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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마을의 머리가 소실된 옛 석상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5월5일 09시40분    조회:1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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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강신문=하얼빈) 나무 수(樹)는 그의 이름에 들어있는 돌림자의 글자였다. 박씨 마을에서 전하고 있는 돌림자는 도합 20자, 박수붕(朴樹鵬, 53세) 씨는 열한 번 째 항렬이었다. 박씨 마을의 생존자 항렬에서 가장 윗세대라고 한다. 마을의 박씨는 현재 14대손으로 전하며 준걸 걸(杰)의 돌림자를 쓰고 있으니 박수붕 씨의 증손자 격이었다.

  "한 세대를 25년이라고 치면 우리 박씨는 이곳에서 3백 년을 살고 있은 셈이지요."

박가원의 귀퉁이에는 아직도 연자방아가 놓여있었다.

  박수붕 씨의 고향은 박가원(朴家院)이었다. 박가원은 장성 기슭의 승덕시(承德市) 평천현(平泉縣) 당패진(黨壩鎭)에 위치한다. 박씨들이 살고 있는 뜰이라는 의미의 이 박가원에는 현재 30여 가구, 160여명의 박씨가 살고 있다.

  박씨의 선인(先人)은 장성 밖의 심양(沈陽) 일대에서 순치(順治, 1638~1661) 황제에게 말잡이로 있었다고 박수붕 씨가 선조로부터 내려온 옛 이야기를 전했다.

  "황제의 은혜를 받아 박가원에서 장두(庄頭, 우두머리)로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박씨 가족이 구전하는 이 이야기처럼 강희(康熙, 1654~1722) 8년, 황제는 전공을 세운 부하 12명을 장성 밖에 정착하게 했다고 괴뢰정부 만주국(滿洲國) 시기의 《열하성각현상황(熱河省各縣情況)》이 기록한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황제의 칙지를 받들어 이 지역에서 말을 달려 땅을 정했는데, 하루 동안 한 바퀴의 말을 달린 그 땅을 그들의 소유로 삼았다. 기타의 부분은 공을 세우고 귀농한 4백 명에게 나눠줬으며 그들의 공로에 사례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전자를 천총(千悤)이라고 했고 후자를 장두라고 불렀다는 것. 장두는 관부에 황량(皇糧) 즉 나라의 녹봉을 납부하는 '황량 장두', 황제에게 꿩 등속의 들짐승을 납부하는 '응수(鷹手) 장두' 등으로 나뉘는데, 박가원의 박씨 선조는 '황량 장두'로 있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인터뷰에서 옛 자료를 확인하고 있는 박수봉씨 .

  박가원에 정착한 1세대는 돌림자가 높을 존(尊)의 항렬이었다고 박수붕 씨가 전하고 있었다. 20자의 돌림자를 따른다면 이 1세대는 4대손이다. 부근의 노장자(老杖子), 교상(窖上), 하영방(下營房)의 박씨 가족은 박가원에서 이주했으며 역시 이 돌림자를 쓰고 있다.

  이쯤에서 박가원에 유전(遺傳)하는 20자 돌림자를 적어야 할 것 같다. 이 돌림자는 차례로 "세문천준영/광수청점창/수준방걸서/경흥의옥상(世文天俊永/廣修淸占昌/樹俊芳傑瑞/景興義玉祥)"이다. 와중에 다섯 글자를 한 줄로 삼고 줄의 끝머리 글자인 '영창서상(永昌瑞祥)'은 꼭 이름의 마지막 글자로 삼아야 하며 기타의 글자는 이름의 가운데 글자로 삼아야 한다고 박수붕 씨가 거듭 설명했다.

  "20자를 전부 마치면 항렬에 따라 이 돌림자를 첫 글자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지요."

  박씨의 다른 한 집거지인 평천현 칠구향(七溝鄕) 박장자(朴杖子)도 같은 20자의 돌림자를 쓰고 있다. 박장자는 박가원에서 북쪽으로 약 20리 상거하는데 박씨가 말뚝을 박아 땅 지경을 삼은 곳이라는 뜻이다. 박가원처럼 황제의 은혜를 받아 박씨가 박장자의 장두로 되었으며, 박가원처럼 박장자의 박씨가 부근에 이주하여 또 다른 동네를 이뤘다. 석호구문(石壺溝門)이나 승덕현(承德縣) 상곡향(上谷鄕) 양장자(良杖子) 등의 박씨 가족은 박장자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박가원이나 박장자의 박씨 가족처럼 모두 20자 돌림자를 쓰고 있단다. 그래서 이름만 들으면 서로 고향이 다르고 면목이 몰라도 금방 상대방의 항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박가원의 저택에서 만난 박수원 옹.

  박가원의 선인처럼 박장자의 박씨 선인 역시 시초에는 심양 부근에서 살았다고 한다. 석호구문의 박길창(朴吉昌, 당시 82세) 옹은 그들의 선인이 한왕(罕王)의 호위병으로 있었으며 명(明)나라의 항복한 장수 오삼계(吳三桂)가 장성의 관문을 열었을 때 청군(淸軍)을 따라 관내에 진출했다고 구술하고 있었다.

  1988년 여름, 현지를 답사했던 연변의 민속학자 천수산(千壽山) 씨가 이렇게 그의 논문에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구술자인 박길창 옹이나 기록자인 천수산 씨는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으로 되고 있다.

  그때 박길창 옹은 박장자의 1대손 이름이 박세걸(朴世杰)이라고 분명하게 구술하였다. 또 박가원의 박씨가 양황기(攘黃旗)이고 당산(唐山) 야리(冶里)의 박씨가 정백기(正白旗)인 것과 달리 박장자의 박씨는 정황기(正黃旗)라고 전하고 있었다. 양황기와 정황기, 정백기는 8기(八旗)의 상3기(上三旗)로 모두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친병이지만, 8기가 배열하는 엄격한 순서에 따르면 첫 자리는 양황기이고 두 번 째 자리는 정황기이며 세 번 째 자리는 정백기이다.

  기실 박가원과 박가장에 전하는 20자의 돌림자도 글자마다 똑 같은 게 아니다. 혹자는 첫 번 째 돌림자인 인간 세(世)는 선비 사(士), 다섯 번째 돌림자인 길 영(永)은 날랠 용(勇), 열한 번째 돌림자인 나무 수(樹)는 말할 술(述)이며 각기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돌림자가 문자 아닌 구두로 유전하면서 일부는 동음이의어의 다른 글자로 마을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노장자 마을 어귀, 촌락의 뒤쪽으로 보이는 산기슭에 옛 무덤이 있었다.

  박수붕 씨는 족보 이야기가 나오자 연신 한탄을 했다. "참, 박씨의 족보는 원래 우리 박가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요…"

  족보는 박씨의 계통과 혈통관계를 밝힌 책으로, 여타의 족보처럼 장자 계승이 원칙으로 되고 있었다. 족보는 가문을 계승하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족장 격인 맏아들이 보존하며 그가 족보를 잇는다. 박가원의 족보는 돌림자 창(昌) 즉 10대손에 이르렀을 때 족장의 가문에 딸만 있어서 데릴사위를 얻었다고 한다. 데릴사위는 장씨(張氏)로 박씨의 족보에 관심이 없었다. 결국 박씨의 족보는 20세기 6,70년대 유실되었고 이에 따라 나무처럼 얽힌 그들의 뿌리가 일부 혼선을 빚고 있었다.

  그때 족보와 함께 보관하고 있던 청나라 때의 옛 패쪽도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런 유물의 이야기는 한두 개 아니었다. 건륭(乾隆, 1736~1796) 연간의 인감이 찍힌 어용 필통 그리고 연대 미상의 황궁의 먼지떨이 꽂개 등이었다. 이런 물건들은 1990년대 초반에 시골 마을을 찾은 이름 모를 고물상들에게 팔렸다.

  박수붕 씨는 그가 북경에 와서 일할 때 생긴 일들이라고 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황실의 어용 필통은 단 15원에 팔렸다고 해요. 그 후에 팔린 먼지떨이 꽂개는 4개나 되었는데 단지 3천원의 싼값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백만 원, 천만 원을 호가할 보물들이 한낱 쓰레기로 날려간 것이다. 에피소드라고 할까, 그맘때 박가원을 찾았던 천수산 씨 등이 이런 유물을 일일이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누군가 사진기에서 필름을 꺼내다가 햇빛에 노출하면서 전부 날려버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박씨의 선조가 옛날의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박수붕 씨는 만주 8기에 있던 선조의 옛 기억이 아직도 그들의 낱말에 남아있다고 말한다.

무덤에 시립한 유일한 옛 석상 그리고 마을에서 박씨의 항렬이 제일 높은 박수발 옹.

  "우린 지금도 늘 '아마(阿媽)'라고 불러요. 물론 아래 세대는 더는 이렇게 부르지 않지요."

  '아마'는 만족어로 부친을 이르는 말. 오히려 박씨는 조선말 이름인 '아빠'를 아직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박가원의 박씨는 박장자의 박씨 등과 함께 모두 만족 족명(族名)으로 호적에 올리고 있다. 일찍 누군가 족명을 조선족으로 개명할 것을 정부에 제기했지만 "조건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고 한다. 비록 조선반도의 고유한 박씨 성씨이지만 같은 성씨의 혼인 현상이 없다는 특성을 갖고 있을 뿐이며 여타의 한족과 다른 데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만주 8기에 있는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예전에 반수 이상이 벌써 만족으로 동화되어 성과 이름을 합치하는 원유의 작법을 포기하고 있었다. 《만주씨족통보(滿洲氏族通報)》에 따르면 만주 8기에 조선인 성씨는 박씨를 비롯하여 김씨, 한씨, 이씨, 최씨 등 42개 된다. 그러나 특이한 성씨의 박씨와는 달리 기타 조선인 성씨는 여러 민족 성씨에서 그들의 진실한 족명을 분간하기 어렵다.

  박가원 박씨의 시조 이야기도 여타의 옛 조선인 족명처럼 긴가만가 분명하지 않다. 박가원의 최고의 연장자인 박수원(朴樹元, 78세) 옹은 옛날에 엄마가 아들을 데리고 왔으며 이 아들이 평천현의 최초의 박씨 마을인 박가원과 박장자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고 하지요. 우리의 시조는 돌림자를 인간 세(世)로 쓰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마을의 같은 항렬이지만 박수붕 씨의 이야기와는 전혀 조대가 달랐고 또 형제의 숫자도 틀렸다. 솔직히 그들이 말하는 박씨의 시조는 최초로 관내에 진출한 첫 시조를 말하는지 아니면 박가원에 정착한 후의 박씨 시조를 가리키는지 약간 헷갈리고 있었다. 실제로 궁벽한 산골에도 예전과 달리 교통이 편하고 교류가 쉬워지면서 서로 다른 박씨의 이야기가 언제인가부터 한데 뒤섞이고 있는 현 주소이다.

  박수붕 씨도 민속학자 천수산 씨에게 박씨의 많은 옛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마침 동구의 강가에서 그들을 만나 마을을 안내했던 것이다. 그때 박수붕 씨가 귀동냥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일부 박가원의 구전 속으로 흘러들어 이어지고 있었다.

  각설하고, 그 무렵 천수산 씨 등은 하북성의 유수의 박씨 마을을 답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가원과 박장자 두 박씨 마을이 언제부터 무슨 인연을 맺고 있는지는 끝내 해석하기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기고 있었다.

  분명한건 박가원와 박장자의 박씨가 한곳에 그들의 선인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

  "옛날에 우리 박씨의 무덤은 모두 노장자에 있었지요. 노장자에는 선조의 무덤을 지키던 박씨의 후손이 살고 있습니다."

  노장자는 박가원에서 동쪽으로 10리 상거한 산골 마을이다. 박수원 옹은 노장자의 그와 같은 항렬인 박수발(朴樹發, 76세) 옹을 일행에게 소개했다. 노장자는 30여 가구의 마을이었는데 그 가운데 박씨가 10가구 정도 띄엄띄엄 섞여있었다.

  고분 자리는 마을 뒤쪽의 소북구(小北溝) 기슭의 평평한 둔덕에 있었다. 앞으로는 작은 강이 흐르고 멀리 산이 호응하며 뒤쪽으로는 큰 산에 기대인 그런 곳이었다. 땅은 마치 솜처럼 푹신푹신하여 신발이 푹푹 빠질 정도였다.

  옛날 풍수장이가 장백산의 산맥을 따라 이 무덤자리를 찾았다고 박수발 옹이 구전되고 있는 이야기를 밝힌다. "우리 선조님은 특별히 유명한 풍수장이를 청해서 묘혈(墓穴)을 팠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일행이 둔덕 위에서 만난 무덤은 고분이 아니라 새로 생긴 봉분이었다. 고분은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 때 벌써 마을의 '홍위병'에 의해 전부 파괴되었다고 한다.

  박수발 옹은 고분 자리를 가리키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은 평토가 되어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옛 무덤이 여러 줄 배열되어 떼를 짓고 있었지요."

  그때 무덤 좌우에는 또 무인(武人)과 문인(文人) 석상을 각기 하나씩 옹립했다고 한다. 와중에 석상 하나는 땅에 매몰되었고 그나마 하나는 두상(頭像)이 어디론가 떨어져있었다. 머리가 없는 옛 석상은 정오의 둔덕에 더구나 기괴한 정적을 연출하고 있었다. 불현듯 소름이 오싹 돋는 듯 했다. 정말이지 만족 박씨의 가족도 이 석상처럼 얼굴이 없는 인물로 영영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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