한국을 비롯한 국내외의 중시를 받고 다양한 문학활동도 활발히 전개되는 반면 산재지역 문학은 중시를 많이 받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또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조선족문학에 헌신해온 작가들에게 힘이 되여주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매 단계, 매 지역 문학에 대한 연구를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앞으로의 조선족문학사 집필을 위한 자료작업을 실천에 옮겨온 거죠. 
 
그 자료들에 근거하여 <다원화시기>란 제목으로 이미 원고를 민족출판사에 넘긴 상황입니다. 원래는 북경지역까지 포함시키려고 했는데 너무 량이 많아 북경지역 문학은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 했어요. 동북3성 산재지역 문학도 편폭의 제한으로 일부 작가들을 포함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산재지역 문학에 대한 조명을 한단락 지은후 세대 별 문학에 대한 조명이 그 다음 구상이였어요. 당시 ㅈ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신봉철회장님의 후원으로 2014년에 ‘50년대 출생 작가 소설연구’ 학술세미나를 연길에서 개최했고 2015년에는 또 ‘50년대 출생 시인 시연구’ 학술세미나를 연길에서 개최했지요. 
 
아직 ‘60년대 출생 작가 문학연구’ 세미나, ‘40년대 출생 작가 문학연구’ 세미나 등이 많이 남아있어요.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노력해 보려구요…
 
《료녕조선족문학사》는 지금 집필중에 있어요. 꼼꼼히 읽고 분석하고 숙고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글의 질이 보장되지 못할가봐 걱정이예요. 《료녕조선족문학사》는 조선족문학사상 첫 지역문학사라는 데 의미가 있겠지요. 아무튼 이 책들이 조선족문학 연구에 일조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 오교수님, 2001년 초에 제가 《도라지》잡지사의 주필을 맡고 처음 한 일이 북경에 진출한 것인데 그때 개최했던 ‘북경시 조선족지성인 좌담회’에서 오교수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시장으로 내몰린 《도라지》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아시고는 앞으로 언젠가 도울 기회를 만들어보시겠다고 말씀하셨죠. 솔직히 당시에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고마우면서도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마음은 있어도 실현 가능성이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예요. 하지만 저의 예상을 깨고 몇년이 지나 오교수님은 정말로 그 때의 약속을 현실로 만들어주셨죠. 원래의 문학상이 기한이 되여 끝난 걸 아시고는 한국 한민족문화교류협회 분들에게 연줄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특별히 비행기를 타고 장춘에 오셔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셨고 결국 ‘중국조선족 수필상’을 세우게 되였어요. 뒤이어 자신의 제자를 동원하여 ‘《도라지》장락주문학상’을 설립하게 되였으며 조선족 력사상 유일하게 북경조어대 국빈관에서 시상식을 개최하는 기적을 만들기도 했죠. 그 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설레네요…
 
그 후에도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의 지원금을 혜택받도록 도와주시고 여러 학술회의와 조선족청년작가창작회의, 《도라지》문학상을 비롯한 문학행사에 후원금을 마련해주시며 발행을 도와주시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주시였어요. 이처럼 오교수님께서는 2004년도부터 《도라지》 고문을 맡으시고 장락주문학상 심사위원을 맡으시며 《도라지》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주셨죠. 그래서 저는 어디 가나 ‘오교수님은 《도라지》의 식구’라고 당당하게 자랑했었어요.
 
후에는 《도라지》 뿐만 아니라 《장백산》, 《문학과 예술》, 《연변문학》, 《송화강》, 《흑룡강신문》, 료녕조선족문학회, 연변작가협회 등 거의 모든 문학잡지와 신문, 단체들에 후원금을 마련해주시고 잡지 주문을 도와주시고 행사경비를 마련해주시였고 몇십년간 혼신을 다 바쳐 편집사업에 종사해온 분들께 공로패까지 주시며 우리 문학을 위한 일에 자신을 다 바쳐오셨어요. 오교수님 만큼 대학교직에 몸 담고 계시면서 문단사업에 두 발 벗고 나서서 뜨거운 정열을 다 쏟으신 분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아요. 그러기에 지금은 문단의 많은 작가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고 많은 문학잡지나 문학단체들의 부탁으로 각종 중임을 맡게 되시면서 더욱 바삐 보내고 계시죠. 
 
오: 1980년대 말부터 ‘조선족문학사’ 강의를 맡기 시작했지만 10여년 동안 문단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문단과 대학은 서로 다른 분야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조선족문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김홍란씨가 그때 북경 문인들과 가진 좌담회에서 《도라지》잡지사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도움을 부탁했을 때부터였어요. 대학이란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해온 저는 그 때에야 우리 문단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우리 작가들이 얼마나 어려운 여건에서 문학을 견지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였고 그런 작가나 편집인들의 모습이 너무 안스럽게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도라지》 편집일을 하고 주필을 맡으면서 잡지를 목숨같이 아끼는 김홍란씨에게 눈물겹도록 감동받고 자그마한 힘이라도 되고 싶어서 시작했구요. 그렇게 렬악한 환경 속에서도 잡지를 끝까지 꾸려가는 편집인들을 보면서 힘 자라는 데까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였죠. 우리 문단이나 작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조선족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라고 할수 있겠는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 후부터 조선족문학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은 곧 우리 조선족문학 전공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조선족문학의 발전과 문단을 위한 일에 나설 수 있게 되였어요.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동화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민족 교육과 문화를 지켜야 하고 민족정체성을 지키는 데서 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저는 다리를 놓은 것 뿐이고 잘 나가는 기업가 제자들이 흔쾌히 후원에 발 벗고 나서주어 고마웠죠. 이 자리를 빌어 한라산그룹 장문덕 리사장, 랑시주식회사 신동일 리사장, 북경송전정松田程과학기술유한회사 림송월 리사장, 단군문학상 운영진의 신봉철 리사장, 청도삼풍화무역유한회사 권혁준 총경리 그리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전임 총장이신 조남철 교수 등 조선족문학 발전에 큰 도움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 참,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나네요. 저의 사업인생에서 오교수님을 만날 수 있은 건 저의 복이고 행운이였어요. 저를 비롯한 전반 문단에 힘을 실어주신 오교수님의 은혜를 우리 작가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오: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하고 싶어서 한 것 뿐입니다.
 
김: 오교수님께서는 문학후대 양성에 대한 일에도 두 발 벗고 나서서 지지해주시고 응원해주시였죠. 작년 11월 말, 중국작가협회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하고저 연변작가협회 대표단이 북경에 가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시자 오교수님께서는 곧 대표단 성원들을 모시고 중앙민족대학교 조문학부 주최로 ‘조선족 문학의 현황과 전망’ 좌담회를 개최하셨어요. 좌담회에는 학부의 석박사 연구생들과 학생들이 꾸리는 《옹달샘》잡지 회원들이 참석했죠. 오교수님께서는 내심으로부터 문학을 애호하는 제자들에게 작가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작가들의 특강을 들을 수 있게 함으로써 문학인재의 후대 양성에 신경을 쓰셨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기회를 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마련해주신 걸로 알고 있어요.
 
오: 조선족문학 전공자로서, 그리고 조선족문단의 일원으로서 제일 걱정이 되였던 부분은 잡지 운영과 후대 양성이였어요. 그래서 잡지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렴치 불구하고 제자들한테 손을 내밀었고 우리 학생들이 조선족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또 창작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문학개론’을 강의하면서 의식적으로 시랑송도 조직하고 글짓기도 하고 ‘조선족문학사’를 강의할 때는 매 주 조선족문학 작품 한편씩 읽어오도록 하고 한달에 한번씩 독후감을 쓰게 했지요. 글짓기와 독후감은 교수가 매편을 읽고 수정해주고 총화해주어야 하는데 보통 한학기에 두개 반, 60~70명일 때가 많은데 강의외의 시간이 엄청 많이 들어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조선족문학에 대해 좀더 많이 알기를 바랐고 좀더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했어요. 
 
이번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기회에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을 비롯하여 김혁 소설가, 김홍란 수필가, 김영건 시인 그리고 정봉숙 부주석을 모실 수 있은 건 우리 학생들에게는 더없는 영광의 기회였지요. 조선족문학사 강의 때 자주 듣던 작가님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번 세미나를 통해 우리 학생들이 문단과 더욱 가까워지고 조선족문학에 더욱 관심을 가졌을 거라 생각해요. 
 
김: 그날 우리 매 사람 앞에는 《옹달샘》잡지와 함께 《옹달샘》 창간 20주년 기념집 《샘의 노래》가 놓여있었어요. 잡지의 고문으로 계시는 오교수님께서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바친 노력과 흘린 땀방울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고 가슴 벅차던 설레임이 아직도 그 속에서 고동치고 있는것 같았어요. 오랜 세월 동안 오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의 창작을 직접 지도해주시고 우수한 작품들을 해마다 여러 문학잡지에 추천하여 특집을 내군 하셨는데 그런 실천들에서 우리 문학의 대를 이어갈 작가가 나오기를 두 손 모아 기대하시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어요.
 
그날 좌담회에서 《옹달샘》과 《샘의 노래》를 펼쳐보며 두눈이 똘망똘망한 채 작가들의 특강을 두 귀 세워 듣는 학생들을 보며 문학을 향한 그들의 꿈과 열망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그만큼 좌담회가 끝날 무렵 “여러분중에서 꼭 작가 몇명이라도 나와주기를 바랍니다.”고 한 저의 말은 진심이였습니다.
 
오: 학생들 가운데서 문학에 끼가 있는 학생들을 발굴하고 이끌어주어 우리 문단의 후계자들로 양성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문학에 끼가 있는 학생들을 특별히 이뻐했고 장학금을 마련해주면서 조선족문학 방향의 석박사공부를 하라고 성원도 해주었지요. 그래서 학생동아리 《옹달샘》문학사 고문을 해달라고 할 때도 거절하지 않았고 《옹달샘》 행사라면 두말 않고 제자들을 통해 지원해주고 지지해주었어요. 다른 동아리들에서 《옹달샘》만 너무 관심해준다고 의견이 있을 정도로요. 
 
학생들의 창작능력을 키우기 위해 《옹달샘》문학사 활동으로 처음에는 중앙민족대학교 내에서, 그 다음엔 전 북경시 조선족 대학생들을 상대로, 또 그 다음엔 전국 조선족 대학생들을 상대로 글짓기 경연을 조직하기도 했어요. 이러한 행사를 통해 조선족 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이끌자고 한 거죠. 수상작품을 《장백산》, 《연변문학》, 《도라지》 등 잡지들에 특집으로 내군 했는데 자기 글이 잡지에 실린 걸 보고 ‘나도 하면 될 수 있다’는 신심을 갖게 되였다고 학생들은 말해요. 물론 우리 학생들의 글이 문학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여리지만…
 
《옹달샘》 작품선집 《샘의 노래》를 출간해 문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퍽 오래되였어요. 그동안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건이 되지 않아 미루어오다가 마침 강용택 학부장이 적극 밀어주고 최학송 선생이 구체적인 일들을 추진해주어 《옹달샘》 창간 20주년 때에 빛을 볼 수 있었어요. 
 
또 《옹달샘》은 제가 담임을 하던 1993학번 학생들이 1995년에 창간한 잡지여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것도 사실이구요. 우리 학생들을 망라해서 조선족 대학생들 가운데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김: 그 소원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오교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앞날에 대한 리상이 없는 사람은 페인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포부가 있는 사람은 자기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기에 하늘을 뒤흔드는 큰일은 못하더라도 분투자의 발자취는 남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목표를 세우라! 그리고 최선을 다하라!”고 학생들에게 주문했었죠. 사실 그건 학생들에 대한 주문이기에 앞서 오교수님 자신에 대한 주문이기도 하셨던 것 같아요.
 
오: 대학생이 되고 학자가 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저의 인생목표였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좌우명이였어요. 그 목표를 위하여 저는 소학교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중학시절, 대학시절에도 최선을 다했어요. 
 
돌이켜보면 저의 일생은 평범하기만 해요. 큰일은 물론 남들보다 뛰여나지도 못했지만 항상 훌륭한 사람들을 본보기로 열심히 노력해왔고 모든 일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고 자기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왔고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면서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가고 있어요. 하기에 저는 후회 없으며 자기 삶에 충실했다는 것에 자긍심을 가집니다. 
 
김: 지금껏 흘린 땀방울은 결코 헛되지 않으셨어요. 그동안 교수님께서는 여러권의 연구저서를 출간하시고 30여차에 이르는 국내외 학술회의를 조직, 주최하시고 120여편의 론문을 해내외 학술지에 발표하시고 조선족문단에서 문학평론을 활발히 해오셨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최선을 다하신 결과 중앙민족대학교 청년교사 과학연구성과 2등상, 북경시 우수청년골간교사, 중앙민족대학교 우수당원, 북경시 정품교재건설 항목상, 보강우수교사상, 연변대학 와룡학술상, 제2회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사회과학연구성과상 3등상, 《장백산》잡지 주최 중국조선족비평상, 《도라지》문학비평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영예를 따안으며 사회 각계의 인정을 받으셨죠. 현재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박사생 지도교수, 중앙민족대학교 소수민족문학연구소 부소장 등 교내 현직과 함께 중국 조선(한국)학연구회 부회장 겸 부비서장, 중국조선족녀성학회 상무 부회장, 중국소수민족문학학회 리사, 《도라지》잡지사 고문, 한국녀성문학연구회 해외리사 등 많은 사회직무를 겸직하시고 여러가지 전국적인 문학상 심사위원을 맡으시면서 보다 다망한 시간을 보내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오: 한 일보다 너무 많은 영광을 안은 것 같아요. 물론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왔지만…
 
김: 오교수님께서는 <조선족문학에>이란 글에서 “조선족문학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적 재부이다. 문학이 없어지면 문화도 사라지게 되고 문화가 사라지면 민족도 없어지게 된다. 나는 조선족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조선족문학 연구에 집착하면서 반생을 살아왔다.”고 쓰셨어요. 바로 그런 뜨거운 가슴과 사랑하는 마음이 계시기에 교수님께서는 조선족문학 교육사업과 조선족문학 연구사업을 포함한 조선족문학의 발전과 우리 문단의 활성화를 위한 많은 일에서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으셨던 겁니다. 공휴일이든 늦은 저녁시간이든 매번 전화를 드릴 때마다 거의 사무실에 계시는 오교수님을 보며 일에 대한 애착과 집념 그리고 책임감을 깊이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감동을 받게 되였으며 존경심을 키워오게 됐어요. 
 
오: 저는 자기보다 남을, 개인보다 집단을 먼저 생각하는 삶, 받는 삶보다 배려하는 삶, 가지려는 삶보다 양보하는 삶, 따지는 삶보다 리해하고 품어주는 삶을 지향했기에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섭섭함도 불쾌함도 별로 느끼지 않으면서 행복해하고 만족해하면서 살아왔어요. 제가 조선족문단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저 열심히 뛰고 일을 만들어 할 수 있은 것도 그런 인생신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가 혼자 생각해봅니다. 
 
조선족문학 전공자가 된 것이 저에게는 얼마나 큰 행복이고 행운인지 몰라요. 조선족문학에 대한 료해가 깊어갈수록 조선족문학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여요. 그리고 우리 작가님들을 많이 사랑합니다. 
 
김: 오교수님께서 추호의 사심도 없이, 그리고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신 채 묵묵히 일을 하시는 희생정신과 인생자세는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하며 교수님께서 이룩하신 업적은 우리 문학사에서 오래오래 빛날 것입니다. 오늘 대담 저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였어요. 감사합니다.
 
오: 저에게도 너무 소중한 시간이였어요.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였고 이제는 그만 나서야지 하는 저에게 다시 앞으로 달리도록 힘을 실어주네요. 고맙습니다.  
 

출처:<장백산>2017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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